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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의 반란

  • 작성일 2021-12-01
  • 조회수 1,985

[현장 비평]

《문장웹진》은 다양한 시선을 통해 폭넓은 담론을 펼칠 수 있는 ‘비평의 장’을 마련하고자
2020년 진행되었던 〈본격! 비평〉 코너를 정비하여, 2021년 4월호부터 〈현장 비평〉을 선보인다.
2021년 〈현장 비평〉은 신진 문학평론가 9명이 각자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자유롭게 주제를 정해 매월 1편씩 발표된다.




누구나의 반란



김정빈




시도 소설도 평론도 아니지만 문학적인 글은 뭐라고 불러야 할까? 수필, 일기, 산문 등 여러 이름이 붙을 수 있겠으나 최근 가장 급부상한 이름은 단연 ‘에세이’일 테다. 그런데 에세이는 그 범주를 도저히 모르겠다. 시처럼 보이는 짧은 글귀도, 그림과 함께 적힌 글도, 꽤 긴 글도 전부 에세이라고 한다. 문학장이 에세이라는 부류에 주목한다면 에세이를 어디서 어디까지로 한정하고 바라보아야 하는 것인가?
만약 문인 즉, 시인이나 소설가의 손에서 탄생한 산문만을 건져낸다면, 에세이를 규명하기 위한 기준이 다른 장르적 구분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에세이는 부차적인 장르가 될 것이다. 이를테면 작가의 문학관을 조망하기 위한 부가 자료로 취급될 수 있다. 그러니 에세이라는 부류를 하나의 독립된 장르로 문학장에 소환하기 위해서는 에세이에 대한 다변적인 고찰이 먼저 필요하다.
이 글은 에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수많은 글들의 상관관계를 확인하며 에세이에 대한 고찰의 토대를 마련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첫 시작은 에세이 베스트셀러의 목록을 살피는 것으로 한다. 다른 무엇이 아닌 에세이라는 이름에서부터 출발한다면 단연 에세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이들에게 가닿고 있는 도서들을 간과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위 목록은 ‘교보문고’에서 제공하는 월간 종합 베스트셀러 순위를 기준으로, 21년 1월부터 10월까지의 에세이 베스트셀러 순위를 산출한 것이다.1) 교보문고는 오프라인 대형서점과 온라인 서점 두 분야에서 모두 가장 큰 판매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유통사이므로, 교보문고의 베스트셀러 목록을 기준으로 삼았다.2)
상위 20권의 작가들을 크게 분류하면 총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직업/경험이 독특하거나, 작가이거나, 인플루언서이거나. 찬찬히 살펴보자. 『어린이라는 세계』의 저자 김소영은 어린이 책 편집자로 10년 넘게 일하다가, 현재는 어린이 독서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떠난 후에 남겨진 것들』의 공동 저자 김새별, 전애원은 모두 유품정리사다. 이들은 직업상 겪어 왔던 독특한 경험과, 이를 바탕으로 얻은 깨달음을 에세이로 작성한 것이므로, 첫 번째 부류에 포함시킬 수 있다.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의 저자 박완서와 『지구인만큼 없어지구를 사랑할 순』의 저자 정세랑은 모두 소설가다. 『나라는 식물을 키워보기로 했다』의 작가 김은주는 10년 넘게 카피라이터로 활동하기도 했지만, 2008년 『1cm』를 시작으로 다수의 베스트셀러 에세이를 남겼으므로 에세이스트라고 지칭할 수 있겠다.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의 저자 김범석 작가 또한 의사로서 항암치료와 그에 대한 수기를 적어 책으로 펴내는 에세이스트이므로, 이 네 사람은 두 번째 부류에 포함시킬 수 있다.
『그러라 그래』의 저자 양희은은 우리에게 가수로 더 익숙하며, 『보통의 언어들』의 저자 김이나 또한 유명한 작사가다. 이 두 저자는 물론 직업적으로 독특한 경험을 이루어냈지만, 동시에 미디어에서 노출이 잦은 유명인이기도 하여 분류가 모호하다. 이런 이들을 인플루언서 중에서도 유명인으로 분류하고자 한다. 비슷한 작가로 『햇빛은 찬란하고 인생은 귀하니까요: 밀라논나 이야기』의 저자 장명숙이 있다. 장명숙은 물론 패션 바이어이자 디자이너로서 명성을 쌓았지만, ‘밀라논나’라는 이름으로 활동 중인 유튜버이기도 하다. 유튜버로서 쌓은 자신의 브랜드를 적극 활용하여 출판하였지만, 유튜브에 게시된 영상콘텐츠 내용과 책의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다. 따라서 함께 유명인으로 분류하고자 한다.
이외의 저자는 모두 소셜미디어와 유튜브에서 발표한 글을 엮어 책으로 출판한, ‘인플루언서3) 작가’로 분류할 수 있다. 『작은 별이지만 빛나고 있어』와 『안녕, 소중한 사람』의 경우 인스타그램 팔로워 24.9만 명에 이르는 ‘책읽어주는 남자’ 채널에서 운영하는 ‘북로망스’ 출판사에서 출간했다. 소윤 작가의 경우 공개된 SNS는 없으나, “책 읽어주는 남자” 채널에서 홍보를 도맡아했다는 점에서 인플루언서 작가와 결이 같은 것으로 보았다. 정한경 작가의 인스타그램은 1.8만 명의 팔로워를 보유하고 있다. 『좋은 사람에게만 좋은 사람이면 돼』의 저자 김재식은 인스타그램 5.5만 명, 페이스북 63만 명의 팔로워를 보유하고 있으며, 『잘했고 잘하고 있고 잘 될 것이다』의 저자 정영욱은 인스타그램 팔로워 수가 14.8만 명이다. 『모든 날에 모든 순간에 위로를 보낸다』의 저자 글배우는 인스타그램 팔로워 수가 26만 명에 이른다.


1) 교보문고에서는 ‘영업점과 인터넷에서 도서와 eBook을 합산하여 가장 많이 판매된’ 순서로 베스트셀러 순위를 산출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각 도서별 정확한 판매량은 확인할 수가 없어, 월간 베스트셀러로 선정된 20권을 순위에 따라 점수를 매긴 후(1위 20점, 2위 19점 … 20위 1점) 1월부터 10월까지 점수를 합산하여 점수가 높은 순서대로 나열했다.
2) 『2020년도 하반기 KPIPA 출판산업 동향 – 통계 및 심층분석』,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2021.
3) 인플루언서라는 명칭은 대개 소셜미디어(블로그,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트위터 등)와 유튜브를 통해 다른 이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을 칭한다. 이 글에서는 특정한 페르소나를 지니고 소셜미디어 계정을 운영하는 개인 또는 단체를 모두 아울러 인플루언서라고 지칭하며, TV를 포함한 매스미디어에서 먼저 출연하면서 팔로워를 얻은 셀럽과 구분하고자 한다. 또한 특정 주제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크리에이터’를 포함한 상위 개념으로 보았다.


『그게 너였으면 좋겠다』의 일홍 작가는 일러스트레이터이며, 6.4만 명의 팔로워를 보유하고 있는 인스타그램에 자신의 작업물을 업로드한다.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의 저자 김수현 또한 일러스트레이터이며, 인스타그램 팔로워 수는 2.2만 명이다. 두 저자는 일러스트레이터로 분류하지만, 사실 일러스트와 함께 짧은 글을 업로드하며, 글과 그림을 모두 엮어 단행본으로 출판하였다.
『오늘은 이만 쉴게요』의 저자 손힘찬은 유튜브와 강연으로도 활동하고 있지만, 인스타그래머 팔로워 수가 24.9만 명이다. 『인생은 실전이다』의 저자 주언규, 신영준은 소셜미디어 활동도 활발하지만 각각 유튜버로 더 유명한데, 136만 명의 구독자를 지니고 있는 ‘체인지그라운드’와 164만 명의 구독자를 지니고 있는 ‘신사임당’이다. 이들은 유튜브 콘텐츠에서 다룬 내용과 책의 내용이 대부분 일치한다. 물론 영상과 텍스트라는 매체상의 차이점이 있으나, 내용상의 차이는 적으므로 인플루언서 중에서 작가로 분류하고자 한다.
『50 홍정욱 에세이』의 저자 홍정욱은 『7막 7장』이라는 책을 출간한 작가로서 더욱 유명한데, 헤럴드미디어의 전 회장 출신이자 현재 푸드 기업을 운영 중인 기업인으로 볼 수 있으나, 현재 다루고 있는 책은 그가 SNS에 남긴 글귀에 이야기를 덧붙여 출판한 책이므로 인플루언서로 분류했다. 마지막으로 『마음의 주인』의 저자 이기주는 인스타그램 팔로워 4.4만 명을 보유한 인플루언서이자 SNS 글귀 출판 신드롬의 근원이라고 봐도 무방할 『언어의 온도』의 저자다.
다시 정리하자면, 현재 에세이라는 이름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도서들은 직업이 독특한 책 2권, 작가의 책 4권, 인플루언서의 책 15권으로 분류할 수 있다.


#에세이
: 서점에서 이름이 불릴 때


에세이라는 장르가 최근에야 급부상한 것은 아니다. 이전부터 에세이는 꾸준히 읽혀 왔고, 사랑받아 왔다. 다만 시인, 소설가, 전문적인 수필가와 같이 꾸준히 책을 쓰는 작가가 아닌 일반인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로 책을 낸다면 큰 자랑이자 업적으로 간주하였는데, 이는 책을 출판한다는 행위 자체를 높이 산다기보다 에세이가 자서전이나 회고록, 수기로서의 성격이 강하였기 때문이다. 학업에 부진하던 시절을 극복하고 하버드/서울대 진학에 성공했다거나, 가난한 집안 배경을 극복하고 자수성가했다거나, 몇 번의 위기를 넘기고 이름 있는 기업을 세웠다는 등 에세이라는 장르는 유명인이거나, 특별한 경험을 한 이들이 자신의 성취를 적는 것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전부터 쌓이던 자기계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본격적으로 “에세이 열풍”이라는 말이 사용된 것은 2010년대부터다.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 혜민 스님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등 삶의 깨달음을 주는 에세이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당시 에세이는 ‘멘토’, ‘힐링’이라는 단어와 연관되어 위로와 격려를 해주는 산문으로 여겨지거나, 강연이나 방송 등을 통해 알려진 멘토들의 생각을 더 알고 싶어서 책까지 사보는 경우로 해석되기도 하였다. 2010년대 중반에는 이병률 시인을 필두로 자신의 여행기를 책으로 엮어 발표하며 여행 에세이가 강세를 보이기도 했다.
현재와 유사한 경향으로 에세이를 향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은 2018년이다. 당해 3월, 인터파크도서에서는 전해 대비 힐링 에세이 판매량이 124% 증가했으며,4) 교보문고는 123.4%, 예스 24는 106.3%5) 증가했다고 밝혔다.6) 이토록 에세이의 판매량을 증대시킨 가장 대표적인 책은 『곰돌이 푸, 행복은 매일 있어』와 소셜미디어 인기 작가 하태완의 『모든 순간이 너였다』이다.
이전에도 『언어의 온도』 등 SNS를 통해 홍보가 된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른 적도 있었지만, 2018년을 기점으로 소셜미디어의 인기 작가들이 출판계 에세이 시장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이때 시로도 소설로도 분류가 어려웠던 소셜미디어의 감성글은 책의 물성을 지니게 되면서 ‘에세이’라는 이름을 택했다.


지면이 청탁과 투고로만 채워질 때, 문학을 하기 위해서는 일정 수준의 인증 또는 인지도가 불가피했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자는 모르니까 청탁을 할 수 없고 눈에 띄지 않는 원고는 선택받지 못했다. 투고된 원고가 수많은 원고 중에서 스스로 그 가치를 밝혀야 하니 특수한 지점이 필요했다. 따라서 에세이가 특정 분야의 유명인사에게 청탁하거나, 특수한 직업, 경험을 가진 자들의 것으로 여기는 것 또한 당연했다.
그런데 글을 공개할 수 있는 가장 쉬운 플랫폼이 열리자 양상이 달라진 것이다. 소셜미디어는 채널마다 글자 수 제한이나, 채널의 특성에 따라 적합한 글의 방향성은 달랐지만, 기본적으로 자유로운 발화가 가능한 공간이다. 글자 수 제한은 형식상의 제한이며, 필요하다면 여러 게시글을 한 번에 발행하면서 긴 글을 적을 수 있었다.
소셜미디어라는 공간 안에서 사람들은 자기 생각을 글로 말로 표현했으며 이들 중 일부는 많은 지지를 얻어 인플루언서가 되었다. 그리고 인플루언서 중 일부는 소셜미디어에서 이루어진 발화를 그대로 출판하거나, 그 발화를 바탕으로 청탁을 받아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자기발화가 넘치는 시대가 도래했으니 에세이에 관한 버즈량이 증가하는 것 또한 당연한 수순인 듯하다. 에세이로 진입할 수 있는 ‘유명인’의 범위가 국민 대다수에게 알려진 연예인을 넘어 ‘인플루언서’까지 넓어진 것이다.


4) 2/1~3/8 기준(출처 : 뉴시스 기사 “서점가도 ‘소확행’...힐링 에세이 열풍”, 2018-03-11)
5) 1/30~3/7 기준, 명상·치유 에세이 분야
6) 예스24의 통계에 따르면, 연령별 에세이 구매율은 30대 구매가 32.1%로 가장 많았다. 이어 20대와 40대가 26.6%로 같았으며, 50대(10.9%) 순이었다. 연령별로는 여성 구매가 72.6%로 남성 구매(27.4%)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맥락 아래서 인플루언서들의 글은 이전의 에세이와 연결할 수 있을 듯하다. ‘멘토’에게 가르침을 받고 그의 태도를 따르고자 하던 ‘멘티’들은 오늘날 ‘팔로워’나 ‘구독자’로 이해될 수 있다. 인플루언서의 생각을 지지하고 따르는 이들이 곧 팔로워나 구독자라고 간주하면 말이다.
그러나 소셜미디어의 감성글이 에세이 장르로 편입되고, 출판시장에서 에세이라는 장르를 견인하는 현상에는 새로이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금껏 에세이가 힐링, 명상, 독서법 등의 단어와 엮여 깨달음이나 교훈으로 인도했다면, 감성글은 교훈보다는 날것에 가까운 감정에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플루언서
: 평범과 공감의 상징?


오늘날 유튜버가 방송에 출연하고, 새로 데뷔한 신인 아이돌보다 백만 유튜버가 더 유명한 것은 흔한 일이기에, 인플루언서와 유명인의 구분이 모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비범함을 기반으로 명성을 얻던 이전의 유명인과는 다르게, 인플루언서는 다름 아닌 ‘평범함’을 내세워 지지를 얻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인플루언서의 탄생 배경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단연 소셜미디어다. 한국에서 주로 사용되는 소셜미디어로는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스토리, 네이버 밴드 정도가 있고, 가장 인기 있는 소셜미디어로는 단연 유튜브가 있다. 이들 플랫폼은 누구나 플랫폼 내부에서 발화가 가능하기에 창작자와 향유자의 구분이 없다. 모두가 창작자이며 모두가 향유자가 될 수 있다. 사용자는 해당 플랫폼에 가입하고 계정을 만드는 순간, 콘텐츠를 향유할 기회와 동시에 콘텐츠를 만들어 공개할 기회도 주어진다. 경유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발달하는 플랫폼의 특성상, 플랫폼은 사용자가 더 오래 머무를 수 있도록 창작과 향유의 경계를 적극적으로 지우며 사용자의 참여를 유도하고 있다. 아주 간단한 예로, 플랫폼의 가장 첫 화면(홈화면)에서 반드시 콘텐츠 창작을 유도하는 아이콘이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출몰한 ‘인플루언서’는 기반 자체가 어떤 재능이나 전문성에 근거한 비범함이 아니라 보편성에서 비롯된다.
인플루언서란 그 이름처럼 타인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존재다. 그러나 영향력의 기반이 매스미디어에서 플랫폼으로 변함에 따라, 영향력의 방식은 분명 이전의 연예인과는 분명 차이가 있다. 이전까지는 비범한 한 개인이 새로운 방식을 개척해 나가면 매스미디어를 통해 보편성을 보유한 대중에게 소개되고, 대중이 이를 따라 하는 방식으로 유행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현재는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로 유행이 시작되는 경향이 크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스스로 꾸민 다이어리를 들고 미디어에 노출되어서 ‘다꾸(다이어리 꾸미기)’가 유행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이 동시다발로 ‘다꾸’에 대한 발화를 했기에 그 버즈량이 늘어나 유행이 시작된다. 그리고 수많은 다꾸러(다이어리를 꾸미는 사람) 중에서 특히 주목받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단지 다이어리 꾸미기를 좋아하는 사람일 뿐인데, 제각각의 이유로 특정 시기에 주목받으며 팔로워/구독자 수가 늘어나게 되면서 인플루언서가 된다.
또는, 근원을 모르는 유행이 생기기도 한다. 최근 초등학생 사이에서 ‘어쩔티비’와 같이 ‘어쩔’ 뒤에 가전제품을 붙여 말하는 것이 유행이라는 소식이 소셜미디어를 중심으로 퍼졌다. 그러나 실제 ‘어쩔티비’를 사용하는 초등학생은 많지 않았고 초등학생을 따라 하고자 하는 움직임만 거대해진 경우를 예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플루언서는 유행의 선구자가 아닌, 기원이 불분명한 유행의 흐름에서 주목을 많이 받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참여를 유도하는 인싸 논리와 챌린지의 유행에서 볼 수 있듯 플랫폼에서는 누구나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콘텐츠가 각광받으며, 인플루언서 또한 ‘누구나’에 기반하고 있다. 그렇기에 소셜미디어의 발화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공감”이다.


지나간 일에 대한 미련이
대부분 가슴 아픈 이유는,


지금 자신의 상황에 비해
그때의 기억이 너무도 아름답기 때문이야


앞으로 만들어갈 행복만 생각해
지난 일은 지난 일일 뿐이야7)


하태완의 글은 이전까지 통용되던 문학성에 비하면 분명 낯선 글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익숙하고 기시감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태완의 글을 기존 문학 장르인 시로 편입시키기가 주저되는 이유는 섣부른 일반화에 있다. 문학 작품은 다른 이들이 발견하지 못했거나, 소외된 지점에 주목하여 언어적 성취를 이루는 것을 미덕으로 삼았다. 서사의 형태로 보여주든, 잘 설계된 배치로 고정하든 방식은 모두 달라도 보여주고자 하는 바 안에 인간 본연을 향한 가치가 있음이 함의되어 있다. 문학에 해석이 필요하다면 저마다 가치로 다가가는 길을 제시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하태완의 글은 문학에서 통용되던 방식과는 달랐다. 「지난 일일 뿐이야」에서는 다소 직접적인 서술로 미련이라는 감정에 대해 단언하며, 이에 대한 부가 설명은 없다. 그리고 그 단언에서 비롯해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도 탐구와 논의 없이 바로 제시한다.
이 작품이 향유되는 방식을 살펴보면, 향유자는 제시된 명제를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공감하며 이로부터 위로를 얻는다. 가령, 더 용기를 내서 도전하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은 ‘그때의 기억이 아름답다’는 설명에 해당하지 않음에도, 향유자는 이러한 반박을 제시하지 않는다. 제시된 ‘미련’이라는 단어에, 즐겁고 행복했던 시간으로 되돌리고 싶다는 마음이라고 스스로 해석을 덧붙이며 이해한다.


7) 하태완, 「지난 일일 뿐이야」, 『모든 순간이 너였다』, 위즈덤하우스, 2018, 91쪽.



제시된 명제-그때의 기억이 아름다웠다는 것을 인정하고 앞으로의 행복을 생각할 것-이 지금까지 통용되던 상식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거부감 없는 명제이며 지금 바로 나에게 적용 가능한 / 적용하고 싶은 방식이기 때문이다. 앞선 문장을 인플루언서 논리로 다시 옮기면 이렇다. [오늘날 많은 이들에게 제시되고 공감을 얻고 있는 감정처리 방식이 있으며, 이 감정의 유행을 인플루언서가 언급할 때, 팔로워들은 다시 공감하고 이를 따르고 싶어 한다.]
독자에게 주어진 고민과 사유의 영역이 배제되었다는 점에서 소셜미디어 감성글이 고전적인 문학성에 부합하는지는 추가적인 검토가 필요하겠다. 그러나 감성글은 소소한 공감과 재확인의 방식으로 글을 읽고 향유가 가능함을 증명했다. 그 증명의 방식이 다름 아닌 자신의 흥행과 전파임을 고려할 때, 지금껏 살펴 온 장황하고 당연한 이야기를 거칠게 요약해 보자면 오늘날 에세이라는 이름 아래 가장 많이 읽히는 글이 전형적인 인플루언서의 발화 방식을 따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인플루언서의 방식으로 쓰인 에세이는 우리에게 어떤 시사점을 주는가?


#일상
: 공개와 내밀의 결합


연예인과 인플루언서의 두드러지는 차이점은 일상을 공유한다는 점이다. 일상은 공유하기 비교적 용이한 주제이자 동시에 따라 할 수 있는, 소소한 공감을 갖춘 콘텐츠로서 플랫폼에서 적극적으로 유통되기 좋은 요건을 갖추었다. 그런데 일상이라는 주제는 너무도 유추 가능하면서, 너무도 환상적이지 않은가.
일상을 기록한 영상인 v-log 콘텐츠들은 유튜브에서 독특한 흐름을 구축하고 있다. 몇몇 콘텐츠들이 자극적인 제목으로 궁금증을 유발하여 클릭을 유도하는 낚시성 썸네일인 반면, v-log 콘텐츠들은 자신을 ‘직장인’, ‘주부’, ‘대학생’ ‘카페 알바생’ 등 가장 보편적인 수식어로 설명하는 제목을 사용한다. 심지어 썸네일에 주요 장면을 4분할로 끼워 넣기도 한다. 제목과 썸네일만 보면 사실상 영상의 주요 내용을 다 본 셈이다. 그럼에도 콘텐츠는 재생되고, 사람들은 단순히 밥을 먹거나 음식을 하고, 장을 보고 집 안 청소를 할 뿐인 일과를 꾸준히 시청한다.
너무도 잘 정돈된 일상을 보며 향유자들은 같은 ‘직장인’, ‘주부’, ‘대학생’으로서 그들처럼 자신의 일상을 잘 가꿔 나가고 싶다는 욕망을 품게 된다. 그들이 입은 옷, 사용하는 물건에 대해 정보를 요구하고 살림이나 공부와 관련된 ‘꿀팁’을 얻기도 한다. 그러나 인플루언서가 v-log를 통해, 사진과 글로 공개하는 일상은 사실 아주 잘 꾸며진 일상이다. 밥을 차려 먹을 시간적 여유, 예쁜 식기류를 준비할 경제적 여유가 없는 상황에서 그들의 일상은 사실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부지런히 투자해야만 이룰 수 있는 담백한 사건이다.
이때 인플루언서는 표준성을 주장하며 팔로워들에게 공감을 유도하지만 이미 주목을 받았다는 점에서 ‘평범함’의 범위를 넘어섰다는 모순이 발생한다. 공감과 친근감을 느껴 인플루언서를 지지하기에, 인플루언서에게 공감을 잃었을 때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기 쉽다. 그래서 인플루언서들은 자신의 일상과 생각을 공개할 때,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요소와 얻지 못하는 요소 사이를 잘 가름하며 공개해야 한다. 자기 자신에 대해 자신이 의도하는 특정 이미지를 향해 잘 편집하며 셀프 브랜딩을 행하는 셈이다. 온전한 모습도 아니고 완전한 거짓은 아니지만, 의도한 대로 자신을 편집하여 보여주는 방식을 ‘셀프 브랜딩’이라 한다면, 셀프 브랜딩이야말로 잘 된 예와 그렇지 않은 예의 차이만 있을 뿐, 오늘날 자기발화의 디폴트값이 아닐까.


에세이와 소설의 가장 큰 차이점은 허구성에 있다. 허구성에 기반하여 꾸며낸 이야기를 적은 소설은 이입의 방식으로 공감을 유도한다. 독자를 특정 상황으로 초대해 그 상황 속에서의 인물과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도록 질문한다. 독자의 선택과 인물의 선택이 같을 경우는 인물의 대사에 공감할 수도 있고, 선택이 다를 경우에도 인물의 성격에 따라 개연성을 갖췄다면 이입이 가능하다. 반면 에세이는 진실성에 기반한다. 진실된 경험만 적어 두며, 진실성에 기반했기에 개연성은 다소 결여되어도 좋다. 오히려 개연성이 없는 의외의 일일수록 흥미가 생긴다.
그런데 오늘날 그럴듯한 허구는 만들어내기 너무 쉽다. 어떨 땐 불가피하게 생성된다. 커뮤니케이션이 대면보다는 주로 사진과 글, 음성, 영상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이 소스들은 편집하기가 너무 쉽다. 당장 사진을 찍을 때도 얼굴형이 바뀐 상태가 원본으로 저장되고, 잠옷 바지를 입은 채 가상 배경으로 화상회의에 참석하는 일도 이미 익숙하다. 진실에 기반하더라도 어떻게 편집하는지에 따라 허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더하여 정보가 너무 많아 정보의 진실성을 판별하기 어려운 상황은 날이 갈수록 심해진다. ‘선동과 날조’라는 말을 유행어처럼 사용할 만큼 교묘히 편집된 거짓 정보와, 이에 현혹되는 이들이 많아졌다.
물론 이 때문에 허구로 꾸며내는 세상에 피로감을 느낀 이들이 실제 삶, 실제 사람들의 이야기에 환호하고 당사자의 발화로 실태를 확인하고자 하는 욕망이 발현될 수도 있다. 인터뷰의 대상이 연예인에서 일반인으로 옮겨가고, 판에 박힌 질문에서 각자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는 질문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면 요즘 사회에서는 실제 삶을 확인하고, 진실된 대화에 대한 열망이 있는 듯하다. 이런 배경에서 진실성에 기반한 에세이가 주목받는 흐름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 자기발화의 디폴트값이 어쩔 수 없는 왜곡이라면, 진실성의 개념은 사뭇 달라진다.
에세이는 ‘나’를 담아야 한다. 기본적으로 ‘나’의 생각, 경험을 기록한 글이기에 그렇지만, 수기에 가까운 에세이는 특수한 일이 실제로 벌어졌음을 증명하기 위해 ‘나’를 드러낼 수밖에 없을 때도 있다. 자신이 겪은 일화, 자신의 일상에서 출발하여 생각을 늘어놓는다면, 더욱 자신을 내밀하게 드러내게 된다. 그러나 에세이는 내밀한 기록임과 동시에 공개되는 글이다. 에세이라는 이름 대신에 일기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보자. 어릴 적 적었던 나에 대해 솔직하게 모두 적어냈던 글을 떠올려 보자. 일기라는 말은 어쩐지 비밀스러움이 느껴진다.
공개를 염두에 두지 않고 쓴 일기는 불가침의 영역이다. 어린이들에게 일기 교환은 친밀함과 신뢰의 가장 확실한 증거다. 일기를 함부로 타인에게 보여주지 않는 이유는 당연하다. 일기에 ‘나’를 너무 많이 담았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드러낼 수 있는 ‘나’의 영역은 한정적이다. 사회적으로 허용된 범위 내에서, 또 지금까지와 앞으로 내가 보여주고자 하는 방향을 고려하여 공개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공개 일기로서의 에세이는, 공개 가능한 비밀만을 적은 비밀이다. 타인에게 공개될 수 있도록 꾸며낸 ‘나’만이 공개되며, 에세이를 쓰는 주체와 에세이에 담긴 객체 사이의 간극이 존재한다. 물론 공개 가능한 비밀은 사실 비밀이 아니다. 타인에게 읽히고 싶은 모습만 담는다면, 내가 내 이야기를 담는다는 의의를 잃게 된다. 따라서 에세이를 쓰는 이들은 실제 나와 공개 가능한 나 사이를 잘 가름해 가며 적절히 조정하며 자신을 글에 담는다. 잘 정돈되었지만 공감을 잃지 않을 수준의 일상만 공유하는 인플루언서와, 진실성에 기반하였으나 검열하여 정리된 모습을 보여줄 수밖에 없는 에세이 작가는 서로 닮아 있다.


#형식
: 새로운 자기발화의 형식


그렇다면 다시, 자신의 내밀함을 공개하는 인플루언서의 v-log 콘텐츠를 살펴보자. 어차피 v-log는 어느 정도의 꾸밈은 있다. 아침에 일어났다가 카메라를 세팅하고 다시 침대에 누워 일어나는 척을 한다든가, 아니면 카메라에 담기지 않은 하루쯤은 늦잠을 자고 끼니를 대충 챙긴 적이 있을 테다. 또, 일상을 주제로 하기 때문에 영상의 내용이 획기적으로 독특하거나 차별되지도 않는다. 비슷한 내용의 영상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들을 따라 하고 싶다는 욕망을 넘어선 무언가가 v-log를 계속 시청하게 만들고 있다.
어쩌면 v-log의 시청 원리는 시간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그저 밥 잘 해먹고, 잘 청소하고 딱 하루치만큼만 부지런한 모습을 보는 일은, 그 모습이 어떤 내용인지도 중요하겠지만 그 모습을 보고 있다는 행위 자체가 중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똑같이 어떤 문학 작품은, 그 작품의 내용만큼이나 다만 작품을 읽는 시간 자체가 중요할지도 모르겠M다. 자극적이지 않고, 삼삼한 문장들을 한 줄 한 줄 타고 내려오는 시간 자체로.
내용보다 글이라는 형식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허용할 때, 에세이의 발화 주체가 누구인지, 얼마나 진실성에 기반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인생의 하이라이트만 모아 공유한다는 정상참작 아래서,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담아야 하는 에세이는 극단적으로 자신이 사라지고 누구나 손쉽게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공감성 단상으로, 미문 모음집으로 확장될 수 있는 셈이다. 더 이상 오로지 진실만을 적은 것도 아닌, 허구를 전제하지도 않은, 의식의 흐름대로인지 의식적으로 문장의 순서를 가다듬었는지를 알 수 없는 자유로운 형식의 글쓰기가 가능해진다. 다만 한 문장 한 문장에 기초해 한 편의 글이 완성된다는, 글쓰기와 읽기의 가장 기본만 남아 있게 된다.
그러니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에세이 장르의 차원이 높은 자유도는 인플루언서의 얼굴에서 비롯되었다. 에세이라는 장르를 문학장 안으로 소환할 때, 인플루언서라는 오늘날의 자기발화 방식이 어떻게 쓰기와 읽기에 영향을 끼치는지 확인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김정빈
작가소개 / 김정빈

2020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글을 발표하기 시작했습니다.


《문장웹진 2021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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