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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저항적인 돼지가 좋아(제3회_마지막회)

  • 작성일 2014-08-18
  • 조회수 1,292

 

 

굉장히 저항적인 돼지가 좋아(제3회_마지막회)

 

 

 

박금산

 

 


 

 

    녀석은 떠났다. 경찰관을졸졸 따라갔다. 가자는대로가고, 타라는대로타는 녀석한테서 난동부릴 객기가 어디서 나왔는지. 속된말로돌아버려서 국화를어떻게폭행했는지. 경찰차 두 대가 내려다보였다. 녀석을태운차가 떠났다. 경광등이시각적으로 만들어준 안정감 덕에 국화를 고즈넉히바라볼수있게되었다. 저 애를 데리고 어디로 가나. 함께 어디로 가면 좋을까.
    집이전부였다. 집으로가자. 누나한테맡기는게 좋을 거다. 가방을 국화 손에 들려주었다. 나가자고말하려던 순간이었다. 여경이 말했다.
    “일단 저희 차로 가시죠.”
    국화가나를보았다. 내게의지하는가엾은 국화. 살짝 흥분되었다. 내가권능을가진사내가 아닌데. 어쩌겠는가. 여경의 말을 따르자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경이 앞장섰다. 계단을 내려갔다. 경찰차에서 엔진소리가 들려왔다. 조수석에는 나이든 경찰관이 앉아 있었다. 여경이 국화를 향해 말했다.
    “타시죠.”
    내가 말했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여경이 국화에게 물었다.
    “그러라고 할까요?”
    국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국화는 오른쪽으로, 나는 왼쪽으로 차에 올랐다. 택시가 다니는 도로에 닿으면 내려달라고 말할 계획이었다. 여경이 운전대를 잡았다. 차가 출발했다. 경광등과 전조등. 학생들이 나와서 웅성거렸다. 건물관리인, 보안관리요원, 슬리퍼 신은 학생들.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불이 많이 켜져 있었다. 실험으로 밤을 새는 방들이었다. 국화 말대로 자기들이 무슨 실험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채로. 자기가 뭘 만드는지 모르는 채 공장에서 일하는 SF영화의 기계 공원처럼. 자기가 먹는 내장이 소인지 돼지인지 인육인지 모르는 애니메이션 세계의 바이러스인간처럼. 살겠다는의지만남아있는 DNA처럼.
    차가 정문 앞에서 정지했다. 여경을 바라보았다.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국화가 말했다.
    “저, 여기서 내릴게요.”
    여경이 물었다.
    “왜요?”
    국화가 말했다.
    “병원 가지 않아도 돼요.”
    여경이 말했다.
    “병원도 가셔야 하지만, 지구대에 잠깐 가주셔야 되거든요.”
    내가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일단 신고가 접수됐으니까 처리를 해야 되거든요. 지구대에 가셔서 간단하게 사고처리하세요.”
    왜? 여기서 끝나는 것 아닌가? 그렇구나. 신속하게 체념했다. 귀찮지만. 그래야 되는 일이라고 하니까. 국화가 말했다.
    “그냥 끝내고 싶은데요. 휘말리고 싶지 않아요. 저는 그냥 됐어요.”
    “지구대에 가서 물어볼 사항인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맞았어요.”
    “왜요?”
    “몰라요.”
    “아무것도 안 했는데 때려요?”
    “네.”
    “저항해 보았나요?”
    “때리지 말라고 하니까 더 때렸어요. 질소 통을 들고 휘둘렀어요.”
    “질소 통이 학교에 있어요? 위험할 텐데?”
    “실험 재료예요.”
    “무슨 실험, 해요?”
    “몰라요.”
    “모른다고요?”
    “그냥 시키는 걸 하는 거예요.”
    조수석에 앉아 있던 경찰관이 국화에게 물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왜 그랬는지 몰라요?”
    “미친 새끼! 미쳤으니까 그런 거예요.”
    “술 마셨나요?”
    “저요?”
    “아니. 가해자.”
    “몰라요. 정말. 가만히 있었는데.”
    설마그럴리가. 전두엽 후두엽 측두엽에 곰팡이가 낀 것이 아니라면. 뇌에 물이 차서 이끼가 낀 것이 아니라면. 뇌세포가 타버릴정도로 화나게 불을 붙였겠지. 가만히 있는데 이마가 찢어질 정도로 구타를 했겠는가. 질소 통을 휘둘렀겠는가. 계기가 있었겠지. 누가 네 말을 곧이듣겠냐.
    맞기만 했을까. 가스총을 썼겠지. 아니면? 국화의 가방을 바라보았다. 이상하게 멀게 느껴졌다. 가만히뭐하고있었는데? 말해 봐. 컴퓨터라도하고 있었을거아냐. 컴퓨터로뭐했는데? 말해 봐. 가만히있었는데 인간이 어떻게 그러니. 그리고. 인간이어떻게가만히있을수있니? 가만히있는다는게뭔데? 국화의정신상태가궁금했다. 치마속에입은 트레이닝복 바지. 무릎에 손을 얹으며 말을 건넸다.
    “네 옷 아닌 것 같다?”
    “너까지 이러지 마. 아무거나 걸쳐 입은 거야.”

 

    짧은 옷을 입는 게 병이야. 그러니까 남자한테 당하지. 이렇게 짧은 치말입고 가만히앉아있으니까 돌아버린거지. 그자식이 널 만지려고 했겠지?

 

    녀석은 묵비권. 이름도, 학과도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수갑을 풀어 주지 않는가 보았다. 녀석 대신 국화가 이름과 학과를 말했다. 녀석은 생년월일 묻는 말에 대답을하지않았다. 국화가대답했다. 자신의 생년월일을정확히 말해서일까. 녀석이국화를노려보았다. 나는국화를바라보았다. 저자식 생년월일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니? 남자 친구니? 내생년월일을대라고하면 그렇게곧바로말할수있니? 우리와 같은 차를 타고왔던상관이 녀석에게물었다.
    “왜 그랬어? 왜 사람을 때리느냐고? 응?”
    녀석은 묵묵부답. 지퍼를 풀지않았다.
    “실험실에서 실험을 하고 있었다고 들었는데? 학생, 무슨 실험 하고 있었어요?”
    “…….”
    “무슨 실험 하고 있었냐고.”
    “모릅니다!”
    “몰라?”
    “어떻게 무슨 실험 하고 있었는지를 모른다는 거야?”
    “말해 줬는데도 무슨 말인지 모른다고요! 궁금하면 교수한테 직접 묻든가!”
    국화가 나섰다.
    “아저씨, 저, 집에 갈게요.”
    “아닙니다, 안 돼요. 아직 처리할 게 남았어요.”
    “됐다구요! 나, 그냥 집에 가겠다고요!”
    국화가 소리를 질렀다. 녀석이나 국화나 할 줄 아는 건 샤우팅뿐이었다. 비밀공작원들도 아니고. 무슨 독극물 제작 현장에서 잡혀온 치들도 아니고. 뭐 이런가.
    “학생이 그냥 가면 저 학생 처벌을 못 해요. 괜찮아요?”
    “상관없어요.”
    “그래도 피해를 입었잖아. 처벌도 하고 보상도 받아야지.”
    “보상요? 뭘로요?”
    “…….”
    경찰관이 당황하는 사이 국화가 나가버렸다. 본능적으로 국화를 따라나섰다. 그런데 뒷모습이. 짧은 치마 안에 트레이닝복을 입고 긴소매 옷을 입은 그 모습이 애니메이션 영화에 나오는 환상소녀 같았다. 급류에 쓸려가는 고무튜브처럼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이마에 난 상처도 이 세계를 벗어나면 저절로 나을 것처럼. 맨몸이었다. 지구대 안에 있을 가방이 떠올랐다. 돌아갔다.
    교수인지 조교인지 관리인인지. 아무튼. 녀석한테 말발이 먹힐 실험실 상급자가 왔다. 경찰관이 경위를 설명했다. 여학생의 신고를 받고 출동해 보니까 여학생은 화장실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고 남학생이 알루미늄 야구 배트로 유리창을 깼다고 말했다. 놀라웠다. 네 녀석 취미는 야구구나. 포지션은? 경찰관이 말했다.
    “실험하다가 무슨 오해가 벌어진 모양인데요…….”
    “실험요?”
    “네.”
    “…….”
    “학생들이 하는 건 무슨 실험입니까?”
    “발효식품 영양소 관련 미생물 프로테인 실험인데…….”
    상급자가말끝을흐렸다. 비밀이라는건지, 말해 줘도 알수없을거니까 설명하기귀찮다는건지. 결국은. 실험내용이현재의이난동상황과 무슨 상관이있냐고화를내고싶다는 건지. 아무튼. 그랬다. 경찰관도 더 이상 호기심을 드러내지 않았다. 나는국화를통해 들은적이있기 때문에 그러거니 했다. 그런데경찰관은 이해할수없다는 뜻으로. 국화가모른다고한 게 이런거구나. 어렴풋하고 믿기 힘들던 것이 눈앞에서 명백해졌다. 말해준다한들내가알아들을수나있겠는가.
    막연히. 일이 이렇게 끝나려는 것 같다고 느꼈다.
    상급자가 녀석과 조용히 대화했다. 왜 그랬는지를 묻는데 녀석은 계속 죄송합니다, 만, 반복했다. 어머니 아버지가 어제 이혼해서 완전히 갈라섰다. 국화는 근무일이 아닌데 실험실에 와서 얼쩡거렸다. 갑자기. 화가났다. 그래서. 부모님 이혼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국화한테 풀었다는 것인가. 병신. 부모님은 부모님이고 너는 너지. 부모님 이혼에 왜 네가 끼어들어? 상급자는 녀석에게 사과를 권유했다. 국화한테 무릎이라도 꿇고. 없었던 일로 돌리자고 했다. 녀석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처벌받을게요. 그러면 되잖아요.”
    상급자가 말했다.
    “처벌, 너, 기록 남으면 취직도 못 해 인마. 대학 졸업한 게 아무런 의미도 없어지는 거야. 쉽게 말할 성질의 것이 아냐 지금.”
    녀석은 취직이라는 말에서 급속도로 긴장했다.
    아무것도 밝혀진 게 없었다. 왜 때렸는지, 국화의 몸 어디까지 폭행했는지, 가, 궁금했는데. 피해자가 나가버렸으니 가해자는 여유로웠다. 상급자가 경찰관과 대화했다. 학교에서 일어난 일이니까 자기가 알아서 수습하겠다는 태도였다. 그래도. 피해자의 의견을 들어 봐야 한다는 경찰관의, 하지만, 그냥 이렇게 흐지부지 끝내더라도 절차상의 하자는 지구상 어디에도 없다는 식의, 관대한 포즈. 그래서 내가 했던 말.
    “이렇게 끝나는 거예요?”
    경찰관이 말했다.
    “피해자분께 연락 한번 해보시죠.”
    그럴줄알았다. 나는망설였다. 어쩌지. 너같으면이상황에서전화를 받겠냐? 전화를 받을 기분이면 그렇게 뛰쳐나갔겠냐? 하지만. 전화말고는내가이세계에서국화를위해해줄수있는건아무것도그순간에있지않았으므로 당연히 전화를걸었을수밖에. 그런데. 전화벨이 가방에서 울렸다.

 

    녀석을 끝까지 바래다줄 것처럼 친한 척하면서 다독이던 상급자는 자기 차를 타고 휭 가버렸다. 녀석은 터덜터덜 걸었다. 국화의 백팩을 메고 녀석의 뒤를 밟았다.

 

    녀석이 편의점에 들어갔다. 컵라면과 소주를 샀다. 계산을 마친 다음 컵라면에 더운물을 부었다. 녀석은 파라솔 의자에 앉았다. 컵라면에 소주를 마시는 동안 나는 하늘을 보며 이국에서 보낸 3년을 추억했다. 숀 선생님과 사냥 갔던 어떤 날 폭포 옆 오두막에서 잤다. 아침에 일어나 멧돼지가 뱀을 잡아먹은 동굴을 보러 갔다. 숀이 랜턴 빛을 쏘았다. 뱀이 우글거렸다. 환영이었다. 동굴 벽의 물기였다. 랜턴 빛이 비늘처럼 반사된 것이었다. 돼지는 뭐든 먹는다. 뱀의 어금니는 돼지의 피부를 뚫지 못한다. 피부를 뚫어야 혈액 속으로 들어간다. 독. <어린 왕자>의 보아구렁이. 그렇다면 돼지를 통째로 삼키는 뱀이 어디 있을 것이다. 거대한 뱀 속에는 동굴이 있을 것이다. 벽에 물기가 흐르는. 다량의 산소가 들어 있어서 탐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동굴을 삼킨 뱀에게 들어간 돼지는 뱀이 뱉어 줄 때까지. 그렇게 사는 것이다. 돼지 집이었다. 숀은 라이플을 꺼내들고 돼지를 쏘려고 했다. 그러는 거 아니에요. 숀. 스탑, 플리즈. 돼지와 눈이 마주쳤다. 전생에 내 형제라도 됐을까. 믿기지 않았다. 그것이 지난날의 신화인 것 같아서. 총을 장전하긴 했지만. 우리는 뒷걸음질로 나왔다. “다 먹어버렸나 봐. 뱀.” 숀이 말했다.
    숀이 생각나서 뱀을 샀다. 인터넷에는 없는 게 없으니까. 배달이 되지 않아 직접 방문했다. 미끼용 갯지렁이 개념이었다. 뱀 농장 주인은 제설용 플라스틱 삽으로 뱀을 떴다. 사료를 먹고 살이 찐 녀석들이었다. 어떤 녀석들은 미끄러져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얌전한 녀석들은 주인이 의도한 대로 그물망 안으로 떨어졌다. 주인은 그물망을 스티로폼 박스에 넣었다.
    돈사를 검색했다. 뱀을 트렁크에 싣고 달렸다. 목적지에 도착해 간다는 내비게이션 안내가 나왔다. 문을 열자 훅. 분뇨 냄새. 돼지는 철골 박스에 갇혀 있었다. 독방 개념. 몸을 틀어 뒤로 돌기에 부족한 공간. 돼지가 싫어졌다. 인터넷 지도에 나와 있지 않은 돈사를 찾아갔다. 지붕을 보면 그곳이 주택인지 축사인지 구분되었다. 내가왜이러는가. 뭐하는짓이지? 그냥……. 해보는거지뭐. 소형 돈사를 발견했다. 애들을 키워 파는 곳인가 보았다. 천장 불빛이 환했다. 초등학생쯤? 중학생쯤? 미성년 돼지들. 명랑했다. 바닥이 깨끗했다. 트렁크를 열고 스티로폼 박스를 꺼냈다. 뚜껑을 열었다. 양파망같은그물주머니에 미끼들이설켜있었다. 망을 묶은 매듭을 풀었다. 뱀들은 미끌거렸다. 스티로폼을 박스째로 던져 넣었다. 우스웠다. 두 팔로 던지려고 하니까 농구 슛 동작이 나왔던 것이다. 뱀들이 돈사 바닥을 기어 다녔다. 처음 떨어졌던 지점을 원심으로 삼고 바깥 방향을 향해 제각각 기었다. 세 개의 발가락. 신발보다 강한 발톱. 돼지들이 탭댄스 추듯이 콘크리트 바닥에서 스텝을 밟았다. 처음에는 뱀을 피해 움직였다. 움직이는 먹잇감에 익숙지 않았다. 한 녀석이 코로 툭 툭 드리블을 쳤다. 뱀이 저항했다. 돼지가 뱀을 밟았다. 뱀은 빠져나갔다. 돼지는 뱀을 물고 허공에서 주둥이를 휘저었다. 정말이구나. 돼지. 전율이 일었다.

 

    녀석이 비척거리며 학교 방향으로 걸었다. 뒤를 밟았다. 걸음에서 알코올 기운이 느껴졌다. 정문이 나타났다. 녀석이 들어갔다. 노래를 흥얼거렸다. 알코올 영향으로 발음이 꼬였다. 뒤통수를 가격하고 싶었다. 참았다. CCTV 카메라에서 붉은 등이 점멸했다. 녀석이 볼륨을 높였다.
    광활한 운동장이 나타났다. 녀석이 고함을 질렀다. 야! 야! 나와! 나오라고! 엄마! 아빠! 씨발! 야밤의 학교란 곳은 참 조용했다. 죽여버릴까. 병신같은놈. 녀석은 운동장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엄마! 아빠! 씨발!
    조용히 불러 보았다.
    “야!”
    녀석이 뒤로 돌아보았다. 제법 대범했다.
    “넌 뭐야?”
    뭐긴. 나? 뭐라말할까. 나. 나. 나. 국화 가방에서 가스총을 꺼냈다. 동물 모형이었다. 클래식 재규어의 보닛 엠블럼처럼 날렵했다. 운전석에 앉아 바라본 적은 없고 남의 차를 보면서 쓰다듬어 주고 싶었던. 빛나는 금속. 정지된 점프. 방아쇠 버튼에 검지를 올렸다. 쏠까 말까. 다가가서 뺨을 쳤다. 녀석이 노려보며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욕을 뱉었다. 저돌적이었다. 갑자기. 흥이 났다. 가스총을 내던지고 한판 제대로 붙어 보기로 했다.
    녀석은 불안정했다. 녀석을 노려보며 잽 스텝을 밟았다. 단 한 대도 맞고 싶지 않았다. 농구의 페이크 기술이 주먹싸움에도 통한다는 것을 실감했다. 주로 얼굴을 가격했다. 오랜만에 기분이 상쾌했다. 생각이 찾아왔다. 녀석의 싸움 실력이 어지간했으면때리는데에만집중했을 것이다. 너무허술했다. 주먹을날리는순간에도. 주먹이 눈두덩에 가 닿는 순간에도. 생각이 찾아왔다. 가령. 몇 대를 더 때리고 그만둘까. 같은. 밤이 깊어 공기도 좋았다. 녀석이 말했다.
    “나한테 왜 이래요?”
    나는 시니컬하게.
    “왜 존댓말이야?”
    “죄송해요.”
    “비굴하게 존댓말하고 그러지 마. 왜 국화한테 그런 거야?”
    “…….”
    또 묵비권.
    “말해. 왜 그랬는지.”
    녀석이 침을 뱉었다.
    “말하라니까!”
    “학교 후졌다고 말하고 다니잖아.”
    “…….”
    “외국에서 실컷 놀다 온 것이. 그래 놓고, 남들은 죽어라 공부해서 들어왔는데, 고마운 줄을 알아야지. 학교를 씹고 다니잖아.”
    “외국에서 학교 나온 게 그리 배 아파?”
    “너도 우리 학교지? 학교 후져서 못 다니겠다고 말하고 다니는 싸가지 손 좀 봐줬는데, 그게 어때서? 가족도 아니라면서. 남친이야? 정신 차려. 걔 편입 가면 너도 끝장이야. 너도 내가 취직 못 하고 있으니까, 영원히 못 할 것 같냐?”
    이상황에서 왜갑자기취직. 할말이없다. 더운 나라에 있을 때도. 서울에 와서도. 국화는 늘 망고색 매니큐어를 발랐다. 지금 있는 데는 내 자리가 아니야. 말했다. 대학에 들어가면 찐하게 연애하자. 외국에서 세웠던 룰이었다. 하지만. 돌아오니 대학교에 들어가는 게 가장 급했다. 일의 우선순위라는 게 있었다. 좋은 대학에 가려고 버둥거렸다. 국화는 취직 잘 되는 학과를 공략하더니 공격력이 바닥났다. 나는 아무데나 상관없었다. 그런데. 원하는 대학이 걸렸다. 현지 고등학교에서 보냈던 3년의 노고에 대한 국가 차원의 보상이라고 할까. 큭. 국화는 나를 부러워했다.
    “꺼져.”
    녀석에게 말했다.
    녀석이 기숙사 쪽으로 걸어갔다. 가스총을 집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바닥에 돌멩이가 보였다. 녀석이 그것을 집어 들고 반항했으면 다리가 후들거렸을 텐데. 가스총을 넣고 가방을 어깨에 걸었다.
    녀석이 걸어갔던 쪽에서 자동차 보안 경보음이 울렸다. 맹렬한 기세였다. 녀석이었을까? 그랬겠지? 스트리트 파이터처럼 맨손으로 차를 공격했다. 차가 깨지지 않았다. 녀석은 점프해서 발차기를 날렸다. 넘어졌다. 반복. 또 반복. 차고 넘어지고, 차고 넘어지고. 정신의 순열이 질서를 분실했다. 미친 사람처럼 저돌적이었다. 차 옆면에서 넘어지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차가 녀석을 흡입했다가 뱉어내는 것처럼 보였다. 헉. 대단한 반전. 차가 박살나기 시작했다. 녀석이 길에 깔린 블록을 뜯어서 들고 보닛 위로 올라가 앞 유리를 가격했다. 씩씩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누군가 신고를 했을 것이다. 정문 쪽 도로에서 학교 안으로 들어오는 경찰차 불빛이 보였다.

 

    학교 운동장에 농구 코트가 있었다. 하얀 라인이 희미하게 빛났다. 코트로 들어섰다. 센터서클에 앉았다. 국화 가방을 열었다. 물건을 쏟았다. 편입시험 교재. 가스총. 호르몬 안정제. 전화기. 화장품 파우치.
    누군가 흘리고 간 볼이 있지 않은지 주위를 살폈다. 돌멩이 같은 것도 없이. 코트는 말끔했다. 볼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지. 편입시험 교재를 가드 자리에 놓았다. 생리불순 치료용 호르몬 안정제를 골밑에 놓았다. 물건들을 바닥에 놓고 그 자리에 버티고 서 있을 수비수를 상상했다. 복싱 선수처럼. 섀도바스켓볼을 구사했다. 농구 코치 케빈이 잘한다고 박수쳐 주었다. 담임선생님 숀, 동아리 주장, 등등의 얼굴이 스쳐갔다. 칡뿌리를 먹기 위해 코로 땅을 후비는 멧돼지처럼. 골밑을 파고들었다. 땀이 흘렀다. 윗도리를 벗어 땀을 닦았다. 계속 농구에 매진했다. 떠올렸다. 3년이라는 시간. 국화를 끼고 버텼던 후반부 2년. 대화의 중심에 있었던 아버지 이야기. 아버지한테 맞고 살았던 엄마 이야기. 대학에 들어가 독립할 수 있게 되면 이혼할 거라는 엄마의 다짐. 숀을 통해 샀던 산탄총을 쓰다듬으면서 나중에 빌려달라고 하면 꼭 빌려달라던, 무심하게, 말하던 국화. EXODUS. 여기서 나가는 거야. 전화기 대기화면에 입력해 놓은 그 애의 주술이었다.
    농구 동작을 멈추었다. 독특한 착상이 몸을 정지시켰다. 국화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이 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기발했다.

 

    8초 룰 : 자기 코트에서 공을 8초 이상 가지고 있으면 규칙 위반이다. 볼을 잡으면 8초가 흐르기 전에 하프라인을 넘어야 한다. 위반 시 상대에게 공격권을 넘겨야 한다.
    24초 룰 : 공을 컨트롤한 순간부터 24초 안에 슛을 해야 한다. 위반 시 상대에게 공격권을 넘겨야 한다.
    백코트 바이얼레이션 : 하프라인을 넘어 프런트 코트로 들어간 뒤에 다시 공을 백코트로 넘기면 규칙 위반이다. 후퇴 금지. 위반 시 상대에게 공격권을 넘겨야 한다.

 

    나는 위에서 말한 세 룰에 의해 국화와 결별했다. 걔가 전화기를 찾으려고 조금이라도 일찍 연락을 했거나 집으로 찾아왔더라면 안그랬을수도 있었을것이다. 지나간일이니까그렇게말할수있다. 그러나. 실제로. 국화를 많이 기다렸다. 그런데. 실제로. 국화는어제의그실험실엘오늘또나가고있었다. 내게는연락하지않고. 농구 코트에서 떠올렸던 착상을 실행에 옮겼다. 학교 우두머리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제보해 줘서 감사하다는 답신이 왔다. 8초가 지나기 전이었다. 하프라인을 넘은 뒤에는 백코트를 바라보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누나가 말했다.
    “가방 좀 보내달래.”
    내가 말했다.
    “국화가?”
    누나가 대답했다.
    “택배로 부쳐. 간단하잖아.”
    역시. 누나다운 발상이었고 간단히 처리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택배는 누나 아이디어가 아니었다. 누나는 실험실 주소를 찍어 보낸 국화의 문자 메시지를 내게 전달해 주었다. ‘언니 현승이한테가방좀 보내달라고말해줘 이주소로.’ 아직 실험실에 나가는구나. 괜히 곱씹게 되는 문장이었다. 택배 박스를 포장했다. 가방을 넣어 보내려니 허전했다. 전화기 액정을 깨버리고 넣을까. 사냥총을 넣어 줄까. 탄환이 있었으면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자살이든 살인이든 사냥이든 시원하게 한번 쏴보라고. 하지만. 빈 총을 보내서 뭐 하나. 포장을 멈추었다. 농구 코트로 나갔다. 슛을 던졌다. 링을 맞고 튕겨 나온 볼을 캐치하다가 떠올렸다. 동굴 속의 돼지를.

 

    문방구에서 돼지저금통을 샀다. 택배 포장이 완성되었다. 왠지. 계몽적이면서 신선한 느낌이었다.

 

    시간이 좀 걸렸다. 난동이 1학기였는데 2학기가 시작될 때에야 국화네 일이 마무리되었다. 생각보다 파장이 컸다. 국화만 살짝 혼내 주려고 했던 것인데. 기대 이상이었다. 아! 그리고! 나도! 아버지는 법원의 연락을 받고 들어왔다. 공문서위조죄로 벌금형을 받았고 누나는 가출했고 어머니는 우울증 일보 직전. 아버지는 어떤 잡녀르 색희가 꼰지른 거냐고 핏대 세워 말했다. 잠수해 버린 학원 관계자 중에 범인이 있을 거라고. 전과자가 됐으니 공항 출입에 지장을 받게 될 것이란다. 기억난다. 국화한테서 전화가 왔다.
    “현승아.”
    “왜?”
    “…….”
    “말해라 국화야.”
    한참을 침묵. 전화 끊었느냐고 물어보려는 순간. 또박또박. 귀에 한 글자 한 글자 발음되어 들어오던 목소리.
    “누가 그랬을까?”
    “중요한 게 그것뿐이구나?”
    “중요한 것?”
    “중요한 것.”
    “궁금해. 아는 사람이 그랬을 건데.”
    아버지나 누나나 어머니나 국화나. 누가 누설했을까가 관건. 침묵은 칼집 속의 칼이었다. 반응을 보이지 않자 국화가 전화를 끊었다. 통화 종료음이 뚜 뚜 뚜 울렸다. 그랬거나 말았거나, 다. 종료음 리듬에 맞춰 몸이 가벼워졌다. 그것은 나.

 

 

 

 

   《문장웹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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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집에 사는 소녀

빨간 집에 사는 소녀1) 김숨 1 내 방엔 거울이 있어. 빛— 빨간색. 세상의 모든 빛— “지금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2 지금, 지금, 그리고 지금, “난 다른 곳에 있고 싶어.” 3 딱딱하게, 딱딱하게, “내 사랑을 받아 주세요.” 다른 곳에선 똑같은 노래가 다르게 흘러, 다르게 슬프게, 다르게 쓸쓸하게, 다르게 외롭게. 다른 곳의 다른 나. 난 나를, 난 나를, 딱딱하게, 딱딱하게, 빨갛게, “난 설레고 싶어.” 4 다섯 살 때 처음 빛을 봤어. 네 곁에, 내 곁에, 빛은 환한 어떤 것. 아, 난 날······. 다섯 살 때 처음 빨간색을 봤어. 엄마가 빨간색을 가져다 내 얼굴에서 45도 사선 밑에 놓았어. 빨간색을 나는 외우고 외웠어. 내가 빨간색을 외우자 엄마가 빨간색을 치우고 노란색을 놓았어. 나는 노란색을 외우고 외웠어. 그리고 파란색, 흰색, 검은색. 세상은 다섯 가지 색깔로 만들어졌어. 세상은 다섯 가지 색깔로 만족해. 다섯 색깔 무지개, 다섯 색깔 도마뱀. 분홍색은 꽃에게. 초록색은 달에게. 내 얼굴에서 45도 사선 밑에 놓여 있는 빨간색만 나는 볼 수 있어. 내 방 거울은 흐르지 않아······. 5 딱딱한 벽에 딱딱하게 거울이 걸려 있어. 거울이 날 봐. 거울은 날 봐. 거울은 엄마 몰래 울고 있는 날 봐. 난 날 안 봐. 음, 흐른다는 건······. 생각하고 싶지 않아. 내가 생각하고 싶은 건 오직 하나. 6 빨간색 크레파스를 선물 받고 난 흥분해 소리 질렀어. “엄마, 난 화가가 될 거야!” 빨간색 크레파스가 흰 도화지 위를 신나게 날아다녔어. (그녀의 엄마) 뭘 그리는 거야? (그녀) 집! 빨갛게, 빨갛게, (그녀의 엄마) 뭘 그린 거야? (그녀) 집! 엄마, 난 집을 그렸어! (그녀의 엄마) 네가 그린 집을 만져 보렴. 엄마가 내 손을 내가 그린 집으로 데려갔어. (그녀의 엄마) 집에 창문이 없네. (그녀의 엄마) 집에 문이 없네. (그녀의 엄마) 집에 지붕이 없네. 난 창문을 본 적 없어, 난 문을 본 적 없어, 난 지붕을 본 적 없어. (그녀의 엄마) 집에 나무도 없네. 7 집에 나무가 있어야 해? 세상에 나무가 있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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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경

원경 성혜령 건강검진을 12월 마지막 주까지 미루는 사람이 자기 말고도 이렇게 많으리라고 신오는 생각하지 못했다. 대기실의 긴 좌석 중간중간 빈자리가 있긴 했지만, 신오는 한구석에 서 있기로 했다. 초음파 검사실 앞 복도는 자기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며 서성이고 있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헐렁한 가운에 느슨한 고무줄 바지를 입고 핸드폰을 보며 기다림을 견디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신오는 이들 중 내년에는 따뜻한 휴양지에서 연말을 보낼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지 궁금했다. 혹은, 오늘 치명적인 암이나 뇌동맥류 같은 것들을 발견하고 전혀 예상치 못한 인생을 살게 될 사람들은? 그런 일들은 언제나 일어나고 있었다. 직장 생활을 10년 정도 하니 주위에 아픈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전 직장 동료는 출근길에 쓰러진 뒤 안면마비를 얻었다. 한쪽 입꼬리가 위로 당겨 올라갔는데 그는 멀쩡한 다른 쪽 입꼬리도 끌어올려 웃는 얼굴을 만들곤 했다. 병가에서 돌아온 뒤 매일 웃는 얼굴로 제일 먼저 출근하는 동료를 보면서 신오는 이직을 결심했다. 신오는 모든 일이 가능하지만 대개 나쁜 일들이 더 자주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되도록 좋은 음식을 먹고 운동을 꾸준히 하려고 했다. 불행은 대비하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게 오히려 쉽게 다가오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도 있었다. 복부 초음파를 보던 의사가 “어랏?” 하고 실없는 소리를 내며 배꼽 부근을 세게 눌렀을 때도 신오는 방귀가 나올 것 같다는 생각뿐이었다. 의사가 차가운 젤을 다시 묻히고 초음파 단말기를 문지르다가 복막에 종양이 보인다는 말을 했을 때는, 그래서 요새 변비가 심했나, 라는 생각이 먼저 났다. 대형 병원에 가서 생검과 CT, MRI 검사를 마치고 소화기내과 교수의 진료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도 신오는 회사 메신저를 보고 있었다. 몇십 억 단위 공공사업의 수주가 걸린 입찰 제안서의 마무리를 앞둔 시점이었다. 병원 검사로 연차를 낸다고 했을 때 팀원들은 모두 별일 없을 거라고, 하루 푹 쉬고 오라고 말했지만 메시지를 보내면서 신오를 계속 태그했다. 신오는 그날 마지막으로 진료실에 들어갔다. 의사는 젊고 피곤해 보였다. 예약을 가장 빨리할 수 있었던 의사였으니 어쩔 수 없지, 신오는 생각했다. 의사는 신오가 자리에 앉자 간단한 인사도 없이 모니터 화면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마우스 커서로 신오는 잘 알아볼 수 없는 흐릿한 음영을 짚었다. 여기예요, 여기. 의사는 약간의 승리감마저 느껴지는 말투로 말했다. 복막의 종양은 전이 암이고, 여기가 원발 암이라고. “이게 숨어 있어서 찾기 어려웠거든요.” 의사는 다시 한번 마우스 커서를 움직였다. 췌장하고 담도 사이인데 위치나 크기가 좋지 않다고. 오늘이 금요일이니 당장 다음 주부터 항암치료로 크기를 줄여 보고 수술을 잡아 보자고. 신오의 핸드폰이 또 진동했다. 신오는 치료를 이주만 미뤄도 되냐고 물었다. 프로젝트가 있어서요. 이주 후에 마감이라. 의사는 처음으로 웃어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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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 식물원

야생 식물원 하가람 식물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다이아몬드 모양의 철골로 둘러싸인 거대한 유리 온실에는 열대와 지중해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이국적인 식물이 자란다고 했다. 한 달 전 나는 식물원 근처에 있는 여러 호텔을 찾아 은규에게 링크를 보냈다. 보통 때의 그라면 어디든 좋다고 했을 것이다. 레스토랑도, 카페도, 동네의 작은 아이스크림 가게조차도 모조리 내 선택에 맡기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날 은규는 이미 예약한 곳이 있다고 하여 나를 놀라게 했다. 은규가 보내 준 링크를 열어 보았다. 넓은 통유리 창 너머로 식물원과 공원이 내다보이는 스위트룸이었다. 나는 조금 들뜬 채 답장했다. — 우리가 만난 지 곧 1년이래. 믿어져? 1년이라는 시간은 내게 유별났고 은규에게는 별다른 감흥이 없는 것이었다. 그가 전에 사귄 여자친구는 단 두 명인데 각각 4년, 5년을 만났다고 했다. 매번 석 달도 채 넘기지 못하는 나와는 달랐다. 이따금 은규에게 이전 연인들에 대해 물었다. 그들이 어떤 성향의 사람이었고 어떤 외양을 가졌는지 궁금했다. 처음에는 응응, 하며 대꾸해 주던 은규는 내가 그녀들의 음악 취향이나 살던 동네처럼 구체적인 정보까지 캐묻자 태도를 바꾸었다. 기억 안 나. 그는 말했다. 다 옛날이야기라고. 그 후로는 이전에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그녀들을 생각했다. 눈, 손톱, 말투, 그리고 신발. 나와 닮았을지, 닮았다면 얼마나 닮았고 다르다면 무엇이 다를지도. 상상을 이어 가다 보면 늘 한 가지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은규는 한 번도 애인과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까 여자와 밤을 보내는 일이 오늘 그에게는 처음이었다. 서른을 넘긴 남성에게서 보기 드문 경우였지만 그가 처음인 게 좋았다. 그 점이 무엇보다도 나와 그녀들을 구분 지어 주는 것만 같았다. 차창에 머리를 기대었다. 햇볕에 데워진 창문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인터넷으로 보았던 화려한 꽃과 기다란 나무들을 떠올렸다. 노랗고 푸르고 분홍빛이 맴도는 공간을. 여름 휴가철이었고 도로는 차들로 빽빽했다. 졸음 껌을 씹는 은규를 보며 말했다. “오늘은 내가 운전하고 싶었는데.” “다음에. 너 힘들어.” 은규가 말했지만 나는 안다.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그는 내게 차를 맡기지 않을 것이다. “보면 놀랄걸? 너무 잘해서?” 나는 허리를 세운 채 한 손으로 반원을 그려 보았다. 휙휙. 입으로 소리 내며 운전대를 쥔 그를 따라 했다. 그가 웃었다. 머릿속으로 주행하기. 그것은 나만의 놀이였다. 캠퍼스 변두리에 있는 H관 1층, 5평 남짓한 주차관리실에서 상상력을 충족시켜 줄 만한 것은 많지 않았다. 먼지 쌓인 커피믹스와 낡은 소파, 책상 위에 시간별로 놓여 있는 분홍색, 파란색, 노란색 주차권들. 지겨운 서류, 서류, 서류. 드물게 실장이 자리를 지키는 날이 아니면 대체로 혼자 그곳에서 일했다. 사람들이 찾아와 주차권을 사거나 정기 등록을 마친 후 돌아가면 나는 모니터에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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