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 작성일 2024-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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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의 벤다이어그램
이소
1.
스무 살을 훌쩍 넘어 성인이 되어도 자신을 어른으로 여기지 못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 뉴스를 보면 언제나 피해자의 억울함에 몰입하고, 많은 경우 나를 포함하지 않은 채 ‘어른들’에게 분노를 터트리는 사람.
2014년 4월 16일, 이 날 나는 처음으로 어른의 자리에서 사건을 경험했다. 아이의 자리가 아닌 해운회사의 직원이나 공무원이나 인솔 교사의 자리에 서 있었다. 항해사나 해경보다 교사인 나를 떠올리기가 더 쉬웠다. 누구나 교사라는 직업에 대해서는 동원할 수 있는 충분한 양의 기억이 있으니까. 나는 전문가를 깊이 신뢰하는 사람이었으므로, 내가 그 배에 탔다면 안내 방송을 충실히 따르며 어른들과 시스템을 믿으라고 아이들을 다독였으리라는 걸 알았다. 누가 보아도 나는 완벽히 어른이었다. 굳이 괴로웠다는 말을 덧붙일 필요도 없이 그때는 모두가 괴로웠다.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다음해 문학을 전공하러 대학원에 들어갔다. 누군가 공부라는 게 어떤 실천이 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아무런 답변도 떠올릴 수 없다. 나부터가 그런 희망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전처럼 살 수 없을 뿐이었다. 나는 어른이었고,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수습될 수 있는 사고가 아니라 소화할 수 없는 사건이었으며, 내게는 더 정확한 언어가 필요했다. 딱 거기까지 생각할 수 있었다.
2.
지금도 교사인 나를 상상해 본다. 항해사나 해경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교사라는 직업과 위치가 내게 어른이란 무엇인지 사고실험을 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다른 직업과 달리 미성년인 학생들을 상대하는 교사는 흔히 이중적인 이미지로 재현된다. 전교조와 교총을 교대로 인터뷰하는 기사의 관례처럼, 전통을 수호하는 보수적인 교사와 변화를 추동하는 진보적인 교사가 대립하는 양상으로 그려지는 건 흔한 일이다. 제도가 부여한 의무와 규범을 학생들에게 어디까지 얼마만큼 요구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한 명의 교사를 그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지만, 이 경우에도 그의 심리적 갈등은 그의 교육방식에 딴지를 걸 더 완고한 교사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떠올려 보면 전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결코 전위적인 존재에 도달할 순 없지만, 마땅히 후위의 역할은 초과해야 하는 사람.
그러나 생각해 보면 교사만 그럴 리는 없다. 모든 직업은 사회가 요구하는 허용범위 안에서 가까스로 변주를 시도하고, 모든 부모는 자녀를 양육하며 유사한 딜레마에 빠진다. 교사는 자신의 의무를 익히 아는 어른의 상징이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점점 학생보다 교사에게 더 쉽게 이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문제는 오래되고 흔한 방식의 재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재현이 더는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데 있을 것이다. 어차피 시대가 변한 줄 모르는 늙은 교사들은 두려운 존재가 될 수 없다. 보수적인 교사와 진보적인 교사의 대립은 기성세대와 새로운 세대가 갈등을 통해 사회를 혁신하는 재생산 메커니즘의 갱신을 상징한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처럼 학교에서 쫓겨나는 키팅 선생을 향해 책상 위에 올라가 경례를 올리던 열렬한 학생들도 결국 대학과 사회로 진출하여 어른이 될 것이다. 재생산의 회로는 결코 멈추는 법이 없고, 오히려 키팅 선생 같은 이들에 의해 다음 시대에 적합한 방식으로 조율되어 생산성을 유지한다. 그렇다면 더 이상 뜨거운 가슴을 지닌 진보적인 교사를 그려낼 수 없는 상황, 기성의 제도와 대립하여 학생들의 환호와 지지를 얻는 반골 교사를 상상할 수 없는 상황, 기성세대와 구별되는 다음 세대를 키워낼 새로운 유형의 교사를 재현할 수 없는 상황은 어떤 상황인가. 당연하게도 오래되어 낡고 삐걱거리는 회로가 여전히 유효해서는 아닐 것이다. 그저 사회가 갱신되고 개혁되기를 기대하는 쪽이 그보다 훨씬 더 어려워졌을 따름이다.
3.
「너머의 세계」1)의 연수는 교사를 그만둔다. 학생과 학부모의 괴롭힘에 시달리고 동료 교사들의 무시와 냉소에 상처를 입은 채 연수는 “중앙 현관을 넘고 나면 이제 다시는, 어떤 문 안으로도 몸을 들이지 않을 작정”(168쪽)으로 학교를 떠난다. 젊은 교사인 연수는 자신만의 교육 방침을 고수하다 자포자기한 것도, 제도에 맞서 신념을 지키려다 탈주한 것도 아니다. 연수 앞을 가로지른 선 안쪽에는 자신을 만만하게 여기는 학생과 학부모와 동료 교사들이 서 있다. 모두가 연수를 한심하게 여기고, 연수는 눈앞의 선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바깥에 점으로 존재한다. 만약 소설이 학부모와 학생의 갈등을 재현한다면, 연수에게는 제자의 고통을 공감하며 그와 연대를 형성하는 선택지가 주어지거나 혹은 어머니와 연대를 형성하여 제자를 설득하는 선택지가 주어질 수 있다. 반대로 학생과 학부모가 돈독하더라도 그들을 바라보며 동료 교사들끼리 서로 이해하는 과정을 재현한다면, 연수가 난관을 극복하든 극복하지 못하든 교사로서 어떠한 행위를 하고 그로 인한 결과를 수용하는 과정을 밟아 갈 수 있다. 그러나 선은 오직 연수 앞에만 그어진다. 그 단절선 앞에서 연수는 어떠한 교훈이나 경험도 얻지 못한 채 홀로 학교를 떠난다.
다시는 어떤 문으로도 들어가지 않기로 한 연수의 세계를 벤다이어그램으로 그려 보면, 단 하나의 원소로 이루어진 작은 집합과 수많은 원소로 이루어진 커다란 집합이 아무런 교집합 없이 나란히 놓인 모양으로 그려질 것이다. 연수는 자신으로만 이루어진 집합 안으로 아무도 들이지 않는다. 학교를 그만둔 후 사람을 상대하고 싶지 않아 무인가게 청소일을 하던 연수는 행색이 초라한 어린아이가 자꾸 가게에 찾아와 비닐째 육포를 뜯어 먹는 기이한 광경을 목격하지만, 그 모습을 문밖에서 물끄러미 바라볼 뿐 안쪽으로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연수의 벤다이어그램에서는 누구도 연수보다 약자일 수 없다. 언제나 연수는 선 바깥에 홀로 서 있고, 선 안쪽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여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연수는 너머의 세계에 있기로 했다. 그것은 부끄러운 선택이 아니었다. 적어도 연수에게는 그랬다.”(168쪽) 상처의 권리라고 해야 할까, 약자의 권리라고 해야 할까. 연수의 집합론에서 연수 한 명으로 이루어진 집합에는 어떠한 포함관계나 교집합도 고려되지 않는다.
고통의 재림을 상상하며 불안을 느끼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상처는 사람을 위축시키고, 자신의 상처에 깊이 함몰된 자가 그리는 그림은 ‘나’와 ‘내가 아닌 것들’의 대립으로 표현된다. 내 앞을 가로지르는 선, 그리고 선 너머의 전부. 그러나 소설이 등장인물을 변호하는 형식이 아니라 등장인물을 통해 질문을 제기하는 형식이라고 믿는다면, 연수가 그리는 단순한 벤다이어그램이 던지는 결코 단순하지 않은 질문을 곱씹어야 할 것이다. 과연 자연스럽다는 것은 자연스러움 이상의 가치를 담보할 수 있을까. 연수가 느끼는 불안과 공포가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해서 그것을 타당한 태도와 선택이라고 보증할 수 있을까. 어떠한 선도 넘지 않고 선 바깥의 점으로 남기로 한 연수의 선택은 이후 이어질 삶에서 언제까지 얼마만큼 알리바이로 인정될 수 있을까.
위험에 노출된 어린아이조차 선 안의 존재로 바라보는 시선, 내가 아닌 모든 것을 선 안쪽의 것으로 바라보는 공포심과 경계심 어린 시선은 아마도 어른의 시선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길을 잃고 배가 고파 무인가게에 드나들던 어린아이의 눈에는 연수야말로 선 안쪽의 존재로 보였으리라는 점을 떠올려 보면, 연수의 회피가 정말 “적어도 연수에게는” “부끄러운 선택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을지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어떤 상황에서나, 매번 같은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적어도 그런 어른은 없다. 점으로 남아 보호할 수 있는 ‘나’, 선을 넘지 않아 지킬 수 있는 ‘나’라는 존재가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른의 시작이니까. 어른은 많은 것을 지킬 수 있는 자가 아니라 다만 포기하는 법을 아는 자에 가깝다.
4.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2)의 희주 역시 교사를 그만둔다. 희주는 기후위기로 꿀벌이 사라지고 해수면이 올라가는 뉴스와 다큐멘터리를 보며 정말 “화내야 하는 일과 화낼 필요가 없는 일을 정”해야 한다고 믿었고, ‘할 필요 없는 일’들에 골몰하는 학생들에게 서둘러 그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다.
어차피 인간은 죽는 건데. 다 같이. 희주는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들과 괴롭히는 아이들에게도 이 사실을 빨리 알려주고 싶었다. 어차피 우리는 모두 물에 잠길 거다. 잘하면 30년 뒤에. 다 같이 죽는 거지. 희주가 그 말을 한 건 아이들을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희주가 근무하던 사립학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194쪽)
학교를 그만둔 후, 희주는 환경 관련 기사를 스크랩하고 식물을 키우고 채식을 하고 수영장에 다닌다. 자기혐오와 자기연민을 오가며 불안에 시달리는 연수에 비하면, 지구에 사는 온갖 생명체를 향한 연민으로 가득한 희주의 일과는 한가하고 평화로워 보인다. 연수가 생활을 위한 최소한의 일과만 유지하며 살아간다면, 희주는 온갖 취미반에 등록하여 이것저것 배우기를 멈추지 않고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요리하는 일에 쏟아 부으며 무해하고 정성스러운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희주의 세계를 벤다이어그램으로 그려 보면, 언뜻 상반되어 보이는 연수와 희주의 세계가 사실은 상당히 유사한 모습을 하고 있음을 알아볼 수 있다. 세상의 멸망을 실감하는 희주 한 사람으로 이루어진 작은 집합과 멸망 앞에서도 아등바등 욕심을 부리는 나머지 사람들로 이루어진 커다란 집합이 나란히 놓여 있는 모양. 희주 엄마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희주의 삶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기에 두 집합 사이에 교집합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형태가 유사하다고 해서 희주와 연수의 벤다이어그램에 아예 차이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희주의 벤다이어그램에는 한 겹의 집합이 더 존재한다. 희주의 집합과 다른 사람들의 집합을 모두 포함하는 전체집합. 인류세 시대의 생명체를 원소로 삼는 거대한 집합이 이 모든 것을 감싸며 한 겹 더 크게 그려진다. 그러니까 희주의 집합은 주변 사람들의 집합과 교집합을 형성하진 않지만, 전체집합의 차원에서 보면 두 집합 모두 인류로서 생명체에 포함되는 부분집합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비록 관념적인 형태일지라도 희주가 푸릇푸릇한 것들에 대한 애착과 인류에 대한 연민을 지니는 것은 이 때문이다. 희주와 연수 두 사람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과 기꺼이 분리되길 선택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지만, 학교를 그만둔 후 깨지기 쉬운 도자기처럼 고통의 역치가 급격히 낮아진 연수와 달리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전체집합의 균질한 원소로 바라보는 희주는 오히려 무덤덤한 구석이 있다. 연수의 분리가 고립이라면 희주의 분리는 고독이다. 단 한 사람의 원소로 이루어진 집합을 구성한다는 점에서 연수와 희주의 집합은 형태상 유사하지만 그 구조를 따져 보면 차이가 발견된다.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 차이로 희주는 연수보다 넓은 행동반경을 유지할 수 있고, 그러다 주호처럼 희주의 선을 넘어오는 이와 마주쳐 잠시나마 교집합을 형성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어차피 우리는 모두 물에 잠길 거”라고 말하는 희주가 좋은 ‘인류’일지는 몰라도 좋은 교사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초등학생에게 먼저 가르쳐야 할 것은 멸종의 윤리가 아니라 생활의 도덕이고,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와 ‘괴롭히는 아이’는 구별되어야 한다. 교사에게는 그들의 사정을 듣고 그들에게 각자 다른 말을 건네야 하는 역할이 있다. 몇 년 살아 보지도 않은 아이들을 어차피 죽을 인간으로 바라보며 연민하는 희주의 시선에는 어딘가 무심하여 잔인한 신학자 같은 구석이 있다. 아마도 바로 그 점이 연수의 경우와 달리 희주에게 장막이나 보호구 역할을 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바로 그 점이 아이들을 한 명의 사람이 아닌 멸종 직전의 인류로 뭉뚱그려 누군가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5.
「보편 교양」3)의 곽은 학교를 그만두지 않는다. 딱히 그만둬야 할 이유가 없었다. “아쉬운 월급이지만 임금노동자 평균 수입에 비하면 넉넉했”고 “자잘한 연수나 업무가 있긴 해도 방학은 방학이었다.” 중요한 건 언제나 “균형감각”(191쪽)이었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입시를 통한 재생산 회로에 종사하고 있다는 자의식을 잃지 않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학생들에게 배움의 기쁨을 알려주겠다는 희망 또한 버리지 않는 것. 그는 “공교육이란 중산층의 아비투스를 재생산하고 체제 유지에 기여하는, 필연적으로 부수적인 국가 장치”라고 곱씹었지만, 그럼에도 미래에 대해 “아무도 예단할 권리는 없”(205쪽)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학생들의 과목 선택권을 보장하는 새 교육정책이 그래 봤자 입시 제도에 불과하다고 우려하면서도, 내심 ‘고전읽기’ 과목을 개설하여 학생들과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기대를 품었다. 그러니까 곽은 장기적인 전략에 따라 효율적인 전술을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다. 정치적으로 편향된 내용을 가르친다고 민원을 넣은 은재 아버지에게 『자본론』이 ‘서울대 권장도서’가 될 만큼 얼마나 ‘안전’한지 설득하려다가 “자신이 마르크스를 긍정하려는 것인지 부정하려는 것인지 혼란스럽기도”(204쪽) 할 정도로.
그러니 곽은 누구와도 완벽히 불화할 수 없다. 곽은 모범생인 은재가 대견한 만큼 학교를 겉도는 다른 학생들도 이해할 수 있고, 마르크스를 위험한 사상가로 동경하면서도 은재 아버지에게 그가 얼마나 안전한지 설명할 수 있으며, 비판과 사유가 체제를 향한 저항이라고 여기면서도 이제 체제가 비판적 사유 능력을 교양으로 요구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이런 곽의 세계를 벤다이어그램으로 그려 보면 연수와 희주의 경우와는 전혀 다른 그림이 그려진다. 중간 크기의 집합들이 서로 복잡하게 교집합과 포함 관계를 이루며 얽혀 있는 그림. 여기서 출발해도 저기로 도착하는 긴 사슬처럼 엮인 집합 다발이 보이기도 하고, 어제는 아무런 접점도 없었지만 오늘은 넓은 교집합을 공유할 수도 있고 내일은 꿀꺽 삼켜져 포함되어 버릴 수도 있는 유동적인 집합들이 가득한, 그런 입체적이고 혼란스러운 그림.
복잡한 교집합의 관계는 한눈에 파악되지 않는다. 『자본론』을 가르친 곽과 곽의 수업을 충실히 따라온 은재와 그것을 걱정하는 은재 아버지의 관계를 생각해 보자. 곽은 수업을 통해 은재와 자신 사이에 교집합이 존재한다고 믿지만, 마르크스에 한해서라면 실은 곽과 은재 아버지야말로 단단한 교집합을 이루고 있다. 마치 군사독재 시절 마르크스의 저작을 금서로 지정했던 국가기관과 어떻게든 그것을 읽으려고 위험을 감수했던 학생들 모두 책의 힘을 믿는다는 공통점을 지녔던 것처럼, 곽과 은재 아버지 역시 책을 읽으면 사람이 달라질 수 있다는 믿음, 책을 읽으면 선을 넘을 수 있다는 믿음을 공유하며 교집합을 형성한다. 은재가 『자본론』을 스펙 삼아 서울대에 합격한 후에도 그들의 교집합은 여전히 유지된다. 이제 두 사람은 마르크스가 ‘보편’과 ‘교양’의 세계에 입성했음을, 마르크스를 읽는다고 선을 넘는 시대는 오래전에 영영 끝나버렸음을 깨달은 동류가 된다.
곽의 벤다이어그램에서 통치의 경계선은 엄청난 탄력성을 지니고, 그 선 바깥으로 넘어가는 일은 도저히 불가능해 보인다. 불온서적이 있다면 그것을 읽고 선을 넘을 수 있지만, 모든 게 교양이 되어버리면 애초부터 넘어야 할 선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선 너머가 보이지 않는 곽의 벤다이어그램을 비관하자는 말은 아니다. 무얼 해도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은 통치의 경계선이 그만큼 자주 갱신된다는 의미이고, 통치의 경계선이 갱신 중이라는 말은 푸코의 주장처럼 언제나 통치와 저항이 동시에 구성된다는 의미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선 너머로 갈 수 없다는 말을 영원히 내부에 갇혀버렸다는 투항의 뜻으로 들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통치에는 항상 예상치 못한 잉여와 빈틈이 존재하여 운신할 수 있는 내부 공간이 완전히 사라지는 일은 없다는 뜻으로 들을 수도 있다. 물론 이 모든 일은 곽의 냉소가 곽의 희망을 완전히 덮어버리지 않았을 때만 가능하다. 냉소와 희망 사이의 승부가 쉽게 나지 않길 바라는 것, 그것이 곽의 벤다이어그램에서 기대할 수 있는 최대치의 목표로 보인다.
6.
연수, 희주, 곽. 세 사람의 벤다이어그램은 평범한 어른이 자신보다 강고하고 막대한 사회를 표상하고 상대하는 세 가지 전형적인 형식을 보여준다. 물론 모두 맹점은 존재한다. 연수와 희주의 집합은 자기연민에 빠지거나 자기보존에 골몰하기 쉽고, 곽의 집합은 필연적으로 자기분열을 동반하기에 자칫 자기기만으로 이어지기 쉽다. 어쩌면 오늘날 교사로서, 어른으로서 산다는 것은 이 정도의 선택지 앞에 놓이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의 인간 삶이 패배라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하”고 “삶이라고 부르는 이 피할 수 없는 패배에 직면한 우리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은 바로 그 패배를 이해하고자 애쓰는 것”4)이라면, 삶의 맹점을 그리는 소설들이 제공하는 실존적 증거를 들여다보고 소설에 쓰이지 않은 것들을 상상하고 검토하는 일이 마냥 무의미하지만은 않다고 믿는다. 그러니 엉성하고 성긴 소묘지만 남겨 두기로 한다.
#1. 연수처럼 첫 번째 방식으로 세계를 보는 사람들은 큰 집합과 작은 집합의 대치에 압도되어 있다. 당연하게도 그 경계선에 대한 의식과 두려움이 크고, 자꾸 자신의 상처와 내면으로 파고들거나 사회로부터 억압당한다는 대타의식을 키울 수밖에 없다. 이들의 불안과 공포는 눈앞의 경계선이 상당 부분 상상적으로 구성되었음을 인정해야만 줄어든다. 전체집합이 어떻게 구성되고 배치되어 있는지에 관한 메타적 시선을 확보해야 겁에 질린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 가장 선명해 보이는 두 집합 사이의 대립에 집중하기보다 더 큰 세계에서 자신이 어느 좌표에 위치하는지 파악할 것. 언제나 피해자인 사람도, 언제나 보호받아야 하는 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2. 희주처럼 두 번째 방식으로 세계를 보는 사람들은 전체집합에 대한 의식이 지나치게 강하여 삶이 보유한 속된 욕망에 적절한 지분을 할당해 주지 않는다. 어린아이에게도 삶보다 죽음을 먼저 속삭이는 이 상냥한 허무주의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전체집합 안에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중간 크기의 집합을 발견하고 가꾸는 일이다. 인류세 시대에 필요한 윤리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자기보호와 구별하기 어렵다. 그러니 중간 규모의 집합에서, 생활의 차원에서, 그 윤리를 실험해 봐야 한다. 다행히 소설에서는 선을 지킬 줄 모르는 주호의 동선이 희주가 그어 둔 경계선을 가로질러 교집합을 만든다. 덕분에 희주는 무해함과 보존의 서사에서 참견과 발견의 서사로 이동할 수 있게 된다.
#3. 곽처럼 세 번째 방식으로 세계를 보는 사람들은 다층적인 지도 위에 자신을 세워 두고 상황에 맞춰 운용한다. 다양한 집합 사이를 이동하는 플레이어처럼, 이들은 교집합이 아예 없는 고립된 집합이나 하나의 원소만으로 이루어진 단일한 집합은 선호하지도 신뢰하지도 않는다. 집합과 집합 사이를 오가다 보니 낙차로 인해 자연스럽게 아이러니가 발생하고, 그 낙차를 해소하기 위해 냉소와 유머의 기술이 필요하다. 교집합과 여집합 개념을 포함하여 집합론의 기초를 가르치기에 좋은 벤다이어그램을 가지고 있기에, 이들이 피해야 할 함정은 “계몽된 허위의식”을 지닌 똑똑한 “냉소주의자”,5) 그러니까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면서도 계속 그렇게 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이들은 비애감 가득한 말투로 기만을 합리화할 방법쯤은 얼마든지 알고 있다.
7.
거칠고 도식적으로 분류해 보았지만, 실은 사회생활을 하는 어른들은 대부분 저 세 가지 벤다이어그램을 동시에 그리며 살아간다. 나 역시 그렇다. 대상에 따라, 상황에 따라 내가 서 있는 그림이 달라진다. 그 점을 반성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대상과 상황이라는 것을 제대로 파악하고 행동해 왔는지, 적어도 십 년의 세월이 지났다면 검토해 봐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할 뿐이다. 명백히 잘못 판단하여 후회가 남는 일도, 여전히 잘 모르겠는 일도, 다시 고민해 봐야겠다고 미뤄 둔 일도 많다. 다음 달에 이어질 글은 여기에서 시작하려 한다.
1) 안보윤, 「너머의 세계」, 《현대문학》 2023년 5월호.
2) 공현진,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 《악스트》 2023년 3/4월호.
3) 김기태, 「보편 교양」, 《창작과비평》 2023년 가을호.
4) 밀란 쿤데라, 박성창 역, 『커튼』, 민음사, 2012, 21쪽.
5) 페터 슬로터다이크, 이진우·박진애 역, 『냉소적 이성 비판1』, 에코리브르, 2005, 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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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익고도 불친절한 미래에 대한 단상 임지훈 세상의 속도를 점점 감당할 수가 없다. 모든 것이 너무나도 빠르게 변해 간다. 변화하는 속도에 편승하지 못하는 자는 자신이 이방인이 된 기분을 느낀다. 스팅의 노래 〈Englishman in New York〉의 화자는 자신을 “legal alien”, 합법적인 이방인이라고 말한다. ‘신사다움’이 철 지난 농담이 되어 버린 세계에서 여전히 “Manners maketh man”이라 말하고, “Be yourself, no matter what they say”, ‘당신답게, 누가 뭐라고 하든’이라 말하는 사람. 그 노래 속에서, 이 합법적인 이방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Modesty, propriety Can lead to notoriety You could end up as the only one Gentleness, sobriety are rare in this society at night a candle’s brighter than the sun - Sting, 〈Englishman in New York〉 겸손과 예의범절이 악평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온화함과 침착함은 흔치 않은 감정이 된 세계.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이고, 우리는 그 속에서 스스로를 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살아가고 있다. 어쩌면 이미 스스로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직 자기 자신을 잃지 않았다’는 건 단지 착각에 불과하고. 그렇다면 어쩌면 그 또한 자신의 착각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미치광이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이건 아마 이중의 의미로 ‘그렇다’고 할 수 있을 텐데, 그가 정말 착각에 빠진 채로 살아가고 있는 거라는 의미에서도 그렇겠지만 모두가 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세상 속에서 그렇지 않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 또한 미친 것이기는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너무나 빠르게 변화하는 세계에서, 겸손과 예의범절이 더 큰 이익을 위한 술책이 되고 온화함과 침착함은 철 지난 농담이 되어 버린 세상에서 그것들의 가치를 알고 있는 사람은 이제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으니까. 그런 세상 속에서 ‘매너가 사람을 만들고요, 당신은 당신답게 살아야 해요’라고 말하는 사람은 분명 광인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종종 이방인으로 느낀다는 점에서 그와 같지만 사실은 전혀 다르다. 그와 달리 우리는 ‘나다운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를뿐더러, 현실 속에서 무엇이 사라지고 있는지조차 헤아리지 못한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와 그는 전적으로 다른 존재처럼 보이는데, 기술적 환경의 변화에 휩쓸려 떠밀리듯 살아가는 우리와 달리, 그는 마치 좌표계의 원점에 선 것처럼 세계를 바라보며, 그 변화의 속도를 측정하고, 그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야 할 길
- 관리자
- 2025-12-01
K-컬처의 그림자, 혐중이라는 문화정치 : 2020년대 한국 사회의 문화적 자부심은 어떻게 배타적 혐오가 되었나 허희 1. 정동적 역설의 면면 2020년대 한국 사회는 기묘한 정동적 역설 가운데 작동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K-팝‧K-드라마‧K-웹툰‧K-게임 산업까지 확장된, 이른바 K-컬처 복합체가 가시적 성취를 축적하면서 한국의 상징체계를 재편 중이다. 이것은 국가 정체성을 구성하는 정동적 보상이 작동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문화적 자부심은 경제 양극화를 포괄하는 저성장 국면‧불안정 노동‧청년 세대의 좌절과 같은 내부 불안을 상쇄하는 역할로 작용하였다. 그러한 면에서 K-컬처는 문화 산업만으로 간주하기 어렵다. 국가 정동을 생산‧관리하는 체제로서, 문화적 자부심은 일종의 집단 감정 자본으로 사회적 정당성을 획득하였다.1) 동시에 한국 사회는 ‘혐중(Sinophobia)’으로 대표되는 조직화된 집단 감정의 분출을 목도하고 있다. 이 글은 그것을 병렬적으로 공존하는 동시대 현상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자부심이 혐오로 전이되는 정동 형성의 정치적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그러니까 혐중은 자부심의 어두운 파생물, 정동의 이동과 변조가 빚어낸 적대의 결과라는 논점이다. 여기에서 비판과 혐오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비판은 특정 행위나 정책, 제도적 불투명성이나 권력 작동 방식과 같은 대상을 향한다. 이는 사실 검증과 토론 가능성을 전제한다. 예컨대 중국 정부의 신장 위구르 지역 내 강제 수용 의혹, 홍콩 보안법의 인권 침해 문제, 동북공정의 역사 왜곡 등은 어떨까. 이상의 논란은 분석과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있고, 국제사회가 공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사안이다. 반면 혐오는 문제를 특정한 정치·사회 행위에서 찾지 않는다. 증오의 대상을 일반화하고 전체화함으로써 제거의 정동을 발생시킨다. 이때 중국(인)은 특정 행위의 주체로서가 아니라, 문명적으로 열등하고 비도덕적이며 반인권적인 타자로 폄하된다. 이 같은 혐오의 메커니즘은 정동의 순환—감정이 사회적으로 이동하며 타자를 구성하는 과정과 유사하게 작동한다. 더불어 그들을 향한 정서가 실체적 검증 없이 사실처럼 굳어지는 탈지성적 담론 구조를 형성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2020년대 한국 사회 내 반중—혐중 세력은 합리적 비판과 비합리적 망상의 경계가 붕괴된 상태에서 광적으로 결집하고 있다. 이에 대한 제재가 대증 요법에 그치지 않으려면 면밀한 분석이 요청된다. 오늘날 혐중은 SNS·커뮤니티·유튜브 생태계의 유통망에서 집단 감정의 양극화를 선동한다. 김치·한복 공정 논란처럼 국가 정체성을 둘러싼 문화 투쟁은 팩트에 근거한 학술 논쟁이나 국제문화 비교 연구의 영역이 아니라, 무분별한 감정 투쟁의 장으로 격화되었다. K-팝 아이돌에게 요구되는 이른바 사상 검증(중국 시장을 겨냥한 발언을 했는가, 홍콩·대만 문제에 침묵했는가)의 사례는 집단 감시된 순응주의가 디지털 민
- 관리자
- 2025-12-01
류수연 문학평론가의 기획 비평은 2025년 11월부터 2026년 1월까지 으로 3회 연재됩니다. k-컬처와 한국이라는 스토리텔링 2 -웹소설이라는 가능성 류수연 1. 지금은 웹소설의 시대 번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외국어 능력일까, 모국어 능력일까? 물론 어느 하나도 포기할 수 없는 요소지만 부득이 한 쪽을 골라야 한다면? 수년 전이라면 당연하게도 ‘외국어’라는 답변이 압도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생성형 AI를 활용한 초벌 번역이 보편화된 오늘의 관점에서라면, 그 답은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다. 실제로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아주 결정적인 장면을 이미 경험한 바 있다. 바로 2022 한국문학 번역신인상에서 말이다. 웹툰 부문 수상자로 선정된 40대 일본인의 한국어 실력이 초급 수준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논란이 시작되었다. 당선자는 AI를 활용해서 초벌 번역을 진행했고, 그 뒤 자신이 일본어 표현을 가다듬었다는 것이었다. 당락을 결정한 것은 만화적 표현과 리듬에 익숙한 당선자의 표현력이었겠지만 번역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언어능력 없이 AI로 번역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한 논란이 거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 뒤로 채 2년도 되지 않아 생성형 AI가 전 세계적으로 보급되었으니, 어쩌면 그 혼란은 이러한 기술 변화에 대한 예고였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웹 서사의 달라진 위상을 공공연하게 보여 주는 사건이기도 했다. AI 번역만큼이나 문학번역의 부문에 웹툰이 있다는 점도 큰 이슈가 되었기 때문이다. 웹 콘텐츠에 부여되었던 수많은 평가절하를 떠올린다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웹-이라는 접두어를 붙인 여러 콘텐츠가 등장한 지 불과 20여 년, 그 확장된 영향력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오늘날 웹을 기반으로 한 콘텐츠 시장은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선발 주자인 웹툰과 후발 주자인 웹소설 모두 대중문화의 절대적 강자로 부각되었다. 거기엔 이들 콘텐츠 자체의 매력도 있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이들 콘텐츠가 다양한 미디어믹스 과정에서 원천IP로 활용되고 있다는 점 역시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웹 기반 서사가 트랜스미디어의 확실한 강자로 부각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특히 웹소설의 경우에는 선발 주자인 웹툰의 원천IP로도 활용되고 있으니, 웹 콘텐츠 전체의 근간을 이루는 기초가 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지난 회차에 살펴보았던 케이팝 스토리텔링 역시 이러한 웹 콘텐츠에 많은 부분을 의존하고 있는바, 오늘날 한국 대중문화를 이끄는 콘텐츠로서 웹 기반 서사를 살펴보는 것은 한국이라는 스토리텔링의 한 정점으로 다가가는 방법이 될 것이다. 그런데 여전히 그 중심에는 또다시 이야기가 있다. 이 글에서는 가장 매력적인 이야기들이 각축을 벌이는 웹 플랫폼이라는 가상공간, 그리고 그곳을 종횡무진하고 있는 웹소설의 의미를 추적해 보고자 한다. 2. 취향의 타파스? 일반 문학과 함께 웹소설을 비평적 연구 대상으로 삼
- 관리자
- 2025-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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