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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탯국

  • 작성일 2013-04-01
  • 조회수 1,252


동탯국

 

천정완

 

 

 

1304_04동태

 

 

 

   4년 전, 미 항공우주국(NASA) 소속의 늙은 천문학자 조지 스텐은 메릴랜드 주의 작은 호텔에서 은퇴식을 했다. 후배들의 권유로 연단에 오른 스텐은 당신들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만 남기고 식장을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마치고 홀로 응접실에 앉아 동료들이 선물로 준 30년산 코냐크와 맥주 여덟 캔을 마셨다. 스텐은 무엇이든 자를 수 있다는 특수합금 식도 TV 광고를 한참 보다가 해가 뜨기 시작하자 잠자리에 들기로 결심했다. 침대에 엎드린 그는 유튜브에 동영상을 한 편 남기고 잠들었다. 그가 남긴 14분 분량의 동영상의 내용은 암흑 속에서 간간이 들리는 그의 잠긴 목소리가 전부였다. 그는 4.3광년 떨어진 알파 켄타우루스별이 폭발했으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 암흑이 바로 별이 폭발하는 장면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4.3년 후에 지구에서 우주선(宇宙線, cosmic rays)을 비롯한 복사선(輻射線, radiant ray)이 기가 막힌 오로라를 만들어 장관이 펼쳐질 것이라는 말을 하다가 잠시 멈췄다. 다시 마음을 다잡은 그는 이론상으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고, 자외선을 비롯한 우주의 공격으로부터 지구를 보호해 주는 자기층을 그 빛이 완전히 파괴해 지구의 모든 생명체가 곧바로 바비큐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가 동영상을 남긴 다음날부터 14분의 검은 영상은 전 세계로 퍼졌다. 그의 주장을 믿을 수 없다는 다른 천문학자는 그가 남긴 것과 비슷한 검은 영상 속에서 그의 의견은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한 어린아이의 주장과 같다고 그를 힐난했다. 많은 과학자들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저열한 수준의 컴퓨터 그래픽이라는 둥, 물리학적 근거를 들어 지상최고의 사기행각이라는 둥 비난하며 목소리만 등장하는 조지 스텐의 동영상과 비슷한 동영상들을 만들어 올렸다. NASA는 조지 스텐이 심각한 수준의 알코올중독자였다고 성명서를 냈으며 그는 동영상을 제작하는 동안에도 술을 마셨다고 발표했다. 그는 순식간에 조롱의 대상이 됐다. 언론을 비롯해 각종 매체에서 그를 취한 오랑우탄이라고 불렀다. 조지 스텐은 미 연방법원에서 그를 소환하기도 전에 자살했으며 그의 장례식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유튜브에서는 암흑 속에서 원숭이가 우는 패러디 영상이 유행했다. 그리고 그 해프닝은 가끔씩 패러디 코미디물로 만들어졌다가 그마저도 곧 대중에게 잊혀졌다.

 

   완전히 잊혔던 조지 스텐의 이름이 인류에게 뜬금없이 다시 등장한 것이 바로 오늘 아침이었다. 4월 중순 난데없이 폭설이 내리고 있었다. 아침을 먹고 거실에 누워 있던 아버지가 방에 있던 우리를 불렀다. 아버지는 똑바로 앉아 TV 속에서 미국 대통령이 성명서를 낭독하는 것을 보고 있었다. 미국 대통령은 속도와 거리를 계산하면 남은 시간은 대략 하루 정도, 운이 좋으면 조지 스텐이 세운 가설이 틀릴 수도 있지만 그게 아니라면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연설을 하던 미국 대통령이 참담하게 고개를 숙였다. 믿을 수 없겠지만 그의 말이 사실이었다고 조지 스텐의 이름을 거론했다. 그가 전 인류를 대신해서 여러분에게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드리겠다고 말하는 장면을 우리는 나란히 앉아 시청했다. 지랄하고 앉았네. 형이 말했지만 더 지랄 같은 상황은 그의 말이 사실이었다는 것이다. 방송사들은 준비했던 특집 프로그램을 편성했고, 검은 상복을 입은 앵커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실황 중계를 했다. 그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하루 정도이고 그 이후의 시간은 ‘혹시’였다. TV 속 우주는 인류를 멸망시킬 빛은 보일 기미도 없이 깜깜하고 고요했다. 과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그 빛을 느끼기 전에 모든 것이 끝날 것이라고 앵커가 설명했다. 고통조차 없을 것이라고. 다시 종합해 보면 우리는 의문도, 예고를 예고로 받아들일 여유도 없었다. 화가 난다기보다는 황당했다.

 

   사람들은 예상외로 ‘혹시’라는 확률에 매달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인류의 종말 예고가 발표되면 으레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폭동이나 약탈은 영화에서만 있는 일인 듯 서울은 지나치게 고요했다. 각종 종교단체의 교당은 예상외로 조용했고, 사람들은 오래 생각해 둔 여행을 준비하듯 침착했다. 백화점과 대형 마켓들은 미리 문을 개방했지만 영화에서처럼 귀중품을 훔치거나 TV를 머리에 이고 뛰어다니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종말을 앞둔 지구는 숨 막히게 조용했다. 나는 사람들이 믿기지 않아서보다 용기가 없어서라고 생각했다. 방송사에서는 헬리콥터를 띄워 전국을 비췄다. 고속도로의 정체가 심했고 개중에는 차를 버리고 걸어가는 사람도 있었다. 열심히 마당을 파고 있는 가족도 보였고 옥상에 커다란 태극기를 펼쳐 놓은 집도 보였다. 눈은 하염없이 내렸다. 모두 저마다 분주하지만 소란스럽지는 않았다. 나는 사람들이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믿기지 않아서였다고 생각을 고쳤다. 예상했던 대로 우리 가족은 같이 보내지 않기로 했다. 동생은 집에 있기 싫다고 했고 형은 ‘혹시’ 모르니까 자신이 다니는 전자회사의 기밀을 빼놓을 거라고 했다. 아버지는 원래 집에 있기 때문에 계속 집에 있겠다고 했다. 그래서 집에는 아버지와 나만 남았다. 아버지와 나는 마땅히 할 일이 없어서 재난 뉴스를 봤다. 가끔씩 비춰 주는 우주는 여전히 깜깜했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 영화는 다 거짓말이네. 종말 하면 강간하고 폭동 아니냐?
   아버지가 말했다. 속보가 전해지고 몇 통의 전화가 왔다. 시시하고 상투적인 말들이었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지만 전부 예상 가능한 말들뿐이었다.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담배를 물다가 도로 내려놓고는 담배 끊어야 하는데, 하더니 피식 웃었다.
   — 밥이나 먹자.
   아버지가 담뱃불을 붙이고 베란다로 나갔다. TV 화면은 마당에서 쌓인 눈에 빗자루로 글씨를 쓰고 있는 남자를 비췄다. 예수천국, 불신지옥. 종교의 끝도 뻔하구나. 전화가 왔다. 나는 TV 볼륨을 줄이고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가 베란다에서 창밖을 보며 천천히 흔들렸다.
   — 뭐 해?
   시큰둥한 목소리였다. 동생이었다.
   — TV 보고 있어. 어디냐?
   — PC방.
   — 뭐 해?
   — 만랩 찍고 죽어야지. 박은 돈이 얼만데. 오늘 공짜네.
   지루하지 않아서 좋아. 꼬박꼬박 업데이트해 주고, 하는 만큼 존경받고 이게 인생 아니겠어? 고등학교에 막 입학할 나이였던 동생의 말이 떠올랐다. 동생은 너무 일찍 알았다. 거기나 여기나 별것 없고,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것을.
   — 사람 많냐?
   내가 묻자 동생이 피식 웃었다. 수화기 건너에서 몇 가지 음악이 섞여 넘어왔다.
   — 존나 많아. 다들 아껴 뒀던 아이템들을 풀어서 여기 피바다야.
   딸깍딸깍 클릭 소리가 들릴 때마다 동생이 말을 끊었다.
   — 오늘 만랩 찍어야 되는데, 시간이 없네, 시간이.
   동생의 말끝이 흐려졌다. 동생은 몇 마디를 더 했는데 적국의 모스부호처럼 도무지 해석할 수 없는 말들이었다. 내가 침묵하자 동생의 말도 끊겼다. 그래, 어쩌면 그편이 나을지도 모르지. 그래. 알았다. 생각하며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 누구냐?
   아버지가 베란다에서 물었다.
   — 정철이요.
   — 경찰이라고?
   아버지가 화들짝 놀라 피우고 있던 담배꽁초를 떨어뜨렸다.
   — 정철이라고요.
   아버지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떨어진 담배를 주워 물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죄지을 용기도 없는 인간이면서. 아버지는 연신 담배연기를 뿜으며 창밖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눈은 쉼 없이 내리고 있었다. 지구에서 아니 서울에서 내리는 마지막 눈이었다. 마당을 쓸던 그 남자는 여전히 쌓인 눈 위에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쓰고 있을까? 치우면 쌓이고 치우면 또 쌓이는 이 눈발을 여전히 감당하고 있을까? 어쩌면 그가 그렇게 두려워하던 지옥이 자꾸만 지워지는 자신의 신념일지도 모르겠다. 표현할 길 없는 오롯이 마음속에서 잠깐씩만 반짝이는 내 말들처럼. 밥 먹자. 아버지가 베란다에서 소리를 질렀다. 밥 먹자. 그 한마디에 침이 고였다.
   — 반찬도 없는데요. 뭐하고 먹죠?
   내가 베란다 쪽으로 소리 질렀다. 아버지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긴 뭐가 중요할까. 잘하면 소화도 못 하고 죽을 판인데. 주방으로 가서 냉장고를 열었다. 아무것도 없는데 시큼한 냄새가 났다. 나는 김치찌개를 끓일까 생각하다가 김치 말고는 넣을 게 없어서 관뒀다. 며칠 전 장을 봤어야 하는데, 돈도 없고 의지도 없었다. 오늘을 예상이라도 했듯.
   — 냉동실에 동태 있더라. 그거 끓여라.
   어느새 거실에 누운 아버지가 말했다. 나는 아버지 옆에 앉았다.
   — 이럴 줄 알았으면, 빚이라도 내서 넓은 집에 사는 건데.
   아버지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 빚은 아무나 내요?
   아버지가 싱겁게 웃었다. 특집방송을 하던 앵커가 울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그는 사과했다. 병신. 아버지가 말했다. 앵커가 데스크 위에 엎드려 울었다. 그의 첫 방송 사고였다. 화면이 바뀌었다. 헬리콥터는 어느덧 시청 광장 위에 떠 있었다. 조금씩 광장으로 모여드는 사람들이 보였다. 시민 여러분 동요하지 마십시오. 자막이 지나갔다.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화면이 바뀌었다. 여자 앵커가 분장을 하고 있다가 깜짝 놀랐다. 여자 앵커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마침내 입을 뗐다. 타이타닉이 침몰할 때 마지막까지 음악을 연주하던 여덟 명의 악대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바이올리니스트 월레스 하틀리를 아십니까? 그는 이름이 없는 연주자였습니다. 혹시 타이타닉을 보셨습니까? 여자 앵커의 시선이 대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수면 아래로 배가 가라앉기 직전까지 갑판에 서서 끝까지 연주했던 그 여덟 명의 악대를 이끌었던 연주자가 바로 월레스 하틀리입니다. 저희는 그 숭고함을 아직도 잊지…… 그녀가 말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못 하겠어요. 이게 무슨 짓이에요. 저는 집에 가고 싶어요.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스카라가 번진 눈에서 검은 눈물이 흘렀다. 카메라 앵글이 순식간에 바뀌었고 데스크에 엎드려 울던 남자 앵커가 경건한 자세로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우당탕, 여자가 비명을 지르며 끌려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 저희는 그 숭고함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화면이 다시 광장을 비췄다. 좀 전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 그렇지. 저렇게 돼야 종말이 믿기지. 아, 난 사실 안 믿었어. 난 니가 나 정신 차리라고 몰래카메라 신청한 줄 알았어.
   아버지가 TV 볼륨을 올리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봤다.
   — 왜 저렇게 모일까요?
   나는 발을 만지며 TV에 열중한 아버지에게 물었다.
   — 이거 몰래카메라 아니지?
   아버지가 은근히 웃으며 물었다. 아버지는 아무렇지 않아요?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돌아올 대답이 뻔해서였다.
   탕탕, 누군가 현관을 두드렸다.
   — 올 사람 있어요?
   — 누가 오냐?
   탕탕탕, 누군가 현관을 세차게 두드렸다.
   — 방망이 하나 쥐고 나가 봐. 모르는 사람이면 먼저 대가리를 때려라.
   현관문을 열자 뚱뚱한 여자 하나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녀의 어깨에 채 녹지 않은 눈송이들이 반짝였다. 여자는 곧 넘어갈 것처럼 숨을 헐떡이면서 서 있었다.
   — 누구세요?
   — 아버지 계시니?
   — 누구신데요?
   — 아버지 계시면 좀 나와 보라고 해라.
   그녀는 요란한 스팽글 무늬로 장식된 작은 백을 꼭 쥐고 단호하게 말했다. 빨간 손톱이 가늘게 떨렸다.
   — 왜요?
   — 급한 일이니까 좀 나오라고 해.
   아버지가 누구냐고 물으면서 천천히 나왔다. 그녀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팔짱을 끼고 다리를 벌려 따질 자세를 잡았다. 나는 눈이 녹아 번진 꽃무늬 블라우스와 큐빅이 듬성듬성 빠진 플랫 슈즈를 훑어봤다. 그녀의 얼굴에서 아마도 정성스럽게 한 화장이 땀에 녹아 흘러내리고 있었다.
   — 돈 줘요. 그러니까…….
   그녀는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 누구요?
   앞서 나온 아버지가 한숨을 쉬었다.
   — 여긴 어쩐 일이에요?
   아버지가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약간 휘청거렸다.
   — 한심해하지 마요. 꼭 주기로 약속했잖아요.
   — 나 참 그게 몇 년 전 일인데.
   아버지는 머리를 긁으면서 멋쩍게 웃었다. 여자가 핸드백에서 수첩을 꺼냈다. 수첩에는 빼곡하게 적힌 글자들이 있었다. 알 수 없는 메모들과 몇 번이나 썼다 지운 숫자들이 있었다. 그녀는 수첩을 척척 몇 장 넘기더니 손가락으로 아버지 이름을 가리켰다.
   — 8만 9천 원이에요.
   — 뉴스 안 봤어요?
   — 난 안 믿어요.
   — 돈은 무슨 돈이야. 내일이면 다 끝인데. 노자로 쓰시게?
   — 난 안 믿어. 아니 못 믿어.
   — 돈 없어요. 참 나. 어떻게 표현을 못 하겠네. 이거 수상한데?
   — 난 안 믿어. 말이 돼요?
   — 몰라. 몰라요. 난 돈 없어요. 가요.
   — 내 돈 내놔요. 약속했잖아요.
   그녀는 울기 시작했다. 여자의 얼굴에서 갈색 눈물이 줄줄 흘렀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 그럼 내일까지 준다고 약속해요.
   그녀가 울음을 삼켰다. 양미간에 심하게 주름이 졌다가 다시 다부진 얼굴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내일 꼭 입금할게요. 몇 번이나 확답을 받은 후에야 여자는 수첩을 핸드백에 넣었다.
   — 내일 안 넣으면 지옥까지 가서 받을 거예요.
   — 밥은 먹었어요?
   — 아직 수금을 반도 못 해서 못 먹었어요. 내일 꼭 넣어요.
   여자가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 누군데요?
   — 전에 살던 동네 우유보급소 사장이야. 밀린 거 두 달치 안 주고 이사 왔어.
   아버지가 구시렁거리며 거실로 들어갔다. 나는 복도를 가로질러 가는 뚱뚱한 그녀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현관에 서 있었다.
   — 야, 밥 먹자.
   아버지가 거실에서 소리쳤다. 눈은 여전히 내렸다. 좀 더 폭력적으로.

 

   주방에서 동태를 녹이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 뭐 하냐?
   형이었다. 저녁 무렵이 되면 형이 늘 하는 질문이었다. 저녁 먹게. 내가 말하자, 뭐하고? 라고 형이 물었다. 형은 수화기 가까이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멀리서 자동차 경적 소리가 들려왔다.
   — 동탯국 끓여 먹게.
   내가 말했다. 오오. 멸치다시 해서? 응. 내가 말했다. 오오. 콩나물도 넣어? 아니 콩나물은 없어. 형이 깊게 숨을 몰아 뱉었다. 수화기 건너편으로 뜨끈한 것이 귀에 전해졌다. 형과 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 아아. 짜증난다.
   — 왜?
   — 몰라 끊자.
   형이 먼저 전화를 끊었다. 형은 콩나물 넣은 동탯국을 좋아했다. 형은 불평이 많고 성질이 급해서 가끔은 폭력을 쓰기도 했지만 뭘 먹고 있을 땐 세상의 어떤 동물보다 온순했다. 지금 생각하면 형은 자기 말고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었다. 형은 늘 회사에 생각보다 팔아먹을 정보가 많다고 했었다. 중국으로 팔아넘기면 돈방석에 앉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단 지구가 멸망하지만 않는다면. 형은 그렇게 말했었다.
   — 누구냐?
   아버지가 거실에 누워서 물었다.
   — 형이요.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텔레비전으로 빠져들었다. 어떻게 저렇게 속이 편할까? 아버지 같은 인간은 보통 사람들과 다른 유전자로 태어나는 것 같다. 동태는 녹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녹지 않았다. 동태에 칼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나는 조금 더 기다리기로 했다. 아버지가 거실에서 콧노래를 불렀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저 콧노래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울었던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물이 끓었다. 멸치와 무를 넣었다. 맑은 물이 탁해졌다. 나는 어릴 때부터 요리하는 것이 좋았다. 중학교 2학년 때 가정 선생님은 요리가 상처라고 했다. 성한 것에 칼집을 내고 썰고 뜯어내고 끓이고 튀기고 하는 것이 다 상처를 내는 것이라고. 상처를 얼마나 잘 내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고. 나는 그 상처라는 말이 좋았다. 동태가 녹고 있었다. 고작 물이 끓는데 13평 아파트가 후끈 달아올랐다. ‘가난이 불편한 것은 사소한 것 때문이다’라고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동탯국의 레시피는 생각보다 간단하다. 잘 손질한 동태를 잘 우려낸 육수에 넣고 잘 만든 양념과 잘 손질된 야채만 넣으면 된다. 적당히 하면 된다는 말이다. 모든 일이 다 마찬가지지만 포인트는 타이밍이었다. 물이 끓기 전에 동태를 넣으면 비린내 때문에 최악의 맛이 되고, 너무 오래 끓이면 살이 다 퍼져서 먹는 동안 재료가 뭐였는지 알 수 없다. 지구가 멸망하고 있는 동안 내내 동태가 녹고 있었다. 아버지가 누워 있다가 일어나 주방 쪽을 봤다.

 

   — 두부는 있냐?
   — 없어요.
   아버지가 박수를 쳤다. 쩍쩍. 물론 아무 의미도 없었다. 아버지 개인적으로도 의미를 두지 않는다. 의미 없는 것들이 타이밍을 잘 맞추면 상당한 파동을 준다. 아버지의 박수가 그랬다. 내가 태어나던 해, 아버지는 길에서 친형을 잃었다. 아버지의 말대로라면 형은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하던 사람이었고, 결국에는 실패했지만 그건 살아남은 사람들의 잘못 때문이라고 한다. 상투적인 핑계였지만 모든 핑계가 상투적이니 나는 그러려니 했다. 아버지는 형이 남긴 숙제인 진보와 해방이 가슴 속 깊이 박혔으며 가끔씩 시리다고 했다. 얼굴도 모르는 큰아버지는 새로운 세상이 오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아버지도 함께 믿었다. 그 시절에는 그게 종교였단다. 아버지는 형의 부재 때문에 형이 그렇게 증오하던 대기업에 취직했다. 아버지는 금융위기 때 스스로 직장을 그만뒀다. 아버지는 둘러앉은 가족들 앞에서 식은 족발을 안주 삼아 소주를 마시며 그동안 국민의 피를 빠는 대기업의 작은 나사로 일했지만, 단 한 번도 꿈을 잊은 적 없으니 이제 꿈을 실현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아버지는 15년을 놀았다. 아버지의 꿈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끔 아버지마저도 꿈을 알까 싶었지만 아무도 물어보는 사람이 없었다. 엄마는 알았을까? 펑펑, 화염병이 터지듯 내 마음속에 불길이 터졌다가 금방 꺼졌다. 동탯국을 망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물은 계속 끓었고, 나는 다 녹지도 않은 동태를 냄비에 넣었다.

 

   딩동. 초인종이 울렸다. 아버지가 누워 있다가 일어나 현관문을 바라봤다.
   — 누구세요?
   현관 밖에 서 있을 누군가는 말이 없었다. 구멍으로 바깥을 보니 뛰어왔는지 숨을 몰아쉬는 남자가 있었다.
   — 이상한 사람 아니니까 문 좀 열어 주세요.
   자신이 없는 목소리였다. 현관문을 열자 경직된 얼굴의 중년 남자가 서 있었다. 얼핏 봐도 쉰은 넘어 보였다. 그의 왼손에는 용림반점이라고 붉은 글씨가 새겨진 철가방이 들려 있었다. 그가 숨을 몰아쉴 때마다 입김이 우리 사이로 퍼졌다. 그의 왼손에 들린 철가방이 떨렸다.
   — 이상한 사람 아니고요. 상가에 용림반점이라고 중국집 하는 사람인데요.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 근데요?
   — 혹시 이거 드실래요?
   그가 철가방을 내밀었다. 철가방을 쥔 손이 빨갛게 얼어 있었다.
   — 안 시켰는데요?
   그의 얼굴이 굳었다. 아마도 준비한 예상 답안에서 가장 어울리는 답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 거짓말 같은 소리인데요. 제가 평생 중국집을 했어요. 미친 소리 같지만 오늘을 의미 있게 보내고 싶어서 가게를 열었어요. 제 평생을 걸었거든요.
   그는 철가방을 흔들면서 말했다.
   — 중국 요리에 평생을 바쳤어요. 오늘 혹시나 시키는 사람이 있나 진짜…… 미친 소리 같지만 고민 많이 했거든요. 열까 말까. 제가 마누라 자식 차사고로 먼저 보낸 사람이에요. 가게, 가게 때문에, 가게가 뭐라고 처가 사람들 다 놀러 가는데, 가게 연다고 고집 부려서 안 가고……. 저만 살았어요. 세상에 저하고 가게밖에 없어요. 그래서 오늘도 가게를 열었어요. 죽어도 가게에서 죽자 하는 마음으로. 그런데 주문이 왔어요. 전가복하고 해삼주스랑 샥스핀 수프까지 이거 재료비만 이십만 원이 넘는 거예요.
   남자가 철가방을 바닥에 툭 내려놓았다. 복도에 여진처럼 둔탁한 소리가 퍼졌다.
   — 근데 가보니까 장난전화예요. 시킨 적 없대요. 그냥 먹으라니까 뭐가 들었을지 아냐고 문전박대하데요. 이게 어떤 요린데. 얼마나 공들여서 한 음식들인데. 개새끼들이. ……. 내 인생을 건 요린데. 진짜…… 짐승만도 못한 새끼.
   그는 철가방을 열어 음식들을 확인시켜 줬다. 한 번도 보지도 실제로 들어 보지도 못한 요리였다.
   — 이거 드실래요? 부탁드릴게요. 그냥은 못 가져가겠습니다.
   — 저, 사정은 알겠는데요. 제가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자격이…….
   내가 말했다.
   — 그럼 버리세요.
   남자는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점점 걸음이 빨라지더니 어느새 복도 끝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쿵쾅거리는 그의 발소리가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철가방을 들고 들어와 아버지 옆에 놓았다.
   — 뭐냐?
   — 누가 주고 갔어요. 먹으라고.
   아버지는 철가방을 눈으로 훑었다.
   — 용림반점? 상가 일층에 있는 집 아니냐? 맛없잖아. 짜장면도 더럽게 맛없더만. 이따가 동탯국 다 끓으면 밥 먹을래.

 

   나는 부엌에 서서 냄비 속에서 끓고 있는 동태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젓가락으로 동태의 배를 갈랐다. 살이 퍼져서 국물에 녹았다. 설마 아무도 실감하지 못하고 있는 건가? 육수에서 멸치를 건져냈다. 젓가락으로 무가 알맞게 익었는지 찔러 봤다. 나는 황하 중류의 모래먼지가 전국을 덮을 것이라고 시끄럽게 떠들었던 어제, 나른했던 오후의 한 라디오 뉴스를 떠올렸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아침부터 눈이 오기 시작했다. 황사는 눈에 섞여 영영 볼 수 없게 됐다. 보이지 않으면 느끼지도 못하는 미세 먼지들처럼 ‘혹시’ 아무도 실감하지 못하고 있는 건가? 나는 창을 활짝 열고 머리를 바깥으로 내밀었다. 봄의 온기를 머금은 바람이 내 얼굴 위로 눈송이들을 올려놓았다. 저절로 한숨을 쉬게끔 만드는 바람이었다. 4월에 눈이라니, 이제는 놀랄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나는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거실에서 TV 소리가 커졌다.
   — 와, 저거 봐라.
   TV 속 광장에 사람들이 꽉 차 있었다. 적어도 100만은 되는 사람들이 광장에 모이고 있다고 자막은 전했다. 그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고 기자가 소리쳤다. 앵커는 국민 여러분을 외치고 있었다.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다. 전경들이 열을 맞춰 사람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누구도 흔히 예상하는 장면을 연출하지 않았다. 다만 모여서 서성이고 있었다. 카메라에 비친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른 채, 앉고 서서 서로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진압차들이 그들에게로 모여드는 장면을 헬기로 찍은 장면이 보였다. 도로 위에 하얀 바퀴 자국들이 생겨났다.
   — 왜 아무것도 안 하냐? 모였으면 이제 패싸움 해야지. 이거 쇼 아냐? 몰래카메라면 너 진짜 혼난다.
   아버지가 턱을 만지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집 안 구석구석 다니며 뭔가를 찾았다.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모여들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형이 한 말이 떠올랐다. 방황하던 시절 당구장에 가면, 같이 방황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마음이 편했다고. 교복을 입고 욕하고 떠들고 보란 듯이 담배를 피우고 있는 동년배들을 보면 자기는 좀 괜찮다는 위안을 받는다고. 어쩌면 저들도 그렇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양념장을 만들기 위해 싱크대를 열었다. 고춧가루와 미원, 간장과 소금을 꺼냈다. 엄마는 모든 음식에 양념이 중요하다고 말했었다. 양념은 재료의 맛을 보충하는 것을 떠나서 재료의 질을 감출 수 있는 중요한 것이라고 했다. 엄마는 선천적으로 싸게 태어난 것들을 감추는 법을 알고 있었다.
   — 이야.
   아버지가 거실에서 소리를 질렀다. 아파트 전체에서 탄성이 터졌다. 월드컵 이후로 그런 소리는 처음이었다.
   — 이리 와봐라.
   아버지가 다시 한 번 소리 질렀다. 내가 아버지에게 갔을 때 아버지는 무슨 일인지 일어나 앉아 있었다.
   — 왜요?
   내가 말하자 아버지는 대답 없이 텔레비전을 가리켰다. 그의 손끝에는 검은 우주가 펼쳐져 있었다.
   — 뭔데요?
   — 저거다 저거.
   아버지의 손끝은 여전히 검은 우주를 가리켰다. 그는 숨을 얕게 몰아쉬고 있었다.
   — 저게 뭔데요.
   — 우리한테 오는 게 저거란다. 그나저나 몰래카메라면 진짜 치밀한데?
   아버지가 손을 거두면서 말했다. 29인치 구형 브라운관 텔레비전은 깜깜한 밤을 쏟아내고 있었다. 거리가 느껴지지 않은 탓인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냥 검은 화면이었다. 평상시와 전혀 차이를 느낄 수 없는 검은 여백이었다. 그것을 중계하는 아나운서는 상황을 세세히 설명하며 끝까지 데스크를 떠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부분에서 사명감이라는 단어를 연발했다. 사명감. 태어나서 그 단어를 체감하는 최초의 순간이었다.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이었지만 역시 시시한 말이었다. 아파트 곳곳에서 탄식과 탄성, 고함소리가 들렸다. 아버지는 눈을 끔벅거리며 가만히 텔레비전을 들여다봤다.
   —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기분이 이상하다.
   아버지가 말했다. 그는 담배를 물고 베란다로 나갔다. 메리야스와 늘 입는 엄마 반바지가 어쩐지 오늘따라 더 늘어져 보였다. 그는 파란 연기를 뿜어내며 묵묵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결국 큰아버지가 말하던 새로운 세상이 왔다. 그렇지만 큰 기계에서 떨어져 나온 작은 나사인 아버지는 당황했다. 예측할 수 있는 건 그렇게 욕하던 통속극의 스토리뿐이었다. 실제로 아버지는 공사장 인부도 할 수 없이 약했다. 그마저 뻔하고 지겨운 패턴이라 욕하던 거실 구석에 버려진 486컴퓨터의 장기 게임과 점점 화면이 흐려지는 TV만 유일하게 아버지와 소통했다. 엄마가 죽던 날, 엄마의 임종을 보지 않겠다던 아버지는 결국 술에 취해 나타났다. 멱살을 잡는 외삼촌을 힘겹게 제압한 그는 육개장을 한 그릇 말아먹더니 발인할 때까지 영안실 구석에 모로 누워 있었다. 하염없이 타는 엄마를 멀리 유리벽으로 보며 껌을 씹던 아버지는 뼈가 된 엄마가 담긴 항아리를 끌어안고 울었다. 형과 나는 처음 보는 아버지의 울음에 당황했고 동생은 조소했다. 그 이후부터 아버지는 더 뻔뻔해지기로 결심한 것 같다. 좀 더 오래 살기 위해서. 화면이 다시 검어지자 아파트 여기저기서 또다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남자 앵커도 마침내 울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를 반복하면서. 그런데 뭐가 죄송하다는 거지? 검은 영상이 지나가고,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하나 둘씩 해산하기 시작했다. 광장 주변 도로가 인파로 물든다. 광장을 둘러싼 진압차들이 서둘러 길을 트고 있었다. 어쩐지 패잔병 같은 생각이 들었다. 왜 모여서, 아니 모였으면 서로 싸우기라도 해야 될 텐데. 용기가 있든 없든 나는 그들이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실감한 사람들이 속속들이 흩어졌다.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채 삼십 분도 지나지 않아 모조리 해산했다. 아버지는 베란다에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나는 아버지가 내게 미안하다고 할까 봐 걱정했다.

 

   동탯국에 양념장을 넣자 연하던 색이 빨갛게 퍼지며 끓어올랐다. 동태는 토막 난 채로 제 몸속에 국물을 끌어 담고 있었다. 그 거짓말 같은 양념을 뒤집어쓰더니 생태라도 될 것처럼 동태의 색이 붉어졌다.
   딩동 초인종이 울렸다.
   현관문을 열자 형이 서 있었다. 형은 나를 한번 껴안더니 집으로 들어섰다. 그는 쪼그리고 앉아 낡은 구두를 오래 벗었다.
   — 울어?
   — 미쳤냐?
   집으로 들어선 형이 집을 살폈다. 대부분 형이 일궈 놓은 것들이었다. 형의 한숨이 집 전체에 퍼졌다.
   — 뉴스 보니까 확실하다며. 생각해 보니까 일하기 억울하더라. 저건 뭐냐?
   형이 거실 한쪽에 있던 철가방을 가리키며 물었다.
   — 저 집 사장이 주고 갔어.
   — 용림반점? 거기 별로잖아.
   뚱뚱한 형의 얼굴에서 굵은 땀이 흘렀다. 그는 땀을 닦아내며 내 어깨 너머 누워 있는 아버지를 봤다.
   — 주무시냐?
   — 아니.
   형이 편한 차림(아버지와 거의 흡사한)으로 주방으로 왔다. 팔짱을 끼고 내가 만들고 있는 동탯국을 보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 왜?
   내가 묻자 형이 대답 대신 내 어깨를 주물렀다. 그는 가쁜 숨을 내쉬며 펄펄 끓는 동탯국과 내 어깨를 동시에 봤다. 형한테서 술 냄새가 풍겼다. 형은 어디서 술을 마셨을까. 대학교를 그만두던 해 테이블 구석에 엎드려 서럽게 울던 형이 떠올랐다. 가족 같은 것은 개나 줘버리라던 형은 결국 가족을 위해 무허가 무역회사에 취직했다. 아버지를 조금은 이해한다고 술김에 말한 것은 입사 3년차 되던 해였다. 그는 술이 깨자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 마늘 넣었냐?
   — 없어서 못 넣었어.
   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형은 포기도 빨랐다. 인생을 송두리째 가족에게 반납할 때도 형은 아쉬워하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 단지 월급의 일부분을 먹는 것에 투자하는 것, 형의 욕심은 거기까지였다.
   — 아쉽지 않냐?
   — 뭐가?
   — 그냥. 이럴 줄 알았으면 존나 방탕하게 사는 건데.
   — 아버지랑 똑같이 말하냐?
   그게 유전인가 보다, 하며 형은 내 목 뒷덜미를 만졌다. 그의 얼굴에 묘한 그늘이 지나갔다.
   — 후회 없이 사는 게 철학이라며? 그냥 방탕하게 살지.
   내가 나직하게 말했다. 형이 웃었다.
   — 내가 할 테니까 가서 담배나 피우고 와.
   형이 내 손에 들린 국자를 빼앗으며 말했다. 형은 음식을 잘 못하지만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형에게 저녁 대접을 받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류 마지막 날에 싹트는 형제애라니. 펄펄 끓고 있는 동태 덩어리가 나도 모르게 애처로웠다.

 

   베란다에 나오자 봄바람이 불었다. 봄바람은 하얀 눈송이를 이리저리 옮겼다. 폭설이 내리는 와중에 이렇게 따뜻한 바람이 불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고층 임대아파트는 일 년 중 가장 조용한 날을 보내고 있었다. 오후 8시. 하나 둘 주차장으로 모여들던 차들도 보이지 않고 거리의 사람들은 쓸쓸하게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어디서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담배연기가 하늘에 풀어졌다, 사라졌다. 씁쓸한 담배 맛이 입가에 맴돌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이제는 하지 못할 말이 되었다. 미래가 없다는 것은 점점 할 말이 없어지는 것과 같았다. 아파트는 레고 블록처럼 반듯하게 서서 꾸역꾸역 사람들의 발걸음을 삼켰다. 전화선들은 복잡하게 얽혀 사방으로 퍼졌고, 각 회선마다 복잡한 심경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바람이 부는 만큼, 마음속에서 내 마음은 등대처럼 깜깜한 곳에서 깜빡거렸다. 크고 작은 발자국이 가로등 주위로 번져 있다. 그 위에 하얗게 눈이 쌓인다. 누군가 한참을 서성인 자국을 천천히 눈발이 지워냈다. 그때 윗집에서 창문 여는 소리가 들렸고 곧 한 남자의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휘파람을 부는 남자는 가족을 모두 잃은 알코올중독자였다. 동네 사람 누군가의 표현을 빌리면 그의 레퍼토리는 너무 사소해서 지겹다는 것이다. 나는 그것들을 정의해 봤다. 표현하지 않으면 잘 알 수 없는 것들, 마음 깊이 고여 있는 말들, 맘속에서 발화되는 감정의 씨앗 같은 것들이었다. 가장 사소한 표현들. 생각해 보면 사소한 것들이 가장 큰 상처였다. 그는 주민들의 신고로 정신병원에 다녀온 후에 한동안 잠잠했었다. 휘익. 휘익. 막막한 저녁을 가르는 휘파람 소리가 단지 안으로 퍼졌다.
   ‘휘익 휘익. 나는 대한민국 사람입니다. 나는 김종철입니다. 나는 슬픕니다. 휘익 휘익.’
   그의 고정 레퍼토리였다. ‘외롭습니다.’ ‘슬퍼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합니다.’ 그의 말들이 눈송이와 함께 날렸다. 아무도 4월의 폭설에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이제는 누구도 그에게 닥치라고 소리 지르지 않는다. ‘휘익 휘익’ 하고 윗집 남자가 부는 휘파람 소리가 가로등 앞에 소복하게 쌓였다.

 

   동탯국은 실패였다. 형은 부엌에서 울상을 지으며 내가 수습해 주기를 바랐다. 뭘 넣었는지 동탯국은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이상했다. 비리면서 짜고 매웠다. 나는 형을 위로하고 나서 그냥 먹자고 밥상을 차렸다. 오늘의 메뉴는 식어 빠진 중국 요리들과 동탯국이었다. 잘 어울리지 않았지만 누구도 불만을 이야기하지 않았기에 그냥 먹기로 했다. 형이 동탯국을 먹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버지는 텔레비전을 보며 묵묵히 젓가락질을 했다.
   — 맛있구나.
   — 이게 맛있다고요?
   형이 밥숟갈을 탁 놓았다. 아버지가 움찔했다. 그는 딴청을 부리며 짠 동탯국을 계속 입속으로 퍼 나르고 있었다. 형이 그런 아버지를 노려봤다.
   — 사람이 한 번도 솔직한 적이 없어. 진짜 맛있어요?
   아버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 대답을 해봐요.
   — 정철이는 안 오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만랩을 채우려면 한 달은 필요할 것이다. 욕망과 재능은 별개의 일이었으니까. 형이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물컹한 동태를 푹 떠서 내 밥그릇에 놓았다. 많이 먹어라. 마음이 물컹해지는 것 같았다.
   — 정철이도 왔으면 좋겠구만.
   아버지가 말했다. 아무도 닭다리를 먹지 않기로 동의한 것처럼, 우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TV는 이제 우리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중계하고 있었다. 자리를 지키던 앵커는 결국,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사명감을 말하던 모습과는 달리 너무도 초라한 모습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메라 앵글 밖으로 사라졌다. 화면은 깜깜한 우주를 비췄다. 볍씨만 한 별들이 너무나 고요하게 빛나고 있었다. 한없이, 한없이 반짝반짝. 저녁 식탁에 둘러앉은 우리는 어울리지 않는 궁합의 한 끼 식사를 해치우며 서로의 존재감을 느꼈다. 아버지가 젓가락을 놓았다.
   — 할 말 없냐?
   예? 형이 되물었다.
   — 그냥 뭐 하고 싶은 말이나, 그런 거.
   형은 무책임한 말이라고 했다. 무책임한 말이라고. 왜 하필 지금 이 시간에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아버지는 정말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냐는 듯 형을 본다. 아버지는 무슨 할 말 있냐는 형의 물음에 아버지가 딴청을 부렸다. 그러고는 밥상을 뒤로 쑥 빼 앉더니 다시금 정말 할 말이 없냐고 물었다.
   — 없어요.
   형이 말했다.
   — 이거 몰래카메라지?
   — 아니에요.
   — 진짜 아니야?
   — 예.
   내가 말했다.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하더니 입속에 남은 밥알을 씹으며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버지는 TV 속 우주처럼 캄캄한 얼굴로 나와 형을 몇 번이고 번갈아 보더니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 이거 왜 이렇게 짜냐?
   형이 숟가락을 탁 하고 놓았다. 동탯국은 실패였다. 좋은 재료도 아니었고 잘 만든 양념도 아니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어쩌면 처음부터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멀리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형은 현관문을 확인하고 보일러 온도를 점검한 후 자리에 누웠다. 형이 내 쪽으로 돌아누우며 물었다.
   — 정철이 안 와?
   — 응. 아무래도 안 올 것 같아.
   — 왜?
   — 만랩을 못 찍었나 보지.
   나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게임 속으로 걸어가기 전, 그는 처음으로 나를 붙잡고 오래오래 말했다. 누구를 원망을 하는 것도 화를 내는 것도 아니고, 보내 달라고 사정했다. 너무 끔찍해서 거기서 살아야겠다고 말하면서.
   내가 뭐가 그렇게 끔찍한지 물었는데 동생은 공부하기 싫어서 그렇다고 말했다. 나도 그도 이유는 모르지만 누구나 공부는 하기 싫으니까 그렇구나 했다. 그리고 그는 마법사와 오크들이 살고 있는 전설의 사냥터로 들어갔다. 거기로 가는 그의 마지막 모습을 보며 나는 그와 영영 이별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잘살아. 그게 마지막 말이었고, 어색하게 흔드는 손, 그게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 넌 점심에 뭐 먹었냐?
   형이 물었다.
   — 라면.
   — 그리고?
   — 그냥. 뉴스 보다가 다운받은 영화 보고.
   형은 나를 보고 가끔 눈을 껌뻑였다. 잠이 오지 않는지 돌아눕기도 했다. 나는 생각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인지. 기상캐스터가 말하던 황사가 찾아올 것인지, 사람들은 오늘 일을 말끔하게 잊고 살 수 있을지, 과연 감사하게 될지, 아니면 진심을 다해서 원망하게 될지, 많은 질문이 머릿속에서 쏟아졌다. 지구는, 세상은, 또 엊그제만큼의 내일을 우리에게 펼쳐낼지, 나는 막막한 날들 속에서 또 한 번 맛없는 동탯국을 끓이게 될지,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난 사람들이 아침 창을 활짝 열고 하얀 눈에 감탄사를 내뱉게 될지. 궁금하고 또 궁금했다.
   — 솔직히 너도 뻥 같지?
   형이 내 쪽으로 돌아누우며 말했다.
   — 응.
   — 그렇지 누가 믿어? 뻥 같지. 근데, 점심 지났는데 슬슬 뻥이 아닌 것 같더라.
   형이 머리를 긁었다.
   — 아, 대머리 되는 것 같아서 머리 심으려고 몰래 돈 모으는 중이었는데.
   나는 몸을 돌려 형을 봤다. 형은 참 못생긴 손을 가지고 있었구나 생각했다. 바보 같기는. 내가 중얼거렸다.
   — 우리 가족 다 모여 있었으면 슬펐겠지?
   가족? 나는 울컥해서 건성으로 대답했다. 형은 몇 번을 뒤척이더니 또 내 쪽으로 돌아누웠다.
   — 잘 거면 불 좀 꺼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불을 끄고 누웠다. 이제 정말 어둠이 찾아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애초에 우리가 없었던 것처럼 깜깜해졌다.
   — 너무 억울해하지 말고 자. 혹시 머리 심는 데 돈 쓰게 될지 모르잖아.
   — 다음 세상이 있으면 거기서는 네가 형 해라.
   — 싫어, 부담스러워서. 형이 형 해.
   내가 형의 등을 손가락으로 찌르며 말했다. 형은 대답이 없었다. 휴대폰을 찾아 시간을 확인했다. 4월 23일. 오전 0시 28분. 내 얼굴로 내일이 파랗게 번졌다 사라졌다. 밀도 높은 어둠이 다시 방 안을 채웠다. 깜깜한 우주를 가로질러 오는 빛 때문에 정말 끝나게 될까? 처음으로 의문이 들었고 그제야 눈물이 흘렀다. 나는 겨우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많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내가 아무것도 실감하지 못했었구나, 라고.
   — 자냐?
   아버지가 방문을 조심스레 두드리면서 물었다.
   — 아직요. 왜요?
   방문 건너에 있는 아버지는 쉽사리 말문을 열지 못했다.
   — 혹시 너희가 몰래카메라 신청한 거 진짜 아니냐?
   뜸을 들이던 아버지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방문에 귀를 댔는지 새근새근 숨소리가 들렸다.
   — 예.
   — 진짜? 정말?
   — 예.
   몇 번이나 같은 질문을 하고 나서야 아버지가 말을 멈췄다. 황하 중류의 흙먼지를 가득 품은 봄바람처럼 닫힌 방문 너머에서 그의 뜨뜻한 한숨이 건너왔다. 잠시 후에 거실에서 TV 소리가 들렸다. 볼륨이 조금씩 높아지더니 이내 낮아졌다. 4월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탐스러운 눈송이가 창밖에서 흩날렸다.

 

 

   《문장웹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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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01
원경

원경 성혜령 건강검진을 12월 마지막 주까지 미루는 사람이 자기 말고도 이렇게 많으리라고 신오는 생각하지 못했다. 대기실의 긴 좌석 중간중간 빈자리가 있긴 했지만, 신오는 한구석에 서 있기로 했다. 초음파 검사실 앞 복도는 자기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며 서성이고 있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헐렁한 가운에 느슨한 고무줄 바지를 입고 핸드폰을 보며 기다림을 견디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신오는 이들 중 내년에는 따뜻한 휴양지에서 연말을 보낼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지 궁금했다. 혹은, 오늘 치명적인 암이나 뇌동맥류 같은 것들을 발견하고 전혀 예상치 못한 인생을 살게 될 사람들은? 그런 일들은 언제나 일어나고 있었다. 직장 생활을 10년 정도 하니 주위에 아픈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전 직장 동료는 출근길에 쓰러진 뒤 안면마비를 얻었다. 한쪽 입꼬리가 위로 당겨 올라갔는데 그는 멀쩡한 다른 쪽 입꼬리도 끌어올려 웃는 얼굴을 만들곤 했다. 병가에서 돌아온 뒤 매일 웃는 얼굴로 제일 먼저 출근하는 동료를 보면서 신오는 이직을 결심했다. 신오는 모든 일이 가능하지만 대개 나쁜 일들이 더 자주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되도록 좋은 음식을 먹고 운동을 꾸준히 하려고 했다. 불행은 대비하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게 오히려 쉽게 다가오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도 있었다. 복부 초음파를 보던 의사가 “어랏?” 하고 실없는 소리를 내며 배꼽 부근을 세게 눌렀을 때도 신오는 방귀가 나올 것 같다는 생각뿐이었다. 의사가 차가운 젤을 다시 묻히고 초음파 단말기를 문지르다가 복막에 종양이 보인다는 말을 했을 때는, 그래서 요새 변비가 심했나, 라는 생각이 먼저 났다. 대형 병원에 가서 생검과 CT, MRI 검사를 마치고 소화기내과 교수의 진료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도 신오는 회사 메신저를 보고 있었다. 몇십 억 단위 공공사업의 수주가 걸린 입찰 제안서의 마무리를 앞둔 시점이었다. 병원 검사로 연차를 낸다고 했을 때 팀원들은 모두 별일 없을 거라고, 하루 푹 쉬고 오라고 말했지만 메시지를 보내면서 신오를 계속 태그했다. 신오는 그날 마지막으로 진료실에 들어갔다. 의사는 젊고 피곤해 보였다. 예약을 가장 빨리할 수 있었던 의사였으니 어쩔 수 없지, 신오는 생각했다. 의사는 신오가 자리에 앉자 간단한 인사도 없이 모니터 화면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마우스 커서로 신오는 잘 알아볼 수 없는 흐릿한 음영을 짚었다. 여기예요, 여기. 의사는 약간의 승리감마저 느껴지는 말투로 말했다. 복막의 종양은 전이 암이고, 여기가 원발 암이라고. “이게 숨어 있어서 찾기 어려웠거든요.” 의사는 다시 한번 마우스 커서를 움직였다. 췌장하고 담도 사이인데 위치나 크기가 좋지 않다고. 오늘이 금요일이니 당장 다음 주부터 항암치료로 크기를 줄여 보고 수술을 잡아 보자고. 신오의 핸드폰이 또 진동했다. 신오는 치료를 이주만 미뤄도 되냐고 물었다. 프로젝트가 있어서요. 이주 후에 마감이라. 의사는 처음으로 웃어 보

  • 관리자
  • 2024-05-01
야생 식물원

야생 식물원 하가람 식물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다이아몬드 모양의 철골로 둘러싸인 거대한 유리 온실에는 열대와 지중해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이국적인 식물이 자란다고 했다. 한 달 전 나는 식물원 근처에 있는 여러 호텔을 찾아 은규에게 링크를 보냈다. 보통 때의 그라면 어디든 좋다고 했을 것이다. 레스토랑도, 카페도, 동네의 작은 아이스크림 가게조차도 모조리 내 선택에 맡기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날 은규는 이미 예약한 곳이 있다고 하여 나를 놀라게 했다. 은규가 보내 준 링크를 열어 보았다. 넓은 통유리 창 너머로 식물원과 공원이 내다보이는 스위트룸이었다. 나는 조금 들뜬 채 답장했다. — 우리가 만난 지 곧 1년이래. 믿어져? 1년이라는 시간은 내게 유별났고 은규에게는 별다른 감흥이 없는 것이었다. 그가 전에 사귄 여자친구는 단 두 명인데 각각 4년, 5년을 만났다고 했다. 매번 석 달도 채 넘기지 못하는 나와는 달랐다. 이따금 은규에게 이전 연인들에 대해 물었다. 그들이 어떤 성향의 사람이었고 어떤 외양을 가졌는지 궁금했다. 처음에는 응응, 하며 대꾸해 주던 은규는 내가 그녀들의 음악 취향이나 살던 동네처럼 구체적인 정보까지 캐묻자 태도를 바꾸었다. 기억 안 나. 그는 말했다. 다 옛날이야기라고. 그 후로는 이전에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그녀들을 생각했다. 눈, 손톱, 말투, 그리고 신발. 나와 닮았을지, 닮았다면 얼마나 닮았고 다르다면 무엇이 다를지도. 상상을 이어 가다 보면 늘 한 가지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은규는 한 번도 애인과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까 여자와 밤을 보내는 일이 오늘 그에게는 처음이었다. 서른을 넘긴 남성에게서 보기 드문 경우였지만 그가 처음인 게 좋았다. 그 점이 무엇보다도 나와 그녀들을 구분 지어 주는 것만 같았다. 차창에 머리를 기대었다. 햇볕에 데워진 창문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인터넷으로 보았던 화려한 꽃과 기다란 나무들을 떠올렸다. 노랗고 푸르고 분홍빛이 맴도는 공간을. 여름 휴가철이었고 도로는 차들로 빽빽했다. 졸음 껌을 씹는 은규를 보며 말했다. “오늘은 내가 운전하고 싶었는데.” “다음에. 너 힘들어.” 은규가 말했지만 나는 안다.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그는 내게 차를 맡기지 않을 것이다. “보면 놀랄걸? 너무 잘해서?” 나는 허리를 세운 채 한 손으로 반원을 그려 보았다. 휙휙. 입으로 소리 내며 운전대를 쥔 그를 따라 했다. 그가 웃었다. 머릿속으로 주행하기. 그것은 나만의 놀이였다. 캠퍼스 변두리에 있는 H관 1층, 5평 남짓한 주차관리실에서 상상력을 충족시켜 줄 만한 것은 많지 않았다. 먼지 쌓인 커피믹스와 낡은 소파, 책상 위에 시간별로 놓여 있는 분홍색, 파란색, 노란색 주차권들. 지겨운 서류, 서류, 서류. 드물게 실장이 자리를 지키는 날이 아니면 대체로 혼자 그곳에서 일했다. 사람들이 찾아와 주차권을 사거나 정기 등록을 마친 후 돌아가면 나는 모니터에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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