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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소설 창작교실

  • 작성일 2013-11-21
  • 조회수 1,603

 

 

생활소설 창작교실

 

 

은승완

 


 

 

생활소설-삽화

 

 

    1.

 

    홍수환이는 사모라한테 깨졌고, 사모라는 사라테한테 깨졌고, 사라테는 고메즈한테 깨졌고, 고메즈는 산체스한테 깨졌지. 먹이사슬로 보면 산체스가 최강이었어. 하지만 산체스의 전성기는 오래가지 못했지. 그는 누구한테 깨졌는지 아나?
    한참 신이 나서 떠벌리던 관장이 불쑥 물었다. 나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아니오, 라고 말했다. 복싱에 관심이 없진 않았지만 헝그리정신으로 무장한 복서들이 활보하던 시절의 먹이사슬까지 꿰고 있진 못했다. 경쾌한 푸트워크를 하며 잽과 스트레이트를 날리듯 복싱 지식을 날려대던 관장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인생한테 깨졌네. 인생 말이야.
    관장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고메즈를 눕히고 일 년쯤 지난 뒤, 타고 가던 포르셰와 함께 절벽에서 곤두박질쳤지. 그를 때려눕힌 건 불의의 교통사고였는데, 그렇듯 장담할 수 없는 게 인생 아닌가.
    관장은 검지를 들어 벽에 붙은 사진을 가리켰다. 허리에 챔피언 벨트를 두르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곱슬머리의 멕시칸 복서. 관장이 좋아했다던 바로 그 산체스였다.
    강의실 한쪽 벽면에는 시대를 호령했던 명 챔피언들의 사진이 액자에 담겨 걸려 있었다. 한국 최장수 세계챔피언인 장정구와 유명우도 보였다. 그러나 내 눈길을 잡아끄는 건 반대편 벽에 걸려 있는 사진들이었다. 바바리코트 깃을 세우고 담배를 꼬나문 우수 어린 눈길의 사내는 소설가 카뮈였다. 파이프를 문 사팔뜨기 중년 남자는 사르트르였고, 콧수염을 기른 수더분한 시골 아저씨 같은 남자는 마르케스였다. 그와 나란히 황순원과 김동리, 이청준의 사진도 보였다. 그야말로 전설적인 복서와 소설가들이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 형국이었다. 복서들이 두 주먹을 올리고 상대를 때려눕힐 듯 노려보고 있는 데 반해 소설가들은 각자 생각에 빠진 듯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다는 점만 달랐다. 복싱과 소설이라니. 와인에 홍어무침을 곁들인 격이 아닌가.
    관장이 전화를 받는 사이 강의실 곳곳을 훑어보았다. 앞에는 흰색 이동식 보드가 걸려 있었고, 서로 마주보며 토론할 수 있도록 좌석이 배치되어 있었다. 흔한 강의실 풍경이었지만 구석에 덩그러니 매달린 샌드백과 펀칭백은 이곳이 여느 강의실과 다르다는 것을 암시해 주었다.
    수강생이 한 명 더 늘어나려나 보군.
    관장이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나는 본격적으로 질문공세를 펼 작정이었다. 생활소설이란 어떤 것인지. 이곳이 다른 소설학원과 어떻게 다른지. 언제부터 이 일을 시작하였으며 복싱과는 어떤 연관이 있는지. 궁금증에 몸이 달 지경이었지만 서두를 수도 없었다. 질문을 던지려는 찰나 강의실 문이 열리더니 수강생으로 보이는 여자가 들어온 것이다.
    안녕하세요. 관장님.
    여자가 헤실헤실 웃으며 인사했다. 관장 역시 고개를 끄덕여 화답했다. 삼십대 중반이나 됐을까. 여자는 헐렁한 트레이닝복에 러닝화 차림으로 책상 끄트머리에 앉아 책을 펼쳤다. 강의실이 아니라 헬스클럽이나 요가교실에 어울릴 법한 복장이었다.
    그래, 어디까지 했더라.
    관장이 내게 눈길을 돌렸다. 다행히 그는 모든 것을 설명할 준비가 되어 있는 듯했다.

 

 

    2.

 

    내가 복싱 판에 뛰어들던 시절, 프로복싱의 인기는 내리막길이었어. 세계챔피언 타이틀매치가 열리면 구름관중이 모여들던 게 불과 얼마 전인데도 까마득한 옛날 같았지. 복싱의 인기는 갑자기 시들해졌어. 전문가들은 여러 가지 분석을 내놓았지. 그중엔 사람들이 이제 헝그리 스포츠인 복싱을 기피한다는 분석도 있었어. 복싱 판에서 예전과 같은 슈퍼스타를 배출하지 못한 탓도 있다고 했어. 그즈음 국내에 소개되기 시작한 이종격투기의 인기 때문이라고도 했지. 이종격투기는 복싱보다 화끈하고 원초적이지. 격투기 본래의 야성에 더 충실하다고나 할까. 하긴 상대를 쓰러뜨려야 하는데, 주먹만 쓰라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기도 해. 발차기를 하든 목을 조르든 관절을 꺾든 상대를 쓰러뜨리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말이야. 그건 태권도와 복싱과 레슬링과 유도 중 어느 것이 더 강한 무술인가 하고 의문을 품었던 호사가들의 오랜 궁금증을 해결해 주는 것이기도 했지. 새로운 세대들은 이종격투기에 열광했어. 관중이 모여들자 스폰서들도 꿀벌처럼 달라붙더군. 반면 복싱은 경기를 여는 것조차 힘들어졌지.
    그래도 나는 복싱이 좋았어. 뭐랄까. 복싱에는 특유의 절제된 미학이 숨겨져 있었거든. 파괴적인 이면에 감춰진 우아함이랄까. 내 스타일 역시 상대를 강펀치로 단번에 쓰러뜨리기보단 기회를 엿보면서 서서히 무너뜨리는 아웃복싱에 가까웠지. 내가 산체스를 최고의 복서로 치는 것도 그런 이유야. 산체스는 강한 상대에겐 강했지만 약한 상대에겐 힘을 못 쓰는 경우가 많았거든. 나는 상대와 주먹을 교환할 때의 흥분과 쾌감이 좋았어. 그러나 내 복싱은 관중의 환호를 이끌어내지 못했지. 화끈하지도 못했고, 일발필살의 주먹도 없었으니까. 다만 나는 끈질기게 상대를 괴롭혔고, 쉽사리 정타를 허용하지 않았어.
    이십대 중반에 나는 프로복싱을 위해 지방대학을 중퇴했어. 모두가 말리는 길이었지. 경기 당 40만 원의 대전료를 받았지만 링 위에 선다는 것만으로도 좋았어. 운동은 오전에 했고, 오후에는 시간제 아르바이트를 뛰었지. 편의점, 택배, 대형마트의 물품 분류 등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았어. 선수가 없어서 시합이 성사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고, 학교 체육관을 빌려 시합을 치르는 경우도 허다했어. 돈이 되는 이종격투기로 갈아타는 동료들도 하나둘씩 늘어났어. 나는 그럴 수 없었어. 어린 시절, 나를 매료시켰던 복싱의 아름다움이 여전히 가슴 속에 살아 숨 쉬고 있었으니까. 아직 그런 복싱을 단 한 번도 구현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나는 한국챔피언을 따내면서 복싱 관계자들에게 조금씩 인지도를 높여 갔어. 대전료가 100만 원으로 뛰었지만 일 년에 한두 번 열리는 경기 수입으로는 목에 풀칠도 힘들었지.
    동양챔피언 도전자 결정전을 앞둔 어느 날이었어. 체육관을 나서는데, 한 노신사가 길을 막아서더군. 감색 양복에 붉은 꽃무늬 넥타이를 맨 신사였는데, 처음 보는 이였어. 내가 알고 있는 프로모터나 상대편 매니저는 아니었어. 그가 나를 구형 그랜저에 태우고 인근 공원으로 가더군.
    “미안한 말이네만 자네보다는 K가 더 챔피언감이야. 이번만 물러나 주게.”
    내가 맞붙을 상대는 십 년 만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기대주라고 했어. 그가 프로복싱의 인기를 다시 끌어 모을 것이므로 돈을 받고 물러나 달라는 것이었지. 상대 선수는 동양타이틀을 따내는 즉시 세계타이틀매치에 도전할 계획이라고 말이야.
    “어차피 자네는 그를 못 이겨. 자네를 도와주고 싶어서 하는 말이야.”
    “내가 질 거라 생각한다면 왜 이런 제안을 하지요?”
    나는 부아를 삭이느라 아랫입술을 깨물었어. 노신사는 미동도 하지 않더군. 한동안 시선을 돌리더니 담배만 피워댔어.
    “스타일상 천적이니까. 이기긴 하겠지만 인기에 흠집이 나겠지. K는 장래가 촉망되는 선수야.”
    “그럼 나는요? 이런 기회가 오기만 기다렸는데 포기하란 말인가요?”
    “관중은 화끈하게 맞붙는 선수를 좋아하지, 자네처럼 도망이나 다니는 선수를 보고 싶어 하지 않아. 설사 이긴다 해도 자네에겐 어떤 스폰서도 붙지 않을 거야.”
    나는 차 문을 박차고 뛰쳐나가야 했어. 그대로 있다가는 노신사의 코뼈를 부러뜨릴 것만 같았거든.
    젊은 강타자는 K. O율 구십 프로에 쇼맨십까지 갖추고 있었어. 그러나 내 트레이너는 초반만 조심하면 승산이 있을 것이라고 했어. 상대는 3라운드를 넘겨 본 적이 없으므로 후반으로 갈수록 체력이 떨어질 거라는 분석이었지. 시합 전날, 노신사가 했던 말이 귓가에 웅얼웅얼 들려왔어.
    1라운드 공이 울리자마자 나는 상대 선수에게 달려들며 롱 훅을 날렸어. 이어 원투 스트레이트를 먹였지. 그때부터 경기는 난타전 양상으로 접어들었어. 세컨드에서 돌아, 옆으로 빠져, 라고 외치는 말도 들리지 않았어. 나는 턱에 정타를 맞아 휘청거리면서도 물러서지 않았지. 전혀 예상치 못한 공격에 상대도 허둥거리는 모습이 역력했어. 3라운드 공이 울리기 전에 승부는 결정 났어. 내 오른손 훅을 맞은 상대의 다리가 풀렸거든. 나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어. 노신사의 비웃음 띤 얼굴에 보란 듯이 한방 먹이고 싶었지. 그러나 상대의 펀치력이 나보다 강하다는 걸 간과했어. 나와 상대가 동시에 오른 주먹을 뻗었어. 쓰러진 건 링 줄을 붙잡고 버틴 상대가 아니라 바로 나였지. 나는 링 바닥에 고목나무처럼 무너져 내렸어. 정신을 차리니 링 닥터의 얼굴이 어슴푸레 보이더군.

 

 

    3.

 

    복싱은 물론이고 모든 운동에서 중요한 게 기초체력입니다. 여러분들 기초체력 훈련을 틈틈이 하라고 했지요?
    수강생은 셋으로 늘어나 있었다. 삼십대 여자와 사십대 주부, 그리고 이십대의 젊은 남자였다. 한 명이나 세 명이나 썰렁하긴 마찬가지였는데, 모두 트레이닝복에 러닝화 차림이라는 게 특이했다.
    오늘은 결석자가 많군요.
    관장이 마치 내 속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말했다. 나는 왠지 민망해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그동안 각자 기초체력 훈련을 어떻게 했는지 말해 볼까요?
    저는 읽다 만 단테의 『신곡』을 마저 읽었어요.
    사십대 주부가 제일 먼저 대답했다. 다른 두 명은 각각 『인도 신화』와 『모비딕』을 읽고 있다고 대답했다. 내 안에서 의문이 솜사탕처럼 커져 갔다. 이게 대체 무슨 씨나락 까먹는 소리람.
    관장은 다시 세 명의 수강생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 글들이 어떤 의미로 다가왔으며 왜 좋았는지, 자신의 글쓰기에 어떤 도움이 되었는지. 이야기 도중 샌드백 앞으로 가서 줄넘기를 시연해 보이며 기초체력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관장을 쳐다보는 수강생들의 눈초리는 진지했다.
    그 다음 여러분들이 매일 해야 할 것이 무엇이라고 했죠?
    자세 연습이요.
    이번에는 삼십대 여자가 대답했다.
    맞습니다. 복싱체육관에 가면 초보자들에게는 줄넘기와 전진과 후진 스텝만 반복적으로 훈련시킵니다. 복싱은 주먹으로 하는 것이지만 이 주먹은 바로 푸트워크에서 나오는 거지요.
    관장이 주먹을 가슴께로 끌어당기더니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하는 시연을 해보였다. 입에서는 연신 이렇게, 이렇게, 라는 말이 튀어 나왔다.
    소설에서 푸트워크에 해당하는 게 문장이죠. 문장을 자유자재로 구사해야 어떤 발상으로든 좋은 글을 쓸 수 있어요. 문장연습 한 것들을 좀 볼까요?
    관장의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 한 줄기가 바닥으로 톡 떨어졌다. 수강생들이 노트를 펼쳤고, 관장은 그것을 일일이 확인하고 돌아다녔다. 아마도 과제를 내주었던 모양이다.
    좋습니다. 오늘 나머지 시간은 스파링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음 시간엔 스파링에 대한 품평을 하겠습니다.
    관장은 사무실로 들어가며 내게 따라오라는 눈짓을 보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져 일어났다. 세 명의 수강생은 노트북을 꺼내 펼쳐 놓았다. 나는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그들에게 다가갔다.
    저기, 스파링이란 게 뭐죠?
    작품 습작을 여기서는 스파링이라고 말해요.
    이십대 남자가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내 입에서 아, 네, 하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스파링을 한다면 실전을 뛰기도 하겠네요.
    내친김에 미끼를 던져 본 것이었다. 젊은 남자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실전을 뛰고 싶었다면 다른 곳을 찾았겠죠.
    다른 곳요?
    네, 많잖아요. 등단을 준비시키는 소설창작교실 같은 데요. 여긴 프로작가 지망생은 안 받거든요. 철저하게 생활소설을 쓰려는 아마추어들만 받아요.
    그래서 강의도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관장님 요구사항이죠. 토마스 만은 자기 집에 마련된 작업실로 갈 때도 정장 차림에 넥타이를 매었다면서요. 우리는 생활소설을 써야 하니 편안한 운동복장으로 오면 좋을 것 같다고.

 

 

    4.

 

    기초체력 훈련 – 독서, 스파링 – 습작, 푸트워크 – 문장과 문체, 잽 – 발상, 스트레이트 – 사건, 훅 – 주제, 어퍼컷 – 상징, 몸통 공격 – 플롯, 카운터펀치 – 반전, 좌우연타 – 소재와 디테일, 감량 – 쓴 글 쳐내기, 위빙1) - 비슷한 소재나 플롯 피해 가기, 더킹2) - 예상되는 독자의 비판 피해 가기, 클린칭 – 패러디, 반칙성 클린칭 - 표절

 

    1) 복싱에서 상체를 좌우로 비틀면서 상대의 펀치를 피하는 동작을 말함.
    2) 복싱에서 몸을 숙여서 상대의 펀치를 피하는 방어 동작을 말함.

 

 

    나는 관장이 건네준 『생활소설 창작 매뉴얼』을 들춰 보았다. 관장은 그 책을 훑어보라고 한 뒤, 다시 강의실로 나갔다. 내가 책을 읽는 동안 수강생들의 스파링을 지도하기 위함인 듯했다.
    나는 관장이 집필한 책을 대략 훑어보았다. 내 눈길을 제일 먼저 잡아끈 건 위에 예시한 용어들이었다. 본문이 시작되기 전에 용어 설명이 나와 있었다. 모두 관장이 직접 만들어낸 용어 같았다. 관장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머리말부터 읽어 내려갔다.

 

    복싱과 소설 창작은 상대나 작품과 싸우기 이전에 자기 자신과 먼저 싸워야 한다는 점에서 닮았다. 나는 십 년 가까이 프로복서로 링 위에서 살았고, 이후 우연한 기회에 작가수업을 거쳐 등단을 하며 십여 년 이상을 소설가로 살아왔다. 돌이켜 보면 복서와 소설가라는 전혀 다른 직업이 결코 다르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작가가 되고 싶어 하거나 작가로 명성을 날리고 싶어 하는 이들은 무수히 많다. 과거 복싱 판에서 챔피언이 되어 부와 명예를 쓸어 담고 싶어 했던 이들이 그러했듯이. 그러나 챔피언의 화려함을 갈망하는 이는 많았어도 복싱의 아름다움 자체에 매료된 이는 많지 않았던 것 같다. 한국 프로복싱이 몰락한 근본 원인도 어쩌면 여기에 있지 않았을까. 문학과 소설의 위기라는 말에도 비슷한 진단을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작가로서의 명성을 꿈꾸는 이는 많아도 소설 자체를 사랑하는 이는 별로 많지 않다고.
    나는 우리 시대에 복싱이 죽지 않고 살아 있음에 주목했다. 프로복싱의 화려함이 아닌 생활체육의 건강함으로 복싱은 어느덧 사람들 곁에 다가와 있었다.
    소설의 위기론이 더욱 활개 치는 요즘, 소설 역시 복싱처럼 사람들의 생활 속에 깊이 뿌리내려야 하는 것임을 나는 절감했다. 소설가의 명성을 꿈꾸는 이들보다 소설을 읽고 창작하는 것 자체를 즐기는 이들이 더 많아져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영혼과 뇌를 쥐어짜 내는 소설 창작이 되어선 곤란하다. 다이어트 복싱처럼 재미나면서도 정신건강에 도움이 되는 소설 창작이 되어야만 한다.
    모든 이들이 친숙하게 접할 수 있는 취미 같고 여가 같은 ‘생활소설 쓰기’. 누구나 통기타를 배우듯 소설쓰기도 배울 수 있기를 갈망하는 마음으로 『생활소설 창작 매뉴얼』을 펴낸다. 소설은 문학이고 예술이기 이전에 장삼이사의 인생 가계부이자 좋은 친구이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소설의 위기를 해결할 하나의 돌파구가 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나는 읽기를 중단하고 책장을 뒤로 넘겼다. 이상한 감흥이 들면서 감전이라도 된 듯 머리 한쪽이 찌릿찌릿해졌다. 매뉴얼은 한마디로 소설쓰기 작법 책이었는데, 복싱용어를 응용한 교재라는 것이 차별화된 점이었다. 1장의 제목부터 눈길을 확 끌었다. 시중의 수많은 소설작법 책들이 “작가가 되려면”이나 “작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과 같은 제목으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어 하는 작가지망생들을 현혹했다. 그러나 관장이 쓴 책은 첫 단원의 제목부터 “프로작가가 되고 싶은 사람은 이 책을 덮어라”였다. 나는 다음 페이지로 넘겨 목차를 살펴보았다.

 

    차례
   
    제1장 프로작가가 되고 싶은 사람은 이 책을 덮어라
    제2장 소설 창작도 훌륭한 여가와 취미가 될 수 있다
    제3장 복싱이 육체의 비만을 해결하듯 소설쓰기는 정신의 비만을 해소한다
    제4장 육체가 땀을 흘려야 하듯 뇌도 땀을 흘려야 한다
    제5장 매일매일 삼십 분 체조하듯 발상으로 두뇌체조를 하라
    제6장 샌드백을 때리면 후련하듯이 자판을 때리면 자아가 후련해진다
    제7장 링 위에서 상대를 속이듯 이야기로 독자를 속여라
    제8장 연타능력과 이야기 낯설게 만들기
    제9장 카운터를 노리듯 때때로 반전을 준비하라
    제10장 감량의 고통, 퇴고의 즐거움

 

    매뉴얼만으로 ‘생활소설’을 이해하긴 힘들었다. 특히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든 건 ‘즐거움’을 강조한 대목이었다. 나 역시 소설쓰기의 즐거움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즐겁기만 한 것이던가. 소설쓰기의 즐거움은 때로 극도의 괴로움을 수반하는 게 아니던가.
    사실 나는 소설쓰기에 너무 지쳐 있었다. 소설이 써지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내가 왜 소설가가 되려고 했는지조차 의심스러워졌다. 거기에는 함께 공부를 해오던 동료 문우들의 신랄한 합평이 큰 몫을 했다. 그들은 앞 다투어 내 소설의 흠을 찾아내 잘근잘근 씹어대곤 했는데 그런 이들의 표정에서 잔인한 미소를 발견하는 일도 어렵지 않았다. 그들의 행태는 사냥감의 숨통이 끊어지기도 전에 연한 뱃가죽을 찢어발긴 뒤, 창자와 내장부터 먹어치운다는 아프리카 들개의 사냥습관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동료 작가의 소설을 자신들의 지적 만족을 위해 갈기갈기 찢어먹듯 비판해 대는 그들의 입이야말로 들개 떼의 그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써낸 소설들이 그들의 혀와 이빨과 어설픈 지적 허영심과 섣부른 자기만족과 싸구려 경쟁심에 의해 낱낱이 찢어발겨지는 아픔을 느낄 때마다 뱃가죽이 찢기고 창자가 튀어나오는 환영에 몸을 떨어댔다. 모임에서 나를 격려해 주는 이는 비슷한 처지의 무명작가 한이 유일했다.
    “잡것들이 입만 살아 가지고 말이야. 어렵게 열심히 쓰는 사람한테 격려는 못해 줄망정…….”
    한과 단둘이 남아 있던 합평회 뒤풀이 자리에서였다. 한의 위로에 하마터면 눈물을 쏟을 뻔했다. 그날도 나는 문우들에게 잘근잘근 씹혀 마음은 물론 몸까지 오징어처럼 흐물흐물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내가 쓴 소설은 쓰레기통에 처박혀야 했으며, 문학의 이름을 더럽히는 태어나지 말아야 할 작품이었다.
    “네가 보기에도 정말 내 소설이 그렇게 허접이야?”
    그 정도의 위로만으로는 부족했던 것이리라. 묵묵히 술잔만 기울이던 한이 더듬더듬 말을 골랐다.
    “허접이라기보다는 아직 갈 길이 멀다고 해두지. 아니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 따위로 작품을 씹어댈 수가 있어?”
    나는 깨달았다. 내 작품은 허섭스레기가 맞았다. 한은 다만 문우들의 작품을 대하는 태도에 분개한 것이었고, 작가가 입을 상처를 염려하는 것이었다. 그날 나는 한에게 더 묻지 않았다. 소주를 다섯 잔 연거푸 마신 뒤 어흐흐, 하는 단발마를 터뜨리며 탁자에 머리를 마구 짓찧었다. 내 자신이 한 잔의 쓰디쓴 소주만도 못한 존재 같았다.
    소설 모임에는 나가지 않았다. 소설가가 되기 위해 멀쩡한 직장마저 때려치운 나는 언제나 비장했다. 그럼에도 내 소설은 자아의 만족을 위한 ‘딸딸이’ 대용품에 불과했다. 들개들의 잔인한 이빨질은 내게 약이 되었는지도 몰랐다. 그들에게 물린 상처로 인해 비로소 나는 보다 현실적이 되었다. 벌써 몇 년간 작품 발표조차 못하고 있다면 작가로 성공하기란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직장인으로 되돌아가기에도 너무 멀리 와 있었다. 나는 소설과 나의 관계를 재정립해야만 했다. 소설가는 나의 유일한 꿈이 아닌 다른 무엇이 되어야 했다. 여전히 중요하지만 절대적이 아닌 어떤 것. 그것은 추상일 뿐 구체가 되지 못했다. 책상 위에 차곡차곡 쌓여 가는 청구서들과 하루가 다르게 비어 가는 통장잔고, 늘어 가는 나이에 대한 걱정으로 잠을 설치는 날이 많아졌다. 그럼에도 어떤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나는 말 그대로 백수가 되어 낮술이나 마시면서 좀비처럼 세상의 언저리를 떠돌았다.
    한과 술을 마시고 헤어져 밤거리를 걷던 어느 날이었다. 회색으로 빛나는 간판 하나가 내 시야에 들어왔다.
    생활소설 창작교실
    등대의 불빛처럼 어둠 속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그것은 개종한 이방인의 눈에 비친 십자가에 다름 아니었다. ‘소설 창작교실’ 앞에 붙은 ‘생활’이란 말이 유별나게 눈길을 잡아끌었다. 나는 그 건물로 가는 대신 길바닥에 개처럼 엎드려 구토를 했다. 다음날, 숙취를 무릅쓰고 그 자리에 다시 가보았다. 간밤에 보았던 건 취중에 본 환영이 아니었다. 허름하고 낡아서 곧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삼층 건물의 이층에 분명히 그런 간판이 내걸려 있었다. 나는 벌렁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면서 계단을 올라가 문을 밀었다. 그때껏 나를 기다리고 있기라도 했던 듯 문은 너무도 부드럽게 열렸다. 온화한 인상에 머리가 하얗게 센 남자가 대걸레로 바닥을 닦다 말고 돌아보았다.
    “어서 오세요. 처음이시죠?”
    남자는 자신을 선생이 아닌 관장으로 불러 주길 원했다.

 

 

    5.

 

    그날의 패배는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지. 그렇잖아도 인기 없는 복서였는데, 볼짱 다 본 셈이었어. 그래도 나는 복싱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네. 복싱은 내 젊은 날의 모든 것이었으니까. 겨우 얻어낸 재기전에서 판정승을 거두었지만 성에 차지 않더군. 그즈음 매일 반복되는 꿈을 꾸었지. 꿈속에서 나는 경기 내내 상대를 유린하다가 마지막 라운드에 통쾌한 K. O승을 거두었어. 왜 이런 꿈을 반복해서 꾸는 걸까. 불현듯 나는 깨달았어. 노신사가 내 안에 잠자고 있던 욕망에 불을 지른 거였어. 나 또한 화끈한 승리를 거둬 보고 싶었던 거지. 한번 불붙은 욕망은 쉽사리 꺼지지 않았어. 다시 기회가 왔어. 동양타이틀매치의 언더카드로 나서게 되었지. 마지막이라는 각오였어. 트레이너에게 정면승부를 펼쳐 보겠다고 했지. 그도 말리지 않더군. 관중은 물론 복싱 관계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줄 필요가 있었으니까. 한마디로 도박이었지. 그래도 충분한 훈련을 소화했기에 이길 수 있으리라 자신했어. 초반에는 신중하게 경기를 이끌었어. 바깥으로 돌면서 기습적으로 잽을 던졌고, 상대가 빈틈을 보일 때마다 스트레이트를 꽂아 넣었어. 상대는 나보다 젊었고, 펀치력이 셌지만 경험이나 기술은 한 수 아래였지. 발 빠른 나를 좀처럼 잡지 못했어. 5회에 다운을 뺏으면서 나는 승리를 확신했어. 상대는 지친 나머지 숨을 헐떡였고, 스텝마저 꼬이더군. 나는 상대의 안면에 리드미컬한 펀치를 꽂아 넣으며 9회까지 경기를 주도했어. 그대로 가면 심판 전원 일치 판정승이겠지만 만족할 수 없었어. 오직 화끈한 K. O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었지. 나도 상대를 때려눕힐 수 있다는 걸 스스로 확인하고 싶었어. 나는 10라운드 공이 울리자마자 거칠게 상대를 몰아붙였어. 가드를 바싹 올린 채 로프에 기대고 있는 상대에게 좌우 연타를 퍼부었어. 무너질 듯 무너질 듯 무너지지 않던 상대가 마지막 발악을 하듯 오른 주먹을 휘둘렀어. 러키펀치였지. 나는 다시 링 바닥을 뒹굴고 말았어.
    나는 복싱 판을 떠났네. 그렇잖아도 내리막길인 프로복싱 판에서 내가 생존할 틈은 없었지. 그만두기로 결심하던 날 밤에 혼자 체육관에 들렀어. 어둠 속에 우두커니 매달린 샌드백만 언제나처럼 나를 맞이해 주더군. 명치끝에서 뜨거운 불덩이가 올라왔어. 그렇게 샌드백을 껴안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복싱과 이별을 고했지.

 

 

    6.

 

    관장님, 저는 어퍼컷이 가장 어려운 것 같아요. 어퍼컷을 잘 치는 방법이 없을까요?
    어퍼컷은 어려운 기술이죠. 하지만 어퍼컷을 잘 치면 정말 훌륭한 소설을 쓸 수 있어요.
    나는 다시 강의실 한쪽에 앉았다. 관장과 수강생들이 주고받는 말은 여전히 알아듣기 힘들었다. 청강생 주제에 대놓고 질문을 할 처지도 못 되었다. 관장이 읽어 보라고 주었던 책을 슬그머니 펴보았다.

어퍼컷 – 상징
    저 청년은 지금 소설에서 상징을 구사하는 게 어렵다고 말하는 것일까. 젠장, 그냥 상징이라고 하지 대체 왜 저런 용어들을 사용하는 걸까.
    우리 같이 의논해 볼까요?
    제 생각에 어퍼컷은 상대에 따라 그때그때 다르게 사용해야하는 기술 같아요.
    사십대 주부였다. 관장이 눈을 빛내며 계속 말해 보라고 했다. 그녀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한결 높은 톤으로 말을 이었다.
    사건이 빠르게 전개되는 소설에서는 어퍼컷보다 스트레이트가 더 중요하다는 거죠. 하지만 상대가 몸을 숙이고 들어올 때는 어퍼컷이 유효하잖아요. 그렇듯 심리나 분위기가 강조되는 소설에서는 어퍼컷을 적절히 구사해야 할 것 같아요.
    나는 다시 책을 뒤져 용어 설명을 찾아보았다.

스트레이트 – 사건
    내 생각도 같아요. 어퍼컷이 소설의 품격을 높여 주긴 하지만 섣불리 꺼냈다가는 오히려 독이 되죠.
    관장이 어퍼컷을 구사하는 시늉을 해보였다. 주먹을 날릴 때, 자신의 턱이 열리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어퍼컷을 남발하면 자칫 난삽해지기 쉬운데, 그런 건 생활소설에 맞지 않아요. 우리는 예술작품을 쓰려는 게 아닙니다. 잊지 마세요. 독자의 눈을 사로잡는 소설이 아니라 작가 자신의 정신을 정화하고 삶을 즐겁게 만드는 소설을 쓰는 게 목적입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건 잽과 스트레이트예요. 이것들부터 제대로 구사할 수 있도록 연마하는 게 중요합니다.
    세 명의 회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자, 스파링을 더 하고 싶다면 남아서 하고 가세요.
    이십대 남자만 일어났고 삼십대 여자와 사십대 주부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아마도 강의실에 남아 스파링인지 소설습작인지를 계속할 생각인 듯했다. 그들이 왜 그토록 열심인지 궁금증이 일었다. 어쩌면 그들도 문학 판의 들개나 하이에나들에게 상처만 받았던 게 아닐까.

 

 

    7.

 

    그가 소설가 윤을 만난 건 택배물류센터의 야간작업대에서였다. 아침 일곱 시에 분류작업을 마치고 둘은 백반 집에 마주 앉았다. 그들은 쉬는 시간마다 농담을 주고받을 만큼 가까워진 사이였다. 그는 윤이 소설가라는 사실을 그때껏 몰랐다. 그가 아는 소설가라고는 최인호나 김홍신같이 유명한 사람들이 전부였다. 읽은 소설도 교과서에 실린 고전들과 몇몇 대중소설이 전부였다. 그가 소설가는 모두 유명한 사람인 줄 알았다고 말하자 윤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나도 복싱선수는 장정구나 유명우처럼 다 유명한 사람만 있는 줄 알았어.”
    윤은 나이가 다섯 살 위였지만 동안이어서인지 친근감이 느껴졌다.
    “밤새 일하고 소설은 언제 써요?”
    “요샌 안 써. 일단 먹고 살아야지. 너야말로 복싱은 그만둔 거냐?”
    “은퇴했어요. 근데, 책 제목이 어떻게 돼요? 한번 사서 읽어 보려고요.”
    윤은 딱 한 권 책을 냈는데 권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워낙 확고한 어조여서 더 물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는 친척 어른의 주선으로 전자제품을 만드는 중소기업에 취업이 된 상태였다. 출근까지 한 달쯤 시간이 비어 아르바이트를 하는 중이었다.
    회사 생활은 그의 기대와 많이 달랐다. 그의 일은 말이 좋아 관리직이지 물류센터의 야간경비업무였다. 하루 여덟 시간씩 경비실과 물류창고, 공장 마당과 사무실을 오가며 보안사항을 점검하고 확인해야 했다.
    눈발이 흩날리던 어느 날 늦은 저녁이었다. 그는 배달된 설렁탕을 먹으며 TV를 보았다. 스포츠채널에서 흔치 않게 복싱 세계타이틀매치를 중계해 주고 있었다. 설렁탕이 식는 것도 잊은 채 그는 TV 화면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도전자의 얼굴이 눈에 익었다. 마지막 경기의 상대 선수. 새로운 챔피언의 화사한 미소가 유리조각처럼 그의 심장에 날아와 박혔다.
    경비실 창으로 짙은 어둠이 먹물처럼 스며들었다. 아침에 그는 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소주 한 잔 사달라고 했다. 왜 윤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인지는 그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윤과 소주를 마시지 않았다면 소설을 쓰는 일도 없지 않았을까. 어이구, 복서 출신 소설가 한 명 나겠네. 해보고 싶으면 해. 그가 소설을 써보고 싶다고 말했을 때, 윤이 시원스레 들려준 대답이었다.

 

 

    8.

 

    제3장 복싱이 육체의 비만을 해결하듯 소설쓰기는 정신의 비만을 해소한다

 

    소설을 처음 습작할 때만 해도 내 글쓰기 실력은 딱 중학생 수준이었다. 다행히 문학적 재능이 없진 않았는지 빠르게 실력이 늘었다. 지인을 통해 소개받은 사설 소설창작교실에 나가면서 나는 본격적으로 소설공부를 하게 되었다. 지인은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면서 세계문학전집을 아무거나 골라 일단 200권만 읽어 보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금과옥조로 여겨 무식하게 실천해 나갔다. 세계문학전집과 한국문학전집, 문학상 수상 작품집을 빠짐없이 읽어 나갔다. 처음엔 읽은 소설들을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왜 그 소설이 명작이며 시대를 반영하는 것인지조차.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나도 모르게 소설의 세계에 깊이 빠져들고 있음을 깨달았다. 문학은 그윽한 향기를 품고 있는 넓고도 깊은 바다이자 숲이었고 들판이면서 동굴이었다. 복싱에서 보았던 절제된 미학을 소설에서 발견하게 되자 답답한 듯 보이던 문장들도 친숙하게 말을 걸어왔다. 소설을 쓰면서 복싱에서 받았던 상처를 치유 받는 느낌이었다. 샌드백을 때릴 때의 쾌감처럼 자판을 두드릴 때의 기쁨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함께 공부하는 문우들은 달랐다. 대체로 그들에겐 울분과 설움이 많았다. 자신의 작품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을 저주하거나 설움을 토해 내며 눈물을 흘리는 이도 있었다. 내가 예상보다 일찍 등단했을 때, 그들이 나를 본 체 만 체한 것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소설의 ‘소’ 자도 모르던 인간이 등단을 했으니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등단을 하자 상황이 변했다. 기쁨과 설렘을 주던 문학의 길이 갑자기 가파르고 험난해졌다. 그건 프로가 갖는 어쩔 수 없는 숙명이었다. 더욱 큰 문제는 생활고였다. 등단 후 몇 번의 청탁을 받긴 했지만 원고료는 100만 원에도 못 미쳤다. 기껏해야 일 년에 한두 번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그것마저 뚝 끊겼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복싱 판이 내리막길이었듯 소설 판도 내리막길임을. 그렇잖아도 내리막길인 소설 판에서 내가 생존할 틈은 없음을. 내가 읽었던 소설가들, 그러니까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고 문학상 후보에 오르내리는 작가들도 나와 같은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것임을.
    마지막 승부를 걸어 보기로 했다. 상금 5천만 원의 장편소설 공모전. 이 년 뒤, 기적이 일어났다. 내 작품이 덜컥 당선된 것이었다. 나는 기쁜 나머지 샌드백 대신 노트북을 부여잡고 한참을 울었다. 그러나 운명은 이번에도 내 편이 아니었다. 갑자기 표절 시비가 일더니 당선이 취소되고 만 것이다.
    표절이라니……. 나는 표절이라 거론된 소설을 도서관에서 찾아 읽어 보았다. 그때껏 들어 본 적도 없는 서인도제도 어느 섬나라 작가의 작품이었다. 그 소설도 복싱을 소설쓰기와 연관시킨 이야기였다. 나는 단지 내 경험을 작품에 녹여냈을 뿐이었다. 그러나 내 주장은 누구에게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서인도제도 작가의 책이 내 방 책장에서 발견된 건 며칠이 지난 뒤였다. 나는 책장의 공간이 부족해 평소 앞뒤 이중으로 책을 꽂아 넣곤 했다. 뒷줄에 꽂혀 있는 책은 앞줄의 책을 꺼내기 전까지는 제목조차 몰랐다. 그런데 다른 책을 찾기 위해 책장을 뒤지다가 뒷줄에서 그 책을 발견한 것이었다. 고압전류에 감전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페이지마다 군데군데 밑줄이 그어져 있는 것도 모자라 메모까지 적혀 있었다. 내 자신의 필체가 분명했다. 그러니까 기억하지 못했을 뿐 언젠가 그 작가의 책을 읽은 게 틀림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악마의 속임수에라도 걸려든 게 아닐까.
    어릴 적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노는 장면을 목격한 적이 있다. 고양이는 쥐를 앞발로 톡톡 쳐서 공처럼 이리저리 굴리며 놀았다. 불쌍한 쥐는 도망칠 엄두도 못 낸 채 바들바들 떨고만 있었다. 놀이에 싫증이 나는 즉시 고양이는 쥐를 잡아먹을 것이었다. 문득 삶이 고양이이고, 내가 쥐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부터 내 삶은 나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그렇다면 쥐가 고양이에게 반항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도망쳐 봐야 잡힐 게 뻔하다면? 쥐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유일한 길이 아닐까. 나는 깨달았다. 복싱과 소설, 그 두 가지 모두 내 길이 아니었음을. 이제 나를 가지고 노는 인생에게 마지막 카운터펀치를 먹일 차례였다. ……

 

 

    9.

 

    그가 죽기로 선택한 장소는 제1한강교였다. 그 전에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 프로복서 생활을 할 때, 로드웍을 하던 고수부지의 자전거 산책로. 그곳을 걸어 본 뒤, 다리 위로 올라가 강물로 뛰어내릴 작정이었다.
    새벽녘 한강 고수부지 자전거 산책로에는 운동을 하러 나온 시민들이 많았다. 그는 괜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너희들이 인생의 승자라고 생각하겠지. 흥, 어림없는 소리. 네들도 쥐새끼일 뿐이야. 언젠가는 고양이한테 붙잡혀 놀잇감으로 굴러다니다 잡아먹힐…….
    그는 자전거 산책로를 지나 제1한강교로 올라갔다. 차들이 바람을 일으키며 휙휙, 지나갔다. 그는 다리 위 인도의 난간을 넘었다. 한 발짝만 앞으로 나서면 죽음이었다. 갑자기 두려움이 몰려왔다. 검푸른 강물은 거대한 고양이의 아가리처럼 입을 활짝 벌리고 있었다. 차들이 이따금 질러대는 경적도 죽어가는 쥐의 단발마처럼 날카로웠다. 이른 아침의 태양이 맛소금 같은 햇살을 강물 위에 흩뿌려 놓았다. 반짝거리며 흔들리는 물살에 눈을 찌푸리며 그는 마지막 인사를 했다. 엿이나 먹어라, 망할 고양이 놈아. 그가 허공에 한 발을 내딛을 찰나였다. 어디선가 귀에 익은 소리가 들려왔다. 하낫 둘, 하낫 둘, 슉슉슉. 그는 앞으로 뻗었던 발을 거둬들이고 고개를 사십오 도 각도로 돌렸다. 소리는 뒤쪽에서 점점 커지고 있었다. 포니테일을 한 뚱뚱한 여자가 로드웍을 하는 중이었다. 펑퍼짐한 몸매로 봐선 복서일 리 없었다. 여자는 섀도복싱을 멈추지 않고 다가왔다. 그와 삼 미터쯤 떨어진 자리에서 여자가 숨을 헐떡이며 멈춰 섰다. 여자는 그를 미처 못 본 듯했다.
    “저기요, 지금 복싱 연습하는 거예요?”
    그가 두 손으로 난간을 붙잡은 채 물었다. 여자는 힐끗 그를 보더니 숨을 헐떡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
    “아저씬, 지금 자살하려는 거예요?”
    그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가 눈이 휘둥그레져서 달려왔다. 안 돼요, 안 돼. 여자가 소리치며 그의 바지춤을 단단히 붙잡았다. 그는 왠지 부끄러웠다. 고양이는 아직 배가 고프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여자를 따라 복싱체육관으로 갔다. 동네마다 복싱체육관이 드물지 않다는 사실도 그날 처음 알았다. 십 년이 넘어 다시 찾은 체육관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헝그리정신이 사라진 자리에 다이어트의 욕망이 가득했다. 체육관에는 여자 말고도 아저씨, 아줌마, 학생, 직장인들이 많았다. 여자는 조금 특별한 케이스였다. 시에서 주최하는 ‘여성 건강 다이어트 복싱대회’에 나가기 위해 맹훈련을 하던 중이었다. 복싱은 인생역전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대표적인 생활스포츠로 변해 있었다.
    그날 내 인생의 3막이 시작되었다고 봐야지.
    관장이 회고를 마치며 쑥스럽게 웃었다.
    그의 삶은 한동안 순조로웠다. 그날 만난 여자와 결혼을 했고 체육관에서 트레이너로 일하며 소설도 쓰게 되었다. 쓰디 쓴 인내와 노력, 실험정신으로 한 땀 한 땀 공들여야 하는 언어예술이 아닌 친구 같은 생활 속 소설쓰기. 그는 복싱과 소설의 결합을 꿈꾸기 시작했다. 바늘구멍 같은 프로 작가의 길만 고집하다가 인생의 패배자로 전락한 수많은 영혼들의 길잡이가 되고 싶어서였다. 그러자면 문학용어를 바꾼 『생활소설 창작 매뉴얼』을 펴내고 복음을 전파해야 했다. 다시 찾은 삶이 그것을 위해 쓰여야 한다고 그는 굳게 믿었다.

 

 

    10.

 

    나는 관장에게 인사한 뒤 강의실을 나왔다. 인도를 터벅터벅 걷다가 멈춰 서서 삼층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부연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생활소설 창작교실’ 간판이 보였다. 영롱한 광채로 빛나던 그날 밤의 간판과는 어딘가 많이 달랐다. 낡아 허물어질 것 같은 건물 탓인지 몰라도 후줄근하고 지저분했다. 그것은 헬스클럽과 분식집과 슈퍼마켓과 논술학원과 영어학원과 개인병원과 호프집과 커피전문점 간판들 사이에서 마치 간첩처럼 시치미를 떼고 매달려 있었다.
    작가로 성공하지 못해 서러운 마음이야 십분 이해하네. 하지만 생각을 바꾸는 순간 이전엔 몰랐던 새로운 기쁨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마치 분수처럼 콸콸 솟구쳐오를 걸세.
    생활소설 창작교실에 나오길 권유하며 관장이 한 말이었다. 나는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도망치듯 그곳을 나왔다. 몸은 빠져나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붙들려 있었다. 관장의 권유는 나를 혼란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내게 생활과 소설이란 서로를 한사코 밀어내는 자석의 같은 극이었다. 내 삶의 불화도 거기서부터 비롯되었다. 그런데, 관장은 그걸 천연덕스럽게 결합시키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의 씨앗은 금세 싹을 틔우더니 쑥쑥 자라나 이파리를 내밀었다. 잎이 무성해진 나무에서 열매 하나가 톡, 떨어졌다.
    아무리 정신건강을 위해 쓴다고 해도 자기 혼자 신이 나서 쓰는 소설이 대체 무슨 소용인가. 정말 독자 따윈 안중에도 없다면 굳이 왜 훈련을 한단 말인가.
    문득 관장은 사기꾼이고 수강생들은 그의 현란한 말솜씨에 넘어간 어수룩한 작가지망생일 거라는 의심이 짙어졌다. 나는 길을 걷다 말고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관장이 내게 주었던 『생활소설 창작 매뉴얼』에서 어떤 단서라도 찾기 위해서였다. 가방을 샅샅이 뒤져도 책은 나오지 않았다. 강의실에 두고 온 모양이었다. 나는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다시 걸음을 돌렸다.
    이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올라 강의실 문 앞에 섰을 때였다. 안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는 문손잡이를 잡은 채 고개를 움츠리고 말았다.
    내 소설이 당신네 잡지에 싣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 형편없다는 말이오?
    관장이었다. 내게 이야기를 할 때와 달리 격앙된 목소리였다. 내 몸의 모든 신경세포들이 두 귀로 몰려들었다.
    그렇다면 할 수 없군. 알았소.
    전화기를 쾅,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대로 등을 돌려 계단을 내려가고 싶었다. 이상한 불안감으로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한참을 우물쭈물 거리다가 용기를 내서 문을 슬그머니 밀었다. 관장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빈 강의실에 흰색 보드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안으로 한 발 들여놓으려 할 때였다. 사무실에서 관장이 걸어 나왔다. 양손에 붉은색 복싱 글러브를 낀 채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문을 닫고 좁은 틈으로 안을 엿보았다.
    관장이 구석에 매달린 샌드백을 때리기 시작했다. 입으로 연신 기합을 질러대는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상기된 얼굴로 펀치를 날려대는 그는 분노의 화신에 다름 아니었다. 원투 스트레이트와 좌우 훅을 쉴 새 없이 꽂아 넣던 관장이 그 자리에 우뚝 멈추었다.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그가 격정적으로 샌드백을 껴안은 것이었다. 그의 어깨가 미세하게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일 분, 혹은 이 분이나 지났을까. 그 짧은 시간 동안 내 입에선 침이 말랐고, 손바닥에선 땀이 배어 나왔다. 관장의 흐느낌이 강의실 전체에 파문처럼 퍼져 나가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재기전에서 역전 K. O패를 당한 선수처럼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문장웹진 11월호》

 

은승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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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01
원경

원경 성혜령 건강검진을 12월 마지막 주까지 미루는 사람이 자기 말고도 이렇게 많으리라고 신오는 생각하지 못했다. 대기실의 긴 좌석 중간중간 빈자리가 있긴 했지만, 신오는 한구석에 서 있기로 했다. 초음파 검사실 앞 복도는 자기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며 서성이고 있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헐렁한 가운에 느슨한 고무줄 바지를 입고 핸드폰을 보며 기다림을 견디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신오는 이들 중 내년에는 따뜻한 휴양지에서 연말을 보낼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지 궁금했다. 혹은, 오늘 치명적인 암이나 뇌동맥류 같은 것들을 발견하고 전혀 예상치 못한 인생을 살게 될 사람들은? 그런 일들은 언제나 일어나고 있었다. 직장 생활을 10년 정도 하니 주위에 아픈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전 직장 동료는 출근길에 쓰러진 뒤 안면마비를 얻었다. 한쪽 입꼬리가 위로 당겨 올라갔는데 그는 멀쩡한 다른 쪽 입꼬리도 끌어올려 웃는 얼굴을 만들곤 했다. 병가에서 돌아온 뒤 매일 웃는 얼굴로 제일 먼저 출근하는 동료를 보면서 신오는 이직을 결심했다. 신오는 모든 일이 가능하지만 대개 나쁜 일들이 더 자주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되도록 좋은 음식을 먹고 운동을 꾸준히 하려고 했다. 불행은 대비하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게 오히려 쉽게 다가오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도 있었다. 복부 초음파를 보던 의사가 “어랏?” 하고 실없는 소리를 내며 배꼽 부근을 세게 눌렀을 때도 신오는 방귀가 나올 것 같다는 생각뿐이었다. 의사가 차가운 젤을 다시 묻히고 초음파 단말기를 문지르다가 복막에 종양이 보인다는 말을 했을 때는, 그래서 요새 변비가 심했나, 라는 생각이 먼저 났다. 대형 병원에 가서 생검과 CT, MRI 검사를 마치고 소화기내과 교수의 진료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도 신오는 회사 메신저를 보고 있었다. 몇십 억 단위 공공사업의 수주가 걸린 입찰 제안서의 마무리를 앞둔 시점이었다. 병원 검사로 연차를 낸다고 했을 때 팀원들은 모두 별일 없을 거라고, 하루 푹 쉬고 오라고 말했지만 메시지를 보내면서 신오를 계속 태그했다. 신오는 그날 마지막으로 진료실에 들어갔다. 의사는 젊고 피곤해 보였다. 예약을 가장 빨리할 수 있었던 의사였으니 어쩔 수 없지, 신오는 생각했다. 의사는 신오가 자리에 앉자 간단한 인사도 없이 모니터 화면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마우스 커서로 신오는 잘 알아볼 수 없는 흐릿한 음영을 짚었다. 여기예요, 여기. 의사는 약간의 승리감마저 느껴지는 말투로 말했다. 복막의 종양은 전이 암이고, 여기가 원발 암이라고. “이게 숨어 있어서 찾기 어려웠거든요.” 의사는 다시 한번 마우스 커서를 움직였다. 췌장하고 담도 사이인데 위치나 크기가 좋지 않다고. 오늘이 금요일이니 당장 다음 주부터 항암치료로 크기를 줄여 보고 수술을 잡아 보자고. 신오의 핸드폰이 또 진동했다. 신오는 치료를 이주만 미뤄도 되냐고 물었다. 프로젝트가 있어서요. 이주 후에 마감이라. 의사는 처음으로 웃어 보

  • 관리자
  • 2024-05-01
야생 식물원

야생 식물원 하가람 식물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다이아몬드 모양의 철골로 둘러싸인 거대한 유리 온실에는 열대와 지중해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이국적인 식물이 자란다고 했다. 한 달 전 나는 식물원 근처에 있는 여러 호텔을 찾아 은규에게 링크를 보냈다. 보통 때의 그라면 어디든 좋다고 했을 것이다. 레스토랑도, 카페도, 동네의 작은 아이스크림 가게조차도 모조리 내 선택에 맡기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날 은규는 이미 예약한 곳이 있다고 하여 나를 놀라게 했다. 은규가 보내 준 링크를 열어 보았다. 넓은 통유리 창 너머로 식물원과 공원이 내다보이는 스위트룸이었다. 나는 조금 들뜬 채 답장했다. — 우리가 만난 지 곧 1년이래. 믿어져? 1년이라는 시간은 내게 유별났고 은규에게는 별다른 감흥이 없는 것이었다. 그가 전에 사귄 여자친구는 단 두 명인데 각각 4년, 5년을 만났다고 했다. 매번 석 달도 채 넘기지 못하는 나와는 달랐다. 이따금 은규에게 이전 연인들에 대해 물었다. 그들이 어떤 성향의 사람이었고 어떤 외양을 가졌는지 궁금했다. 처음에는 응응, 하며 대꾸해 주던 은규는 내가 그녀들의 음악 취향이나 살던 동네처럼 구체적인 정보까지 캐묻자 태도를 바꾸었다. 기억 안 나. 그는 말했다. 다 옛날이야기라고. 그 후로는 이전에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그녀들을 생각했다. 눈, 손톱, 말투, 그리고 신발. 나와 닮았을지, 닮았다면 얼마나 닮았고 다르다면 무엇이 다를지도. 상상을 이어 가다 보면 늘 한 가지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은규는 한 번도 애인과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까 여자와 밤을 보내는 일이 오늘 그에게는 처음이었다. 서른을 넘긴 남성에게서 보기 드문 경우였지만 그가 처음인 게 좋았다. 그 점이 무엇보다도 나와 그녀들을 구분 지어 주는 것만 같았다. 차창에 머리를 기대었다. 햇볕에 데워진 창문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인터넷으로 보았던 화려한 꽃과 기다란 나무들을 떠올렸다. 노랗고 푸르고 분홍빛이 맴도는 공간을. 여름 휴가철이었고 도로는 차들로 빽빽했다. 졸음 껌을 씹는 은규를 보며 말했다. “오늘은 내가 운전하고 싶었는데.” “다음에. 너 힘들어.” 은규가 말했지만 나는 안다.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그는 내게 차를 맡기지 않을 것이다. “보면 놀랄걸? 너무 잘해서?” 나는 허리를 세운 채 한 손으로 반원을 그려 보았다. 휙휙. 입으로 소리 내며 운전대를 쥔 그를 따라 했다. 그가 웃었다. 머릿속으로 주행하기. 그것은 나만의 놀이였다. 캠퍼스 변두리에 있는 H관 1층, 5평 남짓한 주차관리실에서 상상력을 충족시켜 줄 만한 것은 많지 않았다. 먼지 쌓인 커피믹스와 낡은 소파, 책상 위에 시간별로 놓여 있는 분홍색, 파란색, 노란색 주차권들. 지겨운 서류, 서류, 서류. 드물게 실장이 자리를 지키는 날이 아니면 대체로 혼자 그곳에서 일했다. 사람들이 찾아와 주차권을 사거나 정기 등록을 마친 후 돌아가면 나는 모니터에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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