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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와 모리

  • 작성일 2005-11-16
  • 조회수 3,351

 

신상미


유리는 만질 수 없는 모리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유리를 안으면 모리의 마음이 피로 물들었다. 남녀 간에 자연스럽게 나눌 수 있는 신체적인 접촉이 모리에게는 선천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성적(性的)으로 미숙했기 때문에 처음 사귈 때에는 깨닫지 못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어느 날 두 사람은 저절로 깨달았다. 그것은 한 채의 차고 맑은 호수가 마음속으로 고스란히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푸르고 서늘하고 잔잔한 호수였다.

올 가을이 올 때까지 유리와 모리의 생활에는 별다른 변화가 생기지 않았다. 유리는 모리의 얼굴이나 옆모습을 한 번씩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유리가 가장 자주 바라보는 곳은 모리의 뒷모습이었다. 모리의 왼쪽 어깨를, 그리고 또 모리의 반대쪽 어깨를 한참씩 보았다.

유리가 쳐다볼 때마다 모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유리의 시선이 자신의 뒤쪽에 닿아 있는 것이 느껴질 때 모리의 몸은 부자연스럽게 되었다. 차고 깊은 물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모리는 유리가 바라보는 곳을 보려고 애썼다. 그곳에 유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유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보려고 애썼다.


-당신을 사랑하니까 당신이 사랑하는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용서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유리는 모리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유리는 옷소매 속에 들어 있는 모리의 왼쪽 팔꿈치를 오른쪽 집게손가락 끝으로 만져보았다. 동그랗게 튀어나온 팔꿈치에 손끝이 닿는 순간, 유리는 손을 거두었다. 모리의 손목뼈와 손가락 관절을 만질 때는 식물들끼리 잎새를 한 번 비비듯이 하고 그쳤다.

살갗이 닿는 것이 몇 초만 지속되어도 두 사람 모두 쓰러질 지경이 되었다.

모리처럼 유리도 점점 약해졌다.

살갗이 스치기만 해도 두 사람 사이에는 강렬한 느낌이 생겨났다.

그것은 황홀했고, 고통스러웠다. 맨살에 불이 닿은 것처럼 뜨겁고, 온몸이 놀라고, 아팠다.

유리의 손가락은 너무 뜨거운 것에 닿았던 식물의 어린 순처럼 움츠러들었다.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거나 입술을 깨물었다. 눈을 감아도 불 그림자의 붉은 환영이 한동안 유리의 눈앞에서 어룽어룽했다. 그러면 유리는 꾹 참고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이제 다시는 만지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한 천 번이나 만 번쯤 만지면 이 강렬한 감각은 사라질까요?

유리가 물었다.

-모르겠어요.

모리가 대답했다.


모리는 남녀간의 사랑과 폭력을 거의 동일한 것으로 인식했다. 모두 ‘자극’과 ‘아픔’이라는 속성을 가진 것으로 이해했다. 병리학적 용어로는 부분인지능력장애였는데, 생활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보였는데, 오히려 유순하고 침착해 보였다. 감정의 변화를 크게 일으키는 일만 조심하면 되었다. 자극을 걸러주는 필터가 없었고, 자극을 적절히 해석하지 못해서 몸이 무너졌다. 자극이 부정적인 경우에는 관절이나 신경조직이 망가지기도 했다. 의사는 뇌신경의 영구적인 이상에 의한 장애라 병처럼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유리는 영구적인 이상이라는 의사의 말이 과도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의사는 모리의 뇌신경 어느 부분이 어떻게 이상한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다만 이렇게 저렇게 추측하는 것일 뿐이었다. 태아였을 때의 뇌신경 손상일 것이라는 말도 의사가 했지만, 그것 또한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세상에 영구적인 것이란 있을 수 없었다.

모리는 아픔을 몸으로 느꼈다. 모든 정신적인 장애나 고통이 신체적인 통증과 함께 온다는 것을 유리는 처음 알았다. 몸은 정신이나 영혼과 조금도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 모리의 영혼이 놀라면 몸이 함께 아팠다. 어떤 때는 너무 놀라면 모든 감각을 거부하고 저항할 때도 있었지만, 모리는 세상을 미워하거나 자신의 허약한 체력을 탓하지 않았다. 하나하나 이겨내는 것이, 오랜 시간을 들여서 견뎌야 하는 것이 그저 너무 힘들 뿐이었다.

유리는 모리가 아플 때마다 아픔이 사라질 때까지 조용히 지켜보았다. 아픔은 젊음이나 건강처럼 영원한 현상은 아니었다. 아픔이 건강에서 아주 먼 것도 아니었다. 아플 때 오히려 모리는 평화로워 보였다. 모리는 자신의 바깥을 향하여 힘을 가하려 하지 않았다. 세상이나 자기 자신을 바꾸려고 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었다. 타인에게, 다른 사물에, 혹은 자기 자신에게조차 잘못을 저지를 수 없었다. 몸이 아플 때마다 어떤 인식에 도달할 수 있었으므로 모리는 점점 총명해졌다. 총기도 몸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특별한 자극이 없으면 모리는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다.


작년 2월부터 유리와 모리가 함께 살기 시작했다. 봄은 오지 않았다. 꽃샘추위가 끝나자마자 바로 봄 없이 여름 날씨가 되었다. 3월부터 민소매 옷들이 많이 팔렸다. 꽃이 일찍 피고, 한낮에는 무더웠다. 주말마다 놀러 다니는 차들 때문에 고속도로가 막혔다. 대개 운전요원으로 투입되는 가장들은 주말에도 쉴 수 없다며 스트레스를 호소했다. 야외 활동이 늘어나면서 피부과와 이비인후과를 찾는 알레르기 환자도 늘어났다. 꽃이 자꾸 피니까 꽃값이 싸졌다. 발목 잘린 채 팔리지 않는 절화들이 거리에 넘쳐났다. 화훼 농가들은 에어컨과 환풍기를 틀어가며 고생했지만 늘어난 일조량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유리와 모리도 주말마다 도시를 떠났지만 고속도로를 이용하지는 않았다. 파이프처럼 생긴 고속도로는 시야가 막혀 있어서 갑갑했다. 사람들의 여정(旅程)과 여수(旅愁)가 생략되었다. 여행이라는 용어는 잘 쓰이지 않게 되었고, 사전에서 이동이라는 단어에 여행과 비슷한 새로운 뜻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유리와 모리는 주말에 쉬었다. 한 주에 5일씩 근무하면서 유급휴가가 없어졌고, 수당이 줄어들었다. 비가 오지 않는 주말이면 그들은 대개 자전거를 타고 들판으로 나갔다. 유리는 공책에 식물도감을 만들고 있었다. 식물들 그림과 사진, 설명 모두 유리가 직접 작성했다. 식물도감의 이름을 짓지는 못했다. 유리가 꿈꾸는 것은 개개의 항목들만 자유롭게 존재하는 백과사전과 같은 구성이었다. 가나다 순(順)으로 정리하였고, 별도의 색인(索引)은 만들지 않았다. 항목의 내용도 일관된 규격이나 길이에 따라 작성할 필요는 없었다. 설명이 긴 것도 있었고, 짧은 것도 있었다. 유리는 여러 종류의 아름다운 그림을 직접 그려 넣었고, 사진 찍는 것은 모리가 도와주기도 했다. 식물의 싹이었을 때 모습, 잎새, 꽃그림, 열매, 자세가 특히 좋은 어떤 식물 포기, 이런 식으로 여러 개의 그림이 들어 있었다. 유리는 색연필이나 푸른 잉크가 나오는 펜으로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유리는 공책을 자주 들여다보면서 조금씩 자라나고 있는 식물도감과 대화를 나누곤 했다.

유리의 식물도감은 내용이 자꾸 수정되었다. 세상의 모든 식물들이 쉬고 있는 겨울에는 아무래도 식물도감에 새로운 항목이 많이 작성되지는 않았다. 봄이 오면 새로운 항목들이 빠르게 불어나곤 했다. 그래서 유리는 해마다 봄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작년에도 결국 봄은 오지 않았다. 그것은 두 번째 사라진 봄이었다.


이태 전에는 잔인한 전쟁이 일어나서 봄이 오지 않았다. 막 봄이 올 무렵,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다. 이라크 하늘에는 밤마다 불꽃 비가 쏟아져 내렸고, 사막을 붉게 적신 피가 넘쳐 땅속으로 흘러들어갔다. 지구에 살아 있는 사람들은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죄를 지었으나 깨닫지 못했다. 그때 열기가 식어버린 봄은 도저히 지구에 찾아올 수 없었다. 그해 봄이 오지 않는 동안 겨울도 가지 않았다. 늦게까지 겨울이 지키고 있는 세상은 봄내 싸늘했다. 새싹은 돋아났으나 봄은 오지 않았다. 깊숙한 땅속까지 얼어붙은 채 녹지 않았고 사람들은 무감각해졌다.

지난해에는 반대로 여름이 먼저 왔다. 여름이 먼저 와버린 것은 식물도감을 만들고 있는 유리에게는 정말 난감한 일이었다. 이태나 봄이 오지 않았으므로 봄에 꽃이 피는 식물들은 버려진 고아나 다름없었다. 기온이 이상해졌기 때문에 봄의 생태계는 아무것도 정확하지 않게 되었다. 유리의 식물도감에는 나중에 봄이 오면 다시 수정할 수 있도록 연필로 적어놓는 사항이 늘어났다. 형태가 변화된 식물이 나타나면 그려 넣을 수 있도록 빈칸도 넉넉하게 남겨 놓았다.


-올해도 봄이 오지 않네요. 어느 별로 아주 놀러 갔을까요?

지난해 봄이 되었으나 봄이 오지 않았을 때, 유리는 모리에게 그렇게 편지를 썼다. 유리와 모리는 편지로 이야기를 나눴다. 편지를 쓰지 않으면 마음으로 쉬지 않고 너무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편지는 아주 조용한 물건이었다. 편지는 단순하고 단단한 종이상자와 같았다. 안을 혼자서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유리와 모리는 편지에서 나는 잉크 냄새와 종이 냄새를 좋아했다. 글자는 말보다 두 사람을 조금 덜 힘들게 했다. 말은 그들의 영혼이 서로에게 한꺼번에 엎질러지는 것과 비슷했다.

재작년 처음 사랑에 빠졌을 때, 두 사람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막상 말을 할 수 있을 만큼 친해졌을 때, 두 사람은 난관에 부딪쳤다. 말을 주고받을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있게 되면, 두 사람은 우선 몸이 힘들게 되었다. 온몸의 세포가 서로를 명확하게 느끼기 시작했다. 유리에게 모리의 몸은, 모리에게 유리의 몸은 심지어 자기 자신의 것보다 더 생생했다. 연인의 몸이 생생해질 때, 연인의 근육과 그것의 작용, 체액의 존재와 그것의 흐름이 자기 자신의 것보다 뚜렷하게 느껴질 때, 그때 자기 자신은 거의 지워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그런 상태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사회적으로 생각하기가 어려웠고, 손발의 신경이 말을 듣지 않아서 애를 먹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호흡이 불규칙해졌고, 심장이 아프게 뛰었다.

가끔 용기를 내어서 목구멍 바깥으로 말을 꺼내 보기도 했다. 상대방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것은 맑은 단조의 음악과 같았다. 촉촉한 목구멍을 아프게 마찰하면서 가느다랗게 빠져나오는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한 사람이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애쓸 때, 나머지 한 사람은 주의력을 완전히 잃지 않으려고 상대방의 눈동자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주고받게 되는 말들은 별 의미가 없거나 이상한 것들이었다. 사실 뭐라고 말해도 모두 다 같은 뜻이었다. 오리 울음소리를 내거나, 도토리 알이 깍정이를 쓴 채 굴러 떨어지는 소리를 내거나, 그냥 눈동자를 쳐다보면서 미소를 짓거나, 심지어 아무 소리 하지 않아도 모두 같은 말을 주고받는 것이었다. 유리와 모리는 연인들이 사랑을 표현하고 싶을 때 쓰는 말들은 모두 같은 기호로 쓰인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들에게 언어는 거추장스러운 것이었다. 두 사람은 무엇을 표현하는 것보다는 그저 혼자 느끼고 마는 것에 평생 익숙해진 사람들이었다. 유리와 모리는 서로 만나기 전에는 타인에게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할 필요를 느낀 적이 없었다.

유리와 모리는 서로에 대해서 거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이야기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해는 사회적인 언어를 사용하지 않을 때 오히려 완전했다. 신체언어를 주로 사용하던 두 사람이 말을 사용하는 순간, 그들은 오히려 소통의 위기에 빠졌다. 오해가 생겼다. 언어 때문에 생긴 오해를 또 다른 언어를 사용해서 풀려는 순간, 자기 자신처럼 가깝게 느꼈던 연인이 불가해한 타인으로 돌변하는 기분이 들었다. 오리 울음소리를, 도토리 알이 딱딱거리는 소리를 상대방이 왜 했는지 분석하느라 밤을 새우기도 했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 오해가 생기기도 하는 것이 유리는 오히려 반가웠다. 어쩌면 두 사람도 평범해질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이 생겼다.


유리와 모리가 함께 사는 집은 식물원과 비슷했다. 여러 개의 붙박이 화분들 사이에 걸어 다니는 두 포기의 식물이 사는 것과 같았다. 집 안을 날아다니는 바람에서 풋풋한 향내가 났다. 식물 잎사귀들을 통과한 햇살이 해무늬를 그리며 집 안을 돌아다녔다. 유리와 모리는 푸른 줄기와 잎사귀를 쭉쭉 뻗는 식물들처럼 마음속의 생각들이 구겨지는 것을 싫어했고, 물과 바람을 좋아했다. 바람소리와 빗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습기가 사물에 섞여 있는 냄새들을 좋아했다.


유리와 모리는 피부에 서늘한 기운을 자주 느꼈다.

그것은 한 모금의 샘물과 같았다.

신선한 한 줄기의 바람이 풀잎을 한 차례 스치고 지나가는 것과 비슷했다.

그때마다 완전한 기쁨이 몸과 영혼을 적시곤 했다.

손등, 손가락 끝, 손가락 마디, 눈꺼풀, 머리카락 끝, 힘줄의 긴장, 당겨진 근육이 그리는 선이 모두 바라보기에 아름답게 느껴졌다. 가만히 있음, 평화, 휴식, 이런 것들의 양상은 더욱 순수해졌다.

유리는 가끔 손등이나 손가락 마디를 뻗어 모리의 피부를 조금 비벼보았다. 그것은 그들이 사랑을 나누는 가장 예외적인 방식이었다. 모리가 아플까봐 유리는 손을 오래 대고 있지 않았다. 모리가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심하게 놀라지는 않았다.

1.2초나 1.7초 정도 닿으면 유리는 손을 거두었다. 그것은 그들에게 결코 짧은 순간이 아니었다. 마음이 아플 정도로 강렬한 쾌감이 일어났다. 한 차례의 소용돌이와 같은 쾌감이 유리와 모리를 소외시키고 지나갔다.


바라보는 것과 만지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유리는 바라보는 것이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고, 또 슬프게 만든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리는 몇 시간쯤 후 혼자서 울었다.

몇 달 더 지나자 유리는 혼자서 울지 않게 되었다. 속울음이 유리의 몸속으로 잦아들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올해도 봄이 오지 않았다. 봄을 잃어버린 지구는 이상해졌다. 유년기에서 하루아침에 어른이 된 괴물과 같은 여름이 지구를 천천히 훑고 지나갔다. 강의 수온이 너무 높아졌다. 물고기 수컷들은 암컷을 사귀자마자 바로 정액을 뿌리고 다녔다. 물속이 점점 부예졌다. 물속이 물고기 알로 가득 찼다. 암컷들은 서둘러 새끼들을 낳느라 어떻게 생긴 아이들이 태어나는지도 몰랐다.

3월의 마지막 토요일, 마침내 유리는 자연과학 전문 일간지에서 거의 모든 물고기들이 벌써 산란을 마쳤다는 기사를 읽었다. 돌마자, 참마자, 풍사리, 얼룩동사리, 쏘가리들이 두어 달 일찍 산란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늦봄에 태어나던 쉬리, 누치, 돌고기 새끼들은 예년보다 한 달이나 일찍 태어나서 이미 물속을 헤엄쳐 다니고 있었다.

유리와 모리는 3월의 마지막 토요일, 새로 태어난 물고기를 보러 자전거를 타고 교외로 나갔다. 국도를 지나면 멀지 않은 곳에 자주 가는 저수지가 있었다. 제법 넓은 저수지였지만 물이 너무 차고 맑아서 낚시꾼들이 없었다.

저수지는 벌써 푸르게 물들어 있었다. 날이 따뜻해져서 수중 생물과 녹조류가 늘어나 있었다. 겨우내 은빛이던 물빛이 부옇게 보였다. 저수지 주변으로는 숲과 덤불이 벌써 우거지기 시작했다. 암갈색 논병아리와 흰 해오라기들이 한가롭게 헤엄을 치고 있었다. 물새들은 푸른 물의 주름을 길게 잡아끌면서 저수지의 저쪽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물새들은 유리와 모리가 가까이 가도 놀라지 않았다. 물새들은 유리와 모리에게서 인간의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물고기 알과 물벌레를 집어먹으며 물새들이 나아가는 동안, 얕은 물가에는 작은 치어들이 부지런히 도망 다니고 있었다. 수박 씨앗 같은 검은 치어떼들이 흩어졌다 모이고 흩어졌다 모이면서 수영 연습을 하고 있었다. 모리는 물가 바위 위에 앉아서 흙장난을 했다.

유리는 저수지 주변을 돌아다니다 논에서 상한 포도알 주스처럼 생긴 개구리 알을 발견했다. 개구리 알은 물 댄 논의 벼 그루터기 사이에 뭉글뭉글하게 모여 있었다. 올챙이가 부화하기도 전에 버들치 새끼들이 먼저 태어났다는 기사는 정말인 것 같았다. 원래는 올챙이가 먼저 태어나는 것이 순서였다.

-아직 부화하려면 먼 것 같아요.

유리가 모리에게 개구리 알을 보여줬을 때, 모리가 이야기했다. 개구리 알을 둘러싼 막이 아직 투명하고 튼튼해 보였다. 알 속에 포도씨처럼 보이는 검은 점도 짙고 또렷했다.

-물고기가 태어나는 속도가 평균 50일이나 빨라졌다는군요.    

유리가 돌멩이로 강모래 바닥에 그렇게 썼다. 모리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마를 살짝 찌푸렸다. 유리와 모리는 물거울이 된 푸른 수면에 두 사람의 얼굴을 비춰보았다. 마른 두 사람의 모습과 함께 산과 하늘이 흔들리고 있었다. 자연이 사라지면 유리나 모리 같은 사람들은 점점 더 살기 힘들어졌다.

꽃들은 피었다. 날은 가물었다. 제비꽃, 개나리, 개별꽃, 쇠별꽃, 목련, 진달래, 벚꽃, 영산홍, 새앙나무꽃, 철쭉, 애기똥풀, 양지꽃, 민들레, 산수유가 한꺼번에 사이좋게 피었다. 한꺼번에 피었다가 목말라서 금세 시들었다. 날이 무지하게 건조했다. 꽃잎은 시들어도 떨어지지 않았다. 줄기마다 포기마다 말라죽은 꽃잎이 그대로 말라붙었다. 꽃가루들은 신이 나서 하늘을 날아다녔다. 사막화가 진행되는 아시아의 내륙에서 흙먼지들이 날아왔다. 황해를 건너서 날아오는 흙먼지는 검은 매지구름처럼 스산했다. 사람들은 하늘을 쳐다볼 수 없었다. 유리와 모리는 회사일이 끝나면 곧장 집으로 왔다. 외출할 때마다 마스크를 쓰고 다녀도 유리는 기관지가 나빠졌다.

여름에는 섭씨 45도를 넘는 이례적인 폭염이 석 달 동안 계속되었다. 지난해 지진해일이 있은 후에 지구는 더욱 불안정해졌다. 폭염으로 사막의 사람들과 짐승들이 수천씩 숨졌다. 툰드라에는 50년 동안 내린 적이 없는 폭우가 반달 동안 쏟아졌고, 사바나 초원에는 우기와 건기가 거꾸로 찾아왔다. 아열대 기후의 빈국(貧國)들은 날이 더워지자 3.5모작 농사를 지었으나 더욱 가난해졌다. 농작물의 맛과 영양가가 떨어져서 팔리지 않게 되었다. 세계관광기구는 지구 곳곳에 내린 폭우로 유네스코 지정 문화유산이 대거 유실되었다고 발표하고 모금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유리와 모리에게도 힘겨운 여름이었다. 풀들이 하루에 한 뼘씩 웃자랐다. 풀색도 제대로 들지 않은 채 제멋대로 늘어진 풀잎들은 보기에 안쓰러웠다. 고들빼기와 씀바귀와 머위는 비닐하우스에서 자란 비린 채소처럼 쓴맛이 들지 않았다. 알토란처럼 통통한 토란은 아린 맛이 없었고, 덩굴과 잎새가 무성하던 감자와 고구마는 수확이 부실했다. 허우대만 멀쩡한 물렁과일들은 바람만 불어도 땅에 퍽퍽 떨어졌다. 산부인과에서 새로 태어나는 아기들은 태열이 심해서 얼굴이 점점 더 쪼글쪼글해지고 빨개졌다. 봄꽃들이 여름에도 또 폈다. 한 번씩 더 피는 꽃들은 상태가 좋지 않았다. 색깔과 향기가 지나쳐서 화장을 한 꽃들처럼 이상했다. 3년째 식물들의 꽃 피는 시기가 전부 다 달라져서 식물도감이 아주 복잡해졌다.

9월이 되어도 한낮에는 한여름 기온을 유지했다. 곤충의 숫자가 빠르게 늘어났다. 모기와 나방들이 도금 강판과 반도체 표면에 이물질을 성공적으로 남겼다. 공장 직원들은 대형 모기장을 설치하고 모기들의 습격에 저항했지만 결국 유례없는 불량률을 기록하고는 모기장 바깥 모기들의 밥이 되었다. 거미들은 신이 나서 거미줄을 쳤다. 거미의 침대이자 식탁이며 아파트인 여러 채의 거미줄이 출렁거릴 정도로 먹잇감이 많이 걸렸다.

-대추나무에 연 걸리듯 하네.

거미들은 그렇게 노래를 부르며 신이 나서 자신들의 불청객이자 밥인 은혜로운 곤충들을 배불리 먹어치웠다. 가을에는 배고픈 시절에나 먹던 메뚜기볶음이 대대적으로 유행했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말벌을 벌집째 뜯어다 들기름에 볶아먹는 호사가들이 생기기도 했다.


10월 중순이 되어서야 선선한 색바람이 조금씩 불기 시작했다. 주말에 유리와 모리는 자전거를 타고 저수지에 갔다. 미끄러지는 자전거 바퀴 아래로 하얀 길이 강물처럼 흘러갔다. 바람이 휘파람을 불면서 함께 달려주었다. 햇살이 아직도 뜨거워서 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페달을 밟을 때마다 땅에서 일어나는 따뜻한 바람이 바퀴살에 실패처럼 감겼다 풀려나갔다.

가을은 두 달쯤 늦어지고 있었다. 나뭇잎들은 곱게 물이 들지도 않은 채 흙빛으로 되돌아갔다. 여뀌와 고마리 같은 습지 정화식물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있었다. 달풀이 푸른 죽창 같은 줄기를 꽂으며 언덕까지 진군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긴긴 여름내 검푸르던 덤불은 찬바람에 삭아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사위질빵, 환삼덩굴, 돼지풀은 줄기가 끊어지고 잎새가 뜯어져 나갔다. 날이 가물어서 모든 게 갑자기 생겨났다가 갑자기 시들었다. 가을의 정취는 가을이 오기도 전에 사라지고 없었다.

산의 초입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유리와 모리는 산 아래를 감아 도는 흙길을 걷기 시작했다. 작은 개울이 오솔길을 타고 구불구불 흘러가고 있었다. 어느 해보다 빨리 늘어난 칡넝쿨은 숲의 가장자리를 거의 다 덮고 있었다. 묏자리와 산길 가장자리는 벌초가 되어 있었다. 낫이 후려치고 지나간 흔적을 모리의 눈동자가 훑어보았다. 잘려나간 풀의 허리와 발목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유리는 가던 길을 멈추고 새로 솟아오르는 움돋이 싹들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모리는 유리가 하는 짓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루터기마다 푸른 바늘처럼 새잎이 돋고 있었다.

-이것은 푸른 꽃처럼 보입니다.

모리가 말했다. 모리가 보고 있는 것은 꽃잎처럼 정교하게 말려 있는 어린 싸리나무 잎새였다. 유리와 모리는 싸리 잎을 쓰다듬어 보았다. 감촉이 부드럽고 신선했다. 유리는 질경이 싹들도 쓰다듬어 보았다. 키가 작아서 낫질에 다치지 않은 질경이 싹들이 이슬에 젖은 흙길을 지키고 있었다.

-이것은 푸른 별자리처럼 보이네요.

모리가 또 이야기를 했다. 유리는 듣기만 했다. 질경이를 들여다보는 척하면서 모리의 목소리를 들었다. 유리는 늘 하던 식으로 손으로 질경이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유리가 산책하면서 식물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방식이었다. 풀들의 얼굴, 풀들의 손가락, 풀들의 입술, 풀들의 성기, 풀들의 발목, 풀들의 발가락, 풀들의 눈물, 유리는 그런 것을 좋아했고, 식물들도 유리의 손을 좋아했다. 유리가 어루만지면 식물들은 좋아서 몸을 가볍게 흔들었다.

유리는 까끌까끌하고 보들보들한 질경이 싹을 천천히 쓸어보고, 촉촉한 흙바닥과 작은 돌멩이들을 쓸어보았다.

유리는 지금 모리의 뺨과 손가락이 만지고 싶었다. 그럴 때면 만질 수 없는 모리 대신에 주변의 풀잎들을 더 예쁘게 만지작거렸다. 여리지만 질기고 뻣뻣한 것들이 유리에게 위안을 주었다.

-질경이 싹이 제일 예쁘더군요. 싹이 흩어져 있는 문양이 꼭 만다라처럼 보입니다.

유리가 이야기하면서 고개를 들었을 때, 모리가 유리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유리는 바로 몸을 일으켰다. 아직도 유리는 모리의 시선을 받으면 쑥스러움을 느꼈다. 대화는 그래도 조금 자연스러워졌지만, 두 사람 사이에 큰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일어서서 돌아서는 순간, 사랑의 기쁨과 아픔이 동시에 유리의 가슴을 쓸고 지나갔다.

유리는 앞서서 산길을 걷기 시작했다.

유리는 왼손으로 오른손을 만져 보았다. 유리는 왼손가락으로 오른손 등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유리의 손끝과 유리의 손등에서 모리의 손이 닿았을 때의 감촉이 되살아났다. 이제 유리의 몸은 유리의 것이 아니었다.


유리는 모리와 달랐다.

유리의 장애는 모리만큼 위험하지 않았다. 자세히 살펴보아도 유리는 전혀 장애아처럼 보이지 않았다. 어딘가 다 자란 것 같지 않은 느낌을 주는 유리의 인상도 약간 어려 보였을 뿐 그다지 두드러지는 점은 아니었다.

유리는 어려서부터 화를 내본 적이 없었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굉장히 성실했다. 다른 일에는 심상했고, 친한 친구가 없었으며, 자신의 미모나 능력, 장점이나 특징에 대해서 두루 무관심했다. 유리는 오직 흐름에 관심이 있었다. 누군가 세상의 여기저기, 이것저것에 전부 도돌이표를 붙여 놓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세 살 반 무렵이었다. 세상은 자꾸 돌고 있었다. 순환주기나 속도가 다를 뿐 유전(流轉)하는 속성은 동일했다. 유리는 아무도 모르게 사물과 공간과 존재들의 흐름을 읽었다. 흐름을 읽는 것 외에 유리의 관심을 끌 만한 다른 일은 모리를 만날 때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그전까지 유리는 친구가 없었다. 급우들이나 직장 동료들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친구인 줄 알았다. 유리는 사람들에게 공부를 잘하고 성실하고 평범하고 둔하고 예의바르고 매력이 없는 아이였다. 아무도 유리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설령 누군가 관심을 기울였더라도 유리를 이해할 수는 없었다. 유리의 부모나 주변 사람들은 유리가 장애아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물론 유리 자신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유리는 자기 자신에게 관심이 없었다. 유리가 모리를 만났을 때, 모리를 이해하게 되었을 때, 유리는 유리 자신에게도 장애가 있음을 깨달았다.

유리의 장애를 이해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유리에게도 간혹 친구와 같은 존재들이 있기는 했다. 유리가 서른이 넘자 유모차를 편안하게 타고 돌아다니는 아기들이 유리를 알아보았다. 그즈음에 유리의 정신연령이 인간의 보편적인 유아기에 도달했던 것이다. 빽빽거리며 울고 짜증을 내고 투정을 부리고 권태로운 어린 아기들은 유리를 알아보지 못했다. 성격이 느긋한 아기들이나 유리를 알아보았다. 유리는 육체적인 성장을 거듭했음에도 물리적인 순수성을 보존하고 있었다. 유리를 둘러싼 체액은 맑았고, 몸속의 흐름은 아주 간결했다. 여러 가지 감정과 희망사항들, 지워지지 않는 기억들, 여러 가지 좋거나 나쁜 스트레스로 인해 대공장처럼 복잡하게 느껴지는 보통 사람들하고 많이 달랐다.

아기들이 보기에 유리는 생각도 아주 단순했다. 아주 단순한 생각들이 자유롭게 일어났다가 평화롭게 사라지고 있었다. 유리의 생각들은 대부분 쓸모가 없는 것들이었다. 까팡이나 사금파리 조각처럼 반짝이면서 생겨났다가 반짝이며 사라져 버렸다. 뒤끝이 없었다.

-아름답다.

아기들은 속으로 감탄했다. 유리는 산책하다가 무심코 아기들의 그런 시선을 느낄 때가 있었다. 유리는 잠깐 아기들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그냥 가던 길을 갔다. 아기들이 아직 인간의 언어를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무슨 말을 나눌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기들은 고양이나 강아지, 풀이나 꽃, 햇살이나 바람, 혹은 그늘이나 그림자하고 더 소통이 잘 되었다.

아기들이 유리를 발견한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유리는 모리를 발견했다. 모리를 보는 순간 유리는 그를 느꼈다. 그것은 전체를 꿰뚫는 이해와 같았는데, 한순간에 완성되었다.


콩밭에서 몸집이 뚱뚱한 꿩들이 푸르릉푸르릉 날아올랐다. 꿩들은 밭고랑에 숨어 있다가 친구들이 지나가니까 장난을 치는 것이었다. 주렁주렁 매달린 콩꼬투리에는 보얗게 이슬이 덮여 있었다. 여름내 푸르던 콩대는 주저앉고 콩잎은 누렇게 삭고 있었지만, 콩꼬투리는 잘 여물고 있었다. 유리와 모리는 요란을 떨면서 꿩들이 날아간 하늘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것은 꿩들이 하늘을 보여주는 방식이었다.

길섶에 산국(山菊)과 구절초가 피어 있었다. 유리는 비로소 가을을 느꼈다. 국화 향이 이슬을 머금은 채 풀숲을 지키고 있었다. 유리는 짙푸른 꽃대 위에 샛노란 촛불처럼 맺혀 있는 산국의 향기를 맡았다. 모리도 유리를 따라서 향기를 맡아보았다.

-향이 너무 아름다워요.

모리가 촉촉한 목소리로 말했다. 산국은 유리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었다.

-푸른 잎사귀도 향기가 있어요. 깃털 모양의 잎새는 찬이슬에 젖어서 참으로 푸르군요. 국화는 전생에 깃털이 푸른 새였을까요?

모리가 놀라서 유리를 쳐다보았다. 유리가 지금 스캔해서 읽고 있는 시간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언제나 밝고 차분한 유리의 얼굴이 오늘은 밝지 않았다. 모리는 유리가 보여주는 전생에 푸른 새였던 깃털 모양의 국화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유리는 말없이 걷기 시작했다. 오래 그리던 국화 향기를 맡아도 이상하게 힘이 나지 않았다. 무슨 전조처럼 어지러움을 느꼈다. 부드러운 흙길이라 걷기에 좋았는데 다리가 조금씩 무거워지고 눈이 침침해졌다. 유리는 너무 오래 울음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컨디션이 나빠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러 번 울려고 했지만 울 수가 없었다. 울음은 유리의 몸속 너무 깊은 곳까지 내려가 버린 모양이었다.

산 아랫길의 한 굽이를 돌았을 때, 산 위에서 짐승이 우는 소리가 났다. 처음에 유리는 사람이 우는 것으로 들었다. 산의 아주 깊은 곳에서, 길도 없는 골짜기에서, 나뭇잎이 전부 흙빛으로 돌아간 외로운 골짜기에서, 한 마리 짐승이 울고 있었다. 짐승은 사나운 덫에 걸린 것이 분명했다.

유리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바로 옆에 상처에 민감한 모리가 있었다. 모리는 한 번 쓰러지면 오래 앓아야 했다.

모리는 걸음을 멈추고 서 있었다.

모리의 얼굴에는 아무 표정이 없었다.

짐승은 덫에 걸린 지 오래된 모양이었다. 목소리가 완전히 갈라져 있었다. 짐승은 숨을 쉴 때마다 한 번씩 소리를 뱉어내고 있었다. 짐승이 우는 간격이 일정했다. 몸을 파고들면서 조여드는 쇠칼날의 아픔을 잊기 위해서 짐승은 규칙적인 숨을 쉬고 있었다.

짐승의 갈라진 목소리는 꼭 사람의 신음소리처럼 들렸다.

밀렵꾼의 짓이었다. 덫에 걸리면 출혈과 숨이 완전히 끊어질 때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짐승의 의식이 없어지기 전부터 피 냄새를 맡은 온갖 짐승들이 몰려들어 밥상을 차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터진 가죽을 찢어서 벌리고 부드러운 내장을 꺼내 어떤 짐승들은 배불리 뜯어먹고 있을 것이다. 거기에 한 벌의 지옥이 차려져 있었다. 밀렵꾼의 덫에 사람이 걸리면 뼈와 머리카락만 남고 부드러운 살은 발려서 사라지기도 했다.

모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유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유리는 모리를 쳐다볼 수 없었다. 유리는 자신이 지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울려고 해도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유리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짐승은 계속 울고 있었다. 유리는 자신의 목이 졸리는 것 같았다.

누군가 제발 이 희생을 멈춰 주었으면, 이 피를. 아무 죄 없는 자들의 피를.

유리는 온몸에 힘이 빠져나갈수록 짐승의 소리에 신경을 집중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주문을 외웠다. 짐승은 어서 빨리 죽기를 원하고 있었으나, 잔인한 덫은 짐승을 한 번에 죽이는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덫은 짐승이 되도록 천천히 죽기를 기다려 그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짐승은 계속 숨을 쉬었다. 숨이 끊어지려면 멀었다. 최초의 눈물은 살고 싶어서 흘렸지만, 이제 짐승은 죽기가 너무 힘들어서 울고 있었다. 죽으려고 해도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이 짐승을 미치게 했다. 짐승이 깊은 숨을 쉴 때마다 비명이 쏟아져 나왔다. 고통이 너무 생생해서 짐승은 정신을 놓을 수도 없었다. 짐승의 상처와 고통이 짐승의 정신을 각성시켰다. 짐승은 태어난 이후로 가장 명료한 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짐승이 울부짖는 동안, 짐승이 일평생 집착했던 육신이 조금씩 사라지는 동안, 짐승이 태어나 지었던 모든 죄가 짐승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유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유리는 나오지 않는 숨을 토하기 시작했다. 유리의 손에 어린 질경이 순들이 쓸렸다.

모리가 달려와서 유리를 안았다. 모리의 손이 유리의 어깨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러나 유리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유리의 다른 감각들은 마비되고 오로지 청각만 기능하는 것 같았다. 다친 짐승의 비명소리만 유리에게 들려왔다.

모리는 유리를 안았다. 유리는 거의 정신이 없었다. 모리는 순간 유리가 자신과 같다는 것을 느꼈다. 모리의 정신이 또렷해졌다. 유리의 몸속에 자신의 아픔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순식간에 책처럼 정렬되었다. 모리는 유리의 아픔을 느꼈다. 그것은 모리가 잘 아는 것이었다. 그것은 자신의 아픔일 때보다 더욱 아프게 느껴졌다.

유리는 모리가 자신을 끌어안는 것을 느꼈다. 부드럽고 촉촉했다. 지난 3년 동안 단 한 번도 안아본 적이 없었다. 유리는 정신을 잃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거기 예쁜 모리가 있었다. 유리는 어깨에 힘을 빼고 깊은 숨을 쉬려고 애썼다. 유리는 모리의 팔에 안긴 채 가슴속을 짓누르고 있던 뜨거운 숨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죄 없는 짐승의 비명이 유리의 목구멍을 타고 아프게 쏟아졌다.《문장 웹진/20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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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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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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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건

  • 익명

    수정되지 않은 원고를 올리는 바람에 착오가 생겼습니다. 바로 잡게 일러주셔서 고맙습니다.

    • 2007-12-07 11:00:08
    익명
    0 / 1500
    • 0 / 1500
  • 가망

    훌륭한 작품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2021-06-19 16:55:37
    가망
    0 / 1500
    • 0 /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