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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두기

  • 작성일 2023-05-04
  • 조회수 3,276

일러두기

조경란


   모른다고도 잘 안다고도 말할 수 없는 사람이 재서에게 생겼다.
   미용은 평소에 충동적으로 물건을 사는 편은 아니지만 며칠 전에는 검은색 복면을 주문했다고 말했다. 손님이 텔레비전을 틀어 달라고 해서 채널을 돌리다가 여자 주인공이 눈과 입만 빼고 얼굴을 다 가리는 복면을 쓰곤 인질처럼 잡고 있던 아이들을 어떤 단체에서 구출해 내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그게 멋있어 보이기도 한 데다 주인공이 쓴 검정 니트 복면이 그 순간 못 견디게 갖고 싶었다고. 재서는 그 말을 하는 미용을 처음 보는 눈으로 봤다. 성인 여성 평균 키에서도 한참 모자라고 목소리도 작고 앳되며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수줍어하는 마흔아홉 살의 미용. 그녀와 검은색 복면은 아무래도 연결이 되지 않았다.
   숨 쉬는 데 편하고 시야도 가리지 않는데요.
   미용은 에코백에서 검은색 복면을 꺼내더니 무릎에 올려놓고 반듯하게 폈다. 방한용 안면 마스크인가 본데 구멍 세 개가 뚫린 조금 긴 털모자 같았고 재서의 눈에도 영화에서 도둑들이 쓰는 것과 엇비슷해 보였다.
   이걸 쓰고 다니실 건 아니겠지요?
   재서는 자신이 잘 모르는 지점의 미용에게 물었다.
   사람 일은 모르죠.
   미용은 소리 없이 웃었다. 소리 없이 움직이고 소리 없이 먹고 마시고 심지어 노래할 때도 미용은 그래 보였다. 그래서 다른 가게 사장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도 의식하고 있지 않다간 미용의 존재를 까맣게 잊기 십상이었다. 그게 미용의 남다른 점이라면 점인데 얼마 전부터인가 재서에게는 신경이 쓰이는 부분이 되었다.
   재서는 인쇄․복사를 전문으로 하는 ‘대학사’의 오래되고 쿠션이 푹 꺼진 소파에 미용과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버지 가게였고 지금은 재서가 꾸려 가고 있는데 밖에서 보면 ‘♜대학사 COPY’라는, 한때는 눈에 띄었고 쓸모가 있었으나 최근엔 눈여겨보는 사람이 드문 간판이 무겁게 걸려 있을 것이다. 한 차례 장맛비가 지나가 후텁지근한 6월 셋째 주 토요일 오후였다. 미용의 가게는 토요일이 휴무, 대학사의 휴무는 내일이다. 재서가 오른쪽 팔에 반 깁스를 하지 않았다면 미용이 쉬는 날 여기 오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그러나 미용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도와달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제일 먼저 왔다가 정작 고맙다는 말도 못 듣고 돌아가는 사람. 미용이 이 동네에 처음 나타날 때부터 재서의 눈엔 그렇게 보였다. 그런 사람과는 더 거리를 두고 싶어서 재서는 미용을 더는 눈여겨보지 않았다.
   도와주러 왔다는 말 대신에 미용은 정 사장님이 우리 집 단골이시니까요, 라고 얼버무렸다. 재서의 아버지가 미용의 우엉 전문 반찬가게의 조림을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다. 재서는 평소보다 풀이 죽어 있는 상태였다. 나흘 전 밤중에 장롱 한 짝이 방바닥으로 쓰러지면서 재서의 뒤로 쓰러졌다. 무슨 소리가 들려 순간적으로 피하긴 했는데 장롱 모서리가 오른팔 팔꿈치를 스치듯 쳤다. 아버지 말대로 만약 장롱이 머리로 무너졌다면. 집에서도 죽을 수 있다는 상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고 그게 가능하다는 걸 경험하게 되자 두려워졌다. 재서는 돌아가신 지 십 년도 넘은 어머니의 장롱을 버리지 않고 버틴 아버지에게 화를 냈고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아 사흘 동안이나 무단결근을 했다.
   그거 맥아대 방법으로 감은 거 같네요.
   미용이 슬쩍 재서의 오른팔을 보며 말했다.
   그게 뭡니까?
   8자형으로 그려 가듯 감는 붕대법일걸요.
   웅얼거리는 듯한 소리에 재서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토요일엔 손님이 별로 없으니까 조금만 있다 가시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홍보용 인쇄물과 제본한 책을 찾는 손님 두 명이 왔다 갔다. 참고서 복사를 하러 온 중학생이 다녀간 후 더 할일을 찾지 못한 미용이 다시 소파에 앉았다. 삭은 장롱이 무너져 재서가 하마터면 크게 다칠 뻔했으며 그때 정 사장은 거실에서 축구 중계를 보다 화를 면했다는 소문 아닌 소문은 이미 동네 점주들 사이에 돌고 돌았을 터였다. 나흘 만에 출근한 오늘 오전에 아래쪽 스터디룸 한 사장은 자네 살아 있네? 하더니 냉커피 하나를 따서 내려놓곤 나가버렸다.
   출입문 종소리와 함께 손님이 들어오자 미용이 재빨리 일어나 응대했다. 그 바람에 무릎에 올려 둔 복면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재서는 어정쩡하게 소파에서 일어났다가 도로 앉았다. 25매짜리 한글 파일을 50부 출력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다. 미용은 익숙하게 손님에게 원고가 든 USB를 받아 컴퓨터에 꽂은 후 인쇄 버튼을 눌렀다. 대형 복사기에서 원고가 출력돼 나오는 소리는 정확하며 리듬도 있어서 이런 규칙적인 소리는 마음을 놓이게 한다고 대학사에 처음 손님으로 왔을 때 미용은 말했다. 복사기에서 좋은 면을 찾아낼 줄 아는 사람을 재서는 처음 보았고 나이 들어가는 사람이 하는 말치곤 조금은 우습다고 느끼기도 했다. 그게 이 년 전이었다.
   재서는 왼팔을 뻗어 복면을 주웠다. 자전거를 보면 타고 싶고 기타를 보면 쳐보고 싶은 것과 비슷한 기분인가. 막상 쫀쫀한 니트 복면을 손에 쥐자 그걸 한번 써보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대활약을 벌인 주인공을 보고 이걸 사고 싶어 한 미용의 욕구를 조금은 이해할 것도 같았다. 자신이 타인을 이해하는 방식에는 늘 문제와 오해가 있어 왔지만 지금은 아닐 수도 있었다. 복면 안으로 왼손을 집어넣고 짐작보다 넓게 뚫린 눈구멍에 손가락을 넣어 구부려 봤다. 잘 웃지 않는 미용도 이걸 보면 웃을 것 같았다. 재서는 출입문 가까이 놓인 철제 작업 테이블에서 자기 대신 일을 하는 미용의 옆모습을 봤다. 갈라진 뒤꿈치가 보이도록 운동화를 구겨 신고 통이 넓은 베이지색 바지에 길고 품이 큰 면 티셔츠를 입어서 전체적으로 헐렁해 보이는. 재서는 머리를 긁적이고 싶은 걸 참았다.
   미용은 인쇄한 손님의 원고를 네 모퉁이를 맞춰 가며 한 부 한 부 스테이플러로 찍었다. 복사 용지들을 각이 딱딱 맞게 맞추는 건 보기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미용의 손은 종이보다 우엉을 만지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스테이플러로 찍는 건 한가할 때가 아니면 굳이 해주지 않아도 되는 일이고 보통은 손님이 직접 찍거나 용지만 봉투에 담아 주곤 하는데. 인근 국립대학생으로 보이는 손님은 한 손은 주머니에 찌른 채 다른 손으론 전자담배를 만지작거렸다. 어서 밖으로 나가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대충 좀 봉투에 담아 줬으면 좋겠다는 역력한 표정으로. 미용은 자기 일에 집중하느라 아무것도 살피지 못하고 있었다. 손님이 여기 대학사가 아니라 길 건너편 꽃집과 양말 가게 사이, 거의 쐐기풀 모양의 좁고 길쭉한 ‘이모 반찬’ 가게에서 미용을 보았더라면 그녀의 다른 능숙함을 알아차릴 수 있을 텐데. 재서는 자유롭지 못한 한쪽 팔로 자리에서 일어나 주인 역할을 하려고 했다. 그때 손님이 미용에게 얼굴을 갖다 대듯 들이밀더니 쥐새끼 같은 소리를 냈다.

   태어나기 전부터 미용은 자신이 어떤 삶을 살게 될지 알았다고 했다. 그래서 가능하면 태어나고 싶지 않았다고. 청소년 시절에 미용은 이런 생각을 했다. 외로운 사람은 잠든 척하거나 살아 있는 척하지 않는다고. 그리고 중년에 다다른 무렵에는 생각이 달라졌다. 외로운 사람은 자기 자신을 죽이거나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고. 미용과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은 건 아니지만 재서는 알게 됐다.
   손님이 나간 후 미용은 재서에게 등을 보인 채 그대로 출입문 앞에 서 있었다. 신호에 멈춰 선 마을버스들과 한없이 느린 보폭으로 건널목을 건너는 노인들, 휴대전화 매장 앞에서 한쪽 팔을 불규칙적으로 펄럭거리는 공기 인형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 것 같았다. 미용에게 본 적도 없고 어울리지도 않지만 뭔가를 항의하는 눈빛을 짓고 있을지도 몰랐다. 조금 전의 그런 손님들은 흔했고 별일도 아니었다. 미용도 알고 있었다. 재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뭔가를 해야 했을까. 미용의 뒷모습을 보다가 일이 분 전의 그 순간에 미용의 안으로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것이 미용의 핵심을 흔들어 놓았다고.


*


   아내는 솔직했고 자주 울었다. 큰 소리로 울었고 웃을 때 역시 그랬다. 매력적이라고 여겼던 아내의 특징들이 한집에 살면서부터는 감당해야 할 일부가 되었다. 당신은 차가운 사람이야. 아내는 여러 번 말했다. 당신은 아직 애야, 나는 평생 늙은 애랑 살게 될 거야. 아내는 참담한 소리로 흐느꼈다. 그리고 삼 년 전에 떠났다. 재서는 다른 길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미 반쯤 지나온 삶이었으니까. 마흔일곱 해 동안 평범하게 살았고 큰 변모를 해야 할 만한 사건도 없었다. 아내에게 갑자기 버려진 일은 달랐다. 더는 직장에 나가지 못했고 사람들,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놓는 사람들과는 함께 있기 어려워졌다. 높은 수위의 감정을 터트리는 사람들도 조금씩 두려워하게 되었다. 미용처럼 자신의 감정을 한사코 숨기는 데 가진 에너지를 다 써버리는 듯한 사람도.
   미용의 USB에 든 파일을 읽지 않았다면 재서가 그녀를 기다리는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소문도 뒷말도 빨리 퍼지는 동네였다. 건물주들은 이 동네에 젠트리피케이션 같은 말이 생기기 훨씬 전부터 대개 이곳에서 자식들을 키워낸 토박이들이었고, 이 동네 학군을 나온 그 자식들의 자식들이 세입자가 돼 프랜차이즈 짬뽕 전문점이나 음식점, 카페를 운영했다. 삼 년 전부터 재서가 아버지의 복사집을 잇게 된 이유와는 좀 달랐다. 동네 어른들은 네다섯 시경이면 편의점 파라솔이나 대학사 옆의 옆 문방구에 모여 막걸리 타임을 갖는다. 아마 아버지는 거기서 전해 들은 모양이었다. 며칠 전에 소방서 위, 국립대학으로 이어지는 언덕길 중간의 특성화고등학교로 김밥 배달을 갔던 미용이 기절을 했다고. 아버지 나이대 동네 어른들은 그 나이에 남편도 자식도 없고 혼자 산다는 이유로 미용을 여전히 석연찮은 여자로 여겼고 그럴 때마다 재서는 못 들은 척했다. 아무것도 묻지 않자 아버지는 더위를 먹어서 그랬나, 말을 흘리곤 며칠째 내버려둔 일력을 서너 장 뜯어 공처럼 구겼다 폈다. 그러곤 자신이 뭘 하려는지 잊어버린 늘어진 얼굴로 구겨진 어제의 날짜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7월 첫 주에 일시적으로 불볕더위가 지나갔다. 방학 때마다 이렇게 일거리가 줄어드는데 아버지는 그동안 어떻게 가게를 운영해 왔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이따금 명함이나 도장을 새기러 오는 손님밖에 없었다. 재서는 제본을 맡긴 책 중에 흥미로운 페이지들을 읽다가 에어컨을 끄고 출입문을 열어 둔 채 거리로 나가 차양 밑에 서 있기도 했다. 깁스를 푼 오른쪽 팔꿈치가 자주 가려웠다. 위쪽 소방서에서 가끔 사이렌 소리를 울리며 출동하는 소방차를 볼 때도 있었고, 사차선 도로 맞은편 대각선으로 보이는 ‘이모 반찬’의 열렸다 닫히는 출입문을 보기도 했다. 이젠 그 일기 같은 글을 쓰지 않는 걸까. 프린터나 복사기가 집에 없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았고 대학사는 그런 사람들, 미용과 같은 손님들에게 언제나 열려 있는 곳이다.
   초복 날 오후에 미용이 터벅터벅 길을 건너 대학사로 왔다.
   미용은 인쇄물 아홉 장을 출력하곤 천 원짜리 지폐를 주며 잔돈은 됐어요, 라고 갈라진 소리로 말했다. 이주 전보다 기운이 없어 보여서인지 눈과 눈 사이가 평소보다 멀어 보였고 습도 때문에 단발파마 머리가 부슬부슬 뻗쳐 있었다. 미용은 소파에 앉아 재서가 준 박카스 한 모금을 마셨다. 그사이 아홉 장이나 되는 글을 쓴 모양이었다. 한 번쯤은 뭘 쓰는 거냐고 물어 볼 수도 있었다. 그게 자연스러운 일일 텐데. 재서는 이제 그 자격을 잃어버렸고 기회도 놓쳤다는 걸 알았다.
   오전에 미용은 치과에 갔다 왔다고 말했다.
   어금니에 문제가 생겼는지 요즘 우엉을 잘 씹질 못하겠더라고요. 음식을 삼키기도 좀 어렵고 사레도 아무 때나 들리고.
   조금 들떠서인지 재서는 우엉 전문 반찬가게 주인이 우엉을 잘 씹지 못한다는 지점에서 웃고 싶어졌다. 당신은 배려할 줄 모르는 사람이야. 아내의 목소리는 어디서나 들렸다. 재서는 입술을 붙이고 소파에서 떨어진 철제 의자에 앉아 그녀 쪽으로 몸을 숙였다.
   미용은 구강 기능 저하증이란 진단을 받았다. 혀와 인두가 노쇠해서 씹고 삼키는 데 어려움이 생기고 발음도 점점 둔해질 거라고. 대체로 고령에 생기는 증상이라고 했다. 몸이 벌써 다 삭아버렸나 봐요. 미용은 손바닥을 뒤집어 무릎에 허룩하게 얹었다. 삭았다는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재서는 어떻게 해야 괜찮아지느냐고, 건조한 소리로 물었다.
   입술과 혀의 가동력 훈련을 해야 하고요, 섭식 장애도 오지 않도록 신경 써야 한대요.
   잘 씹고 잘 먹어야 한다는 거죠?
   그 기본적인 게 지금 문제라는 거예요.
   재서는 실눈으로 미용을 바라봤다.
   결국 이렇게 어눌하게 살다, 말도 못 하다가 어느 날 혼자 눈 못 뜨면 인생 끝이겠죠.
   미용은 침울한 소리를 냈다. 왜 이런 일들이 자기에게 계속 생기는지 모르겠다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치료받으면 괜찮아지겠죠.
   며칠 전에 저기 고등학교에 배달 갔다가 운동장에서 쓰러졌어요. 교실엔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뭔가가 저를 가로막는 거 같은 기분이었어요. 이번엔 입속에 문제가 생겼다는 진단을 받았고요, 멍청하게. 그리고 지난번에는.
   미용은 말을 잇지 않았다. 지난번. 그래 여기서. 그 쥐새끼 같은 자식. 씨발 아줌마 뭘 그렇게까지 친절하세요. 재서는 허리를 숙여 바닥을 보았다. 미용은 더 말하지 않을 것이다. 대화는 오늘도 나아가지 못한다. 그래서 이주 만에 미용이 대학사에 와서 출력한 종이에 담겨 있을 새로 쓴 글들이 읽고 싶어졌다. 미용의 가방에 든 USB를 떠올렸다. 나이프 모양에 ‘읽고 쓰고 즐겨라’라는 작은 글씨가 인조가죽에 인쇄된 2GB짜리 구청 도서관에서 시민들에게 나눠준 기념품이었다. 미용은 출력하러 왔다가 대학사 컴퓨터에 꽂은 USB를 그 후로 한 번도 잊고 간 적이 없고 재서는 그 실수를 기다리느라 조금은 애가 탔다. 문을 반만 열어 주고 안을 보게 해주었다가 다 보기도 전에 탁 닫아버린 것처럼.
   아무래도 그 사람을 찾아야겠어요.
   미용은 누가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놀란 사람처럼 출입문 쪽으로 고개를 홱 돌리며 말했다.
   누굴 말입니까?
   선생님.
   어떤 선생님을요?
   팔짱을 끼려다 재서는 허리를 펴고 미용을 봤다. 재서는 정말 궁금해졌다. 그건 아직 미용이 쓰지 않은 내용이었으니까.
   머릿속에 찌꺼기 같은 게 평생 떠다니는 기분이에요.
   찌꺼기. 검은색 복면. 평생. 그리고 다른 기억이 끼어든 듯 움찔거리는 미용의 얼굴 근육들. 오후 네 시에 재서는 배가 고파졌고 괜찮으면 미용에게 다른 사람들처럼 삼계탕 같은 음식을 같이 먹자고 청하고 싶었다. 어쩌면 미용을 말리거나 달래거나 그도 아니면 공모자가 되거나.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재서는 자신 안의 냉담한 부분을 움직여 휴대전화를 보는 척했다. 미용이 손깍지를 끼며 말했다.
   나한테 왜 그랬는지 물어 봐야겠어요, 지금이라도.


*


   주황색 옷을 즐겨 입던 미용의 어머니는 열여덟 살에 첫아이를 출산했다. 딸이었고 아직 미성년자였던 미용의 부모는 신생아란 당연히 말을 알아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존재라고 믿곤 아무 말이나 - 미용의 언니, 서용 말에 따르면 - 했다. 그래도 그 어린 커플은 이 년 터울로 원치 않는 아이를 세 명이나 더 낳았다. 넷째 미용을 임신하고 있을 때 큰언니 서용은 만삭에 가까워진 배를 드러내놓고 엄마가 자고 있을 적이면 몰래 배에 손을 올리곤 태아에게 속삭였다. 우리는 부모가 낳고 싶어 한 아이들이 아니란다 아기야, 가능하면 너는 계속 그 안에 있으렴, 여긴 거의 지옥이야. 실제로 미용은 그 목소리를 들었다. 자신을 두고 나눈 부모의 다른 소리도 이미 다 들은 후였다. 미용 자신도 원치 않았지만 겨우 저체중을 면한 2.5킬로그램으로 1974년 11월에 태어났다. 부모에게는 두 딸과 아들 한 명이 있었고 더 필요한 아이는 없어 보였다. 계획에 없던 출산을 어쩌다가 네 번이나 한 - 미용이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점이다 - 젊은 엄마는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불행의 원인을 미용 탓으로 돌렸다. 장신에 뼈대가 굵고 손바닥이 두툼한 아버지가 그 몸을 휘두를 때면 셋방이 종이집처럼 부서졌다. 큰언니는 이른 나이부터 집 밖으로 돌아 가장 어리고 나약한 미용이 그들의 대상이 되었다. 둘째 언니는 애교를 부리는 역할로, 오빠는 아들인 걸로 집에서의 자리를 만들어 나갔다. 신생아 미용은 아무리 오래 혼자 누워 있어야 해도 울거나 소리 내지 않으면서 재빨리 머리를 짜냈다. 난 이 집에서 안 보이는 역할을 맡아야겠구나. 미용은 자신의 모든 것을 작게 작게 만들기 위해 움츠렸다. 활 모양의 늑골도 안으로 둥글게 말려 자라는 듯했다. 부모의 말에 언제나 순종하고 형제자매들에게 공손했다. 눈에 띄지 않는 아이가 되는 법을 스스로 고안하고 터득하느라 취학 전부터 미용은 녹초가 되었다. 뭔가를 거절하거나 의향을 드러내는 일부터 피해야 했다. 취학 후부터 사정은 더 좋지 않아졌다. 이미 자신을 완벽하게 작은 아이로 변형시킨 미용은 누구에게든 도움이 될 준비가 돼 있었으니까. 그건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고 후회했지만 그러기엔 너무 늦었다. 이름의 맨 끝 자를 딴 미용의 별명은 별명치곤 좀 길었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나 자신을 잃어버리게 된 사람이었다, 라고 미용은 썼다. 언젠가 아침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한 여성학 박사가 출연해 모든 사람은 빛나고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하자 방청객들이 감동한 표정으로 박수 치는 장면을 보았다. 순간적으로 미용은 이때껏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욕설을 내뱉었고 제소리에 놀라 후딱 뒤를 돌아보곤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안심하며 전원을 껐다. 그리고 방금 자신이 뱉은 말에서 격렬한 감정 - 나중에 미용은 희열이라는 단어를 찾고 수정했다 - 을 느꼈다고 했다.
   이게 재서가 처음 읽은 미용의 그 일기 같은 원고들의 내용이었다. 미용이 세세하고 적나라하게 쓴 어떤 경험들은 그대로 옮길 수 없고 그러기도 힘들었다. 미용은 자신의 인생에 관해 한 페이지 분량 정도의 글을 규칙적으로 쓰는 듯했고 글마다 제목을 붙였다. <원치 않는 아이>, <완벽한 작은 아이로 살아가기> 같은. 하지만 미용에게 맞춤법과 호응이 되지 않는 문장과 띄어쓰기에 대해 조언해 주는 사람이 아직은 아무도 없어 보인다고 재서는 생각했다.

   수요일에 동네 야산에서 땅에 묻힌 여자 운동화가 발견되었다. 소방서에서 국립대학 쪽으로 올라가는 오른쪽 언덕에 청금산으로 이어지는 그늘지고 야트막한 지점이었다. 이른 아침에 등산객이 처음 목격해 신고했다고 아버지는 전했다. 흰색 운동화 두 짝이 땅에, 그것도 살짝 묻혀 있어서 더 섬뜩했다고. 오전부터 경찰서에서 사람들이 나와 근처의 땅을 파보는 모양이었다. 아버지와 동네 어른 몇 분들은 접근 금지라인 근처까지 걸어갔다 내려온 모양이었다. 그 얘길 안주 삼아 막걸리를 마시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아버지의 운동화에도 흙이 묻어 있었고 그 실물감 때문인지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재서는 장갑을 끼고 작업대에서 특수지와 명함지를 정리하던 중이었다. 장갑을 벗고 의자에서 일어나 왼손으로 오른쪽 팔꿈치를 세게 긁었다. 머릿속의 뭔가를 밀어내듯 재서는 출입문을 열어젖히곤 아버지 잠깐만 가게 보고 계세요, 하곤 밖으로 나갔다.
   구멍이 숭숭 뚫려 그물 같아 보이는 가방을 무릎에 올려 두고 미용은 은행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게 문에 잠시 외출한다는 안내문이 붙어서 옆집 꽃집에 들러 미용을 찾았다는 말, 꽃집 사장이 은행 갔다 금방 온다고 했으니 여기서 기다리라는 말을 들었다고 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재서는 부자연스러웠고 미용을 찾았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막상 그녀를 보자 할 말이 없어져 버렸다.재서가 도로 일어나려고 하자 내가 뽑아올게요, 하더니 미용이 입구 안쪽에서 대기표를 뽑아와 재서에게 건넸다. 미용이 자리를 내어주듯 옆으로 몸을 움직였다. 몸에서 땀 냄새가 날까 봐 재서는 잠자코 있다가 그 일은 잘 되고 있느냐고 물었다. 무슨 말인지 생각하는 눈치더니 미용이 말했다.
   현금을 갖고 내일 사무실로 오래요.
   누가요?
   사람 찾아 준다는 사람이요.
   대기표를 반으로 접고 접은 면을 우엉 때가 낀 거무스름한 손톱으로 훑으면서 미용이 태연하게 말했다. 아직 열두 명을 더 기다려야 했고 쓸모없는 재서의 대기표는 그 세 배쯤이나 떨어진 숫자가 새겨져 있다. 사람을 찾아 준다는 행적 전문가. 사무실. 현금. 재서는 미용을 데리고 은행에서 나가고 싶었다. 그렇게 하려면 관계의 어떤 단계를 거쳐야 했는데 그건 재서에게 익숙한 일도 잘하는 일도 아니었다. 그 사람을 찾는 데만 해도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요,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간단하지 않더라고요, 우리 같은 사람에겐 쉬운 일이 없어요. 미용이 재빨리 소리 죽여 말했다. 재서는 말하고 싶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런 사람은 찾아가지 않는다고. 은행에는 음악이 없고 온도는 터무니없이 낮아서 춥다고 느껴질 정도였으며 아는 어른들의 기침소리, 음량을 한껏 올려 둔 휴대전화 소리로 어수선했다. 게다가 행적 전문가라니.
   저기, 믿을 만한 데 맞는 겁니까?
   재서는 노란색 라운드 티를 입은 미용이 그 색이 받지 않는다고, 누렇게 떠 보인다고 생각하며 물었다.
   믿을 만한 데가 어딨어요, 그런 데가.
   미용이 고개를 수그리더니 픽 웃었다.
   송금하면 되지 왜 거기까지 오라고 합니까?
   저를 좀 봐야겠대요. 찾을 수 있다는 감이 오는지 안 오는지 보면 안다고.
   ……거기가, 어딥니까?
   대기 번호가 떴고 미용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구로 갔다. 미용은 뒤축이 닳은 까만 고무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또 누군가 돈을 빌려 달라는 사람이 생긴 건 아닐까. 미용에게 서너 살 어린 친구처럼 지낸 사람이 있었다. 어묵 공장에서 일할 때 만난 여자였다. 미용은 그녀가 빌린 돈을 갚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녀가 미용에게 보낸 메시지 때문에 마음 아파했다. 언니, 언니 말대로 우린 아직 친구예요. 언니만큼은 웃는 얼굴로 다시 만나고 싶어요. 빚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게 목표니까 더는 연락하지 말아 주세요. 지난겨울, 그 여자의 생일에 미용은 딸기 케이크를 들고 그녀 집 앞까지 갔다가 그냥 돌아온 적이 있다. 유일한 친구를 잃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걸렸고 미용은 아직도 그녀에게 종종 메시지를 보내곤 한다.
   뒤에서 보니 창구 앞 의자에 앉은 미용은 잘못을 비는 사람처럼 직원의 말에 연신 고개를 수그려 가며 태블릿 서류에 손가락으로 사인을 하고 있었다.
   재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찌르며 생각했다. 한 번 더 미용이 원고가 든 USB를 대학사 컴퓨터에 꽂아 두고 가는 실수를 하면 다시 읽고 싶지 않다고.


*


   아버지가 일요일에 동네 점주들과 서울대공원에 갈 거라고 말했다. 운영과에 취직했다던 스터디룸 한 사장네 아들이 동물원 입장권을 나누어준 모양이었다. 호랑이를 위한 무슨 행사를 연다고. 재서는 흘려들었다. 종종 그런 일들이 있었다. 누구네 자식이나 손자 손녀가 취직한 뷔페식당이나 콘도미니엄으로 우르르 몰려다니는. 재서가 근무했던 대학의 우편취급국으로도 아버지는 어른들을 데리고 온 적이 있었다. 이번에는 동물원인 모양이었다. 점심은 김 사장한테 주문했는데 날이 더워서 도시락이 상할까 봐 걱정하더란 말도 아버지는 덧붙였다. 김 사장이요? 재서가 물었다. 토요일 밤이었다.
   칠인분의 도시락이 든 아이스박스 두 개를 김미용은 어깨에 메고 들고 서 있었다. 약국과 문방구 사장이 나오지 않아 한 사장, 아버지, 꽃집 최 아주머니, 미용과 재서, 이렇게 다섯 명이 대공원 입구에서 만났다. 우편번호가 같은 지역에 산다는 공통점을 가진 사람들이. 아이스박스 하나를 재서가 빼앗듯 가져가자 미용이 난처한 듯 아버지를 흘긋 돌아보며 오시는 줄 몰랐어요, 작은 소리로 말했다. 새벽부터 어려운 사람들의 도시락을 준비한 탓인지 미용은 고단해 보였고 짐 가방들을 들고 말짱히 서 있는데도 축 늘어져 보였다. 아침 10시에 벌써 기온이 이십칠 도를 넘었다.
   한 사장이 앞장서고 다들 그 뒤를 따랐다. 대충 보고 어디 시원한 데 가서 한잔해야지. 도시락이 상하면 안 되니까. 요즘은 아무데서나 돗자리 못 펼걸. 앉으면 거기가 자린 거지 뭘. 호랑이들한테 오늘 생닭을 준다더군. 원래 그게 먹이 아닌가? 냉동 닭이겠지. 오늘은 특별한 날이래잖습니까. 한 사장이 아는 소리를 했다. 세계 호랑이의 날인가 뭔가 그렇대. 그래도 살아 있는 닭이라니. 보면 알겠죠. 사육사들이 그걸 연못에 던져준대. 사육사들은 호랑이가 무섭지도 않은가. 그러게 말이야. 전 아침도 안 먹고 나와서 벌써 시장하네요. 그러다 우리 최 여사님 쓰러지겠어. 그럼 정 사장이 등에 업고 말처럼 뛰면 되지.
   호랑이 길은 입구의 제1 아프리카관을 지나서 제2, 3 아프리카관을 지나는 1.5킬로미터나 되는 길이었다. 맹수사까지는 가야 호랑이를 볼 수 있을 터였다. 각각 아이스박스를 하나씩 든 미용과 재서는 일행들 뒤를 따랐다. 선 캡을 쓴 미용을 보자 검정 니트 복면이 떠올랐다. 확실히 지금은 더울 때다. 재서는 미용에게 묻고 싶은 게 많다는 데 조금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거긴, 갔다 오셨습니까?
   두 번이나요.
   왜요?
   졸업앨범이 필요하다고 해서요.
   거기에 뭐가 있는데요?
   사진요. 그리고 맨 뒤에 선생님들 주소가 있더라고요. 졸업생들 주소도.
   한 사장이 뒤를 돌아보며 안 오고 뭐 하냐는 손짓을 보냈다. 네, 가요! 미용은 명랑한 소리로 대답하곤 재게 걸었다. 그 시절만 해도 개인정보 같은 게 없었잖아요, 마지막 주소가 서교동으로 돼 있더라고요. 거기서부터 시작한댔어요, 그 사람들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긴 했는데 재서는 화가 나려고 했다. 막걸리통들이 들었을 미용이 든 더 크고 무거워 보이는 아이스박스도, 기껏 동물원에 와서 동물은 관심 밖이고 어디든 주저앉아서 먹고 마실 궁리부터 하는 아버지도, 오라고 말한 사람도 없는데 여기 와버린 자신도. 그 선생을 찾아서 대체 뭐 할 겁니까? 재서는 그 말을 하려다 미용을 돌아보곤 목구멍으로 크게 삼켰다. 정말로 목 안쪽이 쓰라렸다. 걸음을 빨리하면서도 미용은 일요일 동물원으로 나들이를 나온 가족들을 보고 있었다. 젊은 부모들, 아이들, 그 아이들의 할머니 할아버지들, 연인들. 미용은 가져 보지 못했고 지금대로라면 앞으로도 갖기 어려운 관계들이었다. 미용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형제자매들과도 멀어졌다. 유일하게 가깝게 지냈던 오빠마저 조카가 일곱 살이 됐을 때 오사카로 이민을 갔다. 일곱 살이 될 때까지 그 조카를 오빠 집에서 키운 사람이 미용이었다. 미용은 조카를 보러 오사카에 한 번 가본 적이 있었다. 오빠가 일하는 간이식당에서 먹은 타코야키가 정말로 맛있었다고. 처음에 미용은 가게를 열 때 상호를 ‘작은 반찬’이라고 정하려고 했다. 이 세상에 자신을 위한 표현이 있다면 작다, 작은, 작아서가 전부인 듯해서. 그러다가 조카가 서운해 할지 몰라 ‘이모 반찬’이라고 마음을 바꾸었다. 조카는 올해 대학생이 되었고 미용을 보러 오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게 지난 2월이었다. 아무도 미용을 보러 오지 않을 것이다. 이름이 깊은 강이라는 뜻이라는 그 조카도. 신경질적이고 굉음으로 들리는 원숭이, 새, 기린 - 기린은 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 코끼리들이 내는 소리와 뙤약볕인데도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마음이 좀 누그러지려고 했다. 게다가 잘 알진 못하지만 미용은 동물원에, 대공원에 와본 게 오늘이 처음일지 모른다는 짐작이 들었다.
   시베리아산 호랑이 네 마리가 생닭을 찾느라 첨벙거리며 연못 속으로 뛰어들었다. 생닭에 공작 깃털이 꽂혀 있었다. 호랑이들이 푸드덕거리는 닭을 찾을 때마다 사람들이 손뼉 쳤고 아이들은 얼굴을 가리며 울기도, 큰 소리로 먹어, 잡아먹어, 라고 외치는 꼬맹이들도 있었다. 호랑이 행동 풍부화의 날이라고 했다. 동물원에 사는 동물들에게 원래의 터전과 유사한 환경을 만들어서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해 만든 프로그램이라고. 아이스박스를 처음으로 바닥에 내려놓은 미용은 안전대를 두 손으로 꽉 잡곤 까치발을 한 채 몸을 앞으로 기울여 호랑이들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즐거워 보였고 간헐적으로 새된 웃음소리를 흘리기도 했다. 잠깐이나마 어떤 위해로부터 다 벗어난 사람처럼. 연못에 뛰어들었다가 먹이를 찾지 못하고 나온 호랑이 한 마리가 갈기를 푸르르 흔들며 물방울을 튕겨냈다. 미용이 고개를 하늘 높이 치켜들며 말했다. 동물에게도 저런 걸 해준다니 사람은 참 좋은 거네요. 미용은 제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푸드코트 야외 테이블에서 솜씨를 부린 미용의 도시락과 네 가지도 넘는 주먹밥들, 과일과 떡을 안주 삼아 막걸리 다섯 통을 다 비운 어른들이 취했다. 조금만 쉬었다 가기로 했다. 어른들이 차례대로 세수하러 화장실에 다녀오거나 편의점에서 냉커피를 사오거나 트림을 하고 큰 소리로 웃고 얘기하는 모습을 테이블 의자 끝에 엉거주춤 앉아서 재서는 한 눈으로 보고, 한 눈으로는 미용이 어디에 있는지 계속 봤다. 미용은 재서와 가까운 데 있었다. 소풍날 혼자 화장실에 들어가 도시락을 먹곤 했던 여학생. 재서는 혹시 미용이 지금 자신과 같은 기억을 떠올리지 않길 바라서 눈을 돌렸다. 술이 오른 아버지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꾸벅꾸벅 졸았다. 멋을 내느라 주름을 세운 아이보리색 기지 바지에 흰색 피케 셔츠를 골라 입었다. 벨트가 허리를 조여서 배가 쏟아질 것 같아 보였다. 선글라스가 삐뚜름하게 코끝에 걸쳐졌고 아버지는 두 팔과 두 다리를 무람없이 늘어뜨리고 한낮에 야외에서 자고 있었다. 태평하고 무심하고 부당해 보였다. 덮을 게 있다면 다 가려 주고 싶은 몸이었다. 재서는 문득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자신도 결국 아버지와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아갈 거라고. 날이 너무 더웠다. 한 시가 넘었고 이제 찌는 듯했다. 선 캡을 벗어 이마를 훔치던 미용이 주위를 한번 둘러보며 말했다.
   찾은 거 같아요, 그 선생님.


*


   제주에서 실종된 고등학생은 집에서 직선으로 12km 정도 떨어진 표선해수욕장 앞바다에서 결국 사흘 만에 숨진 채 발견되었다. 영주에서 실종된 여학생은 열흘째 흔적조차 찾지 못했고 배수시설에서 점검 작업 중 불어난 빗물에 실종됐던 작업자 두 명도 끝내 사망 상태로 발견됐다. 전국에 폭염 특보가 확대되었으며 서울 기온은 36도까지 치솟았다. 일요일에는 8호 태풍 프란시스코가 한반도를 향해 북상해 올 거라는 예보가 있었다. 더위와 태풍과 사고들. 여름을 정의하는 다른 말을 찾지 못한 재서는 불안을 달래느라 셔터를 내리고 밖으로 나갔다. 토요일 늦은 오후였다. 가게들은 지난주부터 여름휴가에 들어갔고 행인들도 줄었다. 양쪽 거리의 카페들만은 손님들이 들어차 빈자리가 없어 보였다. 길을 건너 미용의 가게가 있는 아랫길로 내려가려다 말고 청금산 쪽으로 몸을 돌렸다. 휴무이기도 하지만 사나흘 전부터 ‘이모 반찬’은 문을 닫았고 아무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미용에 관한 별다른 말도 들리지 않았다.
   동물원에 다녀온 지 며칠 지났을 때 인도로 나가 서성거리다가 재서는 도로 맞은편의 미용을 본 적이 있었다. 가게로 가는 길일 텐데 무슨 생각에 빠졌는지 미용은 바닥을 보며 내처 걷다가 가로수에 이마를 부딪쳤다. 한 손으로 이마를 문지르면서 미용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 재서가 보기에 - 주위를 휘둘러보다가 지나쳐온 길을 도로 내려가 자신의 가게로 들어갔다.
   재서는 구청 청사를 지나 동네에서 가장 오래된 콩나물 해장국집을 지나 특성화고등학교 담장에 바싹 붙어 걸었다. 습한 바람이 담쟁이 이파리들과 화살나무 이파리를 흔들었다. 이 거리에 새로운 소문이 들린 건 얼마 전부터였다. 검정 복면을 쓴 사람이 비틀거리며 걸어 다니고 문 닫힌 가게들의 쇼윈도를 들여다보기도 하고 팔로 허공에 대고 삿대질하는 시늉을 하더란 말이 들렸다. 그 모습의 일부가 다른 가게 CCTV에도 찍혔다고 하는데 아버지는 그건 고장 난 지 오래된 거라 믿을 만하진 않다고 말했다. 그래도 누가 보긴 본 모양이었다. 작은 사람이 이 열대야에 니트 복면을 쓰고 한밤중에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을. 하릴없이 재서는 여름용 복면을 찾아보았다. 여름에도 복면을 쓰는 도둑들이 있을 텐데.
   원고를 출력하고 미용이 USB를 그대로 대학사 컴퓨터에 꽂아 두고 간 건 지난 5월의 일이었다. 처음에 재서는 그 파일 안에 든 글을 다 읽지 않았다. 한 동네에서 영업해도 미용은 대학사를 드나드는 손님일 뿐이고 평소에 눈길을 끄는 사람도 아니었으니까. 궁금한 게 없었다. 그러다가 달라졌다. 뭔가를 읽는다는 일은 그랬다. 재서에 대해 쓴 글도 있었다. 그건 분명히 기억했고 앞으로도 기억하는 게 좋을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미용이 가게를 연 얼마 후에 꽃집 최 사장님이 주도해 박 사장님 노래방에 몇몇 점주들과 간 적이 있었다. 재서가 간 건 대학사 문을 닫은 후 아버지를 집으로 모셔가기 위해서였다. 아버지와 동네 어른들이 재서를 끌어 앉혔다. 미용은 두 손에 탬버린을 들고 구석에 앉아 흔들었고, 박자나 리듬에 상관없이 무조건 흔들어대서 핀잔을 듣기도 했다. 재서에게 마이크가 건네졌다. 재서는 친구들과도 동료들과도 노래방에 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내와도 그래 본 적이 없었다. 사람들은 그런 말을 하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곤 했다. 재서는 아는 노래가 없었지만 외운 노래는 있었다. 그게 자신이 졸업한 고등학교 교가였고 노래방에는 당연히 음원이 없어서 그냥 불렀다. 비바람이 닥쳐도 젊은 우리는 삶의 주인이 되어 사랑과 배려의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리라, 청년이여, 맑게 흐르고 진리를 탐구하여 빛나는 사람이 되자, 뭐 그런 교가였다. 어른들은 실제로 듣는 것 같지 않았는데 재서가 교가를 마치자 박수를 쳤다. 슬그머니 탬버린을 내려놓은 미용도. 그리고 미용은 집에 돌아가서 <노래방에서 교가를 부르는 사람>이란 글을 썼다. 살면서 고등학교 교가 가사를 기억하고 노래방에서 부르기까지 하는 사람의 학창 시절은 얼마나 좋은 시간이었을까, 라고. 재서는 그 원고에 한 줄 덧붙이고 싶었다. 그저 너무 평범했을 뿐입니다. 글에서 미용은 재서를 정수리에 숱이 적은 갈색 머리, 중키에 긴 입술, 무채색 옷차림, 두 손을 습관처럼 자신의 겨드랑이에 끼고 있는 사람, 사는 일에 분투를 접은 듯한 눈빛이라고 표현해 놓았다. 썩 마음에 드는 표현이 아니었고 재서는 가능하면 팔짱을 지르는 습관을 고치려고 했다. 그래도 분투를 접은 듯한 눈빛은 너무했지만. 아무튼 재서가 알기로 미용은 그 후로 자신을 남다른 눈으로 보기 시작한 듯하다. 재서가 미용의 글을 읽고 그녀를 그 같은 눈으로 보게 된 것과 비슷한 것이었을까.
   대학 부속 치과병원을 지나 재서는 오른쪽 비탈길로 올라갔다. 생각이 많아질 땐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 그리고 장소를 옮기는 거야. 아내가 말해 주었다. 대학 교정 안에 있는 미술관으로 가는 지름길이기도 했지만 인적이 드물고 나무들이 빽빽한 곳이었다. 햇빛이 비치는 틈새로 나무 가장 높은 곳의 가지들이 보이기도 했다. 서로 다른 나무의 가지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 움츠리거나 성장을 멈추는 곳. 아내는 그걸 수피기관 현상이라고 알려주었다. 밀집된 곳에서 서로 햇빛을 골고루 이용하는 식물들의 생존 전략이라고. 아내가 한 말은 아내가 떠난 후에야 생생히 떠올랐고 재서는 이제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잠깐이지만 아내가 좋아했던 이 길을 지날 땐 울창한 숲을 통과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재서는 미술관 앞 넓은 처마로 그늘이 진 벤치에 가서 앉았다.
   무단결근을 한 사흘 동안 재서는 안국역 근처에 있는 4성급 호텔에 투숙했다. 충동적인 선택이었다. 조계사 경내가 내려다보이는 룸이었다. 루프탑에서 수영을 할 수 없는 게 아쉬웠지만 호텔에서는 한 손으로도 불편한 게 없었다. 스테이크를 안주 삼아 와인을 마셨고 충분히 취하지 않으면 룸서비스를 시켜서 더 마셨다. 하마터면 죽을 뻔하다 살았다. 더 좋은 곳에서 지낼 수도 있고 한 번도 안 해본 일을 시도해 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틀째 밤에 재서는 다른 무엇이 아니라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조용하고 단순한 이야기들. 중요하지 않지만 하고 나면 충일해지는 이야기들. 그건 평범한 감정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 순간에 미용이 떠오른 데 놀랐다. 미용도 그런 순간, 그런 밤이 있었다. 눈에 띄지 않게 늘 없는 사람처럼 조용히 살다 보니 오십이 다 돼가도록 연락할 친구가 한 명도 없었다고. 그 글을 읽을 때 재서는 믿지 않았다. 일기 비슷한 자서自敍의 글에서 미용이 처음 자기연민에 빠진 데가 바로 그 부분이라고 여길 만큼. 미용이 USB를 대학사에 잊어버리고 간 건 정말 실수였을까. 어쩌면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사람을 찾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뒤늦게 들었다. 보기보다 용의주도하게 미용이 그 대상을 자신으로 선택한 건 아니었을까 하는 짐작과 함께. 사흘째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 재서는 중얼거렸다. 뭔가를 이해하고 깨닫는 데 난 여전히 오래 걸리는 타입이군.
   가게 문까지 닫고 미용은 어딜 간 걸까. 아니 뭘 하려는 걸까. 지난 5월 이후로 재서는 미용이 무슨 글을 쓰는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이제 재서는 아무도 없는 야외 미술관 데크에서 턱을 괴고 상상하기 시작했다. 미용은 어떤 이유인가로 그 선생을 찾았다, 그것이 미용이 평생을 노력했으나 기대했던 것보다 만족스럽지 못한 자신의 삶을 보상하는 한 가지 방법이라고 여기고 싶어서. 모든 것의 처음이었던 부모는 이미 죽었다. 두 번 다 일반적인 죽음이라고 말하긴 어려웠다. 삶의 가운데가 아니라 늘 가장자리를 걷고 있다는 걸 깨달을 때 사람은 자신을 한번 돌아보게 된다. 왜 이런 사람이 되었는지, 누가 자신을 이런 사람으로 만들었는지. 미용의 몸에서 조급하고 혼란스러운 감정이 흘러나왔다. 의사와 상관없이 늘 복종하고 순종하는 사람은 자신이 되고 싶은 사람이 아니었다. 고치려고 해도 잘 되지 않았다. 중년이 되어 미용은 이렇게 마음먹었다. 자기 자신을 죽이기로. 아니 자기 자신만 죽이기로. 미용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 사이가 멀어서 다른 두 사람이 각자 흘리는 눈물처럼 보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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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탈에 지어진 오래된 다세대 주택에 미용의 방이 있었다. 교회로 이어지는 백 개도 넘는 계단을 올라가야 했고 우편번호는 지하철역을 지나면서부터 달라졌다. 아침에 눈 뜨면서부터 재서는 오늘은 꼭 미용을 보러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뭘 만들지 결정했다면 종이부터 골라야 하는 것처럼. 다세대 주택 1층에 공용 마당이 있고 미용은 거기 놓인 칠이 벗겨진 플라스틱 의자에 재서를 앉게 했다. 그게 미용이 운동화를 말리는 방식인지 그녀의 색 바랜 운동화가 세워둔 빈 맥주병 주둥이에 걸쳐져 있었다. 물기가 잘 빠지도록 세모꼴로 널어 둔 알록달록한 이불도 미용의 것이라는 짐작이 들었다. 높은 지대였다. 고가 쪽으로 휘어지기 전의 순환로와 까치고개 일대가 한눈에 들어왔다. 가게 문까지 닫고 그동안 뭘 하면서 지냈느냐는 말에 미용은 할일이 좀 있었다고 대꾸했다. 미용은 재서의 짐작과는 달리 수척하지도 퀭해 보이지도 않았다. 재서는 얼핏 자신이 한 상상을 수정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여겼고 안도와 동시에 거기서 묻어 나오는 부차적인 감정 사이에서 잠시 혼란을 느꼈다. 재서는 입을 다물고 미소 지었다. 미용을 보고 한 번도 순수하게 그래 오지 않았다고 깨달은 사람처럼 어색하게. 카키색 헐렁한 치마를 입은 미용이 재서를 돌아보다 그동안 뭘 좀 썼다고 말했다. 뭘 쓰시는데요? 그냥, 제 이야기요. 왜 그런 걸 쓰십니까? 덜 무능해지는 것 같아서요. 재서는 가만히 있다가 고개를 끄덕인 후 물었다. 혹시 그 선생님과 연관된 글인지에 대해서. 미용은 숨을 고르듯 들였다 대답했다. 다 쓰고 나니 결국 자신에 관한 이야기가 되었다고. 재서는 미용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져서 그녀의 눈을 봤다. 미용의 눈은 반짝였고 울었다는 흔적은 찾기 어려웠다. 듣고 싶어요? 두 사람은 의자를 붙여 조금 가깝게 앉았다. 제목은 <교련 시간>이에요.

   교실로 선생님이 들어왔다. 한 손에 출석부, 다른 손엔 지휘봉 같은 가늘고 긴 막대를 들고. 교련 선생님이 교실 미닫이문을 탁 닫을 때 ‘전체 속의 조화’라고 쓰인 급훈 액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57명의 침묵과 긴장 때문에 교실이 팽팽해졌다. 화요일은 교련 시간이었다. 학생들은 책상에 삼각건과 압박붕대를 꺼내 놓았다. 일렬로 반듯하게. 출석을 다 부른 교련 선생님이 입을 꾹 다문 채 학생들을 내려다봤다. 모두 고개를 숙였다. 교련 선생님은 사십대로 보였고 굽이 낮은 정장 구두에 감색 상의, 군청색 바지 정장을 즐겨 입었다. 국군 간호사관학교 출신이라는 말도 있었지만 선생님에 대해 알려진 사실은 별로 없었다. 다른 과목 선생님들과 말을 섞는 모습을 본 적도 없었다. 늘 고개를 치켜들고 복도를 지나다녔으나 짤막해 보이는 체형 때문인지 전체적으로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선생님은 매시간 교련 수업의 목적을 상기시키는 점을 잊지 않았고 지금도 그 말을 하려고 입을 떼려는 순간이다. 제군들. 선생은 학생들을 그렇게 불렀다. 1987년 4월이었다. 상계동 세입자 백여 명이 강제 철거에 맞서 시위를 벌이고 현행 헌법으로 내년 정권 교체를 위한 대통령 선거를 연내 실시한다고 대통령이 특별담화를 발표하던 때였다. 제군들, 이 수업의 목적을 아나? 제군들을 가르치고 단련시키기 위해서다. 단련이 무슨 뜻인 줄 아나? 몸과 마음을 굳세게 닦음이라는 뜻이다. 창가 쪽 맨 뒷자리에 앉은 여학생은 첫 수업에서 선생님이 교련의 원래 목적이 길들여진 신체를 만드는 거라고 말했을 때 느낀 서늘함을 잊지 못한다. 손재주가 없어서 ‘응급처치와 붕대법’ 과정으로 들어가면서부터 매시간 애를 먹고 있는 터였다. 다음 주 실기시험을 앞두고 오늘은 실습한다고 선생님이 말한다. 실시. 학생들은 일사불란하게 거즈로 만들어진 감은 붕대를 손에 잡는다. 목청을 올리지도 않는데 교련 선생님의 목소리에는 채찍이 달린 것 같다. 옆자리 짝꿍과 순서를 바꿔 가며 감은 붕대 뭉치는 오른손에, 끝은 왼손에 잡고 붕대 겉면을 피부에 닿게 해서 오른손으로 붕대를 굴려 가며 편편하게 감되 부상자에게 불편이 느껴지지 않도록 조절하면서 감는다. 앞에 감은 붕대의 폭을 이분의 일만큼 덮으면서 나선 모양으로 감는 나선대, 먼저 감은 붕대의 전체를 덮을 만큼 촘촘히 감아 나가는 환행대, 앞에 감은 붕대와 교차되도록 8자형으로 그려 가듯 감는 맥아대법까지.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교련 선생님이 지나갈 때마다 심장이 멎을 것만 같다. 뒷자리 여학생은 붕대 뭉치를 자꾸만 손에서 놓치고 등에는 땀이 흐른다. 붕대가 손에서 바닥으로 굴러 떨어진다. 교련 선생님이 구두소리를 크게 내며 뒷자리로 걸어온다. 선생님이 쥐의 분홍색 꼬리를 닮은 막대로 뒷자리 여학생의 양쪽 어깨를 두 대 친다. 정신이 거기에 있다는 듯 세게. 이번에는 삼각건을 이용한 응급처치법이다. 실시. 학생들은 일사불란하게 삼각건을 펴고 1절 접기, 2절 접기, 3절 접기를 한다. 끝매기법 같은 매듭짓기도 끝자리 여학생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다. 긴장한 탓에 손이 더 떨리고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흉부 손상, 실시. 선생의 목소리가 약간 커진다. 짝꿍의 한쪽 가슴을 싸매서 고정하는 1번 삼각건법의 순서가 기억나지 않아 여학생은 두리번거린다. 다른 학생들은 벌써 가슴의 삼각건법 2번을 실시 중이다. 짝꿍은 무표정하게 앉았고 교련 선생님이 다시 다가온다. 뒷자리 여학생은 구두소리만으로도 호흡이 가빠진다. 이주 전에 앞자리에 앉은 한 급우의 뺨을 교련 선생님이 치던 장면을 잊을 수 없다. 삼각건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제 교련 선생님은 뒷자리 여학생 옆까지 다 왔다. 손에 든 뾰족한 막대기로 짝꿍의 가슴을 묶은 삼각건을 건드린다. 탄탄하게 묶지 못한 삼각건이 풀어지고 만다. 교련 선생님이 뒷자리 여학생의 이마를 막대기로 쿡 찌르며 말한다. 너 같은 것들. 여학생은 눈을 감는다. 단련되지 못한 것들. 모두가 자신을 보고 있을 것이다. 고개를 숙인 채로도. 눈 떠. 선생님이 막대기로 뺨을 찌르며 나직이 명령한다. 눈을 뜨지 않는다. 그러기에 너무 두렵다. 눈을 뜨지 않아도 이미 교실 안의 세상이 기울었다가 흐릿해졌다.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눈 뜨래도, 실시. 교련 선생님이 막대기로 여학생의 몸을 북처럼 두드리는 것 같다. 여학생은 생각한다. 자신이 한 실수와 잘못에 대해서. 교련 선생님이 이제 자신을 일으켜 세우려는 모양이다. 학생들에게 부드러운 소리로 말한다. 의식 없는 환자 일으키는 3단계, 실시. 학생들이 책상을 치우는 소리가 들리고 뒷자리 여학생은 몇몇 손에 의해 교실 앞으로 거의 끌려 나간다. 부축법, 업기법, 업치기법. 지난주 교련 시간에 배운 맨손 운반법이고 뒷자리 여학생을 의식을 잃은 환자 삼아 학생들이 연습한다. 실시. 동작 그만. 선생님의 구령이 빨라진다. 실습 시간은 끝나지 않는다. 환자가 된 여학생은 후들거리는 자신의 다리가 자꾸만 예각으로 구부러진다고 느낀다. 누군가 갑자기 손을 놓으면 여학생은 진짜 응급처치가 필요한 사람처럼 몸을 가누지 못하며 쓰러진다. 다른 누군가는 업치기법으로 여학생을 등에 업었다가 바닥으로 팽개치듯 내려놓는다. 다 너 때문이야. 팽개치는 힘이 그렇게 말한다. 이 교실의 무언가 휘발되었다. 실시. 목소리에 생기가 묻어난다. 뒷자리 여학생은 다시 교실 바닥에 쓰러진다. 치마가 위로 올라갔다. 여학생은 늘 교체되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누구와도 교체되지 않는다. 여학생은 자신이 이 교실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느낀다. 자신을 지키기 위한 정당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눈에 띄고 싶지 않다는 갈망뿐. 자신은 ‘복종하는 용’ 말고도 다른 것일 수 있을 거란 생각을 버렸다. 여학생은 거듭 일으켜졌다 내팽개쳐졌다. 실시. 빠르고 조용한 명령이 반복될수록. 가여워. 아는 목소리가 들렸다. 바닥에 뺨을 대고 쓰러진 채 뒷자리 여학생은 부어오른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맞춤복만 입고 다닌다는 그 반 임원이었다. 선생님 그만하세요, 가여워서 못 보겠으니깐. 그 애가 나직하게 말했다. 아버지가 경찰청장이라는 말이 있었다. 학교의 모든 선생님이 그 애 말에 귀 기울였고 미소 지었다. 교련 선생님도 그랬다. 모두 제자리로, 실시. 뒷자리 여학생도 비칠거리며 일어났다. 어디로 가야 하지. 눈앞이 희뿌옜고 57명의 시선이 자신에게 꽂혔다. 두 손으로 다급히 얼굴을 가렸다. 수업 종이 울렸다. 교련 시간이 끝났다. 가여운 김미용. 교련 선생님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하며 여느 때처럼 고개를 치켜든 채 교실을 걸어 나갔다.

   그런데요,
   미용이 말했다.
   내가 쓰고 싶은 건 이게 아니었어요.
   그럼 뭐였는데요?
   교련 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창가를 내다보고 있었거든요. 내 자리에서 바로 복사나무 한 그루가 보였어요.
   나무요?
   수령이 오래된 복사나무라 학교에서도 유명했어요. 그날 꽃은 많이 졌지만 거칠거칠한 수피에서 팔처럼 뻗어 나온 가지에 새순이 길쭉하게 자라고 있었어요. 막 떨어지려는 꽃잎 사이에서 꽃받침이랑 꽃술도 보였어요. 바람이 부니까 꽃술이 꼼지락거리는 듯했고 연연한 분홍 꽃잎 몇 장이 후르르 떨어지는데 그게 기가 막히게 평화로워 보였어요. 그게 떠올랐어요.
   미용은 담담하게 말했다. 한 사람은 말하고 한 사람은 듣고 있었다.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았고 더 쓸 이야기가 남아 있는 듯했다. 재서는 기우는 태양 쪽으로 얼굴을 돌리며 상상했다. 그 선생님을 찾아서 미용은 자신이 죽지 않고 살아 있음을, 계속 자신으로 살아가고 있단 걸 똑똑히 보여주고 싶어 했을 거라고. 이 상상은 맞을지 모른다. 상기된 표정의 미용은 그사이 다른 데로 가 있는 것 같았으니까. 자신의 이야기를 쓴 짧은 글들이 미용을 그 자리로 옮겨 놓았다. 그동안 출력한 종이의 무게를 가늠하며 재서는 이 책에 나오는 내용은 모두 사실이지만 특정 인물의 이름과 지명은 모두 지은이가 지어냈다는 말은 본문이 아니라 맨 앞의 ‘일러두기’에 써두면 된다고 알려주었다. 일러두기라는 게 있었네요. 미용이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덧붙였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그런 게 있으면 좋겠다고. 왜요? 그러면 미리 동의를 구할 수도 있고 이해 같은 것도 갖게 될 테니까요.
   재서는 아직 버리지 않은 한쪽 장롱에 대해 말했다. 받침대를 받쳐 두었고 그걸 볼 때마다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버리지 않기로 했다고. 그리고 더 말하고 싶어져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름은 아직 남았다. 이불도 운동화도 햇빛에 바싹 말라 가고 있을 거였다. 잠깐만요. 재서는 뒤를 돌아봤다. 미용이 주머니에서 복면을 꺼내 쓰더니 아랫단부터 이마 위로 착착 접어 올리곤 한 손을 흔들었다. 복면을 접어 헬멧처럼 쓴 미용은 오후의 인광 때문인지 귀밑으로 짧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작지만 다부진, 하나의 절차를 통과한 사람 같아 보였다. 미용은 이제 밀치고 앞서가는 사람들 사이에 서 있지 않았다. 내려가는 계단에서 재서는 그 모습을 뚜렷하게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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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샬

마샬 민병훈 너는 물에 젖은 곰을 바라보며 웃고 있다. 너는 동물원에 가자고 갑작스럽게 말했다. 너는 배를 잡고 크게, 오래 웃는다. 곰을 바라보던 사람들이, 이제 너를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곰이 웃겨, 라고 물어 보는 대신 네 바지에 묻은 흙을 닦았다. 너는 눈가에 묻은 눈물을 닦으며 곰에게 손을 흔든다. 너는 동물원이 문을 닫을 때까지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곰을 본다. 너는 평소 그런 식으로 하나의 대상을, 하나의 풍경을, 하나의 장면을 오래 응시하는 습관이 있다. 나는 그사이 매점과 화장실과 흡연구역과 식물관에 다녀왔다. 너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서서 눈을 깜빡이고 있다. 곰은 두 마리였다가, 한 마리가 철문을 통해 어딘가로 향하고, 너는 아쉬운 듯 쩝 소리를 내면서, 다시 물웅덩이에 들어가는 곰을 지켜본다. 너는 뭔가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입으로 소리를 낸다. 나는 네가 어떤 기분일 때 어떤 소리를 내는지 전부 알고 있다. 곰이었다니까. 좀체 흥분하지 않던 네가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귀에서 잠시 삐, 이명이 들렸다. 휴대폰을 떼고 앞을 보자, 앞으로 넘어질 듯 꾸벅꾸벅 조는 사람들의 머리 사이로 잠실대교가 보였다. 언젠가 너는 시에서 대여하는 자전거를 타고 대교를 건넜다가 다리에 쥐가 나서 오도가도 못 하겠다고 전화한 적이 있다. 휴대폰 너머로, 자동차들이 빠르게 지나는 소리가 들렸다. 바람이 너의 몸에 부딪혔다가 흩어지는 소리. 너는 가까운 곳에서 곰이 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작은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배달음식. 너는 그때 상반신만 겨우 나갈 수 있을 정도로 문을 열고 봉지에 손을 뻗었다. 옆집 문이 열렸다. 너는 곰을 보고 놀라지 않았다. 곰은 자기가 음식을 주문한 것처럼, 하얀 봉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너는 종일 밥을 먹지 않았고, 몸이 아픈 건 아니지만 기운이 없었다. 퇴근길에 내게 아무 음식이나 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혹시 곰이 좋아할 만한 음식을 시켰는지 떠올렸다가, 그보다는 곰을 보고도 놀라지 않는 네게 놀라 가슴이 뛰었다. 어땠어, 묻자 곰이었지, 너는 말했다. 너는 동물원 폐장을 알리는 방송이 울리자 그제야 자리에서 벗어난다. 너는 뛰다시피 걷는다. 새로 산 운동화 끈이 풀린다. 허리를 숙여 끈을 묶는 동안, 너는 네가 본 그것이 저 곰만큼 크진 않았다고 말한다. 가면을 썼던 건 아닌지, 인형 알바 옷을 입었던 건 아닌지, 나는 묻지 않는다. 네가 등을 두드릴 때, 나는 다른 신발끈도 풀었다가 다시 묶는다. 지하철역까지 운행하는 셔틀버스에 오르고, 너는 어깨에 기대 곯아떨어진다. 나는 버스가 운행 노선을 한 바퀴 더 돌 때까지 너를 깨우지 않는다. 수중에 있는 돈은 삼십오만 원. 너는 휴대폰 액정에 은행 어플을 켜고 내게 보여줬다. 이게 다야. 이게 다지만, 첫 인사에 빈손은 싫으니까. 너는 두 달 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식상한 표현을 빌리자면, 마침 겨울이었고, 동면에 든 동물처럼, 하루의 반 이상을 침대에서 잠만 잤다. 네가 하던 일은, 네가 아니어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

  •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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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고관리자
  • 2023-05-04
이응 이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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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고관리자
  • 2023-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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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희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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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8-02 13:50:39
    권희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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