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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규범과 폭력

  • 작성일 2022-07-01
  • 조회수 1,594

[현장 비평]

《문장웹진》은 다양한 시선을 통해 폭넓은 담론을 펼칠 수 있는 ‘비평의 장’을 마련하고자
2020년 진행되었던 〈본격! 비평〉 코너를 정비하여, 2021년 4월호부터 〈현장 비평〉을 선보인다.
2022년 〈현장 비평〉은 신진 문학평론가 12명이 각자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자유롭게 주제를 정해 매월 1편씩 발표된다.






사회적 규범과 폭력



최정호




1.


우리는 ‘가족’이라는 단어를 재고해 봐야 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부모와 자식으로 구성된, 혈연 중심의 공동체를 ‘가족’이라고 부른다. 구성원 중 누군가 부재할 때, 사망이나 이혼 등의 사유로 공동체에 결원이 발생할 때, 그 공동체는 ‘결손 가족’ 혹은 ‘한부모 가족’으로 재명명 된다. 이러한 재명명의 기저에는 그들의 공동체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인식이 있다. 보편적인 ‘가족’은 부모와 자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누군가 부재한 공동체는 보편적인 ‘가족’과는 다르며 문제가 발생할 여지가 많다는 차별의 시선이 작동한 것이다. 그래서 ‘가족’이라는 말 앞에 ‘결손’과 ‘한부모’를 덧대어 그들을 보편적인 ‘가족’과 구분한다.
사실, ‘결손 가족’이나 ‘한부모 가족’이라는 말로 구분되지조차 못한 채 배제되어 버린 사람들도 있다. 이를테면 성소수자 커플들. 그들은 자신의 동반자와 오랜 기간 관계를 유지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병원에서 보호자로 인정받지 못하거나 동반자의 사망 신고를 접수하지 못한다. 2014년에 생활동반자법 도입이 논의되기는 했으나 아직 이렇다 할 성과는 없다.1) 생활동반자법이 지지부진하고, 그들의 공동체가 여전히 ‘가족’이라 불리지 못하는 데에는 사회적으로 만연한 혐오의 영향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가족’이라는 말에는 차별과 함께 혐오 또한 내재되어 있는 셈이다.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라고 할 수 있는 ‘가족’ 안에 차별과 혐오가 내재되어 있다면, 우리의 사회를 이루고 있는 체계 또한 근본적으로 차별과 혐오의 토대 위에 세워진 것은 아닐지 의심스러워진다.


나는 지금까지 항상 부모의 사랑을 절대로 찬미하여 왔다. 연인의 사랑, 친구의 사랑은 상대의 보수적인 반면에 부모의 사랑만은 영원무궁한 절대의 무보수적 사랑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조실부모한 것이 섧고 분하고 원통하여 다시 그런 영원의 사랑맛을 보지 못할 비애를 감(感)할 때마다 견딜 수 없어 쩔쩔매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오해이었음을 깨달을 때, 낙심되었다. 실망하였다. 정이 떨어졌다.
(중략)
세인들은 항용, 모친의 애라는 것은 처음부터 모 된 자 마음속에 구비하여 있는 것같이 말하나 나는 도무지 그렇게 생각이 들지 않는다. 혹 있다 하면 제2차부터 모 될 때에야 있을 수 있다. 즉 경험과 시간을 경(經)하여야만 있는 듯싶다.2)


또한 ‘가족’ 안에 내재되어 있는 차별과 혐오는 단기간에 형성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우리의 역사 속에서 제 몸집을 불려 왔고, 그때마다 ‘나’라는 주체는 폭력과 마주해야 했다. 1923년 화가이자 작가였던 나혜석은 「모(母) 된 감상기」라는 글을 발표했다. 「모(母) 된 감상기」는 임신과 출산을 겪은 나혜석의 경험담이다. 당시 나혜석은 글을 발표하고 많은 지탄을 받았다. 모성은 당연한 것이 아니고 부모의 사랑 역시 다른 사랑처럼 “보수적”이라는 나혜석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유교적 관념 아래 가부장적인 가족 체계를 유지하고 있던 당대의 사회 분위기를 고려해야 한다. ‘가족’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구성원들의 역할이 명확히 나뉘어 있었다. 그중 여성, 어머니는 구성원들에 대한 “무보수적” 사랑과 헌신을 요구받았다. 결국 나혜석이라는 개인의 경험은 배척되었다. 이는 사회가 한 주체에게 보편적인 가치관을 강요한 폭력의 예시이다. 앞서 말했듯이 오늘날의 ‘가족’에도 차별과 혐오가 내재되어 있다면, 나혜석이 마주했던 폭력은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을 것이고, 현재에도 유효할 테다.
한정현3)의 소설에도 그런 인물들이 나온다. 지금껏 외면해 왔던, 혹은 존재하는지 몰랐던 폭력과 마주하는 인물들이. 사회적 규범의 비호를 받는 폭력과 마주한 인물들은 하나의 주체로서의 ‘나’를 상실할 위기 상황에 놓인다. 그 폭력의 위상은 너무나 공고해서 극복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이 글에서는 한정현의 소설 속 인물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폭력에 저항해 온전한 ‘나’가 되어 자신의 ‘가족’을 일구어내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1) “사망 신고도 못 하는 동성 커플…인권위 “법적 가족으로 인정해야””, 〈KBS NEWS〉, 2022.04.15.(07:00),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5440892&ref=A
2) 이상경, 「모(母) 된 감상기」, 『나혜석 전집』, 태학사, 2000, 232쪽.
3) 이 글에서 다루는 한정현의 작품은 다음과 같다. 「과학하는 마음-관광하는 모던 걸에 대하여」(『소녀 연예인 이보나』, 민음사, 2020), 「쿄코와 쿄지」(《문학과사회》 봄호, 문학과지성사, 2021), 「결혼식 멤버, 結婚式のメンバー」 (『엄마에 대하여』, 다산책방, 2021). 이후 본문에서 작품을 인용할 때는 괄호 안에 작품명과 쪽수만 표기할 것이다.


2.


한정현의 「과학하는 마음-관광하는 모던 걸에 대하여」(이하 본문에서 인용할 시 「과학하는 마음」으로 인용)의 서사는 경아와 사츠케의 관계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이들의 연애는 한 편의 영화를 계기로 시작되었다. 경아는 우연히 하라 카즈오의 〈극사적 에로스〉를 보았는데, 영화 속 그녀가 사회의 요구를 거부하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려는 모습을 보며 “내 안에서도 무언가가 돌이킬 수 없게 바뀌고 있다”(184쪽)고 느낀다. 이 변화로 경아는 “발언하는 나”, “호명하기도 하는 나”가 되고 싶다는 욕망을 품는다. 〈극사적 에로스〉가 2009년의 한국과 무관하지 않다는 경아의 언급을 고려해 보면, 새로운 ‘나’에 대한 경아의 욕망은 영화 속 그녀처럼 사회의 요구에 매몰되지 않고 한 명의 주체로 거듭나겠다는 다짐처럼 보인다. 경아의 새로운 욕망에 응답한 사람이 사츠케였다. 〈극사적 에로스〉를 시작으로 트위터를 통해 1년간 대화를 나눈 끝에 경아는 도쿄행 비행기를 탄다. 사츠케를 직접 보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이 경아를 움직이는 원동력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연인이 된다. 욕망에 대한 응답과 순수한 마음으로부터 비롯된 두 사람의 미래를 낙관하고 싶지만, 두 사람이 사는 사회가 관계에 균열을 만들어낸다.


나는 사츠케가 너무 좋았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너무 좋았다. 그러나 그의 설명을 들은 후 나는 차마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노력하면 된다는 생각은 곧, 그런데 무엇을 노력한단 말인가. 사랑을? 국적을? 재일을? 한국을? 말문이 막혔다. 그렇게 나는 내 삶에서 처음으로 선명하지 않은 무언가를 남겨 두었다. 오로지 사츠케를 계속 보기 위해서 말이다.(188쪽)


“세상 모든 건 의지만 있으면 선명해질 수 있다”(187쪽)고 믿었던 경아는 사츠케를 만난 뒤 생애 처음으로 “선명하지 않은 무언가”를 남겨 두게 된다. 이 “선명하지 않은 무언가”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사츠케를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츠케의 집안은 김일성 부자의 사진을 벽에 걸어 둘 정도로 정체성이 확고하다. 때문에 일본에서 태어나 성장하고 일본식 이름을 가지고 있음에도 사츠케는 일본인이 아닌 재일 조선인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사츠케는 올림픽 때문에 이전할 위기에 놓인 츠키지 시장을 보며 일본 사회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이다. 사츠케가 생각하는 본인의 정체성은 일본인에 가깝다. 사츠케를 재일 조선인으로 분류하는 사회의 시선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한국으로 갈 수 없다는 구체적인 제약으로 다가온다. 한국인 관광객 앞에서는 일본어를 사용하고, 경아와 둘이 있을 때는 한국어를 사용하는 기이한 행동을 통해 우리는 ‘재일 조선인’ 사츠케의 삶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재일 조선인이라는 구분은 전쟁의 산물이다. 과거 동아시아에서 발발한 전쟁은 이념과 이념의 부딪힘이었다. 전쟁은 사회의 새로운 규범과 제약 그리고 차별을 양산했다. 재일 조선인이라는 구분도 그 과정에서 생성되었다. 과거의 역사가 만들어낸 새로운 규범이 ‘일본인-재일 조선인’이라는 폭력이 되어 사츠케에게 이어진 셈이다. 역사의 맥락 속에서 사츠케를 둘러싸고 있는 “정상성/규범성이 임의적으로 구성된 것에 지나지 않다”4)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사회는 재일 조선인이라 말하고 스스로는 일본인이라 여기는 모순 속에서 사츠케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다. 자신을 만나기 위해 도쿄로 온 경아를 본가로 부르지 않고 본가 근처 긴자 숙소에 머물게 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이제 “선명하지 않은 무언가”의 정체에 대해 말할 수 있겠다. 그것은 경아와 사츠케,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사회적 규범이다. 두 사람이 지닌 한국인 그리고 재일 조선인이라는 정체성, 사회적 규범이 부여한 제약들이 그들의 미래를 불투명하게 만들었다. 한국에 입국할 수 없는 사츠케와 한국의 현실을 잘 알고 있는 경아는 자신들이 가족이 되어 함께하는 미래를 확신할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 미래, 사랑, 국적, 결혼”(194쪽)을 금기어로 삼아 “선명하지 않은 무언가”를 외면한다. 문제는 이렇게 “선명하지 않은 무언가”를 외면하는 동안 사츠케가 자신이 겪고 있는 폭력과 같은 방식의 폭력을 경아에게 행한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당시 히로시마에 떨어진 에놀라 게이를 싣고 간 것도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비행기라는 것, 너도 알지?”
그러나 내 욕망은 확실히 사츠케를 거슬리게 한 모양이었다. 나는 사츠케의 말이 내 윤리의식을 겨냥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에놀라 게이를 만든 맨해튼 프로젝트의 일원 중 누구도 그것이 실제 히로시마로 갈 줄은 몰랐다는 것 (중략) 나는 이렇듯 표면이 아닌 이면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우리를 만나게 해준 건 전후 과학기술의 발전이라는 의미에서의 비행기가 아니라, 저들의 과학하는 마음, 그 자체에 가까울 것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183쪽)


경아는 언젠가 자신이 품고 있는 비행기에 대한 욕망을 고백한 적이 있다. 그때 사츠케는 전쟁 역사를 끌고 와 경아의 윤리의식을 공격했다. 이런 사츠케의 태도는 “현재의 사회적 조건들을 무시하는 윤리적 에토스는 폭력적이게 된다.”5)라는 주디스 버틀러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윤리적 에토스를 적용할 때에는 언제나 현재의 사회적 상황을 고려해야만 한다. 만약 현재의 사회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윤리적 에토스를 보편화시킨 채 누군가에게 적용한다면, 그때 윤리적 에토스는 “폭력”으로 변질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과학하는 마음”을 무시하고 에놀라 게이의 사례로 비행기를 보편화하는 사츠케의 방식은 폭력적이다. 흥미로운 지점은 앞서 말했듯 사츠케 역시 이러한 방식의 폭력으로 고통 받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사회적 규범이 정한 구분 때문에 재일 조선인이라는 보편으로 규정당하는 사츠케가 아니던가? 이런 사츠케의 이중성은 경아의 욕망을 억누른다. 도쿄 말고도 비행기를 타고 여행할 수 있는 관광지가 많음에도 경아의 목적지는 언제나 도쿄이고, 관광객의 마음을 품고도 관광객처럼 행동하지 말 것을 요구받는다.


어쨌거나 확실한 건 하나였다. 평생 그의 아버지는 어머니를 그렇게 불렀다는 것이다.
“저거 치워.”
그 순간, 사츠케의 어머니와 나, 그리고 사츠케와 어머니, 다시 어머니와 나와 사츠케와 이 세상 사이에는 재일 여성해방운동에 앞장섰던 김이사자의 말이 놓였다. “나에게 재일이라는 것과 여성이라는 것은 동일한 것이다.”(192쪽)


경아가 사츠케의 어머니와 마주한 순간이다. 사츠케의 어머니가 남편에게 평생 “저거 치워”라는 말로 호명되어 왔음을 알게 되는 순간 경아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 김이사자의 말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사츠케의 어머니는 재일 조선인인 동시에 여성이다. 그녀 역시 사츠케처럼 ‘일본인-재일 조선인’이라는 구분으로 인한 폭력에 노출되어 왔을 것이다. 그녀를 괴롭힌 폭력은 하나가 아니었다. 그녀는 가부장적인 가족 체계 안에서 이름을 상실한 채 ‘어머니’의 역할을 요구받았다. 그런 그녀가 결혼 후 국적을 물을 때, 그 물음은 단순한 질문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경아는 국적이라는 이야기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자기 모습을 발견하고 어떤 ‘마음’을 발견해 낸다. 매일 아침 김일성 부자의 사진을 닦아 왔지만, 편견 없이 어떤 국적을 선택할 것이냐고 물을 수 있는 마음. 본인의 이름으로 호명되지 못한 채 살아왔지만, “이름을 가졌군요, 멋있어요”(193쪽)라고 말해 줄 수 있는 마음. 그 마음에는 경아와 사츠케가 10년간의 연애 동안 외면해 온 “선명하지 않은 무언가”를 단숨에 뛰어넘게 할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리고 그 마음 저편에 여전히 꼼짝하지 못하는 경아와 사츠케가 있다. 사츠케의 어머니와 만나고 “무언가를 뛰어넘는 건 오롯이 그러고자 하는 ‘마음’”(194쪽)이라는 것을 깨달은 경아는 변화하기 시작한다. “나 관광객 맞는데”(194쪽)라는 경아의 말은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는 사츠케의 요구를 더 이상 수용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자 언젠가 다짐했던 것처럼 사회의 요구에 매몰되지 않고 한 명의 주체가 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런 경아에게 ‘모던 걸’의 이야기가 찾아온다. 사츠케가 들려주는 누이의 이야기는 보편화된 윤리적 에토스로 인한 폭력의 또 다른 예시이다. 사츠케의 누이는 공대에 들어가라는 아버지의 요구를 거부하고 예술대에 들어간다. 아버지는 그런 사츠케의 누이를 긴자의 모던 걸들이나 하던 짓을 하고 다닌다며 비하한다. 이때 아버지의 머릿속에서 작동한 의식은 ‘모던 걸=할리우드 영화나 보러 몰려다니는 정신 나간 여자들’이다. 이러한 의식은 사회적 상황을 고려하지 못한, 성급한 보편화의 결과이다. 모던 걸들의 탄생 배경에는 과학에 대한 동경이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그 사실을 끝까지 믿지 않는다. 사츠케의 누이는 “차라리 합법적인 관광객이 되어 살아갈 것이다.”(196쪽)라는 말을 남기고 뉴욕으로 떠난다. 사회의 요구와 규범에 매몰되지 않고 스스로 선택하는, 오롯이 홀로 선 주체의 모습이다.


그러니까 모던 걸은 원래 자신의 선택을 따라 움직이는 사람, 그러므로 관광하는 모던 걸 또한 어디든 갈 수 있다.
“너를 좋아하는 나를 위해서, 이제 오키나와로, 나하로 갈게.”(205쪽)


경아는 여행을 준비한다. 이전과 달리, 이번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곳으로 향할 것이다. 그곳에서 경아는 온전한 관광객이 될 수 있을 테다. 욕망을 억누를 이유가 없으니 말이다. 경아가 가진 비행기에 대한 순수한 애정, 과학하는 마음이 그녀가 한 명의 주체로 거듭날 수 있게 하는 힘이다. 한 명의 주체인 ‘나’로 좋아하는 곳을 여행하는 경험은 사츠케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 경아는 사츠케를 좋아하는 마음 또한,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자신의 욕망, 품고 있는 마음을 명확히 깨달은 경아의 모습은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규범과 제약을 완전히 뛰어넘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게 한다. 그때가 되면 경아와 사츠케는 그들의 욕망과 마음으로 만들어낸 ‘가족’이 되는 미래를 그려 볼 수 있을 것이다.


4) 한영인, 〈폐허의 반복, 이면의 낙관〉, 《문학과사회》 겨울호, 2020, 336쪽.
5) 주디스 버틀러, 『윤리적 폭력 비판』, 인간사랑, 2013, 15쪽.


3.


사회적 규범이 보편화되어 한 주체와 만났을 때 그것이 폭력이 된다는 사실을 「과학하는 마음」을 통해 확인했다. 「과학하는 마음」에서 드러난 사회적 규범과 그 폭력성이 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에서 시작돼 현재까지 이어져 왔다면, 「쿄코와 쿄지」는 5·18이라는 역사적 사건 속으로 직접 뛰어들어 5·18이 만들어낸 규범이 하나의 공동체를 파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피로 얽혀서 폭력적이지 않은 게 없어, 집에 있는 가족들만 봐도 그렇잖아? 난 너희랑 피로 얽힌 가족은 안 되고 싶어.”


「쿄코와 쿄지」의 네 인물, 경녀, 혜숙, 미선, 영성의 이야기다. 네 사람은 제각기 다른 가정환경에서 자랐고, 서로 다른 학교로 진학한다. 얼핏 보면 이들의 관계는 어린 시절 친했던 친구 정도에 머무르고 각자의 삶을 살게 될 것 같지만, 사회적 규범이 만들어낸 폭력의 피해자라는 공통점이 네 사람의 관계를 공고하게 만든다.
경녀의 아버지는 “여자의 인생은 좋은 남자를 만나는 것으로 결정”(95쪽)된다는 당대의 보편적 관념을 그대로 믿고 경녀를 영부인과 동문으로 만들기 위해 재수학원에 등록시켰다. 경녀의 의사와는 무관한 결정이었고 경녀는 재수학원 생활이 불행했다고 기억한다. 혜숙의 가족은 전형적인 가부장제의 양상을 보여준다. 딸보다 아들이 우선이라는 가부장제의 보편적 관습은 혜숙에게 원하는 대학을 포기할 것과 오빠의 폭력을 묵묵히 감내할 것을 요구한다. 미선은 일본인의 피가 섞여 있다는 이유만으로 “친일파라고, 더러운 피”(94쪽)라고 매도당해 왔다. 일제강점기로부터 수십 년의 시간이 지나 미선이라는 개인이 사실상 일본과 무관하다는 사실은 고려되지 못했다. 미선을 괴롭히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미선의 할아버지가 일본인이라는 사실뿐이다. 영성은 스스로를 여자라고 생각하지만, “아들이니까 인간 대접 받고 사는 거라”(83쪽) 말하는 아버지 때문에 원치 않는 남자의 삶을 살아야 했다. 여자이고 싶은 욕망을 억누른 채로 말이다.
이처럼 사회적 규범이 만들어낸 폭력에 시달려 온 네 사람은 “피로 얽혀서 폭력적이지 않은 게 없”음을 깨닫고 새로운 공동체를 소망한다. 그들이 소망하는 공동체는 사회가 기존에 규정해 놓았던 혈연을 중심으로 한 ‘가족’의 개념을 거부한다. 그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엮어 주는 것은 혈연이 아닌 ‘스스로 자(自)’다. (이후 본문에서 네 사람을 호명할 때는 그들의 새로운 이름인 경자, 혜자, 미자, 영자로 호명) ‘아들 자(子)’를 고민하다가 ‘스스로 자’로 선회한 그들의 선택은 더 이상 사회적 규범과 그 폭력성에 매몰되지 않고 주체로 거듭나겠다는 의지의 발현이다.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가족’이라는 말에 차별과 혐오가 내재되어 있고 그로 인해 배제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해 보면, 사회가 규정한 ‘가족’을 거부하는 네 사람의 공동체 역시 배제될 운명임을 알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역사 속에서 배제된 네 사람의 공동체를 조명하는 한정현의 글쓰기는 김영삼의 지적처럼 “소외와 배제의 미로 속에 갇힌 인물들에게 말과 소리를 부여하는 복원 작업”6)으로 보인다.


소영성에 고정되어 있던 미자의 시선이 이번엔 영자의 얼굴로 향합니다.
“너도 혜자 같은 사람들에게 총을 쐈니?”
나는 순간 의자를 박차고 일어서 영자를 뒤에서 꽉 끌어안았습니다. 영자가 뒤로 넘어갈 것만 같았어요. 무언가 빠져나간 것처럼 느껴지던 영자를 끌어안으며 미자가 앉아 있던 곳을 바라보았을 때, 그곳엔 죄 없는 백발의 노인이 베로니카 자매님 대신 있었습니다.(97쪽)


1980년 5월 18일, 광주를 강타한 국가적 이데올로기가 새로운 규범을 만들어냈다. 그 규범은 사람들을 ‘광주 사람’과 ‘북한 사람’으로 구분 짓고 ‘빨갱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라고 요구한다. 광주 사람 아니면 북한 사람이라는 식의 보편화는 개개인이 가진 욕망을 무시하는 폭력적인 처사이다. 이 폭력에 혜자와 미자 그리고 영자가 휘말린다. 자기 이름에 ‘스스로 자’를 붙여 새로운 공동체를 만든 혜자와 미자는 사회적 규범이 생산한 이분법에 순응하지 않는다. 결국 혜자는 군인이 쏜 총에 맞아 죽고, 미자는 성당 안으로 사람들을 대피시키다가 붙잡혀 정신병원에 수감된다. 둘과 달리, 군 복무 중이었던 영자는 새로운 규범을 거부하지 못했다. 그는 명령에 따라 ‘영자’가 아닌 ‘소영성’이 되어 사람들을 죽였다. “우리가 정말 피보다 강한 것으로 얽혔을지 모른다고 느꼈을 때”(98쪽) 영자가 자살하면서 그들의 공동체에 경자만 남게 된다. 혈연으로 얽히지 않았기 때문에, 경자는 영자의 부모가 영자를 ‘소영성’이라는 이름으로 사망 신고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네 사람의 공동체가 사회적 규범이 생산한 폭력에 의해 파괴되며 이야기가 비극으로 마무리될 듯하지만, 그들에게는 영소라는 희망이 남아 있다.


“응, 근데 거기는 원래 일본 땅도, 미국 땅도 아니었고 평화로운 곳이었나 봐. 전쟁도 폭력도 없이, 동물과 사람들이 어울려 평화롭게 살던 아름다운 섬.”
“그런데 일본이 또 침략한 거야? 조선에 그랬던 것처럼?”
“응, 근데 갑자기 일본이 섬을 지배하면서 그런 질문들을 하기 시작한 거야. 넌 일본인이냐 오키나와인이냐, 설마 조선인이냐 이런 거. 그때 오키나와 사람과 조선인은 거의 같은 취급을 당했다고 하거든. 오키나와인들의 시신을 수습해 준 것도 조선인들이고 아무튼 그래서, 거기 사람들은 살려면 자기가 일본인이라는 걸 어떻게든 증명해야 했대. 모두가 마음만은 일본이 싫었겠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용기 있고 정의로운 사람이 될 순 없으니까 말이야.”(91쪽)


혜자가 낳고, 영자의 이름을 물려받은 영소는 경자와 함께 오키나와로 이주한다. 위의 인용문에 나온 것처럼 오키나와의 평화는 일본의 침략으로 깨진다. 일본군이 가져온 ‘일본인’과 ‘오키나와인’이라는 이분법은 5·18을 떠올리게 한다. 광주를 강타한 국가적 이데올로기가 사람들에게 ‘빨갱이’가 아님을 증명하라고 요구한 것처럼, 일본군도 오키나와인들에게 본인이 ‘일본인’임을 증명하라고 요구했다. 오키나와와 광주는 같은 종류의 폭력을 겪은 것이다.
그런 오키나와에서 영소는 재일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혐오의 대상’이 된다. 다른 아이들이 내뱉는 “더러운 피”라는 혐오 발언 때문에 손목을 그어 피를 보여주는 파괴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증명하고픈 충동을 느끼기도 한다. ‘재일 한국인’이라는 구분과 폭력적인 증명 요구는 광주 그리고 오키나와의 경우와 흡사하다. 그렇다면 ‘빨갱이’와 ‘재일 한국인’이라는 혐오가 남아 있는 광주와 오키나와처럼 영소 역시 혐오를 재생산해 다른 이에게 폭력을 가하게 될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역사를 배우며 “안정을 찾게”(108쪽) 되고, 오키나와를 “폭력으로 얼룩진 땅”(109쪽)으로만 보는 연구자들과 달리, 오키나와에는 “그런 폭력도 있지만 소바도 있고 맥주도 있고 고구마도”(109쪽) 있다는 것을 아는 연구자로 성장한다. 사회적 규범이 만들어낸 폭력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의 시선을 보유한 영소가 기록하는 이야기 속에서 혈연이 얽히지 않았다는 이유로 네 사람의 공동체가 배제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선택한 경자, 혜자, 미자, 영자라는 이름으로, 한 명의 주체로 기록된다.


6) 김영삼, 〈소수자-퀴어-청년이 역사와 만나는 방식 - 한정현의 「쿄코와 쿄지」와 서이제의 「#바보상자스타」를 중심으로〉, 《문학들》 여름호, 2021, 253쪽.


4.


하지만 박사를 졸업하고도 시간강사 일과 계약직 연구원 일을 하다 보니 모험심은 자연스레 사라졌다. 대학에서의 강의, 연구원이라는 직함, 가끔 하는 번역으로 따낸 번역가라는 타이틀. 그러나 타이틀 뒤에서 나나는 점점 작아졌다. 이제 모험은 고사하고 히키코모리가 되지 않으면 다행인 존재감만 남았다. 그렇게 모험심 부족의 임나나는, 그러므로 마음속으론 글쎄요와 같은 목소리가 나올지언정 현실의 삶에서는 일단 결혼을 해보기로 했다.(13쪽)


「결혼식 멤버, 結婚式のメンバー」의 주인공은 나나이다. 나나는 남자와의 결혼을 준비 중인데, 정말로 결혼을 원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나나가 결혼하는 이유는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찾을 수 있다. 공부하고 싶다는 욕망을 따라서 박사학위까지 땄지만 안정되지 않는 생활과 그로 인한 모험심 부족이다. 이렇게 나나가 결혼하는 이유를 따라가다 보면, 그 이유가 나나에게 되돌아가 그녀를 위축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나나가 품었던 학업에 대한 열정은 분명 순수한 것이었을 텐데, 어느 사이엔가 나나가 사귀었던 연인들이 그녀와의 결혼을 거부하는 원인으로 전락해 있다. 과거의 연인들은 모두 나나의 열정을 응원하면서도 그녀의 곁에 남지는 않았다. 반복되는 거부는 나나를 점점 작아지게 했다. 그래서 나나는 “자신과 결혼하려는 남자가”(29쪽) 고맙다.
고마움은 어머니의 메일을 발견하면서 “정말 그랬나”(29쪽)라는 의문으로 바뀐다. 나나는 자신이 결혼제도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남자에 대한 고마움도 근본적으로는 결혼제도가 아닌 “그저 이 순간 자신을 떠나 주지 않는 마음”(29쪽)에서 기인한 순수한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쌓여 있는 메일을 읽을수록 나나 역시 결혼제도라는 사회적 규범의 영향력 아래에 있음이 분명해진다.


내 앞에 선 여자가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었죠. 자세히 보니 동남샤프 TV 로고를 가슴께에 단 채 눈물 흘리던 그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대체 왜 난 그 얼굴을 보았다고 생각했을까요……. 나는 나조차도 가늠하기 어려운 나의 생각이 무례하다 느꼈고 얼른 그곳을 빠져나오고야 말았습니다. 사실 그 얼굴들 속에 내가 끼어들어 가는 게 무서웠던 게 아닐까, 집에 와서는 그런 생각도 했었지요. 이 일이 있고 얼마 후 나는 귀하의 아버지와 혼인합니다.(35쪽)


공부를 위해 입국한 나나의 어머니는 결혼해서 한국에 정착할 생각으로 연애를 한다. 몇 번의 연애를 거친 그녀는 결혼 이야기가 오갔던 남자들이 공부에 대한 욕망을 우려하고 “아이는 누가 키우느냐고 되물었”(25쪽)다는 데에서 이상함을 느낀다. 남자들의 우려와 질문은 나나의 어머니를 한국 사회의 보편적 ‘결혼제도’로 편입시키려는 시도이다. 남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결혼제도’ 속에서 ‘어머니’는 아이와 가정에 헌신하는 사람이므로, 공부에 대한 욕망을 포기하고 집에 머물며 아이를 키울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는 명백한 폭력이다. 하지만 나나의 어머니는 식당에서 “남자에게 결혼을 거절당한, 사회가 정한 결혼적령기의 여자가 되어버”(28쪽)리는 경험을 하고 자신도 그렇게 사회적 규범에서 제외된 “그 얼굴들” 중 하나가 될까 봐 초조하고 무서워져 서둘러 ‘결혼제도’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이러한 경험담을 읽은 나나도 자신이 품었던 고마움이 사실은 “초조했던”(33쪽)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러니까 결국 나나도 ‘결혼제도’에 연연하는 사람이었다. 나나는 더 나이를 먹기 전에 ‘결혼제도’로 들어가라는, 들어가서 편해지라는 주변의 요구를 무시하지 못하고 ‘결혼제도’에 편입되는 중이다. ‘결혼제도’를 단번에 떨쳐내지 못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볼 때 “폭력의 구조에 포획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자기 자신이고자 하는 바람 때문”7)이라는 김요섭의 지적은 날카롭다.


그것도 아니라면 적어도 귀하의 아버지가 그때, “어떻게 나 혼자 아이를 키우라고 그래! 내 곁에 있어 줘!” 했다면 말입니다.(44쪽)


「과학하는 마음」과 「쿄코와 쿄지」에서 확인한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회적 규범이 만들어낸 폭력의 구조에 포획된 채 머무른다면 온전한 주체가 될 수 없다. 차별과 혐오가 내재되어 있는 ‘가족’ 공동체 속에서 욕망을 억눌린 채 매몰될 뿐이다. 나나의 어머니가 공부에 대한 욕망을 다시 꺼내자 나나의 아버지는 가부장제의 논리로 그녀를 비난한다. “그래도 아이는 네 전부여야지”(43쪽) ‘나’라는 주체를 완전히 지우고 그 자리를 아이로 채우라는 폭력적인 요구이다. 나나의 어머니는 그 요구에 나나의 아버지 몫이 존재하지 않음을 포착해 낸다. 나나의 아버지는 혼자서 나나를 어떻게 키울지 걱정하지 않는다. 아이를 키우는 것은 어머니의 몫이니까. 가부장제라는 사회적 규범 아래에서, 나나의 어머니는 ‘아이에게 헌신하는 어머니 역할’을 거부한 나쁜 사람이 되고 반대로 나나의 아버지는 좋은 사람이 된다.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보편화되어 주체에게 적용된 윤리적 에토스는 이토록 폭력적이고 불합리하다.
한국에서 벗어난 나나의 어머니는 자신의 욕망을 따라 도쿄로 향한다. 그곳에서 뒤늦게나마 자신이 성소수자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동성 파트너, 파트너의 딸과 함께 새로운 공동체를 만든다. 도쿄에서는 구에 따라 동반자법이 가능하므로, 그들의 공동체는 배제되지 않는다. 나나의 어머니는 쓰나미를 겪으며 죽음을 목전에 두고, 피가 이어진 나나가 아니라 동성 파트너와 파트너의 딸을 떠올린다. 죽음 앞에서 떠올리는 게 혈연으로 얽힌 ‘가족’ 나나가 아니라 새로운 공동체의 구성원들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그녀의 새로운 공동체는 기존의 ‘가족’보다 단단하다. 이 경험을 계기로 그녀는 “왜 지금까지 나는 세상의 눈치를”(43쪽) 봤는가 하는 의문을 품는다. 이러한 의문은 그녀가 기존의 사회적 규범에서 완전히 벗어났음을 시사한다. 혈연이나 기존의 ‘가족’ 관계에 특별한 의미를 찾을 수 없기에, 나나의 어머니는 ‘귀하’라는 단어로 나나를 호명한다. 어떠한 가치판단도 들어 있지 않은 ‘귀하’는 서로를 동등한 관계로 연결 지어 준다. 남자가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사람”(51쪽)이라는 것을 깨닫고 파혼한 나나는 자신과 어머니 둘 다 ‘귀하’라 부름으로써 기존의 혈연관계를 넘어선 새로운 관계로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음을 알린다.


7) 김요섭, 〈이후의 사람들-한정현 · 황정은 소설과 다원화된 세계〉, 《문학과사회》 가을호, 2019, 164쪽.


5.


글의 본문에서 누누이 말했듯, 현재 우리의 사회에서 통용되는 ‘가족’이라는 단어에는 차별과 혐오가 내재되어 있다. 그것이 기존에 합의된 사회적 규범이 보편화된 결과라면, 우리는 하루빨리 새로운 규범을 위한 광범위한 논의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폭력에 노출된 주체들-자신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사회적 규범이 보편화되어 발생하는 폭력이 비단 ‘가족’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잊지 말아야 한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주체들이 무수히 많고, 사회의 상황도 계속해서 변한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새로운 규범을 위한 논의는 항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정현의 소설이 그 논의의 필요성을 일깨워 주는 자극제가 되리라고 믿는다.














최정호
작가소개 / 최정호

2021 《세계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문장웹진 2022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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