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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여, 이름, 인터내셔널

  • 작성일 2019-03-01
  • 조회수 1,299

[문학더하기+(소설)]




증여, 이름, 인터내셔널




양윤의





1. 판도라라는 선물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훔쳐 인간들에게 선물하자,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와 인간 모두를 벌하기로 결심한다. 프로메테우스를 처벌한 제우스는 헤파이스토스에게 명하여 진흙을 물에 개어 아름다운 여자를 만들었다. 여러 신들이 직분에 따라 이 여자에게 선물을 주었다. 생명과 매력, 감미로운 목소리, 속이고 아첨하고 유혹하는 심성이 그녀의 것이 되었다. 그녀의 이름 판도라(Pandora)는 '모든 선물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판도라는 헤르메스의 손에 이끌려 프로메테우스('먼저 깨달은 자'라는 뜻이다)의 동생 에피메테우스('뒤늦게 깨달은 자'라는 뜻이다)에게 인도된다. 에피메테우스는 제우스의 선물을 받지 말라는 형의 경고를 잊어버리고 판도라를 품는다. 판도라는 불행과 재앙이 가득 담긴 상자(항아리라고도 한다)를 갖고 왔다. 신들은 이 상자를 열지 말라고 경고했으나, 그녀에게는 어리석음과 호기심이라는 선물도 있었다. 그녀가 상자의 뚜껑을 열자, 헤아릴 수 없는 불행과 재앙이 세상에 퍼져 나갔다. 놀란 그녀가 황급히 뚜껑을 닫자, 상자 맨 밑에 있던 희망만이 빠져나오지 못하고 남았다.
'판도라'는 '모든(pan) 선물(don)'이라는 뜻이다. 신들은 인간에게 선물로 그녀를 주었다. 이것은 증여 경제 체계에서의 선물(gift)을 떠올리게 한다. 선물(gift)은 '투여된 독(dose of poison)'이나 '투여량(dose)'을 뜻하는 라틴어 'dosis'를 어원으로 삼는다. 증여는 대가 없이 주는 것이다. 대가가 수반되면 증여 행위는 주고받기 즉 교환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들이 준 선물은 독(poison)이기도 했다. 그녀로 인해서 인간 세상에 온갖 불행과 재앙이 퍼졌다는 이야기는, 증여 경제 체계에서의 선물에도 언제나 대가가 따른다는 것을 암시한다.



2. 증여와 교환


마르셀 모스는 멜라네시아, 폴리네시아, 북아메리카의 원시사회에 대한 다양한 민족지적 연구를 통해서, '증여'를 기초로 한 특별한 경제 체계를 설명한다. 북아메리카의 포틀래치(potlatch), 남태평양의 쿨라(kula), 뉴질랜드의 하우(hau) 등이 그러한 예다. 이들 사회에서는 재화와 부, 즉 동산과 부동산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증여된다. 이 목록에는 축제, 봉사, 의식, 예의와 같은 무형의 것에서 조개껍데기나 음식과 같은 물건뿐 아니라 여자와 아이 등과 같은 사람의 순환까지도 포함된다.
이것들은 무상으로 증여되는 선물(gift)이다. 모스는 선물을 둘러싼 세 가지 의무가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주기, 받기, 답례하기'이다. 즉 첫째, 주는 자에게는 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둘째, 받는 자에게는 받아야 할 의무가 있다. 셋째, 받은 자는 선물을 준 자나 다른 받을 자에게 자기가 받은 것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선물을 되돌려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이 세 요소의 순환을 통해서 부와 재화가 사회 전체에 걸쳐 순환한다. 선물이므로 이것은 이론상으로는 자발적이지만 실제로는 강제적이고 의무적이다. 이를 이행하지 않을 때에는 싸움이 일어나거나 경멸을 받는다. 이로써 증여는 사회적 관계의 초석이 된다. 증여는 대가를 바라지 않고 주는 것이고 그래서 거기에 즉각적인 응답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만 반드시 거기에는 시간을 두고 답례가 따라야 한다. 증여는 '주기—받기—답례하기'라는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지며 결국 완만하게 순환적으로 이루어지는 교환의 형식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대상은 바이구아(vaygu'a)라는 일종의 화폐이다. 이것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즉 음왈리(mwali)는 예쁘게 세공하고 연마한 조개껍데기 팔찌인데, 그 소유주나 친척이 중요한 기회에 착용한다. 또한 술라바(soulava)는 시나케타 지방의 숙련된 세공인(細工人)이 예쁜 붉은국화조개(spondyle)의 자개에 가공한 목걸이이다. (중략) 말리노프스키에 따르면 이 바이구아는 일종의 원운동(圓運動)에 따라 움직인다. 즉 팔찌인 음왈리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일정하게 전해지며, 술라바는 언제나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동한다. (중략) 원칙적으로 이 부의 상징물들의 순환은 끊임없으면서도 정확하게 행해진다. 그것들을 너무 오랫동안 간직해도 안 되며, 그것들을 넘겨주는 데 느려서도 안 되고 인색해서도 안 된다. 또한 그것들을 일정한 방향, 즉 '팔찌 방향' 또는 '목걸이 방향'에서의 특정한 상대방 이외의 다른 사람에게 주어서도 안 된다.(마르셀 모스, ?증여론?, 100~105쪽)


모스는 멜라네시아의 여러 섬들에서 이루어지는 포틀래치인 '쿨라'에 대해 위와 같이 설명한다. 쿨라(kula)는 원(圓)을 뜻한다. 이곳 섬의 원주민들은 두 개의 선물 즉 음왈리와 술라바를 서로 반대 방향으로 순환시킨다. A에서 E까지 다섯 개의 섬이 있다고 하면 음왈리는 A → B → C → D → E의 방향으로 원을 그리며 증여된다. 술라바는 음왈리의 역순, 즉 A → E → D → C → B의 방향으로 원을 그리며 증여되는 식이다. 이 순환은 이 지역의 섬들 전체를 일주하고 이를 통해 이 증여 경제 체계에 속한 사회 전체에 부와 재화가 순환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의무에 '시간'의 요소가 포함된다. 증여에 대한 답례는 즉각적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이 경우, 그것은 증여가 아니라 경제적 교환이 되고 말 것이다. 그렇다고 답례가 무한정 지연되어서도 안 된다. 이 경우에는 답례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모스는 이러한 증여 속에 들어 있는 '자유', 즉 선물은 자발적으로 주는 것이라는 점과 '의무', 즉 선물에는 답례해야 한다는 것과 호혜의 원리 같은 것이 현대사회에서도 사회를 유지하는 원리로 기능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도 결혼식과 장례식에서의 부조하기와 농촌의 품앗이 전통이나 기념일의 선물 풍습 등은 증여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증여 경제에는 특별한 역설이 존재한다. 증여를 하는 사람은 대가를 바라서는 안 되지만 증여받은 사람은 반드시 답례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만일 증여를 한 사람이 보답을 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증여의 결과로 보람을 느끼거나 명예를 얻었다면 그것 역시 대가를 받은 셈이 된다. 따라서 증여 행위가 순수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증여 행위 자체를 '망각'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실제로 실천하기 어려운 난제가 아닐 수 없다. 망각은 의식의 소관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증여를 하되 증여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행위, 익명으로 증여하는 행위가 대안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증여는 원시적인 교환 형태다. 이것은 잉여생산물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생산을 억제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뉴기니 마링족은 몇 년에 한 번씩 돼지 축제를 연다. 정성껏 키운 돼지를 한 번에 잡아서 먹어치우는 이 축제 역시 포틀래치의 일종인데 이것은 불어난 돼지를 더는 키울 수 없는 사정 때문에 생겨난 풍습이다. 그러나 증여가 경제 체제로 기능했던 역사와 지역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것은, 이 체계가 교환을 중심으로 하는 시장경제 체제를 반성하고 새로운 체계를 모색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반화된 교환은 동일화 논리이다. 원시사회가 무엇보다 거부하는 것이 바로 이 동일화 논리이다. 타자와 동일시되는 것에 대한 거부, 자신을 자신으로 구성해 주는 것, 자신의 존재 자체, 자신의 고유성, 스스로를 자율적 '우리'로 생각하는 능력 등을 상실하는 것에 대한 거부가 그것이다. (중략) 만인 사이의 교환은 원시사회의 붕괴를 가져온다. 동일화는 죽음을 향한 운동인 반면, 원시사회의 존재는 삶의 긍정이다.(피에르 클라스트르, 『폭력의 고고학』, 변지현 외 옮김, 울력, 2002, 279~280쪽)


현대사회의 산업화는 '증여'를 통해 작동하는 시스템을 폐기하고 효율성을 앞세워 순전히 '교환'을 통해서만 작동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그런데 시장에서의 '교환'이란 교환되는 상품의 동일화를 전제로 이루어진다. 잘 알려져 있듯이 동일화란 각자의 고유성을 없애고 평균화하는 기제이다. 반면 증여를 통한 순환은 각자의 고유성을 보존하고 상호간의 관계를 재생산하게 해준다.



3. 증여와 소설


박솔뫼의 작은(판형의) 책 『인터내셔널의 밤』(arte, 2018)을 보자. 이 소설은 이동하는 자들의 이야기이자, 사라지(고 싶어 하)는 자들의 이야기이며, 서로가 서로에게 무언가를 주고받는 낯선 사람들의 이야기다. 소설은 부산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시작한다. 홍한솔은 일본에 살고 있는 고등학교 동창 김영우의 청첩장을 받고 고민 끝에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부산행 기차를 탔다. 부산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한솔이 가슴 절제 수술을 받았을 때 영우가 운전을 해주고 동행해 주었다. 그 수술 이후 한솔은 직장을 그만두었다. 한솔의 꿈에 자주 등장하는 장면은 대체로 이렇게 해석될 수 있다. "한솔의 인생에서 무언가 사건이 있었고 그 이후, 이전의 삶을 회복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떻게 보편시민에서 박탈당했는지 또한 배제라는 말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 반복해서 설명했다."(55쪽)
한솔의 옆자리에 앉은 나미는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듯이 부자연스럽게 꺾인 고개가 미술관에 걸린 유화의 한 구도"(18쪽)처럼 보이는 사람이다. 나미는 오랫동안 자신이 몸담고 있던 사이비 교단에서 가까스로 도망쳐 나왔다. 하여 부산에 있는 이모 친구의 집으로 무작정 도피하는 신세가 되었다. 나미는 누군가가 자신을 잡으러 올 것만 같은 두려움과 단죄당할 것 같은 괴로움에 시달린다. 나미는 옆자리에 앉은 한솔에게 충동적으로 말을 걸었다. 이를 계기로 둘은 부산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헤어진다. 둘을 잇는 미묘한 선은 단순히 옆자리에 앉게 된 우연 때문만이 아니다. 나미가 꺼낸 첫 질문과 한솔의 대답을 보자.


― 무슨 책을 읽으세요?
― 그냥 별건 아닌데요, 보실래요?
(『인터내셔널의 밤』, 19쪽)


소설은 교환의 체계에서 벗어나 있는 사물이다. 그것은 보이는/전시되는 것이지 갖는/소유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을 공상이나 망상의 체계로 보는 시선이 존재하는 것은 소설이 교환을 위해서는 도무지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소설은 교환되는 것이거나 가치로 환산되는 것, 그것을 소유한 이에게 부의 척도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소설은 증여의 체계에 속한 것이다. 한솔은 낯선 동행자인 나미에게 읽고 있던 소설책을 선물한다. 헤어질 때가 되자 나미가 한솔에게 묻는다.


― 계속 거기서 묵어요?
― 네.
― 이름이 뭐예요? 저는 이름 못 말해요. 지금은 잘 말 못하겠어요. 근데 이름 알려주세요.


한솔은 선물로 준 책을 다시 가져가 거기에 이름을 썼다. 둘은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탐정소설에서 저는 이름을 말할 수 없어요, 라고 하면 탐정은 의뢰인이 들어온 문을 가리킨다. 말하지 않으면 도와드릴 수 없소. 한솔은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사람, 정체를 밝힐 수 없는 사람, 속으로 중얼거리며 호텔로 향했다.
(『인터내셔널의 밤』, 38~39쪽)


교환의 체계에서 낯선 두 사람이 만나서 나눌 수 있는 첫 번째 품목은 무엇일까? 당연히 이름이다. '명함'을 주고받는 풍습은 이 교환에 상품의 논리가 스며들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통성명이란 이처럼 자신의 이름을 재화로 제공하고 그 대가로 상대방의 이름을 받는 것이다. 둘은 이때 등가로 교환된다.
그런데 나미는 자신의 이름을 밝힐 수 없다고 하면서도 상대방의 이름을 알려달라고 요구한다. 이것이 증여(gift)의 형식이다. 한솔은 선물(gift)로 준 책에 자신의 이름을 써서 준다. 이름을 돌려받지 않고서 주는 것, 둘은 증여의 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증여가 시간적인 간격을 갖고, 일대일의 관계가 아니라 순환의 형식으로 준 것을 돌려받는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다. 시간이 지난 후 둘은 다시 만나고 한솔은 이름을 돌려받는다. 그것도 둘이 아니라 셋(나미의 이모 친구인 '유미'가 둘의 관계에 참여한다)의 형식으로.


이제 누가 자신을 붙잡으러 온다는 생각에서 조금 벗어난 나미는 그래도 당분간 자신을 마치 이리저리 움직이는 좌표처럼 생각해야겠다고 결정했다.(『인터내셔널의 밤』, 97쪽)


나미가 몸담았던 사이비 교단 역시 자본의 논리를 강제한다. 믿는 만큼 시간과 돈을 내야 하는 곳이라면, '믿음'도 '시간'도 '돈'과 같은 가치의 일종이다. 자본은 모든 것을 수량화한다. 이때 '돈'으로 환산 가능한 수치가 바로 가치다. 나미는 교환의 체계에 포획되지 않으려 하고 그래서 이리저리 떠돌기로 했다. 마치 음왈리나 술라바처럼.



4. 인터내셔널의 밤


소설은 가치로 환산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교환체제 하에서는 불필요한 것, 무가치한 것, 해로운 것, 따라서 판도라와 같은 것이다. 우리는 판도라가 저 상자를 연 것이 억압될 수 없는 호기심이라는 것을 안다. 호기심이야말로 교환되지 않는 것이며 양보할 수 없는 것이다. 호기심은 아무리 해로워도 포기될 수 없는 것이다. 그 상자 안에 희망만이 남은 것은 아마도 소설이 다음 이야기를 언제나 남겨 두기 때문이 아닐까. 그것은 다음 호기심이 된다.


올해가 러시아혁명 백 주년이라던데요, 「인터내셔널가」라도 부를까. 하지만 이 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은 전 세계에 한 줌도 안 될 것이다.(『인터내셔널의 밤』, 107쪽)


한솔과 나미는 부산 거리를 떠돌다 러시아 청년과 마주친 다음, 위와 같은 얘기를 꺼낸다. 소설의 표제가 여기서 나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소설이 파리코뮌(의 혁명가)을 상기시키는 것은 아니다. 글자 그대로 상상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인터내셔널'은 'inter + national', 그러니까 나라에서 떨어져 나온 한 사람(한솔)과 종교에서 떨어져 나온 한 사람(나미) 사이의 비등가적이고 탈교환경제적 만남에 대한 비유라고.


어떻게 주민등록에서 도망칠 수 있을까, 어떻게 모르는 사람으로 사라질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은 매일 밤 잠자리에서, 물론 매일 밤은 아니지만 자주 반복하는 생각이었다. 사라질 생각은 없지만, 큰 잘못을 아직 저지르지 않았지만 어떻게 한국에서 사라질 수 있을까 어떻게 숨을 수 있을까 혹은 한국을 빠져나가 외국에서 다른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인터내셔널의 밤』, 37쪽)


따라서 인터내셔널은 국적 없이 떠도는 자들에 대한 비유이자, 그렇게 국적을 상실함으로써 그 자신이 국가가 된 비등가적인 삶에 대한 비유이다. 과연 한솔은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넘어가는 비식별 구역인 바다에 가며 이로써 스스로 내셔널이 된다. 나미는 한 종교에서 빠져나와 그 자신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좌표"가 되면서 또 다른 내셔널이 된다. 둘의 만남은 그것이 무엇이 되든 좋을 것이다. "손에 든 수첩에 방금 떠오른 말을 썼다. '모든 것이 좋았다'고."(119쪽) ■














작가소개 / 양윤의

문학평론가. 평론집 『포즈와 프러포즈』(문학동네, 2013)가 있음.


《문장웹진 2019년 0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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