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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저항적인 돼지가 좋아 (제1회)

  • 작성일 2014-06-01
  • 조회수 2,381

 

 

굉장히 저항적인 돼지가 좋아(제1회)

 

 

 

박금산

 

 


 

 

    낮에는수영하고 저녁에는농구하고 밤에는연애편지쓰고. 그렇다고 학교에 안간것은아니고. 주중에는 등교하고 레슨받고. 주말에는 돼지를먹고 닭을먹고 소를먹고. 그렇다고 생선을 안먹은것은아니고. 닭과 소를 합하면 돼지가 되고. 육류소비량의 통계표에 의하면 그렇고. 겨울에는 농구보고 봄이되면 야구보고. 물가낮은나라에서 보냈던 십대. 대학생이되어돌아왔다.

 

    그런데. 나는더이상학생이아닐수도있다. 그래도. 과제는해야한다. 학점을따야 한다. 법원에서결정해주면 계속학생일수있다. 재판이열릴 때까지학교에는나가지않는다. 당분간. 잡녀르색희. 아버지입에서나오는 이 말은 무슨외국어같다. 색희. 기집애 이름같다. 그런데 누나는……. 집을 나갔다. 어머니는운다. 하루에몇차례. 나는말한다. 엄마 그런다고해결될문제가아냐. 아버지가말한다. 저 자식은 집도 안 나가고. 뒷말은줄인다. 집도 안나가고어쩐다ㄴ`ㄴ 말쌈? 나는 가출하지 않겠다. 가출해서해결될 문제는 따로있다.

 

    중학교를졸업한후 아버지가일하고있던 나라로 날아가서 고등학교에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에서온 김현승입니다. 국제학교입학이 안되어서현지학교에들어갔다. 한국이름을그대로사용했다. 아이들은나를헌쏭이라고불렀다. 현승이, 인데, 헌쏭이, 라고. 그나라발음이었다. 훤쏭이라고 부르는 녀석도 있었다. 담임교사 숀은 발음이 정확했다. 현승! 가끔은 현성!
    현지어를알지못해 겉돌았다. 교과서는 교실에 두고 다녔다. 결석을 해도 무방했다. 그런데. 혼자노는것도 하루이틀이었다. 아침에는학교에 갔다. 교실에서죽을쳤다. 교과목선생님들은나를 투명인간으로다루었다. 출석을안불렀다. 숙제검사를하지 않았다. 국제학교학급에 결원이 생기면 즉시떠날 학생이었던 나. 그래서. 교복을 안 샀다. 곧 전학갈것이므로. 아버지 회사 사람 중에 한국말을 잘하는 현지인이 통역해주었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양해를 받았다. 평상복을단정하게입는것으로.

 

    농구 유니폼을 입고 학교에 다녔다.

 

    수업에방해가되었다. 농구 유니폼이 선생님들의 시선을 끌었다. 도대체국제학교로 언제 전학하는거야. 나도그랬고 선생님들도그랬다. 아이들과는 농구를하면서 친해졌다. 이름들은 기억속에서 희미하다. 포이라는 애가 있었던 것 같다.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팀을 짤 때 그 애가 주도했다. 포지션 배정도 그 애가 주로 했다. 나는 말귀를 못 알아듣는 척 포워드를 잽싸게 낚아챘다. 초기에 몇 번 그렇게 하자 파워포워드로 고정되었다. YMCA 청소년농구단에서 레슨을 받은 실력이었다. 초등학교때는센터였다.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먹고 농구코트에 나갔다. 말은 쉬웠다. 여기! 야! 받아! 뛰어! 하면 통했다. 가장 많이 썼던 영단어는 ‘헤이’, ‘쏘리’, ‘굿’이었다. 공을 달라고 할 때는 헤이, 실수 뒤에는 쏘리, 득점 이후에는 굿 베리굿. 생각난다. 포이 말고 톰, 제이, 이런 이름. 같은 편을 자주 먹었던 친구들이다. 걔들은축구도잘했다. 대학교 가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주말에 어머니와 쇼핑센터에 가면 스포츠용품 코너에서 시간을 보냈다. 농구볼이 몇 종류 눈에 들어왔다. 브랜드를 바꿔 가며 하나씩 샀다. 한국에서는 인터넷 쇼핑으로 농구화를 모았다. 거기에서는 어머니가 거절했다. 신용카드를 쓰기 겁난다고 했다. 해외배송요금은 별도였다. 국내 인터넷 쇼핑몰에서 물건을 산다는 건 난센스였다. 그 나라에도 사이버몰이 있었다. 하지만. 언어가 안 통했다. 인터넷에도 국경이 있다. 백화점 나이키 매장에는 신상품이 잘 들어왔다. 더운 나라였다. 나는 농구화를 신고 다녔다. 비가 오면 가방에서 샌들을 꺼내어 갈아 신었다.
    2개월이 흘렀다. 시간의 절벽. 교실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면서 지냈는지 가히 2개월을 버텨낸 나의 과거는 존경스럽다. 나의 장기는 아무래도 참는 것인가 보다. 참고 참고 또 참았다. 중간고사 비슷한 시험을 치렀다. 수학 몇 문제. 영어 몇 문제. 알 만한 문제가, 있을 턱이 있나. 에라 모르겠다. 이름도 안 쓰고 답안지도 안 냈다. 숀이 내게 손짓했다. 따라오라는 뜻이었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따라 걸었다. 숀이 문을 열었다. 아마도 과학 자료실이었던 듯. 숀은 휴대용 번역기를 꺼내어 어렵게 문장을 만들었다. ‘공부하기 힘들면 여기서 지내다.’ 어색했다. 그런데. 문법에 좀 안 맞으면 뭐 어떤가. 뜻이 통했으면 됐지. 내가 물었다. “수업시간에 여기 있어도 된다는 거예요?” 숀이 대답했다. “오께이 오께이.” 과학 자료실에 실험도구는 별로 없었다. 책상이 널찍했다. 거실에서데리고놀던알씨카가 생각났다. 이튿날 배터리를 충분히 챙겼다. 자동차와 리모컨을 넣으니 가방이 꽉 찼다. 교실로 가지 않았다. 과학 자료실로 출근했다. 책상을 경주장으로 바꾸었다. 책으로 장애물을 배치했다. 분필로 금을 그어 곡선 트랙을 만들었다. 자동차를 운전했다. 책상 위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조정하는 것이 처음에는 벅찼다. 나중에는 코스에 익숙해졌다. 코스에 익숙해지니 심심했다. 심심해질 때마다 커브의 각도와 위치를 바꾸었다. 스톱워치로 주행시간을 점검했다. 자유. 별도공간을주어 격리시키기로한 것이 누구의 아이디어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는순응했고 우리는상생했다.

 

    숀이 말하길,
    안녕하십니까.
    내가 대답하길,
    안녕하세요 선생님.
    숀이 말하길,
    강남역은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대답하길,
    2호선입니다.
    이성계는 누구입니까.
    이방원의 아버지입니다. 사람을 많이 죽였습니다.
    혁명에는 피가 따릅니다. 큭, 큭.
    숀과 그런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수업이비는시간에 찾아와 문을두드렸다. 나는 숀에게 한국어회화 선생님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선생님이었다. 숀은 한국에 관심이 많았다. 나는 조퇴에 관심이 많았다.
    오늘 배가 아픕니다. 집에 일찍 가도 됩니까?
    물론입니다. 자유입니다. 돼지 먹기 좋아하십니까?
    돼지요?
    응 돼지.
    한국 사람들은 삼겹살을 좋아합니다.
    저는 돼지 안 먹습니다.
    왜요?
    돼지가 뱀을 먹습니다.
    그랬거나말았거나 다. 진짜로 돼지가 뱀을 먹는다면 돼지고기를 안 먹을 수도 있겠다. 나는 숀이 들고 다니던 한국어 회화책을 펼치고 네이티브스피커의 발음으로 읽어 주었다. 돼지가 뱀을 먹는다니. 괜히 그런 문장을 찾아서 읽고 싶었다. 그러나. 회화교재에 나오는 글이 아니었다. 숀이 그런 말을 했을 때는 의도가 있었을 텐데. 그랬거나말았거나.

 

    9월이 되었다. 벌써 한 학기. 지긋지긋했다. 어마어마하게. 하지만. 국제학교에 자리가 나지 않았다. 부모님을 조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쯤 나도 알았다. 어머니 아버지가 국제학교 학급 인원을 어떻게 줄였다 늘렸다 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저항은 필요했다.
    “엄마, 나랑 한국에 들어가자 그냥. 미치겠어.”
    “누나는 어떡하고.”
    “아빠랑 여기 있으라고 하면 되잖아.”
    “아빠가 새로 사업 시작할 건데, 엄마가 옆에 있어야지.”
    “새 사업 한다고? 회사 그만둘 거야?”
    “아직 결정 못 하셨대. 구상 중이셔.”
    “그럼 나 혼자 들어갈게. 지겨워 죽겠단 말야.”
    “학교는 어떻게 다니려고?”
    “하숙 하면 되지. 대학교 근처에서.”
    “그건 대학생이나 하는 거고.”
    “고모네 집에서 살까?”
    “어린애들 키우느라고 정신없어, 그 집.”
    “아, 정말, 어쩌라는 거야. 그럼 누나를 빼내고 그 자리에 나를 심어 주든가.”
    “그만 해 그 말은. 네가 양보했잖아.”
    “그때는 금방 자리가 날 줄 알았지.”
    “자리가 나도 그게 네 자리라는 보장도 없다 얘. 무슨 수가 있겠지.”
    “미치겠네. 어쩌라는 거야. 학교를 때려치워?”
    아버지가 퇴근해서 들어왔다. 아버지는 우리가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지 빤히 안다는 눈치였다. 아버지는 골프에 빠져 있었다. 밥상에 앉으면 골프 얘기였다. 몇 개를 쳤는데 누구를 이겼다는. 내게도 가르쳐준다고 해놓고서 차일피일 이차저차. 더 말하고 싶지 않다. 어머니가 에어컨을 틀었다. 아버지가 불렀다.
    “현승아.”
    “예.”
    “사람 일은 모르는 거야.”
    “…….”
    “누나랑, 너랑, 둘 중에 누가 더 좋은 대학교 갈지는 두고 봐야 알아. 누나를 너처럼 여기 고등학교에 넣으면 네 맘이 편하겠니?”
    누나가 들어왔다. 녹색 줄무늬가 들어간 교복을 보자 마음이 약해졌다. 별로 안 입고 싶은 디자인이었다. 어머니 말처럼 자리가 하나 난다고 하더라도 내 차지라는 보장이 없었다. 인터뷰를 생각하면 영어가 딸렸다. 누나는 다시 1학년이었다. 재외국민특별전형 자격을 얻기 위해. 외국학교에서 3년을 채워야 하니까. 2학년으로 들어가면 2년밖에 안 되니까. 나와 연년생이었다. 동생과 같은 학년이 되는 걸 꺼리지 않았다. 조금만큼도. 우리는 말도 잘 안 섞었다. 남매라는 게 원래 그런 거다. 나한테 맞기 싫어서 누나는 말을 걸지 않았다. 그런데. 누나가 그날은 특이하게도 말을 했다.
    “우리 학교는 뭐 다 좋은 줄 아나?”
    툭 던져 놓고 방으로 들어갔다.
    “너 지금 나 들으라고 한 말이야?”
    나는 농구공을 던졌다. 방문이 꽝. 아버지가 말했다.
    “성질 좀 죽여라. 네가 더 좋은 학교에 갈 수도 있어. 국제학교는 평범하잖아. 현지학교 다녔다고 그러면 독특하잖아. 어때. 여기 말 좀 배워 볼 생각은 없어? 유리한 스펙이 될 건데.”
    아버지는 좋은 자기소개서를 쓰려면 좋은 인생이 필요하다고 했다. 여가활동, 봉사활동, 학습활동, 교내활동, 대외활동, 기타 등등. 기타로 내 머리통을 때리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낙타. 웬 낙타? 나도 모른다. 왜 낙타인지. 타락을 떠올렸을까? 자기소개서를 잘 쓰기 위해 인생을 자기소개서 포맷에 맞춰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아버지. 뭔가 잘못됐다. 내가 인생에서 뭔가 잘못된 장비에 올라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낙타 등에 안장 없이 타면 얼마나 아플까를 생각. 그랬거나말았거나. 대학교 입시 때 냈던 자기소개서는 학원에서 대필해 줬다. 열 몇 대학교에 원서를 넣었다. 백 퍼센트 서류전형을 통과했다. 학원 선생님들이 코치를 잘해서 그랬을 것이다. 학과도 참 다양했다. 국제학부가 만만했다. 결국은 꾸역꾸역 버텨낸 현지학교 3년 생활이 자기소개서를 스펙터클하게 만들었다. 인터뷰도 연습을 많이 했다. 3년 가까이 사니까 놀랍게도 그 나라 말이 내 입에 조금 붙었다. 인터뷰할 때 그것을 활용했다. 일곱 개 대학교로부터 합격통보를 받았다. 한 군데를 정해야 했다. 농구를 가장 잘하는 학교를 선택했다. 농구한테 그 정도로는 보답해야 또 농구가 나한테 도움을 줄 것이니까.

 

    담임선생님 숀은 마음 터놓고 지낼 만한 최고의 친구였다. 몇 개월 사이에 한국말이 많이 늘었다. 존댓말과 반말을 섞을 줄 알았다. 아이큐가 높은 사람이었다. 어느 토요일 오후였다. 안내실 아저씨가 현관에 와서 손님이 오셨다고 얘기했다. 나는 짐작할 수 없었다. 한국 사람이면 그냥 호수를 가르쳐주면서 들여보냈을 텐데. 어머니는 마트에 가고, 누나는 학원에 가고, 아버지는 골프 치러 가고 집에 나 혼자였다. 나가 보니, 숀이었다.
    “어? 선생님. 그거 뭐예요?”
    “이걸 한국말로 뭐라고 해요?”
    “총. 엽총. 그런데 웬일이세요?”
    “사냥 가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현승!”
    “내가 언제?”
    “지난번에요.”
    “내가요?”
    “아버지는 어디 가셨습니까?”
    “왜요?”
    “인사하겠습니다.”
    “없어요, 집에.”
    나는 골프 스윙을 해보였다. 숀이 알았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냥 갑니다.”
    “함께 가자는 뜻이에요? 저랑요?”
    숀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나는 숀의 뒷자리에 앉았다. 스쿠터는 털털거렸다. 도시에서 벗어나자 논이 나타났다. 숀은 목적지를 정해 둔 상태였다. 머리카락이 날렸다. 숀의 어깨에서 엽총이 흘러내렸다. 멜빵을 당겨 바로잡아 주었다. 숀이 노래를 불렀다. 총이 또 흘러내렸다. 숀의 등과 내 가슴 사이에 총을 끼웠다. 총은 흘러내리지 않았다. 가슴이 아팠다.
    총을 쏘고 싶었다.
    숀의 취미는 사냥이었다.
    산의 초입에서 스쿠터를 세웠다. 총소리가 들려왔다. 메아리가 굉장히 분명했다. 장검으로 휙 일격을 가하는 모습이 눈에 그려지는 소리였다. 숀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나는 콜라 캔을 열었다. 우리는 걸었다. 마을의 집 밑에는 돼지가 살았다. 지주가 서 있는 빈 공간이 울이었다. 숀이 돼지를 향해 빈 총을 겨누었다. 총을 만져 보고 싶었다.
    “숀 선생님. 돼지 얘기 왜 하셨어요?”
    “무슨 말입니까?”
    “돼지가 뱀을 먹는다면서요. 그래서 돼지고기 안 먹는다 그랬잖아요.”
    숀이 산속을 걸으면서 띄엄띄엄 얘기했다. 나는 멋대로 숀의 이야기를 받아들였다. 사냥을 다닐 때 겪었던 실화. 멧돼지가 동굴로 들어가기에 입구에서 기다렸다. 동굴은 어두웠다. 총을 쏘면 총알이 튕겨서 자기에게 돌아올까 봐 나오기를 기다렸다. 시간이 지났다. 긴장이 느슨해졌다. 그래도 기다렸다. 저녁이 왔다. 숀은 어둠이 산을 잡아먹기 전에 멧돼지를 들쳐 업고 내려가기로 했다. 랜턴을 켜고 동굴로 들어갔다. 끄악. 뱀이 우글거렸다. 그런데. 멧돼지는? 숀은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멧돼지가 보이지 않았다. 옛날 설화라면 그 속에서 처녀가 돼지에게 무릎베개를 내어주고 앉아 있었다고 뻥칠 수 있을……. 숀은 뱀들이 스멀스멀 움직이는 것을 보고 백스텝을 밟았다. 멧돼지가 끄어엉 울었다. 숀은 총을 떨어뜨렸다. 헤드랜턴 빛이 멧돼지를 비추었다. 멧돼지는 입에 뱀을 물고 있었다. 서너 마리가 꿈틀거렸다. 숀은 구토가 나왔다. 그는 내게 사냥을 함께 가자고 말하기 위해서 돼지 얘기를 꺼냈던 것이었다.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디서 뭐 하냐? 집에 왜 아무도 없어?”
    “사냥 왔어요.”
    “사냥? 그게 무슨 소리야?”
    “내일 말씀 드릴게요. 주무시고 오실 거죠?”
    “농구 코치 섭외해 놨다. 다음 주부터 스케줄 잡아서 해. 괜찮지?”
    “선수 출신이에요?”
    “그래.”
    “여기 사람이에요?”
    “미국 애. 너 영어도 좀 늘라고. 근데 사냥이라니, 뭔 소리냐?”
    나는 기분이 좋아져서 상황을 조곤조곤 설명했다. 동영상을 보고 연습하는 것보다 백 배 나을 것이다. 당장 코치를 만나고 싶었다. 아버지는 골프를 치다가 누군가의 조언을 들었을 것이고 누군가는 농구 클럽을 알고 있었기에 코치 운운했을 것이다.
    새 학기에 숀은 전근발령을 받았다. 숀을 따라가서 총을 쏴본 것이 뭐 별거라고. 그 나라에서 있었던 일 중에서 기억에 남는 걸 얘기해 보라기에 주절거렸던 건데 자기소개서를 써준 선생님은 “그거야 그거!” 하면서 환호했다. 현지에서 겉돌지 않고 그 나라 속으로 쏙 들어갔다는 결정적 증거라면서. 그렇게 이용해 먹을 대상이 아닌데 숀은. 나한테 잘해 준 사람인데.

 

    끈적끈적한 날씨였다. 부모님과 누나는 호숫가 수상가옥으로 놀러갔다. 나는 점심을 먹으러 한국 식당에 나갔다. 한국인 골프 관광객이 많은 게 싫어서 정말 먹고 싶을 때만 가는 식당이었다. 국화를 만났다. 된장찌개와 제육볶음. 식당이 분주했다. 뷔페 접시를 들고 옥외 식탁으로 나갔다. 원탁에 빈 자리가 있었다. 한 사람은 백인이었다. 국화는 딱 보기에 한국인이었다. 묵묵히 밥을 먹다가 내가 말문을 열었다.
    “학교 어디 다녀요?”
    “…….”
    “일본 사람인 척하지 말고, 말해요. 학교 어디 다녀요?”
    “여기 아니에요.”
    “여행 왔어요?”
    “아니.”
    “에어포트 플라자 가봤어요?”
    “…….”
    “가봤느냐고요.”
    “세일할 때.”
    “거기 씨즐러 샐러드바 좋은데…….”
    “가봤어요.”
    국화는 숀보다 한국어에 서툰 것처럼 단답형으로 말했다. 괜히 말을 걸었다. 고등학생이 여행을 혼자 왔을 리는 없었다. 척보면 척. 부모님 따라와서 학교에 다니는 중.
    “한국 집은 어디예요?”
    “서울.”
    “서울 어디?”
    “강남.”
    툭. 툭. 빗방울이었다. 우리는 음식 접시를 들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빈 자리로 가서 앉았다. 국화가 먼저 앉고 내가 따라 앉았다. 스콜이 내렸다. 소리가 요란했다. 국화가 물었다.
    “농구복을 입고 다니시네? 농구 좋아해요?”
    “그렇죠.”
    “잘해요?”
    “파워포워드예요. 슬램덩크 알죠? 강백호 포지션이 거기예요.”
    “잘하냐고.”
    나는 전화기를 꺼냈다. 내가 뛰는 장면을 재생시켰다. 국화는 관심 없는 척하더니 동영상이 끝날 때까지 눈길을 떼지 않았다. 케빈한테서 집중적으로 받은 레슨은 스텝, 몸에서 힘 빼기, 공을 끝까지 보기 등이었다. 케빈은 레슨 전에 줄넘기를 1천 회씩 시켰다. 국화가 말했다.
    “같이 농구하는 애들, 여기 애들 같은데? 친하네요? 어떻게 사귀게 된 거예요? 많아요?”
    사람의 눈이란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보게 돼 있다. 국화는 나의 경쾌한 스텝에는 관심이 없었고 함께 시합하는 아이들의 국적이 중요했다.
    “미치겠어요, 정말!”
    나는 학교 얘기를 풀어 놓았다. 국화는 접시에 떡볶이를 담아왔다. 내가 물었다.
    “국제학교 다녀요?”
    “아니에요.”
    “그럼?”
    국화도 나처럼 학교 얘기를 주르륵 풀어 놓았다. 한국 아이들만 다니는 학교가 있었다. 그 나라 북부 지역에 있는 아이들이었다. 몇 개 도시를 합하니까 한 학년에 한 반 이상은 된다고 했다. 모두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졸업생 선배들이 대학을 다 잘 갔다고 했다. 한국 애들만 모여 있으니까 짜증난다는 국화의 말. 짜증이 난다 해도. 영어를 못 하니 국제학교 들어가기도 어렵다는, 어쩔 수 없다는 국화의 말.
    “과학실에서는 주로 뭐 해? 좋겠다.”
    “놀지 뭐.”
    “뭐 하고?”
    “게임도 하고, 음악도 듣고, 뭐 그렇지 뭐. 정말 끝장이야. 심심해.”
    “완전 천국이구나?”
    “천국이 아니라 변태야 변태. 근데 너희 학교 들어가려면 복잡해? 나도 그 학교로 갈까? 국제학교보다 그쪽이 당기는데?”
    “들어가는 건 안 복잡한데, 좀 비싸. 교장이 좀 밝힌대.”

 

    국화를 만난 뒤 라이프 사이클에 수영이 추가되었다. ‘낮에는수영하고 저녁에는농구하고 밤에는 연애편지 쓰고’에서 연애편지쓰는밤은 다음 단계. 국화네 아파트 수영장이 좋았다. 외부인한테서는 사용료를 받았다. 식당도 있었다. 국화는 움직이는 걸 싫어했다. 자기를 만나고 싶으면 수영장에 와서 전화 하라고 했다. 나는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전화를 걸었다. 국화가 나올 만한 시각에 맞춰 근육을 펌핑했다.
    11월이 되자 다시 학기가 시작되었다. 국화를 생각하면 그 학교로 전학하고 싶었다. 그런데. 승용차로 두 시간. 기숙사 생활. 한국 학생들이 대입학원생들처럼 공부를 한다는 것. 그럴 거면 차라리 그대로 있자. 연애편지나 쓰자. 열심히.

 

    부모님은 그 나라에 남고 나와 누나는 대학생이 되어 돌아왔다. 1학년 2학기 때 어머니가 돌아왔다. 아버지보다 우리가 더 신경이 쓰인 것이었다. 나는 1학년 때 학과 대표를 했다. 동아리는 당연히 농구. 1학년 때는 선배에게 밀려 대회에 출전하지 못했다. 그 선배가 졸업했다. 나는 주전이 되었다. 대학별 동아리 대회가 코앞이었다. 학과 사무실에서 전화가 왔다.
    “김현승 학생이시죠?”
    “네.”
    “저기…… 학과사무실로 잠깐 올 수 있나요?”
    “왜요?”
    “전달해 드릴 사항이 있어서요.”
    “전화로는 안 되나요? 지금 바쁜데.”
    “저기…… 확인할 것도 좀 있고. 학교 본부에서 하는 일이라……. 언제 바쁜 일 끝나요?”
    “농구 연습 끝나고 갈게요. 그래도 되나요?”
    “네. 그럼 몇 시?”
    아. 이런 짜증 폭발. 물론 그때는 그랬었지. 조교가 왜 그렇게 더듬 더듬 더듬 더듬 …… 더듬! 나라도 그랬을 거야. 너학교에서잘릴것같은데 내가말해줘야하는데. 근데 그건 사실이니? 너희 아버지가 회사 그만두고 자영업 한 거? 조교는 그런 대화를 열어야 할 처지였으니까. 그래도. 나는 몰랐으니까. 농구 끝나고 샤워까지 하고 여유 있게 학과 사무실 문을 열었다.

 

 

 

 

   《문장웹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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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집에 사는 소녀

빨간 집에 사는 소녀1) 김숨 1 내 방엔 거울이 있어. 빛— 빨간색. 세상의 모든 빛— “지금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2 지금, 지금, 그리고 지금, “난 다른 곳에 있고 싶어.” 3 딱딱하게, 딱딱하게, “내 사랑을 받아 주세요.” 다른 곳에선 똑같은 노래가 다르게 흘러, 다르게 슬프게, 다르게 쓸쓸하게, 다르게 외롭게. 다른 곳의 다른 나. 난 나를, 난 나를, 딱딱하게, 딱딱하게, 빨갛게, “난 설레고 싶어.” 4 다섯 살 때 처음 빛을 봤어. 네 곁에, 내 곁에, 빛은 환한 어떤 것. 아, 난 날······. 다섯 살 때 처음 빨간색을 봤어. 엄마가 빨간색을 가져다 내 얼굴에서 45도 사선 밑에 놓았어. 빨간색을 나는 외우고 외웠어. 내가 빨간색을 외우자 엄마가 빨간색을 치우고 노란색을 놓았어. 나는 노란색을 외우고 외웠어. 그리고 파란색, 흰색, 검은색. 세상은 다섯 가지 색깔로 만들어졌어. 세상은 다섯 가지 색깔로 만족해. 다섯 색깔 무지개, 다섯 색깔 도마뱀. 분홍색은 꽃에게. 초록색은 달에게. 내 얼굴에서 45도 사선 밑에 놓여 있는 빨간색만 나는 볼 수 있어. 내 방 거울은 흐르지 않아······. 5 딱딱한 벽에 딱딱하게 거울이 걸려 있어. 거울이 날 봐. 거울은 날 봐. 거울은 엄마 몰래 울고 있는 날 봐. 난 날 안 봐. 음, 흐른다는 건······. 생각하고 싶지 않아. 내가 생각하고 싶은 건 오직 하나. 6 빨간색 크레파스를 선물 받고 난 흥분해 소리 질렀어. “엄마, 난 화가가 될 거야!” 빨간색 크레파스가 흰 도화지 위를 신나게 날아다녔어. (그녀의 엄마) 뭘 그리는 거야? (그녀) 집! 빨갛게, 빨갛게, (그녀의 엄마) 뭘 그린 거야? (그녀) 집! 엄마, 난 집을 그렸어! (그녀의 엄마) 네가 그린 집을 만져 보렴. 엄마가 내 손을 내가 그린 집으로 데려갔어. (그녀의 엄마) 집에 창문이 없네. (그녀의 엄마) 집에 문이 없네. (그녀의 엄마) 집에 지붕이 없네. 난 창문을 본 적 없어, 난 문을 본 적 없어, 난 지붕을 본 적 없어. (그녀의 엄마) 집에 나무도 없네. 7 집에 나무가 있어야 해? 세상에 나무가 있어야

  • 관리자
  • 2024-05-01
원경

원경 성혜령 건강검진을 12월 마지막 주까지 미루는 사람이 자기 말고도 이렇게 많으리라고 신오는 생각하지 못했다. 대기실의 긴 좌석 중간중간 빈자리가 있긴 했지만, 신오는 한구석에 서 있기로 했다. 초음파 검사실 앞 복도는 자기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며 서성이고 있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헐렁한 가운에 느슨한 고무줄 바지를 입고 핸드폰을 보며 기다림을 견디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신오는 이들 중 내년에는 따뜻한 휴양지에서 연말을 보낼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지 궁금했다. 혹은, 오늘 치명적인 암이나 뇌동맥류 같은 것들을 발견하고 전혀 예상치 못한 인생을 살게 될 사람들은? 그런 일들은 언제나 일어나고 있었다. 직장 생활을 10년 정도 하니 주위에 아픈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전 직장 동료는 출근길에 쓰러진 뒤 안면마비를 얻었다. 한쪽 입꼬리가 위로 당겨 올라갔는데 그는 멀쩡한 다른 쪽 입꼬리도 끌어올려 웃는 얼굴을 만들곤 했다. 병가에서 돌아온 뒤 매일 웃는 얼굴로 제일 먼저 출근하는 동료를 보면서 신오는 이직을 결심했다. 신오는 모든 일이 가능하지만 대개 나쁜 일들이 더 자주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되도록 좋은 음식을 먹고 운동을 꾸준히 하려고 했다. 불행은 대비하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게 오히려 쉽게 다가오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도 있었다. 복부 초음파를 보던 의사가 “어랏?” 하고 실없는 소리를 내며 배꼽 부근을 세게 눌렀을 때도 신오는 방귀가 나올 것 같다는 생각뿐이었다. 의사가 차가운 젤을 다시 묻히고 초음파 단말기를 문지르다가 복막에 종양이 보인다는 말을 했을 때는, 그래서 요새 변비가 심했나, 라는 생각이 먼저 났다. 대형 병원에 가서 생검과 CT, MRI 검사를 마치고 소화기내과 교수의 진료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도 신오는 회사 메신저를 보고 있었다. 몇십 억 단위 공공사업의 수주가 걸린 입찰 제안서의 마무리를 앞둔 시점이었다. 병원 검사로 연차를 낸다고 했을 때 팀원들은 모두 별일 없을 거라고, 하루 푹 쉬고 오라고 말했지만 메시지를 보내면서 신오를 계속 태그했다. 신오는 그날 마지막으로 진료실에 들어갔다. 의사는 젊고 피곤해 보였다. 예약을 가장 빨리할 수 있었던 의사였으니 어쩔 수 없지, 신오는 생각했다. 의사는 신오가 자리에 앉자 간단한 인사도 없이 모니터 화면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마우스 커서로 신오는 잘 알아볼 수 없는 흐릿한 음영을 짚었다. 여기예요, 여기. 의사는 약간의 승리감마저 느껴지는 말투로 말했다. 복막의 종양은 전이 암이고, 여기가 원발 암이라고. “이게 숨어 있어서 찾기 어려웠거든요.” 의사는 다시 한번 마우스 커서를 움직였다. 췌장하고 담도 사이인데 위치나 크기가 좋지 않다고. 오늘이 금요일이니 당장 다음 주부터 항암치료로 크기를 줄여 보고 수술을 잡아 보자고. 신오의 핸드폰이 또 진동했다. 신오는 치료를 이주만 미뤄도 되냐고 물었다. 프로젝트가 있어서요. 이주 후에 마감이라. 의사는 처음으로 웃어 보

  • 관리자
  • 2024-05-01
야생 식물원

야생 식물원 하가람 식물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다이아몬드 모양의 철골로 둘러싸인 거대한 유리 온실에는 열대와 지중해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이국적인 식물이 자란다고 했다. 한 달 전 나는 식물원 근처에 있는 여러 호텔을 찾아 은규에게 링크를 보냈다. 보통 때의 그라면 어디든 좋다고 했을 것이다. 레스토랑도, 카페도, 동네의 작은 아이스크림 가게조차도 모조리 내 선택에 맡기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날 은규는 이미 예약한 곳이 있다고 하여 나를 놀라게 했다. 은규가 보내 준 링크를 열어 보았다. 넓은 통유리 창 너머로 식물원과 공원이 내다보이는 스위트룸이었다. 나는 조금 들뜬 채 답장했다. — 우리가 만난 지 곧 1년이래. 믿어져? 1년이라는 시간은 내게 유별났고 은규에게는 별다른 감흥이 없는 것이었다. 그가 전에 사귄 여자친구는 단 두 명인데 각각 4년, 5년을 만났다고 했다. 매번 석 달도 채 넘기지 못하는 나와는 달랐다. 이따금 은규에게 이전 연인들에 대해 물었다. 그들이 어떤 성향의 사람이었고 어떤 외양을 가졌는지 궁금했다. 처음에는 응응, 하며 대꾸해 주던 은규는 내가 그녀들의 음악 취향이나 살던 동네처럼 구체적인 정보까지 캐묻자 태도를 바꾸었다. 기억 안 나. 그는 말했다. 다 옛날이야기라고. 그 후로는 이전에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그녀들을 생각했다. 눈, 손톱, 말투, 그리고 신발. 나와 닮았을지, 닮았다면 얼마나 닮았고 다르다면 무엇이 다를지도. 상상을 이어 가다 보면 늘 한 가지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은규는 한 번도 애인과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까 여자와 밤을 보내는 일이 오늘 그에게는 처음이었다. 서른을 넘긴 남성에게서 보기 드문 경우였지만 그가 처음인 게 좋았다. 그 점이 무엇보다도 나와 그녀들을 구분 지어 주는 것만 같았다. 차창에 머리를 기대었다. 햇볕에 데워진 창문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인터넷으로 보았던 화려한 꽃과 기다란 나무들을 떠올렸다. 노랗고 푸르고 분홍빛이 맴도는 공간을. 여름 휴가철이었고 도로는 차들로 빽빽했다. 졸음 껌을 씹는 은규를 보며 말했다. “오늘은 내가 운전하고 싶었는데.” “다음에. 너 힘들어.” 은규가 말했지만 나는 안다.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그는 내게 차를 맡기지 않을 것이다. “보면 놀랄걸? 너무 잘해서?” 나는 허리를 세운 채 한 손으로 반원을 그려 보았다. 휙휙. 입으로 소리 내며 운전대를 쥔 그를 따라 했다. 그가 웃었다. 머릿속으로 주행하기. 그것은 나만의 놀이였다. 캠퍼스 변두리에 있는 H관 1층, 5평 남짓한 주차관리실에서 상상력을 충족시켜 줄 만한 것은 많지 않았다. 먼지 쌓인 커피믹스와 낡은 소파, 책상 위에 시간별로 놓여 있는 분홍색, 파란색, 노란색 주차권들. 지겨운 서류, 서류, 서류. 드물게 실장이 자리를 지키는 날이 아니면 대체로 혼자 그곳에서 일했다. 사람들이 찾아와 주차권을 사거나 정기 등록을 마친 후 돌아가면 나는 모니터에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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