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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적인 것’과 ‘문학적인 것’

  • 작성일 2016-08-01
  • 조회수 2,899

[비평 in 문학]


비평 기획
- 한국 문학에 불만 있다?

2016년 한국 문학은 어느 위치에 자리하고 있을까요. 문학을 둘러싼 최근의 담론들 그리고 2010년대 중반 현재의 한국 사회 문화의 종합적 환경을 고려한다면 한국 문학은 어떻게 생각되고 이야기될 수 있을까요. 그보다 먼저, 현재의 복합 다층적인 사회 문화적 조건과 더불어 한국 문학은 어떤 형태와 어떤 맥락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요.
한국 문학에 대한 불만은 기실 개별 텍스트, 즉 어떤 소설, 어떤 시, 어떤 산문, 어떤 글쓰기에 바로 드러나 있는 요소들로만 환원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또한, 한국 문학을 구성하는 개별 텍스트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이야기될 수 없는 것도 분명합니다. 한국 문학에 어떤 막연한 불만이 있다면 그것은 개별적인 문학 작품들에 대한 감상과 비평이 먼저 제기되지 않았을 리 없었으리라는 것이 이번 기획의 시작점이었습니다.
이번 비평 기획은 가급적 구체적이고 실감이 되는 의견을 나누려고 합니다. 솔직해야 하는 만큼 부담스러운 일일 수 있으나, 비평가로서가 아닌, 오랫동안 한국 문학에 애정과 관심을 유지하고 있는 독자로서 한국 문학을 만났을 때 느꼈던 감상을 다시 한 번 깊이 있게 헤아려보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한국 문학의 위치와 역할 그리고 그 의미를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보려 합니다.




‘대중적인 것’과 ‘문학적인 것’

- 정유정의 소설을 경유하여



서영인



1. 베스트셀러 목록이 말해주지 않는 것
“한강 끌고 정유정 밀고, 소설의 반격 시작됐다.” 한국 소설의 판매 호조를 보도하는 최근 신문의 헤드라인이다.1) ‘한강 끌고 정유정 밀고’라는 표현이 재미있다. 물론 베스트 셀러 목록을 기준으로 시장의 현상을 보도하기 위한 표현이겠지만, 어떤가. 한국 소설의 부활을 한강이 끌고 정유정이 밀고 있다고 보아도 좋은가.
한강의 『채식주의자』와 정유정의 『종의 기원』이 베스트셀러 목록 상위에 이름을 올린 배경은 물론 다르다. 2007년 출간된 『채식주의자』가 새삼스럽게 베스트셀러 목록에 등장한 것은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이 작품이 ‘맨부커상’ 수상작으로 결정되면서 여기에 화제와 관심이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채식주의자』의 문학적 가치가 여기서 굳이 재론될 필요는 없을 듯하다. 그 가치나 의미를 가벼이 여기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과는 다르게 이해되어야 할 측면이 이 맥락에서는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맥락’이 문제이다. 2007년에 출간된 『채식주의자』와 2016년에 재출간된 『채식주의자』 사이에는 ‘맨부커상’이라는 사건이 개입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 사건을 중심으로 한 작품 읽기의 ‘재맥락화’가 필요하다. 한국문학의 국제적 인지도 상승과 소설의 판매부수 격증에 흡족해 할 일은 아니다. 가령 이런 문제의식이 필요하다. 영국에서 출간된 작품을 대상으로 하고 금융그룹이 후원하는 이 상에 서구중심적, 자본중심적 가치관이 전제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채식주의자』의 수상은 이러한 상의 성격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영어권, 서구권의 시선에서 평가받은 『채식주의자』의 가치는 현재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의미화될 수 있는가. 그 차이를 고민하지 않아도 될 만큼 현재의 한국사회는 이미 국제적인가. 수상을 이유로 작품이 출간된 2007년과 지금의 격차는 고려되지 않아도 좋은가. 만약 그렇다면 이는 작품을 정전화시키고 현재성의 의미에 무심해지는 계기로 작용할 수도 있지 않은가. 적어도 2016년에 『채식주의자』를 논하기 위해서는 이런 비평적 질문이 필요하다.2)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외부적 권위에 『채식주의자』의 문학성을 편승시키는 일 이상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정유정의 소설에 대해서는 또 다른 맥락이 있다.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로 ‘세계 청소년 문학상’을, 『내 심장을 쏴라』로 ‘세계문학상’을 수상하기는 했지만, 정유정은 문학상 수상 등의 후광없이 『7년의 밤』 이후 세 권의 장편소설을 한국소설의 독보적 베스트셀러로 등재시킨 바 있다. 올해 5월 『종의 기원』을 출간한 후 거의 모든 언론이 정유정의 인터뷰와 책 소개로 도배되고 있을 만큼 뜨거운 관심을 끌고 있는 작가다. 물론 공교롭게도 출간일이 한강의 ‘맨부커상’ 수상 발표일과 겹치는 바람에 언론 보도의 대부분에 한강의 이름이 같이 등장하는 해프닝을 겪기도 했지만. 언론과 대중의 뜨거운 관심에 비해 주류문단의 비평담론 영역에서 정유정에 대한 관심은 크지 않은 것 같다. 가을호 계간지가 나와 보아야 알겠지만 『종의 기원』이 전문적 문학비평의 영역에서 비중 있게 다루어질 것 같지는 않다.3) 그러니 ‘한강이 끌고 정유정이 미는’ 한국문학이란 어떤 것인가. 베스트셀러 목록에 나란히 세워 놓는 것만으로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 ‘미제(未濟)’의 분석이 남아 있다. 한강이 문학상의 권위로 시장을 견인한 예에 해당한다면, 정유정은 독자에 의해 선택되고 확장된 문학시장의 한 예라 할 수 있을까. 2016년 한국문학이라는 맥락에서의 한강과 정유정에 대한 분석이 다시 필요한 시점이다. 신문기사의 헤드라인에서 우연히 출발했으나 이런 구도가 지금의 한국문학을 해명하는 데 유용한 단서를 제공할 지도 모른다. 일단은 자발적으로 정유정의 문학을 선택한 수십만의 독자가 증명하고 있는 정유정 문학의 대중성을 적극적으로 읽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려 한다.


1) “한강 끌고 정유정 밀고, 소설의 반격 시작됐다.” <서울신문> 2016.7.19.
2) 계간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는 한강의 문학세계 전반을 논하는 문학비평(신샛별, 「『채식주의자』에서 『소년이 온다』까지, 한강 소설의 궤적과 의의」)이 실렸고, 여기에는 ‘맨부커상’ 수상이라는 계기가 작용했겠지만, 수상을 둘러싼 독해의 ‘맥락’은 포함되지 않았다.
3) 비평적 언급 자체도 많지 않지만(『자음과 모음』 2011년 겨울호의 작가특집, 『오늘의 문예비평』 2012년 봄호의 작가특집, 『자음과 모음』 2013년 겨울호의 『28』 작품론(복도훈, 「‘인간없는 세상’을 꿈꾸는 소설」) 정도가 대표적이다.) 언급의 횟수가 문제가 아니라 이를 한국문학의 지형 내에서 읽어 내려는 노력이 더 중요하다. 주류비평의 관심 부족은 이런 관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2. 영화 <감기>, 혹은 소설 『28』
미리 말해두건대, 나는 장르소설의 문법에 대해 구체적인 분석을 할 만한 처지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유정의 장편 『28』을 장르적 공통성의 견지에서 바라보고자 하는 것은 이런 시점을 통해 『28』이 지닌 문제성을 더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유정에 대한 비평에는 한편으로 정유정의 소설이 본격소설에 못 미친다고 생각하는 시선, 그리고 그런 비평적 경시에 반발하여 정유정의 소설이 지닌 문학성을 더욱 강조하고자 하는 시선이 공존한다. 즉 장르소설이기에 본격적 비평의 논외가 되거나, 혹은 장르소설적 외피가 아니라 그 안의 문학성에 주목해야 한다는 시선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다4).
그러나 문학성 논란의 강박만 없다면, ‘장르소설’의 문법을 따라 정유정의 소설을 읽어서 안될 이유란 없다. ‘장르’가 일종의 ‘누적과정’의 결과라면, 즉 어떤 전통예술 형식보다 직접적으로 관객들을 사로잡는 예술형식으로서의 대중적 내러티브라면, 그리고 거기에서 특정 시대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를 읽을 수 있다면5), 『28』을 장르적으로 읽는 것도 충분히 의미있다. 오히려 이런 독법이 100만 명에 육박하는 누적독자를 가진 작가의 작품이 함축하는 현재적 영향력을 제대로 읽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수십만의 독자들이 정유정의 소설을 선택한 이유, 혹은 그의 소설을 읽은 수십만의 독자들이 공유하는 인식의 공통성, 행동의 방향성은 시대적 관습, 동시대 문화와의 겹쳐 읽기를 통해 더 능동적으로 해명될 수 있다.


4) 정유정의 소설에 대한 한국 문학 비평장의 담론구조에 대한 분석으로 오혜진의 「‘장편의 시대’와 ‘이야기꾼의 우울’」(『자음과 모음』 2013년 겨울) 참조. 오혜진은 정유정의 소설에 대한 ‘이야기꾼’이라는 명명에 한국문학 비평장의 ‘배제의 수사학’이 잠재해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5) 강정석, 「종말의 풍경들:종말을 재현하는 영화들」, 『문화과학』 2012년 겨울, 235쪽.


출발점은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영화 <감기>와 『28』의 유사성이다. 갑자기 닥친 감기 바이러스와의 사투를 그리고 있는 영화 <감기>는 전형적인 재난영화의 플롯을 취한다. 그리고 이 재난 영화의 설정, 이야기의 전개과정은 『28』과 놀랄 만큼 유사하다. 영화의 감독과 소설의 작가는 공통적으로 구제역 파동 때의 돼지 살처분 장면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밝히고 있는데, 결국 이 둘의 유사성은 텍스트 밖의 사건들이 전해 준 감정적, 인식적 충격에서 발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장르영화나 장르소설이 ‘누적된 관습’이며 그로 인해 유사한 플롯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지만, 시대에 따라 그 관습은 변주되며 거기에는 특정 시대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가 배경으로 깔려 있다. 구제역 파동에서 영화와 소설은 공히 생명의 윤리라는 문제의식, 감염과 격리·처분의 생명정치라는 구도를 취하고 있으며, 그러므로 이 유사성은 일정한 동시대성을 함축한다. 어떤 동시대성인가.
첫째로 바이러스의 발생. <감기>의 감기든, 『28』의 인수공통전염병이든 그 바이러스의 발생지점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 ‘인간성 자체’에서 온다. <감기>의 바이러스는 외국인 노동자가 감금된 컨테이너에서 발생하고 『28』의 바이러스는 철창에 갇힌 개들이 절규하는 아파트에서 발생한다. 두 공간 모두 질척하고 끈끈한 어둠과 피투성이의 시신으로 참혹하다. 이 참혹함은 마침내 치명적으로 스스로를 죽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잔혹함에 다름 아니다. 짐승처럼 컨테이너에 감금되어 옮겨지고 매매되는 외국인 노동자들, 개장수에게 납치되고 포획되고 도륙당하는 개들, 매매의 효율과 이윤의 원리 이외에는 모든 것이 무시되는 이 지옥이 우리를 가두어 죽일 것이다.
그리고 공동체의 안전. 바이러스가 우리로부터 발생했으므로 우리가 스스로를 지킬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공통의 위험과 재난 앞에서 공공의 생명과 존엄을 지키기 위한 사회적 윤리는 여지없이 파탄난다. 국가라는 관리 체계는 희생을 줄이고 질서를 유지하며, 남은 생명들을 보호하는 일에 철저하게 무능하다. 할 수 있는 일은 감염된 도시를 폐쇄하고 시민들을 격리하고 그 와중에서도 통제와 규율을 강요하는 일 뿐이다. 영화는 ‘분당’이라는 실제지명을 사용하고 있고 소설은 ‘화양’이라는 가상도시를 설정하고 있지만, 두 배경 모두 서울에 인접한 수도권 도시인 것도 의미심장하다. 서울을 보호하기 위해 도시는 격리되고 나아가 영화에서는 전 인류를 위해(사실은 미국을 위해) 도시를 폐쇄한다. 영화와 소설에서는 모두 바리케이트를 넘는 인간들이 등장한다. 바리케이트는 죽어도 좋은 사람들과 죽어서는 안되는 사람들 사이를 나누는 경계이다. 감염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아직 살아 있는 생명은 무시당한다. 살기 위해 바리케이트를 넘고, 그리하여 바리케이트의 저편을 향해 여기 사람이 있다고 외치는 사람들을 향해 군대는 총구를 겨누고, 실제로 발포한다.
이 지옥도의 현장에서 살아남는 자, 살리는 자는 누구인가. 영화에 개재된 가족주의와 모성애를 일단 별도로 한다면, 살아남고 살리는 일을 한 사람들은 결국 간호사 혹은 의사, 그리고 구급대원이다. 그들이 이미 사라져버린 인간성을 지키는 자로 남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직업윤리’이다. 공동체적 안전망도, 공공적 윤리와 인간애도 사라진 곳에 개별적 직분만이 감염되지 않고 남았다. 각자도생의 경쟁논리와 위계화된 생명관리 체계 사이에서 묵묵히 자신의 직분을 지키는 개인에게 부여된 소명의식은, 결국 주어진 세계에 대한 자발적 복무를 정당화한다. 살아남은 자들이 강렬하게 호소하는 휴머니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영화와 소설의 유사성을 강조하는 시선이 이 둘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여러 의미망들을 지워 버렸다는 것을 알고 있다. 특히 소설에 대해서 말하자면, 영화적 구도에는 끼어들 수 없는 다채로운 인물들의 형상화, 재난이라는 설정 아래서 탐구되는 인간성의 이면들, 그리고 이러한 디테일을 떠받치는 생생한 묘사와 서사적 장악력 등은 쉽게 단순화될 수 없는 이 소설의 강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난서사라는 장르적 문법 안에서 공유되는 공통성을 읽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공통성이 창의성을 의심하거나 상투성을 지적하는 빌미가 될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동시대적 삶의 구조에 밀착한 현재성의 이름으로 이 서사는 더 분석되어 마땅하다.


나 아닌 타자들을 잔혹하게 억압하는 인간들, 이윤을 위해 그 잔혹을 정당화하는 인간들로부터 재난은 온다. 인간성의 윤리나 공동체적 결속감이 개입될 여지없이 모두 함부로 다루어져도 좋은 물건이 되어 버린 시대에 각자의 생명은 각자 지켜야 하는 냉혹한 각자도생의 세계, 아무도 구원해주지 않는 세계에서 어떻게든 살아가야 하는 개인들의 불안과 감염의 공포, 이 재난서사의 공통성 속에는 우리가 사는 세계의 잔혹한 참상이 함축되어 있다. 정유정 소설의 대중성은 동시대 영화의 공통성으로 확장되면서 더욱 구체적인 해석을 얻는다. 그리고 마침내, 더 끔찍한 것이 왔다.


3. 사이코패스의 사회학
『7년의 밤』에 ‘오영제’가 있었고, 『28』에 ‘박동해’가 있었다면, 그리고 그들의 악마성은 ‘서원’(『7년의 밤』)이나 ‘재형’(『28』)들에 의해 다소간 중화되거나 저지되었다면, 이제 그럴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이제 ‘오영제’와 ‘박동해’를 어떤 위안이나 중화도 없이 직시해야만 한다. 『종의 기원』의 ‘유진’을 통해서. ‘오영제’는 체포되었고, ‘박동해’는 개에 물려 처참하게 죽었지만 ‘유진’은 끝까지 살아남았다. 가족과 친구를 모두 죽인 다음에도. 이 징벌 받지 않는 절대 악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피범벅으로 시작되는 소설에서 우리는 이미 유진이 어머니를 죽인 범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범인이 이미 밝혀진 소설의 긴장감은 사건의 발견과 유진의 기억 사이에 있는 시차, 그리고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살인의 과정에 의해 유지된다. 부분적이거나 왜곡된 기억, 과거의 사건에 대한 뒤늦은 기록들은 반전의 역할을 하는데, 거듭된 반전 끝에 알려진 진상은 유진이 자신의 가족과 이모, 친구까지 죽이고도 살아남는다는 사실, 그리고 유진의 살인은 그가 날 때부터 그런 유전자를 가진 인간이었기 때문에 발생했다는 사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살인의 유전자를 지닌, 선천적 사이코패스였다.
하나뿐인 친구 해진을 수장시키고, 그에게 살인의 누명까지 씌우고 사라진 유진이 새우잡이 배에서 내리는 마지막 장면이 주는 기이한 공포는 이 절대악의 존재가 전달하는 무력감에서 온다. 이미 발생한 사건과 유진의 기억이 계속 엇갈리는 동안, 한 템포 늦게 사실을 알리는 기록들이 발견될 때마다, 그리하여 유진의 살인 혐의에 오해가 있었거나, 혹은 어떤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단서가 주어질 때마다, 나는 그 단서가 다른 진실을 밝혀 주기를 바랐다. 유진을 연민해서가 아니었다. 그의 살인과 악행의 이유를 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유가 있다면, 가령 부모의 편애나, 유진의 본성을 과장한 이모의 처방이 일으킨 부작용이 이유라면 그 이유를 찾는 것으로 상황은 개선될 수 있다. 정상치에서 벗어난 존재를 억압하거나 은폐하지 않고 인정한다면, 공감의 감수성과 사회적 연대의 의미를 더 신장시킨다면, 상황은 좋아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사이코패스의 존재로 인해 우리는 이러한 희망의 동력을 상실한다. 우리가 처한 삶의 조건들을 너무 안일하게 해석하였다는, 휴머니즘적 시민윤리를 반성하는 것만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무력감이 여기에는 있다.
그러나 사실 사이코패스가 더욱 공포스러운 이유는 따로 있다. 타고난 사이코패스라는 유진으로부터 발견하는 기시감, 어쩐지 그가 소설을 위해 등장한 예외적 인간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 어머니의 목을 난자하지 않았을 뿐, 유진과 같은 인물형을 우리는 도처에서 발견한다. 타인의 죽음에 공감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슬픔을 조롱하는 자들, 성공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성공한 지위에서 저지르는 갖은 악행을 성공의 권리라고 생각하는 이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는 매일 사이코패스 인간형을 만나고 있다. 심리학자 파울 페르하에허는 우리의 정체성 형성이 사회적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는 전제 하에 사이코패스를 신자유주의적 인간형이라고 규정6)한다. 사이코패스와 신자유주의적 인간형의 상동성을 저자가 들고 있는 예를 통해 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일단 말을 잘 해야 한다. 그래야 많은 사람을 내 편으로 만들 수 있다. 이런 만남이 피상적이긴 하지만 요즘엔 대부분의 인간관계가 그렇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자신의 행동에도 절대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일이 잘못되면 항상 남 탓이다. 심지어 남 탓이라고 다른 사람들이 믿게 만들 수도 있어야 한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땐 효과가 입증된 도구적 폭력을 사용한다. 여기서 ‘도구적’이란 ‘합리적’이란 말과 같은 뜻이다. 감성 같은 통속적인 것에 흔들리지 말고 폭력 사용을 정당화한다. 감정 따윈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감정이 있는 척 꾸미는 것도 성공의 고정 레퍼토리이다.7)


어느 칼럼니스트가 요약한 출세를 원하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요건인데 이 내용은 ‘사이코패스 핸드북’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칼럼니스트가 활용한 핸드북의 원제는 ‘수트를 입은 뱀(Snakes in Suits)’이다.
공동체의 윤리 대신 계약서만 남은 세계, 성공이 만물의 척도이며 경쟁에 승리한 사람에게는 무한한 자유가 주어지는 세계, 사이코패스가 자신을 정당화할 수 있는 세계이다. 『종의 기원』이라는 제목에서 유추하건대, 유전자는 고정불변의 원천이 아니다. 환경 변화에 적응한 종만 생존하는 ‘적자생존(適者生存)의 법칙’에 따라 종은 유지되고 변이의 유전자는 살아남는다. 그러니 사이코패스적 인간형은 신자유주의시대에 가장 잘 적응한 ‘적자(適者)’가 될지도 모른다. 사이코패스에 대한 대중의 매혹과 공포는 살아남기의 욕망, 그리고 이런 식으로 살아남는 일에 대한 두려움을 동시에 반영한다. 유전자를 바꾸는 일은 살아남기의 조건 자체를 바꾸는 일과 연관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그리고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불안과 공포 속에서 괴물과 동거하거나, 혹은 스스로 괴물이 되어갈지도 모른다. 작가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성공한 사이코패스의 이야기는 우리들 삶의 조건과 연관되면서 대중적 흡입력을 증폭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절대 악의 근원을 묻는’ 식의 추상적 표현을 넘어서는 현실감으로 읽혀야 한다.


6) 파울 페르하에허(장혜경 역), 『우리는 어떻게 괴물이 되어가는가』, 반비, 2015.
7) 앞의 책에서 189-190쪽에서 부분 인용.


4. 무한히 확장되는 ‘문학적인 것’들
정유정의 소설이 한국문학의 대중성을 대표한다고 볼 수도 없고, 또한 그 대중성이라는 것이 한두 가지의 테마로 간단히 정리될 수도 없다. 이 글에서 읽어낸 정유정 소설의 대중적, 사회적 함의는 과장된 것이거나 혹은 일면적인 것일 수도 물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에서 대중성을 키워드로 정유정을 읽고자 한 것은, 소설이 발표되고 독자와 만나고, 그에 대한 담론이 형성되는 과정의 맥락과 효과를 생략한 채 텍스트 자체에만 논의의 초점을 맞추는 경향에 대한 불만 때문이다.
『28』에서 ‘메르스 사태’를, 『종의 기원』에서 ‘강남역 살인사건’을 떠올린 것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일본의 장애인 시설에서 장애인들을 무차별 살해한 살인자의 웃는 얼굴이 화제가 되고 있다. 타인의 생명에 무감각한 인격,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와 위해를 정당화하는 인격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우리들 삶의 안정성과 윤리감각의 기반은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다. 정유정 소설이 포착하는 테마가, 그리고 그 서사의 진행이 함축하는 대중성의 공유감각이 이러한 현실과 멀지 않은 곳에 있다고 생각한다. 소설이 설정한 재난과 범죄의 현장에서 우리는 더 이상 전통적 휴머니티로 감당할 수 없는 우리 삶의 불안한 조건들을 확인한다. 그리고 변화의 불가능성, 현실의 수용과 적응이라는 공통적 이데올로기가 이 소설들의 배경에는 깔려 있다. 그리하여 안일한 기대 없이, 살아남기 위해서 수용하거나 적응해야 하는 삶의 절박한 호흡이 소설읽기의 시간을 긴장시킨다.
그러니 다시 묻자. 한강이 끌고 정유정이 미는 한국문학이란 무엇인가. 국제적 권위의 문학상이 소설의 판매부수를 올리고 독자들을 견인한다면 그에 대한 해석은 ‘순’문학만으로 감당할 수 없다. 절대다수의 대중이 한 작가의 작품을 꾸준히 읽어왔다면 그 대중성은 오늘의 한국문학을 구성하는 중요한 주제가 되어야 한다. 한국문학 담론은 혹시 베스트셀러 순위로 뭉뚱그려질 수 없는 이 맥락들에 대해 지나치게 초연했던 것은 아닌가. ‘문학성’이라는 것이 고정불변의 속성이 아니고 시대적 변화와 당대의 문화환경 속에서 결정된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상식이다. 베스트셀러 순위로 계량화되거나, 텍스트 내부로 환원된 ‘문학성’의 의미를 대중적, 사회적 소통의 방향으로 돌려놓는 일. 문학의 이름으로 다양하게 펼쳐진 맥락들을 우리들 삶의 환경과 조건 위에서 한껏 팽팽하게 당겨 읽으며 그 안에서 ‘문학적인 것’의 소통을 확장시키는 일. 한강이 끌고 정유정이 미는 이상한 한국문학은 이 과정에서 제대로 해명될 수 있을 것이다. ■





문학평론가 서영인

작가소개 / 서영인

- 문학평론가, 평론집으로 『충돌하는 차이들의 심층』, 『타인을 읽는 슬픔』,『문학의 불안』이 있음


《문장웹진 2016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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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않(을)은 길을 향한 반유토피아적 노스탤지어 ― 전하영의 소설들 권영빈 온다 리쿠(恩田陸)의 소설 『잿빛극장』(김은하 역, 망고, 2022)은 1990년대 일본에서 실제로 있었던 동반 자살 사건에서 출발한다. 죽은 두 여성은 대학 시절 만난 친구 사이로 죽음에 이르기 전 함께 살았다는 사실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 이름도, 얼굴도 없이 단지 서로를 죽음의 의지처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특수한 관계성만 남긴 채 사라진 그들은 작가 자신이자 서술화자이기도 한 ‘나’의 마음에 왜인지 사무쳐 버린다. 그로부터 이십여 년 후, 두 여성의 이야기는 소설의 형식으로 소환되고 그들의 삶과 죽음에 존재감이 부여된다. 추리·미스터리 장르를 주축으로 하는 온다 리쿠의 소설은 한국에서도 이미 인기작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래서인지 그가 형상화하는 이 기묘하고 슬픈 ‘실화’는 독자로 하여금 이들 여성이 어떤 역사를 거쳐 동반 자살이라는 흔치 않은 비극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소상히 밝히는 데 주력할 것으로 기대하게 만든다. 그러나 소설은 죽음의 원인을 직접적으로 추적하는 대신 여성들의 삶과 죽음에 소설적 자리를 내주려는 분투 자체에 무게를 둔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주된 장치가 바로 ‘극장’이다. 『잿빛극장』은 작가가 죽은 두 여성의 이야기를 소설화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번민과, 완성된 텍스트를 토대로 이들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드는 과정을 다루는 시점을 교차해 보여준다. 그 사이사이 T와 M이라는, 익명의 두 당사자 여성 각자의 입장에서 그려지는 일상과 회고의 장면이 삽입된다. 극장이라는 장막은 사실로서의 죽음과 허구로서의 죽음 사이에서 빚어지는 재현 윤리를 과장되게 내세우거나 추상화하는 일을 경계하면서 여성들이 살았던 흔적을 희미하게나마 만들어낸다. 1990년대 사십대였던 여성들이 살아가며 겪었음 직한 가부장 이데올로기의 억압과 경력단절, 젠더화된 빈곤의 문제를 건드리면서도 그것을 죽음의 단적이고도 극적인 요인으로 지목하지 않으면서 다만 이들 여성의 시작과 끝을 지켜볼 수 있도록 하는 가변적인 무대를 만드는 것이다. 이름이나 얼굴이 아닌 이야기로 존재하게 된 두 여성은 작가와, 연극배우와, 가상의 당사자 캐릭터 주변을 선회하면서 눈치 채지 못하는 순간 잿빛의 세계로 다 같이 녹아든다. 어떤 사태가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 시작과 끝에 개입한 이야기 조각들을 수집하고 짜 맞추면서 결국에는 비가역적인 ‘한 시절’을 만들어내는 온다 리쿠 특유의 노스탤지어가 새삼 엿보이는 소설이다. 전하영의 소설을 말하려는 이 글이 그와는 세계관도, 세대도 다른 국외 작가의 소설을 거론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돌이킬 수 없는 ‘한때’를 향한 정동과 ‘극장’ 말이다. 시절에의 이끌림과 회한을 발판 삼아 작금의 사태를 해석하고 전망하려는 전하영의 소설은 노스탤지어의 분위기와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 관리자
  • 2024-05-01
소설의 원점, 혹은 클래식-퓨처리즘

소설의 원점, 혹은 클래식-퓨처리즘 박인성 시간의 순환과 소설의 원점 흔히 소설을 가리켜 시간의 예술이라고 부르던 시절이 있다. 물론 여전히 유효한 말이지만, 시간이란 결국 우리가 세상을 인지하고 이해하기 위하여 활용되었던 유용한 개념적 도구일 뿐이다. 따라서 시간을 다루는 방식의 다양성이 늘어나고 시간에 대한 인지적 표현 수단이 늘어나면 자연스럽게 소설이 시간의 예술이라는 표현은 보편적이거나 당연한 것이 아니게 된다. 소설의 언어적 형식은 주제를 이끌어 가는 캐릭터의 삶과 그 의미화를 매개로 시간을 다루는 구성적 논리일 뿐이다. 오늘날에는 양자역학과 다양한 과학적 가설들에 의해서 시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보편화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삶을 연대기적으로 엮어서 기승전결의 플롯 구조를 그리는 소설의 시간적 이해는 그 자체로 시간에 대한 세련된 접근은 아니다. 자연히 소설이라는 언어 형식이 시간에 대한 해석적 주도권을 잃어버린 시대에 다시금 소설이란 무엇이었는지를 묻게 된다. 근대문학으로서나 이후 오늘날의 다양한 소설 형식으로서나 저마다의 응답은 다양하게 도출되지만 자주 잊어버리게 되는 것은 원점에 대한 질문이다. “소설이라는 게 대체 뭐였더라?”라는 질문. 형식과 표현은 언제나 변화하지만 서술과 그에 따른 시간의 뒤섞임은 소설의 본질적인 원료다. 따라서 근대문학에서부터 기존의 시간에 대한 이해를 비틀어 보여주려는 수많은 형식적 실험과 새로운 시도에 존재해 왔지만, 결국 소설이란 세상에 대한 시간적 이해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며 ‘서사적 과거’(Episches Präteritum)1)라는 인지적 조작에 의해서 비로소 시작될 수 있는 삶과 세계에 대한 이해를 함축한다.2) 결국 소설은 ‘서술하는 시간’(narrating time)과 ‘서술되는 시간’(narrated time) 사이의 격차를 통해서 형성되는 상호주관성의 언어이며, 소설가와 독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경험적 맥락을 통해서 그 몸피를 부풀려 가는 해석의 공간이기도 하다. 시간의 공간화의 측면에서, 김연수는 언제나 소설의 언어적 형식이 가진 시간적 해석의 힘을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펼쳐 보인 작가다. 김연수가 지속적으로 소설이라는 언어 형식을 통해 시간을 다루어온 시도는 소설이 가진 이해의 힘을 비판적으로 해체함으로써 오히려 부정할 수 없게 재구성하는 시도에 가깝다. 마찬가지로 소설집 『이토록 평범한 미래』3)는 고전적인 시간의 상상력에 대한 김연수식 문학의 재구성을 집대성한 책이다. 이 소설집에서 다루어지는 시간에 대한 이해와 그 서술적 전략이 특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 소설의 시간성에 기반한 서술 전략이란 미래에 대한 선취를 포함하는 시간의 종이접기와 접붙임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종이접기와 접붙임의 결과물로 도출하고 싶었던 것은 전망-없음과 미래에 대한 비관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의도적인 평범성의 추구다. 소설집의 표제작인 「이토록 평범한 미래」가 보

  • 관리자
  • 2024-05-01
로망스 미학과 새로운 ‘합일’을 희구하는 낭만적 주체의 언어

로망스 미학과 새로운 ‘합일’을 희구하는 낭만적 주체의 언어 염선옥 첨단 테크놀로지의 물결이 세계를 장악하면서 시를 쓰는 철학적 기반에도 작지 않은 변화가 초래되었다. 가령 시 쓰기의 새로운 지표가 친환경적 태도로 기울어 가거나, 고독과 우울 같은 정서를 급격하게 동반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경향의 이면에는 서정적인 것이 낡은 것이라는 신념이 도사리고 있는데, 이는 시인들이 “‘서정적=감상적’이라는 오도된 등식과 연쇄적으로 마주”1)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삶의 모순을 표현하는 데 서정적 일치감보다는 대상과 내면 사이의 불일치를 선택하는 경향이 우세해진 것도 그 까닭의 한 측면을 이루고 있을 것이다. K-팝과 시가 화려한 리듬과 언어유희를 독자에게 전달한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지만, K-팝이 선풍적 인기를 구가하는 것에 반해 시는 일부 문학인들의 전유물로만 공유되고 있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K-팝이 K-문화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세계인들에게 통할 보편적 상상력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우리는 새로움이 주체의 상상력에서 연유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사유하는 것도 상상력”2)이라는 바슐라르의 표현처럼 K-팝은 이미지와 사유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음악이 덮고 있는 낭만성, 서정성이라는 은밀한 파동을 전달한다. 음악이 읊는 이미지는 사유로 이어지고 그것은 다시 ‘너’의 사유로 가닿는다. 이성의 시대를 맞이하면서“시를 쓸 수 없는 시대”, “시가 죽었다”라는 클리셰가 난무하는 가운데도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열정은 조금씩 패턴화되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 그런 와중에 문단 내로 불어오는 ‘서정’의 바람은 꽤 육중하고 소중하게 다가온다. 비역동적 세대의 내적 추락 2010년대 들어 청년층을 가리키는 신조어들이 국내외에서 쏟아져 나왔다. 국내에서는 3포 세대에 이어 N포 세대라는 신조어가 나왔고, 이웃 나라 일본에서는 사토리 세대, 중국에서는 탕핑(躺平, 당평, 눕자) 족이 출현했다. 2010년대 기준 청년실업 등 여러 사회 문제에 시달리는 20~30대 한국 젊은이들이 처한 암울한 현실을 일컫는 ‘N포 세대’는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의미를 염두에 둔 부정적 용어라고 볼 수 있고, 사토리 세대(とり世代)는 불교 용어로서 ‘깨달은 세대’, ‘득도한 세대’로 해석되어 물질적 욕망에서 벗어난 초월적 존재로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현대사회에서 희망을 포기한 젊은 세대를 일컫는다. 탕핑 족 역시 “평평하게 누워 있기”를 뜻하는 중국어로서 그 속내는 제아무리 일을 열심히 해도 대가가 없고 결국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 있는 게 현명하다는 뜻을 함축한다. 이는 존재의 고유한 운동성을 스스로 차단하는 세대를 통칭한다는 점에서 공통 함의를 띠고 있다. 한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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