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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통

  • 작성일 2024-04-01
  • 조회수 1,071

   흉통


김이설


   놀라지 말고 들어. 엄마의 첫 마디에 고개를 들고 허리를 세웠다. 책상 위에는 가맹운영신청서, 가맹점 운영계획과 자기소개, 가맹개설자금축적주계좌잔고 등의 서류가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하루에 검토해야 할 지원자 서류는 끝이 없었고, 서류 심사 후 면접자와 점주 선정은 매일 누적되었다. 전화벨 소리와 통화하는 목소리, 조심성 없이 자판 두드리는 소리에 신경질적으로 딸깍거리는 마우스 클릭 소리까지 사무실은 분주했다.

   ㅡ 은수야, 듣고 있니?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ㅡ 듣고 있어. 말해.

   큰 숨을 들이켠 후 엄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ㅡ 엄마가 며칠 병원에 입원했었어.

   그걸 왜 이제야 말하느냐는 원망은 중요하지 않았다. 엄마, 잠깐만. 나는 조용히 일어나 사무실을 나가 건물 옥상으로 향했다. 부장과 이야기를 하던 서 과장이 힐끔 나를 쳐다보았다. 전화기 너머 멀찍이서 아버지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가 아버지에게 소리쳤다. 아니, 거기 말고. 그 안쪽에! 다시 아버지 목소리가 들리고, 엄마의 대꾸. 전화 끝내고 해줄게, 지금 그게 급한 게 아니잖어! 그사이 나는 옥상에 마련된 휴게실로 들어갔다. 카페의 야외 테라스처럼 꾸며 주로 흡연실로 사용되는 곳이었다. 세밑의 공기가 매서웠다.

   ㅡ 그래서? 병원에서는 뭐라는데?

   ㅡ 네 아빠가 갑자기 안방을 정리한다고 다 들쑤시고 있다. 왜 저런다니. 

   ㅡ 엄마. 

   ㅡ 그래, 알았다고. 그저께 엄마가 혈변을 눴어. 그래서 네 아버지랑 응급실로 갔는데, 이것저것 검사하더니 입원시키더라고. 거기서 또 뭘 검사하라고 해서 다 검사받고. 어제 퇴원했어.

   엄마는 내 질문과 상관없이 자기가 준비한 대로 이야기를 이어 갔다. 새해가 되면 엄마 나이 일흔여섯. 사십대 때 큰 병 앓은 이후로 별다른 잔병치레 없이 이제까지 잘 버텨 준다고 생각하곤 했는데. 다시 생각하니 적은 나이는 아니었다. 나는 담배를 꺼냈다. 

   ㅡ 은수야, 듣고 있지? 놀라지 말고 잘 들어.

   오빠가 은수야 시간 있니? 라고 묻는 것보다, 동생이 언니 지금 바빠? 라고 묻는 것보다 무서운 말이 엄마가 건네는 놀라지 말라는 말이었다. 그만큼 놀랄 이야기라는 뜻.

   ㅡ 직장암이래.

   그런데 어쩐지 놀랍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일이어서 당황하고, 경황없어 머릿속이 하얗게 변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았다. 얼마나 진행되었대? 나는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너무 사무적인 말투였나. 잠시 뜸을 들이던 엄마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ㅡ 많이.

   나는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그제야 엄마가 긴 한숨을 내뱉었다. 언제 올라왔는지 홍보팀 직원 둘이 내게 눈인사를 하고 건너편 의자에 앉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 과장이 어깨를 툭 친 건 막 엄마와 전화를 마친 후였다.   

   “심각한 일?”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눈은 못 속이는데. 분명 무슨 일 있어. 오빠가 또 속 썩여? 아니면 동생? 석훈 씨는 아닐테고.”

   한 팀에서 15년 넘도록 같이 일해 온 사람이었다. 일 잘하는 상사이자 무서운 선배지만, 좋은 언니에다 훌륭한 친구이기도 한 서 과장이 내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나는 방금 전에 엄마에게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전했다. 지난해 친정아버지를 담도암으로 잃은 서 과장이 아무 말 없이 내 등을 쓸어내렸다. 석훈에게 전화가 들어오고 있었다. 받아. 서 과장이 전화기를 가리켰다. 나는 전화기를 뒤집었다. 곧 이어 메시지가 도착했다. 

   : 저녁 내가 준비할 테니, 천천히 들어와. 

   목요일, 석훈이 오는 날이었다.


*

 

   놀라지 말고 들어. 그 말을 처음 들은 건 대학교 2학년 때였다. 엄마는 자신이 자궁암 3기라고 전했다. 그 소식이 자궁을 들어내는 수술과 반복되는 입퇴원, 넋나가게 하는 항암 후유증의 예고라는 걸 스물한 살의 내가 알 턱이 없었다. 엄마는 떨면서 말했는데, 나는 엄마 지금 우는 거야? 라고 대꾸했다. 

   생각해 보면 그 당시의 엄마는 지금의 내 나이 즈음, 그때의 나는 엄마 나이라면 그런 병을 앓아도 될 법하다고 쉽게 받아들였다. 엄마는 늘 자신이 늙었다고 말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잘 몰랐다. 아는 게 없었다. 다들 걱정하고 염려했지만 와중에 또 세상 좋아져서 다 나을 수 있다고 했다. 모두들 그렇게 말하니 정말 그런 줄로만 알았다. 암이라는 것이 그런 병인 줄 알았다. 어떤 병인지 몰랐던 것이다. 수술하고 항암 치료 받으면 낫는 병. 엄마도 그렇게 나았으니까. 아프고 고생하고 힘들었던 건 엄마였지, 그걸 겪은 건 내가 아니었으니까. 나는 그냥 옆에서 보기만 했으니까. 엄마는 결국 완쾌 판정을 받았으니까.

   두 번째로 들었던 놀라지 말라는 말은 교통사고를 당한 아버지가 오랜 병원 생활과 재활 치료를 겪어야 한다는 예측이자, 그로 인해 집안 경제가 주저앉을 거라는 선언이 되었다. 그다음 놀라지 말고 들어야 했던 말이었지만 놀라고 말았던 소식은 오빠네에 사정이 생겼으니 이유 묻지 말고 급전을 돌려달라는 일방적인 요구. 최근에 들은 놀라지 말라 해서 놀라지 않고 듣게 된 이야기는 동생이 이혼해서 엄마네로 들어오게 생겼다는 엄살. 아버지는 결국 한쪽 다리가 불편한 사람이 되었고, 오빠는 파산 신청만 겨우 막았으며 동생은 근래 새 남자가 생겼다고 했다. 

   사무실을 나서면서부터 차례대로 오빠와 동생, 아버지와 통화를 했다. 지하철 환승 구간을 걸으면서, 마을버스 교통카드를 찍으면서, 아파트 단지 상가 마트에서 마침 아침에 똑 떨어진 헤어 컨디셔너를 고르면서도 전화기를 붙들고 있었다. 아파트 출입구 앞에서야 간신히 통화를 마쳤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구운 마늘 냄새가 났다. 석훈은 주방에서 분주했다. 손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그사이 식탁 위에는 루꼴라가 올라간 파스타와 찹스테이크, 구운 자몽과 치즈를 뿌린 샐러드가 보기 좋게 차려져 있었다. 석훈은 칭찬을 원하는 소년처럼 식탁 앞에 서 있었다.

   3년 전에 파산 신청을 하기 직전까지 몰렸던 오빠는 엄마가 암 보험을 들어 두었냐는 것부터 물었다. 이어 국가 건강 검진은 받아 왔냐는 것도 물었는데 그거 안 받아 왔으면 보험 혜택이 어쩌고저쩌고, 똑똑한 척하는 딸년들이 그런 건 왜 또 안 챙겼느냐고 뭐라뭐라. 2년 전 이혼한 동생은 다 자기 잘못 같다면서 눈물부터 흘렸다. 15년 전부터 다리를 절게 된 아버지가 가장 현실적이었는데, 직장만 암이면 다행인데 그 지경이 아닐까 봐 걱정이라고 했다. 아무래도 다른 장기로의 전이가 의심된다는 것인데, 나는 아버지가 표현한 그 지경이라는 말이 가슴에 박혔다. 그 지경이 아니면 어떻게 되는 거지? 내가 석훈에게 묻자 석훈은 조용히 포크를 내려놓았다. 내 몫의 파스타는 차갑게 식은 지 오래였다. 찹스테이크는 진작 굳었고, 샐러드는 둘 다 손을 안 댄 채였다. 

   “맥주라도 할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앞에 앉아 있던 석훈이 내게 다가와 조용히 나를 안았다. 석훈의 품에 안긴 나는 이런 건 아무 도움이 안 된다고 말하고 싶었다. 대신 당신은 그때 어땠느냐고,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고 싶었다. 품에서 떨쳐 나오자 석훈은 다 안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는데, 막상 그 표정을 맞닥뜨리자 나는 맥없이 무기력해졌다. 

   “힘들면 토요일 약속 취소하자. 내가 혜원이한테 설명할게.”

   “혜원이한테는 아무 말 마.”

   열흘 뒤, 해가 바뀌면 스무 살이 되는 혜원은 지난주에 바라던 대학교에 무사히 합격해 내내 들떠 있었다. 혜원의 고등학교 졸업 겸 대학교 입학 선물로 내가 정장 투피스와 코트를 사주기로 한 약속이었다. 쇼핑은 여자들끼리만 하자 해서 혜원이 반색을 했던 터였다. 

   “아빠랑 같이 가면 보지도 않고 무조건 다 예쁘다고 해요. 아니면 피곤하니까 빨리 고르라고 하든지.”

   “쇼핑은 아줌마랑 둘이서 하고. 아빠는 저녁 먹을 때나 오라고 하자.”

   두 여자 사이에서 머쓱하게 웃기만 하던 석훈은, 사실 그날 저녁 식사 자리에서 혜원에게 말하겠다고 했다. 이제는 나와 살림을 합치고 싶은데 혜원의 생각은 어떤지 묻겠다는 것이다. 나는 서두르지 말자고 했다. 혜원이 원하지 않으면, 이제껏처럼 지내도 아무 상관없다는 말에는 석훈이 못내 서운한 내색이어서 괜히 미안한 마음까지 들었다. 석훈은 사실 혜원에게 넌지시 의향을 물었고, 그날 그 이야기를 할 것이라 귀띔도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너무 걱정 말라고, 다분히 형식적인 자리일 거라며 전혀 걱정하지도 않았던 나를 긴장시켰다. 그런데 그 자리를 취소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혜원과의 토요일 쇼핑을 오래 전부터 기다렸다. 새 옷 쇼핑이어서가 아니라 내가 사주는 옷이기 때문에, 생애 첫 정장이기 때문이었다. 요즘 아이들이야 진작 어른스럽게 옷을 입었지만, 그래도 저희들끼리 사 입는 어른 흉내 내는 복장과 정말 어른이 입는 옷은 다르기 마련이었다. 너도 이제 어른이라고 말해 주는 것 같은, 엄마가 성인이 된 딸에게 건네는 첫 선물 같은. 그런 의미를 담은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 

   30여년 전, 대학교 합격 발표가 나고, 엄마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나를 명동의 백화점으로 데리고 간 것이다. 나는 익숙한 공간이 아니어서 쭈뼛거리는데 정작 엄마는 의외로 능숙하게 매장에 들어가 정확하게 나에게 어울리는 코트 스타일과 사이즈를 점원에게 요구했고, 입어 보게 했고, 자연스럽게 다시 둘러보고 오겠다며 능숙하게 매장에서 퇴장하곤 했다. 나는 그 모습에 다소 놀랐는데 평상시의 엄마와 어울리지 않는 태도였던 탓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집에서의 엄마는 늘 아버지가 더 이상 안 입는 티셔츠에 오빠나 내가 지겨워 묵혀 둔 트레이닝 바지를 입던 사람이었다. 그런 옷에 어울리는 태도와 자세란 동네 아줌마들처럼 알뜰하고 부지런한 중년 여성들의 허물없고 수더분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백화점에서의 엄마는 드라마 속 부잣집 여자 같진 않았어도 우아한 말투가 전혀 어색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때의 나는 아마 엄마는 정말 어른이구나, 나는 여전히 엄마 품안의 자식이구나, 같은 안도를 했을 것이다. 

   그날, 열아홉살 겨울, 나는 백화점에서 나이스클럽 회색 코트를, 이엔씨에서 베이지색 원피스와 엘칸토에서 리본이 달린 검은색 에나멜 구두를 샀다. 기억이 선명한 건 그 옷들과 신발을 아직도 갖고 있기 때문인데, 나도 혜원에게 그런 의미의 옷과 신발을 선물하고 싶었다. 내가 엄마는 아니지만, 성인 여성이 성인 여성에게 보일 수 있는 가장 친근하고 가장 큰 호의와 가장 다정하고 가장 믿을 만한 안내자가 되고 싶었다. 혜원에게 내가 그런 존재이고 싶었다. 어쩌면 나는 아직도 혜원에게서 엄마를 빼앗은 사람이 내가 아니라는 걸 변명하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


   석훈을 다시 만난 건 94학번 연운 선배의 장례식장이었다. 석훈에게는 한 학번 아래였고, 나에게는 한 학번 위였던 연운 선배는 참 잘 웃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스스로 생을 놓았다고 했다. 빚이 많았다고 했다. 사업이 망했다고도 했고, 누군가는 지병이 있어 지레 겁먹고 세상을 떴다고도 했다. 병원비 감당을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인데 누구 말이 맞는지 확인할 길은 없었다. 이유가 무엇이든 연운 선배와 동갑이라는 아내와 여섯 살짜리 아들아이를 남기고 떠난 연운 선배를 욕하고 미워하느라 장례식은 흉흉하고 침울했다. 그날 유난히 많이 운 사람이 석훈이었다. 

   누구였더라. 석훈 선배 와이프가 암이래. 얼마 안 남았다나 봐. 그 말을 전한 사람은 석훈이 이해된다면서 혀를 찼다. 나는 의아했다. 무엇이 이해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얼마 못 산다는 아내? 얼마 못 산다는 아내를 둔 석훈? 그래서 우는 석훈? 석훈에겐 아이도 있는데. 그럼 그 아이를? 나는 그 이야기를 전한 이에게 되물었다. 

   “네가 뭔데?”

   테이블에 있던 무리가 일제히 나를 쳐다봤고, 나는 목소리를 줄이지 않고 다시 물었다. 

   “네가 뭔데 석훈 선배를 이해해? 나도 이해를 못 하는데!”

   석훈은 그날 내가 취했다고 기억하지만 나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취한 건 석훈이었다. 나는 장례식장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석훈을 의식하고 있었다. 인사도 제대로 건네지 못하고, 일부러 석훈과 다른 테이블에 앉아, 힘겹게 석훈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그것은 나의 오랜 버릇이었고, 익숙한 습관이었다. 

   스무 살 때부터 품어 왔던 비밀을 내 입으로 무너뜨린 이상 더 머물 수 없었다. 석훈이 보이지 않는 틈을 타 조용히 장례식장을 나섰는데, 흡연실에서 나오던 93학번 무리들과 마주쳤다. 무리의 끄트머리에 석훈이 있었다. 먼저 가보겠다면서 무리를 향해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석훈이 내 이름을 불렀다. 무리의 누군가가 같이 가자며 석훈을 뒤따르는 듯했으나 결국 나와 석훈만 걷게 되었다. 장례식장을 나와 병원 입구를 지나 택시 정류장까지 아무 말 없이 같이 걷기만 하던 석훈이 조용히 내게 물었다.

   “한 잔 더 할까?”

   자정을 훨씬 넘긴 시간이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석훈의 아내는 폐암이라고 했다. 아이는 일곱 살. 연운의 아들아이를 보는데 자기 아이 같아서 안 울 수가 없었다고 했다. 나는 석훈이 슬퍼하는 걸 보는 게 싫었다. 그래서 그냥 내 이야기를 했다.

   내가 스물한 살 때 마흔여덟 살 엄마가 자궁암이었고, 항암 치료를 받는 동안 엄마는 자신이 암 환자라는 사실을 내세워 식구들을 괴롭혔다는 것. 암 환자라는 절망에 절어 있는 엄마를 끊임없이 북돋아야 했고, 왜 하필 자기가 아파야 하느냐는 억울과 분을 받아내느라, 통증의 호소와 구토 냄새를 참아내느라 식구들이 얼마나 피폐해졌는지만 이야기했다. 아니, 사실은 엄마의 암 투병 동안 나는 얼마나 지겹고 짜증이 났는지에 대해서 고백했다. 그래서 너 역시 사실은 그런 거 아니냐고. 주변 사람들 눈 때문에, 남편이라는 이유 때문에, 당신들의 아이 때문에 아프고 힘들고 서글프고 안타깝다고 눈물 흘리지만 정말은 지긋지긋하고, 신경질 나고, 도망치고 싶은 거 아니냐고. 어서 끝내고 싶은 거 아니냐고, 어떻게든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고 바라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렇다면 나는 너를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내 말을 다 들은 석훈은 그냥 웃었다. 장례식장에서 울던 석훈이 내 앞에서는 웃었다. 나는 그게 슬펐다. 슬퍼서 싫었는데, 싫은 것도 좋아서, 좋아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먼저 석훈을 안고 내가 먼저 입을 맞추었다. 내가 먼저 석훈의 손을 잡아 내 가슴을 쥐어주고, 내가 먼저 옷을 벗어 침대로 이끌었다. 

   석훈의 아내는 그 뒤로 2년 더 투병 생활을 한 뒤에 세상을 떠났다. 암이 다른 장기로 전이되었기 때문인데, 그 시기가 석훈이 나를 만날 무렵부터였다. 그것이 내 탓일 리 없다. 물론 석훈의 탓도 아니다. 죽음은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 


*


   “여기 정말 맛있어요. 아, 배고프다.”

   혜원은 아빠와 전에 왔던 데라면서 뇨끼 맛집이라고 나에게 쫑알거리더니 이내 석훈에게 오늘 쇼핑한 것들을 일일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뭘, 어떤 걸 봤는지 갑자기 환하게 웃으며 석훈에게 귓속말을 했다. 혜원의 밝은 얼굴을 보니 혜원의 죽은 엄마, 석훈의 죽은 아내가 떠올랐다. 사진으로만 본 얼굴인데 눈앞의 혜원이 사진으로만 본 혜원 엄마와 꼭 같았다. 혜원 엄마가 살아 있다면 저 부녀를 보며 좋아했겠구나, 행복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괜히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사실 혜원은 여느 날과 다르지 않았다. 아랫단만 동글동글하게 웨이브 진 긴 머리, 매끈한 흰 피부, 분홍색 볼과 반짝이는 도톰한 입술. 타이트한 베이지색 니트 상의에 헐렁한 빈티지 청바지, 오니츠카타이거 운동화. 여느날처럼 혜원이 즐겨 입는 스타일. 그러고 보니 모두 내가 사준 옷과 운동화였다. 석훈도 출근하지 않는 날에 자주 입는 면바지에 스웨트 셔츠 차림이었다. 가장 차려 입은 건 나였는데, 흰색 원피스에 스카프, 모처럼 굽 있는 구두까지. 물 컵에 묻은 붉은 립스틱 자국을 슬쩍 냅킨으로 지우며 나는 혜원의 시선을 피했다. 셋 중에서 다른 건 나뿐이었다. 아랑곳하지 않은 둘이 계속 대화를 이어 갔다. 석훈이 혜원에게 물었다.

   “오티랑 새터가 언제라고 했지?”

   “몇 번을 말해 줬는데 또 물어 봐? 몰라. 말 안 해.”

   내가 슬쩍 끼어들었다. 

   “오티는 뭐고 새터는 뭐야?”

   “오티는 오티고요, 새터는 엠티 같은 거?”

   석훈이 이어 물었다. 

   “몇 박 며칠씩이니?”

   “그것도 한 다섯 번은 얘기했다.”

   “그랬어?”

   혜원은 석훈에게 눈을 흘겼지만 각각 몇 박 며칠인지, 어디로 가는지, 주체가 어디인지, 인솔은 누가 하고 프로그램은 대략 어떤 것인지 찬찬히 다 설명했다. 쉬지 않고 떠드는 혜원을 바라보는 석훈의 눈빛을 보면서 나는 완벽한 소외감을 느꼈다. 세상 무엇이든 다 이해한다는, 이해할 수 있다는, 이미 다 이해하고 있다는 눈빛이었다.

   나는 석훈의 저 눈빛을 좋아했지만, 대상이 혜원일 때는 혜원의 주변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서, 석훈 옆의 나는 아무 의미도 없는 사람이 되어서, 너무 철저히 외로워졌다. 나는 조용히 식전빵을 먹었다. 뇨끼와 샐러드, 파스타가 차려졌고 나는 내 몫의 음식들을 소리 없이 다 먹어치웠다. 후식으로 나온 커피와 티라미수도 남기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둘 다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혜원을 처음 만난 건 혜원이 열한 살 때였다. 엄마를 잃은 지 2년쯤 뒤였고, 롯데월드에서였다. 처음 만난 나에게 혜원은 낯도 가리지 않고 제 이야기를 허물없이 잘 떠들었다. 학교 선생님, 같은 반 아이들, 다니고 있는 피아노 학원과 수학 학원, 영어 학원과 학원 숙제에 대해서. 긴장한 건 오히려 나여서 석훈이 몇 번이고 내 등을 쓰다듬으며 괜찮다는 말을 건네기도 했다. 

   그날, 야간 퍼레이드까지 다 보고 잘 헤어졌는데, 집에 돌아간 석훈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낮고 작은 목소리로 혜원이에게 들은 말을 전했다. 아빠한테는 여자친구가 필요하겠지만 자기는 새엄마가 필요 없다, 했다는 것이다. 혜원이가 또래보다 성숙하고 똑똑한 아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는 어쩔 수 없이 섬뜩한 느낌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혜원의 첫인상이 되었다.

   그럴수록 석훈은 혜원과 내가 함께 만나는 자리를 자주 만들었다. 셋이서 함께 외식을 하거나 근교로 드라이브를 나갔다. 미술관과 박물관에도 다녔고, 놀이동산과 워터파크도 종종 들락거렸다. 캠핑이나 해외여행에 동행하는 것도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을 무렵, 석훈은 일주일에 한 번씩 나의 집으로 퇴근을 했다. 혜원이 중학생이 되면서였고, 목요일마다였다. 혜원과 합의된 사항이라고 했다. 뭐라고 허락받았느냐고 물으니, 아빠도 아빠의 사생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혜원이의 반응은?”

   “인정.”

   무슨 뜻인지 몰라 되물으니, 인정! 그 한 마디만 했다는 것이다. 혜원다웠다. 

   이해가 빠르고 총명한 데다 예의도 바른 혜원이었다. 혜원의 엄마가 세상을 뜨면서 혜원은 친할머니 손에 맡겨졌다. 친할머니는 보통 분이 아니어서 좋은 학원이나 유명한 선생이 있다면 거기가 어디든 자기가 직접 운전해 혜원이가 배울 수 있게 스케줄을 짰고, 속옷을 제외한 모든 옷은 손수 다 다려 입혔으며, 당연히 갓 지은 밥 아니면 먹이질 않았다. 

   친할머니의 극진한 사랑에 혜원은 구김살이나 꼬인 데 없이, 상실감이나 열등감이 전혀  없는 아이로 자랐다. 그러나 그 모든 것- 단점이 하나도 없는 아이로 보이는 것이 혜원의 단점이 되고 말았다. 마치 할머니가 설정한 모습대로 연기하는 느낌. 그래서 나는 혜원이 안쓰러웠다. 혜원의 엄마가 되기를 바라지는 않았지만 혜원에게 좋은 여자 어른이 되고 싶었다. 친할머니만큼 혜원을 위하거나 사랑할 수는 없겠지만 그런 방법 말고 다른 방법으로의 이해와 사랑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혜원이 싫다고 말했을 때 당황한 건 오히려 나였다. 혜원이 원하지 않는 일을 굳이 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고 정말 그렇게 생각했는데, 정작 아니라는 대답을 할 줄은 몰랐다. 혜원은 그게 뭐 별거냐는 듯 해맑은 표정이었다.  

   “저는 아줌마라면 제 입장을 이해할 거라 생각해요.”

   “그럼. 이해해.”

   “아빠도 그렇지?”

   석훈은 나와 혜원을 번갈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혜원은 남은 티라미수의 마지막 조각을 깨끗하게 먹어치우고선 배가 부르다며,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그건 나만의 욕심이었다. 헤어질 때의 혜원은 깍듯하게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이제껏 단 한 번도 예의에 어긋난 적이 없는 혜원다운 인사였다. 그러나 나는 직감했다. 내가 사준 투피스와 코트는 나를 만날 때나 입을 거라는 걸. 내가 사준 구두도 나를 만날 때나 신을 거라는 걸. 혜원이가 들고 있는 쇼핑백에는 석훈이 사준 새 가방이 담겨 있었다. 석훈은 내가 계산한 투피스와 코트, 구두가 담긴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 나는 예민한 편이었지만 그걸 아는 척할 수 없었다.


   다음날인 크리스마스이브에는 독립한 후 처음으로 엄마네서 보냈다. 피자와 치킨을 거실 한쪽에 펼쳐 두고, 초등 1학년과 3학년 두 조카들과 하루 종일 뒹굴었다. 해가 질 무렵 나는 동생을 등 떠밀어 내보냈다. 엄마가 병원에 다니기 시작한 뒤로 제대로 데이트 한 번 못 했을 것이 뻔했다. 

   혜원과 스키장에 다녀왔다는 석훈은 매일 전화를 걸어 나와 엄마의 안위를 물었지만 혜원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석훈이 혜원에게 내 인생이니 네가 가타부타할 사항이 아니다, 라고 하지 않는 이상, 나와 석훈이 함께 사는 일은 이제 불가능한 일이었다. 성인 자식이라는 건 그런 걸까. 자신의 인생마저도 동의와 합의로 결정해야 하는 일인가. 나는 석훈에게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엄마의 검사 결과를 목전에 두고 그런 일로 고민하는 내 자신이 면구스럽기 때문이었다. 아니, 석훈에게 내가 어떻게 보일지 더 걱정이 되었는지도 몰랐다.


*


   크리스마스 연휴가 끝난 26일 화요일. 주간 회의가 끝나 갈 무렵 동생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신규가맹점 희망자 모집전형의 수정사항을 검토하고 내년 일정 조율을 막 마친 참이었다. 나는 서 과장에게 미리 이야기를 해놓은 터라 눈짓으로 허락을 받고 회의실을 나섰다. 전화는 끊겼고, 나는 옥상 휴게실에서 동생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동생이 다짜고짜 울기 시작했다. 

   ㅡ 뭐라는데?

   동생은 대답을 못 하고 울기만 했다. 나는 다그쳤다. 의사가 뭐라는데! 

   직장암은 말기. 수술은 현재 어려운 상태. 간과 폐에도 전이된 상태. 특히 폐는 여러 군데인 데다 크기도 커서 역시 수술은 불가능하다.

   ㅡ 손도 못 쓴다는 거야?

   ㅡ 의사 말로는 방사선 하고, 항암으로 크기를 좀 줄여 보재.

   ㅡ 그러니까 뭐야, 치료는 가능하다는 거야?

   동생은 또다시 울기 시작했다. 무슨 일만 생기면 눈물부터 흘리는 것이 동생의 오랜 습성이라는 걸 알았지만 저 가볍고 흔해 빠진 울음 때문에 될 일도 안 될 것 같았다. 

   ㅡ 그만 좀 울어. 방법은 있다는 건데, 왜? 

   ㅡ 언니. 내가 의사를 따로 만났어.

   동생 말로는 수술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아버지와 엄마는 모르는 사실이라며 울음 섞인 숨을 겨우 참고서 덧붙였다. 

   ㅡ 항암 치료가 잘 되어도 2년을 넘기기 힘들 거 같대. 더 일찍 돌아가실 수도 있고. 천천히 준비하라는데, 어떡해, 언니. 우리 엄마 어떡해.

   하아-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ㅡ 아버지한테는 말했어?

   ㅡ 아니, 아직. 

   ㅡ 그래, 일단 좀 보자. 

   나는 그 자리에서 담배를 연거푸 세 개비를 피웠다. 수술은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냥 둘 수도 없으니 항암은 하겠는데 의미는 없다는 것. 그렇다는데 내가 뭐. 나라고 뭐. 그저 받아들여야 하는 사실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허망했다. 

   그사이 서 과장이 올라와 내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불은 붙이지 않은 채 괜찮으냐고 물었다.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요.”

   나는 동생이 전한 2년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서 과장의 아버지는 발병 4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치료 받으신다 하셔?”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나는 서 과장을 빤히 쳐다봤다. 

   “자식 입장에서는 받지 말라고 하기 힘들지. 그런데 잘 생각해. 어떤 게 어머니를 위하는 것인지. 병원에서 고생만 하다 돌아가시는 게 최선이 아닐 수도 있어. 마지막에는 남은 식구들도 진 다 빠지고. 우리 아버지 그렇게 보내고 나니까 생각이 많아지더라고.”

   “그렇다고 아픈 분을 그냥 둘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물어 봤잖아. 어머니가 직접 치료 받으시겠다고 말하셨냐고.” 

   그건 아니지만. 대답하려는 차에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들어왔다. 서 과장은 전화를 받으라는 손짓을 하며, 입에 물었던 담배에 불도 안 붙인 채 그대로 옥상에서 내려갔다. 아버지 목소리는 콱 잠겨 있었다. 

   ㅡ 네 동생 전화 받았지?

   네. 나는 한숨소리를 감추지 못했다. 

   ㅡ 나도 방금 전에 들었다.

   아버지 역시 긴 한숨 끝에 말을 이었다. 은수야. 아버지가 천천히 내 이름을 불렀다. 

   ㅡ 의사가 말이다. 집에 가서 맛있는 거나 먹으면서 재미있는 영화나 보세요, 하면 네 알겠습니다 하려고 했는데. 방사선이니 항암이니 뭐든 하자고 하는데, 안 하겠다고, 못 하겠다고 할 수는 없는 거다.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나는 단번에 알아들었다. 그럼요. 나는 아버지 의견에 동의했다. 당연히 그래야죠. 아버지는 다른 때보다 더 단정한 어조로 고맙다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담배를 하나 더 피우고 옥상을 내려가려는데 이번엔 오빠 전화였다.

   ㅡ 어차피 돌아가실 거.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전화를 끊었다. 식구들이 저 살리느라 있는 돈 없는 돈 다 긁어모아 줬더니, 어차피 돌아가실 거? 지금 그런 말이 나와? 너는 안 죽을 거 같니? 개새끼. 나는 그 말을 면전에 직접 해주지 못한 걸 두고두고 후회했다.


   방사선 치료를 시작하기로 한 전날, 모두 엄마네로 모였다. 새해 첫날이었다. 온 식구들이 떡국을 먹고 거실에 모여 앉았다. 아버지와 엄마, 오빠 내외와 중학생 큰조카, 나와 동생, 초등학생 작은 조카들 두 명. 스무여 평 주공 아파트가 비좁았다. 거실 창에 뽀얗게 습기가 차올랐다. 한 며칠 푹하더니 다시 추워질 기미였다. 나는 내가 사간 샤인머스켓과 딸기, 배와 사과를 준비해서 엄마 쪽으로 내밀었다. 오빠가 엄마에게 물었다. 

   “아프기도 해?”

   “그럼. 안 아플까 봐?”

   “어디가 아프신데?”

   “직장암이니까 똥구멍이 아프지!”

   똥구멍이라는 말에 작은 조카들이 킬킬거렸고, 그 소리에 큰조카가 억지로 웃음을 참다가 기침이 터졌다.  

   “이상하게 화장실 자주 간다 할 때 알아봤어. 지난번에 같이 밥 먹으러 갔을 때······.”

   올케 언니가 오빠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눈치가 없는 건지 눈치 없는 척을 하는 건지 오빠는 그러거나 말거나 자기 말을 이어 갔다. 모처럼 아버지와 엄마 모시고 중국집에 갔는데 짜장면 한 그릇 먹는 동안 화장실에 다섯 번이나 왔다 갔다 했다는 것이다.

   “그때는 소화 잘 돼서 좋겠다고, 평생 변비는 없을 거라고 칭찬하고선?”

   “아, 그럼 면전에서 왜 그렇게 똥 많이 싸냐고 뭐라 해?”

   “싼다가 뭐냐, 눈다고 해야지.”

  엄마가 머쓱한 지 말 끝을 흐렸다. 하, 참. 나와 동생, 올케 언니가 오빠를 타박했지만 오빠는 샤인머스켓을 우두둑 따다가 한꺼번에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알아보니까 암환자 등록하면 병원비가 싸다고 하대.”

   “오빠가 돈 걱정할 입장은 아니지 않아?”

   내가 한마디 하자 올케 언니가 고개를 숙였다. 오빠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대답했다. 

   “없는 집이니까 돈부터 걱정하는 거야. 있으면 뭘 걱정하겠냐고.”

   큰조카가 슬그머니 안방으로 들어가며 문을 닫았다. 초등생 조카 둘이 쪼르르 큰조카를 뒤따라 들어갔다. 

   “나쁜 새끼.”

   엄마가 끙, 소리를 내며 조카들이 있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아버지는 아무 말도 없이 소리를 죽인 거실 텔레비전만 쳐다봤다. 오빠와 올케 언니, 나와 동생도 아무 말 없이 아버지를 따라 텔레비전을 보았다. 보험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텔레비전에서 눈도 안 떼던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노인들 치매, 암 보험. 내 이름으로 하나 들어 놔라.”

   올케 언니가 네- 하고 대답했다. 내가 얼른 아니라고, 내가 가입하겠다고 올케 언니를 만류했다. 그러자 오빠가 올케 언니에게 툭 내뱉었다. 

   “들었지? 은수가 하게 둬.”

   누군지 혀 차는 소리가 들렸는데 안방의 엄마인지, 텔레비전에서 눈을 안 떼던 아버지인지 알 수 없었다.

   그날 정해진 몇 가지가 있었다. 비용 때문이라도 간병은 사람을 쓰지 않고 아버지가 직접 한다. 병원비는 세 남매와 부모님까지 네 집이 1/4씩 담당한다. 혹시 병원비 감당이 불가능하게 되면 아버지와 엄마가 살고 있는, 그들의 유일한 재산인 주공 아파트를 판다. 그런데 팔기 전에 오빠는 식구들에게 진 빚을 다 갚는다. 또한 엄마의 바람대로 엄마의 지금 이 상황을 다른 친척들에게는 알리지 않는다. 

   오빠가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하루아침에 어떻게 4억을 다 갚느냐고, 기어이 자식 신불자 만들고 싶으냐고, 자식 취급 안 하기로 작정했냐며 그대로 집을 나가버렸다. 올케 언니만 죄인처럼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숙였고,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어쩔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 하다 말았다. 결국 아버지 치매 보험과 암 보험은 내가, 동생은 엄마 치료 전후로 보양식을 맡기로 했다. 아버지 건강도 신경 써야 했다. 엄마뿐만이 아니라 아버지도 지난번 봤을 때보다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올케 언니와 나, 큰조카가 집을 나서는데 동생이 배웅하겠다고 같이 신발을 신었다. 엄마가 현관 앞에서 우리를 향해 한마디 했다. 표정이 나쁘지 않았다. 

   “엄마 치료 잘 받을게. 씩씩하게 잘할게. 걱정 마.”

   우리가 치료 잘 받으라고 말하기도 전에 엄마가 먼저 자기의 의지를 드러내는 말을 해버려서 우리는 머쓱하게 웃었다. 큰조카가 덥석 할머니를 안자 작은 조카애들도 큰조카를 따라 할머니를 안았다. 여하튼 웃으면서 헤어졌다. 그뒤로 오빠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나쁜 새끼. 나와 동생은 통화할 때마다 오빠 욕을 했다. 


*


   석훈이 여행 이야기를 꺼낸 건 엄마가 처음 방사선 치료를 받은 날이었다. 지지난 밤, 그러니까 1월 1일 0시에 맞춰 술집에 들어가 주민등록증을 보여주고 술을 마셨다는 혜원 이야기로 운을 떼더니, 석훈은 혜원이 입학하기 전에 가기로 한 여행을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만에 가고 싶은 나의 바람은 다음으로 미루고, 혜원이 가고 싶다던 호주로 급하게 바꾼 계획이었다. 항공권만 예약을 마친 상태인데 어떡할까- 라고 말끝을 흐렸다. 계획대로 너도 갈 수 있느냐, 아니면 네 좌석은 취소하느냐,를 묻는 것이었다. 차마 넌 못 가지? 라고는 못 묻고. 

   엄마의 상태나 치료 정도를 보았을 때 당장 어떻게 되는 건 아닐 터였다. 오빠 말대로 어차피 돌아가시겠지만 그 또한 오늘 내일은 아닐 터였다. 이달 내달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픈 엄마를 두고 여행을 떠나는 것이, 그것도 해외로, 그것도 내 가족이 아닌 남의 가족과 함께, 설사 나에게는 가족과 같은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진짜 가족은 아파서 병원을 매일 들락거리는데. 그건 아니었다. 설사 나는 괜찮다 해도, 엄마가 괜찮다고 해도, 석훈에게 그런 사람처럼 보이고 싶진 않았다. 그게 사실 가장 큰 이유였다. 

   ㅡ 둘이 다녀와.

   ㅡ 미안해서 어쩌지?

   ㅡ 뭐가 미안해. 모처럼 부녀가 오붓하게. 더 좋겠다.

   석훈은 뜸 들이지 않고, 이해해 줘서 고맙다고 했다. 그건 이해의 문제가 아니었는데. 그래서 나도 혜원이 좋아하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통화 중에 혜원의 이름을 꺼내지 않았다. 그걸 석훈도 모를 리 없었다. 석훈과 나 사이에 서로 감추고 있던 각각의 공간이 커진 것 같았다. 공간이 아니라면 공기, 혹은 둘 사이에 익숙했던 서로의 그림자가 변한 것 같았다.


   나흘간 방사선 치료를 마치고, 주말을 쉰 다음 월요일부터 항암치료에 들어간 엄마는 자궁암으로 항암 치료를 받던 30년 전과 비교하며 세상 참 좋아졌다는 말을 계속했다. 

   ㅡ 쇄골? 거기에 무슨 칩인가? 아무튼 그런 걸 심네. 거기에 주사바늘을 꽂더라고.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니 케모포트 삽입술이라고 했다. 3박 4일 동안 첫 항암 주사를 맞고 퇴원한 엄마는 다행히 부작용은 없다고 했다. 항암 주사는 한 달에 두 번씩, 11개월을 맞아야 한다고 했고, 두 번째 주사를 맞은 후부터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가는데도 갈 때마다 엄마는 다른 사람처럼 살이 내리고, 머리카락이 푹푹 빠져 세 번째 항암 주사를 맞을 때는 거의 민머리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실내용 면 모자와 외출용 니트 모자를 세 개씩 샀다. 

   세 번째 항암을 마칠 무렵은 구정 전이어서 식구들은 모이지 않았다. 엄마가 번잡하다고 오지 말라고 했다.

   ㅡ 힘들어, 엄마? 목소리가 안 좋네?

   항암 주사를 맞을 때마다 밥도 잘 먹고, 토하지도 않는다면서 어린아이가 엄마에게 하루 일과를 보고하듯이 씩씩하게 말하던 엄마가 그날따라 심상치 않았다. 

   ㅡ 근데, 이상해.

   ㅡ 뭐가?

   ㅡ 왜 수술하자는 말은 안 하는지 모르겠다. 언제쯤 하자는 말을 할 법도 한데.

   ㅡ 암 세포 사이즈 줄면 하자고 했다면서. 기다려 봐.

   ㅡ 다음 병원 들어갈 때 물어 봐야겠어.

   나는 더 이상 뭐라 대꾸할 수 없어서 아빠는 어디 갔느냐고 물었다. 

   ㅡ 응, 갑갑해 하길래 한 바퀴 걷다 들어오라고 했지.

   나는 통화할 때마다 매번 먹고 싶은 건 없는지, 필요한 건 없는지, 그런 것만  묻고 또 물었다. 언제까지 그런 맥없는 것만 물을 수 있을까. 그래도 되는 걸까. 언제쯤 엄마에게 신변을 정리하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엄마 스스로 죽음을 받아들이라고, 엄마의 생을 되돌아보고, 남길 것과 버릴 것을 구분하라고, 먹을 수 있을 때 뭐든 먹어 두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 하고 싶은 게 남아 있다면, 그게 아직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서둘러서 해보라는 말을 건넬 수는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가슴이 바늘에 찔리는 것처럼 아팠지만, 그렇다고 주저앉아 울 수는 없어서 괜히 휴게실만 들락거리기만 했다. 

  

   엄마가 항암 주사를 맞는 두 달 동안, 석훈은 변함없이 목요일마다 집으로 왔다. 같이 저녁을 먹고, 일주일 동안 있었던 일을 이야기 나누다가, 앉아 있던 자리에서 그대로 포로록 잠이 들곤 했다. 거기가 소파이기도 했고, 바닥의 러그 위나 침대, 가끔은 식탁의자에 앉아 식탁에 엎드린 채 잠들기도 했다. 목요일마다 만나는 건 똑같았지만 나와 석훈은 서로 마주 보는 시간이 줄었고, 대화시간이 짧아졌으며, 같이 자는 일도 드물어졌다. 나는 쉽게 피로해지곤 했다.


   엄마가 아프다고 해서 하루 종일 엄마 생각만 하고 살 수는 없듯이, 일상은 일상대로 흘러 갔다. 월요일에는 주간 회의를 해야 했고, 화요일에는 가맹 희망자 면접을 했으며, 수요일에는 일상 업무와 퇴근 후 요가, 목요일에는 석훈을 만났고, 금요일에는 엄마를 만나러 갔다. 토요일 오전에는 밀린 집안일, 오후에는 운동을 했다. 일요일에는 도서관에 다녀오고, 오는 길에는 칼국수나 돈가스로 점심을 해결하고 저녁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월급은 제 날짜 제 시간이면 정확히 들어왔고, 나의 몸무게는 1킬로그램의 편차를 유지했으며 매일 엄마 아니면 아버지와 통화를 했다. 동생과는 하루에 두어 번 통화를 하고 수시로 카톡을 나눴다. 동생과 내가 원래 이렇게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는데, 엄마가 아프면서 다소 과장되게 친해진 척을 하는 중이었는데 그게 나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나는 여전히 잘살고 있었다. 

   가끔, 석훈이 엄마의 안위를 확인하듯 물어 볼 때는 슬프기도 했다. 아니, 슬퍼야 할 것 같아서 슬픈 척을 하기도 했다. 굳이 석훈의 죽은 아내를 화제에 올리지는 않았지만 석훈은 언제나 죽은 아내를 암 환자의 표본으로 삼았다. 여전히 암 환자 가족으로서 당사자성을 고스란히 유지했다. 

   약마다 다르고 환자마다 다르게 반응을 하는데, 그쯤 되면 이제 소화가 안 돼서 식사를 잘 못하게 되실 거야. 머리카락은 다시 나기 힘들지 않을까, 아마 마지막까지 계속 항암을 하실 테니까. 어머니에게 본인이 어떤 상황인지는 알려드렸어? 살이 빠지기 시작하면 식구들이 준비에 들어가야 할 거고. 글쎄, 그건 잘 모르겠다, 우리 때와는 달라서 요즘은 약이 좋아졌을 테니까······ 라고 말을 흐렸을 때의 석훈은 여지없이 혜원 엄마의 남편이었다. 

   알고 있지? 식구들이 지치면 어머니가 더 힘들어.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오고 말았는데, 그 말은 내가 석훈이에게 가장 많이 했던 말들 중에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가 용서할 수 없는 건 다른 것이었는데 석훈은 못 알아차린 것 같았다. 

   나는 어디에서든, 누구에게든, 석훈과 나를, 우리라고 표현한 적이 없었다. 


*


   봄이 시작되면서 엄마는 눈에 띄게 외관이 달라졌다. 살이 훅 꺼졌고, 눈빛이 흐려졌다. 식욕을 잃고 하루의 대부분을 누워 지냈다. 통증도 심해져 마약성 진통제인 액틱 구강정을 하루 한 개에서 두 개, 세 개까지도 물고 있는 날이 늘어갔다. 입맛이 없어도 끼니를 거르지 않으려고, 하다못해 죽이나 끓인 밥이라도 넘기려고 애썼다. 닭발곰탕이나 고기사탕, 추어탕과 고기국을 연신 들이미는 동생과 비위에 맞지 않는데도 어떻게든 먹어보려고 끙끙거리는 엄마를 보면, 뭐라 설명할 수 없이 애달팠다. 그러니까 죽을 날을 위해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서 과장은 엄마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엄마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리라고 닦달했다. 서 과장의 친정아버지가 끝까지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아무것도 정리하지 않고 그냥 죽어버려 남은 가족들이 사후 처리를 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몇 번이고 반복해서 설명했다. 서 과장이 나를 얼마나 염려하는지 너무 잘 알았지만 나는 때때로 너무 잔인한 친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는 아버지를 들볶는 모양이었다. 2년도 못 살 사람에게 들어갈 병원비가 아깝지 않으냐며 지금 병원비로 가진 돈 다 쓰면 자식들에게 나눠줄 돈은 고사하고, 나중에 아버지 죽을 때까지 어떻게 살 것이냐는 논리를 펼쳤다. 제 성질에 제가 먼저 연락을 끊었다가 제 할 말이 생각나면 아무 때나 전화를 걸어 아버지를 뒤흔들었다. 언젠가부터는 올케 언니도 큰조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가족이 돈으로밖에 안 보이는 사람은 어떻게 망해야 될까. 가끔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나도 벌을 받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픈 아내를 둔 석훈을 흔들고, 나에게 위안을 받으라고 손짓했으니까. 그래 벌을 받으라면 받겠는데, 어쩐지 내가 받아야 할 벌을 엄마가 대신 받는 것 같아서 엄마를 볼 때마다 고해성사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진작 종교라도 가질 걸 하는 밑도 끝도 없는 후회를 하는 나날도 있었고. 

   프랜차이즈 본사 갑질 문제가 터진 건 3월 말이었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는데 어쩐지 이번에 여론이 더 좋지 않았다. 본사에서 운영하는 세 개의 프랜차이즈 가맹점주들이 연합해 단체 행동에 나선 것이었다. 본사 계열사인 유통업체를 이용해 부당하게 폭리를 취하고 있다면서 국세청의 세무조사를 촉구하고, 결과에 따라 공정거래위원회에 고발하겠다고 난리였다. 부당한 계약을 강요했다, 필수 구매품목을 지정했다, 과중한 프로모션 비용을 부담시켰다는 의혹까지 포털 뉴스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통상, 업계 표준 계약서를 따르던 본사는 발칵 뒤집어졌다. 왜 하필 우리냐는 것. 전 부서가 비상체제에 들어갔고 누구 하나 제 시간에 퇴근할 수 없었다. 

   목요일마다 오던 석훈은 이제 올 수 없었다. 내가 제 시간에 퇴근하지 못하니 빈집에 석훈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게 할 필요가 없었다. 혜원은 신입생 생활을 즐겁게 한다고 했다. 나는 궁금하지 않았는데 석훈이 가끔 소식을 전했다. 십여 년이 넘도록 애틋하고 예쁘고 살가웠던, 그래서 마음껏 살피고 싶던 사람에게 마음을 접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스무 살, 이제 어른이 되었으니 나 같은 건 기억에 남겨 놓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석훈도 마찬가지겠지. 언제든 또 그자기를 동정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석훈은 마음 편히 기대면 될 것이다. 나는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회사 일에 전념했다. 


   동생에게서 전화가 걸려 온 건 점심 시간이었다. 진작 5월이었고, 조금만 걸어도 땀이 맺히는 날씨였다. 그날은 올 해 들어 처음으로 반소매 원피스를 입은 날이었다. 나는 여보세요, 라고 받지 않고 무슨 일 있어? 라고 첫마디를 뗐다. 

   ㅡ 요즘 많이 바쁘지?

   동생의 목소리가 심상하지 않았다. 

   ㅡ 뉴스로 봤어. 복잡해 보이더라. 

   나는 식당 앞에서 동행에게 먼저 들어가라는 손짓을 하며 육개장을 주문해 달라고 입 모양으로 말했다. 그러고는 식당 건물과 옆 건물 사이로 들어가 담배를 물었다. 나는 아직 정신없이 바쁘다고 앓는 소리를 했다. 말미에 다시 또 물었다. 무슨 일 있어?

   ㅡ 아니, 언니가 엄마 보러 온 지 너무 오래되어서.

   ㅡ 엄마가 기다려?

   ㅡ 그건 아닌데, 언니가 한번 왔으면 싶어서. 

   ㅡ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동생이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전화가 끊겼나 싶어, 여보세요? 라고 동생을 불렀다. 동생이 불쑥 대꾸했다.   

   ㅡ 엄마가 아픈 거 말고 더 큰일이 있어야 해? 

   동생은 할 말을 다 했다는 듯이 전화를 뚝 끊었다. 길게 타들어간 담뱃재가 툭 떨어지며 남색 원피스의 가슴팍에 허연 자국을 만들었다. 곧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엄마였다. 부디 놀라지 않을 소식이었으면. 핸드폰 소리가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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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01
원경

원경 성혜령 건강검진을 12월 마지막 주까지 미루는 사람이 자기 말고도 이렇게 많으리라고 신오는 생각하지 못했다. 대기실의 긴 좌석 중간중간 빈자리가 있긴 했지만, 신오는 한구석에 서 있기로 했다. 초음파 검사실 앞 복도는 자기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며 서성이고 있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헐렁한 가운에 느슨한 고무줄 바지를 입고 핸드폰을 보며 기다림을 견디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신오는 이들 중 내년에는 따뜻한 휴양지에서 연말을 보낼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지 궁금했다. 혹은, 오늘 치명적인 암이나 뇌동맥류 같은 것들을 발견하고 전혀 예상치 못한 인생을 살게 될 사람들은? 그런 일들은 언제나 일어나고 있었다. 직장 생활을 10년 정도 하니 주위에 아픈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전 직장 동료는 출근길에 쓰러진 뒤 안면마비를 얻었다. 한쪽 입꼬리가 위로 당겨 올라갔는데 그는 멀쩡한 다른 쪽 입꼬리도 끌어올려 웃는 얼굴을 만들곤 했다. 병가에서 돌아온 뒤 매일 웃는 얼굴로 제일 먼저 출근하는 동료를 보면서 신오는 이직을 결심했다. 신오는 모든 일이 가능하지만 대개 나쁜 일들이 더 자주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되도록 좋은 음식을 먹고 운동을 꾸준히 하려고 했다. 불행은 대비하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게 오히려 쉽게 다가오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도 있었다. 복부 초음파를 보던 의사가 “어랏?” 하고 실없는 소리를 내며 배꼽 부근을 세게 눌렀을 때도 신오는 방귀가 나올 것 같다는 생각뿐이었다. 의사가 차가운 젤을 다시 묻히고 초음파 단말기를 문지르다가 복막에 종양이 보인다는 말을 했을 때는, 그래서 요새 변비가 심했나, 라는 생각이 먼저 났다. 대형 병원에 가서 생검과 CT, MRI 검사를 마치고 소화기내과 교수의 진료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도 신오는 회사 메신저를 보고 있었다. 몇십 억 단위 공공사업의 수주가 걸린 입찰 제안서의 마무리를 앞둔 시점이었다. 병원 검사로 연차를 낸다고 했을 때 팀원들은 모두 별일 없을 거라고, 하루 푹 쉬고 오라고 말했지만 메시지를 보내면서 신오를 계속 태그했다. 신오는 그날 마지막으로 진료실에 들어갔다. 의사는 젊고 피곤해 보였다. 예약을 가장 빨리할 수 있었던 의사였으니 어쩔 수 없지, 신오는 생각했다. 의사는 신오가 자리에 앉자 간단한 인사도 없이 모니터 화면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마우스 커서로 신오는 잘 알아볼 수 없는 흐릿한 음영을 짚었다. 여기예요, 여기. 의사는 약간의 승리감마저 느껴지는 말투로 말했다. 복막의 종양은 전이 암이고, 여기가 원발 암이라고. “이게 숨어 있어서 찾기 어려웠거든요.” 의사는 다시 한번 마우스 커서를 움직였다. 췌장하고 담도 사이인데 위치나 크기가 좋지 않다고. 오늘이 금요일이니 당장 다음 주부터 항암치료로 크기를 줄여 보고 수술을 잡아 보자고. 신오의 핸드폰이 또 진동했다. 신오는 치료를 이주만 미뤄도 되냐고 물었다. 프로젝트가 있어서요. 이주 후에 마감이라. 의사는 처음으로 웃어 보

  • 관리자
  • 2024-05-01
야생 식물원

야생 식물원 하가람 식물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다이아몬드 모양의 철골로 둘러싸인 거대한 유리 온실에는 열대와 지중해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이국적인 식물이 자란다고 했다. 한 달 전 나는 식물원 근처에 있는 여러 호텔을 찾아 은규에게 링크를 보냈다. 보통 때의 그라면 어디든 좋다고 했을 것이다. 레스토랑도, 카페도, 동네의 작은 아이스크림 가게조차도 모조리 내 선택에 맡기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날 은규는 이미 예약한 곳이 있다고 하여 나를 놀라게 했다. 은규가 보내 준 링크를 열어 보았다. 넓은 통유리 창 너머로 식물원과 공원이 내다보이는 스위트룸이었다. 나는 조금 들뜬 채 답장했다. — 우리가 만난 지 곧 1년이래. 믿어져? 1년이라는 시간은 내게 유별났고 은규에게는 별다른 감흥이 없는 것이었다. 그가 전에 사귄 여자친구는 단 두 명인데 각각 4년, 5년을 만났다고 했다. 매번 석 달도 채 넘기지 못하는 나와는 달랐다. 이따금 은규에게 이전 연인들에 대해 물었다. 그들이 어떤 성향의 사람이었고 어떤 외양을 가졌는지 궁금했다. 처음에는 응응, 하며 대꾸해 주던 은규는 내가 그녀들의 음악 취향이나 살던 동네처럼 구체적인 정보까지 캐묻자 태도를 바꾸었다. 기억 안 나. 그는 말했다. 다 옛날이야기라고. 그 후로는 이전에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그녀들을 생각했다. 눈, 손톱, 말투, 그리고 신발. 나와 닮았을지, 닮았다면 얼마나 닮았고 다르다면 무엇이 다를지도. 상상을 이어 가다 보면 늘 한 가지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은규는 한 번도 애인과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까 여자와 밤을 보내는 일이 오늘 그에게는 처음이었다. 서른을 넘긴 남성에게서 보기 드문 경우였지만 그가 처음인 게 좋았다. 그 점이 무엇보다도 나와 그녀들을 구분 지어 주는 것만 같았다. 차창에 머리를 기대었다. 햇볕에 데워진 창문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인터넷으로 보았던 화려한 꽃과 기다란 나무들을 떠올렸다. 노랗고 푸르고 분홍빛이 맴도는 공간을. 여름 휴가철이었고 도로는 차들로 빽빽했다. 졸음 껌을 씹는 은규를 보며 말했다. “오늘은 내가 운전하고 싶었는데.” “다음에. 너 힘들어.” 은규가 말했지만 나는 안다.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그는 내게 차를 맡기지 않을 것이다. “보면 놀랄걸? 너무 잘해서?” 나는 허리를 세운 채 한 손으로 반원을 그려 보았다. 휙휙. 입으로 소리 내며 운전대를 쥔 그를 따라 했다. 그가 웃었다. 머릿속으로 주행하기. 그것은 나만의 놀이였다. 캠퍼스 변두리에 있는 H관 1층, 5평 남짓한 주차관리실에서 상상력을 충족시켜 줄 만한 것은 많지 않았다. 먼지 쌓인 커피믹스와 낡은 소파, 책상 위에 시간별로 놓여 있는 분홍색, 파란색, 노란색 주차권들. 지겨운 서류, 서류, 서류. 드물게 실장이 자리를 지키는 날이 아니면 대체로 혼자 그곳에서 일했다. 사람들이 찾아와 주차권을 사거나 정기 등록을 마친 후 돌아가면 나는 모니터에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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