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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롱의 문이 열리는 순간

  • 작성일 2022-04-04
  • 조회수 1,845

[현장 비평]

《문장웹진》은 다양한 시선을 통해 폭넓은 담론을 펼칠 수 있는 ‘비평의 장’을 마련하고자
2020년 진행되었던 〈본격! 비평〉 코너를 정비하여, 2021년 4월호부터 〈현장 비평〉을 선보인다.
2022년 〈현장 비평〉은 신진 문학평론가 12명이 각자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자유롭게 주제를 정해 매월 1편씩 발표된다.




조롱의 문이 열리는 순간



김진석




0. ‘지금-여기’의 존재론


1980년대 처음 등장하였고, 2000년 무렵 노벨 화학상 수상자인 파울 크루첸(Paul J. Crutzen)에 의해 대중들에게 알려진 ‘인류세(Anthropocene)’ 란 용어는 인간의 각종 활동으로 인해 지구환경에 큰 변화가 나타나게 된 시기를 의미한다. 인류세 담론이 등장한 지 수십 년이 지났고 현재도 인류세에 관한 논의는 끊이지 않고 있지만, 정치적 · 구조적인 부분을 제외하고 과연 의식적인 부분에서 무엇이 구체적으로 달라졌느냐 묻는다면 선뜻 대답하기가 망설여진다. 어쩌면 인류세라는 다소 객관적인 용어 자체가, ‘나’와 ‘인류’ 사이에 거리를 만듦으로써 책임감과 죄책감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만드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인류에 관한 소속감 없이, 인류세에 대한 이해 없이 맞이한 건 코로나바이러스로 말미암은 팬데믹 시대였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타자의 얼굴은 자기 초월의 가능성이자 응답해야 할 부름이라는데, 얼굴의 절반이 가려짐으로써 표정이 빼앗긴 자리엔 시선만이 남겨지게 되었고, 결국은 서로는 서로의 불안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마스크로 가려진 타자의 얼굴은, 닫힌 세계와 다르지 않았다.
타자에 관한 환대와 윤리를 주창하는 목소리가 이제는 꽤 잠잠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지 않는 것이 권고되고, 인류의 과제를 다른 이의 숙제처럼 여기곤 하는 오늘날, ‘나-타자’의 존재와 기원, 연대에 관해 다시 성찰해보는 것은 분명 무의미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이 글은 나희덕의 여러 시집 가운데, 존재론적 성찰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고 생각되는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문학과지성사, 2014)을 다시 찬찬히 읽어봄으로써 들은 적 있으나 말해본 적 없는 목소리를 다시 재현해보고자 한다.


1. 다른 시선


시는 대상과의 관계 맺음을 통해서 탄생한다. ‘너’라고 명명되는 무수한 존재들과의 교감 속에서 언어는, 그리고 시는 태동하며 마침내 제 형태를 드러낸다. 우주 만물과의 소통이 낳은 산물을 시라고 부른다면 시를 쓰는 사람, 즉 대상과 소통으로 존재의 그림자를 포착해내야 하는 사명을 지닌 자는 바로 시인이다.
나희덕 시인은 시인에게 주어진 본질적 임무에 충실한 시인이었다. 대상에 관한 관심과 교감의 시선으로 그녀는 효용적 가치에 가려진 “버려지지 않고는 피어날 수 없는 꽃”(「담배꽃을 본 것은」, 『사라진 손바닥』, 문학과지성사, 2004)을 발견하며, 때로는 일상의 풍경 속에서 “나는 당신에게서 나왔다”(「욕탕 속의 나무들」, 『야생사과』, 창비, 2009)라며 존재의 기원에 대한 성찰을 수행하기도 했다. 그랬던 그녀가 상술할 이 시집에 이르러 대상에 대한 다른 시선과 태도를 지니게 된 것은 다소 의외의 일이다.


제 마른 가지 끝은
가늘어질 대로 가늘어졌습니다.
더는 쪼개질 수 없도록.


제게 입김을 불어넣지 마십시오.
당신 옷깃만 스쳐도
저는 피어날까 두렵습니다.
곧 무거워질 잎사귀일랑 주지 마십시오.

― 「어떤 나무의 말」 부분


이제 시인은 더 이상 대상과의 교감을 원하지 않는다. 세계를 성찰해야 하는 자신의 과제로부터 도주를 선언한 그녀가 염원하는 것은 생명력의 상실, 즉 자신에게 내재되었던 타나토스(Thanatos)의 발현으로 생각된다. 이를 존재론적 현상학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본다면, 죽음에 뿌리내린 시인에게 절대자-존재의 “입김”은 거부하고 싶은 대상이며 존재와의 교감으로 탄생하는 산물, 잎사귀는 아틀라스가 짊어진 짐처럼 버겁기만 하다. 어째서 시인은 자신의 본질적 임무인 대상과의 교감을 거부한 채 지하로의 끝없는 침잠만을 원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대상과의 교감이 그 대상이 실존한다는 신뢰감이 바탕이 되어야 이루어질 수 있는 교류이기 때문이다. ‘너’가 있다는 믿음 없이 ‘너’와의 접점을 이루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며, 실존하지 않는 ‘너’를 찾는 행위는 언제나 무용에 그치기 마련이다. 다시 말해, 대상과의 교감에 대한 거부는 그 대상의 실존에 대한 의심에 기원하며 그러한 의심은 시인이 오랫동안 존재가 부재한 시간을 견뎌왔음을 암시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2. 부재의 시간


부재는 떠난 자보다는 남겨진 자의 문제이다. 나희덕의 시집에서 우리는 타자의 부재 속에 남겨진 그녀의 모습을 숱하게 만나 볼 수 있는데, 교통사고와 같은 비일상적 상황이 초래한 부재에 대해서 시인은 “복도에 우두커니 앉아/너의 부재 증명을 기다”(「그날 아침」)리기도 하지만 평온한 일상의 순간에서도 그녀는 때때로 타자의 부재와 마주한다. 이를테면, 쓰레기를 버리려고 찾은 쓰레기처리장에서도 시인은 절대타자의 부재 현장을 목격한다.


의자 하나 버리러 거기까지 가야 한다니,
정말 불편하고 비효율적인 나라라고 투덜거리며
쓰레기처리장을 물어 물어 찾아갔다
아랫배가 터진 의자는 톱밥을 쿨럭쿨럭 쏟아냈다
직전에 버려진 의자는 다리 한쪽이 부려져 있었다
냉장고는 냉장고끼리, 에어컨은 에어컨끼리,
세탁기는 세탁기끼리, 가전제품들은
허공에 플러그를 꽃은 채 폐기될 순서를 기다렸다
(중략)
해가 뉘엿 넘어가는데
의자 하나 버리러 갔다가 보고 말았다
그의 뒷모습을
흰 날개와 검은 날개로 가득 찬 묵시록의 하늘을

― 「그의 뒷모습」 부분


하이데거의 말마따나, 존재는 스스로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언제나 구체적 사물을 통해서만 우리 앞에 현전한다는 것을 고려해본다면 용도를 잃고 버려진 사물들이 모여 있는 “쓰레기처리장”은 존재로부터 버림받은 사물, 즉 존재자들이 유폐된 감옥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아랫배가 터”지거나 혹은 “다리 한쪽이 부러져” 있는 채로 “폐기될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그들의 머리 위로는 “흰 날개”와 “검은 날개”들이 “공중에서 뒤엉”키고 있으며 이러한 장면이 주는 이미지는 타락과 어둠이 팽배해있던 후그리스도 시대(post-Christian era)의 이미지와 유사하다. 이렇듯 사물들이 고통 속에서 토해내는 비명으로 가득한 쓰레기처리장에서 시인은 “묵시록의 하늘”과 그 아래서 자취를 감추는 “그의 뒷모습”, 절대자의 뒷모습을 목도한다. 종말의 하늘을 목격하기 전 그녀에게 신의 뒷모습이 가지는 의미는 신의 흔적, 다시 말해 그의 피조물로써 그리고 존재를 수용하는 매개로써 담아내고 싶은 신비의 일부였을 것이다. 그러나 죽어가는 사물들을 배반한 채, 스스로의 모습을 감추려고 하는 존재의 뒷모습은 시인에게 더는 신비로움과 감탄의 정서를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그 뒷모습은 시인에게 지독한 배반감을 안겨줄 뿐이며, 그러한 배반 속에서 시인의 처지는 “폐기될 순서를” 기다리는 사물들의 처지와 다르지 않다. 그들 앞에 놓인 시간은 오직 “허공에 플러그를 꽂”는, 망실되는 생명력을 방관할 수밖에 없는 시간이며 이러한 시간을 견뎌내야 하는 시인의 입에서 “제 마른 가지 끝은/가늘어질 대로 가늘어졌습니다./더는 쪼개질 수 없도록.”(「어떤 나무의 말」)이라는 탄식의 발언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존재의 부재는 존재자의 무용성, 나아가 인간의 실존에 대한 회의를 던진다. 그 회의감 속에서 인간은 한 번 더 자신이 위치한 객관세계를 파악하고 스스로가 나아가야 할 길을 가늠해야 하는 숙제를 떠안는다. 탄식과 절망의 시간 속에서 시인이 내놓은 숙제의 답은 다음과 같다.


아, 당신에게는 정교한 턱이 있군요
딱딱한 것을 씹을 수 있고
수천 가지 표정을 만들어낼 수 있는
진화의 결정적 흔적 말이에요
(중략)
하지만 당신은 끝내 기억해내지 못하는군요
아가미와 지느러미의 시절을

― 「당신과 물고기」 부분


인간 실존에 대한 회의를 극복하기 위해, 실존을 증명하기 위한 시인의 사투는 인간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간의 탄생이 절대자로부터의 탄생이라는 창조론적 관점이 아닌, 인간 스스로가 신의 객체임을 거부하고 주체적 존재라는 진화론적 관점으로 쓰인 위 시는 존재의 부재 속에서 인간의 자립에 대한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시의 말미에 있는 “하지만 당신은 끝내 기억해내지 못하는군요/아가미와 지느러미의 시절을”이라는 구절을 통해, 존재와의 독립 가능성을 보여주려던 시인의 노력은 인간이 그 자신의 기원에 대해 망각함에 따라 결국 무용으로 돌아갔음을 알 수 있다.
존재의 부재 속에서 자립하기 위한 시인의 노력이 수포가 됨에 따라 절대자가 부재한 공간에 있는 이들에게 시간이 가지는 의미는 그저 생명력을 천천히 잃어버리는, “곧 녹거나 닳아 없어”(「밀랍의 경우」)지기를 기다리는 과정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끝없는 절망의 나락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수많은 선례를 알고 있다. 부재의 시간을 견디기 위한 또 한 번의 사투가 시작된다.


조롱은 새를 품은 채 날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철망 사이의 공기 함량이 너무 적었다
조롱의 문제는 무거움보다 조밀함에 있었다
가늘고 촘촘한 정신을 두른 조롱은
새의 눈이 어두워지는 동안 조금씩 녹슬어갔다
녹슬어간다는 것은
느리게 진행되는 폭발과도 같아서
붉게 퍼지는 말들이 조롱을 갉아먹었다
조롱은 녹슨 방주처럼 가라앉았다
새가 가진 것은 조롱 속의 허공,
새가 할 수 있는 일은 울음소리를 흘려보내
조롱 안과 밖의 공기를 드나들게 하는 것이었다
닻줄 구멍에서 닻줄을 끌어내듯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날개를 파닥이는 것이었다
물론 조롱에게는 작은 문이 있었다
그러나 문을 열고 닫는 것은 조롱 밖의 권한이었다
물과 모이를 갈아주는 손은
문을 닫고 이내 어디론가 사라졌다
닫힌 문으로 절망은 더 잘 들어왔지만
철망 사이로 스며드는 빛이 그들을 견디게 했다
희박해지는 공기 속에서

― 「조롱의 문제」 전문


새를 가둔 조롱이 사실은 “새를 품은 채 날아가고 싶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새장 속의 새’라는 알레고리적 관념을 훌륭하게 전복시킨 위 시는 절대자의 부재로 인한 두 대상 간 관계의 변화 양상을 면밀하게 보여준다. “물과 모이를 갈아주는 손”으로 표현된 절대자의 부재로 인해 “새”를 가두기 위해 만들어진 사물인 “조롱”은 새와 함께 “철망 사이로 스며드는 빛”을 견디는 사물이 된다. 이러한 두 대상의 관계 변화는 “흰 날개와 검은 날개”(「그의 뒷모습」)가 퍼덕이는 종말의 하늘 아래에 유폐된 사물들 사이에서 조성된 유대의 증명이며, 이러한 유대는 그들이 직면한 절망적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이해된다.
또 한 가지 몸부림의 방법으로써 “조롱은 새를 품은 채 날아가고 싶었다”라며 조롱은 스스로가 “방주”로 거듭나기를 간구한다. 성서의 창세기에 등장하는 이 거대한 배는 인간의 타락에 대한 처벌로 절대적 존재가 내린 대홍수라는 형벌에서 숱한 생명을 구해낸 사물이다. 그러나 절대자의 계시로 축조된 성경 속의 방주와는 달리, 조롱은 절대자에게 버림받은 사물이자 자신의 근원적 한계인 “무거움”과 “조밀함”에 의해 좌절되는 사물이다.
그가 꿈꾸는 심연으로부터의 탈출은 “소용돌이치는 내면을 감아 오르는 덩굴식물”(「아주 좁은 계단」)처럼 자신을 옭아매는 “붉게 퍼지는 말”에 의해 실패로 돌아가며, 조롱 속의 새가 할 수 있는 행위는 “닻줄 구멍에서 닻줄을 끌어내듯/하루에도 수십 번씩 날개를 파닥이는 것”뿐이다. 신에게 버림받은 방주를 움직이기 위한 절망의 몸부림은 망실되는 생명력을 붙잡기 위한 필사의 노력이지만, 절대자의 부재 속에서 두 사물이 마주할 하늘은 연옥의 하늘임이 분명하다.
모든 사투가 의미를 잃음에 따라 절대자의 부재 속에서 남은 이들이 낼 수 있는 목소리는 비탄과 좌절의 목소리뿐이다. “스며드는 빛”으로 절망을 견뎌내던 조롱과 새에게 그 빛마저 사라져 버린 순간, “희박해지는 공기 속에서” 버림받은 이들이 내는 목소리가 한 번 더 행과 연을 비집고 튀어나온다.


숨을 쉬기가 어려워요.
폐에서 물 좀, 물 좀, 빼주세요.
숨 막혀서 못 견디겠어요.
도와줘요, 제발.
폐 속에는 물이 아니라 피가 흥건해요.
깊은 바다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아요.
익사하고 싶지 않아요.
숨만 제대로 쉴 수 있다면 죽어도 좋아요.
(중략)
희미하게 밝아오는 창문들.
이제, 그만, 그만, 문을 닫고 싶어요.
겨우 여기까지 왔는데, 얼마나 더 가야 하나요?
저 검은 바다를 어떻게 건너야 하나요?
세상에서 가장 모진 것은 숨 쉬는 일이에요.
산소가 점점 희박해지고 있어요.
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

― 「겨우 존재하는」 부분


존재가 부재한 종말의 시간이 일상을 영위해야 하는 실존이 위치한 시간이라면, 그에게 있어서 일상은 산꼭대기에 바위를 굴려 올려놓아야 하는 시시포스의 형벌을 수행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타락과 좌절의 공간 속에서 시인이 가지고 있는 죽음 충동은 극대화되어 “세상에서 가장 모진 것은 숨 쉬는 일”이라는 비명으로 분출되며, 이러한 목소리는 절대자가 주권적 현존을 잃어버린 세상에서 인간의 실존이 끊임없는 고통의 연속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존재의 부재 속에서 시인이 지니고 있던 존재의 구음 기관으로써의 역할은 당연히 상실되며, 이러한 상실은 비정상적 언어 행위를 통해 비정상적 상황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눌언의 어조로 증명된다. 실제로 “폐에서 물 좀, 물 좀, 빼주세요,”라는 시의 행과, “이제, 그만, 그만, 문을 닫고 싶어요.”라는 행을 비롯한 텍스트 전체를 통해서 시인이 정상적인 언어의 사용을 지양하며 기존의 언어 문법을 파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비정상적 언어의 사용은 시적 화자가 처한 비정상적 상황, “깊은 바다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이 “숨을 쉬기가 어려”운 상황에 기인하고 있다.
인간에게 있어서 생을 지속하는 데 가장 근본적 행위인 호흡의 불능은 그 인간의 생을 위협하기에 충분하며, 호흡의 불능이 초래하는 고통은 “숨만 제대로 쉴 수 있다면 죽어도 좋아요.”라는 발언으로 미루어볼 때 화자에게 있어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초월하는 고통임을 유추할 수 있다. 고통으로부터의 탈피를 간절히 원하는 화자에게 “희미하게 밝아오는 창문들”은 더 이상 “철망 사이로 스며드는 빛”(「조롱의 문제」)처럼 절망을 견디게 해주는 대상이 아닌 화자에게 주어진 형벌의 시간을 늘리는 대상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화자는 “이제, 그만, 그만, 문을 닫고 싶어요.”라며 자신이 지닌 생명력의 완전한 상실과 동시에 “저 검은 바다”로 표상되는 신이 부재한 공간과의 작별을 희망한다.


3. 파도를 물고 오는 파도


이처럼 시인의 시 세계는 절대자의 부재로 인한 스스로의 죽음 충동의 발현과 피조물의 숙명인 소멸과 조락에 대한 이미지로 가득하다. 살아간다는 것이 대답 없는 존재에 대한 오체투지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녀의 시에 드러난 관념은 끝이 보이지 않는 지난한 수행을 종결짓고 싶다는 바람으로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 시인에게 “저 검은 바다”(「겨우 존재하는」)속에서 “부서진 돛대 끝에”(「아홉번째 파도」) 매달려 삶을 염원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안타까움과 자신에게 느끼는 부끄러움의 정서로 다가온다.


오늘 또 한사람의 죽음이 여기 닿았다
바다 저편에서 밀려온 유리병 편지


2012년 12월 31일
유리병 편지는 계속되는 波高를 이렇게 전한다


42피트 ………… 쌍용자동차
75피트 ………… 현대자동차
462피트 ………… 영남대의료원
593피트 ………… 유성
1,545피트 ………… YTN
1,873피트 ………… 재능교육
2,161피트 ………… 콜트-콜텍
2,870피트 ………… 코오롱유화


부서진 돛대 끝에 매달려 보낸
수많은 낮과 밤, 그리고 계절들에 대하여
망루에서, 광장에서, 천만에서, 송전탑에서, 나부
끼는 손들에 대하여
떠난 자는 다시 공장으로, 공장으로,
남은 자는 다시 광장으로, 광장으로, 떠밀려가는
등에 대하여
밀려나고 밀려나 더 물러설 곳 없는 발들에 대하여
15만 4,000볼트의 전기가 흐르는 電線 또는 戰線
에 대하여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불빛에 대하여
사나운 짐승의 아가리처럼
끝없이 다른 파도를 물고 오는 파도에 대하여
결국 산 자와 죽은 자로 두동강 내는
아홉번째 파도에 대하여


파도가 휩쓸고 간 자리에 남겨진
젖은 종이들, 부서진 문장들


그들의 표류 앞에 나의 유랑은 덧없고
그들의 환멸 앞에 나의 환영은 부끄럽기만 한 것

― 「아홉번째 파도」 전문


자신의 내면세계에 머물러있던 시인의 시선은 이제 자신을 둘러싼 객관세계로 그 방향을 옮기기 시작한다. 실제로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조명하고 있는 위 시는 현실에 만연한 비정상적 상황에 대한 시인의 비판적 인식이 농밀하게 투영되어 있다. 위 시와 같은 제목의 러시아의 화가 이반 아이바조프스키(Ivan Aivazovsky)의 그림처럼, 시에 드러나 있는 사람들이 직면한 상황은 난파선의 잔해에 달라붙어 자신의 생존에 위협이 가해지고 있는 상황과 다르지 않으며 시인은 이러한 상황을 “사나운 짐승의 아가리”에 삼켜지고 있는 상황으로 표현하고 있다. 생존의 끝자락에 서서 “밀려나고 밀려나 더 물러설 곳 없는 발”들이 구축하고 있던 전선(戰線)은, 파도로 상징된 자본주의적 폭력과 비윤리에 의해서 무너지고 만다. 폭력에 대항하여 “수많은 낮과 밤”을 보낸 그들이 끝끝내 폭력에 휩쓸려간 현장에서 시인이 향해가던 죽음으로의 여정은 한없이 “덧없고” 또한 “부끄럽기만”한 과정이다.
“부서진 돛대 끝에 매달”려 생존을 위해 분투하던 이들의 죽음과 그 죽음이 사회에 울리는 경종은 점차 높아지는 파고(波高)의 형상으로 그리고 “15만 4,000볼트의 전기”가 주는 강렬함으로 시인에게 다가온다. 시인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역할, 당대의 사회상을 담아내야 하는 서기(書記)로써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 나희덕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비일상적 폭력의 현장을 계속해서 “유리병 편지”에 담아낸다.


한 개의 청바지가 만들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손에 푸른 물이 들어야 하는지,
그러나 그들은 정작 자신이 만든 청바지 속에 들어
가보지 못했지


그들의 자리는 열두 조각 중 하나,
또는 열다섯 조각 중 하나, 열일곱 조각 중 하나


명랑한 파랑을 위해
질기디질긴 삶을 박고 있을 뿐
미싱 위에서 부표처럼 흔들리며 떠다니고 있을 뿐

― 「명랑한 파랑」 부분


자본주의가 지닌 폭력성의 하나는 물질의 가치가 인간을 넘어서고, 인간이 물질을 생산해내기 위한 도구적 수단으로 전락해버린다는 ‘물질 만능주의’ 풍조의 확산이다. 물질 만능주의 속에서 인간의 실존은 ‘물질을 위한 물질’이라는 명명 아래 바닥으로 내려앉으며 그들이 영위해야 할 일상은 끊임없이 “손에 푸른 물”을 들일 수밖에 없는 지난한 여로의 과정이다. 이 시를 통해 인간의 가치 추락과 물질의 신성화라는 부조리적 현실에 대한 고발과 비판이자, 그러한 현실에서 “부표처럼 흔들리며 떠다니”는 인간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시의 주요한 제재인 “청바지”에 대해 서술해보자면, 청바지는 블루칼라(blue collar)의 상징이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젊음과 활기의 상징으로 그 의미가 변화한 사물이다. 따라서 시인은 청바지를 “명랑한 파랑”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명랑한 파랑”을 만들어내고 있는 인간이 가지는 크기는 “자신이 만든 청바지 속에 들어”갈 정도로 작다. 인간과 제품이 가지고 있는 몸피를 극단적으로 역전시킴으로써 시인은 인간의 주체성이 물질에 의해 찬탈당한 불합리의 현장을 선명하게 텍스트 속에 그려낸다. 따라서 주체성을 빼앗긴 인간-도구적 수단으로 전락한 인간에게 물질을 향유할 권리 따위는 없으며, 그들의 실존적 위치는 청바지를 제작하기 위해 직조된 조각의 자리로 규정된다. 조각의 자리는 제품을 만들기 위한 제품, 다시 말해 앞서 언급했던 물질을 위한 물질의 자리이며 그 자리에 주어진 책무는 오직 제품의 완성뿐일 것이다. 그렇기에 화자가 바라보고 있는 인물들은 “질기디질긴 삶”, 다시 말해 스스로의 생을 제품을 위해 헌신하는 존재들이며, 그들이 처한 상황은 “부서진 돛대 끝에 매달려”(「아홉번째 파도」)서 “부표처럼 흔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4. 천천히, 그리고 다시


신이 폐위된 시대에서 새롭게 왕관을 쓴 자본이라는 절대적 존재의 지배 아래, 나희덕의 시선 속에 비쳐진 인간의 삶은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세계의 밑바닥에. 우리 자신의 밑바닥에”(자카리아 무함마드, 「귀환」, 『팔레스타인의 눈물』) 내려놓아야 하는 과정의 연속이다. 그렇다면 기나긴 부재의 시간 속에서, 파도를 물고 오는 파도 속에서 정박할 곳을 찾지 못한 채 표류하는 인간 앞에 구원의 가능성은 전혀 없는 것일까? 인간은 언제나 자신에게 주어진 형벌을 묵묵히 수임해야 하는 존재에 불과한 것일까?


휠체어에 앉은 당신에게 손을 내밀었을 때
당신은 노련한 선장처럼 웃었지요.
세상의 파도란 파도는 다 겪어본 듯한
고요한 얼굴,
음악이 다시 시작되고
우리의 발은 바닥을 울리며 번져갔지요.
찢어진 땅을 꿰매는 풀처럼
갈라진 파도를 합치는 바람처럼
(중략)
작고 둥근 바퀴가
당신의 두 발을 대신해 돌곤 했어요.
낯선 우리를 태운 방주는 아주 멀리 도망갔지요.

― 「휠체어와 춤을」 부분


방주를 타고 재앙의 시간에서 벗어난, 그리스 신화 속의 데우카리온 부부를 연상시키는 두 인물이 추고 있는 춤은 심연으로 추락한 인간의 실존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기 위한 몸부림의 행위이다. “세상의 파도란 파도”는 「아홉번째 파도」를 비롯하여 인간의 위치를 벼랑 끝으로 내몰기 위해 가해졌던 폭력들의 총체이며, 이러한 폭력에 대항하여 맞선 이에게 남은 것은 육체적 불구이다. 그러나 이러한 불구와 그 불구의 상징인 “휠체어”를, “당신”이 지닌 좌절과 한계성을 보여주고 있는 부정적 의미의 사물로는 볼 수 없다. 휠체어에 타고 있는 그가 짓는 표정은 “노련한 선장”의 웃음이며, 이 웃음은 비통의 시간 속 간난의 세월을 겪은 자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이다. 다시 말해, 그는 “저 검은 바다”(「겨우 존재하는」)를 항해한 인물이자 “철망 사이”(「조롱의 문제」)를 뚫고 나온 인물이며 그가 보여주고 있는 가능성은 부재와 폭력의 시대에서 인간의 주체성 획득과 존엄성의 회복에 대한 가능성이다.
그들의 움직임은 “찢어진 땅을 꿰매는 풀처럼” 삭막한 세계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움직임이며, “갈라진 파도를 합치는 바람처럼” 사회에 팽배해있던 부조리와 폭력을 잠재우는 움직임이다. 이러한 움직임의 궁극적 목표는 자본에게 찬탈당한 왕관을 인간의 머리 위에 씌우기 위함이며, 그러한 노력의 행위는 결국 인간을 재창조해내기 위하여 자신들의 어깨 위로 돌을 던지던 데우카리온 부부의 행위와 다르지 않다.
심연으로부터의 탈출 가능성을 시사한 “당신”이 가지는 의미는 인간 존재가 묵시록 속에서 끊임없이 고해를 토해내야 하는 존재에서, 생을 향유할 수 있는 주체적 존재로 승격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로 인해 시집에 드러나 있던 죽음으로의 여정에 대한 의미도 그 방향을 조금 달리하게 되는데, 이전의 시에서 드러난 생명의 여정이 소멸과 쇠락의 시간을 견디다 못해 결국 죽음으로 이탈해버리는 과정이었다면 이제 그들은 삶의 주체적 존재로서 충분히 생을 향유하고, 기꺼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다음 시는 이러한 변화 양상을 아일랜드에서 점을 치는 화자의 모습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내가 집어든 것은 진흙,
차갑고 축축하고 부드러운 질감이
손끝에 느껴질 때
그것이 죽음이 만져지는 순간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조금 놀라기도 하지
(중략)
그것으로 빚을 수 있는 많은 것들이 있고
진흙이 마르는 동안 갈라지는 슬픔 또한 기다리고
있으니
나는 눈 어두운 진흙의 사람,
그러니 내 손이 진흙을 집어들더라도
부디 놀라지 말기를!
가렸던 눈을 다시 뜬다 해도
나는 역시 한 줌의 진흙을 집어들 것이니!

― 「진흙의 사람」 부분


우리나라의 돌잔치 풍속과 같이 자신이 집어 드는 물건에 따라 앞으로의 생을 유추해보는 아일랜드의 점에서 시인은 죽음을 상징하는 진흙을 집어 든다. 그러나 시인에게 있어서 죽음은 더는 피하고 싶은 대상 혹은, 피하기 위한 도피처로서의 아니다. 그녀는 진흙에 대해서 “빚을 수 있는 많은 것”이 있다며 인간의 삶의 과정, 즉 죽음으로의 여정 속에서 인간이 성취하거나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 많다고 이야기한다. 이는 죽음으로 나아가는 길이 단순히 생명력의 망실을 방관할 수밖에 없는 시간이 아니라, 인간이 삶의 주체로써 무언가를 이루어내야 하는 시간임을 시사한다. 또한 시인은 “진흙이 마르는 동안 갈라지는 슬픔 또한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는데, 이는 삶의 과정을 겪는 동안 마주할 수 있는 고난의 순간, 이를테면 “부서진 돛대 끝에 매달”(「아홉번째 파도」)리는 순간과 마주하더라도 그 순간을 당당히 감내하겠다는 의지의 표출이라고 해석된다. 그렇기에 시인은 죽음을 피하기보다 “나는 역시 한 줌의 진흙을 집어들 것”이라며 그 순간을 기꺼이 맞이하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렇듯 “한 줌의 진흙을 집어들”수 있을 정도로 부재와 폭력의 시간을 견디는 방법을 깨우친 그녀에게 “떠난 자는 떠난 게 아니다. 불현듯 타자의 얼굴로 돌아오고 또 돌아온다.”는 시집 뒷면의 말처럼, 오랜 부재의 시간을 깨고 천천히, 그리고 다시 말들이 돌아오기 시작한다.


말들이 돌아오고 있다
물방울을 흩뿌리며 모래알을 일으키며
바다 저편에서 세계 저편에서
(중략)
가라, 가서 돌아오지 마라
이 비좁은 몸으로는


지금은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수만의 말들이 돌아와 한 마리 말이 되어 사라지는
시간
흰 물거품으로 허공에 흩어지는 시간

―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부분


바슐라르(G. Bachelard)의 말대로 언어 생성과 더불어 존재 생성이 이루어진다면, 말(언어)들이 돌아오는 시간은 존재가 돌아오는 시간으로 여겨도 좋을 것이다. 오랜 부재의 시간을 지나 마주한 말-언어-존재와의 재회에서, 화자가 취하는 행동은 외부에 있는 “수만의 말들”을 자신의 내부로 끌어와 “한 마리 말”로 풀어내는 행위이며 이러한 행위는 자신에게 존재를 접신시키는 과정이자 존재가 귀환함에 따라, 부재의 시간 속 벌어졌던 비윤리와 폭력에 대한 폐막을 의미한다.


5. 끝으로


지금까지 살펴보았듯, 나희덕의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에는 존재론적 성찰과 자본주의 세계에 관한 비판적 의식, 그럼에도 ‘말’을 통해 다가오는 존재 생성과 회복의 가능성이 담겨 있다. 물론 ‘뒤로가기’ 버튼으로 커서를 옮기며 출간된 지 꽤 오래된 시집이 오늘날 발휘하는 효용성에 의문을 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인류세 담론을 포함한 여러 문제가 그렇듯, 당대의 적확한 시의성만으로는 시선과 생각의 폭을 넓히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출간된 지 8년이 지난 시집을 다시 읽을 때, 8년이라는 시간 동안 우리는 우리를 얼마나 더 잘 알게, 혹은 모르게 되었는가. 부디 이 글이 지루한 동어반복일지언정, 당대의 현실을 사느라 잠깐 잊었던 부분을, 접어두었던 숙제를 생각나게 하는 데 도움이 되었기를 바라며 글을 닫는다.














작가소개 / 김진석

2021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평론을 쓰기 시작함


《문장웹진 2022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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