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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의 자리, 유령의 미래

  • 작성일 2024-01-01
  • 조회수 1,152

   유령의 자리, 유령의 미래


김다솔


   1. 이 유령은 그 유령이 아니다.


   이 글은 한국 소설과 관련하여 “2020년대적인 유령적 상상력의 힘을 톺아보려는 시선”1)을 모색해 보고 싶다는 다소 거창하고 민망한 바람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여기에는 최근의 소설들에서 대거 출몰하는 유령들을 향한 흥미는 물론이거니와, 그들을 향한 비평적 관심에 이끌린 사정 역시도 함께 담겨 있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최근의 유령들을 유독 ‘인간적’2)으로 보거나, 그들이 현실에서 정치적 변화를 추동하기에는 지나치게 미약한 힘을 가졌다는 평가다. 논의에 앞서 결론을 먼저 밝혀 두자면, 그것만으로 최근의 유령들을 간단히 정리해 버릴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어떤 관점이든지 사태의 총체를 담지 못하는 필연적인 결여를 안고 있다는 통상적 의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2020년대의 유령이 지닌 중요한 특수성을 놓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식에서 비롯되었다.

   먼저 무언가의 이면, 즉 그림자로 나타나는 유령이 반드시 인간과만 관련된 것일 필요는 없다. 유령은 그 자체로 인간 아닌 무언가를 지칭할 때 통용되는 단어가 아니던가. 특히 인류세 속에서 팬데믹과 기후변화를 겪으며 비인간 전회라는 전환이 이미 당도했음을 절감하는 지금, 행위자로서의 비인간 존재들을 어렴풋하게나마 더듬어 가려는 우리에게 유령은 오히려 인간-됨을 허무는 무언가로 접촉해 오는 듯도 하다.3)

   또한 후자의 평가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데, “세계가 어떠한 인과론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연적인 계기들에 의해서 구성되어 있다는 믿음 속에서, 젊은 작가들의 소설은 자유롭게 유령과 접속”4) 중이며, 따라서 “그들의 삶을 특정하게 속박하고 규정하고 있는 듯한 사회에 대해 어떤 방식의 구체적인 적대를 드러내는 것은 어려워 보”이기에 “자기위안과 무기력의 상태를 탈피”할 방법을 소설이 더 찾아 나가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5)

   그런데 이러한 평가는 비교 대상으로서 이전 시대의 한국 문학 속 유령과 환상의 경향을 논의하던 잣대를 그대로 적용하여 현재의 유령들을 바라보기에 다소 문제적이다. 자신을 산 죽음의 영역으로 내몬 세계와 불화하고 적대하면서 상징계에 구멍을 내던 실재로서의 유령6)과 견주어 보았을 때, 작금의 유령들은 지나치게 연약하다는 것이다.

   문제를 조심스럽게 확대해 보자면, 이러한 경향은 비평의 위기를 논하는 평단의 상황과 함께 놓고 볼 필요가 있다고 느껴진다. 인아영은 최근의 글에서 동시대 한국 문학 비평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진단, 즉 ‘무(無)비판’성과, 반대로 비판적 사고를 지식-권력의 기능으로 사용해 온 비평의 ‘과(過)비판’이라는 의견들을 검토하며 비평이 취해야 할 어떤 방향성을 모색하고 있다. 인아영에게 이러한 평가들은 사실상 “비판을 행위자들의 구체적인 실천이 아니라 주어진(주어지지 못한) 구조적인 전제로 이해”7)한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즉, 비판을 특정 목적을 상정한 채 그것을 ‘폭로’하는 기능에만 묶어 둘 때, 비평은 읽어내야 할 무언가를 이미 상정해 둔 채 텍스트를 오직 그것을 확인하는 도구로서만 이용하게 될 위험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독법은 문학을 ‘읽음으로써 도리어 잃게 하는’ 방식이 될 수 있다. ‘현재의 지배적인 비평 방법론으로서의 비판’과 ‘이를 부정하는 또 다른 비평 방법론’의 무의미한 반복 대신, 이분법이 작동되는 과정에서 누락시켰을지도 모르는 무언가에 더욱 다가서자는 해당 논지는 비평의 기계적 순환에 대해 고심하도록 만든다.

   멀리 돌아왔지만, 결국 현재 문학장에 출현하고 있는 유령들을 바라보는 시선들과 관련해 이 글이 건네고자 하는 말은 바로 이것이다. ‘이 유령’은 그때의 ‘그 유령’이 아니라는 것. 그러니 지금의 유령들이 지닌 힘을 다시 보고, 온전한 의미를 되돌려 주자는 것. 물론 유령에 대한 상상력은 문학의 오랜 주제 중 하나이며, 소설을 시기적으로 분류하는 방식이 긍정적인 의의만을 가지지 않기에 이러한 작업 역시도 분명히 어떤 한계와 누락을 지닐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인류세를 온몸으로 겪으며 살아내고 있는 지금, 우리 곁에 머무는 이 유령들은 특유의 환상적 속성을 통해 우리가 현재 마주하고 있거나 때로는 놓치고 있는 무언가를 바로 볼 수 있게 해줄지도 모른다. 언제나 그래 왔듯이, 하지만 조금은 다르게. 

   따라서 이 글은 문학이 유령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환상을 통해 다른 존재들과 맞닿는 감각을 쇄신하고 현실을 확장해 왔던 과거의 역사적 자장 안에 서 있되, 변화에 걸맞은 시선으로 소설과 나란히 눈을 맞출 수 있길 바라며, 지금의 유령들과 함께 기꺼이 부유해 보려 한다. 



   2. 전체를 다시 실감하기: 성긴 인간의 자리


   다소 가볍고 때로는 천진하며 한없이 유약해 보이는 이 유령들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를 위해 우선 이들과의 관계를 통해 현실을 바로 보고,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미래로 향하게 될 가능성의 여부를 가늠해 봐야 할 듯하다. 그리고 나는 어쩌면 그 만남이 인간의 척도에 맞춰 세워진 자본주의를 유일한 전체로서 생각하는 우리의 관습적 사고에 다른 상상력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싶다. 

   기후위기와 팬데믹을 겪으며 생겨난 유의미한 변화 중 하나는 다시 ‘전체’에 대해 사유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 전체를 새롭게 구성해야 하는 작금의 현실 속에서 완전무결하게 닫혀 있는 듯한 자본주의를 다시 사유할 가능성을 모색해야 한다. 그런데 “세상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야말로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는 용이한 방식”이 된 지금, 우기에겐 종말을 감수하기보다 “(종말하지 않은) 세상 속에 ‘실재하는’ 자본주의의 바깥을 발견하는 과제”8)가 시급하다.

   사실상 구획과 차별을 미덕으로 삼는 이전의 전체가 더는 기능할 수 없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는 중이다. 모턴은 자연과 문화를 구분하는 이분법에서 벗어나 모든 존재가 ‘공생적 실재’라는 연결망 안에 놓여 있다고 주장하며, 우리가 엮인 전체를 ‘생태계’로 다시 쓴다. 이때 그에게 생태계란 ‘자연 없는 생태(ecology without Nature)’이자 ‘어두운 생태(dark ecology)’다. 여기에는 인간이 임의로 그은 선 바깥의 것들을 자연으로 뭉뚱그려 사유해 왔던 관습에서 벗어나 오히려 인간의 척도에 잡히지 않는 사물들이 넓게 퍼져 인간의 세계를 둘러싸고 있으며, 그렇기에 전체는 그게 어떤 것이든 늘 서로가 서로에게 침투하고 영향 받을 수밖에 없는 유동적 상태에 놓여 있다고 보는 관점이 반영되어 있다.9) 즉, 인간의 좁은 세계를 둘러싼 채 그 너머까지 차지하고 있는 존재들과의 묘한 공생이자, 모든 것이 불확실하기에 존재의 단독성을 보장할 수 없게 만드는 비존재성이 함께 가득 찬 세계가 바로 생태계인 것이다. 이렇듯 생태계는 더 이상 인간과 분리된 순수한 대상으로서의 자연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의 세계 전체를 구성하는 근본적인 단위이자 또 다른 존재가 되었다.10)

   자본주의는 우리를 이러한 불확실한 연결성으로부터 소외시키는 방식으로 영속된다. “소외란 생명권, 즉 수천억 개의 구성적 존재자들로 넘쳐나는 과잉객체(hyperobject)와 연결된 사회적·정신적·철학적 관계 내의 균열이다.”11) 존재자들은 행위성을 가지고 언제나 무언가를 행하는 동시에 누군가의 행위로부터 늘 영향 받으며 조율되어 있다. 그렇기에 생산이란 사실상 존재들이 “하지 않을 수 없는 어떤 것”12)을 행위 하는 것이며, 그 행위가 서로에게 언제나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비밀을 함축하고 있다. 다시 말해, 생산은 인간적이고 비인간적인 모든 영향에 상호적으로 반응하는 방식이다. 자본주의는 늘 이와 같은 얽힘을 은폐하는 방식으로 그들과 관계 맺어 왔다.

   따라서 자본주의 바깥을 더듬어 보려는 노력은 이러한 연결성을 되찾는 곳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는데, 모턴은 객체지향 존재론자답게 모든 존재가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언제나 자신을 포함해 모든 존재로부터 물러나는 특성을 지닌다고 말한다. 존재는 ‘존재’인 동시에 ‘-존재’이며, 정확히 구획될 수 없기에 여타 존재들에게 열려 있는 일종의 취약성을 지닌다. 그렇다면 존재들의 불안정한 연결에 기대고 있는 자본주의 역시도 깨질 수 있는 깨지기 쉬운 무언가가 될 수 있다. 생태계는 이렇듯 유령처럼 진동하는 에너지들로 충만하다.

   이때 인간의 세계 너머까지 퍼져 온전히 포착되지 않는 이 존재들은 “다름 아닌 비인간(the nonhuman)이라는 유령”13)으로서, 견고해 보이던 우리의 세계와 존재가 근본적으로 “어른거리고, 기이하고, 낯설며, 유령적인 차원을 포함”하고 있다는 걸 말해 준다. 이들은 미지의 영역으로 사라지는 듯하다가도 언제나 세계 내부에 짙은 흔적을 남기며 잔존한다. 그렇다면 예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불쑥 다가와 우리와 세계를 이전과 완전히 다른 무언가로 바꿔 놓는 이 존재들을 2020년대의 유령이라 칭해 보면 어떨까. 그리고 이 유령들은 단순히 인간과 다른 비인간 혹은 인간이 존중하고 지켜야 할 대상이라는 소재적이고 당위적인 차원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한 존재의 내부에 다른 존재자들의 영향이 예외 없이 섞여 들어와 있다는 걸 상기시키면서 인간의 처지를 더없이 위태롭게 만든다. 그래서 유령들 속에는 때로는 우리가 감지하지 못한 인간의 어떤 모호한 면 역시 함께 포함되어 있다.

   특유의 유령성을 꾸준히 소설에 녹여 온 임선우의 근작 「초록 고래가 있는 방」14)(이후 「초록 고래」)은 인간의 동일성이 무너지는 자리에 들어차는 유령들의 형상이 어떻게 현실의 질서에 의문을 제기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발굴하도록 이끄는지를 보여준다. 「초록 고래」에는 현실의 삶에서 의미를 찾지 못한 채 고립된 두 여성 인물이 등장한다. ‘도연’은 자신이 만든 영화 <초록 고래>가 처참히 실패한 이후 시나리오 쓰기를 그만둔 채 술 없이 잠들지 못하고, ‘유미’는 사고로 남편을 잃은 후 몇 차례나 자살을 시도해 왔는데 그때마다 낙타로 변하는 “낙타 인간”(15쪽)이 되었다. 자신이 멀쩡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청소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던 도연은 누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찾아간 윗집에서 낙타로 변한 유미를 만나게 되고, 이야기를 나누며 가까워질수록 둘은 점점 완연한 인간으로서의 형상과 사회의 문법에서 벗어난다.

   이때 도연과 유미가 가까워질 수 있었던 중요한 계기가 바로 글쓰기였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유미는 낙타로 변해 있는 동안 일기를 녹음해 두었다가 이것을 옮겨 적는 방식으로 꾸준히 글을 써왔다. 그중 한 편의 소설은 커튼으로 변한 남편과 아내의 이야기로, 아내는 남편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를 잘라 입고, 걸치고, 먹기까지 하지만 그럴수록 그는 더욱 붙잡을 수 없는 무언가가 된다. 존재는 우리가 소유하려 할수록 멀어질 뿐이라고 말하는 듯한 이 소설은 개념과 설명은 생략하면서도 간신히 맞닿은 대상의 “생김새와 특징, 심지어 감촉”(37쪽) 등은 세심히 묘사하는 부분에서도 빛을 발한다. 이는 “객체들이 서로에게 말을 걸고, 서로를 포착하고 이해하는 방식”이 오직 ‘미적 차원’에서만 전개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15) 그렇기에 소설은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읽고 나면 무언가 전달받았다는 느낌”(37쪽)을 주는 것이다.

   유미의 소설은 우리의 내부에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유령성이 함께 있기에 존재는 결단코 균일화될 수 없다는 진실을 말하고 있다. 이는 도연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오게 된다. 사실 도연이 칩거하게 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영화의 실패 자체보다 그것을 “수면제를 뜻하는 인터넷 밈”(15쪽)으로 사용하며 조롱하던 사람들의 악의에 있었다. 타인에 대한 부정을 종용하는 사회의 비정한 질서에 짓눌리면서도 도연은 늘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아 왔고, 보여주기 위한 글만을 쓰다가 지쳐버린 것이다. 그래서 도연에게는 타인만을 의식했던 자신의 글과 달리 유미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힘을 푼 글”(33쪽)로 읽힌다.

   유미 또한 남편 없이는 삶의 다른 결들을 상상할 수 없었기에 그를 따라 죽기로 결심했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의도치 않은 낙타로의 변신처럼 갑작스레 틈입하여 인간 구조의 내부에 공백을 채워 넣는 유령성은 그녀를 완전히 다른 존재로 거듭나게 만든다. 나를 잃어버리는 이 과정은 마치 일종의 죽음처럼 느껴지지만, 이는 질서로부터 내몰려 여타 존재들과 단절되면서 겪어 온 이전의 상징적 죽음과는 전연 다른 의미를 지닌다. 비로소 다른 존재자들과 맞닿을 수 있는 어떤 열림을 품고서 돌아가게 된 인간의 자리는 자본주의가 아닌 생태계의 영역에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야만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25쪽)는 유미의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녀가 점차 다양한 가능성을 품을 수 있는, 유령성을 그러안은 성긴 인간이 되어 가고 있다는 걸 말해 준다. 

   그리고 유미의 글을 읽고 “이 년 만에 처음으로 다시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33쪽)을 하게 된 도연 역시 점차 ‘초록 고래’로 거듭난다. 소설의 제목이 「낙타와 고래」16)에서 「초록 고래가 있는 방」으로 바뀌게 된 것은 아마도 낙타와 인간 그 사이의 유미와의 관계에 영향을 받은 도연의 변화에 더 주목하려는 의도일 수 있지 않을까. 사람들은 특히 복수극에서 출발한 〈초록 고래〉가 피해자들이 서로 사랑에 빠지면서 복수의 실패로 끝나는 것을 비난했다. 하지만 낙타가 된 유미의 심장 박동을 들으며 영화를 회상하던 도연은 이제 그러한 강요와 억압으로부터 멀어진다. “어떤 복수는 복수하지 않음으로써 완성되지 않나.”(46쪽). 그리고 그녀는 영화에서 가장 좋아했던 장면 속 느리게 헤엄치는 “거대한 초록 고래”(46쪽)를 떠올리며, 그 자체가 되어 간다.

   전체를 다시 바라보게 하는 생태적 사유는 “하나의 척도가 아닌 수많은 척도에서 윤리적이고 정치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17)이기에 그 자체로 자본과 인간 등 단일한 규준을 영속화하는 질서를 위태롭게 한다. 그러니 순수한 인간성이란 허상일 뿐임을 깨닫고 기꺼이 자신의 내부에 유령들을 불러들이는 이들의 행보는 이미 우리의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어떤 힘을 보유하고 있다. 또 다른 복수를 발명하고, 인간성을 한없이 느슨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다른 존재에게 닿는 것처럼. 소외와 착취, 단절과 폭력을 기본 문법으로 삼는 자본주의의 바깥을 실감하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지금 이 유령들의 신비롭고 부드럽지만, 때로는 서늘하고 낯선 감촉이 필요하다.


   3. 지금, 여기의 미래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문학은 비인간과 최후의 간격을 지닐 수밖에 없는 인간의 위치에 대해 고심하고 있는 듯하다. 특히 이러한 논의는 신유물론의 자장 속에서 비인간 전회를 고민할 때, 언어가 가질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결여에도 불구하고 문학이 언어를 통해서만 그들과 만날 수 있다는 전제 앞에서 더욱 깊어진다. 번역의 폭력성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처지를 인지하면서도 다른 존재자와의 만남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인간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솔직한 고백들은, 거짓 공존을 표방하기를 거부하고 실천을 모색하려는 어려운 의지의 발현이기에 긴요하다.

   그러나 여전히 걸려 넘어지게 되는 지점은, 이러한 노력이 재차 “한층 의식적으로 비인간에게 마음 쓰는 쪽으로 이행하고 있”18)는 것으로 보일 때다. 이와 관련하여 생태에 관한 사유를 전개할 때 “죄책감을 유발하는 설교라는 솔깃한 수사적 방식을 최대한 지양하려”19)는 모턴의 태도는 고려해 볼 만하다. 무엇보다도 연결성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전체와 미래를 상상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지나친 ‘마음 씀’을 경계하는 관점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모턴은 하이데거가 현존재인 인간의 구조를 여타 존재와의 관계와 본래적 삶에 대한 ‘마음 씀’으로 지칭하며 인간을 보다 특별히 간주한 것처럼, 여기에는 인간의 의지와 능력을 과장하는 측면이 있다고 본다. 하지만 일렁이는 모순적 유령성으로 가득 찬 전체에서 인간은 더는 혼자서 결단을 내리고, 마음 쓸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이 의지적으로 행위 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가져올 결과를 누구도 예측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김연수의 「이토록 평범한 미래」20)와, 배명훈의 「미래과거시제」21)에는 다소 지나치게 마음을 쓰며 미래를 상상하는 인간의 모습이 담겨 있는 듯하다. 먼저, 김연수의 소설은 묵시록적 예언이 세계 전체에 떠돌던 1999년 여름에 함께 동반자살을 계획했던 ‘지민’과 ‘나’가, 시간여행을 다룬 한 소설을 계기로 결심을 무르고 미래에서 당시를 회고하는 이야기다. 이들이 살아가기로 결심한 것은 소설 속 연인들이 자신들의 시간의 끝에서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두 번째 삶을 산 이후에, 다시 과거부터 살아가는 세 번째 삶을 맞이하며 ‘더 나은 미래를 기억하는 방식’이 현재를 바꿔 놓을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시간의 끝에,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에 이르렀을 때 이번에는 가장 좋은 미래를 상상할 수 있기를”(23쪽) 선택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내 앞의 세계를 바꾸는 방법”(27쪽)이라는 사실은 “엄마도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상상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34쪽)라며 자살한 어머니를 떠올리는 지민의 말로 더욱 힘을 얻는다.22)

   배명훈의 「미래과거시제」 역시 특정한 미래를 현재에 확신할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믿음을 보여준다. 은경은 우연한 기회에 친분을 쌓게 된 튀르키예인 알트나이 교수의 언어학 강연에서 튀르키예어에 미래시제 어미의 오기로 여겨져 왔으나, 사실 미래에 대해 “화자가 과거시제로 말할 때만큼의 경험적인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경우에만 한정적으로 사용된 어미”(91쪽)가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이때 은경은 한글의 과거시제 선어말어미인 ‘았/었’을 종종 ‘암/엄’으로 쓰던 과거의 한 남자를 떠올린다. 미래에 일어날 일도 가끔 과거처럼 말하던 남자는 은경이 15년 전 대학교에 다니던 시절 미로 같은 건물에서 우연히 만난 ‘강은신’으로, 그는 “도저히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사람”(107쪽)이자 “미래의 일을 마치 과거에 직접 겪은 것처럼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사람”(92쪽)이었다.

   어느 날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강은신을 떠올리게 된 은경은 그와 과거에 주고받은 메일을 살펴보던 중, 그가 둘의 첫 만남을 설명하면서 당시를 “만남지”, “헤매고 있엄잖아”(115쪽)처럼 “과거에 직접 겪은 미래의 일”(116쪽)로 설명하며 은경이 그때 일을 기억하고 있어선 안 된다고 말했던 것을 찾아낸다. 이로부터 은경은 은신이 시간여행을 온 연구자로 미래로부터 당도했으며 자신이 규칙을 어겼다고 생각해 그녀와의 첫 만남을 바로잡고자 다시금 찾아오리라 확신한다. 단조롭게 흐르지 않는 시간 속에서, 은신처럼 미래의 인간이 시간의 방향성을 도모할 수 있으리라는 소망은 “마침내 김은경이 강은신을 처음으로 만남다.”(122쪽)는 확신에 찬 문장을 통해 재차 확인된다.

   이 소설들은 유령과 마주치면서 피어나는 다른 미래의 구현에 있어서 인간의 의지와 관련한 중요한 부분들을 되짚게 한다. 미래를 위한 인간의 노력에 기대를 거는 이러한 믿음들은 고통으로 중첩된 현실 속에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인간을 그려내기에 긍정적이지만, 정확히 그 부분에서 우려스럽기도 하다. 생태계 안에서 다른 존재자들에 의해 영향 받고 변형을 겪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위치는 자명해졌다. 그런데도 여전히 세계의 일부로서의 ‘인간’이 (유일하게)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만을 얘기하는 게 옳은 것일까. 이제 인간이 일부인 ‘세계’에서 행위 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더 많이 말해야 할 차례가 아닐까.

   그리고 여기, 인간의 영향력을 소거하지 않은 채 인간이 선 자리를 바로 보는 데서부터 다른 미래를 모색하는 누군가가 있다. 최진영의 『단 한 사람』23) 속 ‘신목화’는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나무와의 접촉 이후 뒤바뀐 삶을 살아간다. 예측 불가능한 비인간과의 만남은 이후 끊임없이 어떤 유령적인 ‘목소리’로 되돌아오고, 이러한 조우는 목화가 죽음을 구체적으로 목격하고 기억하도록 종용하여 인간인 동시에 인간일 수 없도록 연결된 삶을 되새기게 만든다. 

   소설 속에서 목화를 포함한 모든 인물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삶을 이끌어 갈 수 없는 현실에 부딪힌다. 이때 미래를 알 수 없게 만드는 존재의 정체가 다름 아닌 어떤 나무라는 사실은 사뭇 독특하다. 목화의 집안에서는 외할머니 ‘임천자’, 어머니 ‘장미수’ 그리고 목화에 걸쳐 꿈속에서 오직 ‘단 한 사람’만을 구할 수 있는 능력이 세습되어 내려온다. 불가사의한 무언가에 의해 강제로 소환당한 곳에는 수많은 죽음이 있고, 이들은 누군가를 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자신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어떤 ‘목소리’가 선택한 사람만을 구할 수 있다. 

   ‘신’으로 표현되는 목소리의 주인과 살리는 힘은 이들 각자에게 다른 의미를 지닌다. 가령 순응하는 천자에게는 “거부할 일도 아니고 원망할 일도 아”닌 “기적”(90쪽)이며, 살아남은 단 한 사람보다 죽은 사람들을 기억하는 미수에게는 “사람을 살리는 존재가 아니라 죽도록 내버려두는 존재”(73쪽)이기에 저항해야 할 “악마”(92쪽)다. 이럴 때 인간은 목소리에 행동을 지배당한 채 오직 순응하거나, 저항하더라도 무력함만을 반복해서 확인하는 존재처럼 여겨진다. 그런데 목화에게 이 신은 운명을 바꾸기 위해 그 의도를 알아내야 할 ‘목표’이자 나무다. 설명할 순 없지만 직감적으로 목소리가 신이 아닌 나무라는 걸 알게 된 목화는 인간인 자신의 역할을 “나무와 사람 사이의 중개”(99쪽)를 담당하는 ‘중개인’으로 정의한다. 나무와 인간. 목화는 그 사이의 존재로 자신을 재정립한다. 특히 “나무가 사람을 살리라고 해도 목화 없이는 살릴 수 없다는 점이 중요”했기에, “목화는 자기 몫을 잊지 않으려고 했다.”(99쪽)


   그 나무는 경이를 넘어선 경악이 있다. 그 나무는 현존한다. 꿈과 현실 사이에서, 끔찍한 구토라는 육체적 고통과 죄책감이라는 인간적인 감정을 이용하여 목화를 지배한다. 목화는 이제 그 나무의 잎 모양을 알고, 열매의 크기를 알고, 꽃의 생김새를 안다. 그러나 그 나무의 마음은 알 수가 없다.(161쪽)


   목화는 “언젠가는 그 나무를 알아낼 수 있으리라는 희망”(133쪽)을 품고 살아간다. 하지만 중개를 통해 나무와 관계하면 할수록 나무는 현존하면서도 물러나면서 목화가 결코 전부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를, 어떤 “마음”을 지닌다. 이 나무는 소설의 첫머리에 나온 “줄기는 둘이나 뿌리는 하나로 얽힌 두 나무”(21쪽)로, 오랜 세월 동안 존재하다가 인간의 개발에 의해 “강제적인 죽음”(19쪽)을 맞이한 이후 되살아난 존재다. 그리고 이 나무는 사람에게 파괴된 적이 있는 동시에, 사람을 파괴한 적도 있다. 어린 시절 목화는 쌍둥이 ‘신목수’ 그리고 언니 ‘신금화’와 함께 산을 찾았다가 목수와 금화가 나무에 깔리고 결국 금화가 실종되는 사건을 겪었다. 이 우연한 만남은 목화의 삶에 계속해서 유령처럼 스며든다. 사람을 구하면서 “어떤 틈과 같은 것. 꿈과 현실의 균열. 어긋나는 지점. 또는 미세하게 맞닿은 선. 증명할 수 없으나 존재하는 세계. 가능성으로 남아 인식 너머에 존재하는 사건”(63쪽)을 반복해서 경험한 목화는 “숱한 가능성이 진실로 존재하는 각각의 세계를 상상”(66쪽)할 수 있게 된다.

   결국 나무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존재로 남는다. 마찬가지로 금화의 실종에 대한 진실도, 왜 원하는 사람을 구할 수 없는지도 무엇 하나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는다. 그러나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이 관계들의 반복이야말로 무수한 존재들의 삶과 죽음을 끝없이 들여오는 계기로 작용하면서, 목화를 인간인 동시에 다른 가능성을 품은 유령적 존재로 확연히 변화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가 때로는 사람들의 죽음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으며 모두를 구할 수도, 원하는 사람을 구할 수도 없기에 인간은 무력할 뿐이라는 인식을 함께 바꿔 놓으면서 세계를 다시 바라보고 행동할 수 있는 길을 연다.

   샤비로는 존재와 존재의 만남에서 서로 물러나게 되는 현상을 절대로 관계할 수 없는 존재의 실체의 증거로 받아들이지 않았다.24) 오히려 물러남과 함께 사물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 만짐 자체가 인지나 지식이 접근할 수 없는 양태로 일어나는 것”을 겪고 있다. 따라서 물러나는 객체와 만나는 인과성의 미적 성격은 멀어짐이 아니라 “원격접촉”25)에 더 가깝다. 즉, 존재의 특성인 ‘물러섬’은 사실상 ‘열림’과 다르지 않다.26) 우리는 다른 존재자를 완연히 이해하거나 만질 수 없지만, 오히려 나를 벗어나는 그 관계가 주는 영향 때문에 변화될 수 있다.

   그러므로 물러남을 인정하는 태도는 책임을 외면하는 속 편한 방기가 아니라 인간이 더는 무엇을 독단적으로 행할 수 없는 존재라는 뼈아픈 통찰을 새기고, 거기서부터 행위를 모색하려는 지극히 현실적인 행위의 준비 과정이다. 이 과정을 거쳐 인간이 무언가를 한다면 그것은 우세한 종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선택할 수 없는 공존, 도래시킬 수 없는 미래라는 현실을 ‘이해하면서 하는 것’이다. 인간을 돌보고 마음 쓸 수 있는 남다른 역할과 위상을 가진 존재로 구축하는 순간, ‘인간이 마음 쓸 수 있는 만큼’의 한정된 대상과 영역에 대한 합리화가 즉각 뒤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지나치게 마음 쓰지 말라는 것은 여타 존재자들에게 무감하고 냉담히 굴라는 권유가 아니라 “확장 된 마음 씀”과 “장난스러운 진지함”27)으로 바꿔 행동하자는 말이다. 그러한 대체는 비록 의지의 행사가 긍정적인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고 해도, “총체적으로 알 수 없는 존재자들을 ‘신경 써서’ 그려내는 행위야말로 비인간적 행위자들의 모호성을 걷어내고 인간이 그들의 미래를 ‘좋은’ 방향으로 결정할 수 있다는 인간 중심성”28)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다는 문제의식의 소산이다. “인간과 비인간에게 덜 폭력적으로 마음 쓰는 것, 그러니까 그것들이 존재하도록 아무 이유도 없이 그저 허용하는 것”29)이야말로 인간이 진정으로 갖춰야 할 마음 씀의 태도일 수 있다.

   이러한 태도가 인간이 그동안 저질러 온 행동에 대한 부인으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 오늘날 인간의 교란은 망각될 수 없이 자명하다. 다종의 세계에서 협력은 오염과 교란을 모두 포함하는 과정이며, 그중에서도 인간은 다른 종을 제압하고 차별하는 방식으로 참여해 왔다. 그런데 인간이 산업화와 핵전쟁을 통해 폐허로 만든 오염의 자리를 오히려 다양성과 생명의 터전으로 삼아 탄생한 송이버섯의 출현30)처럼, 공생은 인간의 손을 떠난 곳에서 불확정적으로 흘러간다. 인간의 행위가 미치는 교란을 인정하고 다르게 행위 할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가져올 결과를 속단하지 않는 것. 지금의 인간에게는 그러한 자세가 필요하다.


   목화는 멈추지 않았다. 단 한 명을 살리는 일을 거부하지 않았다.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왜냐하면 누군가에게는 목화 또한 죽음이 덜 억울할 사람, 누군가를 위해서 대신 죽어야 할 사람, 죽어도 상관없는 사람으로 보일 테니까. 목화는 타인의 삶과 죽음에 판단을 멈추었다. 그리고 중개 중에 이전에는 하지 않는 것을 했다. 마음을 다해 명복과 축복을 전하는 일. 죽어가는 사람과 살아난 사람의 미래를 기원하는 일. 그것은 나무의 일이 아니었다. 사람으로서 목화가 하는 일이었다. 나무의 지시가 아니었다. 목화의 자발적인 마음이었다.(221쪽)


   목화는 이제 죽음의 의미를 “사람이 살아서 숨 쉬고 활동할 수 있게 하는 힘이 없어지는 현상”(205쪽) 너머로 확장시켜 이를 삶과 겹쳐 놓는다. “뒤섞인 존재가, 사이가, 현상이, 모호한 상태가 훨씬 많”(215쪽)기에, “그 외의 더 많은 의미가 모여 사람을 이룬다”(206쪽)는 걸 깨닫게 된 것이다. 인간은 이렇듯 모든 모호성과 모순성을 가진 채 살아가는 유령적 존재다. 그리고 이는 모든 존재의 선결 조건이기도 하다. 그러니 자신이 살린 ‘단 한 사람’을 찾아가 “단 한 명의 목소리”(213쪽)를 듣고,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결심하는 목화의 변화는 뭉클하게 다가온다. 목화가 수긍한 운명은 다른 존재자들과의 불확실한 공생에 던져진 인간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거기서부터 다시금 나아가야 한다는 깨달음 그 자체다. 그래서 그 삶은 이제 나무의 명령에만 지배받는 삶이 아니라, “목화의 것”(233쪽)이 된다. 거기에는 비인간 존재자를 파괴하는 인간, 인간을 파괴하는 비인간, 폭력적인 자본주의적 질서 안에서의 차별과 그로 인해 무너지는 수많은 죽음을 마주하는 일들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수용 이후에야 나무의 목소리는 다른 가능성으로도 들려온다. 거대한 연결망 안에서 너무 미미하고 순식간에 사라지는 한 존재에 불과하더라도, “오직 너라는 한 존재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어쩌면 그저 알려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고.(233쪽)

   그럼에도 여전히 인간에게는 다른 존재보다 더 특별한 “80억분의 1”(99쪽)인 어떤 존재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인간이 부단히 마음 써야 하는 이유들은 주로 이런 마음으로부터 온다. 하지만 인간은 함께 얽힌 세계에서 생명의 존귀한 정도를 고를 수 없고, 특별한 누군가를 선택할 수도 없다. 따라서 목화가 판단을 멈추고 살릴 수 있는 한 명을 적극적으로 구하는 한편, 확신할 수 없는 미래 앞에서 그저 “기원”하는 것을 “사람으로서 목화가 하는 일”로 인정하는 것은 지금의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태도다. 

   이렇듯 존재가 언제나 심오한 유령성을 안고 접근할 때, 관계는 무한히 새롭게 도래할 수밖에 없다. 동시에 미래 역시 이 불확실성의 만남 속에서만 생겨난다. 그렇다면 생태계는 유령들과의 관계 속에서 무수한 미래가 터져 나오는 곳이다. 미래는 허구적인 인간의 능력을 앞세우면서가 아니라,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무언가에 빨려 들어가면서 생겨난다. 존재자들의 포착할 수 없는 어떤 면들과 맞닿는 이 마법의 경험들을 통해 우리는 “미래를 보되, 예측할 수 있는 미래가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본다”.31)

   생태계는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지만, 바로 그렇기에 근본적으로 불확실하고 불안하다. 서로 마주치고 충돌하며 협력하고, 교란과 오염을 반복하는 것만이 생존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런 사정 때문에 공생의 미래는 마냥 긍정적일 수 없다. 존재들은 소설 속 나무와 인간의 관계처럼 이해할 수 없기에 서로 불화하거나, 폭력을 가하기도 한다. 인간의 행위 역시도 언제나 다른 존재들과 연결된 그물망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망에는 구멍이 뚫려 있어서 원하는 모든 걸 다 담아낼 수도, 무언가가 새어 나가는 일을 막을 수도 없다. 우리는 알 수 없는 존재들과의 불화와 화합 모두를 전제하고, 부단히 노력해도 원하는 미래를 앞당겨 올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인정한 곳에서부터 마음 쓸 수 있는 존재다. 이러한 인간의 위치는 우리가 여타의 존재들과 자신을 구별하기 위해 깊게 파두었던 언캐니 밸리가 사실 평원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생명체와 연대하고자 하는 투쟁은 유령과 유령성을 포함하려는 투쟁이다.”32) 그러니 인간으로부터 일탈하는 형태로 출몰하는 이 유령들의 장소는 이전에 구축되었던 세계를 위태롭게 만드는 윤리적인 동시에 정치적인 유령의 평원이다. 여기서 “우리는 샅샅이 인간인 것은 아니다”.33) 그리고 우리는 이미 그곳에 도착해 있다. 이 유령의 자리에서부터 새로운 미래는 다시 쓰일 것이다.


1) 따라서 이 글은 졸고 김다솔, 「유령이 무슨 색으로 빛나는지 아세요?」, 『자음과모음』 2023년 겨울호. 의 문제의식을 확장하려는 목적에서 쓰였다.
2) 박혜진은 최근의 “유령이나 환영은 ‘나’와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나’를 완성시켜 주는 존재이며, 따라서 일체감과 동일시의 대상”이라 밝히며 이 유령들이 인간의 “구조”와 “생존”을 위해 동원되는 경향이 있음을 밝히고 있고(박혜진, 「인간의 얼굴을 한 유령, 유령의 얼굴을 한 인간」, 『문학들』 2023년 봄호, 37쪽;39쪽.), 이희우는 “오늘날의 청년세대가 상황을 바꾸려는 의욕이나 상황이 더 나아지리라는 기대를 품기 어렵다는 사실, 그리고 그러한 환경에 소설들이 각자의 반응”으로 최근의 유령들이 “희망 없는 생활, 실패하거나 끝난 사랑, 가까운 이의 죽음, 적대와 혐오, 못다 한 애도”처럼 “오늘날 새삼 다시 증가하는 유령들은 (유령이 되어서도!) 생활의 끈질긴 중력을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고 말한다.(이희우, 「멸망보다 긴–김지연, 나푸름, 임선우 소설에 나타난 인간의 유령들」, 『문학들』 2022년 겨울호, 52쪽;65쪽.)
3) 그런 의미에서 최근 한국 문학의 새로운 유령들이 “오히려 스스로 인간이 되기를 멈춘 자들”로서, “인간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대신에, 인간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설명하길 요구”하고 있다는 통찰은 유의미하다.(김요섭, 「우리가 인간이기를 멈출 때」,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2년 겨울호, 29쪽.
4) 허병식, 「정치적 낭만, 젊은 작가들의 기연론에 대하여」, 『문학들』 2023년 봄호, 50-51쪽.
5) 위의 글, 52쪽.
6) 허병식, 「2000년대의 한국소설과 환상의 몫」, 『계간 시작』 2006년 겨울호, 77쪽.
7) 인아영, 「비평과 사랑: 포스트 비평과 동시대 한국 문학 비평의 논점들」, 『문학동네』 2023년 겨울호,
8) 황정아, 「미래를 도모하는 문학」, 『창작과비평』 2022년 겨울호, 21쪽.
9) 티머시 모튼, 『생태적 삶』, 김태한 옮김, 앨피, 2023, 86-89쪽 참조.
10) 김미정은 세 번의 비평에 걸쳐 시장에서 생태계로 전체를 다시 사유하는 중요한 작업을 수행했다. “생태, 생태계를 통상적인 ‘자연’의 이미지, 이해로부터 이탈시”켜, 전체를 자본주의적 시장에서 공존과 상호침투와 연관의 생태계로 바꿔 사유함으로써 “단순히 시장 모델로 환원되기 어려운 살아 움직이는 무엇”을 찾고자 하며, 이때 문학이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질적인 작품 분석에서 인간 여성과 트렁크의 겹쳐짐에 집중하는 서술 방향은 이 글의 논지와 결을 달리한다. 생태계는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하나로 으깨지지는 않은 존재들이 서로 영향을 받으면서도 물러나는 불확정성을 모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김미정, 「시장에서 생태계로」, 「‘생태계’를 말하기 전에 질문할 것들」, 「문학과 생태계」, 『문장 웹진』 2023년 4·5·6월호.)
11) 티머시 모턴, 『인류』, 김용규 옮김, 부산대학교출판문화원, 2021, 39쪽.
12) 위의 책, 99쪽.
13) 위의 책, 15쪽
14) 임선우, 「초록 고래가 있는 방」, 『초록은 어디에나』, 자음과모음, 2023. 이하 본문 인용 시 괄호 안에 쪽수로 밝힌다.
15) 티머시 모턴, 『실재론적 마술』, 안호성 옮김, 갈무리, 2023, 113쪽.
16) 임선우, 「낙타와 고래」, 『문학동네』 2023년 여름호.
17) 티머시 모튼, 『생태적 삶』, 85쪽.
18) 위의 책, 149쪽.
19) 위의 책, 12쪽.
20) 김연수, 「이토록 평범한 미래」, 『이토록 평범한 미래』, 문학동네, 2022. 이하 본문 인용 시 괄호 안에 쪽수로 밝힌다.
21) 배명훈, 「미래과거시제」, 『미래과거시제』, 북하우스, 2023. 이하 본문 인용 시 괄호 안에 쪽수로 밝힌다.
22) 이소 역시 핼 포스터의 논의를 경유하며 해당 소설이 인간이 실재를 연약한 구성물로 간주하고 “바람직한 실재를 창출하고 돌보”는 관점을 포함한다고 분석한 바 있다. 해당 논의는 이 글과 신유물론에 대한 태도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만, 실재를 돌볼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경계하는 데 있어서 만나는 지점이 있다고 여겨진다.(이소, 「비평의 몰락을 한탄하지 않는 방법」, 『문학동네』 2023년 겨울호, 101쪽.)
23) 최진영, 『단 한 사람』, 한겨레, 2023. 이하 본문 인용 시 괄호 안에 쪽수로 밝힌다.
24) “나는 언제나, 나를 부르는 사물, 나를 스치는 사물, 나에게 기쁨을 주거나 거부감을 주는 사물, 혹은 피상적으로 나와 조우하는 사물에 의해 영향 받고 변화되고 있다. 사실상 이러한 사물이 나의 내적 삶을 촉발하는 이유는 정확히 나와 분리된 것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사물들을 내 안에 간단히 사유화시킬 수 없다.”(스티븐 샤비로, 『사물들의 우주』, 갈무리, 2021, 259쪽.)
25) 위의 책, 265쪽.
26) 티머시 모턴, 『인류』, 68쪽.
27) 티머시 모턴, 『실재론적 마술』, 87쪽.
28) 김다솔, 앞의 글, 406쪽.
29) 티머시 모튼, 『생태적 삶』, 237쪽.
30) 애나 로웬하웁트 칭, 『세계 끝의 버섯』, 노고운 옮김, 현실문화연구, 69쪽.
31) 티머시 모튼, 『생태적 삶』, 155쪽.
32) 티머시 모턴, 『인류』, 215쪽.
33) 티머시 모튼, 『생태적 삶』, 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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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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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다야
    감동했어요

    잘 읽었습니다

    • 2024-01-30 04:18:15
    다야
    감동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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