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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전목마 안으로 걸어가다

  • 작성일 2010-03-26
  • 조회수 1,789

회전목마 안으로 걸어가다

 

강진
 

 


그와 처음 눈이 마주친 것은 지상 80여 미터 높이에서다. 자이로드롭이 낙하하기 직전이었다. 추락의 공포가 극에 달해 있던 찰나, 서로를 봤다. 그러니까 그와 나는 처음부터 땅에서 벗어난, 현실에서 벗어난 어떤 지점에서 만난 것이다. 


회전목마의 속도가 느려진다. 04:00으로 시작되었던 타이머의 숫자는 어느새 모두 영으로 되돌아와 있다. 목마는 지금껏 달려왔던 탄력에 의해 몇 바퀴 더 돌 것이다. 나는 습관처럼 마이크를 집어든다. 완전히 멈출 때까지 내리시면 안 됩니다. 스피커를 통해 밖으로 나가는 목소리는 다른 사람의 것인 듯 낯설게 들린다. 아이들이 안전벨트를 푸는 모습이 모니터에 보인다. 기계실 유리 부스에서 보이는 곳이 회전목마의 앞쪽이라면 모니터는 뒤쪽에 붙어 있는 카메라와 연결되어 있다. 완전히 멈출 때까지 내리지 마세요. 작동 기계의 빨간 불이 비로소 꺼진다.

기계실 유리 부스에서 나가 아이들이 내리는 것을 도와 준다. 안전벨트를 풀어 주고 아이들을 안아 목마에서 내려 준다. 막 꿈에서 깬 것 같은 표정으로 허둥거리다가 아이들은 엄마들이 부르는 소리를 향해 뛰어간다. 출구는 저쪽입니다. 저쪽으로 나가세요. 나는 손으로 출구 쪽을 가리키며 똑같은 말을 아이들 뒤통수에 대고 외친다. 목마들 사이로 한 바퀴 돌며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갔는지 다시 확인한다. 일을 순서대로 진행해야 한다. 한 번의 실수가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입구로 사람들이 들어선다. 표를 받으며 수를 헤아린다. 한 번에 회전목마를 탈 수 있는 정원은 대략 서른 명 정도다. 줄지어 서 있는 사람들을 훑어본다. 청재킷을 입은 아이까지 끊으면 될 것 같다. 입구를 통과한 사람들은 자신을 태우고 달릴 말을 찾아 앉는다. 나는 입구를 쇠사슬로 가로막고, 회전목마를 한 바퀴 돈다. 두 마리가 비어 있다. 쇠사슬을 풀어 두 사람을 더 입장시킨다.

“회전목마, 출발하겠습니다.”

마이크를 내려놓으며, 레버를 밀어올린다. 동작등에 불이 켜지고 목마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타이머의 숫자는 목마가 움직이자 빠르게 변한다.

어젯밤에 우리 아빠가 다정하신 모습으로 한 손에는 크레파스를 사 가지고 오셨어요.

앰프 볼륨을 높인다. 모니터에 목마를 탄 사람들의 얼굴이 획획 지나간다. 나는 그가 서 있는 놀이동산 입구 쪽을 쳐다본다.

키다리 삐에로, 그는 이제야 스틸트를 끼고 걷는 것이 좀 익숙한 모양이었다. 이 미터가 훨씬 넘는 키와 보라색 가발, 과장되게 그려진 코와 입술, 헐렁한 옷, 빨간 신발……. 그의 모든 것이 비현실적이다. 게다가 놀이동산 담장을 따라 그려진 바다 그림 때문에 그는 물 위를 걷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파도 끝 하얀 포말이 짐승의 아가리처럼 일어나 있다. 금방이라도 그의 다리를 덮칠 기세다. 그를 먼 바다로 데려갈 것만 같다.  

그는 오른발을 내딛으면서 피리 소리를 낸다. 이제 막 첫 비행을 하고 돌아온 어린 새는 저렇게 가늘고 떨림이 많은 울음 소리를 낼 것 같다. 나는 그의 입 안에 있는 작은 피리 하나를 떠올리며 입술을 작게 오므려 후, 하고 분다. 

아이의 손을 잡은 여자가 ‘마린 월드’ 정문 입구를 지나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 뒤에 붙는다. 그는 마치 그 여자와 아이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제야 호주머니에서 풍선 하나를 꺼내든다. 빨간 바탕 위에 흰 물방울무늬가 프린트된 삐에로 옷. 그의 헐렁한 옷이 바람에 부풀려지고 출렁인다. 맞바람을 맞고 있는 새의 깃털 같다고, 나는 상상한다.

공기 주입기를 위아래로 움직이자 풍선은 금방 부풀어오른다. 그는 주위를 천천히 살피며 익숙한 손놀림으로 푸들을 만든다. 지금쯤 그의 망막엔 사람들의 얼굴이 동그란 풍선처럼 어려 있을 것이다. 긴 풍선이 올망졸망 작은 공 모양으로 나뉘어지고 비틀리자 미용을 갓 끝낸 푸들 모양으로 변한다. 잠시 그는 동작을 멈추고 천천히 사람들을 둘러본다. 그러고는 한 아이에게 시선을 고정시킨다. 나는 그가 이제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 안다. 푸들 만들기의 마지막 과정, 몸통에 몰려 있던 공기의 일부를 꼬리 쪽으로 보낼 것이다.

그는 자기와 눈이 마주친 아이에게 푸들의 꼬리가 될 풍선 끝을 불어 달라고 한다. 아이가 그에게 다가가 풍선 끝에 입김을 넣는다. 그 순간, 푸들의 예쁜 꼬리가 만들어지면서 그의 입에서는 새 울음 같은 피리 소리가 후룩, 흘러나온다.

긴 허리를 굽혀 풍선 푸들을 바로 앞에 서 있는 아이에게 건넨다. 투명 아크릴 상자 안으로 어린아이가 엄마 손을 잡고 걸어나와 돈을 넣는다. 뒤이어 또 한 사람이 지폐를 상자 안에 넣는다. 그의 입술이 움직인다. 붉은 물감과 하얀 물감으로 과장되게 그려진 그의 입술은 그의 진짜 입술 표정과는 상관없이 언제나 웃고 있다. 그는 풍선 하나를 꺼내 바람을 넣는다. 그가 꺼낸 풍선보다 먼저 삐에로 옷이 바람에 팽팽해진다.

 

놀이공원 중앙에 우뚝 솟은 시계는 12시를 가리키고 있다. 오늘 같은 날은 시간을 가늠하기 어렵다. 시간이 갈수록 구름은 점점 낮아지고 사위는 어두워지고 있다. 공원 안도 한 시간 전보다 사람들이 눈에 띄게 줄었다. 버섯 모양으로 만들어진 매표소 건물은 화려한 페인트칠 때문인지 아니면 날씨 때문인지 오늘은 음지(陰地)에서 자라난 독버섯 같다. 매표소 앞에도 늘어선 사람들의 줄이 짧다. 나는 쇠사슬을 풀어 사람들의 표를 받는다. 모두 열아홉. 빈 목마들이 드문드문 보인다.

풍뎅이가 뛰어온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각자가 담당한 놀이기구를 그 사람의 이름처럼 불렀다. 그러나 풍뎅이만은 별명으로 불리었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움직인다고 붙여진 별명이다. 얼마 전 안전검사에서 그가 맡고 있는 ‘코인 라이더’는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한 달간 운행정지를 먹은 상태다. 정지가 풀릴 때까지 풍뎅이는 점심시간에 놀이기구들을 돌면서 운행을 대신해 주었다. 그래도 일손이 바쁜 계절이어서 쉬지 않게 되었다고 우리는 위로해 줬지만 정작 풍뎅이는 하루 일당이 3분의 1쯤 깎이게 되었다고 투덜거렸다. 

회전목마를 한 바퀴 돌며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는 동안 풍뎅이가 조정 부스 안으로 들어간다. 나는 빈 목마 하나를 골라 올라앉으며 손으로 풍뎅이에게 오케이 사인을 보낸다. 여러분의 꿈을 실은 회전목마, 출발하겠습니다. 어느새 앰프를 조작했는지 에코 섞인 풍뎅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곧 회전목마가 돌고 노래가 흘러나온다. 입을 작게 들썩이며 노래를 따라해 본다.

초록빛 바닷물에 두 손을 담그면, 초록빛 바닷물에 두 손을 담그면, 물결이 차알랑 어루만져요. 물결이 차알랑 어루만져요.

세상이 움직인다. 안전선 밖에 서 있던 사람들 중 한 여자가 손을 흔든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진다. 언제였던가. 아득히 가라앉아 있던 기억들 틈에서 먼지 하나가 부유(浮游)하듯 되살아난다. 아버지는 어린 나를 회전목마에 태워 놓고 구식 카메라를 들고 있다. 내가 아버지 앞을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내가 너무 빨리 지나쳐 버린 까닭인지 아버지는 번번이 셔터를 누르지 못하고 있다. 나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이기 전부터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든다. 그리고 속으로 외친다. 빨리 찍어요, 제발.  

문을 흔들어 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지 애빌 죽이려고 작정을 했어. 이 빌어먹을 년이. 아버지의 거친 목소리가 음악 소리에 묻혀 있다. 아버지는 잠겨진 문을 연신 흔들어댔다.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들을 계속 웅얼거렸다. 나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따라오는 골목을 지나 도망하듯 집을 빠져나왔다. 고향집에 내려가야 한다며 무작정 집을 나섰던 아버지를 파출소에 가서 몇 번 찾아온 후부터 밖에서 방문을 걸어 잠그고 출근했다. 치매 증세는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제정신일 때는 온순하고 말이 없다가도 어느 순간에 걷잡을 수 없게 변했다. 자다가 벌떡 일어나 헛소리를 하는가 하면 어느 날엔 내가 방에 들어서자마자 두들겨 패기도 했다. 한번은 신혼 살림을 했던 고향집이 눈에 선하다며 내 손을 끌고 다시 내려가자고도 했다. 나를 오래 전 집을 나간 엄마로 착각했던 모양이었다. 퇴근 후 집에 돌아가면 문 밖까지 똥 냄새와 상한 음식물 냄새가 진동했다. 똥이 뒤범벅된 종이 기저귀를 벗겨내고 짓이겨진 오물들을 치우고 나면 맥이 빠졌다. 방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나는 눈물도 나지 않는 마른 울음을 꺼이꺼이 토해냈다. 이년아 밥 내놔, 하며 옷자락을 잡아끌기라도 하면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멀리 달아나 버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바랐던가.

장갑을 벗으며 그가 서 있는 곳을 쳐다본다. 공기 주입기로 풍선을 부풀리던 그가 나를 본다. 뻥, 그의 손에서 풍선이 터진다. 사람들을 향해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풍선 하나를 다시 꺼낸다. 달팽이, 왕관, 강아지, 칼……. 사람들은 여러 가지 모양의 이름들을 외친다. 결심이 선 듯 그는 풍선 입구에 공기 주입기를 끼우고 펌프질을 한다. 풍선 끝이 오 센티가량 부풀지 않은 상태에서 그는 펌프질을 멈춘다. 틀어쥐고 있던 주둥이를 비틀어 매듭을 만들고 풍선 하나를 더 꺼내 부풀린다.

이번엔 달팽이 왕관이다. 그가 어떤 색 풍선을 고르고, 얼마만큼 바람을 넣는가만 봐도  그가 무엇을 만들려고 하는지 알 수 있다. 파란 풍선이 투명하게 보일 정도로 팽팽하게 부풀리면 어김없이 칼이 되었다. 여러 번 풍선을 비틀어야 하는 푸들을 만들 때엔 그렇게 바람을 많이 주입하면 안 된다. 요즘 그가 가장 많이 만드는 것은 달팽이 왕관이다. 풍선의 매듭 부분이 달팽이의 눈이 되고, 미처 부풀지 않은 반대편 끝부분은 더듬이가 된다. 완성된 달팽이 왕관을 아이에게 씌워 준다. 삐에로 옷이 그의 움직임과 반대로 이리저리 흔들린다. 그의 머리 위로는 낮아질 대로 낮아진 검은 구름이 빠르게 흘러가고 흘러오고 있다. 어쩐지 그는 늘 검은 하늘을 이고 있는 것 같다.

80여 미터 높이에서 처음 그를 만나던 날도 그는 검은 하늘을 배경으로 앉아 있었다. 곧 땅을 향해 곤두박질할 자이로드롭은 준비운동을 하듯 천천히 빙그르르 돌고 있었다. 아득하게 내려다 보이는 지상의 세계에는 하늘의 별처럼 작은 불빛만 빛나고 있었다. 자이로드롭 위에서 내려다 보이는 불빛은 곧 사라져 버릴 별똥별처럼 여겨졌다. 곧 들이닥칠 극도의 긴장과 무서운 속도를 견뎌내야 한다는 공포와 두려움만이 현실처럼 느껴졌다. 땅으로 내려가기 전 자이로드롭은 잠깐 움직임을 멈췄다. 풍선이 부풀어오르다가 터지기 바로 전의 긴장처럼 공포가 가장 최고점에 이른 것이다.

바로 그때, 바로 옆에 앉은 그가 눈에 들어왔다. 뒤에 보이는 어둠 때문인지 아니면 머리 위에서 내리쬐고 있던 조명 탓인지 얼굴 윤곽이 뚜렷해 보였다. 무서움에 나는 안전바를 움켜쥐었다. 그런데 그는 슬며시 손을 안전바 밑으로 내려놓았다. 그가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이 마주쳤다고 느꼈을 때 자이로드롭이 땅으로 내려꽂히듯 떨어졌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졌다.

나를 묶고 있는 의자는 굉장한 속도로 추락했지만 몸은 공중으로 솟구쳐올라 산산이 흩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소리를 내질렀다. 채 가시지 않은 공포를 떨치듯 안전바를 올리며 일어서는데 놀랍게도 그는 낙하하기 직전의 태연한 표정 그대로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간이식당 안에는 대관람차를 맡고 있는 미스 윤이 혼자 앉아 있다. 창 옆에 자리를 잡은 그녀는 내가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에도 눈을 탁자에 떨군 채 국숫발을 건져올리고 있었다. 그녀는 일주일 전부터 이곳에서 일을 시작했다. 가장 다루기 쉬운 대관람차는 처음 들어오는 사람에게 맡겨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네 명이 앉을 수 있는 둥근 통이 천천히 높이를 달리하며 큰 원을 그리며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데는 10여 분이 걸렸다. 미스 윤이 한 달쯤 버틴다면 그때쯤엔 사람들이 그녀를 대관람차, 라고 부르게 될 것이다. 국수 사리가 미스 윤의 젓가락 사이에서 뚝뚝 끊어진다.

첫날부터 그녀는 별반 말이 없었다. 아마 지금껏 그녀 입에서 세 마디 이상 말이 이어지는 것을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모르지만 그녀에 대한 소문들이 놀이공원의 기구들 사이로 떠돌아다녔다. 친한 친구에게 애인을 빼앗겼다는 말과 의붓아버지에게 강간당하고 가출을 했다는, 혹은 미스 윤이 원래 동성연애자인데 애인이던 여자가 다른 그와 결혼을 해 버렸다는 소문들까지.

바닷가 유원지 작은 놀이공원엔 떠도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새로 들어온 사람들에겐 으레 특별한 사연이 있는 것처럼 말이 만들어지는 것이 당연한 일인 것처럼 되어 있었다. 그와 내가 처음 들어왔을 때에도 말들이 많았다. 심지어 둘이 이복남매 사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그대로 결혼할 수 없어서 둘 다 가출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표를 파는 몇몇 여직원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일용직에 불과했다. 행락객들이 몰리는 봄이 지나면 대부분의 놀이기구는 멈출 것이다. 사람들도 흩어져 제 갈 길을 갈 것이다. 여름쯤이면 그는 어디에서 키다리 삐에로 복장을 하고 풍선을 부풀리게 될까.

“올해는 장마가 빨리 올라나?”

무거운 공기를 일깨우듯 주방 아주머니가 말을 건넨다. 벌써부터 후덥지근한 걸 보면 빨리 올 것 같아요. 나는 밖을 내다보며 대답한다. 하늘엔 먹장구름이 넓게 드리워져 있다. 그가 관리사무소를 향해 걸어가는 것이 보인다. 키다리 삐에로는 어디에서고 금방 찾을 수 있다. 가발이 벗겨지려고 하자 오른손을 올려 잡는다. 성큼성큼 빠르게 관리사무실 건물 뒤로 사라진다. 관리사무실과 담 사이에 쳐놓은 천막이 그의 임시 숙소였고 분장실이었다. 거기서 그는 삐에로 옷을 벗고 스틸트를 벗을 것이다.

힘없는 가락국수의 면이 자꾸만 젓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아이들의 함성이 들린다. ‘날으는 개구리’에서 나는 소리다. 배가 불룩한 커다란 개구리 그림에 의자가 있다. 의자는 개구리 배 부분을 위아래로 왔다갔다한다. 기구가 출렁일 때마다 아이들의 다리가 개구리의 배 위에서 리듬을 타며 흔들거린다. 아래로 내려오다가 갑자기 다시 위로 솟구치면 아이들의 비명이 터져나온다.

익숙한 진행방향과는 다른 방향을 체험해 보는 것, 보통의 속도와는 비교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속도를 즐기는 것, 사람들이 놀이동산에서 찾는 것은 그런 것들일 것이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것, 현실에서는 이룰 수 없는 환상으로 들어가고 싶을 때 사람들은 놀이동산을 찾는다. 놀이기구를 타는 동안은 살아 온 삶과는 다른 방향이거나 아니면 환상, 그 둘 중 하나다. 현실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맞은편 미스 윤은 국물뿐인 그릇에 계속 젓가락질을 하고 있다. 눈동자는 여전히 탁자에 박혀 있다. 괴기스런 느낌마저 든다.

 

네 개의 표에서 뜯어낸 승차권을 상자 안에 넣는다. 손등 위로 빗방울이 몇 개 떨어진다. 하늘이 어둑해지자 사람들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놀이공원 안이 설렁해졌다. 회전목마 앞에도 줄서서 기다리는 사람이 이제 없다. 네 사람은 모두 말을 탔다. 나는 밖으로 나가지 않고 그대로 레버를 밀어올린다. 전구에 빨간 불이 켜진다.

파란 하늘, 파란 하늘 꿈이 드리운 푸른 언덕에 아이 염소 여럿이 풀을 뜯고 있어요. 해처럼 맑은 얼굴로.

음악이 회전목마를 따라 돈다. ‘일일 시설물 점검표’ 위에 걸려 있는 디지털 시계의 붉은 숫자가 1시 23분을 알리고 있다. 시간은 더디게 흐르고 있다.

놀이공원은 문을 닫기 바로 전처럼 한적하다.

바이킹이 가볍게 하늘을 가른다. 배 옆면 애꾸눈 선장 그림이 솟아올랐다가 가라앉고 다시 반대쪽으로 솟구친다. 풍뎅이는 범퍼카에 엉덩이를 반만 걸친 채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차를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다. 범퍼카와 천장에 잇닿은 전선 끝에서 불꽃이 튄다. 차를 모두 한 곳으로 모으고 있는 걸 보니 그쪽도 이미 손님이 끊긴 모양이다.

…해처럼 맑은 얼굴로. 앞면에 녹음된 마지막 노래가 끝난다. 회전목마만 조용히 돈다. 새 노래가 나오길 기다린다. 노란 원피스를 입은 아이가 탄 목마가 눈앞으로 지나간다. 한번. 두 번. 노란 원피스가 돌아오는 것을 센다. 아이가 내 앞을 지나갈 때쯤에 회전축에서 삐걱삐걱 소리가 난다. 속도가 빨라지면서 아이의 치맛자락이 둥글게 펼쳐진다. 목마에 커다란 노란 풍선 하나가 매달려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놀이기구든 그것을 타고 있는 동안은 비현실적이다. 움직임이 멈췄을 때 비로소 모든 건 제자리로 돌아온다. 바람이 채워지고 손놀림에 따라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변한 풍선도 그냥 풍선은 아닐 것이다. 그의 손에서 부풀리고 비틀리고 터지는 풍선은 이미 비현실적이다.  

회전목마의 속도가 느려지다가 멈춘다. 풍선 속의 바람이 빠지듯 노란 원피스가 가라앉는다. 노란 원피스에게 다가가 안전벨트를 풀어 주고 안아서 내려 준다. 물컹한 살이 부드럽고 따뜻하다. 아이의 볼과 내 볼이 살짝 스쳤다고 느꼈는데 어느새 아이는 내 손아귀에서 빠져나가 뛰어가고 있다. 저쪽으로 돌아 나가야지. 나는 목청을 높여 소리친다. 시계 방향으로 돌아간 아이는 밖에서 기다리던 엄마에게 달려가 안긴다. 방금 전 아이의 살에서 느껴지던 물컹함과 따뜻함이 나를 마취시키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회전목마 앞에 그대로 서 있다. 목마는 텅 비어 있고,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빗줄기가 갑자기 굵어진다. 조정 레버에 안전핀을 걸고 자물쇠로 잠근다. 스웨터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식당 쪽으로 뛴다. 약속하지 않아도 일이 끝났을 때나 쉬는 시간이면 모두들 간이식당으로 모였다. 비가 아주 많이 내린다면 모를까 정상 근무 시간인 오후 여섯 시까지는 공원 안에서 대기하고 있어야만 한다. 변덕스런 날씨가 언제 해를 비출지 모르기 때문이다. 바이킹, 풍선여행, 후룸 라이드, 날으는 개구리, 로데오 레이스카……, 모두 멈췄다. 대관람차만 돌고 있다.

“내가 정말 물 좋은 곳 알아놨는데 오늘밤 어때?”

풍뎅이의 목소리가 문 밖까지 새어나온다. 또 싸구려 나이트 클럽 얘기일 것이다. 지난 번 정기 휴일에도 몇몇이 풍뎅이와 함께 나이트 클럽에 갔다는 얘기를 들었다. 풍뎅이는 춤추는 것보다 부킹에 관심이 더 많다. 부킹에서 만난 여자와 여관에 간 얘기를 무용담 늘어놓듯 떠벌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풍뎅이를 둘러싸고 있던 모두가 나를 쳐다본다. 나는 얘기를 못 들은 척하고 창가를 찾아 앉는다.

“회전목마, 너도 오늘은 같이 가자.”

다가서며 풍뎅이가 말한다. 그를 향해 눈을 치켜 뜬다. 나보다 다섯 살이나 어린 녀석이 언제부터 그냥 회전목마, 회전목마, 하고만 불렀다. 누나, 그러지 맙시다. 누난 다 좋은데 인생을 너무 심각하게 사는 게 문제야. 풍뎅이는 굳어 있는 내 표정이 마음에 걸렸는지 금세 말투를 바꾼다. 오늘은 꼭 끌고라도 가겠다는 심사인지 인생까지 들먹인다. 그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본다. 인생을 너무 심각하게 사는 게 문제야, 하는 말을 속으로 되씹어 본다. 괜히 껄끄러운 웃음이 나온다.

주방에서 아주머니가 쟁반 위에 커피가 든 병과 종이컵을 들고 나온다. 안 가겠다는 사람을 왜 자꾸 끌어들여. 우리끼리 가자. 누군가 말한다. 온수기 물을 종이컵 안에 넣자 금세 커피 향이 식당 안에 퍼진다. 풍뎅이가 탁자 위로 커피를 내려놓으며 윙크를 한다. 종이컵을 낚아채듯 집어들고 나는 창 밖을 본다. 유리창에는 빗물이 방울방울 맺혀 있다. 위에서부터 물 한 줄기가 아래로 흘러내리며 맺혀 있던 물방울들을 끌고 내려간다. 중앙 매표소 앞 아크릴 구멍이 더 이상 표를 팔지 않겠다는 말처럼 하얀 종이로 가로막혀 있다.

야야, 이게 무슨 소리냐? 저 나무에서 들리는 소리가 아니냐? 아버지는 죽기 며칠 전부터 자꾸만 새의 울음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고개를 창 밖으로 내밀고 아무리 둘러보아도 나무도 새도 보이지 않았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만 좀 하세요 아버지. 무슨 소리가 들린다고 그래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요. 뭐든……. 엄마 얘기든 고향 얘기든…….”

아버지의 뺨 위로 눈물만 흘렀다. 가물가물한 눈동자는 터진 수맥처럼 눈물을 흘려보냈다. 더 이상 억지를 부리지도 않았고 생떼를 쓰지도 않았다. 모든 걸 소진해 버린 사람처럼 누워 있었다.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검버섯이 뒤덮인 살갗 위로 갈래갈래 검푸른 혈관이 드러나 보였다. 철이 들고 그렇게 아버지의 손을 잡아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정말로 새가 울고 있어. 새가.”

진물이 끈적거리던 아버지의 눈은 이미 눈으로 볼 수 있는 곳보다 더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아차렸다. 정말 새가 날아오르는 것이 보이기라도 한 것처럼 눈동자가 움직였다. 표정도 생생했다. 그러나 내 눈에 보이는 아버지의 눈동자는 텅 비어 있었다.  

며칠 뒤,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그 날 아침 밥상 앞에서 아버지는 손가락을 목에 넣고 억지로 음식물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누런 위액과 김치 가닥과 퉁퉁 불은 밥알이 장판 위로 쏟아졌다. 이렇게 질기게 살면 뭐해. 내가 죽어야 해. 내가 죽어야 니가 편치. 아버지는 정신이 멀쩡해지면 음식을 먹지 않았고 그나마 먹었던 음식까지도 억지로 토해냈다. 방문을 밀고 나서는 나를 불러 세웠다. 그러고는 말없이 자물쇠를 내밀었다. 잠그고 가거라. 그것이 내가 이세상에서 들을 수 있었던 아버지의 마지막 목소리가 되고 말았다.

풍뎅이의 말에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린다. 대관람차엔 아직 손님이 있나? 미스 윤이 안 보이네. ‘플라잉 헬리콥터’의 목소리다. 밖을 내다본다. 움직이는 놀이기구는 아무것도 없다.놀이기구가 멈춰 버린 놀이동산은 폐가처럼 괴괴하다.

“그러고 보니 삐에로도 안 보이네.”

그를 끌어들이는 풍뎅이의 말이 귀에 거슬린다. 나는 그가 사라진 관리사무소 쪽을 쳐다본다. 건물 뒤로 그가 쳐놓은 주황색 천막이 삐죽 나와 있다. 누나, 삐에로도 불러올까요? 내 어깨 위로 손을 올려놓으며 풍뎅이가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한다. 화가 치밀어오른다. 개자식. 나는 탁자 위에 있던 커피를 풍뎅이의 얼굴 위로 뿌렸다. 풍뎅이가 내게 달려들려고 하자 몇몇이 뒤에서 그를 붙잡는다. 밖으로 나오는 내 뒷덜미에 잡스러운 말들이 쏟아진다.

빗줄기는 조금 가늘어져 있었다. 얼굴 위로 비가 내린다. 시원하다. 애써 눈을 떠보려 한다. 낮은 구름 사이로 뭔가 움직이고 있다. 바람에 구름이 밀려가고 있는 것도 같고, 내리는 비에 구름이 흔들려 보이는 것도 같다. 죽은 사람의 영혼이 새가 되어 떠돈다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이집트의 전설이었나. 영혼의 새가 허공을 떠돌아다니다가 마법을 통해 죽은 자기의 육체와 다시 만난다는. 오래 전 들었던 얘기다. 그러고 보니 새들이 한 곳으로 날아가며 휘저어 놓은 구름 사이로 길이 나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구름이 만들어내는 길을 따라 걷듯 하늘을 올려다보며 허청허청 걷는다.

후르르. 분명 새 울음 소리다. 멈춰선다. 발길을 관리 사무소 쪽으로 돌린다.

 

천막 안 공기가 후끈하다. 그는 두꺼운 스티로폼 위에 앉아 있다. 가발과 삐에로 옷을 입은 채였다. 그는 내가 온 것을 모르는 것처럼 쳐다보지도 않는다. 피리를 불면서 테니스 공으로 저글링 연습을 하고 있다. 버클이 풀린 스틸트를 치우고 나는 그 옆에 앉는다. 

“줘 봐. 나도 한번 불어 보게.”

그가 입 안에서 작은 피리를 꺼낸다. 이거? 피리를 옷에 쓱쓱 문질러서 내게 준다. 입 안에 넣고 불어도 소리가 나지 않는다. 쉬쉬. 피리 사이로 바람만 빠져나간다. 왜 이렇게 어려워. 이것도 요령이 있는 거야? 그는 피리를 가져간다. 이렇게 혀로 입구를 반쯤 막아. 그는 혀를 길게 뺀 뒤 그 끝에 피리를 댄다. 공기를 그냥 흘려 버리면 안 돼. 이렇게 하다 보면 맑은 소리가 나는 순간이 있어. 그의 입에서 피리 소리가 난다. 되받아 가르쳐준 대로 해 보지만 소리가 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발끝에 놓여 있는 그의 가방을 끌어당긴다. 물감꾸러미를 꺼낸다. 검지손가락에 빨간 물감을 묻힌다. 거울 좀 줘. 손거울을 얼굴 높이에 맞추고 콧등 위에 빨간 물감으로 동그란 원을 그린다. 거울을 아래로 내린다. 코 바로 밑에서 볼을 지나 턱으로 이어지는 큰 타원형을 그린다. 이번엔 하얀 물감을 가운뎃손가락에 묻힌다. 타원형 안을 하얗게 채워넣는다. 거울을 들여다보며 입술을 움직여본다. 큰 입술이 꿈틀거린다. 우스꽝스럽고 슬퍼 보인다.

나는 버럭 그를 껴안는다. 빨간 물감으로 그려진 큰 입술을 헤집다가 그의 진짜 입술을 찾아낸다. 그는 혀끝으로 피리를 내 입 안으로 밀어넣는다. 나는 피리 대신 그의 혀를 깊숙이 빨아들인다. 새의 혀가 입 안의 점액질을 타고 밀려 들어오는 것 같다. 가늘고 긴 혀다. 곧 그의 몸에서 새 울음이 울릴 것만 같다. 새의 깃털 속을 파고들 듯 나는 그의 겨드랑이로 파고들어간다. 빗줄기가 굵어졌는지 천막 위로 비 내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나는 풍선이고 싶다. 그가 넣어 주는 바람을 타고 달팽이가 되고, 칼이 되고, 우산이 되고……. 그와는 이세상에 없는, 결코 헤어지지 않는 그런 사랑을 하고 싶다. 그것만 현실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천막 위에 고여 있던 빗물이 작은 틈새로 떨어져 바지를 적신다. 허벅지가 차갑다. 엄마랑 싸우던 횟수만큼 자이로드롭을 탔다는 말은 거짓이었어. 우리 엄만 오래 전에 돌아가셨어. 엄마가 너무 보고 싶으면 놀이공원으로 달려갔지. 남들이 무섭다고 말하는 것들만 골라 탔어. 처음 자이로드롭을 탈 때를 잊을 수 없어. 땅에서 점점 멀어질 때 두려웠어. 그런데 그 두려움이 커지다가 어느 순간엔 황홀해졌어. 처음 함께 밤을 보내던 날, 그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 날도 두런거리는 우리들 말 사이로 밤새 빗소리가 들렸었다.

“우리 엄만 내가 어렸을 때 도망갔어. 이젠 얼굴도 가물가물해. 큰 거 한 건 해서 뭉칫 돈을 가지고 오겠다며 중 3 때 집을 나간 아버지는 치매에 걸려 나타났어. 시에서 운영하던 단기보호소에서 연락이 왔더라고. 난 아버지에게서 도망가고 싶어. 하루에도 몇 번씩 이게 모두 꿈이었으면, 하고 생각하지. 왜 가끔씩 그런 꿈을 꾸기도 하잖아. 꼭 진짜 같은 꿈.”

천장을 올려다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는 내게 그가 대답 대신 이마에 긴 입맞춤을 해주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래, 모두 꿈이야, 라고 그가 말하는 것 같았다.

그의 소개로 ‘마린 월드’에서 일하게 된 얼마 후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입맞춤이 나를 아버지에게서 도망할 수 있는 마법이라도 된 것처럼.

   

갑자기 밖이 소란스럽다. 관리사무소 문 여닫는 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이 뛰어가는 것 같다. 대관람차야. 119 부르고, 빨리 사장님께 연락해. 다급한 외침이다. 대관람차, 라는 말에 문득 식당에서 마주쳤던 미스 윤의 무표정한 얼굴이 생각났다. 그녀의 젓가락 사이에서 끊겨지던 국수 가락들과 탁자에 박혀 있던 그녀의 시선. 거기 섬뜩한 뭔가가 있지 않았던가. 서둘러 밖으로 나간다. 그도 뒤따라온다.

낯익은 뒷모습이 빙 둘러서 있다. 그들의 젖은 어깨 사이를 헤치고 앞으로 나간다. 얼굴은 점퍼로 가려져 있지만 밑단에 꽃무늬가 수 놓아진 청바지는 미스 윤의 옷이었다. 가끔씩 경련을 일으켰다. 피 때문에 빗물은 점점 붉어진다. 손님도 없는데 혼자 기구를 탔나 봐요. 식당을 나오는데 저기서 뭔가가 떨어졌어요. 풍뎅이가 대관람차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한다.

검은 구름을 배경으로 솟아 있는 대관람차는 공상영화에 나오는 거대한 괴물 같다. 연인들의 키스 장소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무시무시해 보인다. 대관람차에 오르면서 미스 윤은 뛰어내릴 생각을 했던 것일까. 그냥 높은 곳에 올라가 세상을 내려다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데 땅에서 점점 멀어지면서 삶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던 것은 아닐까. 자이로드롭이 지상을 떠나 80미터 높이까지 올라갔을 때 방 안에 갇힌 아버지의 얼굴까지도 환상처럼 느껴졌던 것처럼. 내가 살아 온 날들이 다 꿈처럼 여겨졌던 것처럼.  

머리카락을 타고 빗물이 뚝뚝 떨어진다. 옷이 젖고, 한기가 몰려온다. 구급차 소리가 들린다. 사람들이 길을 내어주고, 구급대원들이 들것을 들고 뛰어온다.

 

안전핀에 걸어 놓았던 자물쇠를 푼다. 출발 레버를 밀어올리자 기구 작동을 알리는 빨간 불이 선명하게 밝아 온다. 회전목마 지붕 가장자리에 붙어 있는 색색의 꼬마전구들에도 불이 들어와 환하게 빛난다. 목마들이 돌기 시작한다. 천천히, 곧 빠른 속도로 돈다. 화려한 그림과 불빛들, 거울까지……. 회전목마는 현란하다. 앰프 전원을 넣는다.

빗방울이 뚝뚝뚝뚝 떨어지는 날에는 잔뜩 찡그린 얼굴로. 엄마 찾아 음매, 아빠 찾아 음매, 울상을 짓다가.

줄에 매달린 말들은 빗속에서도 한달음에 멀리 달려갈 기세다. 나는 기계실을 나와 목마 가까이 다가간다. 저기 어디쯤 구식 카메라를 들고 아버지가 서 있을 것만 같다. 회전축에 붙은 화려한 거울과 말 그리고 금색 안장. 저 거울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목마는 나를 환상의 세계로 데려다주지 않을까. 

회전축에 붙어 있는 거울 안에 내가 있다. 목마가 돌 때마다 거울은 각을 달리하며 나를 비춘다. 꼬마전구의 불빛을 배경으로 거울 속에 서 있는 나는 현란한 빛 때문인지 내가 아닌 것만 같다. 앞모습을 보여주다가 살짝 비껴가고, 하나로 보여주는가 싶었는데 여럿으로 나를 흩어 놓고 만다. 분명 내 얼굴이었는데 어느 순간에는 낯선 누군가가 거울 속에 서 있다. 내 등뒤로 아버지의 모습도 보인다. 아버지, 하고 부르려는데 어느 새 사라져 버린다.

후르르.

분명 그 새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본다. 아무도 없다. 대관람차 앞에 모여 있던 사람들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그 많던 사람들이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는다. 그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저 소리는 어디서 오는 것인가. 고개를 젖혀 하늘을 본다. 굵은 빗줄기가 따갑게 퍼붓는다. 가늘게 눈을 떠본다. 구름에 무늬를 새겨 놓은 듯 새들이 떠다니고 있다. 구름을 향해 손을 뻗어 휘젓는다. 새들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얼굴에 칠했던 붉고 흰 물감이 빗물과 섞여 흘러내린다. 흰 셔츠가 점점 붉게 물든다.

후룩, 후룩. 이번에는 새소리가 아주 선명하게 들린다. 회전축을 따라 돌고 있는 거울 속에 그가 걸어오고 있는 것도 보인다. 삐에로 옷을 벗어 버린 그는 가늘고 긴 스틸트를 드러낸 채 걸어오고 있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피리 소리가 따라온다. 손에는 파란 풍선으로 만든 우산이 들려 있다. 그는 나를 향해 걸어오는 것이 아니라 회전목마의 거울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지상 80여 미터 높이, 자이로드롭이 낙하하기 직전이었다. 추락의 공포가 극에 달해 있던 찰나에 우리는 서로를 봤다. 그러니까 그와 나는 땅에서 벗어난, 현실에서 벗어난 어떤 지점에서 만난 것이다. 나는 거울 속으로 점점 다가드는 그의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회전목마는 그를 품고 쉬지 않고 돌아가고 있다.  《문장웹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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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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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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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 식물원 하가람 식물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다이아몬드 모양의 철골로 둘러싸인 거대한 유리 온실에는 열대와 지중해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이국적인 식물이 자란다고 했다. 한 달 전 나는 식물원 근처에 있는 여러 호텔을 찾아 은규에게 링크를 보냈다. 보통 때의 그라면 어디든 좋다고 했을 것이다. 레스토랑도, 카페도, 동네의 작은 아이스크림 가게조차도 모조리 내 선택에 맡기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날 은규는 이미 예약한 곳이 있다고 하여 나를 놀라게 했다. 은규가 보내 준 링크를 열어 보았다. 넓은 통유리 창 너머로 식물원과 공원이 내다보이는 스위트룸이었다. 나는 조금 들뜬 채 답장했다. — 우리가 만난 지 곧 1년이래. 믿어져? 1년이라는 시간은 내게 유별났고 은규에게는 별다른 감흥이 없는 것이었다. 그가 전에 사귄 여자친구는 단 두 명인데 각각 4년, 5년을 만났다고 했다. 매번 석 달도 채 넘기지 못하는 나와는 달랐다. 이따금 은규에게 이전 연인들에 대해 물었다. 그들이 어떤 성향의 사람이었고 어떤 외양을 가졌는지 궁금했다. 처음에는 응응, 하며 대꾸해 주던 은규는 내가 그녀들의 음악 취향이나 살던 동네처럼 구체적인 정보까지 캐묻자 태도를 바꾸었다. 기억 안 나. 그는 말했다. 다 옛날이야기라고. 그 후로는 이전에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그녀들을 생각했다. 눈, 손톱, 말투, 그리고 신발. 나와 닮았을지, 닮았다면 얼마나 닮았고 다르다면 무엇이 다를지도. 상상을 이어 가다 보면 늘 한 가지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은규는 한 번도 애인과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까 여자와 밤을 보내는 일이 오늘 그에게는 처음이었다. 서른을 넘긴 남성에게서 보기 드문 경우였지만 그가 처음인 게 좋았다. 그 점이 무엇보다도 나와 그녀들을 구분 지어 주는 것만 같았다. 차창에 머리를 기대었다. 햇볕에 데워진 창문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인터넷으로 보았던 화려한 꽃과 기다란 나무들을 떠올렸다. 노랗고 푸르고 분홍빛이 맴도는 공간을. 여름 휴가철이었고 도로는 차들로 빽빽했다. 졸음 껌을 씹는 은규를 보며 말했다. “오늘은 내가 운전하고 싶었는데.” “다음에. 너 힘들어.” 은규가 말했지만 나는 안다.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그는 내게 차를 맡기지 않을 것이다. “보면 놀랄걸? 너무 잘해서?” 나는 허리를 세운 채 한 손으로 반원을 그려 보았다. 휙휙. 입으로 소리 내며 운전대를 쥔 그를 따라 했다. 그가 웃었다. 머릿속으로 주행하기. 그것은 나만의 놀이였다. 캠퍼스 변두리에 있는 H관 1층, 5평 남짓한 주차관리실에서 상상력을 충족시켜 줄 만한 것은 많지 않았다. 먼지 쌓인 커피믹스와 낡은 소파, 책상 위에 시간별로 놓여 있는 분홍색, 파란색, 노란색 주차권들. 지겨운 서류, 서류, 서류. 드물게 실장이 자리를 지키는 날이 아니면 대체로 혼자 그곳에서 일했다. 사람들이 찾아와 주차권을 사거나 정기 등록을 마친 후 돌아가면 나는 모니터에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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