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인 해제된 소녀, 노벨로부터의 이륙
- 작성일 2024-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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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인 해제된 소녀, 노벨로부터의 이륙
: 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시 소설’1) 리라이팅을 통해 생각하는 근대 소설(novel)의 변화
김미정
소용돌이의 한복판에서는 그것의 실체를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 소용돌이가 멈추고 낙진이 잦아들 즈음, 변형된 지형지물과 그 윤곽이 눈에 들어온다. 켜켜이 쌓여 가는 시간의 무늬는 다시 새로운 지층을 이루고, 그것은 또 다른 소용돌이를 만날 때까지만 안전하다. 그럼에도 그 소용돌이의 한복판에서, 훗날 교정되어야 할지 모를 오류에마저 몸을 내맡겨 보는 일이 어쩌면 비평의 일이다.
1. novel 혹은 근대인의 인식 체계
이 글은 지금 소설(novel)이라는 장르를 둘러싼 어떤 소용돌이의 체감에서 시작한다. 이야기의 역사는 곧 인류의 역사라고 하지만, 이야기의 양식이 모두 동일할 리는 없다. 그 양식을 무어라 부르건 거기에는 늘 각 시대의 인식·정서 체계가 구조화되어 있다. 지금 우리 시대의 지배적 이야기 양식은 말할 것도 없이 ‘소설’이다. 그런데 이때의 소설은, 한 세기 이전에는 ‘literature’나 ‘novel’과 같은 말로 막 들어오기 시작한 서구의 낯선 문학 양식이었고, 한자문화권에서는 그것을 두고 설왕설래하며2) 각고의 번역의 노력을 통해 제도화한 것이다. 2000년대 이래 한국 문학 연구가 주목한 것도 이러한 제도로서의 문학에 대한 것이었음도 잠시 덧붙여 둔다.
그렇다면 근대적 이야기 장르로서의 소설에 담긴 인식·정서의 체계란 무엇일까. 그것을 밝히는 것 자체가 이 글의 목적은 아니고 간단히 적을 수도 없다. 이 글에서는 ‘인식 체계로서의 소설’만 생각해 본다. 이때 주목하는 것은 우선 소설 속 서술자, 곧 앎(인식)을 독점해 온 주체의 자리다.3) 달리 말해, 텍스트 안에 구조화된 재현 주체/대상의 역학이 이 글의 관심이기도 하다. 서술 시점이나 그에 따른 리얼리즘적 묘사란 근대 소설의 핵심이다. 이것은 예컨대 근대 회화의 소실점, 원근법의 발명에 상응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시점과 묘사를 가능케 하는 것이 주체/객체(=서술자/서술대상·객관세계)의 도식이었다. 소설에 구조화된 근대적 인식 체계란 바로 이런 원리에 근거한다. 서술자의 문제란 소설의 세부 요소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이 세계의 대표·재현·표상 원리에 상응하는 장치였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이미 소설을 소설로 성립시켜 온 그 인식 체계가 무엇이었고, 그것이 어떻게 유동하고 있는지는 폭넓게 질문되어 왔다고 생각한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래 독자-작가 모두 질문한 것은 예컨대 ‘누가 말하고 있는가’, ‘어떤 자리로부터 무엇이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가’의 문제이기도 했다. 2010년대 중반 즈음부터의 독자-작가는 리얼리즘적 시선 너머에 은폐된 화자의 존재를 질문했다. 객관을 표방하던 세계가 무엇을 망각시켰는지 환기해 냈다. 요컨대 누가 그 시선을 대표하고 대상이 어떻게 표상되고 있는지의 문제가 곧 페미니즘 리부트 이래 한국 소설의 화두의 하나였다.
이런 문제의식 하에서 이 글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시 소설 두 편을 읽으며, 근대 소설의 변화를 텍스트 안에서부터 짐작해 본다. ‘도시’가 표제어로 쓰인 최근작(2023)과 그것의 원작(1980) 사이의 차이와 그 변화에 주목한다. 결론부터 적어 두자면, 이 리라이팅은 작가의 변화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 시대와 사유의 이행을 함축한다. 즉 오늘날 소설의 변화는 웹소설, 장르소설 등으로의 다양화나 특정 언어권의 문학에만 한정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근대문학의 한 시절을 풍미한 작가와 그의 작품으로부터 무언가가 내파되는 현장을 읽을 때 오히려 그 변화는 좀 더 근본적으로 설명될 수 있을지 모른다.
2. 그는 왜 두 번 다시 쓰는가 : 1980년에서 2023년까지
무라카미 하루키의 최근 장편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2023)은 코로나가 시작하던 2020년에 구상하고 집필을 시작하여 1부를 완성했고, 어딘지 1부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여겨 2, 3부를 보충했다고 한다. 이 소설은 그가 서른한 살에 발표한 작품을 꼭 사십 년이 지나 다시 썼다는 이유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원작인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1979년 데뷔한 직후 잡지 『문학계(文学界)』(1980년 9월)에 발표한 중편 분량의 작품이었다. 하지만 이 중편은 작가 스스로 실패작으로 공언하며 이후 단행본 및 작가 컬렉션에서 빠져 있고 번역도 되어 있지 않다. 청년작가의 ‘실패작’을 노년의 거장이 다시 쓰기로 작정했고 그것이 완결을 보았다는 것만으로도 이 리라이팅 소설이 기대와 관심을 불러 모을 이유는 충분했다.
하지만 장편소설(2023)의 ‘작가 후기’에도 적혀 있듯 원작(1980)은 이미 장편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1985, 이하 『세계의 끝』으로 표기함)를 통해 결실을 본 셈이었다. 즉, 충분히 성공한 과거 작품이 있음에도 그것을 다시 쓴 것이 2023년 출간된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다. 그래야 했던 이유 혹은 맥락은 무엇일까. 노년이 되어서 젊은 시절의 상실이나 ‘나’란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을 계속 서사화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게다가 과거 익숙한 주제나 설정이 반복될 때 독자는 성공한 작가의 관성이나 게으름을 떠올리기도 쉽다. 실제 일본어권에서는 이것을 두고 ‘재생산인지 집대성인지’ 갑론을박이 오가기도 했다.4) 즉, 예상되는 의혹에 대한 부담을 감수하면서까지 젊은 날의 화두를 작정하고 고쳐 이야기하는 이유가 궁금하다.
(1) 1인칭 단수의 사고실험 혹은 견고한 벽과 구획들 :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1980)의 경우
우선, 원작인 중편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1980)은,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 대한 알쏭달쏭한 이야기만 남겨 놓고 사라진 ‘너’(소녀)를 찾아 나서는 ‘나’의 이야기다. ‘나’는 ‘너’가 말한 도시에 도착했으나, 그곳에서 그림자도 기존의 기억도 갖고 있지 않은 ‘너’를 만난다. 그럼에도 ‘나’는 우리의 관계를 이어 가지만, 끝내 내가 기억하는 ‘너’를 만나지는 못한다. ‘나’는 결국 그 도시를 떠나는 선택을 하며 소설은 끝난다.
소설에서는 두 도시(세계) 사이의 ‘나’의 비장한 양자택일이 갈등의 핵심이다. 이때 벽은 두 세계를 가로질러 늘 있어 온 견고한 것으로 묘사된다. ‘너’가 말한 도시는 쇠퇴하고 몰락한 이미지로 가득 차 있다. 전쟁 후의 어두운 기운이 도시를 감싸고 있고, 공장 지대 빈곤한 생활을 이어 간 ‘너’의 사연 및 리라이팅한 장편(2023)에는 빠져 있는 퇴역 군인과의 서사도 그 분위기 형성에 일조한다. 결국 소설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한때의 아름다웠던 시간과 도시가 사라져 간 것을 이야기하는 진혼가로 마무리된다. 훗날 두 장편들(1985, 2023)의 원형이 되는 도시는 아주 세밀하게 묘사되고 있고 각각 완성된 세계로 놓여 있다. 이는, 이미 1980년 소설의 세계관 역시 완결되어 있었음을 암시한다. 작가가 이 소설을 실패작으로 간주한 것은 완성도나 퀄리티 등의 문제는 결코 아니었던 셈이다.
이와 관련하여 한 연구자는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의 우화성에서 그 실패 요인을 찾았다. 이 소설의 명확하고 직설적인 주제 및 스타일이 작가 스스로 실패작으로 간주하게 만든 요소였다는 것이다.5) 그의 말에 따르면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 소설에 대해 “쓸 시기가 너무 일렀”고 “써야 할 제재가 쓰는 행위에 앞선 나쁜 사례”였다면서, 소설 설정에 비해 텍스트 공간이 너무 좁은 것, 즉 규모의 문제를 언급6)했다고 한다. 이러한 작가와 연구자의 견해를 좇아 보자면 1980년 중편은 우화로서 “이야기되는 게 아니라, 그 설정만 과잉”7)된 것, 곧 우화성과 규모의 문제가 작가로 하여금 이 작품을 실패했다고 여기게 한 이유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우화성과 규모의 문제를 수정하고 보완한 것이 바로 『세계의 끝』(1985)이었다. 즉, 이미 실패 요소를 수정, 보완한 작품이 존재하는데 왜 다시 40여 년이 지난 시점에 다시 리라이팅이 이루어졌는지의 질문은 여전히 남는 것이다.
한편, 이 작품에 대한 일본어권 논의들이 거의 공통적으로 지적하듯, 이 소설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말’에 대한 인식이 강조되는 점이다. 특히 그것은 소설의 처음과 끝에 반복적으로 발견된다. 예컨대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말해야 할 것은 너무 많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너무 적다. / 게다가 말은 죽는다. / 순간순간 말은 죽어 간다. 골목길, 다락방, 황야에서, 그리고 역의 대합실에서, 코트 깃을 여민 채, 말은 죽어 간다. / “손님, 열차가 왔어요!” (강조:원문) / 그리고 다음 순간 말은 죽었다. (이후 생략)”8)
여기에서 “말해야 할 것은 너무 많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너무 적다. /게다가 말은 죽는다. / 순간순간 말은 죽어 간다. 골목길, 다락방, 황야에서, 그리고 역의 대합실에서, 코트 깃을 여민 채, 말은 죽어 간다.(語るべきものはあまりに多く、語り得るものはあまりに少ない。/おまけにことばは死ぬ。/一秒ごとにことばは死んでいく。路地で、屋根裏で、荒野で、そして駅の待合室で、コートの襟を立てたまま、ことばは死んでいく。)”라는 구절은 소설 에필로그에서도(98-99쪽) 정확히 반복된다. 소설을 열고 닫는 위치에 놓여 있는 말에 대한 서술자의 직접적 발화는 “완벽한 문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완벽한 절망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이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데뷔작(『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9)의 연장선상에 있다. 단,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는 말에 대해 불신하는 ‘인물’이 등장하여 서사를 끌고 가는 데 비해 이 소설에서는 그 메시지가 소설 처음과 끝에 반복적으로, 그리고 1인칭 단수의 시점에서 직접적으로 진술되는 점이 다를 뿐이다. 즉, 1980년 중편소설은 뚜렷하게 ‘말’에 대한 서술자의 인식을 주제화하여 읽기를 요청했다.9) 하지만 이것이 ‘말’을 주제화하려는 것이었다면 여기에는 반드시 덧붙여야 할 이야기가 있다. 에필로그 및 소설은 실질적으로 다음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조금 길지만 인용해 본다.
“모든 게 없어지고 있다. 계속 사라져 간다. 한때 내 마음을 설레게 한 노래도 지금은 없고 한때 나를 부드럽게 감싸던 풍경도 지금은 없다. 달콤한 말들도 침묵의 어둠 속에 뒤덮여 버렸다. /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는다. / 어둡고 긴 밤, 방의 벽을 따라 길게 뻗은(그리고 지금은 더는 말할 것도 없는) 나의 그림자를 바라보면서 나는 그 벽에 둘러싸인 도시를 생각한다. 높은 벽을 생각하고, 도서관 은은한 전등불 아래의 너를 생각하고, 거리에서 끈적이는 소리를 내던 짐승들을 생각하고, 바람에 흔들리던 버드나무를 생각하고, 그리고 적막한 공장거리에 불던 서늘한 계절풍을 생각한다. /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다. 그것만이 나의 구원이다. 마치 16세에 느낀 그 바람처럼, 지금 모든 것은 내 몸을 빠져나간다. 나는 저 도시를 잊어야 하지만, 내 생각은 저 도시의 어딘가에 지금도 남아 있을 것이다. / 언제까지나······ 라고 너는 말했다. 언제까지나. 너가 나를 잊지 않도록, 나도 너를 잊지 않을 것이다. 여름의 강변의 생각을, 그리고 계절풍이 부는 겨울의 다리에서의 생각을. / 언제까지나······ /흐린 가을의 석양, 나는 저 뿔피리의 울림을 문득 듣는다. 그 소리는 아마 그 불확실한 벽의 어딘가의 틈새에서 내 귀에 도달하는 것이리라. 북쪽 능선에서 내려오는 서늘한 계절풍을 타고.”(99쪽)
소설 전체를 놓고 생각할 때 이 마지막 대목은 생경할 정도로 감상적이다. 특히 윗첨자를 사용한 ‘언제까지나’의 반복적 강조와 너를 잊지 않겠다는 다짐은 과잉, 사족이거나 아예 다른 주제를 떠올리게도 한다. 사라진 ‘너’와 떠나온 도시에 대한 이 감상적인 회고는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의 원형이 무엇에서 출발했을지 짐작케 한다. 또한 이 소설을 1차로 다시 쓴 『세계의 끝』의 묵시록적 세계관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가령, 소설 속 이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는 그림자 없는 세계를 함축하는 동시에 바늘 없는 시계(=시간이 흐르지 않는)로 상징되는 공간이다. 이 도시에서 계절은 계속 순환하지만, 시간은 축적되지 않고 멈추어 있다. 그것은 묵시록적 세계지만 한편으로 이곳의 시간성은 인류 최초의 서사시적 공간의 특징이다. 10)
즉, 이 작가의 소설들이 반복, 변주하는 상실-탐색-발견-재상실의 패턴에는 이 1980년 중편의 ‘너’(소녀)가 핵심으로 놓여 있다. 이 소설은 애초에 상실되어 부재하는 것들(소녀로 상징된) 없이 성립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곧 말과 세계(사물) 사이의 역학에 대한 근대인의 유구한 회의와 멜랑콜리를 함축하고 있다. 또한 ‘나’와 분열한 그림자가 다시 합체해서 탈출을 감행하는 결말은 진짜, 본질, 원형 등을 상정하는 세계에 대한 믿음과 불가분이다. 이런 본질에 대한 작가의 집착에서 플라톤적 세계의 흔적을 읽는 것도11) 무리는 아니다. 좋았던 옛 시절의 불가능함과 그것을 연기(延期, 演技)하는 멜랑콜리 없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는 불가능했던 것이다.
한편 이 소설을 수정 보완한 1985년의 장편 『세계의 끝』은 어떠했나. 이 소설은 애초에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라는 설정을 아예 웅장한 규모의 두 세계가 대결하는 구도로 확대시켰다. 『세계의 끝』은 상반된 두 세계를 병렬적으로 교차시키며 시작한다. 하지만 점차 그 구별은 모호해지고 두 세계가 서로 만나는 와중에 ‘나’는 애초의 이질적 세계가 결국 스스로에 의해 만들어진 것임을 알아차린다. 이때 원작과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나’의 선택이 달라진다는 점이다. 1980년 중편에서 ‘나’는 그림자 없는 세계를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1985년 장편에서의 ‘나’는 그림자 없는 세계에 남기로 결정한다. 이것은 여러 논의들이 지적했듯 스스로가 만든 세계를 책임지고자 하는 서사다. 나아가 스스로 만든 세계를 폐쇄시키고 그곳을 ‘나’의 소우주로 격상시키는 주제이기도 하다. 원작 중편에서의 직접성과 감상성은 거의 사라졌다. 작가가 애초 스스로 불만을 가졌을 그 우화성과 규모의 문제도 이렇게 해결된 듯 보였다. 하지만 1980년 원작과 마찬가지로 어딘가에 존재할 진짜, 본질, 원형 등에 대한 믿음과 그것을 지지하는 ‘나’라는 주제까지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2) 늘 움직이고 있던 벽, 비로소 봉인 해제되는 소녀 :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2023)의 경우
앞서 적었지만 2020년 무라카미 하루키는 다시 장편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구상했다. 꼭 40년 만의 일이었다. 물론 작가의 말처럼 이것을 코로나 팬데믹의 경험과 이 세계의 변화 속에 놓고 읽어도 된다. 총 3부로 이루어진 이 소설의 1부는 원작(1980)과 거의 동일한 뼈대를 지닌다.12)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를 ‘나’에게 알려준 ‘너’는 홀연 사라지고 ‘나’는 그 도시의 실제를 확인하며 그곳에서 그림자 없는(이곳에서의 기억이 없는) ‘너’를 만나 그곳에서의 삶을 시작한다. 2부는 후쿠시마의 한 작은 도서관을 매개로 하는 관계들(전 도서관 관장의 유령, 사서, 커피숍 여자, 옐로 서브마린 소년)이 서사화된다. 1부에서 벽 안의 도시에 남기로 했던 ‘나’는 영문을 알 수 없게도 다시 본래 장소에 살고 있다. 단, 벽은 뚜렷이 이곳과 저곳을 구획하지 않는다. 2부의 서사는 타인들의 사연과 그에 대한 나의 연루에 할애된다. 3부는 다시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 속 ‘나’의 이야기다. 2부에서 사라진 ‘옐로 서브마린 소년’이 그곳에 와 있다. 역시 이 소설 속 벽은 어떤 구획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나’와 소년의 합체가 암시되고, ‘나’는 ‘너’에게 작별을 고하며 소설은 마무리된다.
이런 줄거리 변화에 근거하여 이 소설을 노년 문학의 일종으로 보려는 논의도 이어졌다.13) 한 좌담14)에서는 이 소설이 “노인에 대해 쓰려는 것이 아니었어도 결과적으로는 노인이 드러나 버린 소설”(円堂都司昭)이라거나, “첫사랑 소녀를 상실하는 이야기”이자 “소녀에게 작별을 말하는 소설”(三宅香帆)이라는 감상이 오간다. 이는 특히 일본 작가들이 말년에 사소설 쪽에 다가가는 경향이 있다는 이유 및 2020년 발표된 소설집 『1인칭 단수』15)와의 관련에서 나온 이야기다. 노인의 상상력 및 노년의 형식으로 소설을 조망하는 이 좌담은, 아마도 무라카미 하루키가 좌담자 본인들과 함께 나이를 먹어 간 작가라는 점에서 꽤 실감에 기반한 논의로 진행되고 있고, 그렇기에 설득되는 바가 크다. 하지만 작가의 생물학적 변화와 작품의 변화 사이의 연관관계를 다소 기계적으로 산출하는 관점은 좀 평면적이고, 이것을 작품이나 작가의 문제로만 한정짓는 측면은 다소 불철저하다.
즉, 한 시대를 풍미한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왜 자신의 초기 소설을 두 번이나 다시 쓰는가에 대해서 무수한 추측(평론적 논의)이 이어졌지만 그것이 한 작가의 변화로만 논의되기에는 어딘지 불충분하다. 작가란 그저 진공 상태에 존재하지 않고, 언제나 무수한 영향 관계 속의 존재이기 때문이며, 때로는 개인적 의지를 초과한 세계가 소설 속 세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맥락(context)으로 모든 것을 환원시키는 오류도 유의해야 한다. 이에 소설 속 서사에 근거하며 이 두 번째 리라이팅 소설(2023)의 특징 몇 가지를 정리해 본다.
첫째, 이 소설의 2부와 3부는 일종의 ‘계승’이라는 주제를 테마화한다. 이것이 정확히 무엇에 대한 계승인지 확인하기 어렵고 일견 작가가 일찍이 완성시킨 ‘나’의 왕국의 계승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계승은 스토리상으로 ‘도서관’의 직무를 이어 가는 일과 관련된다. 이는 작가의 초기 소설 속 ‘내성(內省)’의 현재를 암시하는 것으로도 읽을 수 있다. 예컨대 소설 속 ‘나’가 벽 너머 세계에 남기로 결정하는 것은 그곳 도서관에서 맡겨진 직무 때문이다. 1부에서 벽으로 둘러싸인 도서관의 꿈 읽는 ‘나’의 행위의 의미는 물론이고, 2부에서 전 도서관 관장의 일을 이어받아 누군가들의 책 읽을 환경을 제공하는 역할을 맡는 ‘나’의 행위가 의미하는 것 역시 그러하다. 그리고 그 일은 3부에서 옐로 서브마린 소년에게 넘겨지고 ‘나’와 ‘소년’이 합체되는 결말로 이어진다. 이 소설이 주제화하는 ‘계승’은 이제 ‘역사’의 시간까지 환기시키는 것이다. 이때 ‘나’의 역할을 이어받는 옐로 서브마린 소년이 서번트 증후군이라는 특징을 부여받는 설정도 중요하다. 누가 역사를 계승할지, 즉 계승의 주체와 성격을 단적으로 암시하기 때문이다.
둘째, 2부와 3부를 보건대 이 장편은 원작 중편(1980)뿐 아니라 그것을 바탕으로 완성한 1985년 『세계의 끝』까지 고쳐 썼다. 2부와 3부는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이쪽’ 혹은 ‘본체/분인’식의 구도만 공유할 뿐 아예 새롭게 쓰인 소설이라고 해도 된다. 예컨대 그것을 단적으로 지시하는 것이 이 소설 2, 3부의 공간적 배경이다. 소설에는 후쿠시마라는 고유명이 맥락 없이 들어와 있다. 2, 3부에 새롭게 등장한 인물들이 후쿠시마의 작은 마을에 터전을 잡고 살아가게 된 (무언가를 상실한 이들의) 사연들은 ‘나’와 복잡하게 얽히며 서사를 진행시킨다. 소설에서 본래 술창고였던 장소를 개조한 도서관, 그리고 외지인으로서 정착한 그들의 삶은 유일하게 후쿠시마라는 기표로 연결되어 있다. 1960-70년대 일본의 학생운동을 실패한 혁명으로 전제하며 내성(內省)의 문학으로 시작한 작가가 말년에 도달한 곳이 후쿠시마의 한 개조한 도서관이라는 점은 다소 의미심장하다. 이 도서관은 침묵으로 가득 차거나 폐쇄되어 있는 공간이 아니다. 그곳은 무언가가 이어지고 있는 장소다. 골방과 광장의 사이 어디쯤의 장소다.
물론 이는 그의 소설들의 탈역사성, 몰역사성을 지목해 온 논의16)를 참조하자면 다소 과장된 의미 부여일지 모른다. 하지만 한편, 어떤 기표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의미를 부여받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하나의 기호다. 2011년 이후 독자는 후쿠시마가 단지 지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소설에서는 후쿠시마를 둘러싼 맥락이 소거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독자의 인식 안에서 후쿠시마에 외지인이 모여 살아가고 있다는 설정은 느슨한 의미망을 형성한다. 즉, 2부와 3부는 작가가 한때 집요하게 서사화한 ‘세계의 끝’ 이후, 그럼에도 지속될 삶을 암시하고 있다. 이 연결된 삶의 함의는, 주인공의 섹슈얼리티, 젠더에 대한 인식 변화에도 상응한다. 2부의 주요 인물인 전 도서관장(남)의 스커트 복장은 (다소 정형화된 방법이지만) 그 성 정체성을 교란시키는 주요 지표다. 또한 소설 속 여자 인물들과의 성적 관계에도 동의 혹은 합의 여부가 적극 의식되고 있다. 바로 뒤에서 자세히 적겠지만, 이전 소설들 속에서 여성들은 ‘나’의 인식 속에서 주조되던 대상이었으나 지금 그녀들은 그 독점적 인식의 주박(呪縛)에서 풀려나고 있다.
셋째, 말과 소녀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 앞서 원작에서 살폈던 서술자의 ‘말’에 대한 상념은 삭제되었고, 후술하겠지만 오히려 같은 상황에 대한 정반대의 인식까지 엿보인다. 원작에서 이 세계를 온전히 포착할 수 없는 말에 비관하고 회의하던 서술자의 상황은 이 소설에서 오히려 정반대로 그려지고 있다. 소설의 도입부는 너와 나의 만남에 대한 묘사가 초기 하루키 특유의 서정적 분위기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이때 유독 눈에 띄는 대목이 하나 있으니 이런 구절이다.
“그런 시간에는 너에게도 나에게도 이름이 없다. 열일곱 살과 열여섯 살의 여름 해질녘, 강가 풀밭 위의 선명한 기억-오직 그것이 있을 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 위에 하나 둘 별이 반짝일 테지만 별에도 이름은 없다. 이름을 지니지 않은 세계의 강가 풀밭 위에, 우리는 나란히 앉아 있다.”(12쪽)
그리고 이 구절은 본문에서 정확히 다시 한 번 반복된다. 마치 이것은 앞서 중편(1980)의 첫 대목과 에필로그의 두 번 진술되는 말에 대한 회의(“말해야 할 것은 너무 많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너무 적다. / 게다가 말은 죽는다. / 순간순간 말은 죽어 간다.”)에 대응하는, 그러나 그와 상반되는 인식이다. 즉, 1980년 중편이 이 세계를 말로 포착할 수 없음에 대한 비관과 절망과 멜랑콜리로 추동된 것이었다면, 2023년 장편에서는 같은 사태를 정확히 반대로 사유하고 있다. 말과 세계 사이의 어긋남을 비관하며 시작한 작가의 소설은 이제 말에 갇히지 않는 세계의 흘러넘침을 긍정한다. 지금 이 작가에게 말의 제약은 회의나 환멸의 대상이 아니다. 명명될 수 없으나, 그렇기에 늘 말을 초과해 있고 생생하게 실감되는 무언가가 긍정된다. 말로 포착할 수 있는지 없는지와 별개로 오로지 실재하고 있음이 예찬된다.
더불어 ‘너’에 대한 집요한 탐색과 실패와 멜랑콜리의 ‘조건’은 이제 이 소설에서 지워진다.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의 오랜 독자라면 소설 속 여성 이미지의 근원에 놓인 ‘너’의 억압을 안다. 그의 소설에서 자주 귀환하는 소녀는 곧 고유함, 본질이라고 여겨지는 것에 대한 ‘나’의 믿음과 강박의 산물이다. 2023년의 소설은 바로 그 소녀와 작별하기 위해 씌어졌다는 말17)도 틀리지는 않은 것이다. 하지만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것은, 내가 알던 소녀는 늘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제야 수긍하는 쪽에 가깝다. 소녀는 이제야 ‘나’의 관념과 욕망으로부터 봉인 해제된 셈이다. 즉, ‘소녀’는 늘 말을 초과하여 유동하고 있던 세계, 혹은 ‘나’의 인식을 늘 초과해 온 타자다.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의 근간에 놓인, 나아가 근대적 의미의 이야기(소설)에 놓인 것은, 타자 혹은 세계에 대한 말의 우위이자 ‘나’(시선과 발화의 주체)의 인식의 우위였다. 이것이 근대적 앎(인식) 체계를 함축해 왔다는 점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이러한 체계가 2023년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들』에 이르러 붕괴되는 것이다.
이것이 한 작가 혹은 특정 소설의 이야기만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소설을 둘러싼 시간의 이행과 변화의 역동적 사정들을 떠올려도 좋을 것이다. ‘나’의 관념이나 욕망으로 환원될 수 없는 그녀(들)는 곧 이 작가의 진원지에 놓인 강고한 1인칭 단수가 늘 불안정한 것이었음을 증거하는 존재다. ‘나’의 인식 안에서 봉인되고 이제 비로소 해제된 소녀는 앞서 적었듯, 한 인식 주체의 자명성을 전제로 해온 인칭, 주체-대상의 명료한 구도에 기반한 시점에 변화가 생겼음을 암시한다. 더불어, 멜랑콜리의 회로 역시 더는 불가능해졌다.
마지막으로, 그래서였겠지만 ‘벽’의 의미가 완전히 수정된다. 이것은 지금까지 말한 이 소설의 변화(차이) 모두를 함축한다. 지금 이 소설에서의 벽은 ‘유동하는’ 이미지를 강력히 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1980년, 1985년 소설들에서 벽은 늘 있어 왔던 강고한 대결의 대상이었다. 그 소설들에서의 벽은 분리와 구획과 배제를 목적으로 하는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2023년 소설에서는 벽이 늘 유동하고 있다는 진술이 반복된다. 이 벽은 서사의 개연성을 깨트리는 장치이기도 한데, 예컨대 설정에 따르자면 1부의 ‘나’는 2부에 등장할 수 없었다. 하지만 1부의 ‘나’는 2부에 동일하게 등장한다. 이것은 ‘벽’이 무언가를 견고하게 구획시키는 기능을 하지 않기에 가능했다. 오히려 그러한 벽의 통념 자체가 질문되는 것이다. 2023년 장편 제목에서 쉼표가 지워진 것은 이런 사정을 명확히 지시한다. 휴지(休止) 혹은 분리의 기호로서의 쉼표가 사라진 제목은 이미 40여 년 전 작가의 세계와 현재 작가의 세계 사이 결정적 변화를 지시한다.
3. 노벨로부터의 이륙
즉,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서 1980년의 벽은 이곳과 저곳을 나누며 ‘나’를 지키기 위한 선택지를 제공하는 것이었다면, 1985년의 벽은 이곳과 저곳을 ‘나’의 안으로 통합시키며 나의 왕국을 성립시켰다. 그리고 지금 2023년의 벽은 나와 타자의 상호 침투를 적극적으로 긍정할 수 있게 하는 매개다. 2023년 소설에서는 이곳/저곳이라는 구획과 그러한 이항대립 구도의 상투성마저 질문되고 있다. “이곳은 높은 벽돌벽의 안쪽일까, 아니면 바깥쪽일까”(426쪽) 혹은 “생각하면 할수록 나라는 존재를 알 수 없다”(727쪽)라는 질문이 소설에서 내내 반복된다. 이것은 답을 요하는 것이 아니다. 질문 안에 이미 작가의 변화된 관점은 내재되어 있다. 게다가 ‘작가 후기’는 의미심장하게도 이렇게 맺는다.
“요컨대 진실이란 것은 일정한 어떤 정지 속이 아니라 부단히 이행=이동하는 형체 안에 있다. 그게 이야기라는 것의 진수가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할 따름이다.”(767쪽)
그렇다면 이 소설 속 말과 소녀에 대한 인식 변화는 단지 작가의 변화가 아니라 지난 40여 년 사이의 세계의 변화를 함축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예컨대 한국어 독자들은 2010년대 이래로 약진한 여성 서사에서 내내 관계성의 새로운 서사를 발견해 왔다. 그리고 지금, 언어의 차이를 가로지르는 세계의 변화와 그에 상응할 소설 장르의 변화를 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시소설에서 겹쳐 읽게 된다. 1980년 원작에서부터 확인한 셈이지만, 이 작가 이야기 속 모든 화소(motif)와 패턴을 단순화하여 끝까지 남는 것은 바로 이 ‘너’(소녀)와 ‘나’와의 서사였다. 애초 모든 이야기의 진원지는 곧 ‘나’의 인식틀 속의 ‘너’였고 모든 이야기를 위해 ‘너’는 불변의 존재로 봉인되어야 했다. 적어도 1980년, 1985년 두 도시소설만 하더라도 이러한 ‘진짜’ ‘본질’에 대한 믿음이 서사를 전개시켰고 소설 속 세계를 완성시켰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시대에 원본과 복사본의 위계는 낡은 것이다. 세계를 인식하는 ‘나’의 자명성이라 여겨 온 것도 일종의 내적 표상임이 말해지고 있다. 자아와 내면 등의 견고함 역시 구성적이고 역사적인 산물임이 이야기되고 있다. 이 세계를 객관 현실의 일종으로 파악해 온 우리(인간)의 인식 회로와 그 감각의 불명료함도 수면 위로 끌어올려졌다. 무라카미 소설 속 ‘너’(소녀)와 ‘나’의 관계 변화 역시 그 드라마틱한 이행의 흔적이다. ‘너’는 나의 인식틀로 환원할 수 없는 타자인 동시에, 그럼에도 나의 지각과 무관하게 늘 나의 신체에 연루된 존재라는 것. 내가 ‘너’와 일체감을 느낀 순간을 맛보았다고 해도 ‘너’는 ‘나’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동시에 ‘너’는 ‘나’의 세계를 구성시켜 온 것들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
즉, 지금 이 작가의 시선은 늘 움직이고 유동하고 어디론가 이행하고 있는 이 세계의 풍경들을 향해 있다. 과거 풍경과 뚜렷하게 구분되며 존재(성립)하고 있다고 믿어진 ‘나’의 자명함과 그것으로부터 확인되던 세계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작가는 오히려 그 자명함이 얼마나 허약한 토대 위의 것이었는지 환기한다. 세상의 이치를 동사형으로, 그리고 운동과 흐름과 이행으로 파악하는 그의 현재 관점에서 작가의 기민하고 노련한 태세 전환이 엿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른바 거장으로 칭해지는 작가일수록 어떤 일관성과 고유성을 지속시키려는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하여 패착에 이르는 경우를 문학의 역사에서 빈번히 목도해 왔다. 그에 비하자면, 이 작가의 리라이팅이 나름의 시대정합성을 꾀하는 유연성은 주목할 바가 있는 것이다.18)
소설의 문제를 넘어 오늘날 담론적 콘텍스트도 좀 더 떠올려 본다. 가령, 인간만이 이 세계를 보고 만지고 말하고 바꾸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 생물, 무생물, 그리고 각종 마주침에 의해 촉발된 정동적 양태들이 이 세계를 움직여 왔고, 심지어는 언어로 구조화된 담론조차 늘 물질적으로 유동하고 연결되는 관계들이 곧 이 세계의 행위력임을 주장하는 사유도 이제는 위화감 없이 이야기되고 있다. 무언가에게 권리를 위임하고 존재를 대표(대리)시키는 근대의 인식론을 지지해 온 것, 이른바 주체 철학과 그 전제들도 전방위적 질문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러한 전환(turn)의 서사와 그 다양한 논의는 공히 근대 이래의 유구한 주체/객체의 구도를 매개로 온존된 인간중심주의를 기각시키거나, 이 세계 속 구조화된 위계를 근본적으로 질문하거나, 그렇기에 자연화한 어떤 통념이나 가치를 탈구축하고 있다.
반복하지만, 소설과 관련하자면 인칭(person), 시점(point of view)이라 일컫는 것들이 단적으로 이런 사정을 반영하는 바로미터의 하나다. 이것들은 특정 위치에 이 세계의 시선과 발화와 행위성을 독점시켜 온 사유가 함축된 장치였고, 지금 목하 변이 중이다.19) 고유한 자기만의 이야기에 대한 주장이 더 이상 불가능함을 증거한 최근 2010년대 후반 한국에서의 오토픽션, 프라이버시 침해 등의 관련 스캔들도 이러한 근대적 존재의 단위로서의 개체(individual)와 그것에 부수되는 소유(possession), 주권(sovereignty)의 문제틀20)이 변화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요약해 본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녀(너)들은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들』(2023)에 이르러 비로소 봉인 해제되었다. 이 소녀는 늘 말로 가두어지지 않고 유동하고 있던 세계, 혹은 ‘나’의 인식을 늘 초과해 온 타자의 다른 이름이다. 타자 혹은 세계에 대한 말의 우위, 그리고 ‘나’(시선과 발화의 주체)의 인식의 우위는 이렇게 기각되고 있는 중이다. 지금에 와서 그 소녀들이 발견된 것처럼 보이지만, ‘나’의 인식 체계로 환원되지 않는 그녀들은 사실 늘 어딘가에서 다른 세계를 그려 가고 있었을 터였다. 지금 2023년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은 근대 소설에 내재한 이 강고한 인식 체계가 실은 불안정하고 허약하게 지속되어 왔음을 비로소 환기시켰다. 이렇게 근대적 이야기의 주류적 장르(novel)와 그것으로부터의 이륙을 한 노작가의 40여 년을 통해 스케치해 보았듯 소용돌이는 익숙한 것들의 안쪽에서부터도 진행되고 있다. 이륙한 노벨이 다시 어딘가에 착지할 즈음의 세계가 사뭇 궁금하다.
1) 이 글에서 도시소설이라고 지칭한 것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중편 「街と, その不確かな壁」, 『文学界』(1980.9, 46ー99쪽. 미번역) / 장편 『街とその不確かな壁』(新潮, 2023 ; 한국어 번역본은 홍은주 옮김,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문학동네, 2023)이다. 이 글에서는 두 작품을 비교해서 읽되, 장편 『世界の終りとハㅡドボイルド·ワンダㅡランド』(新潮, 1985 ; 한국어 번역본은 김난주 옮김,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민음사, 2023)를 참조점으로 삼는다.
2) 대표적으로 이광수, 「문학이란 何오」(1916), 쓰보우치 쇼요(坪펐逍穀), 『小説神髄』(1885) 등.
3) 물론 소설은 서술자가 단지 한 명이 아니고, 다양한 위치에서의 대화가 깃든 이른바 ‘다성성’의 장르라고 이야기되기도 했다.(미하일 바흐친) 그럼에도 그 대화나 다성성이 곧 근대적 의미의 소설(novel)의 주류 형식은 아니었던바, 이 글에서는 참고만 해둔다.
4) 小川哲, 「「集大成」なのか、「再生産」なのか」, 『新潮』, 2023.6.(『新潮』 2023년 6월호는 무라카미 하루키 신작 장편에 대한 기획을 마련했다.)
5)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1980)과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1985)를 비교 검토하는 山根由美惠의 「封印されたテクスト - 村上春樹 「街と、その不確かな壁」にみる物語觀」(『近代文学試論』 44호, 広島大学近代文学研究会, 2006, 75-85쪽)에서는 ‘우화성’을 중심으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읽어 간다.
6) 村上春樹, 「『物語』のための冒險」, 『文学界』, 1985.8. - 山根由美惠의 앞의 논문(76-77쪽)에서 재인용.
7) 山根由美惠, 앞의 글.
8) 村上春樹, 「街と、その不確かな壁」, 『文學界』 34(9), 1980.9, 46쪽. 이후 소설 인용은 모두 본문 속 괄호에 페이지만 표기한다.
9) 이와 관련하자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항간에서 논의해 온 어떤 패턴을 가진 이야기(모노가타리)가 아닌, 작가의식의 발현태인 소설로서 위치 짓고자 하는 松本和也의 「<箱>と"書くこと" - 村上春樹研究の更新(リニューアル)にむけて」(『信州大学人文科学論集』, 2015.3, 287-307쪽)이 흥미롭다. 이 논문은 모노가타리(이야기)의 패턴과 그 안정성을 통해 하루키를 읽거나(하즈미 시게히코, 다니유키 대담 ‘포스트모던이라는 신화’) 인터랙티브한 해석게임을 유도하는 텍스트(사이토 미나코, 문단 아이돌론, 2006)식 독해를 갱신하여, 쓴다는 것의 의미를 통해 무라카미 하루키를 다시 읽는다.
10) 게오르그 루카치, 김경식 옮김, 『소설의 이론』, 문예출판사, 2007.
11) 松本和也, 앞의 글. / 邵丹, 「村上春樹『街とその不確かな壁』長篇書評 我が唯一つの望みに」, 『群像』78(7), 講談社, 2023.7, 209-219쪽.
12) 단, 세부적 차이(ex. ‘나’와 ‘너’의 나이 설정부터 시작하여)가 많지만 일일이 열거하지는 않는다.
13) 웹진 Real Sound의 좌담 「村上春樹『街とその不確かな壁』に見る、老いの想像力 円堂都司昭 × 藤井勉 × 三宅香帆 鼎談」(2023.6.14. https://realsound.jp/book/2023/06/post-1348397.html 최종검색일 2024.8.11.) / 평론가 우노 츠네히로(宇野常寛)의 개인 블로그(https://note.com/wakusei2nduno/n/n1a69f2661aa7 2023.4.15. 최종검색일 2024.8.11.)
14) 앞의 웹진 Real Sound 좌담.
15) 무라카미 하루키, 홍은주 옮김, 『일인칭 단수』, 문학동네, 2020.
16) 오츠카 에이지, 「교양소설과 성장의 부재」, 『감정화하는 사회』, 리시올, 2020.
17) 각주 13번의 웹진 Real Sound 좌담.
18) 최근 한 장편소설(김홍, 『프라이스 킹』, 문학동네, 2024)의 결말을 읽으며, 바로 이 근대적 인식 체계로서의 소설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 생각해 본 것도 이 글의 문제의식과 연결될 것이다. ‘구천구’라는 이름의 자기를 둘러싼 모든 정체성과 그것의 조건들, 이제까지의 관계들 모두가 자기 안에 흡수하고 뒤섞어버린 채 난데없이 스스로를 ‘코끼리’로 선언하는 『프라이스 킹』의 결말은, 근대적 교양·성장소설의 뼈대를 상속받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취해 온 젠더 형식 내부로부터의 변화를 감지케 했다. 즉, 『프라이스 킹』의 새로운 자기 선언, 다른 방식의 자기 명명의 서사는 근대적 의미의 소설의 큰 지분을 차지하던 것이 교양, 자기형성의 서사다. 하지만 이 교양·성장소설이야말로 청춘 남성의 고뇌를 특권화하는 장소였고, 이 남성 젠더적 형식은 하나의 만가(挽歌)처럼 논의되어 왔다. 하지만 『프라이스 킹』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리라이팅 변화에서도 엿보았지만) 근대적 인식 체계(주체/대상의 도식), 대상으로 존재하는 여성을 매개로 하는 구원, 그때 전제되는 남성 자아의 인식론적 특권, 부재를 지연시키는 멜랑콜리 등을 특징으로 가지지 않는 교양·성장의 변형태를 보여주는 셈이어서 흥미로웠다.
19) 더불어, 김초엽의 『파견자들』(퍼블리온, 2023)이 두드러지게 주제화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러한 방식의 근대적 개체·개인의 신화를 탈구축하는 것이어서 흥미롭다. 이 역동적 변화의 장면도 이 글의 문제의식과 직접 연결될 주제이지만, 지면 관계상 후일을 기약해 본다.
20) 상세한 논의는 20세기 중반 근대 소유적 개인주의의 기원과 그 전개 과정을 분석한, 그리고 50여 년 후 다시 영미권에서 주목받은 C.B. 맥퍼슨의 『소유적 개인주의의 정치이론』(이유동 옮김, 인간사랑, 1991)의 논의 참조. 상세한 논의는 역시 후일을 기약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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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속 부동산과 젠더 정치학 전지니(한경국립대 교수) * 이 글에는 종결되지 않은 웹툰과 올해 공연된 연극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투기와 여성 이 글은 한국의 부동산 현실, 그중에서도 전세 사기로 집약되는 부동산 범죄를 다룬 웹툰과 연극을 겹쳐 보려 한다. 이를 통해 동시대 대중문화 텍스트 안에서 자산 증식에 대한 소시민적 욕망이 어떻게 젠더화되어 형상화되는지를 살피고, 여성을 범죄의 가해자 혹은 피해자로 배치하는 작품 속 시도가 갖는 양면성에 대해 조망한다. 논의할 작품은 표제에 부동산을 내세워 비슷한 시기 독자, 그리고 관객과 만난 (유기 글/그림, 2024.1.13.~연재 중), (김수정 작/연출, 2023.10.14.~22.(초연), 2024.6.1.~9(재연)) 등 두 편이다. 부동산과 여성을 관련지어 논의하는 경우는 본격적인 강남 개발 이후인 1970년대 중반부터 시작됐다. 부동산 가격 상승과 서민의 박탈감, 중산층 진입의 욕망 등의 문제는 박완서의 강남 아파트를 산 교수 부인의 이야기인 「낙토의 아이들」(1978)에서부터 시작해 재개발을 둘러싼 부녀회의 욕망을 다룬 웹툰 (스토리 매미/작화 희세, 2019.05.05.~2020.09.27.)까지 꾸준히 반복되었다. 염두에 둘 점은 (유하 작/연출, 2015), (연상호 작/연출, 2018)의 경우처럼 대중문화 속에서 개발·재개발의 역학관계를 다룰 때는 남성 인물이 이야기의 중심에 놓이지만, 개발의 수혜를 입고자 하는 소시민의 욕망을 다룰 때 그 중심에는 여성이 자리한다는 점이다. 관련하여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불안한 경제상황 속에서 반복되었던 투기는 여성의 것으로 전유되는 일이 빈번했다. 전쟁 이후 사회 혼란의 주범으로 간주되었던 ‘사설계’를 주도하는 부인들이나 1970년대 후반부터 매체에 오르내린 부동산 투기의 주범 ‘복부인’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은 근현대사 속 뿌리 깊은 여성 혐오와 직결되어 있다. 정치·사회적 불안으로 발생한 투기 심리를 여성의 전유물로 간주하며 문제의 핵심을 피해 가고 비판의 대상을 국가와 체제가 아닌 여성으로 지목한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여성이 투기에 몰두하는 이유를 심리학적, 사회학적으로 분석한 기사도 있었다. 한 언론은 “복부인의 욕구 단계는 생리 욕구와 안전 욕구의 원시적인 단계에서 못 벗어나고 있다.”며 여성이 상대적으로 안전 욕구가 강하고 사회 진출이 부진한 것을 복부인이 생기는 이유로 분석하기도 했다.1) 이 와중에 투기를 여성의 것으로 지정하는 데 대한 자성의 목소리도 있었다. 1984년 한 신문 독자는 신문 기고를 통해 ‘복부인’은 여성 천시 단어로 공공매체에서 이 같은 유행어를 쓰면 안 된다고 역설한다. 그는 “이는 여성 학대의 사회적 악습에서 오는 콤플렉스를 여성의 사회 유린이라는 감정으로 희석시키려는 ‘투사’ 심리요, 또한 일종의
- 관리자
- 2024-10-01
휴먼들의 소화불량, 비인간-사물의 매혹 황녹록 밖에선 바퀴벌레의 신음소리 아버지가 숨겨 둔 약을 먹은 것입니다 어머니 내 책상 위에 아버지가 피운 모기향 좀 치우세요 시집 위에 몸 약한 날벌레들 다 떨어지잖아 동생 문 열고 들어옵니다 나는 문밖으로 재빨리 나가려고······ 동생이 소리 질렀습니다 여기 또 있어 진은영, 중1) 오래된 사물, 거슬리는 존재감 이제 우리는 반려인, 반려동물, 반려식물, 반려미생물, 반려사물 등 반려종의 경계를 구분 짓지 않기로 한다. 반려종이란 서로의 밥을 나누고 몸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는 관계를 뜻하는 말로 어떤 물질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를 의미한다. 반려들은 나눔의 상호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 못지않게 서로를 위태롭게 하고, 서로 먹다가 소화불량이 되기도 하고, 때로 죽고 죽이는 유해성의 성분도 가지고 있다.2) 그리하여 누군가의, 무엇인가의 반려가 된다는 것은 결코 무구할 수 없는 관계 속으로 이끌려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과 비인간 반려들의 낯선 이물감으로 시작되는 관계맺음은 애초에 구역감과 체기(滯氣)를 동반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관계맺음은 일상 속에서 예기치 못한 만남으로 강제될 테고, 그로부터 서로를 향한 진지한 응시의 요구가 시작된다. 그 응시는 세계에 대한 새로운 물음과 응답의 이야기로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새로운 관계맺음에 대하여 ‘영원한 동반자’라는 환상을 기대하거나, 우정 어린 돌봄으로 윤리적 책임을 지우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다른 존재들의 있음을 감각하고 그 감각에 감응하는 관계로서 반려를 말하려는 것이다. 김초엽의 소설 『지구 끝 온실』3)은 SF적 상상력을 통해 인간 지수와 사이보그 레이첼, 레이첼과 희귀식물 모스바나, 그리고 모스바나와 이희수의 혼종적 관계맺음에 대한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종의 경계를 넘어선 존재들의 반려-되기는 멸망해 가는 지구 끝에서 찾아내는 희망의 메시지로 충분히 가능해 보인다. 나아가 구원의 식물(푸른빛)이자 악마(생태계의 위협적인)의 식물인 ‘세발갈고리덩굴’의 이중적 존재감은 반려들의 관계로부터 인류의 재건과 구원의 (불)가능성에 대한 적극적인 타진으로 읽어 볼 수도 있다. 꽤 오래전 카프카는 그의 단편에서 규정할 수 없는 것들, 식별 불가능한 반려들의 존재감을 감지한 바 있다. 카프카의 작은 존재들은 경직된 습관의 세계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다양한 실험과 그 과정에서 예기치 않게 발생된 감염의 산물이다. 카프카의 비인간-사물들은 서로를 반려종으로 여기기에는 아직 미심쩍고 불안한 상태로 존재한다. 오드라데크(Odradek)4)는 낡은 실타래 조각처럼 묘사할 수 없는 형태를 띠고,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듯한 웃음소리를 낸다.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 분명하지만, 가장(家長)은 자신이 죽은 후에도 오드라데크가 계속 살아 있는 것이 근심스럽다고 고백한다. 또 있다. 반은
- 관리자
- 2024-10-01
한일 문화의 초국적 접점과 ‘마주침’의 서사학 : 동시대 한국 소설 속 ‘일본’이라는 물음 정창훈 올해 상반기 일본 방송가는 ‘한일 로맨스’로 뜨거웠다. 한국인 배우 채종협(작중 윤태오 역)과 일본인 배우 니카이도 후미(모토미야 유리 역)가 공동 주연을 맡은 드라마 가 그것이다.1) 이 드라마는 채종협을 단숨에 한류 톱스타로 만들며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것은 물론이고, 국내에서도 여러 OTT 플랫폼이나 케이블 TV채널을 통해 방영되며 화제가 되고 있다. 나 역시 이 드라마를 매회 빠짐없이 챙겨보았는데, 기대 이상으로 흥미진진한 이야기였다고 생각한다. 이 두 인물의 연인 관계에 시련이나 위기를 가져오는 여러 갈등의 요인들이 있었으나, 그 가운데서 국가적, 역사적 문제와 연관되는 요인을 끝내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 오히려 신선했다. 국적(내셔널리티)과 언어, 생활관습의 차이는 둘 사이의 장벽이 되기는커녕 상대에 대한 관심을 극적으로 심화시키는 계기가 된다. 가족이나 주변인들도 이 둘이 한국인,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둘 사이를 반대하진 않는다. 이것은 종래의 한일 서사물에서 양국 인물의 연애사를 그려 온 방식과는 차별화되는 것인데, 이를 통해 ‘이례적인’ 해피엔딩의 결말이 주어진다. ‘한일 로맨스’ 자체가 이례적인 것은 아니지만, 다른 아시아 이웃들의 경우와 비교했을 때, 한일 양국 인물의 만남을 그린 서사적 재현이 여러 차례 반복되어 온 점, 나아가 오늘날 그 재현의 양상이 현저히 다양화되고 있다는 점은 주목을 요하는 현상이다.2) 물론 나쁘게 말하자면 이 드라마는 한국과 일본 사이의 정치적, 역사적 이슈를 정교하게 회피함으로써 구축된 가상의 이야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이는 한국과 일본이라는 이웃이 서로를 감각하는 방식에 새로운 무언가가 ‘첨가’되고 있음을 예시하는 것이 아닐까. 돌이켜보면 지난 몇 년 동안 한국 소설은 이러한 변화에 한 발 앞서 민감하게 대응해 온 것으로 보인다. 여러 가지 껄끄러운 문제를 공유한 ‘오랜 이웃’과의 ‘새로운 관계’를 상상하는 시도가 동시대 소설 속에서 계승되어 온 점, 이 글은 거기에 새삼스레 주목하려 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의 움직임이 가져온 의미를 통시적 관점에서 살펴보기 위해, 잠시 과거로 돌아가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현해탄 서사’ 이후, 한일을 넘나드는 월경의 서사 근대 이래 한일 관계에서 ‘현해탄’은 상징적 의미를 지녀 왔다. 특히 식민지-제국 체제의 해체 이후 그것은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의 바닷길(대한해협)’이라는 외시적 의미만이 아니라 역사적, 정치적 문제 등으로 인한 한국과 일본의 ‘가깝고도 먼 관계’(심리적 거리감, 국가적 입장의 차이 등)를 가리키
- 관리자
- 2024-10-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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