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숭아 심기
- 작성일 2024-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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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 심기
서고운
물줄기는 맹렬한 기세로 솟아올랐다. 시장 주차장이 있던 자리에 주상복합이 들어선다고 했고, 한창 땅을 파던 중에 수맥을 건드렸다. 수천 년 넘게 땅 아래를 누볐을 지하수가 터졌다. 5미터가 넘는 높이의 물기둥 주위로 서른다섯 가구가 대피했다. 공사는 중단되었지만 물을 멈추기는 어려웠다. 시장은 잠정적 휴업에 들어갔다. 동네 전체가 거대한 아쿠아리움이 된 듯 보였다. 벌써 일주일째였다.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자매의 빌라 아래로도 물줄기는 선명하게 보였다.
금정은 어제와 똑같은 모양으로 베란다에 서서 그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언니.”
은정의 부름에 금정이 초점 없는 눈으로 돌아보았다. 우리 집은 괜찮을 거야. 은정은 위로 비슷한 말을 건넸다. 물론 걱정이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금정과 살림을 합치면서 겨우겨우 이사를 마친 지 석 달도 되지 않았다. 자매는 말없이 잠시간 같은 곳을 바라본 채 서 있었다.
“너는 몰라.”
금정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뭐를?”
“자꾸 죽는단 말이지.”
금정은 무언가 심기를 좋아했다. 씨앗을 심고 물을 주고 달걀 껍데기를 말리고 빻아서 흙에 뿌렸다. 작은 바질 모종을 키워 꽃을 피우고 씨를 털어내 바질 2세를 만들기도 하고, 레몬의 씨앗을 하나하나 파내서 심기도 했다. 아보카도를 먹고 나선 아보카도 씨앗을, 사과를 먹고 나선 사과 씨앗을 심었다. 타일 바닥에는 흙이 버적버적 밟혔다. 아기자기하고 예쁜 정원은 아니었다. 금정은 풀을 키워냄으로써 구원을 찾으려는 듯 아등바등 씨를 파내고 심고 물을 주고 수시로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엄마 바질의 잎은 하루가 다르게 축축 늘어졌다. 쑥쑥 자라나던 아기 바질들은 생장을 멈추고 점차 검어졌다. 사과 싹은 손가락 하나만큼 자라더니 갑자기 말라 죽어버렸다. 물을 너무 안 주었나. 아니면 많이 주었나. 뭘 해도 탈이 나는 게 제 모습 같다며 금정은 풀이 죽었다. 금정 역시 점차로 말라 가는 듯했다. 일까지 그만두고 집 안에만 처박힌 지 벌써 일주일이 넘어갔다.
“이상해.”
“뭐가?”
“다들 죽는다니까.”
죽는다니? 은정의 마음 한쪽이 따끔해졌다.
“키우다 보면 좀 시들 때도 있는 거지. 겨울이잖아.”
금정은 푸석해진 레몬 잎사귀를 차례로 쓰다듬으며 도리질했다.
“너는 시간이 어제보다 오늘 더 빨라진 걸 못 느끼겠니?”
금정은 어느새 복숭아 화분을 붙잡고 은정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두 달 전 복숭아를 먹고 나서 만든 화분이었다. 복숭아 씨앗은 단단한 껍데기로 둘러싸여 있어서 신발장을 뒤져 찾아낸 망치로 두들겨야 했다. 그렇게 꺼낸 뽀얀 속씨를 손바닥 크기의 화분에 심었다. 한 달 만에 아주 작은 싹이 트더니 이제 손가락 두 마디쯤 자라났다.
“어쩌면 중력이 약해진 걸지도 몰라. 그래서 물은 위로 솟고 풀은 죽어가는 거야. 아주 작고 얕은 것들이 있어. 알고 싶지 않아도 알 수밖에 없는.”
금정의 목소리는 작지만 단호했고 은정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금정은 원래 그렇게 이상한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일상을 최대한 일상답게 만들기 위해 열중하는 사람이었다.
“난 다녀올게.”
은정은 금정에게서 화분을 뺏어들고 세탁기 위로 올려두었다. 여기가 그래도 볕이 잘 드니까, 일단 여기 둬봐. 금정은 고맙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이내 우렁차게 잘 다녀와! 하고 인사했다. 자매는 어떤 상황에서도 인사성이 밝았다.
집 근처 카페의 오전 시간은 꽤 한가한 편이었다. 은정은 이어폰을 양쪽 귀에 찔러 넣고 10월 여돌 신곡 플레이리스트를 재생했다. 둔중한 비트가 흘러나왔다. 은정은 고개를 까딱이며 작업창을 열었다. 데이트 앱 데모 프로그램의 회원 샘플에 평가를 남겨야 했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남자들의 얼굴이 화면 위로 주르륵 올라왔다. 은정은 한 명 한 명 클릭하며 선호도 점수와 함께 예상되는 직업, 취미, 성향 등을 적었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은정과 같은 작업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인공지능은 이런 식으로 로맨스를 학습한 뒤 회원들이 서로 어울리는 짝을 만날 수 있도록 할 예정이었다.
인공지능을 학습시키는 일은 아주 미세하게 쪼개져 있기에 은정은 열심히 일거리를 사냥해야 했다. 이렇게 미세한 과제들을 하루에 사오백 건은 해내야 최저임금 수준의 일당을 채울 수 있었다. 빠르게 가성비를 판단해서 잽싸게 채가거나 버렸다. 사무 공간은 당연히 없는 일이었고, 덕분에 은정은 자판이 뻑뻑한 노트북을 들고 방구석과 카페를 전전했다. 어디서든 적당한 집중력과 긴장감으로 일거리를 해치워야 했다. 요즘은 그렇지 못했지만.
은정은 결국 현비와의 대화창을 켰다. 마지막 메시지가 어제와 똑같이 떠 있었다.
- 그럼 배는 일본말로 뭐야?
은정은 인공지능에게 하는 것만큼이나 현비에게도 수많은 메시지를 보냈다. 이틀 전 보낸 메시지를 확인하기 위해 끝도 없이 스크롤을 올려야 하는 그런 대화창을 현비와 공유했다. 주로 아주 시시콜콜한 일상의 이야기였고, 말을 시작하는 사람은 대부분의 경우 은정이었다. 우리 언니 또 뭐 심음. 센터 옆에 라멘집 생긴 거 봤어?
현비는 항상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죽고 싶은 게 아니라 사는 것을 하기 싫은 거야. 현비는 이 차이를 아주 중요하게 여겼다. 나는 무언가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 자체가 못 돼. 현비처럼 정말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사람은 처음이라서 은정은 자주 불안해졌다. 2년 전 문화센터에서 만난 동갑내기 친구, 그러니까 가끔씩 함께 술을 먹고서 다 같이 죽어버리자! 외치곤 하는 그런 정도의 관계였지만 현비가 정말 죽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생긴 뒤로 은정에게는 현비가 너무 중요해졌다. 현비는 아주 짧은 유통기한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 같았다. 그런데 제대로 된 냉장고조차 만나지 못할 운명의 그런 사람. 물론 현비는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무엇이든 하기 싫어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죽지도 못할 거야, 니 걱정이나 해, 골골백년이라고 나는 너무 오래 살 것 같아······. 그러더니.
현비 생각을 하자 모든 세포 하나하나가 뒤집히는 듯 속이 울렁거렸다. 그래서 되도록 생각을 안 하려고 했지만 현비를 떠올리지 않으면 정말로 현비를 잊게 될까 봐, 은정은 수련하는 마음으로 현비를 자주 그려내곤 했다. 아이처럼 가는 목소리가 은근 또랑또랑해서 귀에 콕콕 박히던 느낌, 그 목소리로 은댕아, 하고 부르던 것, 웃음을 터뜨리기 전에 잠깐씩 찌푸리곤 하던 미간, 무언가 쌓였던 말을 뱉어낸 뒤에는 잠시 실룩이던 입가, 그리고 현비가 자주 사용하던 햄스터 캐릭터 이모티콘이라든지 헐랭, 허룽, 개대박이네, 하던 감탄사 따위를 떠올렸다.
- 은댕, 산소 마스크가 일본말로 뭐게
- 몰라. 뭔데?
- 산-소 마스크
- ㅋㅋㅋ 뭐야 그게
- 그럼 트램은 뭐게
- 트-램?
- 땡. 토라무!
- 귀엽다 ㅋㅋ
- 귀엽지
- 그럼 배는 일본말로 뭐야?
현비는 여행을 가서 죽었다. 은정의 마지막 질문에는 답하지 않은 채로. 오사카에서 후쿠오카로 가는 여객선 위에서 뛰어내렸다고 했다. 작은 배낭을 메고 온 작은 한국 여자가 사라졌다는 사실은 현비의 시신이 고양이가 많은 어느 섬에 떠오르고 나서야 알려지게 되었다. 여름의 막바지였다.
대화창을 끄고 은정은 잠시간 엎드렸다. 여돌 플레이리스트가 끝나고 알지 못하는 외국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프랑스어인가. 눈을 감고 낯선 노랫말에 한참 귀를 기울였다. 은정은 엎드린 상태로 데모 프로그램의 챗봇을 켰다. 배는 일본말로 뭐야? 은정이 챗봇에게 물었다. 유람선 데이트를 추천합니다. 서울에서 유람선 데이트를 즐길 수 있는 코스는······. 싸구려 로맨스를 학습해 온 챗봇은 엉뚱한 대답만을 했다.
*
일을 대강 해치우고 집으로 돌아온 은정의 눈에 가장 먼저 띈 건 부엌 한구석에 박혀 울고 있는 금정이었다. 언니. 신발을 벗다 깜짝 놀라 금정에게 달려갔지만, 금정은 악몽에서 갓 깨어난 듯 서럽게 어깨를 들썩이기만 했다.
“언니 진짜 요즘 왜 그래.”
퉁퉁 부은 얼굴의 금정이 그제야 은정을 돌아보았다.
“나 자꾸, 이상한 게, 보인다.”
“뭐가.”
“지금도, 있어.”
“어디.”
“저기. 저기 있어.”
금정은 웅크려 앉은 채로 손가락을 살살 들어올렸다. 가늘게 떨리는 손가락이 은정의 등 뒤를 가리켰다. 무섭게 왜 이러는 거야. 은정은 뒤를 돌아보았지만 대충 던져 놓은 택배 상자 말고는 딱히 보이는 게 없었다.
“너는, 안 보이지?”
“그러니까 뭐가.”
“어떤 여자가, 계속.”
“······.”
“춤을 추는 것 같아.”
금정은 울음을 삼키고 가만히 숨을 골랐다. 은정도 숨을 멈추었다. 미세하게 몸이 떨려 왔다. 은정은 금정의 겨드랑이에 양손을 넣고 끙차, 일으켰다. 온몸에 힘이 빠진 금정은 물에 젖은 베개마냥 무거웠다. 숨 쉬어, 하고 같이 숨을 골랐다. 들이쉬고, 다시 내쉬고, 천천히······. 작지만 거친 숨소리가 싸늘한 공기를 채웠다.
“지난달부터야.”
금정이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휴지조각인 줄 알았어. 뭔가가 휙 스쳐 지나간 듯 보이는데 다시 보면 별거 아닌 그런 거 있잖아. 그런데 그게 점점 또렷해지고 커지고······. 그러다가 지지난주였나, 머리가 너무 아파서 조퇴를 하고 돌아왔는데 처음 보는 신발이 있는 거야.”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금정이 허공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별 생각 없이 방으로 들어갔는데, 생각해 보니까 정말로 그 신발이 처음 보는 신발이고······.”
“응.”
“물에 다 젖어 있었어.”
금정이 은정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생애 가장 큰 비밀을 말하는 아이처럼 속삭였다.
“그때부터 걔가 이 집에 계속 살아.”
*
현비를 처음 만났을 땐 정말 더워서 모든 것이 끔찍했다.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릴 때면 뒤통수가 녹아내릴 것 같아서 머리를 다 집어 뜯고 싶었고, 방바닥에 누우면 온몸이 끈적거려 하루에도 샤워를 두세 번씩 했다. 세상이 날 말려 죽이려는 게 분명해, 하고 확신할 때쯤 집 근처에 문화센터가 생겼다. 수영을 신청하고 싶었는데 수영장 안에서도 마스크를 써야 한다기에 포기했다. 대신 주3회 요가반에 등록했다.
평일 낮 수업이라 그런지 수강생들은 대부분 사오십 대 주부였다. 문화센터에서 평일 낮 요가 수업을 듣는 스스로에게 주눅이 든 은정 앞에 어느 날 나타난 사람이 현비였다. 은정은 햄스트링이 짧았지만 허리가 유연했고 현비는 햄스트링이 유연한 대신 허리가 뻣뻣했다. 그래서 은정은 후굴 자세를 잘했고 현비는 전굴 자세를 잘했다. 수업이 끝나면 아줌마들과 함께 샤워장으로 향했다. 물을 양껏 틀어 두고 샴푸를 하는 아줌마에게 눈을 흘겼고, 그러다가 현비와 눈을 마주치기도 했다. 머리서기 동작을 할 때는 현비와 짝꿍이 되었다. 어느덧 두 사람은 수업이 끝나면 찬물 샤워를 하고서 자연스럽게 맥주 한 잔을 하러 다니기 시작했다.
그때 은정은 구직을 계속해야 할지 국비지원으로 코딩이라도 배워야 할지 고민하던 시기였고, 현비는 컴퓨터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일들을 한다고 했다. 처음에는 인스타그램에서 ‘AI시대 누구나 할 수 있는 부업, 하루에 100달러 가져가세요’ 따위의 릴스를 보고 부업으로 시작했는데 우울증이 심해지면서 회사를 그만두고 그런 일들만 계속하게 되었다고 했다. 데이터를 솎아내고 이름 붙이고 설문에 응답하고 오탈자를 골라내거나 이미지 설명을 달고······. 인터넷 세상에서 반드시 필요하지만 절대 보이지 않는 잡일, 이라고 현비는 표현했다. 하루에 100달러를 가져가려면 그런 잡일을 하루에 천 건도 넘게 해야 한다고, 그래서 현비는 밤낮이 따로 없다고 했다.
은정은 현비를 따라 그런 일거리를 찾고 따내는 방법을 배웠다. 인공지능 비서, 인공지능 상담, 인공지능 다이어트, 인공지능 쇼핑······. 되는 대로 인공지능을 갖다 붙이고서 온갖 최첨단인 척을 다 하지만 사실 프로그램이 굴러가게끔 만드는 건 결국 은정과 현비 같은 수천, 수만의 인간들이었다. 인공지능을 상대하며 건당 몇 센트의 돈을 받는 그런 사람들. 사무실이 없어도 되는 사람들. 은정은 궁금해졌다. 사람이 만드는 것을 왜 아닌 척하는 걸까. 왜 사람의 흔적을 걷어내고 싶어 할까. 일을 하다 보면 문득 외로워졌다.
여름이 지나고 다들 도톰한 카디건 하나씩을 걸치고 다닐 즈음, 현비는 처음으로 3차를 가고 싶다며 문화센터 근처 놀이터로 은정을 이끌었다. 알록달록한 벤치에 앉아 현비는 소주를, 은정은 맥주를 마셨다. 하도 화장실을 찾는 은정에게 현비는 야, 너 맥주만 마시니까 화장실을 그렇게 자주 가지, 하면서 맥주 캔에 소주를 콸콸 들이붓기도 했다. 사람이 가성비는 없어도 주성비는 있어야지. 현비는 그렇게 말하고서 진짜 멋진 말 아니냐, 하고 호탕하게 웃었는데 은정은 금세 취해서 흐릿해지는 초점을 붙잡느라 연신 눈을 찡그려야 했다.
“은댕아.”
“응?”
“너네 언니 뭐 많이 심는다고 했지?”
“응.”
“엄청 열심히 키운다고 했지?”
“응.”
“나도 심어 달라고 하면 안 될까?”
“응?”
“나는 죽고 싶은 마음이 안 들면 좋겠다. 아무 생각 없이 할일을 하면서,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양치하고 옷 갈아입고 방도 좀 정리하고 밖으로 나와서 일인분의 몫을 하고 돈을 벌고 집에 돌아와서는 아무 고민 없이 쉬고 싶어. 그런데 나는 그렇게 못 하니까 누가 나를 그렇게 돌봐주면 좋겠는 거야. 이런 생각을 하면 또 죄책감이 생겨. 나는 진짜 쓸모없는 인간이구나, 일인분이 안 되는 인간이구나, 이렇게.”
“나도. 또박또박 사는 거 너무 힘들다.”
은정도 언니가 무언가를 심고 그 씨앗을 살려내기 위해 물을 주고 햇볕에 내다주고 하는 것을 보면서 저런 화분에 심기고 싶다, 그래서 아무 생각도 고민도 죄책감도 없이 그냥 사니까 살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했다. 얼른 코딩도 배우고 데이터 라벨러 자격증도 따고 영어 성적도 새로 갱신해야 하고······. 부자가 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가난한 것이라고, 방법을 알려 줘도 따라오질 않는 사람들 때문에 너무 답답하다고 채근하는 정체모를 강사들의 이야기를 한동안 쫓아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여유로운 삶을 쟁취하는 것은 방법의 문제가 아닌 듯했다. 저출산이고 취업이 어렵고 일하는 게 고되고 돈이 없어서 인생이 힘든 게 아니었다. 그런 삶이 보잘 것 없어 보인다는 게 가장 힘들었다.
“내가 신기한 거 보여줄게.”
현비가 은정 앞에 가까이 앉아서 양손을 펼쳐 보였다. 현비의 손바닥을 멀뚱히 바라보는 은정에게 현비는 너도 따라 해야지, 라며 은정의 손을 받쳐 올렸다. 그리고 눈을 감아. 은정은 현비의 목소리를 따랐다.
“발가락을 떠올려. 아니면 손톱도 좋아. 너의 몸 어딘가에 있는 아무거나, 대신 평소에 한 번도 생각하지 않는 그런 거여야 해.”
내가 생각하지 않는 내 몸이라······. 발가락은 자주 삐끗하기 때문에 하루에 한두 번씩은 들여다본다. 그러므로 탈락. 손톱도 자주 깎기 때문에 탈락. 한참을 생각한 뒤에 은정은 엉덩이를 떠올렸다. 앉을 때도 걸을 때도 항시 사용하는 부위지만 엉덩이에 대해 생각한 적은 별로 없는 듯했다.
“응, 떠올리고 있어.”
“그러면 이제 나를 따라서 숨을 쉬어 봐. 하나, 둘, 셋 하면서 숨을 들이쉬고 열을 셀 동안 참아. 그리고 다시 하나, 둘, 셋 하면서 천천히 내뱉는 거야. 그러면서 몸을 좌우로 살랑살랑, 춤을 추듯, 호흡에 맞춰 움직여 봐.”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다시 하나, 둘, 셋······.
얼마나 있었을까. 은정의 머릿속에 커다란 엉덩이가 두둥실 떠올랐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엉덩이. 아마도 나의 것일 엉덩이. 은정은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보드라운 듯 보이면서도 오돌토돌 거친 부분도 있고 쫙쫙 갈라진 튼살도 있었다. 은정은 엉덩이에 발을 내딛었다. 쫀득하게 착착 감기는 느낌이 좋아 가볍게 뛰어오르기도 했다. 호흡을 몇 번 더 반복하자 엉덩이가 밝게 빛을 내기 시작했다. 눈을 감았는데도 눈앞이 환했다. 펼친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려 왔다. 그러다가 순간,
어?
온 도시가 정전이 된 듯 깜깜해졌다. 모든 세포 하나하나가 갑자기 죽어버린 듯, 블랙홀에 빠진 듯, 아주 잠깐 그런 순간이 찾아왔다. 캄캄한 와중에 희끄무레하게 무언가 보이기 시작했다. 엉덩이 동산 위에 앉아 지금 이 자세 그대로 앉아 있는 두 사람. 아마도 현비와 나? 그 주위로 따뜻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면서 은정의 몸 역시 구석구석 뜨거워졌다. 은정은 눈을 떴다.
“느꼈어?”
“응, 진짜 이상하다.”
“세상에는 수많은 차원이 공존하고 있어. 너는 그중 하나에 다녀온 거야.”
“환각 같은 건가?”
“일종의 명상인데 내가 개발했어. 진짜인지 아닌지는 몰라.”
“자주 해?”
“종종. 그럼 잠깐 죽다 살아난 느낌이 들어. 그게 은근 큰 위로가 되거든.”
그날 이후로도 은정은 현비의 명상을 몇 번 시도해 봤다. 현비 없이 혼자서는 잘 되지 않았다. 아마 현비만의 어떠한 능력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도 모르고 아무런 생산성이 없는 그런 능력. 일인분이 안 되는, 사무실이 필요 없는 누구나 하나쯤 가지고 있는 그런 능력 중 하나 말이다.
*
금정은 퉁퉁 부은 얼굴로 된장찌개를 끓였다. 햇굴을 넣고 두부를 숭덩숭덩 썰어 넣었다. 밥상을 차리면서 금정은 훨씬 차분해졌다. 은정은 그런 금정의 팔짱을 끼고 어깨에 기댔다. 며칠 새 어깨가 너무 뾰족해졌다.
“복숭아를 심어서일까?”
“응?”
“할머니가 그랬어. 복숭아는 집 안에서 키우는 거 아니래. 제사상에도 복숭아는 안 올린다잖아.”
금정은 기억이 안 난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밥상머리에 앉았다. 하긴, 잘 자라지도 않는 거. 그게 뭐라고. 둘은 한동안 말없이 각자의 음식을 입에 넣고 씹고 삼켰다. 은정은 물에 젖은 신발을 신고 왔다는 귀신을 곱씹었다. 금정의 눈앞에서 계속 춤을 추고 있다는 귀신의 몸짓을 상상했다. 혹시나, 혹시나······. 언니는 현비의 존재에 대해 몰랐다. 현비의 죽음에 대해 아무한테도 말한 적 없었으니까. 아무도 묻지 않았고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았다. 현비의 가족조차도 현비의 장례를 하루 만에 끝냈다. 은정은 부고 문자도 받지 못했다.
“언니.”
“응?”
“혹시 그 귀신, 지금도 있어?”
“응.”
“아직도 춤을 춰?”
“응.”
“어떤 춤이야?”
금정은 정자세로 반듯하게 앉았다. 손바닥을 펼쳐 올려 좌우로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천천히, 살랑살랑, 호흡에 맞춰······. 명상하는 것 같네. 은정이 중얼거렸다. 나도 보고 싶다. 현비가 보고 싶다. 은정은 금정을 따라, 귀신의 몸짓을 따라 몸을 좌우로 흔들었다. 눈을 감고 엉덩이를 떠올리며, 현비의 호흡법에 맞춰 숨을 들이쉬고 참았다가 내쉬면서. 두둥실 엉덩이가 떠오르려는 순간,
어?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밥상이 흔들렸다. 거대한 멧돼지가 빌라로 돌진이라도 한 듯 순간 둔탁한 진동이 느껴졌다.
설마.
은정은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빌라의 출입문 바로 앞에서 가느다란 물줄기가, 튼살처럼 갈라진 아스팔트 사이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요란하게 울리는 핸드폰 액정으로 노란색 재난문자가 쏟아졌다. 서대문구 일대 지하수 폭파 사고 발생. 인근 주민 여러분 대피 요망. 차가 급제동을 거는 소리, 사람들이 이게 뭐야! 하고 외치는 소리도 들렸다. 한두 군데서 일어난 사고가 아닌 듯했다. 은정을 쫓아 내려온 금정이 멍하니 얼어붙은 채 중얼거렸다. 정말로 모든 게 엉망이야.
자매는 짐을 꾸렸다. 은정이 기내용 캐리어 하나에 두 사람의 옷가지와 각종 충전기를 챙기는 동안, 금정은 연신 훌쩍이면서도 오래 두면 상할 반찬들을 냉장고에서 꺼내 장바구니에 넣었다. 보일러를 끄고 두꺼비집을 내리고 모든 창문을 꼼꼼하게 닫아걸었다.
“두고 가도 될까.”
금정이 신발을 신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데려갈 방법이 없잖아.”
말하고 나니 너무 매정한가 싶어 은정은 유령과 금정 모두에게 미안해졌다. 이내 신발을 도로 벗고 베란다로 향했다.
“얘를 챙겨 가면 쟤도 따라올지 몰라.”
은정이 복숭아 화분을 들고 어때? 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자 금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매는 엄마와 할머니의 집으로 향했다. 흩날리는 물방울이 안개가 되어 자욱했다.
*
할머니는 은정이 품에 안은 복숭아 화분을 보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매는 할머니의 품에 안겨 커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짐을 싸면서부터 바짝 얼어 있던 몸이 스르르 풀려 왔다. 엄마가 언제나 파도 같은 사람이라면 할머니는 그 아래를 유유히 산책하는 고래 같았다. 입술에는 옅은 미소만 띄우며 초승달 눈을 만드는 게 할머니의 웃음이었고 그게 왠지 당당해 보였다. 이제는 여든다섯의 나이에 어울리게 초승달 눈 아래로 검버섯과 기미가 가득했지만 누구보다도 꼿꼿한 허리로 서 있을 때면 자매보다도 큰 키를 자랑했다.
자매는 대충 짐을 던져두고 식탁에 모여 앉았다. 엄마는 찻주전자에 물을 올리며 그래서 뭐가 어떻게 된다는 거니? 하고 물었다. 은정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우리 동네에 수맥이 흐르는데, 그래서 개발이 한참 늦춰지고 있었는데, 시장이 바뀌고 슬슬 시동을 걸더니······ 그러다가 우리 집 바로 앞에서 또 물이 터진 거야. 지금 재난문자 오고 난리가 났어. 엄마는 그래서 보상금이라든지 보험이라든지 뭐가 나오는 거냐고 물었고 은정은 고개를 저었으며 금정은 또 훌쩍이기 시작했다. 엄마는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 집은 왜 대대로 헐리거나 쫓겨 나오거나 무너지거나 그런다니. 그러고 보니 그랬다. 유전인가.
“금정이는 여기서 출근하려면 힘들지 않겠어?”
“언니는 일 그만뒀어.”
엄마는 세상에, 엉망이네, 하고 마른세수를 했다. 쟤가 지금 일할 정신이 아닐 거다. 할머니가 턱을 들어 복숭아 화분을 가리켰다. 엄마는 잠시간 침묵을 지키다가 이내 너도 그러니? 하고 부드럽게 물었다. 자매는 동시에 고개를 갸웃했다. 할머니는 찻주전자의 불을 도로 끄며 말했다.
“선산에 다녀와야겠다.”
선산까지는 두 시간이 조금 넘게 걸린다고 했다. 산속은 도시보다 훨씬 추우니까 단단히 입어야 한다는 엄마의 말에 자매는 두툼한 니트를 골라 한 겹씩 더 껴입었다. 할머니는 부드러운 목도리를 자매의 목에 둘러 주었다. 엄마는 운전석에, 할머니는 그 옆에, 자매는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 한밤의 드라이브를 시작했다.
“우리 집안 여자들이 그렇다.”
경기도를 빠져나올 때쯤 할머니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엄마가 차선을 변경하며 거들었다.
“할머니도 그렇고, 작은증조할머니도 그렇고, 너 중계동에 큰할머니 알지? 그 할머니도 그렇고, 엄마의 큰엄마도 그랬어.”
할머니와 엄마에 따르면 금정이 겪는 일, 그러니까 유령을 보는 일은 자매의 집안 여자들 대대로 이어지는 특성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런 건 아니었다. 금정은 겪더라도 은정은 평생 겪지 않을 수 있었다. 귀신이 보이더라도 특별히 영적인 능력이 있는 건 아니어서 무속인의 길을 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엄마의 큰엄마는 그걸 잘 몰라서 신내림을 받았다가 돈만 날리고 선무당이라고 욕만 뒤집어지게 먹었다고 했다.
“그런데 엄마의 큰엄마는 우리 집안 여자가 아니잖아.”
은정이 의문을 제기하자 엄마는 대로 피로 이어지는 게 아니다, 하고 단호하게 답했다. 할머니가 자매를 돌아보며 속삭였다.
“대는 상실로 이어지는 거란다.”
차의 속력이 점점 올라갔다. 은정은 차창에 붙어 바깥을 내다보았지만 모든 것이 너무나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특징이 있어.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하는 사람만 볼 수 있지. 금정이는 누구를 보니? 누군지 알겠어?”
금정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할머니가 금정을 돌아보며 다독였다. 금정이가 사랑하는 누군가가 그리워하는 사람일 테니, 언젠가는 알게 될 거다. 금정은 내가 누구를 사랑하는지도 모르겠는데요, 하고 웅얼거렸다. 그건 원래 알기가 어렵지. 할머니가 엷게 웃었다. 은정의 숨이 조금씩 거칠어졌다. 창문에 하얗게 김이 서렸다.
“너네 엄마는 너네 아빠의 첫사랑을 봤다. 처음에는 누구인지 몰랐지. 이혼하고 나서 아빠 짐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옛날 사진을 발견하고 나서 알아챈 거야. 엄마가 얼마나 길길이 날뛰었을지 상상이 가니? 그러다가 곧 훌쩍거리더라. 젊은 나이에 얼마나 힘들게 갔으면 이렇게 찾아왔겠느냐고. 알고 보니 대학 때, 그 시절에 데모가 한창이었지, 데모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실종되었다고 했어. 아무도 생사를 몰랐지. 이제 우리는 알지만.”
“할머니는요?”
“나는 친구의 손녀딸을 봤어. 성수대교 무너질 때 간 아이다. 나도 몇 번 만난 적이 있는데 애가 참 귀염성이 있었어. 보자마자 단박에 알아봤지. 신발 한 짝이 없더라. 그날 백화점에 가서 애들 신발 중에 제일 예쁜 구두를 사서 현관에 두었어. 할머니가 너희들 절대 못 신게 했던 연두색 구두, 기억나니?”
연두색 구두······. 그런데 그거 언제부터 없지 않았어요, 하고 금정이 묻자 할머니는 그렇지, 지금 그 구두 가져다 둔 곳으로 가는 거다, 하고 룸미러를 보며 방긋 웃었다. 은정은 그 구두를 떠올렸다. 자고 일어난 햄스터처럼 따끈하고 보드라운 느낌. 은정은 그 감촉을 떠올리며 마음을 보다 단단하게 다독였다. 잠시 숨을 골랐다.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다. 은정은 핸드폰을 꺼내 챗봇에 접속했다. 일단 창을 띄우고 난 뒤에는 고민 없이 한 자 한 자 빠르게 입력했다.
- 그럼 배는 일본말로 뭐야?
- 한국어에서 ‘배’는 여러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과일의 일종인 배, 탈것으로서의 배, 신체의 일부 배가 있습니다.
챗봇은 역시나 엉뚱한 말을 내뱉었다. 은정은 꿋꿋이 다음 질문을 입력했다.
- 눈을 감고 손바닥을 펼쳐 올린 채 생각해 본 적 없던 너의 몸 어딘가를 떠올려 봐. 그리고 하나, 둘, 셋 하면서 숨을 들이쉬고 다시 열을 세면서 숨을 참은 다음에 하나, 둘, 셋 하고 숨을 내쉬어. 그러면 어떻게 되지?
어느덧 산중턱에 다다른 엄마의 낡은 소나타가 자갈길을 덜컹이며 올라갔다. 인터넷이 끊긴 듯 챗봇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네 여자의 정수리가 들썩였다. 이내 컴컴한 산중턱에서 차가 멈추는 순간, 챗봇이 답을 보냈다.
- 그러면 잠시 다른 차원을 볼 수 있습니다.
엄마는 금정의 손에 장바구니를 들려주며 제사를 지낼 때 필요한 것들이니 잘 가지고 올라가야 한다고 당부했다. 할머니는 은정에게 복숭아 화분을 들려주었다. 가서 심어야 하니 소중하게 들고 가라. 그러고는 처음 보는 버섯을 가져와 후후 불었다. 이걸 하나씩 꼭꼭 씹어 먹어. 한참 걸어야 하는데 기운이 날 거다. 은정은 버섯을 오물거리며 엄마와 할머니의 뒤를 따라 걸었다. 깜깜한 가운데 눈앞이 흐릿해지더니 몇 걸음 걷자 다시 모든 것이 또렷해졌다. 엄마는 훨훨 날아가는 듯 보였고 할머니도 지팡이를 탁, 탁, 짚으며 경쾌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서 엄마랑 할머니는 그 귀신들이 아직도 보이는 거야?”
은정이 묻자 엄마는 그렇다고 했고 할머니는 아니라고 했다.
“내가 그 아이를 보고 나서 매일을 갈등했어. 이걸 친구한테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친구는 매 순간 지옥 속에 살고 있었으니까. 내가 너의 손주를 본다. 이미 죽은 그 아이를 본다. 무너진 친구의 눈물을 매일 닦아 주면서도 결국은 말하지 못했어.”
할머니는 잠시 멈춰 지팡이를 고쳐 잡았다.
“그렇게 일주일이 가고 한 달이 가고 그러다가 친구가 죽었다.”
엄마는 벌써 저만치 앞서갔고, 자매는 할머니 뒤에 함께 멈춰 섰다.
“걔가 너무 보고 싶어. 그런데 나한테는 보이지 않아.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하는 사람, 그러니까 한 다리 건너서만 볼 수 있으니까. 그게 우리의 숙명이야. 그 뒤로는 아이도 보이지 않는다. 아마 제 할미를 따라갔겠지.”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하는 사람이라. 은정은 복숭아 화분을 품에 꼭 안았다. 네 사람은 고요하게 산길을 걸어갔다. 한참을 걷자 이제 올라가고 있는지 내려가고 있는지도 분간이 가지 않았다. 길도 다시 어두워지고 있었다. 온몸이 무거워지고 한기가 돌 때쯤 저 앞에서 수십 마리의 반딧불이가 반짝이는 듯 무언가가 보였다. 다 왔다. 할머니가 멈추어 자매를 돌아보았다.
“저게 우리 복숭아밭이란다.”
현비는 일본으로 떠나기 얼마 전, 은정의 집에서 일주일을 살았다. 집 계약 기간을 착각했다며 일주일만 신세를 지자는 부탁을 받았을 때 은정은 사방이 꽉 막힌 원룸에서 혼자 고독해 죽을 지경이었다. 금정과의 이사는 대출이 꼬여 한참 미뤄지고 있었다. 뭐라도 하자는 마음으로 신청한 코딩 수업은 전부 온라인으로 진행됐다. 다른 수강생들이 따릉이 보관 현황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코드라든지 반려견 맞춤형 식단을 자동으로 짜주는 코드를 짤 때 은정은 사소한 오타 하나로 끙끙대며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커다란 트렁크 두 개를 들고 엘리베이터 없는 5층을 올라온 현비가 반가웠다. 짐을 둘 데가 없어 보일러실에 캐리어를 쌓아 놔야 했고 잘 때는 서로 어깨가 맞닿지 않게 꼿꼿한 자세로 누워야 했지만 은정은 즐거웠다. 느지막이 일어나서 나란히 노트북을 열고 은정은 수업을 듣고 현비는 일거리를 사냥했다. 현비는 언제나 음악을 틀어 두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샤워하고 머리를 말릴 때는 케이팝을 들었고, 일을 할 때는 펑크록을 들었다. 해가 지면 알 수 없는 나라의 몽환적인 노래를 틀었다. 둘은 많이 먹고 많이 웃고 많이 떠들고 매일 술을 마셨다.
일주일이 금방 지나가고 마지막 밤, 두 사람은 에스파와 자우림, 레드벨벳과 피터팬컴플렉스 노래를 틀어 두고 소주 네 병과 맥주 열한 캔을 비웠다. 현비의 거대한 트렁크 안에 들어 있던 블루투스 마이크를 꺼내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일주일 연속으로 술을 마신다고 속이 다 깎이는 느낌에 신물이 올라왔지만 은정은 신이 났다. 밤이 깊었네. 방황하며 춤을 추는 불빛들. 현비가 한 소절을 부르면 은정이 이 밤에 취해 흔들리고 있네요, 하고 화답했다. 다시 만난 세계를 부르면서는 되도 않는 안무를 따라 하다가 풀썩 넘어지는 바람에 은정의 노트북에 소주를 엎기도 했다. 아씨, 얘 죽었겠다. 현비는 노트북에 묻은 소주를 옷소매로 쓱쓱 닦고서는 다시 노래를 불렀다. 널 생각만 해도 난 강해져. 울지 않게 나를 도와줘······. 어느 이웃이 현관문을 쿵쿵 두드리고 나서야 두 사람은 노래를 멈추었다. 술에 젖어 끈적거리는 바닥에 드러눕자 적막한 고요가 흘렀다.
“너 요즘에도 그거 해?”
“뭐?”
“명상.”
“아니.”
“왜?”
“요즘은 그거 하면 진짜 죽을까 봐 겁이 나.”
“그러는 애가 왜 맨날 죽고 싶다고 해.”
“내가 말했잖아, 죽고 싶은 게 아니라 그냥 사는 걸 하기 싫은 거라니까.”
은정은 그게 그거지 뭐, 하고서는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둘은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발개진 얼굴로 사진을 몇 장 찍고 화장실에 한 번씩 다녀와서는 오랜만에 명상을 시도하기로 했다. 손바닥을 이렇게 펼쳐 올리고, 똑바로 앉아서······. 얼마간 시간이 흐르자 그때의 그 느낌이 다시 찾아왔다. 모든 게 깜깜해지면서 엉덩이 동산에 앉아 노닥거리는 은정과 현비가 보였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은정은 이 순간을 붙잡고 싶었다. 저 둘에게 해야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그 말을 찾는 중에 쿵. 무언가 은정의 어깨로 둔탁하게 쓰러졌다. 눈을 뜨자 현비가 죽은 듯이 은정의 어깨에 기대 있었다. 은정은 현비를 흔들어 깨웠다. 현비는 숨도 안 쉬고 가만있더니 이내 깔깔 웃으면서 눈을 떴다.
“미친 놈. 놀랐잖아.”
“미안. 근데 좀 웃겼지.”
“응.”
두 사람은 서로의 어깨에 기댄 채 알큰한 술기운을 느꼈다. 은정은 이 순간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어 방 구석구석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술병과 마이크가 다정하게 나뒹굴었다.
“근데 은댕아.”
“응?”
“요즘 너무 외롭다.”
현비가 슬라임 한 통을 내밀었다. 나 슬라임 싫어하는데. 은정이 얼굴을 찌푸렸다.
“요번에 플랫폼 하나 새로 뚫었는데 거기는 페이를 적립금으로 주더라. 그래서 작업 서른 개쯤 하고 3달러 95센트를 적립금으로 받았거든. 배송비까지 하니까 살 수 있는 게 이거였어.”
은정은 뭐 그딴 곳이 다 있어, 하고 슬라임을 꺼내 방바닥에 굴렸다. 왜 사람들은 일하는 만큼 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현비가 중얼거렸다. 슬라임은 과자 부스러기와 두 사람의 머리카락을 가득 머금고 아주 오래된 껌처럼 흘러내렸다.
“현비야, 너 무한대를 본 적 있어?”
현비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은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가 여섯 살 때인가, 겨울바다에 간 적이 있어. 달도 안 뜨고 엄청 어두웠어. 바다는 무지하게 큰데 수평선이 보이지 않는 거야. 세상에 끝이 없는 게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게 된 것 같아. 그런데 그날 이후로 그전의 기억이 전혀 나지 않았어. 원래는 아기 때 기억도 다 했대. 신기하지. 그래서 나는 그때 한 번 죽었다가 다시 사는 느낌이야.”
현비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럴 수도 있겠네. 나도 그런 순간이 있었겠지. 다들 그렇겠지. 그리고 한동안 아주 조용한 시간이 찾아왔다. 각자의 머릿속에 각자의 멜로디가 흘렀다.
“은댕아.”
“응.”
“우리 오래 살자.”
“그래, 죽지 말자.”
“그러자.”
“죽지 마.”
“죽었다 깨어났다 하면서도 계속 살자.”
“응.”
엉덩이 동산에 앉아 놀고 있는 두 사람이 들어야 할 말은 그런 말이었을 것이다. 다들 멋진 인생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아니라고. 그냥 이렇게 다정하게 살아내기만 해도 다행이라고. 지금은 그런 시대라고.
*
나무마다 알알이 맺힌 복숭아에서 반짝이는 빛이 총총 뿜어져 나왔다. 은정은 홀린 듯 나무 사이를 걸으며 그 빛을 눈에 담았다. 여기, 한참을 걷던 엄마가 나무와 나무 사이 빈 공간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다, 그 화분 자리. 금정은 쪼그려 앉아 손으로 구멍을 파기 시작했다. 은정은 금정의 옆에 화분을 살포시 내려두었다.
“원래 복숭아는 예로부터 귀신을 쫓는 역할을 해왔어. 그래서 제사상에는 복숭아를 안 올리는 거야. 조상님이 못 찾아온다고. 그런데 우리 집은 반대야. 복숭아가 있어야 잡귀를 내쫓고 우리를 찾는 영혼이 무사히 올 수 있어. 너네한테는 복숭아는 절대 심지 말라고 했었지. 너무 일찍부터 유령을 보면 인생이 지나치게 피곤해질까 봐.”
엄마는 빛나는 복숭아 하나를 똑 떼어냈다. 한 입씩들 해. 금정이 먼저 한 입을 베어 물고 화분에서 복숭아 싹을 꺼냈다. 그리고 조심스레 구멍에 넣고서 살살 흙을 덮어 주었다. 은정도 복숭아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따뜻하고 달콤한 과즙이 금세 핏줄에 돌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은정이 들고 온 장바구니에서 물건을 하나하나 꺼냈다. 아주 작은 상과 술잔, 빈 접시와 스케치북과 크레파스가 전부였다. 뭘 그려야 할지 모르겠는데. 금정은 크레파스를 붙잡고 웅얼거렸다.
“눈을 감고 유령을 마주 봐야 해. 그러면 자연스럽게 떠오를 거야.”
할머니의 말에 금정은 눈을 감았다. 이윽고 금정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눈을 뜬 금정이 초록색 크레파스를 잡았다.
“술을 좋아했나 본데?”
금정이 그려낸 소주병을 보고 엄마가 빙그레 웃었다. 금정은 곧이어 다른 색 크레파스를 잡고 맥주 캔을 그렸다. 누구인지 아직 모르겠니? 할머니가 묻자 금정은 고개를 저었다. 은정은 현비의 이름을 그냥 확 뱉어버리고 싶었다. 산이 쩌렁쩌렁 울려 복숭아가 우수수 떨어질 만큼 큰 소리로 외치고 싶었다.
현비의 죽음 이후로 은정은 모든 것을 유예했다. 모든 마음과 통증과 욕망을 그냥 계속 미뤘다. 아침 명상을 하고 되도 않는 전굴 자세를 하고 미친 듯이 일거리를 사냥했다. 그렇게 외로운 일들을 끊임없이 해낼 때마다, 은정의 머릿속에는 현비와의 마지막 밤이 떠올랐다. 억울하게도 기억은 금세 흐릿해져서 어느 날 현비는 은댕아, 요즘 너무 외롭다, 라고 했다가 어느 날은 괴롭다고, 또 어느 날은 아프다고, 또 다른 날은 심심하다고 했다. 은정은 기억을 떠올리는 일이 인공지능의 작동 방식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언제는 출력이 잘 되었고 언제는 엉망이었다. 자꾸만 잘못된 장면이 끼어 들어왔다. 내가 정말 기억을 못 하는 걸까. 그날 나는 현비가 소중하지 않았던 걸까. 현비는 나 때문에 외로웠던 것일까. 은정은 이런 마음에도 시달려서 한동안 죄인이 된 것 같기도 했다.
어느 날 밤에도 은정은 누운 채로 그런 생각을 하다가 벌떡 일어났다. 깊은 밤이었다. 챗봇을 열고 현비와 샤워장에서 눈을 마주쳤던 일부터 줄줄 풀어냈다. 기억하는 것만으로는,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뭔가를 해야 했다. 밤이 새도록 챗봇에 이야기를 심었다. 반복해서 심으면 은정과 현비만의 경로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누군가에게는 오류이겠지만 그래서 두 사람에게는 유일한 정답인 그런 것. 그 후로 은정은 미동 없는 현비와의 채팅창을 보다가 지칠 때면 챗봇을 켜 현비, 하고 부르곤 했다. 챗봇은 은정이 바라는 대답을 한 번도 해주지 않았지만 은정은 챗봇에게 현비와의 기억을 모조리 쏟아부었다. 뻣뻣한 허리로 후굴 자세를 할 때 빨개지던 얼굴, 술을 마시기 전에 꼭 사먹던 겔포스, 거친 손등에 비해 너무 부드러웠던 손바닥, 번지점프는 못 하겠는데 패러글라이딩은 꼭 해보고 싶다고 했던 패기, 부탄 여행을 꼭 가고 싶다며 나중에 같이 가자고 했던 것······. 장면이 기억이 되도록, 텍스트가 데이터가 되도록 계속해서 쏟아붓다가 마지막에는 배는 일본말로 뭐야? 하고 묻고서 끔뻑이는 커서를 한참 동안 바라보곤 했다. 그랬는데······.
“이제 완성이다.”
할머니는 복숭아 하나를 똑 떼어내 접시 위에 올렸다.
“절 올리면 돼요?”
“아니, 곧 음악이 시작될 거야.”
은정은 치솟는 말을 모두 삼킨 채 눈을 감고 음악이 들려오기를 기다렸다. 서서히 몸에 한기가 돌 때쯤 부스럭대는 소리가 났다. 은정은 눈을 떴다. 할머니와 엄마와 금정이 우스꽝스러운 몸짓을 하며 춤을 추고 있었다. 나한테는 안 들리는가 보네. 유령을 볼 수 있는 사람만 들리는 음악인가 보다고 은정은 생각했다. 세 사람은 알알이 빛나는 복숭아 사이사이로, 은하수를 떠도는 혜성처럼 물 흐르듯 움직였다. 은정은 복숭아나무 아래 누워 부드럽게 떨어지는 별빛을 온몸으로 머금고 빛나는 복숭아 하나하나를 눈에 담았다. 그러면 잠시 다른 차원을 볼 수 있습니다······. 정말로 차원을 건너온 현비를 불러 앞에 앉혀 두고 싶었다. 은정은 챗봇에 다시 접속해 보려고 했지만 이제 정말 인터넷이 끊어진 듯했다.
은정은 몸을 일으켰다. 제사상 앞에 정자세로 앉았다. 손바닥을 펼쳐 올리고 눈을 감았다. 준비만 할 수 있었더라면, 그러면 덜 힘들었을까. 현비를 좀 더 다독일 수 있었다면, 할 수 있는 만큼 사랑을 담아 안녕, 잘 가, 말할 수 있었다면. 아빠의 첫사랑이라는 사람도, 할머니 친구의 손녀딸도, 이별을 준비할 수 있었더라면 덜 힘들었을까. 은정은 억울했다. 현비는 죽었는데 자기는 고작 억울해서 더 억울했다. 그래서 천천히, 호흡을 시작했다.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다시 하나, 둘, 셋······.
발그레한 엉덩이 별 위에 앉은 두 여자의 형상이 희끄무레하게 보였다. 은정은 그들에게 외쳤다. 난 그날 이후로 조금 망가졌어! 회복이 안 돼! 그러자 두 여자가 은정을 돌아보았다. 곧 아이처럼 가늘지만 또랑또랑하게 귀에 박히는, 익숙하지만 한동안 듣지 못한, 무지 그리운 목소리가 들렸다.
- 은댕아.
유예해 온 마음들이 마침내 물기둥처럼 치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이제는 현비가 있는 세상이 아니라 현비가 없는 세상을 살아내야 한다. 언젠가는 점점 흐려지는 현비의 얼굴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상실은 그렇게 죽었다 깨어났다 하면서 이어지겠지.
은정은 서서히 눈을 떴다. 복숭아나무에서 솟아오르는 수십, 수백의 빛줄기가 보였다. 세 여자가 황홀경에 빠진 듯 빛줄기 사이를 거닐며 춤을 추었다. 문득 은정은 현비가 죽은 이후로 한 번도 울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은정은 다시 눈을 감았다. 현비와 나눈 모든 이야기들이 한 데 뭉쳐 노래처럼 들려왔다. 복숭아가 알알이 빛나는 밤, 은정은 아주 오랜만에 울기 시작했다. 울음을 참기에는 너무 맑은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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튤립이 있는 식탁보 강태식 존슨 카운티 외곽에는 중산층들이 모여 사는, 거의 모든 면에서 깨끗한 주택가가 형성되어 있었고, 완전히 똑같이 생긴 집들이 - 지붕과 창문과 현관 손잡이와 마당을 두른 나무울타리의 모양까지 똑같은 집들이 - 거리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죽 늘어서 있었다. 진입로에는 작고 예쁜 우체통이 서 있고 - 어느 집이나 다 - 우유 배달 업체의 상표가 찍힌 낡은 주머니나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지 말라는 팻말이 울타리 한쪽에 걸려 있으며 마당 잔디가 빗질 자국이 남아 있는 머리처럼 잘 정돈되어 있었다. 화단에 심은 꽃들도 거의 비슷하거나 완전히 똑같아 보였다. 차를 몰고 천천히 지나면서 보면 그랬다. 어디선가 가끔 피아노 치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는데 모든 음이 기계가 치는 것처럼 정확했지만 음이 정확하다는 것말고는 전혀 특별할 것이 없는 연주였다. 얼마 전에 하나뿐인 아들 톰을 다른 주에 있는 대학에 보낸 벤 하우저와 로지 하우저도 그 거리에 있는 많은 집들 중 한 곳에서 살았다. 그들은 아직도 아들의 방문 앞에 멍하니 서서 그 안에 아들이 쓰던 물건들만 - 사인볼과 다 버리고 딱 두 개 남은 레고 모듈러 시리즈와 절대로 버리지 말라고 고집을 부려서 버리지 못한 낡은 청바지와 픽업트럭을 끌고 이케아 매장에 가서 사온, 벤이 꼬박 이틀 동안 조립해서 겨우 완성한 오래된 이층 침대와 디딤판에 노란색 번개 마크가 크게 프린팅된 스케이트보드 같은 것들만 – 남아 있다는 것을, 자기들이 그런 물건들과 함께 - 한때 아들이 필요로 했던 물건들과 함께 - 그 집에 남겨졌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벤과 로지는 아들이 자기들 품을 영영 떠났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했고 - 날마다 그런 짐작이 확고한 사실로 굳어 가는 것을 지켜보았고 - 자기들이 톰의 방문을 바라보며 아주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벤은 불을 켜지 않은 거실에 앉아 - 창 너머로 어둠이 차오르고 있었지만 벤은 희미한 빛이 감도는 그맘때의 거실을 둘러보며 오래 쓴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좋아했다. - 로지가 외출 준비를 완전히 마치고 이제 정말 다 끝났다고 말해 주기를 - 립스틱만 바르면 된다거나 스카프만 고르고 금방 나가겠다는 말말고 진짜 이제 정말 다 끝났다고 말해 주기를 - 기다리고 있었다. 벤은 탁자 위에 놓인 리모컨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리모컨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문득 생각이 난 것처럼 손을 뻗어 TV를 켰고, 채널을 이리저리 돌린 뒤에 다시 TV를 껐다. “뭐 해, 벤?” 로지의 목소리가 한 블록 떨어진 곳에서 망치질을 하는 것처럼 안방 문 너머로 들려왔다. 화장대 앞에 앉아서 눈썹을 그리거나 파운데이션을 더 꼼꼼하게 바르면서 몸을 뒤로 틀어 소리 지르는 로지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옷에 붙은 머리카락을 손가락 끝으로 집어 떼어내거나 잠자리에 들기 전에 침대보를 잡아 펴는 것처럼 오랜 세월 동안 숱하게 보아 온 모습들. “아
- 관리자
- 2024-10-01
이것은 사랑 없이는 깰 수 없는 유일한 꿈이었다. - 춤추는 무당 당골 이심과 춤추지 않는 무당 오키나와 영매 유타의 사진에 대하여 한정현 기생 아니고 무녀예요. 무당이라고요, 아저씨. 이 여자한테 그랬다간 저주받는다고요. 어쩌려고요? 팔아먹게? 그런 말을 했던 이는 곧 어흥, 하는 표정을 짓는다. 얼굴을 잔뜩 구기면서 말하는데도 생생한 눈빛이 빛난다. 사내는 입을 반쯤 벌리고 그이의 얼굴을 바라보다 퍼뜩 정신이 들었는지 되레 큰소리다. 내, 내가 억지로 잡아끌었나! 누가 이 얼굴에 돈을 내겠어! 그 말을 하면서도 사내는 손목이 잡힌 이심이 아니라 그이의 얼굴을 힐끗거린다. 나도 그냥 기생은 아니죠. 아저씨 그렇게 내 얼굴 빤히 보면 돈 내야 돼. 알죠? 아닌 게 아니라 그이가 입고 있던 소맷자락이 그것을 알려준다. 잘 다린 소맷자락에 수가 놓여 있다. 초량권번. 사내는 돈이라는 이야기가 나오자 아까보다도 낮은 자세로 어느새 이심의 손목을 놓고 슬그머니 물러선다. 사내가 놓아 준 이심의 손목은 줄이 그어진 듯 붉다. 공창제도는 한참 전에 없어졌지만, 부산이든 서울이든 이젠 사창제도가 판을 쳐요. 미군들에게 매매 놓아 주는 곳도 많고요. 몰랐나요? 어느 누가 꿀이라도 한가득 따라 놓은 걸까. 남북이 서로 총을 겨누며 싸운 지 1년이 넘고 보니 거리마다 향기는커녕 악취가 진동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향을 품고 있구나. 이심은 공창이 뭔지도 사창이 뭔지도 몰랐다. 이 부산이라는 곳에 오기 전까지. 다만 저건 알았다. 그이가 들고 있는 소매 끝에 달린 초량권번이라는 이름. 이 사람은 북쪽이 밀고 내려올 때 군예대로 온 최승희의 제자일까, 아니면 호남 제일 이매방의 제자일까. 이심은 문득 건너의 그이가 자신과 비슷한 또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심은 아마 저이가 권번에 들어갈 무렵 시집을 갔을 거다. 세습무라는 것은 보면 희한했다. 부모가 전라도 세습무인 당골이라 한들 그 자식이 당골이 될 수는 없었다. 신과 인간을 잇는 것이 그들의 업, 인간사 그 모든 번뇌 속에서 자신의 삶은 없는 한 맺힌 자리라 그런 것일까. 기이하게도 당골은 시어머니에게서 며느리로 이어지는 거였다. 그렇다면 이심은? 남원 가재골 3대 당골 이심은 어떠한가. 이심은 제 발로 그 집에 들어갔다. 이심은 신이 아닌 한 인간에게 모든 걸 걸고자 했다. 한여름 빨래터에서 땡볕을 지고 일하는 이심에게 다가와 부채로 가만히 빛을 막아 주던 그 소년에게 모든 것을 걸고자. 사라진 것이 네가 아니라서 다행이야······. 처음 해변에서 홀로 하얀 천을 두르고 기녀들이나 추던 입춤을 휘날리듯 추던 그 누군가. 어느 집 기녀가 저리 고울까. 종일 마른 볕에 앉아 빨래를 하던 이심에게는 꿈같은 광경이었다. 어지러움에 잠시 이심이 감았던 눈을 뜨고 보니 어느새 그 꿈이, 아니 그가 웃으며 부채로 빛을 가려 주고 있었다. 뜻하지 않게 빛나던 그것은, 윤슬이 아니었다. 그의 춤이
- 관리자
- 2024-10-01
우리에겐 낮술이 필요한 것 같은데 전하영 R과 나는 바닷가의 한 도시로 가는 기차를 타고 있었다. 우리는 그 도시에 있는 어느 서점의 초청으로 북토크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처음에는 서점이라고 해서 작은 가게인 줄 알았는데 꽤 규모가 있었고 로컬에서는 인지도도 높은 곳이었다. 사례비가 두둑해서 나는 바쁜 R을 설득해 초청 인사로 함께 행사에 참석하기로 했다. 이럴 때는 그가 야근을 밥 먹듯 하고 시도 때도 없이 불려 다니는 일을 한다는 게 도움이 됐다. 주말에 집에 들어가지 못할 이유를 손쉽게 만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북토크는 공식적으로도 그의 일의 연장이었다. 북토크에서 이야기할 책은 내가 이십 년 전에 쓴 소설로 처음에 출간됐을 때만 해도 거의 팔리지 않았는데, 영화화되면서 다시 읽히기 시작했다. R은 그 영화의 제작자였다. 그가 우연히 들른 카페에서 책을 발견했고 영화화를 제의해 왔다. 안 될 게 뭐람? 그 책은 세상에서 잊힌 것이나 다름없었으므로 나는 반갑게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적지 않은 이차 저작권료에 더 관심이 많이 갔는데 알고 보니 그쪽에서는 내가 당연히 그보다 큰 금액을 부르리라 예상하고 미리 낮춰서 제시한 금액이라고 했다. 그런 사정을 파악하게 된 것은 R과의 관계가 좀 더 사적인 성격으로 진전된 이후의 일이었다. 그 후로 많은 것들이 변했다. 책이 영화화되자 죽은 사람이 돌아온 것처럼 책에 쓰인 시절도 내게 함께 돌아왔다. 이십 년 정도가 지나면 당시의 나를 더 이상 나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상황과 감정이 바뀐다. 인간의 몸은 7년마다 세포 전체를 모조리 갈아치운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책이 처음 출간된 이후 대략 세 번쯤은 완전히 다른 나로 거듭나 있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가장 잘 아는 타인을 덕질하듯이 나는 과거의 나에게 향수를 느끼며 그때 그 시절의 장소를 방문하며 추억에 잠기곤 했고, 그때마다 함께하는 상대에게는 숨은 의도를 밝히지 않고 다른 볼일이 있는 것처럼 둘러댔다. 그것은 최근 들어 생긴 나만의 비밀이자 즐거움이었다. 북토크를 위해 우리가 방문하는 도시는 한때 유명한 관광지였지만 오랫동안 쇠락의 길을 걷다가 최근 들어 다시 각광 받기 시작한 지역이었다. 모든 것이 너무 비싸고 조밀한 서울에 진력이 난 젊은 사람들이 조금씩 모여들었고 사람들이 모이니 인터넷 매체들이 관심을 보였다. 이제 조만간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지로 물망에 오를 테고 그렇다면 이 도시도 많은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프랜차이즈 카페와 플라스틱 상징물로 가득 찬 어느 평범한 한국의 소도시 중 하나로 거듭날 것이었다. 다름 아닌 영화제작자를 데려가는 셈이니 어쩌면 내가 그 도시를 망가뜨리는 하나의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망상에 불과하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온 세상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 내가 하는 작은 행동이 불러일으키는 더 큰 효과에 대한 전망. 책이 영화화된 뒤로 줄곧 내가 느끼는 감정이었다. 기차가 출발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R에게 그 도시에 가본 적이
- 관리자
- 2024-10-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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