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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경

  • 작성일 2024-03-01
  • 조회수 880

   나경


박서영


   누구나 나경을 지난다. 도약하기 위해 존재하는 장소. 수만 개의 지향이 도로 위로 얽히고 오래된 주택들은 암시처럼 골목을 밝힌다. 머무는 것만이 그곳에서 실천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다. 그곳에서는 아무도 꿈을 이루지 않고 다만 꾸기만 한다.

   나는 한때 나경에서 지냈다. 그리고 오늘은 오랜만에 그곳을 지나게 되었다. 출장이 있어 남쪽 도시로 왔다가 다시 북쪽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이었다. 딱딱한 등받이에 몸을 붙이고 불편하게 자다 형체가 불분명한 무언가에 쫓기는 꿈을 꿨다. 수면을 통제하는 신체 스위치가 눌리듯 저절로 눈이 뜨였다. 버스는 차체의 백색소음이 옅게 깔려 있을 뿐 고요했다. 드문드문 앉은 승객들은 자거나 핸드폰을 보며 각자 할일을 했다. 나는 창문 커튼을 젖히고 바깥을 바라보았다. 산들이 석양을 등진 채 서로 엉기듯이 달라붙어 있었다. 그늘을 덮은 탓에 화재라도 입은 것처럼 새까맸다. 나는 버스 맨 앞 상단의 모니터를 봤다. 현재 지나는 위치가 명시되어 있었다. 남과 북의 한가운데, 나경이었다.

   나는 이제 나경으로 가지 않는다. 그곳에 있던 외할머니도 십 년 전에 죽었고 몇 없던 친척들도 다른 도시로 떠나버렸다. 나경은 원래 그러라고 있는 곳이다. 이 말을 처음 해준 이는 내 초등학교 3학년 시절 담임인 장 선생님이었다. 학교에서 유일한 남자 교사였고 초임이었다. 인구가 4만 명인 나경군에서 4년째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도시의 학교로 부임하고 싶어 했는데, 그러려면 시골에서 오 년을 근무해야 한다고 했다. 시골은 인기가 없고 도시는 인기가 많아서다. 나는 그렇게 불평하는 그의 어투를 매일 듣고 완벽히 외웠다. 목소리와 음의 높낮이까지 똑같이 따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교실의 장 선생님 책상에는 스테인리스 전기포트가 있었다. 그는 조회 시간마다 전기포트로 끓인 물을 육개장 사발면에 부었다. 면이 다 익을 때까지 늘어지게 하품하고는 우리에게 조용히 하라고 면박했다. 나는 맨 앞자리였다. 다 익은 라면을 장 선생님이 후루룩 소리 내며 먹는 광경을 정면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어른이 되면 자기 마음대로 아무 때나 라면을 먹을 수 있는 것일까? 나는 배가 고팠다. 어른이 되고 싶었다.


   우리 가족이 나경으로 이사한 건 내가 열 살 때다. 나보다 일곱 살 많은 언니의 피부병을 치료하기 위해서였다. 경리 언니는 태어날 때부터 살가죽이 일정 부분 돌처럼 굳는 피부병을 앓았다. 돌처럼 굳은 표피는 잘게 부서져 가루가 되었다. 언니가 머문 자리마다 조밀한 입자가 남았다. 그것은 까말 때도 있었고 하얄 때도 있었다. 정확한 병명은 병원에서도 모른다고 했다. 엄마는 밤마다 때수건으로 언니의 피부를 벅벅 벗겨냈다. 돌이 떨어진 부분에는 붉은 자국이 남았다. 그 위로 병원에서 받아온 스테로이드 연고를 발랐다. 병원에서 면봉으로 바르라고 했지만 엄마는 그냥 맨손이었다. 그러다가 부아가 치밀어 오르면 손바닥으로 철썩 소리가 나게 언니 등을 내리쳤다.

   씨팔. 대체 어떤 귀신한테 씌어서.

   언니는 학교에 다닌 적이 없다. 매일 집에 있었다. 나경으로 온 뒤에도 언니의 생활은 딱히 달라지지 않았다. 변화에 적응하는 것은 내 몫이었다. 마흔 명 조금 넘는 학교의 아이들은 도시에서 전학 온 나를 구경하기 위해 쉬는 시간마다 찾아왔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낯설어 하는 전학생을 연기했다. 아무 말도 해선 안 된다는 것쯤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나경은 엄마의 고향이었다. 산들이 다닥다닥 달라붙어서 민가를 둘러싼 형태였다. 인간이 발을 딛을 수 없도록 신이 일부러 좁게 만든 것 같았다. 그런 곳에서 사람들은 살았다. 낮게 지어진 슬레이트 지붕의 주택 사이로 옥수수와 고추가 자랐다. 잡초뿐인 밭 앞에는 땅을 판다며 주인 연락처를 명시한 현수막이 나부꼈다.

   그 사이에 5층 규모 양지연립 두 동이 우뚝 서 있었다. 형제처럼 서로 어깨동무하고 키 작은 주택들을 기세등등하게 내려다보는 포즈였다. B동보다는 A동이 형 같았다. B동은 A동에 가려 햇빛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은 B동에 살았다. 노가다 일당을 술과 여자에 까먹는 외할아버지 대신 외할머니가 약초 따위를 팔아 번 돈으로 마련한 집이었다. 우리 가족이 나경에서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이기도 했다. 내부는 우중충했다. 빨래는 마르지 않았고 곰팡이 낀 벽지는 쉽게 벗겨졌다. 천장에는 예전 세입자가 붙인 듯한 싸구려 야광별 스티커가 드문드문 빛났다. 옆집에서는 저녁마다 찬송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이 무렵 양지라는 단어를 몰랐다. 양지연립은 그냥 양지연립이었다. 나경을 떠난 뒤 열세 살이 되고 나서야 양지를 배웠다. 그러나 열일곱 살이 될 때까지, 나는 양지라는 단어를 들으면 버릇처럼 음지의 풍경을 떠올리고는 했다.

   아빠는 나와 언니와 엄마를 나경에 데려다준 뒤 사흘 만에 도시로 떠났다. 그리고 얼굴을 볼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이혼을 한 것도 아닌데 그랬다. 나는 엄마에게 아빠가 왜 안 오는지 물었다. 돈을 버느라 바빠서라고 엄마는 말했다. 나는 그 대답이 매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고작 초등학생이라는 이유로 거짓말을 듣고 의문조차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정작 엄마는 매일 돈이 부족하다는 소리를 습관처럼 했다.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동네 노래방으로 나가 과일을 깎고 청소하는 일을 했다.

   나는 이때부터 어른들의 행위에 숨겨진 모든 의미를 유추했다. 그것은 대개 맞았다.

   “유마리 너 공부 안 하니?”

   일을 마치고 돌아온 엄마에게서는 술과 담배 냄새가 났다. 취하지는 않았다.

   “아니요.”

   “이게 어디서 거짓말이야. 너 학교 받아쓰기에서 30점 맞았다며?”

   안방에서 할머니는 아기처럼 양손을 주먹 모양으로 쥔 채 자고 있었다. 엄마는 할머니가 깨지 않도록 안방 미닫이문을 닫았다.

   “엄마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나는 엄마에게 한 번도 내 받아쓰기 점수 따위를 알려준 적이 없다. 내가 학교에서 뭘 배우는지도 엄마의 평소 관심사가 아니었다.

   “뭘 몰라. 나는 다 알아. 속일 사람을 속여, 멍청한 년아.”

   또 하나의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장 선생님은 엄마가 일하는 노래방에 다닌다.


   엄마는 월요일마다 언니를 데리고 성학사에 갔다. 성학사는 이 동네를 둘러싼 수많은 산 중 하나에 있는 사찰이었다. 한번은 개교기념일이라 학교를 쉬게 되어 나도 둘을 따라갔다. 엄마는 불상 앞에서 연이어 절을 했다.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헐떡대면서 중간중간 씨팔, 씨팔 했다. 무엇을 향한 욕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언니와 나는 바로 옆에 앉아서 그 광경을 구경했다.

   절을 마치고 난 뒤 우리는 스님을 따라 사찰 외곽의 약수터로 향했다. 석재 두꺼비가 입을 쩍 벌린 채 약수를 토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참새가 찍찍거리며 지저귀었다. 엄마는 언니의 옷을 벗겼다. 군데군데 돌처럼 딱딱하게 굳은 살가죽이 드러났다. 사람이라기보단 짐승에 가까웠다. 일부러 징그러울 작정으로 디자인된 형태 같았다. 언니는 등을 스님 앞에 드러낸 채 죽은 것처럼 가만히 있었다. 스님이 차가운 약수를 바가지로 떠서 언니의 등에 쏟아 부었다. 돌들이 각질처럼 조금씩 뜯겨져 나갔다.

   언니의 등은 약수를 맞고 더 빠르게 부식했다. 집으로 돌아와 보면 벌써 돌들이 새로 나 있었다. 엄마는 언니의 등에 뜨거운 물을 다시 붓고 때수건으로 벅벅 밀었다. 차가운 약수가 지나간 자리라서 더 쓰라릴 수밖에 없었다. 언니는 팔과 다리를 이리저리 비틀며 비명을 내질렀다. 저러다 애 죽겠어! 할머니가 끼어들었다. 그러면 엄마는 화장실 습기 때문에 벌게진 얼굴로 씩씩거렸다.

   “여기서도 지랄, 저기서도 지랄. 누가 들으면 애 잡는 줄 알겠어.”

   언니가 울었다. 그 모습을 보고 할머니도 따라 울었다. 엄마가 신경질적으로 때수건을 바닥 타일에 내던졌다. 둘 다 조용히 하라면서 소리를 내질렀다. 옆집에서는 또 찬송가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혹시 집에 무슨 일 있어?”

   우리 집의 고성에 관심을 가진 이는 옆집에 사는 오빠였다. 나는 학교 마치고 양지연립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와 마주쳤다. 목소리를 듣자마자 그가 찬송가를 가장 열성적으로 부르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획일적인 목소리 가운데 가장 튀는 목청이었으므로 모를 수가 없었다.

   “아니요. 왜요?”

   “누구는 화내고 누구는 우는 소리가 들려서. 혹시 어머니가 필요 이상으로 엄하신 분은 아닐까 해서 말이야.”

   “엄마는 저희를 사랑하세요.”

   “그래? 그런데 왜 그런 소리가 나는 거지.”

   “언니가 많이 아파요. 그래서 엄마가 항상 약을 발라 주는데 언니가 따가워서 소리를 지르는 거예요.”

   “언니가 어디가 아픈데?”

   “건선 비슷한 병이 있어요.”

   “건선 비슷한 병?”

   “정확한 이름은 몰라요. 귀신에 씐 것처럼 아파요.”

   오빠는 자기 일처럼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도화지에 그린 것처럼 무척 잘생긴 얼굴이었다.

   “옆집에 살면서도 그런 일이 있는 줄은 전혀 몰랐어. 미안해.”


   자신을 연우라고 소개한 오빠는 그 주 일요일 아침 우리 집 초인종을 눌렀다. 같이 교회 갈 생각 없냐는 것이었다. 헌금은 필요 없다고 했다. 엄마는 노래방 일을 마치고 밤늦게 돌아와 아직도 자고 있었다. 언니는 선뜻 가겠다고 했다. 아무래도 오빠가 잘생겼기 때문이었다. 나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연우 오빠는 언니와 동갑이었다. 그는 도시에 살다가 2년 전 목사 부모를 따라 나경에 왔다고 소개했다. 장 선생님처럼 도약하기 위해 나경에 머무는 것이었다. 그의 가족은 시골 교회에서 일정 기간 목회 일을 마치면 다시 도시로 돌아갈 테다. 나경은 그러라고 있는 동네였다. 이곳에 정착한다는 것은 슬레이트 지붕의 키 작은 주택들처럼 양지연립을 우러러보며 살아가야 함을 뜻했다.

   교회에는 사람이 많았다. 나경에서 본 인파 가운데 가장 복잡했다. 그들 모두가 연우 오빠를 알아봤다. 오빠는 나와 언니를 데리고 맨 앞자리로 향했다. 예배가 처음인 우리를 위해 찬송가책을 갖다 줬다. 모르는 노래가 나오면 손뼉만 쳐도 된다고 설명했다. 예배가 시작되자 장내가 엄숙해졌다. 목사가 설교하자 사람들은 동시에 손을 모으고 중간중간 아멘 했다. 나는 고개를 빼꼼 들고 그들을 구경했다. 신기하고 무서웠다. 옆에서 언니는 사람들의 아멘 소리를 곧잘 따라 하고 있었다.

   예배를 마친 뒤 오빠는 우리와 함께 밥을 먹었다. 언니가 젓가락질하기 위해 팔을 뻗을 때마다 돌가루가 부스스 떨어졌다. 주변 교인들이 눈치를 보면서 자리를 옮겼다. 그 사이에서 오빠는 아랑곳하지 않고 가루 떨어진 더러운 반찬을 주워 먹었다. 언니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의 반찬을 떠주면서 더 먹으라고 했다. 언니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고맙다고 읊조렸다.

   그날 이후 나는 저녁에 옆집에서 찬송가가 흘러나올 때면 벽에 귀를 갖다 댔다. 오빠의 목소리가 가장 컸기 때문에 언뜻 들으면 오빠의 독창 같았다. 언니는 또 엄마한테 혼나기 싫으면 공부나 하라고 핀잔을 줬다. 나는 낮은 성적이나 장 선생님이 무심결에 띠는 한심한 눈빛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오빠는 다음주, 다다음 주 일요일 아침에도 우리 집 초인종을 눌렀다. 예수를 믿지 않는 엄마는 우리가 교회에 가는 걸 미덥지 않아 하면서도 말리지는 않았다. 나는 우리 셋이 주일마다 교회로 향하는 그 길이 좋았다. 오빠가 좋았다. 가끔 오빠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인도 화단을 가리켰다. 이 꽃은 백일홍이고 저 꽃은 취나물 꽃이라고 가르쳐 줬다. 그러면서도 꽃을 꺾지는 않았다.

   하루는 비닐 멀칭 작업만 끝난 밭 앞에서 멈췄다. 새까만 플라스틱 필름이 가지런히 깔려 있었다. 잡초만 듬성듬성 있을 뿐 아무것도 없었다. 나도 교회에서 들은 얘기인데. 오빠가 말문을 열었다. 여기가 원래 배추밭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30년 전 주인이 독한 농약을 너무 많이 쓴 탓에 토양 입자가 망가졌다는 것이다. 이 땅을 거쳤던 농부들은 손가락부터 시작해 천천히 온몸이 마비됐다. 종국에는 파킨슨병에 걸리거나 죽었다. 지금은 이 땅에서 아무도 뭔가를 지으려고 하지 않았다. 사겠다는 사람도 없어서 주인은 방치했다.

   “30년 전 주인은 지옥에 떨어졌을까? 어쨌든 그 많은 사람이 자기 때문에 죽은 셈이잖아.”

   언니가 물었다. 오빠가 신중하게 대답을 골랐다.

   “이런 걸로 지옥에 간다고 보기는 어렵지. 의도한 게 아니니까.”

   “신기하네.”

   “당장 죽일 목적으로 타인에게 그라목손을 건넨다고 해도 지옥으로 떨어지진 않아. 그걸 마시는 건 받는 사람의 자유의지니까. 물론 속여서 억지로 먹이는 건 다른 이야기고.”

   오빠가 시간을 확인했다. 예배 시작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 가자. 앞장서서 걷는 오빠 뒤로 언니가 잠자코 따라갔다. 나는 문득 뒤돌아 메마른 토양 위 플라스틱 필름을 바라보았다. 무서운 일이었다. 어떤 건 단지 스치기만 해도 평생 괴로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뭐 해, 안 오고? 언니가 외쳤다. 나는 병든 토양을 뒤로 남겨 두고 언니를 향해 급히 뛰어갔다.


   성학사에서 약수를 들이부을수록 언니의 피부는 더 빠르게 돌이 되었다. 집에서 무식하게 뜨거운 물을 붓고 때수건으로 벅벅 긁어낼 때가 차라리 나았다. 우리는 월요일 빨간 날에 어떤 아저씨 트럭을 타고 도시의 대학병원으로 향했다. 운전석과 보조석에 아저씨와 엄마가 앉고 그 가운데에 내가 앉은 형태였다. 언니는 돌가루 때문에 뒷좌석에 홀로 앉았다. 그 앞에 투명한 가림막이 있어 앞자리의 우리와 대화할 수 없는 구조였다.

   “근데 아저씨는 누구예요?”

   나는 순진한 얼굴로 아저씨를 쳐다봤다. 아까부터 계속 궁금했다.

   “너희 엄마 가게 단골. 한 씨 아저씨라고 불러.”

   “손님이 이렇게 병원까지 데려다줘요?”

   “그냥 손님이 아니고 너희 엄마랑 친한 손님이라서 그래.”

   “얼마나 친한데요?”

   “친구 사이.”

   친구가 아니라는 뜻이다. 나는 알 수 있었다.

   병원에 도착해 언니는 무슨 생물학적 제제 주사를 맞았다. 보험이 되지 않아 한 번에 240만 원이었다. 의사는 2주에 한 번씩 와서 이 주사를 맞아야 한다고 했다. 엄마는 알겠다고 대답하고 다음 진료 날짜는 잡지 않았다. 씨팔, 한 달에 480만 원이라는 소린데 그 돈이 우리가 어딨어 씨팔, 조선 천지를 다 뒤져 봐라 그 돈 주고 주사 맞는 정신 나간 인간이 있는지. 엄마는 말끝마다 씨팔을 붙였다.

   돌아가는 트럭 뒤편에서 언니는 담요를 덮어쓴 채 벽에 기대어 자고 있었다. 엄마는 가림막 때문에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할 언니를 향해 욕을 쏟아냈다. 벌레 같은 년. 없는 살림에 돈이나 뜯어먹고. 어디서 병에 걸려도 저딴 병에 걸렸는지. 난 어쩔 땐 저년 얼굴만 봐도 구역질이 나.

   “그만해, 당신. 힘든 건 경리가 제일 힘들어.”

   친구 사이라면서 아저씨는 엄마에게 당신이라는 호칭을 썼다.

   “전생에 내가 죄를 많이 지었나 봐. 그래서 지금 벌 받는 거야.”

   “전생 같은 건 없대. 교회에서 그랬어.”

   내가 끼어들었다. 사실이 아닌 건 정정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

   엄마와 아저씨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엄마는 창문을 열어 환기했다. 할머니가 춥다고 투정을 부렸지만 무시했다. 빨래통에 담긴 옷들을 종류별로 나눠 세탁기에 넣었다. 욕실 발 받침대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 물을 틀었다. 빨래판에 할머니의 쉰내 나는 고무줄 바지를 올려놓고 바쁘게 비볐다. 엄마는 아빠도 저렇게 오줌 자국처럼 지워버린 게 틀림없다. 집으로 찾아오지 않는 아빠에 관해 이 집 식구 누구도 언급하지 않으니까. 아빠가 없어진 이유 정도는 나도 오늘 낮에 만난 아저씨를 통해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열 살은 그래서는 안 되는 나이였다.

   “아빠 왜 안 와요?”

   “일한다니까.”

   “아빠랑 놀고 싶어요.”

   “언젠간 놀 수 있겠지.”

   빨래판에 아무리 비벼도 고무줄 바지의 오줌 자국은 지워지지 않았다. 엄마가 또 소리를 질렀다.

   “엄마, 자기 전에 물 마시지 말라고 했잖아!”

   “물 안 마셨어.”

   할머니가 애처럼 대꾸했다. 나보다 더 어린 말투였다.

   “대체 왜 그래? 젊어서도 나 힘들게 하더니 늙어서도 이렇게 괴롭히고.”

   “나 그런 적 없어.”

   아이는 침묵도 대답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할머니의 변명은 엄마 내면에 빨래처럼 겹겹이 쌓여 있던 기억들의 가장 높은 곳을 건드린다. 오래된 기억이 거품 묻은 고무줄 바지와 함께 바닥 타일로 내팽개쳐졌다.

   “아빠가 왜 밖으로 돌아다녔겠어? 엄마가 답답하고 좆같으니까. 나 열 살이었을 때 엄마가 내 손 잡고 아빠 붙잡으러 방석집 들어갔잖아. 거기에 아빠는 없고 여자들만 있고. 들어가서 머저리같이 씨팔씨팔 거리다 돌아와선 나랑 동생들한테 화풀이했지. 같이 죽자면서 물에 농약 타서 주고.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우리 다 엄마 앞에서 삼키는 척하고 안 삼켜서 겨우 살았어. 미련하게 삼킨 엄마 살리겠다고 나는 옆집 문 두들기면서 도와 달라 빌고. 막상 병원까지 갔을 땐 동네에 내 엄마 미친년이라고 소문내는 것 같아서 쪽팔렸어. 차라리 혼자 죽게 놔둘걸.”

   “하나도 기억 안 나.”

   “이래서 나경에 오기 싫었어. 쟤 병만 아니었어도 이딴 곳은 발도 딛지 않았는데, 씨팔.”

   엄마는 양손에 비누 거품을 묻힌 채로 울었다. 외할머니는 안방으로 들어가 미닫이문을 닫았다. 언니는 작은 방 장롱 앞에 무릎을 모으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화장실 앞에서 우는 엄마를 보는 것은 식구 중 나뿐이었다. 다른 집 부모들은 자식한테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데 우리 엄마는 반대였다.

   “나경을 잊고 살아야 하는데.”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고작 열 살이기도 했으므로 우는 엄마를 보면 어쩔 수 없이 불안했다.

   엄마는 한참 울다가 코를 훌쩍이며 다시 할머니의 늘어난 고무줄 바지를 빨았다. 그리고 우리의 속옷을 빨았다. 그것을 차가운 물에 여러 번 헹궜다. 물기가 나오지 않을 때까지 바짝 짰다. 화장실에서 나와 젖은 손을 수건에 닦았다. 나보고 이 닦고 세수하고 잘 준비하라고 했다. 모두가 이불에 눕고 불을 끄면 엄마의 울음도 일어난 적 없는 일처럼 소멸했다.

   나는 어둠 속에서 눈을 깜빡였다. 한바탕 시원하게 운 엄마는 옆에서 잘 자는데 나는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 벽 쪽에서 이불 스치는 소리가 났다. 언니가 있는 자리였다. 나는 느리게 움직이는 언니의 어둠 속 인영을 살폈다. 그 인영은 일어나 외투를 걸친 뒤 방 밖으로 나갔다. 멀리 현관에서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났다. 엄마는 옆에서 코를 골았다. 나는 따라 나가지 않았다. 열 살이 나가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이후로도 노래방에 가지 않는 날이면 할머니와 싸웠다. 그때마다 엄마의 어린 시절은 누수되어 벽지로 스며들었다. 할머니의 과거 만행이 곰팡이처럼 새까맣게 달라붙어 양지연립을 잠식했다. 엄마는 울기도 했고 할머니의 머리통을 때리기도 했다. 아이가 된 할머니는 아프다고 울기만 할 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언니는 월요일과 일요일 저녁에는 이불 덮고 잠만 잤다. 그리고 엄마가 출근한 날에는 지갑만 챙겨 가지고 밖으로 나갔다. 밤이 늦도록 한참 동안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옆집과 맞닿은 벽에 귀를 갖다 댔다. 찬송가가 흘러나왔다. 연우 오빠의 목소리가 없었다. 그 튀는 목소리는 없으면 바로 티가 났다. 간혹 엄마가 집을 비워도 언니가 나가지 않는 날이 있었다. 나는 그때도 귀를 갖다 대 보았다. 찬송가 노래 속 오빠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안다. 언니는 나가서 오빠를 만난다.


   “밥 먹고 갈 거지?”

   예배가 끝난 후 오빠가 물었다. 옆에는 언니가 얄밉게 달라붙어 있었다. 나는 엄마 일하는 곳에 가서 먹을 거라고 대답했다. 오빠는 두 번 물어 보지 않았다. 가든지 말든지 관심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언니를 째려본 뒤 교회를 나왔다. 교회에서 점심을 안 먹겠다는 건 나름의 반항이었는데 별 소용이 없었다. 언니가 부러웠고 질투가 났다. 늦게 태어난 건 어쩌면 이름 모를 피부병보다 더 큰 저주일지도 모른다.

   엄마가 일하는 노래방은 교회서 멀지 않은 시내에 있었다. 저녁이 되어서야 영업하는 업소이기 때문에 낮에는 직원들끼리 청소하고 노닥거리는 게 끝이었다. 나는 문을 열었다. 익숙한 방울소리가 났다. 복도 끝에 있는 주방으로 향했다. 입구의 주렴 너머 두 사람이 있었다. 내가 들어가기도 전에 주렴이 걷히더니 한 씨 아저씨 얼굴이 드러났다. 왔니? 그렇게 묻는 아저씨 손에는 담배가 들려 있었다. 불을 안 붙였는데도 뿌연 담배 연기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아저씨 뒤에서 엄마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엄마는요?”

   “일하고 있어.”

   아저씨가 라이터를 꺼내 급하게 담뱃불을 붙였다.

   “아저씨 담배도 피워요?”

   “응.”

   아저씨가 서툴게 담배 연기를 뻐끔뻐끔 빨아들였다. 뒤에서 엄마가 담배를 짓밟아 껐다. 아저씨 옆으로 엄마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점심 먹을래? 나는 능청맞게 먹고 싶은 메뉴를 떠들었다.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학교에 제출할 그림일기장에 아저씨의 담배 사건을 썼다. 아저씨의 흡연 연기에 어린애가 완전히 속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한 씨 아저씨가 담배 피우는 모습을 최대한 정성껏 그리자니 웃음이 나왔다. 사랑하는 여자의 흡연 사실을 숨겨 주기 위한 노력이 눈물겨웠다.

   장 선생님은 일기를 읽고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한 씨가 담배를 피운다고? 아닐 텐데. 그리고 노래방에 가서 엄마에게 말한다. 마리가 일기장에 한 씨 담배 피우는 모습을 그렸어요. 그 사람 담배 안 피우지 않아요? 듣고 나서 엄마는 한 씨와의 연기가 먹혀들었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역시 어린애는 단순하다고 여긴다.

   어른들이란, 고작 그 정도인 것이다.


   확인해야 할일은 더 있었다. 아빠는 앞으로 영원히 집으로 오지 않을 요량인지 말이다. 출근하지 않은 엄마는 빨래를 종류별로 세탁기에 넣고 있었다. 할머니는 안방에서 죽은 듯이 자고 있었다. 옆집에서는 찬송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연우 오빠의 목소리가 뚜렷했고 언니는 집에 있었다.

   “아빠는 집에 언제 와요?”

   엄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벌써 다섯 번째 듣는 질문이니 그럴 만도 했다.

   “이제 한 씨 아저씨가 내 아빠가 되는 거예요?”

   텔레비전을 보던 언니와 세탁기 버튼을 누르던 엄마가 동시에 나를 휙 쳐다봤다. 애니메이션 속 연출처럼 정확한 타이밍이었다.

   “아저씨가 내 아빠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나는 유마리가 아니라 한마리가 되는 거잖아요. 애들한테 놀림 받을 텐데.”

   언니가 내 뒤통수를 빡 소리 나게 쳤다.

   “이게 미쳤나.”

   “왜 때려?”

   너무 아프고 언니가 무서워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였다. 열 살이란, 대체.

   “네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잖아.”

   “아저씨 말고 아빠가 왔으면 좋겠어.”

   “아빠는 추석 때 올 거야.”

   “아저씨가 안 올 순 없어?”

   “더 맞고 싶으면 계속 떠들어.”

   언니는 아저씨가 오지 않을 거란 소리는 하지 않는다. 언니가 할 말을 대신 해줬기 때문인지 엄마는 나를 혼내지 않았다. 보일러실로 들어가서 문을 꽉 잠글 뿐이었다. 엄마는 담배를 피운다. 다 아는 사실을 굳이 번거롭게 숨기고 있다. 돌아가는 정황이 내 추측과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사실이 나는 서러웠다. 경멸하는 표정의 언니 앞에서 울었다. 옆집에서는 찬송가가 흘러나왔다. 연우 오빠가 들을 수 있도록 최대한 크게 울었다. 찬송가는 멈추지 않았다. 나의 울음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어린애의 의사 표시는 번거롭기만 할 뿐이었다. 그래도 나는 계속 울었다.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울고 나면 치약을 짰다. 어쨌든 오늘은 잠을 자야 하고 내일은 학교에 가야 했다. 일부러 세게 칫솔질했다. 잇몸이 아팠다. 아무리 세게 양치해도 유치는 흔들리기만 할 뿐 빠지지 않았다. 내 이가 멀쩡해서 나는 또 서러웠다. 밖에서 엄마가 왜 이렇게 이를 오래 닦느냐고 뭐라고 했다. 물로 입안을 헹궜다. 이는 없고 거품 물만 나왔다.


   장 선생님은 종종 판서하다 말고 착잡한 표정을 짓는 걸 빼면 수업에 성실했다. 그는 아는 게 많았고 적당한 때에 매를 들었다. 아이들의 질문에 일일이 답해 주려고 노력했다. 나도 한 씨 아저씨의 흡연 여부에 관해 묻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내가 진상을 이미 알고 있음을 증명하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최대한 열 살 어린이처럼 보이기 위해 내가 선택한 질문은 이런 것이었다. 수업 끝나기 오 분 전이었다.

   “나경을 떠나면 뭐가 좋아요?”

   아이들의 질문을 기다리던 장 선생님의 눈이 반짝였다. 그는 누군가 이렇게 물어 봐 주길 바라던 것이 틀림없었다.

   “일단 도시에 가면 아웃백도 있고 스타벅스도 있지. 씨지브이도 있어. 그리고 버스 배차도 많고 택시도 부르면 바로 와. 병원도 과별로 돌아다닐 수 있고. 너도 도시에서 왔으니까 이 정도는 알지 않아?”

   “그렇게 큰 곳은 아니었어요. 일단 아웃백이랑 스타벅스는 없었어요.”

   “공부 열심히 해서 더 큰 도시로 가. 이런 데는 사람 살 곳이 못 돼.”

   하지만 정말로 나경 같은 데가 없다면 농작물도 외국에서 수입해 와야 하고, 언니처럼 아픈 사람이 공기 좋은 곳에서 요양도 못 하지 않을까?

   물론 이런 건 물어 보지 않았다. 다른 아이 한 명이 손을 들었다.

   “좋은 점은 아무것도 없나요?”

   “음······.”

   선생님의 시선은 늘 그래 왔듯 창밖으로 향했다.

   “도시보다는 별이 잘 보여.”

   옛날 사람들은 밤하늘의 별을 보며 방향을 가늠했다고 한다. 어른들의 사정은 다 아는 나지만 이런 내용은 몰랐다. 나는 선생님이 설명해 주는 이야기를 가만히 들었다. 동양에서는 동서남북마다 일곱 개씩, 총 스물여덟 개의 별자리가 하늘에 머문다고 믿었다. 이 28수를 찾기 위해 나침반을 썼다. 아래 판의 날짜와 위 판의 시간을 맞추면 그때 떠 있는 별자리를 찾을 수 있다. 나침반의 옛말은 공교롭게도 나경이었다.

   “별자리를 보면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있어. 어쩔 땐 내 운명도 볼 수 있지.”

   나는 그날 밤 집으로 와서 별을 보았다. 방 천장에 붙어 있는 싸구려 야광별이었다. 거실 너머 안방에서는 할머니의 헛소리가 들려왔다. 옆집에서는 연우 오빠 없는 찬송가 소리가 새어 나왔다. 언니는 지금쯤 진짜 밤하늘의 별을 오빠와 보고 있을 것이다. 노래방에 간 엄마는 오지 않았다. 이 시간에 밖으로 나가기에 나는 너무나 어렸다.

   전 세입자가 처음 붙였을 때만 해도 환하게 반짝였을 별은 이제 치매 걸린 외할머니처럼 침침하게 죽어가고 있었다. 문득 전 세입자가 빛도 제대로 들지 않는 양지연립에서 이 별을 어떤 기분으로 붙였을지 궁금해졌다. 지금은 나경을 떠나 잘살고 있는지도. 사람들은 나경에 와서 자신이 어디로 떠날지를 가늠한다. 장 선생님에 따르면 나경은 그러라고 있는 곳이다.

   나는 어디로 가게 될까?

   현관문이 열렸다. 눈 감고 자는 척을 했다.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옷걸이에 옷을 거는 듯 뒤척이는 소리가 났다. 술 냄새는 나지 않았다.

   “안 자는 거 알아. 엄마 왔었어?”

   나는 입을 닫은 채로 가만히 있었다. 언니는 금방 화장실로 들어갔다. 속이 텅 빈 벽 너머 오줌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자세를 바꾸면 깨어 있음을 들킬 테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눈물이 났다. 연우 오빠는 언니 같은 여자가 뭐가 좋다고 만나는 건지 이해가 안 갔다. 내겐 나경을 떠나는 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빨리 어른이 되어야 했다. 그래서 오빠랑 사귀고 싶었다. 내 나이가 지긋지긋했다.


   월요일과 일요일에만 일을 쉬던 엄마는 이제 수요일에도 쉰다고 했다. 내가 학교에 간 사이 엄마는 언니를 데리고 성학사에 다녀왔다. 하교한 뒤 집에서 마주친 언니의 얼굴은 잔뜩 짜증이 나 있었다. 엄마는 성학사에 다녀온 차림새 그대로 쌀을 씻었다. 주방과 이어진 거실 텔레비전에서는 정보 프로그램의 맛집 소개 코너가 나왔다. 엄마가 채널을 돌리라고 했다. 나는 막 들어와서 양말을 벗는 참이었다. 텔레비전 바로 앞에 앉아서 리모컨을 쥐고 있는 건 언니였다. 텔레비전 채널은 돌아가지 않았다. 엄마는 채널 돌리라고 한 번 더 말했다. 그래도 채널은 그대로였다. 수돗물이 뚝 멈췄다. 엄마가 몸을 기울여 텔레비전 쪽을 쳐다봤다. 나는 황급히 언니 손에서 리모컨을 뺏어 채널을 돌렸다. 뒤편의 수돗물이 다시 틀어졌다.

   저녁밥을 먹으면서 엄마와 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외할머니가 혀 짧은 말투로 고기반찬이 없다고 투정할 뿐이었다. 식사를 마친 뒤 엄마는 설거지를 했다. 잽싸게 끝내고서는 텔레비전 보는 언니의 웃통을 까 등을 봤다. 돌이 떨어진 자리로 새빨간 흉터가 있었다. 개가 오줌 싼 흔적처럼 불규칙한 문양이었다. 다행인 건 전보다 면적이 좁아져 있었다. 약수 효과가 이제 나타나는 건가? 엄마가 혼잣말하자 언니가 옷을 내렸다.

   “저번에 병원에서 주사 맞아서 나아진 거야. 계속 약수만 붓다간 금방 또 심해져. 나 주사 더 맞고 싶어.”

   “우리가 그 돈이 어딨어? 씨팔, 돈은 네가 벌어?”

   “일 년에 몇 번이라도 좋으니까 계속 병원 보내 주면 안 돼?”

   “미쳤구나.”

   언니는 그동안 엄마에게 대든 적이 없었다. 늘 죄인처럼 고개 숙였고 주눅 들어 있었다. 언니가 큰 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병원도 안 보내 줄 거면 나를 왜 낳은 거야?”

   나는 텔레비전 소리를 한 단계 줄였다. 옆집에서는 찬송가 소리가 들려왔다. 연우 오빠가 있었다. 언니가 왜 화내는 건지 나는 조금 헷갈렸다. 병원에 못 가서인지, 아니면 연우 오빠랑 나가서 만나야 하는데 엄마 때문에 그러질 못해서인지. 엄마와 언니가 서로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언니가 처음 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그걸 보고 금방 확신했다. 아무래도 오빠와 못 만나서였다. 병원 때문에 화내기에는 병과 함께한 세월이 지나치게 길었다. 언니는 병과 하나였다. 건선 비슷한 그 병이 없으면 완성되지 않는 인물이었다.

   “살고 싶지 않아. 내가 죽으면 그건 무조건 엄마 때문이야.”

   볼품없이 메마른 몸이 일어난다. 엄마를 지나쳐 현관으로 향한다. 문이 닫힌다. 언니는 기어코 가출할 구실을 만들어서 떠난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엄마는 황당해한다. 나는 두 눈을 깜빡인다. 엄마에게 사실을 말해 줘야 할까? 엄마는 언니를 찾아 밖으로 나선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연애에 눈이 돌아간 사춘기 딸을 다 늙은 중년의 엄마가 붙잡을 수는 없다. 할머니는 안방에서 시끄럽다고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엄마는 보일러실로 들어간다. 문이 딸깍 잠긴다. 안에서 라이터 켜는 소리가 난다. 텔레비전에서는 아홉 시 뉴스가 나온다. 벽 너머 옆집 문이 열린다. 바쁜 발걸음이 타다닥, 계단을 타고 내려간다.

   그날 언니는 밤새 돌아오지 않았다. 뜬눈으로 지새운 엄마는 아침이 되었을 때 경찰에 실종신고를 했다.


   “마리야, 집에 무슨 일 있니?”

   우리 가족의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차린 건 장 선생님이었다. 나는 언니의 가출을 친구에게 말한 적도 없고 일기장에 쓰지도 않았다. 그런데 장 선생님이 눈치 챈 건 엄마가 노래방에서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언니는 일주일이 지나도록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엄마는 며칠간 노래방에 무단결근하다가 어제 결국 관뒀다.

   “언니가 가출했어요.”

   장 선생님이 눈을 크게 떴다. 이건 모를 만했다.

   “언제?”

   “지난주 수요일에요. 엄마가 그래서 요즘 언니 찾느라 정신이 없으세요.”

   “그렇구나. 어머니가 걱정이 크시겠네.”

   “오늘은 인쇄소 가서 종이 뽑아 오신다고 했어요. 사람 얼굴 붙어 있는 그거 뭐라고 하더라? 전단지? 아무튼 그거요.”

   사실 전단지까지는 필요 없었다. 연우 오빠에게 물어 보면 언니가 어딨는지 금방 알 수 있을 테다. 그런데 며칠째 옆집 찬송가 소리에서 오빠의 목소리가 빠져 있고, 주일에 찾아간 교회에도 오빠는 오지 않았다. 따로 연락을 하자니 나는 핸드폰도 없었다. 고작 열 살이라는 이유로 부모가 사주지 않아서였다. 오빠와 우연히 마주칠 기회조차 생기지 않으니 언니의 행방을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다음주까지 언니가 오지 않으면 나는 엄마에게 사실을 전부 말할 생각이었다.

   “어머님, 따님이······.”

   그러나 그런 계획도 전부 소용없게 되었다. 집에서 전단지를 정리하고 있는데 대뜸 형사가 집으로 찾아왔다. 형사에게서 무슨 말을 전해 들은 엄마는 돌연 몸을 휘청였다. 우리는 경찰차 뒷좌석에 올라탔다. 차는 나경을 둘러싼 수많은 산 중 하나로 향했다. 이 차에 있는 누구도 그 산의 이름은 모를 것이다. 등산로 입구 앞에서 차는 멈췄다. 우리는 통나무 계단을 올랐다. 엄마는 다섯 걸음마다 멈춰서 헛구역질했다. 중반까지 다다랐을 때 형사가 샛길로 우리를 안내했다. 멧돼지 출몰 지역이라고 적힌 표지판을 지나자 오랫동안 방치된 듯한 풀숲이 드러났다. 뒤죽박죽 얽힌 노란색 폴리스 라인 안에 누군가 하얀 천을 덮고 누워 있었다. 밑으로 튀어나온 두 발은 가지런했다. 언니의 신체 중 드물게 돌이 전혀 없는 깨끗한 부위였다.

   엄마는 소리를 내질렀다. 앞으로 뛰어가서 폴리스 라인을 뜯어내려는 걸 경찰들이 말렸다. 엄마는 양팔을 붙잡힌 채로 씨팔, 씨팔 하며 울부짖었다. 오열이라기보단 포효였다. 나는 가까이 가서 언니를 확인하고 싶었다. 발을 떼려는데 먼저 현장에 있던 경찰이 이런 거 보면 안 된다면서 나를 막아섰다. 그리고 어린애는 왜 데리고 온 거냐고 같이 온 순경을 나무랐다. 나는 먼발치의 담당 형사가 엄마에게 떠드는 말을 들었다. 드문드문 그런 단어가 튀었다. 피부병으로 인한 우울증, 음독, 자살, 나체······. 형사에게도 나경은 단지 떠날 곳에 불과한 걸까? 시시티브이가 없는 숲에서 언니는 누워 있었다. 천을 들추어내질 못하니 어떤 모습인지 확인할 수 없었다. 다만 이건 추측할 수 있었다. 언니는 입가에 지저분한 토사물을 묻히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손톱에는 핏자국이 선명할 수도 있다. 농약을 마시고 위나 식도 따위가 불타는 고통에 가슴을 쥐어뜯었을 테니까.


   언니는 부검을 거치지 않고 영안실에 안치됐다. 장례식장 입구에 걸려 있는 화면 속 사망자 명단 중 우리 언니가 가장 어렸다. 복도를 걷던 다른 사망자의 조문객들은 간혹 우리 언니 방 앞에 멈춰서 앳된 영정 사진을 물끄러미 보고는 했다. 일 년 만에 만난 아빠는 면도도 이발도 제대로 되지 않아 볼품없는 얼굴이었다. 나를 보고 딱히 반가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하긴 딸이 죽었는데 반색하는 게 더 이상하기는 했다. 외할머니는 언니의 영정 앞에서 한참 울다가 구석에서 구겨지듯 잠이 들었다. 엄마는 조문객들이 오면 울기만 할 뿐 말을 문장으로 잇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두 번 쓰러져서 실려 갔다가 지금 다시 돌아온 참이었다. 갈라진 입술 끝에 피가 맺혀 있었다. 흘러내리는 머리를 고정하려 꽂아 놓은 은색 머리핀이 어울리지 않게 빛났다.

   장 선생님이 왔다. 방명록에 이름 석 자를 크게 쓰고 부조금을 냈다. 절을 두 번 하고 엄마와 인사했다. 둘은 꼭 처음 본 사이처럼 굴었다. 떠나기 전 선생님은 내게 학교는 쉬라면서 무슨 얘기를 했다. 뭐였는지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말이었던 것 같다. 선생님이 떠나고 십 분 조금 지났을 때 교인들이 왔다. 매일 옆집에서 찬송가 부르는 그 목소리들이었다. 뒤편에 연우 오빠가 있었다. 나서기 좋아하는 그는 그날따라 입을 꾹 닫고 어른들이 서로 인사하는 양을 지켜만 봤다. 교인들과 함께 영정 앞에 서서 손을 모아 기도했다. 연우 오빠가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언니가 밤마다 연우 오빠를 만나러 나갔어요.”

   어른들 간의 위로는 내 말 한마디에 멈췄다. 여러 시선이 내 쪽으로 쏠렸다. 나는 내가 아는 모든 걸 증언해야 했다.

   “둘이 만나서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지만요. 언니는 오빠를 좋아했어요. 오빠가 하자는 건 거절하지 못하고 전부 했을 거예요. 그리고 오빠는 지옥에 가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알아요.”

   “정신 나갔어? 꿈꿨냐? 찾아오신 분들한테 무슨 실례야?”

   엄마가 벌게진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어쩌면 엄마는 언니의 자살이 본인 때문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가출하기 전 언니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그러나 두 사람의 잘못은 아니다. 연우 오빠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교인 중 하나가 나를 가리키며 멀쩡한 사람 몰아가지 말라고 했다. 자신이 그동안 교회에서 지켜봐 온 내 모습을 읊었다. 평소 연우 오빠를 좋아하고 친언니를 시샘하던 열 살짜리 어린아이. 엄마는 그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내가 집에서 언니에게 머리통 맞으며 우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그들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 말도 거짓이 아니었다. 노래방으로 일하러 가는 엄마. 신을 믿지도 않으면서 교회에 꼬박꼬박 나가는 언니. 오빠가 빠진 찬송가 소리. 이제는 누구도 소유하지 않으려 하는 병든 토양. 하지만 내 증언을 믿어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빠는 언니를 장지에 묻은 뒤 바로 도시로 떠났다. 엄마는 방 안에서 언니의 옷을 끌어안은 채 매일 울었다. 가끔 한 씨 아저씨가 찾아왔다. 자기 엄마가 해준 거라면서 냉장고에 반찬을 넣어 두고 떠났다. 나는 혼자서 세수하고 밥을 챙겨 먹은 뒤 학교에 갔다. 장 선생님은 여전히 내 앞에서 사발면을 먹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면 새삼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연우 오빠는 더 이상 주일 아침에 우리 집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혼자 교회에 갔다. 천 원을 헌금으로 내고 교인들과 함께 주기도문을 읊었다. 찬송가를 불렀다. 내 죄를 반성했다. 그리고 기도했다. 우리 언니 천국에 가게 해달라고. 예배를 마친 뒤에는 교회에서 주는 점심밥을 먹었다. 후미진 자리였다. 연신 다른 교인들과 떠들던 연우 오빠는 내 앞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콩자반을 젓가락으로 집고 있었다. 보통 열 살 아이는 콩도 안 먹고 젓가락질도 못 하지만 나는 할 수 있었다.

   “오늘 왜 저 데리러 안 왔어요?”

   오빠가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이제 그는 울 필요가 없었다.

   “하나님한테 빌었어요. 우리 언니는 천국에 가고 나쁜 사람들은 지옥에 떨어지게 해달라고요.”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은연중에 오빠가 자기도 똑같이 기도했다고 대답해 주기를 바랐다. 만약 그래 주기만 한다면, 나는 내가 아는 사실을 묻어 두고 기꺼이 넘어가 줄지도 몰랐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은 사람을 정말 멍청하게 만드는구나. 내가 또 새롭게 깨닫는 순간이었다.

   “기도는 말하면 안 이뤄져.”

   하지만 오빠는 열일곱 살이었다. 나보다 오래 살았지만 그러나 분명히 어렸다. 돼지고기에 등급을 매기듯, 나란히 나열된 내 추측들 위로 의심할 여지없이 사실임을 증명하는 도장이 찍혔다. 오빠가 떠났다. 후미진 자리에 홀로 남아 나는 울었다. 언니가 가여웠다. 엄마가 불쌍했다. 계속 울었다. 그러나 어린애의 울음이 그렇듯 어른들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우리 가족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나경을 떠났다. 내가 나경에서 머문 시간은 전체 인생 가운데 손톱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나경은 그러라고 있는 곳이다. 단지 자신이 어디로 나아갈지 방향만 가늠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그곳에서의 기억은 곰팡이처럼 내 피부에 들러붙어 기생했다. 가끔은 감각을 마비시킬 태세로 뾰족하게 세포를 찔렀다. 그럴 때면 옅게 농약 냄새가 났다. 곰팡이는 햇빛 아래서도 죽지 않았다. 이제 나는 이름만 양지인 연립이 아니라 진짜 볕드는 양지로 언제든 갈 수 있는데도 그렇다. 건선 비슷한 그 병이 없으면 완성되지 않는 언니처럼 나도 그 곰팡이가 없으면 존재하지 못하는 것이다.

   어른들은 내가 아무것도 모르리라고 생각했겠지만 실은 틀렸다. 나는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그 오래된 기억은 평소 깊숙이 숨겨져 있다가 술을 거나하게 마신 뒤에야 흘러나왔다. 증언할 때 내 말투는 저절로 열 살 아이가 됐다. 혹여 설득력을 잃을까 봐 말끝마다 의식적으로 어른 같은 말을 붙였다. 씨팔, 씨팔······. 언니의 증인은 나뿐이었다. 나는 이 모든 기억을 끌어안고 반드시 자라야만 했다. 살아남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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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4-01
알파벅스

알파벅스 이원석 사라진 마을의 이름은 소몽笑夢이었다. 소몽리는 작은 마을이었지만 유속과 깊이가 적당한 계곡이 가까워 외지 사람들이 많이 찾던 관광지로, 몇몇 주민들은 일찍부터 부업으로 관광객들을 재워 주며 얼마간의 돈을 벌었다. 그러던 중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의 촬영과 유명 연예인의 방문이 화제가 되어 마을이 여러 매체에 소개되고 관광객이 늘어나며, 생업과 부업의 위치가 바뀌기 시작했다. 살던 집을 개조해 전문적으로 민박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더니 종국에는 마을 주민 대부분이 그 일로 먹고살게 되었다. 처음에 그들은 같은 마을 주민들끼리 동종 업계 종사자가 되었다는 것을 기쁨으로 삼았다. 자신이 손님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일 때는 다른 집을 소개해 주기도 하고, 소개받은 집에서는 소개해 준 사람에게 작은 보답을 하는 일종의 중개업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한동안 그들의 사회적 유대감이 혈족의 그것 이상이었을 것이라고 보는 사회학자들도 있다. 소규모 민박집이 성행하던 어느 날 ‘물꼬리 펜션’이라는 이름의 첫 대형 독채 펜션이 문을 열었고 관광객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넓고 쾌적한 시설, 안전한 보안과 차량 픽업 서비스 등은 특히 가족 단위 손님들이나 젊은 세대 단체 손님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읍에 하나 있는 2금융권 은행에는 대출 상담을 받는 주민들의 줄이 길게 늘어섰다. 그리하여 소몽리는 다시 한 번 변화의 바람에 휩쓸렸다. ‘물꼬리 펜션’ 이후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서른 개가 넘는 크고 작은 독채 펜션이 생겨났고, 일대에서는 가장 유명한 펜션 단지로 자리 잡게 되었다. 대를 이어 펜션을 운영하는 집도 있었고 외지인이 지은 펜션의 관리인으로 일하는 주민도 있었다. 관광객들은 해마다 늘어 갔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의 주민들은 이전보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을 거라고 사회경제학자들은 말한다. 그러나 리스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숙박업에 종사하는 주민들은 여름 한철 외지인들이 쓰고 간 돈으로 겨울을 견뎌야 했다. 규모가 커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숙박객 유치를 위한 경쟁이 치열해지기 시작했고, 여름이면 집과 집 사이로 고성이 오가거나 주먹다짐이 일어나는 일도 빈번했다. 산을 잘 모르는 외지인들의 부주의한 행동도 골칫거리였다. 술을 먹고 입수하는 외지인은 해마다 몇 명씩 있었고 출입이 금지된 곳에 억지로 들어가 뱀에 물리거나 말벌에 쏘여 구급차에 실려 가는 사람도 많았다. 몇몇 부덕한 업주들이 성수기 숙박 요금을 지나치게 올려 받아 신문과 텔레비전 뉴스에 오르내리는 것도 부지기수였다. 주민들이 외지인을 대상으로, 외지인이 주민들을 대상으로 일으키는 범죄의 빈도도 날이 갈수록 잦아졌다. 어느 순간부터 주민들은 ‘이래서 사람을 믿으면 안 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간혹 어린아이가 태어나도 가장 먼저 그런 것을 가르쳤다. 다른 사람을 믿지 않는 법. 타인에게 다가가지 않는 법. 그러나 영특한 아이들은 어른들

  • 관리자
  • 2024-04-01
양파가 들어간 토마토 수프

양파가 들어간 토마토 수프 김나현 1 엄마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원룸 안에서 그 냄새를 해결하지 못할 거라고 했지만, 결국 양파가 들어간 토마토 수프를 끓였다. 수프는 메인 재료가 양파와 토마토가 맞나 의심이 들 만큼 동그란 기름이 둥둥 떠 있었다. 돼지고기에 붙은 비계 때문이거나 양파를 볶을 때 버터가 들어간 탓인 듯했다. “이렇게 먹어야 제 맛이야.” 제 맛? 양파가 들어간 토마토 수프에 과연 그런 게 있을까? 엄마의 기분에 따라 혹은 우리 가족의 재정 상태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수프의 맛이었다. 그러고 보면 금전적 여유가 있을 땐 소고기가 잔뜩 들어가곤 했다. 여유랄 게 없을 땐 몇 조각의 고기만 들어간 야채수프에 가까웠다. 그 수프는 마녀 수프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다이어트 음식으로 각광받기 훨씬 전부터 우리 집의 시그니처 메뉴였다. 다른 집 엄마들이 된장찌개나 김치찌개를 특기로 내세울 때, 엄마는 양파가 들어간 토마토 수프를 주력으로 삼았다. 깊은 맛의 토마토 수프, 따뜻한 쌀밥, 그 위에 계란 프라이를 올리면 특별히 다른 반찬이 필요하지 않았다. 엄마의 수프에 특별한 비법은 없었다. 냉장고 안의 남은 재료에 양파와 토마토를 넉넉히 넣고 끓일 뿐이었다. 그래서인가 그 수프의 이름은 자연스럽게 양파가 들어간 토마토 수프가 되었는데, 어떤 이들은 종종 그것을 토마토가 들어간 양파 수프라고 부르기도 했다. 어쨌거나 내가 먹어 본 어떤 수프도 엄마가 만든 수프 맛을 따라오지 못했다. 이웃들이 엄마의 레시피를 그대로 따라 해도 그 맛은 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것은 엄마의 장기이자 우리 집의 자랑이었다. 그 수프가 이제 내 신경을 건드렸다. 방 안에 겹겹이 쌓인 냄새 때문에 짜증이 밀려왔다. 어떤 냄새든 밀폐되면 지독해진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주방 후드의 환풍기를 켜고 침대를 밟고 올라가 창문을 열었다. 쌀쌀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들이마시자 어딘가 모르게 매캐함이 밀려왔다. 그건 이웃집에서 흘러온 담배 냄새 따위가 아니었다. 공기 질이 좋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도로변 오피스텔은 어쩔 수 없었다. 미세먼지가 있든 없든 주위는 옅은 안개에 휩싸여 흐릴 때가 많았다. “그만 내려와. 상이나 펴.” 접이식 탁자를 펼치고 엄마와 마주 앉으니 다섯 평 원룸이 꽉 차는 듯했다. 받침대에 냄비를 내려놓은 엄마는 할 말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편안히 수프 맛을 음미하기에는 엄마의 눈치가 보였다. 나는 무슨 소리를 들을까 내심 마음을 졸이며 먼저 입을 열었다. “저번 집보단 낫지 않아?” 그 집은 방충망에 벌레가 자주 들러붙었다. 작은 날벌레도 아니고 엄지만 한 크기였다. 그게 집으로 날아 들어오곤 했다. 오래된 주택의 2층집에 딸린 셋방이었다. 화장실은 밖에 있었다. 부엌은 없었다. 그에 비하면 여긴 화장실이 집 안에 있고 부엌도 딸려 있었다. 그러나 엄마는 줄곧 말이 없었다. 한동안 이어진 침묵에는 그 돈을 갖고 겨우 이런 곳밖에 구

  • 관리자
  • 2024-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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