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 프롬 홈
- 작성일 2025-03-01
- 좋아요 2
- 댓글수 0
- 조회수 1,256
파 프롬 홈
강지원
데이팅 어플에서 매칭된 모든 사람들을 통틀어 재이는 가장 마음에 드는 상대였다. 주고받는 대화의 간격이 짧지도 길지도 않은 게, 부담스럽지 않을 만큼의 적절한 간격을 터득한 것 같았고 민주와는 달리 자신을 드러내는 데에도 스스럼이 없었다. 머리 길이나 성향을 묻는 등 소상한 신변잡기에 심취하지도 않았다. 이따금 주고받은 일상 사진으로 추측건대 취향도 대강 비슷한 것 같았다. 민주는 취향을 가늠하기에 가장 보편적인 질문으로 좋아하는 영화를 물었다. 각자의 별 다섯 개짜리 영화와 이런저런 퀴어 영화를 나열하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아가씨〉와 〈캐롤〉에 대해서는 서로 비슷한 감상이었다. 지금보다 어렸을 적에는 감명 깊었고 언젠가 그런 영화처럼 대단한 인연을 만나길 바란 적도 있었으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실감과는 다소 동떨어진··· 여느 판타지 영화나 다름없다는 이야기. 재이가 덧붙였다. 그런 건 이제 〈아이언맨〉 시리즈처럼 보는 거죠.
여러모로 호기심이 동하는 사람이었다. 화면 속 인력이 민주를 자꾸만 끌어당겼다. 얼마 전, 전 여자 친구인 보영을 만난 참이기도 했다. 헤어지고 한 달 만에 연락을 하더니 이사할 적 챙기지 못한 짐을 가져다주겠다며 대뜸 선언한 것이다. 이제 와서 대체 뭘? 뾰족한 말이 불거졌으나 그것을 부러 꺼내어 겨누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버려 달라며 부탁해도 보영이 한사코 고집을 부리는 탓에 속수무책이었다. 얼굴 보고 대화도 할 겸. 보영의 연락에 마지못해 응하고서는 근처 역 이름을 말했다. 간만에 본 보영의 얼굴은 어딘가 누추하고도 조촐한 몰골이었다. 두고 왔다던 짐만 챙길 심산이었는데··· 정작 얼굴을 마주하고 나니 마음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뭔가 헛헛하네. 간소한 세간을 보자마자 보영이 중얼거렸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됐으면 그럴 수도 있지. 곧 눈치를 살피며 수습했다. 기껏해야 다섯 평일 방은 냉전을 치르는 동안 급하게 구한 곳이라는 걸, 함께 살던 집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형편에 맞는 거의 유일한 곳이라는 것을··· 전 여자 친구 앞에서 구차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현관 앞에 짐을 둔 보영이 머뭇거렸다. 돌이키기에는 지나치게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헐거운 찬장을 뒤적거리는 시늉을 하다 냉장고에 처박아 두었던 맥주캔을 대접했다. 1인용 좌식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선 안부와 근황으로 이루어진 대화를 듬성듬성 이어 갔다. 내밀한 공간은 마음가짐을 신중하게 만들었다. 싸구려 가벽 너머로 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와 앞집 커플이 주고받는 욕설 따위가 들렸다. 밤만 되면 불거지는 것들이었다. 씨발! 한 번 더 욕설이 떨어지자, 보영은 놀란 듯 흠칫 몸을 떨었다.
앞에 커플이 사는데, 자주 저래.
민주는 별 대수롭지 않은 척 굴었다. 너는 저게 괜찮아? 보영이 눈살을 찌푸리며 묻는 동안 이번에는 앞집 여자가 높은 괴성을 질렀다. 아, 씨발!
안 괜찮지. 민주가 대답했다.
그래서 조금씩 복수하는 중이야.
민주의 복수란 앞집 현관에 놓인 택배를 건드리는 게 고작이었다. 현관을 드나들 때 실수인 척 밟거나, 상자나 보랭 백의 경우 발끝으로 은근슬쩍 차 버리곤 했는데 다행스럽게도 들킨 적은 없었다. 복도는 한 사람이 간신히 통과할 만큼 협소했고 앞집 커플은 아주 늦은 시간이 되어야 귀가했으며 현관 옆에 놓인 택배를 며칠씩 방치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모두 성립하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한 복수였다. 한번은 택배 봉투의 모서리를 밟은 순간 앞집에서 대차게 싸우는 소리를 들은 적도 있었다. 민주는 봉투를 지그시 밟고 선 채 엿듣고자 노력했다. 거의 매일, 서로에게 무엇을 외쳐대는 것인지. 무엇이 서로의 목을 아프게 만드는지 궁금했다.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고성 섞인 대화에는 정확한 형체가 없었다.
뭐야. 차라리 걷어차는 거면 몰라도.
그러다 무슨 일이 날 줄 알고.
수긍 대신 궁색하게 말대꾸를 했다. 사실 민주가 진심을 담아 차 버린 건 보영과 그간의 세월이었는데, 한 사람이 살기엔 넓고 두 사람이 살기엔 미묘하게 좁았던 보영의 집과 그곳에서의 작별이 함께 떠올라 조금 아찔한 심정이 되고 말았다. 두 사람 모두 쓸모없는 것을 냉정히 처리하는 데엔 재주가 없었고 짐은 살아갈수록 늘기만 했다. 마음과 달리 정리라는 건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혼자 살기엔 적당한 것 같다.
보영은 구태여 참견하는 대신 행어 위로 쌓인 옷가지와 널브러진 물건들을 둘러보며 맥주만 들이켰다. 대화는커녕 적적한 공기만이 두 사람 사이를 떠돌았다. 서로에게 욕을 해대던 앞집 커플은 어느덧 징그러운 신음을 쏟아 냈다. 아주 목에 피라도 나겠네. 보영이 중얼거렸고, 민주는 전 여자 친구의 성급한 속도를 따라 맥주를 마셨다. 조도를 한껏 낮춘 방이었음에도 서로의 취기가 올랐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비로소 침대로 향했을 때, 민주는 보영의 손길을 저지하고선 다급히 노트북을 열었다. 이쪽의 일들을 저들에게 알릴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넷플릭스에 접속해 요란할 법한 영상을 찾았다.
노래가 낫지 않아?
이 시간에는 영화가 더 자연스러울 것 같아서···.
어··· 그런가? 보영은 순순히 동조했다. 눈에 걸려든 영화가 있었다. 〈평단의 찬사를 받은 영화!-스파이더맨: 홈커밍〉
가장 시끄러운 장면이 있을 후반부에 스크롤을 놓은 뒤 볼륨을 최대로 높였다. 비행기 동체에 매달린 스파이더맨이 떨어지지 않으려 무진 애를 썼다. 민주는 보영에게 매달렸다. 바지가 벗겨지고, 머잖아 새된 비명이 터졌다.
피 나는 것 같은데?
떨어진 건 스파이더맨이 아니었다. 팬티 위로 붉은 피가 비쳤다. 보영은 난감한 표정으로 두 눈을 뻐끔거리기만 했다. 단지 그뿐이었다. 민주의 주기는 대체로 불규칙한 편이었다. 서둘러 수습에 나서는 동안 어쩐지··· 싶었다. 얼굴을 붉힌 채 화장실을 나서자 보영이 물었다. 괜찮아? 민망한 기색이 형형해서 이걸 미안하다고 해야 하나, 고민이 들었지만 당황스럽기는 해도 사과할 일은 아니었으며 무엇보다 그런 말을 선뜻 내민다면 완전히 지는 기분이 들 것 같았다.
주기가 제멋대로라서···
대신 멋쩍게 말문을 열었다. 너는 항상 그렇더라. 이해하지 못한 채로 지나가버린 여러 일들을 궁리하듯 어딘가 침울한 얼굴이었다. 김이 빠진 듯 객쩍은 어조에다 한 마디 쏘아붙이려 했지만 이내 그만두고 말았다. 어떠한 합의나 타협도 이루어지지 않은 심상한 관계 속에서 취기는 그저 한 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술이 깬 건 마찬가지일 텐데도 보영은 좀체 나갈 기미 없이 미적거리기만 했다. 보고 가려고? 민주가 화면을 가리키며 넌지시 물었다.
전에 같이 봤던 건데.
보영은 잠시 어물거리더니 다시 물었다.
영화관에서 봤어. 기억 안 나?
어느 영화관인지 세세히 떠올리는 보영과 달리 아무리 되짚어도 건질 만한 기억이 없었고, 화면 속 스파이더맨이 다정한 이웃을 자처하는 장면에 시선을 기울여도 낯선 건 매한가지였다. 보영은 한참 고민하는 민주를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챙겼다. 현관을 나서기 직전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없었던 일로 하자.
민주는 홀로 남은 방에서 피가 묻은 바지와 팬티를 빨았다. 핏자국이 남지 않도록 손에 힘을 가득 실어서. 없었던 일인 양 지우는 건 늘 품이 들었다. 미처 씻어 내지 못한 수치심과 미련을 안고 침대 위에 누웠다. 후회를 곱씹으며 잠시간 뒤척였다. 영화의 스크롤을 들쑤시며 기억을 캐내려고도 했지만 특별한 소득은 없었다. 히어로로서 인정받지도, 평범한 생활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어중간히 거미줄만 타는 피터 파커를 무심히 넘기는 동안 앞집 커플은 여전히 다정하면서도 남사스러운 신음을 쏟아 냈다. 결국 민주의 손을 떠난 영화는 저 혼자 떠들었다. 토니 스타크가 모든 소동을 홀로 정리한 피터 파커를 가상히 여기며 다독였다. 아주 개판을 쳤었지. 하지만 잘 수습했어. 피가 울컥거리며 쏟아졌다. 그 정도면 훌륭한 찬사였다.
민주는 재이에게 답장을 했다. 읽음 표시가 사라진지 한참이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벌어졌던 모든 소동을 애써 지우며 골똘히, 채팅창을 바라보던 차에 재이가 말문을 열었다.
그런데 저··· 여자친구랑 같이 살아요.
여태 들인 공과 발품이 아까웠다. 형편에 걸맞는 집이란 흔치 않았고, 비루한 사정은 당분간 풀릴 기미가 없었다. 이곳을 벗어난다면 다시 신세를 가늠하며 여기저기 전전할 게 뻔했다. 불규칙한 일회성 만남은 연말 특수와 맞물려 쓸쓸함만 고조시켰다. 송년회 겸 가볍게 친목이나 하자고 제안한 쪽은 민주였다.
적절한 간격을 가진 대화는 첫 만남에서도 변함이 없었다. 무엇보다 핸드폰 액정화면 속 수많은 말풍선을 비집고 나와 현실로 진입할 때 무릇 느껴지던 낙차 따위도 없었다. 그간의 일회성 만남에 비한다면 꽤 성공적인 편이었다. 과하지도, 늘어나지도 않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진 대화는 숙련된 줄타기 같았고 간간한 농담은 히어로 가면을 쓴 채 던지듯 적당히 장난스러우면서도 분위기를 환기하는 데에 도움이 됐다. 방해되지 않을 만큼 벌어진 테이블 간격과 간편하면서도 부담스럽지 않은 메뉴‧‧‧ 그 모두를 아우르는 식당이란 점은 재이와의 일정한 거리를 벌리는 데에 도움이 됐다. 모든 게 지나치면 지나치게 허물없는 관계로 돌변하거나 순식간에 돌아서기 마련이니까. 사는 얘기와 예년 같지 않은 날씨, 최근 인기를 끄는 여자 아이돌의 가십거리와 새로 개봉한 영화까지. 개괄적으로 톺아보는 사이 파스타 그릇은 바닥을 보였고 재이는 2차를 제안했다. 좀 더 깊은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깊은 이야기’라는 것이 어딘가 심상찮게 들렸지만 민주는 흔쾌히 수락했다. 재이가 자주 가는 이쪽 술집이 있다고 했다. 어수선한 골방으로 돌아간들 딱히 반길 만한 일도 없었다.
룸 형태로 된 프라이빗한 공간이었다. 빌 에반스가 연주가 지나가고 조 스태포드의 〈No Other Love〉가 괴괴스러운 실내에 울려 퍼졌다. 가격표를 면밀히 살피다 주문한 진로골드에서는 떫은맛이 났다. 약간의 취기를 느끼며 소파에 등을 기댔더니 옆방에서 깔깔대는 소리가 들렸다. 아, 왜 그래 진짜아. 하지 마아. 교태스러운 투정이었다. 괜스레 목을 축이며 재이를 보자 그녀는 깊은 이야기를 할 채비를 마쳤다는 듯 제법 진지한 얼굴로 마카로니 뻥튀기만 씹어댔다. 일단, 짠 먼저···. 재이의 말마따나 한잔 들이켜는 사이 전에 없던 정적이 일었다. 먼저 침묵을 깨트린 건 재이였다.
혹시··· 이쪽 친구는 있어요?
커밍아웃은 안 해요? 쭈뼛거리며 운을 뗀 재이의 손은 공연히 빈 잔만 만지작거렸다. 엄숙한 분위기에 심각한 표정···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신중하게 말을 고르는 동안 얼마나 솔직해져야 할지 고민했고, 대체로 민주의 취향인 재이의 얼굴을 다시 보는 순간 농담으로 얼버무린 가면을 이제 벗어야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웬만해선 안 하려고요. 그리고 설핏 덧붙였다. 언제 한번 했더니 무슨 말 들은 줄 알아요?
뭐라고 했는데요?
여자끼리 만나면 예쁘게 잘 배려하면서 만날 것 같다고.
아. 재이가 짧게 탄식했다.
피가 식는다, 진짜.
빌런이 뭐··· 별건가요. 그런 게 빌런이지.
안 들으니만 못한 소리네요.
재이는 이런 식의 ‘죽을 때까지 고민을 나눌 진정한 친구’가 ‘필요’하다고 했다. ‘있었으면 한다’도 아니고 ‘만들고 싶다’도 아닌 ‘죽을 때까지’ 필요하다니. 비장한 뉘앙스였지만 어찌 됐든 드라마 〈엘 워드〉의 중축인 레즈비언 패거리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런저런 고민을 공유할 수 있는 친구가 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었다. 그나마 있던 일반 친구들도 결혼이니, 자기 먹고 살길 찾아가느라 멀어지고‧‧‧ 퍽 익숙한 고민이었다.
민주는 취미나 친목 모임을 찾는 게 낫지 않겠냐며 조언을 했지만 그야말로 안 하느니만 못한 말이었다. 재이에겐 독서 모임과 영화 모임 같은 곳을 전전한 내력이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깊은 우정을 유지한 친구 관계는 없었다. 성격이 워낙 제각각이라 튕겨 나오거나, 누군가가 누군가와 사귀고 또 다른 누군가가 누군가와 헤어져 모임이 파투 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우린 정체성 말곤 공통점이 많지 않고 서로 애써야 유지되는 관계니까. 마음 찾는 친구 찾는 게 쉽지는 않더라고요. 재이가 말을 이었다.
아니면 아예 확, 사귀거나.
에이··· 사귄다고 안 맞던 게 갑자기 맞춰지나.
그런 경우도 봤단 얘기죠. 친구 찾다가 여자 친구 만드는 사람들.
재이 씨도요?
저는 아니죠. 여자 친구 있으니까.
민주는 미심쩍은 듯 들먹거렸다. 정말요? 진짜요?
사실, 여자 친구 있다고 해도 신경 안 쓰는 사람들이 있긴 해요.
근데 저는 그런 거 말고, 진짜 친구를 원하거든요. 나름 호기로운 선언을 하더니 이번에야말로 목적에 맞는 사람을 만난 것 같다며 수줍게 웃었으나, 민주는 어물거릴 뿐이었다. 십 년 지기와도 한순간에 틀어지는 게 세상만사인데 이쪽이라고 크게 다를 게 있나, 낙담이나 떠드려다 그만두고 말았다. 대신 발품을 팔기만 한다면 언젠가 잘 맞는 친구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그럴싸한 낙관으로 상황을 무마했다. 두 사람 사이에 고인 먹먹한 공기가 좀체 사라지지 않았다. 독서도 영화도 나쁘지는 않았는데요. 재미도 있었고.
재미가 쓸모의 전부는 아니니까요.
어떤 결의 같은 것이 느껴지는 바람에 대답할 말을 고심했고, 그사이 요원하던 술자리가 끝을 드러냈다. 얼어붙은 바깥 공기를 마주한 뒤에야 어색함을 눅이려 너스레를 떨었다. 운동 모임은 좀 그런가? 아무래도 그쪽이 더하겠죠? 재이가 물었다. 가 본 적 있어요? 민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걸음을 걷고 활발히 움직이는 것들은 언제나 관심 밖에 있었다.
제 여자 친구랑 똑같아요.
공교롭게도 돌아가는 방향이 같았다. 상가가 즐비한 골목을 지나친 뒤 비교적 한산한 주택가로 진입했지만 재이는 민주 옆을 진득하게 걷기만 했다. 굽이친 경사가 시작될 즈음 어디에 사느냐고, 조심스러우면서도 조금은 무관심한 척 물었다. 재이가 사는 곳은 언덕 중턱에 걸쳐진 이십사 시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 근처로 민주도 이따금 지나친 적이 있는 곳이었다. 술을 깰 겸 산책이나 하겠다며 짐짓 쾌활하게 말한 재이는 오르막길을 허정허정 오르기 시작했다. 민주가 사는 빌라는 산을 깎아 조성한 주택가에서도 가장 높고 구석진 자리에 위치한 곳에 있었다. 오르는 건 매한가지였다.
내친김에 산책을 했다. 천변은커녕 그럴싸한 공원조차 없어 골목 사이사이를 헤집는 게 고작이기는 했다. 몇 개의 모퉁이를 돌아도 빌라와 다세대 주택, 차량들이 협소한 간격으로 붙어있는 풍경은 변함이 없었다. 여기서 산 지 몇 년이나 되었냐는 의례적인 질문을 시작으로 어느덧 사생활을 슬쩍 엿보기에 이르렀다. 일찍이 독립한 재이는 여러 동네와 전 여자 친구들의 집을 전전하다 이곳에 자리 잡은 지 삼 년째였다. 사 년째 교제 중인 명주와 동거를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재이의 말에 따르면 명주는 지나치게 신중하고 계획적인 사람이었다. 정년이 보장된 공기업을 선택한 데에도 그 성격이 반영되었을 거라고. 단정에 가까운 짐작을 할 무렵엔 재이의 속사정을 들을 준비가 되지 않았던 터라 겨우 눈만 굴릴 뿐이었다.
명주는 몰라요.
재이는 그렇게 말하곤 헛기침을 했다.
뭐를요?
제가 이러고 다니는 거요.
이러고 다니는 게 어떤 건데요?
싫어하거든요. 그래서 늘 비밀이고.
재이의 답은 단지 그뿐이었다. 저기가 집이에요. 민주는 재이가 가리킨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필로티 구조에 붉은 벽돌로 지어 올린 평범한 빌라였다. 멀찍이서 내다본 탓인지, 전봇대의 전깃줄이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얽혀 건물 주변을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 저기, 오 층이요. 늦은 시간인데도 베란다 창은 기척없이 깜깜했다.
한갓진 길에서 작별한 뒤 민주는 종종 재이를 만났다. 사실 민주는 재이가 말한 비밀을 감당할 자신이 없는 편에 가까웠다. 어플로 만난 비밀 친구라니. 그런 배역을 맡았다간 피를 보기 십상이었다. 그럼에도 재이의 연락을 내치지 않았던 건 밤이면 불거지는 이웃집의 요란한 음성을 피할 요량도 있었지만 제법 통하는 구석이 있었던 그녀에 대한 일말의 아쉬움과 가망 탓이었다.
퇴근 후에 만나 간단한 저녁 식사나 술자리를 가지고 길을 배회하는 건 두 사람의 루틴이 되었다. 시장 어귀와 골목들을 전전하는 동안 재이는 다정한 이웃이라도 된 것처럼 살아가는 데에 쓸모 있는 것들을 간간이 알려 주기도 했다. 한 끼씩 포장되어 있는 도시락이나 샐러드는 프랜차이즈보다 건너편 대형 마트의 마감 세일을 노리는 편이 저렴하며 마트 옆 두 개의 반찬 가게 중 젊은 부부가 운영하는 곳이 서비스가 후하다는 식이었는데, 이는 민주를 빠르게 적응하도록 만들었다. 재이와 명주가 함께 사는 집은 명주의 영혼은 물론 명주 어머니의 영혼 일부를 보태어 마련한 전셋집으로 재이가 부담하는 건 소정의 관리비와 가사 노동, 그리고 철저한 룸메이트 역할이라는 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다.
명주의 목표는 악착같이 모은 목돈으로 지금보다 넓은 평수의 아파트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내 집 마련은 명주의 오래된 꿈이자 장기적으로 봤을 때 가장 쓸모 있을 계획으로, 그 집에서 보낼 노후의 밑그림까지 착실하게 그리고 있었다.
평생 이렇게 살 수는 없지. 재이는 마감 세일이 임박한 샐러드에 멍든 구석은 없는지 살피며 말했다.
그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텐데. 재이의 투정이 배부른 소리처럼 여겼던 것도 이제는 제법 지난 일이었다. 쓸모를 떠들던 재이는 민주를 만날 때마다 연애사와 관련한 이런저런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마치 추락 직전의 비행기에 함께 매달린 동류랄까, 공범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해? 난데없는 질문이 탄산처럼 터지다 곧 가라앉았다. 주문한 지 오래된 맥주는 김이 푹 빠져 밋밋하기만 했고, 일갈이라도 하자니 적절한 대꾸가 떠오르지 않아 애꿎은 감자튀김만 건드렸다. 좀 식었는데도 맛있네. 주제를 돌릴 겸 은근슬쩍 권하자 다이어트 중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뺄 데가 어딨다고. 민주의 미적지근한 반응에 재이는 사뭇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명주가 나 요즘 찐 것 같대.
그렇구나‧‧‧.
귀가 솔깃할 만한 하소연도 거듭하여 듣다 보면 차갑게 식기 마련이었다. 재이의 마음이 식은 것은 아니었다. 차라리 그랬더라면 흥미가 돌지도 모르겠으나‧‧‧ 불만으로 꿈틀거리는 두 눈을 보아하니 흥미는커녕 술자리라면 으레 따를 법한 흥조차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무튼, 고이면 썩기 마련이라고.
무심코 잡은 손을 명주가 뿌리친 일이 화근이었다.
손잡은 게 왜?
민주의 물음에 재이는 손바닥을 펼치라며 종용하더니 곧장 손깍지를 꼈다. 차갑고 건조한 손이 민주의 손 안에서 잠시간 머물렀다. 아‧‧‧ 이거 말이구나. 빤한 클리셰나 다름없는 고민이었다. 명주네 회사 근처였거든.
기겁을 하더라.
좀체 심통이 풀리지 않았던 재이는 집에서는 명주 보기를 돌 같이하며 연락이라곤 죄다 무시하던 중이었다. 민주는 이와 비슷한 일화를 재이가 알려 준 쓸모 있는 지식만큼이나 통달하고 말았는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건 집주인과 우연히 마주친 일이었다. 집주인은 수시로 건물 주변을 청소하거나 층계참을 살피며 어슬렁거릴 만큼 꼼꼼한 인물로 그날은 공용현관 바닥에 조금씩 물을 뿌리고 있었다. 붉은색이 도는 잔해와 시큼한 냄새가 물살에 떠밀렸다. 바닥에 고인 웅덩이를 이리저리 피하던 명주가 되레 밟아 버리곤 작게 욕을 중얼거렸다. 여느 때처럼 붙임성 좋게 인사를 하던 집주인이 누가 토를 해놨다며 투덜거렸다. 건성으로 대답한 뒤 자리를 뜨려는 순간, 집주인이 명주를 붙잡고 재계약 여부를 물었다. 연장하실 거예요? 변한 건 없긴 한데. 만기를 고작 2개월 남겨둔 채였고 목표로 삼은 여윳돈까지는 아직 요원하기만 했으며 그 요원한 상태로 재이와 함께 산 지 어언 삼 년째였다. 명주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래야죠. 집주인은 재이와 명주의 얼굴을 잠시 번갈아 보더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게 해요, 그럼.
재이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은 왜 뻔한 걸 물을까? 뒤따르던 명주는 못마땅하다는 투로 대꾸했다. 그냥 물어보고 싶었겠지.
그건 걔가 잘못한 거지‧‧‧. 그래도 네가 명주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늘 신중한 태도로 잘못을 가늠하던 민주도 이쯤 하면 심통이 날 법했다. 그렇게 안 맞으면 헤어지던가. 뭉툭한 핀잔을 저울 위로 툭, 올려놓았다. 취기 오른 재이의 몸이 테이블을 향해 바짝 기울었다. 앓는 소리가 났다. 그렇지만 명주만 한 사람을 다시 찾을 자신은 없거든. 귀찮기도 하고‧‧‧ 민주의 입술 새로 짜증스러운 한숨이 샜다. 테이블에 엎드려 있다시피 한 재이는 어느새 손을 꾸물댔다. 꽤 심각한 표정이라 들여다보니 테이블 위를 굴러다니던 볼펜을 쥐고 주문서에 의미 없는 낙서나 하는 것이었다. 책임감도 있고 나를 잘 알고, 그 정도면 착하고, 어‧‧‧ 능력도 있고. 아무렇게나 덧그린 동그라미와 공허한 말이 서로 뒤엉킨 채 주문서 위를 까맣게 덮었다. 조금 긴 침묵이 지나갔다.
그래,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지.
냉철한 조언자 역할을 맡는 대신 반쯤 공범이 된 심정으로 감자튀김을 씹었다. 그사이 딱딱하게 식은 탓인지 입안에서 푸석한 잔해가 떠돌았다. 귀찮다니? 말꼬리를 늘어트리며 드러냈던 속내가 아주 싫지는 않았고 오히려 듣던 소리 중 반가운 소리처럼 여겨지기도 했는데, 왜 그런 마음이 드는지 생각해 보았지만 이렇다 할 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힐끔거리며 본 주문서 속 수어 개의 동그라미는 빈틈없이 메워져 있었다.
어느덧 꼬박 조는 재이의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김빠진 생맥주와 함께 사과가 담긴 장문의 메시지를 꼴딱 삼켰다지만, 명주의 영혼 일부가 깃든 집으로 이만 돌려보내야 할 시간이었다. 주섬거리며 겉옷을 걸치던 재이가 핸드폰 시계를 보더니 꽤 취기 오른 어조로 중얼거렸다. 맞다, 화장실 청소 안 했는데. 그러자 민주가 물었다.
이번엔 네 차례야?
그건 아닌데, 명주는 요즘 좀 바빠서.
알아서 하겠지. 내버려둬.
이럴 때 내가 해야지 누가 해.
그즈음엔 민주 또한 제법 상기된 채였다.
걔는 뭐 하는데?
야근.
퇴근하고 하라 그래. 너 혼자 사는 집도 아니면서.
늦게까지 일하는데 어떻게 그래.
씹다 만 감자튀김이 목구멍을 꽉 틀어막는 듯한‧‧‧ 말할 것도 없이 익숙한 감각이었다.
같이 살면 같이 해야지. 아니 뭐, 걔는 손이 없대?
걔는 수챗구멍에 손대는 거 못하거든. 뭐가 막혔는지 물이 안 빠지더라.
수챗‧‧‧ 미친 건가? 찬물을 얻어맞은 듯 취기가 바짝 깨고 말았다.
그럴 거면 왜 사귀냐고.
곧 후회했지만 쏟은 물을 주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화를 낼 법한데도 재이는 코트 주머니를 만지작대며 대꾸할 뿐이었다. 내가 하는 게 속 편하니까 그러지. 언성이 높아진 탓에 가게 안의 무르익은 시선들이 한곳으로 모였다. 의자 끄는 소리도 났다. 아무렇지 않은 시늉을 하지만, 재이가 눈치를 살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알아, 나도. 그런데 그건 생각처럼 쉽게 되는 게 아니거든.
민주는 재이의 말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누군가의 연애사에 끼어드는 장면에는 도저히 내성이 생기지가 않았는데, 이건 순전히 벌겋게 달아오른 취기 탓일 테다. 더 이상의 대꾸 없이 멀뚱거리기만 하는 재이를 향해 대체 평생을 뭘 어쩌고 싶은 거냐고, 따져 묻는다면 마저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몰랐지만 이해를 남용할 만큼 심도 있는 사이도 아니었다.
두 사람은 가게를 벗어났다. 괜스레 발만 굴리던 재이는 데면데면한 시선을 던지더니 들릴 듯 말 듯 무어라 핑계를 댔다. 깜빡한 게 있는데, 이제야 겨우 떠올라서 늦기 전에 가야 한다‧‧‧ 그런 비슷한 말을, 했던 것도 같았다. 미처 퉁을 놓기도 전에 서두르는 통에 작별조차 흐리멍덩했다. 성의 없던 인사와 반대편으로 사라진 뒷모습을 되씹으며 민주는 잰걸음으로 걸었다. 가게로부터 아주 멀리 벗어난 뒤에야 자신의 몫을 미처 계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뒤를 돌아보자 텅 빈 건널목과 헛헛하게 깜빡거리는 신호등 불빛이 전부였다. 자기가 먹은 건 언제나 각자 정산하는 것이 두 사람 간의 암묵적인 룰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민주는 빌라 어귀에서 앞집 커플을 마주쳤다. 쓰레기장 겸 흡연 구역으로 쓰이는 공터에 가물가물 서 있었다. 두어 번 지나치며 엿보던 것과 달리 남자와 여자 둘 다 제법 나이가 있는 편이라고 생각했을 때 남자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막 염색한 모양인지 샛노란 색이었다. 머리라도 식힐 겸 담배를 꺼내려다 바닥에 침을 뱉는 여자를 보고서는 마음을 접었다. 제법 쌀쌀맞아 보이는 여자였다. 길게 연기를 뿜던 남자가 여자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공용현관 키패드를 누르는 동안 괜히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아무렇게나 드러눕고 나서야 민주는 잠시나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바닥에 내던진 겉옷을 주우려 팔을 뻗었지만 닿지 않았다. 술 때문에 눈앞이 아찔했고, 핸드폰 화면에 뜬 메시지를 본 뒤에는 머리가 어질했다. 재이인가 싶어서 봤더니 보영이었다. 특별한 언질도 없이 기프티콘을 보내온 것이었다. 집들이/이사/답례 선물 잘 풀리는 집 프리미엄 세트 6종.
민주는 진작에 차단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무심코 눌러 버린 탓에 읽음 표시마저 사라진 뒤였다. 피 봤네, 피 봤어. 못 본 척 굴기에는 사라진 읽음 표시가 각별하게도 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왜 보낸 거야? 묻고 싶었지만 잔사설을 덧붙이자니 궁상맞을 것 같아 애써 담백한 인사말만 보냈다. 찾아가서 미안했고‧‧‧ 이사 갔는데 집이 영 허전해 보이고 마음 쓰여서‧‧‧ 어쩌고저쩌고. 보영 또한 구태의연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더는 볼 일 없는 인연인 셈 쳤던 민주는 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딴짓하는 두 관객을 두고 갈팡질팡하던 노트북 속 히어로와 보영의 당혹스러운 얼굴, 핏자국이 남지 않도록 정성껏 팬티를 빨았던 제 모습이 떠올라 홧홧 낯을 붉혔다.
아직도 복수하는 거야?
딱히 하지는 않는데.
내가 갈까?
아니?
성의 없는 답장과 함께, 물음표를 띄운 라이언 스티커를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민주는 재빨리 화면을 껐다. 울적하고 모난 자신의 얼굴이 까만 화면 위로 어른거렸다. 잘 풀리는 집이 액정화면을 떠나 밉살스레 방안을 헤집었다. 비밀 친구 겸 다정한 이웃 노릇을 할 때가 아니라 인생이 잘 풀릴 수 있도록 강구할 때라는 걸 어렴풋이 짐작했다. 현란한 줄타기는커녕 거미줄 위에 똑 떨어져 버둥거리게 된 시작점을 가늠했고 이건 영화가 아닌 현실이니 되감지도 못할 것이며, 설령 돌이킨다 한들 다른 선택을 할 확신도 없다고‧‧‧ 생각하다가 골방에서 펼치는 구차한 독백은 쿰쿰하기 짝이 없는 짓이었기에 그만두고 말았다. 다만 눈을 딱 감고 수챗구멍에 손을 댔더라면 어떤 전개가 펼쳐질 것인지 궁금하긴 했는데, 그때의 민주는 판에 박힌 대사와 지문을 말하는 인물이자 예상 가능한 전조를 가진 인물이었으므로 머리카락과 물때가 엉킨 수챗구멍을 보곤 어김없이 기겁하며 물러났을 터였다. 보영에게선 더는 답장이 없었다.
재이와의 만남이 소원해지고, 퇴근 후 하릴없이 칩거하게 된 민주는 앞집 커플의 행태를 견디는 지경에 이르렀다. 여자의 높고 신경질적인 고함이 끝난 뒤엔 언제나 남자의 큰 욕지거리가 뒤따랐다. 온 건물이 울리도록 복도에다 욕을 내던지며 나가는 건 남자일 때도, 여자일 때도 있었다. 가끔 남자와 여자가 합심하여 예의 신음을 내기도 했다. 그럴 때는 현관문을 한 뼘 정도의 넓이로 열었다가, 큰 소리가 나도록 닫기를 반복했다. 앞집은 대개 내던 소리를 수그러트렸지만 곧 아랑곳하지 않았다. 모두 온전한 해결책은 아니었다. 나 몰라라 내뺀 집주인과 자질구레한 악당들이 만든 난장의 한복판에서 민주는 거의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었다.
라이터에 불을 붙이자마자 건물 안에서 도어록 소음과 발걸음 소리가 났다. 또렷하게 들릴 만큼 바깥은 고요했다. 공용현관이 열리고 앞집 커플이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냈다. 그 사이 다리에 깁스를 한 남자가 겉옷 주머니를 뒤지고는 담배를 물었다. 여자가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없는데. 돛대는 건드리는 거 아니야. 남자가 말했다. 아‧‧‧ 나도 없는데. 작게 욕을 중얼거린 여자가 민주를 향해 넌지시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피하던 민주는 애써 모른 척했다. 이윽고 여자가 다가왔다.
미안한데, 한 대만 빌릴 수 있어요?
칼칼하게 찢어진 목소리만 듣던 민주는 정중한 여자의 정중한 말투에 위화감을 느꼈다. 몇 대가 남았는지 속으로 헤아렸지만, 헤아릴 필요도 없었다. 짧은 찰나 고민하다가 곽 안에 있던 담배 하나를 꺼내 여자에게 건네며 생색을 냈다. 돛대 빼고 주는 거예요. 깍듯하고도 예의 바른 인사가 나왔다. 여자가 제자리로 돌아가고, 남자가 여자의 담배에 불을 붙여 주었다.
두 사람은 민주가 있는데도 곧잘 떠들곤 했다. 그간의 소동 따윈 없었다는 듯 시시덕거렸고, 말없이 담배를 피울 때는 새벽 공기처럼 차분했다. 번갈아 바닥에 침을 뱉기도 했다. 다시 이어진 대화에서는 서서히 언성이 높아졌는데, 가만하던 민주도 그때만은 귀를 바짝 세울 수밖에 없었다. 새 담배를 꺼내 연달아 피웠다. 여자의 짜증 섞인 물음에 남자가 답했다. 나을 때까지만 기다려 봐. 여자는 연기와 긴 한숨을 동시에 내뱉었다. 알아서 좀 해. 일일이 손 가게 만들지 말고. 곁눈질로 흘긋 쳐다볼 만큼 또렷한 음성이었다. 여자와 눈이 마주쳤고, 먼저 피한 쪽은 민주였다. 반쯤 피운 담배를 바닥에 비벼 껐다.
두 사람 옆을 지나자 여자는 민주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요. 여자는 태연한 표정이었다.
102호 맞죠? 저희 앞집.
그런데요.
혹시 집주인한테 말하셨어요?
뭐를요?
우리요.
민주는 설핏 긴장한 채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그렇구나. 아니, 혹시나 해서요. 한 모금 짧게 들이켠 여자가 연기를 토하며 말했다. 바람이 들이닥쳐 그대로 연기를 맞았다. 어차피 조만간 나갈 거예요. 대강 고개를 까닥이곤 현관으로 다가갔다. 근데 이 담배, 무슨 담배예요? 여자의 물음에 민주가 답했다.
히말라야요.
익숙한 형체가 어물거렸다. 흔쾌히 아는 체할 법한 사람을 헤아려 보자면 재이가 고작이었다. 집에서 멀지 않은 프랜차이즈 카페였고, 픽업대와 출입구는 누군가의 얼굴을 한눈에 알아챌 만큼 거리가 짧았다. 민주가 아는 척 인사를 건네려던 찰나 재이가 휑하니 지나치고 말았다. 술집 앞에서 어영부영 헤어진 뒤 처음 마주친 것이었다. 못 봤다고 하기엔 시선이 정확히 마주쳤으므로 민주는 명백한 고의라고 판단했다. 재이 옆에는 단발을 한 여자가 있었는데, 손을 잡거나 팔짱을 끼지는 않았지만 누구인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바라던 대로 지나칠 작정이었다. 그즈음 민주는 재이와 마지막으로 나눴던 대화에 대해 잊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일회성 만남처럼 흐리멍덩한 관계로 남겨 두는 편이 오히려 마음을 소모하지 않는다는 낙관에 동의할 필요가 있었다. 지는 기분은 절차였다.
민주는 재이에게 다가가 부러 인사를 했다. 어머, 안녕하세요. 높은 음조로 화답한 재이는 꽤나 당황한 기색이었다.
여긴 웬일이세요?
맞은편에 앉아 있던 명주가 두 눈을 뻐끔거리다 물었다.
누구셔? 아는 사람이야?
어··· 등산 모임에 있으신 분. 왜, 내가 요즘 나간다던.
아. 명주가 짧게 호응했다. 안녕하세요.
근처 사시나 봐요.
민주가 답했다.
그건 아니고···. 민주가 재이를 흘긋거리며 말했다.
지나가던 길이었는데, 마침 재이 씨가 보여서요.
짧은 침묵이 지나가는 사이, 재이는 벗겨진 빨대 포장지를 잘게 찢었다.
잠시 인사나 하려고 했죠.
그렇구나. 누구신가 했어요.
명주는 듣던 바와 달리 제법 붙임성이 있는 편이었다.
등산 모임 얘기 들었어요. 재밌다고.
내키시면 한번 오세요. 재이 씨랑 같이.
배우 노릇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목이 비쩍 말라 왔다.
요즘은 바빠서요. 등산하기엔 관절도 안 좋고.
같이 오면 재이 씨도 좋아할 것 같은데.
그 말에는 슬쩍 웃기만 했다. 그러게요.
저도 전엔 그랬었는데, 해 보니까 못할 정도는 아니더라고요. 올라가다 보면 숨도 트이고.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뭐··· 생각해 볼게요.
이윽고 재이와 다시 눈이 마주쳤다. 제법 그렁그렁한 눈망울이었다.
가타부타 말이 없을 뿐 아니라 흔한 맞장구조차 치지 않았던 재이가 작게 콧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네, 다음에 봐요···.
밖으로 나간 민주는 카페의 통창을 기웃거리며 한동안 동태를 살폈다. 멀어진 거리 사이로 인파가 끼어들어 희미했지만, 척 보기에 특별한 기미는 없었다. 등산 모임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메시지에 대한 답장 같은 건 기대하지 않았는데도 회신은 금방 왔다.
아니 좀‧‧‧ 당황스럽다. 아는 척할 줄 몰랐어.
다시 한번 통창을 엿보자 머그잔을 들고 수줍게 웃는 재이의 얼굴만 간간이 보일 뿐이었다. 민주는 테이크아웃 잔에 든 커피로 목을 축인 다음 깊게 들이쉰 숨을 뱉었다. 미친 새끼.
그리고 그 주 주말이었다. 평일 동안 이어진 지난한 다툼 끝에 대화하기를 제안한 재이는 등산복 차림으로 나타났다. 쨍한 빨간색에 파란색 어깨선이 포인트로 곁들여진 윈드 브레이커의 지퍼를 목 끝까지 채우고, 등산화까지 신은 재이는 고즈넉한 카페 인테리어와 달리 어딘가 엉성한 분위기를 풍겼다. 일견 분장 같기도 했다. 오늘은 어느 산으로 가시려고? 민주가 비아냥거렸다. 그러니까, 마냥 거짓말은 아니라고‧‧‧ 그렇게 대꾸하는 재이의 얼굴은 주눅 든 피터 파커의 얼굴과 닮아 있었다.
사실 명주는 당근에서 만난 동네 소모임 정도로만 알거든.
너도 참‧‧‧ 대단하다.
민주의 핀잔 덕에 비로소 작은 상황극을 할 수밖에 없었던 구체적인 사정을 들을 수 있었다. 그 사이 여러 모임에 들어가 간을 봤는데, 그중 등산 모임은 재이의 입맛에 얼추 맞아떨어졌다. 앉아서 시시덕거리는 것보다 움직이며 땀을 흘리는 쪽이 잡념을 지우는 데에 쓸 만한 덕이었다.
첫날 오른 산은 한 시간 내외로 등반이 가능한 대모산이었다. 불국사와 성지 약수터, 우수조망명소를 거쳐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단순한 코스였는데도 재이는 어슴푸레 쓴맛을 봤다. 앞 사람을 따라 어영부영 스트레칭을 하고 완만한 길을 오르자 겨울철 메마른 산속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오랫동안 산을 오른 적이 없었고, 등반이라곤 주택가의 오르막길이 전부였던 재이에게 그런 광경은 익숙지 않았다. 허벅지 안쪽이 뜨겁고 가려웠다. 코가 아닌 입으로 숨을 쉬게끔 의식적으로 깊은 호흡을 하려 노력했지만 숨은 금세 턱밑까지 차올랐고 구역질이 났다. 물과 함께 억지로 삼켜도 가라앉을 기미 없이 속이 울렁거렸다. 경고문이 적힌 플래카드가 시야에 들어왔다. 등산로 외 출입 금지. 올바른 방향로를 이용하세요. 굵은 밧줄에 매달린 채 바람에 휘적거렸다. 재이는 플래카드 아래에서 숨을 돌리다 구토를 했다. 단체 버스에서 먹은 김밥 잔해와 커피색이 섞인 노란 액체는 썩 보기 좋지 않았다. 재이는 무릎을 부여잡고 숨을 돌리는 동안, 자세히 액체를 바라보았다. 뒤늦게 따라온 후미대장이 재이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잘했어요. 이렇게 하면 내려올 때 속은 편할 거예요.
그래서 등산복을 입은 거지.
재이는 정상에서 내려다본 풍경에 대해서는 끝내 말하지 않았다. 해명은 단지 그뿐이었다.
나눌 법한 모든 대화를 소진한 뒤에는 뜸한 정적과 함께 미적거리기만 했다. 이전처럼 노닥거릴 마음도 썩 내키지 않았다. 민주는 명주의 근황 따위를 물으려다 굳이 물어서 무얼하나, 딱히 알고 싶지도 않은 걸‧‧‧ 하는 생각에 그만두었다. 재이는 더 이상 명주와 얽힌 하소연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밖으로 나섰다. 길이 나뉠 구간에서도 재이는 선뜻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안 가? 민주가 묻자, 조금 걷다 가겠다는 건조한 답이 돌아왔다. 곧장 귀가하자니 멋쩍기도 했다. 두 사람은 후미진 골목 사이사이를 지나치며 정처 없이 걸었다. 재이와 만나지 않던 사이엔 통 갈 일이 없었던 마트에도 갔다. 호객하는 직원의 쩌렁쩌렁한 외침이 마트 한복판을 가로질렀다. 반찬 코너에서 가격표나 기웃거리며 이번에는 완곡하게 물었더니, 돌아오는 답이 심상치가 않았다. 사실‧‧‧ 들어가기가 좀 그래.
익숙한 풍경 속에 포함된 재이의 모습은 어딘가 낯선 구석이 있었다. 어김없이 들리는 앞집 커플의 소음도 한몫 거들었다. 어둑한 조명이 술렁거리는 집. 홀로 있어야 온전히 익숙해질 수 있는 공간에 누군가를 들이는 건 언제나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며
뭐라도 마실래?
결국 그렇게 물었다. 집 안에 들어온 재이가 침대 옆 바닥에 앉았다. 길을 걷고 돌고 돌아 낯선 곳에 당도한 사람처럼 방안을 두리번거렸다. 고개만 몇 번 꺾으면 후미진 부분까지 볼 수 있을 정도의 작은 크기였고, 그건 당분간 변하지 않을 사실이었다.
이 시간에 싸워대는 집도 있네.
열 시를 넘어선 시간이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맨날 저래?
거의 맨날 그러지.
야밤에 기운도 좋다.
집주인이 그러는데, 전에는 되게 예민한 재수생도 있었대.
재수생이야 뭐‧‧‧ 그렇겠지.
저 집에서 싸우거나 어디서 밤늦게 벽간 소음이 들리면 문 열고 소리를 지른 거지. 악을 쓰면서 몇 번이나.
민주는 악, 하고 소리 내는 시늉을 했다.
근데 그 재수생, 잘 풀려서 이사 나갔다더라.
잘된 건 어떻게 알았대?
글쎄다. 잘됐다고 하니까 잘됐구나 싶은 거지.
제멋대로 하고 살면 잘될 수 있는 건가?
그건 아니지.
가만히 귀를 세우던 재이가 물었다.
우리도 소리 지를래?
싫어. 뭔 일 날 줄 알고.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재이가 악 지르는 소리를 냈다. 요령 없이 목에 힘을 바짝 준 방성이었다. 야, 하지 마. 민주가 한사코 말렸다. 뭐 어때. 다들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는데. 그리고 덧붙였다.
소리 지르는 것도 훈련이 필요하대. 훈련한다고 쳐.
고함을 치며 재촉했고
해 봐. 배에 힘주지 말고 목에 힘줘서.
민주는 머뭇거리다 입을 벌렸다. 씨발!
작은 외침이었다.
욕 잘 한다.
민주와 재이는 한동안 번갈아 소리를 질렀다. 앞집은 어느덧 침묵하고 있었다. 아무렇게나 내버려둔 핸드폰이 고성방가를 뒤따르듯 진동했다. 재이의 것이었다. 오래도록 끊기지 않는 긴 진동이었다. 잠시 멈췄다 하면 다시금 울어댔다. 한달음에 달려왔을 누군가가 현관문을 거칠게 두드렸다. 앞집인데요. 화면 속에 갇힌 이름을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깊게 고민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재이는 바닥을 기는 진동을 건드리는 대신 가만히 둔 채 숨을 죽였다. 목에서 피날 것 같아.
진짜 피.
남자의 호통을 듣던 민주가 말했다. 재이는 윈드 브레이커의 지퍼를 내리며 말했다. 가끔은 이럴 때도 있는 거지. 목을 쓰느라 잔뜩 쉬어 버린 목소리였다.
민주가 앞집 여자를 마주친 것은 다음 날 하고도 자정 무렵이었다. 남자는 없었다. 여자는 조용히 담배를 피우며 민주를 흘겨보았다. 말이라도 꺼내려는 것인지 적절한 타이밍을 가늠하는 여자의 눈길이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쌩하니 지나치는 대신 성큼 거리를 벌려 더듬더듬, 담배를 찾았다. 우두커니 보내는 사이, 이전보다 누그러진 바람이 겉옷 사이를 제멋대로 드나들었다. 앞 건물의 외벽으로 난 보일러 배관에서 하얀 김이 폴폴 떠올랐다. 어느덧 쪼그려 앉은 여자가 피로한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곧 나갈 테니까 조용해질 거예요. 배수로를 향해 고개를 푹 기울이고는 침을 뱉었다. 길고 가늘게 늘어진 침은 격자 모양의 구멍 속에 들어갔다. 민주는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누가요?
제가요.
별꼴을 다 보고 살아서요. 민주는 그제서야 끄덕였고 여자는 여전히 배수구에 시선을 기울였다. 한껏 웅크린 여자가 몸을 일으킬 때까지, 어딘가로 정확히 들어가지도 비껴가지도 못한 자신의 내력들을 가늠했다. 여자는 미련 없이 현관으로 다가갔다. 떠나려는 사람의 뒷모습을 보는 건 퍽 간만이었다.
이윽고 모든 흔적이 남은 방. 민주는 정처 없이 널브러진 자신의 짐을 잠시 건드렸다. 쓸모없는 것과 쓸모 있는 것을 분간하는 일은 여전히 품이 들고 어려운 일이었다. 가느다란 숨 한 줄기가 고요한 방 속을 가로질렀다. 옷걸이에서 떨어진 재이의 붉은색 윈드 브레이커를 바라본 끝에, 민주는 그 끝자락을 힘주어 밟았다. 보던 것과 달리 거칠어서 몇 번인가의 시행착오를 반복해야 겨우 몸에 익을 것 같은 감촉이었다. 닿고 나서야 비로소 실감하는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그대로, 오랫동안 서 있었다. 자신을 향한 눈초리와 마주칠 때를 기다리면서.
추천 콘텐츠
오토매틱 블루베리 구소현 1 치와와를 닮은 거대한 구름이 서서히 왼쪽으로 움직였다. 주의 깊게 관찰하지 않으면, 움직이는지 모를 정도로 느리게 움직이는 구름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지한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귀에 꽂혀 있던 에어팟을 뺐다. 빠른 비트로 귓가를 울리던 테크노풍의 음악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대신에 노이즈 캔슬링 기능으로 차단됐던 주변 소음이 그녀의 귀에 생생하게 들려왔다. 그녀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얼굴이었다. 곧이어 그녀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빨간색 페인트칠을 한 철근 골조와 청록색 유리, 콘크리트 벽으로 이루어진 초대형 백화점이 눈에 들어왔다. 건물 내부에 들어가는 뼈대와 같은 구조물을 외부에 노출한 하이테크 스타일의 건축물이었다. 그녀는 콘택트렌즈나 안경을 끼지 않았는데도, 시야가 깨끗하고 선명하게 보였다. 백화점 정문 앞은 붐볐다. 안으로 들어가고, 나오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그녀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6월 15일 토요일, 오후 1시 20분. 택시 앱이 켜져 있어 확인해 보니 택시를 이미 부른 상황이었다. 지한은 어깨에 크로스백을 메고 있었고, 반대편 손에는 크기가 다양한 쇼핑백 여러 개를 들고 있었다. 택시는 6분 뒤 도착 예정이었다. 그녀는 잠시 쇼핑백을 바닥에 내려놓고 구글을 켜 도착지로 설정된 장소를 검색했다. ‘다이버’라는 가게였는데, 검색해 보니 마포구에 있는 이탈리아 레스토랑이었다. 그녀는 최근 주고받은 문자와 메신저 대화창을 훑어보며 ‘다이버’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 상대를 찾았다. 남자 친구였다. 지한은 자신도 모르게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곧 택시가 그녀 앞에 도착했다. 차가 오래 정차할 수 없는 장소였기에, 어쩔 수 없이 바로 탑승했다. 그녀는 택시에 타자마자 창문부터 내렸다. 내부에서 나는 불쾌한 냄새 때문이었다. 헛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도착 예정 시간을 보니 15분 뒤였다. 택시 기사는 핸드폰에 사이버 렉카 유튜버가 악의적으로 편집한 가짜 뉴스 영상을 틀어 놓고 운전을 했다. 지한은 에어팟을 다시 끼려다 말고 잠시 바라봤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방을 뒤졌는데, 일회용 알코올 솜을 발견했다. 그녀는 일회용 알코올 솜 포장지를 뜯어 곧장 에어팟과 자신의 귀를 닦기 시작했다. 에어팟에서 더러운 게 묻어 나온다거나, 안 좋은 냄새가 나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녀는 가방 안에 있던 알코올 솜을 모두 사용했다. 2 지한이 도착한 곳은 벽면이 거대한 수족관처럼 물로 채워져 있어, 마치 수중에서 식사하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레스토랑이었다. 그녀가 자리에 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종업원이 블루베리가 가득 올려진 피자를 테이블로 가져왔다. 이 가게의 주메뉴라며 남자 친구가 미리 주문해 둔 음식이었다. 하얀 모차렐라 치즈에 콕콕 박혀 있는 보라색 과일을 보자마자 그녀는 음식을 입에 대지도 않았음에도 입맛이 뚝뚝 떨어졌다. “지한아. 무슨
- 관리자
- 2025-03-01
빛의 한가운데 정이현 만약 아무것도 없던 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인간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일 같은 건 하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자신이 낳은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과는 다르다. 안희는 몇 해 전 이토록 모순적인 마음을 미령에게 고백한 적이 있다. 그런 말은 미령에게만 할 수 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미령이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 진심, 나도. 어깨에 얹힌 타인의 무게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고 안희와 미령은 경쟁하듯 토로했다. 그들은 한때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았다. 안희의 아들과 미령의 딸은 동갑이었다. 아이들은 어릴 때 같은 학교에 다닌 적이 있지만 친구라고 할 만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아이들 때문에 알게 되었으나 그들은 그와 상관없이 가까워졌다. 비슷한 일들이 어디서나 일어난다. 아이들이 진급할 때마다 안희와 미령은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이제 몇 년째, 라고 헤아리곤 했다. 10년이 되던 해에 내년엔 열 손가락으로 모자라겠다고 안희가 말하자 미령이 그럼 발가락으로 세면 된다고 말해서 웃은 적이 있었다. 올해 초, 안희의 집에 놀러 온 미령이 귤을 까려다 말고 갑자기 한쪽 양말을 벗었다. 오른쪽 엄지발가락부터 카운트를 시작하자면서 맨발을 꼼지락댔다. 그녀만큼 아무렇지 않은 순간에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안희를 웃겨 준 사람은 없었다. 또 없을 것이다. 언니가 늘 귀엽게 봐 주니까. 미령은 안희를 언니라고 불렀고, 안희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미령과의 관계에서 안희는 어떤 소속감과 안정감을 느꼈다. 나이가 몇 살 어린 친구라고 생각했다. 어디선가 걸려 온 전화를 받은 미령이 상대방에게 지금 친구랑 노는 중이라고 말했던 때부터인 것도 같았다. 그런 말들은 연장자가 하면 아무것도 아닐지 모르지만 나이가 어린 쪽에서 하면 꽤 근사하게 들린다. 안희가 보기에 미령은 근사한 것을 많이 가진 사람이었다. 같이 노는 사이가 친구가 아니면 친구는 누구란 말인가. * 안희는 미령을 처음 본 순간을 기억했다. 혁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며칠 지나지 않은 날이었다. 학교에서 신입생 학부모를 대상으로 하는 설명회가 열렸다. 3월 초, 아직 스웨터 아래 히트텍을 벗기 힘든 날씨였다. 안희는 두꺼운 머플러를 동여매고 그 속에 얼굴 절반을 파묻은 채 강당으로 갔다. 교장과 교감, 교무부장으로 이어지는 긴 인사말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마지막에 학생부장이 연사로 나와 학교 폭력의 사례에 대해 설명했다. 휘말리지 않는 것만이 중요하다고 그가 열변을 토했다. 행사가 끝나자 안에 있던 학부모들이 일제히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참석자는 전원 여자였다. 그런 곳엔 언제나 엄마들뿐이었다. 교정 여기저기에 삼삼오오 느슨한 원들이 여럿 만들어지고 있었다. 안희는 곤혹스러웠다. 동네에서 유치원에 보내는 동안 알게 된 얼굴들도 꽤 눈에 띄었지만, 그들과 자신이 정말로 아는 사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막 형성되고 있는 그 원에 쓱 끼어들 만한 숫기도 의지도 없었다. 아무도 눈여겨보
- 관리자
- 2025-03-01
이름 쓰기 문지혁 1 1994년 봄에 저는 중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제가 다니던 방배중학교는 서초구 반포동 서래마을 언덕 위에 위치한 학교로, 작고 아담한 운동장을 지닌 곳이었습니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즈음, 아마도 4월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수업 중에 갑자기 앞문이 열렸습니다. 평상시에는 대체로 일어나지 않는, 뭔가 급박한 사정이 있을 때 생기는 일이지요. 문지혁, 나와. 저를 호명한 사람은 학생주임 선생님이었습니다. 머리가 꽤 많이 벗겨진 데다 웃을 때마다 묘하게 시선을 사로잡는 치열 때문에 〈개구쟁이 스머프〉에 등장하는 ‘가가멜’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분이었지요. 본업은 음악 교사였습니다. 주무기는 끝을 다듬은 하키채였고요. 당시 선생님들에게는 저마다 그런 것들이 있었으니까요. 과거형과 과거 완료형의 차이를 가르치던 영어 선생님이 말을 멈췄습니다. 졸던 아이들이 눈을 떴습니다. 체크무늬 양복을 입은 학생주임 선생님이 저를 손으로 지목했습니다. 저는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저에게 쏠렸지요. 학생주임 선생님이 기다리고 있는 앞문으로 곧장 나가야 할지, 아니면 뒷문으로 돌아 나가야 할지를 두고 아주 잠깐 고민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수업 중인 영어 선생님께 실례가 되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뒷문으로 나가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제가 복도로 나가 뒷문을 닫자 학생주임 선생님도 앞문을 닫고 먼저 걷기 시작했습니다. 설명은 없었습니다. 선생님은 계단 쪽으로 걸어갔고 저는 우리가 교무실로 향한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직감했습니다. 당시 저에게 교무실은 익숙한 공간이었습니다. 어떤 친구들은 교무실에 가는 것을 지옥문을 여는 것처럼 두려워하기도 했지만 저는 아니었습니다. 저는 언제나 반장 혹은 부반장이었고 전교 학생회의 임원이었으며 선생님들에게 사랑받는 모범생이었으니까요. 심부름을 비롯한 다양한 용건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교무실에 드나들 때가 많았고 그때마다 선생님들은 하나같이 저를 따뜻하고 다정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네가 문지혁이구나. 용무를 마치고 나면 몰랐던 선생님도 제 초록색 명찰에 새겨진 하얀 이름을 눈여겨보며 말했습니다. 마치 도감 속에 나오는 동물을 실제로 본 어린아이처럼요. 이번엔 무슨 일일까? 교실이 있던 3층에서 교무실이 있는 1층까지 내려가는 길에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갑작스러운 부름이라면 매우 중대한 일이거나 아주 급박한 이유일 거라고 짐작했죠. 이를테면 상을 받는다거나, 학교 대표가 되었다거나, 당장 저를 필요로 하는 일이 있다거나··· 그것이 나쁜 일일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이 계단을 다 내려가면 제가 전혀 짐작도 하지 못한,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한 어떤 엄청난 일이 일어날 거라는 사실을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제 만으로 겨우 열넷인 소년에게 세계란 그토록 단순하고 안온하며 순진한 것이기 마련이니까요. 학생주임 선생님이 교무실 문을 여는 순간, 저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 관리자
- 2025-03-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