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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력의 경제학

  • 작성일 2022-02-01
  • 조회수 5,110

[현장 비평]

《문장웹진》은 다양한 시선을 통해 폭넓은 담론을 펼칠 수 있는 ‘비평의 장’을 마련하고자
2020년 진행되었던 〈본격! 비평〉 코너를 정비하여, 2021년 4월호부터 〈현장 비평〉을 선보인다.
2022년 〈현장 비평〉은 신진 문학평론가 12명이 각자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자유롭게 주제를 정해 매월 1편씩 발표된다.



매력의 경제학



이희우




0.



글을 시작할 때 종종 어떤 선문답이 떠올라 망설이게 된다. 그 선문답의 내용은 이렇다. 한 스승이 제자들에게 네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 사람은 일하고 있고, 한 사람은 쉬고 있고, 한 사람은 여행을 갔고, 한 사람은 공부하고 있다. 네 사람의 차이를 충분히 설명한 다음 스승이 묻는다. “이 중에 돈 욕심이 가장 많은 사람이 누굴까?” 질문에 대한 선문답식 정답은, 질문을 던진 바로 그 스승이라는 것이다. 그는 네 사람의 모든 행적을 돈과 관련된 것으로 보고 있고, 또 질문함으로써 제자들이 상황의 모든 요소를 돈과 관련된 것으로 보게끔 부추기기 때문이다. 이 선문답은 비판적 사유가 자신이 비판하는 것에 얽매이는 방식을 보여준다.
이 선문답 때문에 ‘매력의 경제’를 말하기에 앞서 고민이 되었다. 동시대 문화에 매력의 빈부격차를 조장하는 논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옳을까? 우리에게 어떤 종류의 비통함을 주입하는 논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머릿속에 한 번 떠오른 이후로 이 생각은 스스로에 대한 의심을 낳았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야말로 매력의 불공평함에 가장 집착하는 사람이 아닐까?
하지만 매력의 경제라는 문제를 말하지 않고 건너뛰면, 동시대 문화에 설명되지 않는 것이 너무 많아 보였다. 그중 하나는 윤리적 판단, 미적 판단, 정치적 판단을 카레에 들어가는 구황작물처럼 한데 뒤섞는 문화적 경향이다. 잘 알려져 있듯 윤리와 미학은 칸트가 『실천이성비판』과 『판단력 비판』에서 따로따로 다룬 문제다. 칸트는 인식의 한계를 정한 것과 마찬가지로 윤리와 취미비판의 한계를 정하려고 했는데, 이것은 각각 영역의 자율성에 관한 문제이기도 했다. 가령 행위는 미적 판단이나 다른 이해 관심을 배제할 때만 진정으로 윤리적인 행위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아름다움은 도덕적 판단이나 이해 관심을 배제할 때만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일 수 있다. 즉 예술작품은 도덕의 눈치를 보거나 다른 이해 관심을 추구하면 아름답지 않다. 이것이 ‘무관심한 관심’이 의미하는 것이었다. 지금껏 수많은 이가 이러한 형식주의적 분리 혹은 자율성의 개념을 공격해 왔다. 사회학자들은 취향이나 아름다움에 대한 정의 역시 사회 구조적·이데올로기적 산물이므로, 아름다움에 관한 판단에는 당연히 윤리적·정치적 문제가 개입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정치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말할 수 있다. 정치란 감수성을 조직하고 감정을 분배하는 문제이므로, 혹은 정치적인 것과 정치적이지 않은 것을 가르는 ‘감각의 나눔’이야말로 정치적인 문제이므로, 정치적 판단에는 윤리적·미학적 문제가 개입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최근에 드는 생각은 칸트식 분리가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라 불가능해졌다는 것이다. 형식주의적 분리를 생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미적 판단과 윤리적 판단 그리고 정치적 판단이 뒤섞여 있다. 단순한 예를 하나 들자면, SNS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예의 없거나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언행을 하는 사람을 보고 종종 ‘미개하다’, ‘빻았다’라고 하는데, 이것은 2010년대 중반부터 특히 두드러지게 된 현상이다. ‘미개하다’는 말은 문화적 우열에 관한 판단을 함유한다. 이것은 개발된 것이 곧 윤리적이거나 예의 바른 것이고, 미개발된 것은 비윤리적이고 예의 없다는 식의 잘못된―그러나 점점 더 완고해지고 있는―일방향성을 전제한다. ‘빻았다’는 말은 2016년 이전에는 남초 커뮤니티에서 (특히 여성의) 못생긴 얼굴을 비하하는 비속어로 사용되었는데, 2016년쯤에 (특히 남성의) 올바르지 않은 언행을 공격하는 말로 전유되었다. 이런 전유의 효력을 평가하는 것과 미적·윤리적·정치적 판단을 뒤섞는 일의 부작용을 지적하는 것이 별개의 일로 여겨질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미적 판단과 윤리적 판단의 야합은 최종적으로 모든 것을 매력의 서열 속에서 보게 한다. 이 서열은 물론 주관적이고 다원적인 서열이다. 그렇긴 해도 윤리적이지 못한 것에 대한 반감이 못난 것, 가난한 것, 후진적인 것, 촌스러운 것에 관한 멸시와 착종(錯綜)되는 경향은 점점 더 일반화되어 가고 있다. 실로 최근 한국의 문화적 갈등은, 자신의 적이 얼마나 매력 없는지를 조롱하는 전략을 다방면으로 발전시켜 왔지 않은가? 상황이 이렇기 때문에 윤리와 미학을 넘나드는 포괄적인 사유가 요구된다는 생각도 맞지만, 이런저런 대상이나 현상을 평가하는 것보다는, 큰 틀에서 윤리적 판단과 미적 판단이 뒤섞일 수밖에 없는 문화적 논리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내가 ‘매력의 경제학’이라는 말을 공론장에 제출하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된 맥락이다. 아직은 근거가 부족한 가설에 불과하긴 하지만 말이다.
영화 〈기생충〉(2020)에서 주인공 기택은 경제적 불평등이 있다는 사실 자체에는 특별히 반응하지 않는다. 다른 가족이 자신의 가족보다 훨씬 잘산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주어진 상황에 적절한 태도를 선택하면서 살아가는 듯하다. 그가 심각한 상처를 받고 충동에 휩쓸리는 것은 계급적 차이가 ‘냄새’라는 감각적 문제로 번역되기 때문이다. 그런 번역이 있기 전에는 기택도, 그를 지켜보는 관객도 불평등의 의미를 완전히 알지 못한다. 많은 학자가 동시대의 ‘젊은 세대’가 차별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세대라고 말했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괴물이 된 20대의 자화상』(오찬호, 2013) 같은 책도 있지 않았는가. 확실히 이런 세대론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계급적 차이가 ‘냄새’와 같은 감각적 차원의 일로 번역되면 여전히 충격적인 의미를 갖는다. 어쩌면 우리는 불평등이나 계급성이라는 추상적 사실보다는 감각적 번역에 가장 민감한 세대일 것이다. 매력과는 다른 맥락이긴 하지만, 오늘날 문제가 되는 ‘공정/불공정’ 역시 평등/불평등의 감각 가능한 범위를 표시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나 매력의 불평등이 단지 경제적 불평등의 감각적 효과인 것만은 아니다. 경제적 불평등과 매력의 불평등 사이에는 오차를 발생시키는 모호함이 있다(돈이 많아도 매력적이지 않을 수 있는 것처럼). 이러한 모호함이 없으면 매력의 경제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고, 매력도 갈급한 욕망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매력은 몸과 깊이 연루되는데, 매력이 한 사람을 신체적 기호들(몸짓, 냄새, 말투, 옷차림, 제스처, 예절, 분위기 등)의 조합(assemblage)으로 파악하게 하기 때문이다. 매력의 경제는 이 기호들의 의미와 위상에 관여한다. 이 경제가 절대적인 것은 전혀 아니지만, 매력의 불평등은 돈의 불평등보다 종종 더 치명적인 상처를 준다. 신체나 인격에 대한 모욕은 경제적 상황에 대한 모욕보다 훨씬 직접적인 공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력의 경제는 정동과 윤리, 미학과 정치, 재현/대표(representation)와 배움의 문제를 포괄하지만, 내 생각엔 특히 장르와 삶의 관계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1.


이 글에서는 매력의 경제와 연결 지어 손보미와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을 비교해 보려 한다. 하지만 소설들을 다루기 전에, 이 글의 주장이 뜬금없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도록 꼭 인용하고 넘어가야 하는 텍스트가 있다. 철학자 질 들뢰즈와 클레르 파르네의 대담 일부인데, 매력을 비평적 개념으로 만들기 위해 중요한 텍스트다.


사람들은 항상 메이저리티의 미래를 생각합니다(“내가 위대한 사람이 된다면, 내가 권력을 갖게 된다면……”). 하지만 문제는 ‘마이너리티-되기’입니다. 즉 문제는 어린이·미치광이·여자·동물·말더듬이·이방인인 척하거나, 흉내 내거나, 그들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들로 생성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힘, 새로운 무언가를 발명하기 위해서 말이죠.


삶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에는 일종의 서툶, 병약함, 허약한 체질, 치명적인 말더듬 같은 것이 있는데, 이런 것들이 혹자에게는 매력이 됩니다. 스타일이 글쓰기의 원천이듯이, 매력은 삶의 원천입니다. 삶이란 당신의 역사가 아닙니다. 매력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삶도 없습니다. 그들은 송장과 같습니다. 그러나 매력은 결코 사람/인격personne이 아닙니다. 매력은 사람을 수많은 기호로 파악하게 하고, 그런 조합을 이끌어낸 독특한 기회로 파악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매력은 필연적으로 이기는 주사위 던지기입니다.1)



흔히 ‘반전 매력’을 말할 때와 마찬가지로, 들뢰즈에게도 매력의 핵심은 가치의 전환이다. 즉 일반적인 관점에서 결점인 특징도 독특한 조합 속에서는 강점으로 전환된다. 아니 바로 그 약점 때문에 누군가는 매력적으로 된다. 이처럼 놀라운 전환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들뢰즈에게 창조적 글쓰기와 삶의 역량은 동일하다. 매력은 기호를 사유화(私有化)할 수 있는 역량, 혹은 들뢰즈식으로 말해서 ‘가치를 주관화’할 수 있는 역량이다. 그리고 들뢰즈에게 예술은 가치를 주관화하는 역량 그 자체다.
삶의 원천으로서 매력을 글쓰기의 문제와 연결 짓는 것은 아름다운 발상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정확히 들뢰즈적인 의미의 매력이 동시대 문화의 재현 논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가령 인스타그램은 사람을 수많은 기호로 파악하게 하고, 그런 조합을 이끌어낸 독특한 장르로 파악하게 한다. 기호가 조합되는 특정한 방식을 ‘장르’라고 부른다면 그렇다. 오늘날 매력이 자산이 된다는 말은 전혀 은유가 아니다. 높은 팔로워 수를 돈벌이 수단으로 삼는 인플루언서가 아니더라도 예술가, 가게 주인, 스타트업 창업가, 정치인, 활동가에게 SNS는 점점 더 중요한 공간이 되어 가고 있다.
사람들이 내가 만든 것, 나의 활동, 혹은 나라는 존재를 욕망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나를 기호의 경제 속에 계속해서 노출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내 삶을 장르화해야 한다. 오늘날 예술가가 SNS에서 하는 일은 단지 새 작품 활동에 관한 소식을 사람들에게 공유하는 것만이 아니다.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일상을 전시하는 일, 즉 삶 자체의 장르화가 필수적이다. 삶은 패러디하거나, 차용하거나,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장르화된 삶은 그렇게 할 수 있다. 장르화된 삶이란 말하자면 ‘라이프스타일’이다. 매력적인 라이프스타일을 전시하는 사람은 영향력을 가진 사람, 즉 인플루언서가 된다. 문화적 영향력을 갖기 위해서는 일단 문화 속에 재현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통용되는 문화적 코드를 자신의 욕망에 알맞게 전유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상황이 만인의 예술가-되기(beciming), 활동가의 프로보커터(provocateur)-되기, 예술가의 인플루언서-되기를 부추기고 있다.
문화에 전면화된 장르들의 경쟁과 야합은 장르의 인플레이션을 부추긴다. 장르의 인플레이션은 매력의 빈부격차를 야기한다. 매력적인 자는 점점 더 많은 문화적 코드를 사유화하는 반면, 매력 없는 자는 점점 더 문화에서 멀어지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매력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삶도 없”다고 했다. 우리는 반대로 말해야 할 것이다. 매력이 없어서 삶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재현되지 않기 때문에 매력 없는 삶으로 여겨진다. 장르는 문화가 삶을 셈하는 단위다. 따라서 장르화되지 않는 삶은 전파될 수도, 패러디될 수도, 밈(meme)이 되어 전승될 수도 없다. 동시에 장르들의 인플레이션은 재현되지 않는 것들을 뒤에 두고 어서 앞으로 달려 나가라고 명령한다. 우리가 콘텐츠가 모여드는 곳을 부지런히 순례하지 않는다면 기호의 운동에 뒤처지게 되고, 그러면 우리도 매력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급해 보여서도 안 된다. 매력을 뒤쫓는 느낌은 매력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화가가 은은한 마감재를 발라 회화의 표면을 완성하듯이, ‘진정성’이 장르들의 표면을 한 번 덮어서 마지막 처리를 해야만 한다. 아우라가 고전적인 예술의 생산수단을 은폐했듯이, 매력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진정성이 장르들의 공허한 논리를 살짝 가려 줘야 한다.

1) 질 들뢰즈·클레르 파르네, 『디알로그』, 허희정·전승화 옮김, 동문선, 2005, pp. 14~5.



2.


진정성과 매력은 소설 장르가 전통적으로 다뤄 온 문제다. 관련하여 이제 프루스트의 소설과 손보미의 소설의 유사성을 짚고, 손보미의 소설 일부를 읽어 볼 생각이다.2) 마침 얼마 전에 18세기 후반 프랑스와 21세기 초 한국의 정치적 상황이 비슷하다고 주장하는 짧은 글이 한 지면에 게재되었다. 그 글의 저자인 허경이 18세기 프랑스와 21세기 대한민국이 유사하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몇 가지가 있다. 최종 판단을 내려 줄 권위의 부재, 문화적 동일성의 와해, 문화나 정치에 대한 신뢰할 수 있는 설명 모델 부재 등.3)
그런데 이것들은 매력의 문제가 두드러지게 되는 정치적·문화적 배경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허경의 글은 프루스트와 손보미의 유사성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러프한 아이디어를 제공해 주는 듯하다. 물론 프루스트는 18세기 후반을 살았던 작가가 아니라 19세기 후반을 살았던 작가이긴 하지만, 허경이 18세기 프랑스 문화의 특징이라고 말한 정치적 모호함과 문화적 역동성을 잘 보여주는 소설가이므로, 프루스트의 소설이 “1789년 체제”4)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손보미의 소설들은 21세기 한국의 도입부에 속한다. 공교롭게도 프루스트의 소설과 손보미의 소설 모두 1) 감각의 질서에의 비자발적 참여, 2) 미/추와의 대면, 3) 사교계/교실의 정치, 4) “실망과 깨달음의 운동”5)이라는 테마를 되풀이한다. 그리고 프루스트와 손보미의 소설은 각자의 시대적 맥락 속에서 매력이 문제 되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
프루스트의 사교계에서는 말투, 문체, 표정, 제스처, 목소리뿐만 아니라 턱수염과 옷차림, 입 냄새까지도 세심하게 변별된다. “비단 같은 금빛 턱수염과 잘생긴 이목구비, 콧소리, 강한 입 냄새와 의안(義眼)”(❶ p. 154)……. 이것들은 인물을 구성하는 기호들로 파악된다. 화자는 이러한 기호들의 차별화 작업을 통해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 무엇이 세련된 것이고 무엇이 천박한 것인지를 배운다. 하지만 이것은 논리적인 구별에서 출발하는 명증한 배움이 아니라, 극히 미세한 차이들을 확보해 가는 감각적 배움이다. 초반부에서 이 배움을 주는 가장 중요한 대상은 화자가 좋아하는 여자 아이 질베르트의 아버지인 스완이다. 화자에게 스완은 고통스러운 의문의 대상이다. 화자는 그가 우아한 사람인지 천박한 사람인지, 세련된 사람인지 촌스러운 사람인지 도저히 구분할 수가 없다. 부르주아이고, 사교계의 핵심 인물들과 고위 귀족들과 친하고, “재치와 매력에 대해 끊임없이 까다롭게 굴”(p. 157) 만큼 세련된 취향을 가졌으면서도 범속한 사람들과 호들갑스럽게 어울리며, 천한 직업의 여인과 결혼한 그를 계급적으로 고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호성이 프루스트의 화자가 “정신적 혈족”을 변별하는 주관적인 기준을 고도로 발전시키는 아이러니한 원인이 된다. 여러 계급과 인물상이 뒤섞이던 당대의 사교계만큼 “많은 기호들을 방출하고 집결시키는 영역은 없다.(……) 그것들은 계급뿐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정신적 혈족’을 따라서 서로 차별화된다.”6) 말하자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사교계는 기호들이 등록되고 비교되며, 모방되고 평가되는 장(場)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같은 작품이 시대의 단순한 반영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적할 수 있는 사실 하나는, 당대 사교계의 계급적 모호성이 프루스트를 기호에 극도로 민감한 사람으로 훈련시켰을 것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프루스트가 매력의 세분화된 서열과 그 자잘한 표식들에 예민해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사교계나 극장, 위락정원 등이 부르주아에 의해 흥행하게 되었던, 즉 부르주아들이 문화의 주인공으로 자리매김했던 당대 프랑스의 문화적 역동성이 있다. 혹은 발터 벤야민이 그렇게 했던 것처럼, 대상을 가리지 않는 프루스트의 산문이 당대에 전면화된 ‘속물 자본주의’를 파괴하고 있다고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것도 가능하다. “프루스트가 의도했던 바는 상류사회의 전 구조를 수다의 생리학이라는 형태로 구성하려는 것이었다. 상류사회의 편견과 도덕적 기준의 모든 목록은 그의 위험스러운 희극에 의해 파괴되어지고 있다.”7) 어쨌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배경에는 귀족 문화를 자신들의 일부로 흡수했던 부르주아 문화의 부흥이 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한국의 소설가가 매력의 문제를 첨예하게 다룬다면, 그 원인을 우리 사회에 자리 잡은 양가적인 평등주의,8) 특히 인터넷과 SNS를 통해 가치가 빠르게 전파되고 전환되는 문화적 역동성, (복장 단속을 하는 학교 같은) 규율 사회와 (매력을 자기 계발의 목표로 가르치는) 신자유주의적 통제 사회가 복잡하게 착종된 한국의 문화 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사회문화적 맥락들을 거치면서, 우리는 프루스트의 화자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매력의 문제에 민감해져 온 것이다.

2) 이 글에서 인용하는 소설들은 다음과 같다. 손보미, ① 『디어 랄프 로렌』(문학동네, 2017), ② 『작은 동네』(문학과지성사, 2020), ③ 「해변의 피크닉」(《문학과사회》 2020년 가을호). 마르셸 프루스트,
❶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1』(김희영 옮김, 민음사, 2014). 이하 인용 시 번호와 페이지를 병기한다. 따로 병기하지 않을 시 바로 앞 인용과 동일.
3) 허경, 「현재의 진단학―21세기 대한민국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1년 겨울호, pp. 123~39 참조.
4) 위의 글, p. 124.
5) 질 들뢰즈, 『프루스트와 기호들』, 서동욱·이충민 옮김, 민음사, 2004, p. 23.
6) 위의 책, p. 24.
7) 발터 벤야민, 「프루스트의 이미지」,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반성완 편역, 민음사, 1983, p. 108.
8) 김종엽, 「‘사회를 말하는 사회’와 분단체제론」, 《창작과비평》 2014년 가을호, pp. 15~37 참조.



3.


소설의 ‘비자발적 기억’은 매력의 경제에 진입하는 중요한 입구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여행이 마들렌의 풍미에서 출발하듯이 『디어 랄프 로렌』의 ‘비자발적 기억’은 어떤 박사의 피겨스케이팅에서 촉발된다. 『디어 랄프 로렌』의 도입부에서 화자는 자신이 악감정을 가진 어떤 박사의 피겨스케이팅을 지켜본다. 그런데 박사의 스핀은 예상외로 너무나 완벽하다. 박사가 선보이는 스핀과 화자의 기억 속 랄프 로렌의 미소가 둘 다 비인간적으로 완벽하다는 감각적 동일성 때문에 랄프 로렌에 대한 연상이 발생한다. 화자는 잡지에서 랄프 로렌의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그의 미소가 “‘정말’ ‘매력적’”(① p. 45)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기억에 남아 있다. 그리고 화자는 학창 시절에 수영이라는 아이와 함께 랄프 로렌에게 편지를 보낸 적 있기 때문에, 랄프 로렌의 미소는 화자를 학창 시절의 기억으로 돌려보낸다. 이 무의지적 연상 작용은 우리가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의식적인 질서 배면에 있는 감각의 질서를 의식하게 한다. 누군가의 뛰어난 피겨스케이팅 기술이나 아름다운 미소는 이 감각의 질서 속에서 비로소 의미와 위상을 갖는다. 그리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꼭 마찬가지로 『디어 랄프 로렌』에서도 비자발적인 감각적 질서를 따라가는 과정은 작가가 되는 과정과 동일하다. 이 감각적 질서를 관장하는 것이 매력의 경제이므로, 19세기의 예에서도 21세기의 예에서도 작가는 매력의 경제에 관한 전문가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매력의 문제에 있어 좀 더 솔직한데, 소설의 표면에 이미 매력의 서열(고상한 사람과 천박한 사람, 위대한 예술가와 그저 그런 예술가……) 속에 인물을 고정하려는 집착이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극단적인 집착 때문에 역설적으로 밝혀지는 것은 삶을 결코 어떤 가치의 서열 속에 고정할 수 없다는 진실이다. 짧은 예를 하나 들어 보자. 19세기의 어린 화자는 스완 부인의 살롱에서 평소에 흠모해 마지않던 시인 베르고트를 소개받는다. 그러나 고개를 돌린 베르고트와 처음 인사를 나눌 때 화자의 예술에 대한 동경과 세계에 대한 신뢰가 박살나는데, 그 박살의 이유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베르고트가 너무 못생겼기 때문이었다.


나는 죽을 듯이 슬펐다. (……) 그의 책들이 지닌 투명한 아름다움으로 축조했던 베르고트 전체가, 지금 달팽이 모양 코를 보존하고 검은 턱수염을 활용해야 하자 그런 베르고트는 단번에 더 이상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게 되어버렸다. (❶ pp. 215~6)


즉시 내게는 그 책의 가치가 하락하면서(이 하락과 더불어 ‘아름다움’과 우주와 삶의 모든 가치도 더불어 하락했다) 드디어는 그 책이 턱수염 난 남자의 하찮은 심심풀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❶ p. 218)


이 ‘베르고트의 못생김’에 대한 분노는 한 시인을 향한 몹쓸 인신공격에 그치지 않고 훨씬 심오한 교란을 야기한다. 즉 화자가 마음속에 나눠 놓은 시시한 예술과 위대한 예술, 절대 섞일 수 없는 두 우주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이다. 못생긴 얼굴이 인간 베르고트에게서 어떤 위대함의 작은 표시도 새어 나갈 수 없게 차단했기 때문이다. 즉 베르고트와의 대면은 (미모·인격의 비범함·예술적 탁월성을 연결하는) 화자의 선입견을 훼절시키고 그가 지금껏 가지고 있었던 가치 체계를 재편성하도록 강요한다. 19세기의 어린 화자는 이제 위대한 예술이 범접할 수 없는 개성의 발로인지, 아니면 그저 그런 노동의 얻어걸린 결과인지 심각하게 자문하게 된다.
화자가 특히 자신이 동경하는 사람일수록 엄격한 매력의 잣대를 들이대기 때문에, 화자는 실망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매력에 대한 집착은 작가 지망생에게 엄청난 양의 기호들, 차별화된 가치들, 장르의 문법들을 가르친다. 프루스트의 경우, 이것은 소설가가 되기 위해 꼭 거쳐야만 하는 배움이었다. 하지만 막상 소설은 매력을 개개인으로부터 떼어낸다. 만연체가 인물에 대한 평가를 끊임없이 번복하기 때문에, 사실상 독자는 인물에 대해 아무것도 판단 내릴 수 없게 된다. 마치 기호의 인플레이션이 매력의 경제의 대공황을 불러오는 듯이. 이것이 그 경제의 전문가가 남긴 공산주의적인 교훈이다. 마찬가지로 손보미의 『디어 랄프 로렌』은 크게 보면 랄프 로렌이라는 유명하고 매력적인 남자에 대한 집중으로부터 무명인들의 기억과 이야기에 접근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랄프 로렌의 주변 인물들을 추적하는 화자의 여정에서, 처음엔 매력의 절대적인 화신처럼 그려지던 랄프 로렌은 인간적인 이중성과 모호성을 드러낸다. 그리고 랄프 로렌처럼 유명하지 않은 다른 인물들의 삶에도 그만큼의 이중성과 모호성이 있다. 이 동등한 이중성과 모호성의 발견은 문화 속에 재현되지 않던 삶의 구체적인 발굴과 동일하다. 따라서 『디어 랄프 로렌』은 매력의 경제라는 문제로부터 편안하게 벗어나는 것 같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작은 동네』나 「해변의 피크닉」 같은 손보미의 최근 소설들은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 즉 오히려 매력의 불평등을 향해 대범하게 나아간다. 그래서 이 소설들은 퇴행적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하지만 손보미의 소설을 계속 따라 읽어 온 입장에서 드는 생각은 그의 소설이 매우 도발적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그의 최근 소설은 우리가 한동안 쉽게 말하지 못했던 불편한 문제를 건드리고 있다.


4.


이제 손보미의 소설에서 비슷한 예를 들어 보자. 『작은 동네』의 화자는 어린 시절 부모님에게 개를 키우자고 조른다. 그러자 화자의 엄마는 화자를 데리고 옆집 개를 보러 간다. 그러나 개의 주인인 이웃집 할머니를 만나 대화를 나누자마자 화자의 감정은 급변한다.


나는 할머니의 목소리 때문에 충격을 받았다. (……) 그녀가 한 마디 한 마디 뱉을 때마다 나는 그녀의 목구멍 안에 작은 상처가 생기고 그 상처가 점점 더 길게 갈라지는 상상에 사로잡혔다. 늙은 여자의 눈동자는 탁했고 무언가 막이 씌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늙은 여자는 내가 처음으로 마주한 손상된 육체의 현현이었다. (……) 개를 만지는 것, 나는 그걸 더 이상 원하지 않았다. 내게 그 집 개, 혹은 이 동네에 살고 있는 그 모든 개들의 의미가 변했던 것이다. 이제 그건 내가 안고 싶고 눈을 마주치고 싶은 그런 대상이 아니었다. 그건 누군가 소중한 대상을 상실했다는 증표였다. 징그럽고 소름끼치는 것이었다. (② pp. 57~8)


화자가 그토록 갖고 싶어 했던 사랑스러운 강아지는 노인의 “손상된 육체”와 연루되면서 “의미가 변”해버린다. 이제 개는 돌이킬 수 없는 상실과 연결되고, 급기야 상실을 의미하는 “증표”가 된다. 노인의 육체와의 마주침은, 화자가 그때까지 조부모나 이웃과의 관계가 차단되어 있었기 때문에 더 큰 충격으로 다가온다.
이처럼 미나 추는 단순히 외양상의 조화/부조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감각적 기호들의 짜임에 신체가 어떻게 접속하느냐의 문제다. 이 점에서 매력의 경제 논리와 ‘무의지적 기억’은 밀접하게 관련된다. 무의지적 기억이 기호들의 계열에의 접속에 관련된 문제라면, 매력의 경제는 감각적 기호들의 편성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언어로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신체적 경험의 문제다. 하지만 우리는 이처럼 설명하기 힘든 감각적 경험을 통해 기호들의 의미를 끊임없이 배운다. 이 기호와 이미지의 감각적 엮임이 삶 속에서 축적되면 사람들이 ‘편견’이라 부르는 사고의 비논리적 체계로 굳어진다. 가령 노인의 이미지를 ‘상실’이나 ‘상처’ 등의 기호와 습관적으로 결부해 생각하는 것을 우리는 편견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 편견은―세계의 표면에 이미 편향되게 현상되고 있는―감각적 사실들의 짜임에서 기원한다.
손보미 소설에 나오는 ‘작은 동네’나 교실의 상황은 물론 매우 구체적이지만, 동시대 문화에 대한 통렬한 알레고리처럼도 보인다. 이 알레고리에서 눈에 띄는 것은 매력의 경제 속에 그어져 있는 ‘분할선’이다. 말하자면 발언권을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 당당하게 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분할선. 손보미의 소설에서 아이들은 매력의 문제에 종종 어른 이상으로 민감하다. 그것은 누가 이 세상에서 사랑받고, 주목받고, 영향력을 행사하는지를, 반대로 누가 그렇지 못한지를, 그 차이를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이들이 민감하게 감지한다는 것을 뜻한다. 어른에게는 매력의 문제가 돈의 문제에 포함된 부수적인 문제일 수 있지만, 아이들에게는 오히려 매력의 문제가 “돈을 포함한, 훨씬 심오한 문제”다. 이 문제가 가장 두드러지기 시작하는 공간은 물론 교실이다.


내 기억으로, 모든 아이들이―그게 아무리 싸구려라고 할지라도―플라스틱 단소를 살 수 있는 형편은 아니었다. 그건 돈의 문제일 수도 있었고 돈을 포함한, 훨씬 심오한 문제의 결과일 수도 있었다. (② p. 115)


플라스틱 단소를 살 수 있는 형편이 안 되는 아이는 단지 돈이 없는 집안의 아이일 뿐만 아니라 사랑받지 못하는 아이, 보살핌 받지 못하는 아이다. 아이들은 이것을 “거의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고 혐오한다. 그 사실이 어떤 신체적 기호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 애는 목욕을 하지 않아서 언제나 머리카락에는 기름때가 끼어 있었고, 얼굴에는 언제나 버짐 같은 게 피어 있었다(그게 영양실조의 결과라는 건 이후에 알게 되었다). (……) 그 애의 이름은, 그래, 고장연이었는데, 내가 여전히 그 애의 이름을 기억하는 건, 반의 짓궂은 남자애들이 그 애를 ‘고장난’이라고 불렀기 때문이었다. (pp. 115~6)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내가 무리로부터 떨어진다면, 무리에 정착하지 못한다면 나는 ‘깨끗한 버전’의 고장연이 되고 말 것이라고. (pp. 116~7)


어떤 신체를 “고장난”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신체의 특성을 설명하는 것을 넘어 신체의 의미를 규정한다. 이러한 의미화를 둘러싼 과정이 매력의 정치이고, 교실 속 매력의 정치를 통해 화자가 몸소 배우기 시작하는 것이 매력의 경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사교계의 유치함, 치열함, 공허함이 손보미의 교실에도 있다. 하지만 교실의 언어에는 사교계의 언어만큼의 호화로움이나 다양성, 여유로움이 없다. 또 교실의 학생들은 여러 사교계를 옮겨 다니며 배우는 프루스트의 화자처럼 배움의 장을 옮겨 다닐 수 없다. 교실은 훨씬 일괄적이고 강제적인 공간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교실은 배움의 강도에 있어서 사교계를 능가한다. “정신적 혈족”이라는 귀족적인 말이 어떻게 교실의 ‘일괄적인’ 언어로 번역될 수 있는지 보자.


팔짱을 낀 채 또래 남자애들을 바라보고 혀를 끌끌 차며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정말 수준 낮아. 수준 낮아서 같이 못 놀겠어.” 수준, 그래 그 애들에게는 수준이 있었다. 그 애들은 순식간에 교실을 공포로 얼어붙게 만들 수 있었고 (……) 그건 나로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 중 하나였다. (② p. 151)


따라서 핵심적인 문제는 청결하냐 아니냐, 단소를 살 돈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다. 그런 문제를 “포함한, 훨씬 심오한 문제” 즉 포괄적인 ‘수준’이 교실의 아이들을 갈라놓고 있다. 수준이 있는 아이들은 매력의 문제에 관한 입법자이고 법원장이고 검찰총장이다. 아이들의 정치에 3권 분립 따위는 없는 것이다. 이것이 교실의 정치가 그토록 잔혹해질 수 있는 이유다. 따돌림을 주도하던 아이가 되레 따돌림을 당하는 식으로, 탄핵 역시 매우 쉽고 빈번한 일이지만. 아이들은 이와 같은 매력의 정치를 통해 어쩌면 교과서에서 배우는 것보다 사회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울 것이다. 어디가 이 체제의 다수적인 지점인지, 누가 무시하거나 괴롭혀도 되는 약자인지, 사회에 어울리며 살아가기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고 어느 정도 수위의 농담을 할 수 있는지, 여자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고 남자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등의 ‘감각’을 말이다.


5.


손보미의 「해변의 피크닉」은 배움의 강도에서 사교계와 교실을 초과한다. 소설적으로 압축된 이 시공간에서는 사교적 기호들, 사랑의 기호들, 정치의 기호들, 예술의 기호들이 마구 뒤섞여 자가증식하기 때문이다. 어린 화자는 해변에서 심한 충격을 받게 되는데, 첫 번째 충격은 아름다운 동성과의 대면에서 온다. 처음 만난 삼촌의 여자친구는, “그때까지 내가 만나 본 성인 여자 중 가장 아름다웠다”(③ p. 151). 삼촌 여자친구의 아름다움은, 화자가 ‘난봉꾼’ 삼촌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을 사랑과 혼동하기 때문에 더욱 비통하게 다가온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마르고 예쁜 저 여자. 그날 내가 깨달은 것 중 하나는 어떤 여자를 ‘예쁘다’고 표현하기까지 아주 복잡한 과정들이 수반된다는 점이었다. 그건 단순히 얼굴의 어떤 한 부분―눈이나 코, 입―이 보기 좋다거나, 배열이 잘 되었다거나, 그런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예쁘다는 것은 매 순간마다 자신의 어떤 요소를 초월하는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 내가 밤에 외운 단어 중 하나가 떠올랐다. 비통하다. (③ p. 152)



이 도발적인 구절의 묘사가 고전적인 예술을 상기시킨다는 것(그래서 더 문제적이라는 것)을 짚고 넘어가자. 우리는 고전적인 예술이 생산수단·생산과정의 은폐를 통해 아우라를 지니게 된다는 것을 안다. 마찬가지로 “예쁜 저 여자”가 예쁘기 위해 하는 모든 인간적인 노력은 짐작할 수 없게 감춰져 있다. 드러난 외모 때문이 아니라 이 ‘인간적인’ 것들의 은폐 때문에 아름다움은 초월적인 느낌을 준다.
게다가 어린 화자는 아름다운 외모에만 압도되는 것이 아니다. 몸짓과 표정, 말투 등을 꾸며내는 부유한 어른들의 능숙함에 기가 눌린다. 어린 화자에게 해변에 모인 어른들은 흉내 낼 수 없는 매력의 대가들이다. 그들은 감정을 너무 능숙하게 감추고, 연기인 것조차 잊어버릴 만큼 자연스럽게 연기한다. 할머니와 삼촌은 어제만 해도 서로를 끔찍하게 미워했는데, 삼촌의 여자친구가 있는 해변에서는 사이좋은 엄마와 아들이 된다. “그들이 서로에게 다정하게 말을 걸고, 미소를 짓고, 고개를 끄덕이는 건 내 눈앞에 실재하는 일이었고, (……) 진실된 세계의 모습이었다.”(p. 159) 매력이 문제가 될 때, 실제로 미워하느냐 미워하지 않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어떤 몸짓, 어떤 눈길, 어떤 목소리를 통해 권위와 존재감, 분위기를 사유화할 것인가가 문제다. 마음을 감추는 어른들의 연출 중에서도 할머니의 연출은 특히 대가다운 솜씨를 보여준다.


할머니의 세심한 보살핌 속에는 주인의 위엄이 서려 있었다. 그것은 할머니가 가지고 있던 자연스러운 생활양식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을 꾸며진 것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p. 154)


마침내 나는 낙담했고 패배를 인정했다. (……) 나는 알 것 같았다. 주인의 권위는 그런 식으로 간단하게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여전히 가짜 배신자, 작은 협잡꾼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들의 그러한 표정, 말투, 그들이 구사하는 문장은 그저 그런 속임수가 아니었다. 그래, 그건 진짜 마술이었다. (pp. 158~9)



기호는 공허한 것이지만 기호를 사유화하는 능력, 즉 매력은 속임수가 아니다. 이 점에서 「해변의 피크닉」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정반대의 교훈을 주는데, 이 교훈은 훨씬 냉소적이고 보수적이다. 매력은 몸에 진정으로 배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매력을 완성하는 것은 진정성이다. “주인의 위엄”을 몸에 두르기 위해서는 진짜 주인의 삶을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화자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준다. 어린 화자는 교실에서부터 남들과 비교하면서 자신이 매력적이지 않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내가 우는 건…… 내가 슬픈 건…… 내가 마음이 아픈 건…… 내가 못생기고 뚱뚱하기 때문이에요.”(③ p. 165)
어른들의 ‘승인’을 받고자 했던 허영심이 극단적으로―반역의 수준으로―나아갔던 만큼, 이 어린 화자에게 허영심의 철회는 치명적이다. 이 철회는 ‘나는 특별해, 나는 그 경제에 속하지 않아’라고 믿는 상상적 일탈을 중단하고 자신의 신체, 자신의 인격, 자신의 존재감을 매력의 경제 속에 위치시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삼촌은 이 “실망과 깨달음”의 원인 제공자이지만, 막상 해변에서는 매력의 경제의 들러리에 지나지 않는다. 삼촌이 가진 존재감이란 할머니가 지닌 진짜 “주인의 권위”에 비하면 “치졸하고 졸렬한 권위”(p. 147)에 지나지 않는다. 특별한 ‘난봉꾼’인 줄 알았으나 여기서는 다정한 아들·남자친구·삼촌을 연기하고 있는 삼촌은 그저 실망스러운 존재다. “나는 진심으로 그 여자가 미웠고, 삼촌에게 지독한 실망감을 느꼈다. 그가 너무 평범해 보여서.”(p. 154) 마찬가지로 화자의 모든 동경과 질투와 증오는 두 여성에게 집중된다.


그녀에 대한 미움은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증오심으로 바뀌었다. 그래, 나는 그녀를 증오했다. 그녀의 길게 뻗은 목과 쇄골, 꼿꼿한 등을, (……) 그런 생각을 하자 몸이 떨리는 것 같다. 살갗으로 올라오는 무수한 작은 돌기,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것, 순전히 신체적인 영역에 속하는 반응들. (p. 156)



물론 이 도발적인 소설이 ‘여성과 여성의 적대’의 사례인 양 유치하게 읽혀서는 안 될 것이다. 소설은 왜 양성이 기호의 의미를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게 되는가, 왜 “이 세상의 불공평”(② p. 265)에 대한 감각이 성별 이분법적으로 되는가를 역추적한다. 세계를―특히 소설에 재현된 교실처럼 일괄적인 사회 속에서―배우는 자에게는 성별에 따라 복종해야 할 두 개의 질서가 따로 있는 것처럼 보였다. 즉 일반적인 배움 속에서 ‘여자’와 ‘남자’는 기호의 의미를 해석하는 분리된 두 계열의 이름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성의 신체가 배우는 자를 더 위협하고 더 많은 것을 가르치는 한편, “서로 영원히 섞이지 않을 거라고 맹세라도 한 것처럼”(③ p. 117)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 어떤 사건이 두 계열을 횡단하고 새로운 배움을 우리에게 주지 않는다면, 두 계열은 언제까지나 각자의 앎만을 고수할 것이다. 양성의 배움의 계열은 프루스트의 소설에서도 분리되어 있지만(그가 특히 매력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스완이나 베르고트처럼 자신이 동경하는 남성 어른들이다), 손보미의 최근 소설에서는 더더욱 심하게 분리되어 있다. 그리고 나눠진 양성의 계열은 프루스트의 경우에는 동성애와 사도마조히즘(sadomasochism)으로 휘몰아치듯 나아가지만, 손보미의 소설에서는 그렇지 않다.


6.



「해변의 피크닉」의 화자는 자신을 어린애 취급하는 어른들에게, 혹은 세상에 복수심을 느꼈고, 매력의 정치의 주권자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해변의 피크닉”에서 삼촌 여자친구의 미모와 어른들의 능숙함에 압도되고 자신의 초라함에 상처받는다. 할머니는 돌아가는 차 안에서 우는 손녀를 달래기 위해 화자가 “그런 여자들” 혹은 “그저 그런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 것이라고 말해 준다. 이제 화자가 학습하게 되는 것은 “할머니의 세계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종류”다. “그저 그런 사람들, 그런 여자들, 뛰어난 여성, 훌륭한 사람.”(p. 166) 물론 이것은 할머니가 가진 ‘편견’에 따른 구분이다. 하지만 편견은 할머니만의 것이 아니다. 할머니가 살아온 세계에 존재하는 기호들의 편성 방식을 반영한다. 할머니의 편견이 반영하는 매력의 경제는 계급적인 동시에 성차별적이다. 할머니의 머릿속에서 가장 높은 위치인 “훌륭한 사람”은 남자로만 채워져 있다. 두 번째 위치인 “뛰어난 여성”은 할머니가 화자에게 약속하는, (할머니 생각에는) 여성으로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위치다. 그런데 “뛰어난 여성”의 위치는 돈이 있어야 도달/지속할 수 있다. 그리고 남자들만이 “훌륭한 사람”에 속할 수 있는 이유는 그 남자들이 ‘돈’과 ‘능력’을 사유한 자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화자는 “해변의 피크닉”을 통해, 특히 할머니를 통해 이 세계가 매력의 계급이 엄존하는 세계라는 사실을 배운다. 그리고 화자는 소설의 말미에서 재회한 엄마에게 다음처럼 고백한다.


“엄마, 내가 커서 뭐가 되고 싶은 줄 아세요?”
“뭐가 되고 싶은데?”
“나는 커서 배신자가 될 거예요. 진짜 배신자.”
어머니는 나를 힐긋 바라보더니 정말이지 아무런 흥미도 느끼지 못하겠다는 듯이 말했다.
“꼭 그렇게 되어라. 제발 꼭.” (p. 169)



여기서 화자가 말하는 “진짜 배신자”의 의미는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첫째로 ‘계급의 배신자’가 되겠다는 말. ‘나’를 “우리 사랑스러운 돼지”(p. 167)라고 부르는 가난한 엄마, 보잘것없지만 고통스러운 교실의 정치, “폴로 티셔츠를 입고 괴상한 소리를 내며 뛰어다니던 그 아이”(p. 168)가 있는 매력의 소시민 계급을 떠나, “주인의 위엄”을 지닌 할머니가 있는 매력의 상류층 계급으로 이동하겠다는 이야기다. 이 장래희망을 고해성사하듯 엄마에게 고백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엄마는 ‘나’를 종종 낯 뜨겁게 하지만 어쨌든 소속감을 느끼게 하는 존재인 것이다.
하지만 “한 작가의 배움의 과정의 이야기”9)라는 테마의 연장선상에서 생각했을 때, “진짜 배신자” 가 되겠다는 말은 감각의 질서 자체에 대한 배신자가 되겠다는 말로 이해할 수도 있다. 기성의 질서란 화자를 기껏해야 2등 시민으로 만들어 줄 수 있을 뿐이고, 그마저도 전혀 주체적이지 않은 배움을 통해 가능한 것일 테니까 말이다. 엄마가 가르쳤던 것, 할머니가 가르쳤던 것, 교실에서 배운 것, 이 세계가 가르친 것, 이것들은 ‘되찾은 시간’ 속에서 나의 언어로 다시 쓰기 전에는 살아가기에 유익하거나 무익한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진짜 배신자”의 이 두 번째 갈림길이 바로 작가의 길일 것이고, 여기서부터 배우는 자는 자신의 배움의 독자적인 길을 따라 감각의 질서를 교란하는 쪽으로 나아갈 수 있다.

9) 『프루스트와 기호들』, p. 22.




7.



물론 이 미학적 ‘교란’은 쉽지 않고, 결코 단순히 개인적이거나 자족적인 문제인 것도 아니다. 매력의 문제를 도발적으로 다루는 동시에 손보미의 소설은 우리가 사는 세계의 기호들을 관장하는, 국가적 체제나 자본의 체제를 다시 의식하게 한다. 『작은 동네』에서 어떤 신체에 ‘간첩’이라는 기호를 부착하고, 그 기호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배후의 국가 체제다. 간첩이라는 기호가 부착된 신체는 절대 사회에 재현될 수 없다. 하나의 신체가 철저한 ‘공백’이 되기 때문에 그 신체를 둘러싼 모든 진실, 모든 배움이 왜곡된다. 『작은 동네』의 화자는 마지막에 가서야 진실을 알게 되며, 이것이 화자를 자신이 믿어 온 모든 것의 배신자가 되도록 밀어붙인다. 또 「해변의 피크닉」에서 할머니가 “주인의 위엄”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 난봉꾼인 삼촌이 “예쁜 저 여자”를 만날 수 있는 이유는 할아버지의 돈이다. 할아버지는 매력의 차별적인 경제에 개입하지 않지만, 이 경제를 가능하게 하는 배후처럼 재현되었다.
그렇다면 손보미의 소설에서도 여전히 ‘국가’ 혹은 ‘돈’이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아닌가? 실제로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매력은 돈의 부수적인 효과일 뿐이고, 또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 매력은 노동자나 브랜드로서의 자신을 홍보할 수 있는 상징 자본에 지나지 않는다고. 또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재현/대표의 문제는 궁극적으로, 틀림없이 국가의 문제라고.
국가와 자본이 매력의 문제와 절대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세계를 채우고 있는 차별적인 사실들은, 그것이 감각적 차원으로 번역되기 이전에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지 못한다. 도대체 무엇이 우리에게 불공평의 의미를 가르치는가? 그리고 무엇이 불공평에 대한 감각을 성별 이분법적으로 만드는가? 도대체 무엇이 우리를 “이 세상의 불공평”에 붙들려 옴짝달싹할 수 없게 하고, 불공평에 대항하기보다는 오히려 차별화된 기호를 뒤쫓아야 한다는 조급함을 주입하는가? 매력의 경제학은 이러한 문제들을 더 잘 사고하기 위한 모델이다. 이 경제는 종종 소설의 전담 분야였지만, 문학 작품 속에만 있었던 문제는 당연히 아니며, 점점 더 노골적으로 그렇게 되어 가고 있는 듯하다.











이희우
작가소개 / 이희우

문학평론가. 2020년 《문학과사회》에 평론을 발표하며 활동을 시작했다.


《문장웹진 2022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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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리자
  • 2024-05-01
소설의 원점, 혹은 클래식-퓨처리즘

소설의 원점, 혹은 클래식-퓨처리즘 박인성 시간의 순환과 소설의 원점 흔히 소설을 가리켜 시간의 예술이라고 부르던 시절이 있다. 물론 여전히 유효한 말이지만, 시간이란 결국 우리가 세상을 인지하고 이해하기 위하여 활용되었던 유용한 개념적 도구일 뿐이다. 따라서 시간을 다루는 방식의 다양성이 늘어나고 시간에 대한 인지적 표현 수단이 늘어나면 자연스럽게 소설이 시간의 예술이라는 표현은 보편적이거나 당연한 것이 아니게 된다. 소설의 언어적 형식은 주제를 이끌어 가는 캐릭터의 삶과 그 의미화를 매개로 시간을 다루는 구성적 논리일 뿐이다. 오늘날에는 양자역학과 다양한 과학적 가설들에 의해서 시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보편화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삶을 연대기적으로 엮어서 기승전결의 플롯 구조를 그리는 소설의 시간적 이해는 그 자체로 시간에 대한 세련된 접근은 아니다. 자연히 소설이라는 언어 형식이 시간에 대한 해석적 주도권을 잃어버린 시대에 다시금 소설이란 무엇이었는지를 묻게 된다. 근대문학으로서나 이후 오늘날의 다양한 소설 형식으로서나 저마다의 응답은 다양하게 도출되지만 자주 잊어버리게 되는 것은 원점에 대한 질문이다. “소설이라는 게 대체 뭐였더라?”라는 질문. 형식과 표현은 언제나 변화하지만 서술과 그에 따른 시간의 뒤섞임은 소설의 본질적인 원료다. 따라서 근대문학에서부터 기존의 시간에 대한 이해를 비틀어 보여주려는 수많은 형식적 실험과 새로운 시도에 존재해 왔지만, 결국 소설이란 세상에 대한 시간적 이해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며 ‘서사적 과거’(Episches Präteritum)1)라는 인지적 조작에 의해서 비로소 시작될 수 있는 삶과 세계에 대한 이해를 함축한다.2) 결국 소설은 ‘서술하는 시간’(narrating time)과 ‘서술되는 시간’(narrated time) 사이의 격차를 통해서 형성되는 상호주관성의 언어이며, 소설가와 독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경험적 맥락을 통해서 그 몸피를 부풀려 가는 해석의 공간이기도 하다. 시간의 공간화의 측면에서, 김연수는 언제나 소설의 언어적 형식이 가진 시간적 해석의 힘을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펼쳐 보인 작가다. 김연수가 지속적으로 소설이라는 언어 형식을 통해 시간을 다루어온 시도는 소설이 가진 이해의 힘을 비판적으로 해체함으로써 오히려 부정할 수 없게 재구성하는 시도에 가깝다. 마찬가지로 소설집 『이토록 평범한 미래』3)는 고전적인 시간의 상상력에 대한 김연수식 문학의 재구성을 집대성한 책이다. 이 소설집에서 다루어지는 시간에 대한 이해와 그 서술적 전략이 특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 소설의 시간성에 기반한 서술 전략이란 미래에 대한 선취를 포함하는 시간의 종이접기와 접붙임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종이접기와 접붙임의 결과물로 도출하고 싶었던 것은 전망-없음과 미래에 대한 비관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의도적인 평범성의 추구다. 소설집의 표제작인 「이토록 평범한 미래」가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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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01
로망스 미학과 새로운 ‘합일’을 희구하는 낭만적 주체의 언어

로망스 미학과 새로운 ‘합일’을 희구하는 낭만적 주체의 언어 염선옥 첨단 테크놀로지의 물결이 세계를 장악하면서 시를 쓰는 철학적 기반에도 작지 않은 변화가 초래되었다. 가령 시 쓰기의 새로운 지표가 친환경적 태도로 기울어 가거나, 고독과 우울 같은 정서를 급격하게 동반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경향의 이면에는 서정적인 것이 낡은 것이라는 신념이 도사리고 있는데, 이는 시인들이 “‘서정적=감상적’이라는 오도된 등식과 연쇄적으로 마주”1)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삶의 모순을 표현하는 데 서정적 일치감보다는 대상과 내면 사이의 불일치를 선택하는 경향이 우세해진 것도 그 까닭의 한 측면을 이루고 있을 것이다. K-팝과 시가 화려한 리듬과 언어유희를 독자에게 전달한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지만, K-팝이 선풍적 인기를 구가하는 것에 반해 시는 일부 문학인들의 전유물로만 공유되고 있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K-팝이 K-문화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세계인들에게 통할 보편적 상상력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우리는 새로움이 주체의 상상력에서 연유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사유하는 것도 상상력”2)이라는 바슐라르의 표현처럼 K-팝은 이미지와 사유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음악이 덮고 있는 낭만성, 서정성이라는 은밀한 파동을 전달한다. 음악이 읊는 이미지는 사유로 이어지고 그것은 다시 ‘너’의 사유로 가닿는다. 이성의 시대를 맞이하면서“시를 쓸 수 없는 시대”, “시가 죽었다”라는 클리셰가 난무하는 가운데도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열정은 조금씩 패턴화되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 그런 와중에 문단 내로 불어오는 ‘서정’의 바람은 꽤 육중하고 소중하게 다가온다. 비역동적 세대의 내적 추락 2010년대 들어 청년층을 가리키는 신조어들이 국내외에서 쏟아져 나왔다. 국내에서는 3포 세대에 이어 N포 세대라는 신조어가 나왔고, 이웃 나라 일본에서는 사토리 세대, 중국에서는 탕핑(躺平, 당평, 눕자) 족이 출현했다. 2010년대 기준 청년실업 등 여러 사회 문제에 시달리는 20~30대 한국 젊은이들이 처한 암울한 현실을 일컫는 ‘N포 세대’는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의미를 염두에 둔 부정적 용어라고 볼 수 있고, 사토리 세대(とり世代)는 불교 용어로서 ‘깨달은 세대’, ‘득도한 세대’로 해석되어 물질적 욕망에서 벗어난 초월적 존재로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현대사회에서 희망을 포기한 젊은 세대를 일컫는다. 탕핑 족 역시 “평평하게 누워 있기”를 뜻하는 중국어로서 그 속내는 제아무리 일을 열심히 해도 대가가 없고 결국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 있는 게 현명하다는 뜻을 함축한다. 이는 존재의 고유한 운동성을 스스로 차단하는 세대를 통칭한다는 점에서 공통 함의를 띠고 있다. 한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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