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킨츠키 클래스

  • 작성일 2024-03-01
  • 조회수 987

   킨츠기 클래스


신주희


   유리 조각을 주워 그 애의 집으로 갔다. 그랜드 피아노가 있는 이층집. 피아노 레슨 중인 그 애를 기다리는 동안 그 집의 장난감들을 가지고 노는 것은 자유다. 예컨대, 그 애가 아끼는 인형의 옷을 갈아입히거나, 그 인형의 이름을 다르게 부르거나. 침대에 눕는 것도 가능했다. 굳이 눕고 싶다면 그래도 되었다는 뜻이다. 나의 경우, 그러니까 초등학교 1학년이던 나는 그 애의 침대가 좋았다. 늘 좋은 냄새가 나고, 귀여운 만화 캐릭터 시트가 깔려 있는, 나로서는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는 앙증맞은 침대였으므로. 나는 그곳에 누워 차마 피아노곡이라 말할 수 없는 도, 미, 솔, 솔, 솔을 들으며 끝끝내 무엇인가 다른 것을 원하는 상태가 된다. 길에서 주워 온 유리 조각을 꺼내 햇빛에 비춰 본다. 그러니까, 그래서, 그렇지만,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결심했기 때문이다. 오늘은 꼭, 그 애의 매끄러운 피아노에 깊은 흠집을 내버리기로. 


*


   수업 준비는 늘 최고이면서 최악이었다. 나는 매일 산산조각이 난 접시나 찻잔, 사발을 들고 온 수강생들에게 그것은 복원 중일 뿐 아직 완전히 망한 것은 아니라는 말을 반복한다. 그러니 인내심을 가지기를. 끈기를 가지고 다음 수업 예약을 꼭 해주기를. 나는 구차함을 떨쳐내며 테이블 위의 수업 계획서를 가지런히 모아 놓는다. 지난 수업과는 조금씩 다르게 이어 붙인 문장들 사이에서 틈이라는 글자가 내 시선을 붙잡는다. 


   깨진 도자기를 복원하는 기법 중 하나인 킨(金) 츠기(継ぎ)는 상처 난 영혼을 치유하는 것에 비유됩니다. 틈을 금으로 이어 붙인다는 뜻으로 파편의 경계를 감추지 않고 오히려 살려서 사물의 일상성을 회복시키는 의미 있고 아름다운 작업입니다.


   나는 틈을 메우는 일에 보람을 느끼면서도 내게 틈이 생기는 것을 싫어한다. 고작 틈, 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절망이나 좌절이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다. 나는 비관을 포기한 사람으로 서른 중반까지 사모님으로 살았지만 마흔이 된 지금은 누군가를 사모님이라고 부르는 처지가 되었다. 꽤 큰 규모의 프랜차이즈 레스토랑을 운영하던 남편의 회사가 최종 부도 처리되자 집 안 곳곳에는 압류 딱지가 붙었다. 죽고 싶을 만큼 처참했다. 동시에 처절하게 이를 악물고 살아남고 싶기도 했다. 밑 빠진 독을 채우는 일처럼, 눈앞에 던져진 모든 것을 허겁지겁 해치웠다. 끝내 이혼과 재산 분할, 양육권 분쟁으로 이어진 일련의 시간이 들이닥쳤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깨뜨려 본 사람은 안다. 한번 깨진 것은 본래의 것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니게 된다는 것을. 아무리 긴 시간과 정성을 들여도 완벽한 복원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 뒤로 알 수 없는 허기가 나를 집어삼켰다. 공포스러울 만큼 왕성한 소화력과 끝이 없는 식사. 순식간에 불어난 몸이 거대한 틈처럼 느껴졌다. 때문에 나는 시시때때로 벌어지는 틈을 채울 수밖에 없었다. 집은 항상 정리된 상태를 유지해야 하고, 규칙적으로 다이어트를 하며, 적어도 일주일에 두 번은 아이가 하원하는 시간에 맞춰 간식을 준비한다. 여전히 양육비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지만, 적당히 연출된 생활을 전시함으로써 나는 나의 틈을 매끄럽게 수리한다. 선별하고, 구별하고, 셀렉하면서. 

   나는 프린트에 적힌 문장들을 되짚다가 혹, 재사용된 문장들이 너무 도드라진 건 아닌지 확인에 확인을 거듭한다. 공방을 옮기기 전, 다리 건너의 수강생들은 그런 것에 꽤 민감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제때에 제대로 소모되지 않은 것들이 자신들의 내밀하고 폐쇄적인 위상에 흠집 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곧 글에서 눈을 뗀다. 이 수업에는 그쪽 사람들이 없다.

   이런저런 이유로 내 일은 길고 지루하다. 인내심이 필요하다. 깨진 조각들의 단차를 끊임없이 계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매 순간 창조보다는 부활이 더 어렵다는 걸 증명해야 한다. 물 한 잔 담을 수 없었던 그릇이 근사한 오브제로 탄생하는 순간 달라지는 사람들의 표정들. 나는 그것을 떠올리며 다시 바쁘게 손을 움직인다. 정갈한 다과로 시작하는 오리엔테이션을 위해 킨츠기로 부활한 찻잔과 디저트 접시를 적당한 간격으로 놓는다. 수강생들이 하나둘 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원래 공방이 있던 곳은 압구정동이었다. 백화점을 거느리고 아파트 단지를 병풍처럼 두른 상가 건물이어서 근처에 사는 수강생들이 많았다. 삼 년을 별 탈 없이 버텼는데 문제는 건물주의 죽음이었다. 지병이 있던 건물주가 죽자 자식들끼리 상속 분쟁이 벌어진 것이다. 한번 소송에 걸리면 몇 년이고 그곳에 발이 묶일 수도 있다고 변호사 남편을 둔 수강생이 알려주었다. 나는 수습 불가의 상황을 피하고자 황급히 공방 자리를 수소문했다. 마침 늘어난 수강생을 위해 더 넓고 세련된 공간을 생각하던 차였다. 하지만 조건을 충족하기란 쉽지 않았다. 조금 넓은가 싶으면 건물이 너무 낡았고, 건물이 세련됐다 싶으면 값이 무서울 지경이었다. 강을 건너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뒤늦게 나의 사정을 파악한 부동산 사장은 지금의 공방 자리를 간발차 압구정, 이라고 소개했다. 옥수동 쪽의 빼곡한 아파트촌은 말할 것도 없고, 핫플 성지인 성수동도 지척이라 아무도 그곳을 그냥 응봉동이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응봉동이 아니면 뭔데요?

   부동산 사장은 세상물정 모른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당연히 서울숲 옆이죠.     

   나는 부동산 사장의 말에 실소를 터뜨렸지만 결과적으로는 그의 그 말 때문에 마음을 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며칠 뒤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공방 이사를 준비하며 인스타그램에 새로운 공방의 위치를 알리고 해시태그를 걸었다.  

   #공방 리유 #서울숲 스튜디오


   한번 나가면 다신 못 들어와요.    

   공방의 이사 결정에 대해 한 수강생이 말했다. 건물주의 죽음으로 소송이 걸리면 몇 년이고 발이 묶일 수 있다는 걸 알려준 그 수강생이었다. 하지만 기분이 상한 건 그 때문이 아니었다. 공방의 이사 자리가 다리 건너편에 있다는 사실을 안 그의 말투가 얼핏, 내가 규범이나 규칙을 위반한 것처럼 나무라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다리만 건너면 되는데요? 거기는 여기보다 훨씬 넓고 깨끗해요. 

   나는 미소를 지으며 차근차근 이사 갈 곳이 얼마나 근사한지 설명했다. 지척에 있는 서울숲과 그 주변을 빽빽하게 둘러싼 핫플에 관해서도. 하지만 그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여기 사람들은 강 건너 새 건물보다 이곳의 낡은 지하를 더 좋아할 거예요. 다들 번잡한 걸 싫어하니까. 

   다 선생님을 위해서 하는 소리라며 그는 내 어깨를 톡톡 두드리고 공방을 나섰다. 얼굴이 굳어지는 걸 느꼈지만 입 꼬리를 내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의견은 의견일 뿐, 감정적으로 해석하지 않기. 공방을 열고 내가 한 최초의 다짐이었다. 경계나 두려움을 이유로 마음의 문을 닫고 사는 사람들을 마주하려면 꼭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저런 것을 의견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건 어떤 감정이었고, 그 감정에 이름을 붙인다면 그것은 멸시였다. 나는 끝내 기분이 상해버리고 말았다. 갑자기 여러 날 여러 일을 한꺼번에 겪어서 그렇게 된 것 같았다.  


   공방을 옮긴 뒤, 잠깐 수강 문의가 이어졌다. 수강생이 늘었던 건 사실이지만 그 숫자는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강을 건너 수업에 참여하던 수강생들도 하나둘 나타나지 않았고 수업은 일회용처럼 잠깐 있다 사라지는 사람들로 채워졌다. 친구를 따라서 호기심에, 아이들 학원이 공방과 가까워서, 혹은 비싼 그릇이 깨져서 수리할 곳을 찾다가. 킨츠기의 와비사비 와비(侘)란 미완성이며 오래된 것의 단순한 아름다움을 의미하고, 사비(寂)란 오래되거나 낡은 것을 의미.

 정신은 고사하고 수업을 듣게 된 사람들 대부분이 기차역 뜨내기와 다름없었다. 애당초 강을 건널 결심을 한 것이 잘못이었을까. 나는 참을성 없이 휴대전화를 힐끔거리거나 누군가의 뒷담에 몰두하는 수강생들 앞에서, 대출 이자와 건물주의 월세 독촉 전화 앞에서 자주 침울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리고 내내 한 사람을 떠올렸다. 

   서울숲이 내려다보이는 아파트에 사는 조안. 그를 떠올리면 두툼하고 묵직한 유리 성작(聖爵)이 떠올랐다. 은이나 쇠로 만든 게 아니라서 깨지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없는 유리잔. 포도, 천사, 십자가가 화려한 장식을 햇볕 아래 가만히 놓고 보면 빛이 아름다운 방식으로 통과하는, 근사한 틈을 가진 잔. 나는 조안을 그렇게 떠올렸다.    


   나의 첫 수업. 나는 하늘색 스트라이프 셔츠에 네이비색 슬랙스를 입었다. 구김 없이 잘 다려진 마 소재의 앞치마를 두르며 나는 수강생들에게 정직한 인상을 주길 기대했다. 대다수의 수강생들이 노트 한 권 없이 나타났다는 것을, 실은 킨츠기에 그닥 관심이 없다는 것을 눈치 챘지만 나는 그것을 불길한 암시로 해석하지 않았다. 그때는 다만 선입견을 경계해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그들이 그저 세련된 취향을 갖길 원하는 속물이라는 편견. 온실 속 화초 같은 태평함과 해맑음이 비현실적이고 이질적이라고 느끼는 마음. 그렇게 깨진 눈으로는 아무것도 이어 붙일 수 없기 때문이다. 설사 진짜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일지라도 수업 시간만큼은 공평한 눈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대단치 않은 노력이지만 그것이 내가 취할 수 있는 최적의 태도라고 여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출퇴근도 힘든 강남에 공방을 차렸냐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들에게 나는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간단해요. 깨져도 버릴 수 없는 그릇이 많은 곳을 택했을 뿐이죠. 

   그래서 비싼 그릇이 많이 깨지고, 남은 그릇의 짝이 맞지 않아 괴로운 여자들이 속출하는 사월의 어느 날, 나는 조안을 만났다.  

   조안. 사십대에 접어들었지만 결코 제 나이로는 보이지 않았던 조안은 이곳으로 이사 오기 전 압구정 공방의 장기 수강자이자 내게 틈을 보여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어딘지 외국의 어떤 도시가 생각나는 그의 이름만으로도 사람들은 많은 것을 유추했다. 생화 장식을 곁들인 주먹밥 도시락을 준비해 모두를 놀라게 했던 일화라든가, 어떻게 구했는지 알 수 없는 유명 작가의 한정판 접시라든가, 혹은 계절마다 바뀌는 명품백들은 그곳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런 조안이 처음 공방에 들고 온 것은 프랑스 바카라에서 생산된 유리 성작이었다. 군데군데 금이 가 있었고 스템이 조각나 있었는데도 섬세한 십자가와 포도 장식의 정교함이 예사롭지 않은 물건이었다. 

   혹시, 이거 신부님들이 쓰시는 성작 아닌가요?

   알아보시네요? 보통은 은이나 쇠로 만들어져서 잘 모르시던데.

   제가 어렸을 때 성당에 다녔거든요. 

   아, 그러셨어요?    

   근데 이렇게 유리로 된 성작은 처음 봐요. 

   나의 말에 반짝 반색하던 조안은 금세 슬픈 기색이 되어 나를 바라봤다. 

   어머님이 다니시는 성당 신부님이 얼마 전에 돌아가셨어요. 그분 유품인데, 이렇게 깨져버려서 마음이 너무 안 좋아서요. 제가 수리해 보려고 가져왔어요. 혹시 유리도 수리가 가능할까요?

   나는 성작의 상태를 살펴보다 선물을 건네듯 밝게 대답했다.  

   그럼요. 유리 킨츠기는 깨진 단면에 직접 금박을 붙이는 것 말고는 일반 킨츠기와 수리법이 비슷해요. 요즘은 유리용 옻도 파는걸요. 마르는 게 조금 더 까다롭긴 하지만요. 

   의사의 선고를 기다리는 듯 초초하게 서 있던 조안의 입에서 와, 하고 짧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정말 다행이에요. 그런데 유리 조각도 붙이고 나면 햇볕 같은 데 말리나요?

   아니요. 

   나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공방 창가에 놓인 나무 상자들을 가리켰다. 

   옻이 마르는 방식은 좀 달라요. 

   어떻게요? 

   옻은 습기를 흡착하면서 깨진 조각들을 잇거든요. 좀 이상하게 들리지만 쉽게 말하자면 물로 말리는 거예요. 저기, 저 나무 상자 속에서요. 상자 속에 물을 함께 넣어야 옻이 말라요. 

   그때 어딘가 기묘한 표정이 된 조안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깨진 그릇들은 모두 목이 마른 셈이네요. 

   조안의 말뜻을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가 한 말이 적어도 옻에 대한 것이 아니며, 너그럽게 잡아 봐도 킨츠기 기법에 관한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제야 나는 조안의 모습을 찬찬히 살폈다. 깔끔하게 머리를 뒤로 묶은 조안은 공방의 여자들과는 어딘가 다른 분위기가 있었다. 화장기가 없는 얼굴은 공방 사람들이 한 번씩 힐끔거리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고운 얼굴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묘한 굴곡이 있었다. 전혀 노골적이지 않은 차림 역시 그랬다. 얇은 아이보리색 캐시미어 스웨터에 작은 진주 브로치, 가는 몸매를 감추는 듯한 와이드 팬츠에 스웨이드 소재의 드라이빙 슈즈. 이곳 여자들이 추구하는 편안한 듯 격식을 포기하지 않는 스타일이었지만 그 역시 어딘지 조금 다르게 보였다. 그게 뭘까, 생각하는데 조안의 코와 입술 사이가 눈에 들어왔다. 아주 자세히 봐야 보이지만 결코 없다고는 할 수 없는 짧은 상흔이 인중과 코끝에 흐릿하게 걸려 있었다. 

   도움을 좀 받고 싶어요.

   이번에도 당황스러웠다. 그 말 역시 성작 수리를 말하는 건지, 다른 무엇에 도움을 달라는 건지 헛갈렸다. 그렇게 말한 조안이 수줍게 미소 지을 때, 그 미소 어디에서도 경계의 그늘을 찾을 수 없을 때, 내 마음이 그랬는지도 몰랐다. 여러 번의 결심에도 나는 줄곧 이곳 수강생들이 친절함으로는 도저히 가릴 수 없는 견고한 경계를 품고 있다고 생각했다. 기득권, 계층 의식, 뭐라고 부르든 나는 그들의 경계심 밖에 서서 그런 것을 따져 본 적 있는 이들 중 하나라는 식이었다. 알고 보면 다 그렇고 그렇지만 굳이 그런 것을 따지는 인간들 속에서 조안은 어쩌면 다른 부류의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가 일었다. 나는 황급히 인중에 머물던 시선을 거두었다. 조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앞으로 주해 씨, 라고 불러도 될까요?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안은 그 뒤부터 나를 그냥 주해, 라고만 불렀다. 선생님, 강사님 혹은 주해 씨가 아니라 그냥 주해. 나와 조안은 동갑이었고, 또래의 아이가 있으며, 비슷한 취향을 가졌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이상한 일이었다. 그날 이후부터 옻을 말릴 때마다 조안이 떠오르는 것만 봐도 그랬다.  


   조안이 들고 온 유리 성작은 상급자의 기술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상대적으로 조안과 나는 대화를 나눌 기회가 많았다. 조각난 유리에 마스킹 테이프를 붙이며, 옻을 말리고 금분으로 틈을 메우며, 나는 그가 최근에 성수동으로 이사 왔다는 것을 알았다. 폐 수술을 한 시어머니와 외국계 금융 회사 임원이라는 남편, 허니문 베이비로 태어난 아들이 가벼운 ADHD를 앓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는 다소 놀랐다. 솔직히 그때의 기분은 안타까움이나 걱정, 혹은 연민이라기보다 뭔가 빈틈을 찾은 것 같은 반가움이 먼저였다. 이상하고 괴상한, 스스로도 납득하기 힘든 감정이지만, 그 순간 가장 정직한 표현은 그랬다. 반가움. 나는 재빨리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조안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가 도울 일이 있을 것 같아요. 

   그 이후로 조안과 함께한 수업은 지루했던 적이 없었다. 조안은 수업 시간에 열의가 있었고 진정성이 느껴졌으며 겸손한 태도로 사람들을 대했다. 특히 나에게 그랬다. 부자라서 착한 게 아니라 그런 천성을 특별한 재능으로 가진 사람. 그러나 수강생들의 생각은 좀 달랐다. 조안이 상대에 비해 어딘가 부족하다는 듯 자신을 낮추는 태도를 취하는 건 분명히 숨겨진 의도가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아무에게나 관심과 애정을 드러내는 건 아무래도 의심을 해야 하는, 그들이 아는 한 특히 경계해야 할 유형이라고 뒷담을 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람을 잘 못 믿잖아요, 하고. 하지만 그들은 의식조차 못 하는 것 같았다. 따지고 보면 그들의 경고가 나를 비난하는 것임을. 어쩐지 억울하고 분했다. 나도 견고한 선을 가지고 있다고, 관심과 애정을 받는 사람이 결코 아무나일 리 없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지금 너희들이 느끼는 건 진짜에 대한 가짜들의 시기 질투일 뿐이라고. 그러나 나는 대답 대신 입을 꾹 닫아버렸다. 어쩌면 그 때문인지도 몰랐다. 소문과 상관없이, 내 마음, 내 의지와도 상관없이, 나는 서서히 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나는 보란 듯이 조안과 자주 어울렸다. 수업 시간이 아닌 자리에 함께하는 일도 많아졌다. 공방이 아닌 곳에서 점심 식사를 하기도, 필요한 킨츠기 재료 쇼핑을 함께하기도, 그가 초대한 파티에 특별 게스트가 되기도 했다. 매일 안부 문자를 주고받았고, 아무 내용이 없는 통화를 했다. 조안과 함께 있을 때 나는 평소보다 조금 더 매끄러운 버전의 내가 되었다. 무엇인지 모르게 해방감을 느꼈는데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인가 물으면 그건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차에 행사가 있었다. 킨츠기 원데이 클래스를 진행해 달라는 조안의 부탁이었다. 

   원데이 클래스 장소는 조안의 아파트에 딸린 게스트 라운지였다. ‘시어머니 지인분들을 초대할 예정’이라는 문자만 왔을 뿐 별다른 설명이 없었다. 폐 수술 때문에 거동이 불편하다던 시어머니가 퇴원했다는 말을 덧붙였으니, 그를 위한 이벤트가 아닐까 짐작했을 뿐이다. 행사를 진행한다면 기존의 수업 시간 조절이 불가피했지만 조안의 부탁이라 고민은 오래 하지 않았다. 오히려 킨츠기 클래스를 홍보할 기회로, 알음알음으로 이런 종류의 원데이 클래스라면 해볼 만하다는 계산도 있었다. 마침내 클래스 두 개와 맞먹는 레슨비가 입금됐을 때, 나는 그날 하루 두세 명 기준이던 클래스를 셋, 넷으로 합쳐 진행하기로 했다. 예상대로 수강생들의 거센 민원이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침착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원래 특별 수업을 생각하고 있었고, 새로운 재료들도 준비되어 있다고.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죄송하지만, 저는 이게 월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날 조안은 유난히 조급해 보였다. 다과를 준비하면서, 주문한 도시락을 확인하면서, 그는 무엇인가를 놓쳐 떨어뜨리고 허둥거리는 기색을 감추느라 자주 입 꼬리를 올렸다. 조안은 최근 불면증 약 처방을 바꾸었는데 밤에 잠을 잘 자는 대신 낮에도 꿈을 꾸는 부작용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알코올과 벤가라 분, 금분과 마스킹 테이프를 꺼내 놓으며 시어머니를 위한 이벤트이니 몽롱한 상태를 유지하는 건 부작용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농담을 했다. 조안의 얼굴이 조금 누그러진다 싶던 때였다. 

   타쿠 나카노 스튜디오 박스네요?

   잘 차려입은 노부인이 게스트 라운지에 들어와 있었다. 노부인은 산소통이 달린 핸드 카트에 몸을 기댄 채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산소통과 연결된 투명하고 긴 줄이 노부인의 코밑에 걸려 있는 것을 보고 나는 그가 조안의 시어머니임을 알아차렸다. 조안이 재빨리 노부인 곁으로 가 그를 부축했다. 카트에서 산소통을 떼어낸 조안은 노부인의 동선에 맞춰 능숙하게 몸을 움직였다. 나는 잠시 두 사람을 멀뚱하게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조안의 시어머니가 산소 호흡기까지 할 정도의 중환자였나 싶어 놀랐으나, 그 뒤에는 긴장된 표정으로 노부인의 수족처럼 움직이는 조안에게 더 놀랐다. 노부인이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맨들맨들한 피부의 혈색이 기이할 정도로 건강해 보였다. 

   타쿠 나카노 스튜디오를 어떻게 아세요?

   조안의 오랜 취미가 킨츠기라기에 좀 찾아봤지요. 그 박스의 로고가 많이 보이더군요. 

   노부인은 내가 가져온 나무 박스를 손으로 가리켰다.  

   이제 막 킨츠기를 시작한 조안이 아니었던가? 의아하다는 생각을 하는데 노부인의 질문이 이어졌다.  

   오모테산도 힐에서 가장 큰 킨츠기 스튜디오라지요? 

   아, 네. 맞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노부인에게 준비해 간 프린트를 건넸다. 그는 메뉴판을 보듯 돋보기를 쓰고 내용을 죽 훑었다.   

   조안하고는 오래 알던 사이인가요?

   그렇진 않지만 마치 그런 것 같아요. 

   이번에는 노부인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부인과 조안의 말은 어딘가 조금씩 어긋나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닮은 점도 있었다. 호칭을 빼고 이름을 부르는 것을 포함해 말의 톤이나 속도, 특유의 손짓이 그랬다. 

   조안과 어머님이 많이 닮으셨어요. 

   노부인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그래요? 했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이었다. 조안의 입술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어딘지 이상하리만치 서늘한 기운이 맴도는 표정이었다. 어떤 각주도 찾을 수 없는 얼굴을 나는 조심스럽게 살폈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고 노부인이 잔기침을 시작하자 조안이 조용히 주방 쪽으로 사라졌다.

   제가 큰 수술을 했다는 얘기는 들으셨지요? 

   네. 폐 수술이라니, 너무 큰일을 치르셨어요. 

   맞아요. 보통 큰일이 아니죠. 다른 사람의 폐를 이식받는다는 건. 

   나는 또 한 번 놀라 입을 벌리고 말았다. 폐 수술과 폐 이식이 전혀 다른 말처럼 느껴졌다. 새삼 다른 사람의 폐를 이식할 수 있다는 게, 그러고도 저렇게 살아서 움직이고 말한다는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노부인은 비밀을 털어놓는 사람처럼 목소리를 낮춰 이렇게 말했다. 

   성경 말씀이 다 맞구나 싶더라고요. 부자와 나사로를 아시나? 지옥에 간 부자와 천국에 간 거지 얘기인데. 내가 온갖 복을 다 누렸잖아요. 하지만 죽음 앞에서는 다 쓸모가 없더라고요. 이제는 베풀면서 살아 보려고요. 덕은 나눌수록 쌓이잖아요. 안 그래요? 

   노부인은 자신의 집안에 비해 한참 기우는 조건의 조안을 가족으로 인정하기 시작한 것을 포함해 수술 후 자신의 시야가 얼마나 넓고 깊어졌는지에 대해 오래도록 이야기했다. 그토록 경계하던 사람들을, 어쩔 수 없이 잘못된 선택을 하고 게으름을 변명하는 사람들을 헤아리기 시작했다고.

   그래서 문득 조안이 한다던 킨츠기도 해볼 생각을 했지요. 마침 아끼던 장식이 깨지기도 했고······.

   노부인이 밭은 숨을 내쉬었다. 그때 조안이 무명천으로 된 손수건 더미를 들고 라운지에 들어섰다. 노부인이 조안을 향해 눈짓하던 그 순간이었다. 

   큭윽, 퉤. 

   짧은 순간이지만 나는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노부인이 조안의 손에 펼쳐진 손수건 위에 가래를 뱉은 것이다. 물론, 폐 수술, 환자와 가래, 이런 것들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그 상황을 기묘하게 느낀 것은 조안의 행동 때문이었다.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생경한 느낌. 크윽, 에 손수건을 펼치고 퉤, 에 가래를 받아낸 뒤 그것을 아무 거리낌 없이 자신의 주머니에 착착 접어 넣는 것. 그런 다음 조안은 이렇게 말했다. 

   죄송해요. 아직 회복 중이시라. 

   그리고 조안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알 수 없는 불편함이 밀려왔다. 잠시 넋을 놓고 있다가 얼른 다른 화제로 말을 돌렸다.  

   아! 아끼신다는 그 장식은 어디 있어요?

   이번에도 노부인은 조안을 향해 눈짓으로 말했다. 조안은 테이블 아래 놓여 있던 상자에서 알 모양의 도자기를 꺼냈다. 타조알 크기로 표면에는 아라베스크 무늬가 가득했는데 두 동강이 난 상태였다. 내가 조각난 장식을 살피는 사이 원데이 클래스 게스트들이 하나, 둘, 라운지에 도착했다.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조안은 시어머니 곁에 서서 무명 수건을 펼치고 접는 것을 반복했다. 마치 벌을 서는 아이처럼, 어떤 수치심을 견디는 사람처럼, 그럼에도 울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처럼. 조안은 사람들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콧잔등을 찡긋거리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게스트들이 식사를 하러 떠난 자리에는 수업 중 배부되었던 프린트가 그대로 버려져 있었다. 나는 천천히 정리를 마쳤다. 가방을 챙겨 복도를 지나는데 화장실의 열린 문틈으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조안이 구역질을 하고 있었다. 그가 문밖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황급히 문을 닫았다. 딸깍, 문 잠그는 소리가 났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몇 번이나 물 내리는 소리가 들렸고 한참 뒤 조안은 백지장 같은 얼굴로 화장실을 나왔다. 수업 시간 내내 있던 미소는 사라지고 없었다. 싸늘한 표정이었다. 나는 휘청이는 조안의 어깨를 부축했다. 그렇게까지는 하지 마세요,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그만두었다. 다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도와줄 게 없을까요?

   조안은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난히 창백해 보이는 얼굴로 꾸벅 인사를 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리고 다음날 나는 조안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이번 수업에는 나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조안과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화가 났다. 이유를 알 수 없어 더 그랬다. 마음이 조각나는 느낌이었지만 그렇다 한들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며칠 뒤, 나는 잘 지내라는 답을 보냈고 그게 끝이었다.   


   조안이 킨츠기 클래스를 그만두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공방에는 조안에 대한 소문이 떠돌았다. 수강생 중 한 명의 어머니가 노부인의 지인이라고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조안의 ‘인생’은 한마디로 ‘역전’이라고 했다. 인생 역전이라는 단어 앞에 둘러앉은 공방 여자들은 어쩐지, 와 아마도, 를 여러 번 반복했다. 평범함으로 점철된 인생이 어떻게 역전되는가, 하는 이야기에는 반드시 흔하디흔한 막장 드라마의 몇 장면이 필요한 법이었다. 돈 다발을 던져 주고 먹고 떨어져, 하는 장면이나 마시던 주스나 물을 얼굴에 끼얹는 장면 같은 것들. 하지만 이 모든 것의 하이라이트는 핍박받던 주인공이 혼전 임신 사실을 밝히는 대목에 있었다. 여자들은 목소리를 높였다.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면, 조안의 결혼은 성사될 리 만무하다는 거였다. 남의 이야기를 이렇게 오래 해보기는 처음이라고, 밝힌 수강생은 신이 난 얼굴로 자신의 긴 이야기를 이렇게 마무리했다. 

   사실, 그 여사님이 되게 선량한 사람이거든요. 자식의 미래가 걸린 일이니까 오죽했겠어요? 그래서 그렇게 독한 사람이 된 거지. 그러고 보면 멀쩡한 사람을 나쁘게 만드는 사람이 있긴 있어요. 안 그래요?


*


   조안에게 다시 연락이 온 것은 공방이 응봉동으로 이사를 하고도 한참 뒤였다. 그사이 나는 그에게 몇 번인가 전화를 했다. 통화를 할 수는 없었다. 콜백도 없었다. 무슨 사정이 있겠지 생각했지만 서운한 마음이 든 건 사실이었다. 내 전화를 받지 않는 조안의 SNS에는 생일 파티 사진이나, 취미로 프랑스 요리를 시작했다는 피드가 올려 있었다. 나는 종종 조안의 사진에 좋아요를 눌렀다. 셀카 사진에 안부 메시지를 남겼고, 바이올린을 켜는 아이 사진에는 박수를 치는 이모티콘을 달기도 했다. 나와 조안 사이에 뚜렷하게 나쁜 일이 없었고 내게는 그 정도의 안부를 물을 수 있는 적당한 이유도 있었기 때문이다. 조안의 첫 킨츠기 작품이기도 한 성작이 벌써 일 년째 내게 있었다. 시어머니가 아끼는 성작을 이렇게 방치하다니 아무래도 이상했다. 그러나 시어머니 간병으로 정신이 없을 수도 있겠다, 이해하려 하니 충분히 이해가 됐다. 그렇게 시간을 지내던 차에 조안에게 먼저 문자가 온 것이다. 

   좀 바빴어요. 그간 일도 좀 있었고요. 혹시, 점심에 시간 괜찮아요?

   간단한 안부를 전한 조안이 점심 식사를 제안했다. 전화를 끊고 몇 번이나 웃음이 났다. 팔다리 어딘가가 조금 자라난 느낌이었고, 그 느낌은 다행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혹시, 하는 마음이 일었다. 당장 이번 주까지 내야 할 대출 이자가 약간 모자랐다. 다음 달에 돌아올 수강료가 있어서 금방 갚을 수 있는 돈이었다. 생활이 여유로운 조안이라면, 혹시. 그렇다면 혹시. 예전에 조안이 내게 했던 기분 좋은 말들, 그때의 표정 같은 것들이 떠올랐다. 반갑게 인사를 해야지. 그 어느 때보다 더 반갑게,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하지만 이상하게 그런 생각 뒤에는 크윽, 퉤, 하는 소리에 맞춰 손수건을 폈다 접었다 하는 조안의 잔상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조안의 틈을 목격한 유일한 사람이라는 자만심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상관없었다. 일 년이라는 시간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지만 근거 없는 마음이 자라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나는 서울숲 근처 레스토랑에서 조안을 기다렸다. 시계를 보니 약속 시간이 십 분 지나 있었다. 나는 창밖과 휴대전화를 번갈아 봤다. 조안에게 주려고 가져온 쇼핑백을 내려다봤다. 최근 새로 작업한 킨츠기 작품과 조안의 성작을 꼼꼼하게 포장한 것이었다. 다시 조안에게 메시지가 온 것은 약속 시간이 조금 더 지날 즈음이었다. 

   미안해요. 거의 다 왔어요. 집에 일이 좀 생겨서 정신이 없네요.

   나는 괜찮아요, 천천히 오세요, 라고 메시지를 쓰다가 괜히 재촉하는 느낌이 들어 그만두었다.   

   말뿐인 줄 알았는데, 조안은 정말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았다. 생기가 도는 얼굴에 활기찬 표정. 새삼 마음이 서운했다. 많은 일을 겪은 사람치고 말수는 퍽 줄어 있었다. 문자나 전화로 별별 사소한 일들까지 다 이야기하던 그때와 비교해 보면 조안은 아랫배에 힘을 주고 있는 사람처럼 뻣뻣해 보였다. 

   집에 무슨 일이 있었어요?

   조안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 집 도우미 아줌마 때문에 작은 소동이 있었어요. 

   아줌마가 왜요?

   입주민들에게만 커피를 주는 라운지에서 커피를 마셨다나 봐요. 그래서 외부인 라운지 입출입을 강화하네 마네······.   

   아. 

   고작 커피 한 잔인데 뭘 그렇게까지 하나 싶죠? 

   그러게요. 

   나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정말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싶었다. 그러자 조안은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가 잘못된 건지 모르겠죠? 하는 얼굴. 잊고 있었지만 그건 조안의 버릇이기도 했다. 말 안 해도 다 안다는 듯 바라보는 것. 친절하고 다정한 눈으로 그 어떤 의도도, 감정도 실은 다 간파하고 있다는 표정.

   그런데 그건 그런 게 아니거든요. 선을 지키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 순간 뭘 뺏은 사람이 돼요. 느닷없이 나쁜 사람이 되는 거죠.  

   나는 그가 하는 이야기의 의도를 알 수 없어 되물었다. 

   그게 어떤 선인데요?

   글쎄요. 

   조안은 부드럽게 입 꼬리를 올렸다. 그것 역시 조안을 떠올릴 때 자주 떠오르던 표정이었다. 나는 그다음 대화가 순조롭게 이어지길 기대했지만 이야기는 하나씩 차례로 나오는 점심 코스 요리 주변을 뱅뱅 맴돌 뿐이었다. 디저트를 먹을 때쯤 나는 완전히 기분이 상해버렸다. 한 시간 동안 나눈 대화가 고작 근처 브런치 맛집과 오픈런이 필수라는 명품 신상에 관한 게 전부였기 때문이다. 


   식사를 마치고 나는 조안을 따라 서울숲을 걸었다. 초여름, 숲은 미열이 있는 사람의 숨처럼 뭉근한 열기가 떠돌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풀 비린내가, 묵직한 습기가 코끝을 맴돌았다. 산책을 하다 갈 계획이라고 말했지만 실은 숲에서 누굴 만나기로 했다는 조안을 따라 나선 것이나 다름없었다. 할 말이 있었는데 그게 무엇인지 확실치 않았기 때문이고, 아직 전달하지 못한 쇼핑백이 손에 들려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조안은 조금 걷다가 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벤치에 자리를 잡으며 말했다. 

   요즘엔 골프에 푹 빠졌어요. 필드도 자주 나가고 레슨도 꾸준히 받고. 올 겨울에는 지인들과 하와이 쪽으로 필드 레슨을 가볼까 해요. 

   골프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잖아요. 

   그땐 그랬는데, 지나고 보니까 사람들과 어울리기에 이만한 게 없더라고요. 

   궁금한 게 그런 건 아니었지만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뭔가 할 말을 다 못 한 사람처럼 떨떠름한 표정을 읽은 것인지 조안은 잠시 나를 바라보다 이렇게 말했다. 

   어머님은 돌아가셨어요. 

   나는 짧게 탄식했다. 

   그때 잘 회복하신 줄 알았는데. 

   수술 부작용이 있었어요. 거부 반응이 심했거든요. 

   왜요? 

   왜요? 조안이 내 말을 똑같이 따라 하더니 푸훗,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왜냐고 물으니까 그 이유가 나한테 있는 것처럼 들리네요.  

   조안은 시어머니의 죽음 이후 시간적 여유가 생겼다고 했다. 그래서 운동도 시작할 수 있었고, 프랑스 요리도 배울 수 있었다고. 불면증 약은 아직 먹고 있지만 증세는 많이 좋아졌다고 했다. 공방에 나오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서는 끝까지 별말이 없었다. 나는 무엇인가를 포기하는 마음으로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조안은 침묵이 흐를 때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올려다보았다. 미지근한 바람이 불어왔다. 이윽고 조안은 자신이 할 말은 모두 끝냈다는 듯 휴대전화를 봤다.

   미안해요. 여기서 지인을 만나기로 해서. 

   나는 그제야 엉거주춤 벤치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들고 있던 쇼핑백을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조안의 첫 킨츠기 작품이요.   

   조안은 쇼핑백 속 나무 상자에서 성작을 꺼내 들었다. 유리잔 위에 금빛 경계가 매끈하게 반짝거렸다. 

   단차를 이렇게 잘 이어 놓고 왜 안 가져갔어요? 

   성작을 건네받은 조안은 내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그간 공방이나 성작, 나를 잊고 지낸 미안함이나 서운함 같은 것은 없었다. 

   이것 때문에 그렇게 연락을 했던 거예요? 

   조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성작을 상자 속에 도로 넣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 안 그래도 돼요. 

   부탁인지 명령인지 애매한 말투였다. 무엇을 안 그래도 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문득, 내가 지금껏 이으려 했던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왜요? 

   수습할 새도 없이 튀어나온 말이었다. 나는 뭔가를 망쳤다는, 그러나 이미 늦었다는 생각을 했다.

   주해 씨. 

   심장 근처로 시큰한 무엇이 얇은 균열을 내며 지나갔다. 우리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의 답은 이미 충분했다. 주해, 였던 관계가 주해 씨, 하고 벌어진 느낌. 조안은 입속에 씁쓸한 것을 물고 있는 사람처럼 인상을 찌푸렸다.  

   단차가 그렇게 쉽게 이어지던가요?

   조안은 이만하면 상대할 만큼 한 것 아니냐고, 이제는 그만 좀 알아들을 때도 된 게 아니냐고 다그치듯 말했다. 나는 천천히 조안의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멀리서 한 여자가 운동복 차림으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조안을 향해 손을 흔드는 그가 나를 지나쳐 벤치로 향했다. 등 뒤에서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는 사람이야?

   아니, 아니야.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두 사람의 소곤거리는 말소리가 귓가에서 멀어져 갔다. 두 뺨이 달아올랐다. 위잉, 하고 이명이 일었다. 어디선가 도, 미, 솔, 솔, 솔, 하는 서툰 피아노 소리가 이명에 섞여 들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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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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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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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잔잔
    감동했어요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 2024-03-29 11:51:57
    잔잔
    감동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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