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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 작성일 2005-08-19
  • 조회수 3,699

 

정지아


이십구 분, 더 이상 기다려 줄 생각은 없었다. 토요일 오후의 호텔 커피숍은 특급 호텔다운 품위라곤 눈곱만큼도 찾을 수 없이 북적거렸으며, 사람들마다 뿜어 대는 체온을 지나치게 고려하여 에어컨을 최대한 틀어 놓은 덕분에 나는 아랫배가 살살 아프기 시작했다. 도대체 현대 문명의 편리에 적응할 줄을 모르는 촌스러운 몸으로 인해 나는 여름마다 감기와 배탈로 죽을 맛이었다. 게다가 오늘은 올 여름 최고의 더위라고 했다. 지하 주차장에 세워 놓았는데도 차안은 찜통이었고, 시동을 걸고 에어컨이 작동하는 동안 몸은 이미 땀에 젖었다. 에어컨 바람을 견딜 수 없어 방향을 틀어 놓으면 땀이 솟았고, 내 쪽으로 바람이 오게 하면 이번에는 배가 아팠다.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여고 동창을 만나러 나온 것부터가 한심한 선택이었다. 이름도 모르는 동창생이 일곱 번이나 전화를 걸어오지 않았다면 절대 만나러 나오는 일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꽉 막힌 토요일 오후의 정체 구간을 운전해 오는 내내 나는 전화번호를 일러 준 출판사 직원을 원망했다. 저번에는 상대가 남자라는 이유로 전화번호를 끝내 알려 주지 않아 중요한 일을 어긋나게 하더니 엉뚱한 여고 동창생에게 알려 주는 바람에 삼복더위에 한바탕 곤욕을 치르고 있는 것이었다. 때마침 호텔에 닿기 직전 그 출판사 직원의 전화가 걸려 왔고, 내친김에 서너 마디 불평을 토로했더니, 이제 겨우 서른이 된 그녀는 거의 울먹거리며 물었다.

“그럼, 남자에게만 알려 주고, 여자에게는 절대 알려 주지 말까요?”

헛웃음이 나왔다. 마음 같아서는 아무에게도 알려 주지 말라고 하고 그냥 전화를 끊고 싶었으나 한동안 보지 않을 수 없는 관계여서 나는 제 발등 제가 찍은 꼴로 그녀의 마음을 풀어 주는 수고로움까지 감당해야 했다. 차라리 말이나 말 것을.

발레 파킹은 어쩐지 부르주아 냄새가 나는 듯하여 몇 번이나 망설인 끝에 직접 주차장에 차를 댄 후 땡볕 속을 백여 미터나 걸어 로비에 들어선 순간, 이번에는 그 여고 동창생의 번호가 액정 화면에 떴다.

“어머, 어떡하니? 차가 너무 밀린다 얘. 한 십 분만 기다려 줘. 더 늦지는 않을 거야. 거기 커피숍 에어컨 빵빵하니까 잠깐 쉬고 있어. 알았지?”

그 정도의 실례를 해도 아무 상관없는 절친한 친구인 양 동창생은 호들갑을 떨며 제 용건만 말하고는 툭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는 삼십 분이 다 되어 가도록 연락조차 없는 것이다. 전화를 해볼까 싶었으나 가만 생각하니 차라리 다행이었다. 유년기에 대해서든 성장기에 대해서든 나는 별로 관심이나 애착이 없었다. 나를 그저 참한 모범생 정도로나 아는 동창생들과 마주 앉아 있어 봐야 나올 이야기는 뻔했고, 추억담이 끝나고 나면 양념처럼 뒤따라 나올 일상사도 뻔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정확하게 삼십 분이 되면 일어나야지 생각한 찰나, 한 남자가 입구에 나타났다. 누군가를 찾는 것인지 남자는 카운터 앞에 서서 커피숍의 내부를 왼쪽에서부터 찬찬히 훑기 시작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막 오십 줄에 들어섰을 것으로 보이는 남자는 야위었는데도 복어처럼 아랫배만 불룩 튀어나와 기이한 느낌을 주었다. 시선을 돌리려던 나는, 이제 홀의 중앙을 훑느라 정면으로 향한 그 남자의 얼굴을 온전히 보게 되었다. 찌푸린 미간 사이로 내 천(川)자 모양의 굵은 주름이 선명했다. 그러고 보니 무엇을 볼 때마다 두 눈을 가느스름히 모으고 미간을 찌푸리는 버릇도 낯익었다. 이제 가운뎃손가락으로 왼쪽 안경테를 밀어 올리겠군, 생각했고 남자는 줄 인형이기나 한 듯 내 생각에 따라 그대로 움직였다. 윗입술보다 배는 두툼한 아랫입술을 신경질적으로 쑥 내밀고 있는 그는, 중학교 일 학년 이후로 보지 못한, 그러니까 삼십 년 가까이 보지 못한 막내 외삼촌이었다. 지난 삼십 년 동안 나는 수십, 아니 수백 번, 때로는 밤새도록 잠 못 이루며 이런 순간을 상상하고 또 상상했었다. 호텔 커피숍에 정장, 이만하면 삼십 년 만의 재회를 위한 조건으로는 제법 괜찮다고 할 만했다.  

정확히 삼십 분이 지났다. 어차피 나올 생각이 없었던 자리였으니, 그쪽 사정이 어찌되었든 나로서는 최선의 예의를 표한 것으로 충분했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나로부터 형성된 자장이 그에게 닿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내 쪽을 향해 있던 그의 시선이 당연히 나에게 집중되었다. 그러나 내 기대와 달리 그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 찾고 있는 사람이 여자가 아닌 모양이었다. 어떤 사람의 시선이라도 붙들 만한 매혹적인 외모를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난생처음,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나는 뒤돌아서서 똑바로 그를 향해 걸었다. 내가 시야를 가렸는지 그가 왼쪽으로 두 걸음 움직였다. 나 역시 목표 지점을 변경했다. 이제야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챘는지 그가 왼쪽 안경다리를 올리며 나를 보았다. 이쯤에서 그가 나를 알아보기를 나는 바랐다. 아무리 성장기의 어린아이였다고 해도 나는 까무잡잡한 피부며 집중해서 남을 쏘아보는, 그래서 초면의 사람들에게 건방지다는 소리를 듣곤 하는 날카로운 시선, 그런 인상을 더 두드러지게 하는 날렵하다 못해 얍삽한 턱 선과 특이하게 두드러진 광대뼈까지 유년의 흔적을 고스란히 유지한 채 성장했으며, 불행하게도 4분의 1의 유전자를 공유한 탓에 그와 남매지간이라거나 혹은 부녀지간이라고 해도 누구나 믿을 만한 외모를 갖고 있었다. 설령 내가 친가의 유전자만 물려받았더라도 그는 나를 알아보아야 했다.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그는 한때 나를 지독히 예뻐하여, 방학이면 온갖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아침저녁으로 코피를 쏟으면서도 저 남도의 끝까지 달려와 단 하룻밤 자고 가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세월이 지나 나 역시 그를 마음에서 지웠지만 그와 함께 했던 특별한 시간들만은 어떻게 해도 지울 수 없었다. 여름방학과 겨울방학, 일 년에 딱 이틀, 당시의 나는 그 시간으로 인해 363일을 견뎌 낼, 아니 기쁘게 살아갈 힘을 얻었던 것이다. 그 시간을 지운다는 것은 그러니까 내 유년을 송두리째 걷어  낸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그와 내가 외삼촌과 조카라는 혈연의 끈을 뛰어넘어 영혼으로 맺어지던 순간을 나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때 나는 마른버짐 허옇게 일어난 얼굴로 하루 종일 사서 혼자 지키고 있는 군립도서관에 처박혀 아무 책이나 닥치는 대로 읽어 대던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그날 나는 사서의 땀만 식혀 주느라 탈탈거리는 신일 선풍기 소리를 배경 음악으로 『개선문』과 『노인과 바다』를 읽어 치웠다. 제 아무리 어른인 척 눈을 치깔고 같은 또래의 어린애들을 코웃음으로 조롱한다고 해도 아이는 아이여서 나는 저 『개선문』의 낭만에 쉽게 빠져 들었다. 어둠에 잠긴 개선문 앞에서 칼바도스를 한 잔 마시고 싶어 나는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 지루한 여름 해가 지려면 당당 멀었는데 도서관 문 닫을 시간이 되었고, 그 문을 열고 나가면 지리산의 붉은 노을을 등진 채 바바리코트 깃을 세운 라빅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칼바도스 한 병을 불운한 운명인 양 품에 안은 채. 기왕이면 태풍 직전의 소용돌이치는 바람이 불고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문을 열었지만 기다리는 것은 온종일 햇볕에 달궈져 기포가 퐁퐁 솟아오르는 검은 아스팔트뿐이었다. 나는 고무신으로 아스팔트의 기포를 터뜨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녹은 아스팔트가 자꾸 내 신발을 잡아당겼는데, 나는 삶이라는 지옥이 이렇듯 내 인생을 잡아당기는 거라는 생각에 지독하게 우울했다. 고작 열한 살 주제에.

열린 대문으로 들어섰을 때 한 남자가 우물 앞에서 윗옷을 벗은 채 등목을 하고 있었다. 시골 사람들과 달리 새로 바른 창호지처럼 뽀얀 등을 한 손으로 어루만지며 촌스러운 주황색 플라스틱 바가지로 물을 끼얹고 있는 사람은 물론 어머니였다. 내가 태어나자마자 죽어 버리는 바람에 아버지 얼굴도 알지 못했던 나는, 나라는 존재만으로는 충족되지 않는 어머니의 여자로서의 삶에 대해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며, 조용히 그 불륜(아버지가 없었으니 불륜이랄 것도 없겠지만)의 현장을 지나치려 했다. 그런데 그 남자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싱긋 웃으며 물었다.

“도서관 다녀오니?”

강원도 억양이 희미하게 묻어나는 남자의 서울말과, 어머니를 쏙 빼닮은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나의 섣부른 판단에 조금 당황했고, 그 이상으로 기분이 좋아졌다. 나이로 보아 서울대학 다닌다는 막내 삼촌이 분명했고, 서울대학생을 처음 본 나는 대문으로 들어서기 직전까지 나를 매료시켰던 라빅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라빅은 너무 멀었으나 서울대생 삼촌은 내 눈앞에 있었던 것이다. 삼촌은 어머니가 등을 닦고 나서 건네준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물었다.

“넌 친구들이 없니? 매일 도서관에만 다닌다면서?”

어머니가 쓸데없는 걱정을 한바탕 늘어놓은 것이 분명했다. 백 점짜리 시험지를 안겨 줬으면 됐지 덤으로 다정한 친구들까지 선물할 만큼 착한 어린이가 되고 싶지는 않았을 뿐이었다. 무엇보다 어머니가 좋아할 친구가 되어 줄 그것들은 그야말로 철딱서니 없는 열한 살짜리 악동에 불과했다. 가능한 한 강렬하고 멋진 첫인상을 심어 주고 싶었던 나는 미리 훼방한 어머니에게 빈정이 상하여 왼쪽 입 꼬리를 치켜 올리며 살짝 코웃음을 웃었다. 너무 건방져 보이지는 않도록, 적당히 니힐하고 적당히 냉소적으로 보이도록 나는 웃음의 강도를 조절하는 데 꽤 신경을 썼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어쩌자고 그 순간에 어설픈 서울말이 튀어나왔는지, 나는 자존심이 상했다. 삼촌이 쿡쿡 웃음을 참으며 다시 물었다.

“그럼 뭐가 중요한데?”

가급적 말을 하지 않으려 나는 가운뎃손가락으로 내 머리통을 톡톡 두드렸다. 웃통을 벗은 채 머리를 잔뜩 뒤로 젖힌 삼촌은 시원한 웃음을 분수처럼 내뿜었다. 소설에는 분홍빛 유두, 라고 쓰여 있었지만 분홍이라기보다 흰 돼지 껍질과 비슷한 삼촌의 젖판에 긴 털이 한 가닥 솟아 있었다. 어쩐지 나는 가슴이 뛰었다. 가슴 두근거리며 나는 삼촌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 말에 따라 친구로 삼아 줄지 말지 결정할 생각이었다. 삼촌은 우물 가장자리에 걸쳐 놓은 윗옷을 입으며 말했다.

“가자.”

“어디?”

“네가 제일 좋아하는 데가 어디야?”

아이라는 것을 성가신 파리 정도로나 취급하는 것이 내가 알건대 어른이라는 족속이어서 네가 좋아하는, 이런 말 따위를 입에 담는 법이 없었다. 그 순간 삼촌은 내게 다가와 꽃이 되었다.

내가 삼촌을 데려간 곳은 8월 중순인데도 벌써부터 가는 길에 내 키만 한 코스모스 만발한 섬진강도 아니고, 섬진강보다 작기는 하지만 휘돌아 흐르는 모양이 조신하고 애잔한 서시내도 아니고, 북문통의 구정물이 모여드는, 이름조차 없는 실개천 가였다. 거기 사람들이 오가는 작은 다리가 하나 있고, 나는 종종 그 다리 아래 드러누워 시간을 보내곤 했었다. 모서리가 떨어져 나간 조악한 시멘트 계단을 내려가면서 삼촌은 일단 코를 킁킁거렸고, 여기는 왜, 하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일단 아무도 없잖아. 이런 데 오는 사람은 없거든. 나밖에는.”

나밖에는, 이 대목에서 삼촌은 귀여워 미치겠다는 듯 다시 쿡, 웃으며 물었다.

“그리고?”

그리고 그 뒤는 설명하기 어려웠다. 강폭 넓고 물 맑은 섬진강 가에 앉아 있으면 머리와 마음이 깨끗하게 비워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썩어 가기 시작한 실개천은 그 견딜 수 없는 냄새처럼 무수한 생각을 들끓게 했다. 내 머릿속이 터져 나갈 만큼 생각들이 끓어오르는 느낌이 나는 좋았다. 그런 느낌을 말로 표현하기도 어려웠지만, 사실 나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가 처음 보는 서울대생 삼촌이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볼까 봐 두려웠다. 내가 대답하지 않자 삼촌이 먼저 말했다.

“음, 그리고 여기 오면 사람 사는 냄새가 나겠지. 너는 사실은 사람들 속으로 걸어가고 싶은 거야. 그렇지?”

만점은 아니어도 구십 점 정도는 너끈히 받을 수 있는 분석이었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너무 정곡을 찔린 터라 나는 놀랐다. 역시 서울대생은 다르구나, 생각하며 나는 묵묵히, 내가 늘 앉던 자리에 앉아 발부리의 돌멩이를 툭툭 걷어찼다. 처음 보는 삼촌은 내 옆에 앉아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머니 외에는 아무도 쓰다듬어 준 적이 없던 내 짧은, 사내 아이 같은 머리카락을 한없이 다정하게.

“돌멩이 따위나 걷어차고 있어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 네가 정말로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세상 속으로 씩씩하게 걸어가야만 해.”

그리고 삼촌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작은아버지나 사촌 오빠들과 달리 길고 하얗고 보들보들해 보이는 손이었다. 내가 도와줄게, 라고 삼촌이 말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그런 말을 들은 것 같았고, 삼촌이 내미는 손을 잡았다. 

이듬해 겨울, 어머니는 나를 서울로 전학시켰다. 시골 읍내에서도 제때 육성회비 내기 힘든 나를 굳이 서울로 불러올리고, 자기가 가정교사로 일하던 집에 어머니를 외주 가정부로 취직시키고, 내 자존심이 상할까 봐 그것을 철저하게 비밀에 부친 것은 당연히 삼촌이었다. 삼촌에게 등 떠밀려 나는 조심조심 세상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내게 손 내밀어 세상으로 끌어올린 그 남자는 삼십 년 만에 내가 자신의 레이더 안에 스스로 포착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자신의 시야를 방해하며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나를 저건 뭔가 하는 눈빛으로 한 삼 초쯤 보았을 뿐이었다. 필요한 일이 아니면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는 것은 외갓집의 핏줄 내력이었다. 삼촌이라는 호칭을 부른 지 너무 오래되어 이제는 그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배 볼록 나온 오십 대 남자 앞에서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남자는 중복이 막 지난 한여름인데도 정장을 입고 있었으며, 정장 안으로 보이는 흰 와이셔츠는 푸른빛이 슬몃 감돌도록 새하얬다. 그는 열세 명의 식구가 단칸방에 옹기종기 모여 살던 시절에도 잠을 줄여 가며 흰옷을 하얗게 빨아 입는 결벽증이 있었다. 결벽증의 유전자는 상당히 집요한 모양인지 그 피를 살짝 이어받은 나 역시 다르지 않았다. 어쩌면 그와 나의 삶을 가른 것은 중학교 일 학년의 어느 봄날에 있었던 사소한 사건이 아니라 결벽의 대상이 다르다는 근원적인 차이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더러운 것, 누추한 것을 참지 못하고 새 와이셔츠와 같은 세상을 동경했다. 나 역시 처음에는 그와 같은 것을 가슴에 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끝내 내 바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벗어나려  할수록 그것은 내 발목을 붙잡았고, 결국 나는 그토록 벗어나려 했던 지난날의 누추를 발가벗겨 이른바 소설이라는 것을 쓰면서 밥벌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삼촌이 열어 준 문을 통해 나는 서울이라는 공간으로 표상되는 세상으로 걸어 나왔다. 서울은 어린 나에게 추한 것과 멋진 것, 새로운 것과 빛나는 것, 이 모든 것들이 뒤섞여 들끓는 용광로와 같았다. 서울에는 더 많은 책이 있었고 친구로 삼아 줄 만한 아이들도 더러 있었다. 대신 어머니와 나는 집을 잃었다. 집, 이라는 것은 있을 때는 몰랐지만 생각보다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었다. 시골 살 때 나는 내 인생이 진흙탕 속으로 꿈틀꿈틀 파고든 미꾸라지와 같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은 파들어 갈 바닥도 없을 테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가난이든 슬픔이든 세상 어떤 일에도 턴 하고 돌아설 바닥 같은 건 없다는 것을 몰랐던 무지의 소치였다. 내 삶이란 시작된 그 순간부터 탯줄처럼 가난과 연결되어 있었음에도 서울에서의 가난에는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이를테면 서울에서의 내 삶은 누구나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투명한 유리 집과 같았다, 라는 표현이 상징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그러나 그건 상징이 아니라 너무도 명료한, 확고부동한 사실이었다.

삼촌이 기꺼이 시간을 투자해 얻어 놓은 연신내 전세방은, 삼촌 말에 따르면 학군 좋고 어머니가 일할 곳과도 가깝고, 무엇보다 시골 우리 집을 팔아 마련한 몇 푼 되지 않는 푼돈으로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고 했다. 주인집과 벽 사이에 지붕을 잇고, 반투명의 두꺼운 비닐로 막아 놓은 그곳은 바닥과 천장이 있어 집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몰랐으나, 외부와 완전히 차단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결코 집일 수 없었다. 반투명 비닐 사이로 참으로 볼품없는 부엌의 세간까지 고스란히 드러났던 것이다. 물론 그 집은 이웃집과 연결된 쪽의 벽에 붙어 있어 주인집 사람들조차도 잘 드나들지는 않았다. 그래도 우리 집 부엌 문 바로 앞쪽으로 나와 같은 나이인 주인집 아들 방의 창문이 나 있었다.

집이라고 불러도 좋을지 모를, 한 번도 집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는 그 집에는 화장실이 없었다. 주인집은 열 시만 되면 온 식구가 잠자리에 들었고, 열 시 이후에는 우리는 똥 같은 건 싸지 말아야 했다. 그러나 지독히 불운하게도 나는 그 무렵 장염을 앓고 있었다. 장염은 일 년 넘게 계속되었고, 나는 한밤중에도 몇 차례나 부엌을 드나들며 설사를 했다. 부엌 바닥에 신문지를 서너 겹 깔고 그 위에 엉덩이를 까내리고 앉아 있으면 한겨울에는 서툰 백정의 칼날처럼 엉덩이 살을 도려내는 듯한 찬바람이, 여름에는 내 엉덩이가 숯불 위에 올려진 고기인 양 노릇노릇 익을 것 같은 후끈한 열기가 밀려들었다. 혹 주인집 아들이 더위에 못 이겨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면 요즘 시대에나 어울렸을 참으로 엽기적인 퍼포먼스를 목격할 수 있었으리라. 사춘기에 접어들었던 나는 부엌 바닥에 똥을 싸면서 인간이라는 존재의 가장 비참하고 우스꽝스러운 바닥을 보는 느낌이었고, 세상 앞에 완전히 발가벗겨진 느낌이었으며, 이 순간에도 한 가닥 자존심을 버리지 못하는 내 자신이 우스웠고, 그래서 이제는 세상 무엇도 무섭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몸의 한 부분인 양 입가에 매달고 있던 냉소를 버리고 한없이 가벼워지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세상일이 작정한다고 작정한 대로 되는 것은 아니어서, 나는 내가 싼 똥 냄새가 밴 부엌에서 만든 콩나물국과 오이무침을 우걱우걱 씹어 먹으려 노력했지만, 내 몸은 그것들을 좀처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뭘 먹으면 늘 토했고, 배 속에 남아 있는 것이 없는데도 밤마다 똥을 계속 싸면서 나는 중학생이 되었다. 그때의 내게 삼촌은 단 하나의 피난처였다.

그 앞에 멈춰 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그의 눈을 응시했다. 그는 혹 아는 사람인가 싶었는지 고개를 약간 내민 채 내 시선을 맞받았다. 오십이 넘은 그의 얼굴은 주름이 조금 늘었을 뿐 나의 피난처였던 시절의 모습을 그대로 갖고 있었다. 양 눈썹 끝 부분에 보통 눈썹의 두 배쯤 긴 눈썹 대여섯 개가 비죽 나와 있었는데, 그것 역시 똑같았다. 그때의 나는 눈을 감고 손끝의 감각을 극도로 끌어올린 뒤 그의 얼굴을 더듬기를 좋아했었다. 골 깊은 인중과 찌푸리지 않아도 희미하게 느껴지는 미간의 주름 세 개와 긴 눈썹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다. 보통 사람보다 길고 깊은 인중을 쓸어내리고 있노라면 코로 내쉬는 삼촌의 숨결이 내 손가락을 간질였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그때처럼 움찔거리는 손가락의 욕망을 나는 간신히 눌러 참았다. 생각해 보니 삼촌은 나의 피난처였을 뿐만 아니라 나의 첫사랑이었다.

내가 중학생이 된 봄, 삼촌은 거의 매일 우리 집에 들러 어머니가 만들어 준 생미역무침을 한 접시 깨끗이 비운 후 삼십 분쯤 내 공부를 봐주고, 천호동 외갓집으로 돌아갔다. 그때 삼촌은 한 달간 무악재에 있는 서울여상에서 교생 실습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돌아가려고 일어서던 삼촌이 코피를 쏟기 시작했다. 몸 안의 모든 피를 쏟아 내고 새 피로 갈아 치우기라도 할 것처럼. 코피가 멈추기를 기다리는 동안 막차가 끊겼다. 삼촌에게도 어머니에게도 천호동까지 택시를 타고 갈 돈 따위는 물론 없었다. 삼촌이 맨바닥에 머리를 누이고 있는 동안, 나는 핏방울이 점점이 묻은 삼촌의 흰 와이셔츠를 깨끗이 빨아 널었다. 새하얀 와이셔츠의 깃이 너덜너덜 닳아 있었다. 와이셔츠를 탁탁 털어 물기를 빼면서 찔끔 눈물이 났다. 삼촌은 자신의 누추함을 감추기 위해 코피를 쏟으면서 안간힘을 쏟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면 닿고 싶어 하는 곳에 닿을 수 있을까. 푸르스름한 새 와이셔츠를 매일 갈아입을 수 있는 그런 날이 오면, 깊은 밤에도 우아한 수세식 변기에 앉아 제 바닥을 들여다보지 않을 수 있는 날이 오면, 부엌 바닥에 똥을 싸야 했던 참담한 시간을 말끔히 잊을 수 있을까. 삼촌은 몰라도 나는 그럴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유토피아가 나의 미래 속에 펼쳐진다고 해도 부엌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찬바람 맞으며 설사를 하던 유년의 내가 조금도 성장하지 않은 채 내 마음의 바닥에 웅크리고 있을 것 같았다. 코피를 쏟아 가며 탈출하려는 삼촌의 생이 안타까웠던 것인지, 삼촌과 나 사이의 서걱대는 간극을 막연하게나마 처음으로 감지한 슬픔 탓이었는지, 나는 눈이 빨개지도록 울었다.

그날 밤, 종일 남의 집 일에 치인 어머니는 하루의 노고를 풀어내듯 깊은 한숨을 서너 차례 몰아쉬고는 이내 코를 골기 시작했다. 서울에 온 이후 시작된 잠버릇이었다. 우리가 세 들어 사는 곳은 붉은 벽돌집이 똑같은 모양으로 들어선 도시 계획 단지였다. 집마다 나무 댓 그루 설 만한 작은 화단이 있었고, 그곳에는 어김없이 백목련 한두 그루, 라일락 한두 그루가 심어져 있었다. 5월이었고, 밤이 깊을수록 들큼한 라일락 향기가 어둠처럼 진해졌다. 들큼하기로 따지자면 아카시아 꽃도 못지않았지만, 서울에서 처음 본 라일락은 서울처럼 유혹적이라 코를 막지 않으면 그 냄새에 취할 것만 같았다. 몇 백 미터나 떨어진 곳에서도 나는 라일락 향기를 느꼈고 그때마다 코를 싸쥐며 있는 대로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데 그날 밤에는 진한 라일락 향기가 초가집 지붕 위에 살풋 얹힌 초승달처럼 다정하고 감미로웠다. 나는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조심 모로 돌아누워 삼촌을 껴안았다. 원래 크지 않은 체격이기도 하지만 삼촌의 몸은 아무리 솜씨 좋은 백정도 살 한 점 발라 낼 수 없을 정도로 앙상하게 말라 내 품에 쏙 들어왔다. 아주 천천히 나는 삼촌의 어깨뼈와 쇄골을 어루만졌다. 그 뼈를 따라 고단한 삶의 슬픔이 흘러내리는 듯했다. 내 심장 박동이 점점 빨라졌다. 화음을 맞추듯 삼촌의 심장도 내 박동을 따라왔다. 와이셔츠처럼 희긴 하지만 축 늘어진 러닝셔츠 밑으로 나는 불쑥 손을 집어넣었다. 내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충동이었다. 삼촌의 배가 움찔하며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잠든 것인지 잠든 척하는 것인지 삼촌은 나를 제지하지 않았다. 꼬물거리며 삼촌의 가죽만 남은 배를 쓰다듬던 내 손은 마침내 언젠가 보았던 분홍빛 유두에 닿았다. 자두 씨만 한 젖판을 숙주로 삼아 피에로의 눈물처럼 비죽 솟은 긴 털 한  가닥을 오래도록 어루만졌고, 그동안에 삼촌과 나의 숨이 똑같이 오르내렸으며, 하나가 된 둘의 심장 박동을 자장가 삼아 나는 잠이 들었다. 그것이 전부였지만 그것은 분명 금기를 뛰어넘은, 누군가 근친상간이라고 해도 별로 대꾸할 말이 없는 행위이긴 했다. 그날 밤 이후 몸이라도 섞은 연인처럼 삼촌이 살가웠던 것을 보면 나는 참으로 발칙한 아이였던 모양이다. 삼촌 또한 그날 밤의 일을 잊지 못했을 거라고 나는 굳게 믿었다. 나는 잊더라도 제 가슴을 파고든 열세 살짜리 계집애의 손길을 어찌 잊겠는가 하고.

그날 밤의 사건만으로도 그는 나를 기억했어야 한다. 그랬다면 나는…… 어찌했을까. 작정을 하고 그 앞에 멈춰 서긴 했지만 뜨악한 그의 시선이 라일락 향기 분분하던 그날 밤처럼 조금은 훈훈하게 덥혀진 내 마음을 차갑게 식혔다. 저, 윤미예요, 삼촌. 다가가는 동안 수없이 마음속으로 되뇐 그 말을 나는 끝내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김상철 씨, 아니세요?”

김상철이란, 대학 시절 오래 사귄 남자의 이름이었는데, 순간적으로 내 입에서 나온 것은 뜬금없이 지금은 얼굴조차 희미한 그 남자의 것이었다. 삼촌은, 그러니까 그는 여전히 아랫입술을 쑥 내민 채 무뚝뚝한 표정으로 대꾸도 없이 고개만 저었다. 그리고 찾을 사람을 찾은 것인지, 아니면 빈 자리에 가 앉기로 한 것인지 나를 지나쳐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이제 돌아서서 삼촌, 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도 그랬다. 중학교 일 학년의 봄, 그 은밀한 밤이 있고 난 며칠 후에도.

그날 나는 연신내 개천가를 따라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세상 만물이 봄의 생기를 얻어 한껏 물이 오르자 저 또한 무슨 꽃이라도 되는 줄 아는지 개천은 짙어 가는 봄빛만큼이나 강렬한 악취를 피워 올렸다. 여기저기서 복개 공사가 한창이었고, 그해 가을이면 시궁창이나 다름없는 개천은 영원한 어둠에 가리게 될 터여서, 나는 조금은 처연한 기분으로 기꺼이 악취를 들이마셨다. 사거리 육교를 건너면 바로 미도파 백화점이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을 닫은 백화점은 그 무렵 마지막 발악으로 온갖 가판대를 만들고 직원들을 앞세워 물건 팔기에 여념이 없었다. 백화점을 통과하는 것이 지름길이었으므로 나는 여느 때처럼 백화점으로 들어섰다. 맨 앞 가판대에서 양복을 입은 이십 대의 젊은 남자가 팔고 있는 것은 그때 돈으로 한 봉지에 오십 원쯤 했던 온갖 꽃씨들이었다. 채송화며 분꽃, 봉숭아. 나는 나도 모르게 그 가판대 앞에 멈춰 섰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어린것들이라고 비웃었던 고향 친구들의 얼굴이 그 순간 하나씩 스쳐 갔고, 어머니가 집 안은 물론이고 담장을 빙 둘러 심어 놓았던 코스모스, 붓꽃, 맨드라미들이 정겹게 떠올랐다. 서울에 오니까 꽃모종 심을 땅 한 뼘 없노라고 한숨을 내쉬던 어머니의 쓸쓸한 모습도. 나는 꽃 사진이 전면에 담긴 꽃씨 봉투를 한참이나 만지작거렸다. 이상한 느낌에 고개를 들자 점원이 나를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내가 훔치기라도 할까 봐 감시를 하고 있는 듯했다. 그럴 만도 하게 나는 물려받은 크고 낡은 교복 차림에, 여전히 깡마른 얼굴에는 마른버짐이 군데군데 피어 있었으며, 누가 봐도 영양실조임이 분명하게 얼굴빛이 싯누렜다. 영락없이 도둑으로 보는 듯한 그 시선이 나를 얼마나 깊은 나락으로 떨어뜨렸는지, 그 남자는 물론 몰랐을 것이다. 나는 빤히 남자를 쳐다보면서 꽃씨 세 봉지를 주머니에 넣고 돌아섰다. 당연히 세 걸음도 가지 않아 남자에게 목덜미를 붙잡혔다. 몇 푼 안 되는 것이라 그랬는지 너무 당돌해서 그랬는지 점원은 상부에 보고하지는 않고 내 주머니에서 꽃 봉지를 꺼낸 뒤, 가판대 옆에서 한 시간 동안 무릎을 꿇은 채 손을 들고 있게 했다. 무수한 발들이 멈칫거리며 내 머리통을 내려다보고 지나갔다. 그 중엔 나를 아는 아이도 있었다. 어머머, 쟤 윤미 아냐? 흥, 공부 잘한다고 새침 떨고 다니더니 순 도둑이었잖아. 그 순간 나는 빳빳이 고개를 들었다. 평소 말 한 번 주고 받은 적 없는 우리 반 아이들 둘이 지레 당황해서 내 시선을 피하며 뒷걸음쳤다. 하필 그때 삼촌이 나처럼 촌각을 다퉈 빨리 우리 집에 가려고 백화점 안으로 들어서지 않았다면, 뒷걸음치던 친구들과 부딪쳐 고개를 들게 되고, 그리하여 나를 보지 않았다면, 그날의 사건은 아릿한 슬픔 정도로 기억에 남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삼촌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고, 싸늘하게 굳은 시선을 황급히 피했으며, 우리 집에 가는 길임이 분명했으나 집에는 가지 않았다. 그날 어머니는 삼촌이 좋아하는 생미역을 한 접시 그득 담아 놓고 몇 번이나 문밖을 들락거리며 저녁때를 늦추었다. 나는 삼촌이 다시 오지 않을 것을 알았다. 우리 막둥이는 에레서 질바닥에 돈이 떨어져 있어도 줍들 안 했어야.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무슨 대단한 무용담인 양, 하고 또 하던 말을 생각하면서 나는 삼촌을 위해 무친 생미역 한 접시를 꾸역꾸역 먹어 치웠다. 내 예상대로 삼촌은 다시는 우리 집에 오지 않았다.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안디, 노상 밥 묵고 간다고 나가 혹 섭섭하게 했다냐 어쨌다냐. 속 모르는 어머니만 서운해서 자기 탓을 하다가 나중에는 빌어묵을 놈이 설령 그랬기로서니 고로코롬 야멸차게 발길을 딱 끊어야, 하며 삼촌을 원망했다.

보지 않은 긴 세월 동안, 삼촌은 대학 졸업과 동시에 행정고시에 합격하고, 유학을 다녀오고, 서른하나라는 젊은 나이에 자기가 졸업한 대학의 부교수가 되었다. 그의 행적은 외가 식구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회자되었고, 얼굴을 보지 못한 나 역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곁에서 지켜본 듯이 꿰뚫고 있었다. 사람들은 보기만 하면 네 막둥이 외삼촌만큼만 되라고 주문을 외웠다. 그러나 나는 삼촌이 손들고 서 있는 나를 외면하고 돌아선 순간부터 삼촌이 가는 길을, 삼촌이 내게 가라고 했던 길을 버렸다. 나는 용서할 수 없었다, 단 한 번의 실수로 냉정하게 돌아선 그를. 왜 그랬느냐고 한 번만 물어 주기를 얼마나 간절하게 바랐는지 모른다. 그러면 나는 가정부인 무학의 편모슬하에서 사는 일의 쓸쓸함을, 참고서조차 중고로 사야 하고, 책 한 권 마음대로 살 수 없고, 전축도 녹음기도 심지어는 라디오도 없어 어떤 음악조차 들을 수 없는, 내가 발 딛고 선 생의 이 비루함을, 엉엉 눈물이라도 쏟으며 털어놓고 싶었다. 삼촌에게.

아주 먼 훗날에야 그랬어도 소용없었을 것임을 나는 깨달았다. 대학생이 된 후 잠시 운동 판을 기웃거렸는데, 정보기관에서 국립대 교수인 삼촌에게까지 연락을 한 모양이었다. 공부 못해서 후줄근한 대학 갔으면 죽어라 공부나 할 일이지 데모는 무슨 데모냐고, 삼촌은 오랜만에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닦달을 했다. 어머니에게 회초리를 맞으면서 나는 그간의 삼촌에 대한 원망과 미움까지를 모두 버렸다. 똑같은 폐허에 서 있긴 했으나 삼촌과 나는 너무 다른 곳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삼촌이 꿈꾸던 곳, 그토록 꿈꾸어 무사히 안착한 그곳으로 나는 가고 싶지 않았다. 거기 삼촌이 예전처럼 환하게 웃으며 팔 벌리고 서 있다 해도. 나는 지금으로부터 십오 년 전, 신문을 보다가 글쓴이의 이름과 첫 문장만 보고도 그 칼럼을 쓴 자가 삼촌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구걸이라고 말해도 별로 지나치지 않을 세상에 대한 애틋한 동경이 첫 문장 안에 너무도 여실히 담겨 있었다. 처음으로 나는 삼촌을 비웃었고, 그만큼 삼촌으로부터 벗어났지만, 밤새도록 독한 담배를 피운 뒤끝처럼 기분은 씁쓸했다. 그날 나는 혼자서 소주 한 병을 마셨다. 내게는 거의 치사량이었다. 독한 약을 먹고 몇 날 며칠 쓰러졌다가 혼곤한 잠에서 깨어난 듯 그날 이후 삼촌은 더 이상 내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르지 않았다.

원망과 미움을 완전히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만은 않았던 것인지 삼촌의 무거운 발소리가 멀어지는 동안 중학교 일 학년의 그날 오후처럼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의 걸음이 멈추고 어디쯤에 앉기 위해 의자를 빼는 소리가 들렸다. 한꺼번에 마구 솟구친 기억들로 머릿속이 시장 바닥처럼 혼란스러웠다. 그를 뒤로 한 채 커피숍을 나가야 한다는 생각만 분명했다. 계산을 하고 로비로 막 나서려는 찰나 핸드백 안에서 휴대 전화가 울렸다. 삼십 분이나 늦은 여고 동창생이었다.

“나야, 서인숙. 아무래도 오늘은 안 되겠다. 내가 마음의 준비가 되거든 그때 보자. 뭐 이 정도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아무튼 미안하게 됐다.”

마음의 준비가 되거든, 이라는 대목에서 불쑥 갈래 머리 여고생의 얼굴이 거짓말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때도 그 아이는 그랬다. 내가 마음의 준비가 되거든, 고등학교 일 학년인데도 핀컬 파마를 했던 그 아이 서인숙은 교내 백일장에서 시 부문 장원을 했다. 전년도 어느 대학 백일장에서 장원한 다른 학교 학생의 작품을 표절했다는 것이 밝혀져 유기 정학에 처해지긴 했지만. 하필이면 그 사실을 가장 먼저 안 것이 나였다. 그 아이가 신춘문예에 등단이라도 한 시인인 양 온갖 유세를 떨지만 않았다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참아 주기가 어려울 지경으로 유세를 떤 데다 문예반 선배가 정말 좋은 시라며 극찬을 하기에 나는 그거 베낀 건데, 꼭 한 마디를 했을 뿐이었다. 문학이 종교나 되는 듯 신성하게 여기던 문예반 선배는 당장 그 아이를 불러올렸다. 야단을 치자 고개 빳빳이 쳐들고 증거 있냐고 맞고함 치던 서인숙은 다음 날 선배가 어렵사리 구해 온 다른 학교의 교지를 보고서야 고개를 숙였다. 흥분한 선배는 학교에 알리겠다고 통보했다. 서인숙은 내가 마음의 준비가 되거든, 그때…… 제발 부탁해요, 라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래도 선배는 용서할 마음이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고, 결국 학교에 통보했지만, 우리들 중의 누구도 그 아이를 동정하지 않았다. 같은 반이었던 서인숙이 한 달의 유기 정학이 끝난 후 학교로 돌아왔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하기야 서인숙에 대한 기억은 오직 그 사건과 관련된 몇 장면에 불과했다.

서인숙은 이번에도 제 말만 하고는 내 답변 같은 것은 기다리지도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마도 그 아이는 모든 것이 나 때문이었다고 생각하는 듯한데, 나는 그것에 대해 해명하거나 사죄해야 할 필요를 조금도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소설가라는 직업의식의 발로로 그 사건이 그 아이의 삶을 어떻게 바꿔 놓았는지, 조금 궁금하기는 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성장기의 상처에 붙들려 있는 인간을 만나서 눈물 섞인 고백이나 한탄을 듣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혹 다시 전화가 올까 봐 나는 휴대 전화의 전원을 껐다. 서인숙이라는 이름을 잊는 데는 단 십 초도 걸리지 않았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삼촌과의 기억들이 조금씩 선명해졌고, 영화 <빅(Big)>의 주인공 톰 행크스처럼 조금씩 내 몸이 작아지는 듯했다. 열네  살짜리 어린 계집애가 소원을 비는 졸타 기계 앞에서 삼촌을 돌려 달라고 울고 있는 모습이 영화 속 장면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는데, 그 옆에서 눈물을 뚝뚝 떨구고 있는 것은 핀컬 파마를 한 열일곱의 서인숙이었다.《문장 웹진/200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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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집에 사는 소녀1) 김숨 1 내 방엔 거울이 있어. 빛— 빨간색. 세상의 모든 빛— “지금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2 지금, 지금, 그리고 지금, “난 다른 곳에 있고 싶어.” 3 딱딱하게, 딱딱하게, “내 사랑을 받아 주세요.” 다른 곳에선 똑같은 노래가 다르게 흘러, 다르게 슬프게, 다르게 쓸쓸하게, 다르게 외롭게. 다른 곳의 다른 나. 난 나를, 난 나를, 딱딱하게, 딱딱하게, 빨갛게, “난 설레고 싶어.” 4 다섯 살 때 처음 빛을 봤어. 네 곁에, 내 곁에, 빛은 환한 어떤 것. 아, 난 날······. 다섯 살 때 처음 빨간색을 봤어. 엄마가 빨간색을 가져다 내 얼굴에서 45도 사선 밑에 놓았어. 빨간색을 나는 외우고 외웠어. 내가 빨간색을 외우자 엄마가 빨간색을 치우고 노란색을 놓았어. 나는 노란색을 외우고 외웠어. 그리고 파란색, 흰색, 검은색. 세상은 다섯 가지 색깔로 만들어졌어. 세상은 다섯 가지 색깔로 만족해. 다섯 색깔 무지개, 다섯 색깔 도마뱀. 분홍색은 꽃에게. 초록색은 달에게. 내 얼굴에서 45도 사선 밑에 놓여 있는 빨간색만 나는 볼 수 있어. 내 방 거울은 흐르지 않아······. 5 딱딱한 벽에 딱딱하게 거울이 걸려 있어. 거울이 날 봐. 거울은 날 봐. 거울은 엄마 몰래 울고 있는 날 봐. 난 날 안 봐. 음, 흐른다는 건······. 생각하고 싶지 않아. 내가 생각하고 싶은 건 오직 하나. 6 빨간색 크레파스를 선물 받고 난 흥분해 소리 질렀어. “엄마, 난 화가가 될 거야!” 빨간색 크레파스가 흰 도화지 위를 신나게 날아다녔어. (그녀의 엄마) 뭘 그리는 거야? (그녀) 집! 빨갛게, 빨갛게, (그녀의 엄마) 뭘 그린 거야? (그녀) 집! 엄마, 난 집을 그렸어! (그녀의 엄마) 네가 그린 집을 만져 보렴. 엄마가 내 손을 내가 그린 집으로 데려갔어. (그녀의 엄마) 집에 창문이 없네. (그녀의 엄마) 집에 문이 없네. (그녀의 엄마) 집에 지붕이 없네. 난 창문을 본 적 없어, 난 문을 본 적 없어, 난 지붕을 본 적 없어. (그녀의 엄마) 집에 나무도 없네. 7 집에 나무가 있어야 해? 세상에 나무가 있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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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 식물원 하가람 식물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다이아몬드 모양의 철골로 둘러싸인 거대한 유리 온실에는 열대와 지중해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이국적인 식물이 자란다고 했다. 한 달 전 나는 식물원 근처에 있는 여러 호텔을 찾아 은규에게 링크를 보냈다. 보통 때의 그라면 어디든 좋다고 했을 것이다. 레스토랑도, 카페도, 동네의 작은 아이스크림 가게조차도 모조리 내 선택에 맡기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날 은규는 이미 예약한 곳이 있다고 하여 나를 놀라게 했다. 은규가 보내 준 링크를 열어 보았다. 넓은 통유리 창 너머로 식물원과 공원이 내다보이는 스위트룸이었다. 나는 조금 들뜬 채 답장했다. — 우리가 만난 지 곧 1년이래. 믿어져? 1년이라는 시간은 내게 유별났고 은규에게는 별다른 감흥이 없는 것이었다. 그가 전에 사귄 여자친구는 단 두 명인데 각각 4년, 5년을 만났다고 했다. 매번 석 달도 채 넘기지 못하는 나와는 달랐다. 이따금 은규에게 이전 연인들에 대해 물었다. 그들이 어떤 성향의 사람이었고 어떤 외양을 가졌는지 궁금했다. 처음에는 응응, 하며 대꾸해 주던 은규는 내가 그녀들의 음악 취향이나 살던 동네처럼 구체적인 정보까지 캐묻자 태도를 바꾸었다. 기억 안 나. 그는 말했다. 다 옛날이야기라고. 그 후로는 이전에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그녀들을 생각했다. 눈, 손톱, 말투, 그리고 신발. 나와 닮았을지, 닮았다면 얼마나 닮았고 다르다면 무엇이 다를지도. 상상을 이어 가다 보면 늘 한 가지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은규는 한 번도 애인과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까 여자와 밤을 보내는 일이 오늘 그에게는 처음이었다. 서른을 넘긴 남성에게서 보기 드문 경우였지만 그가 처음인 게 좋았다. 그 점이 무엇보다도 나와 그녀들을 구분 지어 주는 것만 같았다. 차창에 머리를 기대었다. 햇볕에 데워진 창문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인터넷으로 보았던 화려한 꽃과 기다란 나무들을 떠올렸다. 노랗고 푸르고 분홍빛이 맴도는 공간을. 여름 휴가철이었고 도로는 차들로 빽빽했다. 졸음 껌을 씹는 은규를 보며 말했다. “오늘은 내가 운전하고 싶었는데.” “다음에. 너 힘들어.” 은규가 말했지만 나는 안다.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그는 내게 차를 맡기지 않을 것이다. “보면 놀랄걸? 너무 잘해서?” 나는 허리를 세운 채 한 손으로 반원을 그려 보았다. 휙휙. 입으로 소리 내며 운전대를 쥔 그를 따라 했다. 그가 웃었다. 머릿속으로 주행하기. 그것은 나만의 놀이였다. 캠퍼스 변두리에 있는 H관 1층, 5평 남짓한 주차관리실에서 상상력을 충족시켜 줄 만한 것은 많지 않았다. 먼지 쌓인 커피믹스와 낡은 소파, 책상 위에 시간별로 놓여 있는 분홍색, 파란색, 노란색 주차권들. 지겨운 서류, 서류, 서류. 드물게 실장이 자리를 지키는 날이 아니면 대체로 혼자 그곳에서 일했다. 사람들이 찾아와 주차권을 사거나 정기 등록을 마친 후 돌아가면 나는 모니터에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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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익명

    <작은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를 눈물 많이 흘리면서 읽었는데. 이 소설도 가슴 짠합니다. 작가님이 세상을 보시는 눈길이 참 애처롭고 따뜻합니다.

    • 2007-08-02 09:49:35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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