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하구 사람들

  • 작성일 2010-02-24
  • 조회수 1,149

하구河口 사람들
이상인





일 년 만에 겨들어왔으면 년아, 훔쳐간 돈부터 내놔야 될 거 아냐, 이 염병할 년아 / 그랑께 시내에 가잔 말여, 돈 찾아 줄 팅께  어여 가, 지랄 떨지 말고오 / 가주와 당장 찍어 준다니께, 육갑이네 저년이 / 나발 불덜 말고오 가자니께 / 그놈한테 붙어 처먹지 오긴 왜 와, 이 미친년아, 여개가 무신 여관이여 여인숙이여 / 당장 갈 팅께 이혼부텀 허자 안혀어 / 한 번 속지 두 번 속간디, 이 염병할 년아…….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점심도 거른 채 내리 잠 속에서 허우적거린 탓이었다. 수분이 모조리 빠져나가 돌덩어리처럼 그대로 가라앉아 버린 듯싶었다. 바짝 메마른 핏줄기가 온몸을 다시 탱탱하게 휘감을 때까지는 어떠한 움직임도 해낼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안간힘쓰듯 몸 이곳저곳을 움직여 본다. 어김없이 이어지는 앙칼진 여자 목소리와 우물거리는 사내의 목소리가 팽팽하게 내 몸 이쪽저쪽에서 조금씩 살아나고 있었다. 싸움 소리는 여전하다. 번차례로 이어지는 앙칼지고 우물거리는 소리. 나는 싸움 소리를 피해 버린다.

빗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나뭇잎을 뒤흔드는 바람 소리뿐이었다. 슬리퍼 소리가 짜증스럽게 시멘트 바닥을 긁었다. 그네들 싸움엔 이제 말리는 사람도 없었고, 마당을 기웃거리며 구경하는 사람조차 없는 모양이었다. 어느 한쪽이 더 난폭해진다거나 수그러드는 기미도 없이 어제 저녁부터 계속되는 지겹고 싱거운 싸움일 뿐이었다. 조금만 한쪽으로 기울면 끝나는 싸움이었다. 어차피 양쪽 다 갈라선다는 한 매듭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팽팽히 맞선 상태로 집 안만 어수선하게 만들고 있었다.

넓은 터에 이리저리 맞붙인 낮은 지붕들, 뒤채를 빼놓더라도 마당을 둘러막은 방이 자그마치 열둘이었다. 매몰차게 닫히는 방문 소리에 못이기는 체 한쪽만이라도 눈치 보며 숙여야 옳았다. 나서서 말리거나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 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들어 보라는 듯, 더 기를 쓰고 소리를 질러대는 통에 모두들 혀를 내두른 끝이었다. 여자 쪽에선 아예 애원하다시피 법원에 가 주길 요구했고, 사내도 도장 찍어 줄 테니 백만 원부터 당장에 내놓으라는 것이다. 법원에 가서 도장 찍어 주면 주겠다는 여자나 줘야지 찍어 주겠다는 사내나 도통 물러설 기미가 없었다.

나뭇잎을 몰아치던 바람이 이번에는 화장실 문을 벌렁 열어젖혔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다. 안 되면 가방 싸야지 별수 있어? Y의 말이 떠오른다. 느들이 제대로 일을 못 한다 이거야. 흘려 버리려고 해도 그 말만 되씹으면 부아가 치밀어올랐다. 설령 그런 말을 김 반장한테 들었다 하더라도 Y는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었다. 뒤틀어진 팔이 아니라면 안으로 굽어야 정상이지, 올 때만 해도 그 정도 단가야 아무데 가서라도 받는다고 한 게 누군데 이제 와 일을 하니 못하니 떠드는가. 지미. 일꾼이 없다며 불러들일 땐 언제고?

비 끝의 바람은 거칠게 불어댔다.

찢겨진 방충망이 너덜너덜한 창가로 무릎걸음으로 다가갔다. 바람살을 견디다 못해 떨어진 나뭇잎들이 시멘트 바닥에 너저분하게 들러붙어 있었다. 바람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사내는 마당 한 귀에 놓인 젖은 평상에 버릇처럼 다리를 꼰 채 앉아 있었다. 전혀 적의라고는 찾을 수 없는 앉음새였다. 버릇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우물거리고 있었다. 비질을 하면서도, 마당을 서성이면서도, 옆에 사람이 있거나 없거나 우물거렸다. 사내가 잦아들면 여자도 잦아들었다. 아마 여자는 주인 할머니가 쓰고 있는 방 마루쯤에서 사내와 대치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조금 더 창 쪽으로 몸을 밀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일을 못 할 정도의 바람은 아니었다. 오전에 비가 그쳤다면, 아니 빗줄기가 가늘어지기만 했어도 벌써 깨웠을 것이었다. 어차피 끝난 일인지도 모른다.

 

이쯤이다 싶었을 때 나는 골목을 확인했다. 보안등 달린 전봇대를 확인하고 꺾어들지 않아서 몇 번이나 미로 같은 골목을 헤맸던 적이 있었다. 골목길은 뒤엉켜 버린 거미줄 같았다. 골목에 처음 들어설 때 길잡이를 해주던 정 대리의 말을 거꾸로 하나하나 되새기며 익숙해질 때까지 식당과 숙소를 찾곤 했다. 전봇대에서 오른쪽으로, 철거라고 쓴 붉은 페인트 글씨가 보이면, 왼쪽으로 길을 꺾었다. 공중전화가 나올 때까지 걷다가 오른쪽으로 나서면 동네 큰길이 나설 것이었다. 식당은 그 끝에 있었다. 덜렁거리는 보안등 밑에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 을씨년스러웠다. 골목에 남은 집이라곤 이제 몇 집 되지 않았다. 방문이 열어젖혀진 빈집들, 고인 빗물에 빠진 신문지, 욕뿐인 분필낙서들은 붉은 페인트 글씨에까지 이어졌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골목을 빠져나오면서 마음이 무거웠다. 헐렁한 못 주머니를 허리에 찬 채 시커먼 하수에 비친 내 모습을 발견했을 때처럼. 걸음을 옮길 때마다 이사이사의 숫자가 눈에 띄었다. 돈 좀 벌어 보겠다고 나선 길이라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을 제대로 못 한다고? 뒤따라 드는 목수 팀 일손 놀게끔 늑장 부린 적 한 번 없었고 잘못됐다고 철근을 뜯어 본 적도 없었다. 게다가 잡부들마저 꺼리던 하수구 일까지 마다 않고 해버리지 않았던가. 이유가 되지 않는 소리였다. 오히려 P와 김 반장과의 마찰이 화근이리라 싶었다. 김 반장이 가슴에 그 일을 담아 두고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그 날은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하지만 쉬고 싶었던 우리들은 투덜거리면서도 우의를 입고 나설 수밖에 없었다. 사십 미터가 넘는 하수구 속에 기어 들어가 거푸집을 뜯어내는 작업이었다. 하수구에는 풀어진 화장지에다가 걸러지지 않은 내용물들이 둥둥 떠내려오고 있었다. 곁에만 가도 코를 싸잡아 쥐어야 할 하수구를 사십 미터나 기어 들어가야 했다. 거푸집들이 한꺼번에 떨어져 내릴지도 모를 위험까지 따르는 일이라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현장에 도착한 일행은 서로 눈치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도 뒤쪽으로 물러나 우의를 눈썹 밑까지 덮어썼다. 그때 P가 나섰다. 팔뚝에 하트 모양을 꿰뚫은 화살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잘생긴 얼굴에서 섬뜩함이 풍기는 그였다. 하수구를 들여다보고 있던 P는 대번에 얼굴을 찡그리며 Y에게 물었다. 다분히 김 반장에게 들으라는 소리였다. 이거 한 대가리요? 그 말에 Y가 김 반장의 눈치를 보며 망설이자 그는 우의를 벗어던졌다. 김 반장은 멋쩍은 표정으로 담배를 피워 물었다.

 

김 반장이요, 이거 어디 이래서 되겄소? 우리들도 좀 벌어 볼까 하고 발바닥까지 내려온 거 아뇨? / 기다려, 박스 공사만 들어가면 녹아나니까 / 녹아날 땐 녹아나는 거고, 사람 기분도 생각해야 할 거 아뇨, 이런 일까지 우리한테 한 대가리로 시킨단 말요? / 얼마 되지도 않는 걸 가지고 뭘 생색이야? / 생색? 당신 말 다했어? 생색이라니, 당신 우리들한테 도급 한 번이라도 줘봤어? 똥물 뒤집어쓰면서 한 대가리 품값 벌라고 내려왔는 줄 알아?

 

김 반장은 이틀치 일당을 마지못해 걸고는 등을 돌렸다. 김 반장이 물러선 것이었다. Y는 중간에 끼어 말없이 담배만 피워 물고 있었다. 일이 일단은 이틀치 품값으로 풀리고 나자 Y와 씩씩거리던 P가 굴 속으로 들어섰고, 우리들 넷은 굴 입구에서 하수에 띄워 보내는 합판이나 각목을 건져올렸다. 하수에 젖은 장갑은 미끌미끌했고, 위에서 조금이라도 늦게 끌어당기면 하수를 고스란히 뒤집어쓸 수밖에 없었다. 왝왝거리던 그때의 토악질처럼 끝내 나는 담장 밑에다 헛구역질을 해대고 말았다. 개새끼. P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을 것이었다. 낡은 트럭을 몰고 기일이 촉박한 검사를 받기 위해서 다른 시로 떠난 지가 삼일째였다. 예정대로라면 오늘에야 P는 올 것이다.

‘철거’에서 왼쪽으로 골목을 꺾어들다가 골목 어귀에서 어기적거리며 걸어오는 ‘킹’과 맞닥뜨렸다. 여전히 킹은 푸른색 작업복 차림에다가 'KING'이라 새겨진 모자를 쓰고 있었다.

“어째 일을 안 나갔나 보네 잉, 너무 상심 말드라고.”

제법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별 대꾸 없이 식당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던 나를 P가 잡았다. 식당 구석방에 있던 친구들이 시내로 나갔는지 보이질 않더라는 킹의 말 때문이었다. 친구? 다섯 해 밑인 동생들이었지만, 노동판에 뛰어든 지 오 년이 넘은 고참들이었다. 저녁은 아직 일렀다. 그들이 방에 없다면 굳이 식당으로 갈 필요도 없었던 터라 킹이 이끄는 대로 통닭집으로 향했다. 먼저 자리 잡고 있던 박 씨가 손을 들어 킹을 불렀다. 나는 의자를 뒤로 빼고는 앉았다. 탁자 위에는 식어 빠진 닭고기 몇 점이 놓여 있었다. 나는 안주와 술을 주문했다. 술자리에 불러들인 킹의 표정이 그랬다. 그들은 이 현장에서만 일 년을 넘겼다고 했다. 킹은 50대였고, 박 씨는 사십을 갓 넘긴 나이였다. 골목에서 서성대고 있어야 할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이들만 일을 나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공구리친다 안하요./ 뭔 지랄로 비오는 날 일이여, 이런 날 일하믄 골벵든당께 / 공구리 날짜 받았는데 안하믄 어쩔 거시여? / 안하믄 안하는 것이제, 비 맞은 돈 안 받겄다는디 워쩔 거시여? / 워째 가방끈도 길담시롱 막노동판으로 풀레 버렸을까 잉? 책상머리에 앉아 펜대나 굴릴 것이제? / 거 성님도 요즘 겉은 시상에 대학물이 벨거 관디요? 흐흐 / 근디 그 친구들헌티 들응께로 김반장이 브레끼를 걸었담시?/ 설마 같은 고향지기들헌티 박하게야 허겄소? / 단가가 안 맞는다제 잉 / 기술자들이니께 버팅길만도 허요, 거개 단가도 꽤 될 것이구만?/ 우리 겉은 잡부들하고는 많이 다르겄지.

 

넌지시 그들은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들에게 히죽 웃어 보인 나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김 반장과 어떻게 타협을 보았는지 Y를 통해 아직까지 딱 부러지게 말이 건너온 것은 아니었다. 빈속의 소주 맛이 싫지는 않았다. 설마 같은 고향 사람인 김 반장이 제동을 걸었겠느냐는 그들의 빈정거리는 위로를 피하고는 통닭의 뒷다리부터 집어들었다. 그들의 대화 속에 끼고 싶지 않았다. 이쪽의 사정을 염탐하면서 은근슬쩍 우리 팀의 단가를 미끼로 걸고 넘어 질 요량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내가 벌써 일 년째라니께 그라네, 여근 겨울이라도 눈이 안 와부러. 아 우리 겉은 잡부들헌틴 이만 한 곳도 읎다니께 / 날만 좋으면 뭐하요? 몸 망가지면 끝이어라 / 그려도 버틸 때꺼정은 버티야지 어쩔 거시여? 가다 퍼져 쁠믄 도둑질을 할 것이여, 비럭질을 할 것이여? 요즘 시상에 굶어죽는다고 눈 깜짝할 사람이 있당가, 아 여그 팔십 몇 년도가? / 도둑떼들 말이어라? / 그려, 회사문 딱 닫아 버링께 이 동네에 도둑놈들이 득시글거렸다고 안혀? / 정말 주인장 그런 말이 참말이어라? / 아 먹을게 없는데 그럼, 말도 마세요. 술취해 비틀거리는 사람이 길바닥에 널렸고, 아침이면 여기저기 털린 집들이 수두룩했다니까 / 앞으로도 걱정이라니께 / 생사람 죽으라 하겠어요, 어디? / 이러다가 우리꺼정 내몰리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라 / 공사 중단하믄 종치는 기지, 뭐 벨수 있간디? / 허기사 지 사정 아닌 담에야 종치는 기 대수겄소?

 

남소리가 아니었다. 당장 김 반장과 한패인 정 대리와 우리 팀의 줄다리기가 문제였기는 하지만 현장의 악조건도 만만치 않았다. 거의 스무 차례 가까이 노사협상을 벌여오다가 끝내는 사내가 쩌렁쩌렁 울리는 스피커에서 직장폐쇄를 알렸던 것이었다.

청테이프가 감긴 쇠파이프로 땅바닥을 툭툭 치면서 사라지던 노동자들의 붉은 머리띠. 특수부대 출신들만 가려서 뽑았다던 경비들의 풀빛 제복과 군화. 나는 참으로 나온 마른 빵을 씹으면서 현장 주위의 풍경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알려 드립니다. 알려 드립니다. 벌써 대여섯 번은 반복되었을 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여기저기 벽면마다 암호처럼 붙어 있던 132,132. 나는 그 암호를 풀 수가 없었다. 그 숫자와 나는 전혀 별개였기 때문이었다. 사내에 남아 계신 전 사원은 즉시 퇴근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툭툭 낫질에 넘어지는 옥수수대궁처럼 펄럭이던 깃발들이 쓰러졌고, 대형 글자들은 찢겨 나갔다. 임금투쟁에 대한 대자보 위에 직장폐쇄를 알리는 대자보가 입막음하듯 곳곳에 덧붙여졌다. 모든 차량의 통행은 통제되었고, 마른 빵을 씹던 우리들은 한동안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나는 소주 한 잔을 마시며 창혁을 떠올렸다. 서울의 아파트 공사장에서만 여러 해 일했다던 그였다. 일자리 하나쯤이야. 나는 술잔을 킹에게로 돌려주었다.

 

기술을 배와야지 돈이 된다니께, 진종일 잡부 혀봐야 코끼리 아가리에 비스껫또여 / 근데 십 몇 년씩이나 노가다를 했다면서 어떻게 아직까지 잡부요? / 한 일이 년 혀고 탁 치워 뿐다 치워 뿐다 혀도 그기 지나가는 바람잡기였다니께, 동상도 그라겠지만서도 평생 노가다 할라는 치들 워디 있간디? / 아주머니도 있을 거 아녜요? / 마누라쟁이 생과부 된 지 오래여, 어쩔 수 읎지러 / 술로 날린 돈만 혀도 집 한 채는 됐을 거시고만 / 지미 좋은 술도 못 마심시롱 돈은 벌어 뭐 하간디? 낙 끈아쁠고 이 지꺼리 난 몬항께.

 

식당은 마을 입구의 공터 앞에 있었다. 간신히 파마 고대라는 글자가 남아있는 미용실 유리문 앞은 이미 잡풀이 무성하게 자라 올라 있었고, 철 지난 지방의원 출마자들의 이리저리 찢겨진 앞가슴과 얼굴조각이 근근이 붙어 있는 공터 한쪽이었다. 식당이랄 수도 없었다. 처마 밑에다 판자를 덧붙여 만든 것이라 대여섯이 들어앉으면 숨통이 막힐 지경이었고, 찌개고 뭐고 수저질 몇 번이면 금방 바닥이었다. 한꺼번에 밀어닥친 인부들로 앉을 틈 하나 남아 있지 않은 식당을 기웃거리다가 뒷마당으로 들어섰다. 야간 일까지 해야 할 판인지 정 대리가 재촉을 하고 있었다. 나는 본 체 만 체 뒷마당을 돌아 창혁 또래들이 쓰고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아직 그들은 시내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방 안은 동굴 속처럼 어두웠다. 벗은 채 널려 있는 작업복하며 한구석으로 밀어 둔 술병, 만화책들에다 둘둘 말린 이불로 방 안은 엉망이었다. 돌아가고 싶었다. 뒤엉킨 채로 돌아가고 있는 지금 이 상황을 더 이상 견뎌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가슴 밑바닥으로 자꾸 무엇인가가 가라앉을 뿐 울컥 치솟아오르는 것이 없었다. 축축 늘어진 몸은 움직이기조차 싫었다. 직장폐쇄. 가슴이 턱턱 막혔다.

 

출근시간의 정문은 겨우 한 사람이 빠져 들어갈 만큼만 열려 있었다. 승용차들도 일일이 운전자를 확인하고서야 정문을 열어 주었을 정도의 삼엄한 경비였다. 총구만 들이대지 않았을 뿐이었다. 똑같은 제복을 입은 직원들은 신분증을 미리 준비한 채 길게 늘어서 있었다. 인부들은 그 줄에 채이지 않을 만큼 담장 쪽에 몰려 있었다.

임시출입증이 문제였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문제되지 않았던 것이었다. 정 대리가 끈질기게 달라붙어도 경비들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호각을 불어대며 정문 앞에 밀린 차량과 사람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수십 명의 경비들이 몇 겹으로 정문을 막고 있었다. 정 대리는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우리들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인부들은 전혀 개의치 않은 얼굴이었다.

 

알아서 처분하시요, 놀고 있어도 일은 나왔응께 한 대가리여. / 무노동 무임금이란 말도 못 들었능감? / 붙일 때가 읎어 고런 유식한 말을 노동판에 붙인당가아? / 딴소리들 말고 주민등록증이나 걷어 봐요.

 

나도 주민등록증을 꺼냈다. 출입증 대신 몇 차례 증을 맡긴 적이 있었지만 오늘부터는 그것만으로는 절대 출입시키지 않으려는 듯이 버티던 경비들이었다. 직장폐쇄라는 말도 모르느냐는 식의 험악한 얼굴이던 경비에게 정 대리는 걷어간 주민등록증을 내밀며 사정을 하고 있었고, 마지못한 듯 그제야 인부들을 힐끔거리더니 문을 열어 주었다. 인부들은 빠르게 차에서 연장을 내려 좁은 입구를 비집고 들어섰다.

회사 안에 널려 있던 구호들이며 대자보들은 말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공장 건물마다 철문이 내려져 있었고, 출근하는 사원들은 일사불란하게 정문 옆에 우뚝 솟은 건물로 몰려 들어가고 있었다. 현장에 도착한 인부들에게 정 대리는 심통난 얼굴로 한마디 쏘아붙였다.

 

출입증 없는 사람들 말이요, 등본 준비된 사람들부터 사진을 찍어야겠어요. 내일부턴 안 들여보낸답니다. 낮에 사진기를 가져올 거요. 아무 벽에나 기대서 찍어야지 뭐 별수 있어요? / 등본 없는 사람들은 그럼 어떡하라고? / 사진은 일단 찍어 둬요. 소장하고 얘기해 볼 테니까. / 우리가 뭐 죄수여? 담벼락에 기대 찍게? / 찍기 싫은 사람은 관둬요, 관두면 될 거 아냐. / 즉석 사진 찍으면 바로 나올 거 아뇨? / 오후에 사진을  찾으려는 거 아녜요, 무슨 선보는 사진이요? 당장 내일부터는 출입시키지 않으면 그냥 놀 거요덜? 아니면 일 안하고 사진이나 박으러 갈 거요? 언제부터 사진을 내라고 노래를 불렀소? / 식당에 가서 찍으면 될 거 아냐? / 점심때 내보내지 않아요, 오늘 점심은 여기서 식권을 줄 테니까, 여기서 때워야 됩니다.

 

그깟 사진 한 번 찍는데 뭐. 나는 담벼락에 잠깐 서 있는 모습을 지워 버렸다. 새삼스럽게 사진기 앞이라고 낯가림이라니, 그러나 막상 사진기 앞에 섰을 때 나는 착잡했다. 삼십 도가 넘는 태양은 인부들의 얼굴로 쏟아졌다. 차례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사진기 앞에서 잔뜩 찌푸린 인부를 보며 웃으라는 둥, 가슴을 활짝 좀 펴라는 둥 야유를 퍼부어댔다. 그것은 작은 소동이었고 단막극이었다. 하지만 웃고 떠들던 인부들도 제 차례가 되었을 때는 어쩔 수 없이 얼굴을 잔뜩 찌푸릴 뿐이었다.

젊은 나이의 우리 팀도 여지없이 사진기 앞에서 낯설고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 어색함. 지워 버릴 수 없이 억지로 짓는 표정들이 그랬다. 자신을 지켜보는 낯선 시선들이 얼굴 위를 벌레처럼 기어다녔기 때문이다. 특히 창혁은 그 어색함을 떨쳐 버리기 위해 손가락으로 V자를 만들어 보이다가 정 대리로부터 몇 번씩이나 제지를 당하곤 했다. 창혁의 어색함은 끝내 조용히 넘어가지 못했다. 물론 목소리의 톤이 높아진다거나, 아무것이나 발로 차버린다거나 하는 창혁의 행동이 끝내 일을 저질렀다고는 믿지 않았다. 일진이 나쁜 탓이었을 것이다.

저녁이라고 해는 대낮처럼 남아 있었다. 땀이 번들거리던 창혁은 웃통을 벗은 채 야간 일을 하기 위해 현장 이동을 하고 있었다. 지쳐 있던 나는 뒤처져 따라 걸었다. 그런데 정문 쪽을 향하던 창혁이 느닷없이 경비들과 충돌을 빚은 것이었다. 경비의 일방적인 시비였다. 웃통을 벗고 사내를 걸어다닌다는 그럴싸한 이유였지만, 다른 날 같았다면 그냥 지나치던 일이었다. 처음에는 좀 고참 격인 경비가 싫은 소리를 던졌다. 옷을 입으라면서 맨살을 쿡쿡 손가락으로 찔러대자 창혁은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한순간에 무참하게 무너져 버린 자존심 때문인지, 창혁은 꿈틀거리면서도 손에 든 웃옷을 입지 않고 서 있었다.

“자식, 입으라면 입어야 될 거 아냐. 여기가 니네집 마당인 줄 알아? 가뜩이나 신경 날카로운데 별게 다 지랄이네 참, 야.”

나는 그때 창혁을 향해, 아니 우리들을 향해 벌떼처럼 달려드는 경비들을 보고 있었다. 우리 팀이라 해야 고작 여섯뿐이었다. 창혁은 여기저기 날아드는 주먹을 맞고 있었다. 놀란 우리들은 창혁에게 다가서기는 했지만 서로들 눈치만 보며 주춤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어쩔 수가 없었다. 까딱 잘못했다가는 군화발이 날아들 참이었다. P가 나섰다. 이미 움츠러들 만큼 움츠러든 우리들이었다. P의 목소리도 조금은 떨리고 있었다.

 

몰라서 그랬으니 참으시오. / 느들은 남에 집 찾아갈 때도 웃통 벗어 들고 설쳐 임마? 야 끌어내 개 같은 것들이. / 끌어내 끌어내 새꺄.

 

우리들은 기가 죽은 채 정문으로 내몰렸다. 이리저리 흩어지는 경비들의 웃음기 없는 시선들. 저들은 자신들의 힘이 얼마나 센 줄을 모르고 있는 듯했고, 자신들의 얼굴에 비참함이 번지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떠밀리면서 정문을 나섰다. 오늘부터 정문으로 들어올 수 없었던 노동자들이 질서정연하게 앉아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퇴근시간에 밀리는 정문으로 거침없이 내몰려 버린 우리들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서로 마주하지 않은 채 슬금슬금 가로수에 기대어 담배를 피웠다.

 

뒷마당을 가로지르는 발자국 소리에 눈을 떴다. 시내에 나갔던 창혁의 또래들은 불콰해진 얼굴로 들어섰고, Y도 뒤따라 들어섰다. 분위기는 어두웠다. 김 반장과 정 대리 쪽에서 우리들 중 두 명에게는 지금처럼 단가를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다른 잡부들이 그들의 임금을 놓고 쑥덕거리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들만큼 단가를 받아야지 일을 하겠다고 나온 것이다. 한두 명도 아닌 그 인부들의 임금을 하루아침에 모두 올려 줄 수는 없다고 Y는 덧붙였다. 나는 그 둘 중의 하나가 바로 나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창혁의 또래들은 아예 한 명은 제쳐 놓고, 또 한 명이 자신들 속에 끼어 있다는 것에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잘들 생각해 봐. 이제 박스 공사만 들어가면 한 일 년은 꾸준할 거야. 때 되면 단가도 올라갈 거고, 두 명이 안하겠다면 다 가방 싸는 거지, 뭐.”

“시발 놈들. 얘들 장난도 아니고 뭐야 이게. 내 노가다 다니면서 단가 깎는 데는 또 처음이네.”

자신일 리 없다는 표정의 창혁은 대번에 투덜거렸다.

“아니, 그게 누군데 그래요?”

창혁의 또래들도 역시 자신일 리 없다는 얼굴이었고 그들은 서로 너라며 웃어댔다. 나는 벌건 얼굴로 Y의 얼굴을 비껴 보았지만, Y는 어떻게 이름을 밝히느냐며 내 시선을 피해 버렸다. 김 반장과 P의 사이가 안 좋아서 그런 것이었다고 생각했던 나는 얼굴이 점점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럴수록 태연해야 된다고. 나는 벽에 등을 기대고는 만화책 한 권을 집어들었다.

“김 반장, 그 새끼가 인부들 부르는 전화는 그럼 뭐예요?”

“너희가 안한다면 다른 팀을 붙이겠다는 거야. 잘들 생각해. 두 사람 기분을 생각해서 하는 소린데, 두 사람 단가를 넷으로 나눌 수도 있잖아. 그런 식으로 해야지. 누군 그대로 놔두고 누군 깎고 하겠냐?”

나는 건성건성 만화책만 뒤적거리고 있었다. 아무리 자신을 속이려 하더라도 속일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에 비해 내가 일하는 것은 비교할 수가 없었다. 일의 능률보다 노동판으로 굴러먹은 사람답게 행동한다는 게 역시 서툴렀다. 한 달도 채우지 못할 것이었다면 이곳으로 아예 오지 않았을 그들이었다. 일이 꾸준하고, 단가도 처지지 않아 있던 자리들을 박차고 내려왔던 것이었다. 창혁만은 단호하게 그 단가로는 일을 못 하겠다고 나섰다. 나도 그럴 수는 없었다.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 눈치 봐가며 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Y는 그들을 불러들인 책임 때문에 몇 마디 붙여 보았지만, 더 이상 그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는 말끝에 창혁은 다시 발끈했다.

 

한 번 엎어버리든가 해야지 이거 원 시팔. / 엎긴 자식아 뭘 엎어 단가가 안 맞는다는 건데. / 단가 깎는 데가 어딨어요? 그게 가란 말이지. 아예 애초부터 그러던가? / 단가란 게 그렇잖아. 그만큼 일을 해줘야지 단가를 올리든가 하는 거고. / 우리가 올려 달라고 한 적 있어요? 그만큼 또 일을 못해 준 거 뭐예요? / 김 반장은 일하는 게 자기 맘에 안 찬다는 거야. / 생각해 봐요, 그 정도 단가는 서울에 있을 때도 받았다구요! 일거리가 계속 있다는 것 때문에 내려왔는데 이제 와서 그러면 우린 어쩌란 말예요? / 그건, 마. 우리 사정이지 안 그래? / 좋다 이겁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쓴맛 한번 보여주고 가겠다는 겁니다. / 안하겠다는 거야? / 그게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네 사람 다 단가를 깎을 수밖에 없다는 건데. / 그건 니네들이 알아서 하는 거지. 두 사람이 하겠다면 하는 거구. / 하필 왜 형을 따돌리고 그런 얘길 해요? / 그 성질에 하겠다고 그러겠냐? 다른 사람들이 끼지만 않았다면 어떻게 해보겠는데, 문제가 이렇게 돼버리니까 서로 난처하게 된 거지. 생각해 보고 이따가 결정하자고. 안한다면 끝내는 거지, 뭐.

 

나는 막연해졌다. Y의 눈치도 그렇고 다른 치들의 눈치도 여기서 일을 했으면 하는 얼굴들이었다. 단가를 깎는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나서서 그만두겠다고 선언을 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저들 속에서도 한 명을 골라내야 하지 않은가. 나는 만화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슨 말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생각은 말이 되지 못했다. 자리를 피해 주고 나면 그들이 결정을 내릴 것이고, 따르는 편이 나을 듯싶었다.

모처럼 하구로 나가 보고 싶었다. 사람들이 부르는 하구란 단어가 내게는 낯설기만 했다. 강이나 바다에 익숙했던 탓이었을까. 골목을 빠져나가 하구로 나섰다. 우뚝 솟은 공장의 굴뚝들이 늘어서 있었고, 엄청난 크기의 배 한 척이 떠 있을 뿐이었다. 자동차 공장 철조망 옆 공터에서 바라보던 저녁 해는 유난히 크고 붉었다. 그러나 오늘은 보이질 않았다. 하구를 거슬러 올라 강으로 가고 싶었다. 거기에 아직 남은 붉은 해가 있을 듯도 싶었다.

내가 그 둘 중 하나라는 것은 단지 추측만은 아니었다. 나 자신까지 속이고 싶었지만 이미 화살은 내 가슴에 깊숙이 박혀 있었다. 구체적인 결정 하나 하지 못한 채 하구에서 식당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P와 Y가 나누는 소리를 엿듣고 말았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나였다는 것을 확인한 셈이었으니까. 조금 더 얼굴이 뜨거워진 것은 그 둘 중에서도 내가 문제라는 것이었다. P는 묵묵하게 Y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내 입가에서 그제야 웃음이 새어나왔다. 어차피 그들의 결정에 따르자고 했던 것이 아니었던가.

 

내 친구가 하도 부탁을 해서 데리고 오긴 했지만, 대학 나와 빌빌 논다고 말이야. / 얘기 잘해서 가방끈이나 단가를 내리고 일하게 해야지 뭐, 어쩔 거요? 이대로 갈 수는 없잖아? 한 번 더 두고 봐서 김 반장 이거, 본때를 보이던가 해야지, 쌍. 완전히 한 놈 물어 놓고 생트집 잡는 거잖소? / 김 반장, 계속 물고 늘어질 것 같애. / 가방끈 소리 난 넌덜머리가 나는 사람이오. 그건 형이 알아서 하쇼.

 

정 대리까지 끼어든 술자리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Y가 넌지시 다가와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물어 왔을 때도 딱히 해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제는 떨어진 일당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뭔가가 자꾸 가슴 밑바닥으로 가라앉으며 부글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가타부타 말없이 웃어넘겼다. 그러나 다른 잡부들이 사실은 나를 놓고 자신들의 임금을 올려 달라는 것이었다는 Y의 말끝에 그만 돌아가겠다는 말을 토하고 말았다. 그러자 Y가 내 어깨를 토닥이면서 내민 것은 임시출입증이었다.

“한 번 더 생각해 봐. 다 세상 그렇지 뭐.”

나는 받아 쥔 출입증 속 사진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기우뚱하게 머리가 넘어간 채, 풀기 없는 얼굴이 눈을 맞추고 있었다. 나는 출입증 사진을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문질렀다. 안쓰러웠다. 손으로라도 머리를 빗고 찍어 줄 것을, 아니면 눈이라도 부리부리하게 뜨고 찍어 주었다면 조금은 낫지 않았을까 싶었다. 어디에서부터 이곳까지 흘러온 것인지, 이젠 더듬을 수조차 없을 것만 같았다. 태양이 이렇게도 싫었던가? 잔뜩 찡그린 얼굴이 마당 한 귀에 앉아 종일 우물거리는 사내의 얼굴과 닮아 보였다. 나는 서서히 임시출입증을 쥔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문장웹진 3월호》

 

 

 

추천 콘텐츠

빨간 집에 사는 소녀

빨간 집에 사는 소녀1) 김숨 1 내 방엔 거울이 있어. 빛— 빨간색. 세상의 모든 빛— “지금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2 지금, 지금, 그리고 지금, “난 다른 곳에 있고 싶어.” 3 딱딱하게, 딱딱하게, “내 사랑을 받아 주세요.” 다른 곳에선 똑같은 노래가 다르게 흘러, 다르게 슬프게, 다르게 쓸쓸하게, 다르게 외롭게. 다른 곳의 다른 나. 난 나를, 난 나를, 딱딱하게, 딱딱하게, 빨갛게, “난 설레고 싶어.” 4 다섯 살 때 처음 빛을 봤어. 네 곁에, 내 곁에, 빛은 환한 어떤 것. 아, 난 날······. 다섯 살 때 처음 빨간색을 봤어. 엄마가 빨간색을 가져다 내 얼굴에서 45도 사선 밑에 놓았어. 빨간색을 나는 외우고 외웠어. 내가 빨간색을 외우자 엄마가 빨간색을 치우고 노란색을 놓았어. 나는 노란색을 외우고 외웠어. 그리고 파란색, 흰색, 검은색. 세상은 다섯 가지 색깔로 만들어졌어. 세상은 다섯 가지 색깔로 만족해. 다섯 색깔 무지개, 다섯 색깔 도마뱀. 분홍색은 꽃에게. 초록색은 달에게. 내 얼굴에서 45도 사선 밑에 놓여 있는 빨간색만 나는 볼 수 있어. 내 방 거울은 흐르지 않아······. 5 딱딱한 벽에 딱딱하게 거울이 걸려 있어. 거울이 날 봐. 거울은 날 봐. 거울은 엄마 몰래 울고 있는 날 봐. 난 날 안 봐. 음, 흐른다는 건······. 생각하고 싶지 않아. 내가 생각하고 싶은 건 오직 하나. 6 빨간색 크레파스를 선물 받고 난 흥분해 소리 질렀어. “엄마, 난 화가가 될 거야!” 빨간색 크레파스가 흰 도화지 위를 신나게 날아다녔어. (그녀의 엄마) 뭘 그리는 거야? (그녀) 집! 빨갛게, 빨갛게, (그녀의 엄마) 뭘 그린 거야? (그녀) 집! 엄마, 난 집을 그렸어! (그녀의 엄마) 네가 그린 집을 만져 보렴. 엄마가 내 손을 내가 그린 집으로 데려갔어. (그녀의 엄마) 집에 창문이 없네. (그녀의 엄마) 집에 문이 없네. (그녀의 엄마) 집에 지붕이 없네. 난 창문을 본 적 없어, 난 문을 본 적 없어, 난 지붕을 본 적 없어. (그녀의 엄마) 집에 나무도 없네. 7 집에 나무가 있어야 해? 세상에 나무가 있어야

  • 관리자
  • 2024-05-01
원경

원경 성혜령 건강검진을 12월 마지막 주까지 미루는 사람이 자기 말고도 이렇게 많으리라고 신오는 생각하지 못했다. 대기실의 긴 좌석 중간중간 빈자리가 있긴 했지만, 신오는 한구석에 서 있기로 했다. 초음파 검사실 앞 복도는 자기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며 서성이고 있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헐렁한 가운에 느슨한 고무줄 바지를 입고 핸드폰을 보며 기다림을 견디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신오는 이들 중 내년에는 따뜻한 휴양지에서 연말을 보낼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지 궁금했다. 혹은, 오늘 치명적인 암이나 뇌동맥류 같은 것들을 발견하고 전혀 예상치 못한 인생을 살게 될 사람들은? 그런 일들은 언제나 일어나고 있었다. 직장 생활을 10년 정도 하니 주위에 아픈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전 직장 동료는 출근길에 쓰러진 뒤 안면마비를 얻었다. 한쪽 입꼬리가 위로 당겨 올라갔는데 그는 멀쩡한 다른 쪽 입꼬리도 끌어올려 웃는 얼굴을 만들곤 했다. 병가에서 돌아온 뒤 매일 웃는 얼굴로 제일 먼저 출근하는 동료를 보면서 신오는 이직을 결심했다. 신오는 모든 일이 가능하지만 대개 나쁜 일들이 더 자주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되도록 좋은 음식을 먹고 운동을 꾸준히 하려고 했다. 불행은 대비하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게 오히려 쉽게 다가오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도 있었다. 복부 초음파를 보던 의사가 “어랏?” 하고 실없는 소리를 내며 배꼽 부근을 세게 눌렀을 때도 신오는 방귀가 나올 것 같다는 생각뿐이었다. 의사가 차가운 젤을 다시 묻히고 초음파 단말기를 문지르다가 복막에 종양이 보인다는 말을 했을 때는, 그래서 요새 변비가 심했나, 라는 생각이 먼저 났다. 대형 병원에 가서 생검과 CT, MRI 검사를 마치고 소화기내과 교수의 진료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도 신오는 회사 메신저를 보고 있었다. 몇십 억 단위 공공사업의 수주가 걸린 입찰 제안서의 마무리를 앞둔 시점이었다. 병원 검사로 연차를 낸다고 했을 때 팀원들은 모두 별일 없을 거라고, 하루 푹 쉬고 오라고 말했지만 메시지를 보내면서 신오를 계속 태그했다. 신오는 그날 마지막으로 진료실에 들어갔다. 의사는 젊고 피곤해 보였다. 예약을 가장 빨리할 수 있었던 의사였으니 어쩔 수 없지, 신오는 생각했다. 의사는 신오가 자리에 앉자 간단한 인사도 없이 모니터 화면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마우스 커서로 신오는 잘 알아볼 수 없는 흐릿한 음영을 짚었다. 여기예요, 여기. 의사는 약간의 승리감마저 느껴지는 말투로 말했다. 복막의 종양은 전이 암이고, 여기가 원발 암이라고. “이게 숨어 있어서 찾기 어려웠거든요.” 의사는 다시 한번 마우스 커서를 움직였다. 췌장하고 담도 사이인데 위치나 크기가 좋지 않다고. 오늘이 금요일이니 당장 다음 주부터 항암치료로 크기를 줄여 보고 수술을 잡아 보자고. 신오의 핸드폰이 또 진동했다. 신오는 치료를 이주만 미뤄도 되냐고 물었다. 프로젝트가 있어서요. 이주 후에 마감이라. 의사는 처음으로 웃어 보

  • 관리자
  • 2024-05-01
야생 식물원

야생 식물원 하가람 식물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다이아몬드 모양의 철골로 둘러싸인 거대한 유리 온실에는 열대와 지중해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이국적인 식물이 자란다고 했다. 한 달 전 나는 식물원 근처에 있는 여러 호텔을 찾아 은규에게 링크를 보냈다. 보통 때의 그라면 어디든 좋다고 했을 것이다. 레스토랑도, 카페도, 동네의 작은 아이스크림 가게조차도 모조리 내 선택에 맡기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날 은규는 이미 예약한 곳이 있다고 하여 나를 놀라게 했다. 은규가 보내 준 링크를 열어 보았다. 넓은 통유리 창 너머로 식물원과 공원이 내다보이는 스위트룸이었다. 나는 조금 들뜬 채 답장했다. — 우리가 만난 지 곧 1년이래. 믿어져? 1년이라는 시간은 내게 유별났고 은규에게는 별다른 감흥이 없는 것이었다. 그가 전에 사귄 여자친구는 단 두 명인데 각각 4년, 5년을 만났다고 했다. 매번 석 달도 채 넘기지 못하는 나와는 달랐다. 이따금 은규에게 이전 연인들에 대해 물었다. 그들이 어떤 성향의 사람이었고 어떤 외양을 가졌는지 궁금했다. 처음에는 응응, 하며 대꾸해 주던 은규는 내가 그녀들의 음악 취향이나 살던 동네처럼 구체적인 정보까지 캐묻자 태도를 바꾸었다. 기억 안 나. 그는 말했다. 다 옛날이야기라고. 그 후로는 이전에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그녀들을 생각했다. 눈, 손톱, 말투, 그리고 신발. 나와 닮았을지, 닮았다면 얼마나 닮았고 다르다면 무엇이 다를지도. 상상을 이어 가다 보면 늘 한 가지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은규는 한 번도 애인과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까 여자와 밤을 보내는 일이 오늘 그에게는 처음이었다. 서른을 넘긴 남성에게서 보기 드문 경우였지만 그가 처음인 게 좋았다. 그 점이 무엇보다도 나와 그녀들을 구분 지어 주는 것만 같았다. 차창에 머리를 기대었다. 햇볕에 데워진 창문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인터넷으로 보았던 화려한 꽃과 기다란 나무들을 떠올렸다. 노랗고 푸르고 분홍빛이 맴도는 공간을. 여름 휴가철이었고 도로는 차들로 빽빽했다. 졸음 껌을 씹는 은규를 보며 말했다. “오늘은 내가 운전하고 싶었는데.” “다음에. 너 힘들어.” 은규가 말했지만 나는 안다.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그는 내게 차를 맡기지 않을 것이다. “보면 놀랄걸? 너무 잘해서?” 나는 허리를 세운 채 한 손으로 반원을 그려 보았다. 휙휙. 입으로 소리 내며 운전대를 쥔 그를 따라 했다. 그가 웃었다. 머릿속으로 주행하기. 그것은 나만의 놀이였다. 캠퍼스 변두리에 있는 H관 1층, 5평 남짓한 주차관리실에서 상상력을 충족시켜 줄 만한 것은 많지 않았다. 먼지 쌓인 커피믹스와 낡은 소파, 책상 위에 시간별로 놓여 있는 분홍색, 파란색, 노란색 주차권들. 지겨운 서류, 서류, 서류. 드물게 실장이 자리를 지키는 날이 아니면 대체로 혼자 그곳에서 일했다. 사람들이 찾아와 주차권을 사거나 정기 등록을 마친 후 돌아가면 나는 모니터에

  • 관리자
  • 2024-05-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