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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일 2008-03-31
  • 조회수 2,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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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길연




1


남자는 횡단보도 앞에 서 있다. 붉은 신호등이 초록색 보행 신호로 바뀌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횡단보도를 건너 백여 미터쯤 걸어가다가 지하도를 한 번 더 건너야 한다. 그러고도 5분은 걸어가야 목적지에 닿을 테고.

택시를 탈 걸 그랬나? 사실 약속시간보다 일찍 도착하게 될 것이 싫었다. 예식이 시작될 때까지 참석자들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어야 할 걸 생각하면 남자는 등짝이 서늘하다. 그런데 꽉 막힌 도로를 보니 택시를 타는 쪽이 걷는 것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겠다. 그럼 둘러대기 좋을 텐데. 접촉 사고라도 났는지 차들이 꼼짝을 해야 말이죠.

 

 

쓴웃음이 나온다. 알다가도 모르겠다. 돌아보면 아무도 없는데, 누군가 자꾸 등 뒤에서 팔꿈치를 잡아당기는 것 같다. 가는 도중에 사고를 당하거나 복통을 일으켜 구급차에 실려 갈 확률은 얼마나 될까. 피치 못할 상황이 벌어질 걸 기대하기엔 길이 너무 짧다.

호텔에 당도하면 남자는 회전문 안으로 빨려 들어가 로비에서 한 차례 숨을 고르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다가갈 것이다. 물론 계단을 이용할 수도 있으리라. 어쩌면 그 편이 남자에겐 나을지도 모른다. 엘리베이터의 밀폐된 공간은 가슴이 답답하다. 동승자가 있건 없건, 시선을 숫자  판에 고정시킨 채 목적한 층의 문이 열릴 때까지 뻣뻣하게 서 있어야 하는 머쓱함은 또 어떻고.

남자는 넥타이를 조금 느슨하게 푼다. 양복 정장에 넥타이까지 갖추기엔 약간 더운 날씨다. 와이셔츠 단추를 하나쯤 끄를까 말까, 망설이다가 참는다. 소연회장에서 기다리고 있을 일행을 떠올려본다. 거의가 아는 면면이겠지만, 저쪽 인물 중에는, 존재는 알고 있으되 남자와는 초면인 경우도 한 둘 섞였으리라. 넉살 좋아 뵈는 얼굴, 근엄해 보이는 얼굴, 까닭 없이 못마땅한 티를 내는 얼굴, 호기심 가득한 얼굴, 분위기에 걸맞지 않게 찌푸린 얼굴, 얼굴들……. 말하자면 비슷하면서도 너무나 다른 얼굴들. 겉으로는 화사해 보이도록 애를 쓰지만, 속으로는 적대적인 저울질에 분망할 얼굴들. 끔찍하군. 남자는 부르르 몸을 떤다.

초록색 불이 켜진다. 남자의 주위에 몰려 서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앞으로 돌진한다. 맞은편에서도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온다. 누군가 남자의 어깨를 건드리고 지나간다. 미안하다는 말도 없다. 하긴 흐름을 방해한 건 남자 자신이다. 다들 몰려가고 몰려오는데 남자 혼자 그 자리에 그대로 멍청히 서 있었으니까. 뒤미처 사무실에 뭔가를 두고 온 것 같다는 생각이 스친 까닭이다.

그게 뭘까? 뭐였지? 아으 미치겠군.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골똘히 되짚어본다. 그 사이 초록불이 빨간불로 바뀐다.


남자는 여전히 횡단보도 앞에 서 있다. 눈은 맞은편 신호등을 주시하고 있지만, 머릿속으로는 사무실 안을 헤집고 다닌다. 책상 위를 휘익 둘러보고, 서랍을 열고 건둥건둥 들여다보고, 그리고 손가락 끝으로 명함철을 뒤적······ 뒤적······ 아아 그래, 그거야.

기억이 난다. 어딘가에 전화를 걸기로 했다. 아닌······가? 누군가와 만나기로 했던가······?

기억은 거기까지다. 잡힐 듯 말 듯, 아리송하다. 기억을 복원하자면, 아무래도 사무실로 되돌아가는 게 낫지 않을까? 무엇인가 하려던 일을 종내 떠올릴 수 없을 때엔 원래 그 일을 하려고 마음먹었던 장소로 되돌아가 보는 것도 한 방법이지 않은가 말이다.

다시 신호등 색깔이 바뀐다. 초록불이 켜지자마자 사람들은 경보 선수들처럼 앞 다퉈 출발한다. 툭. 누군가 제법 세게 남자의 어깨를 치고 뛰어간다. 기류를 타는 바람개비처럼 남자의 몸이 반 바퀴쯤 휘청, 돌아간다. 중심을 잡는 순간,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세븐일레븐 편의점과 파리바게트 빵집과 테이크아웃 커피 전문점이 사거리 코너 빌딩의 일층을 점유하고 있다. 저 편의점에서는 종종 담배를 산 적이 있지. 남자는 무의식적으로 와이셔츠 윗주머니로 손을 가져간다. 담배······를 두고 왔군. 동시에 고개가 갸웃 기울어진다.

그런데, 나는 왜 여기 서 있는 거지?



2


연신 하품을 해댔더니 눈가에 물기가 고인다. 여자는 잠이 부족하다. 어젯밤 인터넷으로 다운받은 개그 프로그램을 보느라 밤을 샜다. 요즘 애들과 의사소통이 가능하려면 3개 방송국 개그 프로그램은 모조리 섭렵해야 한다. 정규 방송과 재방송을 모두 놓쳤을 때엔 인터넷이 요긴하다. 여자는 그렁그렁한 눈물을 손등으로 찍어 낸다. 아무 데나 머리카락 세 올만 닿으면 두세 시간은 너끈히 잘 것 같다. 그럼 개운할 텐데······.

어른들이란 한결같은 소리들을 한다. 때가 있는 법이라고. 때를 놓치면 때가 오지 않는다고. 스물다섯부터 서른다섯이 되도록 여자가 줄곧 들은 소리다. 여자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다른 여자들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을 소리다. 여자가 친척들이 모이는 자리를 싫어하는 이유 중의 하나다. 명절증후군을 앓는 부류는 의외로 다양하다. 부엌일에 치이는 주부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재수생, 취업준비생, 노처녀, 노총각······. 여자는 멀쩡한 직업이 있기 때문에 더 곤혹스러운 경우다. 여자의 성격이나 정신세계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는 게 아닌가, 의심의 눈초리를 피할 수 없다.

여자가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 어른들의 절반 이상이 자신의 배우자에게 진저리를 내면서 자기 자식에게도 꿈에라도 만날까 무서운 웬수를 만들어주지 못해 안달한다는 사실이다. 아무튼, 여자는 혹여 미래의 웬수가 될지도 모르는 남자를 만나기 위해 약속 장소로 가고 있는 중이다. 줄기차게 하품을 해대면서. 남자에게 채여 질질 짜는 것처럼 눈물을 찍어내면서. 한심해라.

버스 안에서 거리를 내다보고 있으면 세상이 어떻게든 돌아간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 8차선 대로 양쪽 인도를 바삐 활보하고 있는 저 사람들, 횡단보도 앞에 두 겹 세 겹으로 늘어서서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는 저 많은 사람들. 도로를 꽉 메운 차량들 속에, 연도의 빌딩들에 차곡차곡 들앉은 사무실들마다에, 뒷골목에 자리 잡은 어둑신한 건물들마다에······ 운전자들과 회사원들과 방문판매원들과 행상들과 그들에게 딸린 식구들과······.

어찌 되었건 다들 때가 되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또 그러느라 무엇인가를 해서 먹고 산다는 것 아닌가. 그 대열에 합류하지 못할까 봐 조마조마해 하는 건 덜 떨어진 자식의 등을 부지런히 떼밀고 있는 세상의 부모님들이다.

가서 돌아와도 좋으니 가기나 가라. 맞선 장소와 시간이 적힌 종이쪽지를 건네면서 여자의 어머니는 그렇게 말했다. 이혼하는 자식보다 결혼 못한 자식이 더 흉이 된다는 비장한 통고 앞에 여자는 두말없이 종이쪽지를 받아들긴 했는데,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사정없이 졸린 걸 보니 아무래도 아직 때는 오지 않은 것 같다. 아니면 이미 지나갔거나.


호텔 회전문으로 들어서면서 시간을 확인하니 약속시간에서 15분이 지나 있다. 여자는 깜빡 조느라 내려야 할 버스정류장을 놓쳤다. 한 구간을 걸어서 되짚어 오느라 딱 그만큼 늦었다. 택시를 탄다고 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한창 붐비는 시간대인지라 걷는 쪽이 더 빠를 수도 있다. 뛰거나 재게 걷지는 않았다. 뭐, 그럴 필요까지야. 늦은 빌미로 점수를 깎이는 것도 소득(!)이라면 소득이려니. 여자에겐 그런 미필적 고의의 계산속이 있었다.

중매를 선 친척 아주머니가 상대 남자 몰래 눈을 치뜬다. 늦은 것이야 그렇다 치고 차림새가 말이 아닌 것이다. 평소대로 청바지와 티셔츠 차림으로 출근을 했고, 또 그 차림으로 덜렁덜렁 맞선 자리에 나왔으니.

사실, 아침에만 해도 여자는 오늘이 맞선 날이라는 걸 떠올리지 못했다. 어머니가 있었으면 한번쯤 환기시켜 주었을 테지만, 어머니 아버지 두 분 다 결혼 35주년 기념일에 맞춰 친목계원들과 2박3일 중국 광저우 관광에 나서느라 새벽부터 집을 비운 상황이었다. 서른다섯이 넘도록 시집 못 간 딸년 먹으라고 어머니가 다 차려 놓은 밥상 앞에 밥만 퍼서 앉으면 되는 아침때도 거르는 마당에, 맞선 날이라는 걸 알았어도 낭패였으리라.

까마득히 잊고 넘어갔으면 일이 더 커졌을 걸, 여자는 퇴근 전에 무심코 호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가 그나마 쪽지를 발견했다. 집에 들러 옷을 갈아입을 만한 시간적 여유는 없었다. 투피스니 쓰리피스니 따위의 정장은, 정말이지 사양하고 싶은 컨셉인데, 그건 잘 되었다 싶었다. 그런 복식은 주리가 틀린다. 맞선 같은 따분한 일을 더 따분하게 만드는 짓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맞선 상대는 이 켠의 결례를 별로 개의치 않는 눈치다. 의례적인 소개말과 속이 훤한 인사말이 오간다.

인상이 참 좋으시네요.

청바지가 잘 어울리십니다. 젊어 보이고요.

이만하면 시작으로선 나쁘지 않다.

난 바쁜 일이 있어서 먼저 일어설 테니까, 두 사람, 천천히 이야기들 나눠요.

적당한 타이밍에, 중매를 선 친척 아주머니가 자리를 뜬다. 바쁜 일이 있다는 핑계는 너무 상투적이다. 상대 남자가 엉거주춤 일어서자 아주머니가 손사래를 쳐 도로 주저앉힌다.

나올 거 없어요. 그냥 있어요.

두어 걸음 따라나서는 여자에게는 저쪽에 들리지는 않게 혀를 쯧 찬다. 나무라는 눈짓으로 위아래를 사납게 훑어 내리면서. 어머니의 귀에 들어갈 게 뻔하다.

둘만 남자, 정적이라고 할 만한 불편한 침묵이 가로놓인다. 무슨 이야기든 떠들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들도록. 여자는 성실히 대화에 임한다. 기실 대화를 주도해 나가는 건 여자 쪽이다. 여자는 어색한 것보다야 망가지는 게 낫다. 점수야 깎일수록 좋은 것이고.

본인은 초등학교 교사고, 상대남도 중학교에 적을 둔 처지다. 화제는 학교와 학생들 위주로 표면상 풍성하게 전개되는 듯하다. 내용상 하등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문답에 불과하지만. 옆자리 동료 교사하고도 나눌 수 있고, 교사 연수회 같은 데서 처음 만난 타 학교 교사들과도 충분히 교환할 수 있는, 그런 수준의 대화들. 결국은 상투적인······.

상대는 그럭저럭 무난해 보인다. 무난하다는 건 어디까지나 객관적인 평가이고, 여자가 본 주관적인 느낌은······ 밋밋하다. 쉽게 말해 ‘필’이 팍 꽂히지 않는다. 지리멸렬한 연애질과도 촌수가 멀어 맞선이나 봐야 하는 주제에 ‘필’ 운운한다는 게 얼마나 가당찮은 오버인지 여자라고 모르진 않지만, 그래도 그렇지, 형식상 인륜지대사와 관련한 사교 무대가 아닌가.

눈치 채지 못하게 시계를 넘겨다본다. 웬만큼 시간은 때웠다. 여자는 이제 그만 호텔 커피숍을 벗어나고 싶다. 세상에, 호텔 커피숍이라는 데가 맞선 경연장이라는 사실을 낯 뜨겁게 확인하는 기분이란. 세간에 도는 믿거나 말거나 식 입소문을 들은 기억이 난다. 그 호텔 커피숍, 맞선 성공률이 높대지 아마? 씁쓸하다. 로또 1등 나온 곳이라고 큼지막하게 써 붙인 복권 판매소랑 뭐가 다르지?

상대 남자는 이런 일에 익숙한지 태연하다. 혹 무난한 게 아니라, 무딘 게 아닐까? 살짝 의심이 간다. 여자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가 일어서며 말한다.

어디 가서 저녁이나 먹을까요? 좀 이르긴 하지만.

그러더니 대답도 듣지 않고 카운터로 가서 커피 값을 치른다. 앉아 있을 땐 몰랐는데 남자는 무릎이 튀어나온 베이지색 면바지를 입고 있다. 피차일반. 저 남자도 부모에게 떼밀려 나온 모양이지. 그렇게 생각하자 맘이 풀린다. 여자는 군말 없이 상대남자를 따라 근처 밥집으로 자리를 옮긴다.

여기 생태탕 둘이요.

남자는 제멋대로 주문을 하고 나서 뒤늦게 아차, 하는 얼굴로 여자를 쳐다본다. 여자가 이해심을 발휘할 때다.

저기, 맛있어 보이네요.

여자가 턱짓으로 옆 테이블 위에서 끓고 있는 매운탕 냄비를 가리키자 남자가 맞장구를 친다.

전에도 선보고 나면 여기서 밥 먹곤 했는데, 괜찮더라구요.

여자는 속으로 중얼거린다. 저 남자는 다음 번 맞선을 보고 나서도 이 집에 와서 밥을 먹겠구나. 밥을 두어 술 뜨다 말고 남자가 반주를 해도 되겠느냐고 묻는다. 여자는 그러시라고 고개를 주억거린다. 남자가 외친다.

여기, 처음처럼요.

술병과 술잔이 오자 남자는 잔 두 개에다 술을 채운다. 남자가 권하는 술잔을 여자는 별 뜻 없이 받는다. 밥을 먹는 동안은 대화의 의무에서 해방되어 좋다. 남자는 이마의 땀을 냅킨으로 훔쳐 가며 열심히 밥을 먹는다. 그 바람에 이마가 조금씩 드러난다. 서른여덟이라고 들었는데, 사막화 속도가 빠른 것 같다.

소주 한 병을 둘이 나눠 마시고 나자 생태탕 냄비도 바닥을 보인다. 남자는 아쉽지만 참는다는 표정으로 일어선다. 밥값도 남자가 낸다. 하는 수 없이 여자가 가까운 찻집으로 이끈다. 다시 커피를 마신다. 이번에는 지갑을 꺼내는 남자를 만류하고 여자가 계산을 한다. 그리고 헤어진다. 그게 다다.


집 방향이 정반대여서 얼마나 다행인지. 상대 남자는 지하철 역사로, 여자는 버스정류장으로 향한다. 횡단보도를 건너기 전 파리바게트 빵집에 들러 작은 케이크를 하나 산다. 단 걸 유난히 좋아하는 어머니 몫이다. 빵집에서 나와 그 옆 세븐일레븐 편의점으로 들어선다. 생태탕이 짰는지 소주 탓인지 갈증이 난다. 여자는 탄산음료를 집으려다 생수를 고른다.

쉬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여자는 생수를 들이킨다. 뭔가 허전하다. 맞선 후유증 같은 것이다. 서른여섯. 아직 때가 오지 않은 걸까, 벌써 지나간 걸까. 스물일곱 번째, 오늘의 남자를 다시 볼 일은 없을 것이다. 어차피 그쪽도 어른들에게 떼밀려 치른 행사일 거니까.

거 봐, 시간 낭비라니까. 어머니는 과년한 딸을 다시금 뜯어보리라. 나이가 좀 들었다 뿐이지, 내 눈엔 아직까진 괜찮아 보이는데······. 혼수시장에는 젊고 똑똑하고 능력 있는 신붓감들이 넘쳐난다는 걸 모른 채로. 그러거나 말거나, 이제 여자는 한동안 어머니의 등쌀에서 놓여 지낼 수 있다. 물론 주기적으로 약속시간과 장소가 적힌 쪽지를 건네받긴 하겠지만.

타야 할 버스가 오고 있다. 버스가 정차할 지점으로 급히 발걸음을 옮기다가 여자는 한 손이 가볍다는 걸 느낀다. 이런, 또······. 편의점에 케이크 상자를 두고 나왔다. 여자는 가게에서 무엇인가를 사고 값만 치른 뒤 맨손으로 나오는 일이 허다하다. 되돌아가야겠군. 그새 버스는 멈춰 섰다가 더 올라탈 승객이 없자 꽁무니를 보이며 사라진다. 여자는 횡단보도 앞에 서서 맞은편 신호등을 노려본다.             



3


횡단보도를 건너지 못한 남자는 자신이 일하는 사무실로 되돌아갔다. 사무실은 5층에 있다. 남자는 계단을 이용한다. 밖에서 동료들과 점심을 먹고 묻어 올 때에는 하는 수 없지만 지금처럼 혼자일 때에는 계단이 편하다. 2층에서 3층 사이 계단참에서 넥타이를 풀어 양복 주머니에 찔러 넣는다. 3층에서 4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돌면서는 양복 윗도리를 벗어 팔에 걸친다.

사무실은 텅 비었다. 남자는 입구의 접대용 소파 등받이에 양복 윗도리를 걸쳐 두고 자신의 책상으로 간다. 탁상용 달력을 들여다본다. 저거군. 남자는 그날 중으로 처리해야 할 일에 관한 메모를 발견한다. 메모 옆에 느낌표를 두 개나 달아 놓았다. 담배는 명함철 위에 놓여 있다.

남자는 컴퓨터를 켜고 부팅이 되는 동안 창가로 가서 담배를 한 대 물었다. 사무실은 금연구역이지만 퇴근시간 후에는 딱히 제지할 만한 사람이 없기도 해서 은근슬쩍 넘어가는 분위기다. 창을 조금 열자 거리의 소음이 안으로 밀려들어 온다. 남자는 건너편 빌딩의 옥상에 설치된 광고판을 바라보면서 담배를 피운다. 광고 속 여자 모델은 세탁기 위에 올라앉아 팔짱을 낀 채 웃고 있다. 막 삶아낸 빨래처럼 환한 미소다. 남자는 꿈에 그 여자 모델을 안아 본 적이 있다. 끝까지 가기 전에 잠을 깨 버린 게 못내 아쉬웠다.

남자는 담배꽁초를 비벼 끄고, 창문을 닫고, 자기 자리로 돌아와 컴퓨터 앞에 앉는다. 패스워드를 입력해서 메일박스를 열고 받은 메일함으로 들어간다. 그 사이 새로 들어온 메일이 한 통 있지만 제목만 보고 바로 지워 버린다. 일단 몇 줄 아래로 커서를 내려서 이미 열어 본 메일 가운데 하나를 클릭한다. 내용을 한 번 더 읽어본 뒤 답장을 누른다. 그러고는 피아노 건반을 누르듯, 키보드 위에 두 손을 올려놓고 재빨리 키를 두들기기 시작한다.

한참 만에 남자는 작성한 답장을 전송하고 컴퓨터를 끈다. 머리 뒤로 깍지 낀 두 손을 뻗어 기지개를 켠 다음 의자에서 일어난다. 하마터면 빠뜨린 채 넘어갈 뻔한 일을 처리한 것이 다행스럽고도 뿌듯하다. 도서관에서 맨 마지막에 일어설 때의 기분이 이랬었지, 하는 생각이 뜬금없이 끼어든다. 그러고 보니 도서관을 이용해 본 적이 까마득하다. 대부분의 궁금증은 인터넷 검색으로 푼다.

남자는 사무실을 나선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때 이른 무더위도 한풀 꺾였다. 퇴근 무렵 근처 사무실들에서 쏟아져 나온 샐러리맨들로 붐비던 거리도 얼추 소강상태다. 두어 시간이 지나면 뒷골목 어딘가에서 밥과 술을 겸한 회사원들이 약간 풀어진 걸음으로 거리를 다시 메울 것이다. 더러는 호기롭게 2차로 쓸려가고, 더러는 지하철 역사나 버스정류장으로 종종걸음을 치리라.

남자는 회식 술자리가 있을 경우 주로 동료들과 헤어져 혼자 2차를 가는 편이다. 그럴 때는 2차를 간 동료들과 부딪히지 않도록 좀 멀리 간다. 아예 집 가까이 포창마차에서 해결할 때도 있다. 술을 마시고 난 다음날 아침에는 어김없이 후회하게 되지만, 마시기 전에는 끝까지 가지 못한 채 깨 버리는 꿈이나 마지막 회를 놓친 연속극처럼 미진한 것이 늘 문제다. 마침 배도 출출하고, 목도 칼칼하다. 자, 나도 이제 어디 가서 한 잔 하는 게 좋겠군.

남자는 이따금 들르던 생맥주집으로 방향을 정한다. 맥주 맛이야 기본이고 안주도 훌륭한 집이다. 남자는 입맛이 까다롭고 성정이 까다로운 어머니 덕분에 음식에 관한 한 고집이 있는 터다. 그것도 단순히 음식의 맛보다는 식재료의 궁합과 차림새에 더 신경을 썼다. 가령 맥주에 어묵탕이나 생선회의 조합을 질겁하는 식이다. 그래서 푸드코디네이터란 직업에 호감을 품고 여자를 사귄 적도 있다. 정작 그 여자가 차린 식탁은 여자 자신의 블로그에 올라와 있는 사진으로 접한 것이 전부이지만. 남자는 그 푸드코디네이터가 끓여 주는 라면조차 먹어 보지 못한 상태로 절교를 당했다. 푸드코디네이터의 라면은 뭔가 좀 색다르지 않을까.

생맥주집 사장은 독일로 음악 공부를 하러 가서 맥주마니아가 되어 돌아온 고교 선배다. 원래부터 알고 지내던 선후배 사이는 아니고 혼자 스탠드 쪽에 앉아 잔을 기울이는 남자에게 주인다운 친절을 베푼 게 말문을 트게 된 계기다. 몇 차례 이런저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며 증권 동향 따위를 주고받다가 같은 고등학교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대한민국 사회란 혈연을 빼고 나면 학연과 지연 순이다. 그러나 주인은 사장 행세도 선배 행세도 그다지 하지 않는다. 혼자 한두 조끼 가볍게 마시고 싶을 때 딱 편안한 정도로 알은 체를 해주고 물러나는 매너다. 이쪽에서 붙들고 뭔가에 대한 억울함을 하소연하고 싶어도 그런 땐 꼭 사장을 찾는 전화벨이 울리거나, 다른 테이블에서 사장을 불러가기 때문에 길어질 수가 없다. 그런 관계에선 외상도 통하지 않는다.

어이.

사장은 스탠드 안쪽에서 남자에게 손을 들어 알은 체를 한다. 그러고는 이내 홀 구석 룸으로 갔다가 남자가 두 번째 조끼를 새로 시작하고 있을 때 돌아온다.

신수가 훤해 보이는데?

남자는 유쾌한 척 웃으며 무심코 목덜미를 매만진다. 넥타이가······ 없다. 재빨리 아래를 훑어 내린다. 젠장. 윗도리도 두고 왔군. 핸드폰도 거기 들어 있을 텐데. 어쩐지 날이 시원하더라니. 다행히 지갑은 바지 뒷주머니에 들어 있다. 바지를 벗어 둘 일은 없을 거니까. 아무튼 오늘은 이상한 날이군.

남자는 꽤 여러 조끼를 마셨다. 첫 한 모금부터 술이 당겼던 참이다. 안주를 제법 집어 먹었는데도 취기가 빠르게 돈다. 그럼에도 몸속의 뭔가가 몸 밖으로 줄줄 새고 있는 것처럼 허기를 느낀다. 남자는 자신의 몸이 거대한 호수와 연결되어 있는 환상을 본다.


늘 똑같은 자리에 앉는 손님이 그렇게 많은 맥주를 마신 적이 없음을 기억하는 사장이 그쪽을 흘낏 넘겨다보고는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귀찮은 기색이 역력하지만, 다만 남자는 그 사실을 전혀 인지할 수 없다. 남자는 너무 많이 마신 것이다.


이제 남자는 호텔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일행에 대해서는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자신이 합류하는 대로 치러질 행사에 대해서도 완벽하게 잊어버렸다. 그날은 아주 중요한 행사가 예정돼 있었다. 양가 친지들이 어렵사리 시간을 내 모이는 자리였다.

그러니까 그날 남자가 횡단보도 앞에서 잠시 다른 생각을 좇던 그 순간 이후, 일말의 동요 없이 완전무결하게 잊어버린 건, 그 자신의 약혼식이었다.



4


일요일이었지만 여자는 학교에 나왔다. 일직 당번이다. 떠들썩하기 그지없는 아이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텅 빈 교정은 평화롭다 못해 적막하다. 여자는 교무실에만 앉아 있기가 무료해서 담임반 교실로 들어간다. 비뚤어진 책상과 걸상의 줄을 맞추고 교단에 선다. 맨 처음 교단에 섰을 때엔 얼마나 떨렸던지······. 어느새 열서너 해 전 일이다. 부임하고 세 해째 6학년 담임을 맡았다. 그때의 아이들 중 몇몇은 교육대학에 진학했으니까 머잖아 교생 실습을 나올 것이다.

여자는 칠판에다 커다랗게 자신의 이름을 적는다. 임 순 영. 그러고는 돌아서서 빈 책상과 걸상을 향해 말한다. 여러분, 반가워요. 내 이름은 임, 순, 영, 이에요. 앞으로 한 달 동안 잘 지내기로 해요. 여자는 꾸벅 절을 하고는 혼자 풋, 웃는다. 오래 전 교생 실습을 나왔을 때의 일이 떠오른다.

소개를 마치자 뒷줄에 앉은 남자아이가 벌떡 일어나더니 제 옆자리의 여자아이를 가리키며 외쳤다. 선생님, 얘도 순영인데요? 허, 순, 영, 이요. 그러자 반 아이들이 책상을 두들기며 와아 웃어댔다. 또 다른 녀석이 불쑥 맞장구를 쳤다. 에이, 촌스러운 이름이잖아? 허순영이라는 여자애는 책상에 얼굴을 묻었고, 교실 분위기는 더욱 요란하게 뒤집어졌다. 여자는 실습반 담임교사를 돌아보았다. 웃을 일이 아닌데도 왁자하게 웃어대는 아이들을 어떻게 다뤄야 좋을지 모를 때였다. 담임교사는 싱긋이 웃고만 있었다.

여자는 칠판지우개로 자신의 이름을 천천히 지운다. 그 후로도 순영이라는 이름을 가진 학생을 몇 번이나 더 만났던가. 딱 한 번, 순영이라는 이름의 남자아이도 있었다. 강순영이었지, 아마도? 모두 손에 잡힐 듯한데 짧게는 삼사 년, 길게는 십 년이 지난 일들이라니······.

여자는 새로 글씨를 쓴다. 얘들아, 안녕?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얘들아, 잘 지냈니?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여자는 한참을 궁리하다가 자신의 반 아이들의 이름을 생각나는 대로 적어 나간다. 김새롬, 박찬우, 유하늘, 하은지, 고진수, 정수빈, 신해정······ 단번에 외워지는 이름이 있는가 하면 한 학기가 끝날 즈음에야 간신히 틀리지 않게 부를 수 있는 이름이 있다. 지난해에도 아이들의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아 애를 먹었다. 열아홉 개까지 적어 나갔을 때 전화벨이 울린다. 어머니다.

잘 다녀오셨어요? 힘들지 않았어요? 아버지는?

어머니는 여자가 단숨에 묻는 말을 건너뛰고 되묻는다.

이 케이크, 네가 사 둔 거냐?

엄마, 케이크 좋아하잖아?

망할 년, 어미 빨리 죽으라고 염불을 드려라.

어머니가 소리 나게 전화기를 내려놓는다. 여자는 억울한 낯빛으로 휴대전화를 들고 있다가 뒤늦게 신음을 흘린다. 당뇨 때문에 단 걸 삼가야 한다는 사실을 깜빡, 했다.

여자는 의기소침한 채 교무실로 돌아온다. 그새 일어설 시각이다. 주섬주섬 가방을 꾸린다. 행여나, 책상 위를 두 번이나 훑는다. 그러고도 뭔가를 하나쯤 빠뜨리는 일이 잦다. 여자가 일어나려고 의자를 뒤로 뺐을 때 전화벨이 또 울린다. 액정판에 낯선 번호가 뜬다. 광고 전화일 확률이 높은데, 하면서도 전화기를 귀에 갖다 댄다.

저, 임순영 선생 핸드폰 맞습니까?

조심스러운, 그러나 짐작이 안 가는 남자의 목소리다.

그런데요?

아, 네, 송인구입니다.

역시나, 짐작이 안 가는 이름이다. 학부형이 학생의 이름을 댈 순 있지만 재빠르게 더듬어 봐도 반 아이 중에 그런 이름은 없다. 여자는 다소 퉁명스럽게 말끝을 채 올린다.

누구시라구요?

송, 인, 굽니다.

실례지만 누구신지······?

송인구라고, 그저께 만났던······. 시내에서요.

상대방은 끈덕지게 자신의 이름을 되읊고 있다. 여자는 짜증이 나는 걸 겨우 참는다. 대단히 고집 세고 고지식한 타입, 이라고 단정한다. 그리고 자신만만하고도 깐깐한 말투로 대꾸한다.

그렇담 전화 잘못 거신 거네요. 왜냐하면······.

네?

왜냐하면, 전 그저께 아무도 만나지 않았거든요.

지금······.

홧김을 다스리려는지 상대방은 일단 말을 끊었다가 4, 5초쯤 지난 뒤에야 덧붙여 말한다.

농담, 하십니까? 아니면······ 장난, 치시는 겁니까?

여자는 더럭 겁이 난다. 금방이라도 누군가 교무실로 쳐들어올 것만 같다. 여자는 출입문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사정조로 말한다.

정말이에요. 퇴근해서 곧장 집으로 갔으니까요.



5


십여 분 가까이, 의사는 남자의 말을 묵묵히 들었다. 신중하고 사려 깊은 인상을 주기 위해서인 듯,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반쯤 감았던 눈을 치켜뜨면서 남자의 미간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럴 때마다 남자는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부끄러움에 사로잡혔다. 의사의 그런 계산된 제스처는, 적어도 피상담자인 남자가 느끼기에, 마치 자신이 고통 받고 있는 어떤 증상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죄를 고백하고 있는 것 같은 심정으로 몰아갔기 때문이다.

의사는 자기 또한 관찰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거나 무시하는 듯했다. 그럼에도 남자는 의사가 등받이에 기댔던 몸을 앞으로 숙이는 것으로 자신의 말을 중단시킬 때까지, 성실히, 가장 최근에 저질렀던 치명적인 실수를 언급하는 중이다.

나중에 사무실에 벗어두고 온 양복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찾았어요. 진동으로 되어 있더군요. 아무리 그렇기로 수십 번이 넘게 부르르 떨어대도록 인지하지 못했을까요? 평소에는 잠잠할 때도 한 번씩 확인하곤 하는데 말이죠.

의사의 직업적인 통찰로 볼 때 환자는 자신의 상태에 대해 심각한 우려와 모호한 합리화 사이를 오갔다. 물론 거의 대부분의 환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보게 되는 현상이다. 그나마 남자는 정직한 편이다. 감추거나 왜곡하지 않았다. 단지 자신의 깊은 무의식이 두려워하고 있는 무엇인가를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야말로 신중하고 사려 깊은 진단을 위해서는 좀 더 남자 스스로 많은 이야기를 하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다. 빠르지도 더디지도 않게 치료의 타이밍을 조절할 필요도 있다. 의사는 자신이 따분함을 참고 있다는 사실을 자신의 환자가 알아채지 못하도록 종이 위에다 생각나는 대로 끼적거렸다. 약혼 상대에 대한 기피 심리, 혹은 결혼 자체에 대한 공포감. 부모의 관계, 혹은 부모와의 관계. 기타 등등.

어떻게 그런 망각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그렇게 중요한 일을, 다른 일도 아닌 자신의 약혼식을, 딜리트 키로 문서 전체를 날리듯 깡그리 날려버릴 수 있었을까요?

좋습니다. 일단 심리검사를 해 보기로 하지요.

네?

선택적 기억상실이란 말을 들어보셨나요? 

기억상실······증? 제가요?

나가시면 간호사가 설명해 줄 겁니다.

남자는 가까스로 의사의 말을 알아들었다. 시간이 다 되었다는 뜻이었다. 얼떨떨한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사에게 가볍게 목례를 한 뒤 진료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대기실 소파에 앉아 있던 여자의 시선이 남자에게로 쏠렸다.

임순영 님 들어가세요.

간호사의 호명을 받은 여자가 남자를 비껴서 진료실 문 쪽으로 다가갔다. 남자는 무심코 여자를 돌아다보았다.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었다. 어디서 보았을까. 남자는 간호사가 자신의 이름을 몇 번씩이나 부르는 것도 듣지 못한 채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애를 썼다.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기억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므로.《문장 웹진/2008년 4월호》


정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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