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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저항적인 돼지가 좋아 (제2회)

  • 작성일 2014-07-09
  • 조회수 1,204

 

 

굉장히 저항적인 돼지가 좋아(제2회)

 

 

 

박금산

 

 


 

 

    누군가는무언가를누군가에게사정하고 누군가는누군가에게말귀를못알아들은척딴전을피우는데 그것이진정한 거절이다. 안된다고하면 안되는것으로받아들여야한다. 학과사무실에서는. 어리숙한애들은 그걸모른다. 신입생은 특히 그런다. 한애가 칸막이를붙잡고 변경 어쩌고저쩌고하면서 조교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출석이거나 장학금이거나 서류제출 문제였을 테지. 나는나의가녀린처지를몰랐기에 속으로비아냥거렸다. 딱하다딱해 비굴하게뭘그러냐. 애송아 안되는건안되는거야. 안쓰러워하며 농구공을튕겼다. 플로어가 울리도록 뻥 뻥 소리 나게 쳐주어야 하는데 실내라 조신하게 컨트롤했다. 슛을 하려면 스텝을 크게 가져가 줘야 공간이 만들어진다. 방금 체육관에서 연습했던 동작을 떠올렸다. 조교가고개를홱돌렸다. 사무실에서드리블을때리는 너는뭐야? 하는 눈치로 째려보다가, 자기가용건이있어서 부른 학생임을알고 자세를바꾸었다. 진정하기위해침을몇모금 삼켰을것이다. 아마. 나는도전적이었다. 눈싸움에서밀리지않으려고그를바라보았다. 그가물었다.
    “김현승 학생이세요?”
    꾸벅고개를 조아렸다. 조교는 칸막이 패널에 손을 얹고 있던 학생을 눈으로 밀어낸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말했다.
    “여기는 다른 학생들이 있으니까 조용한 데 가서 얘기하실까요?”
    그가앞장섰다. 뒤를따라걸었다. 복도는 어두웠다. 그는 고리슬리퍼차림이었다. 나는 농구화로 저벅저벅 걸었다. 밑창이 바닥에 닿으면서 간헐적으로 삑삑거렸다. 복도 중간쯤에서 조교가 멈췄다. 열쇠로 자물쇠를 풀었다. 불을 켜기 전까지는 어두웠다. 칠판. 복사용지. 서류파쇄기. 사각 테이블. 전원 연장용 멀티탭. 스탠딩 스크린. 프로젝터. 형광등 불빛이 사무용품을 비추었다. 조교가 의자에 앉았다. 위협적으로느껴졌다. 그가 권하는의자에 앉았다. 그가했던 말이 그네처럼 머릿속에서진자운동을한다. 왔다리갔다리 좌우로앞뒤로 지금도.
    “저기, 혹시 다른 데서 연락 받은 거 있나요?”
    나는 나도모르게푹 농구공을감싸안은채 물었다. 뭘요?라고 했어야 했는데 왜요?라고. 조교가말했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자꾸만 왜요?가 떠올랐다. 그가 하는 말마다. 연달아서 왜요? 왜요? 하고 물었다. 그는 내가 숙맥이어서 주저하는 것 같았다. 학교 다니는 데 어려움이 없는지 물었다. 페이크였다. 나는 본론을 기다렸다. 초조해지니까 농구공을 튕기고 싶어 죽을지경이었다. 그가 말했다.
    “확인할 사항이…… 좀 있습니다.”
    “뭘요?”
    “그러니까 그게……. 확인을 해야 하는데, 아버님께서 좀 실수를 하신 것 같아요.”
    “그런데, 왜요?”
    “그러니까 말예요.”
    “아버지가 실수했는데 왜 저를요?”
    “그러니까 말예요.”
    “뭐가 그러니까 말예요예요?”
    “나도 잘 모르는데. 학생처럼 입학한 학생들을 다 조사했거든요.”
    “특례입학요?”
    “네.”
    “난 아무 문제 없을 텐데요?”
    뭐가 문제일 수 있단 말인가. 국화처럼 위장학교를 다닌 것도 아닌데. 한국 학생들이 모여 있던 국화네 학교는 정식 고등학교가 아니었다. 이름이 학교였지만 사실은 사설학원이었다. 그걸 모르고 다녔던 애들은 나중에 울면서 운명을 운운했다. 알면서도 국화처럼 대학만 들어가면 된다고 작정하고 마음 편하게 다녔던 애들은 문명의 엄중함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했다. 학교에서 쫓겨났으니까. 한 달 전에 그 학교 출신들 모두 입학이 취소됐다. 하소연할 구석이 하늘 아래 있지 않았다. 졸업한 고등학교가 사설학원이었으니 걔네들 학력은 중졸이었다. 대학교에서 퇴학을 당한 거라면 훗날 재입학을 하겠다는 식으로 희망을 가져 볼 수 있었겠지만 입학 자체가 없는 걸로 됐으니 존재 자체의 완전 소멸이었다. 대학에 갈 자격을 영영 잃은 것이었다. 아니. 원래 자격이 없었으니까 잃은 것이 아니라 원상복귀된 것이었다. 국화 선배중에는대학교를졸업한후 회사에취직해서다니던 사람도 있었다. 그네들도 입학이 취소됐으니 졸업이 취소됐을 것이다. 회사에서잘렸는지어쨌는지는알바 아니다.
    누군가꼰질렀을거라고 추측하지만 걔네들은, 흥, 확신하지못한다. 자기들이 왜 그런 꼴이 됐는지. 아마. 같은 출신 중에서 대학에 떨어진 누군가가 간첩질을했을거라고 생각하고있을 가능성이 크다. 국화가 뇌세포를 유리조각으로 긁어대지만 않았어도. 신고 같은 것. 하지. 않았을. 것이다. 넋나간년. 그런데. 아버지. 문제? 국화 아버지가 아닌 내 아버지의 문제? 그게 왜? 왜 나하고 문제가 엮이는 거? 조교의 설명을 들었다. 재외국민특별전형으로 입학한 학생들을 모두 조사했는데 문제가 되는 사람 명단이 공개됐다. 우리학교에세명 있다. 내가거기포함돼있다. 한 명은 군대생활 하고 있고 한 명은 휴학 중이다. 나만 학교에 다니고 있다. 어둠의이미지가 돼지입김처럼 몰려왔다. 아버지는 외국에 있다. 비자나 여권에무슨문제가 있나? 아버지한테문제가 있으면 아들이불려다녀야되는 게법이란말인가. 개법! 아버지 문제는 내 연구영역이아니다. 알려고해도 알수없는일. 조교가 말했다.
    “곧 집으로 문서가 갈 거예요. 법원 판결이 날 때까지 좀 기다려야 되거든요. 그러니까…….”
    이어졌다. 설명은 이렇다. 아버지가 그 나라에 있는 동안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것이 밝혀졌다. 상사 주재원으로서 자격을 잃었다. 한국에 왔다갔다하면서 개인사업을 했다. 그런데 누나와 나는 외국에서 학교를 다녔다. 뭐? 나한테는 문제가없었다. 3년을 외국에서 학교 다녔다. ‘어쩔 수 없이 외국에 있어야 할’ 이유가없었음에도불구하고 제기랄 우리는 외국에 있었다. 귀국하면 특별전형 자격을 잃게되니까당연히. 그런데. 아버지. 입학원서에 해외 파견 근무 기간을 3년으로 적었다. 그것이 허위라는 거다. 누군가 그것을 집어냈다. 서류위조. 입학자격상실. 나도대학교에서잘린다. 어떻게 거기까지연구해! 나한테도문제가있을수있다는 것을 내가어떻게짐작이나했겠냐고! 국화네학교를꼰지를때는 국화가타깃이었다. 국화만끌어내리면 족한 일이었다. 그런데. 수류탄도 아닌데. 파편이내게로. 아! 나한테는나를연구할필요도있었던 것! 털어서일어날먼지의두께가어떤구름의형태로내존재를감싸고있는지 현미경대물렌즈를들이댔어야했던 것! 평정을회복하려고노력했다.
    “조교님, 난 몰랐어요…….”
    “그러게요. 다른 학교에서도 학생처럼 모르고 그랬다는 학생들이 있다더라고요.”
    “난 몰랐어요. 진짜요.”
    “…….”
    “그러면 저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극단적인 경우에는 입학이 취소되는 거죠.”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글쎄요. 학교에서도 어쩔 수 없어서 재판을 걸었다고 하니까 미리 알고 계시라고……. 학교는 당분간.”
    조교는 말끝을 닫았다. 잠시후. 휴학을하든 학교에 계속나오든 그건 편한 대로 하라고 했다. 강의실에 나와서 분위기 흐리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렇게압박하려고부른것이었다.

 

    누나는 컴퓨터 작업을 하고 있었다. 내가 들어서자 파일을 저장하는 눈치였다. 테이블 위의 물건을 정리했다. 자기 방으로 들어가려고 준비했다. 짜증이일었다. 훅슛을크게날렸다. 농구공이 모니터에 가서 꽂혔다. 노트북이 나뒹굴었다. 공이 유리문에서 튕겨나왔다. 화분이 넘어졌다. 누나는똥물을 맞은것처럼 저항했다.
    “야! 이 저능아!”
    “뭐?”
    “뭐야 너?”
    “병…신…. 뭐 하냐? 미친년아.”
    “뭐래, 이 미친놈이?”
    “과제 하냐? 학점 딸라고?”
    “왜 이래 너? 엄마! 엄마! 얘 좀 봐!”
    누나는뒷베란다를바라보았다. 어머니가빨래를널고있었다. 그랬거나말았거나. 발앞으로다가온농구공을뻥 찼다. 공이벽을맞고나왔다. 마루를울리며튕겨다녔다. 방으로 들어갔다. 때려부수고집어던지고불지르고싶었다. 아버지. 더이상대학생이아니다. 상대할대학생이없어진다. 동아리에서쫓겨난다. 쫓겨나면동아리대회에나갈수없다. 참피온이될수없다. 숨기고대회에나가면 부정선수 가된다. 수능을봐서 대학에 다시들어가는것? 어림반푼어치도없다. 괜히누나한테저능아로불리는것 이아니다. 순응이라면할자신있지만. 뒷목이뻐근했다. 주먹으로 벽을 쳤다. 누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어딜 도망가? 이리 안 나와?”
    그래. 한판붙어보자 이거지. 거실로 나갔다. 어머니가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어후, 열 뻗쳐 정말.”
    “너희들 또 왜? 현승아, 왜 그러니?”
    “엄마…….”
    “그래, 현승아. 말로 해. 누나한테 그러지 말고.”
    누나를바라보았다. 누나는 주먹을 쥐고 눈에 힘을 주었다. 국화가 생각났다. 집에 놀러오면 누나랑 잘 어울렸다. 망고껍질을잘벗겼다. 노란색매니큐어를좋아했다. 반짝반짝. 이렇게될줄몰랐다. 누나는 노트북을 손으로 닦았다. 누나의 말.
    “짐승이니?”
    노트북 모니터는 깨져서 울긋불긋했다. 다시 누나.
    “도대체 애가 왜 그래?”
    나.
    “말해 줄까?”
    “네 과제는 네가 해야지 왜 남의 걸 훔치려고 그래? 노트북 물어내!”
    “병신아, 그게 전부가 아니야.”
    왜 모르겠는가. 과제 따위로 그렇게 분노가 치밀었을 리 없지 않겠는가. 한집에사는데누나라고왜그것을 모르겠는가. 할말이없으니까 과제핑계를대는 것이다. 누나와 나와 국화는 같은 학년이었다. 학교와 학과가 달랐지만 교양과목은 비슷했다. 국화는자연계열이었다. 나와누나는인문계열이었다. 자유주제를선택하라는 과제내용이 많이 겹쳤다. 누나가수강신청을하면 비슷한과목으로골라서 수강신청했다. 국화도그랬다. 우리는과제를함께했다. 북카페에서빙수를자주먹었다. 국화는과제물을예쁘게만드는걸 잘했다. 나는도서관심부름을잘했다. 내용은누나가만들었다. 웹사이트에서텍스트를긁어다가 스타일을바꾸었다. 셋이 똑같은 것을 냈다. 학교가달라서안심이었다. 국화가누나방에서자고가는날이 있었다. 미치겠는일이었다. 한집에서잠을자다니. 외국에서수영복차림으로선베드에 나란히 누워 있었을 때와 느낌이아주달랐다. 국화의어머니와아버지는 헤어졌다. 그게무슨대순가. 국화는개의치않았다. 집을나와 고시원을얻었다. 우리집에서저녁을먹는날, 누나방에서자고가는날, 이, 늘었다. 가방에서가스총이나왔다. 나를겨누기위한것이아니었다. 2학년에 올라간 다음에는 따로 놀았다. 나는 농구동아리 주전 선수가 되었다. 국화는 실험실이라는 델 들어갔다. 누나는 노땅 복학생과 연애를 시작했다.

 

    그게무슨대순가. 그럴수도있지. 떡볶이국물에순대를찍어먹을수도 있는 일이지.

 

    “미친년아, 과제는 해서 뭐 하냐. 톡 잘려 떨어질 건데.”
    “무슨 개소리야 이게.”
    “너네 학교에서는 학교 계속 다니라고 하나 보지?”
    “뭔 말이야?”
    “병신아. 조사 다 끝났대. 끝이야 끝.”
    “어머, 그게 무슨 말이니 현승아?”
    어머니가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 둘 다, 학교에서 잘리는 거라고! 엄마!”
    “…….”
    “아빠가 주재원 아니었다면서!”
    뇌세포의 정렬순서가 뒤바뀌면서 정신의 순열이 기준을 잃었다. 소위 말해 미쳤다. 오디오텔레비전거울유리컵컴퓨터벽시계. 쳐서 부술 무언가를 눈으로 찾았다. 누나가 굉장히이성적인목소리로 가지런하게말했다.
    “야, 김현승. 무슨 말이니? 잘린다니? 학교에서 무슨 말을 듣고 온 거야? 우리 학교에서는 그런 얘기 안 하던데. 말해 봐. 뭐야?”
    “김정식 씨께서 회사를 그만뒀대잖아. 그만뒀는데 해외기업체 근무기간을 3년으로 썼잖아.”
    “그래서?”
    “그래서 그런 거지 그래서라고 왜 물어?”
    “저능아…….”
    “뭐야?”
    “그런다고 잘리니?”
    “…….”
    “아빠가 그러셨다고 하더라도 그게 무슨 문제야? 우리 외국에 있었던 것 맞잖아. 정식 학교에 다녔잖아. 더구나 넌 현지 학교 졸업했잖아.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 아빠가 회사 그만뒀어도 거기서 사업 하셨잖아. 아직도 그 사업, 하시잖아. 그러면 됐지. 그게 무슨 문제야?”
    누나는 태연했다. 국화 따위와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이었다.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우리는 국화네처럼 그런 저질이 아니었다. 더구나 알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원서를 쓸 때는 학원에 맡겼다. 자기소개서를 쌈빡하게 써준 곳이었다. 학원에서는 귀찮아서 그냥 통으로 3년 동안 재직했다고 서류상으로 간편하게 썼을 것이다. 우리는 확인하지 않았다. 잘못이 있다면 학원 책임이었다. 아버지가 물론, 주재원 기간을, 꽉, 채웠더라면 좋았겠지. 새 사업을 시작한다고, 개업식 한다고 했던 기억이 나긴 한다. 하지만 어느 시점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게 대학 들어가는 것과 무슨 상관. 누나 말대로 잘릴 염려는 없을 것이다.

 

    조교가 헛다리짚고 압박한 것이다. 누나가 조리 있게 말하니 믿음직스러웠다. 그런데. 정말 난 몰랐을까. 나한테 자격이 없다는 걸 정말, 몰랐을까. 알고 있었는데 모르는 척하면서 살아왔을 것만 같은 이 느낌, 이, 뭘까. 누가 딴지를걸어오면몰라서그랬다는 식으로 말할 준비를 해왔던 것 같은 이 느낌. 아버지가 외국에 있어서 마음이 편했던 이유. 국화가 집에 오지 않으면서 누나와 나는 외국에 있을 때 그랬던 것처럼 서로 으르렁댔다. 과제를 같이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누나는 복학생 선배 과제를 대신했다. 공돌이라 글을 A4용지 절반 이상을 이어서 쓰지 못한다고 했다. 나도 학점이 필요했다. 농구도 잘하고 학점도 잘 받는 ‘싸나이’가 돼보고싶었다. 누나가 쓴 보고서를 강탈했다. 말싸움으로는 게임이 안 됐지만 힘으로 훔칠 수 있는 능력이란 게 있었다. 잊지 마. 넌 내가 양보해 줘서 인터내셔널 스쿨 다녔던 거야. 네가 부르주아틱하게 인터내셔널 다니는 동안 난 현지 애들 틈에서 죽을 똥을 쌌잖아. 누나를 압박할 과거가 있었다. 그런데. 연년생 남매처럼 골 때리는 관계는 어디에도 없다. 누나를 대하면 감정이 춤을 춘다. 나도 모르게 이랬다저랬다……. 침대에 누워 메시지를 보냈다. 누나도 내 앞에서는 이랬다저랬다 했다. 답장이 금방 왔다. 벽을 사이에 두고 전자기기로 대화했다.
    ― 괜찮을까?
    ― 괜찮을 거야.
    ― 그랬으면 좋겠다.
    ― 근데. 누가 그랬을까.
    ― 뭘?
    ― 누가 찔렀으니까 그런 거 아냐. 아빠가 그랬다는 것. 어떻게 아느냐고.
    ― 조교 말이 국화네 때문이래.
    ― ??
    ― 완전히 다 조사했대. 특례입학생들.
    ― 국화하고는 연락해?
    ― 꺼져 줄래? 걔 얘기 할 거면?
    ― 걔네 중에 누가 그랬겠지. 아빠 친구 중에 악감정 가진 사람? 너는 뭐 짚이는 거 없어?
    ― 뒈지려면 혼자 뒈지지 이게 뭐야. 자기들만 잘릴 수 없다 이건가?
    ― 우린 괜찮을 거야.
    ― 조교가 안 괜찮을 거라더라.
    ― 조교가 뭘 안다고? 괜찮을 거라니까! 경우가 다르잖아 국화 걔네들하고는!
    ― 동아리 시합에 나갈 수 있을까?
    ― 저능아 넌 완전히 농구밖에 관심이 없구나.
    ― 그렇지. 재미있는 건 농구밖에 없으니까.
    연년생 남매는 정말 어지러운 관계였다. 누나하고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으니 기분이 안정되었다. 조교한테 불려가서 들었던 얘기는 짧은 스콜 같았다. 비현실적인 경험이었다. 내일 아침이 되면 학교에 나가 농구 연습을 할 것이다. 국화한테 연락해 볼까. 뭘 하고 있을까. 랩(Lab)에서 쫓겨났을 것이다. 병원에 갔을까. 연락하고 싶은 욕망이 누나한테로 전이되었다.
    ― 어떻게 될 것 같냐?
    ― 네 누나가 판사니? 어떻게 알겠냐!
    ― 너네 학교에서도 널 부르겠지?
    ― 아닐 수도 있고.
    ― 등신아, 아버지가 같은데 어떻게 나만 걸릴 수 있냐?
    ― 우리 학교에서는 아무 얘기 안 했어.
    ― 좋겠다, 넌 대학에 죽 다닐 수 있겠네.
    ― 새가슴! 괜찮을 거야. 겁먹지 마.
    ― 노트북은 내가 AS센터에 갔다 올게. 과제는 돈 받고 팔아라. 비싸게 쳐줄게. 잘리면 그만이지만.
    ― 미치겠네 정말. 어떤 새끼가 딴지를 건 거야? 우리 괜찮겠지?
    그래. 이게누나이다. 불안해야내누나이다. 내일학교에가면누군가자기를부를 것이라고. 두려운 것이다. 아닌 척하지만.
    ― 내일 돼봐야 알지. 그렇다고 학교에 가서 일부러 조교 찾아가고 그러지는 마. 괜히…….
    ― 진짜 우리한테 입학 자격이 없었던 거냐? 조교 말이 맞아?
    ― 왜 갑자기 변하셨어? 아닐 거라며.
    ― 졸라 헛갈린다 이제. 네가 쪼는 것 보니까.
    ― 그만 자자.
메시지 편집기를 닫았다. 벽을 사이에 두고 누나와 나는 누워 있었다.

 

    간단하게 징계를 먹고 끝났으면 좋겠다. 누나가 바라는 대로.

 

    유튜브를 틀었다. 마이클 조던의 페이드어웨이 콤필레이션을 감상했다. 감동적이었다. 유니폼이 바뀌고 코트가 달라지고 상대 수비수가 달라져도 조던은 일정했다. 준비동작에 변화를 주면서 수비수를 흔들고, 슛 동작에 들어가서는 고정된 자세를 만들었다.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점프하면서 슛을 바로 날리는 것이 아니다. 몸이 최고 지점에서 낙하하는, 상승과 낙하 사이에 존재하는 0.000…1초의 정지 순간에 공을 날린다. 몸빵으로 나오는 놈들을 이기는 길은 스텝이다. 크게, 크게, 드리블을 빵 빵 치다가, 페이크, 터닝, 페이드어웨이, 점핑, 정지, 슛. 볼과 바스켓을 끝까지 보기. 조던한테는 198센티미터의 신이 내린 몸매가 있었다.

 

    이튿날 누나는 학교에 갔다.

 

    나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사냥총을닦았다. 숀 선생님이 말했다. 사냥을 잘하려면 기다려야 한다. 목을 알아야 한다. 숀 선생님은 라이플로 멧돼지를 쏘았다. 나는 산탄총으로 새를 쏘았다. 나무에 무심히 한 방, 새들이 날아오르면 조준해서 하늘로 한 방. 숀한테 부탁해서 샀던 총에는 셸이 다섯 개 들어갔다. 셸 하나에 총알이 여덟 개 들어 있었다. 총을 쏘아서 새를 떨어뜨리면 그걸로 끝이었다. 개가 없었다. 떨어진 새를 찾으러 다니기에는 숲이 짙었다. 사냥꾼에게는 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학교고 뭐고 군대에나 가버릴까. 총을 닦으면서 생각했다. 이삿짐 상자에 넣어서 가져왔다. 총알을 구할 수 없으니 격발 연습이 쓸모없다.
    언젠가 국화.
    “고시원에 안 들어간 것 같던데. 어디에서 잤어?”
    “실험실에서.”
    “거기서 잠을 자? 뭐 하는데?”
    “말하면 아니? 네가?”
    나는 농구공을 통 통 튕겼다.
    “큭. 미안. 사실 나 같은 애는 몰라. 무슨 실험인지. 자리 지키라고 해서 지키는 거야.”
    “무슨 실험 하는데?”
    “모른다니까.”
    “어떻게 모르는 실험을 하냐? 말이 돼?”
    “대학원생 선배가 하라는 대로 하는 거야. 시간 되면 온도 조절하고, 알람 울리면 계기판 보고. 가스통 점검하고. 그러다 보면 날이 새는 거야. 미생물 어쩌고 저쩌고 그러는데 그게 어디 눈에 보이니? 하라는 대로 하는 거지.”
    “짜증난다. 그걸 왜 하는데?”
    “장학금이 나오잖아. 학점도 잘 받을 수 있고.”
    “학점 잘 받아서 뭐 할 건데?”
    “학생이 학점 잘 받으려고 하는 건 당연하지.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지!”
    “그래도 너 그런 애 아니잖아.”
    “뭐가?”
    “목적이 있으시겠지…….”
    “기숙사에 들어가려면 성적이 좋아야 되거든. 다음 학기에는 들어갈 거야. 그리고 편입할 거야, 학교가 좀 후져.”
    “대학에만 들어가면 된다더니. 고등학교도 안 나온 게…….”
    “이걸로 맞아 볼래? 고등학교를 안 나오긴 누가 안 나왔다고 그래?”
    국화는 가방에서 가스총을 꺼냈다.
    “그렇게 나오니까 좀 새롭긴 하다. 그거에 맞으면 어떻게 되니?”
    “한번 쏴볼까?”
    나는 페이크 동작으로 국화 눈을 속이면서 가볍게 가스총을 빼앗았다.
    “우리 집에 이제 안 올 거야?”
    “실험실에 들어가고 나니까 시간이 많이 없어. 과제도 거기에서 하면 되고. 선배들도 잘해 주고.”
    “밤에 무섭지 않나?”
    “괜찮아. 남자 선배가 있으니까.”

 

    밤에 에스오에스를 받았다. 11시. 택시 타야 되는데 좀 와줄래? 누나의 메시지. 나는 이렇게 답장. 뭐 해줄 건데? 누나의 제안. 국화 비밀. 국화의 비밀을 들어서 나쁠 건 없었다. 나의 물음. 어딘데? 누나의 대답. 강남역. 버스를 타고 누나가 있는 곳으로 갔다.
    낮에는 수영하고 저녁에는 농구하고 밤에는 연애편지 쓰고. 그럴 때. 밤외출은삼갔다. 여자들은순박했다. 해코지하려고 덤비는 건달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나라남자들은 음주운전을 많이 했다. 하프트럭 짐칸에 친구들을 태우고 무식하게 운전했다. 아버지도 잦았다. 술에 취해 들어와 아무렇게나 차를 댔다. 출근하기 전, 운전하고 왔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콜택시를 부르려고 한 적도 있었다. 범퍼를 개 피로 적신 날도 있었다. 골목에서 만난 개를 차로 갈아버린 것이었다. 개 꼴 당하지 않으려면 집 안에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었다. 경비원이 순찰 도는 주택단지 안에서 밤바람을 쐬는 게 유일한 산책이었다. 밤의 수영장은 조명이 흰색이었다. 겨울에도 그 나라는 더웠다.
    국제학교 동창생들과 맥주 마시는 자리였다. 영어 반 한국어 반. 농담 반 진담 반. 누나는 궁금했을 것이다. 혹시 나처럼 학교로부터 이상한 소식을 들은 친구가 있지 않은지. 외국 습관이 불쑥 치고 올라와서 밤거리가 무서워졌을 것이다. 그래서. 나를 불렀을 것이다.
    술집 앞에서 전화를 걸었다. 누나가 알딸딸한 취기를 즐기며 계단을 내려왔다. 나는 가방을 받아 주었다. 국화 것이면 좋을 텐데. 수술을 받았을까? 나는 술 같은 것 먹지 않았다. 내장이 부글거려서 마실 수가 없었다. 누나가 말했다. 너랑 이렇게 밤길을 걷다니. 새삼스럽다. 나의 속마음. 흥, 이게 무슨 수작이야? 누나의 고백. 현승아, 그래도 넌 내 동생이고, 동생이니까 난 너 좋아. 연년생 남매 관계는 정말로 이상하다. 골 때리는 년. 막무가내로 짜증나다가도 불쑥 좋아지는 이 베이스 불규칙한 감정. 누나는 새벽서너시쯤으로생각하는것같았다. 빈 택시가 다니는 길목으로 손을 잡고 끌었다.
    잠시 후 택시 안.
    “말해 봐. 국화 비밀이 뭔데?”
    “걔 때문이었대.”
    “뭐가?”
    “거기 출신들이 모였는데 국화만 빠졌대. 완전 따 당하고 있어 걔. 걔 때문에 자기들이 다 들통 났다고 뼈를 갈아 마실 것처럼 얘기들 한다더라.”
    “누가 알아, 국화 때문이었다고?”
    “난동 있었잖아. 그 자식이 찔렀대.”
    “그게 말이 되니?”
    “안 될 건 뭐냐. 하여간에 걔네들 국화 만나기만 하면 가만 안 놔둘 것처럼 그런대.”
    “병신들. 그게 왜 국화 때문이야?”
    한숨이 나왔다. 실험실에서 떨고 있던 국화의 얼굴이 스쳐갔다. 현승아, 빨리 좀 와! 영화를 보다가 전화를 받았다.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뛰어나갔다. 택시에서 내비게이션을 틀었다. 학교의 위치는 도시 외곽이었다. 실험실 건물에 도착했다. 경찰차 루프에서 경광등이 번쩍거렸다. 현장을 보지 못했으므로 본 것처럼 말할 수 없다. 내가 본 것은 사후 상황이었다. 국화는 짧은 치마 속에 트레이닝복 바지를 입고 있었다. 여고생들이 겨울에 치마 속에다 체육복 입고 하교할 때 그러는 것처럼 어수선했다. 국화는 이마가 찢어졌다.
    경찰이 녀석의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질소 가스통을 발로 차면서 죽여 버리겠다고 위협했다 한다. 실험실 구석에 접이식 침대가 놓여 있었다. 그 위에 무릎 담요가 구겨져 있었다. 창문 바깥은 작은 숲이었다. 가로등이 듬성듬성했다. 경찰이 내게 말했다.
    “학생, 친굽니까?”
    “예.”
    “가족은 아니죠?”
    “예.”
    “그럼 필요 없는데.”
    “저 여학생이 불러서 온 거예요.”
    경찰관을 젖히고 국화 옆으로 다가갔다. 여경이 국화의 이마를 매만졌다. 국화가 나를 보더니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학생들이 하나 둘 도착했다. 실험실 근무자들이었다. 술집에서 연락받고 온 학생, 기숙사에서 온 학생, 당구장에서 온 학생, 피시방에서 온 학생. 얼떨떨하다는 눈치였다. 모두 남자였다. 학생들은 수갑 찬 녀석을 형이라 불렀다.
    실험실에 남자 선배가 있으니까 밤에도 괜찮다고 하던 국화의 말이 떠올랐다. 그 남자 선배가 녀석이었을 것이다. 국화는 고시원에 혼자 있는 것이 싫어서 되도록이면 실험실 야간 근무를 택했다. 아버지가 망했고 어머니도 국화한테서 손을 뗐다. 대학생이 됐으니까. 국화 부모님은 할 만큼 한 것이었다. 딸을 대학교에 입학시키는 데 돈을 많이 썼다. 집이 망하는 데 꼭 천재지변처럼 큰일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내 아버지도 언제 망할지 모른다. 난동 부린 녀석이 말했다.
    “아이 씨, 이게 뭐야, 쪽팔리게. 얘들아, 내가 그럴 사람이냐?”
    경찰이 제압했다.
    “그러지 말고 따라오세요. 일단 차에 타봐요.”

 

 

 

 

   《문장웹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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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집에 사는 소녀

빨간 집에 사는 소녀1) 김숨 1 내 방엔 거울이 있어. 빛— 빨간색. 세상의 모든 빛— “지금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2 지금, 지금, 그리고 지금, “난 다른 곳에 있고 싶어.” 3 딱딱하게, 딱딱하게, “내 사랑을 받아 주세요.” 다른 곳에선 똑같은 노래가 다르게 흘러, 다르게 슬프게, 다르게 쓸쓸하게, 다르게 외롭게. 다른 곳의 다른 나. 난 나를, 난 나를, 딱딱하게, 딱딱하게, 빨갛게, “난 설레고 싶어.” 4 다섯 살 때 처음 빛을 봤어. 네 곁에, 내 곁에, 빛은 환한 어떤 것. 아, 난 날······. 다섯 살 때 처음 빨간색을 봤어. 엄마가 빨간색을 가져다 내 얼굴에서 45도 사선 밑에 놓았어. 빨간색을 나는 외우고 외웠어. 내가 빨간색을 외우자 엄마가 빨간색을 치우고 노란색을 놓았어. 나는 노란색을 외우고 외웠어. 그리고 파란색, 흰색, 검은색. 세상은 다섯 가지 색깔로 만들어졌어. 세상은 다섯 가지 색깔로 만족해. 다섯 색깔 무지개, 다섯 색깔 도마뱀. 분홍색은 꽃에게. 초록색은 달에게. 내 얼굴에서 45도 사선 밑에 놓여 있는 빨간색만 나는 볼 수 있어. 내 방 거울은 흐르지 않아······. 5 딱딱한 벽에 딱딱하게 거울이 걸려 있어. 거울이 날 봐. 거울은 날 봐. 거울은 엄마 몰래 울고 있는 날 봐. 난 날 안 봐. 음, 흐른다는 건······. 생각하고 싶지 않아. 내가 생각하고 싶은 건 오직 하나. 6 빨간색 크레파스를 선물 받고 난 흥분해 소리 질렀어. “엄마, 난 화가가 될 거야!” 빨간색 크레파스가 흰 도화지 위를 신나게 날아다녔어. (그녀의 엄마) 뭘 그리는 거야? (그녀) 집! 빨갛게, 빨갛게, (그녀의 엄마) 뭘 그린 거야? (그녀) 집! 엄마, 난 집을 그렸어! (그녀의 엄마) 네가 그린 집을 만져 보렴. 엄마가 내 손을 내가 그린 집으로 데려갔어. (그녀의 엄마) 집에 창문이 없네. (그녀의 엄마) 집에 문이 없네. (그녀의 엄마) 집에 지붕이 없네. 난 창문을 본 적 없어, 난 문을 본 적 없어, 난 지붕을 본 적 없어. (그녀의 엄마) 집에 나무도 없네. 7 집에 나무가 있어야 해? 세상에 나무가 있어야

  • 관리자
  • 2024-05-01
원경

원경 성혜령 건강검진을 12월 마지막 주까지 미루는 사람이 자기 말고도 이렇게 많으리라고 신오는 생각하지 못했다. 대기실의 긴 좌석 중간중간 빈자리가 있긴 했지만, 신오는 한구석에 서 있기로 했다. 초음파 검사실 앞 복도는 자기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며 서성이고 있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헐렁한 가운에 느슨한 고무줄 바지를 입고 핸드폰을 보며 기다림을 견디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신오는 이들 중 내년에는 따뜻한 휴양지에서 연말을 보낼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지 궁금했다. 혹은, 오늘 치명적인 암이나 뇌동맥류 같은 것들을 발견하고 전혀 예상치 못한 인생을 살게 될 사람들은? 그런 일들은 언제나 일어나고 있었다. 직장 생활을 10년 정도 하니 주위에 아픈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전 직장 동료는 출근길에 쓰러진 뒤 안면마비를 얻었다. 한쪽 입꼬리가 위로 당겨 올라갔는데 그는 멀쩡한 다른 쪽 입꼬리도 끌어올려 웃는 얼굴을 만들곤 했다. 병가에서 돌아온 뒤 매일 웃는 얼굴로 제일 먼저 출근하는 동료를 보면서 신오는 이직을 결심했다. 신오는 모든 일이 가능하지만 대개 나쁜 일들이 더 자주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되도록 좋은 음식을 먹고 운동을 꾸준히 하려고 했다. 불행은 대비하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게 오히려 쉽게 다가오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도 있었다. 복부 초음파를 보던 의사가 “어랏?” 하고 실없는 소리를 내며 배꼽 부근을 세게 눌렀을 때도 신오는 방귀가 나올 것 같다는 생각뿐이었다. 의사가 차가운 젤을 다시 묻히고 초음파 단말기를 문지르다가 복막에 종양이 보인다는 말을 했을 때는, 그래서 요새 변비가 심했나, 라는 생각이 먼저 났다. 대형 병원에 가서 생검과 CT, MRI 검사를 마치고 소화기내과 교수의 진료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도 신오는 회사 메신저를 보고 있었다. 몇십 억 단위 공공사업의 수주가 걸린 입찰 제안서의 마무리를 앞둔 시점이었다. 병원 검사로 연차를 낸다고 했을 때 팀원들은 모두 별일 없을 거라고, 하루 푹 쉬고 오라고 말했지만 메시지를 보내면서 신오를 계속 태그했다. 신오는 그날 마지막으로 진료실에 들어갔다. 의사는 젊고 피곤해 보였다. 예약을 가장 빨리할 수 있었던 의사였으니 어쩔 수 없지, 신오는 생각했다. 의사는 신오가 자리에 앉자 간단한 인사도 없이 모니터 화면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마우스 커서로 신오는 잘 알아볼 수 없는 흐릿한 음영을 짚었다. 여기예요, 여기. 의사는 약간의 승리감마저 느껴지는 말투로 말했다. 복막의 종양은 전이 암이고, 여기가 원발 암이라고. “이게 숨어 있어서 찾기 어려웠거든요.” 의사는 다시 한번 마우스 커서를 움직였다. 췌장하고 담도 사이인데 위치나 크기가 좋지 않다고. 오늘이 금요일이니 당장 다음 주부터 항암치료로 크기를 줄여 보고 수술을 잡아 보자고. 신오의 핸드폰이 또 진동했다. 신오는 치료를 이주만 미뤄도 되냐고 물었다. 프로젝트가 있어서요. 이주 후에 마감이라. 의사는 처음으로 웃어 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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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 식물원

야생 식물원 하가람 식물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다이아몬드 모양의 철골로 둘러싸인 거대한 유리 온실에는 열대와 지중해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이국적인 식물이 자란다고 했다. 한 달 전 나는 식물원 근처에 있는 여러 호텔을 찾아 은규에게 링크를 보냈다. 보통 때의 그라면 어디든 좋다고 했을 것이다. 레스토랑도, 카페도, 동네의 작은 아이스크림 가게조차도 모조리 내 선택에 맡기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날 은규는 이미 예약한 곳이 있다고 하여 나를 놀라게 했다. 은규가 보내 준 링크를 열어 보았다. 넓은 통유리 창 너머로 식물원과 공원이 내다보이는 스위트룸이었다. 나는 조금 들뜬 채 답장했다. — 우리가 만난 지 곧 1년이래. 믿어져? 1년이라는 시간은 내게 유별났고 은규에게는 별다른 감흥이 없는 것이었다. 그가 전에 사귄 여자친구는 단 두 명인데 각각 4년, 5년을 만났다고 했다. 매번 석 달도 채 넘기지 못하는 나와는 달랐다. 이따금 은규에게 이전 연인들에 대해 물었다. 그들이 어떤 성향의 사람이었고 어떤 외양을 가졌는지 궁금했다. 처음에는 응응, 하며 대꾸해 주던 은규는 내가 그녀들의 음악 취향이나 살던 동네처럼 구체적인 정보까지 캐묻자 태도를 바꾸었다. 기억 안 나. 그는 말했다. 다 옛날이야기라고. 그 후로는 이전에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그녀들을 생각했다. 눈, 손톱, 말투, 그리고 신발. 나와 닮았을지, 닮았다면 얼마나 닮았고 다르다면 무엇이 다를지도. 상상을 이어 가다 보면 늘 한 가지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은규는 한 번도 애인과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까 여자와 밤을 보내는 일이 오늘 그에게는 처음이었다. 서른을 넘긴 남성에게서 보기 드문 경우였지만 그가 처음인 게 좋았다. 그 점이 무엇보다도 나와 그녀들을 구분 지어 주는 것만 같았다. 차창에 머리를 기대었다. 햇볕에 데워진 창문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인터넷으로 보았던 화려한 꽃과 기다란 나무들을 떠올렸다. 노랗고 푸르고 분홍빛이 맴도는 공간을. 여름 휴가철이었고 도로는 차들로 빽빽했다. 졸음 껌을 씹는 은규를 보며 말했다. “오늘은 내가 운전하고 싶었는데.” “다음에. 너 힘들어.” 은규가 말했지만 나는 안다.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그는 내게 차를 맡기지 않을 것이다. “보면 놀랄걸? 너무 잘해서?” 나는 허리를 세운 채 한 손으로 반원을 그려 보았다. 휙휙. 입으로 소리 내며 운전대를 쥔 그를 따라 했다. 그가 웃었다. 머릿속으로 주행하기. 그것은 나만의 놀이였다. 캠퍼스 변두리에 있는 H관 1층, 5평 남짓한 주차관리실에서 상상력을 충족시켜 줄 만한 것은 많지 않았다. 먼지 쌓인 커피믹스와 낡은 소파, 책상 위에 시간별로 놓여 있는 분홍색, 파란색, 노란색 주차권들. 지겨운 서류, 서류, 서류. 드물게 실장이 자리를 지키는 날이 아니면 대체로 혼자 그곳에서 일했다. 사람들이 찾아와 주차권을 사거나 정기 등록을 마친 후 돌아가면 나는 모니터에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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