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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 · 몸 · 살

  • 작성일 2009-02-23
  • 조회수 8,453


 

젖 · 몸 · 

  



신 혜 진




호텔방은 깨끗했다. 침대시트는 손질이 잘 돼 있어 부드러우면서도 상크름하게 찬 기운이 감돌았다. 새로 지은 호텔이 아님에도 워낙 청소 상태가 좋아 방안에는 먼지 한 톨 없을 것처럼, 모든 집기들이 선명하다. 작지 않은 싱글 침대 두 개와 다탁과 의자, TV, 작은 옷장, 소박한 액자 하나가 전부지만 만족스럽다. 창밖으로 눈길을 주면서 나는 손가락 끝의 거스러미를 이로 잘근잘근 씹었다. 창문만 열면 뛰어들 듯 가깝게 보이는 바다.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짭짤하고 눅눅한 바람. 후텁지근하기보다는 오히려 청신하다.

이곳에 올 때는 기왕이면 일본식 료칸(旅館)에 묵기를 바랐지만 봄꽃이 한창일 무렵인 데다 연휴까지 겹쳐 예약을 할 수가 없었다. 이즈(伊豆)는 바다를 볼 수 있는 노천탕으로 유명해 평소에도 온천장에는 정양을 하러 오는 사람들로 북적인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창밖으로 보이는 이즈의 바다가 눈부시다.

프런트에 내려갔던 동생이 돌아와 당초무늬가 들어간 보라색 챙 모자를 벗어 침대에 던지며 말했다. 아휴, 언니, 더럽게 뭐하는 거야, 오래 살면 부부도 닮는다더니 형부가 하는 버릇을 그대로 하고 있네. 스트레스가 쌓일 때마다 남편이 하던 버릇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비로소 깨닫는다. 남편의 손가락에서 일상적으로 풍기던 침 냄새가 내 손에서 났다.

“원하는 입욕 시간을 적어 넣는 건데, 우리가 너무 늦게 도착했나봐. 자정 무렵은 돼야 차례가 올 것 같아.”

호텔에 딸린 두 개의 노천탕은 객실마다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 각각 다른 모양이었다. 한숨 돌릴 새도 없이 계단을 오르내리느라 땀이 차는지, 동생은 손부채를 부치면서 손수건으로 연신 이마의 땀을 찍어냈다. 광대뼈가 튀어나온 기름한 얼굴이 수척해 보인다. 해산을 한 지 이제 겨우 한 달 남짓, 땀으로 번들거리는 얼굴에는 짙은 화장으로도 미처 감추지 못한 기미가 넓게 끼어 있다. 다시 한 번 찬찬히 동생을 톺아보았다. 창을 통해 들어온 저녁 빛에 기미가 평상시보다 더 도드라지고 볼은 한층 우묵하다. 임신 말기에 조산기가 있어 통 외출을 못 해봤다며, 동경을 떠나면서부터 동생은 내내 들떠 있었다. 하지만 얼굴에 새까맣게 낀 잡티 때문인지 언뜻언뜻 비치는 낯빛이 우울해 보였다. 침대 끝에 걸터앉은 동생의 블라우스가 실그러진 채, 앞섶이 둥글게 얼룩져 있는 게 눈에 띠었다.

“너, 젖이 새는가보다. 패드 안 하고 왔니?”

고개를 수그려 윗옷을 살펴본 동생이 침대 발치에 던져둔 가방을 뒤적였다. 어떡하지? 유축기를 빼놓고 왔어. 당황한 표정으로 가방 앞지퍼를 열어 새 패드를 꺼낸 후, 쪼그려 앉아 블라우스 단추를 풀기 시작한다. 수유용 브래지어의 앞으로 열 수 있는 후크를 따자, 펑 젖은 패드가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유방에서 급하게 젖이 뚝뚝 흘러내렸다. 비릿하면서도 들척지근한 젖 냄새가 침대 주위를 떠돈다.

동생의 젖가슴은 풍만했으나 관능적인 느낌보다 왠지 모를 안쓰러움을 자아냈다. 몇 시간이나 수유를 하지 않아 유방은 젖으로 꽉 차 있다. 부풀대로 부풀어 하드 롤처럼 딱딱해져, 한눈에도 위태로워 보였다. 창호지처럼 얇은 피부는 유선과 푸른색의 정맥이 비칠 정도로 투명하다.

“언니, 컵 같은 것 있으면 찾아다 줄래? 젖을 좀 짜내야겠어. 아퍼.”

동생의 부푼 가슴을 보자, 젖이 돌 때의 짜르르한 느낌이 나에게까지 전해져 온다.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동안 맛있는 음식을 보기만 해도 젖이 도는 기운이 짜르르 했는데 그 때와 똑같은 느낌이다. 이상한 일이다.

내가 해산을 한 날, 새벽에 남편은 곁에 있지 않았다. 육인용 병실에서 젖몸살을 앓느라 뜬뜬해진 몸을 이리 저리 뒤채며 나는 열에 시달리고 있었다. 돌처럼 딱딱해진 가슴은 눈물을 흘리듯 뚝뚝 젖을 흘렸고, 참기 힘들 정도로 아팠다. 빗장뼈며 어깨까지 뻐근하게 통증이 밀려와 괴로워하는 나를 내려다보며 간호사가 난처해했다. 눈가에 졸음이 더께 진 간호사는 연방 하품을 해대며 뜨거운 수건으로 거칠게 내 가슴을 문질러댔다.

―애기 아빠 어디 계세요? 온찜질도 해주시고, 마사지도 해주셔야 하는데…….

늙은 간호사는, 다른 아기 아빠들은 산모가 젖몸살을 앓을 때 마사지를 하며 입으로 젖꼭지를 빨아 젖이 잘 돌도록 돕는다는 말을 덧붙이며 가볍게 혀를 찼다. 목젖까지 차오르는 신음을 입 밖에 내지 않으려 나는 어금니를 앙다물었다.

 

남편은 동틀 무렵이 되어서 만취한 채 돌아왔다. 여섯 개의 침대 사이에서 한참을 비틀거리던 남편은 무너지듯 보호자용 침상에 쓰러져 몸을 한껏 옹송그리고 모로 누워 잠을 잤다. 넘을 수 없는 옹벽처럼 남편의 등은 완강해 보였다. 남편은 그 자세 그대로, 내 쪽으로는 단 한 번도 몸을 돌리지 않았다.

동생이 컵 아귀에 젖꼭지를 겨냥하고 젖을 짜내며 진저리를 쳤다. 유축기도 없이 맨손으로 생젖을 짜려니 당연히 아플 수밖에.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뚝뚝 흐르던 젖은 뜻밖에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아이가 빠는 것과는 힘도 방식도 한참 다르리라. 말려 올라간 블라우스 밑으로 동생의 불어난 살이 비어져 나왔다. 한창때는 꽤 낭창낭창하던 옆구리에, 이제는 둔해 보이는 군살이 볼썽사납게 불퉁그러져 있다. 산후에 조리를 제대로 못한 탓에 붓기가 거의 그대로 남은 것이다. 늙은 호박에 꿀이라도 재어 달여 먹였으면 싶다.

“욱인이, 데리고 올 걸 아무래도 잘못한 거 같어. 모유 먹던 애라 분윤 안 먹으려고 할 텐데……. 느네 시어머니, 아무 말씀 안 하시던? 너, 의외로 모진 데가 있어.”

 

조카의 이름, ‘아키토(旭仁)’를 나는 부르기 편하게 한국식으로 ‘욱인’이라고 불렀다. 동생 집에 도착했을 때 보고, 바로 이즈로 여행을 오느라 아기 얼굴을 본 것은 잠깐 뿐이다. 그러나 조카의 얼굴은 아주 익숙해서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욱인이는 백일사진 속의 내 모습과 놀랄 만큼 닮아 있었다. 겉모습만큼은 전적으로 외탁을 한 것 같았다. 오늘 아침에 동생은 젖을 먹이자마자 트림도 시키기 전에 서둘러 아기를 제 시댁에 데려다주고 왔다.

“쓰읍…… 갓난앨 데리고 무슨 여행을 해. 괜히 신경만 쓰이지. 겨우 이삼 일인데 뭐. 쓰읍…… 괜찮아, 쓰읍…… 근데, 이렇게 하니까 아프긴 너무 아프다.”

한손에 컵을 든 채 웅크리고 앉아 젖을 짜내던 동생이 시선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아픔을 참느라 연신 숨을 크게 들이켜던 동생이 미간을 구기며 가볍게 진저리를 쳤다. 머리칼이 흩어져 땀 맺힌 옆얼굴에 달라붙는다. 아휴, 바보같이 유축기를 왜 놔두고 왔지? 노란빛이 감도는 젖은 컵 바닥을 겨우 적실만큼만 채워졌다. 능숙하게 브래지어에 새 패드를 끼워 넣고 옷을 추스른다. 뺨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주려 손을 뻗는데 동생이 컵을 들고 일어서 화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젖을 변기에 쏟아 붓는지 쪼로록 소리가 새어나온다. 이내 변기 물 내리는 소리와 컵 씻는 소리도 들린다.

“그러는 언니나 형부랑 같이 오지 그랬어? 형부, 요즘도 바빠? 애는 어떻게 하구?”

동생이 화장실에서 나오지도 않은 채, 방을 향해 큰소리로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물어왔다. 정작 물어보고 싶은 것을 이제야 묻네, 하는 투였다. 동생은 갑작스런 나의 방문에 그다지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나 또한 서울에서 부산쯤 놀러가는 기분으로 가볍게 가방을 꾸려 가지고 나온 터였다. 하지만 집을 나오면서 남편에게 같이 가자거나, 어디로 가겠다는 언질을 주지는 않았다. 지금쯤 남편은 손톱을 물어뜯으며, 수십 번이고 핸드폰 숫자판을 눌러대고 있을 것이다. 나는 짐짓 못 들은 척 아무 대답 없이, 가방을 풀어 옷가지와 화장품 따위를 꺼내기 시작했다.

“언니, 무슨 생각해? 내가 하는 말, 못 들었어?”

화장실에서 나온 동생이 손에 묻은 물기를 내 얼굴에 대고 털면서 말했다. 얼굴에 튄 물방울이 선뜻해서 나는 얼른 소매로 물기를 걷어냈다.

“어…… 어? 뭐라고 했었니? 물소리 때문에 안 들렸어.”

“언니도 이제 슬슬 늙는다. 이거, 이거 좀 봐. 눈가에 잔주름 잡히는 거. 내가 아이크림 열심히 발라주라고 그렇게 얘기했는데, 말도 아주 되게 안 들어요.”

먼저 물었던 것은 금세 잊어버렸는지, 내 얼굴 앞으로 바싹 다가앉아 눈 꼬리를 톡톡 건드리며 흰소리를 지껄였다. 실없이 웃는 동생의 눈가에도 긴 잔주름이 접었다 편 흔적들처럼 가로세로 파인다. 우리도 이제 하릴없는 삼십 대 중반의 아줌마라는 사실이 어쩐지 쓸쓸하게 여겨졌다.

동생이 일본으로 건너온 온 것은 벌써 십 년 저쪽의 일이다. 아르바이트와 장학금으로 다니던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일본으로 유학을 와서, 또다시 아르바이트와 장학금으로 학위를 따고, 내처 일본인과 결혼을 해 아예 눌러앉아 버렸다. 왜놈한테 시집간다고, 넘 우세스러워 우째 사느냐면서 어머니는 결혼식에 참례조차 하지 않았다. 한국에는 일 년에 한 번쯤 들어왔지만 친정집에는 들르지 않은 채 조용히 돌아가곤 했다.

서양식 호텔이기는 해도 객실에 딸린 옷장에는 두 벌의 유카타(浴衣)가 나란히 걸려 있다. 동생은 소박한 꽃무늬가 그려진 유카타를 손익은 솜씨로 입었다. 그러고 나서 흰 바탕에 자잘한 금붕어 프린트가 되어 있는 나머지 한 벌을 나에게도 입혀주었다. 오비에 주름이 잡히지 않도록 손톱에 지그시 힘을 주어 쪽쪽 펴는 동작이 날렵하다.

“엄마한테 안 섭섭하니? 몸 풀 때, 나라도 와봤어야 했는데 동기간이라고 하나 있는 걸, 사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사람 구실하면서 사는 거 같지가 않어.”

“어이구, 그러셨어요? 뭘, 새삼스럽게…… 별 소리 다 하네. 지금 이렇게 왔잖아.”

외려 자기가 언니인양 의젓하게 대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동생이 말하는 그 들숨과 날숨 사이에, 그래, 진작 왔음 좋았잖아, 하는 서운함이 깃들어 있음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해산바라지 같은 건 애초에 기대도 안 했다며, 하지만 애 낳느라 열 시간 넘게 진통할 때는 그래도 엄마 생각이 제일 많이 나더라고 동생이 애써 심상한 목소리로 털어놓았다. 유카타의 겉섶이 흩어지지 않도록 누르며 익숙한 솜씨로 허리끈을 돌려 매는 모습을 보며 나는 속으로 놀랐다. 옷 입는 태로 보나, 말을 할 때의 태도 따위가 동생은 이제 일본인에 더 가까워 보인다. 둘이 손을 잡고 어디를 간다 해도 사람들로부터 쌍둥이처럼 닮았다는 말은 이제 더 이상 들을 수 없을 것 같다.

어렸을 때, 어머니와 함께 시내에 있는 목욕탕에 가면 심심치 않게 둘이 쌍둥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살갗이 빨갛게 익도록 탕 속에 들어앉아 있노라면 이따금 팬티만 걸친 때밀이 아주머니가 빨대 꽂힌 봉지우유를 빨면서 잠자리채로 때가 둥둥 더껑이 진 탕 속을 휘저으며 지나갔다. 물방울이 맺힌 봉지우유 한 모금이 어찌나 간절하던지……. 어지간히 몸을 불리고 나면 어머니는 이태리타월로 때를 밀어 주었다. 겨드랑이 사이에 나나 동생을 끼고 앉아 머리까지 감겼다. 그렇게 어머니의 겨드랑이 사이에 거꾸로 몸이 끼인 채 머리를 내맡기다 보면 어머니의 젖가슴이 덜렁덜렁 흔들리며 검붉은 젖꼭지가 볼을 간질이고는 했다. 그러면 나는 어머니의 젖꼭지를 물고 쪽쪽 소리 나게 빠는 시늉을 하였다. 아이구, 이년이 신경 씨이게 왜 이랴! 다 커단 년이! 철썩철썩 볼기짝을 얻어맞고도 나는 쉬이 어머니의 젖꼭지를 놓아주지 않았다.

저녁을 먹으러 일층으로 내려가는 길에 테라스에서 온천으로 이어진 통로가 보였다. 예약한 사람이 아직 오지 않은 틈을 타 노천탕을 둘러보았다. 욕탕은 절벽 위에 올라 앉아 그 몇 걸음 저쪽으로 한눈에 바다가 내려다보였다. 석재로 만들어진 탕 주변에는 푸른색 수국이 한창이다. 가지가 휘도록 탐스럽게 피어있는 수국을 건드리며 그들먹하게 찰랑이는 온천수에서 실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탕에 떨어진 수국 꽃잎들이 잔물결을 따라 둥둥 떠다녔다.

“바다 보면서 목욕했으면 기가 막혔을 텐데 아쉽다, 그치?”

이렇게 미리 구경했으니, 나는 아무려면 어떠랴 싶지만 동생은 정말로 아쉬운 모양인지 연방 아깝다는 말을 했다. 비음 섞인 동생의 목소리에서 응석이 뚝뚝 묻어난다. 민달팽이 한 마리가 수국 이파리를 핥으며 느릿느릿 지나갔다. 달팽이가 붙어 있는 잎사귀 바로 아래, 뜨거운 탕에서는 여전히 김이 무럭무럭 솟아오르고 있었다. 발밑이 저승길인줄 아는지 모르는지 달팽이는 천연덕스럽다.

“언니가 와서 나야 좋지만, 이상하게 맘이 편치가 않네. 형부랑 싸웠어?”

“…….”

“정말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나는 조용히 쉬고 싶어서 왔을 뿐이라고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거짓말로 꾸며댄 말만은 아니다. 일본어를 거의 알아들을 수 없기에 아무리 번잡한 곳이라도 고요했고, 그 속에 침잠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곳에는 내가 받아야 할, 전화가, 없는, 것이다.

“언니, 형부한테 잘 해. 저번에 한국 갔을 적에 형부가 그러더라, 언니 사랑한다고.”

동생의 얼굴에 다시금 알 듯 모를 듯 어떤 음영(陰影) 같은 게 만들어졌다. 허나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사랑? 의처증도 사랑이니? 반문하고 싶은 것을 꿀꺽 집어삼킨다.

“언니, 나…… 이혼 할까? 너무너무…….”

나는 동생이 줄인 말이, ‘너무너무’ 어쨌다는 것인지 얼른 가늠할 수 없다. 혼잣말처럼 갑작스럽게 내뱉은 동생의 말에 나는 어젯밤 일을 떠올렸다. 새벽녘에 요의(尿意)를 느끼고 일어나 미닫이문을 열고 나갔다가 동생 방을 엿보았던 것이다.

묵지근한 어둠 속에, 조금 열린 동생의 방문 틈으로 창백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욱인이가 칭얼대는 소리 사이사이로 동생의 새된 음성이 간헐적으로 흘러 나왔다. 속사포처럼 쏘아대는 동생의 말 속에서 띄엄띄엄, 얏바리(역시)라든가, 쯔바라시(대단해) 같은 몇 개의 단어가 귀에 걸러졌다. 걱정과 호기심으로 문 밖에 서 있기는 했지만 일본어에 귀머거리나 마찬가지인 나로서는 도통 무슨 내용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다만, 말하는 쪽은 애오라지 동생뿐이고, 무척 흥분해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이 나쁜 새끼야!

경멸하는 듯도 하고, 약간의 체념기도 섞여있는 분명한 모국어였다. 씹어 뱉듯 내던져진 그 말은 잘 벼린 줄칼처럼 차갑고 까칠했다. 온전히 의미를 해독하기 어려운 그 한 마디가 나로 하여금 문 옆으로 한 발짝 다가서게 만들었다.

비로소 제랑(弟郞)의 모습이 눈에 잡혔다. 제랑은 목을 길게 늘어뜨린 채 동생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순간, 왜 동생만이 그토록 일방적으로 화를 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궁금하지 않았다. 한 장의 사진과도 같던 그 장면은 순식간에 뒤섞이고 윤색되어 종당에는 ‘외로움’이라는 기호 하나로 내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외로움의 주인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끝내 알 수 없었다. 불처럼 화를 낼 수밖에 없었던 동생의 것인지, 무릎을 꿇고 앉아 아무 변명도 하지 않던 제랑의 것인지, 그도 저도 아니면 그 새벽 예기치 않은 상황을 문밖에서 가슴 졸이며 바라보아야 했던 나의 것인지……. 그리고 말을 하지 않았지만 늘 몸과 눈빛으로 외로움을 토로하는 또 한 사람이 떠올랐다.

결혼을 하고 나서 남편은 하루에 열 번도 넘게 집으로 전화를 했다. 잠깐 시장에라도 갔다 오는 길이면 열쇠구멍에 열쇠를 꽂으면서도 끈덕진 전화벨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그랬다. 나도 처음에는 그게 다 내가 사랑받으며 살고 있는 행복의 증거라고……. 보여줄 수 있는 것이라면 지나는 사람들마다 붙잡고 보여주고 싶을 정도로 자랑스러웠다. 핸드폰이라는 물건이 나오고 생일 선물로 그것을 받아 들었을 때, 나는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족쇄가 될 것인지 미처 알지 못한 채 찔끔, 눈물을 흘릴 정도로 고마워했다.

―집에만 있는 여자가, 핸드폰은 뭐에다 써? 괜한 돈 썼어요. 아니, 이참에 나, 전에 다니던 직장 다시 나갈까? 정 팀장이 그러는데, 이러고 있지 말고 다시 나오는 게 어떠냐고 그러던데. 아닌 게 아니라, 어떻게 들어간 직장인데 싶기도 하고.

―정 팀장? 그 놈이 왜 남의 유부녀한테 전화질이야? 언제 둘이 만난 거야?

남편은 손톱 주변의 거스러미를 이로 잘근잘근 물어뜯으며 빠른 어조로 물었다. 남편의 손가락 끝은 늘 그렇듯이 침독이 올라 빨갛게 부어 있었다.  

―어제 낮에 통화 했어요. 정 팀장이 나랑 죽이 잘 맞았던 거, 자기도 알잖아. 왜 그렇게 예민하게 굴어요? 아휴, 그리고 그것 좀 물어뜯지 않음 안 돼? 애도 아니고.

그 후로, 남편은 주로 핸드폰과 집 전화를 번갈아가며 울려댔다. 핸드폰은 전원을 꺼 놓아도 안 되고,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느라 받지 못해서도 안 되었다. 어디야, 또는, 누구랑 있는데, 단 두 마디가 그의 애정 표현의 거의 전부였다. 집이라고 대답하면 그는 다시 집 전화를 걸어 재차 확인을 했다.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가슴이 철렁철렁 내려앉았다. 등장질 하듯 집요하게 걸어대는 남편의 전화에 점점 신물이 나기 시작했다. 더러 심사가 틀어져, 집에서 전화를 받으면서도 백화점이라거나, 버스정류장이라고 거짓말을 늘어놓을 때도 있었다. 그러면 그는, 왜 그렇게 조용하냐고 낮게 깔린 음성으로 물어오는 것이었다. 지하철 안에서 남의 전화기가 울려도 나는 화들짝 자지러졌다.

커피를 마시러 온 이웃집 여자들은 낮에 집으로 전화를 하는 그를 두고 신랑이 찬찬한 성격인가 보다고 말했다. 앞에서 추어세우고, 뒤에서는 흉잡는 앞집 여자는, 당신 남편이 여자 마음을 잘 아는 사람이라고 부러운 척 하기도 했다. 새댁 얼굴 부석부석한 것 좀 봐. 간밤에 바빴어? 자기는, 알면서 뭘 그런 걸 다 물어봐, 젊은 부부가 밤에 잠 안자고 바둑 둘까봐? 나이든 여자의 질펀한 육담에 여기저기서 간살맞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여자들의 음탕한 웃음이 베란다를 뛰어넘고 놀이터를 지나 한낮의 플라타너스 잎사귀를 까르르 떨게 만들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나는 남편과 부부관계를 하면서 눈을 뜨지 않게 되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눈을 감은 채 아무런 감정 없이도 교접이 가능해졌다. 왜냐하면 상상 속에서 남편 아닌 정 팀장과, 눈이 서글서글하고 몸매가 좋은 남자 가수와, 심지어는 대머리 아파트 관리인과 정사를 하고 있었으므로……. 단언컨대, 육체적으로 불쾌하거나 불편하지는 않았다. 하여 딱히 억지로 바람을 피우려고 애쓸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내가 덤덤하게 남편의 몸을 받아들이는 날이라고 해서 남편의 의심이 거두어지는 것 또한 결코 아니었다. 부부관계는 그저 부부가 공통적으로 갖게 되는 습관에 가까운 것이었다. 남편의 몸은 점점 이물 없고 친숙해졌으나 좀체 친밀감까지 생기지는 않았다. 남편의 의심과 한 달에 몇 번 있는 부부관계와 그러저러한 일들은 차츰, 맘에 들지는 않지만 아무렇게나 입기에 편안한 운동복처럼, 익숙하게 일상의 패턴이 되어갔다. 다만 정념과 쾌락에 내맡겨진 몸이 저 혼자 허리를 비비 틀며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그럴 때면 몸과 생각을 철저히 분리시킬 수 있다는 사실과 그 중 한 가지만 갖고도 그럭저럭 만족하며 살게 된 나 자신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첫아이를 임신했을 때, 남편의 의심처럼 나 또한, 뱃속의 아이가 과연 정 팀장의 아이인가, 남자 가수의 아이인가, 아니면 아파트 관리인의 아이인가가 의심스러웠다.

 

“언니, 안 먹고 뭐 해? 아참, 언니 비린 거 싫어하지. 에이, 괜히 석식 포함 요금으로 했나보다. 식당 찾으러 다니기 귀찮을 것 같아서 그랬는데…….”

사실 저녁 식탁은 훌륭한 편이었다. 메밀국수는 차졌고, 장어덮밥과 생선회는 알맞게 촉촉했다. 그러나 나는 적당히 먹는 시늉만 하다가 붉은색 옻칠이 되어 있는 나무젓가락을 슬그머니 내려놓고 말았다. 시차적응이 안 돼서 그런다고 농담을 하자, 동생이 킬킬거렸다. 이틀 동안 잠을 설친 탓에 머리가 어지럽긴 했다.

장어가 얹혀있는 밥공기를 들고 동생이 밥을 먹는 동안 나는 손가락 끝을 물어뜯었다. 또! 왜 그래? 그거 좀 하지 말라니까! 아이를 야단치듯 낮은 목소리로 재우치는 소리에 나는 언제부터 내 손이 입술로 가 있었는지 되새겨보았다. 손에 묻은 침을 냅킨에 닦고 멍청하게 식탁보를 바라보다가 체크무늬 식탁보를 손가락에 돌돌 말았다 풀었다 하기 시작했다. 식탁보 자락에 달라붙은 실마리를 잡아당기자 실이 길게 끌려나온다. 헝겊 밑단에 쪼글쪼글한 주름이 잡혔다. 반복해서 실을 당겼다 풀었다 하면서 동생의 식사가 끝나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딱히 바쁜 일도 없는데 왠지 초조하다. 전화벨 소리가 당장이라도 중이(中耳) 끝에 붙어있는 고막을 잡아챌 것만 같다. 식당 안의 비린내에 갑자기 욕지기가 치민다. 생목이 올라 미간에 주름을 그으며 신 침을 삼켰다.

그때 키가 작고 오종종한 이목구비의 남자가 다가와 굽실거리는 태도로 내게 뭐라 뭐라 말을 걸었다. 갑작스런 남자의 출현에 눈만 껌벅이며 대답을 않자, 그가 고개를 외로 꼬며 동생에게 또 무슨 말인가를 건넸다. 동생이 킬킬대며 그에게 짤막하게 대꾸했다.

“이 집 지배인이라네. 음식이 입에 안 맞느냐고 묻는데? 어린이 손님용 돈가스라도 가져올 테니 먹겠느냐고……. 저 사람이 그러는데 언니가 중국인 같대. 나보고 까다로운 외국인 접대하기 힘드시겠대.”

나는 지배인에게 손짓 발짓 섞어가며, 저녁 맛있게 먹었습니다, 분명한 한국어로 말했다. 그가 동생을 쳐다보며 고개를 갸우뚱해 보인다. 동생이 웃는 낯으로 통역을 했고, 그가 소데스까, 스미마셍 스미마셍(아, 그렇습니까?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을 연발하더니 몸을 돌려 주방 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나에게 말을 걸어올 사람도, 내 말을 기다릴 사람도 동생 외에는 없는 곳인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다.

동생이 자기 앞의 밥과 국수를 다 먹어치우고도 내 앞의 음식까지 집적거렸다. 젖 감질 하는 아기를 둔 산모라면 으레 그럴 법한 일이긴 하지만, 동생은 몰라볼 정도로 먹는 양이 늘어 있었다. 지금쯤 동생의 가슴에서는 유선을 돌아 나온 유즙이 맹렬하게 유방을 채우고 있을 것이다. 욱인이의 말캉거리는 볼이 떠오른다. 그러고 나자 젖이 돌 때의 저릿함이 나에게도 전이되어 다시금 유두 주위를 맴돈다.

지금쯤 아이는 어떻게 하고 있을까? 떠올리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애썼던 상념들이 한꺼번에 몰려든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이는 자다가 툭하면 경기를 일으키듯 엄마를 찾으며 울었다. 그런 아이를 어디 맡기고 집을 비우는 일도 조심스러워서 나는 끝내 직장에 나가는 일을 포기했다. 하지만 내 발목을 틀어쥔 채 옴짝달싹 할 수 없게 만드는 아이가 또 다른 족쇄처럼 느껴져 때때로 아이를 미워하기도 했다. 젖을 떼고 난 후에도 젖을 만지작거리다 잠드는 습관은 아직까지 고치지 못했다. 며칠 새 어떻게 잠을 청하고 있을까. 아이를 생각하자, 가슴 한쪽이 서늘해진다.

“어디 갔다 온 거야? 형부랑?”

“어, 그런 게 있어. 그냥 바람 쐬러…….”

“혼자?”

동생의 물음은 집요하다. 하지만 나는 남편에게 그랬듯이 동생에게도 아무 말을 할 수가 없다. 며칠 전 정 팀장과 만났던 이야기를 한다면 거듭 형부에게 잘해야 한다며 덮어놓고 힐난할 게 너무나도 뻔하다.

 

돌돌 만 석간신문을 바통처럼 들어 올리며 정 팀장이 카페로 들어왔다. 그는 어깨를 심하게 건들거리는 특유의 걸음걸이로 다가와 소파에 몸을 묻었다. 오랜만에 만난 정 팀장은 별로 변한 게 없어 보였다. 각진 턱에 굴러 떨어질 듯 튀어나온 눈, 얼굴 한가운데 둔감하게 뭉쳐있는 코, 달라진 것이 있다면 전보다 배가 더 나와 있다는 것 정도였다.

―어이구, 재미가 좋은 갑제? 통 코빼기도 안 비 주고. 이기 얼마 마이고, 이?

정 팀장이 직장 동료였던 데다가 남자이긴 했어도, 마음이 잘 통하는 친구로서 나는 그를 좋아했다. 아무리 심각한 이야기도 그의 걱실걱실한 말투를 거치고 나면 이상할 만큼 그다지 무겁게 여겨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남의 상처를 우습게 보는 것은 아니었다. 정 팀장의 입은 일종의 필터와 같아서, 고민이 있을 때 그와 한참 수다를 떨고 나면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곤 했던 것이다.

기분 좋게 취한 내가 이차를 가자고 제의했고, 삼차를 가자고 졸랐으며, 급기야 여관 앞에서 막무가내로 들어가자고 그의 양복저고리를 잡아끌었다. 아이고, 아주마이, 아주 마이 취해 삣네예. 서방님이 계속 전화할 낀데, 나는 싫다는 정 팀장을 내버려둔 채, 줄줄 늘어진 여관 대문의 비닐 포장을 헤치고 삐트적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의 촉수 낮은 붉은 조명등은 흔하게 생긴 휴지통마저 선정적인 보라색으로 바꿔놓았다. 그 붉은 등 아래 정 팀장이 책상다리를 하고서 앉았다.

―니가 들오라 캐가 들온 거 아이다. 여자 혼자 이런 데 들어오는 게 마땅치 않아가 ……. 니를 내 친구로 생각해 하는 말이지만서도, 취해서 이러는 거 내는 정말 싫다. 곱게 디비 자든가, 택시 잡아 주께 드가든가 그캐라.

정 팀장은 윗저고리만 의자 위에 던져놓고는 양말도 벗지 않은 채 침대 위로 냉큼 올라갔다. 그리고 이내 잠이 들었는지 우렁우렁 방안을 울리며 코를 골기 시작했다. 나는 냉장고를 열어 생수를 꺼내 마셨다. 생수 한 통을 다 마시고 나자 어렴풋하게 정신이 돌아왔다. 열심히 코를 골며 자고 있는 정 팀장이 야속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우직해 보이기도 하고, 병신 같아 보이기도 했다. 나는 곱게 잘 것인지 아니면 정 팀장 말대로 당장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갈 것인지 판단을 내리지 못한 채 망설였다. 그냥 돌아간다 해도 남편의 닦달에 곱게 자기는 어려울 터였다.

화장실로 가 한바탕 토악질을 하고 나서 양치질을 하고 돌아와 나는 살그머니 침대로 올라갔다. 벽 쪽으로 바짝 돌아누운 정 팀장의 넙데데한 등짝이 들먹거릴 때마다 참기 힘든 소리가 났다. 실로 굉장한 코골이였다. 이대로는 잠을 자기 힘들다는 생각에 TV를 켰다. 가슴이 수박통 만한 백안의 여인과 엉덩이 근육이 잘 발달된 흑인 남자가 브라운관 속에서 한창 방사를 치르고 있었다. 열에 들뜬 신음 소리가 스피커로 흘러 나왔다. 나는 얼른 리모콘을 집어 들어 볼륨을 0으로 낮추었다. 채널을 돌리자, 올이 성근 그물 같은 속옷을 입은 여자가 다리를 벌린 채 마스터베이션을 하는 중이었다. 화면에 깔린 음악은 미미한 진동만이 느껴졌지만 여자의 표정은 한없이 농염하여, 저것이 과연 연기일 뿐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잠자코 그 여자의 쾌락을 눈여겨보고 있자니, 배꼽 아래에서 뜨거운 것이 뭉근하게 치받는 느낌이 들었다. 이윽고 불두덩 아래가 축축해져왔다. 얼마 후, 몸엣것이 흐른 것처럼 속옷이 젖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지퍼를 내리고 팬티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정 팀장이 깨어나면 어쩌나 신경이 쓰였다. 불현듯, 내 삶에는 어째서 몸과 마음이 일치하는 순간이 이다지도 없는 것일까 하는 새삼스러운 불만이 치밀었다. 눈으로 화면을 좇으며 남몰래 쾌락에 탐닉하면서도 이 요령부득한 현실이 난처하고 부끄러운 한편으로, 무언가 매우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와중에서도 육체만은 저 혼자서 거늑한 포만감을 만끽하고 있었다.

남편은 밤새 잠들지 못했던 듯 거칠한 얼굴로 거실 창 앞에 석고처럼 서 있었고, 나는 입을 다문 채 그의 곁을 지나쳐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소리 나지 않게 조심해 가면서 가방을 쌌다. 뜻밖에도 남편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붙잡으려 하지도 않았다.

남편은 왜 그랬을까? 나는 수국 위의 달팽이처럼 발밑의 위험이나 혼란을 예기치 못했던 것은 아닐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남편의 성정을 몰랐다면 모를까, ‘단지 취했기 때문에’라는 것은 이유가 되지 못한다. 혹여 어떤 빌미를 만들어 자연스럽게 파국으로 가는 길을 내려고 애썼던 것은 아닐까.

저녁을 먹고 나서 우리는 호텔 주변의 산책로를 걸었다. 삼나무 숲에서 불어온 바람이 동생의 머리카락을 흩어놓고, 강아지풀 위를 뛰어다니다가 가뭇없이 사라졌다. 그 결에 동생에게서 풍겨 나오는 젖 냄새가 솔솔 나에게까지 끼쳐왔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이혼, 하고 싶으면 해. 요즘 세상에 이혼이 무슨 흠이니?”

동생이 의외라는 듯이 수굿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말고, 길가의 강아지풀을 뽑아들었다. 개꼬리처럼 생긴 이삭만을 남기고 줄기는 손톱으로 잘라냈다. 그것을 코 밑에 수염처럼 붙이고 윗입술을 들어 올려 떨어지지 않게 고정시켰다.

“언이, 이거, 생강나? 우이 어여서 이여구 노라짜나.”

강아지풀 수염을 단 동생이 우스꽝스러운 입 모양으로 말해 놓고는 킬킬대며 웃었다.

“생각나. 아카시아 줄기로 파마도 해주고, 삘기도 불고 그랬는데……. 얘, 그때, 거북탕 가면 엄만 왜 그렇게 우유 한 봉지에 벌벌 떨었다니? 그까짓 거, 얼마나 한다고.”

어느새 강아지풀을 떨어뜨린 동생이 글쎄 말야, 대답한다. 짙은 그늘의 삼나무 숲 속에 매복해 있던 어둠이 산책로 주변으로 몸을 낮추며 슬금슬금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노천탕의 물은 좀 뜨거운 것 같다. 밤공기에 한껏 오그라들었던 몸이, 뜨거운 탕 속에서 금세 풀어졌다. 물 밖으로 머리만 내놓은 채 앉아 있으니 머리는 아주 차가워지고, 몸은 나른해진다. 머리 위로 다보록한 수국 꽃송이가 닿을락 말락 고개를 숙이고 있다. 몇 분 되지 않아 기분 좋은 노곤함이 느슨하게 밀려왔다.

“아키토가 보고 싶네. 웃기지? 그 애 옆에 있을 때는 한 번도 그런 생각 안 해 봤는데……. 보이지 않는 끈이 아키토랑 나랑 단단히 묶어놓은 것 같단 생각이 들어……. 언니, 머리 위에 수국 좀 봐. 꼭 구름 같어. 하늘색 수국, 꽃말이 뭔 줄 알어?”  

“아아니, 뭔데?”

“나도 몰라. 알면 물어봤겠어?”

나는 어쩐지, 동생의 망설임의 근원을 알 것도 같다. 햇살 밝은 한낮에는 보이지 않다가도 안개 자욱한 새벽이나 흐린 날엔 제법 잘 보이는 거미줄처럼, 관계에 균열이 갈 때 비로소 그런 게 있었지 싶은 끈. 남편과 아이 그리고 나를 엮고 있는 끈은 얼마나 튼튼한 것일까. 물속에 몸을 담근 채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다. 별안간 동생이 물 밖으로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웠다. 동생의 느닷없는 행동에 나도 엉거주춤 일어났다.

“가슴이 아퍼, 언니. 쓰읍…… 언니, 어떻게 좀 해 봐봐. 가슴이 아퍼…… 쓰읍…… 죽겠다구!”

동생이 양손으로 유방을 감싸 쥐고 탕 밖으로 서둘러 나갔다. 아차 싶었다. 호텔에 도착한 후로 약간의 젖을 짜낸 후 한참이 지났건만, 동생이 젖몸살을 앓고 있다는 생각을 미처 못 한 것이다. 갑자기 따뜻한 물속에 들어앉아 있어서 피돌기가 빨라져 통증이 한꺼번에 몰려든 모양이다. 동생은 눈을 찡그리고 미간을 한껏 좁히고 앉아, 제 가슴을 건드리지도 못한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이렇게 돌아앉아봐, 좀 보게.”

동생의 유방에서 방울방울 유즙이 떨어졌다. 욱인이가 곁에 있었다면 꿀꺽꿀꺽 흐뭇한 소리를 내면서 그 젖을 마셨으련만, 아니 유축기라도 있었으면 아쉬운 대로 동생의 아픔을 삭일 수 있으련만……. 손만 대도 아픈지 동생은 으으으, 몸서리를 쳤다.

“안 되겠다. 내가 빨아줄게. 그렇게 하면 아프진 않을 거야.”

동생은 하는 수 없이 내게 젖꼭지를 내맡겼다. 나는 동생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젖을 빨기 시작했다. 유두에 맺혀 방울져 떨어지던 젖은 내가 입을 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입천장을 쏘며 마구 뿜어져 나왔다. 달착지근하고 따뜻한 젖이 입안에 가득 고였다. 나는 차마 그것을 뱉어낼 수가 없었다.

희미한 가등 아래서 동생은 우는 것도 같고 웃는 것도 같은 묘한 표정을 한 채 내게 몸을 맡기고 있었다. 힘없이 늘어져 있던 동생의 손이 어느 순간 내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동생의 젖을 빨며 나는 공항에서 로밍 신청을 해 둔 핸드폰을 어디에 두었는지를 생각했다. 남편은 불안정하게 손톱을 물어뜯으며 연신 핸드폰을 눌러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밤의 한가운데 잠겨 있는 바다에서 파도소리가 밀려들었다.

이즈 반도의 만월(滿月)이 강물처럼 조용하게 동생의 젖은 머리카락 위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문장웹진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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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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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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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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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 식물원

야생 식물원 하가람 식물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다이아몬드 모양의 철골로 둘러싸인 거대한 유리 온실에는 열대와 지중해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이국적인 식물이 자란다고 했다. 한 달 전 나는 식물원 근처에 있는 여러 호텔을 찾아 은규에게 링크를 보냈다. 보통 때의 그라면 어디든 좋다고 했을 것이다. 레스토랑도, 카페도, 동네의 작은 아이스크림 가게조차도 모조리 내 선택에 맡기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날 은규는 이미 예약한 곳이 있다고 하여 나를 놀라게 했다. 은규가 보내 준 링크를 열어 보았다. 넓은 통유리 창 너머로 식물원과 공원이 내다보이는 스위트룸이었다. 나는 조금 들뜬 채 답장했다. — 우리가 만난 지 곧 1년이래. 믿어져? 1년이라는 시간은 내게 유별났고 은규에게는 별다른 감흥이 없는 것이었다. 그가 전에 사귄 여자친구는 단 두 명인데 각각 4년, 5년을 만났다고 했다. 매번 석 달도 채 넘기지 못하는 나와는 달랐다. 이따금 은규에게 이전 연인들에 대해 물었다. 그들이 어떤 성향의 사람이었고 어떤 외양을 가졌는지 궁금했다. 처음에는 응응, 하며 대꾸해 주던 은규는 내가 그녀들의 음악 취향이나 살던 동네처럼 구체적인 정보까지 캐묻자 태도를 바꾸었다. 기억 안 나. 그는 말했다. 다 옛날이야기라고. 그 후로는 이전에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그녀들을 생각했다. 눈, 손톱, 말투, 그리고 신발. 나와 닮았을지, 닮았다면 얼마나 닮았고 다르다면 무엇이 다를지도. 상상을 이어 가다 보면 늘 한 가지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은규는 한 번도 애인과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까 여자와 밤을 보내는 일이 오늘 그에게는 처음이었다. 서른을 넘긴 남성에게서 보기 드문 경우였지만 그가 처음인 게 좋았다. 그 점이 무엇보다도 나와 그녀들을 구분 지어 주는 것만 같았다. 차창에 머리를 기대었다. 햇볕에 데워진 창문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인터넷으로 보았던 화려한 꽃과 기다란 나무들을 떠올렸다. 노랗고 푸르고 분홍빛이 맴도는 공간을. 여름 휴가철이었고 도로는 차들로 빽빽했다. 졸음 껌을 씹는 은규를 보며 말했다. “오늘은 내가 운전하고 싶었는데.” “다음에. 너 힘들어.” 은규가 말했지만 나는 안다.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그는 내게 차를 맡기지 않을 것이다. “보면 놀랄걸? 너무 잘해서?” 나는 허리를 세운 채 한 손으로 반원을 그려 보았다. 휙휙. 입으로 소리 내며 운전대를 쥔 그를 따라 했다. 그가 웃었다. 머릿속으로 주행하기. 그것은 나만의 놀이였다. 캠퍼스 변두리에 있는 H관 1층, 5평 남짓한 주차관리실에서 상상력을 충족시켜 줄 만한 것은 많지 않았다. 먼지 쌓인 커피믹스와 낡은 소파, 책상 위에 시간별로 놓여 있는 분홍색, 파란색, 노란색 주차권들. 지겨운 서류, 서류, 서류. 드물게 실장이 자리를 지키는 날이 아니면 대체로 혼자 그곳에서 일했다. 사람들이 찾아와 주차권을 사거나 정기 등록을 마친 후 돌아가면 나는 모니터에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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