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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드를 올려요

  • 작성일 2025-01-01

   가드를 올려요


양지예


  월요일 출근 지하철에 이현은 용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제일 좋아하는 구석 자리 좌석이었다. 이어폰을 꽂으려 고개를 들었을 때 맞은편에 앉은 노인이 급히 시선을 돌렸다. 이현을 훑어보던 눈치였다. 까끌까끌해 보일 정도로 머리를 짧게 자른 왜소한 남자. 이현은 아무 일도 없는 듯 스마트폰에 무선 이어폰을 연결했다. 괜찮았다. 진심이었다. 언제인가 눈이 마주쳤는데도 시선을 돌리지 않는 사람과 마주 앉은 적도 있었다. 노인 여성 한 명, 중년 남성 한 명. 이현 쪽에서 시선을 먼저 돌린 후에도 이현에게 고정되어 있던 두 시선. 지금 생각해 보니 전혀 닮지 않은 두 사람은 꼭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서른 인생에서 스쳐 지나간 수천수만의 사람 중 단 둘뿐이었는데도 기억에 선명했다. 두 번 모두 이현은 목적지에 닿기도 전에 낯선 역에서 내려야 했다.

  어김없이 지하철 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내리는 사람 없이 타는 사람만 늘었다. 건너편의 까까머리 노인이 아직 그 자리에 있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이현의 시선에는 앞에 선 고등학생이 배 쪽으로 멘 백팩만 들어왔다. 백팩에 얹힌 스마트폰에 고정된 안경알과 마주치지 않으려 조심하면서 이현은 자리를 고쳐 앉았다. 이어폰에서는 출근 때마다 듣는 ‘직장인 필수 영문장 섀도잉’ 음성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 시간 정도 되는 유튜브 영상은 지하철에 타서 듣기 시작하면 갈아타는 역에 도착할 즈음 끝났다.


 광고 건너뛰기▶|

 를 누르려다 이현은 알고리즘이 추천한 다른 영상을 잘못 누른다.


  보통은 광고가 흘러가게 두는 편이었다. 예고 없이 튀어나오는 광고 음악에는 졸음이 달아나는 효과가 있었다. 더 큰 이유는 앉아서 출근하는 때보다 서서 출근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었다. 만원 지하철에 선 채 가방이나 외투 주머니에 넣어 둔 스마트폰을 꺼내려면 꽤나 용기가 필요했다. 주위 승객 여러분, 아주 잠깐만 이만큼의 영역에서 제 팔꿈치를 좀 휘두르겠습니다. 나서서 승낙을 구할 수 없기에 적당한 때를 노리는 요령과 눈치까지 필요했다. 앉아서 가면 민폐에 대한 부담이 덜했다. 무릎 위에 올려 둔 가방이 약간의 공간을 확보해 주기 때문이었다.

  이현이 실수로 누른 영상은 어젯밤에 시청하던 발톱 치료 영상이었다. 이현의 알고리즘은 비슷한 영상으로 채워져 있었다. 얼굴이 아니라 균과 얽힌 나머지 안으로 파고들다 파고들다 이윽고 시커멓고 누렇게 되어 버린 발톱이 주인공인 영상들이었다. 증상이 심한 사람은 색이 변한 정도를 넘어 자라나는 발톱을 내리누를 정도로 두껍게 쌓여서 발톱이 웃자란 조개껍데기처럼 보이기도 했다. 올린 사람은 달라도 영상의 흐름은 거의 비슷했다. 소독약을 뿌린 다음 작은 드릴처럼 생긴 도구로 발톱을 갈아 낸다. 휘날리는 빵가루 같은 각질들을 닦아 내고 가끔은 니퍼를 이용해 커다란 발톱 덩어리를 잘라 내기도 한다. 잘라 낸 발톱 아래에는 각화된 살과 균이 융합해 불규칙적이고 축축한 구조체를 이루고 있기 마련이었다. 피고름이 고여 있을 때도 있었다. 도구를 이용해 이물질을 파내는 모습을 볼 때마다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이현 자신은 의식하지 못한 채 일어나는 일이었다. 이윽고 영상의 막바지에 이르러 처음과 달리 매끈해진 발톱에 소독약을 뿌리면 이현은 비로소 손가락 관절부터 팔목을 거쳐 어깨까지 긴장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힘주기와 다르게 몸에 힘을 빼는 건 저절로 되지 않았다. 손가락에 힘을 빼면 그만큼의 힘이 어깨에 들어갔고 어깨에 힘을 빼면 다시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당연히 홀로 집에 있을 때 벌어지는 일들이었다. 집 밖에서 이현은 유튜브 어플을 조심해서 사용하는 편이었다. 알고리즘이 추천한 노랗고 누런 발톱들을 들킬까 봐서였다. 양말 속에 비슷한 발톱을 숨기고 있다고 의심받기도 싫었다.

  모처럼 좌석에 앉았다가 알고리즘을 들킬 뻔한 이현은 재빨리 스마트폰 화면을 껐다. 눈 주변 근육은 최대로 고정한 채 눈동자만 사방으로 훑었다. 옆자리 직장인은 새벽에 꾸던 꿈을 이어 꾸는 중이었다. 문가에 선 키가 큰 남자는 책을 읽고 있었다. 앞에 선 고등학생은 보고 있던 쇼츠 영상인지 웹툰인지를 보느라 여전히 스크롤 삼매경이었다. 시선이 닿는 반경 내에 이현에게 눈길을 주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도 손바닥 위에 걸쳐 있던 누렇고 검게 솟은 발톱을 보지 못했다. 이현인 양말 속에 그런 발톱을 숨기고 있으리라 의심하는 사람도 없었다. 퍼뜩퍼뜩 뛰는 오른쪽 관자놀이에 손을 가져다 댔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자 움직임이 가라앉았다. 고개를 가볍게 좌우로 돌렸다. 두둑 목에서 나는 소리가 귀가 아니라 내부를 타고 전해졌다. 이현은 침묵한 이어폰을 꽂은 채 앉은 무릎 밖으로 보이는 발끝을 끌어당겨 숨겼다. 직장인 필수라지만 이현의 직장에서는 전혀 쓸모가 없는 영어 문장을 더는 듣고 싶지 않아졌다. 다시 스마트폰을 조작해서 음악을 틀고 싶지도 않았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상태가 되자 느닷없이 자신이 존재하고 있었다. 아무런 고통 없이 예상한 바도, 어머니도 없이 태어난 아이가 된 것 같았다. 노이즈캔슬링 너머 지하철 안내방송이 들리자 비로소 작은 소망이 떠올랐다. 내릴 역까지는 얼마나 남았지. 기억 속 지하철 노선도를 더듬었다. 인파를 헤치고 내리는 시뮬레이션을 했다. 내릴게요. 한마디면 대부분 길을 만드는 시늉이라도 해 준다는 사실을 이현은 이제 알았다. 가끔 마주치는 못 들은 척 문 앞에 버티고 선 사람들이 문제였다. 눈이 마주쳐도 멀뚱멀뚱 보기만 하는 사람들. 귀에 이어폰을 꽂지도 않은 사람들.

  에스컬레이터 오른편에 선 채 이현은 한 짝씩 빼내어 케이스에 넣었다. 긁힌 자국이 하얀 이어폰 케이스의 광택 위에 불규칙한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보호 케이스를 검색해 보다가 결국 사지 않았다. 말 그대로 이어폰을 넣어 두기 위해 있는 케이스인데 또 다른 케이스를 덧씌우는 게 이상했다. 이어폰 케이스의 케이스를 고민하기에 평일은 평일대로 주말은 주말대로 직장인의 하루는 바쁘게 돌아갔다. 지하철역에서 회사까지는 걸어서 십 분 거리였다. 이현은 걸으며 오늘 하루 할 일을 시뮬레이션하기 시작했다.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면서 하늘을 잠시 올려다보았다. 그 외에 다른 풍경은 살피지 않았다.


  월요일의 직장인이라면 그렇기 마련이다.


  여섯 명이 앉는 테이블에 매번 일곱이 앉았다. 점심시간의 을지로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이현은 다른 테이블에 가서 빈 의자를 가져가도 되겠냐고 양해를 구한 후에 자처해 가장자리에 앉았다. 주문 취합도 나서서 했다. 보통 입사가 가장 늦은 선우의 역할이었다. 선우는 오전 업무 중 팀장에게 실수를 지적받고 만회하겠다며 점심을 먹지 않으려고 했다. 이현이 선우를 달래서 나왔다. 업무야 나누어 하면 그만이었다. 이현은 선우의 사수였다.

  조직 내 홍일점은 버텨도 청일점은 못 버틴다던데. 선우의 입사 직후 동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렸던 말이다. 통념이 어떻든 선우의 근속 기간은 현재 두 달이 넘어 석 달을 채워 가는 중이었다. 지난주에 누군가의 입에서 입사 백 일 기념 파티 이야기가 나왔다. 그때 이현은 딱 세 글자를 떠올렸다. 맙소사.

  “다들 유튜브 프리미엄 구독하세요?”

  윤서가 입을 열었다. 질문의 형식을 띤 불평이었다. 이현은 가능한 좁은 각도 안에서 고개를 저었고 누군가는 맞장구쳤다.

  “그거 가격이 올랐다며? 저번에 우리 아들이 해 달라는 거 안 해 줬잖아.”

  “글쎄 팀장님. 이제 한 달에 만 사천구백 원이에요.”

  테이블 가장 안쪽 자리에는 팀장이, 그 옆인 가운데에는 윤서가, 가장자리에 면한 바깥 자리에는 선우가 앉아 있었다.

  “그래도 팀장님, 아드님한테 유튜브 정도 끊어 주시는 게 어때요. 공부도 잘하고, 게임도 안 하잖아요. 저희 조카는 게임에 미쳐서 저만 보면 문상 달라고 떼를 쓴다니까요.”

  회사에서는 직함을 쓰지 않는다. 이름 뒤에 님을 붙여 부르는 것이 매뉴얼이었다. 최근의 경향, 아니 트렌드에 발맞추어 가겠다는 의지를 담은 대표의 제안이었다. 몇 년 정도 시간을 거치며 꽤 잘 정착했지만 윤서의 입사 후 팀장만이 ‘팀장님’으로 돌아왔다. 이현이 직함으로 부르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을 때 윤서는 그래도 팀장님한테는 예의 없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이후부터 디자인 홍보팀 사람들은 모두 팀장님이라는 호칭을 쓰게 됐다. 이현은 윤서의 사수였다.

  “유튜브 싸게 구독할 수 있는 방법 다들 모르세요?”

  선우가 윤서 너머로 팀장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싸게? 어떻게?”

  “다른 나라로 우회하면 돼요. 보통 터키로 하거든요.”

  튀르키예. 이현이 조그맣게 한 말을 아무도 듣지 못한 듯했다.

  “아 그거. 그러고 보니 우리 아들도 얘기했었다. 그런데 불법 아니야?”

  설명을 시작하려던 선우가 스마트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윤서가 팀장의 어깨를 가볍게 톡 치며 웃었다.

  “에이, 팀장님. 유튜브는 글로벌 대기업인데. 그러면서 나라 차별하는 게 더 나쁘지 않아요?”

  “나는 엄마잖아. 아들한테 그 핑계라도 대야지. 그놈의 광고라도 있어야 스마트폰 좀 덜 끼고 살지 않겠냐고.”

  주문한 돼지고기김치찌개 칠 인분이 나왔다. 냄비 두 개와 달걀찜 두 뚝배기, 각종 반찬이 차려지는 동안 다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윤서가 선우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선우 님. 터키로 우회는 어떻게 해요?”

  튀르키예. 이현이 다시 중얼거렸다. 선우가 웃으며 이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맞다. 터키가 아니라 이제 튀르키예죠? 자꾸 잊어버린다니까요.”

  윤서가 선우 쪽으로 살짝 몸을 기울이고 다시 물었다.

  “그런데 선우 님, 터키로 우회는 어떻게 하는 거라고요?”

  입사는 선우보다 빠르지만 나이로 따지면 팀의 막내는 윤서였다. 이현은 윤서의 사수를 맡으며 회사 생활 최대의 위기를 겪었다. 힘든 업무를 맡으면 윤서는 이현에게 자주 떠넘기는 버릇이 있었다. 한때 이현은 윤서가 하지 못하는 일은 사수인 자신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여기까지만 내가 도와줄 테니까 마무리는 윤서 님이 해 보세요.”

  과정과 결과 중 어느 쪽이 중요하냐 묻는다면 이현은 언제나 결과였다. 마감이 있으면 지켜야 했고 마감을 지키지 못하는 동료가 있다면 일을 나누면 그만이었다. 입사 후 비슷한 방식으로 일을 해 왔으나 억울하다고 생각이 든 것은 윤서의 경우가 처음이었다. 윤서가 일을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마저 솔희가 설명해 주기 전까지 제대로 파악도 못 하고 있었다.

  ―너 이용당한 거잖아.

  ―이용당했다고?

  ―사수니까 네가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했지? 네 책임감을 걔가 이용한 거야.

  ―그럼 어떻게 해. 윤서 님이 못하더라도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인데.

  ―너 억울하다면서. 걘 네 사람이 아닌 거야. 너는 일하고 사람하고 분리해서 일만 네 걸로 생각하고 있는 거라고. 항상 내가 말해 줘야 알지? 넌 내 덕에 지금껏 마음에 병이 안 생겼다는 걸 알아야 해.

  솔희는 중학 시절부터 이어져 온 친구였다. 대학이 달라지고 솔희가 취직하여 지방으로 내려간 후에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주 연락하곤 했다. 불편한 일이 생기면 이현은 참는 편이었고 솔희는 반대였다. 학창 시절에는 둘을 보며 정반대끼리 친하게 지낸다며 신기하다고 말하는 친구도 있었다. 이현도 솔희를 따라 행동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시도는 시도일 뿐 조금이라도 목소리를 높일라치면 목소리가 갈라져서 나왔다. 땀 찬 손바닥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차가워지기도 했다. 세 명 이상 시선이 자신에게 모이면 어느 쪽에 눈을 두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솔희와 함께 있으면 이런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 대학 시절을 거치며 일부러 발표를 도맡아 하기도 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일상에서는 길을 막은 사람에게 비켜 달라는 말도 속으로 몇 번 연습하고 나서야 꺼낼 수 있었다. 

  이현이 입사 이래 점심시간마다 선우의 몫이던 자리에 앉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통로 쪽이라 불편한 자리기도 했지만 눈에 띄는 자리이기도 했다. 지난 금요일 솔희가 내준 미션을 수행할 생각이었다. 어렵지는 않은 일이었다. 사촌오빠에게 들었다면서 이야기를 하나 하면 그만이었다.

 

  재채기를 참으려다가 이현은 사레가 들린다.

  선우가 이현의 컵에 물을 따라 준다.

  팀원들의 시선이 물을 들이켜는 이현에게 모인다. 


  이현은 콜록거리며 팀원들에게 괜찮다고 눈짓을 했다. 모두의 이목을 끈 지금이 딱 좋은 타이밍이었다. 이현은 기회를 놓칠까 목소리를 짜냈다.

  “지난주 토요일에 저희 사촌오빠가 결혼했거든요.”

  “전에 결혼 선물 고민하던 그 오빠?”

  팀장이 이현의 말에 바로 반응했다. 이현에게 집중한 여섯 명의 시선이 의식되기 시작했다. 이현은 목을 가다듬는 시늉을 하면서 들고 있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탁자 아래로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엉뚱하게 들어가는 힘을 빼기 위해서였다. 이건 발표, 아니 프레젠테이션이야. 지금껏 수도 없이 해낸 거라고. 차가워진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속으로 되뇌었다.

  “맞아요. 팀장님 덕분에 선물 잘했어요. 새언니가 정말 좋아하더라고요.”

  “안 써 본 사람은 없어도 일단 로봇 청소기는 써 보면 계속 쓰게 된다니까. 내가 추천했던 모델로 산 거야?”

  “네. 그런데,”

  “그런데?”

  팀장이 목소리를 한 톤 낮추었다. 그런데는 팀장이 싫어하는 단어였다. 이현은 발가락에 힘을 주었다. 주먹 말고 발가락에 힘을 줘. 그러면 아무도 네 긴장을 눈치 못 챌 테니까. 솔희의 충고였다.

  “아, 아니에요. 팀장님 선물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그, 결혼식장에서 얘기를 들었거든요. 결혼식 얘기하다 보니 갑자기 생각이 나서요. 결혼식에 오빠 친구 중에 목발 짚고 오신 분이 계셨는데요.”

  아무도 반응하는 사람이 없었다. 정말 발표나 다름없었다. 공들여 준비한 프레젠테이션에 동료들은 보통 반응해 주지 않았다. 망했다고 여기고 마음을 정리할 때쯤 팀장이나 팀장과 비슷한 직급의 누군가에게서 약간만 수정하고 그대로 가지, 라는 말을 듣곤 했다. 회의실이란 그런 곳이었다.

  “어… 그분이 같은 동네 직장 동료한테 카풀을 해 주시고 계셨다나 봐요. 그러다가 사고가 났대요. 과실 비율이 그분이 이십이고 상대 운전자가 팔십이고 그랬는데, 카풀 받던 동료가 이분한테까지 소송을 걸겠다고 한다고 그러더라고요. 동료는 멍만 약간 든 정도고 이분은 크게 다쳐서 깁스까지 하게 되셨는데도요. 어디서 진단서를 끊어 왔는지 눈앞에서 펄럭거리면서, 소송할 거라고, 그래서 곤란하게 됐다고··· 그게 생각이 나서요···.”

  선우가 이현을 보고 있었다. 이현은 선우 너머의 팀장을 보고 있었지만 선우의 눈길을 느낄 수 있었다. 선우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을 때 팀장이 물었다.

  “그 사람, 혹시 카풀비도 못 받았다고 하지 않아?”

  “아 네, 맞아요. 그랬던 것 같아요.”

  “요새 그렇다니까. 나도 들은 이야기가 있어. 그런 거 해 줘봤자 대접도 못 받고 사고 나면 책임질 일만 생기고 할 짓이 못 돼. 우리 팀에서는 카풀 같은 건 하지 말자고. 괜히 문제 일으키지 말자.”

  자가용으로 출퇴근하는 사람은 팀에서 팀장과 선우 둘뿐이었다. 너희 팀에 자차로 출퇴근하는 사람 누구누구 있어. 지난주 금요일 솔희가 대뜸 이현에게 했던 질문이었다. 

  “알겠습니다, 팀장님.”

  누군가 과장되게 대답하자 팀장의 건너편에 앉은 세 사람이 웃었다. 이현도 팀장도 선우도 윤서도 웃지 않았다. 팀장이 젓가락을 들자 다들 조용해졌다. 이현은 멍하니 있다가 자신이 돼지고기를 씹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살코기와 비계에 밴 시고 달고 매콤한 맛이 새삼스러울 정도로 선명했다. 마치 혀가 처음으로 음식을 접해보는 것만 같았다. 점심을 안 먹겠다던 선우는 밥에 김치와 계란찜을 넣어 비비더니 두 그릇을 비웠다. 이만하면 솔희가 내 준 미션은 성공이었다. 이현으로서는 대모험이었지만 문제가 해결된 것 같았다.

 

*


  신우와 이현은 사촌지간이지만 어려서부터 한동네에서 자란 덕에 남매만큼 가깝게 지냈다. 어려서부터 해사한 외모에 공부도 운동도 곧잘 했던 신우는 남녀불문하고 인기가 좋았다. 외동인 이현에게 신우는 이상 속의 오빠처럼 느껴졌다. 어릴 때는 신우가 친오빠이기를 바라기도 했었다. 아무리 가까워도 가족이라기보다는 친척. 성장하면서 이현은 조금씩 이 거리감을 더 좋아하게 됐다.

  초중고 같은 학교 선후배를 이어 오며 집과 마트나 극장을 오갈 때 종종 마주치면서 솔희 역시 신우와 인사하는 사이가 되었다. 솔희가 지방으로 내려간 후에는 가끔 신우도 이현에게 솔희의 안부를 묻곤 했다. 신우가 모르는 것이 있다면 솔희는 자칭 짝사랑 전문가였으며 신우는 솔희의 첫사랑이었다. 신우의 결혼 소식을 전했을 때 솔희는 대뜸 자신도 참석하겠다고 말했다.

  ―네가 왜 와.

  ―한신우. 한신우. 한신우. 한신우우우.

  ―뭐야.

  ―이름을 불러 보면 안다잖아. 좋아하는지 안 좋아하는지. 떨리는지 안 떨리는지. 한. 신. 우.

  ―그만. 시끄러워.

  ―그러니까 나도 간다. 오빠도 반가워할걸. 겁나게 예쁘게 차려입고 가야지.

  그러니까, 라니. 그래서 솔희는 신우의 이름을 부르면 떨린다는 소리일까 아니라는 소리일까. 이현은 묻지 않았다. 예전부터 이현은 솔희의 모든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잘 구분하지 못했다. 솔희가 얘기하면 짝사랑 전문가라는 말도 신우를 좋아했다는 말도 농담처럼 들렸다.

  결국 솔희는 반차까지 써 가며 결혼식 전날 이현의 원룸에 왔다. 하룻밤 자는데 챙겨온 짐이 여행용 캐리어 한 가득이었다. 안에는 다음날 입을 원피스에 구두, 액세서리며 온갖 화장품과 메이크업 도구가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다. 이현으로서는 짐작도 하지 못하는 용도를 솔희가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가령 납작한 브러시는 파운데이션용, 가장 통통하고 큰 브러시는 파우더용, 파우더용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조금 작은 건 치크 블러셔용, 납작 둥글넓적 통통 뾰족한 각각의 작은 브러시들은 아이섀도용, 사선으로 깎인 모양은 섀이딩용, 뚜껑이 있는 작은 브러쉬는 입술 전용, 가장 작고 세밀해 보이는 것은 컨실러용. 도구뿐이 아니었다. 한 섀도 팔레트에는 베이지색만 열 가지가 담겨 있었다. 눈두덩이에 발랐을 때 과연 차이가 있긴 할까 싶을 정도로 닮은 색들이었다. 고개를 젓는 이현에게 솔희는 노르스름과 누르스름은 다른 색이지 않냐고 말했다.

  “하늘 아래 같은 색조는 없어. 그러니까 퍼스널 컬러부터 따져 보자.”

  매끄러운 천 두 장이 양쪽 어깨에 걸쳐졌다. 왼쪽에는 어두운 와인색, 오른쪽에는 크림색. 번갈아 천을 들춰 보며 이현의 모습을 살피던 솔희가 크림색 천을 끌어 내려 제 손에 들고 확인시키듯 가볍게 흔들었다. 솔희의 움직임에 따라 천 위의 광택과 그림자가 미끄러지듯 물결을 만들어 냈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넌, 채도가 낮으면서 따뜻한 느낌이 도는 밝은 색상이 어울려.”

  “이게 뭐야?”

  “너랑 나랑 커플 파자마. 오늘 재워 주는 값. 우리 파자마 파티하자.”

  이현은 그렇게 매끄러운 옷을 입어 본 적이 없었다. 계속 만져보고 싶으면서도 스르르 미끄러지는 통에 익숙해지지 않을 듯한 감촉이었다. 솔희의 재촉에 받아 들고서도 파자마를 엄지와 검지 끝으로만 다루었다. 손바닥에 땀이 나는 것 같았지만 문질러 닦을 엄두도 나지 않는 옷이었다. 갈아입고 거울 앞에 서니 마네킹보다도 어울리지 않는 모양새였다. 실크 파자마는 어깨 골격에 겨우 걸쳐진 채 피부 위에서 제멋대로 미끄러지고 있었다.

  미적거리는 사이 솔희는 좀 전에 이현의 왼쪽 어깨에 걸쳤던 와인색 파자마로 갈아입고 고양이 귀가 달린 헤어밴드까지 하고 있었다. 평소 식탁으로 쓰는 앉은뱅이 상에는 와인과 와인잔이 준비되어 있었다.

  “이거 봐. 이거 안 깨지는 재질인데 이렇게 짠 하면 정말 와인 잔 부딪히는 소리가 나.”

  잔 두 개를 챙챙 부딪히는 솔희를 보면서 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보는 와인 잔에 관심을 표명하듯 눈을 살짝 크게 뜬 채로.

  “뭐야, 그 반응. 전에 본 적 있구나. 내 앞에서 사회생활 하지 마라.”

  “어, 아니.”

  “뭐가 아니야. 넌 내 말이 맞을 때도 일단 아니라고 시작하잖아.”

  캠핑용 와인 잔에 대한 이야기는 전에 팀장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설명도 비슷했다. 깨지지 않는데 와인 잔 부딪히는 소리가 나서 분위기는 살릴 수 있다고. 

  “본 건 아니고 들어 보기만 했어. 회사에 캠핑 좋아하는 동료가 있어서.”

  “어이고 그랬어어. 아주 자알 설명했어요.”

  솔희가 제 앞의 잔을 들고 이현에게 내밀었다. 이현도 잔을 들고 솔희의 잔에 부딪었다. 딘딘. 빈 잔이었을 때보다 탁한 소리가 났다.

  “어때?”

  솔희의 물음에 이현은 입술을 조금 벌려 숨을 들이마셨다. 와인을 머금은 채 입으로 공기를 마시면 맛이 더 잘 느껴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지난달 회식 장소인 뷔페에서 윤서가 해 준 말이었다. 저는 드라이한 게 좋더라고요. 확실히 물을 탔는지 향이랑 바디감은 좀 떨어지네요. 치즈와 샐러드가 놓인 쟁반을 두고 새끼손가락을 살짝 들어 올린 채 잔을 들어 올렸다. 윤서는 싸구려라고 했지만 건배할 때 정말로 챙 하는 소리가 퍼져나가는, 진짜 와인 잔이었다.

  향기와 바디감. 윤서의 말을 떠올리며 이현은 다시 한 모금 마셨다. 입술 새로 공기를 살짝 들이마시며 이번에는 눈을 감았다. 눈을 뜨자 솔희가 이현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향기와 바디감.


  “바디감이라는 건 와인의 촉감 같은 거야?”

  “물은 건 나인데 질문으로 돌아왔네?”

  “내가 잘 모르잖아. 와인 같은 거.”

  “알아야 돼?”

  “응?”

  “알아야 되냐고.”

  솔희가 잔을 높이 들고 꿀꺽꿀꺽 와인을 삼켰다. 캬아 감탄사를 하더니 상체를 뒤로 쭉 빼고 뒤에 놓여 있던 필라테스용 짐볼에 한쪽 팔을 척 걸쳤다.

  “마실만 해?”

  “마실만 해.”

  둘은 마주 보며 웃었다. 홈트레이닝, 여행, 자취생활 같은 추억과 상관없는 이야기가 끝없이 이어졌다.

  “자, 그럼 이제 쌓인 회사 이야기를 해 보거라. 그 윤서인지 서윤인지 걔 이야기든 새로 들어왔다는 잘생긴 남자 후배 얘기든.”

  솔희의 말에 이현은 바늘구멍에 실을 꿴 기분이었다. 이상할 정도로 평소보다 손이 떨리고 눈이 침침한데 단추를 꼭 달아야 하는 상황에서 나타난 구세주랄까. 그날 오후 선우에게 들은 이야기를 솔희에게 들려주려고 기회를 찾던 중이었다.

  아무도 없는 걸 소리와 곁눈질로 확인한 다음 이현이 탕비실에 들어갔을 때였다. 커피 머신의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는 사이 선우가 들어왔을 때, 이현은 목뒤에 소름이 돋았다. 선우가 자신의 뒤를 따라 일부러 탕비실에 들어왔다는 확신이 들었다. 둔하다는 소리를 듣는 이현에게는 낯선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선우가 고민을 털어놓았다. 윤서가 선우에게 카풀을 요청했다는 이야기였다. 업무와 관련된 이야기로 보아야 하는지 헷갈렸다. 


  이현은 단호한 목소리를 연습한 적이 있었다.

  솔희와 함께.

   

  이현은 커피 머신의 버튼을 한 번 더 눌렀다. 커피 원두 갈리는 소리가 새어나가는 목소리를 막았다.

  “거절하세요.”

  “했어요. 그런데 실은 한 번이 아니에요.”

  처음에는 메신저로, 그다음에는 휴대폰으로 연락이 왔다고 했다.

  “전화번호를 주고받았어요?”

  “절대 아니에요. 저도 윤서 님이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어요.”

  이현은 따뜻한 아메리카노가 담긴 종이컵을 양손으로 쥐었다. 평소보다 뜨겁게 느껴졌다. 대답을 기다리듯 서 있던 선우가 제빙기를 열었다. 한동안 얼음을 찾는 사람이 없었는지 얼음끼리 서로 단단히 붙어 있었다. 선우가 깡깡 얼음을 깨는 동안 이현이 낮게 말했다.

  “일단 확인할게요. 선우 님은 윤서 님이 그러는 게 불편한 거죠?”

  “네.”

  “나 말고 또 아는 사람 있어요?”

  “아뇨.”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이현은 남김없이 모두 솔희에게 전했다. 꽤나 매끈한 대화라고 솔희는 이현을 칭찬했다. 이현으로서는 오랜만에 듣는 칭찬이었다.

  “선우라는 동료는 왠지 정이 가네. 신우 오빠랑 이름이 비슷해서 그런가.”

  “진지한 얘기야.”

  “나도 진지해. 너 그 사람 좋아하지.”

  “선우 님은 회사 동료인데.”

  “어쩌라고. 너희 사내 연애 금지야?”

  “나보다 두 살이나 어린데.”

  “어쩌라고.”

  왜 솔희와 친구가 됐더라. 둘은 중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 집이 서로 가까웠다. 2학년 때 헤어졌다가 3학년 때 다시 같은 반이 되었다. 그때, 3학년 때 같은 반이 되었을 때 둘은 절친이 되었다. 절친이 되기까지 알고 지낸 지 이 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다. 이제 둘은 선을 알고 있었다. 이현이 불편할 것 같으면 솔희는 설명도 하지 않고 화제를 건너뛰었다. 남에게는 마구잡이인 듯 들릴지 몰라도 둘 사이에는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흐름이었다. 이현과 솔희는 반대이기 때문에 퍼즐 조각의 오목한 쪽과 볼록한 쪽처럼 연결될 수 있었다.

  “팀장에게 말하는 건 어때?”

  “윤서 님이 팀장님한테 엄청 잘하는 편이라 어떨지.”

  “팀장이 예뻐해?”

  팀장은 누구도 예뻐하지 않고 누구도 배척하지 않았다. 이현은 자신이 팀장이라면 윤서를 어떻게 볼지 생각했다. 이현이라면 윤서를 특별히 예뻐했을지도 몰랐다. 일은 어차피 다른 팀원들이 한다. 윤서는 입안의 사탕 같은 존재로 팀장 송이현에게 꼭 필요한 존재였을 것이 분명했다.

  “내가 팀장님이라면 예뻐했을 거야.”

  “아부에 약한 사람?”

  솔희의 물음에 이현은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디자인팀이 일곱 명이면 엄청 많은 편이지?”

  “디자인 홍보팀.”

  “그래, 디자인 홍보팀.”

  팀장이 홍보팀을 흡수했다는 이야기는 회사에서 손꼽히는 전설이었다. 입사 전에 있던 이야기라 이현도 전해 들은 게 전부였다.

  “능력 있는 분이야. 보고서를 제출하면 팀장님이 마무리를 해 주셔. 피드백이 엄청 대단하거든.”

  “대단한 사람이 맞으면 알고 있지 않겠어?”

  “뭐를?”

  “그 여자애 어차피 오래 못 가 퇴사할 것 같거든.”

  이현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역시 모르겠다는 뜻이었다.

  “전에 팀장님이 이렇게 물어본 적은 있어. 얄미운 짓만 골라 하는데 일 잘하는 직원하고 착하고 성실한데 일은 못하는 직원하고 누가 더 회사에 필요하겠냐고.”

  “그래서? 팀장은 누구라고 했는데?”

  “둘 다래.”

  “둘 다? 무슨 질문이 그래? 이상한 사람이네.”

  솔희가 흐음, 하고 소리를 내더니 와인을 꿀꺽꿀꺽 삼켰다.

  “그래, 이상한 사람 맞네. 네 성격을 이제 알 텐데 자꾸 신입을 너한테 붙여주는 거야.”

  “아냐, 가르치면서도 배우는 법이라고 하셨어. 그런데 솔희야, 윤서 님이 정말 금방 퇴사할까?”

  “윤서 님은 무슨. 이년 저년 해도 네가 하면 바른 말 고운 말로 들릴 텐데. 아무튼 걔, 입사 일 년 됐다며. 그럼 얼마 안 남았어. 날마다 퇴직금이며 수당 알아보면서 튀기 적당한 때를 가늠하는 중일걸. 요새 그런 애들 많잖아. 팀장도 알 걸. 다 내 짐작이지만.”

  솔희가 빈 잔에 넘치기 직전까지 와인을 따르며 빙긋 웃었다.

  “솔직히 너, 걔가 퇴사하면 좋겠지.”

  “좋고 싫은 게 어딨어. 회사 생활에.”

  “야, 난 다 알아. 가끔은 그냥 시원하게 말이라도 해라 좀.”

  “싫어.”

  “왜.”

  “직장 동료잖아.”

  아이고 한신우우우. 솔희가 짐볼에 반쯤 드러누우며 몸부림쳤다. 와인이 쏟아질 듯 찰랑거리다 멈추었다.

  “아직 어리고.”

  “그런데 어쩌라고. 엄청 쉽잖아. 유튜브 영상 보다가 ‘싫어요’ 누르는 거나 마찬가지야.”

  “싫어.”

  “왜.”

  솔희가 제 가슴을 두 번 두드렸다. 발개진 얼굴에 목소리가 아까보다 커져 있었다.

  “난 유튜브에서 좋아요든 싫어요든 누른 적이 없어. 안 눌러도 유튜브는 나를 알아.”

  “아악 한신우우우우우.”

  솔희가 머리를 부여잡으며 비명을 질렀다. 옆집에 들릴까 걱정될 정도의 큰 목소리였다.

  “뭐하는 거야.”

  “잊어버렸어? 저번에 통화할 때 내가 말했잖아. 한신우우우.”

  “아직도 그래?”

  “뭐가.”

  “신우 오빠를 부르면 떨려?”

  “아냐. 끝났어. 이제 떨리지 않아서 슬퍼. 그러니까, 끝난 짝사랑을 위해 계속 건배해 줘. 그리고 말해 봐. 아까의 대신이야. 나는 황선우를 좋아한다.“

  ”뭐?“

  ”알았어. 연애는 간섭 안 할게. 확인 작업이야. 너는 사수로서 책임을 느끼고, 그 선우라는 후배에게 에너지를 쓸 거라는 거지?”

  “써야지.”

  “내가 간섭하는 기준 세 가지를 알려 줄게. 돈, 시간, 신경이야. 내가 돈을 쓰고 싶은 사람인가. 시간을 쓰고 싶은 사람인가. 신경을 쓰고 싶은 사람인가. 아니면 나에게 돈을 썼거나 쓸 사람인가. 시간을 써 준 사람인가. 신경을 써 준 사람인가. 여기에 그 선우가 해당 돼?”

  이현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솔직한 답변과 자연스러운 답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서였다.

  “간섭하기 싫어.”

  이현이 우는 얼굴을 하자 솔희가 방법이 있다며 달래는 시늉을 했다. 선우처럼 자동차로 출퇴근하는 팀장을 끌어들이자는 것. 짧은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둘은 와인과 아이디어를 한참 주고받았다. 신우의 결혼식에서 들은 이야기로 하자는 아이디어로 솔희의 미션이 완성됐다.

  “잘 안되면 어쩌지. 나 너 말고는 자연스럽게 대화도 못 하는데.”

  “요즘도 사람들이 쳐다보면 무서워?”

  “아니, 괜찮아.”

  “진심이야?”

  “아니, 진심이야.”

  “아 그러시군요. 이현 님.”

  “왜 또.”

  “뭐가.”

  솔희가 스마트폰을 들더니 갑자기 셀카를 찍었다. 브이를 한 채 한 장.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고 한 장. 와인 잔에 입을 맞추며 또 한 장. 옆에 와서 함께 찍자고 하는 말에 이현은 고개를 저었다. 솔희는 더 권하지 않았다. 이현이 SNS도 하지 않고 사진 찍히기 싫어한다는 사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얼굴 대신 둘은 한쪽씩 하트를 만든 손 사진을 찍었다. 하트가 주인공 같지만 실은 서로 맞춰 입은 파자마에 카메라 초점을 맞춘 사진이었다.

  “솔희야.”

  “왜.”

  “넌 뭐가 제일 무서워?”

  “타인이 나를 갉아먹는 거. 타인이 선을 넘어오는 거. 타인에 의해 내가 나도 모르게 바뀌는 거. <타인은 지옥이다>는 불후의 명작이다. 너는?”

  유튜브 재생목록. 알고리즘 추천 영상 그게 알려지면 어떨까. 물론 솔회라면 같이 보아 줄지도 몰랐다. 키득키득 웃으며 함께 즐겨줄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다 해도 이현은 솔희에게까지 들키고 싶지 않았다. 걱정은 되지 않았다. 이현의 얼굴과 여섯 자리 비밀번호가 꽉 닫힌 조개처럼 스마트폰을 지켜 내고 있었다. 장난으로 비밀번호를 알아낼 염려도 없었다. 솔희는 두뇌를 공유하는 것처럼 이현이 싫어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넌 예민해서 하루하루가 정말 전쟁이겠다. 자기 안으로만 숨어야 하는 애가. 나 없으면 어떡할래.”

  “아냐, 꽤 버틸 만해.”

  “버틸 만해?”

  “응.”

  “진심이야?”

  “아니, 진심이야.”

  “거짓말쟁이. 그래도 너 그대로도 난 괜찮아.”

  이현은 대꾸하지 않았다. 버틸 만했다. 진심이었다. 솔희는 더 캐묻지 않았다. 밤새 솔희의 새로운 짝사랑 상대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


  카풀 금지령이 떨어지고 난 후 사무실은 오후 내내 평온했다. 윤서는 평소보다 굳은 듯 보이기도 했고 그대로인 듯도 했다. 윤서를 살피면서 일하는 내내 이현은 처음 느끼는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한 가지 같기도 하지만 여러 가지 기분이 파도처럼 차례차례 밀려왔다 사그라드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그 감정의 파도는 바다라는 거대한 묶음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해냈다는 뿌듯함과 안도감. 윤서가 이현의 의도를 눈치채고 공격해 올지 모른다는 불안. 그리고 전에 느껴보지 못한 기대. 이름을 붙여 색인을 만들기에 좀 치졸해 보이기도 하는 사소한 감정들까지. 사내 메신저로 선우가 메시지를 보냈을 때 이 파도는 최고조로 높아졌다.

 

  이현 님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잘 해결될 것 같아요^^

  네 화이팅하세요


  필요한 경우 팀장은 사내 메신저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탕비실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 이현은 적당한 때를 노려 자리에서 일어섰다. 선우가 뒤따라올 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손바닥보다 작은 쇼핑백을 내밀 줄은 몰랐다. 저도 모르게 발가락에 힘을 잔뜩 주었다. 지금껏 회사의 누구와도 선물을 주고받을 만큼의 친밀한 사이가 된 적은 없었다. 이현은 당연히 거절할 생각이었다.

  “오늘 생각지도 못했는데, 감사합니다.”

  선우는 쇼핑백을 거두지 않았다. 빤히 바라보는 시선은 덤이었다. 이현이 마주친 눈길을 황급히 거두고 탕비실 구석구석으로 눈동자를 굴리는 동안 선우는 버티고 있었다. 이현도 눈을 마주치지 않으면서 버텼다. 이십 초 정도. 결국 쇼핑백을 받아들었다. 탕비실을 뛰쳐나갈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선우가 뒤돌아 커피 머신을 작동시켰다. 요란한 소리가 마치 솔희가 외치던 한신우우우, 처럼 들렸다.

  “메신저로라도 슬쩍 알려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지원사격이라도 할 수 있었잖아요.”

  “그럼 윤서 님이 눈치챘을 걸요.”

  “그렇네요.”

  ,회사에서 간식 외의 물건을 주고받을 정도로 친밀한 사이를 만든 적은 없었다. 만들 예정도 없었다. 더구나 쇼핑백, 그것도 아주 작은 쇼핑백에 담긴 물건이라면 더욱.

  “별 건 아니에요. 무선 이어폰 케이스예요. 아니 케이스의 케이스인가. 부담스러워하실 것 같아서 일부러 작은 걸 골랐어요. 금요일에 그렇게 말씀드려놓고 주말 내내 마음에 걸려서요.”

  이현은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로 끝이었다. 왠지 눈물이 나려고 했다. 주머니에 넣은 쇼핑백에 선우의 시선이 붙어 있는 것만 같았다.


  타인에 의해 내가 나도 모르게 바뀌는 거. 


 퇴근길 습관처럼 횡단보도 앞에서 하늘을 올려다보았을 때, 굵은 빗방울이 이현의 콧잔등에 떨어졌다. 일기예보에 없던 소식이었다. 지하철까지 걸음을 서두르던 이현은 잠시 멈추어 서서 하늘을 보았다. 


  지하철이 가장 붐비는 퇴근 시간대.

  이현의 회사에서 집까지는 지하철로 한 시간 거리.

  아침에 잠깐 눈이 마주쳤던 노년의 남자.


  이현은 가장 가까운 건물에 있는 카페로 들어갔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몇 년이나 같은 길을 지나면서도 있는지조차 몰랐다. 저녁에는 와인 바로도 운영한다는 카페에는 거꾸로 수납된 와인 잔 여럿이 장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캐모마일 티를 주문하려던 이현은 메뉴를 둘러보다 아르바이트생에게 물었다.

  “잔 와인 중에 바디감이 제일 좋은 걸로 추천해 주세요.”

  뜻밖에 알바생이 아닌 사장이 다가와 설명하기 시작했다. 품종명이라든지 빈티지라든지 원산지라든지 페어링이라든지. 향과 바디감을 넘어선 설명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현은 눈을 내리깔고 사장의 가슴께를 바라보았다. 무광 코팅된 희미한 갈색 앞치마가 간접조명 아래 잘 볶은 커피 원두처럼 반작였다. 첫 번째 걸로 한 잔 주세요. 이현은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작다고 생각했다. 사장은 되묻지 않고 포스기를 두드렸다.

  와인을 앞에 두고 창가 자리에 앉아 있자니 챙챙 마주칠 상대가 없었다. 혼자 허공에 건배하듯 잔을 들어보다가 솔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있었던 일을 보고해야 했다. 이미 퇴근했을 솔희는 받지 않았다. 군데군데 습기 찬 유리창을 배경으로 와인 사진을 몇 장 찍어 솔희에게 보냈다. 점심시간에 자신이 어떤 모험을 했는지 또 팀장이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한참 메시지를 작성했는데도 솔희는 확인하지 않았다. 스마트폰을 테이블 위에 뒤집어 놓고 고개를 들었다. 목에서 가볍게 두둑 소리가 들렸다.

  창 너머 빗방울이 은행잎의 고개를 톡톡 꺾어 놓고 있었다. 몇 번의 괴롭힘 끝에 어떤 잎은 금방 떨어지고 어떤 잎은 끝까지 버틸 것처럼 제자리를 지켰다. 가을이 되었지만 여름은 끝나지 않은 풍경 속 단풍은 선명하지 않고 얼룩덜룩 희부연 노란색이었다. 노랗기보다 초록빛이 짙은 낙엽이 쌓인 보도 위로 레인부츠에 레인코트까지 색을 맞춰 챙겨 입은 여자가 지나갔다. 빨강과 흰색. 뒤쫓아가고 싶을 만큼 잔상이 길게 이어졌다. 갑자기 카페에 흐르던 팝송이 잦아들더니 곧 재즈풍의 피아노곡으로 바뀌었다.

  “좋다, 이런 게 좋은 것 같아.”

  무심결에 말하고서 이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장은 스팀 밀크를 내리는 중이었고 등 뒤 테이블에 앉은 두 여성은 이현에게 닿지 않는 대화가 한창이었다. 커다란 이어폰을 쓴 채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젊은 남자와 정장을 차려입은 노년의 부부도 이현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 공기와 함께 와인을 한 모금 머금었다. 시고 달콤하고 쌉쌀했다. 살짝 눈을 감고 다시 한 모금 마셨다. 향과 바디감. 또 품종명과 빈티지와 원산지와 페어링. 이현은 어느새 방금 무엇을 보고 좋다고 느꼈는지 완전히 잊어버렸다.

  이현은 미래를 위한 계획을 세우기로 했다. 지하철이 한산해질 때쯤 자리에서 일어나야지. 어쩌면 아침처럼 앉아서 퇴근할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럼 아침에 듣지 못한 ‘직장이 필수 영문장 섀도잉’을 듣자. 평소보다 귀가가 늦었으니 딱 오늘만 홈트레닝을 건너뛰자. 그러면 잠들 때까지 영상 볼 시간은 충분하겠지. 손톱깎이가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단단히 굳어 있지만 정작 열어보면 숭숭 뚫린 다른 이의 비밀스러운 발톱들을. 따뜻한 침대 위에서 크림색 매끄러운 파자마를 입은 채로. 그러면 나는 충분히 만족스럽겠지.

  거기까지 생각한 후 이현은 조용히 입술을 움직였다. 황선우. 특별한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가방 깊숙이 숨긴 쇼핑백을 꺼냈다. 선우가 준 이어폰 케이스의 케이스는 곱게 포장까지 되어 있었다. 포장을 뜯자 메모가 붙어 있었다. ‘소라색이 이현님께 어울리시는 것 같아서 골라봤어요’.

  “소라색이 아니라 하늘색. 어울리시는 게 아니라 어울리는 것.”

  자신에게만 들리는 목소리였다. 이현은 이어폰 케이스에 선우가 준 케이스를 끼우기로 했다. 되돌려줄까 하던 마음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 정도는 괜찮았다. 손바닥보다 작은 하늘색 실리콘 정도가 이현의 일상을 흔들거나 할 위험은 없었다. 선물 받은 물건에 흠집이 나면 마음이 쓰일까. 그렇다면 케이스의 케이스에 덧씌울 만한 다른 케이스가 있을까. 마주 보고 있는 거울이 서로를 무한히 반사하는 광경을 떠올렸다. 어디였는지 언젠가 그렇게 거울이 설치된 엘리베이터에 혼자 탔던 일이 있었다. 들여다보기 두려울 정도로 증식한 끝없는 자신이 실은 케이스, 그 케이스의 케이스, 그 케이스의 케이스의 케이스였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좀 든든해졌다. 따지고 보면 발톱도 비슷한 맥락일지 몰랐다. 감염으로 약해진 발톱을 보호하기 위한 케이스를 덧씌우다 보니 그토록 비대해질 수밖에 없었는지도. 그렇다면 그 케이스를 드릴로 갈아 내고 들어내고 하는 광경이란 지나칠 정도의 폭력이나 마찬가지였다. 영상을 볼 때마다 왜 온몸에 힘이 들어갔는지 이현은 알 것 같았다.

  스마트폰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솔희가 영상통화를 걸어왔다. 연결하자 얼굴 옆에 엄지를 치켜세운 솔희의 모습이 떠올랐다.

  ―혼자 마시려니 외로워.

  ―외롭긴. 요즘은 그렇게 다 혼자 즐기는 시대인데.

  ―건배해 줄 사람이 없잖아.

  ―그럼 네가 두 잔을 시키면 돼. 오른손과 왼손이 건배한다고 챙챙 소리가 안 나는 것도 아닌데.

  ―나 혼자로 충분해?

  ―내가 있잖아. 난 너야.

  정말로 어느새 솔희는 이현이었다. 서로에게 꼭 맞지만 매끄러워 평생 거스를 일이 없는 사이. 문득 솔희가 짝사랑만 고집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꽤 괜찮은 선택 같기도 했다. 이현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와인 잔을 정리하고 선우가 건넨 메모를 다시 읽었다.

   

  소라색이 이현님께 어울리시는 것 같아서 골라봤어요.

  소라색이 이현님께 어울리시는 것 같아서 골라봤어요.

  소라색이 이현님께 어울리시는 것 같아서 골라봤어요.


  둥글게 뚫린 휴지통 입구 위에서 선우의 문장을 반으로 찢었다. 그리고 다시 반으로 찢었다. 네 조각의 종이를 모아 쥐고 마지막으로 찢었다. 여덟 조각이 되어 메시지가 아니게 된 글자들을 눈에 담았다. 선우님은 이렇게 글씨를 쓰는구나. 감상은 짧은데 조각이 모두 휴지통 속으로 사라지는 시간은 이상하게 길었다.

  뒤돌아서며 이현은 카페에 막 들어서던 남자와 부딪힐 뻔했다. 비는 그쳤지만 남자는 꽤 젖은 것처럼 보였다. 반 발자국 물러서며 이현은 고개를 수그렸다.

  “오우, 미안합니다.”

  낯선 억양에 반사적으로 얼굴을 들었다. 푸른 눈의 서양인이었다. 직장인 필수 영문장 섀도잉. 출퇴근하며 매일 쌓이던 수많은 글자는 한 마디도 소리로 나오지 않았다. 그저 이현은 다시 고개를 수그리며 말했다. 황선우.

  “파든? 뭐라고 하셨어요?”

  “아뇨, 괜찮아요.”

  이현은 꾸벅 인사하고 서둘러 카페를 나섰다. 지하철에 올라탈 때까지 아무런 풍경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카페에서 시간을 꽤 보냈음에도 열차 안은 붐볐다. 일어선 채 퇴근해야 했지만 아쉽지 않았다. 이어폰을 꽂고 노이즈캔슬링을 켜자 시끄럽던 신경이 가라앉았다. 매일 듣던 영문장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거북할 정도로 쿵쿵 뛰던 심장박동도 잦아들었다. 그러자 바랄 것이 없어졌다. 이대로 집에 도착할 때까지 누구와도 눈이 마주치지 않는다면 충분했다. 그렇게 ‘좋아요’도 ‘싫어요’도 필요 없는 집에 갈 수만 있으면 다 괜찮았다. 진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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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사과 박솔뫼 어느 날 아침 애리는 자신이 오랜 시간 흔들리는 창을 보며 시간을 보내왔음을 알았다. 일을 하러 가는 길이었고 이곳에 이사와 이 열차를 탄 것은 1년 7개월째였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학교에 들어가기 전 아이일 때 모든 것이 멈춰 서 있고 시간이 영원한 것처럼 느껴지던 때부터 탈 것에 올라타 멀어지는 집과 나무들을 보아 왔다고 느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텐데 왜 그제야 그것이 새삼스럽게 느껴진 것일까. 어딘가로 향하는 감각과 함께 창 너머 공터와 집들과 골목들을 실제로 걷는 일은 왜인지 일어나지 않을 일처럼 느껴지고 언제까지나 좌석에 앉아 멀어지는 사람과 집들과 빨래와 커튼을 보고 있을 것 같다. 애리는 사원 숙소를 제공하는 회사에서 오랫동안 일을 하다 그만두고 나와 집을 구해 살다 사회복지와 개호 관련 자격증을 따고 이후에는 자격증과 상관없는 일을 몇 년을 하였다. 그러다 역시나 숙소를 제공하는 지금의 회사에 다니게 되었다. 회사는 큰 항구가 있는 대도시와 인접한 소도시에 있었고 숙소는 회사 직원만이 아니라 해당 지역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한 곳이었기 때문에 회사와는 아주 가깝지는 않았다. 그 때문에 예전 회사는 숙소에서 회사까지 걸어갈 수 있었지만 지금 회사에 가기 위해서는 숙소에서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역으로 가서 다시 20분가량 열차를 타야 했다. 숙소 앞에서 버스를 타는 방법도 있었고 버스를 타는 것이 여러모로 더 편했지만 버스는 늘 같은 회사 사람들로 붐볐고 앉아 가기가 힘들어서 애리는 보통 열차를 탔다. 오랜 시간 흔들리는 창을 보며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자 곧이어 오랜 시간 기숙사에서 공동 부엌에서 공용 생활공간에서 얼굴만 익숙한 사람들과 살아왔다는 사실이 마치 연결된 문제처럼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둘은 전혀 상관없는 일인데. 마음을 먹자면 살 곳을 구해서 혼자 사는 것이 가능했던 것도 같지만 애리는 왜인지 그럴 마음을 쉽게 먹지 못했다는 생각을 한다. 이렇게 나이가 들어서 공동 숙소에서 사는 것이 부끄럽거나 괴롭지는 않고 돈을 아낄 수 있고 여러모로 편리한 점도 많았지만 혼자 살 집을 찾아 오래 쓸 가구를 사는 일에 겁을 먹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냉정하게 바라본다. 창은 여전히 흔들리고 창밖으로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터가 보인다. 공터 구석에서는 무언가 야채 같은 것을 심는 것도 같지만 대부분은 아무것도 없는 공터. 도시 어느 한구석의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터는 드물다는 생각을 한다. 가끔은 누군가의 넓은 방과 책장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다가도 애리는 동시에 이것저것 모든 것을 한 번에 버리고 어딘가로 금세 떠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고 그것이 실제로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지금 생활은 지금 생활대로 좋다고 여기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누군가의 텅 빈 방 (떠올려 보면 아주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가져 본 적이 없는)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 그것을 원하는 마음은 원하는 마음으로 눈에 보이는 곳에 확실하게 붙여 두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텅 빈 방의 모습이

  • 관리자
  • 2025-07-01
알고 싶습니다

알고 싶습니다 최재영 가끔 인생이 내게 애벌레가 파먹는 중인 사과를 베어 물도록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토요일 저녁 아홉 시 뉴스에선 오늘도 전 세계 기아들이 굶고 있고 남미 쿠데타 정부의 진압 몽둥이에 시민들이 맞고 있으며 전장의 포탄은 군인과 민간인들을 죽인다. 그러나 우리 집 안방엔 세 살 연상 아내와 세 살짜리 딸이 곤히 잠들어 있다. 비록 내일이면 공룡 박사 딸은 파키케팔로사우루스 흉내 내며 내 턱에 박치기를 날릴 것이고 아내는 원시인 사냥꾼처럼 괴성을 지르며 딸을 쫓을 것이지만··· 서른여섯 살의 나는 대한민국 성남시의 아파트에, 지금 여기에, 우리 세 가족과 잘 있고, 그것참, 다행이다. 내가 베어 문 사과 반쪽에 벌레가 없어서. 뉴스에 어느 북한군이 등장한 건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전장이었다. 한 북한군이 부상 때문에 낙오했는지 홀로 하늘을 보며 누워 있었다. 러시아 것인지 우크라이나 것인지 모를 드론이 공중에서 그를 촬영하고 있었다. 곧 드론은 부드럽게 수직 하강하며 그에게 다가갔고 그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쓰으윽- 줌인 됐다. 뉴스 진행자와 패널들이 호들갑 떨었다. “너무나 리얼합니다!” 무슨 아는 사람이라도 본 것처럼 오바하네. 나는 그들의 반응에 코웃음 치며 손에 든 캔맥주를 쓰으윽- 들이키려다, 멈칫했다. 아는 사람 같았다. 낯이 익었다. * 약 15년 전 여름, 나는 백령도에 주둔한 해병대 6여단 영창에 15일간 구금되어 있었다. 죄명은 후임 폭행이었다. 막 상병이 됐을 때 생긴 일이었다. 영창의 개인 감방에 들어서자 정말이지 감옥처럼 생겨서(정말 감옥이긴 했지만) 울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철커덩 자물쇠가 닫히는 소리와 함께 스물한 살에 인생이 망해 버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감방 철창 너머론 건물의 입구와 헌병 하나가 근무하며 감시하는 공간이 보였다. 그 공간을 기준으로 네 개의 감방들이 반원을 그리며 각각 1호 창, 2호 창, 3호 창, 5호 창이라는 이름으로 있었다(4호 창은 없었다, 해병대에선 숫자 4를 쓰지 않으니까). 나는 3호 창에 수감됐다. 감방 안에 앉아 있으면 보이는 건 꾹 닫힌 건물 문, 그리고 중앙의 그 헌병밖에 없었다. 양옆의 다른 감방들은 시야에 아예 들어오지 않았다. 1호 창과 5호 창에도 수감자가 한 명씩 있다는 것만 알 뿐이었다. 단 2호 창만은 비어 있다고 했는데 폭행 사건이 일상적이라 항상 미어터지던 백령도 해병대의 영창에선 이례적인 일이었다. 나중에 듣기론 당시 북쪽 상황이 심상치 않아 각 부대들의 징계 절차가 보류됐기 때문이라고 했다. 감방 안은 어두컴컴하고 축축했다. 폭은 누워서 다리를 뻗지 못할 정도였다. 물론 화장실은 따로 없었다. 안쪽으로 세 걸음 가면 구석에 수도꼭지를 비롯해 쪼그려 앉아 일을 보는 일명 고무신 변기가 있었다. 무릎 정도 높이의 아담한 담만이 가림막을 해 주었다. 큰 것이든 작은

  • 관리자
  • 2025-07-01
프레살레

프레살레 반수연 홍은 미로처럼 이어진 길을 솜씨 좋게 빠져나갔다. 홍을 놓칠세라 일행들은 빠른 걸음으로 따라붙었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공항은 번잡했다. 챙이 넓은 홍의 검은색 모자는 인파 사이에서 사라졌다가 나타나곤 했다. 모자가 사라질 때마다 짧은 불안이 스쳤다. 우리 중 누구도 파리에 처음 오는 이는 없었다. 정아는 작년 패션 위크에도 왔다고 했다. 하지만 출구로 빠져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홍을 만난 순간, 홍이 웰컴 투 패리스, 라며 환하게 웃던 순간, 제가 잘 모시겠습니다, 라며 농담과 카리스마가 뒤섞인 환영 인사를 건네는 순간, 홍은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깃발이 되었다. 몇 개의 건물과 긴 복도를 통과해 홍이 예약해 둔 렌터카 사무실에 도착했다. 미리 맡겨 두었다는 홍의 짐이 사무실 모퉁이에 쌓여 있었다. 각지고 거대한 두 개의 캐리어, 명품 마크가 선명한 가죽 배낭과 보스턴백, 두 개의 쇼핑백도 포개져 있었다. 캐리어 계의 에르메스라는 바로 그 리모와 아닌가요? 색깔 너무 이쁘다. 이삿짐을 떠올리게 하는 홍의 짐에 약간의 충격을 받은 나와는 달리 정아는 레몬색 캐리어에 먼저 관심을 보였다. 자기야, 그건 좀 그렇지 않아요? 에르메스야 버킨 말고는 뭐가 있나. 홍과 정아의 대화를 들으며 나는 며칠 전 정아가 단톡방에 올린 메시지를 떠올렸다. 유럽 항공은 수하물 분실이 잦으니 위탁 수하물 없이 기내용 캐리어와 작은 손가방으로 짐을 제한해요! 정아는 해당 항공사의 기내 반입 수하물 규정을 캡처해서 올리며 당부했다. 같은 옷을 이틀 연달아 입거나, 옷과 콘셉트가 맞지 않는 신발이나 가방을 견디지 못하는 예민한 패션 감각의 소유자인 정아가 분실이 두려워 그런 제안을 한다는 건 조금 의외였다. 그런데 이제 보니 정아는 홍의 짐이 어마어마하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정아가 홍을 위해 우리 짐을 단속했다는 사실보다 진실의 내막을 뒤틀었다는 것이 묘하게 신경을 긁었다. 독일제 7인용 SUV 차량의 마지막 3열을 접어 트렁크의 공간을 넓혔다. 홍의 캐리어를 먼저 싣고 그사이에 네 개의 기내용 캐리어를 테트리스 하듯 넣었다 뺐다 씨름하느라 손가락이 욱신거렸다. 어찌어찌 짐을 욱여넣고 나니 트렁크는 룸미러로 후방이 보이지 않을 만큼 꽉 찼다. 배낭이나 손가방은 발아래에 두거나 안고 타면 될 거라고 홍이 운전석으로 올라타며 말했다. 나는 노트북과 파우치와 책이 담긴 배낭을 가슴에 안고 뒷좌석에 올라 안전띠를 당겨 맸다. 짐과 사람이 뒤엉켜 숨 쉴 공간마저 충분치 않게 느껴졌다. 답답함이 불안으로 바뀌며 숨이 가빠 왔다. 다른 일행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프로작을 한 알 꺼내 입에 물고 창을 조금 열었다. 약기운이 신경을 눌러 주기를 기다리며 눈을 감았다. 파리는 오전 열한 시, 한국은 오후 여섯 시였다. 지금쯤이면 윤수는 일어났을 것이다. 냉장고 제일 위 칸에 김치찌개 있어. 냉동실에 육개장도 얼려 두었어.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어. 공항으로 출발하기 전 나는 신발을 신다 말고 식탁에 앉아 짧

  • 관리자
  • 2025-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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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판다곰젤리
    최고에요

    작가님의 문학동네 장편 수상작 -일 미터는 없어- 존잼이니 읽어보세요. 오겜2보다 재미있습니다.

    • 2025-01-01 09:52:29
    판다곰젤리
    최고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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