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에 쓴 글자
- 작성일 2024-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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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에 쓴 글자
천운영
그녀는 발가락 스트레칭을 시작으로 하루를 연다. 발바닥 오목한 아치 부분에 저릿한 느낌이 올 때까지 발가락을 꽉 오므렸다가 활짝 펴기. 몸의 좋은 기운은 바로 그 오목한 곳에 모였다가 나간다고 그녀는 믿고 있다. 스트레칭으로 잠기운을 지우고 나면 맞추어 놓은 알람이 울린다. 오전 일곱 시. 그녀를 깨우기 위해 알람이 있는 게 아니라, 알람을 끄기 위해 그녀가 일어나는 기분이 들 때도 있다.
자리에서 일어나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두유 만들기. 전날 불려 놓은 검은콩에 호두, 아몬드, 단백질 분말, 오트 우유와 물 한 컵을 넣고 돌리면 두 잔 분량이 나오는데, 한 잔은 아침에 먹고 남은 한 잔은 저녁 식후에 마신다. 콩 불린 물은 따로 담아 머리 감을 때 헹굼 물로 쓴다. 두유가 완성되기까지 15분. 아침상을 차리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식사는 가볍게. 한 끼 분량으로 담아 놓은 채소 스틱과 아보카도 반 개, 달걀 두 개. 채소는 색과 식감을 고려해 조화롭게 구성하고, 달걀은 현미유를 사용해 프라이를 하거나 수란으로 먹는다. 입안에서 완전히 가루가 되고 곤죽이 될 때까지 적어도 오십 번 이상 씹어 넘긴다. 의식적인 행동이라기보다는 소화기가 약해 생긴 오랜 습관이다.
배변은 하루 한 번 아침 식후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물 내리기 전에 꼭 변 상태를 확인하는데, 색이나 냄새 단단한 정도가 아주 좋으며, 가끔은 그녀가 먹는 양보다 배출되는 변의 양이 더 많아 보일 때도 있다. 체중계에 올라가 보지 않아도 몸무게는 이십 년째 변함이 없다. 건강보조제는 방송을 통해 널리 알려진 것들로 두어 가지 유행을 따라가지만, 단백질만큼은 꼭 산양유 초유 단백질로 넉넉히 쟁여 두고 먹는다.
간단한 집안일을 하고 외출 준비를 마치면 열 시 반. 집에서 노인복지관까지는 걸어서 십오 분 거리. 수업은 11시부터 시작된다. 월요일 수요일은 줌바댄스와 밴드 스트레칭. 화요일 목요일은 노래교실. 수강생은 무작위 추첨 방식으로 선정하는데, 다섯 강좌 지원에 셋 성공했으니 운이 좋은 편에 속한다. 실버 줌바댄스는 40명 선발에 지원자가 123명이었다.
점심은 복지관에서 운영하는 식당에서 먹는다. 일반 5천 원, 65세 이상 4천 원, 기초생활수급자 무료. 그녀가 천 원 할인을 받은 지는 삼 년 남짓이다. 저렴한 가격에 비해 반찬 구성이 다양하고 맛도 좋아 인근 주민들에게 인기가 좋다. 특히 막 무친 겉절이가 그녀의 입맛에 맞는다. 주 고객층은 70세 이상 남성들로 일찌감치 몰려와 줄을 서는데, 그들을 가리켜 ‘집에서 밥도 못 얻어먹고, 혼자서는 해먹을 줄도 모르는 불쌍한 노친네들’이라고 빈정거린 사람은 노래교실 선생이다. 그날 배운 노래의 흥으로 남은 하루도 즐겁게 보내시라는 말로 수업을 마무리하는데, 그녀는 그날 배운 노래는 그 시간에 바로 잊어버린다. 노래를 부른다고 흥이 나는 것도 아니고, 흥을 내려고 춤을 배우는 것도 아니다.
특별한 약속이 없는 오후에는 아쿠아리움에 가서 시간을 보낸다. 짧으면 한 시간, 길게는 오후 한나절. 해파리와 가오리를 좋아하고 펭귄은 좋아하지 않는다. 되도록 수달 먹이 시간에는 맞춰 가서 보지만 인어 쇼는 굳이 찾아보지 않는다. 그녀는 아쿠아리움 연간 회원권을 보유하고 있다. 회원권은 다음 달까지 유효하다. 한국 최초이기도 한 그곳은 다음 달로 폐관되고 세계적인 현대미술관의 분관이 들어설 예정이다. 근교의 다른 아쿠아리움 회원권을 구입할지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아쿠아리움에서 나오면 샛강을 따라 좀 걷다가 버스를 타고 돌아온다. 집으로 가는 버스는 운행 중에 땡땡땡땡 전차소리를 내기 때문에, 노선버스 번호를 확인하지 않고도 타야 할 버스를 알아볼 수 있다. 그녀는 옛날 전차 종착지였던 동네에서 산다. 아파트 단지 개발에 포함되지 않은 구역으로 낡은 다세대 주택과 신축 빌라가 뒤섞여 있는데, 그녀의 집은 2층 상가주택으로 92년에 지어 지금까지 살고 있다. 1층엔 최근에 베이글 전문점이 들어와 11시부터 5시까지 영업한다.
장은 월요일마다 시내 중심가에 있는 재래시장에서 본다. 해산물은 광장시장, 건어물은 중부시장. 딱히 살 것 없어도 구경삼아 간다. 멸치는 여수집, 김과 다시마는 흥덕상회, 견과류는 오진이네. 대부분 삼십 년 넘게 다닌 곳들로, 그녀가 선호하는 제품을 알아서 꺼내 줄 정도로 안면이 깊다. 오진이네는 깐깐한 남편과 인심 좋은 아내 부부가 주인이었는데, 남편이 죽고 혼자 남은 여주인이 일머리 없는 막내아들을 가르치며 겨우겨우 이어 나가더니, 최근에 여주인마저 가고 나자 막내아들은 곧바로 가게를 접고 견과류 대신 중고자동차를 팔기 시작했다는 얘기를 흥덕상회 주인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저녁 식사는 굽거나 조린 생선 위주로, 육류와 국물 요리는 피하고, 채소는 익혀 먹는다. 설거지는 바로바로 해서 마른행주로 닦아 제자리에 놓고, 그날 입은 속옷과 양말도 그날 빨아 널어놓는다. 그밖에 해야 할일들은 여덟 시 전에 모두 끝내고 침대에 들 준비를 한다. 텔레비전은 아침나절에 잠깐, 건강 정보 프로그램이나 아침 뉴스를 오며가며 소리로만 듣는다. 그녀는 매사에 느긋하게 움직이는 편이지만 멀뚱히 앉아 시간을 보내지는 않는다. 시간에 쫓겨 종종거리거나 서둘러 해치우는 법도 없다.
침대에 들면 잠들기 전까지 책을 읽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읽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다. 배우나 낭독 전문가가 읽어 주는 오디오북보다는 전자책 음성변환 시스템을 이용한다. 오디오북 낭독자들은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대본 연기를 하는 라디오 극장 배우 같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다. 음성변환의 감정 없이 건조한 어조가 오히려 문장의 몰입도를 높인다. 마음에 드는 작품은 서너 번 반복해서 돌려 듣는다. 가끔 재생을 멈추고 지나간 문장을 되새김질하거나, 기억해 두고 싶은 페이지를 저장해 두기도 한다.
자정 전에는 반드시 독서를 멈추고 잠을 청한다. 책을 읽다 잠이 온다거나 책 때문에 잠을 못 이루는 일은 없다. 자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대체로 10분 이내에 잠이 든다. 반듯하게 누운 자세 그대로 뒤척이지도 깨지도 않고 푹 잔다. 그러고 다음날 일곱 시면 잠에서 깬다.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을 뜨고, 발가락 스트레칭을 하고 알람을 끄고 두유를 만들고 아침 식사를 한다. 15분 거리의 노인복지관에 가서 노래와 춤을 배우고 아쿠아리움에 가고 전차소리를 내며 운행하는 버스를 타고 집으로 온다.
매월 6일은 내 고등학교 동창 학부모 모임에 나간다. 자식들끼리는 아예 친분이 없거나 연락이 끊긴 지 오래지만, 자식 교육을 빌미로 시작된 엄마들 모임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처음에 열 명으로 시작했다가 여섯 명으로 고정되었는데, 여섯 명이 매달 6일에 만난다 하여 육일회라는 이름을 붙였다. 식사를 하고 남은 회비는 모아 두었다가 단체 여행을 가기도 하는데, 칠 년 전 하와이가 마지막이었다. 두 달에 한 번 신경과, 석 달에 한 번 가정의학과에 가서 검사받거나 약을 타온다.
나와는 거의 매일 통화를 하는데, 점심 메뉴로 삼계탕이 나왔는데 닭 한 마리를 다 주더라는 시시콜콜한 얘기나, 미정인지 민정인지 이름도 가물가물한 고등학교 동창의 근황을 전해 주곤 한다. 그녀가 정해진 일상에서 벗어나는 경우는 나를 만날 때뿐이다. 보통은 며칠 전에 약속을 잡아 만나지만, 때로는 유난히 맛있게 된 김치나 너무 싱싱해서 살 수밖에 없었던 생선 같은 걸 들고 내가 일하는 작업실로 찾아오기도 한다. 그 외에 그녀가 고정적으로 만나는 모임이나 약속이라 할 만한 것은 없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 그렇다.
이것이 내가 이미 알고 있거나 그녀에게 들어서 알게 된 요즘 그녀의 루틴이다. 그녀의 일상은 단조롭지만 규칙적이고 정갈하다. 다른 여지가 없다. 그것이 나에게 안정감을 준다. 그녀의 일과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한 그녀는 내 반경 안에 있는 것이니까.
*
그녀의 일상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비질소리를 듣게 된 후부터다. 처음엔 비가 오는 줄 알았다고 한다. 잠결에 빗소리를 듣고 창문을 닫아야 하나 생각하다가, 자기 전에 항상 창문을 잠근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그리고 비라기에는 소리가 너무 날카롭고 반경이 넓지 않다는 것도. 싸악 싹, 싸악 싹. 억센 플라스틱 재질의 빗자루가 시멘트 바닥에 긁히는 비질소리였다.
처음엔 환경미화원인가 했지. 참 일찍부터 일하는구나 싶었는데, 가만 생각해 보니까 환경미화원이 주택가 골목까지 청소를 해주겠어? 그래서 누군지 몰라도 참 부지런하네 하면서 다시 자려는데 잠이 안 와. 굳이 그 시간에 바지런을 떨 일이야? 눈이 오면 몰라도. 시계를 보니 세 시 반이야. 밤중에서도 한밤중이지. 이게 또 금방 끝날 것 같지가 않아. 쓸고 또 쓸고. 멀리 가지도 않고 딱 옆집 그 앞만 쓸더라니까? 지저분해 봤자 골목이 얼마나 더럽다고 그렇게 정성이냐고. 제발 빨리 끝내고 가라, 들어가라, 속으로 빌었지. 삼십 분을 그렇게 한 자리만 쓸더라니까? 정확히 네 시에 소리가 멈췄어. 조용해지니까 다시 잠이 오더라고. 그런데 문제는 이게 하루 이틀이 아니라는 거지. 다음날 또 비질소리가 들려. 벌써 며칠째 그래. 이젠 비질소리가 알람 소리 같아. 어김없이 세 시 반. 싸악 싹. 딱 그 자리에서 삼십 분.
나는 내려가서 부탁해 보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잠을 못 자니 청소 시간을 조정해 달라고. 그녀는 열심히 일하고 있는 사람에게 그만두라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새벽 세 시 반에 비질은 너무하다고 내가 밀어붙이자, 그녀는 마지못해 그래 보겠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녀는 비질을 그만두게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비질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그녀만의 방식으로.
남자가 아니라 여자야. 나보다 나이가 좀 많으려나 적으려나. 어디 일 나가는 사람 같더라고. 옷을 잘 차려입었어. 집에서 막 입는 그런 옷이 아니고 갖춰 입었다니까. 신발도 슬리퍼나 운동화가 아니라 구두였어. 굽 높은 정장 구두는 아닌데 구두는 구두야. 며칠 지켜보니까 일을 나가는 게 아니라 끝내고 오는 거 같더라고, 좀 지쳐 보였거든. 좀 쓸다가 허리 펴고, 좀 쓸다가 한숨 쉬고. 이교대 삼교대 하는 그런 일 있잖아. 영업 택시 교대 시간이 그쯤 아닌가? 아. 택시 운전하시나 보다.
그 여자는 택시 기사였다가 새벽기도를 나가는 교인이었다가 간호조무사가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일과표에 칸을 하나 추가하고 새벽 세 시 반의 여자를 넣은 것 같았다. 이제 그녀는 여자가 어디에서 오는지 알아보기 위해 비질소리가 나기 전에 일어나고, 미리 창문을 조금 열어 놓고 벽에 붙어 서서 여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여자의 차림새와 비질하는 습관을 훔쳐본다.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가끔 과감하게 머리를 창밖으로 내밀어 가며 여자의 동선을 쫓는다.
목에서 뭐가 번쩍 하는데 금목걸이더라고. 굵은 체인 목걸이야. 14금도 아니고 24금. 어디 좋은 데 가려고 황금 목걸이를 걸고 나왔나 입술도 빨갛게 바르고서는. 보라색에 가까운 붉은색이었는데, 아마 낮에 보면 좀 더 진해지지 않을까 싶어.
비질을 얼마나 꼼꼼히 하는지 몰라. 집 안 청소도 그렇게 안 할 거야. 비질에도 순서가 있더라고. 집 앞에서부터 밀고 나가는데, 짧게 쓱쓱 모았다가 길게 싹싹 몰았다가, 틈새는 빗자루 끝으로 촉촉촉 파냈다가. 리듬이 아주 좋다니까. 빗자루 잡는 것도 나름 노하우가 있더라구. 힘 안 들게 옆구리에 착 끼고 싸악 싹. 빗자루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폼이 꼭 만화 같은 데 나오는 마녀라니까.
오늘은 삼십 분이 아니라 십오 분이야. 세 시 반에 나오긴 했는데 쓸다 말고 가더라고. 쓸다 말았다니까? 시간이 모자라면 덜 꼼꼼히 쓸어도 되잖아. 눈에 보이는 쓰레기만 살살 이렇게. 그런데 그렇게 안 해. 십오 분 어치만 딱 쓸고 가. 아무래도 강박증이 있는 거 같아. 그러니까 그렇게 하루도 안 빼놓고 나오지. 전날 비가 와서 거리가 깨끗한데도 나와. 그런데 그날은 뭐가 그리 급한 일이 있어서 쓸다 말고 갔지?
그녀의 단정했던 일과는 수정이 불가피했다. 그녀는 새벽 세 시 반을 기점으로 잠드는 시간을 조정했다. 침대에 들면 곧바로 잠을 청하고, 비질이 끝나면 다시 침대로 돌아와 독서를 한다. 독서는 하루 일과의 마지막이 아니라 시작이 되었다. 여자를 관찰하는 일은 일종의 발가락 스트레칭이었다. 이전의 그녀가 자정을 기점으로 꽉 채운 하루를 살았다면, 이후의 그녀는 세 시 반을 기점으로 하루를 앞당겨 산다.
그것은 단순히 생활계획표에 칸을 추가하고 순서를 변경하는 문제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아침을 먹고 난 후 잠깐 졸기도 하고, 자다 깨서 허겁지겁 복지관으로 가거나 수업을 빼 먹는 일도 생겼다. 날짜를 착각해서 병원 진료를 놓쳤다거나, 월요일 줌바 수업이라고 갔는데 월요일은 이미 지나고 화요일 노래교실 수업이었다거나, 그래서 월요일에는 도무지 무얼 하고 지나갔는지 기억이 안 난다고도 했다.
그녀와 나누던 저녁나절의 전화 통화는 통째로 날아가 버렸다. 점심 식사 후 다음 수업을 기다리는 월요일과 수요일 잠깐, 그것도 온통 새벽 세 시 반 여인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나는 그녀와 나 사이에 그 여자가 끼어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여자는 우리의 안정적인 생활 패턴에 틈입해 궤를 같이하고 있었다. 그녀와 내가 함께 중심을 잡고 있던 축이 기우뚱 기울어진 것 같았다.
*
그녀가 서 있던 곳은 1번 출구였다. 우리는 4번 출구에서 만나기로 했다. 약속 시간이 한참 지나 전화를 걸었더니, 자신은 이미 약속 장소에 나와 있다고 했다. 출구 번호를 몇 번이고 되묻고 확인해도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환승역이라 호선마다 출구 번호가 정해지기도 하나? 내가 알고 있던 상식을 의심하며 출구를 오르락내리락했다. 4번과 5번, 2번과 2-1번. 숨이 차올랐다. 이윽고 1번.
여기 1번 출구잖아.
내가 숨을 고르며 다가가자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가 1번이라고 안 그랬나?
그러곤 내 손을 끌어 그녀의 겨드랑이에 끼고 말했다.
가자, 눈썹 그리러.
나는 좀 어리둥절했다. 그녀의 아무렇지 않은 태도와, 해맑은 얼굴과 그에 걸맞은 쾌활한 목소리에. 길도 모르면서 그냥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당당함에. 그녀가 기다리고 있다는 4번 아닌 4번을 찾아 헤매며 들었던 온갖 불길한 생각들을 일거에 없애버리는 능력에. 나는 언제부턴가 그녀에게 화를 내지 못하게 되었다. 아마도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녀가 영원히 이 세상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는 걸 인식했을 때.
그녀는 지하철 승강장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진 적이 있다. 초복을 맞아 경복궁 근처 삼계탕집에서 모임을 하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왜 이러지, 왜 이러지, 했던 기억만 난다고 했다. 갑자기 시야가 뿌예지고 사지에 힘이 빠지는가 싶더니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근처에 있던 청년 하나가 신고를 하고 응급실까지 동행해 주었다. 그녀의 가방에서 휴대폰을 찾아 내게 연락을 해준 것도 그 청년이었다. 출혈이나 외상은 없었다. 내가 연락을 받고 도착했을 때 그녀는 멀쩡하게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의사는 일사병인 것 같다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응급실까지 가는 동안 나는 그녀가 죽으면 나도 따라죽겠다는 생각까지 했던 것 같다.
나는 그녀의 겨드랑이에서 손을 빼 제대로 팔짱을 낀 다음 반대 방향으로 이끌었다.
그쪽 아니야, 어딘지도 모르면서 뭐 이렇게 씩씩하게 걸어가?
씩씩하게 걸어야 씩씩해지는 거야. 너도 좀 씩씩하게 가슴 좀 내밀고 걸어. 발레리나처럼 발끝도 살짝 들고.
기분이 좋으신가 보네요 여사님.
그럼 좋지. 예뻐지러 가는데.
우리가 가는 곳은 반영구 문신을 전문으로 하는 의원이었다. 눈썹 입술 유두 두피 헤어라인 회음부 색소 침착까지, 문신을 새기기도 하고 지우기도 하는 곳이었다. 미용을 위한 반영구 문신의 영역이 그렇게 넓은지 처음 알았다.
다행히 예약 시간에 늦지 않게 도착했다. 상담사는 몇 가지 도안을 보여주며, 연세가 있는 분들은 도톰한 일자형이 젊어 보이는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일자눈썹은 싫다고 했다. 상담사는 다시 각진 아치형보다는 약간 곡선 아치형이 어떻겠느냐 제안했다. 그녀는 휴대폰 사진 앱을 열고 사진 하나를 찾아 내밀며 말했다.
이거랑 비슷하게 그려 줘요.
물고기요? 어맛, 정말 무늬가 딱 눈썹처럼 생겼네? 물고기도 눈썹이 있어요? 이거 진짜 눈썹 아니죠? 무늬인 거죠? 약간 둥근 형을 원하시는 거 같은데. 제가 한번 그려 봐 드릴게요.
상담사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당황했다기보다 황당해하는 표정이었다. 당황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연예인도 아니고 물고기라니. 몇 번의 수정 끝에 눈썹 도안이 완성되었다. 그녀가 마취 크림을 바르고 기다리는 동안 나는 옆 침대에 걸터앉아 그녀의 휴대폰에 있는 사진들을 훑어보았다. 꽃, 물고기, 꽃, 물고기. 강변 산책길의 꽃과 아쿠아리움의 해양 생물들.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그 여자는 요즘 어때? 내가 무심하게 물었다. 누구? 그 청소하는 여자. 청소하는 여자? 그 새벽에 빗자루질하는 옆집 여자 말이야. 아아 그 여자? 요즘에 안 나오더라? 그러곤 끝이었다. 새벽마다 그 여자 시간에 맞춰 일어나 탐정놀이를 하던 그녀와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마침 마취가 끝나고 시술이 시작되었고, 또 다른 내원객이 침대를 사용해야 해서 나는 밖으로 나와야만 했다.
나는 그녀가 좀 의심스러웠다. 새벽 세 시 반이면 어김없이 나와 집 앞을 쓸고 간다는 여인이 과연 진짜일까? 혹시 무언가를 감추기 위해 (그녀가) 이야기를 꾸며내고 있는 건 아닐까? 1번 출구에 서 있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주 잊어버리고 착각하고 헷갈려 하는 것도. 기억력 감퇴, 언어능력 저하, 시간개념 상실. 일련의 문제들은 노인성 치매의 초기 증상과 일치했다. 치매까지는 아니어도 경도인지장애 정도라면.
시술 후 주의 사항을 들으면서도 나는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폈다. 마치 그녀에게 문제가 있다는 증거를 찾으려는 사람처럼. 그것은 의심이 아니라 불안이었다. 우려했던 것들이 현실로 나타날 것에 대한 불안. 시술 부위는 손으로 만지지 마시고요. 재생 크림은 하루 한 번 쌀알만큼 면봉으로 얇게 펴서 발라 주세요. 샤워는 가볍게 하셔도 되는데 사우나 찜질방 땀나는 운동 안 되시고요. 메이크업도 하지 마시고요. 설명을 듣던 그녀가 옷을 탈탈 털며 말했다.
참 안 되시는 것도 많으시구려.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렇게 유쾌한 그녀가 치매일 리가 없다. 그녀가 내게 종종 하는 말처럼, 나는 걱정이 많아서 걱정이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따라 웃었다.
의원에서 나와 점심을 먹고 공원길을 걸었다. 이제 막 시술을 받은 데다 재생 크림까지 두텁게 바른 터라, 그녀의 얼굴에서 눈썹만 까맣게 빛이 났다. 그녀는 가끔 걸음을 멈추고 쇼윈도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확인했다.
웃는 상이네, 그렇지?
그거 원한 거 아니었어?
그렇지. 내가 원한 거지. 근데 좀 더 둥글게 나오길 바랐어.
상쾌했다. 황금 목걸이를 하고 비질을 하는 여자도 사라지고, 그녀에 대한 의심도 남아 있지 않다. 4월 말인데도 벌써 장미가 곳곳에 피었다. 그야말로 봄날이었다. 그녀는 꽃내음을 맡는 것처럼 코로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나서 말했다.
요즘엔 꽃들이 순서를 안 지킨다? 서로 먼저 뽐내려고 난리들이야.
그게 다 기후변화 때문이라잖아.
매화 지면 산수유 피고 지나리 갠달래 다음에 목련 터지고 목련 지고 나야 라일락 피는 건데.
사과도 이제 강원도 산골에서 키운대. 나 작년에 사과 한 번도 안 사 먹었다? 그런데 지금 뭐라고 그랬어? 지나리 갠달래?
아, 갠달래가 먼저 피나? 지나리보다?
그녀는 다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나는 우리가 꽃전 해 먹던 꽃 이름이 뭐냐고 묻고 싶었지만 하지 않았다. 속으로 그녀가 한 말을 따라 해 보았다. 지나리 갠달래 다음에 목련. 자꾸 외다 보니 그게 원래 이름처럼 느껴졌다.
뭐가 먼저인지 뭐가 중요하겠어. 그런데 이상하게 입에 짝짝 붙네? 지나리 갠달래, 지나리 갠달래.
그런데 말야, 정말 좋지 않니? 봄은 정말······.
정말 뭐?
음란해서 좋아.
봄이 음란해?
번식의 계절이잖아.
*
봄이 음란해서 좋다던 그녀는 스스로 음란해지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음란한 것들만 보고 음란한 상상을 하고 그걸 또 음란한 말로 내게 전했다.
청소하는 여자가 가고 발정 난 고양이가 왔다. 길거리에는 뽀뽀하는 연인들과 서로 만지작거리며 달뜬 청소년들이 넘쳐났고, 아쿠아리움에서는 태어날 때부터 번식능력을 갖춘 해파리들이 쏟아져나와 흐느작거리고, 어느 날은 러브버그의 비행을 보기 위해 은평구의 어느 하천까지 갔다 온다. 화제를 돌리려고 무슨 책을 읽고 있느냐고 물어 보면 <채털리 부인의 연인>이다. 벌써 세 번째 읽고 있는 중인데, 볼 때마다 새로운 걸 발견한다며 즐거워 한다. 나는 영화로도 책으로도 보지 않았지만, 내용은 알고 있다. 불구자 남편 두고 하인이랑 바람피우는 얘기 아니냐고 했더니 내게 상스럽다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상스러워지는 게 누군데.
나는 그녀가 낯설고 두려웠다. 그녀는 성적인 것들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얘기를 듣는 것도 하는 것도 끔찍이 싫어하던 사람이었다. 오래된 친구가 나이 들어서는 자기네 부부생활까지 함부로 얘기한다고 관계를 끊어버릴 정도였다. 변화라기에는 너무나 이질적인 변화였다. 내가 알던 그녀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다시 그녀를 의심했다. 갑작스러운 성격 변화. 음란하고 상스러운 이상한 변화. 결국 나는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고야 말았다.
처음에는 고양이였다. 발정 난 고양이. 밤새 얼마나 울어대는지 잠을 못 잤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황금목걸이가 가고 발정 난 고양이가 왔구나 했다. 밤이고 낮이고 들을 수 있는 게 고양이 울음소리니, 그런가 보다 했다. 하지만 그녀가 듣는 울음소리는 성격이 좀 달랐다.
일주일을 울고 다니더라고. 나 발정 났어요, 발정 났다니까요, 아기 울음소리 있지 않니. 저러다가 안달이 나서 죽겠구나, 어느 놈이라도 빨리 와서 좀 해주지. 그런 생각이 들다가는, 아이쿠 아무 놈이나 안 되지, 잘 골라서 해야지, 길에서 나서 또 길에서 낳고 길에서 생활하려면 그래야지, 실컷 울어라, 울어서 동네 수컷들 다 불러다가 제일 괜찮은 놈으로 골라서 섹스해라, 응원했지. 그러니 궁금해서 잠을 잘 수가 있나. 아앙 울음소리가 나면, 퍼뜩 잠에서 깨 가지고는 이제나 끝나나 저제나 끝나나. 그런데 드디어 어제 끝났어. 아주 서로 얼마나 앙큼을 떨고 신경전을 부리면서 좋아라 하던지. 아무래도 처음 하는 애들 같아. 뭘 어떻게 해야 할 줄 모르고 우왕좌왕 야옹야옹 으앵으앵.
그러니까 그녀는 발정 난 암컷 고양이 울음소리가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잔 게 아니라, 욕구를 해결하지 못한 고양이가 안쓰러워서 응원하느라 못 잤다는 얘기였다.
그다음은 물범이었는데 지어서 한 얘기라 해도 너무 지나쳤다. 그녀는 아쿠아리움에 갔다가 물범 짝짓기 하는 걸 보았다고 했다. 그녀가 쓴 단어를 그대로 사용하자면, 짝짓기가 아니라 섹스다. 섹스도 아니고, 쎅, 쓰. 물범의 짝짓기 광경을 전해 주던 그녀의 목소리는 어딘가 다른 세상에 가 있는 것처럼 아득했다. 그 목소리가 징그럽게 낯설었다.
엄마 쟤네들 싸워, 어떤 꼬마애가 소리치는 걸 듣고 쳐다봤지. 그 옆에 있던 여자애가 싸우는 게 아니라 뽀뽀하는 거야, 야무지게 얘기하더라? 둘이 남매인지 눈매가 똑 닮았더라고. 약간 아래로 처진 눈매가 어디서 나왔는지 알게 생긴 엄마가 여자애 편을 들어 줬어. 그래, 물범이 뽀뽀하는구나. 그때였어. 붉그무레하고 길쭉한 것이 슬그머니 나오는 거야. 딱 보고 알았지. 물범 자지구나. 그때까지만 해도 둘 중에 누가 암컷인지 수컷인지 몰랐거든? 몸집이 좀 더 큰 놈이 수컷이더라고. 그런데 있잖니. 걔네들 정말 재밌게 놀더라? 애들 말대로 뽀뽀도 하고, 몸도 부딪치고, 나 잡아 봐라 도망치고 따라잡고, 한참 그렇게 재미나게 놀더니, 어느 순간 수컷이 암컷 뒤에 몸을 붙이고 두 팔로 옆구리를 붙들어. 그러고선 딱 한 바퀴 돌았어. 좀 더 오래 해주길 바랐는데 삽입 시간이 좀 짧더라구? 섹스를 마치고 나서는 신나게 헤엄을 치더라고. 함께 나란히 가다가 따로 이쪽저쪽으로 방향을 바꾸다가 한 곳에 모여 점프를 하기도 했어. 그런데 말이야. 정말 아름다웠던 건 뭔 줄 아니? 암컷 물범이 손을 입에 모으고 웃어. 호호호호 하는 것처럼. 그러고선 제자리에서 빙그르 돌아. 두 손을 모으고 빙그르르. 김연아 트리플 악셀처럼 우아했어. 세 바퀴까지는 아니어도 두 바퀴는 족히 돌았을 거야.
물범이 웃긴 뭘 웃어. 돌고래도 아니고 뭘 빙그르르야. 그리고 짝짓기, 교미, 그런 단어도 있잖아. 발음도 꼭 그렇게 강조해서 쎅,쓰 라고 해야 해?
물범도 웃어. 웃을 때는 손을 입에 대고 웃어. 그런데 교미가 뭐니?
뭐긴 뭐야 교미지. 엄마 말대로 쎅쓰. 동물들이 하는 짝짓기.
생전 처음 듣는 말이다. 미교든 교미든, 짝짓기든 번식이든, 쎅스는 쎅스지. 물범 쎅쓰가 얼마나 귀여운 줄 아니? 빙그르르 도는데, 쟤 정말 행복하구나, 말 안 해도 알겠어. 말해 뭐 해? 몸이 다 말해 주는데. 그런데 이영아. 너는 좀 하고 다니는 거니?
뭘?
쎅,스.
하마터면 핸드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녀에게서 그런 질문을 받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다. 너는 좀 하고 다니는 거니? 우리가 이 비슷한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던가?
혼자 살더라도 이영아, 섹스는 끊지 마. 연애하라는 얘기가 아니야. 지금 와서 결혼하라는 얘기도 아니고. 섹스 파트너는 꼭 있어야 한다는 거지. 그래야 건강해. 네가 애도 안 낳고 그래서 그쪽에 문제가 많이 생길 수 있단 말이야. 내 말 허투루 듣지 말고.
그녀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 머릿속에는 80세 노인이 동네 여자 아이를 겁탈했다거나, 아파트 베란다에서 자신의 성기를 흔들어댔다거나 하는 기사들이 떠올랐다. 음란한 여자 노인.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그런 변태 노인과 그녀를 연결시키는 나 자신도 싫었다. 그녀가 살아오는 동안 억눌린 욕망과 채워지지 않은 욕구가 뒤늦게 발현되는 거라고 해석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것은 정갈했던 그녀의 삶을 부정하고 더럽히는 일이었다.
결국 나는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고 말았다.
엄마 발정 났어? 노망났어? 노망이 나도 곱게 나야지. 왜 그래 정말! 노망이 나려면 차라리 벽에 똥칠을 해. 내가 다 받아 줄 거니까. 고양이고 물범이고 나한테 그런 얘기 하지 말라고. 듣기 싫다고!
내 입에서 나온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말을 하는 순간 후회했지만, 일단 터져 나온 말들을 멈출 수가 없었다.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말들이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적당한 단어들이 떠오르지 않았다. 말하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윤이영.
그녀가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렀다.
내일 나랑 아쿠아리움 가지 않을래? 거기 이제 문 닫는대. 거기 처음 오픈했을 때 너 데리고 간 적 있어. 그때 너무 어려서 기억 안 나겠지만, 너 정말 좋아했었어.
*
그녀는 수달관은 그냥 지나쳤다. 대부분의 관람객들이 관심을 가지고 보는 대형 가오리나 거북에도, 그녀가 좋아한다던 해파리에도 관심이 없었다. 옆구리에 주황색 형광 줄무늬가 있는 아주 작은 물고기는 아주 오래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내게 저것 좀 보라거나 하지 않고, 무언가 설명하거나 아는 체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그저 말없이 약간의 거리를 둔 채 이동했다.
우리는 물범관 앞에 도착했다. 가방을 사이에 두고 관람용 계단에 앉았다. 천장에는 반구형의 작은 수족관이 붙어 있었는데, 물고기들이 하늘을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내가 바다 밑에 들어와 있는 것도 같았다. 나는 물범을 보지 않으려 천장만 올려다보았다. 혹시라도 그녀가 짝짓기하는 물범을 봐보라고 할까 봐, 그녀의 말대로 손으로 입을 가리고 호호호 웃는 물범을 보게 될까 봐.
우리가 처음 여기 왔을 때 말이야.
이윽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네가 다섯 살인가 여섯 살인가 그랬을 거야. 한참 글자를 배울 때였는데, 벽에 한글판 붙여 놓고 틈만 나면 기역니은 노래를 불러. 밖에 나가면 간판도 읽고 플래카드도 읽다가 무슨 뜻인지 묻고. 세상이 온통 글자를 읽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여기 와서도 그랬지. 물고기보다는 물고기 이름을 읽는 데 정신이 팔려있어. 점자를 읽듯이 안내판에 적힌 글자들을 손가락 끝으로 짚어 가면서. 그러다가 갑자기 네가 묻더라? 다른 건 다 응인데 기역은 왜 역이냐고. 다른 건 다 은데 시옷은 왜 옷이냐고. 곰곰 생각하다가 그랬지. 기역은 기차역에서 왔고 시옷은 오나라에서 와서 그렇다고. 그냥 말장난한 것뿐인데, 어린 너는 대단한 얘기를 들었다는 표정으로 나를 봐. 그러더니 나더러 등 좀 대보래. 내가 뭐 쓰는지 맞춰 봐, 하면서 손가락으로 글자를 써. 이응 미음 자기 입으로 다 말하면서. 오나라에서 온 시옷, 오나라의 리을, 지금 내가 뭐라고 썼게? 지금도 그 순간이 생생해.
난 기억 안 나.
내가 조용히 말했다. 그녀는 기억 안 나는 게 당연하다고 했다.
처음 글자를 배우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 이미 글자를 알아버렸으니까. 이미 알고 있던 글자들이 뒤죽박죽 섞이면 새로 배워야 하나? 시옷이 있어야 할 자리에 이응이 있으면, 기차역에서 온 기역인지 오나라에서 온 시옷인지 도무지 모르겠으면. 새로 배울 수는 있는 걸까? 꼭 다시 읽어야만 하는 걸까? 이영아, 난 이제 더 이상 문자를 못 읽어. 그렇게 됐어. 아무리 집중하고 봐도 의미를 알 수가 없어. 뒤죽박죽 엉망진창이야. 언젠가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안내 방송을 듣고 내렸는데 처음 들어본 이름인 거야. 역을 지나쳤나 환승을 잘못했나, 내가 깜빡 졸았나,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나 지도 앞에 섰는데,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어. 문자들은 이제 얼룩 같은 게 되어 버렸어. 옷에 흘린 김칫국물 같은.
무슨 소리야, 그게. 그런 말 없었잖아. 엄마 혹시 전에 다친 거, 그 후유증 아냐? 병원에는 가본 거야?
이영아, 쉿. 내 말 들어봐. 겁내지 말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말하고 나는 들었다. 듣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전에 지하철에서 넘어졌을 때 말이야. 머리를 좀 세게 부딪쳤던 모양이야. 그때 뭔가가 심하게 눌렸거나 끊어진 거 같다고 의사가 그래. 시간이 지나면 돌아오기도 한다는데, 굳이 돌아갈 필요가 있나 싶어. 처음엔 너무 무섭고 불편하고 힘들었는데 익숙해지니까 오히려 편해. 난 지금이 좋아. 문자를 버리고 나니 다른 감각이 생겼어. 누군가의 귀를 보면 올챙이도 보이고 뱃속에 웅크린 태아도 보이고. 그게 얼마나 예쁜지 몰라. 세상이 온통 나한테 말을 걸어. 자기 좀 보라고, 자기가 얼마나 예쁜지 좀 들어보라고. 자랑하고 뽐내는 소리가 들려. 그래서 이제 문자들을 해독하느라 애쓰는 대신 다른 것들을 보고 듣기로 했어. 난 사랑에 빠진 것들이 다 좋다. 빗자루와 사랑에 빠져도 좋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해도 좋고, 꼬리를 붙이고 하늘을 날아도 좋아. 내 눈은 더 음란해질 거야. 아름다운 걸 탐하고 사랑을 응원할 거야. 그러니까 내 걱정은 하지 마. 그리고 나는 이제 네가 나한테서 독립했으면 좋겠어. 몸이 아니라 마음. 날 보호하고 끌어안아야 한다는 생각은 버려. 내가 벽에 똥칠을 하거든 요양원에 보내. 그거 치울 생각하지 말고.
그녀가 내 손을 가져가 손바닥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지금 내가 뭘 쓰는지 맞춰 봐.
나는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보지 말고 상상해 봐.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나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눈을 감았다. 너무 세게 감아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녀의 손가락에 집중했다. 내 손에 그린 작대기 두 개. 아마도 시옷. 오나라에서 온 시옷. 이응, 이응, 이응. 내 이름은 왜 이렇게 이응이 많냐고 투덜거리는 어린 여자아이가 보였다. 오나라는 어디에 있게? 시옷과 이응 사이에 있지. 묻고 대답하는 여자애와 그 아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엄마. 계속되는 시옷과 이응. 어쩌면 ‘ㅏ’거나 ‘ㅗ’일 수도 있는 시옷. 어쩌면 엄마 아니면 내 이름의 이응. 그렇게 가만히 손바닥에 쓴 글을 듣고 있자니 이상하게 손이 아니라 다른 부분이 간질간질했다.
모든 좋은 기운이 모였다가 다시 온몸으로 번져나간다는 바로 그곳. 오목하게 들어간 발바닥 아치 부분. 나는 발가락을 꽉 오므렸다 활짝 펼치기를 반복했다. 어쩐지 그곳에서 음란한 말들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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튤립이 있는 식탁보 강태식 존슨 카운티 외곽에는 중산층들이 모여 사는, 거의 모든 면에서 깨끗한 주택가가 형성되어 있었고, 완전히 똑같이 생긴 집들이 - 지붕과 창문과 현관 손잡이와 마당을 두른 나무울타리의 모양까지 똑같은 집들이 - 거리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죽 늘어서 있었다. 진입로에는 작고 예쁜 우체통이 서 있고 - 어느 집이나 다 - 우유 배달 업체의 상표가 찍힌 낡은 주머니나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지 말라는 팻말이 울타리 한쪽에 걸려 있으며 마당 잔디가 빗질 자국이 남아 있는 머리처럼 잘 정돈되어 있었다. 화단에 심은 꽃들도 거의 비슷하거나 완전히 똑같아 보였다. 차를 몰고 천천히 지나면서 보면 그랬다. 어디선가 가끔 피아노 치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는데 모든 음이 기계가 치는 것처럼 정확했지만 음이 정확하다는 것말고는 전혀 특별할 것이 없는 연주였다. 얼마 전에 하나뿐인 아들 톰을 다른 주에 있는 대학에 보낸 벤 하우저와 로지 하우저도 그 거리에 있는 많은 집들 중 한 곳에서 살았다. 그들은 아직도 아들의 방문 앞에 멍하니 서서 그 안에 아들이 쓰던 물건들만 - 사인볼과 다 버리고 딱 두 개 남은 레고 모듈러 시리즈와 절대로 버리지 말라고 고집을 부려서 버리지 못한 낡은 청바지와 픽업트럭을 끌고 이케아 매장에 가서 사온, 벤이 꼬박 이틀 동안 조립해서 겨우 완성한 오래된 이층 침대와 디딤판에 노란색 번개 마크가 크게 프린팅된 스케이트보드 같은 것들만 – 남아 있다는 것을, 자기들이 그런 물건들과 함께 - 한때 아들이 필요로 했던 물건들과 함께 - 그 집에 남겨졌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벤과 로지는 아들이 자기들 품을 영영 떠났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했고 - 날마다 그런 짐작이 확고한 사실로 굳어 가는 것을 지켜보았고 - 자기들이 톰의 방문을 바라보며 아주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벤은 불을 켜지 않은 거실에 앉아 - 창 너머로 어둠이 차오르고 있었지만 벤은 희미한 빛이 감도는 그맘때의 거실을 둘러보며 오래 쓴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좋아했다. - 로지가 외출 준비를 완전히 마치고 이제 정말 다 끝났다고 말해 주기를 - 립스틱만 바르면 된다거나 스카프만 고르고 금방 나가겠다는 말말고 진짜 이제 정말 다 끝났다고 말해 주기를 - 기다리고 있었다. 벤은 탁자 위에 놓인 리모컨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리모컨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문득 생각이 난 것처럼 손을 뻗어 TV를 켰고, 채널을 이리저리 돌린 뒤에 다시 TV를 껐다. “뭐 해, 벤?” 로지의 목소리가 한 블록 떨어진 곳에서 망치질을 하는 것처럼 안방 문 너머로 들려왔다. 화장대 앞에 앉아서 눈썹을 그리거나 파운데이션을 더 꼼꼼하게 바르면서 몸을 뒤로 틀어 소리 지르는 로지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옷에 붙은 머리카락을 손가락 끝으로 집어 떼어내거나 잠자리에 들기 전에 침대보를 잡아 펴는 것처럼 오랜 세월 동안 숱하게 보아 온 모습들. “아
- 관리자
- 2024-10-01
이것은 사랑 없이는 깰 수 없는 유일한 꿈이었다. - 춤추는 무당 당골 이심과 춤추지 않는 무당 오키나와 영매 유타의 사진에 대하여 한정현 기생 아니고 무녀예요. 무당이라고요, 아저씨. 이 여자한테 그랬다간 저주받는다고요. 어쩌려고요? 팔아먹게? 그런 말을 했던 이는 곧 어흥, 하는 표정을 짓는다. 얼굴을 잔뜩 구기면서 말하는데도 생생한 눈빛이 빛난다. 사내는 입을 반쯤 벌리고 그이의 얼굴을 바라보다 퍼뜩 정신이 들었는지 되레 큰소리다. 내, 내가 억지로 잡아끌었나! 누가 이 얼굴에 돈을 내겠어! 그 말을 하면서도 사내는 손목이 잡힌 이심이 아니라 그이의 얼굴을 힐끗거린다. 나도 그냥 기생은 아니죠. 아저씨 그렇게 내 얼굴 빤히 보면 돈 내야 돼. 알죠? 아닌 게 아니라 그이가 입고 있던 소맷자락이 그것을 알려준다. 잘 다린 소맷자락에 수가 놓여 있다. 초량권번. 사내는 돈이라는 이야기가 나오자 아까보다도 낮은 자세로 어느새 이심의 손목을 놓고 슬그머니 물러선다. 사내가 놓아 준 이심의 손목은 줄이 그어진 듯 붉다. 공창제도는 한참 전에 없어졌지만, 부산이든 서울이든 이젠 사창제도가 판을 쳐요. 미군들에게 매매 놓아 주는 곳도 많고요. 몰랐나요? 어느 누가 꿀이라도 한가득 따라 놓은 걸까. 남북이 서로 총을 겨누며 싸운 지 1년이 넘고 보니 거리마다 향기는커녕 악취가 진동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향을 품고 있구나. 이심은 공창이 뭔지도 사창이 뭔지도 몰랐다. 이 부산이라는 곳에 오기 전까지. 다만 저건 알았다. 그이가 들고 있는 소매 끝에 달린 초량권번이라는 이름. 이 사람은 북쪽이 밀고 내려올 때 군예대로 온 최승희의 제자일까, 아니면 호남 제일 이매방의 제자일까. 이심은 문득 건너의 그이가 자신과 비슷한 또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심은 아마 저이가 권번에 들어갈 무렵 시집을 갔을 거다. 세습무라는 것은 보면 희한했다. 부모가 전라도 세습무인 당골이라 한들 그 자식이 당골이 될 수는 없었다. 신과 인간을 잇는 것이 그들의 업, 인간사 그 모든 번뇌 속에서 자신의 삶은 없는 한 맺힌 자리라 그런 것일까. 기이하게도 당골은 시어머니에게서 며느리로 이어지는 거였다. 그렇다면 이심은? 남원 가재골 3대 당골 이심은 어떠한가. 이심은 제 발로 그 집에 들어갔다. 이심은 신이 아닌 한 인간에게 모든 걸 걸고자 했다. 한여름 빨래터에서 땡볕을 지고 일하는 이심에게 다가와 부채로 가만히 빛을 막아 주던 그 소년에게 모든 것을 걸고자. 사라진 것이 네가 아니라서 다행이야······. 처음 해변에서 홀로 하얀 천을 두르고 기녀들이나 추던 입춤을 휘날리듯 추던 그 누군가. 어느 집 기녀가 저리 고울까. 종일 마른 볕에 앉아 빨래를 하던 이심에게는 꿈같은 광경이었다. 어지러움에 잠시 이심이 감았던 눈을 뜨고 보니 어느새 그 꿈이, 아니 그가 웃으며 부채로 빛을 가려 주고 있었다. 뜻하지 않게 빛나던 그것은, 윤슬이 아니었다. 그의 춤이
- 관리자
- 2024-10-01
우리에겐 낮술이 필요한 것 같은데 전하영 R과 나는 바닷가의 한 도시로 가는 기차를 타고 있었다. 우리는 그 도시에 있는 어느 서점의 초청으로 북토크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처음에는 서점이라고 해서 작은 가게인 줄 알았는데 꽤 규모가 있었고 로컬에서는 인지도도 높은 곳이었다. 사례비가 두둑해서 나는 바쁜 R을 설득해 초청 인사로 함께 행사에 참석하기로 했다. 이럴 때는 그가 야근을 밥 먹듯 하고 시도 때도 없이 불려 다니는 일을 한다는 게 도움이 됐다. 주말에 집에 들어가지 못할 이유를 손쉽게 만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북토크는 공식적으로도 그의 일의 연장이었다. 북토크에서 이야기할 책은 내가 이십 년 전에 쓴 소설로 처음에 출간됐을 때만 해도 거의 팔리지 않았는데, 영화화되면서 다시 읽히기 시작했다. R은 그 영화의 제작자였다. 그가 우연히 들른 카페에서 책을 발견했고 영화화를 제의해 왔다. 안 될 게 뭐람? 그 책은 세상에서 잊힌 것이나 다름없었으므로 나는 반갑게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적지 않은 이차 저작권료에 더 관심이 많이 갔는데 알고 보니 그쪽에서는 내가 당연히 그보다 큰 금액을 부르리라 예상하고 미리 낮춰서 제시한 금액이라고 했다. 그런 사정을 파악하게 된 것은 R과의 관계가 좀 더 사적인 성격으로 진전된 이후의 일이었다. 그 후로 많은 것들이 변했다. 책이 영화화되자 죽은 사람이 돌아온 것처럼 책에 쓰인 시절도 내게 함께 돌아왔다. 이십 년 정도가 지나면 당시의 나를 더 이상 나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상황과 감정이 바뀐다. 인간의 몸은 7년마다 세포 전체를 모조리 갈아치운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책이 처음 출간된 이후 대략 세 번쯤은 완전히 다른 나로 거듭나 있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가장 잘 아는 타인을 덕질하듯이 나는 과거의 나에게 향수를 느끼며 그때 그 시절의 장소를 방문하며 추억에 잠기곤 했고, 그때마다 함께하는 상대에게는 숨은 의도를 밝히지 않고 다른 볼일이 있는 것처럼 둘러댔다. 그것은 최근 들어 생긴 나만의 비밀이자 즐거움이었다. 북토크를 위해 우리가 방문하는 도시는 한때 유명한 관광지였지만 오랫동안 쇠락의 길을 걷다가 최근 들어 다시 각광 받기 시작한 지역이었다. 모든 것이 너무 비싸고 조밀한 서울에 진력이 난 젊은 사람들이 조금씩 모여들었고 사람들이 모이니 인터넷 매체들이 관심을 보였다. 이제 조만간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지로 물망에 오를 테고 그렇다면 이 도시도 많은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프랜차이즈 카페와 플라스틱 상징물로 가득 찬 어느 평범한 한국의 소도시 중 하나로 거듭날 것이었다. 다름 아닌 영화제작자를 데려가는 셈이니 어쩌면 내가 그 도시를 망가뜨리는 하나의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망상에 불과하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온 세상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 내가 하는 작은 행동이 불러일으키는 더 큰 효과에 대한 전망. 책이 영화화된 뒤로 줄곧 내가 느끼는 감정이었다. 기차가 출발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R에게 그 도시에 가본 적이
- 관리자
- 2024-10-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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