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블 위에서
- 작성일 2024-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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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 위에서
이소
1.
그날 내가 이태원에 갔었으면 어떤 일을 겪었을까. 나는 신촌에 있었어. 이태원이 아니라. 그건 정말이지, 놀랍도록 가혹한 일이야. [······] 기억나? 프놈펜 숙소에서 배가 침몰하는 광경을 생중계로 봐야 했던 그날. 나 자꾸 그날이 생각나. 이런 일들이 되풀이되는 건 정말이지, 말이 안 되잖아.1)
참사는 세계 곳곳에서 끊임없이 반복될 거야. 이렇게 잊히기만 한다면 말이야. 석이가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많이 변했다는 얘기를 듣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2)
세월호가 침몰할 때, 석이와 동이와 혜란은 대학교 해외 봉사 프로그램을 위해 떠난 프놈펜의 한 학교에 있었다. 세 사람은 무언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발생했음을 직감했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내가 속했던 세계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사건으로 말미암아 통째로 부정당하는 기분이 들었”고, 그 “대상 없는 배신감과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치심”3)을 무어라 설명해야 할지 말을 고르기 어려웠다. 그때의 석이에게 세월호 사건을 “이런 일들”로 묶거나 “세계 곳곳”의 참사와 비교하는 일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속수무책으로 뉴스와 인터뷰 영상을 찾아보는 것 외에 아무 일도 할 수 없던 그때, 석이는 모든 비교를 거부했다. 그들이 일하는 학교의 학생이 한국의 상황을 안타까워하며 2010년 꺼삑섬 축제에서 일어난 압사 사건에 관해 말하자, 석이는 “그거랑 이거는 다르지”라고 선을 그었고, 세 사람 모두 “우리조차 쉽사리 말할 수 없는 사건을 캄보디아 사람이” 뭘 안다고 “그런 죽음”4) 따위와 비교하는지 불쾌감을 숨기지 못했다. 그러나 이태원 참사 이후, 석이는 완전히 달라진다. 석이에게 세월호와 이태원과 꺼삑섬은 신속하게 연결된다. 그러니까 10년이 흐르는 사이, 세월호는 테이블 위로 올라온 것이다.
아무리 충실한 토양학자라 해도 영원히 숲에 머무를 순 없다. 토양학자는 숲의 흙 일부를 추출하고 분류하여 테이블 위에 올려 둔다. 사건 역시 마찬가지다. 차마 말할 수 없을 만큼 참혹했던 사건도 시간이 흐르면 얼마만큼의 변형과 생략을 감수하고서라도 유사도에 따라 다른 사건과 함께 배치되고 비교된다. 이 과정이 모두에게 일어난다고, 특히 모든 유가족에게 일어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러나 다수의 사람에게는, 적어도 어떤 유가족에게는 반드시 일어난다. 그렇게 사건은 다른 사건의 중요한 참고문헌이 되어 주기도 한다. 2005년, 백 명이 넘는 승객들이 사망한 후쿠치야마선 탈선 사고로 아내와 여동생을 잃은 아사노 야사카즈가 ‘사고의 사회화’를 위한 “유가족의 사회적 책임”5)을 주장하며 정부와 JR서일본을 상대로 10년간 투쟁한 기록에는 대구지하철 참사,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의 추천사가 붙어 있다.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이 반드시 극복을 위한 왜곡이거나 회복을 위한 망각은 아니다. 하나의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 그 사건을 다른 사건과 함께 의미화의 회로에 삽입하는 일이 그 일의 사건성을 지우거나 그 일이 더 이상 트라우마적이지 않다고 선언하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트라우마의 정의를 바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로런 벌랜트는 트라우마에 대한 기존 학설이 트라우마를 주체로 하여금 사건이 벌어진 과거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기형적으로 끌어당기는 검은 구멍으로 설명하는 것에 대해 반박하며, “트라우마적이라고 불리는 사건과 마주쳤을 때 그것은 [이 사건을 설명할] 장르가 [아직] 없다는 상황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는 하나의 장르”라고 주장한다. 여전히 트라우마적 사건을 다루는 많은 문헌에서 트라우마가 “주체를 역사적 현재에서 분리시킨다는 점에 대한 합의가 지배적”이지만, 벌랜트가 보기에 트라우마는 오히려 주체를 과거에 고착시키는 대신 “역사적 현재의 경험을 가능하”6)도록 만들어 준다. 예컨대, 세월호 사건 이후 전혀 신을 믿을 것 같지 않던 석이가 열렬한 신앙을 갖게 된 것이나, 반대로 어릴 적부터 신도였던 혜란이 교회에 발길을 끊게 된 것, 동이가 “직접적으로 연루되어 있지 않은 일에는 쉽게 눈을 감아버리는 사람이”7) 된 것은 모두 트라우마적 경험의 결과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 석이가 집회에 참석하여 사회적 비판을 수행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참여를 호소하는 것이나, 그러던 석이가 실종되자 나머지 두 사람이 바로 꺼삑섬을 석이의 행선지로 떠올리고 찾아가는 것 역시 트라우마적 해석에 기반한다. 세 사람이 현재를 역사적 맥락에 접속하는 방식은 트라우마를 매개로 삼아 이루어진다. 트라우마는 주체에게 새로운 행로를 요청하고, 그것은 단발적인 균열이나 비가역적인 결여라고 볼 수 없는 지속적이고 구축적인 성격을 지닌다.
그러니 트라우마는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는 어두운 크레바스가 아니고, 트라우마적 주체는 크레바스에 빠져 꼼짝도 못 하는 무기력한 존재가 아니다. 벌랜트에 따르면, 트라우마는 오히려 허구적이고 자전적인 자기 서사에서 벗어나 지금 눈앞에 직면한 역사적 현재를 제대로 감각하고 설명하기 위해 고안된 특수하고 유효한 형식이다. 주체는 트라우마적 경험을 통해 역사를 해석할 새로운 경로를 찾고자 한다. 알다시피, 트라우마적 경험을 지닌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유사성을 발견한다. 세월호를 트라우마로 깊이 각인한 사람은 이태원 참사를 단순한 사고나 우연으로 볼 수 없고, 이들에게 이태원은 역사적 현재가 드러나는 사건적 장소로 인식된다. 그런 방식으로 주체는 끊임없이 역사를 재해석하고 세계를 재구성한다. 가야트리 스피박의 표현처럼 이들은 “그럴 수 없는 곳에서 증거를 발견”하고 만날 수 없을 만큼 “멀리 있는 타자에게 말을 건”넨다. 이 “원격 생성teleopoiesis”8)의 과정은 다양한 사건들 사이의 만남을 주선한다.
2.
목화는 다시 그 세계로 소환되었다. 이번에는 교통사고였다. 수백 개 CCTV 영상이 사방에 펼쳐져 확대되었다가 작아졌다가 다시 확대되는 것만 같았다. 각기 다른 시간과 장소였다. [······] 꿈이 아니란 것을 알았고, 억지로 깨어날 수 없다는 것 또한 알았으므로 목화는 기다렸다. 기다리면서, 자기도 모르게, 금화를 찾았다. 거기 어딘가에 금화가 있을 것만 같았다. 금화를 찾아내서 금화를 구하고 싶었다. 교통사고는 흔했고 죽음은 무작위였다. [······] 목화는 자기가 아직 살아 있음을 의심했다. 버스나 자동차나 자전거를 수천 번 탔을 것이다. 매일 길거리를 걸었다. 그런데 아직 한 번도 사고를 겪지 않았다고? 저렇게 많은 사람이 죽는데 어째서 나는 살아 있지? 수많은 죽음 앞에서는 살아 있음 자체가 비정상이었다.9)
열여섯 살 어느 날부터, 할머니와 엄마의 대를 이어 목화에게는 기묘한 능력이 발현된다. 꿈속에서 무수한 죽음을 목격해야 했고 그중 단 한 사람을 구할 수 있었다. 죽음으로 가득한 세계를 견딜 수 없는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노라면, 어디선가 단 한 명을 지정해 주는 목소리가 들려왔고, 그 목소리를 따르면 한 사람을 구할 수 있었다. 거대한 환난 속에 존재하는 연약한 희망이라고 생각하기엔 상황이 지나치게 비극적이었다. 목화는 돕고 싶은 사람들을 돕지 못했고, 살리고 싶은 사람들을 살리지 못했다. 화재 현장에서는 구하고 싶었던 어린아이 대신 방화범을 구해야 했고, 폭력의 현장에서는 매 맞는 아내 대신 때리는 남편을 구해야 했다. 물론 기적이라고 여길 만한 다행스러운 순간들도 드물지 않았지만, 수많은 사람의 죽음을 지켜보고 단 한 사람을 구하는 일은 능력이라기보다 무능력에 가깝게 느껴졌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혹시 어릴 적 실종된 금화 언니를 만나기 위한 운명인지, 이런저런 의문과 기대를 품어 보지만 어떠한 응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무관한 사건들을 연결하고 멀리 있는 자에게 말을 거는 “원격 생성”은 과다할 수도 과대할 수도 있다. 최진영의 소설은 가장 최대치로 확장된 테이블의 한 사례를 보여준다. 트라우마적 경험을 테이블에 올려 두고 그 위에서 벌어지는 중첩과 충돌을 살펴보는 일은 예소연의 소설처럼 사회적 차원에 한정되어 타당한 방식으로 진행되지만은 않는다. 끝까지 비교하고 최대한 연결하면, 모든 인간사와 세상사를 망라하는 보편적인 문제와 만나거나, 삶과 죽음과 운명의 관계를 묻는 추상적인 의문에 닿을 수밖에 없다. 세계의 비극은 끊임없이 변주되어 반복되고, 여기서 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다. 목화의 엄마처럼 원망하고 증오하거나, 목화의 할머니처럼 기적으로 믿고 섬기거나, 목화처럼 그 사이를 쉴 새 없이 오르내리거나. 무작위적인 비극 전체가 테이블 위에 올라오면, 삶과 죽음의 의미는 무엇인지, 한 사람을 구하라는 목소리가 신인지 악마인지, 불가항력의 운명 속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근본적이고 종교적인 질문을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다.
목화는 무력감에 빠졌다. 묻고 싶었다. 어째서 그 아이가 아닌지. 어째서 배가 침몰하던 그때 나를 부르지 않았는지. 나뿐 아니라 엄마도, 할머니도 부르지 않았는지. 당신의 기준은 대체 무엇인지. 물론 목화는 알고 있었다. 침몰하는 배에서 살아남은 사람도 많다는 사실을. 자신과 엄마와 할머니를 불렀다면 적어도 세 명은 더 구할 수 있었다는 사실 또한.10)
그러나 고백하자면, 나는 이 소설을 완벽하게 세월호에 대한 소설로 읽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트라우마적 경험이란 주체에게 현재를 해석하는 새로운 행로를 부여하고 주체는 그 행로를 따라 세계를 재구성한다. 산재, 교통사고, 자살, 살해, 병사 등 온갖 죽음이 우글대는 이 소설을 나는 하필 세월호에 대한 소설로 번역하여 읽었고, 이것은 나의 트라우마에 기반한 독서일 것이다. 내게는 사라져 버린 금화도, 금화의 죽음을 믿지 못하는 가족들도, 세계의 비극성을 조망하는 목화의 고통스러운 능력도, 아무리 발버둥 쳐도 한 사람의 힘이란 고작 전 세계 인구 가운데 한 명의 몫에 불과하다는 무력감도, 모두 세월호 이후의 고민이 끝 간 데 없이 이어진 결과처럼 읽혔다. 이 또한 나의 트라우마적 행로일 것이다. 감정은 단지 생물학적으로 환원될 수 없는, “인지적 믿음과 판단에 의존하는 가치 평가적 사유 형태”이고 그러므로 반드시 “사회적인 속성을 지닌다”11). 트라우마적 경험은 나의 감정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나는 세계 전체를 다시 해석할 수밖에 없다. 물론 그 행로 위에서도 결단의 순간은 매번 다시 찾아온다. 같은 트라우마를 공유하고 있다고 해서 모두 같은 선택을 하거나 같은 삶을 사는 건 아니니까. 소설은 막대한 범위의 일반화로 인한 섣부른 봉합의 위험을 상쇄하기 위해, 같은 운명을 조우한 세 사람의 상이한 해석에 대해 함부로 판단하거나 평가하지 않는다.
임천자의 단 한 명은 기적.
장미수의 단 한 명은 겨우.
신목화의 단 한 명은, 단 한 사람.12)
3.
사람들은 종종 석이처럼 각성하여 연대하고, 가끔 목화처럼 실존적인 고민에 휩싸인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자주 잊어버리고, 잊어버렸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다. 누군가를 탓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들은 각자의 테이블을 가지고 있고, 그 테이블 위에 무엇이 어떻게 올라가는지는 제각기 다를 수밖에 없다. 다만, 텅 빈 테이블이나 모든 것이 반듯반듯 열을 맞춘 테이블을 가진 사람이 없을 뿐이다.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빼곡하게 헝클어진 테이블 위에서, 저마다 다른 선택을 하며 살아가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오히려 가끔은, 많은 사람의 테이블 위에 세월호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문득 신기해질 때가 있다.
우현이 표지 일러스트를 맡은 책은 10년 전에 일어난 어떤 사건에 관한 내용으로, 르포부터 시나 소설까지 다양한 형식의 글을 다양한 관점에서 다양한 작가가 쓴 것이었다. 그 책에서 반복되는 이미지는 바다에 가까웠는데, 다 읽고 난 뒤 우현에게 떠오른 것은 한 영화관의 풍경이었다. [······]
우현은 이 이미지가 어디서부터 비롯한 것인지 며칠째 생각 중이었다. 어째서 바다가 아니라 영화관인지.13)
우현은 책 표지 일러스트를 그리는 일을 한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저 책을 읽은 다음 떠오르는 이미지를 하나의 장면으로 옮기면 됐다. 우현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그래서 그 일을 좋아했다. 그런데 아마도 세월호 10주기에 맞춰 기획된 것으로 추정되는 책의 표지 작업을 하면서 우현은 작은 난관에 부딪힌다. 분명 책에서 반복되는 이미지는 바다였는데, 그의 머릿속에는 자꾸 바다가 아닌 영화관의 풍경이 떠오른다. 자그마한 나무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앉아 엔딩 크레딧을 바라보는 두 연인. 그 이미지가 어디에서 어떻게 유래했는지 며칠째 생각해 봐도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다 문득, 아무런 예고도 이유도 없이 기억은 솟아오른다. 일 년 전 죽은 연인과 심야 영화를 보러 갔던 날. 극장에 들어가기 전 꽃집에서 율마를 보았지만 영화 보는 동안 둘 곳이 마땅치 않아 사지 않았던 기억. 어쩌면 영원히 잊힐 뻔한 순간이 돌연 기억으로 빚어지고, “우현은 이제 막 탄생한 기억에 사로잡혀 조금 울”14)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실은, 기억은 아무 예고도 없이 떠오르지만 아무 이유도 없이 떠오르진 않는다. 우현이 세월호를 추모하는 글을 읽으며 죽은 연인의 기억을 한 조각 건져 올릴 수 있었던 것은, 우현에게 세월호와 연인이 이미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슬픔은 다른 슬픔을, 상실은 다른 상실을, 추모는 다른 추모를. 우현의 테이블 위에는 연인의 죽음과 세월호의 침몰이 그리 가깝지는 않게, 그러나 아주 멀지도 않게 놓여 있었을 것이다. 망각의 힘은 중력처럼 기억을 가라앉히지만, 뜻하지 않게 찾아온 빛과 바람은 기억의 파편을 솟아오르게 만든다. 종종 햇볕에 부유하는 먼지처럼 기억은 무질서하게 떠오른다. 그러나 이때 상승하기 위해서는 먼저 연결되어 있어야만 한다. 그 연결은 며칠째 생각해도 도통 이유를 알 수 없을 만큼 그렇게 느슨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분명히 연결은 연결이다. 앞으로도 우현은 상실을 경험할 때마다 세월호와 묶어 둘 것이다. 가끔은 세월호를 생각하면 다른 슬픔들이 희미하게 차오르는 것을 느끼기도 할 것이다. 그런 것도 충분히 트라우마라고 말할 수 있다.
4.
당연히 훨씬 더 진한 농도로 단단하게 연결될 수도 있다.
고등학교 2학년 봄과 여름 사이, 그 무렵부터 그녀는 종종 등교하지 않았고 그런 날엔 학교 밖을 하염없이 걷곤 했다. 버스나 기차를 타고 먼 도시로 가지는 않았다. [······] 그저 교복 차림 그대로 ― 때로는 조끼에 단 이름표도 떼지 않은 채 ― 오후 서너 시까지 익숙한 동네를 걷고 또 걷다가 아르바이트 장소로 이동하는 식이었다. 그때는 생각이 머릿속이 아니라 근육이라든지 뼈와 장기 사이에 덩어리로 존재하는 것 같았는데, 걸을수록 그 덩어리가 삭제되는 것 같은 기분이 그녀는 마음에 들었다. 생각의 삭제가 과제이면서 유일한 성취가 되던 시절이었다.15)
그때 송이는 안산의 고등학생이었고, 어떤 비행도 저지를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학교를 제대로 다닐 수도 없었다. 물론 세월호 때문만은 아니었다. 부모님은 가난하고 무기력했고, 선생님은 바쁘고 무성의했으며, 자신은 대학을 목표로 삼을 만큼 현실감각이 없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이 뒤섞여 부글거리던 시절이었고, 특히 그해의 봄은 가만히 앉아 있는 것조차 견딜 수 없을 만큼 끓어오르고 흘러넘치던 날들이었다. 십여 년 만에 만난 동창 장훈에게 아무 설명도 없이 “그런 때였잖아”라고 말해도, 장훈은 바로 알아듣는다. “하긴, 그런 때가 있었지.”16)
그러니까 송이에게 세월호 사건의 여파는 우현의 경우보다 끈적하다. “학교와 행정구는 달라도 어떻게든 연결하면 결국 연결되는 이들이 차가워진 몸으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공부방에서 함께 지우개를 나눠 쓰고 서로의 파우치를 구경했던 아이가 돌아오지 않았다. “친구라 말하기 애매했지만, 그렇다고 그 소식을 접하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17) 지금도 여전히 송이는 단원구와 연결된 터널을 그저 터널로 보지 못한다. 터널은 “한 번 흡입되면 다시는 빠져나올 수 없는 그런 구멍”처럼 보였고, “저 너머에 안산의 또 다른 행정구가 있다는 것이, 그곳에서도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18)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그곳’은 송이에게 시간 외의 공간이다.
우현과 송이는 십 년이 지났어도 세월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다. 두 사람 모두 세월호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 때 함께 딸려오는 기억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현의 기억을 매개하는 끈이 식별하기 어려울 만큼 흐릿해진 것과 달리, 송이의 기억은 여전히 선명한 색과 모양을 지니고 있다. 우현의 기억은 이유 없이 도래하는 섬광처럼 보이지만, 송이의 기억은 터널이나 공부방이나 학교 같은 매듭을 거쳐 안산의 거리를 전류처럼 흐른다. 당연하게도, 트라우마처럼 다층적이고 비균질적인 현상을 단일한 정의로 설명할 수는 없다. 개인적 트라우마와 집단적 트라우마를 나눠야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집단트라우마 중에서도 전쟁 같은 ‘역사적 트라우마’나 세월호 같은 ‘문화적 트라우마’는 같은 방법으로 분석할 수 없다. 동일한 집단트라우마를 갖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우현과 송이가 지닌 기억의 농도와 온도가 다른 것처럼, 직접적 피해자와의 관계, 접촉의 수준, 사건이 발생한 지역과의 거리, 개인적 성향과 지향 등에 따라 같은 트라우마도 전혀 다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5.
5·18 집단트라우마를 분석하며 김명희는, 보상을 위한 법적 기준이 아닌 공동체적 접근을 위한 새로운 범주화를 시도한다. 사회구성원들이 “자신들의 미래를 변화시킬 충격적인 사건에 종속되어 있다고 느낄 때 발생”19)하는 문화적 트라우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건을 의미화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공적 담론에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집단트라우마는 협소한 당사자주의를 넘어선 사회적 접근이 필요하고, 그렇기에 명백한 신체적·정신적 상해를 기준으로 한 ‘피해자 인증’에 머무르지 않는 광범위한 범주화가 요구된다. 김명희는 직접적 피해자와 유가족을 중심에 두고, 중심과의 영향 관계를 고려하여 순차적으로 동심원을 그려 나간다. 동심원의 반지름이 커질수록 피해는 직접적이기보다 간접적이고, 사적이기보다 공적이다. 당시 주변에서 활동했던 의료인, 수습위원, 기자 등의 ‘일선 대응인’, 참여적 목격자와 우연적 목격자를 포함한 ‘목격자로서의 피해자’, 광주·전남 지역에서 거주했거나 지역 정체성을 공유하는 ‘지역사회 일원’ 등이 동심원의 여기저기에 배치되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가장 흥미로운 점은, 광주 지역과 무관하더라도, 심지어 그 당시 태어나지 않았더라도 “광주의 진실을 간접적으로 견문하거나 반복적으로 다루면서 고통을 겪는 사람”20)이라면 누구나 ‘사후 노출자’로서 트라우마의 영향권에 포함된다는 사실이다. 세월호 사건에서도 충분히 목격한 것처럼, 언제 어디서나 감수성의 차이는 엄존한다. 동시대에 속한 이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트라우마적 경험을 했다고 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자기 일’이 아니면 트라우마가 생길 리 없다고 주장할 필요도 없다. 누군가의 트라우마적 경험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그 경험의 질적·양적 특징을 비교하고 분석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는, 사건을 둘러싼 다양한 감정과 경험을 폭넓게 인정하면서도 사건과 관련한 구체적 요인을 식별하는 재범주화가 필요하다.
나는 내 주변의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타인의 감정과 경험을 부인하거나 폄훼할까 봐 걱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트라우마를 결코 상징화할 수 없는 실재의 구멍으로 신비화하는 일을 경계해야 할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은 그 구멍이 절망스러울 만큼 어둡지만 바로 그와 같은 모습으로 진리를 암시한다고 믿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그 구멍의 결여를 메워 주는 것이 같은 인간이자 시민으로서의 윤리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럴 때 피해자는 신성해지거나 환자가 된다. 누군가는 피해자가 되길 열망하고, 누군가는 피해자가 되길 거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결국 같은 이야기가 되고 말 것이다. 사건은 신성하게 격리되고 말 것이다. 우리가 영원히 사건 앞에 머무를 수 없다면, 불완전할지언정 사건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어야 한다. 끝까지 사건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분류도 비교도 분석도 필요하고, 판단도 실천도 책임도 불가피하다.
1) 예소연, 「영원에 빚을 져서」, 『현대문학』 2024년 4월호, 217~218쪽.
2) 같은 책, 216쪽.
3) 같은 책, 201쪽.
4) 같은 책, 215쪽.
5) 마쓰모토 하지무, 김현욱 역, 『궤도 이탈 -후쿠치야마선 탈선 사고와 어느 유가족의 분투』, 글항아리, 2023, 76쪽.
6) 로런 벌랜트, 박미선·윤조원 역, 「직관주의자들: 역사 그리고 정동적 사건」, 『잔인한 낙관』, 후마니타스, 2024, 152~154쪽.
7) 예소연, 같은 책, 233쪽.
8) 로런 벌랜트, 같은 책, 164~165쪽.
9) 최진영, 『단 한 사람』, 한겨레출판, 2023, 64~65쪽.
10) 같은 책, 140쪽.
11) 김명희, 「재난의 감정정치와 추모의 사회학 -감정의 의료화를 넘어 사회적 치유로」, 『감성연구』 19권,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2019, 154,157쪽.
12) 최진영, 같은 책, 233쪽.
13) 송지현, 「유령이라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문학과사회』 2023년 겨울호, 102쪽.
14) 같은 책, 117~118쪽,
15) 조해진, 「내일의 송이에게」, 『문학과사회』 2024년 여름호, 111쪽.
16) 같은 책, 130쪽.
17) 같은 책, 127쪽.
18) 같은 책, 120쪽.
19) 김명희, 「5·18 집단트라우마 연구방법론과 새로운 진단기준」, 『경제와사회』 130호, 비판사회학회, 369쪽.
20) 같은 책, 3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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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칼리아의 거울 ―배수아 소설과 음악들 인아영 최초의 소리 배수아의 신작 단편 「눈먼 탐정」(『문학동네』 2024년 겨울호)에는 무언가를 찾는 사람이 나온다.1) 스스로 탐정이라고 불리기를 원했으므로 아마 무언가를 추적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는 무엇을 추적하려는 것일까. 살인 현장을 가까스로 빠져나간 살인자? 희미하게 남아 있는 핏자국과 발자국?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끔찍한 비극? 그런데 그는 “뭔가를 발견하기를 원하지 않는다”(232쪽). 그에게는 살인 사건을 파헤치려는 목적이 없다. 대신 그는 뭔가를 보기를 원한다. 아니, 그러나 그는 ‘눈먼’ 탐정이 아닌가. 앞을 보지 못하는 그는 뭔가를 보기 위해서 눈이라는 시각 기관이 아니라 다른 도구를 이용해야 할 것이다. 하나는 ‘영혼의 막대기’로, 그의 삼촌이 오래전에 쓰던 물건인데 “수맥의 파장이나 지하 단층의 미세한 진동, 특정 물질의 방사선 에너지”(226쪽)를 감지해서 살인자가 달아난 방향을 추적한다. 다른 하나는 ‘귀’로, 이 청각 기관을 통해 그는 사람과 사물의 사소한 움직임, 동물과 식물의 은밀한 상호작용, 이를테면 돌의 속삭임 같은 것을 감지한다. 눈먼 탐정은 ‘나’에게 말한다. “그 속삭임을 들어 봐”(239쪽). 배수아의 근작들은 소리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의미를 가진 어휘들로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지만 동시에 의미로부터 멀어져 은은하게 울리는 음향들로 가득하다. 말이라기보다는 소리. 언어라기보다는 음악. 그러니 우리는 이 소설들을 읽기보다는 들어야 한다. 미지근한 여름 강물 위로 울려 퍼지는 날카로운 매미 울음, 오래된 동굴의 광물에 축적되어 있는 음향, 짙은 숲속을 달려가는 기차 신호음, 끝나지 않는 나선형 계단을 내려가는 누군가의 발소리. 확실히 해독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들리는 이 소리들은 때로는 웅성거림이나 속삭임, 파장이나 소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배수아의 소설들에서 서로 부딪치고 뒤섞이거나, 부풀어 올랐다가 잦아들거나, 되풀이되고 메아리치면서 무언가 아름다운 것를 만들어 내고 있다. 서사를 구성하고 있지만 그것을 보태는 장식이나 에두르는 묘사가 아니라 그 자체로 다른 차원의 서사를 만들어 내는 섬세한 구조물. 「눈먼 탐정」에는 이 아름다운 구조물의 기원이라고 할 만한 하나의 소리가 울려 퍼진다. 우체국 앞 우체통에 잠시 멈춘 여인은 우리가 한눈을 파는 사이 한 통의 편지를 재빨리 우체통에 던져 넣었다. 그날 이후 귀에는 최초의 소리가 산다. 묵직한 편지가 어두운 우체통 깊숙이 툭 하고 떨어지던 소리. (230쪽) (강조는 인용자) 지금도 기억나는, 우체통 깊숙이 편지가 툭 하고 떨어진 후에도 오래오래 울리던, 어둠을 닮은 최초의 소리. (234쪽) (강조는 인용자) ‘나’는 자신을 키워 준 젊은 여인이 바닷가 소나무숲에서 우체통에 은밀하게 넣은 편
- 관리자
- 2025-04-01
새로움의 경제2 (1) 강동호 1. 일전에 나는 「문학의 경제학–문학적 ‘배움’과 ‘세대’에 관한 이론적 검토」라는 글에서, 문학의 자율성에 관한 새로운 이론적 관점을 모색하기 위해 ‘문학의 경제’라는 다소 생경한 용어를 제안한 바 있다.1) 당시 내가 경제(economy)라는 개념에 주목하고 ‘문학 작품의 가치’(문학성)가 측정·평가·유통되는 과정을 ‘경제적 현상’에 비유했던 까닭은, 문학 작품을 생산·소비하는 데 관여하는 남다른 교환(exchange)의 원리 및 체계가 상정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문학 역시 경제적 교환의 대상에 해당한다는 주장은 일면 낯설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경제적 교환은 시장에서의 행위를 지시하는 제한된 단어가 아니라, 특정한 ‘가치’(value)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다양한 주체들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확장될 수 있다. “경제란 특정한 가치 위계 내부의 가치들을 거래하는 작업이다. 이 작업은 모든 사람에게 사회적 삶에 참여할 것을 요구한다. 문화는 그중 한 부분이다.”2) 누군가가 특정 행위를 시도하는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비용(cost)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는 요소(물론 이때의 비용은 금전적 비용에만 국한되지 않는다)가 따르기 마련이다. 다시 말해 주체에 의해 어떤 행위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그 행위의 선택을 통해 얻게 되는 가치의 편익이 지출된 비용보다 크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우리는 가치가 행위의 동기이자 목적이면서 동시에 교환을 가능하게 하는 필요조건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가치가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되거나 그에 대한 기대가 교환 주체 사이에서 어긋난다면, 거래는 즉각 중단되고 더 이상 유의미한 교환 행위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특정한 가치를 거래하는 교환의 네트워크는 삶의 국면들에 광범위하게 편재하고 있으며, 이러한 교환을 원활하게 하고 정당화하는 경제적 원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중이다.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상품 거래뿐만 아니라 이를테면 일상에서의 대화, 사회적 의례의 실천, 문화적 재생산, 심지어는 개인의 지극히 사적인 행위에서도 우리는 특정한 가치들의 거래 현상, 즉 경제적 교환의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 2.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는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다양한 교환의 양태를 이해하고, 거기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고유한 경제적 체제들을 변별하는 데 있다. 이를테면 욕망의 경제(프로이트), 선물의 경제(마르셀 모스), 숭고의 경제(리오타르), 구별의 경제(부르디외), 권력의 경제(푸코) 등과 같은 개념들은 인간의 다채로운 행위를 관통하는 경제적 논리가 정신분석학, 인류학, 미학, 사회학, 정치학 등의 광범위한 분야에서 관측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사례들이다. 동일한 맥락에서 우리
- 관리자
- 2025-04-01
사실은 아주 조금 망했을 뿐이므로 -김지연의 『조금 망한 사랑』이 번역한 ‘반려(종)-되기’에 대해 김영삼 1 한국문학의 숲을 지배했던 우세종으로서의 퀴어 서사는 면역 정치의 배제성(팬데믹)과 죽음 정치(차이 나는 존재에 대한 절멸을 기획했던 정치 기술)의 강박을 거쳐 새로운 관계성의 지점으로 나아가고 있는 듯하다. 젠더 권력의 신화에 맞서 퀴어적 친연성에 주목했던 김지연의 서사가 동성 연대(또는 소수자 연대)의 친밀성이 모종의 불안으로 인해 균열되는 순간으로 그 시선을 확장하고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따라서 『마음에 없는 소리』와 『조금 망한 사랑』1)의 변별 지점은 김지연의 서사가 퀴어적인지 아닌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작품에서 인물들이 겪는 불안의 원인이 다르다는 데 있다. 관습화된 젠더 권력의 얼굴 없는 폭력이 전자의 불안이라면, 소수자끼리의 관계성 파괴 또는 연약한 주체들 간의 관계 위기가 후자의 불안이다. 김지연의 소설집 『조금 망한 사랑』은 이러한 불안의 감정이 연약한 주체들이 새로운 관계성의 레시피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어떠한 오류와 마주하게 했는지에 대한 보고이자, “우리는-(모두)-여기에-함께-있지만-하나가-아니고-똑같지도 않”2)은 연약한 주체들 간의 차이 그 자체에 대한 보고서이기도 하다. 이들이 겪은 사랑과 이별에 대한 김지연의 이야기들은 지워지거나 누락된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를 경유하여 공동체에 공동 거주하고 있는 모든 우리의 관계성에 대한 질문으로 나아간다. 이때 김지연 소설의 미덕은 혐오와 차별에 얽힌 ‘차이 없는 반복’을 답습하지 않으면서 돈, 불안, 사소한 균열, 약자다움의 감성 등과 같은 현실적 문제를 직면했다는 데에 있다. 2 확장된 의미에서 김지연의 소설이 퀴어적인 것은 그(녀)들의 이야기가 ‘연약한 주체’(주변화, 성차화, 인종화되면서 상징적 자격이 박탈되는 ‘소문자 인간’)들이 경험하는 장면들을 서사화하기 때문이다. ‘대문자 인간’이 생산한 관습과 경계선들을 들춰내고 폭파하면서 그것의 패권을 의문으로 대상으로 만들고 그러한 세계의 문법이 모종의 사건들과 연루되어 있다는 혐의를 문제 삼을 때, 김지연의 소설은 퀴어적이고 때로 그것을 넘어 우리 사회 공동체 전체에 대한 사유가 된다.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조금 망한 사랑』에 수록된 이야기들은 동성-이성에 얽힌 관계성을 더 이상 전경화하지 않으면서, 세계와 직접 부딪고 있는 소문자 인간들의 삶의 지속성에 주목함으로써 전진하고 있는 듯하다. 끝끝내 ‘우리’를 떠나지 않는 반려종은 ‘불안’이라는 것, 그 불안으로부터 파생된 서툴기 이를 데 없는 사랑과 이별이 ‘빚’으로 남는다는 것, 그리고 이 과정을 겪은 연약한 주체들이 그 빚의 청산 유무와
- 관리자
- 2025-04-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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