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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들

  • 작성일 2015-09-01
  • 조회수 3,791



예언자들




천희란



삽화_예언자들



남자는 창문을 연다. 육중한 회색의 콘크리트 벽이 그를 맞이한다.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자 이내 차갑고 거친 벽에 정수리가 닿는다. 매서운 추위에 일순간 얼굴이 얼어붙고, 매캐한 석면 먼지가 콧속을 후비고 들어온다. 그는 어깨와 머리를 틀어 건물과 건물 사이의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한 줄기 빛을 응시한다. 창밖의 기온은 빛의 빙점에 도달한 듯하다. 날카롭게 벼려진 빛이 애초에 하나인 것처럼 보이는 거대한 회색의 평면을 직선으로 쪼개고 있다. 벽과 벽 사이의 풍경은 매일의 날씨와 일조량, 그리고 창문을 여는 때에 따라 시시각각 바뀌었는데, 이따금 햇빛이 건물 모서리의 윤곽을 서서히 빨아들이는 순간을 목격할 수 있었다. 남자는 세계의 모든 구획과 경계가 빛 속에 융해되어 하나의 온전한 덩어리가 될 때, 그 부드럽고 거대한 덩어리에 자신의 신체가 삼켜지는 기분을 상상하며 눈을 감는다.
방 안에는 문이 있고, 문을 열면 계단이 있고, 계단을 오르면 찬란한 아침의 풍경 속으로 진입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매일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그는 그것을 좋아한다. 어쩌면 그가 좋아하는 것은 빛이 세계의 한 귀퉁이를 삼켰다가 뱉어내는 마술 같은 순간이 아니라, 그가 원할 때면 언제든 창을 열고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 수 있는 현실 그 자체다. 그것이 한때 그가 상상할 수 있는 최대한의 자유였으므로, 그는 이제 아무런 구속도 없이 주어진 드넓은 영토에서도 더는 새로운 자유의 감각을 획득하지 못한다.
한참 만에 창문 안으로 머리를 들여놓은 남자가 좁은 방을 휘 둘러본다. 두 다리를 뻗고 누울 수 없는 매트리스와 전원을 연결하지 않은 소형 냉장고, 칠이 벗겨진 책상과 여기저기 쌓여 있는 더러운 옷 더미만으로도 방은 발 딛을 틈 없이 좁아 보인다. 가로 1.2미터, 높이 80센티미터의 창문을 제외하면 방 안의 어떤 것도 그를 머뭇거리게 만들지 않는다. 이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면 이 건물로 되돌아올 일은 없다. 그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도, 몸을 누일 몇 평의 공간과 아침을 확인할 수 있는 작은 창문 따위는 필요하지 않게 될 것이다. 아마도, 모두에게 오래도록 알려져 온 것과 같이 내일이 그날이라면, 설령 그러하지 않다고 한들,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으리라고 남자는 다짐한다.
미리 정해 둔 두꺼운 점퍼를 챙겨 입고 문을 연다. 문은 주먹 하나가 들어갈 정도로 열리다가 하단의 모서리가 바닥을 긁으며 더 이상 열리지 않는다. 문이 기울어진 것은 낡고 빈약한 경첩 때문이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무겁고 뻑뻑해지는 문을 여닫으며, 남자는 사각형의 출입구가 서서히 이지러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한쪽 어깨에 체중을 실어 강제로 문을 열어젖힌다. 차가운 기운이 아직 덥혀지지 않은 점퍼 속으로 파고든다. 냉기가 방 안으로 침입하는 것을 더는 괘념치 않는다. 얕은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다. 그가 창을 통해 본 것보다 훨씬 밝은 세계로, 그가 절대로 가늠할 수 없는 크기의 세계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알레그로 모데라토. 여자의 걸음걸이는 마치 춤의 스텝을 밟는 것처럼 보인다. 크레셴도 포코 아 포코. 조금씩 점점 세게. 그녀는 악상기호들을 떠올리며 낮게 허밍 한다. 입술 밖으로 흘러나오는 멜로디가 중단될 때마다 멀리서 지저귀는 새소리와 정원의 낙엽들이 썩어 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코트 속에 있어서 아직 따뜻한 두 손을 꺼내 빨갛게 언 귀를 감싼다. 잘 닦인 길을 따라 지은 형형색색의 전원주택들이 회백색의 새벽 공기 속에 생기를 잃고 잠들어 있다. 추위를 견디지 못하는 양손이 주머니 속으로 되돌아간다. 빈 가지 위에서 새가 날아오른다. 겨울이 되어도 숲을 떠나지 않는 새들을 생각한다. 귓속이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아프다. 걸음이 빨라진다. 그녀의 발이 어느새 유일하게 불을 밝힌 이층집 현관 앞에 멈춰 선다.
여자의 거실은 황량하다. 중앙에는 커다란 소파와 테이블이 놓여 있고 한쪽 벽에는 구형 오디오 하나가, 다른 쪽에는 벽을 따라 비슷한 크기의 종이 상자들이 즐비하다. 쌓여 있는 것은 뜯지 않은 것들이고, 몇 개의 상자는 아무렇게나 풀어헤쳐져 있다. 집 안의 훈기 때문에 다시금 졸음이 쏟아진다. 초조하게 거실 이쪽저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여자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바이올린을 들어 어깨와 턱 사이에 고정시킨다. 그녀는 여전히 능숙하게 턱으로 악기를 지지하고, 손을 대지 않고도 오래도록 그것을 떨어뜨리지 않을 수 있다. 지판을 누르지 않은 채 현 위로 가볍게 활을 밀어 올리자 밋밋하고 불안정한 화음이 뺨과 어깨를 타고 진동한다. 가장 가느다란 네 번째 현이 끊어져 있다.
사라진 E음계를 상상한다. 그것이 그녀에게 연약하고 구슬프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E음계가 사라지기 전에 그녀가 단 한 번이라도 독립적인 E음계의 인상을 이토록 구체적인 언어로 떠올린 적이 있었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지금 그것은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며, 그곳에서만 더 깊고 애잔하게 울려 퍼진다.
여자가 악기를 내려 두고 오디오 위에 놓여 있는 달력 앞으로 다가간다. 달력 귀퉁이에 몇 개의 숫자가 적혀 있다. 오디오 옆의 수화기를 들어 귓가로 가져간다. 그녀는 상대방이 전화를 받지 않으리라는 것을 예감하면서도 또다시 전화를 건다. 지난밤부터 몇 번이고 반복해 전화를 건 탓에 전화번호는 이미 머릿속에 분절 없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기억을 불신하고, 모든 숫자를 한 자리씩 거듭 확인한다. 통화연결음이 길게 이어진다. 곧 단속적인 경고음과 같은 신호가 들려올 것이다. 이제 그 소리는 그녀가 수화기에서 귀를 떼고 있을 때도 들려오고, 그 환청이 그녀를 또다시 전화기 앞으로 불러 세운다. 그나마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초조함을 견디게 한다. 바이올린의 끊어진 네 번째 현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쉼 없이 응답하지 않는 곳을 향해 전화를 건다. 어차피 언젠가 이 기다림에도 끝이 올 것이므로, 차라리 그녀의 행동은 끝을 기다리는 의식에 가까워진다.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는다. 그러면 여자는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그리고 다시, 여자가 수화기를 집어 든다.


그때, 자전거의 페달을 밟는 사내가 있다.


종말은 불시에 찾아오지 않았다. 종말의 날짜가 모두에게 공표되었을 때, 사람들은 종말이 도래하리라는 사실이 아니라, 그것이 예상보다 너무 멀리 있다는 데 당혹감을 느꼈다. 새로운 인생을 꿈꿀 수 있을 만큼 멀지는 않았으나, 다급하게 삶을 정리해야 할 만큼 가깝지도 않았다. 작별의 인사를 전할 사람들의 목록 대신에 남아 있는 계절의 숫자를 헤아렸다. 초읽기가 시작되자 온갖 종교가 앞 다투어 포교에 나섰고 수많은 천국이 상품처럼 진열되었다. 거리에 폭동이 일어날 때면 종말보다 지옥이 앞서는 듯했다. 최후의 존엄을 외치는 운동가들이 있는가 하면, 이 종말이 실패하리라 예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과학자들의 예측과 무속인들의 전언은 혼동되었다. 그러나 그중 무엇 하나도 종말을 실감케 하지는 못했다. 종말의 징후들이 포착되고, 종말의 날이 거듭 확정되는 일 또한 마찬가지였다. 종말은 너무 멀리 있었다. 사람들은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절망이나 희망이 아니라, 기다림에 익숙해지는 일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여자는 음악을 구원이라 여겼다. 여자에게 연주는 인류의 역사를 기리는 행위였고, 동시에 안식과 평화에 다다르는 길이었다. 종말은 좀처럼 획득되지 않는 명성, 확장되지 않는 레퍼토리, 만족스럽지 않은 연주에 대한 콤플렉스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었다. 모든 것이 불가능해지자, 모든 것이 가능했다. 그녀는 자신의 욕망 없는 헌신을 순교자적인 것으로 여겼고, 음악은 예정된 끝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리라 믿었다. 서서히 종말을 향해 기울어져 가는 무대 위에 서 있을 때면 침몰하는 거대한 증기선의 갑판 위에 선 기분이었다. 내가 이곳에서 침몰하리라.
그것은 연약하고 순진한 사명감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믿음이 처참히 가라앉았을 때 종말은 여전히 너무 멀리 있었다. 어설픈 지하단체로부터, 술집의 주정뱅이들로부터, 공원의 부랑자들로부터 간헐적인 폭동이 예고 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폭동이 한 차례 거리를 휩쓸고 지나간 오후, 공연장의 객석은 대부분 비어 있었다. 무대에 오르자마자 객석에 점점이 박혀 있는 관객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모두 식별할 수 있을 만큼 적었다. 그녀는 무대 위에서 내려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모욕감과 무기력이 동시에 찾아왔다. 완벽하게 정렬해 있는 똑같은 크기의 의자들과 의자의 등받이 뒤로 솟아오르는 그림자들과 무표정하게 연주를 기다리는 소수의 관객들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마치 정교하게 설계된 무대 위에서 각각의 역할을 가지고 연기를 하는 광대들처럼 보였다. 그녀는 끝내 한 사람의 유일한 관객인 것처럼 무대 한 중간에 어리둥절하게 서 있었다. 피아니스트의 기침소리가 그녀를 무대 위로 되돌려 놓을 때까지, 관객 중 하나가 기침을 시작했고, 기침은 멀리 떨어져 앉은 관객들 사이로 전염되며 연주되었다. 여전히 무표정하게 연주를 기다리는 관객 중 누구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슈베르트의 화려한 론도는 엉망이었다. 바이올린의 선율이 무겁고 진중하게 시작되는 피아노 반주 위를 미끄러지듯 타고 오르는 순간은 잠깐이었다.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었다. 가볍게 쥔 활이 자꾸만 손에서 벗어났다. 여자는 활을 고쳐 쥐며 허리를 뒤로 젖히고 바이올린의 넥을 평소보다 높게 쳐들었다. 알레그로의 두 번째 악장이 시작되자 피아노는 바이올린의 제멋대로 바뀌는 템포를 따라가기에 바빴다. 비어 있는 객석은 낯선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서서히 누적되어 온 공포와 허무가 불시에 한계를 넘어서는 순간은 찾아왔다. 그녀는 자신이 떨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 했고, 그럴수록 연주는 점점 더 빨라졌으며, 그러면 그럴수록 그녀의 불안이 관객들에게 전해졌다.
한 곡의 피아노 소나타와 한 곡의 바이올린 소나타가 어떻게 연주되었는지 여자는 기억하지 못한다. 연주는 오로지 평생 훈련을 거듭해 온 몸의 감각으로만 겨우 유지될 수 있었다. 부정확한 테크닉과 신경질적인 악기의 음색이 비어 있는 극장 곳곳에 울려 퍼졌다. 기묘하게도 관객들은 끝까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지 않았다. 연주에 대한 심드렁함을 표시하기 위해 의자에 몸을 깊게 파묻을 때마다 낡은 의자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을 뿐이다. 관객들은 이 엉망진창이고 괴기스러운 연주에 대해서도 의례로 앙코르 박수를 쳤다. 그것은 종말과는 관계없이 극장에서는 늘 일어나는 일이었다.
- 귀가 잘 들리지 않는 것 같아.
그것은 거짓이었다. 여자는 앙코르 무대에 서기를 거절했다. 피아니스트는 홀로 스크랴빈의 피아노 에튀드 한 악장을 앙코르로 연주했다. 그녀는 대기실 한구석에 우두커니 앉아 연주되고 있는 모든 음계를 놓치지 않고 들었다. 비로소 떨림이 잦아들었다. 피아니스트는 침착하게 연주를 이어 갔고, 관객들의 박수가 다시 한 번 터져 나왔다.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향한 찬사가 여자를 조롱하고 있었다.
여자는 연주복을 갈아입지도 않은 채 공연장을 빠져나왔다. 당장에 부동산으로 달려가 집을 내놓았다. 업자는 도시에 집을 구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했다. 그녀는 하루에 한 번씩 집값을 내렸고, 집은 처음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가격에 팔려 나갔다. 가족과 친구들은 그녀가 그들 곁에 있기를 바랐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그녀와 그녀의 음악을 사랑하는 지극하고 열렬한 마음을 뒤로 한 채, 그녀는 자기 자신만의 세계로 훌쩍 떠나버렸다.
그로부터 삼 년이었다. 여자는 거실 소파에 누워 책을 읽는 중이었다. 그녀의 눈에 라벨이 제1차 세계대전의 군복무 중에 보낸 편지의 일부가 들어왔다. ‘며칠 전 음악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마치 폭군과도 같이 말이죠. 저는 그 밖의 다른 것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 문장과 함께 폭군과도 같은 음악이 그녀에게도 되돌아온 것이다. 그녀는 라벨처럼 다른 것은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전쟁의 참혹함 앞에서 음악가이기를 포기하고, 또다시 음악 앞으로 되돌아온 이 위대한 작곡가가 전장의 추위와 허기 속에서 편지를 적어 내려가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여자는 그 순간을 직접 목격하거나 혹은 스스로 라벨 그 자신이 된 것 같았다. 당장에 이층 침실로 달려가 벽장 속에서 바이올린을 찾아냈다. 다른 물건들이 상자에 담겨 분류도 없이 방치된 것과는 달리 바이올린과 악보들은 벽장 하나에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컨디션은 썩 좋지 않았지만, 그런대로 연주를 하기에 무리가 없어 보였다. 기름진 현을 닦아내고 느슨한 활 털을 팽팽하게 감아올렸다. 심호흡 한 번 없이 바이올린을 켰다. 조율이 틀어진 악기는 듣기 불편한 소리를 냈지만, 악기가 소리를 낸다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가슴 속에는 전에 없던 의욕이 솟아났다. 이제 종말은 손을 뻗으면 만질 수 있는 물건처럼 가까웠으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여자는 이 갑작스러운 열정 앞에 의심 없이 굴복했다. 종말의 날에, 종말의 날을 기리는 연주를 하자. 여자의 마음속에 일어난 열망은 쉽게 가라앉을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바이올린의 네 번째 현이 탄성을 잃고 힘없이 끊어져 나간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남자는 아무런 계획도 없이 걷는다. 밤이면 교회로 향할 것이다. 교회로 가서 기도를 할 것이다.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그는 생각한다. 아침까지만 해도 텅 비어 있던 거리에 행인들이 속속 나타난다. 행인들은 혹독한 추위와 타인에 대한 경계심으로 잔뜩 어깨를 움츠린 채 걷는다. 곁눈질로 서로가 서로를 끊임없이 주시한다. 간혹 서로를 반갑게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 때면 잠시나마 그들을 둘러싼 공기는 온화해지지만, 그 곁을 지나는 사람은 더욱 걸음을 재촉한다.
남자는 서로가 서로를 의식하고 시선과 시선이 뒤엉킨 거리에서, 누구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물처럼 움직이려 노력한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하면 할수록 주의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만큼은 알아채지 못한다. 그의 행동거지와 상관없이 언제나 누군가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드물고, 그 드문 사람들조차 그에게 별다른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때 그에게 쏟아진 관심으로 인해 차라리 철창 속으로 돌아가기를 바랐던 날들로부터는 쉽사리 벗어나지 못한다. 사람들은 따뜻한 말 속에서도 그와의 간격을 유지하려 했고, 그것을 비난할 이유야 없지만, 그럴 거라면 차라리 그를 외면해 주기를, 남자는 간절히 바라고는 했다. 그는 방 안에 두고 온 창문 앞으로 달려가고 싶은 기분에 빠져든다. 그 자유, 그에게 허락된 최대한의 자유 앞으로.
그것은 분명 기적이라 할 만한 일이었다. 남자는 시체안치소의 시신용 비닐 팩 안에서 깨어났다. 시체안치소 직원이 비닐 팩의 입구를 열던 순간은 아득하기만 하다. 그는 스스로의 생사를 구분할 수조차 없었다. 들숨과 날숨, 어둠과 빛, 고통과 희열의 경계에서 침묵을 지키는 것이 남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그는 곧장 병원으로 이송되어 은빛 수갑을 차고 병상에서 깨어났다. 왜 이런 우연이 일어났는가. 부러진 두 번째 경추가 붙기를 기다리는 내내, 남자는 자꾸만 떠오르는 하나의 질문에 시달려야 했다.
형장에서 누군가 마지막 한 마디의 말을 허락했다. 하지만 이미 그의 죄가 법정에서 입증되었고, 이제 그는 자신에게 선고된 형벌의 끝에 서 있었다. 도무지 할 말이라고는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머리 위에 용수가 씌워지고 어둠을 감싸 쥐는 굵은 올가미가 느껴지자, 길고 뾰족한 것이 몸을 수직으로 관통하는 것 같은 감각에 휩싸였다. 그것은 고통이라기보다는 좀 더 가볍고 서늘한 것이었다. 그때야 비로소, 그는 아주 잠시, 무언가 더 할 말이 남아 있다고 느꼈다. 그 순간 사형대의 밸브가 무겁게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몸이 수직으로 낙하하기 시작할 땐 이미 너무 늦었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어쩌면 절박했던 마지막 한 마디를 남기지 못했던 것이 남자가 그토록 희박한 확률을 이기고 생존할 수 있었던 이유인지도 몰랐다. 그는 병실에 누워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던 말을 떠올리려 애썼다. 그 말을 떠올리기 위해 자신의 목이 매달리던 순간을 끊임없이 복기했다. 그러나 상상만으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었고, 그리하여 그가 떠올린 말들은 모두 그의 가정에 불과했다. 용서해 달라거나, 죽고 싶지 않다거나, 믿지 않는 하느님에게 구원을 요청하려고 하지 않았을까 하는 뻔한 생각은 조금씩 변형된 수없이 많은 문장들을 구성했다. 무죄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들의 목록이 남아 있다고 말하거나, 아직 밝혀지지 않은 범죄가 남아 있다고 선언하려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은 동시에 찾아왔다. 나중에는 화장실에 가고 싶다거나, 아침 식사가 형편없었다거나, 있지도 않은 재산과 유서의 행방을 말하려던 것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무엇도 확신을 주지는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마지막 말들의 목록을 늘려 나갔다. 그리고 다시 사형이 집행되는 때를 기다렸다. 때로는 모든 말을 속사포처럼 쏟아낼 수 있을 것 같았고, 때로는 또다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뜻밖의 일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남자는 알 수 없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시체안치소 직원은 남자의 부활을 신비로운 기적으로 여겼다. 그것은 느리고, 지루하며, 평화롭기 이를 데 없는 종말의 수인들에게 충격적인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남자가 모르는 사이에 그의 부활이 세간에 알려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통상 실패한 사형은 다시 집행되어야 했지만, 남자의 경우는 예외였다. 의사와 교도관이 사형장에서 사형수의 생존을 확인하지 못한 것이 이례적인 일이기 때문이었다. 사망증명서에 사인을 한 이상 그의 사망은 이미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남자를 다시 사형대에 올리는 것은 반인륜적인 행위라는 논리가 남자를 보호했다. 놀랍게도 사람들은 종말 앞에서 일어난 기적을 향해 가능한 최대한의 자비를 베풀고자 했다. 남자의 모범적인 수감생활에 대한 평가가 그의 목숨을 저울질했다.
종말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 남자는 자신의 죽음을 지연하는 것을 딱히 온정적이라 여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당장에 다시 사형대로 돌려보내 달라 애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실상 남자는 애초에 무엇을 선택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그는 부러진 경추가 붙은 뒤에도 교도소로 돌려보내지지 않았다. 그는 한동안 교도소와 별반 다르지 않은 병원의 철창 안에서 은빛 수갑을 찬 채 처분을 기다려야 했다. 그가 잠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간호사들이 커튼을 걷으면 햇살이 병실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고, 은빛 수갑은 손목을 끊어버릴 것처럼 뜨겁게 달구어졌다. 그것이 앞으로 남자에게 일어날 일을 암시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종말이 아니었더라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잦은 폭동과 시위로 교도소는 항시 정원을 초과하는 범죄자들을 수용해야 했다. 성급한 사형이 줄을 이었고, 살아남은 사형수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보호감찰을 받는 조건으로 남자에게 자유가 주어졌다. 폭 1.2미터 높이 80센티미터의 창문이 있는 좁은 방, 그것은 그가 오래전에 바란 불가능한 일 중에서도 가장 불가능한 일이었다.
남자의 생존을 확인한 시체안치소 직원은 수시로 그를 찾아왔다. 그를 데리고 함께 교회에 갔다. 시체안치소 직원은 남자를 다시 태어나게 한 장본인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남자의 보호자이자 인도자라 여겼다. 그는 지나친 세간의 관심으로부터 남자를 지키며, 신이 남자의 여죄마저 씻어 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열렬한 신의 자식은 남자의 죄를 용서할지언정, 그 자신에게 주어진 가혹한 운명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그는 남자의 생존을 본 직후부터 끝없이 실려 들어오는 시체들을 죄다 살아 있는 것처럼 느꼈다. 그가 한번은 남자에게 조심스레 비밀을 털어놓았다.
- 그러니까, 시신들이 조금씩 움직이는 것 같더란 말이죠. 가끔은 보관실에서 자그마한 소리들이 들려와요. 그게 아주 낯설지는 않아요. 일종의 냉장고니까. 소음을 내죠. 그런데 그게 달리 들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누군가 그 안에서 몸을 비틀거나 손톱으로 내벽을 긁고 있는 것처럼 들리죠. 그 소리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저를 따라다녀요.
시체안치소 직원은 머지않아 더 이상 남자를 찾아오지 않았다. 그가 목을 매고 죽었다는 사실을 남자는 보호감찰관을 통해 전해 들었다. 남자는 자신의 좁은 방 속에 숨어들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대부분이 남자와 남자의 기적을 잊었다. 누구도 시체안치소 직원처럼 그를 돌보려 하지 않았다. 그는 시체안치소 직원의 생각과 달리 자신이 되살아난 것을 구원이라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을 구원이 아닌 다른 무엇이라 생각할 수도 없었다. 딱히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가끔 남자는 홀로 교회를 찾아가려 했지만, 매번 교회 앞에서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다시 교회로 간다. 만약 시체안치소 직원의 믿음대로 진정 신이 존재한다면 마지막 순간에는 질문에 대한 답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왜 살아난 것일까? 마지막에 하고 싶었던 말은 과연 무엇일까?
모두 마지막에 무슨 말을 하고 싶을까?


여자의 네 번째 바이올린 현이 도착하지 않는다.
그녀는 무척 오랜만에 운전대를 잡는다. 오래 방치된 차의 내부는 바깥보다 차갑고 건조하다. 시동을 걸자 자동으로 라디오가 방송을 수신한다. 폭동에 관한 소식이 줄을 잇는다. 세계가 반쯤은 여전히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 의아하기만 하다. 차는 차고를 빠져나오면서 섬세하게 진동한다. 길 위로 올라선 차가 장난감처럼 예쁜 몇 개의 집을 지난다. 여자는 옅은 하늘색 외벽과 짙은 푸른색 지붕을 얹은 단층 주택 앞에 차를 세운다. 집들이 불을 밝히기 시작한다. 차에서 내리자 타는 냄새가 난다. 마을 가장 안쪽의 검붉은 지붕 너머에서 어둡고 탁한 연기가 피어오른다. 낙엽과 쓰레기를 태우는 시간이다. 멀리서 바삐 낙엽을 쓸어 담고 쓰레기를 뒷마당으로 실어 나르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다. 여자를 포함하여, 마을은 불필요한 성실함으로 가득하다. 여자는 마을을 사랑한다. 생활의 무용함이 여자의 의지를 북돋는다. 피아노와 첼로 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려온다. 여자는 하늘색 집의 정원을 가로지른다. 정원이라는 표현이 무색할 만큼 커다란 가장자리를 벽돌로 둘러친 텃밭 위에 엉망으로 흙더미가 뒤덮여 있다. 울타리를 대신해 빼곡하게 심겨 있는 마른 장미나무 가지들만이 한때의 정원을 증명한다. 종말이 선포되기 전의 정원 풍경이 뇌리를 스친다. 본 적은 없으나 상상할 수는 있다. 학습된 편견으로 가득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유려하고 매끄러우며 한 줌의 조악함도 없이 완벽한 풍경이다.
여자가 초인종을 누르자 음악소리가 멎는다. 현관은 잠겨 있지 않다. 그녀는 주인의 허락도 없이 거실로 향한다. 첼로를 받치고 앉은 십대 후반의 소년과 피아노 앞에 앉은 그의 어머니가 여자를 맞는다. 여자는 안온함을 느낀다. 벽에는 크고 작은 사진 액자가 빼곡하고, 테이블 위에는 손으로 짠 테이블보가 덮여 있다. 초록과 보라가 섞인 오래된 카펫의 촉감이 양말 속으로 전해진다. 어색하게 건네는 소년의 눈인사가 얇은 커튼처럼 투명하고 보드랍다. 머릿속으로 떠올린 풍경이 눈앞의 현실로 불려 나온다.
- 혹시 망치 좀 빌릴 수 있을까.
- 망치라니?
- 쓸 일이 있어.
여자는 머쓱하게 웃으며 답한다. 소년의 어머니가 소년에게 눈짓한다. 소년은 커다란 첼로를 바닥에 눕히고 일어선다.
- 악기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거지?
- 오고 있는 중이라는데. 선생님들은 연락이 없니?
- 저녁 식사 시간쯤엔 맞춰 오실 거야. 함께 저녁 식사를 하기로 해.
소년이 망치를 가져온다. 그녀는 그것을 한 손에 받아들고, 다른 한 손은 소년의 어깨에 얹는다.
- 내일 아침엔 다 함께 맞춰 볼 수 있을 거야. 너무 잘하려고 할 필요도, 긴장할 필요도 없어. 네가 우리의 유일한 첼리스트니까. 부탁해 젊은 거장.
그것은 형용모순이다. 여자는 젊은 거장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소년의 연주는 상찬을 받을 만큼 뛰어난 것조차 아니다. 다만 소년의 사기를 돋우기 위해 거짓을 말한다. 진심어린 거짓이다. 소년이 수줍게 고개를 끄덕인다.
- 현을 구해 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어. 곡을 바꾸기만 하면, 그러면 너는 다른 연주자가 가져오는 악기를 연주할 수도 있어. 지금 밖으로 나가는 건 위험해. 너도 알 거야.
- 장미가 다 졌더라. 여름엔 정말로 멋진 장미 정원이 있었는데.
여자가 말을 돌린다. 소년의 어머니는 말을 잇지 못한다.
- 여름에 피는 꽃이니까. 여름이 오면 다시 피겠죠.
갑자기 대화에 끼어든 소년의 말에 대기가 정지한다. 소년의 손이 어머니의 손 위로 겹친다. 여자는 맞잡은 두 손을 내려다본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 위에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미소가 번지고 있음을 감지한다.
- 그래, 여름에 피는 꽃이니까…….
- 너는 항상 네 고집대로만 하려고 해.
침착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가 여자를 다그친다.
- 여기에 온 이후부터 줄곧 그랬지. 넌 이곳 사람들이 너를 가족처럼 받아들이고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어. 너의 계획이 아주 멋지다는 데 동의해. 그렇지만, 생각해 봐. 네가 모든 걸 처음 계획대로만 하려고 고집을 부리는 데 필연적인 이유는 없어 보여.
- 그래, 그렇지. 나도 알아. 식사 시간 전에는 돌아올게.
마을은 크지 않다. 마을을 벗어나자 이차선 도로가 길게 이어진다. 왼쪽으로는 숲이, 오른쪽으로는 작물이 거의 자라지 않는 밭들이 펼쳐진다. 마지막 햇살이 헐벗은 가지 끝에 감겨 빛난다. 차는 얼마 못 가 바리케이드 앞에 멈춰 선다. 경비초소쯤 되는 작은 가건물에서 사내가 걸어 나온다. 그의 손에 무거워 보이는 쇠파이프가 들려 있다. 사내들은 돌아가며 마을 입구에서 보초를 선다. 여자는 창문을 열고 눈인사를 건넨다.
- 시내에 나가요. 금방 돌아올 거예요.
사내가 도로 한쪽을 열어 준다.
- 아시죠? 내일 연주를 하러 연주자들이 도착할 거예요.
사내가 허리를 구부려 여자와 눈을 맞춘다.
- 나도 오늘은 일찍 돌아갈 거요. 밤부터는 보초를 서는 사람도 없소.
- 그렇다면 불을 끄지 말아 주세요.


그때, 사내가 자전거의 페달을 밟고 있다.


여자는 적당한 엄폐물을 찾지 못하고 번화가에서 두 블록 떨어진 공원 근처 차도에 차를 세운다. 문이 잘 잠겼는지 여러 차례 확인한 후에 망치를 품에 끌어안고 언젠가 봐둔 문 닫힌 악기점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 거리는 난장판이다. 고요하고 처참하다. 상점들은 모두 문을 닫았다. 쓰레기며 온갖 크고 작은 물건들이 거리에 나뒹군다. 주차된 차들은 말할 것도 없다. 대부분 깨지고 찌그러진 채로 오랫동안 방치된 듯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길의 모퉁이를 돌자 정면에서 한 쌍의 남녀가 걸어오는 것이 보인다. 그들은 그녀를 발견하고는 반대편 인도로 건너간다. 차가 다니지 않는데도 교차로의 신호등 색깔이 시시각각 바뀐다. 그녀는 망치를 더욱 단단히 부여잡는다. 가로등이 켜진다. 망가진 상점들은 이제는 간판에 불을 밝히지 않고, 군데군데 보이는 오피스텔이나 주택의 창문도 어둡다. 간혹 불을 밝힌 창들은 굵은 쇠창살을 두르고 있다. 여자는 걸음을 재촉한다.
한 번 더 모퉁이를 돌아 악기점이 있는 거리에 도착한다. 악기점 옆에 있는 슈퍼마켓에서 남자 아이 하나가 걸어 나온다. 아이는 주위를 살피는가 싶더니 그녀를 발견하고는 황급히 반대 방향으로 달아나기 시작한다. 아이의 작은 몸은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진다. 여자의 눈길이 자연스럽게 슈퍼마켓으로 향한다. 상점의 유리벽은 모조리 깨져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있다. 여자는 홀린 것처럼 뻥 뚫린 가게 안으로 걸어 들어선다. 진열대 위는 비어 있다. 깨진 유리 파편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발밑에서 갈라진다. 발끝에 온 신경이 집중된다. 발길이 닿는 곳마다 희미하게 흘러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이 산란한다. 여자의 시야에 작은 갈색 뚜껑이 덮인 인스턴트커피 한 병이 들어온다. 그녀는 발로 비교적 크기가 큰 유리 파편들을 밀어내고 신중하게 병을 들어 올린다. 코트 밑단으로 먼지와 유리가루를 털어낸다. 그리고 코트에 달린 커다란 주머니 안에 그것을 집어넣는다. 거리는 비어 있다. 밖으로 나온 여자는 누구도 자신의 작은 범죄를 목격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그와 동시에 조금 전에 눈을 마주치고 달아난 아이의 표정을 떠올린다. 아이를 흉내 내듯 표정을 바꿔 본다. 근육의 움직임이 낯설다. 급기야 자신의 얼굴이 낯설어진다. 악기점 앞으로 발을 옮기는 잠깐 사이에 그녀의 얼굴 위에 수많은 표정이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익숙한 감각이 되돌아오지 않는다.
파이프 셔터로 잠긴 악기점은 그 거리의 어느 상점보다 안전해 보인다. 아무도 생존과 관계되지 않은 것들을 소유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자는 최대한 가까이 몸을 붙여 가게 안을 들여다본다.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아 사위를 살핀다. 이어 셔터 아래 달려 있는 자물쇠를 망치로 힘껏 내리친다. 예상치 못한 굉음에 동작을 멈춘다. 아무도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지 않는다. 여자는 도통 망가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자물쇠를 연거푸 내리치기 시작한다. 어깨가 뻣뻣하게 굳고 등은 땀으로 젖는다. 자물쇠는 끄떡도 하지 않는다. 그녀의 힘으로 자물쇠를 부수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가로등의 빛이 밝아지는 것에 비례해 어둠은 짙어지고, 기온은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한다. 어쩌면 네 번째 바이올린 현이 도착했을지도 몰라. 모두 함께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지. 그녀는 굳게 닫힌 악기점을 바라보고 선 지 한참 만에야 차가 있는 곳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한다.
여자가 공원에 다다를 무렵 멀리서 희미한 음악소리가 들려온다. 그녀는 그것이 공원 건너편의 성당에서 들려오는 소리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돌아가기엔 제법 먼 거리다. 그녀는 공원 가장자리를 둘러친 철책 주변을 서성거리다 어린아이가 서서 들어갈 정도로 큰 틈 하나를 발견한다. 공원에 들어서자마자 건너편 성당의 뾰족한 첨탑과 일렬로 늘어선 직사각형 창들이 온화한 빛을 뿜어내는 것이 보인다. 합창이 흘러나온다. 그녀는 텅 빈 공원을 가로질러 성당 쪽으로 향한다. 성당에 가까워질수록 음악은 또렷해진다. 문득, 노래하는 목소리보다 가까운 곳에서 그것보다 작게 찰박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여자는 공원 가운데에 크게 펼쳐진 호수로 눈길을 돌린다. 멈춰 서서 귀를 기울인다.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잔잔해 보이는 호수 가장자리에서 잔물결이 인다. 살을 에는 추위에도 얼지 않은 물이 호숫가의 둔덕을 적시는 소리가 청량하다. 멀리 떠 있는 몇 마리의 흰 오리가 달빛을 받아 더욱 희게 빛난다. 겨울 호수의 오리들을 본 적이 있던가. 기억을 되짚는다. 떠오르지 않는다. 들려오던 노랫소리가 멈춘다. 순간의 정적과 함께 공원은 그녀가 지금껏 듣지 못했던 수많은 소리들로 가득 찬다. 리듬을 예측할 수 없는 노래가 떠밀려온다.


교회를 향해 가던 남자의 발이 성당 앞에 멈춰 선다. 밤의 성당은 낮의 그것보다 물리적으로 훨씬 크고 웅장해 보인다. 화단에 설치된 조경용 할로겐 조명이 외벽의 요철을 두드러져 보이게 만든다. 성당은 분명 여기에 있지만, 마치 다른 세계로부터 쏘아진 영상처럼 이질적이다. 성당의 빛이 거리의 다른 빛들을 압도한다. 사람들은 커다란 아치를 통과해 다른 세계로 진입하기를 바라는 것처럼, 또는 최후의 성소를 지키려는 파수꾼들처럼 그곳으로 모여든다. 촛불을 든 사람들이 있고,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태우는 사내들이 있다. 그것들이 성당 앞 좁은 광장을 불태울 것처럼 물들인다. 붉다. 붉음은 그 빛의 형상을 정확히 추상하지 않는다. 다만 남자는 그것을 붉다고 생각한다.
남자는 광장에서 본당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오르다가 계단을 오르는 인파 사이에 멈춰 서고 만다. 그는 계단을 오르지도 내려가지도 못한다. 교회로 발길을 돌린다 한들 또다시 멈춰 서지 않을 수 있을까.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어깨가 그의 어깨에 부딪히거나 비껴간다. 남자는 계단 가장자리로 자리를 옮겨 잠시 엉덩이를 붙이고 앉는다. 노래가 시작된다. 종교가 없는 남자에게도 종교음악은 종교적으로 느껴진다. 광장을 서성이던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성당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텅 비어버린 광장에 세찬 바람이 한 차례 지나간다. 이마를 덮고 있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린다. 어둡지만, 완전히 어둠에 잠기지 않은 채 웅크린 건물들은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의 시선이 오른편의 공원으로 향한다. 거기에 거리의 어둠보다 좀 더 짙은 어둠이 있다. 또다시 바람이 분다. 어둠이 일렁인다.
남자는 공원에 들어가 본 적이 있다. 햇살은 찬란했고, 화창한 날씨 속에서 예정된 비극은 더욱 선명했다. 그러나 아직은 모두가 안전했으므로, 누구도 위태로워 보이지는 않았다. 남자는 그 이전에는 병원에 있었고, 그 이전에는 교도소에 있었으며, 그 이전에는 훨씬 더 큰 도시에서 살았다. 공원의 적당한 한산함과 적당한 분주함, 그것은 그가 살면서 본 중 가장 평화롭고 또한 유의미해 보이는 광경이었다. 어디선가 공포에 질린 비명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돌리면, 거기에는 무릎을 찧어 울고 있는 아이가 있었다. 아이의 어머니가 달려와 아이를 안아들었다. 종말을 앞두고도 새롭게 태어나는 아이가 있을까, 하고 생각하면, 그가 살아난 것은 축복인가 불행인가 하는 질문이 덩달아 따라왔다.
- 당신을 구한 게 제게는 축복입니다. 이것 좀 보세요. 생명은 이렇게 아름답지요.
시체안치소 직원이 곁에 있었다. 그가 물과 빵을 내밀었다. 남자는 그것을 받았다. 시체안치소 직원이 기도를 할 때, 그는 함께 눈을 감고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눈 속에서도 햇빛이 아른거렸다.
- 만약에 종말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저는 어떻게 되는 거죠?
눈을 뜨자 빛의 잔상이 독실한 신도의 얼굴 위에 겹쳐 보였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햇빛이 너무 강렬한 탓인지도 몰랐다.
공원과 맞닿은 건물 사이의 어둠이 토해 내는 것이 있다. 가로등 밑으로 나온 것은 남자 아이다. 아이는 갑작스레 눈앞에 펼쳐진 광경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자신이 가야 할 길과 성당의 전면을 번갈아 본다. 아이는 두 팔로 자신의 가슴을 끌어안는다. 남자는 무의식적으로 아이처럼 팔짱을 낀다. 추위 때문이다. 아이는 어딘가를 향해 걷기 시작한다. 남자는 아이가 향하고 있는 곳을 생각한다. 아이의 종말에 대해 생각한다. 종말이 없이 아이에게 찾아올 미래를 생각한다. 아이가 점점 멀어져 작은 점이 되었다가 그의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도 생각을 멈출 수 없다. 음악이 끝나고 새로운 음악이 시작되고, 거대한 흐느낌과 같은 기도소리가 좁은 광장을 떨게 만든다.
- 레퀴엠이네요.
목소리가 남자의 생각을 중단시킨다. 자그마한 발이 멈춰 선다. 남자는 불쑥 내뱉어진 말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몰라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그러다가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거리에 있는 사람이 오로지 자신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고개를 든다. 여자가 서 있다.
- 지금 연주되고 있는 곡이요. 이건 포레의 레퀴엠이에요.
말을 늘어놓으며 여자는 옷깃을 여민다. 남자는 그 말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다. 손이 떨린다. 신경이 수축하는 것을 느낀다. 수술 후유증일 것이다.
- 죄송해요. 긴장이 풀린 것 같아요. 여기까지 오는데 줄곧 혼자였거든요.
남자는 여자를 똑바로 올려다보지 못한다. 여자의 작은 발이 지나치게 가깝다. 남자는 거리를 벌리려 조금 떨어져 앉는다. 여자는 그것을 앉아도 좋다는 뜻으로 여긴 듯 어깨를 움츠리며 몸을 낮춘다. 커다란 코트로도 감춰지지 않는 마른 몸이 휘청거리는 것처럼 보인다.
- 이건 살아 있는 자들을 위한 레퀴엠이에요. 여기에는 다른 레퀴엠에 있는 『진노의 날』이 없어요. 대신에 『자비로운 예수』와 『천국에서』가 있죠. 심판 없는 구원의 진혼곡이랄까요. 종말에 익숙해질 수는 있어도, 알 수 없는 것에는 익숙해질 수 없겠지요. 누구라도 말예요.
시체안치소 직원이 떠오른다. 구원과 심판, 그는 그런 단어들을 자주 입에 올리고는 했다. 남자가 여자의 옆모습을 응시한다. 비쩍 말라 코와 광대가 도드라져 보이고, 푹 팬 뺨과 눈가에 깊은 그늘이 진다.
- 신자세요?
여자의 시선이 남자를 향한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황급히 고개를 떨군다.
- 아뇨.
- 기도를 하러 오신 건 아니겠네요?
- 아닙니다.
- 저처럼 음악에 이끌려 오셨나요?
그는 잠시 침묵한다. 그러나 답할 수 없기 때문은 아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누군가와 긴 대화를 나눈 것은 무척이나 오래전의 일이었으므로, 남자는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스스로의 음성을 낯설게 느낀다. 그는 조심스럽게 목소리의 결을 매만지며 입을 연다.
- 이제, 할 일이 없어졌기 때문이죠.
여자가 웃음을 터뜨린다.
- 그렇네요. 사실 이제는 대부분 불필요한 일들을 하고 있어요. 아직까지도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는 오로지 작물과 가축을 기르고 그걸 나누는 일 정도지요. 어쩌면 그것도 별 의미가 없는 것일 수 있어요. 사실 그렇게 생각하면 그 이전에도 의미 있었던 일은 별로 없죠. 그러니까, 오히려, 마지막엔 이렇게 무용한 것들이 우리에게 위안을 주죠. 우리가 쓸모없는 것이 될 때, 쓸모없는 것이 아름답다는 그 사실이요. 지금 연주되는 음악처럼 말예요.
여자의 말에 남자의 청각이 예민해진다. 음악소리는 명료하게는 전달되지 않는다. 대신에 깊은 물속에서 연주되고 있는 것처럼 웅웅대며 귓바퀴를 맴돌고, 부드럽게 남자의 등을 떠민다. 경건한 합창이 낮게 깔린 악기소리를 빨아들인다.
- 창밖의 아침 햇살 같은 거요.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친다. 커다란 여자의 눈이 의아하다는 듯 몇 차례 깜빡이다, 둥글게 휘어진다.
- 재미있는 분이시네요.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 저는 이 음악을 이해할 수 없지만, 이해하지 못해도 듣기 좋다고 생각하니까요.
- 우리가 좀 감상적이 된 것 같아요. 저는 이제 돌아가야 해요. 계속 여기 계실 생각인가요. 날씨가 추워지는데요.
-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남자는 교회로 가려던 애초의 결심에 대해서는 털어놓지 않는다.
- 들어가 보셨어요? 사실 저기서 들려오는 음악은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예요. 악기도 합창도 없지요. 사람들은 추위와 불안에 떨고 있어요. 예정된 종말과 약속되지 않은 구원을 기다리며 겨우 서로를 의지하면서요.
여자의 말은 더 따스한 곳, 진짜 합창이 있는 곳을 알고 있다는 것처럼 들린다. 어쩌면 그곳에 또 다른 구원이 있지 않을까. 남자는 생각한다.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남자가 따라 일어선다. 잠시 바람이 멎는다. 성당을 둘러싼 불빛이 따뜻하다. 실제로는 온기를 전하지 못하는 것들이, 그에게는 그렇게 느껴진다.


그들이 컴컴한 공원을 가로지르는 사이에 새로운 음악이 시작되었다. 성당 안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겨울밤의 낮은 기온 때문에 더더욱 멀리까지 퍼져 나갔다. 성당 문을 여닫을 때마다 더 거대한 음악이 거리로, 공원으로 흘러들고, 그 소리가 마치 세계를 부풀리고 있는 것처럼 들려왔다. 여자는 어쩌면 종말은 세계가 견딜 수 없을 때까지 부풀어버린 결과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종말의 순간을, 혹은 그 이후의 세계를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종말이 너무 멀리 있었고, 종말이 다가올수록 종말에 대한 상상력은 고갈되었다. 여자는 성당 안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들으며 처음 만난 남자와 공원을 걷는 그때, 비로소 시종일관 지리멸렬하게 느껴지던 기다림이 비로소 끝나 가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정확하게는 호의라고 할 수 없었다. 완연한 밤이 찾아와 있었고, 홀로 차를 세워 둔 곳까지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막막하게 느껴졌다. 여자는 내일의 연주 계획과 바이올린 현을 찾고 있다는 이야기 따위를 늘어놓았다. 품에 끌어안고 있는 망치의 용도에 대해 설명하자, 남자는 악기점이 이미 오래전에 비워졌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경계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남자의 낯설지 않은 얼굴이 그녀의 불안을 누그러뜨렸다. 여자는 잠깐의 망설임 끝에 동행을 제안했다. 남자가 기꺼이 초대에 응했다.
- 더는 할 일이 없으니까요.
남자의 외모나 차림은 개성적인 구석이 없고, 그것은 격렬한 공포와, 권태를 차례대로 지내온 대부분의 사람들의 표정이 죄 비슷한 탓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알 수 없는 친숙함을 느낀다. 그러나 단둘이 밀폐된 차 안에 갇혀 있는 동안에, 여자는 옆자리의 남자가 신경 쓰이는 것만은 막을 도리가 없다. 길이 좋지 않은 탓에 시내에서 마을까지는 제법 긴 시간을 운전해야 한다. 남자는 여자가 묻지 않으면 여자에게 먼저 말을 건네는 법이 없다. 얼어붙었던 몸이 녹으며 피로가 몰려온다.
- 멈춰요!
남자의 손이 여자의 어깨를 붙잡고, 여자는 황급히 브레이크를 밟는다. 상체가 앞으로 깊게 쏠렸다가 거칠게 제자리로 되돌아온다. 남자의 손이 닿은 부위가 뜨겁다.
-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아요.
커다랗고 밝은 물체가 도로 한가운데를 가로막고 있다. 사람이다. 전조등 불빛이 핀 조명처럼 도로를 비춘다. 옅은 분홍빛 코트와 남색 치맛자락 아래로 신발도 신지 않은 하얀 발이 드러나 있다.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가 차의 내부를 가득 채운다.
- 여기에 둘 수는 없어요.
여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자가 문을 열어젖힌다. 찬 공기가 밀려들자 잠이 달아난다. 여자는 운전대에서 겨우 손을 떼고 기어를 바꾼다. 남자는 큰 보폭으로 무대 위로 입장한다. 무릎과 허리를 굽히고 앉아 아스팔트 위에 엎어진 상체를 일으켜 세운다. 검고 긴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며 멀리서 보아도 앳되어 보이는 얼굴이 드러난다. 남자가 신호를 주듯 손짓한다. 여자는 부리나케 차에서 내려 그들에게로 달려간다. 소녀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여자를 올려다본다. 갓 화장을 마친 것 같은 붉은 입술에 여자는 안도감을 느낀다.
- 다행이네요.
남자가 고개를 쳐드는 순간, 여자는 이미 오래전에 남자의 얼굴을 본 적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흐릿한 카메라의 초점이 서서히 피사체의 윤곽을 포획하는 것처럼 남자의 얼굴은 흔들리면서 뚜렷해진다.
숲에서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이윽고 커다란 함성과 함께 몽둥이를 든 서녀 명의 소년들이 숲에서 도로로 뛰어내린다. 피할 새도 없이 소년들이 여자와 남자와 소녀를 에워싸고 커다란 나무 몽둥이를 휘둘러댄다. 몽둥이가 남자의 등허리를 후려친다. 그는 소녀를 끌어안은 채 앞으로 고꾸라진다. 여자는 비명도 지르지 않는 입을 틀어막는다. 성년인지 미성년인지 알아볼 수 없는 사내아이는 셋이다. 그들은 쓰러진 남자를 발로 걷어차고, 몽둥이로 내리친다. 굵고 짧은 남자의 신음소리가 아스팔트 위로 쏟아진다. 여자의 발은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일 줄을 모른다. 남자와 함께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소녀가 쓰러진 남자를 밀치고 일어난다. 태연하게 작고 가녀린 손으로 코트를 털어낸다. 먼지가 일어난다. 소녀는 쓰러진 남자와 겁에 질린 여자를 번갈아 보며 웃는다. 가면처럼 흰 얼굴이 웃고 있는 동안에도 무표정해 보인다. 그제야 비명이 터져 나온다. 비명이 도로를 쩌렁쩌렁하게 울리고 퍼져 나가다가 되돌아온다. 남자를 두들겨 패던 사내아이들이 낄낄거리기 시작한다.
- 그만 됐어, 빨리 타!
등 뒤에서 또 다른 사내아이 하나가 막 운전석에 올라탄다. 소녀가 먼저 차를 향해 달려간다. 소녀의 발이 여전히 희다. 두 명의 소년이 소녀의 뒤를 따른다. 키가 큰 사내아이는 마지막까지 남아 남자의 배를 걷어차고 돌아서다 말고 홉뜬 눈으로 여자를 향해 다가온다. 그녀는 두 눈을 질끈 감는다. 비릿하고 달착지근한 숨이 콧잔등에 닿는다. 뜨거운 입김은 순식간에 차갑게 식는다. 차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나 그녀는 눈 속에 컴컴한 어둠이 차오르고, 엔진 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도 쉽사리 눈을 뜨지 못한다.
- 차를 빼앗겼네요.
갈라진 목소리가 여자의 눈꺼풀을 들어 올린다. 남자가 힘겹게 몸을 일으킨다. 그녀는 선뜻 손을 뻗지 못한다. 그의 얼굴 주변으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한참 동안이나 맴돈다.
- 마을까지는 얼마나 남았죠?
- 걸어서 가기엔 제법 먼 거리예요.
- 그렇다면 서두릅시다. 난 괜찮아요. 그리고 저애들도 아주 멀리까지 가진 못할 거예요.
남자가 웃는다. 방금 전 그녀가 떠올리다 만 남자의 과거가 또다시 희미하게 떠오른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여자는 웃을 수 없고, 또한 웃지 않을 수조차 없다.
마을은 생각보다 멀거나, 멀게 느껴진다. 희미한 달빛만이 길을 비추고, 이따금 흘러가는 구름이 달빛마저 가려버린다. 어색하게 주고받던 짧은 대화도 사라진다. 여자는 차츰 거칠어지는 남자의 숨소리를 따라가듯이 그의 가까이에서 어깨를 바싹 붙이고 걷는다. 지금껏 느껴지지 않던 남자의 냄새가 덮쳐 온다. 그것은 시큼하고, 불길하다. 그녀는 비로소 남자의 정체를 분명하게 떠올린다. 그러나 남자를 되돌려보내거나 그로부터 달아나지 않는다. 간혹 어둠 속의 식물과 사물, 저 멀리 고정되어 있던 풍경이 일어서는 것처럼 보이고, 그럴 때면 여자는 두 눈을 감고 남자의 숨소리에, 절뚝거리는 남자의 발걸음 소리에 더욱 예민하게 귀를 기울인다. 차가운 바람이 두 사람의 몸을 얼게 하면서 고통의 감각 또한 서서히 얼어붙는다. 걸음이 점점 더뎌지는 가운데, 여자는 자신의 다리가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 의심스럽다는 듯 두 다리를 내려다본다. 이토록 짙은 어둠 속에서는 거리도 시간도 측정되지 않는다. 이미 지나온 거리만큼 통증이 누적되었고, 그 통증이 그녀를 나아가게 만드는 유일한 힘이다. 불 꺼진 경비초소에 다다르자 갑자기 더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처럼 온몸의 힘이 모조리 빠져나가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그녀의 다리는 이미 멈춰 서는 법을 잊은 것처럼 쉬지 않고 발을 내딛는다. 어둠과 추위가 차츰 아늑해진다.


자전거 페달을 밟는 사내는 페달을 밟는 일을 멈추고 지도를 본다.
오직 지금까지 페달을 밟아 온 길에 의지해서만 지도를 읽을 수 있다.


몸 안에 들어온 한기가 여전하다. 남자는 벌떡 일어나 자리에 앉는다. 어둡지만, 사물을 식별할 수 없을 만큼은 아니다. 테이블 위에는 바이올린 가방과 그가 읽을 수 없는 악보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고, 악보 위에 지난밤엔 없던 컵 하나가 놓여 있다. 남자는 컵을 들여다본다. 거기에 차갑게 식은 검은 음료가 담겨 있다. 여자는 불도 켜지 않은 채 소파에 자리를 내주고, 커다란 담요를 가져다주고, 무언가 따뜻한 것을 가져다주겠다고 했다. 그다음은 기억나지 않는다. 혼절하듯 잠들었다. 그는 자신이 잠을 청한 소파 건너편의 계단을 바라보며 숨죽인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대신에 잠결에 들은 현악기의 선율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그것이 그저 현악기였다는 것을 제외하면 구체적인 멜로디나 음색은 기억나지 않는다. 어쩌면 그녀가 기다리던 것을 얻게 된 것일는지 모른다.
실내가 차갑다. 추위를 떨쳐내려 크게 기지개를 켠다. 커튼 아래로 빛이 기어 들어온다. 커튼을 걷자 거실은 순식간에 환하게 밝는다. 종말의 아침이다. 순간 남자는 시계를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못 하나 박지 않은 벽은 새하얗다. 그는 잠시 동안 여자가 말한 커다란 창을 통해, 여자의 정원과 여자의 마을을 바라본다. 창은 커다랗지만, 마을 전체를 조망할 만큼은 크지 않다. 몸의 각도를 이리저리 바꾸면 더 멀리 마을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유리창의 얼룩이 창밖의 전경 위에 아른거린다. 황망하다. 정원에는 멋대로 자라다가 시들어버린 누런 잎의 식물들과 용도를 알 수 없도록 쌓아올린 흙더미, 말라죽은 가지들로 가득하다. 이리저리 쓸려 다니는 낙엽들이 건물 사이를 가로지르는 길을 지우고 있다. 마을은 지난밤의 기억 그대로다. 칠이 벗겨진 건물들은 멀리서 보아도 사람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다. 지난밤 보았던 몇 개의 뻥 뚫린 창이 여전히 어둠을 물고 있을 뿐이다. 그 어둠 앞에서 햇빛은 그에게 익숙한 어떠한 마술도 부리지 못한다. 어둠 안에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너무 새카매서 그 안에 아무것도 없다고 확신하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어느 모퉁이에선가 여자가 나타난다. 그녀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길을 걸어 그를 향해 다가온다. 여자의 걸음은 마치 춤을 추는 듯 가볍다. 발밑의 낙엽들과 흩날리는 머리카락으로 바람의 세기를 가늠할 수 있다. 그러나 여자가 걷고 있는 햇빛 속은 지금 남자가 서 있는 곳보다는 훨씬 따뜻하게 보인다. 여자는 느리게, 그러나 꾸준히 다가온다.
- 깨어 있을 줄은 몰랐어요.
여자가 코트를 벗어 소파 위로 던져 놓는다. 코트에 깃들어 있던 한기가 펄럭인다. 여자가 남자를 지나쳐 갈 땐 그녀의 굵게 짠 청록색 니트 원피스에서도 차가운 기운이 뿜어져 나온다. 그는 커다란 창을 등지고 선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다. 발밑의 그림자가 여자를 향해 뻗어 나가는 것을 본다. 여자의 손이 테이블 위의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 몇 시쯤 되었죠?
동작을 멈춘 여자가 허리를 펴고 거실을 둘러본다.
- 글쎄요. 아마 우리가 음악을 들을 시간은 충분할 거예요.
- 도착했나요?
여자는 남자의 질문에 곧장 답하지 않고 다시금 테이블 위로 시선을 옮긴다. 악보 위에 악보가 포개진다. 바이올린 상자에 단단한 잠금장치가 걸려 있다.
- 아뇨, 기다린 것은 아무것도 도착하지 않았어요. 함께 연주를 하기로 한 사람들도, 현도 도착하지 않았어요.
여자는 애초에 아무런 기대도 없었다는 것처럼 태연한 목소리로 답한다. 그녀가 소파로 자리를 옮겨 담요들을 개어 놓는다.
- 실망스럽겠어요.
- 실망스럽죠. 모든 사람들이 실망했을 거예요. 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그건 제 능력 밖의 일이니까요. 그래도 음악을 들을 시간은 충분하고, 함께 음악을 들을 사람이 있다는 건 다행한 일이죠.
마지막으로 커튼을 정돈한 여자가 오디오 앞으로 다가가 전원을 넣는다.
음악이 시작되지 않는다.
여자가 작은 목소리로 허밍 한다. 음악은 그녀에게만 들려오는 것 같다.
- 우리가 연주하려던 곡이죠. 라벨의 현악 사중주요. 잘 들어 보세요. 제1 바이올린이 연주하는 주제는 명징하고 서정적이죠. 그런데 다른 악기들의 선율은 관념적이에요. 확실한 것과 불확실한 것, 안전한 것과 위험한 것이 함께 있어요. 그나마도 앞부분의 서정적인 선율은 차츰 격정적으로 변하고, 나중엔 모든 주제들이 뒤엉키고 흩어져요. 마지막은 정말 놀랍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멜로디 사이에서 어렴풋하게 처음의 주제가 떠오를 뿐이에요. 모든 것을 추억하고,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게 돼요. 지금 우리에게 이보다 완벽한 사중주는 존재하지 않을 거예요. 그게 제가 이 곡을 고른 이유예요.
여자가 다시 허밍을 시작한다. 남자는 여자가 길게 늘어놓는 말을 한 마디도 이해할 수 없다. 그는 여자의 그림자가 누운 방향을 보고 태양의 위치를 확인한다. 그러나 그림자를 보고 시간을 유추하지는 못한다. 여자가 읊조리는 멜로디의 높낮이가 바뀔 때마다 그녀의 음색 또한 조금씩 변한다.
- 지금 몇 시쯤 되었을까요.
- 음악을 들을 시간은 충분해요.
여자는 소파로 돌아와 자리를 잡고 앉는다. 남자가 그녀 곁에 앉는다. 그녀는 정말로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것처럼 재빨리 숨을 들이마시고 허밍과 함께 그것을 천천히 나누어 뱉는다. 그는 여자가 따라 부르고 있는 멜로디 외에는 다른 악기들의 소리를, 그것들의 선율을 조금도 짐작할 수 없다.
- 자, 들어 봐요. 2악장은 피치카토로 시작해요.
- 제게는 음악이 들리지 않아요.
여자의 미간이 좁아진다.
- 조심스럽게 말하는 거예요. 지금 이 마을엔 나와 그쪽 외엔 아무도 살지 않는 것처럼 보여요. 음악이 재생되지도 않는데 어디서 음악이 들린다는 거죠? 미안하지만, 지금 당신은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그게 아니라면 당신에겐 좀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음악을 정지시킨다. 시작되지 않은 음악이 멎는다. 여자는 멀찌감치 선 채로 소파에 앉은 남자를 바라본다. 그녀의 눈이 전보다 조금 사나워진다.
- 하지만, 당신에게 문제가 있는 거라고 해도 이해해요. 이상한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나잖아요. 내 경우에도…….
- 저는 어제 처음으로 도둑질을 했어요.
여자가 남자의 말을 가로챈다.
- 저는 그게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죠.
여자가 말한다.
- 시내의 상점에서 커피 한 병을 훔쳤어요.
여자가 말한다.
- 당신이 어젯밤에 그걸 마실 뻔했고요.
여자가 말한다.
- 괜찮아요. 나는 마시지 않았고, 이제는 그런 것에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어요.
남자가 일어선다.
- 당신이 누군지 알고 있어요.
여자가 말한다.
-당신이 누군지 알고 있다고요.
여자가 말한다.
- 당신의 죄도요.
여자가 말한다.
대답을 추궁하는 듯 부동하는 눈동자가 남자를 사로잡는다.


한 대의 자전거가 마을로 진입한다. 마을의 입구에서 누구도 그를 막아서지 않는다. 사내는 천천히 속도를 늦추며 숨을 몰아쉰다. 바람이 휘몰아치자 하늘이 어두워진다. 사내의 머리 위로 한 무리의 세 떼가 날아간다. 새들은 그와 같은 방향으로 그를 앞서 간다. 핸들을 붙잡고 있는 붉은 손 위로 먼지처럼 작고 가벼운 것이 떨어진다. 사내는 왼쪽 손바닥을 펼친다. 또다시 작고 가볍고 차가운 것이 그의 손바닥 위에 떨어졌다가 사라진다. 사내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커다란 구름이 새들을 따라 이동한다. 땅에 드리운 그림자의 반경이 넓어진다. 순간 자전거가 휘청인다. 사내는 자세를 바로잡는다. 다시 자전거의 속도를 높인다. 자전거 바퀴 밑의 낙엽들이 조금씩 눅눅해진다. 몇 개의 건물을 빠르게 지나치고, 몇 개의 건물 앞에서 다시 속도를 늦추던 자전거가 이층 주택 앞에 망설임 없이 멈춰 선다. 사내는 자전거 뒷자리에 동여맨 끈을 풀고 상자를 내린다. 현관 옆의 커다란 창 위로 설핏 사람의 형체가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사내가 초인종을 누른다. 집 안을 울리는 벨소리가 현관 바깥까지 흘러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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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소개 / 천희란(소설가)

- 2015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으로 등단.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와 동 대학원 석사 졸업.



《문장웹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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