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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의 실패에 대해 말하겠다

  • 작성일 2018-12-01
  • 조회수 3,250

[젊은 비평가 특집]



최근 몇 년 간 한국문학의 흐름은 그야말로 숨이 가쁠 정도였다. 얼마나 많은 사건과 변화가 있었는지 머릿속에서 떠올리기조차 쉽지 않다. 한국문학은 달라져야 했고, 달라지고 있으며, 또 계속해서 달라져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많은 것이 바뀌었다고 해도 더 많은 것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고, 수많은 변화의 외침은 지금도 사방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목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이고자 한다. 이제 막 자리매김한 '젊은' 비평가들에게 한국문학에 관한 자유로운 글을 부탁했다. 이들의 글 속에서 꿈틀대는 변화에 대한 열망과 관습을 비트는 다른 시선을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목소리들이 모여 새롭게 만들어갈 한국문학의 풍경을 기대하며 '기획'의 지면을 연다.






내가 나의 실패에 대해 말하겠다




전기화





웃다 우는 사람


등단작 「패리스 힐튼을 찾습니다(이하 '패리스')」에서부터 일관되게 박상영의 소설에는 일인칭 화자만이 등장한다. 소설집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에 나타나는 '나'들의 형상은 "게이 남창"에서 "실패한 예술가들", "아이돌 연습생"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지만, 모두 "자신이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술과 무의미한 섹스로 인생을 탕진"한다고 이해되었으며, '오늘날 한국 사회의 인간형'으로 평가되기도 하였다.1) 그러나 박상영 소설의 화자들을 이렇게 소개하고 그치기에는 어쩐지 아쉬운 감이 있다. 이 화자들은 분명 자신들의 실패와 망함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그것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이들은 왜 자신의 실패를 '실패'라 명명하고 '실패'로 인식하려 이토록 애를 쓰는 것일까, 그리고 그 명명과 인식의 과정으로서의 말하기는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일까?
「패리스」 속 하찮고 인상적인 스펙터클에서부터 시작해 보자.2) 사라진 개를 찾는 '소라'의 인스타그램 포스팅을 본 팔로워들이 모인 자리, 소라와 '나', 두 연인은 다투기 시작한다. 소라가 휘두른 족발 뼈에 이마를 맞은 '나'의 눈썹 위로 피가 흐르고, 동석자는 비명을 지르며 음식점에는 정적이 어린다. 사라진 존재가 '애완견'인지 '반려견'인지, 그 이름이 '개'인지 '패리스'인지의 문제를 두고 벌어진 이 '피의 현장'에 대해 독자들이 피식피식 웃음을 흘리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듯 보인다. 왜 애완견이 아닌 반려견이어야만 하는지, 왜 개가 아닌 패리스여야만 하는지의 문제에 소라가 도대체 왜 집착하는지는 서술되지 않기 때문에, '나'는 사실 그런 문제에는 별 관심이 없으며 어쩌면 귀찮고 성가신 마음마저 들기 때문에, 그러니까 전단지에서 오타를 발견하고도 "여든 장 중 서른두 장 정도가 이미 인쇄된 상황이었으므로 나는 그냥 살ㄹ례하기로 마음먹"은 '나'에 의해 이 모든 촌극의 현장이 서술되고 있으므로.

1) 이 문장에서의 직접 인용은 윤재민의 해설에서 가지고 왔다. 윤재민, 「캡사이신 폭탄에 치즈를 곁들인 '빨간 맛'을 음미할 줄 아는 고독한 미식가들을 위한 알려지지 않은 케이팝 모음집」,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문학동네, 2018, 330-331면.
2) 이 글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문학동네, 2018)에 실린 단편들과 큐큐퀴어단편선에 실린 「강원도 형」(『사랑을 멈추지 말아요』, 큐큐, 2018)을 중심적으로 다루되, 두 작품집의 출간과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재희」(『자음과 모음』 가을호, 2018)도 부분적으로 논의에 포함시킨다.


경찰이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두 분이 어떤 관계시냐고요.
한때는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이젠 아니에요!
소라가 벌떡 일어나서 소리쳤다. 기개 넘치는 목소리와는 달리 벌겋게 상기된 두 눈에서는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소라는 울 때 제일 예쁘다. 소라가 예뻐 보일 때마다 나는 비로소 그녀의 나쁜 점들을 견뎌 왔던 이유를 깨닫고는 했다. 소라를 꽉 안았다. 어깨 너머로 경찰들이 웃음을 참고 있는 게 보였다. ... 소라는 오빠가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으면 도대체 누가 내 마음을 알아줄 것이며 나에게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지 않느냐, 말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고개를 끄덕이고 다 알고 있다고 말했다. 소라는 한참 동안 서럽게 울다 자리에 앉아 눈물을 닦았다. 내가 소라를 대신해 소라 몫까지 조서를 작성했다. 경찰들은 고개를 숙인 채 계속 웃고 있었다. (「패리스」, pp.68-69)


결국 가게 주인의 신고로 소라와 함께 파출소까지 가게 된 '나'는 그곳을 무대로 만들어버린다. 웃음을 참다 결국엔 고개를 숙이고 웃는 경찰들이 '나'의 시야에 계속해서 포착되므로 이들을 일종의 관객이라 해둘 수 있겠다. 이 시선들을 의식하며 '나'는 마치 무대 위의 배우처럼, 최선을 다해 배역을 연기하는 듯 보인다. 주먹으로 가슴팍을 때리는 소라를 '나'는 "더욱 세게" 안으며, 자신을 왜 만나냐는 질문에는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사랑하니까"라고 답한다.3) 이 '사랑싸움' 속에서 소라의 울음에 대한 소라 자신의 설명, 요컨대 "오빠는 날 사랑하지 않고, 나는 내가 왜 오빠를 만나는지 모르겠"다는 말은 진부한 수사 이상의 의미를 획득하지 못한 채 허공으로 흩어진다. '나'는 소라의 마음을 "다 알고 있다"고 소리 내어 말하고, 소라를 "정말 사랑한다고 거듭 말"한다. 그러나 '나'가 그런 연출을 시도할 때, '나'의 마음에서 어떠한 생각과 감정이 오가는지는 알 수 없다. '나'의 마음에서 독자들이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소라는 울 때 제일 예쁘다'는 판단 외에 무엇이 있는가?
'나'에게서 어떤 균열이 감지되는 장면은 "이제 행보ㄱ해질ㄹ 시간ㅇ다"라는 문자를 받고 소라를 찾아간 '나'가, 유서처럼 보이는 소라의 문장들을 발견하는 대목에서다.

3) 앞서 강지희는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에 대한 분석을 통해, 박상영 소설 속 인물들이 "인생은 연극이라는 은유를 받아들임으로써 젠더와 삶을 자기 패러디적으로 구성"한다는 점을 지적하였으며, 이들이 스스로를 연출하거나, 즉흥적인 연기를 수행하는 등 일련의 연극적 특질을 지니고 있음을 간파하였다(강지희, 「광장에서 폭발하는 지성과 명랑」, 『현대문학』 4월호, 2018).


유서를 쓰다 눈물을 흘렸는지 간단다, 라는 글씨가 번져 있었다. 소라가 취했을 때의 말투와 너무나도 흡사해 괜히 웃음이 나왔다. 소라를 깨우지 않기 위해 입을 막고 웃음을 참는데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나조차도 왜 우는지 알 수 없는, 실로 당혹스러운 눈물이었다. 나는 내가 울고 있다는 사실이 웃겨 웃다가, 웃음을 참으며 울기를 얼마간 반복했다. 한참 뒤 유서를 찢어내 주머니에 넣었다. 노트는 제자리에 되돌려 놓았다. 발소리를 죽여 밖으로 나오며 다음번에는 기필코 사연이 없는 사람을 만나리라 다짐했다. (pp.77-78)


소라도 잠들어 있으므로 '나'의 전시를 관람할 어떠한 관객도 부재하는 이 장면에 이르러, '나'는 소라의 유서를 읽으며 웃다가 운다. 우는 "나조차도 왜 우는지 알 수 없는" 채로 '나'는 웃다가 울고, 울다가 웃고, 다시 웃다가 울 뿐이다. 이 장면에서 '나'는, 연출가로서의 '나'의 지시를 받은 배우로서 울음과 웃음을 수행하고 있지 않다. 그저 자신을 웃고 울게 하는 어떤 복잡한 감정에 몰입해 이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겪어내고는 있을 뿐, 자신이 겪는 감정의 실체가 무엇인지, 그것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분명하게 언어화하지 못해 당혹해하기까지 한다. 한바탕 감정의 요동을 겪고 방을 나선 '나'는 사라진 개를 찾아 비 내리는 한강변을 헤매면서 "소라와 헤어지기로 마음먹었으면서도 우는 소라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자신의 마음을 슬며시 내비친다. 그러나 이내 '나'의 발화는 "빗방울이 떨어지는 검은 강이 뼈와 종잇조각을 삼켰다. 물 위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는 말로 마무리된다. 마치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감정의 올들을 다시 마주할 여지를 남겨 두고 싶지 않다는 듯이.
만약 '나'가 울며 웃는 자신의 감정을 언어화 하려 노력했다면, 이들은 "서로의 진면모를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피상적인 관계"4)를 넘어설 수 있었을까? 개를 찾다 보니 "어느새 나는 나 자신이 개를 찾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인 것처럼 느끼게 되어버"리는 식의 패턴을 넘어, 자신이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를 정확히 인지하며 행동하는 주체로 거듭나, 마침내는 '진정성' 있는 관계까지 맺어 갈 수 있었을까?
그러나 박상영의 소설에서 진정성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인물은 스스로를 "진정성 있는 삶을 찾아 나서는 사람"이라 소개하는 「조의 방」의 '남자'뿐이다. 똥이야말로 진짜라면서 주기적으로 똥을 공급해주면 거액의 대가를 제공하겠다는 남자는, '나(수/유나/바니)'에게 단순한 결과물이 아닌 "진정성 있는 결과물"을 요구한다. '나'는 남자의 요구에 맞서, 동영상 속의 수와 성매매 서비스를 제공하는 유나를 분리하여 유나의 정체성을 수행하기 위해 투쟁한다. 집요하게 '진짜'만을 요구하는 남자와의 실랑이 속에서 '나'는 "어떤 이름으로 불려도 나는 나"라고 읊조리며 언뜻 스스로에게서 수를 발견하다가도, 결국에는 "난 누구도 아니었"으며 '진짜 수'는 세상에 없다고 생각한다. '진짜'라는 것이 토대하고 있는 기대와 믿음, 아니 착각과 기만5)을 생각한다면, 단단하다고 믿어 왔던 유리마저 흘러내리는6) 이 허약한 세계에서 진짜와 진짜 아닌 것을 구분하는 시도는 갈피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

4) 윤재민은 「패리스」에 나타난 해시태그(#)를 중심으로 '나'와 '소라'가 "서로의 진면모를 의도적으로 외면한 채 피상적인 관계를 유지"한다고 보았으며, 두 사람에 의해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포메라니안을 "이 피상적 관계의 화신"으로 제시하였다. 소설집 전반에 대한 해설에서 윤재민은 박상영의 소설에 나타난 인물들을 "황폐화된 내면과 윤리적인 파탄을 반영하는 인간형"으로 읽어내면서, 이들을 "피상적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혹은 바라볼 수밖에 없는 처지의 욕망으로서", 요컨대 개인이 아닌 욕망 그 자체로서 읽어낸 듯하다. 나아가 이 인물들(욕망들)을 직시하는 작가의 안목을 '퀴어 아이'로 의미화 하는 작가론의 구도를 취한다(윤재민, 앞의 글, 331, 340, 343-345면). 반면, 이 글은 인물들의 말하기 방식 및 그들의 세계 인식과 자기 인식을 살펴보는 접근법을 취하고 있다. 소설 세계 내에서 나름의 내적 논리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로서 인물을 상정한다는 점에서, 인물에 대한 시각을 윤재민의 그것과 달리한다. 한편 인물에 대한 이해와는 별개로, 박상영의 소설 세계가 보편과 특수, 진짜와 진짜 아닌 것, 피상적인 것과 피상적이지 않은 것 등 일련의 이분법적 경계를 흩뜨리고 뒤섞는 특징을 지닌다는 점은 부기해 두고자 한다.
5) 해당 서술은 '나'(수)와 조의 에피소드에 대한 해석을 기반으로 한다. 「조의 방」에서 남자가 수에게 '진짜'의 사례로 보여주는 것은, 수의 옛 애인 조가 수 몰래 둘의 섹스를 촬영했던 동영상이다. 한때 수가 조와 공유하고 있다고 기대했던 "진짜, 깊이 사랑하는" 감정이 배신당함으로써, '진짜'의 허약함이 폭로된다. 관련하여 박상영이 그려내는 것은, '진짜'가 '똥'이 되고, 그 '똥'이 진정성 운운하는 자들에 의해 '진짜'로 발견되는 "역겨운 세계"라는 논의가 앞서 이루어진 바 있다(노태훈‧이은지‧이재경, 「되풀이된 공감 이상의 실감을」, 『문학동네』 여름호, 2017).
6 「조의 방」 전반부에서 '나'는 유리창을 손으로 짚다가 일전에 조가 유리에 대해 해준 이야기를 떠올린다. 조는 "우리가 보고 있는 모든 유리는 인간이 인식하지 못할 만큼 아주 천천히 흐르고 있는 액체"라고 말하는데, 소설 마지막의 '나'의 말 또한 이러한 유리의 특성에 긴밀히 결부되어 있다.



실패의 연장, 그 관성


「조의 방」을 뒤덮는 정조는 비애감이다. 어떤 사실이나 사람에 대한 확실하고 단단한 마음을 가질 수 있던 시기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어느 순간 끝나버렸음을 알아차리는 데에서 비롯되는 비애감은 「조의 방」을 비롯하여 「햄릿 어떠세요?」,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이하 '자이툰')」, 「재희」까지 박상영 소설에서 일관되게 감지되는 정서다. 그렇다면 특정한 시기를 마감한 이후의 삶이란 어떤 형태로 이어지는가? 「중국산 모조 비아그라와 제제, 어디에도 고이지 못하는 소변에 대한 짧은 농담(이하 '제제')」에서 그러한 삶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불안한 섹스를 한 후에는 꼭 꿈에 Q가 나왔다.
꿈속에서 Q는 늘 성공하고, 나는 실패한다.
그게 언제나 웃기고 이상했다.
벌써 시간이 많이 흘렀다. (p.21)


소설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은 화자인 '나'와 그의 동거인 '제제'다. '나'는 제제를 "어딘가에는 현혹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것처럼 매일 사랑을" 하며,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에게는 얼마든지 이용당해도 상관없다는 태도를 지닌 사람이라 생각한다. 반면에 '나'는, 콘돔을 사용하든 사용하지 않든지 간에 언젠가는 나도 너도 다 죽는다고 '말하고', 삶에 기대하는 것이 없으므로 불안함도 느끼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불안한 섹스 후에는 꼭 Q의 꿈을 꾸는 사람이다. '나'가 회사원031, 의사103과 각각 콘돔을 끼지 않은 섹스를 한 후에도 어김없이 Q가 꿈에 등장한다. Q는 '나'와 "함께 수면제를 나눠 먹고, 모텔을 잡아 섹스를 하거나, 연탄을 피우거나, 빙초산이나 락스 같은 것을 나눠 마시며 죽음을 도모하던" 사이이며, '나'와 "농약을 나눠 마시고 욕조에 들어"갔으나 지금은 홀로 세상에 없는 사람이다.
꿈에 나타나 자신의 죽음을 사람들에게 비밀로 해달라고 말하는 Q에게, '나'는 "안 돼. 네 인생에 성공한 건 그거 하나뿐인데."라고 답한다. 꿈속에서도, 그리고 현실에서도 Q는 자살 시도에 성공하(였)고, '나'는 실패한다. 혼자 살아남은 '나'의 꿈에 나타나는 Q는, '나'에게 실패의 연장을, 어디에도 고이지도 스미지도 못한 채 그저 흘러가는 '나'의 시간을 환기시킨다. 죽거나 살거나,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의 갈림길에서 '나'는 살았고, 그러므로 실패했다. 그러니 「제제」의 화자 '나'에게 삶이란 그 자체로 실패의 증거일 뿐이다. 이토록 완벽한 비관의 세계에서 실패를 실패 자체로 두지 않고, 그 이상으로 의미화 할 여지는 별로 남겨지지 않는다.


실패는 인간을 성숙하게 한다.
개소리다. 실패는 인간을 한껏 구겨지고 쪼그라들게 만든다. 날카로운 끄트머리로 살갗을 찢어 낱낱이 해부해 버린다. 보지 않아도 될 내장 속 시꺼먼 부분까지 기어이 들여다보게 만드는 것이 실패라는 경험이다. 실패에 그럴듯한 의미를 붙이는 사람들치고 제대로 된 성공을 해본 사람이 없다(고 나는 믿는다). (p.252)


「햄릿 어떠세요?」의 화자 '나'가 대표적인 사례다. 데뷔를 앞두고 모든 것이 어그러져 하릴없이 대학으로 돌아온 전직 아이돌 연습생 '나'는 실패는 인간을 성숙하게 한다는 말이 '개소리'라 단언한다. '나'의 인식 속에서 실패를 거름 삼으라는 조언은 무용하다. 단 한 번의 실전인 인생에 "연습 따위"는 없으므로, 실패는 그저 한 인간을 구겨지고 쪼그라들게 만드는 '실패'일 뿐 무언가를 위한 자양분이 되지 못함을 '나'는 이미 체험했기 때문이다. 우연히 '다음'이라는 기회가 찾아온 뒤에도 '나'는 무언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는 섣부른 기대를 품지 않는다. 실제로도 '나'는 "천장 위에서 벌레가 기어가는 소리"가 나는 집에서 "코앞의 천장이 내 몸으로 쏟아져내릴" 것만 같은 숙소로 공간을 이동했을 뿐이며, 여전히 짓눌린 채 납작한 '나'의 삶은 팽팽하게 부풀어 오를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설사 부풀어 오른다 해도 결코 이전과 같은 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으며, 그렇게 '믿고' 있다.
이렇듯 박상영의 소설 속 화자들이 내비치는 포기와 체념의 정서는 하루하루를 견디며 살아온 그들의 경험에 끈끈하게 밀착되어 있으며, 도망칠 수 없는 구체적 조건들에 발붙이고 있다.7) 그러므로 「패리스」의 등장인물이자 「부산국제영화제」의 화자인 '소라'가 절망적으로 인식하듯이, "내가 나에게서 도망칠 수는 없"다는 사실만이 이들 앞에 견고하게 버티고 있을 뿐이다.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끌려 올라갈 수 있을 것만 같았"던 기대 섞인 믿음은 번번이 '실패'하고, 그것이 이미 실패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진실을 숨긴 채" 실패의 연장선 위에서 살아가는 삶은 지독한 관성을 발휘한다. "나조차도 이런 내가 역겹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할 뿐이다.
믿음 없는 세계에서 간당간당 삶을 버티는 소라는 모든 걸 끝내버릴 때가 온 거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삶을 끝내버리지는 않는다/못한다. 박상영 소설 속 화자들의 대부분이 그렇듯, 소라 역시 실제로 무언가를 행동으로 옮기는 대신에 그것에 대한 생각을 '말한다'.8) 모래사장에서 불꽃놀이를 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지 확실히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는 소라의 말은, 앞서 살펴본 「패리스」의 화자 '김'의 말과 아주 유사해 보인다. 그러나 '그런 것만 같았다'는 어미에서 드러나듯, 소라에게 저 사람들이 실제로도 그런 사람들인지 아닌지는 부차적인 문제이며, 소라는 사실상 '나는 그렇지 않다'는 자기 인식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소라는 인스타그램이라는 매체 속에서 특정한 '소라'를 연출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 소설은 그 자체로 연출가 박소라의 변으로 읽어낼 수도 있다. 다만 연출가로서의 소라는 '소라'를 자기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지 확실히 알고 있는 사람으로까지 연출하는 데로 나아가지는 않는다.9)
「패리스」의 화자인 '김'에게, 소라는 "유일한 자아실현의 장이자 인생의 진열대" 위에서 허구를 꾸며내는 데 열성적으로 매달리는, 집착과 허영을 본질로 삼는 인물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스스로 말하는 자로서 등장하는 소라는, 실상 자신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 인식하고 있으며, 스스로에 대한 혐오의 감정마저 인지한 위에서 연출을 수행하는 슬픈 연출가다.10) 연장된 실패를 살아가는 이 인물은 실패의 관성에 붙들려 있지만, 실패한 자로서의 자기 자신을 확인하는 일은 기어코 홀로 해낸다. 자기비하가 자기연민으로 빠져드는 것을 두려워하며 오히려 자기혐오로 궤도를 틀고서야 안심하는 이 인물은 서글픈 객관성을 무기처럼 쥐고 휘두른다.11) 그리고 그 무기는 타인을 향해 사용되기도 하지만 보다 많은 경우 자신을 향해 사용된다, 이것으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겨우 제 몸을 베는 일밖에는 없다는 듯이.

7) 이를테면 <햄릿 좋아하세요?>의 화자는 "두 번이나 대형기획사의 아이돌 데뷔조에 발탁되었다가 끝내 탈락"하면서 스물한 살이 되자 그 나이를 (아이돌로서는) "모든 가능성의 끝자락"으로 인식한다. 한편 <부산국제영화제>의 화자('소라')는 삼 년째 말기 암 환자인 엄마의 "똥오줌과 감정 수발까지 드느라 밥 먹을 시간조차 없"는 채로 지내다가 꼬박 삼 년 만에 휴가를 떠난다는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8) 이러한 견지에서 「세라믹」의 화자 '나'는 특이하다. '나'는 'M'이 사라지게 된 사건 이후, 그 사건에 연루된 '은주 씨'(어머니)의 탄원서를 하천에 버리고, 은주 씨에게 "죄를 지었으면, 죗값을 치러야 하니까."라고 말하며 행위를 통한 단절을 실천한다. 그리고 M의 집에서 가지고 온 세라믹 조각들을 삼키고 M의 이름을 부르며 애도를 수행한다. 관련하여 박상영의 여타 소설 속에서 '단절 이후'의 시간을 살아가는 화자들의 모습이 중심적으로 재현되는 반면, 「세라믹」은 화자 자신의 결단으로 만든 '단절의 국면'에서 서사가 마무리된다는 점을 생각해 볼 수 있으며, 특히 「세라믹」의 화자가 다른 화자들에 비해서 비교적 어린 나이로 설정되어 있다는 점도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다.
9) 관련하여 소영현은 "소라가 위장된 자아를 연출하는 것은 암담한 현실을 견디기 위한 안간힘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면서, 이를 "자기기만이면서 자기를 지키는 방어술 같은 것"으로 읽어냈다(소영현·박인성·이은지, 「경애하는 나의 이웃들: 2018년 여름의 소설들」, 『자음과 모음』 가을호, 2018, 331면). 이러한 해석에 일견 동의하면서도, 이 소설 속에서 소라가 과연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지, 요컨대 소라의 연출 행위를 자기기만으로 개념화할 수 있을지에 관해서는 다소 의문이 남는다.
10) 주지하다시피 「부산국제영화제」는 「패리스」의 종결 이후의 시간을 다루고 있는데, 두 작품 모두 일인칭 화자를 내세우지만 후속작인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화자의 위치가 '김'에서 '소라'로 옮겨져 있다. 「부산국제영화제」의 화자인 소라에 관하여 김건형은 "다소 상투적인 '된장녀'와 인스타그램의 언어를 결합시켰을 때 여성 화자의 위상은 문제적으로 읽힐 수밖에 없다. 그것이 게이 문화의 자조의 언어와 연계된다고 할 때, 더욱 부단하게 성 정치 문제를 인용하게 되기 때문이다."라며 우려를 드러낸 바 있다(김건형, 「2018, 퀴어전사-前史·戰史·戰士」, 『문학동네』 가을호, 2018). 그러나 「부산국제영화제」의 (시스젠더 헤테로 여성처럼 보이는) 화자를 텍스트 내적 맥락과는 무관한 '게이 문화'와 연결시키는 독법에는 다소 의문이 남는다. 이는 박상영의 작품 전체를 퀴어서사의 맥락에서 꿰는 시각에서 비롯된 서술로 보인다. 나아가 김건형은 「부산국제영화제」의 화자의 위상 문제와 더불어 「자이툰」에 관하여 "왕샤가 이성애자인 미자에게 상처를 주던 말에 남는 의혹"을 간략히 언급하면서, 이제 "퀴어와 여성의 정치적 역학이 필연적인 독해의 지평이 되었"다는 문제의식을 내비쳤는데,(김건형, 앞의 글, 386-387면) 이는 동시대 '퀴어 서사의 재현'을 문제화할 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문제 제기라고 생각된다. 특히 퀴어와 여성의 관계가 전면화 되는 박상영의 최근작 「재희」에 대해서라면 이 지점에 착목하는 보다 섬세한 논의가 이어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게이 화자 '나'의 관점에서 서술되는 「재희」에서 여성 인물('재희')의 형상화 방식과 '나'와의 관계 속에서의 배치 등에 주목할 때, 김건형의 문제제기가 지닌 적실성을 상기하게 되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서로에게 서로가 좀 절실한" 상황에서 친구가 된 '나'와 재희는, 서로를 통해 "게이로 사는 건 때론 참으로 좆같다는 것"과 "여자로 사는 것도 만만찮게 거지같다는 것"을 알 만큼 친밀해지지만, 재희가 '나'의 비밀을 "도구"화하면서 이들의 관계는 전과 같을 수 없는 상태로 넘어간다. 「패리스」와 「부산국제영화제」의 연작 사례처럼, 독자로서 우리는 언젠가 재희가 화자인 소설 또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기대해 본다.
11) 해당 서술은 '소라'가 '태혁'에게 자신과 '문경 언니'('체리') 사이에 있었던 일을 고백하는 장면에 기반을 두고 있다. 서사의 앞부분에서 소라와 태혁이 우연히 문경 언니 부부를 마주쳐 함께 식사하는 장면에서, 독자들은 소라의 서술을 통해 소라의 병수발 사정은 고려하지도 않고 "언제나 자신이 제일 힘들고, 다른 사람의 사정은 별것도 아니라고 생각해버리는 종류의 인간"으로 문경 언니를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이후 소라는 자신이 문경 언니에게 준 상처를 태혁에게 고백하며 자신의 "최악"임을 폭로하고, (아마도 위로를 할 것으로 예상되는) 태혁의 반응을 차단해 버린다.



'주제파악'의 윤리


그 무기를 쥔 자, 박상영의 소설에서 소라뿐이겠는가. "세상의 많은 문제들은 거울을 보는 순간 풀리곤 한다. / 거울 속에 답이 있다."는 심상하고 섬뜩한 두 문장으로 시작되는 소설 「강원도 형」의 화자 도이언은 "주제파악"의 객관성을 쥐고 있다. 소설 속에서 도이언은 '주제파악의 샘물'을 두 번 들이켜는데, 한 번은 항공사 측의 업그레이드로 "딱 한 번" 타본 비즈니스석에서 이코노미석에 마땅한 식음료를 제공받았을 때이고, 다른 한 번은 세 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와서 만난 남자('강원도 형')에게 거절을 당할 때이다.
두 경우 가운데 후자는 전자보다 조금 더 복잡하다. 도이언은 연두색 마티즈에서 내리는 "쪼그라든 풍선처럼 생긴 남자"를 처음 보고 당혹해하지만, 이내 "나 자신이 아닌 사람이" 되어 쇼맨십을 발휘해 보자고 다짐한다. 남자가 내민 믹스커피를 받아들고서도 "이미 망쳐버린 하루"니 무엇이든 견뎌 보자고 생각한다. 그렇다, 분명 도이언은 자신에게 부당하다고 생각되는 상황을 견디고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나 남자와의 대화를 통해 도이언의 견딤은 점차 서글픈 인정으로 나아간다. 강원도 형의 "누런 이빨이 마치 내 얼굴을 비추는 거울" 같다고 느끼게 되면서, 그러니까 "외모 콤플렉스가 어마어마하며, 자지마저 작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이 남자 앞에 바로 '내'가 거울상처럼 마주 앉아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 도이언의 마음은 조금씩 관대해진다. 결국 스스로의 못생김을 자인하는 남자의 말에, 그리고 '그의 잔뜩 쪼그라든 얼굴과, 구부러진 어깨, 세 겹으로 접힌 복부와 좌절과 실패가 내려앉은 이마, 숱이 적은 정수리와 늘어진 목살'에 연민을 느끼면서 도이언은 "둘만 있을 수 있는 곳으로" 옮기자고 남자에게 제안한다. 그러나 자기 연민의 발현인지 선심을 베푼 것인지 판단하기 애매한 도이언의 이 제안에, 남자는 회사에 가봐야 한다며 연거푸 거절의 의사를 표할 뿐이다.


모를 리가 없지. 지금껏 숱하게 당해왔던 일. 실물과 사진이 다른 것은 강원도 형만이 아니니까. 포토샵 CS3를 통해 세 시간이 넘는 노동을 필요로 하는 내 얼굴과 몸을, 그에게 강요할 수는 없으니까, 그게 얼마나 싫은 일인지 내가 가장 잘 아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어이가 없는 건, 네 주제에, 라는 생각 때문. 내 사진마다 쫓아다니며 악플을 달아대는 시궁창 쥐들의 마음이 이런 거였나. (...)
나의 이십 대의 반절은 그렇게 돈을 벌고 얼굴을 찢고 빻고 부기를 가라앉히다가 다 가버렸지. 맞아. 이게 나야. 떼돈을 쓰고서, 인생을 한참이나 날려먹고서도 이 정도인 사람에게는 믹스커피면 충분해. 충분하고말고. (pp.106-107)


도이언은 남자의 거절에 대해 (겨우) "네 주제에" (감히 나를 거절하느냐)라고 생각하지만, 곧이어 스스로에 대해 (겨우) "이 정도인 사람에게는 믹스커피면 충분"하다며 생각을 바꾼다. 여기에서 도이언은 미적 위계 위에서의 남자의 위치를 가늠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위치 또한 가늠하고 있다, 어떤 종류의 엄격한 '객관성'을 발휘하면서. 단일한 위계를 상정하는 인식 하에서는 그 위계 속에서의 상대적 위치란 것이 권력 관계를 결정지으며, 각자의 위치에 따라 '감히'와 '겨우'의 범주가 나뉜다. 그러므로 주제파악을 한다는 것은 '감히'와 '겨우'를 범하지 않는 균형감각을 갖춘다는 것, 눈치껏 제 주어진 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과 상통한다. 주제에 맞게 살라, 주어진 것 외의 것은 넘보지 말라는 섬뜩한 윤리와 그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이 도이언을 관통하는 듯 보인다. 그 믿음은 스스로를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한 일종의 방패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니 어느 무엇에도 몰입하지 못하는 자 특유의 비애감이 도이언을 둘러싸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럽다. 비교를 통해 위치를 파악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눈을 상시적으로 의식(상상)하며 자신에 대한 객관화를 시도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비애감을 인식하고, 또 상처받지 않기 위한 마음을 인정하는 단계에서 멈추는 것이 최선일까? 위계란 그 너머를 상정할 수 없을 정도로 공고하기만 한 걸까? 서로 다른 위계들이 충돌하고 변하는 일은 그야말로 허구인 걸까?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도이언의 마음에서는 균열이 감지되기도 한다. "내가 나를 미워하지 않을 수 있을 때까지 한없이 내게서 멀어지고 싶어."라는 말로 덮으려던 마음에서 비죽 새어 나오는 말들을 눈여겨보자. "아니 거짓말이야./ 실은 나, 단 한순간이라도 나 자신이고 싶어. 그냥 아무것도 아닌 나 자신으로서 살고 싶어. 내 모습 그대로 사랑받고 싶어. 숨 쉬고 싶어. 그것만으로도 족해." 이러한 도이언의 발화를 미적 위계에 대한 믿음의 파열로까지 읽어낼 수는 없겠지만, 여기에서 그 위계를 붙들고 있는 일의 고단함, 그리고 객관화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고픈 간절함만은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남자로부터 도착한 문자는, 다시금 도이언으로 하여금 마음의 회로를 틀게 만든다. 도이언은 허물어지려던 마음을 다잡듯, '태어난 순간 이미 다 망쳐버린 인생이라 생각하면 쉽다'면서, 터미널 화장실 거울에 비친 스스로의 얼굴을 "냉면집 앞의 발 깔개"에 비유하는 '객관적'인 눈을 재장착한다.
타인에게 자신의 전 존재를 내던지는 도이언의 모험, 어떤 종류의 목숨을 건 도약이 "지금껏 숱하게" 실패해 왔으며 이번에도 어김없이 실패해 버렸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인물의 회귀를 비판하거나 이 인물에게 어떤 지침을 내려 주는 일은 거의 무의미해 보인다. 아름다움의 단일한 기준이 끝내 심문되지 못했다는 사실보다도 더욱 아픈 것은, 화장실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도이언이 핸드워시로 화장을 지우고서 "당장이라도 쏟아져버릴 것 같은" 그 자신의 얼굴에 대해 "아름답지 않았다"고 단언하며 그의 발화가 마무리된다는 점이다.
위악과 자기혐오의 모호한 경계 위에 놓인 이 마지막 말이 아픈 까닭은, 어쩌면 「강원도 형」의 화자 도이언이 "당신"을 호명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서사 초반부에서 도이언은 "지독히도 찐따 같았던" 고등학교 시절에 자신이 품었던 욕망을 떠올리며, "왠지 당신에게는 진실해지고 싶"다고, "나를 모르니까/ 내가 말하는 것을 통해서만 나를 아니까" 무슨 말을 해도 괜찮을 것 같다고, "그러니 계속 들어"달라는 요청의 신호를 보낸다.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면 마치 도이언이 남자에 대해 생각하듯, 독자들 또한 도이언의 "가장 솔직한 내면의 모습"을 본 것만 같다고 생각하게 된다. 사랑받고 싶은 마음과, 사랑받든 말든 상관없다고 믿고 싶은 두 개의 마음이 일으키는 요동의 목격자로서, 일정한 양의 수치심과 절망감을 나누어 받게 된 독자들은, 도이언의 균열에 관해 각자의 질문을 이어나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실패한 '나'들의 말하기


「강원도 형」의 화자 도이언의 경우처럼, 박상영 소설에서 화자들의 마음속 균열은 기미로서는 분명히 감지되지만, 이들이 이에 대한 골똘한 사유를 밀고 가는 장면은 서사 내에서 끝내 지연된다. 그것은 삶이 언제나 기대 이하의 것만을 예비해 두고 있기에, 균열에 천착한다고 해서 무언가 달라질 리는 없다고 이들이 '믿기' 때문일 수도 있으며, 혹은 모든 것이 변하는 세계에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여지는 너무 보잘 것 없어 능동적으로 그 변화에 개입할 수는 없으며 겨우 스스로를 보호하는 일만을 할 수 있을 뿐이라고 이들이 '믿기' 때문일 수도 있다. 무언가를 믿을 수 있던 시기는 지나버렸다고 반복적으로 상기되는 소설 세계에서도, 이렇듯 어떤 종류의 믿음은 견고하다. 화자들은 스스로의 '믿음 없음'을 믿으면서, 비애로 몸을 감싸고, 객관적 태도와 비관적 인식을 무기처럼 쥔 채 실패에 대해 끊임없이 말한다.
한국 소설 장에서 실패를 선언하고 이를 자원화 하는 화자들을 우리는 이따금 목격해 왔다. 실패를 경험하는 스스로에 대한 산뜻한 긍정, 그리고 아이러니하게 깃드는 묘한 낙관 등은 실패에 대한 상투적 정의를 흔들며 다양한 의미화의 여지를 남겨 두었다.12) 이러한 흐름은 박상영의 소설에 관해 자주 언급되는 '실패', '유머' 등의 키워드와 일맥상통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박상영의 소설에서는, 탈주의 전망 없는 세계와 그 속에서 구체적인 조건들에 붙들린 채 살아가는 인물들이 그려지며, 이들은 실패를 말하는 스스로에 대해 어떤 종류의 객관성을 지켜보려는 태도를 지니고 있다. 실패에 관해 어줍지 않게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로부터 가능한 한 멀어지고 싶어 하는 이 인물들에게서는, 실패를 이야기하는 '나'를 다시금 거리를 두고 바라보려는 시선이 감지되기도 한다. 이에 실패는 그 자체로 '보이는' 방식으로 재현되기보다는, 실패에 대해 '이야기하는' 화자들의 입을 통해서 전시되고 의미화 된다.
이를테면 「자이툰」의 후반부에서 '나'가 동그랗게 몸을 말았다가 몸을 펴서 튀어 오르는 동작은, 그 움직임을 행하고 있는 '나' 자신에 의해 "나는 세상의 아주 작은 점이다"라는 제목의 현대무용 '작품'으로 의미화 된다. 그리고 이를 지켜보던 왕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마치 무대 위의 배우가 제 배역을 연기하듯 소주병을 치켜들면서 "우리는 세상의 작은 점조차 되지 못했다!"고 외침으로써 이 경이로운 실패의 퍼포먼스는 완성된다. "우리는 망했다. 망해먹은 채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 우리는 웃고 떠들고 술 먹고 섹스하다 죽을 줄이나 아는 동성애자들일 뿐, 그 이상의 아무것도 되지 못했고, 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애초에 아무것도 아니었고, 아무것도 아니며, 그러므로 영원히 아무것도 아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화자의 마지막 말에서는, 이 퍼포먼스의 의미를 타인이 전유하도록 두지는 않겠다는, 연출가이자 배우인 '나' 스스로가 의미화의 키를 쥐고 놓지 않겠다는, 고집스러운 장인정신마저 느껴진다.
세계에 대한 거의 확고부동한 인식과, 그 안에 처한 자신에 대한 거의 확실한 위치감각, "정말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도 그 삶에 대한 의미화는 기어코 자신이 직접 해내겠다는 결기를 장착한 채, 박상영 소설의 화자들은 계속해서 자신들의 실패에 대해 말한다. 이 실패는 보편적 차원의 실패도, 자기애로 환원되는 실패도 아니다.13) 각각의 고유한, 그리고 실패 그 자체로서의 실패다. 이러한 실패에 대한 말하기는, 상실해 버린 과거에 대한 회복의 의지나, 현재의 상태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 혹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발전적 도모 등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이 화자들은 그저 '나는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사실만을 확실히 인식한 위에서, 최선을 다해 실패에 대한 말하기를 수행할 뿐이다.
이들이 살아가는 한, 그러니까 이들의 실패가 연장되는 한, 각각의 실패의 당사자로서 이들의 말하기는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그 말하기란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저 그 자체의 완결성을 위해 수행될 것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균열이 내비치지만 얼핏 보면 매끈한 구처럼 완결된, 이 각각의 실패에 대한 이야기는 이제 공처럼 튀어 독자들을 향해 온다, 당신의 실패는 무엇이냐고 묻듯이, 그리고 그것을 의미화 할 키를 그 누구에게도 넘기지 말고 오직 당신 스스로 쥐라고 말하는 듯이.

12) 이를테면 우리는 박민규 소설을 곁에 두고 일정한 비교를 시도해 볼 수 있다. 박민규의 소설은 사회적 '루저'(권력관계에서의 약자)들의 인물 형상, 자본주의 질서를 탈주하고 세상을 언인스톨하는 수준으로 도약하는 상상력, 비관적인 동시에 유머러스한 세계관 등에 주목해 읽혀온 바 있다.
13) 「자이툰」에 대한 이 글의 해석은 기존의 해석들과는 다소 결을 달리한다. 예컨대 「자이툰」에서 정체성 및 예술(가)적 자의식이라는 두 가지 문제에 주목한 노태훈은, 소설의 마지막 문장에 대하여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은 결국 '보편적'이라는 의미와 같아 보인다."고 해석하며, 이 소설 자체를 '보편적인 예술'로 의미화 하였다. 한편 강지희는 「자이툰」에 나타나는 실패에 대해 "처절한 것이 아닌, 그 자체로 즐길 수 있는 것"이라고 해석하며, 소설 마지막 문장에 대해 "맨살로 세상을 대면하며 욕망과 사랑을 그대로 표출하게 된 자기애의 표현"과 "지금 이곳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에 대한 부드러운 긍정"을 읽어낸 바 있다. 노태훈, 「깨어 있는 꿈-예술가의 정체성, 퀴어라는 장르」, 『2018 제9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18; 강지희, 앞의 글.












작가소개 / 전기화

1990년생. 문학평론가.


《문장웹진 2018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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