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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보

  • 작성일 2025-01-01

   오경보


김슬기


   청포수영센터 아쿠아로빅 새벽반 6월 마지막 수업 일이었다. 회원들은 수업 20분 전부터 이미 샤워하고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수영장에서 몸을 풀고 기다리는데, 담당 강사는 수업 시작 시간이 지났는데도 도착하지 않았다. 경보는 강사의 휴대전화 번호를 입력했다. 길게 통화 대기음이 이어지다가, 이내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자동 응답 메시지가 흘러나왔다. 경보는 쉬지 않고 강사의 휴대전화 번호를 입력하고 또다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전화는 끝내 연결되지 않았다.

   “경보 씨는 쓸데없이 이런 데 집착하는 경향이 있어.”

   사무용 의자에 앉아 긴 하품을 하던 미경이 핀잔을 주었다. 미경이 보기에 강사의 펑크는 예견된 일이라는 것이었다. 자신은 벌써 알아차렸다고 덧붙였다. 미경은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어떻게 미리 아는 것일까. 경보도 나름의 예견을 해 보기 위해 애썼다. 그러다 매일 아침 강사에게서 희미하게 번져 나오던 술 냄새를 떠올렸다. 술을 좋아하면 그럴까요. 경보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미경이 눈을 흘기며 대답했다. 술이 문제가 아니죠. 경보 씨도 퇴근하고 술을 마시는데 지각은 안 하잖아요. 경보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경이 말에 리듬을 붙여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말했다. 그렇게 생긴 사람들은 뺀질뺀질할 수밖에 없어요. 센터에서 일하는 6년 동안 단 한 번도 결근이나 지각 따위 하지 않은 경보는 죽어도 이해하지 못할 그런 노랫말. 경보는 알아들은 척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센터의 오랜 회원인 김금자가 맨발로 경보와 미경이 앉아 있는 안내 데스크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맨발이 바닥에 닿을 때 찹찹찹, 재촉하는 듯한 소리가 났다. 두꺼운 투명 가림막 앞에 선 김금자의 눈이 수영모 때문에 한껏 치켜 올라가 있었다. 그녀가 진짜로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경보는 알아차리기 힘들어, 입을 꾹 다물고 눈을 내리까는 편을 택했다.

   “회원님. 아무리 급해도 슬리퍼는 신고 나와야지. 바닥에 뭐라도 있어서 발 다치시면 어쩌시려고 그래요. 나 그러면 마음 아파.”

   미경은 센터의 주 고객인 중년 여성들을 잘 다루는 방법을 알았다. 유리할 때는 반말을, 불리할 때는 깍듯한 존댓말을 썼다. 유불리가 애매할 때는 그것들을 적절히 섞을 줄도 알았다. 김금자는 나긋한 말투로 강사의 행방을 물었다. 미경은 또 한 번 강사의 행방과는 전혀 상관없을 김금자의 발 상태를 걱정하는 말을 하고선,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슬픈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강사님이 요 앞 사거리에서 가벼운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미경의 뻔뻔한 거짓말에, 경보도 깜빡 속아 넘어갈 뻔했다. 김금자는 눈앞에서 교통사고를 직접 목격한 사람처럼 안타까워하며 혀를 끌끌 찼다.

   “그럼, 우리 미경 씨가 오늘 아쿠아로빅 수업 좀 해 주면 되겠네. 키도 크고, 늘씬하고··· 미경 씨가 딱 맞구먼.”

   “잘생긴 남자 강사님들만 보시다가, 제가 가서 이리 흔들고 저리 흔들면 언니들 눈 버리셔. 오늘은 자유 수영 조금만 하시다 가시고, 다음 달에 새 시간표 나오면 꼭 보강 처리 해 드릴게. 우리 금자 회원님이 다른 회원님들한테도 잘 좀 얘기 부탁드려요.”

   김금자와 미경이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는 동안, 경보는 지난 6년간 어깨너머로 배운 아쿠아로빅 동작 몇 개를 마음속으로 그려 보았다. 줄곧 미경만 바라보고 대화를 이어 나가던 김금자가 ‘그럼 경보 씨가 오늘 수업을 맡아 주면 어때’ 하고 물어 오면 못 이기는 척 옷을 갈아입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미경과 대화를 마친 김금자는 경보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궁둥이를 씰룩이며 수영장으로 돌아갔다.

   책상에 올려 둔 휴대전화에서 요란하게 알림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경보의 전화뿐만이 아니었다. 미경의 휴대전화와 회원들이 쓰는 수영장 사물함 안에 들어 있는 모든 휴대전화가 한꺼번에 진동하고, 비명을 질러 댔다.

   -산춘시, 전국에 폭염경보 발효 중. 야외 활동 자제, 충분한 물 마시기, 주변 노약자 돌보기 등 안전사고 유의

   “아휴, 귀찮아 죽겠어. 아예 꺼둘 수도 없고. 더우면 덥다고 경고, 추우면 춥다고 경고, 비 온다고 경고, 바람 분다고 경고··· 요즘은 안전 문자가 우리 엄마가 잔소리하는 것보다 더 심한 것 같아.”

   “저는 엄마가 안 계셔서 그런가. 이런 일이라도 걱정해 주는 메시지를 보내 주는 게 고맙던데. 그렇지 않아요?”

   “진짜 우리가 걱정돼서 보낸다고 생각해요?”

   미경이 흡연실에 간 사이, 경보는 ‘폭염주의’ 네 글자를 적은 종이 여러 장을 인쇄해 로비 이곳저곳에 붙여 두었다. 갑작스러운 휴강으로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나온 회원들이 경보가 써 붙인 것을 잠깐 들여다봤다가, 별것 아니네 하는 표정으로 돌아서서 삼삼오오 모여 깔깔거렸다. 김금자 회원도 그 무리에 섞여 웃다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안내 데스크 쪽으로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김금자는 미경을 찾는 듯 두리번거리다 경보와 눈이 마주쳤다.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가림막 아래 반원 모양으로 뚫린 구멍 사이로 불쑥 손을 들이밀었다. 김금자의 손바닥 위에 있던 것이 형광등 빛을 받아 반짝하고 빛났다. 끝이 뾰족한 은색 에펠탑 모양의 열쇠고리였다.

   “우리 아들이 프랑스 출장 갔다 오면서 사람들 나눠 주라고 가져다준 건데. 경보 씨도 하나 해.”

   명절이나 스승의 날이 되면, 퇴근길 수영 강사들의 손에는 회원들이 선물한 듯한 쇼핑백이 여럿 들려 있었다. 정규직 직원들도 명절이면 각종 생필품, 참치, 햄이 예쁘게 포장된 선물 세트 하나씩을 들고 퇴근했다. 비정규직이자 그 누구의 선생님도 아닌 경보의 몫은 없었다. 명절, 기념일 선물 예산이 워낙 타이트한 거 잘 아시지요. 빈손을 비비며 경보에게 다가온 경영지원팀 직원 하나가 말했다. 실은 예산이 문제라기보다··· 경보 씨는 1개월마다 계약을 갱신하는 케이스라 아예 명단에도 없어서···. 경보가 그의 말을 온전히 이해하기도 전에, 그는 경보의 어깨를 툭 치고 눈을 찡긋거리고 바삐 계단을 뛰어 올라가 버렸다. 김금자가 건넨, 고작 성인 남성 손가락 세 개 정도 크기의 에펠탑이 경보의 눈앞에서 크게 몸을 부풀리는 것만 같았다. 잃어버리지 않게 바지 주머니에 깊숙이 넣었다. 에펠탑의 뾰족한 모서리가 허벅지를 콕콕 찌르는 존재감이 좋아서 경보는 온종일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


   청포수영센터는 인근 대단지 아파트 주민들에게 가격 대비 좋은 시설을 갖춘 수영장으로 유명했다. 미네랄이 함유되어 있고 관절 건강에 좋은 해수 풀이라는 것이 중·노년 여성들에게 특히 큰 호응을 얻었다. 매월 정기 등록일이 되면 새벽 5시부터 수영장 밖으로 긴 줄이 만들어졌다. 선착순 등록이 시작되면 10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새벽반을 포함한 모든 반이 마감되었다. 반별로 예비 5번까지 번호가 부여되지만 어렵게 등록한 수영 강습을 취소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예비 2번만 되어도 이번 달 등록은 완전히 단념하는 게 좋다는 것이 오랜 회원들 사이의 공식처럼 여겨졌다.

   7월 첫 수업이 시작되기 전날, 경보는 등록 예비 1번 강영숙 회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모르는 번호로 걸려 온 전화에 강영숙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청포수영센터인데요. 경보의 말에 강영숙의 목소리가 한층 높아졌다. 어머, 이게 어쩐 일이래? 강영숙은 경보가 묻지도 않은, 새벽 수영을 대신해 하려 했던 계획을 줄줄이 읊었다. 그런데 누가 취소를 했대요? 새벽잠이 없고 부지런한, 늘 등록하는 회원들만 돌고 도는 새벽반이었다. 수영복에 명찰을 달고 있는 것도 아닌데 회원들은 대충 서로의 수영복 색깔과 이름, 각자의 가족 관계 정도는 꿰고 있었다. 경보는 강영숙의 물음에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엄밀히 따지면 ‘누가’, ‘취소’를 했다고 말하기 뭣한 구석이 있었다. 김금자 회원은 1등으로 7월 새벽반에 등록했지만, 며칠 전 심장마비로 죽었다. 김금자 회원과 전화번호를 교환했던 몇몇이 그녀의 장례까지 다녀오고서 전해 준 얘기였다.

   “설마 더워서 돌아가셨을까.”

   “그날도 안전 문자 왔잖아요. 폭염경보 발효, 노약자 주의.”

   경보는 김금자 회원이 폭염 때문에 죽었을 것이란 확신을 했다. 경보가 아무리 맞는 말을 해도 의심부터 하고 보는 미경은 이번에도 경보의 말을 튕겨 냈다. 경보는 미경이 불쾌감을 느끼지 않도록 미경의 얼굴이나 몸 쪽을 바라보는 대신 그녀의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난번에 미경에게 받은 부탁 때문이었다. 그런 눈으로 쳐다보면 부담스럽다고요. 제가 어떤 눈을. 그렇게 보기만 하는 것도 일종의 성희롱이 될 수 있어요. 바로 옆에 앉아서 일하는데도요? 아무튼 유명 유튜버가 그랬어요. 경보는 미경의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 후로 미경과 대화할 땐 기둥이나 빈 벽, 의미 없는 사물 따위에 시선을 고정했다. 미경의 모니터 화면 위에 ‘무자본 월 3천만 원 매출 달성’, ‘구매대행 A to Z’, ‘중국 도매 완전 정복’ 글자가 크게 쓰인 영상 콘텐츠가 규칙 없이 뒤섞여 있었다.

   “미경 씨는 늘 열심이어서 보기 좋아요.”

   “뭐가 그렇게 자꾸 좋아요? 그리고 왜 남의 화면을 보고 그래요.”

   미경은 모니터 전원 버튼을 신경질적으로 눌러 끄고, 의자에 걸어 둔 가방을 들어 무릎 위에 올렸다. 월화수목금토일. 칸마다 요일이 적힌 길쭉하고 투명한 통 하나를 꺼내 들었다. 화요일 칸 뚜껑을 딸깍 소리가 나게 열고, 손바닥 위에 빛깔과 크기가 다른 약을 털어놓았다. 미경이 혹시 아프기라도 한 것일까. 경보는 조바심이 났다. 미경도, 이제는 미경의 화면도 볼 수 없는 경보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사람에게라도 말을 거는 듯 천장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미경 씨 어디 아파요?”

   “영양제 먹는 사람이 더 건강한 거 몰라요?”

   미경이 말을 마치자마자, 휴대전화에서 안전 문자가 요란하게 울렸다.

   -산춘시, 기록적인 폭염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외출을 삼가시고, 수분 섭취에 유의해 주시길 바랍니다.

   “수분을 많이 섭취해야 좋대요.”

   “그건 제가 알아서 하는 거고요. 뭐가 자꾸 좋다고 하는 거야···. 왜 그래 진짜.”

   

   센터에서 멀지 않은 저렴한 백반집에서 경보가 점심을 먹을 때였다. 월급이 이체됐다는 알람 메시지가 휴대전화 화면 위로 떠올랐다. 월세와 관리비를 내고 카드값을 빼고 나면 현금이라곤 고작 이십만 원 남짓 남는 게 전부지만 경보는 퇴근 후엔 기분을 내보기로 했다. 뚝배기에 담긴 멀건 된장국과 말라붙은 김치를 앞에 두고, 경보는 배달 앱을 한참 뒤적였다. 평소엔 값이 나가 잘 먹지 못했던 것을 ‘찜’해 두었다가 저녁에 시켜 먹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화면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데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2층 사무실 직원 장 대리였다.

   “월급날엔 역시 건하게 먹어 줘야죠. 미경 씨랑 한 잔?”

   장 대리가 경보를 향해 능글맞게 웃으며, 엄지와 검지로 소주잔을 드는 시늉을 했다. 경보가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경보 씨가 민첩하진 않아도 성실한 스타일이잖아. 미경 씨도 그런 모습에 반할 거라고. 우리 사무실 직원들은 이미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알고 있는데 뭐.”

   자리에서 같이 일어나자고 한 건 장 대리인데 계산대 앞엔 경보가 먼저 섰다. 경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장 대리가 잘 먹었다고 인사를 하는 바람에 백반집 사장이 장 대리의 몫까지 경보의 카드로 계산했다. 식당 밖으로 나서자 장 대리는 인상을 팍 썼다. 이렇게 날씨가 주체를 못 하고 절절 끓으니 사람이 죽어 나간다며 누구를 향하는지 알 수 없는 불만을 얘기했고 경보는 잠자코 들었다. 한여름 특유의 무겁고 습한 공기였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후텁지근한 공기가 훅 끼쳐 들어왔다. 옛 기억도 경보의 의지와 상관없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경보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푹푹 찌는 날씨였음에도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늦은 시간까지 축구하고 돌아온 날이었다. 온몸이 땀범벅이 된 채 집으로 돌아왔는데, 알 수 없는 냄새가 진동했다. 때때로 경보의 엄마는 ‘실험’을 했기에, 경보는 집에서 풍기는 이상한 냄새에는 크게 개의치 않는 편이었다. 문제는 고요한 분위기였다. 태어나고 자란 집인데도 경보는 하마터면 저기요, 하고 낯선 손님처럼 엄마를 찾을 뻔했다. 부엌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코를 찌르는 악취가 풍겨 왔다. 경보의 엄마는 식탁 바로 아래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물건처럼 누워 있었다.

   엄마의 실험이 성공했구나. 경보는 엄마의 숱한 실험, 그러니까 죽기 위한 갖은 노력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유일한 가족이었다. 경보의 엄마는 실험 준비를 마칠 때면, 경보를 앉혀 두고 경보야아- 경보야아- 하고 자신이 어른인 것을 잊은 듯 울곤 했다. 그럴 때마다 경보는 따라 울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른 채 엄마의 등을 쓰다듬곤 했었다. 경보는 다른 어른들이 보기 전에, 엄마가 실험을 마치고 차마 치우지 못한 잔해들을 대신 정리하며 생각했다. 경보야아아아. 그날 아침엔 엄마가 경보를 부르며 우는 소리가 평소와 미묘하게 달랐다. 그건 경보만이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었다. 수업을 듣는 내내 그 목소리가 경보의 귓가를 맴돌았다. 선생님이 용철이 나와서 문제 풀어 봐라, 했는데 불리지 않은 경보가 벌떡 일어나 칠판 앞으로 가기도 했다. 무더운 날씨에 친하지도 않은 다른 반 축구 무리에 끼어 조금만 더, 한 골만 더 하고 집에 돌아가지 않고 버텼던 건 경보가 평생을 살며 유일하게 예견 비슷한 것을 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퇴근 후에 경보는 냉채족발과 소주 세 병을 배달시켰다. 경보가 사는 작은 원룸에는 식탁, 침대, 책장이나 TV 선반 같은 가구라 불릴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경보는 배달 온 것을 바닥에 되는 대로 펼쳐 놓고 먹기 시작했다. 고기 서너 점을 집어먹고, 소주는 두 병을 비웠다. 금세 배가 불렀다. 먹던 것을 아무렇게나 발로 밀어 치워 두고, 경보는 방 한가운데 드러누웠다. 늦은 밤엔 안전 문자도 울리지 않았다. 아무런 방해 없이, 긴장도 없이 편히 쉴 수 있는 시간. 경보는 미경이 보고 싶었다. 사실 미경이 아니더라도, 이 방에 누구라도 함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지만 떠오르는 얼굴이 미경밖에 없었다. 안내 데스크에 나란히 앉아, 매일 9시간을 함께하는 미경이 유일하다시피 한 ‘아는 사람’이었다. 취기가 오른 경보가 휴대전화를 꺼내 전화번호부에서 ‘청포수영센터 김미경’의 이름을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내가 있는 곳에 와 줘요. 미경이 전화를 받는다면 그리 말할 셈이었다. 두루루루, 두루루루루. 신호음이 자꾸 이어지기만 할 뿐 미경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경보는 혼잣말로 미경씨이- 미경씨이- 부르며, 작고 부드러운 공이 빠르게 구르는 듯한 신호음을 듣고 또 들었다.

   

*


   -산춘시, 호우경보 발령에 따라 많은 비와 낙뢰가 예상됩니다. 침수 위험 지역 접근 금지 및 차량 운행 자제 등 안전에 유의 바랍니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는 예고된 일이었다. 청포수영센터는 시설과 서비스 모두 전반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주차장이 문제였다. 이중 주차, 삼중 주차를 해도 모자랄 정도로 자리가 좁은 것도 있었지만, 장마철이면 배수가 잘되지 않아 비가 오면 금방 물이 차올랐다. 경보는 비 예보가 있을 때면, 전날부터 로비 곳곳에 ‘호우경보. 대중교통 이용 권장’ 따위의 말을 적은 종이를 인쇄해 붙여 두곤 했다.

   수영센터에서 가장 이른 시간에 열리는 수영 수업을 듣고, 집으로 돌아간 것 같았던 회원이 센터 문을 벌컥 열고 씩씩대며 들어왔다. 옷을 입고 수영이라도 한 것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쫄딱 젖은 채였다. 단단히 화가 난 회원이 허리에 두 손을 올리고 경보를 향해 목소리를 높이며 근본적인 주차 시스템 개선을 요구했다. 그 어떤 근본적 해결책도 내놓을 수 없는 경보는, 회원이 제풀에 지쳐 입을 다물 때까지 자신이 전날 붙여 둔 안내문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호우경보. 대중교통 이용 권장. 시력 검사를 하듯 한 글자씩 떼어 가며 자세히, 몇 번이고 속으로 읽었다.

   경보는 여러 차례 수영장 내부 스피커에 연결된 마이크로 차량번호 구이공이 차주를 찾는 방송을 했다. 주차의 근본적 문제 해결을 요구하던 회원은 당장의 추위에 턱을 덜덜 떨었다. 경보는 이를 모르는 체하며 태연히 안내 방송만 하려다가, 폭염 때문에 죽은 김금자 회원을 떠올리고 이내 수영장 안으로 급히 뛰어 들어갔다. 아쿠아로빅 수업이 한창이었다. 물을 머금은 것 같은 먹먹한 음악 소리가 실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경보의 방송 소리가 들리지 않은 것이 당연했다. 물속에서 사람들은 무거운 춤을 추고 있었다. 죽은 김금자 회원도 지난달까진 이곳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김금자 회원이 만든 빈자리에 운 좋게 들어온 강영숙도 아쿠아로빅 대열에 섞여 춤을 췄다. 양팔을 벌렸다가 오므리고 또 한 바퀴 빙 도는 동작을 신나게 따라 했다. 경보는 두 손을 입가에 둥글게 말아 가져다 대고, 큰 목소리로 외쳤다.

   “구이공이 차주 분!”

   새로 부임한 강사가 스피커 볼륨을 낮췄다. 경보는 다시 한번 더 구이공이 차주를 찾기 위해 외쳤다. 붉은 바탕에 야자수 그림이 그려진 수영복을 입은 회원 하나가 물안경을 머리 위로 올리며 물 밖으로 나왔다.

   “내 정신 좀 봐. 내가 구이공이지.”

   구이공이는 발목에 걸어 두었던 붉은색 스프링 줄을 한 손으로 빼내, 경보를 향해 말없이 흔들어 보였다. 탄성 좋은 스프링에 달린 사물함 키가 반짝였다. 구이공이는 이거면 충분하지 않으냐는 표정이었다. 경보는 회원의 것을 가만히 받아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서 있었다. 엄지손가락만 한 수영장 사물함 키로는 아무리 해도 다른 차 앞을 가로막고 있는 구이공이를 움직이기엔 역부족이었다. 경보는 사물함 키와 구이공이 사이에 생략된 중간 과정을 떠올렸다. 여자 탈의실에 가는 일, 98번 사물함을 찾는 일, 열쇠를 꽂아 돌리는 일, 남의 옷 무더기 사이에서 정확히 차 키를 찾는 일, 그러다 누가 들어오지 않을까 눈치를 살피느라 주변을 휘휘 둘러보는 일, 도둑처럼 여자의 옷 무더기 사이에서 찾아 낸 차 키를 들고 비가 쏟아지고 있을 배수가 안 되는 주차장으로 가는 일, 잘하지 못하는 운전 실력으로 살금살금 차를 빼는 일.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반대로 하고 공손히 키를 되돌려 주는 일···. 야자수 수영복 회원이 조심조심 미끄러지지 않게 무리로 향하는 동안, 강사는 다시 음악 소리를 키웠다.

   쿵쿵. 빠른 박자로 울리는 음악 소리가 마치 심장 박동 소리처럼 느껴져 경보는 마음이 급해졌다. 미끄러운 타일 위를 빠른 걸음으로 걸어 탈의실 쪽으로 향했다. 미경이 출근하지 않은 지 일주일째였다. 안내 데스크를 오래 비우면 안 되었다. 게다가 화가 단단히 난 채 로비에 덜덜 떨며 서 있을 회원을 생각하니 더 조바심이 났다. 몇 걸음도 채 떼지 않았을 때, 경보의 한쪽 발이 미끄러졌다. 몸의 중심이 완전히 무너졌고, 속수무책으로 경보는 허리부터 바닥에 쾅, 하는 큰 소리와 함께 넘어졌다. 소리를 지를 수도 없을 정도로 큰 통증이 밀려왔다. 경보는 텅 빈 입을 아, 하고 벌린 채 물빛으로 일렁이는 수영장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경보의 등이 축축하게 젖어 들어갈 때가 되어서야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다가왔다.

   이를 어쩌나. 또 사람 죽는 거 아니려나 몰라. 그런 부정 타는 말은 하지 말어. 숨은 쉬는 거지. 아무렴 눈을 뜨고 있는데. 가만히 놔둬, 119 금방 오니까. 근데 누가 119를 부르기는 했어요? 누구라도 불렀겠지. 누가 불러요. 안내 데스크에 사람도 있고. 이 사람이 안내 데스크 직원이잖아.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경보는 고통 속에서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을 떠올렸다. 이들 중 유일하게 바지를 입은 사람은 경보였고, 그에게는 주머니가 있었다. 아쿠아로빅의 물속 동작 하나를 재연하듯 경보는 공중에서 느릿하고 둥근 동작으로 제 주머니 쪽으로 손을 뻗었다. 한쪽엔 김금자 회원이 준 에펠탑 열쇠고리가, 다른 한쪽엔 휴대전화가 있었다. 휴대전화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리고 있었다.

   -산춘시, 침수 우려 지역 등 위험지역 통제 구간 접근을 삼가시기를 바랍니다.

   

*


   월급을 받지 못한 월급날이었다. 한 달 동안 일을 하지 못했으니, 월급을 받지 못한 것도 당연했으나 경보는 어쩐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받지 못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친 허리는 2주쯤 통원 치료를 하고 나서 일상생활을 하는 데 무리가 없을 정도로 나았다. 굽히고 펴고, 때로 힘을 주어 무언가를 드는 일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청포수영센터에 돌아갈 수 없었다. 경보는 그나마 친분이 있던 장 대리에게 센터 일을 다시 시작할 수 없을지 물어보았다. 이전보다 더 성실하게 일하겠다고 사정하듯 얘기했다. 오경보 씨 성실한 건 센터 어린이 회원들도 다 알지요. 장 대리는 무척 난감해하며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경보가 다친 다음 날, 자기 사업을 하게 되었다며 센터를 그만두었던 미경이 잠시 돌아와 자리를 채워 주었다. 미경은 이전에 근무했던 때보다 더 살갑게 회원들에게 말을 걸고, 이런저런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나눴다. 미경이 판매하기 시작했다는 해외 직구 화장품을 회원들은 그 간의 정으로 몇 개씩 주문을 해 주었다. 미경이 사업 파트너이자 새 애인이 실은 6월 새벽 아쿠아로빅 수업을 펑크 낸 강사라는 얘기를 꺼내자, 회원들 사이에선 미경이 경보와 강사 두 사람에게 양다리를 걸치다가 한쪽을 차 버린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미경은 자신이 경보 같은 사람을 만났다는 소문이 억울했는지, 경보의 흉을 보기 시작했다. 대부분 부풀렸고, 때론 완전히 지어내기도 했다. 회원들 입에서 경보의 이야기가 아닌 경보의 이야기는 더 좋지 않은 방향으로 와전돼 떠다녔고, 결국 경보가 센터에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이유가 됐다.

   경보는 당장의 월세와 생활비, 병원비로 잔뜩 쌓인 카드값이 걱정이었다. 어디에도 기댈 곳 없는 경보는 변화가 두려운 사람이었다. 흘러가는 대로 살라는 낭만적 노래 가사도 경보에겐 공포였다. 할 수만 있다면 있는 힘껏 고여 있고 싶었다. 부당해 보이는 계약도 감내한 채 6년이란 시간 동안 청포수영센터에서 일했다. 경보는 막막했다. 어떻게 흘러야 하나. 이를 놓고 상의할 사람 하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경보는 제 이름을 스스로 소리 내 불러보았다. 경보야아. 경보야아. 경보는 오랜만에 엄마를 떠올렸다. 분명 앞모습인데, 얼굴은 뒤통수인 기괴한 조합이었다. 생각해 보니 그 시절의 엄마는 경보의 지금 나이와 비슷했다. 엄마는 냄비 받침뿐인 빈 식탁에 수저 두벌만 올려 두고 떠났지. 경보는 한없는 허기가 몰려오는 것 같았다.

   경보는 편의점에서 컵라면 하나와 소주 세 병을 사 왔다. 면은 건져 먹지도 않고, 국물 몇 모금에 소주 세 병을 비웠다. 금세 잔뜩 취했다. 휴대전화를 들고 습관처럼 전화번호부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경보는 미경의 이름을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두루루, 두루루, 두루루루··· 신호음이 길게 이어졌다. 음성사서함으로 이어지는 안내 멘트를 몇 번이나 듣고서야, 경보는 미경에게 전화 거는 일을 멈췄다. 몽롱한 정신으로 빈 바닥에 아무렇게나 누워, 잠에 빠져 들었다가 휴대전화가 울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경보는 다급히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미경의 메시지였다. 유명 24시 체인점 카페의 아이스커피 교환권과 함께였다.

   -말이 조금 크게 번진 것 같긴 한데··· 경보 씨도 눈치가 있으면, 이 상황 어느 정도 이해는 하실 거로 생각해요. 그러니까 경보 씨도 잘못한 것이 분명···

   경보는 미경이 보낸 메시지를 읽다 말고 시계를 확인했다.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커피 쿠폰을 쓸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카페가 사거리에 있다는 것이 떠올랐다. 경보는 당장 위안이 필요했다. 가벼운 겉옷을 걸치고 현관문을 나섰다.

   

*


   경보는 90도로 기울어진 세상에서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24시 카페 옆 좁은 골목에 앉아 아이스커피의 뚜껑을 열고 한숨에 들이켠 것이 화근이었다. 얼음 한 조각이 경보의 목에 턱 걸렸고, 숨쉬기가 어려워졌다. 경보는 목을 부여잡고, 밝은 가로등이 비추고 있는 큰길 쪽을 내다보았다. 도와 달라고 소리치고 싶어도, 숨 쉴 여유조차 없는 목구멍으로 소리를 낼 수 없었다. 사람들은 물속을 걷는 것처럼 느리게 휘청휘청 대다가 경보와 멀어졌다. 골목은 깜깜했고, 경보는 작았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얼굴을 대고 고통에 신음하던 경보의 마음이 일순간 평온해졌다.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서였다. 경보의 엄마에게도 찾아왔던 그런 죽음의 순간. 실험에 성공한 엄마이지만, 딱 한 가지 아쉬웠던 것이 있었다. 경보는 엄마의 일그러진 마지막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그런 얼굴로 기억되는 일은 그리 좋지 못한 일이라는 것을 경보는 잘 알았다. 경보는 목을 감싸 쥐고 있던 손을 내려놓았다. 있는 힘을 다해 몸을 일으켜, 벽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깊은 명상을 하는, 혹은 수련을 하는 사람처럼 마음을 내려놓고 숨을 마시려 하는 대신 도리어 읍, 소리를 내며 참았다. 아주 깊은 바닷속에 잠수하는 사람처럼, 그렇게.

   

*


   희미하게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이 다급하게 뛰는 발소리도 들리는 듯했다. 천국이 이토록 요란하진 않을 터였다. 경보는 지옥에서 깨어나게 될 것임을 확신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경 씨가 다닌다는 교회에 한 번 나가 보는 건데, 회개 기도라도 한 번 하는 거였는데. 그러다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천국엔 아는 사람 하나 없을 게 분명했지만, 지옥은 달랐다. 엄마는 천국에 갈 위인은 되지 못했으니까, 지옥에서라면 곧 만나게 될 수도 있겠구나. 경보는 엄마에게 묻고 싶은 것이 몇 가지 있었다. 보통의 아들이 보통의 엄마에게 품고 있는 궁금증과 그리 다르지 않은 것들이었다.

   “실제 상황입니다.”

   경보는 눈을 번쩍 떴다. 지옥도 천국도 아니었다. 어젯밤 그 골목이었다. 바닥에는 엎어진 테이크아웃 커피잔과 얼음 녹은 물이 흥건했다. 경보는 벌떡 일어서려다 말고, 갓 태어난 망아지처럼 바닥에 철퍼덕 쓰러지고 말았다. 밤새도록 가부좌 자세로 고정된 다리에 피가 돌고, 회복하는 덴 꽤 시간이 필요한 듯했다. 골목 너머론 몇몇 사람들이 회사에 지각을 한 사람처럼 다급히 지하철역이 있는 방향으로 뛰고 있었다. 주민센터의 스피커에서는 조악한 음질로 ‘실제 상황’이라는 안내 방송이 반복해서 흘러나왔다. 경보는 바지 주머니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리는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산춘시, 오늘 06시 32분. 전지역에 경계경보 발령. 국민 여러분께서는 가까운 대피소로 대피하시기 바랍니다.

   경보는 퍼뜩 판단이 서질 않았다. 자연재해라기에 하늘은 너무 맑았고, 땅은 흔들림 없이 고요했다. 골목에서 가부좌를 하고, 죽은 듯 앉아 있는 동안 자신만 모르는 어떤 일이 새벽 내내 차곡차곡 벌어지고 있었던 것일까. 경보는 높은 가능성으로 전쟁을 점쳤다. 전쟁이 아니더라도, 대피하라는 메시지에 따르지 않으면 큰일이었다. 경보는 다리를 절뚝이면서도 집이 있는 방향으로 힘껏 달리기 시작했다. 에엥- 하고 길게 이어지는 사이렌 소리 사이로 실제 상황이라는 방송이 반복해서 들려왔다.

   집에 돌아온 경보는 옷장에서 가방 하나를 꺼냈다. 한 번도 메지 않은 새것이었지만, 오래되어 곰팡내가 났다. 언젠가 여행을 가게 되면 써야지, 하고 명동에서 만 오천 원을 주고 충동구매 했다가 지금껏 사용하지 못한 가방이었다. 빈 가방을 앞에 두고 경보는 발을 동동 굴렀다. 무엇이라도 챙겨야 할 것 같은데 마땅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원룸 바닥엔 음식물 찌꺼기가 묻은 플라스틱 용기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그래, 식수가 중요하지. 경보는 냉장고에 남아 있는 유일한 마실 것인 캔맥주 두 개를 꺼내 가방에 넣었다.

   경보는 아주 중요한 한 가지를 떠올렸다. 겨울 이불 맨 아래 고이 모셔 두었던 파일 하나를 꺼냈다. 경력증명서였다. 정형외과에서 마지막 허리 물리치료를 받고, 청포수영센터에 잠깐 들렀다가 받은 것이었다. 장 대리는 ‘미리 챙겨 두라’며 경보의 손에 기어이 경력증명서를 쥐여 주고, 등을 떠밀듯 경보를 센터 밖으로 밀어내 손을 흔들었다. 당시엔 장 대리의 행동이 다신 이곳에 얼씬도 하지 말라는 것처럼 느껴져 적잖이 서운했었지만, 그의 선견지명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이불 아래에 손을 넣은 김에 통장과 도장을 꺼내 가방에 챙겨 넣었다. 경보는 지난날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미경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미경 씨, 대피하실 때 경력증명서 꼭 챙기는 편이 좋습니다. 저는 잊을 뻔한 것을 간신히 떠올렸습니다.

   가방 지퍼를 끝까지 채우고, 경보는 운동화를 신었다. 현관문을 열기 전 잠시 망설였다. 문을 잠글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물론 재난 상황 전에도 마땅히 훔쳐 갈 것 하나 없었기에 굳이 잠글 필요가 없었다. 그저 남들이 다 문을 잠그고 사니, 그렇게 따랐을 뿐이었다. 경보는 열쇠로 현관문을 잠그고, 잘 잠겼는지 문을 당겨 확인까지 했다. 열쇠를 주머니에 잘 챙겨 넣으려 깊이 찔러 넣는데, 열쇠고리의 뾰족한 부분이 손끝을 찔렀다. 김금자 회원이 주었던 선물, 에펠탑 열쇠고리. 경보는 열쇠고리에 집 열쇠를 끼워 넣었다.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내리막길에서 경보는 개 산책을 시키는 여자를 보았다. 여전히 위협적인 사이렌 소리가 들리는데도 여자는 태평한 얼굴로, 개가 끄는 방향으로 털레털레 걸음을 옮겼다. 여자는 한 손에는 개 목줄을 다른 한 손에는 개똥이 든 비닐봉지를 들고 있을 뿐이었다. 여자도 자신의 전부인 개를 데리고, 저 나름의 속도로 대피하고 있는 것이겠지. 경보는 어깨에 걸친 가방을 손으로 단단히 붙잡고, 빠른 속도로 내리막길을 뛰어 내려갔다.

   곧 전쟁으로 아수라장이 될 이곳을 상상해 보았다. 고요한 아침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불기둥과 귀를 때리는 폭발음까지. 영화에서 본 대로라면, 한 나라의 모든 것이 붕괴될 것이었다. 목숨을 부지할 수만 있다면, 완전히 초기화된 환경에서 새로이 모든 것을 시작해야 할 것이었다. 경보는 그런 일 따위 두렵지 않게 느껴졌다. 오히려 경보에게는 꽤 희망적이고도 공평한 상황처럼 여겨졌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죽어도 그만인 인생이라 생각했는데, 간절히 살고 싶어졌다. 경보는 전속력으로 달리며 내리막길을 걷는 몇몇 사람들을 추월했다. 난생처음 우월감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보란 듯이 더 빠른 속도로 달리기 위해 세게 발을 굴렀다. 저 멀리 대피소 안내 팻말이 붙은 지하철역이 보였다.

   지하철역 안엔 경보처럼 가벼운 짐만 챙겨 나온 가족 단위의 두세 팀이 엉거주춤 서서 자기들끼리 소곤거리고 있었다. 경보는 고향을 떠나 혼자 살고 있다는 미경의 안위가 걱정되어 휴대전화를 찾았다. 주머니와 가방 어디에도 휴대전화가 없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열쇠고리를 끼우는 동안 신발장 위에 두고 온 것이 분명했다. 경보는 안절부절못했다. 좀 전에 보낸 메시지에 미경이 연락을 해 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동안 있었던 모든 일이 미안했다며,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해 준 것은 경보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할지도 몰랐다. 되돌아가려다 말고, 경보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곧 기간 시설이 파괴되면, 통신 기기도 아무 소용이 없을 터였다. 미경이 부디 안전하길 바라며, 경보는 역사 내에서 가장 안전해 보이는 자리를 골랐다. 무엇을 기다리는진 모르겠지만, 기다리는 듯한 마음을 하고서 단단히 팔짱을 끼고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분명 긴박해야 할 순간인데, 경보는 자꾸 졸음이 쏟아졌다. 꾸벅꾸벅 조는 동안에도 그가 바라거나 바라지 않는 그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했다. 이내 경보는 어디에도 기대지 못한 고개를 허공에 아무렇게나 꺾고 잠에 빠져들었다.

   

*


   경보가 잠에서 깨었을 땐, 상상했던 것과 완전히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불구덩이도, 요란한 폭발음도, 경보의 뒤를 이어 몰려든 대피 행렬도 없었다. 멀끔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지하철 개찰구를 통과하는 모습만 반복됐다. 경보는 꿈이라도 꿨나 싶었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꿈이 아니게 되는가. 경보는 자신이 앉은 자리 바로 옆에 가지런히 놓아두었던 가방을 열어 보았다. 팬티 두 장과 바지 한 벌, 청포수영센터 경력증명서와 맥주 두 캔이 들어 있었다. 챙겨 온 것 그대로였다.

   경보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세상은 그대로인데 갈 곳이 완전히 사라진 것만 같았다. 어쩌지, 어쩌지. 경보는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바지 주머니를 더듬어 보았다. 작은 에펠탑이 대롱대롱 매달린 열쇠고리만 있었다. 경보는 열쇠고리를 손에 쥐고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확실히 해 둬야 할 것이 있었다. 전쟁은 어떻게 되었나. 어쩌다 번복이 되었나. 누구에게라도 물어야 할 것이었다.

   “저···.”

   경보가 제대로 말을 꺼내기도 전에, 말쑥하게 차려입은 여자가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여자는 경보를 아래위로 훑었다. 미경이 자주 짓던 표정과 비슷했다. 경보는 되도록 여자와 눈을 맞추지 않기 위해 애쓰며, 여자의 시선이 닿는 자신의 행색을 살폈다. 경보의 상·하의는 온갖 먼지와 오물이 잔뜩 묻어 있었다. 경보는 여자가 놀랄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이에 대해 분명히 해명을 해 줘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건 순전히 여자를 위한 일이었다. 경보가 여자 가까이 반걸음 다가서자, 여자는 세 걸음 물러섰다.

   “어머! 도와주세요!”

   바쁜 걸음을 옮기던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경보와 여자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기 시작했다. 무언가 잘못되어 가는 것 같았다. 금세 몰려든 사람들의 무리 사이로, 덩치 큰 남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와 경보 가까이 다가왔다. 본인은 다가오면서, 경보에게는 다가오지 말라는 듯 손바닥을 앞으로 내민 채였다. 남자는 경보의 손에 든 것이 무엇인지 살피려는 듯 자꾸만 힐끔거렸다.

   “아저씨, 일단 손에 든 뾰족한 것부터 내려놓고 얘기합시다. 사람들 다치면 안 되잖아요. 아저씨 범죄자 되고 싶어 그래요?”

   “나는 단지 전쟁이 났다고 그래서.”

   “아저씨, 전쟁 안 났어요. 봐요. 다들 출근하잖아.”

   “아니, 나는.”

   경보가 한 걸음 다가서자, 뒤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크게 술렁였다. 남자가 반걸음 물러서며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다.

   “새벽에 이 난리 난 건, 다 오경보 때문이었어요. 집에 가셔야지요.”

   “내가? 나는 아무 잘못도 안 했는데?”

   “아저씨 잘못 안 한 건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알죠. 아무튼 전쟁 안 났고, 정부가 뉴스로 공식 발표도 했어요. 이게 다 오경보 때문이니, 일상으로 돌아가라고.”

   “정부가 오경보 때문이라고 발표했다고요?”

   “네. 정부가. 안전 문자로 전 국민한테 그렇게 다시 얘기했어요.”

   “···.”

   “그러니 손에 든 거 내려놔요.”

   경보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덮쳐 올 것 같은 두려움이 몰려왔다. 자신을 지킬 것이라곤, 세 면이 뾰족한 에펠탑 열쇠고리뿐. 경보는 그중 가장 길쭉한 부분을 사람들 앞에 들이밀었다. 가장 길고 뾰족한 부분은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길이밖에 되지 않는데도, 사람들은 경보가 한 걸음씩 앞으로 걸어갈 때마다 워, 하는 소리를 내며 몇 걸음 더 물러섰다. 경보와 사람들은 영원히 섞이지 않을 것처럼 자꾸 멀어지기만 했다. 오경보의 잘못은 없지만 오경보 때문인 혼란스러운 아침. 지하철 역사 안은 대피 대신 출근을 하게 된 사람들이 자꾸자꾸 쌓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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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사과 박솔뫼 어느 날 아침 애리는 자신이 오랜 시간 흔들리는 창을 보며 시간을 보내왔음을 알았다. 일을 하러 가는 길이었고 이곳에 이사와 이 열차를 탄 것은 1년 7개월째였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학교에 들어가기 전 아이일 때 모든 것이 멈춰 서 있고 시간이 영원한 것처럼 느껴지던 때부터 탈 것에 올라타 멀어지는 집과 나무들을 보아 왔다고 느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텐데 왜 그제야 그것이 새삼스럽게 느껴진 것일까. 어딘가로 향하는 감각과 함께 창 너머 공터와 집들과 골목들을 실제로 걷는 일은 왜인지 일어나지 않을 일처럼 느껴지고 언제까지나 좌석에 앉아 멀어지는 사람과 집들과 빨래와 커튼을 보고 있을 것 같다. 애리는 사원 숙소를 제공하는 회사에서 오랫동안 일을 하다 그만두고 나와 집을 구해 살다 사회복지와 개호 관련 자격증을 따고 이후에는 자격증과 상관없는 일을 몇 년을 하였다. 그러다 역시나 숙소를 제공하는 지금의 회사에 다니게 되었다. 회사는 큰 항구가 있는 대도시와 인접한 소도시에 있었고 숙소는 회사 직원만이 아니라 해당 지역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한 곳이었기 때문에 회사와는 아주 가깝지는 않았다. 그 때문에 예전 회사는 숙소에서 회사까지 걸어갈 수 있었지만 지금 회사에 가기 위해서는 숙소에서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역으로 가서 다시 20분가량 열차를 타야 했다. 숙소 앞에서 버스를 타는 방법도 있었고 버스를 타는 것이 여러모로 더 편했지만 버스는 늘 같은 회사 사람들로 붐볐고 앉아 가기가 힘들어서 애리는 보통 열차를 탔다. 오랜 시간 흔들리는 창을 보며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자 곧이어 오랜 시간 기숙사에서 공동 부엌에서 공용 생활공간에서 얼굴만 익숙한 사람들과 살아왔다는 사실이 마치 연결된 문제처럼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둘은 전혀 상관없는 일인데. 마음을 먹자면 살 곳을 구해서 혼자 사는 것이 가능했던 것도 같지만 애리는 왜인지 그럴 마음을 쉽게 먹지 못했다는 생각을 한다. 이렇게 나이가 들어서 공동 숙소에서 사는 것이 부끄럽거나 괴롭지는 않고 돈을 아낄 수 있고 여러모로 편리한 점도 많았지만 혼자 살 집을 찾아 오래 쓸 가구를 사는 일에 겁을 먹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냉정하게 바라본다. 창은 여전히 흔들리고 창밖으로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터가 보인다. 공터 구석에서는 무언가 야채 같은 것을 심는 것도 같지만 대부분은 아무것도 없는 공터. 도시 어느 한구석의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터는 드물다는 생각을 한다. 가끔은 누군가의 넓은 방과 책장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다가도 애리는 동시에 이것저것 모든 것을 한 번에 버리고 어딘가로 금세 떠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고 그것이 실제로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지금 생활은 지금 생활대로 좋다고 여기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누군가의 텅 빈 방 (떠올려 보면 아주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가져 본 적이 없는)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 그것을 원하는 마음은 원하는 마음으로 눈에 보이는 곳에 확실하게 붙여 두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텅 빈 방의 모습이

  • 관리자
  • 2025-07-01
알고 싶습니다

알고 싶습니다 최재영 가끔 인생이 내게 애벌레가 파먹는 중인 사과를 베어 물도록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토요일 저녁 아홉 시 뉴스에선 오늘도 전 세계 기아들이 굶고 있고 남미 쿠데타 정부의 진압 몽둥이에 시민들이 맞고 있으며 전장의 포탄은 군인과 민간인들을 죽인다. 그러나 우리 집 안방엔 세 살 연상 아내와 세 살짜리 딸이 곤히 잠들어 있다. 비록 내일이면 공룡 박사 딸은 파키케팔로사우루스 흉내 내며 내 턱에 박치기를 날릴 것이고 아내는 원시인 사냥꾼처럼 괴성을 지르며 딸을 쫓을 것이지만··· 서른여섯 살의 나는 대한민국 성남시의 아파트에, 지금 여기에, 우리 세 가족과 잘 있고, 그것참, 다행이다. 내가 베어 문 사과 반쪽에 벌레가 없어서. 뉴스에 어느 북한군이 등장한 건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전장이었다. 한 북한군이 부상 때문에 낙오했는지 홀로 하늘을 보며 누워 있었다. 러시아 것인지 우크라이나 것인지 모를 드론이 공중에서 그를 촬영하고 있었다. 곧 드론은 부드럽게 수직 하강하며 그에게 다가갔고 그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쓰으윽- 줌인 됐다. 뉴스 진행자와 패널들이 호들갑 떨었다. “너무나 리얼합니다!” 무슨 아는 사람이라도 본 것처럼 오바하네. 나는 그들의 반응에 코웃음 치며 손에 든 캔맥주를 쓰으윽- 들이키려다, 멈칫했다. 아는 사람 같았다. 낯이 익었다. * 약 15년 전 여름, 나는 백령도에 주둔한 해병대 6여단 영창에 15일간 구금되어 있었다. 죄명은 후임 폭행이었다. 막 상병이 됐을 때 생긴 일이었다. 영창의 개인 감방에 들어서자 정말이지 감옥처럼 생겨서(정말 감옥이긴 했지만) 울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철커덩 자물쇠가 닫히는 소리와 함께 스물한 살에 인생이 망해 버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감방 철창 너머론 건물의 입구와 헌병 하나가 근무하며 감시하는 공간이 보였다. 그 공간을 기준으로 네 개의 감방들이 반원을 그리며 각각 1호 창, 2호 창, 3호 창, 5호 창이라는 이름으로 있었다(4호 창은 없었다, 해병대에선 숫자 4를 쓰지 않으니까). 나는 3호 창에 수감됐다. 감방 안에 앉아 있으면 보이는 건 꾹 닫힌 건물 문, 그리고 중앙의 그 헌병밖에 없었다. 양옆의 다른 감방들은 시야에 아예 들어오지 않았다. 1호 창과 5호 창에도 수감자가 한 명씩 있다는 것만 알 뿐이었다. 단 2호 창만은 비어 있다고 했는데 폭행 사건이 일상적이라 항상 미어터지던 백령도 해병대의 영창에선 이례적인 일이었다. 나중에 듣기론 당시 북쪽 상황이 심상치 않아 각 부대들의 징계 절차가 보류됐기 때문이라고 했다. 감방 안은 어두컴컴하고 축축했다. 폭은 누워서 다리를 뻗지 못할 정도였다. 물론 화장실은 따로 없었다. 안쪽으로 세 걸음 가면 구석에 수도꼭지를 비롯해 쪼그려 앉아 일을 보는 일명 고무신 변기가 있었다. 무릎 정도 높이의 아담한 담만이 가림막을 해 주었다. 큰 것이든 작은

  • 관리자
  • 2025-07-01
프레살레

프레살레 반수연 홍은 미로처럼 이어진 길을 솜씨 좋게 빠져나갔다. 홍을 놓칠세라 일행들은 빠른 걸음으로 따라붙었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공항은 번잡했다. 챙이 넓은 홍의 검은색 모자는 인파 사이에서 사라졌다가 나타나곤 했다. 모자가 사라질 때마다 짧은 불안이 스쳤다. 우리 중 누구도 파리에 처음 오는 이는 없었다. 정아는 작년 패션 위크에도 왔다고 했다. 하지만 출구로 빠져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홍을 만난 순간, 홍이 웰컴 투 패리스, 라며 환하게 웃던 순간, 제가 잘 모시겠습니다, 라며 농담과 카리스마가 뒤섞인 환영 인사를 건네는 순간, 홍은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깃발이 되었다. 몇 개의 건물과 긴 복도를 통과해 홍이 예약해 둔 렌터카 사무실에 도착했다. 미리 맡겨 두었다는 홍의 짐이 사무실 모퉁이에 쌓여 있었다. 각지고 거대한 두 개의 캐리어, 명품 마크가 선명한 가죽 배낭과 보스턴백, 두 개의 쇼핑백도 포개져 있었다. 캐리어 계의 에르메스라는 바로 그 리모와 아닌가요? 색깔 너무 이쁘다. 이삿짐을 떠올리게 하는 홍의 짐에 약간의 충격을 받은 나와는 달리 정아는 레몬색 캐리어에 먼저 관심을 보였다. 자기야, 그건 좀 그렇지 않아요? 에르메스야 버킨 말고는 뭐가 있나. 홍과 정아의 대화를 들으며 나는 며칠 전 정아가 단톡방에 올린 메시지를 떠올렸다. 유럽 항공은 수하물 분실이 잦으니 위탁 수하물 없이 기내용 캐리어와 작은 손가방으로 짐을 제한해요! 정아는 해당 항공사의 기내 반입 수하물 규정을 캡처해서 올리며 당부했다. 같은 옷을 이틀 연달아 입거나, 옷과 콘셉트가 맞지 않는 신발이나 가방을 견디지 못하는 예민한 패션 감각의 소유자인 정아가 분실이 두려워 그런 제안을 한다는 건 조금 의외였다. 그런데 이제 보니 정아는 홍의 짐이 어마어마하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정아가 홍을 위해 우리 짐을 단속했다는 사실보다 진실의 내막을 뒤틀었다는 것이 묘하게 신경을 긁었다. 독일제 7인용 SUV 차량의 마지막 3열을 접어 트렁크의 공간을 넓혔다. 홍의 캐리어를 먼저 싣고 그사이에 네 개의 기내용 캐리어를 테트리스 하듯 넣었다 뺐다 씨름하느라 손가락이 욱신거렸다. 어찌어찌 짐을 욱여넣고 나니 트렁크는 룸미러로 후방이 보이지 않을 만큼 꽉 찼다. 배낭이나 손가방은 발아래에 두거나 안고 타면 될 거라고 홍이 운전석으로 올라타며 말했다. 나는 노트북과 파우치와 책이 담긴 배낭을 가슴에 안고 뒷좌석에 올라 안전띠를 당겨 맸다. 짐과 사람이 뒤엉켜 숨 쉴 공간마저 충분치 않게 느껴졌다. 답답함이 불안으로 바뀌며 숨이 가빠 왔다. 다른 일행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프로작을 한 알 꺼내 입에 물고 창을 조금 열었다. 약기운이 신경을 눌러 주기를 기다리며 눈을 감았다. 파리는 오전 열한 시, 한국은 오후 여섯 시였다. 지금쯤이면 윤수는 일어났을 것이다. 냉장고 제일 위 칸에 김치찌개 있어. 냉동실에 육개장도 얼려 두었어.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어. 공항으로 출발하기 전 나는 신발을 신다 말고 식탁에 앉아 짧

  • 관리자
  • 2025-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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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조이

    고여 있고 싶어하는 경보의 마음...그리고 자꾸만 오해 받는 경보의 처지..너무나도 공감됩니다. 재밌게 읽었습니다!!

    • 2025-01-04 23:55:41
    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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