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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벅스

  • 작성일 2024-04-01
  • 조회수 1,014

   알파벅스


이원석


   사라진 마을의 이름은 소몽笑夢이었다. 소몽리는 작은 마을이었지만 유속과 깊이가 적당한 계곡이 가까워 외지 사람들이 많이 찾던 관광지로, 몇몇 주민들은 일찍부터 부업으로 관광객들을 재워 주며 얼마간의 돈을 벌었다. 그러던 중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의 촬영과 유명 연예인의 방문이 화제가 되어 마을이 여러 매체에 소개되고 관광객이 늘어나며, 생업과 부업의 위치가 바뀌기 시작했다. 살던 집을 개조해 전문적으로 민박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더니 종국에는 마을 주민 대부분이 그 일로 먹고살게 되었다. 처음에 그들은 같은 마을 주민들끼리 동종 업계 종사자가 되었다는 것을 기쁨으로 삼았다. 자신이 손님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일 때는 다른 집을 소개해 주기도 하고, 소개받은 집에서는 소개해 준 사람에게 작은 보답을 하는 일종의 중개업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한동안 그들의 사회적 유대감이 혈족의 그것 이상이었을 것이라고 보는 사회학자들도 있다. 

   소규모 민박집이 성행하던 어느 날 ‘물꼬리 펜션’이라는 이름의 첫 대형 독채 펜션이 문을 열었고 관광객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넓고 쾌적한 시설, 안전한 보안과 차량 픽업 서비스 등은 특히 가족 단위 손님들이나 젊은 세대 단체 손님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읍에 하나 있는 2금융권 은행에는 대출 상담을 받는 주민들의 줄이 길게 늘어섰다. 그리하여 소몽리는 다시 한 번 변화의 바람에 휩쓸렸다. ‘물꼬리 펜션’ 이후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서른 개가 넘는 크고 작은 독채 펜션이 생겨났고, 일대에서는 가장 유명한 펜션 단지로 자리 잡게 되었다. 대를 이어 펜션을 운영하는 집도 있었고 외지인이 지은 펜션의 관리인으로 일하는 주민도 있었다. 관광객들은 해마다 늘어 갔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의 주민들은 이전보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을 거라고 사회경제학자들은 말한다. 

   그러나 리스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숙박업에 종사하는 주민들은 여름 한철 외지인들이 쓰고 간 돈으로 겨울을 견뎌야 했다. 규모가 커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숙박객 유치를 위한 경쟁이 치열해지기 시작했고, 여름이면 집과 집 사이로 고성이 오가거나 주먹다짐이 일어나는 일도 빈번했다. 산을 잘 모르는 외지인들의 부주의한 행동도 골칫거리였다. 술을 먹고 입수하는 외지인은 해마다 몇 명씩 있었고 출입이 금지된 곳에 억지로 들어가 뱀에 물리거나 말벌에 쏘여 구급차에 실려 가는 사람도 많았다. 몇몇 부덕한 업주들이 성수기 숙박 요금을 지나치게 올려 받아 신문과 텔레비전 뉴스에 오르내리는 것도 부지기수였다. 주민들이 외지인을 대상으로, 외지인이 주민들을 대상으로 일으키는 범죄의 빈도도 날이 갈수록 잦아졌다. 어느 순간부터 주민들은 ‘이래서 사람을 믿으면 안 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간혹 어린아이가 태어나도 가장 먼저 그런 것을 가르쳤다. 다른 사람을 믿지 않는 법. 타인에게 다가가지 않는 법. 그러나 영특한 아이들은 어른들의 그 가르침마저도 믿지 않았다. 그것을 믿는 아이들에게 상처를 받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무튼 단지의 규모가 커질수록, 역설적으로 마을 사람들의 유대감과 삶은 축소되어갔다. 여름날의 소몽리는 전쟁터였고, 병원이었고, 법원이었고, 무덤이었다. 

   그중에서도 그 마을의 여름을 지옥으로 만든 가장 큰 요인은 벌레였다. 외지인들이 무분별하게 버린 쓰레기들은 부패하며 벌레들의 서식지이자 식량이 되었다. 본인 업소의 미관을 해칠 것을 염려한 업주들이 그 쓰레기들을 몰래 다른 업소에 버리고, 또 해당 업소의 업주가 다른 업소에 버리는 쓰레기 돌려막기가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쓰레기를 버리면 더 큰 쓰레기와 더 많은 벌레가 되돌아왔다. 제때 처리했다면 심각해질 일이 없었을 사소한 문제가 마을의 존폐를 위협하는 거대한 사건으로 불어나고 있다는 것을 주민들은 알지 못했다. 생전 처음 맡는 냄새와 생전 처음 보는 벌레가 소몽리뿐만 아니라 산 일대를 뒤덮었다. 이미 개인적으로 방역을 한다 해서 해결될 차원의 일이 아니었다.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험준한 곳까지 벌레들의 사교장이 되어 있었다. 먹는 음식, 입는 옷, 머무는 숙소 모두가 온통 벌레투성이였다. ‘꿈에서도 그때 봤던 이름 모를 벌레가 나온다’는 유명 여행 인플루언서의 리뷰는 소규모 인터넷 신문사에서 제법 높은 조회 수를 기록하기도 했다. 한 번 방문했던 관광객들의 재방문율은 거의 0에 수렴했고 그때부터 소몽리는 소몽이라는 이름 대신 충몽蟲夢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온라인에서 시작된 그 별명은 소수의 관광객들을 통해 다른 관광객들에게, 마을 주민들에게, 곧 지역 사회 전체에 유행어처럼 퍼졌다. 충몽리. 지금도 사라진 마을을 기억하는 사람 중 몇몇은 그곳을 그렇게 부른다고, 지리학자들은 말한다.

   그리고 어느 해 여름이 시작된 직후, 관광객들이 찾아오기 시작할 시기가 지났는데도 대부분의 객실이 비어 있는 현실을 마주하고서야 주민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뒤늦게 도청에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지만 답변도 기약도 없었다. 오히려 정부 차원에서 언론과 대중에게 안 좋은 인식이 박힌 전국의 ‘악덕 숙박시설 단지’를 철거하고 싶어 한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당장 다가오는 성수기에 일을 하지 못하면 한 해를 보내는 것도 확신할 수 없는 영세한 업자들은 속이 까맣게 탔다. 영세하지 않다고 해서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모두가 불황이었다. 물론 그런 일이 처음은 아니었다. 당시로부터 몇 해 전 전 세계적 팬데믹으로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긴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말 그대로 전 세계가 함께 힘든 나날을 보냈다. 뚜렷한 행동 방침이 있었고, 백신이 있었고, 나라에서 여러 지원을 해줬고, 함께 기다리다 보니 종국에는 치료제도 나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왜 나만, 우리만 이렇게 힘들어야 하는가? 억울함은 순식간에 사람을 집어삼켰다. 마을을 떠나야 할까?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여전히 담보로 묶여 있는 펜션이 그렇지 않은 펜션보다 더 많았다. 설사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세대를 막론하고 소몽리에서 평생을 나고 자란 주민들에게 애초에 그것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외지인의 입장에서 충몽리를 대신할 수 있는 마을은 얼마든 있었다. 그러나 주민들에게 소몽리는 그 어떤 마을도 대신할 수 없는 삶의 터전이었다.



   팬데믹 때도 열리지 않았던 마을 전체 구성원이 모인 대규모 회의가 ‘물꼬리 펜션’에서 열렸다. 부모를 이어 ‘물꼬리 펜션’을 운영해 온 사장이자 자칭 마을의 청년회장인 40대 중반의 남성 강이 회의의 진행을 맡았다. 사태가 심각한 와중에 지푸라기라도 잡고자 모두가 모이긴 했지만 왜 강이 회의의 진행을 맡고 있는지에 의문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강은 앞에 앉은 주민들을 둘러보고, 크흠, 목을 한 번 가다듬은 후 말했다.

   “아, 아. 좋지 않은 상황이지만 이렇게 오랜만에 우리 마을 사람들끼리 모이니까, 저기, 또 나름의 의의가 있네요.” 

   강의 느릿한 말 사이사이에 사람들의 손뼉소리가 끼어들었다. 벌레를 쫓거나 잡으려고 친 것이었지만 꼭 박수소리 같았고, 강의 입 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반갑습니다, 저는 뭐 누군지 알지요? 청년회장입니다.”

   강의 말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청년회? 우리 마을에 그런 게 있었어? 근데 쟤는 뭔데 청년회장이래? 청년은 맞아? 누가 뽑았어? 아, 있거나 말거나 그게 무슨 상관이야. 거 빨리 얘기나 좀 합시다. 얘기는 지랄, 아주 지랄이 풍년이네. 애들도 듣는데 욕 좀 하지 마쇼. 뭐 이 새끼야? 너 누구야? 처음 보는 새낀데? 그러는 넌 누군데? 나도 너 같은 새끼 처음 봐. 무슨 개소리야, 나 이 마을에서 70년 전에 나고 70년 동안 살았어. 근데 새끼? 너 몇 살이야? 몇 살이면 뭐, 세뱃돈이라도 주게? 아 그만들 좀 해요. 우리가 뭐 얼굴 보고 인사하고 그러고 살았나? 당연히 얼굴 모를 수도 있지. 아니 씨발 수상하잖아, 이 새끼 이거 첩자 아니야? 첩자? 다 망한 마을에 첩자는 무슨 첩자. 망하긴 뭐가 망해, 이 개······ 아, 입에 벌레 들어갔네. 씨발, 어따 침을 뱉어? 아 개새끼들아 애들 들으니까 욕 좀 그만하라고! 너나 그만해, 미친놈아. 아, 쳤어? 쳤어? 안 쳤어, 이빨도 다 빠진 노인네를 내가 뭐 하러 치겠어? 이빨? 노인네? 너 말 다 했지? 딱 기다려 오늘 이빨 다 빠진 노인네한테 한번 죽어 보자. 내가 틀니 바꿔 끼고 와서 모가지 물어버릴라니까. 아이고, 그만들 좀 하시라니까.

   “어, 여기 ‘물꼬리 펜션’은 제 모친께서 지은 마을 최초의 펜션으로 제가 2대 사장이고······ 역사와 진통이······ 아니 전통이······.”

   사람들의 언성이 점점 높아졌고, 강은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종이에 써둔 회의 안건을 읽어 내려가기 바빴다. 혼란. 혼돈. 사람들의 모습은 여름밤 전등 아래로 몰려드는 날벌레들 같았다. 그들에게 남은 결말이 공멸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분명하게 보여주는 복선이라고, 업계에서 부동의 인지도를 자랑하는 한 문학 평론가는 말한다.

   “회의나 합시다!”

   그때, 소란을 뚫고 찢어지는 듯한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렸다. 사람이 내는 목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크고 기괴한 소리였다. 주민들이 서로를 향해 세운 그 어떤 날보다도 날카로웠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향했다. 정이었다. 고요한 가운데 정은 예의 그 크고 기괴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여기가 진짜 충몽립니까? 우리가 진짜 벌렙니까? 아니잖아요.”

   사람들은 생전 처음 듣는 성량과 성질의 소리에 놀라 멍한 얼굴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그런 소리를 낸 사람이 정이라는 데 놀란 듯 표정조차 짓지 않았다. 오직 강만이 잔뜩 찌푸린 얼굴로 정을 노려볼 뿐이었다. 

   “애들도 보고 있는데, 어른들이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곧 얼굴을 붉히고 싸우던 사람들이 헛기침을 하며 멀찍이 떨어졌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은 읽던 종이를 힘껏 구겼다. 여기저기서 손뼉 치는 소리가 들렸다. 간헐적으로 들리던 이전과는 달리 계속해서, 단일한 대상에게 쏟아지는 박수소리였다. 옳소. 맞소. 그만들 좀 합시다. 이후 사람들은 강을 향해 앉아 있던 몸을 돌려 정을 마주 보고 앉았다. 이후에는 정이 중심이 되어 본격적인 회의가 시작되었다.



   정은 몇 년 전 팬데믹이 종료된 이후 외지에서 소몽리로 터전을 옮겨온 사람이었다. 떠나온 곳에 가족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으나 소몽리에서는 혼자 살았다. 객실 하나 딸린 작은 규모의 민박집을 운영했는데, 그게 본업은 아니었고 항상 무언가를 쓰곤 했다. 소설인지 시인지 논문인지 일기인지, 정이 쓰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주민들은 정을 작가 양반이라고 불렀다. 직업이나 출신을 떠나서도 대부분의 이웃들이 다툼 외에는 서로 대화를 나누지 않던 소몽리에서 정은 이질적인 사람이었다. 오고 가며 마주치는 모든 사람에게 인사를 건네고 대화를 나누려 한다는 점에서 그랬다. 자신의 민박에 묵는 숙박객은 물론이고 외지인, 주민 등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슬슬 더워지네요. 한동안 또 왁자지껄하겠어요. 김치 좀 드릴까요? 수박 좋아하세요? 참외는요? 시원한 물 한 잔 드릴까요?

   처음 주민들은 정이 건네는 인사를 경계하고 낯설어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정이 자신의 집에 투기된 쓰레기들을 모두 직접 처리하는 장면이 빈번하게 목격되며, 주민들 또한 그 꾸준하고 성실한 청년과 조금씩 대화를 이어 나가려 노력하기 시작했다. 쓰던 건 다 썼는가? 저녁은 먹었나? 포충기 좀 빌려줄까? 정은 누구와도 경쟁하지 않았고, 아무에게도 피해를 입히지 않았다. 무해함. 주민들이 정에게 마음을 여는 데는 그것만으로 충분했을 것이라고 심리학자들은 말한다. 오랜 경쟁과 다툼에 지쳐 있던 주민들에게 정의 무해는 몸집을 불려 다정으로 다가왔을 것이라고.

   벌레로 인한 피해가 심각해진 이후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소몽리를 재방문하지 않았지만, 정의 민박에는 해마다 찾아오는 몇몇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질투하거나 의아하게 생각하는 주민은 아무도 없었다. 자신들이 결코 할 수 없는 일을 정이 하고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은 찾아오는 모든 숙박객을 꼭 가족처럼 대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정의 손님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대부분 혼자 찾아와 머물렀고, 물을 보기 위해 놀러 온 여느 사람들과는 달리 가만히 산에 다녀오는 것을 선호했다. 정은 숙박객의 요청이 있을 때는 항상 그들과 동행했다. 누군가 이유를 물었을 때는 그저 지리를 모르는 그들이 길을 잃을까 염려되어 그렇다고 대답하며 가만히 웃을 뿐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는 유료로 제공되거나 아예 제공되지 않는 여벌의 옷, 식사, 주류 등을 제공하기도 했다. 자신에게 없는 것은 안면을 튼 인근 주민들에게 빌려서라도 줬다. 그리고 빌린 것들은 반드시 갚았고, 보답으로 사람들이 요청해 오는 이런저런 부탁을 들어 주기도 했다.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변경하거나, 전구를 갈아 주거나, 청소를 도와주는 등의 대수롭지 않은 일들이었지만 오랫동안 소통 없이 서로를 견제하며 살아온 주민들에게 그것은 전혀 당연하지 않은 일이었다.

   나 같아도 또 오지, 저런 사람 있는 데면.

   주민들의 반응은 대충 이랬고, 특별한 환대는 없었지만 아무도 정에게 적대감을 가지지는 않았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말이다.



   회의는 순차적으로 진행됐다. 우선 부정적인 리뷰를 작성했던 인플루언서에게 구두로 경고를 하고, 경고가 통하지 않으면 고소를 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다. 되나 그게, 고소가? 실제로 벌레가 오지게 많긴 많잖아. 누군가 의문을 제기했지만, 정이 진짜 가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해 주었다.

   “진짠지 가짠지는 별로 안 중요해요. 우리가 피해를 봤다는 게 중요한 거죠.”

   강은 정의 옆에서 정과 정의 말에 동조하는 주민들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잘 흘러가고 있다. 얼마 만에 보는 단합된 모습인지 모르겠다. 그런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았고 중요하지도 않았다. 회의를 주최한 것은 강이었고 회의를 하고 있는 장소도 강의 펜션이었지만, 누가 봐도 명백히 정의 주도 아래 회의가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아니, 저러면 안 되지 않나? 저래도 되나, 인간이? 염치가 없어도 정도껏이지.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정이 회의를 주도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놓고 화를 낼 수는 없었다. 

   강은 처음 봤을 때부터 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이 오기 전까지 강은 마을의 업주들 중에서 가장 젊은 사람이었다. 마을의 청소년들은 보통 고등학생이 되면 타 도시로 유학을 떠났고,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도시에 정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마을에 남은 소수의 아이들은 도시에서 생활하는 소몽리 출신의 부모들이 자신의 부모들에게 양육을 부탁한 아이들이었고, 그 아이들도 때가 되면 마을을 떠날 예정이었다. 강 역시 도시에서 생활하다가 10년 전에 소몽리로 돌아왔다. 대학 졸업 후 이런저런 창업에 도전했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실패하고, 이제 제발 그냥 와서 일이나 도우라는 모친의 절박한 부탁에 못 이기는 척 내린 결정이었다. 일을 배울 생각도 없었으나 갑작스럽게 죽은 모친의 뒤를 이어 정말 아무것도 배운 것 없이 덜컥 ‘물꼬리 펜션’의 업주가 되었다. 숙박업이 돌아가는 시스템을 전혀 몰랐지만 그렇다고 마을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묻는 것은 경쟁 업체에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는 일처럼 느껴졌다. 비용을 아끼고자 별도의 업체를 쓰지 않고 손님이 묵고 간 방을 혼자 대충 정리하기도 했고, 숙취가 심하거나 그냥 귀찮으면 그마저도 생략하는 경우가 많았다. 손님들에게 항의가 들어오면 ‘원래 이렇다, 업체 측의 잘못이 아니다’라는 말만 반복하며 계약금을 돌려주지 않고 내쫓았다. ‘물꼬리 펜션’은 포털사이트에 ‘소몽리 펜션’을 검색하면 가장 먼저 뜨는 펜션이었고, 때문에 ‘물꼬리 펜션’에 대한 평가가 소몽리 펜션 단지 전체에 대한 평판으로 오해를 받는 일도 잦았다. 그런 여러 사정으로 마을 사람 중에서는 강을 마땅치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강 역시 그런 사람들과의 다툼을 피하지 않았다. 강에 대한 사람들의 평판은 ‘최악의 이웃들 중에서도 최악의 이웃’이었다.

   그런 강에게 갑자기 나타나 사람들에게 좋은 평판을 받는 동년배 업주 정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심지어 정은 강이 굳이 우편으로 보낸 청년회 가입 요청에 답장조차 하지 않았다). 물론 정의 민박집은 강의 ‘물꼬리 펜션’에 비하면 숙박업소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수준의 규모였다. 지나가는 관광객 모두를 붙잡고 누가 더 성공한 삶을 살고 있는지 물으면 백 퍼센트 자신이 선택받을 것이라고 강은 생각했다. 그건 정말이지 강의 입장에선 인간과 벌레의 삶을 비교하는 것만큼이나 정답이 정해진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이해할 수 없었다. 저 새끼는 뭔데 저렇게 여유로운가? 왜 저렇게 남에게 친절을 베푸는가? 도대체 뭘 얼마나 잘 써서 뭘 얼마나 먹고 사는가? 요즘 세상에도 글이나 쓰는 게 돈이 되는가? 사람들은 왜 저 새끼를 좋아하는가?



   “아니 그러니까요. 지금 쓰레기가 어쩌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강이 말했다. 회의는 어느새 마을에서 공동으로 관리하는 간이쓰레기장의 수립과 수거 업체 선정 방식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논제로 이어져 있었다. 갑작스러운 강의 개입에 사람들의 시선이 강에게 향했다. 

   “어떡할 거냐고요, 제일 중요한 거.”

   “중요한 거요?”

   “벌레요. 어떻게 다 잡아 죽이냐는 거죠, 제 말은.”

   “그건 힘들죠. 여기는 산이고 사람만 사는 곳도 아니니까요. 사람이야 잠시 피해 있으면 되지만 동물들이나 식물들은 그럴 수 없으니까 방역에도 한계가 있죠.”

   “아니, 사람이 먼저 살아야죠. 안 그래요?”

   강은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맞지, 그건 그렇지. 좀 미안하긴 해도 우선은 그게 맞지. 사람들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저마다 말을 보탰다. 정은 심각한 얼굴로 잠시 생각에 잠겼고, 기회를 잡은 강이 말을 이어 나갔다.

   “제가 아는 형님이 방역 업체를 하는데요, 사람한테는 아무 해도 없고요, 작은 짐승들이나 벌레 정도만 박멸할 수 있는 약이 나왔대요. 신제품이라 가격은 좀 비싸긴 해도 십시일반으로 모으면 어떻게든, 네? 그거 하나 못 사겠습니까?”

   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정이 나섰다.

   “벌레를 모두 박멸한다는 말씀이실까요? 심지어 작은 짐승들까지요? 그건 애초에 불가능하고, 해서도 안 되죠.”

   “왜? 왜 하면 안 되는 일입니까, 그게?”

   “지금까지 이 마을이 그나마 이렇게라도 유지되는 게 그놈들 덕분이니까요.”

   “덕분이라고요?”

   “아니었으면 지금쯤 쓰레기에 파묻혀서 뭐가 인간이고 뭐가 쓰레긴지 모르는 상태로 살고 있겠죠.”

   “참나, 무슨 벌레나 짐승 좀 없다고······.” 

   “그러니 누군진 몰라도 쓰레기를 가장 먼저 버린 사람은 오히려 걔네한테 보답을 해야 맞는 거죠.”

   “보답은 무슨!”

   “왜 화를 내세요,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정이 강을 향해 웃으며 말했고 강은 주위를 둘러보며 사람들의 눈치를 살폈다. 강의 입장에서는 다행스럽게도 논쟁의 승패와는 별개로 사람들의 의견은 점차 강의 의견과 일치되어 가고 있었다. 당장 현저히 줄어든 관광객의 수와 생활의 여러 불편함을 생각했을 때 벌레를 먼저 처리하고 쓰레기 문제를 논의하는 것이 더 옳은 순서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래도 발등에 불이 붙었는데 어깨에 묻은 흙을 먼저 털어낼 필요가 있나?” 

   누군가가 말했고 정은 즉시 반박했다.

   “쓰레기를 먼저 처리해야 합니다. 지금은 벌레가 너무 많아서 문제가 되지만, 부분적인 방역과 쓰레기 처리를 병행하면 조금씩 그 수가 줄어들 거예요.”

   “그래도 다수의 의견이 그렇다는데, 혼자 밀어붙인다고 뭐 어쩔 수 있나요?”

   강이 빈정거리며 말했다. 정은 강을 보고,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을 본 후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그래요. 그럼 이미 그렇게 결정이 난 거죠? 꼭 그러고 싶으시다는 거죠? 후회하거나 뭐, 그러실 분이 한 명도 없는 거죠? 이제 끝난 거죠?”

   회의는 끝났다. 사람들이 순차적으로 돌아갔고, 정은 ‘물꼬리 펜션’을 나서는 사람 한 명 한 명을 붙잡고 인사를 건넸다. 안녕히 가세요. 안녕히 가세요. 잘 가세요. 가세요.

   모두가 떠난 ‘물꼬리 펜션’에 강과 정이 남았다. 강은 천천히 머릿속으로 이후의 계획을 점검해 봤다. 방역 업체를 하는 아는 형님 같은 건 없었다. 인체에 무해한 약 같은 것이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다. 그냥 아무 방역 업체와 접촉해서 최대한 강력한 약을 마을 인근에 살포하고, 신제품이라는 거짓말로 얻어낸 추가 자금은 업체와 말을 맞춰 꿀꺽할 생각이었다. 혹시 모를 안전사고를 위해서라는 핑계로 일주일 정도 주민들을 마을 밖에 머물게 하면 그만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강이 갑작스럽게 회의를 소집했을 때부터 그런 계획을 세우고 있었을 거라고, 너무나 체계적인 꾼의 냄새가 난다고 익명의 범죄 브로커는 말한다.

   “저기요.”

   그때 행복한 상상에 빠져 있던 강에게 정이 다가왔다. 강은 순간 흠칫하며 정으로부터 얼마간 거리를 뒀다. 여태껏 자세히 보지 않아 몰랐지만, 가까이에서 마주 본 정의 몸은 생각보다 더 탄탄했다. 정면으로 붙는다면 도저히 승산이 없을 것 같았다. 언제나 얼굴에 미소를 짓고 있던 정의 얼굴이 조금 굳어 있었다. 강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왜요, 뭐, 왜? 어쩌려고? 어쩌자고!”

   정은 강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 주먹을 불끈 쥔 강의 손을 잡았다. 크게 힘을 준 것 같지도 않았는데 아귀힘이 그대로 느껴졌다.

   “저랑 얘기 좀 하시죠, 사장님.”

   정이 늘 지어 보이던 미소를 다시 지으며 강을 바라보았다. 강은 자신도 모르게 올라가는 입 꼬리를 주체할 수 없었다. 사장님, 그건 강이 가장 좋아하는 호칭이자 오랫동안 꿔온 강의 꿈이었다.



   정은 자신이 매일 쓰고 있는 것이 국내에 서식하는 희귀 생물에 관한 생태 보고서라는 사실을 고백했다. 소속과 연구 중인 생물 종은 기밀 사항으로 알려줄 수 없지만, 지금껏 자신이 작성한 보고서의 일부는 보여줄 수 있다고 했다. 강이 정의 스마트폰을 통해 확인한 보고서에는 소몽리 일대에 서식하는 다양한 생물의 종과 특성이 빼곡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버섯류, 약초, 꽃과 나무, 열매 등의 식물부터 생전 처음 들어 보는 곤충의 이름, 크고 작은 동물의 자세한 분류까지도 확인했다. 강이 보고서를 훑어보는 동안 정은 분기마다 자신의 민박을 찾아오는 단골들이 사실은 자신을 보조하기 위해 오는 연구원들이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그제야 강은 정에게 가졌던 의문이 상당 부분 해소되는 것을 느꼈다. 1년에 몇 팀의 손님만 받고 하루 종일 글이나 끄적이고 쓰면서 어떻게 생활을 유지하는지, 어떻게 그냥 하루 묵고 갈 손님일 뿐인 사람들에게 그렇게 친절할 수 있었는지까지. 정은 자신이 맡은 업무가 남아 한동안 더 소몽리에 머물러야 하며, 분류가 끝나지 않은 종에게 영향을 미칠 수도 있으니 산 일대에 무분별하게 방역을 시도하면 곤란하다고 간곡히 부탁했다.

   “그래도 그건 좀 그렇죠. 저희한테는 생업이 걸린 일인데요.”

   강이 여전히 정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말했다. 정은 강의 말을 듣고 잠시 고민하더니 제안을 건네 왔다.

   “제가 해충류에 대한 분류는 어느 정도 끝났거든요. 지금 마을에 문제가 생긴 것도 걔네 때문이잖아요. 제가 일하는 회사에서 이번에 신제품이 나왔는데······.”

   정은 강에게 ‘신제품’에 관해 자세히 설명했다. 인공지능, 로봇, 벌레잡이, 벌레. 따로 떼어 놓고 본다면 얼마든 이해할 수 있는 단어들이 뭉쳐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장이 만들어졌다. 열정적이고 디테일한 설명이라는 것은 단번에 알 수 있었지만, 강으로서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어려운 단어를 나열해서 자신의 혼을 쏙 빼내려는 전략처럼 보이기도 했다. 강은 하품을 하며 정의 말을 중간에 끊고 말했다.

   “그래도 저기, 이미 주민들끼리 방역은 하기로 결정했고. 저는 좀 그쪽 말만 듣고 계획을 바꾼다는 게······ 영 찝찝하네요.”

   “그냥 주민들 다시 모아서 제 설명 좀 들을 수 있게 도와주세요.”

   “제가요? 어떻게요? 왜요?”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몇 년 동안 다 봤는데요. 사장님께서 여기 소몽리 실질적인 이거 맞으시잖아요.”

   정은 그렇게 말하며 강의 눈앞에 엄지를 치켜들었다. 강은 그동안 자신이 정을 오해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처음으로 정에게도 인간다운 면이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사장님께서 저희 연구에 협조하시는 거니까 보상도 섭섭하지 않게 드리겠습니다.”

   “보상이요?”

   “네, 이 정도.”

   정은 계산기 어플을 열어 액정을 몇 번 터치한 후 화면에 뜬 숫자를 강에게 보여주었다. 강으로서도 들이는 품에 비해 절대 나쁘지 않은 액수였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거절하기 힘들 정도의 제안이었다. 강은 말을 멈추고 고민하는 척 이마에 손을 짚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손바닥에 땀이 흥건해져 있었다.

   “그래요.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한 번 사람들을 모아 보죠.” 

   정은 고맙다고 말하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금전적 보상과 더불어 평소 눈엣가시 같던 사람이 자신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광경이 썩 나쁘지 않다고, 강은 생각했다.



   ‘알파벅스Alpha Bugs’를 처음 접한 소몽리 사람들의 반응은 다소 부정적이었다. 벌레를 잡기 위해 로봇 벌레를 산에 풀다니, 그 자체로도 의문이 드는 일이었지만 그것보다는 알파벅스의 외형이 너무 보잘것없었기 때문이다. 새끼손톱의 4분의 1 정도나 될까 싶은 회색 몸체, 등에 박힌 점박이 무늬까지. 어디서 본 것도 같고 보지 못한 것도 같은 조그마한 그 벌레에게 도저히 신뢰가 생기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 벌레를 저기, 산에 풀자고?”

   “벌레가 아니라 로봇이에요. 그, 요즘 유행하는 고성능 인공지능? 그게 탑재된.”

   “인공지능인지 인조지능인지 거 나는 모르겠고. 그게 벌레를 잡을 수 있다고?”

   “그럼요. 요즘 이런 거 입소문 한번 타면 없어서 못 구해요.” 

   “그냥 아는 형님인가 누님인가 뭐 방역 업체 쓰는 게 낫지 않아?”

   “일단 들어나 보자고요. 자세한 설명은 여기 이 친구가 말해 줄 거예요.”

   “친구? 둘이 언제부터 친구 먹었어?”

   “아, 나이 같고 말 통하면 그게 친구지. 설명이나 들어 보세요.”

   강은 정을 바라보았다. 정은 설명을 시작했다. 


   알파벅스, 정확히는 ‘알파벅스 Lv.1’은 세계적인 기업에서 상품화를 앞둔 ‘인공지능 벌레잡이 벌레’의 초기 모델이다. 크기나 종류에 상관없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벌레를 사냥할 수 있지만 우수한 인공지능을 통해 해충만 박멸할 수 있도록 프로그래밍할 수 있다. 나비나 꿀벌 등의 익충은 제외하고 바퀴벌레, 파리,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귀와 입으로 날아드는 날파리 등이 알파벅스의 주된 사냥감이다. 정밀하게 제작된 레이더 센서와 음파 감지기를 통해 해충의 생체반응을 감지하고 주변에 사냥감이 될 만한 해충이 없으면 스스로 땅에 묻혀 전원을 차단하는 시스템을 갖고 있다. 아직은 감지망의 범위가 넓지는 않지만 이 산의 규모로 미루어 보자면 보름 안에 모든 해충을 박멸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정은 거침없이 알파벅스에 관해 설명했고 마을 사람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대부분의 단어를 건너뛴 채 정에게 질문했다.

   “보름? 그렇게 빨라?”

   강은 정을 대신해 대답했다.

   “아 그렇다니까요. 물만 있다고 손님 오나요? 꽃도 피고 해야지. 그러려면 나비나 벌은 있어야 하고.”

   “그건 그렇지.”

   “약 뿌리면 걔네까지 싹 죽어요. 풀도 죽고. 그거는 좀 너무하잖아요. 우리가 뭐 죽이고 싶어서 죽이는 것도 아니고 우리 살자고 하는 짓인데.”

   “그것도 그렇지.”

   “이거는 내가 가져온 게 아니라 저 친구가 추천하는 거예요. 어디서 이런 걸 또 알아왔대. 아주 성실해. 환경도 사랑하고, 몸도 좋고, 참 됐어요, 저 친구가.”

   “그래, 작가 양반 성실하고 된 거야 우리가 다 알지.”

   “어떻게, 보름이면 된다는데 이쪽으로 해보는 거 어때요?”

   “근데 저런 건 얼마나 해? 비싸지 않을까?”

   “아, 비싸지. 약보다는 조금 더 써야지요. 그래도 십시일반 어떻게 하면 못 낼 돈은 아니더라고요. 그리고 일단 돈 걱정은 마셔요. 내가 먼저 비용 처리하고, 효과 있으면 그때 나한테 주는 걸로 하자고요.”

   “자네가? 왜?”

   “내가 그동안 어르신들한테 못 한 것도 있고. 또 나는 이 마을 없으면 안 된다니까요. 우리 어머니도 저 뒤에 묻혀 있고. 이래저래 이왕이면, 하는 마음이지 뭐.”

   “원래 이랬나, 자네가?”

   “뭐가요?”

   “효자고, 뭐 그랬나?”

   “아니, 이웃끼리 얼마나 교류가 없었으면 그걸 모르시네.”

   강이 주민들을 설득하는 동안 정은 알파벅스가 든 유리병을 조심스럽게 쓰다듬고 있었다. 유리병 속에 든 알파벅스는 이미 스위치가 켜져 있었고 정과 눈을 마주칠 때마다 등 뒤에 달린 날개를 움직였다. 센서를 통해 이미 이 산에 자신의 먹이가 가득하다는 것을 감지한 것처럼 보였다. 정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심한 듯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한 마리만으로도 충분하니까 비용은 오히려 덜 들 수도 있어요. 계속 스스로 번식하거든요. 생물로 치면 자웅동체 같은 거예요. 임무를 완수하고 땅으로 들어가 스스로 전원을 차단한 알파벅스는 섭취한 생체 에너지를 배출해 작물이나 나무가 더 잘 자라게 만들기도 합니다. 인공 비료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좋겠네요.”

   정의 말이 끝난 후 몇 시간에 걸쳐 긴 논의가 이어졌고 주민들의 만장일치로 알파벅스의 방생이 결정되었다. 아무래도 초기 비용에 대한 부담이 없다는 점과 보름이라는 빠른 박멸 기간이 중요하게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고, 방역 전문가들은 말한다. 모든 사안이 결정된 후 정이 조심스럽게 병뚜껑을 열자마자 알파벅스는 재빨리 날개를 움직여 순식간에 보이지 않는 곳까지 날아갔다. 

   “자자, 이제 보름 정도 지켜보자고요. 오늘은 제가 지금까지 고생 많으셨고, 또 죄송했다는 의미로 저희 펜션에서 푸짐하게 대접하겠습니다.”

   “근데 오늘 사람이 왜 이렇게 없어?”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애 키우는 사람들 다 어디 갔어? 애들이 코빼기도 안 보이네.”

   “아이 뭐, 애들이 뭐 중요하겠습니까? 먹고 마시다 보면 오겠죠.”

   강이 주민들을 데리고 ‘물꼬리 펜션’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득 무언가 허전해 뒤를 돌아보았더니 정은 알파벅스를 방생한 그 자리에 서서 알파벅스가 날아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뒤통수였기 때문에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이러거나 저러거나 강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알파벅스가 정말 벌레 박멸에 효능이 있다면 보름 후에 주민들에게 큰돈을 받을 수 있을 것이고, 만약 효능이 없다면 그것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강 역시 일체의 비용을 소모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받기로 한 돈이 남아 있었으니까. 그야말로 밑져야 본전이었다.



   알파벅스의 성능은 실로 놀라웠다. 눈에 잘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그 인공지능 벌레를 방생한 후 일주일이 채 지나기도 전에 눈에 띌 정도로 날벌레의 수가 줄어든 것이었다. 주민들의 얼굴에 다시금 생기가 돌기 시작했고, 서로를 향한 적대심도 얼마간 수그러든 것이 눈에 보였다. 가까운 이웃들끼리는 인사를 나누거나 반찬 등을 나누어 먹는 모습 역시 관찰되었다. 여기저기서 알파벅스의 활약상을 칭찬하는 말이 들려왔다. 일각에서는 정의 성실과 강의 결단에 대한 긍정적인 말들도 나왔다. 묵고 갔던 몇 안 되는 관광객들의 반응과 리뷰도 정상적으로 돌아왔고 아직 이전만큼은 아니지만 다시 조금씩 외지인들의 예약 문의가 들어오기도 했다. 그 페이스가 계속되었다면 본격적인 성수기가 시작될 즘에는 소몽리의 계곡이 다시 많은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게 될 수도 있었을 거라고, 여행 전문가들은 말한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 마을은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사라졌고, 그 사라짐 자체가 그런 일이 없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일 것이다. 

   재앙의 징조는 알파벅스 방생 보름 후부터 시작됐다. 현재 기계공학자들은 알파벅스 설계의 최대 문제점으로 무한에 가까운 자가 번식을 꼽고 있다. 아직까지도 당시의 기술력으로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했는지는 밝혀내지 못한 상태다. 남겨진 자료에 의하면 알파벅스의 번식은 대부분의 곤충들처럼 알을 통해 이루어졌다. 정확히는 알처럼 생긴 칩이었지만, 중요한 것은 그 형태가 아니라 가공할 만한 생산력이었다. 별다른 수정 과정 없이 하루에 무한에 가까운 칩을 생산할 수 있었는데, 그 칩은 반나절이면 부화했으며 부화한 약충은 다시 반나절만 지나면 새로운 칩을 생산할 수 있는 성충이 되었다. 이는 바퀴벌레를 포함해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생물도 감히 넘볼 수 없을 정도의 번식력이었다. 날파리 정도라면 단일 개체만으로 충분히 사냥에 성공할 수 있었지만, 아무리 알파벅스라 할지라도 지네 같은 대형 해충을 혼자 사냥하는 것은 무리였다. 알파벅스는 그들을 사냥하기 위해 빠르게 번식해 나갔다.

   번식에 이어 공학자들이 뽑은 알파벅스 설계의 두 번째 오류는 생물학적 고증이 지나치게 반영된 고성능 인공지능이었다. 번식은 곧 부양자와 피부양자의 생성을 의미하며 특히 곤충 사회에서 피부양자를 위한 부양자의 희생은 절대적이라고, 곤충학자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즉 알파벅스는 사냥을 위해 번식한 후 태어난 약충이 번식 가능한 성충이 될 때까지 부양하고, 성충이 된 약충은 다시 번식한 후 태어난 약충을 부양하고, 그 약충은 성충이 되어 그다음 약충을 부양하는 사이클을 절대적으로 우선시한다는 말이다. 알파벅스의 뛰어난 사냥 솜씨로 산의 해충은 약속한 보름 내에 멸종 직전의 단계까지 맞이했으며, 프로그래밍된 대로라면 알파벅스는 곧 스스로 땅속에 들어가 전원을 차단해야만 했다. 알파벅스의 정교한 인공지능은 이 프로그래밍된 시스템과 절대적 부양 본능 사이에서 충돌을 일으켰다. 산에 존재하는 마지막 해충을 사냥한 직후, 산에는 여전히 부양해야 할 약충이 존재했고, 다급해진 성충 알파벅스의 인공지능은 해충으로 한정되어 있던 사냥 프로그래밍을 스스로 수정했다. 해충에서 곤충으로, 다시 곤충에서 짐승으로 사냥 목표물을 확대한 것이다. 결국 폭주한 인공지능은 산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를 사냥할 때까지 번식과 사냥을 반복하게 되었다. 더 작은 개체를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자신의 프로세스를 파괴하는 일은 인공지능에게도 괴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공지능은 그래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것이 종을 떠나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단일하고 확실한 진리라고 인식한 것이다.

   알파벅스에게 사냥 자체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프로그래밍을 수정한 이후 덩치가 큰 사냥감을 사냥하기 위해 알파벅스는 끝도 없이 번식을 이어 나갔고 다시 앞서 언급했던 부양 프로세스를 통해 더 큰 집단을 형성하게 되었다. 인간에게 뼈의 형태로 가장 먼저 발견된 사냥감은 참새였다. 곧 다람쥐, 멧비둘기, 토끼, 까마귀 등의 사체가 무더기로 발견되었고 심지어는 알파벅스가 소형 짐승을 사냥하는 장면이 주민들에게 종종 발견되기도 했다. 그것은 가히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처음에는 몇 마리가 공격을 시작하더니 삽시간에 짐승의 몸을 뒤덮을 정도로 수가 불어났다. 강도 그 장면을 실제로 본 적이 있었다. 강의 경우에는 뒷마당에서 키우던 닭이었는데, 실패한 실험의 화학작용처럼 순간적이고 폭발적이었다. 강은 눈앞에서 벌어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놀라 ‘물꼬리 펜션’으로 뛰어 들어갔고 한동안 펜션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다.

   발견된 가장 거대한 짐승의 사체는 멧돼지의 것이었다. 멧돼지의 경우 확실히 알파벅스의 소행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었지만 그 멧돼지의 뼈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뼈 겉면에 알파벅스의 알이 그득했다고 말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뭉쳐서 토끼나 다람쥐를 먹는 놈들이 더 모이고 뭉쳐 멧돼지를 먹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멧돼지가 되면 씨발, 사람은?

 누군가가 겁에 질려 소리쳤고 주변을 둘러보던 다른 누군가가 손가락으로 허공을 가리키며 ‘알파벅스’라고 외쳤다. 주민들은 그 즉시 각자의 펜션으로 돌아갔다. 



   이후 일주일이 좀 안 되게 남은 기록의 마지막 순간까지 사람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알파벅스가 내뿜는 사냥감 감지용 음파에 의해 통신 수단이 모두 막혀 외부와 연락할 수단도 없었다. 유일한 방법은 산을 걸어 내려가는 것이었지만 누구도 감히 엄두를 내지는 못했다. 소몽리 주민들의 유골 대부분은 몇 년이 지난 후 저마다의 펜션이 있던 터에서 발견되었다. 특이한 것은 강이었는데, 강의 유골은 정의 민박집이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터에서 발견되었다. 추측하건대 결단을 내리고 산에서 내려가기 전, 약속했던 금전적 보상을 받기 위해 정을 찾아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강은 살아 움직이는 정을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정. 정의 유골은, 그것을 유골이라고 할 수 있다면, 한동안 발견되지 않다가 마지막 기록일로부터 30여 년 뒤 자신이 운영하던 민박집 마당의 땅속에서 발견되었다. 몸을 잔뜩 웅크린 채였고 저항흔이 없는 것으로 보아 스스로 내린 선택일 것이라고 범죄분석학자는 말한다. 뼈가 아니라 철로 이루어진 구조물이었고 그 구조물 주변에서는 새끼손톱 4분의 1 정도 크기의 회색 로봇 벌레가 무더기로 발견되었다. 그들은 주어진 임무를 마친 후 스스로 전원을 차단하고 땅속으로 들어가도록 입력된 시스템을 보유하고 있었다. 벌레처럼 생긴 로봇의 임무가 벌레를 사냥하는 것이었다면, 정의 임무는 무엇이었을까. 누구든 얼마간 유추해 볼 수는 있지만 답을 알려주지는 않을 거라고, 익명의 소설가는 말한다.


*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방생되었던 최초의 알파벅스에 내장되어 있던 작은 용량의 메모리와 정의 코어 메모리에서 추출한 영상을 토대로 얼마간 각색된 소설이다. 복원 과정에서 임의로 삭제된 기록들이 발견되었지만 무슨 수를 써도 그 내용을 알아낼 수는 없었다. 

   훗날 알파벅스를 방생한 날로부터 하루 뒤, 이미 소몽리를 비롯한 일대의 산 전체에 폐쇄 명령이 내려졌다는 문서상의 기록이 발견되며 큰 논란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정확히 누가, 언제, 어디서, 왜 그런 명령을 내렸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았고, 그러므로 여전히 진실은 알 수 없다고 정치학자들은 말한다. 그러나 인간은 기록된 것만을 믿지 않으며 그 어떤 거대한 그림자로도 진실을 가릴 수는 없다고, 현재를 살고 있는 바로 우리는 믿고 말한다.

   처음 이 사건에 관한 기밀 자료를 접했을 때, 그리고 그 기록을 토대로 당시를 재현하는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나는 이 작업을 시작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당시의 상황이 담긴 영상 자료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원한다면 화질을 더 높일 수 있는 기술 역시 얼마든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수치화된 데이터와 시간 순서대로 작성된 활자 기록 역시 사건을 복기하는 용도로는 충분한 양이라고 판단했다. 당시에는 인공지능의 폭주가 대처 불가능한 수준의 재앙이었을 수 있지만 지금에 와서는 얼마든 수습 가능한 차원의 사고라는 점도 내 의욕을 꺾는 요인이었다. 그러나 영상 자료와 현재의 데이터를 대조하며 사건을 살펴보았을 때, 해결되지 않는 의문이 하나 존재했다. 영상에는 존재하며, 그러므로 분명히 있어야 할 것들이 현장에는 없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발견되지 않았다. 

   영상 자료 속에서 확인 가능한 아동은 셋이었고, 모두 살아 있었다. 수소문 끝에 찾아낸 그들은 모두 소몽리, 혹은 충몽리를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셋 중 두 명이 증언을 거부했고 남은 한 명이 인터뷰에 참여했지만 연구 진행 중 쇼크를 일으켰다. 연구진은 당사자의 정신 건강을 생각해 더 이상 증언을 요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무슨 수를 써도 그 기억을 다시 떠올릴 수는 없을 거라고도 말했다. 마치 어떤 목적 아래 최면 등을 사용하여 임의로 삭제된 기록 같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참 다행한 일이다, 라고도 덧붙였다. 이제는 아무도 그들에게 증언을 요구하거나 강요하지 않는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해본다. 정이 삭제한 자신의 자료들. 현대의 기술로도 복원할 수 없을 만큼 필사적으로 숨겼던 그것이 누군가의 약점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 알파벅스를 방생하던 날, 애들이 코빼기도 어쩌고,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는 생각. 어쩌면 정에게 주어졌던 임무를 우리가 착각하고 있다는 생각. 이렇게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내가 너무 많은 것을 모른다는 생각.

   이제, 다시 소설로 돌아가 보자.


*


   현재 소몽리가 있던 그 산은 어떻게 됐을까? 알파벅스는 정의 말대로 땅속에서 그동안 축적했던 생체 에너지를 내뿜었고 그 방대한 양의 생체 에너지는 산의 토양을 그 어떤 땅보다도 비옥하게 만들었다. 산은 온갖 벌레와 동물은 물론이고 울창한 나무와 화사한 꽃이 가득한 낙원으로 변했다. 국가는 그 산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고 사람이 살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러니 인간을 제외한 거의 모든 생물이 그 낙원에 거주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마을은 사라졌지만 마을이 있을 때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찾고 있다. 사진을 찍고, 대화를 나누고, 행복을 느끼고, 위로를 받고, 때로는 슬픔과 분노로부터 해방된 느낌을 받으며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어떨까. 폐허 위에 지어진 낙원을 우리는 축복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렇다면 이제 와 우리 세상에 낙원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곳이 존재하기는 할까? 우리는 정말로 낙원에 살고 싶은 것일까?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남지 않았을 거라고, 믿음을 연구하는 신학자들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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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01
원경

원경 성혜령 건강검진을 12월 마지막 주까지 미루는 사람이 자기 말고도 이렇게 많으리라고 신오는 생각하지 못했다. 대기실의 긴 좌석 중간중간 빈자리가 있긴 했지만, 신오는 한구석에 서 있기로 했다. 초음파 검사실 앞 복도는 자기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며 서성이고 있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헐렁한 가운에 느슨한 고무줄 바지를 입고 핸드폰을 보며 기다림을 견디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신오는 이들 중 내년에는 따뜻한 휴양지에서 연말을 보낼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지 궁금했다. 혹은, 오늘 치명적인 암이나 뇌동맥류 같은 것들을 발견하고 전혀 예상치 못한 인생을 살게 될 사람들은? 그런 일들은 언제나 일어나고 있었다. 직장 생활을 10년 정도 하니 주위에 아픈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전 직장 동료는 출근길에 쓰러진 뒤 안면마비를 얻었다. 한쪽 입꼬리가 위로 당겨 올라갔는데 그는 멀쩡한 다른 쪽 입꼬리도 끌어올려 웃는 얼굴을 만들곤 했다. 병가에서 돌아온 뒤 매일 웃는 얼굴로 제일 먼저 출근하는 동료를 보면서 신오는 이직을 결심했다. 신오는 모든 일이 가능하지만 대개 나쁜 일들이 더 자주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되도록 좋은 음식을 먹고 운동을 꾸준히 하려고 했다. 불행은 대비하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게 오히려 쉽게 다가오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도 있었다. 복부 초음파를 보던 의사가 “어랏?” 하고 실없는 소리를 내며 배꼽 부근을 세게 눌렀을 때도 신오는 방귀가 나올 것 같다는 생각뿐이었다. 의사가 차가운 젤을 다시 묻히고 초음파 단말기를 문지르다가 복막에 종양이 보인다는 말을 했을 때는, 그래서 요새 변비가 심했나, 라는 생각이 먼저 났다. 대형 병원에 가서 생검과 CT, MRI 검사를 마치고 소화기내과 교수의 진료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도 신오는 회사 메신저를 보고 있었다. 몇십 억 단위 공공사업의 수주가 걸린 입찰 제안서의 마무리를 앞둔 시점이었다. 병원 검사로 연차를 낸다고 했을 때 팀원들은 모두 별일 없을 거라고, 하루 푹 쉬고 오라고 말했지만 메시지를 보내면서 신오를 계속 태그했다. 신오는 그날 마지막으로 진료실에 들어갔다. 의사는 젊고 피곤해 보였다. 예약을 가장 빨리할 수 있었던 의사였으니 어쩔 수 없지, 신오는 생각했다. 의사는 신오가 자리에 앉자 간단한 인사도 없이 모니터 화면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마우스 커서로 신오는 잘 알아볼 수 없는 흐릿한 음영을 짚었다. 여기예요, 여기. 의사는 약간의 승리감마저 느껴지는 말투로 말했다. 복막의 종양은 전이 암이고, 여기가 원발 암이라고. “이게 숨어 있어서 찾기 어려웠거든요.” 의사는 다시 한번 마우스 커서를 움직였다. 췌장하고 담도 사이인데 위치나 크기가 좋지 않다고. 오늘이 금요일이니 당장 다음 주부터 항암치료로 크기를 줄여 보고 수술을 잡아 보자고. 신오의 핸드폰이 또 진동했다. 신오는 치료를 이주만 미뤄도 되냐고 물었다. 프로젝트가 있어서요. 이주 후에 마감이라. 의사는 처음으로 웃어 보

  • 관리자
  • 2024-05-01
야생 식물원

야생 식물원 하가람 식물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다이아몬드 모양의 철골로 둘러싸인 거대한 유리 온실에는 열대와 지중해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이국적인 식물이 자란다고 했다. 한 달 전 나는 식물원 근처에 있는 여러 호텔을 찾아 은규에게 링크를 보냈다. 보통 때의 그라면 어디든 좋다고 했을 것이다. 레스토랑도, 카페도, 동네의 작은 아이스크림 가게조차도 모조리 내 선택에 맡기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날 은규는 이미 예약한 곳이 있다고 하여 나를 놀라게 했다. 은규가 보내 준 링크를 열어 보았다. 넓은 통유리 창 너머로 식물원과 공원이 내다보이는 스위트룸이었다. 나는 조금 들뜬 채 답장했다. — 우리가 만난 지 곧 1년이래. 믿어져? 1년이라는 시간은 내게 유별났고 은규에게는 별다른 감흥이 없는 것이었다. 그가 전에 사귄 여자친구는 단 두 명인데 각각 4년, 5년을 만났다고 했다. 매번 석 달도 채 넘기지 못하는 나와는 달랐다. 이따금 은규에게 이전 연인들에 대해 물었다. 그들이 어떤 성향의 사람이었고 어떤 외양을 가졌는지 궁금했다. 처음에는 응응, 하며 대꾸해 주던 은규는 내가 그녀들의 음악 취향이나 살던 동네처럼 구체적인 정보까지 캐묻자 태도를 바꾸었다. 기억 안 나. 그는 말했다. 다 옛날이야기라고. 그 후로는 이전에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그녀들을 생각했다. 눈, 손톱, 말투, 그리고 신발. 나와 닮았을지, 닮았다면 얼마나 닮았고 다르다면 무엇이 다를지도. 상상을 이어 가다 보면 늘 한 가지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은규는 한 번도 애인과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까 여자와 밤을 보내는 일이 오늘 그에게는 처음이었다. 서른을 넘긴 남성에게서 보기 드문 경우였지만 그가 처음인 게 좋았다. 그 점이 무엇보다도 나와 그녀들을 구분 지어 주는 것만 같았다. 차창에 머리를 기대었다. 햇볕에 데워진 창문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인터넷으로 보았던 화려한 꽃과 기다란 나무들을 떠올렸다. 노랗고 푸르고 분홍빛이 맴도는 공간을. 여름 휴가철이었고 도로는 차들로 빽빽했다. 졸음 껌을 씹는 은규를 보며 말했다. “오늘은 내가 운전하고 싶었는데.” “다음에. 너 힘들어.” 은규가 말했지만 나는 안다.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그는 내게 차를 맡기지 않을 것이다. “보면 놀랄걸? 너무 잘해서?” 나는 허리를 세운 채 한 손으로 반원을 그려 보았다. 휙휙. 입으로 소리 내며 운전대를 쥔 그를 따라 했다. 그가 웃었다. 머릿속으로 주행하기. 그것은 나만의 놀이였다. 캠퍼스 변두리에 있는 H관 1층, 5평 남짓한 주차관리실에서 상상력을 충족시켜 줄 만한 것은 많지 않았다. 먼지 쌓인 커피믹스와 낡은 소파, 책상 위에 시간별로 놓여 있는 분홍색, 파란색, 노란색 주차권들. 지겨운 서류, 서류, 서류. 드물게 실장이 자리를 지키는 날이 아니면 대체로 혼자 그곳에서 일했다. 사람들이 찾아와 주차권을 사거나 정기 등록을 마친 후 돌아가면 나는 모니터에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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