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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 식물원

  • 작성일 2024-05-01
  • 조회수 941

   야생 식물원


하가람


   식물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다이아몬드 모양의 철골로 둘러싸인 거대한 유리 온실에는 열대와 지중해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이국적인 식물이 자란다고 했다. 한 달 전 나는 식물원 근처에 있는 여러 호텔을 찾아 은규에게 링크를 보냈다. 보통 때의 그라면 어디든 좋다고 했을 것이다. 레스토랑도, 카페도, 동네의 작은 아이스크림 가게조차도 모조리 내 선택에 맡기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날 은규는 이미 예약한 곳이 있다고 하여 나를 놀라게 했다. 은규가 보내 준 링크를 열어 보았다. 넓은 통유리 창 너머로 식물원과 공원이 내다보이는 스위트룸이었다. 나는 조금 들뜬 채 답장했다.

   — 우리가 만난 지 곧 1년이래. 믿어져?

   1년이라는 시간은 내게 유별났고 은규에게는 별다른 감흥이 없는 것이었다. 그가 전에 사귄 여자친구는 단 두 명인데 각각 4년, 5년을 만났다고 했다. 매번 석 달도 채 넘기지 못하는 나와는 달랐다. 이따금 은규에게 이전 연인들에 대해 물었다. 그들이 어떤 성향의 사람이었고 어떤 외양을 가졌는지 궁금했다. 처음에는 응응, 하며 대꾸해 주던 은규는 내가 그녀들의 음악 취향이나 살던 동네처럼 구체적인 정보까지 캐묻자 태도를 바꾸었다. 기억 안 나. 그는 말했다. 다 옛날이야기라고.

   그 후로는 이전에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그녀들을 생각했다. 눈, 손톱, 말투, 그리고 신발. 나와 닮았을지, 닮았다면 얼마나 닮았고 다르다면 무엇이 다를지도. 상상을 이어 가다 보면 늘 한 가지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은규는 한 번도 애인과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까 여자와 밤을 보내는 일이 오늘 그에게는 처음이었다. 서른을 넘긴 남성에게서 보기 드문 경우였지만 그가 처음인 게 좋았다. 그 점이 무엇보다도 나와 그녀들을 구분 지어 주는 것만 같았다. 차창에 머리를 기대었다. 햇볕에 데워진 창문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인터넷으로 보았던 화려한 꽃과 기다란 나무들을 떠올렸다. 노랗고 푸르고 분홍빛이 맴도는 공간을. 

   여름 휴가철이었고 도로는 차들로 빽빽했다. 졸음 껌을 씹는 은규를 보며 말했다.

   “오늘은 내가 운전하고 싶었는데.”

   “다음에. 너 힘들어.”

   은규가 말했지만 나는 안다.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그는 내게 차를 맡기지 않을 것이다.

   “보면 놀랄걸? 너무 잘해서?”

   나는 허리를 세운 채 한 손으로 반원을 그려 보았다. 휙휙. 입으로 소리 내며 운전대를 쥔 그를 따라 했다. 그가 웃었다.


   머릿속으로 주행하기. 그것은 나만의 놀이였다. 캠퍼스 변두리에 있는 H관 1층, 5평 남짓한 주차관리실에서 상상력을 충족시켜 줄 만한 것은 많지 않았다. 먼지 쌓인 커피믹스와 낡은 소파, 책상 위에 시간별로 놓여 있는 분홍색, 파란색, 노란색 주차권들. 지겨운 서류, 서류, 서류. 드물게 실장이 자리를 지키는 날이 아니면 대체로 혼자 그곳에서 일했다. 사람들이 찾아와 주차권을 사거나 정기 등록을 마친 후 돌아가면 나는 모니터에 입력된 그들의 차량 정보를 보며 상상에 빠지곤 했다. 십 년째 모닝을 끌고 다니는 수학과 교수. 매끈한 테슬라를 모는 갓 스무 살이 된 남자애. 그 차를 훔쳐 달아나는 나. 백미러에는 흩날리는 머리칼······. 

   출근하면 가장 먼저 신발을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특히 메리 제인을 신고 온 날은 조심히 벗어 사무실에 구비해 둔 상자에 넣어 두었다. 그 구두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 첫 직장을 다닐 때 구매한 신발로, 엄마의 빚을 갚으면서도 조금씩 돈을 모아 마련한 유일한 사치품이기도 했다. 당시 직장 동료가 병행수입 명품을 판매하는 지인을 통해 할인해 주겠다고 귀띔한 덕이었다. 중요한 약속이 있는 날, 메리 제인을 신을 때면 자주 발을 내려다보았다. 직장을 여러 번 옮겨 다니는 동안에도 가죽 스트랩에 박힌 금색 로고는 변함없이 반짝였다. 

   강의가 있는 날에도 메리 제인을 신었다. 점심시간에는 교직원 식당에 사람이 많았고, 위탁 업체에서 일하는 나는 정직원보다 웃돈을 주고 음식을 사 먹어야 했다. 튀김옷만 두꺼운 돈가스나 묽은 카레를 먹는 데 팔천 원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다른 방식으로 그 시간을 즐겼다. H관 5층에는 대형 강의실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매주 두 번 정오부터 <세계문학과 정신분석>이라는 교양 수업이 진행됐다. 오전 내내 시계를 바라보던 나는 정오가 되면 상자에서 메리 제인을 꺼내 신었다. 출석을 모두 부르고 수업이 시작될 때까지는 약 10분. 10분이 지나면 계단을 뛰어올라 강의실 뒷문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맨 끝줄에 앉아 조용히 학생들 속에 섞여들고자 했다. 

   불문과 소속인 중년 교수는 늘 흰 셔츠에 핏이 다른 청바지만 바꾸어 입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목덜미를 살짝 덮는 곧은 단발머리를 한 그녀는 평범한 외양임에도 불구하고 시선을 끌었다. 자연스럽다. 그녀를 처음 봤을 때의 인상은 그랬다. 그리고 차츰 수업을 들으며 그런 자연스러움이 꾸밈에 대한 무신경함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잘 다려진 셔츠와 마른 몸, 맑은 피부와 고운 주름. 그 모든 것은 오히려 노련하게 정제된 아름다움에 가까웠고 나는 종종 연극을 보는 관객처럼 강단에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사로잡는 건 외양뿐만이 아니었다. 몰래 웹툰을 보는 학생의 바람 빠진 웃음소리, 누군가의 하품소리와 콜라 캔 따는 소리, 벽 뒤쪽에 붙은 공기청정기 소리. 강의실 곳곳을 떠도는 작은 소음들 가운데서도 교수의 목소리는 힘을 잃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목소리가 특별히 크다거나 어조가 날카로운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교수의 말투는 따듯한 크림커피처럼 달고 녹진했다. 처음에는 단지 마이크를 쥐고 있어서라고 여겼다. 그 덕에 그녀가 성대에 크게 힘을 주지 않아도, ‘오늘 며칠이더라’ 같은 사소한 혼잣말도 선명히 귀에 들어오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런 단순한 이유일 리는 없었다. 그녀의 나긋한 태도와 적재적소에 단어를 배치할 줄 아는 센스, 상냥하면서도 완고한 화법은 그녀의 외양이 그렇듯 단기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리라. 그보단 좋은 화장품, 균형 잡힌 음식, 유연한 산책과 빼곡한 책장 같은 것들이 긴 세월 동안 차곡차곡 쌓여 만들어진 삶의 총합에 가까울 거라고 나는 짐작했다. 종종 교수에게서 엄마를 겹쳐 보기도 했다. 그렇게 크게 말 안 해도 다 들려. 내가 한쪽 귀를 틀어막기라도 하면 엄마는 그걸 공격으로 받아들였다. 니도 백날천날 공장 다녀 봐라. 기계가 천지빼가린데 이래 안 하고 배기나. 

   점심시간은 고작 1시간이었고 그전에 사무실로 돌아가야 했다. 나는 가져온 메모장에 교수의 말을 최대한 옮겨 적었다. 내게는 시간이 없었고 언제나 손과 귀가 바빴다. 사무실로 내려와 수첩을 펼치면 그녀가 뱉은 말들이 내 서체로 흘려 적혀 있었다. 프로이트와 생소한 작가의 이름. 오트흐, 불어를 귀에 들리는 대로 적어 둔 것. 개중에는 이런 문장도 있었다. 모든 이론을 배우는 이유는 그것을 배반하기 위해서다. 교수는 그 말을 자주 반복했는데 나는 정확히 반대로 구는 셈이었다. 수업을 듣지 않는 날에도 몇 번이고 수첩을 펼쳐 그녀가 썼던 어휘와 문장을 소리 내어 읽어 보았으니까. 한번은 엄마와의 통화에서 교수의 말을 그대로 따라 해 보았다. 엄마, 사람은 저마다 견딜 수 없는 지점을 달리 가지고 있대. 교수는 여기서 한 템포 쉬면서 학생들의 이목을 끌었다. 나도 똑같이 쉬고서 말을 이었다. 근데 그건 그 사람을 가장 고유하게 만드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돌아오는 소리는 ‘뭐? 크게 좀 말해라’. 


   어느 날은 강의실에 들어갔는데 유독 적막이 흘렀다. 기말고사를 치르는 중이었다. 강단에는 교수 대신 한 젊은 남자가 시험 감독을 보고 있었다. 큰 키에 옅은 눈썹, 잡티 하나 없이 흰 피부. 그는 볼보였다. 달에 한 번씩 주차등록을 연장하러 오는 남자. 경영학과 졸업생인 그가 시험 감독을 보는 것이 의아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나는 도로 나가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빈자리에 아무렇게나 앉았다. 그는 내 책상에 시험지를 내려놓았다. 빈 종이를 멀뚱히 보던 나는 떠오르는 것들을 적어 내려갔다. 아마도 엉망진창일 답, 답보다는 잡생각에 가까울 문장들을. 모든 문항의 답을 적었지만 시험지에는 끝내 채울 수 없는 빈칸이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학생들이 하나둘 나가는 동안 나는 펜을 쥐고서 가만히 종이만 바라보았다. 강의실을 돌아다니는 볼보의 신발이 시야에 들어왔다가 멀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는 양말 없이 발목을 훤히 드러낸 채 운동화를 신고 있었는데 신발이 깨끗했다. 꼭 새것 같았다.

   마침내 강의실에 나 혼자 남았을 때 볼보가 시험이 끝났음을 알렸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시험지를 제출했다. 잠시만요. 뒷문을 열자 그가 불러 세웠다.

   “이름을 안 적었네요.”

   전공과 이름을 묻는 말에 이름만 답하고서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내가 나간 후 그는 출석부를 펼쳤을 것이다. 그리고 몇 번이나 찾았겠지. 원경. 원경. 고원경. 어디에도 없을 내 이름을.

   정체가 발각되는 데는 일주일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가 또다시 주차등록을 연장하러 왔기 때문이었다.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하고서 모른 척 그의 이름과 차 번호를 물었다. 이은규요. 그가 답하며 내 쪽을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강의를 몰래 들은 일, 답안지에 적은 엉터리 문장을 그가 알고 있는 게 부끄러웠지만 태연하게 말했다. 카드는 앞쪽에 꽂아 주세요.

   그렇게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그 무렵 사무실에는 에어컨이 부쩍 말썽이었다. 전원을 켜면 듣기 싫은 소음과 함께 더운 공기가 흘러나왔다. 학사운영실에 몇 차례 전화를 걸었지만 네네, 알겠습니다 같은 기계적인 말만 되풀이할 뿐 어떤 수리기사도 불러 주지 않았다. 언젠가 걸려 온 전화에서는 엉뚱하게도 커피 얘기가 나왔다. 휴게실에 있는 커피 머신요. 요즘 원두가 빨리 떨어져서요. 직원의 말을 들으며 누린내가 나는 커피 맛을 떠올렸다. 그게, 교직원만 사용할 수 있거든요. 한 번 마시고 이용하지도 않았지만 내가 뱉을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주의하겠습니다. 그리고 더는 학사운영실에 전화를 걸지 않았다. 그 덕에 종일 창문을 열어젖히고 지내야 했다.

   축축한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책상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창은 H관 건물 뒤편을 향해 나 있었다. 그곳에는 햇빛이 잘 들지 않았고 조경 관리도 이루어지지 않는 듯 잡초와 잔디가 구분 없이 뒤엉켜 자라났다. 덩그러니 놓인 벤치에 낀 초록 이끼는 멀리서 보면 곰팡이 같았다. 넉 달 전 이곳에 입사했을 때, 교수를 처음 본 것도 그 창을 통해서였다. 교수는 아침마다 벤치에 앉아 담배를 태우곤 했다. 한 손에는 늘 책이 들려 있었다. 그녀가 읽는 책의 제목이 못내 궁금했는데, 내가 있는 곳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다. 창을 통해 볼 수 있는 건 그녀의 고고한 자세와 입에서 흘러나오는 희뿌연 담배 연기뿐이었다. 나는 교수가 올 시간에 맞추어 부러 창문을 조금 열어 두곤 했다. 그러면 머지않아 희미하게 냄새가 흘러들었다.

   종강 이후 교수는 벤치를 찾지 않았다. 대신 계절 학기를 듣는 학생들이 이따금 그곳에서 캔 음료를 마시고 돌아가곤 했다. 학생들의 수다는 어떤 날에는 좋아하는 연예인 이야기가 되었다가 어떤 날에는 캠퍼스에 도는 수상한 소문이 되기도 했다. 하루는 한 교수가 제자와 영화관에서 나오는 장면을 보았다고 떠들어댔다. 어떤 흥미도 일지 않는 이야기들. 여러모로 따분한 여름이었다.

   그런 틈에도 은규는 매일 주차관리실을 찾았다. 그는 이미 정기 등록을 해서 필요 없을 주차권을 색깔별로 사거나 때로는 싱거운 말들, 학생회관이 어디 있느냐는 질문 따위를 던지고 사라지고는 했다. 뙤약볕이 내리쬐고 매미소리가 유독 크게 들리던 어느 날에 그는 불현듯 나타나 사무실 책상에 무언가를 내려놓았다.

   “심심할 때 에어컨이라도 쐬러 가요.”

   졸업생 도서관 출입증이라고 적힌 카드에는 아마도 새내기 시절로 보이는 그의 어수룩한 모습이 담겨 있었다. 고개를 들어 땀이 송골송골 맺힌 그의 벌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은규는 멋쩍은 듯 괜찮다며 자신은 어플을 사용하면 되니 가지고 있으라고 했다. 그게 아니라······ 내가 물었다. 

   “목마르지 않아요?”

   그날 저녁 학교 앞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동안 우리 사이에는 많은 말이 오가지 않았다. 그는 내게 수업을 몰래 들은 이유를 묻지 않았고, 나 또한 먼저 변명할 생각이 없었으므로 묘한 긴장감이 침묵을 가장한 채 테이블 위를 맴돌 뿐이었다. 커피가 바닥나고도 한참이 흘렀을 때 은규는 겨우 한 마디를 던졌다. 가요, 집에 데려다줄게요.

   처음 탄 그의 차에는 익숙한 담배 냄새가 배어 있었다. 찬찬히 내부를 훑었다. 별다른 장식품은 없었고 대시보드 위에 놓인 작은 액자가 눈에 띄었다. 젊은 연인이 꽃이 흐드러진 정원에서 활짝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낯익은 여자의 얼굴에 눈을 떼지 못했다.

   “엄마예요.”

   그의 말에는 애정이 깃들어 있었다. 은규는 본래 직장을 다니며 미국 경영대학원에 갈 준비를 하다가 지금은 모두 그만두고 어머니의 조교 일을 돕고 있다고 했다. 아침마다 코케허니 원두로 커피를 내려 둘 것, 책상 위에는 몽블랑 두 자루를 나란히 세팅해 둘 것, 디퓨저는 주기적으로 교체할 것 등등. 까다로운 취향을 가진 교수가 새로운 학생을 구하기보다는 그가 보조해 주기를 원했고, 볼보는 그 대가로 그녀에게서 물려받았다고. 액자 속 사진은 교수가 결혼하기 전 남편과 파리에서 찍은 것이었다. 은규는 자랑스러운 듯 그들의 러브스토리에 대해 읊었다. 파리에서 유학 중이던 여대생은 마트에서 장을 보다가 폭우로 그곳에 고립된다. 그때 옆에 있던 한국인 여행객이 그녀에게 불어로 말을 건다. 터무니없는 농담에 여자는 크게 웃는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며 두 사람은 장바구니를 든 채 마트를 몇 바퀴 돈다. 저녁 메뉴에 대해 나누던 그들의 이야기는 내일과 모레, 그보다 먼 미래로 차츰 뻗어 나간다.

   며칠 후 소나기가 내린 날 그 얘기를 떠올렸다. 나는 점심시간마다 도서관에 들르기 시작했고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아지랑이로 어지러운 캠퍼스를 걸어 에어컨 바람이 부는 건물에 들어서면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은규가 준 출입증을 찍고 도서관 게이트를 통과할 때는 마치 이 학교의 학생이 된 양 어깨가 올라가곤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명문 학교의 마크가 그려진 점퍼를 어떤 허영 없이 그저 제 옷처럼 입고서 공부하는 학생들을 지나칠 때면 여러 가정을 하게 되었다. 학창 시절 잦은 이사를 하지 않았다면. 집집마다 빨래건조대를 현관문 앞에 전시하는 동네에 살지 않았더라면. 엄마가 조금 더 똑똑했더라면. 그러니까, 떼돈을 벌 수 있다는 이웃 아주머니의 말에 홀라당 넘어가 버리지 않았다면······ 상상은 그칠 줄 모르고 과거를 돌이켜 남을 탓하는 일은 쉬웠다. 

   도서 검색대에 무심코 교수의 이름을 입력하자 책 한 권이 나왔다. 『마담 보바리』라는 제목 아래에 그녀가 옮긴이로 표기되어 있었다. 출간 날짜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어쩌면 교수가 담배를 피우며 읽던 것이 그 책의 원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수업에서 그녀가 플로베르를 언급했던 기억도 어렴풋이 났다. 도서관을 가득 채운 오래된 책장에는 무수한 삶이 가나다순으로 놓여 있었다. 그중에서 교수가 번역한 책을 찾아 들었다. 챙이 넓은 빨간 모자를 쓴 채 먼 곳을 응시하는 여자가 그려진 표지를 넘기면 책날개에 적힌 교수의 이력이 보였다. 그리고 페이지를 더 넘기면 교수의 몸을 통과한 언어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사무실로 돌아가 그 문장들을 하나씩 발음해 보았다. 쏴아, 소리에 고개를 드니 창밖에 소나기가 내리고 있었다. 네모난 프레임 너머로 텅 빈 벤치가 젖어 갔다. 창문을 닫아걸고 비를 바라보다가 문득 파리의 마트를 생각했다. 그 마트에서 남자가 처음 교수에게 건넨 농담을 알고 싶었다. 속수무책으로 그녀를 뒤흔든 유머를. 그 얘기를 할 때 은규는 남자가 했던 말, 그러니까 그의 아버지가 꺼낸 말 그대로 불어로 발음했기에 나는 어떤 의미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다시 자리로 돌아와 책을 펼쳤을 때, 손끝에 묻은 물기가 읽고 있던 문장에 동그랗게 자국을 남겼다. 그녀는 집 테라스의 빗물받이 홈통이 막히면 빗물이 고여 호수를 이룬다는 사실을 몰랐으므로, 그대로 태평스러운 삶을 계속 이어 가다가 어느 날 갑자기 벽에 금이 간 것을 발견했다.


*


   차들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체되었던 도로가 서서히 뚫리고 은규가 안도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앞차에 붙으려는 찰나 2차선에서 다른 차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화가 날 만한 상황이었지만 은규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뭐가 저리 급할까.”

   1년 동안 만나며 지켜본 그는 매사에 놀라울 만큼 무던한 사람이었다. 뉴스에 나오는 정치적 이슈나 시위운동을 볼 때도 특정 입장을 견지하지 않았고 가볍게 혀를 찰 뿐이었다. 그는 어떤 일이 발생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여겼으며 크게 화를 내거나 감정을 쓰지 않았다. 타인의 일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일에도 그런 편이어서 미래에 대한 걱정이라곤 없어 보였다. 객관적으로 그는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삼십대 초반에 백수였고 작년에 도전했던 공인중개사 시험에서도 고배를 마셨으니까. 스물아홉에도 계약직을 새로 구할 때마다 나이 걱정을 하는 나와 비교하면 그의 처지는 도리어 나빴다. 그는 초조해야 했다. 조급해야 했고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잠 못 이뤄야 했다. 그러나 여유로웠다.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사고가 나지는 않을까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까 전전긍긍하는 쪽은 언제나 나였다. 나도 이런 데 카페나 차릴까. 좋은 풍경을 지나칠 때 그는 무심히 내뱉곤 했다.

   딱 한 번. 그가 평정심을 잃은 적이 있었다. 2학기가 한창이던 지난가을이었다. 그 학기에 교수의 수업은 열리지 않았다. 이따금 창밖을 살피거나 캠퍼스를 거닐어도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그즈음 나는 점심시간에 열리는 영어 회화 강의를 찾아 들었다. 하지만 첫 수업부터 몇 살이냐, 취미가 뭐고 전공이 무엇이냐, 하며 개인정보를 물어 보는 통에 거짓말을 지어내기에 지쳐 바로 그만두었다. 나는 다시 사무실에서 『마담 보바리』를 펼치고 그 속에서 나와 닮은 여자, 에마를 마주했다. 에마가 무도회장에서 주운 시가 케이스를 남몰래 꺼내어 냄새를 맡는 장면은 언제 읽어도 두근거렸고, 죽기 전 황량한 오솔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에서는 여지없이 가슴이 미어졌다.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게 해주는 것은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가 귀가 먹먹할 정도로 크게 울리는 음악처럼 들판을 가득 채우는 맥박소리뿐이었다. 이런 문장을 번역할 때 교수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언젠가 그녀를 만난다면 모두 묻고 싶었다.

   은규가 나를 펍으로 불러낸 것은 공인중개사 시험에 떨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수화기 너머로 혀를 꼬아대며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낯설었다. 은규는 술을 그다지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펍에 들어서니 그가 만취 상태로 테이블에 엎어져 있었다. 나는 그의 친구라는 직원과 함께 은규를 대로변에 주차된 그의 차 조수석으로 옮겼다. 그리고 친구로부터 몇 가지 얘기를 전해 들었다. 은규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긴 별거 끝에 이혼을 결정했고, 그의 어머니는 파리에 있는 대학교로 전근을 가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내 물음에 친구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아무 말도 듣지 못했냐고 되물었다. 그는 속으로 단어를 고르듯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러고는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고만 말했다.

   나는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켰다. 은규가 만졌고 그보다 오랫동안 교수의 것이었던 운전대를 쥐었다. 조금 전 친구의 말을 곱씹었다. 그가 던진 단어들로 몇 가지 빤한 그림을 그릴 수도 있었다. 은규의 어머니와 아버지 중 한 사람이 외도했다거나, 누군가 스캔들을 핑계 삼아 그녀를 교수직에서 내려오게 했다는 방식으로.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내게 중요한 건······ 앞 유리창 너머로 주차선 왼쪽 도로에서 차 한 대가 전조등을 켠 채 다가왔다. 빛이 사방으로 분산되며 두 눈을 찔렀다. 눈을 질끈 감았다. 감은 눈꺼풀 안쪽에서 빛의 잔상이 노란색으로, 분홍색으로, 파란색으로 둥둥 떠다녔다. 잔상이 이내 가라앉자 눈꺼풀 안쪽은 어둠으로 가득했다. 그것을 응시하며 무언가를 상실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엇을? 고작 청강생이었던 내가. 그녀와 무엇을 나누었다고? 은규는 어느새 잠에서 깨어 운전대를 쥔 내 오른손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운전할 수 있겠어?”

   그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조용히, 두 눈이 부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를 껴안았다. 그의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처음으로 우리가 조금은 닮았다고 생각했다.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더 이상 그의 차에서는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호텔 지하 주차장에 차를 댄 뒤 우리는 다소 지쳐 있었다. 도로에서 지체한 시간이 예정보다 길어진 탓이었다. 우리는 한동안 차에서 내리지 않고 서로의 몸에 기댄 채 숨을 골랐다. 서늘한 공간 속 시동이 꺼진 차들은 고요했다. 그 가운데는 이름만 듣던 화려한 셰이프를 가진 차도 있었다. 내 어깨에 기대어 있던 은규가 이내 고개를 돌려 내 뺨에 입을 맞추었다. 나도 가벼운 입맞춤으로 답했고, 그것을 시작으로 우리는 혀를 섞었다. 내 손이 그의 허벅지 안쪽을 더듬을 때 은규가 저지했다.

   “나중에. 들어가서.”

   처음이니까 제대로 하고 싶다고 그는 말했다. 우리는 뒷좌석에서 준비해 온 케이크와 와인을 꺼냈다. 

   휴가철이어서 체크인을 기다리는 줄이 길었다. 은규는 왼손에 와인을, 나는 오른손에 케이크 상자를 든 채 서로 빈손을 맞잡고서 줄 끝에 섰다. 앞에는 스무 팀 정도가 대기하고 있었고 그마저도 줄이 금방 줄어들지 않았다. 우리는 아이들이 우는 소리와 여러 국적이 뒤섞인 외국어를 들으며 가만히 차례를 기다렸다. 시간이 흐르면서 달아 있던 몸이 천천히 식어 가는 것이 느껴졌다. 맞잡았던 손은 점점 힘이 풀려서 어느새 손가락 두어 개만 걸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은규니?”

   뒤를 돌아보니 나이 든 여자가 서 있었다. 그녀가 나를 위아래로 훑는 시선이 아주 잠깐이지만 느껴졌다. 엄마. 은규가 말했다.

   “여기 어쩐 일이에요?”

   “해마다 여기 호텔 자선 행사 오잖아. 며칠 전에 입국했어.”

   가볍게 안부를 주고받는 그들 사이에서 나는 다소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갑작스러운 해후였다. 그리고 내내 꿈꾸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선뜻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지 못했다. 나는 은규의 어머니, 즉 교수를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나를 모르므로 어떻게 인사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망설인 것은 교수의 인상이 학교에서 봤을 때와 달라 보여서이기도 했다. 하나씩 뜯어보면 크게 변한 점은 없었다. 줄무늬 티셔츠에 네이비 슬랙스를 입은 교수는 여전히 캐주얼한 차림새를 고수하고 있었고 말투도 나긋나긋했다. 그나마 달라진 부분이라면 먹물처럼 까맣던 머리카락 사이로 삐져나온 흰머리를 꼽을 수 있지만 그조차도 그녀의 인상을 뒤바꾸기에는 충분치 않았다. 그럼에도 왜인지 눈앞에 있는 여자를 강의실의 교수와 같은 사람으로 생각하기가 어려웠다.   

   속으로 인사말을 고르는 사이 교수는 나를 가리켜 여자친구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답하는 은규의 말에 그녀는 반갑다며 고개를 까딱였다. 잠은 어디서 자요? 은규가 묻자 교수는 같이 온 친구가 있어 호텔에 묵을 예정이라고 했다. 나는 어쩐지 그 친구가 애인일 것이라고 여겼고 그러자 가라앉는 기분이 되었다. 이내 직원이 우리를 불렀다. 은규가 자리를 뜬 사이 교수와 나는 줄에서 빠져나와 은규를 기다렸다. 우리 사이에는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교수가 먼저 나를 알아봐 주기를 바랐다. 내 수업을 들었죠? 하고 말을 걸어 주기를. 매일 맨 뒷자리에 앉던 학생, 남들보다 강의실에 늦게 들어와서 일찍 나가던 사람을 그녀가 기억하고 있다면 나는 1년 전 답안지에 썼던 부끄러운 문장을 고백하듯 꺼내 놓을 수도 있을 터였다. 꿈을 무의식의 영역으로 바라 본 프로이트의 해석은 옳지 않다. 꿈은 그저 이곳과 다른 세계이고 우리는 이곳과 저곳을 오가며 여러 개의 생을 동시에 살아간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그녀가 물으면 나는 말하겠지. 교수님이 그러셨잖아요. 무언가를 배우는 이유는 그것을 배반하기 위해서라고요. 내가 웃으면 나를 따라 미소 짓는 교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교수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고 우리는 여전히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은규가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다. 카드 결제에 오류가 있거나 예약한 방이 직원의 안내와 달라 작은 실랑이라도 벌이기를. 조급함이 일 때 나도 모르게 한 마디가 튀어나왔다.  

   “보바리를 읽었어요.”

   동그랗게 눈을 뜨는 교수를 보며 다음 말을 준비했다. 로맨스 소설 속에 등장할 법한 낭만과 정열을 찾아 헤매는 에마를 이해한다고, 실은 이따금 내가 사랑이라는 감정을 이해하고 있는지, 내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감정이 다른 이들이 느끼는 감정과 오롯이 같을지 궁금하다고. 그런 혼돈을 에마에게서 느꼈다고. 당신은 어떤 마음으로 그녀의 음성을 번역했느냐고.

   “오, 보바리.”

   교수가 감탄사를 뱉었다. 마침내 내게 되돌아올 질문을 기다렸다. 그녀는 짧게 말했다.

   “옛날이야기네요.”

   이내 은규가 돌아오자 교수는 덧붙였다. 그럼 또 봐요. 그녀가 내 어깨를 살포시 잡았다가 놓았다. 짧은 순간이었다. 그러나 내내, 멀어지는 교수의 뒷모습을 본 후에도 그녀가 건드린 부분만 멍이 든 것처럼 아렸다. 


   룸은 그가 보여준 사진 그대로 근사했다. 우리는 곧장 침대에 드러누워 높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식욕이 돌지 않았고 케이크를 꺼내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은규도 운전에 지친 기색이었다. 그래도 기분을 내보자는 그의 말에 일어나서 케이크를 꺼내고 초를 불었다. 흰 케이크를 앞에 두고서 우리는 잠시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침대 바로 옆 벽면 전체가 커다란 유리창으로 되어 있었다. 눈앞에 공원이 보였는데 사진으로 볼 때보다 훨씬 가깝게 느껴졌다. 피크닉을 온 가족들, 공원을 거니는 사람들이 이따금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어쩌면 그들이 우리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창문을 프레임으로 공원에서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왼쪽 상단으로 올라가면 식물원이 있었다. 장밋빛으로 물든 하늘 아래 전면이 유리로 된 돔 형태의 온실은 우주선처럼 보였다. 그제야 우리가 그곳에 가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운영시간이 이미 지난 뒤였다.

   우리는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룸서비스로 스테이크와 파스타를 주문했다. 은규는 준비해 온 와인을 꺼내 보였다. 집에 오래 묵혀 둔 와인이라고 했다. 나는 맡은 역할극에 충실하려는 사람처럼 애써 환호했다. 그런데 오프너가 보이지 않았다. 은규는 프런트에 전화를 걸었고 곧 직원으로부터 음식과 함께 오프너를 가져다주겠다는 답을 받았다. 잠시 후 벨이 울리고 직원이 트롤리를 끌며 들어왔다. 음식을 내려놓은 직원은 주머니에서 오프너를 꺼내어 와인을 따기 시작했다. 우리는 테이블 앞에 앉아 가만히 직원을 지켜보았다. 그는 자세부터 불안정했고 코르크는 빠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지지부진한 움직임은 꼭 슬랩스틱 코미디를 관람하는 것 같은 착각을 일게 했다. 하지만 누구도 웃지 않았다.

   “제대로 좀 하세요!”

   직원의 손이 미끄러져 와인을 깨뜨릴 뻔했을 때 은규는 돌연 외쳤다. 그가 누군가에게 큰 소리를 낸 건 처음이었다. 직원은 죄송하다며 손등으로 땀을 훔치고, 미끄러운 손을 옷에 몇 번 쓱쓱 닦고는 다시 시도했다. 결국 어설프게 오픈한 와인병 안에는 코르크의 잔해가 둥둥 떠다녔다. 직원은 연신 죄송하다며 사과하고는 돌아갔다. 와인을 마실 때마다 입안에서 부스러기가 맴돌았다. 그것을 조금씩 혀로 밀어내며 입에서 빼내었다. 잠시 후 은규와 입을 맞추었을 때도 그랬다. 커튼을 쳤다. 실내가 어두워졌다. 

   그의 것은 잘 서지 않았다. 몇 번 더 시도했으나 결국 서로 애무해 주는 정도에 그치고 말았다. 허기진 나는 와인 잔을 집어 들었다가 놓았다. 포크로 식은 스테이크를 푹 찍어 입에 넣었다. 차려진 것 중에 가장 나았다.


   아무래도 좋다고 은규는 말했다. 우리는 보통의 연인들처럼 침대에 반쯤 누워서 티브이를 보았다. 티브이에서는 지루한 야구 경기가 한창이었다. 남은 와인을 홀짝이는 은규에게 물었다. 

   “어머니는 언제 출국하셔?”

   “내일 바로 공항으로 갈 것 같던데?”

   은규가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아까 직원 말이야.

   “어떻게 와인도 안 따라 주고 그냥 가?”

   기본이 안 돼 있어. 은규는 중얼거리며 입속에 남은 코르크의 잔해를 뱉어냈다. 그렇지 않아? 내 품에 안기며 그가 물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한 번도 그런 걸 기본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 순간 이상하게도 머릿속을 스친 것은 어느 날의 대화였다. 내가 운전면허증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은규는 말했다. 의외다.

   “뭐가?”

   “면허가 있었어?”

   “놀랄 일이야?”

   “음······ 뭔가 넌 없을 것 같았어.”

   왜지? 그렇게 되묻는 은규에게 악의란 없었다. 그가 바라보았을 모든 시선을 떠올렸다. 처음 강의실에서 마주했을 때 내가 했던 옷차림과 움츠렸던 어깨. 주차관리실에서 내려다보았을 나의 정수리. 틈만 나면 메리 제인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는 손짓. 나는 그때까지 말하지 않은 사연을 털어놓았다. 차는 없고 면허를 딴 지는 오래되었다고. 선천적으로 난시가 심해 밤 운전이 어려운 탓에 운전대를 잡기 쉽지 않다고. 차를 사지 않는 것도 그래서라고. 말들은 변명처럼 길어졌고 내 얼굴은 점점 붉어졌다. 한참 듣던 은규는 평온한 말투로 대꾸했다. 그건 할 줄 모르는 거지. 

   “응?”

   “운전.” 

   그가 덧붙였다.

   “할 줄 안다고 하면 안 돼.”

   눈앞의 테이블에는 쓰다 만 콘돔 껍데기들이 놓여 있었다. 그 옆으로 창을 가리고 있던 커튼이 무방비하게 걷혀 있었다. 반쯤 드러난 창으로 푸르스름해진 하늘과 하나둘 공원을 떠나는 사람들이 보였다. 커튼이 언제부터 걷혀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누군가 보았을지도 몰랐다. 나를. 우리를. 모든 것을. 재빨리 이불 속으로 몸을 감추었다. 멀리 식물원이 우두커니 있었다.   


   그곳에 불이 켜진 건 모두가 잠든 밤이었다. 나는 얼핏 잠에서 깨어 은규 옆에 있는 무드 등을 껐다. 방이 캄캄해지자 창밖의 풍경이 선명해졌다. 반만 드리워진 커튼을 완전히 젖혀 보았다. 공원에는 길을 따라 가로등이 놓여 있었다. 늘 그렇듯 내 눈에 빛은 사방으로 번져 보였다. 가로등을 따라 시선을 위쪽으로 옮기니 불이 켜진 식물원이 보였다. 통유리로 된 온실은 실내조명을 그대로 투과하여 발광하였다. 처음에 노란색이었던 조명은 푸른색으로, 분홍색으로 시간에 따라 서서히 색깔을 달리했다. 잠시 후 호텔 건물에서 나오는 한 사람이 보였다. 그녀는 가로등이 놓인 길을 따라 구불구불 걷기 시작했다. 식물원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가로등이 비치는 정도에 따라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가, 반만 보였다가, 감추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녀가 멀어지면서 점만큼 작아지고 식물원에 가까워져 더 이상 눈에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았다. 나는 어째서인지 몇 시간 전 어깨에 닿았던 교수의 손길을 떠올렸고 순식간에 식물원으로 들어섰다. 

   온실 문이 열리고 교수가 천천히 안으로 들어왔다. 덥고 습한 기운에 그녀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혔다. 교수는 몬스테라를 지나치고 작은 폭포가 흐르는 연못을, 벽을 타고 자라는 넝쿨을 차례로 지났다. 나는 그곳의 붉은 아네모네가 되어, 선인장이나 야자수 때로는 물속에 뿌리를 내린 기이한 식물 위의 개구리가 되어 그녀의 걸음을 따랐다. 마침내 그녀가 커다란 바오밥나무 아래에 이르렀을 때 그곳에는 열댓 명의 나체가 서 있었다. 그들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몸에 허벅지까지 오는 레이스 양말을, 커다란 챙이 달린 붉은 보닛을 착용했다. 교수는 티셔츠와 속옷을 벗어 한편에 개어 놓은 뒤 그들에게로 섞여들었다. 그들은 한 덩어리로 묶였다가 흩어지고 다시 다른 형태로 엉켰다. 성별과 나이, 직업 따위는 짐작할 수 없는 살덩어리 자체로. 언뜻 스쳐 가는 얼굴에는 나와 닮은 이도 있었다. 그들에게는 당장의 교미 말고는 중요한 게 없었다. 나는 식물원의 일부가 되어 그 모든 걸 보았다. 그들을 비추는 조명이 계속하여 색깔을 달리했다. 멀리서 보면 여러 빛깔로 반짝일 것이었다. 환하고 따듯하게.


   눈을 떴을 때 은규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의 머리에 눌려 있던 오른쪽 팔을 빼내었다. 호텔 방에는 서늘한 새벽 공기가 감돌았다. 침대에 앉아 텅 빈 공원을 한참 내려다보았다. 나무들은 검푸르게 흔들렸고 잔디밭에는 누군가 버리고 간 피크닉 매트와 바람 빠진 풍선이 굴러다녔다. 어제의 북적거림은 오래전 일로 여겨졌다. 식은 스테이크와 와인 잔들 사이에 놓인 물을 마시고 화장실에 다녀왔을 때 현관 센서 등에 불이 들어왔다. 현관문 앞에 각자의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새하얀 운동화와 그토록 아껴 신어도 앞코가 해진 까만 메리 제인. 무릎을 모으고 앉아 괜스레 발끝을 매만졌다.

   내가 열네 살 때 학교 건물에는 선생과 중요한 손님만 드나들 수 있는 정문이 있었다. 어느 날 친구들과 나는 빨리 하교하고 싶은 마음에 선생들이 없는 틈을 타 정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음악 선생이 우리를 붙잡았다. 단발머리에 호피 무늬 안경을 쓴 그녀는 학교에서 깐깐하기로 유명했다. 고개를 늘 빳빳하게 들고 걸었고 한 번도 흐트러진 자세를 보인 적이 없었다. 오래전에 성악을 준비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음악 선생은 기다란 회초리를 들고 다니며 복도를 뛰어다니는 학생들을 야단치고는 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대놓고 그녀에게 대드는 애들은 없었다. 아이들은 뒤에서 조용히 ‘야, 저기 쌍년’하고 읊조릴 뿐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우리를 훑더니 친구들을 돌려보내고 나만 남으라고 했다. 나는 혼자 복도에서 무릎을 꿇은 채 손을 들고 한 시간 동안 벌을 받았다. 체벌이 가능하던 시절에 엎드려뻗쳐를 하지도 회초리를 맞지도 않았으므로 수위가 약한 벌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때까지 내가 받아 본 최악의 대우였다. 정문을 오가는 선생들은 하나같이 ‘네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니, 하며 한마디씩 던지고 지나갔다. 그들 입장에서 나는 ‘이러고 있을’ 애가 아니었다. 전교 일등을 두 번이나 한 우등생이었으니까. 그 발가벗긴 수치감은 어떤 체벌보다도 큰 모욕감을 주었다. 차라리 맞고 싶었다.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훗날 전교 일등이라는 타이틀은 내 유일한 영광으로 빛바래리라는 것을. 

   그녀가 다시 나타난 것은 해가 서서히 저물고 교정이 적막에 잠길 무렵이었다. 그녀는 내가 왜 너만 남겼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억울한 마음에 고개를 크게 내저었다. 그녀는 들고 있던 기다란 회초리로 내 발을 가리켰다. 내 발에는 샛노란 국화 두 송이가 피어 있었다. 화투 문양이 그려진 양말이었다. 엄마와 같이 신는 양말. 집 앞에 주기적으로 오는 노상 양말 가게에서는 여러 유행어가 적힌 양말, 캐릭터 양말 등을 팔았고 그중에서 우리 가족은 천 원에 열 개 하는 양말 묶음을 사서 돌려 신고는 했다. 선생은 너 같은 모범생이 어떻게 이런 양말을 신을 수가 있느냐고 다그쳤다. 그녀가 말하는 ‘이런’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화투는 우리 가족에게 그저 평범한 놀이였으니까. 하지만 뒤따라오는 말은 날카롭게 심장을 겨눈다.

   “남들은 보이는 만큼 널 대우할 거야.”

   머지않아 내 말을 이해할 날이 올 거라고, 그녀는 당부했다.

   그녀는 나를 돌려보냈고 다시는 그날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모를 것이다. 그날 이후로 그녀가 음악 시간에 들려준 클래식과 쉬는 시간에 보여준 오페라의 유령조차도 내게는 어떤 계시처럼 여겨졌다는 사실을. 나는 그것들을 엠피쓰리에 담아 등굣길에 매일매일 들었다. 드뷔시의 달빛과 쇼팽의 녹턴, 낭만이 넘치던 시절의 유흥, 그것을 아는 자들의 고상함. 나의 처음이었다.


   노란 불빛 아래 그의 운동화는 하나의 정물처럼 보였다. 운동화가 늘 새것 같아. 어느 날 말했을 때 은규는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같은 모델의 운동화를 주기적으로 사서 조금이라도 얼룩이 지면 버린다고. 과연 구김 없이 깨끗한 그것은 이 방에서 가장 빛이 났다. 신발에 발을 하나씩 넣어 보았다. 신발은 내게 턱없이 컸다. 센서 등이 몇 초 뒤에 꺼졌다. 발을 조금씩 움직이며 빛을 조금 더 붙들었다. 이대로 문을 열고 나간다면, 하고 생각했다. 문 밖의 새벽 거리를 나선다면. 그의 차를 훔쳐 멀리 달아난다면. 차창 너머 다가오는 빛들이 내 시야를 방해하지 않고 깊은 새벽이 선명히 빛과 어둠으로 구분된다면. 둔중한 무언가에 부딪혀 다칠 위험 없이 매끈한 주행으로 거리를 달린다면. 공항으로 가 교수와 마주한다면. 하지만······ 나는 다시 현관문 앞의 나로 돌아와 투명한 대리석 위에 서 있다. 나는 여전히 나인 채로, 현관문 앞 발밑을, 훤히 드러난 내 발목을, 내게 조금 헐거운 운동화를, 운동화와 발목 사이의 까만 틈을 바라보았다. 

   불이 꺼지면 몇 번이고 손을 휘저으면서. 





*소설 속 책 내용은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김남주 옮김, 문학동네, 2021)에서 인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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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01
원경

원경 성혜령 건강검진을 12월 마지막 주까지 미루는 사람이 자기 말고도 이렇게 많으리라고 신오는 생각하지 못했다. 대기실의 긴 좌석 중간중간 빈자리가 있긴 했지만, 신오는 한구석에 서 있기로 했다. 초음파 검사실 앞 복도는 자기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며 서성이고 있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헐렁한 가운에 느슨한 고무줄 바지를 입고 핸드폰을 보며 기다림을 견디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신오는 이들 중 내년에는 따뜻한 휴양지에서 연말을 보낼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지 궁금했다. 혹은, 오늘 치명적인 암이나 뇌동맥류 같은 것들을 발견하고 전혀 예상치 못한 인생을 살게 될 사람들은? 그런 일들은 언제나 일어나고 있었다. 직장 생활을 10년 정도 하니 주위에 아픈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전 직장 동료는 출근길에 쓰러진 뒤 안면마비를 얻었다. 한쪽 입꼬리가 위로 당겨 올라갔는데 그는 멀쩡한 다른 쪽 입꼬리도 끌어올려 웃는 얼굴을 만들곤 했다. 병가에서 돌아온 뒤 매일 웃는 얼굴로 제일 먼저 출근하는 동료를 보면서 신오는 이직을 결심했다. 신오는 모든 일이 가능하지만 대개 나쁜 일들이 더 자주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되도록 좋은 음식을 먹고 운동을 꾸준히 하려고 했다. 불행은 대비하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게 오히려 쉽게 다가오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도 있었다. 복부 초음파를 보던 의사가 “어랏?” 하고 실없는 소리를 내며 배꼽 부근을 세게 눌렀을 때도 신오는 방귀가 나올 것 같다는 생각뿐이었다. 의사가 차가운 젤을 다시 묻히고 초음파 단말기를 문지르다가 복막에 종양이 보인다는 말을 했을 때는, 그래서 요새 변비가 심했나, 라는 생각이 먼저 났다. 대형 병원에 가서 생검과 CT, MRI 검사를 마치고 소화기내과 교수의 진료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도 신오는 회사 메신저를 보고 있었다. 몇십 억 단위 공공사업의 수주가 걸린 입찰 제안서의 마무리를 앞둔 시점이었다. 병원 검사로 연차를 낸다고 했을 때 팀원들은 모두 별일 없을 거라고, 하루 푹 쉬고 오라고 말했지만 메시지를 보내면서 신오를 계속 태그했다. 신오는 그날 마지막으로 진료실에 들어갔다. 의사는 젊고 피곤해 보였다. 예약을 가장 빨리할 수 있었던 의사였으니 어쩔 수 없지, 신오는 생각했다. 의사는 신오가 자리에 앉자 간단한 인사도 없이 모니터 화면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마우스 커서로 신오는 잘 알아볼 수 없는 흐릿한 음영을 짚었다. 여기예요, 여기. 의사는 약간의 승리감마저 느껴지는 말투로 말했다. 복막의 종양은 전이 암이고, 여기가 원발 암이라고. “이게 숨어 있어서 찾기 어려웠거든요.” 의사는 다시 한번 마우스 커서를 움직였다. 췌장하고 담도 사이인데 위치나 크기가 좋지 않다고. 오늘이 금요일이니 당장 다음 주부터 항암치료로 크기를 줄여 보고 수술을 잡아 보자고. 신오의 핸드폰이 또 진동했다. 신오는 치료를 이주만 미뤄도 되냐고 물었다. 프로젝트가 있어서요. 이주 후에 마감이라. 의사는 처음으로 웃어 보

  • 관리자
  • 2024-05-01

끗 김학찬 1 크리스마스 선물은 컴보이가 좋겠습니다. 착한 어린이의 크리스마스 선물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건 오직 현대 컴보이뿐이니까요. 컴보이는, 당신도 기억하실 겁니다. 벽돌을 치고 버섯을 먹는 슈퍼마리오를 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게임기였으니까요(컴보이는 닌텐도와 라이선스 계약을 맺고 출시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혼자 외가에 있었습니다. 엄마와 떨어져 있으면서도 울지 않는 착한 일곱 살이었고, 컴보이를 받을 자격은 충분했습니다. 저는 크리스마스 일주일 전부터 슈퍼마리오 노래를 불렀습니다. 립스틱으로 화장실 거울에 ‘컴보이’라고 써두기도 했습니다. 할머니도 선물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요. 혹시라도 할머니가 삼성 게임보이나 대우 재믹스를 사오면 피차 곤란해질 테니까요. 유치원 차석 졸업 예정이었던 저는 (분하지만 도저히 지영이는 이길 수 없었습니다) 산타의 비밀 따위는 모른 척하며 크리스마스 아침을 기다렸습니다. 머리맡에 놓인 컴보이를 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손자의 웃음소리를 할머니에게 들려줄 계획이었습니다. 자고로 받은 게 있으면 주는 게 있어야 하는 법이니까요. 하지만 조잡한 크리스마스트리에 걸려 있던 선물 상자는 고작 담뱃갑만 했습니다. 달랑달랑, 이상했습니다. 아무리 할머니가 골초라도 손자한테 담배를 선물로 주진 않을 텐데······. 저는 손을 떨면서 포장지를 풀었습니다. 휴, 다행히 담배는 아니었습니다. 포장지 안에 든 것은 화투花鬪였습니다. 화투와 슈퍼마리오는 형 동생 사이입니다(물론 화투가 형입니다). 1889년 화투 제작으로 시작한 닌텐도는 (슈퍼마리오는 8억 장이 넘게 팔렸습니다) 지금도 화투를 생산합니다. 그러니까 할머니의 선물이 아주 어긋나지는 않은 셈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화투로 하늘을 날고 불꽃을 쏘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할머니는 전자오락보다 더 재미있는 걸 가르쳐 주겠다며 화투패를 챠르륵 펼쳤습니다. 화투를 알면 일 년 열두 달을 직접 만들어 나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어떤 친구를 사귀게 되는지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되는지 궁금하지 않으냐고 속삭였습니다. 나이만큼 패를 섞고 (할머니는 예순일곱 번까지 패를 섞고 돌아가셨습니다) 짝을 맞추면 그날의 운명을 읽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분하지만 저는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저는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운명이라는 말이 저를 충동질했습니다. 만약 한 살만 더 많았거나 적었다면 할머니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운명에 비하면 만약은 부질없는 단어고, 화투점占과 민화투는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저는 금방 화투와 친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화투점은 하루에 한 번밖에 볼 수 없었습니다(두 번 보면 반칙이니까요). 하루 종일 혼자 중얼거리며 화투를 (1인 2역으로) 치다 보면 스스로가 누구인지 헷갈리기도 했습니다. 가뜩이나 엄마와 떨어져 있어서 심란한데, 자아정체성마저 잃을 수는 없었습니다.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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