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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밤이 밤을 밝히었다

  • 작성일 2020-02-01
  • 조회수 2,453

[문학더하기(+)]



그리하여 밤이 밤을 밝히었다



이선우




1_ 두 개의 밤


"밤은 어두웠으며, 그리하여 밤이 밤을 밝히었다."1)
바루지의 『십자가의 성 요한』에 나오는 구절이다. 롤랑 바르트는 이 문장을 빌려와 사랑의 문형(紋形, figure)으로 제시한 바 있는데, 나는 이 역설적인 사랑의 문형을 다시 문학의 표제로 삼아 보려 한다.
스무 살 무렵에는 예사로 넘겼던 이 문장을, 몇 년간 오래 들여다보았다. 처음 나를 사로잡은 것은 밤이 밤을 밝힌다는 역설이었는데, 나중에는 '어둡다'와 '밝히다'를 연결하는 '그리하여'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어둡다, '그리하여' 밝힌다. 여기에는 아무런 논리적 결함이 없다. '그리하여'는 두 문장을 인과관계로 자연스럽게 연결한다. 문제는 앞뒤 문장 모두의 주어가 '밤'이라는 사실이다. 상반되는 서술어의 주어가 동일하다는 모순은 몇 가지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첫 번째 의문은 이것이다. 어두운 것도 밤이고 그 어둠을 밝히는 것도 밤이라면 이 밤은 대체 무엇인가.
롤랑 바르트의 논지(argument)에 따르면, "밤(nuit)이란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둠의 은유(감정적인, 지적인, 실존적인)를 야기하는 온갖 상태로서, 그 속에서 그가 몸부림치거나 마음을 진정시키는 것"2)이다. 여기서 핵심은 밤이 어둠의 은유라는 것이 아니라 이중적인 어둠이라는 것이다. 몸부림치는 시공간이 밤이라면 그 마음을 진정시키는 곳 역시 밤이라는 역설. 바르트는 그것을 '암흑(tinieblas)'과 '어둠(oscuras)'으로, '십자가의 성 요한'3)은 '감각의 밤'과 '영의 밤'으로 구분한다. 전자가 '사물에 대한 집착과 그로 인한 혼란으로 눈이 먼' 상태라면, 후자는 소유하고 해석하려는 맹목의 눈을 가만히 감은 상태, 욕망에 사로잡혀 암흑 속으로 떨어지는 대신 사랑의 어두운 내부 안에 조용히 앉아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생각해 보는 시간이다. 이 "두 번째 밤이 첫 번째 밤을 감싸며, 어둠이 암흑을 비춘다."4)
그러나 누구에게나 '두 번째 밤'이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암흑 속에 갇혀 산산이 부서져 버리는 이들도 있다. 무엇이 이 둘의 차이를 낳는가. 어둠의 이중성에 대한 사유는, 단순히 모든 것은 양가적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 있지 않다. 어둠조차 고정된 어떤 것으로 파악하고 그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이들에게 밤의 다른 지평을 열어 보이는 것, 어둠에 거하되 어둠에 갇히지 않고 밤을 밝히는 밤을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이 사유가 가 닿고자 하는 지점일 것이다. 그리하여 성 요한이 신앙을, 바르트가 사랑을 논하면서 어둠의 이중성에 대해 천착했다면 노자는 도(道)에 이르는 길을 논하면서 현(玄)을 강조한 것이 아닐까.
바르트는 글의 마지막에 "이 어둠을 어둡게 하는 것, 바로 거기에 모든 경이로움의 문이 있다"는 『도덕경』의 한 구절("현지우현, 중묘지문玄之又玄, 衆妙之門")을 인용하는데,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명가명비상명(名可名非常名)"으로 유명한 『도덕경』 1장5)의 결구가 바로 이 구절이다. '도라고 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로 시작하는 장의 결구이니만큼 '현'을 그저 어둠이라 일컬을 수는 없을 것이다. '현지우현'은 해석이 더 분분하다.6) 『사랑의 단상』에 인용된 대로 옮겨도, '밤이 밤을 밝히다'의 역설과는 다른 의미의 난감함이 우리의 시선을 붙잡는다. 이미 어두운 것을 더 어둡게 한다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혼돈에 혼돈을 더하고 역경에 역경을 가해 존재의 심연으로 가라앉힌다는 것일까. 그리하여 "어두운 것이 되면 이미 어두우니까, 어두운 것을 어둡다고 생각하거나, 무섭다고 생각하는 일은 없"7)게 된다는 것일까.

1) 롤랑 바르트, 김희영 옮김, 『사랑의 단상』, 문학과지성사, 1991, 232쪽.
2) 롤랑 바르트, 위의 책, 232쪽.
3) 16세기의 성인이자 가르멜 개혁가. 개혁 운동을 저지하려던 완화 가르멜 수사들에게 납치당해 톨레도 감옥에 갇힌다. 탈출하기까지 8개월간 자신이 믿어 왔던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리는 '어둔 밤'을 겪으며 영적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한다. 이때의 체험과 깨달음을 바탕으로 「가르멜의 산길」, 「어둔 밤」, 「영혼의 노래」, 「사랑의 산 불꽃」 등의 뛰어난 시를 남긴다. 베르나르 세제, 이연행 옮김, 『십자가의 성요한』, 바오로딸, 2007 참고.
4) 롤랑 바르트, 앞의 책, 232쪽.
5)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 天地之始, 有名, 萬物之母. 故常有欲以觀其徼, 常有欲以觀其徼. 此兩者同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노자 지음, 김학목 옮김, 『노자 도덕경과 왕필의 주注』, 홍익출판사, 2011, 30~32쪽)
6) 참고로 오강남 역의 우리말본에는 '현'을 어둠 대신 '신비스러운 것'으로, '현지우현'을 '신비 중의 신비'로 풀이해 놓았다. 문제는 '중묘지문'의 '묘' 역시 '신비'로 번역해("신비 중의 신비요, 모든 신비의 문입니다.") 원문에는 드러난 '현'과 '묘'의 구분을 없애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노자 원전, 오감남 풀이, 『도덕경』, 현암사, 1995; 개정판 2010, 19쪽 참고)
7) 황정은, 『백의 그림자』, 민음사, 2010, 90쪽.



2_ 현의 양가성, 불확정성, 운동성


'어둠을 어둡게 하다'와 '밤이 밤을 밝히다', 비슷한 구조의 두 문장이 이렇듯 다르게 와 닿는 것은 '밝히다'와 '어둡게 하다'라는 상반된 술어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극과 극은 만나고, 상반되는 것들이 서로의 뿌리가 되기도 한다. 『주역』의 '태극도설'에는 움직임이 극에 달하면 고요하게 되고 고요함이 극에 달하면 다시 움직여(動極而靜 靜而生陰 靜極復動) 우주의 생성과 변화를 만들어 간다는 사고가 담겨 있는데, 이에 따르면 어둠을 어둡게 해 어둠의 극에 이르면 그 극단의 어둠에서 밝음이 도래한다는 이야기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굳이 『주역』까지 들먹이지 않아도 '어둠을 어둡게 하다'와 '밤이 밤을 밝히다'는 같은 의미라고 볼 수 있다. 『도덕경』에서 말하는 현이 곧 '암흑을 비추는 어둠'이기도 한 까닭이다.
『도덕경』 1장의 뒷부분을 다시 보자. '요(徼)'와 '묘(妙)'에 대해서도 해석이 분분하지만,8) 욕망에 욕망을 더해 존재의 참모습이 가려진 상태가 '요'라면("상유욕 이관기요常有欲 以觀其徼") 덜어내고 덜어내 비로소 보게 된 본연의 모습을 '묘'("상무욕 이관기묘常無欲 以觀其妙")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현'은 바로 이 "왜곡된 현상으로부터 본연의 현상으로 복귀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기 위한 메타포"9)라고 해석되기도 한다. 어떻게 빛이 아니라 어둠이, 존재의 가려진 참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가.
일반적으로 현은 '깊고 어둡고 아득히 멀어 알 수 없는 어떤 것'을 의미했으나, 노자는 그것을 철학적인 의미로 발전시켜 '서로 상반되는 것들 또는 차원이 다른 것들이 하나로 뒤섞여 있는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했다고 한다. 묘만도 아니고 요만도 아닌, 묘와 요가 혼재해 있는 만물의 상태. 이를 고정화시켜 규정하고 이름붙일 수 없으므로 다만 '현'이라 했다("차양자동 출이이명 동위지현此兩者同 出而異名 同謂之玄").10) 『도덕경』에서도 양가성과 불확정성이 '현'의 속성인 셈이다. 그렇다면 '현지우현'이란, 이렇듯 이름 붙일 수 없는 것들에 이름을 붙여 그 본질을 흐리지 않는 것, 상반되거나 이질적인 것들을 품고 불확정적인 것을 불확정적인 채로 견디는 것을 의미한다. 어둠을 빛으로 가리는 것이 아니라 어둠의 심연까지 내려가 이 혼돈을 직시하는 것, 이것이 밤이 밤을 밝히는 방식이다. 정의하고 분류하기 좋아하는 이론가나 비평가들에게 어쩌면 이것처럼 어려운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노자에 따르면 그것만이 중묘(衆妙)에 이르는 문이다.
그런데 앞서 인용한 논문에서는 이 '현'자에 또 다른 함의가 있다고 지적한다. 일차적으로는 상반되는 것의 혼재를 의미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혼재의 상태로부터 초월하는 것을 뜻한다는 것이다. 『도덕경』 48장11)과 연결시켜 보면 이는 좀 더 명확해진다. 학문을 하는 것은 날로 더하는 것이고 도를 행하는 것은 날로 덜어내는 것이니("위학일익 위도일손爲學日益, 爲道日損"), 덜어내고 덜어내 무위(無爲)에 이르는 이 위도(爲道)의 방법이 손지우손(損之又損)이며 동일한 구조로 이루어진 현지우현(玄之又玄)이다. 즉 현은 단순한 어둠도, 도나 도보다 상위에 있는 어떤 존재도 아니다. 그것은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 깜깜한 하늘에 여명이 번지듯이 "밝음과 어두움의 혼재, 그러면서도 단순한 혼재가 아니라 '짙은 어두움으로부터 밝음으로' 향하거나 '밝음이 짙은 어두움 속으로' 확산해 들어가는 점진적인 추행(趨行)에 대한 비유"12)이다.
이 매력적인 해석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 주의해야 할 점은, 초월에 대한 지향을 초월 그 자체로 오인하지 않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그 혼재의 상태로부터 초월하는 것"이란 초월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이지(이렇게 보면 현은 또한 동사이다) 현이 곧 혼재로부터의 초월이라는 뜻이 아니다(그렇게 되면 현은 형용사나 동사가 아니라 명사가 된다). 혼재 속에서 혼재를 품고 견디되 혼재 너머를 바라보기, 혹은 혼재 너머를 향해 나아가되 혼재를 부인하거나 지우는 방식이 아니라 혼재의 근원까지 드러내기. 양가성과 불확정성뿐 아니라 이것들과 다소 모순될 수도 있는 어떤 운동성, 즉 지향성이 현에 내재해 있다는 것은 이 시대의 어둠에 대한 사유에 희미하게나마 희망을 드리우는 것도 같다.

8) 요가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라면 묘는 그 이면의 본질이라고도 하고, 요가 '사물이 되돌아가서 끝나게 되는 종결점'이라면 묘는 '사물이 시작되는 미묘함'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표면과 이면'이든, '시작과 끝'이든 둘은 같은 곳에서 나왔는데 이름을 다르게 붙인 것(혹은 둘은 같은 것인데 다른 이름으로 나온 것)으로 이 둘을 함께 일러 '현'이라 한다.
9) 유병래, 「『노자』의 '玄之又玄, 衆妙之門' 해석 ― 욕망론의 기본 구조」, 『철학 · 사상 · 문화』 제3호, 동서사상연구소, 2006년, 59~110쪽 참고. 이하 이 글의 '玄之又玄, 衆妙之門'에 관한 부분은 대체로 유병래의 해석을 따르고 인용했다. 문장을 그대로 옮겨오지는 않아 모든 문장에 각주를 달지는 못했다는 것을 밝힌다.
10) 참고로 『도덕경』 1장의 "此兩者 同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에 대한 왕필의 주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양자는 始와 母를 의미하고, 同出이란 玄에서 함께 나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異名이란 所施된 것이 같을 수 없다는 말이다. 머리(시작)에 있은즉 始라 하고, 끝에 있은즉 母라고 이른다. 현은 冥과 같은 의미로서 黙然無有한 것이요, 여기에서 始와 母가 나온다. 이것은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同을 '名曰玄'이라고 하지 않고 '謂之玄'이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무어라 이름을 붙일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냥 '謂之'라고 말한 것이다. '謂之'라고 말한 것은 '玄'이라는 표현으로도 규정 · 고정화할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니, 만약 그것을 어떤 고정된 이름으로 부르게 되면 그 본래의 의미를 크게 잃어버리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玄之又玄'이라고 했으며, 衆妙가 모두 (이 玄)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것을 '衆妙之門''이라고 했던 것이다." 유병래, 위의 논문, 95쪽 각주 50번에서 재인용.
11) 爲學日益, 爲道日損. 損之又損, 以至於無爲, 無爲而無不爲.. 取天下常以無事. 及其有事, 不足以取天下. 도덕경 48장에 대한 해석은 대개 다음과 같다. "학문을 하면 날마다 보태고, 도를 행하면 날마다 덜어낸다. 덜어내고 또 덜어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경지에 도달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하지 못하는 것이 없게 된다. 그러니 천하를 취하는 것은 항상 일을 없애는 것으로 한다. 일을 하는 것으로는 천하를 취하기에 부족하다."(홍석주 지음, 김학목 옮김, 『홍석주의 노자』, 예문서원, 2001, 179쪽)
12) 유병래, 앞의 글, 100쪽.



3_ 궁핍한 대낮의 세계


그렇더라도 왜 '그리하여'인가.
모순을 해결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바르트처럼 이 문장에 등장하는 '밤'을 서로 다른 것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밤은 어두웠으며"와 "밤을"의 '밤'은 맹목(盲目)의 밤 곧 암흑으로, '밝히다'의 주어는 무명(無名)의 밤 곧 어둠으로 구분하면 무명이 맹목을 감싸 안는 풍경, 혹은 묘와 요가 뒤섞인 상태에서 점차 묘로 나아가는 어떤 파동이 그려진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모든 것이 해명되지는 않는다. 두 가지 밤이 존재한다 할지라도, 어둠이 아니라 빛이 암흑을 밝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 밝게, 더 찬란하게, 더 확실하게 밝혀 줄 빛을 놔두고 왜 굳이 밤의 층위를 나누어 어둠으로 하여금 암흑을 비추게 하는가. '그리하여'의 필연성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밤을 밝힐 빛 자체가 없거나, 빛이 있어도 밤을 밝힐 수 없거나, 밤이 빛보다 밤을 잘 밝혀야 한다.
'그리하여'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 내가 제일 먼저 떠올렸던 것은 첫 번째 경우였다. 밤은 어두운데 그 어디에도 이 암흑천지를 비출 빛이 없는 경우. 절망한 자가 절망한 자를 위로하고, 아픈 자가 아픈 자를 치료하며, 가난한 자가 가난한 자를, 죽은 자가 죽은 자를 장사 지내야 하는 상황. 용산참사 현장에서도, 쌍용차 해직노동자들의 고공농성장에서도, 세월호참사 유가족들의 광화문 천막에서도 내가 본 것은 또 다른 해직자, 또 다른 철거민, 또 다른 유가족, 누구보다 절망한 자와 아픈 자,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의 연대와 지지였다. 빛이 되어야 할 국가는 오히려 제도화된 폭력집단으로 기능했고 법은 가진 자들의 잘 벼린 무기에 불과했다. 어두운 곳을 감추고 망각을 조장하는 언론과 배타적 수구세력이 되어버린 대형교회는 그야말로 우리 사회를 암흑 속으로 밀어 넣었다. "죄 많고 벌 없는 이곳을 뭐라 부를까 / 내 나라라는 적진(敵陣)을 부러질 듯 오체투지로 뚫으며 / 몸이 더 젖고 더 해지는 동안,"13) "그, 마음의 몸을 찌르려고 몰려온 / 웃는 몸들을 보았다"14). 밤은 어둡다. 밤을 비출 다른 그 무엇도 없다. '그러므로' 밤이 밤을 비춘다.
휘황찬란한 21세기에 이것은 너무 시대착오적인 진단인 걸까. 그러나 어딘가에는 넘쳐흐르는 빛이 다른 어딘가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빛조차 불평등하게 비추는 곳만 비추고 밝힐 곳만 밝히며 어두운 곳은 계속 어둡도록 방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편재(遍在)하는 빛은 없다. 빛의 일방향성은 빛의 편재(偏在)를 낳을 뿐이고, 이는 곧 빛의 부재로 이어진다. 누군가는 빛에 갇혀 어둠을 보지 못하고, 어둠에 갇힌 자를 도리어 질책하기도 한다. 이 대명천지 어디가 어둡냐고, 어두운 곳에 있다면 밝은 곳으로 나오면 될 것 아니냐고 무지를 가장해 주위를 모두 암흑천지로 만든다. 어떤 빛은 만물을 따스하게 비춰 생명을 일깨우지만, 어떤 빛은 이렇게 눈조차 멀게 만든다. 사막의 태양처럼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빛, 밤을 감싸는 것이 아니라 추방해 버리는 대낮의 폭력.
빛이 밤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밤의 존재를 감추고 사라지게 만든다는 것은 밤에 공간적 의미만이 아니라 시간적 의미도 있다는 것을 떠올리면 금방 알 수 있다. 낮의 빛이 밤의 어둠을 비추면 그 밤은 더 이상 밤이 아니라 낮이 된다. 너무 찬란한 빛은 밤을 밝히되 밤을 사라지게 하는 식으로만 비추는 것이다. 그러한 빛을 일컬어 과연 밤을 밝히는 빛이라 할 수 있는가. 본질은 은폐되고 "궁핍함 자체가 궁핍한 채로" 있는 이 대낮의 세계야말로 오히려 더 '궁핍한 시대', 길고 긴 '세계의 밤'이 아닌가.15)

13) 이영광, 「마음1」 부분, 『끝없는 사람』, 문학과지성사, 2018.
14) 이영광, 「마음2」 부분, 위의 시집.
15) 마르틴 하이데거, 신상희 옮김, 「무엇을 위한 시인인가」, 『숲길』, 나남출판사, 2008, 404~405쪽.



4_ 어둠에 내재한 빛, 빛이 되는 어둠

빛은 편재(遍在)하지 않으며, 편재(偏在)하는 빛은 대체로 폭력적이다.
'그러므로' 밤이 밤을 밝힌다는 역설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밤은 어떻게 밤을 밝히는가. "너무 어두워서, 정말로 밝은 곳에 당도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16) 때도 있다. 아니, 실은 매 순간이 그러하다. 개인을 둘러싼 세계의 어둠도 어둠이지만, 내면의 어둠이 우리를 덮치는 순간은 꼼짝달싹할 수조차 없다. 이러할 때, 함께 암흑에 갇히지 않고 우리는 어떻게 여명으로 나아가는가.
조해진의 『빛의 호위』에는 유독 어둠에 잠긴 자들이 많다. 인상적인 것은, 이 소설집에는 이들이 어둠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희미하게나마 빛을 밝히고 있는 사람들이 함께 등장한다는 것이다. 강렬한 도덕심으로 무장한, 신념에 찬 휴머니스트들이어서가 아니다. 그들 역시 대부분 나약하고, 비슷한 고통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자들일 뿐이다. 조직적이고 지속적으로 연대하는 것도 아니다. 카메라 셔터를 누를 때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빛처럼 일회적이고 순간적인 빛에 불과한 경우가 더 많다. 흐릿하고 불완전한 이 찰나의 빛이 어떻게 저 깊은 어둠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 문이 될 수 있었을까.
2017년 봄에 이 소설집을 읽고 나는 "핵심은 빛 그 자체가 아니라 빛을 찾는 눈"17)에 있다고 썼다. 조해진 소설의 인물들이 윤리적인 주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그들이 쉽게 손을 내밀어 주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를 유폐시킨 바로 그 힘으로 어둠에서 빠져나오는 발걸음을 다시 내딛기 때문이라고. 즉, 이들을 어둠으로부터 구원한 것은 외부의 빛이 아니라 자신의 존엄을 지키고자 하는 내부의 의지, 빛을 찾아내는 눈이었다고 말이다. 여전히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렇게만 써서는 해명되지 않는 것이 있다. 이 내부의 의지는 대체 어떻게 생겨나는 것인가. 왜 누군가는 포기하고 절망하는데 누군가는 버티고 살아내는가. 어떻게 어둠 속에서 길을 찾는가, 끝내 한 걸음을 더 내딛는가.
매 순간 찬란한 빛 속에 거해야만 존귀한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인간다운 대접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이 스스로를 존엄하게 여기기는 쉽지 않다. "존귀한 사람은 아무에게도 무시당하지 않는다"는 훈계는 판매 서비스직에 종사한 뒤로 언제나 '웃는 사람'이 되어버린 「복경」의 '나' 같은 인물에게는 헛소리에 불과하다. "스스로 귀하다는 것은…… 자존, 존귀, 귀하다는 것은, 존, 그것은 존, 존나 귀하다는 의미입니까."18) 실제로는 모두가 "꿇으라면 꿇는 존재가 있는 세계. 압도적인 우위로 인간을 내려다볼 수 있는 인간으로서의 경험"19)을 바라면서 말로만 윤리를 가르치고 천부인권을 선언해 봤자, 매일같이 '도게자(土下座)'20)를 요구받는 사람에게 갑자기 자존감이 생길 리 없다. 그것은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서만 배우고 익힐 수 있는 것. 사물이 아니라 인간으로 존중받은 경험, 단 한 번이라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존재 그 자체로 이해받은 경험은 그러므로 무엇보다 소중하다. 존재의 심연에서 우리를 끝까지 '호위'하는 것은 어쩌면 이런 소소한 경험일는지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사소해 보이는 일이 누군가에게는 이렇게 '인간을 살리는 위대한 일'이 된다. 구원은 바깥에서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도 아니지만, 혼자만의 힘으로 스스로를 온전히 구원할 수도 없다. 안과 밖은 이어져 있고, "숲의 바깥에도 동행자가 있다"21)는 것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다. 신성(神性)은 세속(世俗)과 본질적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어서 어떤 관계는 일상의 남루함을 신성한 것으로 바꾸기도 한다.22)
그렇다면 어둠 속에서도 빛을 찾아내는 눈은, 어둠 속에도 빛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아는 눈, 언젠가 한 번은 그 빛을 본 적이 있는 눈이라는 말일까. '외부의 빛'보다 '빛을 보는 눈'을 더 강조했던 것은, 빛은 구원, 어둠은 구원의 손길만을 기다리는 수동적 지대라는 독법을 비틀어 보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너무 부셔서 눈을 감게 하는 빛이 아니라 어둠에 눈뜨게 하는 빛, 어둠을 드러내되 어둠에 잠기지 않고 어둠에 손을 내미는 빛이라면 어둠의 대립항으로만 설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존재를 드러내는 순간은 찰나에 불과할지라도, 그것은 어둠 자체에 내재한 빛. 그러므로 결코 사라질 수 없고, 사라진 것이 아니므로 언제든 다시 나타날 수 있는 빛. 특출한 누군가에게만 존재하는 빛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다만 지금은 가려져 있는 빛일 뿐이다.
어둠, 가려진 그 빛이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가장 뜨거운 응원이 되기도 한다. 현실의 비참과 혼돈 속에서도 인간다움을 포기하지 않고, 우리를 비인간으로 몰아넣는 '툴'을 의심하는 사람들. 처절하게 부서진 채 그 부서진 몸으로 이 세계의 밤과 싸우는 사람들. "그들과 d에게는 같은 것이 거의 없었다. 다른 장소, 다른 삶, 다른 죽음을 겪은 사람들. 그들은 애인(愛人)을 잃었고 나도 애인을 잃었다. 그들이 싸우고 있다는 것을 d는 생각했다. 그 사람들은 무엇에 저항하고 있나. 하찮음에 하찮음에."23) 황정은의 연작소설 「d」에서 d는 "너무 하찮아서, 충돌 한 번에 내동댕이쳐질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대해, 자신과 자신의 연인, 그리고 아버지조차 이 세계에서는 그토록 하찮을 뿐이라는 사실에 대해 깊이 상처받고 암흑 속에 잠기지만, 자신이 그렇게 자책과 원망에만 빠져 있는 동안 누군가는 그 하찮음에 저항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삶의 다른 가능성을 발견한다. 직접적인 구제나 위로의 손길만이 누군가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암흑 속에서도 싸우고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각자의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낸다. 그렇게, 때로는 가장 깊은 어둠이 가장 내밀한 빛이 된다.
이러한 빛과 눈의 조응을 그러므로 단순한 선후나 인과로만 파악할 수는 없다. 빛이 먼저냐 눈이 먼저냐는 질문은 더 이상 사태의 본질을 드러내지 못한다. 그것들은 서로 연루되어 동시에 작동하며 서로가 서로의 원인이자 결과, 과거이자 미래가 된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활동 속에 내재한 능동성이다. 어둠에 내재한 빛은 신의 임재처럼 무작위로 내리쬐는 빛이 아니므로 여기서 '본다'는 것은 무엇보다 능력이며, 이 능력에는 반드시 의지가 개입한다. 밤의 이중성에 대해서는 앞서 논의했으니 그러므로 이제 어둠의 능동성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결여태가 아니라 능동태로서의 어둠. 종말이 아니라 기원의 활동으로서, 폭력이 아니라 위로의 시간으로서, 배제가 아니라 공존의 공간으로서의 어둠. "어둠의 시간, 눈은 보기 시작하네."24) 시어도어 로스케의 시에서처럼, 어둠 속에서 비로소 뜨게 되는 눈에 대해서.

16) 황정은, 위의 책, 163쪽.
17) 이선우, 「인간이란 무엇인가」, 『문학들』 48, 2017 여름.
18) 황정은, 「복경」, 『아무도 아닌』, 문학동네, 2016, 202쪽.
19) 황정은, 위의 소설, 201쪽.
20) 土下座. "땅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이마를 바닥에 대고 엎드리는 행위로, 크게 사죄하거나 간청할 때 하는 일본식 풍습이다. 흔히 수치감이 동반되며 상대에게 도게자를 시키는 행위는 모욕으로 여겨진다. 본래 귀족이 행차할 때 서민이 땅에 엎드려 존경심을 표현한 데서 비롯됐다. 현대 일본에서는 사죄의 뜻으로 많이 쓰이는데, 선거철에 국회의원이 대중 상대로 도게자를 하거나 기업 윤리를 저버리는 등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기업인들이 언론 앞에서 도게자를 하는 모습을 관행처럼 볼 수 있다." -pmg 지식엔진연구소,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2018.
21) 조해진, 「동쪽 伯의 숲」, 『빛의 호위』, 창비, 2017, 106쪽.
22) "dd를 만난 이후로는 dd가 d의 신성한 것이 되었다. dd는 d에게 계속되어야 하는 말, 처음 만난 상태 그대로, 온전해야 하는 몸이었다. d는 dd를 만나 자신의 노동이 신성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랑을 가진 인간이 아름다울 수 있으며,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아름답다고 여길 수 있는 마음으로도 인간은 서글퍼지고,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황정은, 「d」, 『dd의 우산』, 창비, 2019, 18쪽.
23) 황정은, 「d」, 『디디의 우산』, 창비, 2019, 144쪽.
24) Theodore roethke, "In a dark time", On Poetry and Craft: Selected Prose Selected Prose of Theodore Roethke, Copper Canyon Press, 2001, p. 231.



5_ 어둠 속에서만 볼 수 있는 것


아감벤의 「동시대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짧은 에세이에 이와 관련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다. 우리는 흔히 어둠을 단순히 빛이 없는 상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경생리학자들에 따르면, 빛의 부재는 망막 주변부의 세포(정확히 오프셀off-cells이라고 부르는 일련의 세포)를 활성화시켜 우리가 어둠이라고 부르는 특수한 종류의 시각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어둠은 결여를 나타내는 개념, 빛의 단순 부재, 비시각 같은 무언가가 아니라 오프셀이 활동한 결과, 즉 우리 망막의 산물"이다. 천체물리학에서 말하는 하늘의 어둠 역시 빛의 대립 개념이 아니라 "가장 멀리 떨어진 성운의 빛"이다. 우주는 팽창하고 있으므로, 멀리 떨어져 있는 성운의 빛은 전속력으로 우리를 향해 여행하지만 다가오는 속도보다 빠르게 멀어지기 때문에 우리에게 도달하지 못한다. 우리가 어둠이라 부르는 것은, "도달할 수 없는 그 빛"이다.25) 말놀음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이러한 설명은 어둠이 단순한 수동태가 아니라 적극적인 활동의 결과이며 빛의 완전한 부재가 아니라 빛과 연관된 상태라는 것을 드러낸다.
「d」에 나오는 '진공'을 이러한 어둠과 관련해서 생각해 볼 수는 없을까. 이 작품의 전신인 「웃는 남자」(『아무도 아닌』, 문학동네, 2016)는 그야말로 어둠에 갇혀 있던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인데, 작가의 말에 의하면 「웃는 남자」는 「디디의 우산」을 부숴 만든 단편이다. 즉 「디디의 우산」 반대편에 「웃는 남자」가 있고, 「웃는 남자」를 확장해 만든 작품이 「d」인데, 「d」와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로 이루어진 이 연작소설집의 제목은 왜 '디디의 우산'인가. 「디디의 우산」에 등장하는 디디는 "모두가 돌아갈 무렵엔 우산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다른 사람들이 자고 있는 시간에 미리 우산을 세어 보는 사람, 「d」에서도 비가 오자 오랜만에 만난 d에게 자신의 우산을 내미는 사람이다. 이 작은 걱정과 관심이 d와 dd를 깊이 연루시키고 "dd를 만난 이후로는 dd가 d의 신성한 것"이 된다. 그러나 「d」는 이 '신성한 것'이 상실된 세계다. d는 dd와 함께라면 "생활의 부족함, 남루함, 고단함" 속에서도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고 믿었고 행복해지자고 다짐했지만, dd가 어느 날 갑자기 이 세계 밖으로 내동댕이쳐져 버린 것이다. 신성을 상실한 자의 세계는 삶보다 죽음에 가깝다. 살아남았으나 마치 죽은 자처럼 홀로 유폐되어 있던 d는 dd를 만나기 전보다 더 차가워진 채 잡음으로 가득 찬 원래의 세계로 돌아간다.
「d」는 이렇게 연인을 잃고 매 순간 죽음을 느끼는 d와, 수십 년간 일해 온 전자상가가 어느 날 문득 저승 같다고 느끼는 여소녀, 종말을 예감하는 박조배, 언제고 다시 전쟁이 일어나 소중한 모든 것을 앗아갈 수 있다고 불안해하는 노파들처럼 빛보다는 어둠에 잠긴 자들, 낡아 가고 죽어가고 외면당하고 하찮게 여겨지는 자들의 세계를 다룬다. 그러나 "절망적인 것을 절망적인 것으로서 절박하게 감지하는 자들"이라는 점에서, 어쩌면 이들이야말로 하이데거가 말한 '소수의 죽을 자들'(죽음을 죽음으로서 떠맡을 수 있는 인간)일지도 모른다. "세계의 밤의 시대에는 세계의 심연이 경험되고 감내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심연에까지 이르는 사람들이 필요하다."26) '살아 있으면서 단순히 죽어가고 있는 자들'과 달리 이들은 진짜 어둠을 경험한 자, 그리하여 어둠 속에서 눈을 뜨고 어둠을 보는 자이다. 어둠 속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을 보기 위해, 성급히 그 어둠으로부터 벗어나지 않고 오히려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자들, 스스로 심연에 갇히는 자들.
「d」의 전신인 「웃는 남자」에서도 '나'(도도)는 그저 암굴 같은 곳에 틀어박힌 자가 아니라 그 어둠 속에서 끊임없이 '생각'하는 자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생각하고 생각해 마침내는 이해해 보려고" 스스로를 어둠 속에 가둔 자이다. 그렇게까지 깊이 내려가 무엇을 이해하려는 것인가. 교통사고가 난 순간 디디가 아니라 가방을 붙들었던 "저날의 나"를, 자신도 모르게 직조해낸 패턴의 연속을, 그 연속이 만들어낸 결과로서의 현실을. "이것을 이해해 보려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며 나는 여기 머물고 있지만 이해할 수 없다." 생각하고 생각해서 겨우 생각해 낸 것은, 생각이 없었다는 것. 아버지처럼 자신도, "그냥 하던 대로"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d」의 연작인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는 이 '사유의 무능'이 얼마나 폭력적인 '상식'을 낳고, 아이히만 식의 상투성(banality), 즉 악으로 이어지는가에 대해 본격적으로 파헤친 작품이다. 그런 점에서 「웃는 남자」는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의 전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 무능의 결과가 낳은 처절함의 측면에서는 「웃는 남자」가 훨씬 압도적이다. 그리하여 압도적으로 처절하게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생각 없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도도에게 그것은 자신의 삶을 "총체적으로" 돌이켜보는 것, 외면하고 싶었던 자신의 어둠을 똑바로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결정적으로 아버지와 다른 사람이 된다. 생각이 없었다는 점에서 한때 둘은 같았으나, 이제 아버지는 "당신이 잘못했다는 말을 들으면 화를 내는 사람"이 되고 말았지만 도도는 스스로를 유폐하면서까지 자신에게 "잘못이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어떤 인간인가", "어떻게 살았나." "어떻게 사는가." 지속적으로 되풀이하여 돌아보고, 끈질기게 살펴서 깨닫는다. 이를 일컬어 우리는 '반성(反省)'이라고 하거니와, 반성이야말로 오롯이 생각하는 능력이며 죽음이 아니라 삶을 향한 사유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도도가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바로 생각의 이 방향성이다. 단순한 애도나 원망, 자책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삶을 반성한다는 것은 이 반성에 맞닿아 있는 것이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임을 보여준다. 죽은 것이나 다름없기는 안팎이 매한가지지만 더 이상 "여기 있고 싶지 않다"는 욕망, 이 생의 의지 덕분에 도도는 아무도 자기를 구하러 오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완전한 절망에 빠지지 않고 자기 발로 걸어 나갈 생각도 해보는 것이다.
「d」는 그렇게 제 발로 암굴을 걸어 나온 d의 이야기이자, 자신의 어둠을 들여다본 자가 바라본 '바깥'의 어둠에 대한 이야기이다. 「웃는 남자」가 내면의 어둠에 집중하고 있다면 「d」는 개인을 둘러싼 세계의 어둠으로 시선을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드디어 바깥으로 나왔지만 d에게 바깥은 안과 별반 다르지 않다. "오랫동안 방에 틀어박혔다가 스스로 문을 열고 나왔으나 여기는 여전히, 어딘가의 안쪽이고, 작은 주머니에서 조금 덜 작은 주머니로 이동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d는 계속해서 움직이지만, 세운상가도, 도심의 번화한 거리도, 광장도, 소중한 것이 하찮게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어디나 "디디를 먹어치운 거리"일 뿐이다. d가 넓은 곳으로 나갈수록 오히려 더 선명해지는 것은 "미래와 빤하게 연결된 현재, 이상에 이르지 못하는 실재", "혁명을 거의 가능하지 않도록 하는 혁명……", 망함조차 없이 적나라한 채 이어지는 "더는 아름답지 않고 솔직하지도 않은, 삶", 말하자면 이 세계의 투명한 "좆같음"일 뿐이다.
그러나 d가 매일 보고 지나치면서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여소녀를 알아보고, 여소녀가 d의 "낯빛이 한순간에 바뀌는 것을" 알아채면서 이야기는 조금씩 다른 층위를 드러낸다. 「웃는 남자」에서 도도는 "아무도 나를 구하러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d」의 세계에서는 'dd의 우산'과도 같은 한 그릇의 짜장면이, dd와 함께 들었지만 들어 본 적 없는 사운드의 「러브 미 텐더(Love Me Tender)」가, dd가 읽던 박조배의 『REVOLUTION』이 d와 여소녀, 박조배를 이어 주고, 이 만남들을 통해 d는 잡음의 세계가 음악의 세계로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을, 차벽이 만들어낸 도시의 진공 너머에도 열기를 품고 싸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d는 그들의 함성이 차벽을 뚫지는 못하리라고, 그 사이의 공간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공간(空間), 즉 '진공'일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어둡고 막막한 도시의 진공에도 사실은 무수한 빛과 신호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다만 정류(整流)와 증폭(增幅), 산만하게 흩어진 것이 한 방향으로 흐르고 신호의 진폭이 늘어나는 순간 저 진공 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우리는 이미 경험한 바가 있다.

25) 아감벤, 『장치란 무엇인가』, 난장, 2010, 76~78쪽.
26) 하이데거, 위의 책, 396쪽.



6_ 불가능성을 뚫고 나오는 가능성


그렇다면 「d」는 단순히 어둠에 갇힌 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어둠에서 여명으로 나아가는 이야기, 혁명의 불가능성 속에서 혁명의 가능성을 발견해 내는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다. 무엇이 이러한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가. 이 세계는 자신의 툴과 패턴에 맞지 않는 것은 아무리 신성한 것이라도 순식간에 하찮은 것으로 전락시켜 버리는 무심한 곳이다. 우리를 어둠에 가두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나의 신성이 무참히 훼손된 경험, 내게는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 무의미하게, 하찮게, 하찮다 못해 지겹게 다루어진 기억. 왜 지겹다고 말하는가. 왜 하찮게 취급하는가.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언제든 교체 가능한 부품처럼, 돈만 주면 살 수 있는 기계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소녀는 d에게, 아무리 기계라도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기계들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단종되어 더 이상은 살 수도 없고 부품조차 쉽게 구할 수 없는 물건들이 있거니와, "같은 모델이라도, 그 기기를 다룬 사람에 따라 소리가 다르"기 때문에 그것은 세상에 하나뿐인 존재라고. 그래서 "빈티지를 고치려는 사람들은 고친다고 말하지 않는다. 살린다고 말하지".
빈티지를 마치 생명이 있는 존재처럼 다룬다는 것은 인간과 기계의 위상이 전도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기계일지라도 관계는 존재를 변화시키고, 서로를 길들인 존재는 서로에게 유일한 존재가 된다는 뜻이다. d와 dd가 그러했던 것처럼, d와 여소녀가 서로를 길들이며 변화시키는 과정 역시 대체 불가능한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만인이 만인과 관계를 맺고 만인에게 '어린 왕자와 여우'가 되어 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인간에게 어떻게 인간이 되는가. 무엇이 인격적인 관계를 만드는가. 무엇이 그도 나와 똑같은 '인간'이라고, 하찮게 패대기쳐지고 함부로 잊혀서는 안 되는 존재라고 알려주는가. 공감하는 능력을 통해서만, 한 사람을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을 통해서만 그것은 가능하다. "무감각이 자아의 경계를 수축시키는 것이라면, 감정이입은 그 경계를 확장한다."27) 그러나 폭력과 차별로 점철된 인간의 역사는 이 단순한 능력이 얼마나 오래 배우고 갈고닦아야 겨우 쟁취할 수 있는, 불가능에 가까운 능력인가를 증명한다.
문학이란 이 불가능에 도전하는 불가능, 그리하여 매 순간 다시 써내려가야 하는 백지 위의 싸움이다. 암흑과도 같은 저 진공 속에서 빛과 신호를 발견해 내고, 나아가 그것을 정류하고 증폭함으로써 존재 자체를 완전히 바꾸어내는 작업. 이것이 문학하는 일의 암담(暗澹)이자 황홀(恍惚)이거니와, 그런 의미에서 '진공관'으로서의 이 문학의 역사는 또한 혁명의 역사다. 혁명이란 무엇인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싸움이다. 인간을 이토록 하찮게 여기는 세계에서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는 일보다 "급격"하고 "질적"으로 "새로운" 일28)이 있겠는가. 혁명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사유하고 있는 황정은 연작소설집의 제목이 '디디의 우산'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디디의 우산'이란 무엇인가.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고 아끼는 마음이다. 그런 마음의 징표이자 그런 사람의 흔적, 그리하여 이제는 그 사람의 일부가 되어버린, 사라져 버린 신성을 간직한 사물. "혁명을 거의 가능하지 않도록 하는 혁명"으로서 거대한 차벽이 발명되었다면, 이러한 야만에 저항할 수 있는 인간의 유일한 무기이자 저 불가능성을 뚫고 '혁명을 가능하게 하는 혁명'으로서 우리에게 당도한 것이 '디디의 우산'인 것이다. 어둠을 힘껏 들여다보되 자기 기도에만 얽매이지 않고29) 타인의 고통을 알아보는 능력, 사람을 가르고 막아서고 쳐내는 장벽이 아니라 서로를 잇고 더하고 감싸 안는 어둠 속의 연대. "어둠은 벨벳처럼 내려와 주변을 감싸고, 그 고치 같은 암흑 속에서 나를 또 다른 나와 타인에게 이끌어 주었다."30) 이 어둠으로부터, 어둠을 보는 눈으로부터, 어둠 속에서 어둠을 알아보고 우산을 내미는 작은 움직임으로부터 나와 당신이, 그리하여 세계가 변화한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모든 문학은 이러한 어둠의 기록이며 어둠에 대한 어둠의 투쟁이다. 카프카는 "자신의 바닥까지 파괴되었다고 느끼는 그곳에서 파괴를 가장 고귀한 창작의 가능성으로 대신하는 깊이"를 획득했다. 무엇이 이러한 전복을 가능하게 했을까. "침몰하지 않으리라는 희망, 보다 정확히 말해서 자신보다 더 빨리 침몰하여 마지막 순간 자신을 되찾으리라는 그러한 희망"은 그의 글쓰기가 '생존을 위한 투쟁'에 다름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31) 극도의 절망에서 오히려 글쓰기의 동력을 얻고 내면의 불안을 종이의 깊이 속으로 옮기고 재창조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암흑을 어둠으로 바꾼다.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를 구원했을까. 아니, 문학은 그 누구도 온전히 구원하지 못한다. 삶의 기본값은 죽음이며, 세속의 구원은 한 번으로 족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므로 그는 계속 썼다. 패배가 계속되므로 싸움도 계속될 수밖에 없다. 계속되는 싸움의 기록, 실패와, 그럼에도 반복되는 응전(應戰)의 기록, 혁명의 불가능성을 사유하면서도 그 불가능성 속에서 가능성을 발견해 내려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 이야기. "탈출이 불가능하다면 여기서 날 수밖에, 여기서 마찰하는 수밖에 없어."32)
그러나 바로 이 실패의 서사를 통해 문학은 아무도 구원하지 못하면서 모두를 구원한다. 신이 사라진 세계에서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더 이상 신성이 아니라 인성에 대한 반성이며, 전지전능한 신의 결정론이 아니라 무력한 인간들이 매 순간 치러내는 투쟁이기 때문이다. 실패할 줄 알면서도 인간은 싸우고, 싸우는 만큼 인간은 존재한다. 어쩌면 구원은 무한히 지연되면서 이미 이곳에 당도해 있는, 완성된 세계가 아니라 하나의 과정으로서만 의미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현지우현, 중묘지문'에 담긴 이상도 이러한 '과정'과 무관하지 않다. 혼재 속에서 혼재를 품고 견디되 혼재 너머를 바라보는 것이 '현지우현'이라 했다. 양가성, 불확정성에 이은 현의 운동성, 이 초월에의 지향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 유병래에 의하면 이는 "개인이 본연의 모습으로 복귀하여 도를 깨닫는 것만 아니라 이미 도를 깨달은 자가 깨닫지 못한 자들을 본연의 모습으로 복귀시켜 가는 활동"으로서, 개인적 차원에서 도를 깨닫는 체도(體道)와 사회적 차원에서 도를 구현하는 행도(行道)가 하나로 중첩된 것이다.33) 그렇다면 '현지우현' 역시 형용사이자 동사로서, 계속되는 과정이자 활동으로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깨달음과 행함이란 완성이 있을 수 없으므로, 이 미완의, 그리하여 계속 시도할 수밖에 없는 체도와 행도의 '길' 그 자체가 곧 현지우현인 것이다.
'어둠을 어둡게' 할 뿐만 아니라 '어둡게 하고, 다시 어둡게' 함으로써만 겨우 가 닿을 수 있는 중묘의 이상. 그러나 '모든 경이로움에 이르는 문'이든, '모두가 경이로움에 이르는 문'이든, 현지우현이 중묘지문이라는 것은 중묘 역시 어둠을 더 어둡게 하고, 현하고 또 현하는 그 과정 속에서만 구현되는 것임을 드러낸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현지우현이 곧 우리에게 주어진 최상의 중묘이며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인간의 모든 행함이 인간에게 주어진 인간의 유일한 구원이다.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부처가 되는 것을 미루듯이 그리하여 작가는 이 세계의 밤을 드러내기 위해 심연으로 내려간다. 이들이 곧 '궁핍한 시대의 시인'(하이데거)이자 '동시대인으로서의 시인'(아감벤)이다.

27) 레베카 솔닛, 『멀고도 가까운』, 반비, 2016, 161쪽.
28) 표준국어대사전』의 정의에 따르면, 혁명이란 "이전의 관습이나 제도, 방식 따위를 단번에 깨뜨리고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급격하게 세우는 일"이다.
29) "너는 가장 마지막에 온다. 차오르지 않는 빈 몸으로 온다." "튀어오르지 못하는 공은 구르다가도 멈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 자기 기도에 얽매이면 안 된다고. 마지막은 늘 그렇게 끝났다." 안미옥, 「빛의 역할」 부분, 『온』, 창비, 2017.
30) 레베카 솔닛, 『멀고도 가까운』, 반비, 2016, 272쪽.
31) 모리스 블랑쇼, 이달승 옮김, 『카프카에서 카프카로』, 그린비, 2013, 118~119쪽.
32) 황정은,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 『디디의 우산』, 창비, 2019, 292쪽.
33) 유병래, 앞의 논문, 105쪽.



7_ 동시대인으로서의 시인


아감벤이 니체를 경유해 말하는 '동시대성'이란 시대와 너무 일치하거나 동조하는 관계가 아니라 "거리를 두면서도 들러붙음으로써 자신의 시대와 맺는 독특한 관계"이다. 시대와 완전히 일치하는 자들, 모든 점에서 시대와 완벽히 어울리는 자들은 시대에 보내는 시선을 고정할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동시대인이 되지 못한다. 동시대인이 되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시차'와 '시대착오'가 필수적인 것이다. 늘 시대에 뒤처지거나 너무 앞서 나가는 듯한 작가야말로,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동시대인이라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어떤 '시차'이고 '시대착오'인가, 그리하여 그는 무엇을 보는가.
아감벤에게 동시대인이란 "세기의 빛에 눈멀지 않고 그 속에서 그림자의 몫, 그 내밀한 어둠을 식별하는 데 이르는 자"이자 "현재의 어둠 속에서 우리에게 도달하려 애쓰지만 그럴 수 없는 이 빛을 지각하는" 자이다. 그는 시대의 어둠에 시선을 고정하는 동시에, 우리를 향하지만 우리에게서 무한히 멀어지는 빛을 지각한다. 작가도 이러한 겹눈을 가진 자다. 동시대인이 연대기적 시간성 자체를 해체함으로써 시대의 긴박한 요청에 응답하듯이 작가 역시 "그의 긴급함, 반시대성, 시대착오 덕분에" "'너무 늦은' 형태이자 '너무 이른' 형태로, '아직 아닌' 형태이자 '이미'의 형태로 우리의 시대를 포착한다".34)
"동시대성, 즉 현재와 함께-현존함은 그것이 체험되지 않은 것에 대한 경험과 망각의 추억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드물고 어렵다."35) 그러나 문학이야말로 '아직 아닌' 것들과 '더 이상 아닌' 것들이 '이미' 함께 현존하고 있는 '동시대성'의 세계이며, '개별자의 삶의 시간'을 통해 '집단적 역사의 시간' 그 너머까지를 꿰뚫는 '시대착오'적인 투시다. 따라서 "동시대인으로서의 시인은 시간이 다시 모이는 것을 막는 자이며, 동시에 자신의 피로써 그 째진 곳을 봉합해야 한다".36) 이것이 밤이 밤을 밝히는 문학의 정치이자 윤리다.


지금, 깊은 어둠 속에 잠긴 당신.
어쩌면 생의 가장 어두운 시기를 지나고 있을 이곳의 d와 dd들, 우리 안과 밖의 그림자들, 폭력에 가까웠던 상식(常識)과 "악의처럼 드러난 오만한 선"37)에게, 무심한 이웃과 선량한 적들에게, 밤을 잊은 아침과 신성을 잃어버린 텅 빈 얼굴에게, 우리를 하찮다 말하는 대낮의 그대들에게, 자꾸만 넘어지는 혁명에게, 상처받은 마음으로도 다시 사랑하고 싸우는 당신들의 어제 오늘 내일에게,
"그리하여" 이 밤에도, 밤이 밤을 밝히기를.
한때의 승리 따위는 기나긴 패배의 역사를 장식할 뿐이라 할지라도, 오늘의 패배가 반드시 내일의 패배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인의 생활과 /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 절제(節制)여 /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 오오 나의 영감(靈感)이여",38)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우리의 밤은 그대들의 낮과 다르다. "낮을 부정하면서, 문학은 숙명으로서의 낮을 다시 세운다. 밤을 긍정하면서, 문학은 밤의 불가능성으로서의 밤을 찾는다. 이것이 문학의 발견"39)이며, 끝날 수 없는 우리의 싸움이다.

34) 아감벤, 위의 책, 77~78쪽.
35) 아감벤, 위의 책, 86쪽(역주7)에서 재인용한 「철학적 고고학」(아감벤, 『사물의 서명』)의 한 부분.
36) 아감벤, 위의 책, 74쪽.
37) 프리드리히 니체, 김정현 옮김, 『선악의 저편 · 도덕의 계보』, 책세상, 2002, 133쪽.
38) 김수영, 「봄밤」 부분, 『김수영 전집1: 시』, 민음사, 1981, 133쪽.
39) 모리스 블랑쇼, 위의 책, 52쪽.















신샛별

작가소개 / 이선우

2006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문학평론 「신화의 죽음과 소설의 탄생」으로 등단.


《문장웹진 2020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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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않(을)은 길을 향한 반유토피아적 노스탤지어 ― 전하영의 소설들 권영빈 온다 리쿠(恩田陸)의 소설 『잿빛극장』(김은하 역, 망고, 2022)은 1990년대 일본에서 실제로 있었던 동반 자살 사건에서 출발한다. 죽은 두 여성은 대학 시절 만난 친구 사이로 죽음에 이르기 전 함께 살았다는 사실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 이름도, 얼굴도 없이 단지 서로를 죽음의 의지처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특수한 관계성만 남긴 채 사라진 그들은 작가 자신이자 서술화자이기도 한 ‘나’의 마음에 왜인지 사무쳐 버린다. 그로부터 이십여 년 후, 두 여성의 이야기는 소설의 형식으로 소환되고 그들의 삶과 죽음에 존재감이 부여된다. 추리·미스터리 장르를 주축으로 하는 온다 리쿠의 소설은 한국에서도 이미 인기작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래서인지 그가 형상화하는 이 기묘하고 슬픈 ‘실화’는 독자로 하여금 이들 여성이 어떤 역사를 거쳐 동반 자살이라는 흔치 않은 비극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소상히 밝히는 데 주력할 것으로 기대하게 만든다. 그러나 소설은 죽음의 원인을 직접적으로 추적하는 대신 여성들의 삶과 죽음에 소설적 자리를 내주려는 분투 자체에 무게를 둔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주된 장치가 바로 ‘극장’이다. 『잿빛극장』은 작가가 죽은 두 여성의 이야기를 소설화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번민과, 완성된 텍스트를 토대로 이들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드는 과정을 다루는 시점을 교차해 보여준다. 그 사이사이 T와 M이라는, 익명의 두 당사자 여성 각자의 입장에서 그려지는 일상과 회고의 장면이 삽입된다. 극장이라는 장막은 사실로서의 죽음과 허구로서의 죽음 사이에서 빚어지는 재현 윤리를 과장되게 내세우거나 추상화하는 일을 경계하면서 여성들이 살았던 흔적을 희미하게나마 만들어낸다. 1990년대 사십대였던 여성들이 살아가며 겪었음 직한 가부장 이데올로기의 억압과 경력단절, 젠더화된 빈곤의 문제를 건드리면서도 그것을 죽음의 단적이고도 극적인 요인으로 지목하지 않으면서 다만 이들 여성의 시작과 끝을 지켜볼 수 있도록 하는 가변적인 무대를 만드는 것이다. 이름이나 얼굴이 아닌 이야기로 존재하게 된 두 여성은 작가와, 연극배우와, 가상의 당사자 캐릭터 주변을 선회하면서 눈치 채지 못하는 순간 잿빛의 세계로 다 같이 녹아든다. 어떤 사태가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 시작과 끝에 개입한 이야기 조각들을 수집하고 짜 맞추면서 결국에는 비가역적인 ‘한 시절’을 만들어내는 온다 리쿠 특유의 노스탤지어가 새삼 엿보이는 소설이다. 전하영의 소설을 말하려는 이 글이 그와는 세계관도, 세대도 다른 국외 작가의 소설을 거론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돌이킬 수 없는 ‘한때’를 향한 정동과 ‘극장’ 말이다. 시절에의 이끌림과 회한을 발판 삼아 작금의 사태를 해석하고 전망하려는 전하영의 소설은 노스탤지어의 분위기와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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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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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건

  • 못된낄낄이

    정말 잘 봤습니다

    • 2021-10-30 15:55:40
    못된낄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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