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정세랑의 많은 사람들

  • 작성일 2018-12-01
  • 조회수 6,569

[젊은 비평가 특집]



최근 몇 년 간 한국문학의 흐름은 그야말로 숨이 가쁠 정도였다. 얼마나 많은 사건과 변화가 있었는지 머릿속에서 떠올리기조차 쉽지 않다. 한국문학은 달라져야 했고, 달라지고 있으며, 또 계속해서 달라져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많은 것이 바뀌었다고 해도 더 많은 것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고, 수많은 변화의 외침은 지금도 사방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목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이고자 한다. 이제 막 자리매김한 '젊은' 비평가들에게 한국문학에 관한 자유로운 글을 부탁했다. 이들의 글 속에서 꿈틀대는 변화에 대한 열망과 관습을 비트는 다른 시선을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목소리들이 모여 새롭게 만들어갈 한국문학의 풍경을 기대하며 '기획'의 지면을 연다.






정세랑의 많은 사람들




오은교





1. 들어가며: 정세랑의 가벼움


정세랑의 소설1)에는 의외로 재난이 잦다.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 자연재해에서부터 이유가 너무 많은 안전사고까지, 그의 거의 모든 작품에서 재난 사건이 발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이 '의외'인 이유는 그의 소설을 마주할 때 느끼는 독자들의 기대와 관련되어 있다. 정세랑의 독자들은 그가 그려내는 재난이 완전히 불가역적인 파국으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니까 재난은 있지만 그것이 완전한 재앙으로까지는 이어지지 않는 세계, 시스템은 잦은 고장을 일으키지만 누군가는 그것을 수리하기 위해 묵묵히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세계, 그것이 정세랑의 세계이다. 재난이 일상이 되어버린 우리 삶의 현장에서 제멋대로 뒤틀린 인간의 갖은 꼴들과 복잡하게 허술한 이 사회 시스템에 대한 환멸이 끝없이 밀려올 때, 정세랑을 읽는 것이 조금은 도움이 된다.
정세랑의 재난 소설들은 진지하고 웃긴다. 진지해서 웃긴 것이 아니라, 진지하지만 유머를 잃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의 장르는 씁쓸한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블랙 코미디가 아니라 그 자체로 건강한 쾌감을 선사하는 소규모 히어로물에 가깝다. 작가는 인물들이 서서한 내면 변화를 통해 비로소 행동에 나서게 되는 대목을 묘사하는 대신, 인물들이 빠른 행동 전환을 통해 당면하고 있는 미션들을 클리어하는 과정을 서술하는 편이다. 복잡하고 해결이 불가능해 보이는 문제들도 정세랑이 그려내는 인물들을 만나면 어느새 해소 국면에 접어든다. 이 간극이 정세랑의 소설을 가볍게 만든다. 가령 이런 식이다. 버섯을 잘못 먹고 환각 상태에 빠진 이들이 칼을 들고 학교를 습격하면 아무 때고 엘리베이터를 움직일 수 있는 초능력을 가진 고등학생이 친구들을 대피시킨다. 손톱에서 자라난 세포가 강력한 방탄 소재가 될 수 있음을 알게 된 과학자는 폭발 사고가 자주 발생하는 실험실의 동료 연구자들의 가운을 훔쳐와 옷깃에 자신의 손톱을 바느질해 넣는다.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폭력적으로 돌변한 친구의 전 애인을 처치하기 위해 그가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킬 만한 물질로 만든 네일 아트를 친구에게 해준다. 대기업의 사주를 받고 학교 밑에 잠복해 나쁜 영향력을 끼치는 용을 퇴마 능력이 있는 보건교사가 비비탄 총과 무지개 검을 이용하여 무찌른다. 건물에서 불이 나면 모두가 투철한 직업정신과 침착함을 발휘하여 전원이 무사히 구출된다.
현실의 레퍼런스가 알레고리처럼 등장하는 초능력 판타지물뿐만 아니라 그 대처 방식이 매우 상식적이고 깔끔해서 판타지가 아님에도 판타지처럼 느껴지는 작품들까지, 그의 재난 소설에선 모든 이들이 빠짐없이 구조되고 있으며 그 과정의 정의로움과 다정함은 안전한 웃음과 함께 넉넉한 감동을 유발한다. 장르 문학과 문단 문학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 나가고 있는 정세랑의 작품들은 무거운 사회적 문제들을 명랑하게 풀어 나간다는 점에서 로날드 달을, 소망을 판타지에 투영한다는 점에서는 어슐러 르 귄 등을 떠올리게 한다. "재난물이되 칙칙한 호러물이 아니라 마구 달리는 소년 만화"(『보건교사 안은영』, 186쪽) 같은 정세랑의 소설들이 선취하는 이 역동성과 긍정성은 동시대에 생산되고 있는 여타의 다른 재난 소설들과는 그 무드 면에서 상당히 이질적이고 더러 생경하기까지 하다. 정세랑의 이 한없이 가벼운 소설들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2. 사건과 이후의 삶: 한국형 재난 서사가 남긴 것들


거리의 종교인들이 임박한 최후를 운운하며 속인들을 겁박하듯이, 난세에는 종말론이 유행하기 마련이다. 일반적으로 재난 서사는 목숨에도 급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쓰여진다. 위기상황이 아니었다면 변명이 가능한 삶의 무수한 조건들이 생존이라는 단일한 목적 앞에서 예각화 되고, 극단적 상황 속에서 발현되는 이웃의 이기주의나 이타주의는 인간성의 궁극을 실험하는 맞춤한 설정이 되어 주었다. 2000년대 이후 한국 문학도 재난과 관련한 묵시론이 지속적으로 생산되어 왔다.2) 재난물들은 재난을 발생시키는 사회적 무의식을 궁구하기 마련이기에 그 경향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한 사회가 앓고 있는 문제들을 측정할 수 있게 해준다.
2000년대의 한국의 재난 문학들이 환경주의적인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뮤턴트들의 디스토피아였다면 2010년대의 재난물들은 현실 사회의 몇몇 국면을 거치면서 사회의 안전 시스템과 무능한 공공 서비스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일주일에도 수명의 여성이 정기적으로 살해되고 있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의 재난 이야기는 단연 섹슈얼리티와 신극우주의의 문제를 다룬다. 자연재해와 부패한 공권력과 언론, 그리고 여성 억압으로 가파르게 이어져 온 문제의식의 변화는 재난을 발생시키는 결정적인 변수들이 시대에 따라 변화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재난이라는 주제 자체에 대한 세밀화의 결과일 수 있다. 2000년대 이후의 한국형 재난물에서 재난을 발생시키는 조건의 변화를 하나의 내러티브로 성글게 연결하는 것도 가능할까. 가령 작금의 생태계가 무너진 것은, 인간의 탐욕 때문인데, 그것은 여성을 괴롭히며 전개되었다는 식의 플롯 말이다. 악몽과 재난의 일상화에 대한 문제의식을 줄곧 탐구해 온 편혜영의 필모그래피를 이 플롯으로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다. 편혜영의 세계는 서사를 초월하는 실재적 감각의 묘사로 점철된 「아오이 가든」의 뮤턴트들의 세계로 시작하여, 어디선가 끊임없이 개가 짖는 「사육장 쪽으로」의 전원주택 세계를 경유한 후, 전염병이 창궐하여 세상의 온갖 부조리가 현실화되는 『재와 빨강』의 세계를 거쳐 아내가 죽은 뒤 온몸이 마비된 채로 장모님과 함께 남겨진 홀아비의 세계인 『홀』로 이어졌다. 혹은 이 재앙의 발생 조건들이 하나로 응축된 최근의 작품도 있다. 최진영의 『해가 지는 쪽으로』가 바로 그것이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바이러스의 창궐로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이 죽어 나가고, 이 아비규환의 상황 속에서 목숨을 담보로 여성과 어린이들이 가차 없이 착취당한다. 그리고 그 와중에 레즈비언 로맨스가 태동한다. 이 소설은 오늘날의 여성 동성애자들이 처한 성정치학의 지형을 한눈에 보여줌과 동시에 한국형 재난물의 결정판이기도 하다. 동시대 미국에서 양산되고 있는 트럼프 시대의 포스트 호러 무비들처럼, '사회파 재난물'이라고 할 만한 이 같은 이야기들은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액션 서사라기보다는 해당 사회의 정동을 측정할 수 있는 증상적인 텍스트로 기능한다.
재난 서사와 짝을 이루고 있는 서사는 바로 재난 이후 남겨진 이들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한국 사회에서 각종 재난이 일상화되고 계급적, 성적, 당파적 목적에 따라 사건이 편파적으로 전개되거나 수습되면서 애도와 기록은 상징적, 행정적 절차를 넘어선 투쟁의 문제가 되었다. 2014년 봄 이래로 재난 '이후의 삶'을 보내고 있는 유족과 생존자의 이야기가 대거 등장하게 된 것은 그들의 증언을 피로한 것으로 치부하거나 거짓말이라고 매도한 현실에 대한 저항들이었다. 공통적으로 이 소설들은 피해자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뜨겁게 문제시화 하고 있는데, 이는 유족이나 생존자의 행실을 문제 삼아 그들의 목소리가 유통되는 통로 자체를 오염시켜 버렸던 현실 사회에 대한 문화적 대항들이었다.
그런데 이런 작품들이 발생시키는 어떤 공통적인 정서가 있다. 돈을 모으기 위해 자발적으로 참사 현장으로 이주했지만 노역과 성 상납 강요의 상황 속에서 전염병에 걸려 결국 온몸이 석회로 굳어 가는 레즈비언 커플의 생존기를 그린 강화길의 「방」, 버스전복 사고로 반려자를 잃고 집 안에 틀어박혀 타인과 자신 모두에 대한 지독한 환멸에 시달리는 유족·생존자의 내면을 그린 황정은의 단편 「웃는 남자」, 교통사고로 아이를 잃은 후 동네 사람들로부터 끔찍한 소문에 시달리는 부부의 이야기인 김애란의 「입동」, 군의문사를 당한 아들의 시신을 7년째 안치하지 못한 채 지쳐 가는 엄마의 이야기인 정용준의 「7년」 등과 같은 작품들은 작품 말미에 열어 둔 얼마간의 여지들에도 불구하고 모두 할 말을 잃게 만드는 데가 있다. 돌이킬 수 없는 불행, 규명되지 않는 진상, 지옥 같은 타인, 요원해 보이는 회복 등 이야기 속의 상황과 감정들이 독자의 현실과 강력한 고리를 만들어내며 엄청난 무력감과 도무지 나아질 가망이 없을 것 같다는 망연함의 정서가 독자들을 속수무책으로 휩쓸어간다.
정세랑의 작품 중 예외적이라 할 만큼 돌이킬 수 없는 비극적 사건을 품고 있는 『이만큼 가까이』가 봉착한 지점도 바로 그러한 회복의 불가능성과 사회적 관계의 절단, 총체적인 낙망과 같은 고립감의 정조들이었다. 마약중독의 경험으로 집 안에만 갇혀 살던 '나'의 남자친구 주완이 무장한 탈영병이 버리고 간 총으로 동네 개들을 죽이던 초등학생 수호 ― 그 또한 보호받지 못한 소년이다 ― 에게 살해당한 후 같은 버스를 타고 등하교하던 여섯 친구들의 우정 공동체는 해체된다. 수호의 누나인 수미만 "제대로 인사도 못 하고 우리의 인생 밖으로 걸어 나가야"(175쪽) 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사회적 관계의 반경이 넓지 않은 고등학생들이고, 동네 친구들 누구를 만나도 부재하고 있는 이가 상기되기 마련이다. "친구들에게서 조금 멀리 있을 필요도 있었다. 주연이를 보면 주완이가 생각났고, 모두 모여 있으면 수미가 생각났다."(178쪽)
'나'와 '나'의 친구이자 주완의 동생인 주연은 주완의 죽음 이후 어느 날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다.


주연 내 생각에, 인간이란 종은 아주 가끔을 빼곤 좀처럼 아름답지 않아. 아름다운 생물이 아냐.
나 그럼 언제가 그 가끔이야?
주연 플래시몹을 할 때? 아주 성공적으로 플래시몹을 할 때 정도만.


모든 이가 사전에 계획된 하나의 합으로 연결되는 이벤트. 완벽하지만 그러나 결코 계속될 순 없는 플래시몹의 연극적 순간만이 유일하게 인간이 아름다울 수 있는 가능성이라고 말하는 주연의 말은 설계된 작전에 따라 계획한 대로 행동하지 않는 현실의 인간에 대한 지독한 염세를 나타내 준다. 그에 따르면, 삶은 플래시몹이 아니니 인간은 결코 아름다울 수 없다.
첫사랑을 잃고 정상적인 애도의 과정을 거치지 못한 채 성인이 된 '나'는 영화미술을 직업으로 삼는다. 영화감상은 집 안에서만 살던 주완의 유일한 취미이자 그들의 주된 데이트 코스였다. 홀로 성인이 된 '나'는 "주완이가 살아 있었으면 좋아했을 영화"(189쪽)들의 끝나지 않을 리스트를 만들다가, 어느덧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사건 이후 흩어져야 했던 동창생들의 현재 모습을 카메라를 담는다. 그 인서트들이 소설의 초반부부터 곳곳에 배치되어있는데, 서술되고 있는 과거 시간의 흐름을 끊는 이 짧은 인서트들은 주완의 죽음으로 인해 부서져 버린 관계들과 '나'와 친구들의 조각난 마음의 파편들을 의미하는 한편, 과거 시간에 도입된 미래 순간들의 이미지로 그들의 미래가 과거와의 연속선 위에서 점멸하듯 이어지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미래 시간의 조각들 속에서 남겨진 이들은 일자리를 얻고, 이사를 하고,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고, 새로운 관계들을 맺어 나간다.
작가는 남겨진 이들의 이후에 삶에 대해서도 비교적 긴 서술을 할애하고 있다. 성인이 된 주연과 '나'는 어느 날 서로가 각자의 방식으로 주완의 죽음을 견디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 나는 오빠가 결국 못 살아남았을 거라 생각해 (…) 오빠가 이 모든 걸 견디지 못했을 것 같아. (…) 결국 죽었을 거야. 겨우 버틸 만큼 예민하고 부서져 있었어. 오빠는 이미 그랬다고." (…) "나는 그래도 주완이가, 결국은 그 금 간 부분을 흔적 정도로만 남게 이어 붙여서 뭔가 다른 게 되었을 거라 생각해, 죽지 않았더라면. (…) 온갖 고장 난 부분들을 제어하는 법을 배워서 그 불안을 가지고 아름다운 걸 만들어. 병든 부분을 오려서 모빌처럼 바람에 흔들리게 해." "그건 멋지네. 나는 단정짓는 걸로 버텼는데, 너는 그 반대로 갔구나. (…)"(185-186쪽)


주연과 '나'는 같은 이유로, 그러나 정반대의 방식으로 주완의 빈자리를 지탱하고 있으며, 죽지 않았으면 그가 살았을 삶에 대한 '나'의 가정은 남은 이들이 살아야 하는 삶의 과제가 된다. 이후 '나'는 어른이 된 친구들의 모습을 찍은 비디오를 이어 붙여 엉성한 한 편의 필름 다이어리를 만들어 작은 상영회를 갖는다. 그 영상은 주완이 살아 있었으면 만들어냈을 작품의 형식이자 부서진 부분을 오려 붙여 무언가를 만들려는 '나'의 긴 애도의 시도이다. 그 부분 부분들이 남겨진 친구들의 미래의 모습이나 미래에 새롭게 등장한 인물들로 구성된 콜라주 다큐멘터리라는 사실은 모든 시간이 하나의 인과적 계선에 따라 봉합될 순 없지만, 예측할 수 없는 미래가 과거를 포옹하는 방식을 통해 부서진 이야기들이 그 자체로도 온전하게 존재할 수 있음을 말해 준다. 이후 주연은 '나'의 작업물을 편집하여 다큐에서 픽션으로 영상물의 장르를 변경시키는데, 이는 주연 또한 친구들의 미래의 이야기들을 오리고 붙이는 유희적 작업을 통해 점차 애도와 치유의 길로 들어서고 있음을 의미할 것이다.
그리하여 비극적인 사건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다시 낙관적 상상력을 통해 미래를 예비하는 정세랑의 작품들은 현실을 호도하고 있다기보다는, 유족과 피해자에 대한 전형적인 재현 방식에 대한 거리두기의 결과로 보인다. 정세랑의 작품을 두고 밝거나 명랑하다는 말들은 있어 왔지만, 그 같은 낙관이 성취하기 어려운 종류의 긍정성이라는 점은 아직 말해지지 않은 듯하다.



3. 초능력과 직업윤리: 구원 주체의 변화


정세랑의 첫 장편 『덧니가 보고싶어』에는 장르 문학 작가인 주인공이 아홉 번의 소설 쓰기를 통해 전 남자 친구에게 복수를 한다는 점에서 소설 창작의 욕구와 기원에 대한 자기 지시성이 표기되어 있다. 소설 속에서 전 애인을 죽이며 쾌감을 느끼고, 작품을 통해 헤어진 그와 다시 인연을 맺어 결국 그 연이 목숨까지 구하게 한다는 설정은 허구의 이야기가 현실을 반영하고 있을 뿐 아니라 허구적 이야기가 가진 힘이 반대로 현실을 낳을 수 있다는 작가적 믿음이 판타지적 상상력과 만나 구현된 첫 번째 사례로, 곤경에 처한 당사자들을 언제나 전원 구조하고야 말겠다는 의지로 가득 찬 정세랑의 다른 작품들 또한 모두 이러한 작가의 소망 하에서 전개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떻게?
『재인, 재욱, 재훈』의 경우 끔찍한 사건과 사고를 예방하고, 더 큰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게 하는 힘은 초능력이다. 평범한 삼남매인 재인, 재욱, 재훈이 우연히 작은 초능력을 소유하게 되면서 시작된 이 노벨레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비밀을 깨달은 이들이 작은 영웅이 되어 가는 과정을 그린다. 그들이 가진 초능력의 종류는 우리가 흔히 히어로물에서 본 것에 비해 다소 약소하고 어렴풋하다. 과학자인 재인은 어느 날부터인가 단단하게 자라난 손톱을 배양하여 새로운 방탄 소재를 개발한다. 중동 지역의 개발 공사를 위해 사막에서 일하는 재욱의 눈에는 언제부턴가 위험을 감지할 수 있는 센서가 생긴다. 고등학생 재욱은 언제 어디서나 자신이 원하는 층에 엘리베이터를 소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 이들의 아리송한 초능력은 위기상황에 처한 지구를 구원하는 보통의 히어로물 스케일을 감당하기에는 아무래도 역부족으로 보인다. 이 희미한 초능력을 가지고 히어로 서사를 만들어내기 위해선 그리하여 하나의 요건이 더 충족되어야 한다. 그들이 이 능력을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에 사용하겠다는 적극적 의지를 보여야 하는 것이다. 선량하고 정의로운 개인들인 재인, 재욱, 재훈은 각자 자신의 능력을 활용하여 친구와 동료를, 위험 사고가 잦은 어느 현장들을, 위기의 상황에서 탈출한 낯모르는 타인들을 돕는 일에 사용한다.
『보건교사 안은영』에 이르러 이 초능력은 직업윤리와 결합되는 양상을 보인다. 『보건교사 안은영』의 주인공 안은영은 『재인, 재욱, 재훈』의 경우와 유사하게 초자연적인 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자로 등장한다. 그의 초능력은 귀신과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다. 어렸을 적부터 자신의 능력을 알고 있던 그가 간호사와 보건교사라는 직업을 선택한 것은 역시나 자신의 재능을 올바른 곳에 쓰고자 하는 인물의 선하고 정의로운 의지를 보여준다. 주인공 안은영은 평일에는 비비탄총과 무지개검을 이용하여 악귀들을 물리치고, 주말에는 명승고적지들을 돌아다니며 나쁜 기운을 물리칠 힘을 충전하는 일로 하루하루 바쁜 일상을 보낸다. 불량한 일을 계획하는 학생들의 뭉친 마음을 풀어 주고, 퇴마 능력을 악랄하게 이용하려는 자를 쫓아내고, 죽을 운명에 처한 학생이 생명 연장 시술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학교의 평화와 질서를 위협하는 끊임없는 사건, 사고들로 인해 과로한 나날을 보내는 안은영에게 귀신-친구인 강선이 직장을 옮기라고 조언하지만, 안은영은 "아직은 있어야 할 것 같아."(192쪽)라고 말하며 끝까지 남아 책임을 다할 것을 다짐하고, 작품의 말미에서 그는 결국 학교에 잠복해 있던 거대 괴물을 무찌르는 일에 성공한다.3)
『피프티 피플』에 이르면 사건을 해결하는 것은 초자연적 능력이 아니라 온전한 직업윤리와 소명 의식의 몫이 된다. 작품 말미의 화재 사고와 구조 작업 장면은 한 편의 플래시몹처럼 완벽해 보인다. 자정경 허술하게 시공된 극장 건물에서 화재가 난다. 계약직만 남은 극장 직원 중에는 비상대피 훈련을 받지 못한 이도 있지만, 그들은 침착하게 이동경로를 확인하고 무전기로 상황을 공유한다. 마침 극장에 있었던 의료인들이 주의를 주며 인원들을 인솔하고 대피로를 만든다. 소방차와 의료용 헬기가 제때 도착하여 사람들을 빠르게 구조해 나간다. 어린아이가 가장 먼저 구조되고, 옥상에 남은 이들은 지혜를 발휘하여 물탱크를 열어 화재를 진압해 나간다. "아무도 죽지 않았다. 유가족을 만들지 않았다. 건물은 기울었을 뿐, 무너지지 않았다."(389쪽) 진로에 대해 고민하던 젊은 의사는 산업의학과에 진학하여 자신의 동료들을 비롯한 많은 노동자들의 노동 조건 및 환경 개선 방안을 연구하고자 한다.
정세랑이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긍적적 결말에 대한 집요한 희구와 강박은 『재인, 재욱, 재훈』, 『보건교사 안은영』, 『피프티 피플』을 두루 거치며 직업윤리와 소명 의식을 통해 현실화 된다. 문제의 해결방식이 개인의 초능력과 사적인 친절함에서 공공의 직업윤리와 그로부터 비롯된 소명 의식으로 명백히 전환된 것은 재난에 대한 작가의 입장이 무엇인지를 매우 선명하게 보여준다. 우리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은 더 이상 선한 개인들의 친절한 마음씨에 호소하는 방법만으로는 해소될 수 없다. 데이트 폭력과 이별 살해, 난민 문제, 마약중독, 가습기 살균제 피해, 가정폭력, 건축 비리, 대학의 기초 학문 통폐합, 여성들의 경력단절과 독박 육아, 비정규직과 아웃소싱으로 인한 고용 불안, 위험한 노동 환경, 층간 소음, 피임과 임신 중단권, 복지 사각지대의 빈곤 노인, 군사 비리 등 이 소설들의 표면 이야기의 한 꺼풀을 벗기면 드러나는 온갖 사회적 문제들은 개인의 도덕적 감수성의 향상만으로는 해결될 수도 없을뿐더러, 제도적 개선 없이 개인을 질책하는 것은 허구적이며 기만적이다. 따라서 전문성을 통해 사건 방지를 소망하는 정세랑의 재난 서사는 윤리적 감각의 확장만을 요구했던 기존의 타자론과도 차별점을 갖는다.
이 맥락에서 정세랑표 인물 관계의 기본 형식이 변화하는 면모 또한 유의미하게 적바림되어야 할 것이다. 너무나도 달디 달아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이가 상할 것만 같은 기분을 선사하던 그의 초기작들이 거의 남녀 간의 로맨스 관계를 중심으로 진행되었었다면, 최근의 작품들에선 관계의 형식이 점차 확장되고 다양해지는 추세를 보인다. 이 같은 변화는 정세랑의 재난 서사가 강조하고 있는 특성으로 인해 발생한 결과임과 동시에 그가 몰두하고 있는 여성 서사의 두드러진 강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4. 송이의 자매들: 정세랑의 여자들


정세랑의 여성 청년들에게는 성격상의 공통점이 하나 있다. 그들은 '마땅히 머뭇거리거나 두려워할 상황에서도 태도나 기색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예사롭다'는 '태연'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에 매우 부합하는 성격의 소유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어느 순간이 되면 때가 되었다는 듯 짐을 싸서 자신이 속한 원공동체를 미련 없이 떠난다. 이를테면 그들은 자신이 속한 원공동체로부터 영영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조바심과 여전히 그곳에 남겨진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이 지배하는 최은영의 여자들4)과는 확연하게 대비된다. 정세랑의 여자들에게는 새로운 삶에 대한 공포가 거의 없다. 그들은 고향, 가족, 국가를 가뿐하게 뜬다. 남편에게 이용당하다가 살해당할 뻔한 여자(『섬의 애슐리』의 애슐리)는 자신의 신분을 버리고 가족을 떠나고, 다만 이곳이 싫다는 이유로 스튜어디스가 되었던 여자(『이만큼 가까이』의 송이)는 작은 기회를 잡아 이민을 결정한다. 아내가 아프자 집으로 돌아와 살림을 하라고 서울 간 딸에게 전화를 하는 아버지와 이별을 통보하자 인터넷에 자신의 신상을 유포한 전 남자 친구를 떠나 유학길에 오른 여자(「효진」의 효진)는 새로운 공부를 시작한다. 결혼이 부동산(不動産)으로 유지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여자(「이혼 세일」의 이재)는 이혼 후 모든 무거운 짐들을 친구들에게 팔아버린 후 캠핑카에 남은 짐을 싣고 다니며 동산(動産)형 주거 실험을 시작한다. 심지어는 좋아하는 가수가 실종되자 그를 따라 지구 바깥으로 떠나는 우주여행선에 기꺼이 몸을 싣는 여자(『지구에서 한아뿐』의 주영)도 있다. 그리고 그들은 떠나온 곳에 남은 친구나 자매들과 간간이 연락을 주고받으며 먼 곳에서 아주 잘살아 간다.
『이만큼 가까이』의 송이는 정세랑의 이 같은 여성 인물들의 원형이라고 할 만한 캐릭터이다. 발가락에 'MISFIT'이라는 타투를 새기고 다니던 송이는 기회를 잡아 영영 조국을 떠나는 선택을 감행한다.


송이뿐만 아니라 송이의 자매들도 여기의 규칙과 오래된 권위들을 요괴 같은 얼굴로 잘도 무시하고 살았다. 그들은 간단하게 이혼을 하고, 외국인과 결혼하고, 이민을 가고, 나이에 상관없는 머리를 하고, 쨍한 옷을 입었다. 그런데 여기는 그런 약간의 파격에 항상 수군거림이 따라붙었다. (…) 무시하고 살려면 또 얼마든지 할 수 있을 테지만 더 재미있고 다양하고 풍부한 곳이 있는데 뭐 하러? 송이의 자매들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 여기가 싫어. 두 마디로 정리하고는 잘도 떠나갔다. (145쪽)


정세랑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여자들은 바로 이 '송이의 자매들'이다. 그들의 그러한 태연함 혹은 용감함이 독자들에게 어떤 불일치감을 남긴다면, 그것은 작가가 '송이의 자매들'에 대해 다양한 계급적인 고려를 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혹은 그런 여성들의 재현이 단지 낯설기 때문인지를 분명하게 판별하기란 어렵다. 후자의 낯섦이 전자의 학습에서 기인한 측면이 크기 때문이다. 우리는 간단하게 좋은 결말에 도달하는 여자들을 현실 세계에서도, 재현 세계에서도 거의 보지 못했다. 간단하게 나쁘거나 복잡하게 나쁜 여자가 아니라면, 복잡하게 불쌍한 여자들만이 여성에 대한 긍정적인 상의 거의 전부였으니 말이다. 이 '송이의 자매들'은 '탈조선'한다기보다는 '탈고향' 혹은 '탈관계'하고 있다고 말하는 편이 더욱 적확한데, 여성들에게는 국가라는 상위 소속만이 아니라 가족이나 연인과 같은 일상적 관계가 더욱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여성의 고등교육과 교양 수준이 남성의 수준과 이미 비등하거나 월등해진 오늘날, 머뭇거리다가 이내 선 자리에서 그대로 주저앉고 마는 여성상들만이 계속해서 양산되는 것은 시대착오적일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다. '송이의 자매들'은 '먼 곳에 대한 갈망'을 가슴 속에만 품고 살아야 했던 많은 여성들의 꿈을 실현하고 있으니, 죄책감 없이 원소속을 떠나는 이들은 진보한 여성상의 재현이라 할 만하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떠나게 되었는가, 그들은 어떤 방식으로 떠날 수 있었는가, 그들은 떠나온 곳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으며 어떻게 현재의 삶을 꾸려가고 있는가. 이 떠나옴의 과정을 소설의 주요 줄거리로 삼고 있는 『섬의 애슐리』나 「효진」을 통해 작가가 원소속을 떠나는 여자들의 삶을 묘사하는 방식의 특징을 알 수 있는데, 두 소설 모두 그들에게 일어났던 '사건'의 끔찍함을 핍진하게 전달하고 있기보다는 그들의 행위성과 그들이 새롭게 꾸려가는 '이후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 공통적인 특징이다.
『섬의 애슐리』의 애슐리는 본토인인 엄마와 섬사람인 아버지 사이에서 난 혼혈로 본토 사람처럼 생겼다는 이유로 일자리를 옮겨야 하는 폐쇄적인 섬에서 나고 자란 여성이다. 공부를 잘한 여동생이 일찌감치 섬을 빠져나가고 부모마저도 본토로 이주해 갈 때에도 그는 홀로 고향에 남아 관광객이 타는 유람선에서 "가슴에 조악한 코코넛 껍데기를 달고 되도 않는 민속춤을 추는"(18쪽) 일을 하며 살아가는, 딱히 불만도 야망도 없는 심드렁한 여성 청년이다. 소설은 소행성의 충돌 사고로 인해 강력한 생화학 무기고가 터지면서 본토가 엉망진창이 되고 외지인들이 섬으로 피신을 오면서 본격화되는데, 애슐리가 세면대에 손이 닿지 않는 피난민 어린이를 씻는 것을 도와주는 장면을 외국인 기자 리가 우연히 사진에 담게 되고, 그것이 바깥 세계에 전송되며 애슐리는 삽시간에 인도주의 성녀가 된다. "애쉬는 모르죠? 저 바깥사람들은 애쉬의 얼굴에서 차별과 화해, 오리엔탈리즘과 세계 시민 의식, 물질적 가난과 정신적 해방, 비극과 희망을 읽어요. 당신이 딱이에요./ 남의 얼굴에서 이상한 걸 많이도 읽네, 나는 어이가 없었다."(50-51쪽) 대형 갤러리가 붙어 애슐리와 리는 단독 계약을 맺고 '섬의 애슐리'라는 사진 시리즈를 만들어 나가는데, 그 이미지들 속에서 애슐리는 "세기의 나이팅게일"(46쪽)이 되기도 하고 "베네통 광고"(52쪽)의 모델 같은 것이 되기도 한다. 섬의 청년 회장인 아투는 섬의 아이콘인 애슐리와 결혼하여 이 디스토피아를 관광화 시키고 염전을 메워 신도시를 건립하려는 기획을 추진하며 스스로를 섬의 영웅으로 셀프 메이킹해 나간다. 모두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애슐리를 이용한다.
그러나 곧 본토의 상황이 생각보다 이르게 해결이 되면서 사람들이 다시 섬 밖으로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무리한 간척 사업과 부동산 개발 계획을 추진하던 아투는 자신의 영웅 서사가 훼손될 것 이라는 위기감 속에서 아내를 살해하려 시도한다. 불이 붙은 폐선에 애슐리를 묶어버린 것이다. "아투에겐 마지막 비극이 필요했던 것이다. (…) 사고로 일생일대의 사랑을 잃고도 섬에 봉사하는 비련의 영웅으로 남고 싶은 아투"(65쪽). 애슐리가 꼼짝 없이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을 때, 다시 나타난 이는 사진작가 리로, 그는 애슐리를 구조하여 자신의 고향으로 애슐리를 안전하게 대피시킨다. 사정을 모르는 고향에선 애슐리의 장례식이 치러진다. 여기까지 보면 이 이야기는 1세계 남성 저널리스트가 대표하는 보편 인권의 의지와 권력이 2세계 혹은 3세계의 배우지 못한 원주민 여성을 구하는 서사이다. 그런데 신분을 버리고 남편에게서 탈출하여 새로운 곳에 도착한 애슐리는 사진을 공개하여 아투에게 복수하자는 리의 의견에 반대하는데, 이때부터 구원의 도식이 서서히 뒤집어지기 시작한다.


리는 내내 나를 설득하려고 애를 썼다. 이제 안전한 곳에 있으니 아투의 진실을 섬사람들에게, 모두에게 알려야 한다고 말이다. 그게 나와 리의 의무라고 했다. 나는 그런 의무보다 두꺼운 옷과 난방비를 스스로 책임질 수 있도록 일자리를 구하는 게 더 급했기 때문에 자꾸 대답을 미뤘다. (64쪽)


애슐리는 언어를 배우고 일자리를 구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하여 나머지 인생을 꾸려 나간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지난 후, 아투가 그 자신의 소원대로 존경받는 영웅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애슐리는 과거의 사진들과 함께 섬으로 가는 비행기표를 예매한다.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갔던 '섬의 애슐리' 이미지는 이제 애슐리의 무기가 된다. 독자는 당장의 복수를 선택하는 대신 스스로의 삶을 정비하고 재건한 후에야 마침내 대의적 행동에 나서는 애슐리의 모습에서 구원의 주체가 이동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섬의 애슐리』는 이타적 타인의 도움을 통해 구원의 계기가 마련될지라도 궁극적으로 스스로를 살리는 것은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하게 어필한다.
단편 「효진」의 주인공 효진은 애슐리와는 국적도 계급도 교육 수준도 모두 상이한 인물이지만, 그들이 여성이라는 단 하나의 공통점은 그들을 구조적으로 매우 유사한 상황에 처하게 만든다. 도쿄에서 제과학교에 다니고 있는 효진이 대학 시절의 룸메이트와 전화통화를 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친구에게 안부를 전하는 효진의 목소리를 통해 그가 한국을 떠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효진의 현재의 상황이 교차되어 진술되고 있다. 효도(孝)를 다하라(盡)는 이름을 지어 준 그의 아버지는 효진이 딸이라는 이유로 서울로 대학에 보내주지 않고, 엄마가 병이 나자 공부를 접고 고향으로 내려와 살림을 맡으라 명령하는 구시대의 가부장이다. 어릴 적부터 효진은 서울로 시집간 이모들이 책이나 과자세트를 담아 보내는 택배를 내내 기다리며 일찌감치 사투리를 고치며 서울을 동경했다. 그에게 서울은 타락한 도시 문명이나 비열한 자본의 상징이라기보다는 차별과 여성 노동 착취를 통해 지탱되는 고향이라는 향토적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다. 오빠의 도움을 통해 가까스로 인서울 하게 된 효진은 명절이 되어도 집에 내려가지 않고, 맛있는 디저트를 먹으러 다니는 대학원생으로 성장한다.
그러나 이성애자 여성에게는 가부장적인 아버지 이외에도 타파해야 할 문제적 관계가 하나 더 있으니, 가부장적인 애인이 바로 그것이다. 효진은 인사차 들른 남자 친구의 집에서 남자 친구의 어머니가 풍기는 뻔뻔하고 불길한 기운과 그 옆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휴대폰 게임을 즐기는 남자 친구의 모습을 알게 되고, 그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는 인터넷에 전 여자 친구의 신상과 사진을 올리고, 인터넷상에서 효진은 남자 친구의 "집이 가난하다고 홀어머니를 대놓고 무시하면서 도망간"(313쪽) "ㅇㅇ女"(같은 쪽)가 된다. "처한 상황 모두에 진저리를 치고 있을 때쯤"(314쪽) 마침 효진을 좋게 본 일본의 교수가 방문연구원 자격으로 그를 초청하자 효진은 "하루도 생각해 보지 않고"(314쪽) 일본행을 결정한다. 효진은 일본으로 온 후에야 자신에게 더 이상 공부의 뜻이 없음을 깨닫고 제과학교에서 새로운 기술을 배우며 일자리를 얻고 새로운 남자 친구를 사귄다.
스스로를 "계속 도망치고, 도망치고, 도망치는 인간"(315쪽)으로 생각하는 효진은 "한 시간 사십오 분의 비행이 끝나고 하네다 공항에서 수화물을 찾으며 내가 느꼈던 안도감에 대해 죄책감을 가져야 할까. 더 멀리 날아갔다면 더 큰 안도감을 느꼈을까."(314쪽)라고 스스로에게 되물으며 성찰적 감상에 빠져들지만, 작품의 말미에서 그는 도망을 잘 치는 자신의 성격이 어쩌면 특장점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이른다. "상황이 너무 늦기 전에, 다치기 전에, 너덜너덜해지기 전에"(315-316쪽) 빠져나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그는 디저트를 점차 능숙하게 만들게 되며 자신이 도망치는 사람이 되었던 최초의 기억을 떠올리는데, 한 선생이 초등학생인 효진이 보는 앞에서 과학실험용 램프에 담겨 있던 알코올을 들이켰던 것이다.


상처를 주고 싶었던 거라고 생각해. 인생은 아주 불행한 거라고 아홉 살짜리 아이에게 각인시키고 싶었던 거라고 말이야. 잔인하고 이상한 어른이었지. (…) 나는 그때부터 도망쳤던 것 같아. 예고된 불행으로부터 도망쳤어. 만약 도망치는 걸 멈추면 알코올램프보다 더 나쁜 걸 마시게 될지도 모른다고, 나도 모르게 스스로 암시하게 되어버렸던 거야. (316-317쪽)


타르트를 구우며 효진은 트라우마가 되었던 이 원장면을 떠올리고, 이내 '도망'이라는 행위 속에 함의된 비겁함의 낙인에서 스스로 벗어나게 된다. 「효진」이 특별한 점은 여성의 자기 개발과 생계 노동이 "스스로에게 조금 너그러워"(316쪽)지는 계기를 만들어내고 있는 지점을 정확히 짚어내기 때문이다. 효진이 부모와 애인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이주할 수 있었던 가장 결정적인 동력은 효진이 고학력자이며 자신의 분야에서 뛰어난 성취 능력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효진」은 겨우 기회적 평등을 수혜 받을 수 있었던 오늘날의 여성들에 대한 새로운 보고서다. 효진이 죄책감을 덜어내고 자기 배려의 길목으로 들어서게 되는 계기가 외국에서 자리를 잡아 가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여성의 자기실현이 물리적, 경제적 독립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기존의 여성 자립 서사를 확인함과 동시에 가족과 나라를 등지고 외국에 머물며 길게 공부를 하고, 외국인과 연애를 하는 국제화 시대의 여성들에게 붙는 온갖 부정적 혐의들에 대한 반격의 시도이다.
『섬의 애슐리』와 「효진」 모두 젠더 폭력의 현실로부터 벗어난 생존자들로, 그들은 타인의 도움과 자신이 가진 역량을 활용하여 가부장적인 남성들의 세계로부터 벗어나는 일에 성공한다. 상처의 경험을 넘어 언제든지 어디서고 다시 새롭게 삶을 지어 올리는 정세랑의 여성 인물들은 피해자 정체성에서 생존자 정체성으로의 이행에 대해 말해야 할 때 반드시 참고 되어야 할 텍스트다. 반드시 끔찍하고 회복 불가능한 폭력의 경험을 통해서만 여성에게 발언권이 부여될 때, 경험의 외설적인 재현과 그것의 복제 이미지들 사이에서 여성은 더욱 피해자라는 프레임을 벗어나기 어렵다. 따라서 광기의 목소리나 비체적 몸짓 대신 정의로운 타인들의 도움을 통해 상황을 딛고, 가용 자원을 활용하여 다시금 건강한 삶의 궤도에 승선하고야 마는 이 '송이의 자매들'은 전형적인 피해자의 이미지를 어긋 내고, 생존자에 대한 새로운 상을 제공한다. '송이의 자매들'이 전하고 있는 메시지는 분명해 보인다. 우리는 다시, 잘살아 갈 수 있다.



5. 나오며: 한 명의 이름들


정세랑의 작품들은 작중 인물의 이름이 그대로 제목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캐릭터 자체가 곧 이야기의 전개방식이나 결말을 예고하는 정세랑 특유의 창작 방식 때문일 것이다. 한아, 애슐리, 하주(『이만큼 가까이』의 단행본 출간 전 제목), 보늬, 재인·재욱·재훈, 효진, 안은영, 이마와 모래, 현정 그리고 『피프티 피플』을 구성하고 있는 쉰한 명의 각기 다른 이름들까지. 정세랑이 부르고 있는 이 고유명들의 세상은 한 개인의 호의나 악의가 작은 변침이 되어 타인의 삶에 작용하고 있는 곳이다.
『피프티 피플』 속 오십여 명의 인물들은 모두 각자이지만, 그들은 하나의 풍경 속에서 타인의 영감과 참조점으로 존재한다. 싱크홀에 빠져 몸을 다친 대학 강사이자 시인인 배윤나와 가습기 살균제 사고로 누나를 잃은 대학생 한규익은 기초 학문 통폐합을 반대하는 시위 현장에서 만나 절박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분노조절장애로 인해 시도 때도 없이 폭력을 행사하다 정신병동에 입원한 강한정의 발작을 제압하는 보안요원은 커밍아웃 이후 가족들로부터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폭언을 들은 김성진이다. 엄마와 동생의 자살 시도 현장을 목격한 정다운은 친구 오정빈이 선물한 그림에 적혀 있는 연락처로 전화를 걸어 교통사고로 반사 상태에 빠진 남편을 돌보며 지쳐 가고 있는 장유라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보코하람의 박해를 피해 망명을 고려하는 핸드볼 선수 스티브 코티앙은 가정폭력 생존자인 여성과 어린이를 위한 센터의 자선행사를 기획한 의사 이설아와 다정한 손인사를 나눈다. 이설아는 생각한다. "가장 경멸하는 것도 사람, 가장 사랑하는 것도 사람. 그 괴리 안에서 평생 살아갈 것이다."(266쪽) 정세랑이 적극적으로 가시화하고 있는 많은 좋은 사람들은 이 괴리를 견딜 수 있게 해주는 힘의 원천이다.
이름이 작품의 제목이 되는 경향은 사실 정세랑만의 특징은 아니다. 김지영, 쇼코, 세실과 주희, 경애 등 최근 한국 문학계를 달구었던 일련의 여성 서사들이 모두 한 인물의 이름을 통해 구현되고 있다. 이는 중층적인 정체성으로 구성된 한 사람의 고유한 결을 면밀히 살피는 방식을 통해서만 여성들의 이야기가 온당히 확장될 수 있음을 말해 준다. 한국 문학의 여성들은 이렇게 '한 명의 이름들'을 통해 다양해지고 깊어지고 있는 참이다. 혹시 그중에서도 유능하고 다정한 여자가 특히 필요한 이가 있다면, 그에게 정세랑을 권하고 싶다.


1) 이 글에서 언급되는 정세랑의 작품 목록은 다음과 같다. 『덧니가 보고 싶어』, 난다, 2011. 『지구에서 한아뿐』, 네오픽션, 2012. 「보늬」, 사이버문학광장 문장 웹진, 2013. 『이만큼 가까이』, 창비, 2014. 「효진」, 『창작과 비평』 42(4), 2014. 『재인, 재욱, 재훈』, 은행나무, 2014. 『보건교사 안은영』, 민음사, 2015. 「현정」, 『열일곱』, 알라딘, 2016. 「이마와 모래」, 『문학동네』 87(2), 2016. 『피프티 피플』, 창비, 2016. 「이혼 세일」, 『현대문학』 752(8), 2017. 『섬의 애슐리』 미메시스, 2018.
2) 2000년대에 대거 등장한 재난 서사에 대한 독해를 통해 파국을 현실의 알레고리로 파악하고, 파국 서사가 선사하는 멀티 엔딩이 문학적 상상력과 사회적 감각의 확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는 주장은 정여울, 「구원 없는 세계에서 살아남기」, 『문학과사회』 92(4), 2010. 2000년대 후반-2010년대 중반기의 재난 소설을 불안과 강박증 시대의 '마스터 플롯'의 변주로 독해하며 재난 모티브의 다양한 서사화 전략을 살피는 작업은 강유정, 「재난 서사의 마스터플롯」, 『세계의 문학』 151(1), 2014. 이외 재난 서사의 발생 요건과 정동이 관리의 대상이 되는 애도 정국 사회의 정치화 가능성에 대한 이론적 탐구는 문강형준, 「재난 시대의 정동」, 『여성문학연구』 35(2), 2015 등을 참조.
3) 2014년 9월에 완성 제출된 『보건교사 안은영』은 작품이 생산된 현실 세계와의 관계성 속에서 처음 소개 되었었다. "2014년 현재 한국 사회가 얼마나 무능한 국가 인프라를 가지고 있는지, 참사 이후에도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불투명한 의혹들만 늘어나는 중인지, 그러나 어떤 방식으로도 혁신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지를 돌아본다면, 이 괴물이 뜻하는 바는 보다 명확해지는 듯하다. 그러므로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 보여주는 스펙터클은 작가를 넘어 이 시대가 간구하는 한 장면이리라 믿는다. '스무 살을 넘기고도 살아 보고 싶어요'라 말하는 한 아이의 소망을 실현시켜 주며, 모든 아이들의 안위를 위해 계속해서 싸워 나가는 주인공 안은영은 우리 시대가 꿈꾸는 메시아 그 자체이다." 강지희, 『세계의 문학』 153(3), 2014, 7쪽.
4) 이는 오혜진의 분석에 따른 것이다. 오혜진, 「'성장'이라는 외상(trauma)을 견디는 '여자들의 사회'」, 『안녕, 오늘의 한국소설』, 민음사, 2017.












작가소개 / 오은교

대학원에서 독문학을 전공한다. 황정은론으로 2018년 문학동네 신인상을 받았다.


《문장웹진 2018년 12월호》


추천 콘텐츠

가지 않(을)은 길을 향한 반유토피아적 노스탤지어

가지 않(을)은 길을 향한 반유토피아적 노스탤지어 ― 전하영의 소설들 권영빈 온다 리쿠(恩田陸)의 소설 『잿빛극장』(김은하 역, 망고, 2022)은 1990년대 일본에서 실제로 있었던 동반 자살 사건에서 출발한다. 죽은 두 여성은 대학 시절 만난 친구 사이로 죽음에 이르기 전 함께 살았다는 사실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 이름도, 얼굴도 없이 단지 서로를 죽음의 의지처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특수한 관계성만 남긴 채 사라진 그들은 작가 자신이자 서술화자이기도 한 ‘나’의 마음에 왜인지 사무쳐 버린다. 그로부터 이십여 년 후, 두 여성의 이야기는 소설의 형식으로 소환되고 그들의 삶과 죽음에 존재감이 부여된다. 추리·미스터리 장르를 주축으로 하는 온다 리쿠의 소설은 한국에서도 이미 인기작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래서인지 그가 형상화하는 이 기묘하고 슬픈 ‘실화’는 독자로 하여금 이들 여성이 어떤 역사를 거쳐 동반 자살이라는 흔치 않은 비극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소상히 밝히는 데 주력할 것으로 기대하게 만든다. 그러나 소설은 죽음의 원인을 직접적으로 추적하는 대신 여성들의 삶과 죽음에 소설적 자리를 내주려는 분투 자체에 무게를 둔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주된 장치가 바로 ‘극장’이다. 『잿빛극장』은 작가가 죽은 두 여성의 이야기를 소설화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번민과, 완성된 텍스트를 토대로 이들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드는 과정을 다루는 시점을 교차해 보여준다. 그 사이사이 T와 M이라는, 익명의 두 당사자 여성 각자의 입장에서 그려지는 일상과 회고의 장면이 삽입된다. 극장이라는 장막은 사실로서의 죽음과 허구로서의 죽음 사이에서 빚어지는 재현 윤리를 과장되게 내세우거나 추상화하는 일을 경계하면서 여성들이 살았던 흔적을 희미하게나마 만들어낸다. 1990년대 사십대였던 여성들이 살아가며 겪었음 직한 가부장 이데올로기의 억압과 경력단절, 젠더화된 빈곤의 문제를 건드리면서도 그것을 죽음의 단적이고도 극적인 요인으로 지목하지 않으면서 다만 이들 여성의 시작과 끝을 지켜볼 수 있도록 하는 가변적인 무대를 만드는 것이다. 이름이나 얼굴이 아닌 이야기로 존재하게 된 두 여성은 작가와, 연극배우와, 가상의 당사자 캐릭터 주변을 선회하면서 눈치 채지 못하는 순간 잿빛의 세계로 다 같이 녹아든다. 어떤 사태가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 시작과 끝에 개입한 이야기 조각들을 수집하고 짜 맞추면서 결국에는 비가역적인 ‘한 시절’을 만들어내는 온다 리쿠 특유의 노스탤지어가 새삼 엿보이는 소설이다. 전하영의 소설을 말하려는 이 글이 그와는 세계관도, 세대도 다른 국외 작가의 소설을 거론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돌이킬 수 없는 ‘한때’를 향한 정동과 ‘극장’ 말이다. 시절에의 이끌림과 회한을 발판 삼아 작금의 사태를 해석하고 전망하려는 전하영의 소설은 노스탤지어의 분위기와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 관리자
  • 2024-05-01
소설의 원점, 혹은 클래식-퓨처리즘

소설의 원점, 혹은 클래식-퓨처리즘 박인성 시간의 순환과 소설의 원점 흔히 소설을 가리켜 시간의 예술이라고 부르던 시절이 있다. 물론 여전히 유효한 말이지만, 시간이란 결국 우리가 세상을 인지하고 이해하기 위하여 활용되었던 유용한 개념적 도구일 뿐이다. 따라서 시간을 다루는 방식의 다양성이 늘어나고 시간에 대한 인지적 표현 수단이 늘어나면 자연스럽게 소설이 시간의 예술이라는 표현은 보편적이거나 당연한 것이 아니게 된다. 소설의 언어적 형식은 주제를 이끌어 가는 캐릭터의 삶과 그 의미화를 매개로 시간을 다루는 구성적 논리일 뿐이다. 오늘날에는 양자역학과 다양한 과학적 가설들에 의해서 시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보편화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삶을 연대기적으로 엮어서 기승전결의 플롯 구조를 그리는 소설의 시간적 이해는 그 자체로 시간에 대한 세련된 접근은 아니다. 자연히 소설이라는 언어 형식이 시간에 대한 해석적 주도권을 잃어버린 시대에 다시금 소설이란 무엇이었는지를 묻게 된다. 근대문학으로서나 이후 오늘날의 다양한 소설 형식으로서나 저마다의 응답은 다양하게 도출되지만 자주 잊어버리게 되는 것은 원점에 대한 질문이다. “소설이라는 게 대체 뭐였더라?”라는 질문. 형식과 표현은 언제나 변화하지만 서술과 그에 따른 시간의 뒤섞임은 소설의 본질적인 원료다. 따라서 근대문학에서부터 기존의 시간에 대한 이해를 비틀어 보여주려는 수많은 형식적 실험과 새로운 시도에 존재해 왔지만, 결국 소설이란 세상에 대한 시간적 이해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며 ‘서사적 과거’(Episches Präteritum)1)라는 인지적 조작에 의해서 비로소 시작될 수 있는 삶과 세계에 대한 이해를 함축한다.2) 결국 소설은 ‘서술하는 시간’(narrating time)과 ‘서술되는 시간’(narrated time) 사이의 격차를 통해서 형성되는 상호주관성의 언어이며, 소설가와 독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경험적 맥락을 통해서 그 몸피를 부풀려 가는 해석의 공간이기도 하다. 시간의 공간화의 측면에서, 김연수는 언제나 소설의 언어적 형식이 가진 시간적 해석의 힘을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펼쳐 보인 작가다. 김연수가 지속적으로 소설이라는 언어 형식을 통해 시간을 다루어온 시도는 소설이 가진 이해의 힘을 비판적으로 해체함으로써 오히려 부정할 수 없게 재구성하는 시도에 가깝다. 마찬가지로 소설집 『이토록 평범한 미래』3)는 고전적인 시간의 상상력에 대한 김연수식 문학의 재구성을 집대성한 책이다. 이 소설집에서 다루어지는 시간에 대한 이해와 그 서술적 전략이 특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 소설의 시간성에 기반한 서술 전략이란 미래에 대한 선취를 포함하는 시간의 종이접기와 접붙임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종이접기와 접붙임의 결과물로 도출하고 싶었던 것은 전망-없음과 미래에 대한 비관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의도적인 평범성의 추구다. 소설집의 표제작인 「이토록 평범한 미래」가 보

  • 관리자
  • 2024-05-01
로망스 미학과 새로운 ‘합일’을 희구하는 낭만적 주체의 언어

로망스 미학과 새로운 ‘합일’을 희구하는 낭만적 주체의 언어 염선옥 첨단 테크놀로지의 물결이 세계를 장악하면서 시를 쓰는 철학적 기반에도 작지 않은 변화가 초래되었다. 가령 시 쓰기의 새로운 지표가 친환경적 태도로 기울어 가거나, 고독과 우울 같은 정서를 급격하게 동반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경향의 이면에는 서정적인 것이 낡은 것이라는 신념이 도사리고 있는데, 이는 시인들이 “‘서정적=감상적’이라는 오도된 등식과 연쇄적으로 마주”1)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삶의 모순을 표현하는 데 서정적 일치감보다는 대상과 내면 사이의 불일치를 선택하는 경향이 우세해진 것도 그 까닭의 한 측면을 이루고 있을 것이다. K-팝과 시가 화려한 리듬과 언어유희를 독자에게 전달한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지만, K-팝이 선풍적 인기를 구가하는 것에 반해 시는 일부 문학인들의 전유물로만 공유되고 있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K-팝이 K-문화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세계인들에게 통할 보편적 상상력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우리는 새로움이 주체의 상상력에서 연유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사유하는 것도 상상력”2)이라는 바슐라르의 표현처럼 K-팝은 이미지와 사유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음악이 덮고 있는 낭만성, 서정성이라는 은밀한 파동을 전달한다. 음악이 읊는 이미지는 사유로 이어지고 그것은 다시 ‘너’의 사유로 가닿는다. 이성의 시대를 맞이하면서“시를 쓸 수 없는 시대”, “시가 죽었다”라는 클리셰가 난무하는 가운데도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열정은 조금씩 패턴화되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 그런 와중에 문단 내로 불어오는 ‘서정’의 바람은 꽤 육중하고 소중하게 다가온다. 비역동적 세대의 내적 추락 2010년대 들어 청년층을 가리키는 신조어들이 국내외에서 쏟아져 나왔다. 국내에서는 3포 세대에 이어 N포 세대라는 신조어가 나왔고, 이웃 나라 일본에서는 사토리 세대, 중국에서는 탕핑(躺平, 당평, 눕자) 족이 출현했다. 2010년대 기준 청년실업 등 여러 사회 문제에 시달리는 20~30대 한국 젊은이들이 처한 암울한 현실을 일컫는 ‘N포 세대’는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의미를 염두에 둔 부정적 용어라고 볼 수 있고, 사토리 세대(とり世代)는 불교 용어로서 ‘깨달은 세대’, ‘득도한 세대’로 해석되어 물질적 욕망에서 벗어난 초월적 존재로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현대사회에서 희망을 포기한 젊은 세대를 일컫는다. 탕핑 족 역시 “평평하게 누워 있기”를 뜻하는 중국어로서 그 속내는 제아무리 일을 열심히 해도 대가가 없고 결국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 있는 게 현명하다는 뜻을 함축한다. 이는 존재의 고유한 운동성을 스스로 차단하는 세대를 통칭한다는 점에서 공통 함의를 띠고 있다. 한

  • 관리자
  • 2024-05-01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