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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보

  • 작성일 2025-01-01
  • 조회수 770

   오경보


김슬기


   청포수영센터 아쿠아로빅 새벽반 6월 마지막 수업 일이었다. 회원들은 수업 20분 전부터 이미 샤워하고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수영장에서 몸을 풀고 기다리는데, 담당 강사는 수업 시작 시간이 지났는데도 도착하지 않았다. 경보는 강사의 휴대전화 번호를 입력했다. 길게 통화 대기음이 이어지다가, 이내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자동 응답 메시지가 흘러나왔다. 경보는 쉬지 않고 강사의 휴대전화 번호를 입력하고 또다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전화는 끝내 연결되지 않았다.

   “경보 씨는 쓸데없이 이런 데 집착하는 경향이 있어.”

   사무용 의자에 앉아 긴 하품을 하던 미경이 핀잔을 주었다. 미경이 보기에 강사의 펑크는 예견된 일이라는 것이었다. 자신은 벌써 알아차렸다고 덧붙였다. 미경은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어떻게 미리 아는 것일까. 경보도 나름의 예견을 해 보기 위해 애썼다. 그러다 매일 아침 강사에게서 희미하게 번져 나오던 술 냄새를 떠올렸다. 술을 좋아하면 그럴까요. 경보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미경이 눈을 흘기며 대답했다. 술이 문제가 아니죠. 경보 씨도 퇴근하고 술을 마시는데 지각은 안 하잖아요. 경보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경이 말에 리듬을 붙여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말했다. 그렇게 생긴 사람들은 뺀질뺀질할 수밖에 없어요. 센터에서 일하는 6년 동안 단 한 번도 결근이나 지각 따위 하지 않은 경보는 죽어도 이해하지 못할 그런 노랫말. 경보는 알아들은 척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센터의 오랜 회원인 김금자가 맨발로 경보와 미경이 앉아 있는 안내 데스크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맨발이 바닥에 닿을 때 찹찹찹, 재촉하는 듯한 소리가 났다. 두꺼운 투명 가림막 앞에 선 김금자의 눈이 수영모 때문에 한껏 치켜 올라가 있었다. 그녀가 진짜로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경보는 알아차리기 힘들어, 입을 꾹 다물고 눈을 내리까는 편을 택했다.

   “회원님. 아무리 급해도 슬리퍼는 신고 나와야지. 바닥에 뭐라도 있어서 발 다치시면 어쩌시려고 그래요. 나 그러면 마음 아파.”

   미경은 센터의 주 고객인 중년 여성들을 잘 다루는 방법을 알았다. 유리할 때는 반말을, 불리할 때는 깍듯한 존댓말을 썼다. 유불리가 애매할 때는 그것들을 적절히 섞을 줄도 알았다. 김금자는 나긋한 말투로 강사의 행방을 물었다. 미경은 또 한 번 강사의 행방과는 전혀 상관없을 김금자의 발 상태를 걱정하는 말을 하고선,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슬픈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강사님이 요 앞 사거리에서 가벼운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미경의 뻔뻔한 거짓말에, 경보도 깜빡 속아 넘어갈 뻔했다. 김금자는 눈앞에서 교통사고를 직접 목격한 사람처럼 안타까워하며 혀를 끌끌 찼다.

   “그럼, 우리 미경 씨가 오늘 아쿠아로빅 수업 좀 해 주면 되겠네. 키도 크고, 늘씬하고··· 미경 씨가 딱 맞구먼.”

   “잘생긴 남자 강사님들만 보시다가, 제가 가서 이리 흔들고 저리 흔들면 언니들 눈 버리셔. 오늘은 자유 수영 조금만 하시다 가시고, 다음 달에 새 시간표 나오면 꼭 보강 처리 해 드릴게. 우리 금자 회원님이 다른 회원님들한테도 잘 좀 얘기 부탁드려요.”

   김금자와 미경이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는 동안, 경보는 지난 6년간 어깨너머로 배운 아쿠아로빅 동작 몇 개를 마음속으로 그려 보았다. 줄곧 미경만 바라보고 대화를 이어 나가던 김금자가 ‘그럼 경보 씨가 오늘 수업을 맡아 주면 어때’ 하고 물어 오면 못 이기는 척 옷을 갈아입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미경과 대화를 마친 김금자는 경보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궁둥이를 씰룩이며 수영장으로 돌아갔다.

   책상에 올려 둔 휴대전화에서 요란하게 알림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경보의 전화뿐만이 아니었다. 미경의 휴대전화와 회원들이 쓰는 수영장 사물함 안에 들어 있는 모든 휴대전화가 한꺼번에 진동하고, 비명을 질러 댔다.

   -산춘시, 전국에 폭염경보 발효 중. 야외 활동 자제, 충분한 물 마시기, 주변 노약자 돌보기 등 안전사고 유의

   “아휴, 귀찮아 죽겠어. 아예 꺼둘 수도 없고. 더우면 덥다고 경고, 추우면 춥다고 경고, 비 온다고 경고, 바람 분다고 경고··· 요즘은 안전 문자가 우리 엄마가 잔소리하는 것보다 더 심한 것 같아.”

   “저는 엄마가 안 계셔서 그런가. 이런 일이라도 걱정해 주는 메시지를 보내 주는 게 고맙던데. 그렇지 않아요?”

   “진짜 우리가 걱정돼서 보낸다고 생각해요?”

   미경이 흡연실에 간 사이, 경보는 ‘폭염주의’ 네 글자를 적은 종이 여러 장을 인쇄해 로비 이곳저곳에 붙여 두었다. 갑작스러운 휴강으로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나온 회원들이 경보가 써 붙인 것을 잠깐 들여다봤다가, 별것 아니네 하는 표정으로 돌아서서 삼삼오오 모여 깔깔거렸다. 김금자 회원도 그 무리에 섞여 웃다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안내 데스크 쪽으로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김금자는 미경을 찾는 듯 두리번거리다 경보와 눈이 마주쳤다.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가림막 아래 반원 모양으로 뚫린 구멍 사이로 불쑥 손을 들이밀었다. 김금자의 손바닥 위에 있던 것이 형광등 빛을 받아 반짝하고 빛났다. 끝이 뾰족한 은색 에펠탑 모양의 열쇠고리였다.

   “우리 아들이 프랑스 출장 갔다 오면서 사람들 나눠 주라고 가져다준 건데. 경보 씨도 하나 해.”

   명절이나 스승의 날이 되면, 퇴근길 수영 강사들의 손에는 회원들이 선물한 듯한 쇼핑백이 여럿 들려 있었다. 정규직 직원들도 명절이면 각종 생필품, 참치, 햄이 예쁘게 포장된 선물 세트 하나씩을 들고 퇴근했다. 비정규직이자 그 누구의 선생님도 아닌 경보의 몫은 없었다. 명절, 기념일 선물 예산이 워낙 타이트한 거 잘 아시지요. 빈손을 비비며 경보에게 다가온 경영지원팀 직원 하나가 말했다. 실은 예산이 문제라기보다··· 경보 씨는 1개월마다 계약을 갱신하는 케이스라 아예 명단에도 없어서···. 경보가 그의 말을 온전히 이해하기도 전에, 그는 경보의 어깨를 툭 치고 눈을 찡긋거리고 바삐 계단을 뛰어 올라가 버렸다. 김금자가 건넨, 고작 성인 남성 손가락 세 개 정도 크기의 에펠탑이 경보의 눈앞에서 크게 몸을 부풀리는 것만 같았다. 잃어버리지 않게 바지 주머니에 깊숙이 넣었다. 에펠탑의 뾰족한 모서리가 허벅지를 콕콕 찌르는 존재감이 좋아서 경보는 온종일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


   청포수영센터는 인근 대단지 아파트 주민들에게 가격 대비 좋은 시설을 갖춘 수영장으로 유명했다. 미네랄이 함유되어 있고 관절 건강에 좋은 해수 풀이라는 것이 중·노년 여성들에게 특히 큰 호응을 얻었다. 매월 정기 등록일이 되면 새벽 5시부터 수영장 밖으로 긴 줄이 만들어졌다. 선착순 등록이 시작되면 10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새벽반을 포함한 모든 반이 마감되었다. 반별로 예비 5번까지 번호가 부여되지만 어렵게 등록한 수영 강습을 취소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예비 2번만 되어도 이번 달 등록은 완전히 단념하는 게 좋다는 것이 오랜 회원들 사이의 공식처럼 여겨졌다.

   7월 첫 수업이 시작되기 전날, 경보는 등록 예비 1번 강영숙 회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모르는 번호로 걸려 온 전화에 강영숙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청포수영센터인데요. 경보의 말에 강영숙의 목소리가 한층 높아졌다. 어머, 이게 어쩐 일이래? 강영숙은 경보가 묻지도 않은, 새벽 수영을 대신해 하려 했던 계획을 줄줄이 읊었다. 그런데 누가 취소를 했대요? 새벽잠이 없고 부지런한, 늘 등록하는 회원들만 돌고 도는 새벽반이었다. 수영복에 명찰을 달고 있는 것도 아닌데 회원들은 대충 서로의 수영복 색깔과 이름, 각자의 가족 관계 정도는 꿰고 있었다. 경보는 강영숙의 물음에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엄밀히 따지면 ‘누가’, ‘취소’를 했다고 말하기 뭣한 구석이 있었다. 김금자 회원은 1등으로 7월 새벽반에 등록했지만, 며칠 전 심장마비로 죽었다. 김금자 회원과 전화번호를 교환했던 몇몇이 그녀의 장례까지 다녀오고서 전해 준 얘기였다.

   “설마 더워서 돌아가셨을까.”

   “그날도 안전 문자 왔잖아요. 폭염경보 발효, 노약자 주의.”

   경보는 김금자 회원이 폭염 때문에 죽었을 것이란 확신을 했다. 경보가 아무리 맞는 말을 해도 의심부터 하고 보는 미경은 이번에도 경보의 말을 튕겨 냈다. 경보는 미경이 불쾌감을 느끼지 않도록 미경의 얼굴이나 몸 쪽을 바라보는 대신 그녀의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난번에 미경에게 받은 부탁 때문이었다. 그런 눈으로 쳐다보면 부담스럽다고요. 제가 어떤 눈을. 그렇게 보기만 하는 것도 일종의 성희롱이 될 수 있어요. 바로 옆에 앉아서 일하는데도요? 아무튼 유명 유튜버가 그랬어요. 경보는 미경의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 후로 미경과 대화할 땐 기둥이나 빈 벽, 의미 없는 사물 따위에 시선을 고정했다. 미경의 모니터 화면 위에 ‘무자본 월 3천만 원 매출 달성’, ‘구매대행 A to Z’, ‘중국 도매 완전 정복’ 글자가 크게 쓰인 영상 콘텐츠가 규칙 없이 뒤섞여 있었다.

   “미경 씨는 늘 열심이어서 보기 좋아요.”

   “뭐가 그렇게 자꾸 좋아요? 그리고 왜 남의 화면을 보고 그래요.”

   미경은 모니터 전원 버튼을 신경질적으로 눌러 끄고, 의자에 걸어 둔 가방을 들어 무릎 위에 올렸다. 월화수목금토일. 칸마다 요일이 적힌 길쭉하고 투명한 통 하나를 꺼내 들었다. 화요일 칸 뚜껑을 딸깍 소리가 나게 열고, 손바닥 위에 빛깔과 크기가 다른 약을 털어놓았다. 미경이 혹시 아프기라도 한 것일까. 경보는 조바심이 났다. 미경도, 이제는 미경의 화면도 볼 수 없는 경보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사람에게라도 말을 거는 듯 천장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미경 씨 어디 아파요?”

   “영양제 먹는 사람이 더 건강한 거 몰라요?”

   미경이 말을 마치자마자, 휴대전화에서 안전 문자가 요란하게 울렸다.

   -산춘시, 기록적인 폭염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외출을 삼가시고, 수분 섭취에 유의해 주시길 바랍니다.

   “수분을 많이 섭취해야 좋대요.”

   “그건 제가 알아서 하는 거고요. 뭐가 자꾸 좋다고 하는 거야···. 왜 그래 진짜.”

   

   센터에서 멀지 않은 저렴한 백반집에서 경보가 점심을 먹을 때였다. 월급이 이체됐다는 알람 메시지가 휴대전화 화면 위로 떠올랐다. 월세와 관리비를 내고 카드값을 빼고 나면 현금이라곤 고작 이십만 원 남짓 남는 게 전부지만 경보는 퇴근 후엔 기분을 내보기로 했다. 뚝배기에 담긴 멀건 된장국과 말라붙은 김치를 앞에 두고, 경보는 배달 앱을 한참 뒤적였다. 평소엔 값이 나가 잘 먹지 못했던 것을 ‘찜’해 두었다가 저녁에 시켜 먹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화면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데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2층 사무실 직원 장 대리였다.

   “월급날엔 역시 건하게 먹어 줘야죠. 미경 씨랑 한 잔?”

   장 대리가 경보를 향해 능글맞게 웃으며, 엄지와 검지로 소주잔을 드는 시늉을 했다. 경보가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경보 씨가 민첩하진 않아도 성실한 스타일이잖아. 미경 씨도 그런 모습에 반할 거라고. 우리 사무실 직원들은 이미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알고 있는데 뭐.”

   자리에서 같이 일어나자고 한 건 장 대리인데 계산대 앞엔 경보가 먼저 섰다. 경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장 대리가 잘 먹었다고 인사를 하는 바람에 백반집 사장이 장 대리의 몫까지 경보의 카드로 계산했다. 식당 밖으로 나서자 장 대리는 인상을 팍 썼다. 이렇게 날씨가 주체를 못 하고 절절 끓으니 사람이 죽어 나간다며 누구를 향하는지 알 수 없는 불만을 얘기했고 경보는 잠자코 들었다. 한여름 특유의 무겁고 습한 공기였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후텁지근한 공기가 훅 끼쳐 들어왔다. 옛 기억도 경보의 의지와 상관없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경보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푹푹 찌는 날씨였음에도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늦은 시간까지 축구하고 돌아온 날이었다. 온몸이 땀범벅이 된 채 집으로 돌아왔는데, 알 수 없는 냄새가 진동했다. 때때로 경보의 엄마는 ‘실험’을 했기에, 경보는 집에서 풍기는 이상한 냄새에는 크게 개의치 않는 편이었다. 문제는 고요한 분위기였다. 태어나고 자란 집인데도 경보는 하마터면 저기요, 하고 낯선 손님처럼 엄마를 찾을 뻔했다. 부엌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코를 찌르는 악취가 풍겨 왔다. 경보의 엄마는 식탁 바로 아래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물건처럼 누워 있었다.

   엄마의 실험이 성공했구나. 경보는 엄마의 숱한 실험, 그러니까 죽기 위한 갖은 노력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유일한 가족이었다. 경보의 엄마는 실험 준비를 마칠 때면, 경보를 앉혀 두고 경보야아- 경보야아- 하고 자신이 어른인 것을 잊은 듯 울곤 했다. 그럴 때마다 경보는 따라 울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른 채 엄마의 등을 쓰다듬곤 했었다. 경보는 다른 어른들이 보기 전에, 엄마가 실험을 마치고 차마 치우지 못한 잔해들을 대신 정리하며 생각했다. 경보야아아아. 그날 아침엔 엄마가 경보를 부르며 우는 소리가 평소와 미묘하게 달랐다. 그건 경보만이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었다. 수업을 듣는 내내 그 목소리가 경보의 귓가를 맴돌았다. 선생님이 용철이 나와서 문제 풀어 봐라, 했는데 불리지 않은 경보가 벌떡 일어나 칠판 앞으로 가기도 했다. 무더운 날씨에 친하지도 않은 다른 반 축구 무리에 끼어 조금만 더, 한 골만 더 하고 집에 돌아가지 않고 버텼던 건 경보가 평생을 살며 유일하게 예견 비슷한 것을 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퇴근 후에 경보는 냉채족발과 소주 세 병을 배달시켰다. 경보가 사는 작은 원룸에는 식탁, 침대, 책장이나 TV 선반 같은 가구라 불릴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경보는 배달 온 것을 바닥에 되는 대로 펼쳐 놓고 먹기 시작했다. 고기 서너 점을 집어먹고, 소주는 두 병을 비웠다. 금세 배가 불렀다. 먹던 것을 아무렇게나 발로 밀어 치워 두고, 경보는 방 한가운데 드러누웠다. 늦은 밤엔 안전 문자도 울리지 않았다. 아무런 방해 없이, 긴장도 없이 편히 쉴 수 있는 시간. 경보는 미경이 보고 싶었다. 사실 미경이 아니더라도, 이 방에 누구라도 함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지만 떠오르는 얼굴이 미경밖에 없었다. 안내 데스크에 나란히 앉아, 매일 9시간을 함께하는 미경이 유일하다시피 한 ‘아는 사람’이었다. 취기가 오른 경보가 휴대전화를 꺼내 전화번호부에서 ‘청포수영센터 김미경’의 이름을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내가 있는 곳에 와 줘요. 미경이 전화를 받는다면 그리 말할 셈이었다. 두루루루, 두루루루루. 신호음이 자꾸 이어지기만 할 뿐 미경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경보는 혼잣말로 미경씨이- 미경씨이- 부르며, 작고 부드러운 공이 빠르게 구르는 듯한 신호음을 듣고 또 들었다.

   

*


   -산춘시, 호우경보 발령에 따라 많은 비와 낙뢰가 예상됩니다. 침수 위험 지역 접근 금지 및 차량 운행 자제 등 안전에 유의 바랍니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는 예고된 일이었다. 청포수영센터는 시설과 서비스 모두 전반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주차장이 문제였다. 이중 주차, 삼중 주차를 해도 모자랄 정도로 자리가 좁은 것도 있었지만, 장마철이면 배수가 잘되지 않아 비가 오면 금방 물이 차올랐다. 경보는 비 예보가 있을 때면, 전날부터 로비 곳곳에 ‘호우경보. 대중교통 이용 권장’ 따위의 말을 적은 종이를 인쇄해 붙여 두곤 했다.

   수영센터에서 가장 이른 시간에 열리는 수영 수업을 듣고, 집으로 돌아간 것 같았던 회원이 센터 문을 벌컥 열고 씩씩대며 들어왔다. 옷을 입고 수영이라도 한 것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쫄딱 젖은 채였다. 단단히 화가 난 회원이 허리에 두 손을 올리고 경보를 향해 목소리를 높이며 근본적인 주차 시스템 개선을 요구했다. 그 어떤 근본적 해결책도 내놓을 수 없는 경보는, 회원이 제풀에 지쳐 입을 다물 때까지 자신이 전날 붙여 둔 안내문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호우경보. 대중교통 이용 권장. 시력 검사를 하듯 한 글자씩 떼어 가며 자세히, 몇 번이고 속으로 읽었다.

   경보는 여러 차례 수영장 내부 스피커에 연결된 마이크로 차량번호 구이공이 차주를 찾는 방송을 했다. 주차의 근본적 문제 해결을 요구하던 회원은 당장의 추위에 턱을 덜덜 떨었다. 경보는 이를 모르는 체하며 태연히 안내 방송만 하려다가, 폭염 때문에 죽은 김금자 회원을 떠올리고 이내 수영장 안으로 급히 뛰어 들어갔다. 아쿠아로빅 수업이 한창이었다. 물을 머금은 것 같은 먹먹한 음악 소리가 실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경보의 방송 소리가 들리지 않은 것이 당연했다. 물속에서 사람들은 무거운 춤을 추고 있었다. 죽은 김금자 회원도 지난달까진 이곳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김금자 회원이 만든 빈자리에 운 좋게 들어온 강영숙도 아쿠아로빅 대열에 섞여 춤을 췄다. 양팔을 벌렸다가 오므리고 또 한 바퀴 빙 도는 동작을 신나게 따라 했다. 경보는 두 손을 입가에 둥글게 말아 가져다 대고, 큰 목소리로 외쳤다.

   “구이공이 차주 분!”

   새로 부임한 강사가 스피커 볼륨을 낮췄다. 경보는 다시 한번 더 구이공이 차주를 찾기 위해 외쳤다. 붉은 바탕에 야자수 그림이 그려진 수영복을 입은 회원 하나가 물안경을 머리 위로 올리며 물 밖으로 나왔다.

   “내 정신 좀 봐. 내가 구이공이지.”

   구이공이는 발목에 걸어 두었던 붉은색 스프링 줄을 한 손으로 빼내, 경보를 향해 말없이 흔들어 보였다. 탄성 좋은 스프링에 달린 사물함 키가 반짝였다. 구이공이는 이거면 충분하지 않으냐는 표정이었다. 경보는 회원의 것을 가만히 받아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서 있었다. 엄지손가락만 한 수영장 사물함 키로는 아무리 해도 다른 차 앞을 가로막고 있는 구이공이를 움직이기엔 역부족이었다. 경보는 사물함 키와 구이공이 사이에 생략된 중간 과정을 떠올렸다. 여자 탈의실에 가는 일, 98번 사물함을 찾는 일, 열쇠를 꽂아 돌리는 일, 남의 옷 무더기 사이에서 정확히 차 키를 찾는 일, 그러다 누가 들어오지 않을까 눈치를 살피느라 주변을 휘휘 둘러보는 일, 도둑처럼 여자의 옷 무더기 사이에서 찾아 낸 차 키를 들고 비가 쏟아지고 있을 배수가 안 되는 주차장으로 가는 일, 잘하지 못하는 운전 실력으로 살금살금 차를 빼는 일.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반대로 하고 공손히 키를 되돌려 주는 일···. 야자수 수영복 회원이 조심조심 미끄러지지 않게 무리로 향하는 동안, 강사는 다시 음악 소리를 키웠다.

   쿵쿵. 빠른 박자로 울리는 음악 소리가 마치 심장 박동 소리처럼 느껴져 경보는 마음이 급해졌다. 미끄러운 타일 위를 빠른 걸음으로 걸어 탈의실 쪽으로 향했다. 미경이 출근하지 않은 지 일주일째였다. 안내 데스크를 오래 비우면 안 되었다. 게다가 화가 단단히 난 채 로비에 덜덜 떨며 서 있을 회원을 생각하니 더 조바심이 났다. 몇 걸음도 채 떼지 않았을 때, 경보의 한쪽 발이 미끄러졌다. 몸의 중심이 완전히 무너졌고, 속수무책으로 경보는 허리부터 바닥에 쾅, 하는 큰 소리와 함께 넘어졌다. 소리를 지를 수도 없을 정도로 큰 통증이 밀려왔다. 경보는 텅 빈 입을 아, 하고 벌린 채 물빛으로 일렁이는 수영장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경보의 등이 축축하게 젖어 들어갈 때가 되어서야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다가왔다.

   이를 어쩌나. 또 사람 죽는 거 아니려나 몰라. 그런 부정 타는 말은 하지 말어. 숨은 쉬는 거지. 아무렴 눈을 뜨고 있는데. 가만히 놔둬, 119 금방 오니까. 근데 누가 119를 부르기는 했어요? 누구라도 불렀겠지. 누가 불러요. 안내 데스크에 사람도 있고. 이 사람이 안내 데스크 직원이잖아.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경보는 고통 속에서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을 떠올렸다. 이들 중 유일하게 바지를 입은 사람은 경보였고, 그에게는 주머니가 있었다. 아쿠아로빅의 물속 동작 하나를 재연하듯 경보는 공중에서 느릿하고 둥근 동작으로 제 주머니 쪽으로 손을 뻗었다. 한쪽엔 김금자 회원이 준 에펠탑 열쇠고리가, 다른 한쪽엔 휴대전화가 있었다. 휴대전화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리고 있었다.

   -산춘시, 침수 우려 지역 등 위험지역 통제 구간 접근을 삼가시기를 바랍니다.

   

*


   월급을 받지 못한 월급날이었다. 한 달 동안 일을 하지 못했으니, 월급을 받지 못한 것도 당연했으나 경보는 어쩐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받지 못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친 허리는 2주쯤 통원 치료를 하고 나서 일상생활을 하는 데 무리가 없을 정도로 나았다. 굽히고 펴고, 때로 힘을 주어 무언가를 드는 일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청포수영센터에 돌아갈 수 없었다. 경보는 그나마 친분이 있던 장 대리에게 센터 일을 다시 시작할 수 없을지 물어보았다. 이전보다 더 성실하게 일하겠다고 사정하듯 얘기했다. 오경보 씨 성실한 건 센터 어린이 회원들도 다 알지요. 장 대리는 무척 난감해하며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경보가 다친 다음 날, 자기 사업을 하게 되었다며 센터를 그만두었던 미경이 잠시 돌아와 자리를 채워 주었다. 미경은 이전에 근무했던 때보다 더 살갑게 회원들에게 말을 걸고, 이런저런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나눴다. 미경이 판매하기 시작했다는 해외 직구 화장품을 회원들은 그 간의 정으로 몇 개씩 주문을 해 주었다. 미경이 사업 파트너이자 새 애인이 실은 6월 새벽 아쿠아로빅 수업을 펑크 낸 강사라는 얘기를 꺼내자, 회원들 사이에선 미경이 경보와 강사 두 사람에게 양다리를 걸치다가 한쪽을 차 버린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미경은 자신이 경보 같은 사람을 만났다는 소문이 억울했는지, 경보의 흉을 보기 시작했다. 대부분 부풀렸고, 때론 완전히 지어내기도 했다. 회원들 입에서 경보의 이야기가 아닌 경보의 이야기는 더 좋지 않은 방향으로 와전돼 떠다녔고, 결국 경보가 센터에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이유가 됐다.

   경보는 당장의 월세와 생활비, 병원비로 잔뜩 쌓인 카드값이 걱정이었다. 어디에도 기댈 곳 없는 경보는 변화가 두려운 사람이었다. 흘러가는 대로 살라는 낭만적 노래 가사도 경보에겐 공포였다. 할 수만 있다면 있는 힘껏 고여 있고 싶었다. 부당해 보이는 계약도 감내한 채 6년이란 시간 동안 청포수영센터에서 일했다. 경보는 막막했다. 어떻게 흘러야 하나. 이를 놓고 상의할 사람 하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경보는 제 이름을 스스로 소리 내 불러보았다. 경보야아. 경보야아. 경보는 오랜만에 엄마를 떠올렸다. 분명 앞모습인데, 얼굴은 뒤통수인 기괴한 조합이었다. 생각해 보니 그 시절의 엄마는 경보의 지금 나이와 비슷했다. 엄마는 냄비 받침뿐인 빈 식탁에 수저 두벌만 올려 두고 떠났지. 경보는 한없는 허기가 몰려오는 것 같았다.

   경보는 편의점에서 컵라면 하나와 소주 세 병을 사 왔다. 면은 건져 먹지도 않고, 국물 몇 모금에 소주 세 병을 비웠다. 금세 잔뜩 취했다. 휴대전화를 들고 습관처럼 전화번호부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경보는 미경의 이름을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두루루, 두루루, 두루루루··· 신호음이 길게 이어졌다. 음성사서함으로 이어지는 안내 멘트를 몇 번이나 듣고서야, 경보는 미경에게 전화 거는 일을 멈췄다. 몽롱한 정신으로 빈 바닥에 아무렇게나 누워, 잠에 빠져 들었다가 휴대전화가 울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경보는 다급히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미경의 메시지였다. 유명 24시 체인점 카페의 아이스커피 교환권과 함께였다.

   -말이 조금 크게 번진 것 같긴 한데··· 경보 씨도 눈치가 있으면, 이 상황 어느 정도 이해는 하실 거로 생각해요. 그러니까 경보 씨도 잘못한 것이 분명···

   경보는 미경이 보낸 메시지를 읽다 말고 시계를 확인했다.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커피 쿠폰을 쓸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카페가 사거리에 있다는 것이 떠올랐다. 경보는 당장 위안이 필요했다. 가벼운 겉옷을 걸치고 현관문을 나섰다.

   

*


   경보는 90도로 기울어진 세상에서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24시 카페 옆 좁은 골목에 앉아 아이스커피의 뚜껑을 열고 한숨에 들이켠 것이 화근이었다. 얼음 한 조각이 경보의 목에 턱 걸렸고, 숨쉬기가 어려워졌다. 경보는 목을 부여잡고, 밝은 가로등이 비추고 있는 큰길 쪽을 내다보았다. 도와 달라고 소리치고 싶어도, 숨 쉴 여유조차 없는 목구멍으로 소리를 낼 수 없었다. 사람들은 물속을 걷는 것처럼 느리게 휘청휘청 대다가 경보와 멀어졌다. 골목은 깜깜했고, 경보는 작았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얼굴을 대고 고통에 신음하던 경보의 마음이 일순간 평온해졌다.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서였다. 경보의 엄마에게도 찾아왔던 그런 죽음의 순간. 실험에 성공한 엄마이지만, 딱 한 가지 아쉬웠던 것이 있었다. 경보는 엄마의 일그러진 마지막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그런 얼굴로 기억되는 일은 그리 좋지 못한 일이라는 것을 경보는 잘 알았다. 경보는 목을 감싸 쥐고 있던 손을 내려놓았다. 있는 힘을 다해 몸을 일으켜, 벽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깊은 명상을 하는, 혹은 수련을 하는 사람처럼 마음을 내려놓고 숨을 마시려 하는 대신 도리어 읍, 소리를 내며 참았다. 아주 깊은 바닷속에 잠수하는 사람처럼, 그렇게.

   

*


   희미하게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이 다급하게 뛰는 발소리도 들리는 듯했다. 천국이 이토록 요란하진 않을 터였다. 경보는 지옥에서 깨어나게 될 것임을 확신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경 씨가 다닌다는 교회에 한 번 나가 보는 건데, 회개 기도라도 한 번 하는 거였는데. 그러다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천국엔 아는 사람 하나 없을 게 분명했지만, 지옥은 달랐다. 엄마는 천국에 갈 위인은 되지 못했으니까, 지옥에서라면 곧 만나게 될 수도 있겠구나. 경보는 엄마에게 묻고 싶은 것이 몇 가지 있었다. 보통의 아들이 보통의 엄마에게 품고 있는 궁금증과 그리 다르지 않은 것들이었다.

   “실제 상황입니다.”

   경보는 눈을 번쩍 떴다. 지옥도 천국도 아니었다. 어젯밤 그 골목이었다. 바닥에는 엎어진 테이크아웃 커피잔과 얼음 녹은 물이 흥건했다. 경보는 벌떡 일어서려다 말고, 갓 태어난 망아지처럼 바닥에 철퍼덕 쓰러지고 말았다. 밤새도록 가부좌 자세로 고정된 다리에 피가 돌고, 회복하는 덴 꽤 시간이 필요한 듯했다. 골목 너머론 몇몇 사람들이 회사에 지각을 한 사람처럼 다급히 지하철역이 있는 방향으로 뛰고 있었다. 주민센터의 스피커에서는 조악한 음질로 ‘실제 상황’이라는 안내 방송이 반복해서 흘러나왔다. 경보는 바지 주머니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리는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산춘시, 오늘 06시 32분. 전지역에 경계경보 발령. 국민 여러분께서는 가까운 대피소로 대피하시기 바랍니다.

   경보는 퍼뜩 판단이 서질 않았다. 자연재해라기에 하늘은 너무 맑았고, 땅은 흔들림 없이 고요했다. 골목에서 가부좌를 하고, 죽은 듯 앉아 있는 동안 자신만 모르는 어떤 일이 새벽 내내 차곡차곡 벌어지고 있었던 것일까. 경보는 높은 가능성으로 전쟁을 점쳤다. 전쟁이 아니더라도, 대피하라는 메시지에 따르지 않으면 큰일이었다. 경보는 다리를 절뚝이면서도 집이 있는 방향으로 힘껏 달리기 시작했다. 에엥- 하고 길게 이어지는 사이렌 소리 사이로 실제 상황이라는 방송이 반복해서 들려왔다.

   집에 돌아온 경보는 옷장에서 가방 하나를 꺼냈다. 한 번도 메지 않은 새것이었지만, 오래되어 곰팡내가 났다. 언젠가 여행을 가게 되면 써야지, 하고 명동에서 만 오천 원을 주고 충동구매 했다가 지금껏 사용하지 못한 가방이었다. 빈 가방을 앞에 두고 경보는 발을 동동 굴렀다. 무엇이라도 챙겨야 할 것 같은데 마땅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원룸 바닥엔 음식물 찌꺼기가 묻은 플라스틱 용기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그래, 식수가 중요하지. 경보는 냉장고에 남아 있는 유일한 마실 것인 캔맥주 두 개를 꺼내 가방에 넣었다.

   경보는 아주 중요한 한 가지를 떠올렸다. 겨울 이불 맨 아래 고이 모셔 두었던 파일 하나를 꺼냈다. 경력증명서였다. 정형외과에서 마지막 허리 물리치료를 받고, 청포수영센터에 잠깐 들렀다가 받은 것이었다. 장 대리는 ‘미리 챙겨 두라’며 경보의 손에 기어이 경력증명서를 쥐여 주고, 등을 떠밀듯 경보를 센터 밖으로 밀어내 손을 흔들었다. 당시엔 장 대리의 행동이 다신 이곳에 얼씬도 하지 말라는 것처럼 느껴져 적잖이 서운했었지만, 그의 선견지명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이불 아래에 손을 넣은 김에 통장과 도장을 꺼내 가방에 챙겨 넣었다. 경보는 지난날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미경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미경 씨, 대피하실 때 경력증명서 꼭 챙기는 편이 좋습니다. 저는 잊을 뻔한 것을 간신히 떠올렸습니다.

   가방 지퍼를 끝까지 채우고, 경보는 운동화를 신었다. 현관문을 열기 전 잠시 망설였다. 문을 잠글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물론 재난 상황 전에도 마땅히 훔쳐 갈 것 하나 없었기에 굳이 잠글 필요가 없었다. 그저 남들이 다 문을 잠그고 사니, 그렇게 따랐을 뿐이었다. 경보는 열쇠로 현관문을 잠그고, 잘 잠겼는지 문을 당겨 확인까지 했다. 열쇠를 주머니에 잘 챙겨 넣으려 깊이 찔러 넣는데, 열쇠고리의 뾰족한 부분이 손끝을 찔렀다. 김금자 회원이 주었던 선물, 에펠탑 열쇠고리. 경보는 열쇠고리에 집 열쇠를 끼워 넣었다.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내리막길에서 경보는 개 산책을 시키는 여자를 보았다. 여전히 위협적인 사이렌 소리가 들리는데도 여자는 태평한 얼굴로, 개가 끄는 방향으로 털레털레 걸음을 옮겼다. 여자는 한 손에는 개 목줄을 다른 한 손에는 개똥이 든 비닐봉지를 들고 있을 뿐이었다. 여자도 자신의 전부인 개를 데리고, 저 나름의 속도로 대피하고 있는 것이겠지. 경보는 어깨에 걸친 가방을 손으로 단단히 붙잡고, 빠른 속도로 내리막길을 뛰어 내려갔다.

   곧 전쟁으로 아수라장이 될 이곳을 상상해 보았다. 고요한 아침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불기둥과 귀를 때리는 폭발음까지. 영화에서 본 대로라면, 한 나라의 모든 것이 붕괴될 것이었다. 목숨을 부지할 수만 있다면, 완전히 초기화된 환경에서 새로이 모든 것을 시작해야 할 것이었다. 경보는 그런 일 따위 두렵지 않게 느껴졌다. 오히려 경보에게는 꽤 희망적이고도 공평한 상황처럼 여겨졌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죽어도 그만인 인생이라 생각했는데, 간절히 살고 싶어졌다. 경보는 전속력으로 달리며 내리막길을 걷는 몇몇 사람들을 추월했다. 난생처음 우월감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보란 듯이 더 빠른 속도로 달리기 위해 세게 발을 굴렀다. 저 멀리 대피소 안내 팻말이 붙은 지하철역이 보였다.

   지하철역 안엔 경보처럼 가벼운 짐만 챙겨 나온 가족 단위의 두세 팀이 엉거주춤 서서 자기들끼리 소곤거리고 있었다. 경보는 고향을 떠나 혼자 살고 있다는 미경의 안위가 걱정되어 휴대전화를 찾았다. 주머니와 가방 어디에도 휴대전화가 없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열쇠고리를 끼우는 동안 신발장 위에 두고 온 것이 분명했다. 경보는 안절부절못했다. 좀 전에 보낸 메시지에 미경이 연락을 해 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동안 있었던 모든 일이 미안했다며,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해 준 것은 경보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할지도 몰랐다. 되돌아가려다 말고, 경보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곧 기간 시설이 파괴되면, 통신 기기도 아무 소용이 없을 터였다. 미경이 부디 안전하길 바라며, 경보는 역사 내에서 가장 안전해 보이는 자리를 골랐다. 무엇을 기다리는진 모르겠지만, 기다리는 듯한 마음을 하고서 단단히 팔짱을 끼고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분명 긴박해야 할 순간인데, 경보는 자꾸 졸음이 쏟아졌다. 꾸벅꾸벅 조는 동안에도 그가 바라거나 바라지 않는 그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했다. 이내 경보는 어디에도 기대지 못한 고개를 허공에 아무렇게나 꺾고 잠에 빠져들었다.

   

*


   경보가 잠에서 깨었을 땐, 상상했던 것과 완전히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불구덩이도, 요란한 폭발음도, 경보의 뒤를 이어 몰려든 대피 행렬도 없었다. 멀끔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지하철 개찰구를 통과하는 모습만 반복됐다. 경보는 꿈이라도 꿨나 싶었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꿈이 아니게 되는가. 경보는 자신이 앉은 자리 바로 옆에 가지런히 놓아두었던 가방을 열어 보았다. 팬티 두 장과 바지 한 벌, 청포수영센터 경력증명서와 맥주 두 캔이 들어 있었다. 챙겨 온 것 그대로였다.

   경보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세상은 그대로인데 갈 곳이 완전히 사라진 것만 같았다. 어쩌지, 어쩌지. 경보는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바지 주머니를 더듬어 보았다. 작은 에펠탑이 대롱대롱 매달린 열쇠고리만 있었다. 경보는 열쇠고리를 손에 쥐고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확실히 해 둬야 할 것이 있었다. 전쟁은 어떻게 되었나. 어쩌다 번복이 되었나. 누구에게라도 물어야 할 것이었다.

   “저···.”

   경보가 제대로 말을 꺼내기도 전에, 말쑥하게 차려입은 여자가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여자는 경보를 아래위로 훑었다. 미경이 자주 짓던 표정과 비슷했다. 경보는 되도록 여자와 눈을 맞추지 않기 위해 애쓰며, 여자의 시선이 닿는 자신의 행색을 살폈다. 경보의 상·하의는 온갖 먼지와 오물이 잔뜩 묻어 있었다. 경보는 여자가 놀랄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이에 대해 분명히 해명을 해 줘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건 순전히 여자를 위한 일이었다. 경보가 여자 가까이 반걸음 다가서자, 여자는 세 걸음 물러섰다.

   “어머! 도와주세요!”

   바쁜 걸음을 옮기던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경보와 여자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기 시작했다. 무언가 잘못되어 가는 것 같았다. 금세 몰려든 사람들의 무리 사이로, 덩치 큰 남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와 경보 가까이 다가왔다. 본인은 다가오면서, 경보에게는 다가오지 말라는 듯 손바닥을 앞으로 내민 채였다. 남자는 경보의 손에 든 것이 무엇인지 살피려는 듯 자꾸만 힐끔거렸다.

   “아저씨, 일단 손에 든 뾰족한 것부터 내려놓고 얘기합시다. 사람들 다치면 안 되잖아요. 아저씨 범죄자 되고 싶어 그래요?”

   “나는 단지 전쟁이 났다고 그래서.”

   “아저씨, 전쟁 안 났어요. 봐요. 다들 출근하잖아.”

   “아니, 나는.”

   경보가 한 걸음 다가서자, 뒤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크게 술렁였다. 남자가 반걸음 물러서며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다.

   “새벽에 이 난리 난 건, 다 오경보 때문이었어요. 집에 가셔야지요.”

   “내가? 나는 아무 잘못도 안 했는데?”

   “아저씨 잘못 안 한 건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알죠. 아무튼 전쟁 안 났고, 정부가 뉴스로 공식 발표도 했어요. 이게 다 오경보 때문이니, 일상으로 돌아가라고.”

   “정부가 오경보 때문이라고 발표했다고요?”

   “네. 정부가. 안전 문자로 전 국민한테 그렇게 다시 얘기했어요.”

   “···.”

   “그러니 손에 든 거 내려놔요.”

   경보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덮쳐 올 것 같은 두려움이 몰려왔다. 자신을 지킬 것이라곤, 세 면이 뾰족한 에펠탑 열쇠고리뿐. 경보는 그중 가장 길쭉한 부분을 사람들 앞에 들이밀었다. 가장 길고 뾰족한 부분은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길이밖에 되지 않는데도, 사람들은 경보가 한 걸음씩 앞으로 걸어갈 때마다 워, 하는 소리를 내며 몇 걸음 더 물러섰다. 경보와 사람들은 영원히 섞이지 않을 것처럼 자꾸 멀어지기만 했다. 오경보의 잘못은 없지만 오경보 때문인 혼란스러운 아침. 지하철 역사 안은 대피 대신 출근을 하게 된 사람들이 자꾸자꾸 쌓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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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드를 올려요

가드를 올려요 양지예 월요일 출근 지하철에 이현은 용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제일 좋아하는 구석 자리 좌석이었다. 이어폰을 꽂으려 고개를 들었을 때 맞은편에 앉은 노인이 급히 시선을 돌렸다. 이현을 훑어보던 눈치였다. 까끌까끌해 보일 정도로 머리를 짧게 자른 왜소한 남자. 이현은 아무 일도 없는 듯 스마트폰에 무선 이어폰을 연결했다. 괜찮았다. 진심이었다. 언제인가 눈이 마주쳤는데도 시선을 돌리지 않는 사람과 마주 앉은 적도 있었다. 노인 여성 한 명, 중년 남성 한 명. 이현 쪽에서 시선을 먼저 돌린 후에도 이현에게 고정되어 있던 두 시선. 지금 생각해 보니 전혀 닮지 않은 두 사람은 꼭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서른 인생에서 스쳐 지나간 수천수만의 사람 중 단 둘뿐이었는데도 기억에 선명했다. 두 번 모두 이현은 목적지에 닿기도 전에 낯선 역에서 내려야 했다. 어김없이 지하철 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내리는 사람 없이 타는 사람만 늘었다. 건너편의 까까머리 노인이 아직 그 자리에 있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이현의 시선에는 앞에 선 고등학생이 배 쪽으로 멘 백팩만 들어왔다. 백팩에 얹힌 스마트폰에 고정된 안경알과 마주치지 않으려 조심하면서 이현은 자리를 고쳐 앉았다. 이어폰에서는 출근 때마다 듣는 ‘직장인 필수 영문장 섀도잉’ 음성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 시간 정도 되는 유튜브 영상은 지하철에 타서 듣기 시작하면 갈아타는 역에 도착할 즈음 끝났다. 광고 건너뛰기▶| 를 누르려다 이현은 알고리즘이 추천한 다른 영상을 잘못 누른다. 보통은 광고가 흘러가게 두는 편이었다. 예고 없이 튀어나오는 광고 음악에는 졸음이 달아나는 효과가 있었다. 더 큰 이유는 앉아서 출근하는 때보다 서서 출근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었다. 만원 지하철에 선 채 가방이나 외투 주머니에 넣어 둔 스마트폰을 꺼내려면 꽤나 용기가 필요했다. 주위 승객 여러분, 아주 잠깐만 이만큼의 영역에서 제 팔꿈치를 좀 휘두르겠습니다. 나서서 승낙을 구할 수 없기에 적당한 때를 노리는 요령과 눈치까지 필요했다. 앉아서 가면 민폐에 대한 부담이 덜했다. 무릎 위에 올려 둔 가방이 약간의 공간을 확보해 주기 때문이었다. 이현이 실수로 누른 영상은 어젯밤에 시청하던 발톱 치료 영상이었다. 이현의 알고리즘은 비슷한 영상으로 채워져 있었다. 얼굴이 아니라 균과 얽힌 나머지 안으로 파고들다 파고들다 이윽고 시커멓고 누렇게 되어 버린 발톱이 주인공인 영상들이었다. 증상이 심한 사람은 색이 변한 정도를 넘어 자라나는 발톱을 내리누를 정도로 두껍게 쌓여서 발톱이 웃자란 조개껍데기처럼 보이기도 했다. 올린 사람은 달라도 영상의 흐름은 거의 비슷했다. 소독약을 뿌린 다음 작은 드릴처럼 생긴 도구로 발톱을 갈아 낸다. 휘날리는 빵가루 같은 각질들을 닦아 내고 가끔은 니퍼를 이용해 커다란 발톱 덩어리를 잘라 내기도 한다. 잘라 낸 발톱 아래에는 각화된 살과 균이 융합해 불규칙적이고 축축한 구조체를 이루고 있기 마련이었다. 피고름이 고여 있을 때도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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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1-01
막내를 찾습니다

막내를 찾습니다 곽재민 작정하고 도망친 사람의 자리는 깔끔하다. 이를 토대로 우린 이틀간 연락이 되질 않던 막내가 돌아오지 않을 거란 결론을 내렸다. 얼마 전까지 같이 일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수많은 욕설이 들려왔다. 막내는 얼어 죽을 년이었다가, 차에 치어 콱 죽어 버렸으면 좋을 년이 됐다가, 찢어 죽일 년이 됐다. 잠자코 선배들의 욕을 듣던 왕작가 님은 요즘 막내들은 버틸 생각이 없는 것 같다며 따지듯이 얘기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왕작가 님은 무안했는지 내게 면죄부를 내려 줬다. 막내와 비슷한 연배임에도 요즘 것들에 묶이지 않았다는 사실이 묘하게 안정감을 줬다. 혹시 너는 막내가 도망칠 걸 알고 있었니. 나는 몰랐다고 답했다. 혹시 숨겨 주는 거라면 너도 다를 게 없는 거 알지. 나는 알고 있다고 답했다. 그것도 못 버티면서 어딜 방송계에 발 들이려 해. 선배들은 방송작가 블랙리스트에 막내의 이름을 올리겠다며 윽박질렀다. 고작 23살짜리 사회 초년생에게 너무한 처사가 아닌가 싶었지만, 내게 발언권은 없었다. 도망치는 걸 도와줬다간 네 이름도 오르게 될 거야. 가족도 아닌데 연좌제라니. 나는 공손하게 두 손을 모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블랙리스트는 방송작가들 사이에서 은밀하게 공유된다. 으레 블랙리스트가 그렇듯 내용은 상당히 주관적이다. 업무 강도가 어땠는지, 막내가 얼마나 버티다가 도망치게 됐는지는 명시되지 않는다. 선배의 기분을 거슬리게 했던 몇몇 일화가 적힌 채 방송계에 떠돌게 될 뿐이다. 그렇게 박제된 작가들은 취업 시장에서 기회가 제한되곤 한다. 작가들이 최대한 구설수 없이 일하려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비롯된다. 방송업계에 발을 들인 지 얼마 되지 않은 막내가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알 리 없었다. 이런 것도 알려 줬어야 하나. 하지만 방송에 환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추잡한 부분을 일일이 설명하기가 싫었다. 선배, 이거 해석해 봐요. 나 어시민 못살메, 이추룩 조꼬띠 이서도 못 사는디. 이걸 어떻게 알아먹어요. 조만간 베네수엘라어 해석하라고 시킬 것 같아요. 세전 180만 원 받으면서 이런 일을 해야 돼요? 함께 일한 지 한 달이 지나고 막내는 내게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영상을 문서화하는 프리뷰 작업은 막내의 일이었다. 얼마 전, 제주도 해녀들의 방언을 문서화하는 작업을 할 때 막내의 투정이 더욱 격해졌다. 비품을 채우러 다이소에 들르거나 커피 심부름하는 것보다도 이해할 수 없다고,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다고 했다. 그런 기본적인 업무를 할 줄 알아야 메인작가도 되는 거라 다독였지만 막내는 거듭 하소연했다. 이런 잡무를 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선배 대단하다. 이런 짓을 몇 년씩이나 하면서 어떻게 버텨요? 정신병 오겠네. 나는 잠자코 투정을 들어줬다. 나까지 이런 것도 못 하냐며 핀잔을 줬다간 당장이라도 그만둘 것 같았으니까. 어르고 달래며 막내가 실수하지 않도록 체크해 주는 일. 그게 서브작가의 잡무였다. 그러던 지난 월요일 아침, 작가 팀 톡방이 잠잠했다. 보통이면 막내의 현황 보고

  • 관리자
  • 2025-01-01
비비안의 딸들

비비안의 딸들 유호민 “금고 좀 비워 놔. 곧 갈게.” 남편의 전화는 길지 않았다. 그러나 그 짧은 통화에 모든 것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 집 어디에도 피할 수 있는 공간은 없다. 고민할 여유는커녕 필요조차 없이, 결정의 순간이 떠밀려 왔다. 금고 속에 있던 수천 장의 종이를 상자에 옮겨 담으며 희빈 씨를 생각했다. 그녀를 처음 만난 건 이번 학기 수업이 시작하던 날이었다. ‘나는 xxx xxx xxx xxx 이다’ 화이트보드에 그렇게 쓴 강사가 돌아서서 수강생들을 마주 봤다. “나는, 여러분에게 시 쓰기를 가르쳐 줄 수 없는 시인 김인하, 입니다.” 구립 도서관의 초급 시 창작반 첫 수업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다음 순서는 자기소개였는데 ‘구체적이고 창의적인 한 문장으로’라는 단서를 붙이자 강의실 안의 모든 사람이 고개를 숙였다. 강사는 나를 지목하고, 나는 수줍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초급 시 창작을 여덟 번째 수강하는 대치동 쌍둥엄마, 입니다.” 수강생 몇 명이 작은 소리로 웃었다. “저렇게 소개하시면 만년 초급을 못 면하십니다.” 강사의 말에 폭소가 터졌다. 팔 년 전 시 창작 강의가 처음 열렸을 때, 강의실을 휘익 둘러본 그는 나를 회장으로 찍었다. 평균 연령 60세쯤 되는 강의실에서 그중 젊고, 그리고 반듯해 보이는 내 인상 때문일 터였다. 뭔가 민망해서 “회장은 다른 분이 하시고 저는 총무 할게요,” 했더니 그는 선선히 “그럼 총무 하세요,” 했지만 그걸로 끝, 나는 회장 없는 만년 총무가 되어 수업을 보조하는 경지에 이르게 된 거였다. 분위기가 편안해지자 신입회원들을 한 명씩 지목해 나갔다. 대부분은 이름과 나이를 밝히는 소심한 자기소개, 일부는 조금 더 자세한 소개를 하고, 한두 명은 나름 참신한 시도를 하다가 괴상망측한 결과가 되곤 하는데, 희빈 씨는 그중 마지막에 속했다. 정확히 기억은 못 하지만 비 오는 사막에서 꼬리 잘린 전갈 황 희빈,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소개한 거였다. 잠깐 뜨악한 정적이 흘렀다. 강사는 곧 “황 희빈 씨, 잘린 게 아니라 숨긴 것 같은데요?” 은근히 추어 주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수업이 끝난 후 서둘러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시어머니가 오기로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식사 준비는 식당에 주문해 둔 요리를 포장해 오는 걸로 끝냈다. 신경 써야 하는 일들은 따로 있으니까. 삶이 편안해지는 요령 1호는 새로 산 비싼 물건들은 눈에 띄지 않게 하는 것, 더 중요한 팁은 숨겨야 할 물건은 가격만으로 정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새로 산 가방과 친정어머니와 같이 갔던 여행 사진 액자를 들고 드레스 룸으로 들어갔다. 남편 양복들 아래에 있는 금고. 가정용치고 꽤 큰 금고의 문짝을 열자 세 개의 서랍이 드러났다. 서류와 통

  • 관리자
  • 2025-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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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조이

    고여 있고 싶어하는 경보의 마음...그리고 자꾸만 오해 받는 경보의 처지..너무나도 공감됩니다. 재밌게 읽었습니다!!

    • 2025-01-04 23:55:41
    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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