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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학 번역, 그 슬픈 실상

  • 작성일 2022-10-01
  • 조회수 1,862

[현장 비평]

《문장웹진》은 다양한 시선을 통해 폭넓은 담론을 펼칠 수 있는 ‘비평의 장’을 마련하고자
2020년 진행되었던 〈본격! 비평〉 코너를 정비하여, 2021년 4월호부터 〈현장 비평〉을 선보인다.
2022년 〈현장 비평〉은 신진 문학평론가 12명이 각자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자유롭게 주제를 정해 매월 1편씩 발표된다.






한국 문학 번역, 그 슬픈 실상

― 윤고은의 「밤의 여행자들」과 영역본 「The Disaster Tourist」의 검토 ―



김엔야




1. 들어가며 ― 번역의 이론과 실제


「밤의 여행자들」은 2013년에 출판된 윤고은의 소설이다.1) 아마도 출간 당시 문단에서 비교적 조용하게 ‘지나갔던’ 책이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그 당시 나는 갖은 고생을 하느라 문단의 사정에 관심을 둘 여유는 없었기에, 나의 짐작이 틀렸을 수도 있다. 그랬던 이 책이 다시 주목을 받은 것은 2021년에 들려온 영국의 대거상(정식 명칭은 ‘Crime Fiction in Translation Dagger 2021’이다) 수상 소식 때문이었다. 이미 일 년 전의 수상이지만 ‘한국 문학의 세계화’가 한창 진행 중인 지금, 번역의 문제는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윤고은이라는 작가를 잘 알지 못했던 나는 처음에는 이 수상 소식을 듣고서 윤고은이 수상할 수 있던 이유는 ‘번역의 힘’에 있었으리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막연하지만 합리적인 생각이기도 했다. 그도 그럴 듯이, 대거상의 심사위원들은 오로지 영역판만 읽고서 상을 주는 것이므로 어떻게 보면 사실상 번역본에 상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윤고은에게 대거상 수상을 안겨 준 판본이자 유일한 영역본인 「The Disaster Tourist」2)를 기대를 안고 세밀하게 검토해 본 결과, 내가 내린 결론은 처음의 예측과는 전혀 달랐다.
이 글은 해당 번역본에 대한 호평은 아니므로, 굳이 번역을 맡은 젊은 번역가의 이름을 거론하지는 않으려 한다. 나 자신도 겨우 신고식을 치른 신진 평론가로서 이 젊은 번역가를 관대하게 평가해 보려고 애써 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리 좋은 점수를 매길 수가 없었다. 그만큼 이 번역본은 여러 심각한 문제들을 안고 있다. 구체적으로, 편집상의 오류, 틀린 번역, 직역과 의역의 ‘자리 바뀜,’ 주체의 혼동, 일관성 결여, 이유 없는 추가 및 삭제, 작중 상황과 인물 성격의 변질, 역사 및 문화의 이해 부족, 영어 표현력의 결핍 등 실로 다양한 유형의 문제들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요소들은 복합적이고도 오묘하게 서로 결합, 작용하여 원 작가는 미처 상상하지도 못했을 총체적인 ‘문제적’ 장면들로 가시화되기도 한다.
발터 벤야민의 이론에 기대어 말하자면, 어차피 완전한 번역이란 불가능한 도전이므로, 원전이 담고 있는 ‘순수언어’로 구성된 번역 불가능한 영역을 ‘번역’하여 이 낯선 ‘순수언어’를 번역가 자신의 언어로 해방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역설적으로 재창작밖에 없다.3) 재창작은 번역가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모국어를 보충하는 작업이기도 한바, 그러한 작업은 원전의 의미를 풍성하게 만들고 무엇보다도 이 원전에게 ‘사후의 삶(Uberleben)’을 부여함으로써 여러 시대를 살도록 해준다. 이것이 바로 번역가의 과제다. 그런데 여실히 드러나는 번역가의 실력과 성의 부족으로 아무렇게나 남겨진 결과물을 과연 ‘재창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실제로 이 글이 다루고자 하는 「밤의 여행자들」의 번역본은 ‘재창작’이라기보다는 원작의 훼손에 가까운 양상을 보인다.
나의 생각이지만 번역은 항상 이론보다 실전이 먼저다. 번역이란 단일한 작품 내에서도 부분 부분의 맥락에 따라 최적의 전략이 달라질 수도 있는 것이므로, 어떠한 번역작을 그 일부만 놓고서 또는 한두 가지 전략만 가지고서 평가하기는 어렵다. 전체를 제대로 평가하려면 처음부터 끝까지 원작과 대조해 면밀하게 따져 보는 방법밖에는 없는데, 이 글은 바로 그러한 검토 과정을 원작 「밤의 여행자들」과 그 영역판인 「The Disaster Tourist」를 대상으로, 마치 번역 워크숍을 함께하듯이 독자에게 펼쳐 보이려 한다. 이 글의 목적은 한국 문학 번역이 오늘날 어디까지 와 있는지 가늠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 만큼, 한국 문학 번역의 현재 사례를 구체적으로 점검해 보는 이 일은 필연적인 관문이다. 해당 번역가의 번역 능력이나 태도 또는 그 결과물을 의도적으로 폄훼하려는 뜻은 없음을 미리 밝혀 둔다.


1) 윤고은, 「밤의 여행자들」, 민음사, 2013.
2) Yun, Ko-eun. The Disaster Tourist, Translated by Lizzie Buehler, Serpent’s Tail, 2020. 본문에서는 통일성을 위해 해외논저도 한국식 서지사항 표기법을 따르기로 한다.
3) Benjamin, Walter(발터 벤야민). 「번역자의 과제」, 「발터 벤야민 선집 6: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 · 번역자의 과제 외」, 최성만 옮김, 도서출판 길, 2008, 119~142쪽.



2. 기술적인 오역, 틀린 번역, 직역과 의역의 ‘자리 바뀜’


「밤의 여행자들」은 정글이라는 재난여행 회사 직원인 고요나가 출장을 겸해 베트남을 거쳐 ‘무이’4)라는 섬나라로 여행을 갔다가 그곳을 최고의 재난여행지로 만들기 위한 인공재난 프로젝트 혹은 ‘음모’에 가담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소설은 여러모로 현대 문명비판을 꾀한 문제작인데, 어느 번역가든 간에 이것이 내포하는 의미를 심층적으로 이해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번역을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먼저 번역본이 노정하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 가운데서도, 소설에 관한 이해를 크게 방해하지 않는 비교적 작은 문제들부터 살피고자 한다. 이 장에서는 편집상의 오류에 따른 기술적인 오역, 틀린 번역, 그리고 직역과 의역의 ‘자리 바뀜’의 사례들을 다루고자 한다.


편집상의 오류


우선, 영국의 서펜츠 테일(Serpent’s Tail) 출판사에서 나온 영역본 「The Disaster Tourist」는 편집상의 오류부터 심상치 않게 자주 발견된다.
한눈에도 금방 드러나는 문법적 오류들을 지적해 보겠다. “After passing through a long tunnel of jarring noises, the man starting speaking again.”(p. 74)5) 무엇이 이상한가? 당연히 “starting”이 잘못됐다. 주어인 “the man”의 수식어로서 ‘ing’로 끝나는 동사가 연속으로 이어질 순 없으니, “starting”이 아니라 ‘started’로 표기되었어야 했다. 번역가가 이렇게 표기했더라도 편집자가 옳게 고쳐 놓았어야 하는 부분이다.
“It took bravery for me come here, Yona Ko,”(p. 149)라는 문장도 그렇다. 무엇이 빠졌는가? 의미상 주어 “for me” 뒤에 ‘to 부정사’가 와야 하는데 동사만 왔다.
그뿐 아니다. 부정관사도 문제다. 모음으로 시작하는 단어 앞에는 ‘an’이, 자음으로 시작하는 단어 앞에는 ‘a’가 붙는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영어 교과 과정 첫 시간부터 배워 왔다. 그런데 영역판을 읽다 보면 심지어 “an lift”(p. 95)라는 조합까지도 발견된다. 원문의 “엘리베이터”(113쪽)를 처음에 ‘elevator’로 번역했다가 “lift”로 어휘를 변경하는 과정에서 앞의 부정관사를 “an”에서 ‘a’로 미처 바꾸지 못한 것이 아닐까 추측은 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이런 기초적인 문법의 오류는 번역 원고를 한 번만이라도 제대로 읽었다면 피할 수 있었던 것들이 아닌가.
이밖에도 편집상의 문제는 너무나 많다. “Eight-one per cent of the world’s natural disasters over the past ten years had been floods and typhoons, and the disasters that caused the most casualties were earthquakes.”(p. 153)라는 문장을 보자. 여기에서 “Eight-one”은 ‘Eighty-one’이어야 했는데, ‘y’가 빠졌다.
“But at least she know knew that Luck was going to stay safe from this disaster.”(p. 153)라는 문장도 말이 되지 않는다. 이는 “어쨌거나 이 재난극으로부터 럭은 안전할 것이다.”(187쪽)라는 문장의 번역인데, ‘But at least she now knew that Luck was going to stay safe from this disaster.’의 오류로 보인다. 즉 ‘now’라는 단어에 실수로 ‘k’를 더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 문장은 ‘now’라는 단어가 없어도 의미가 성립하므로, “know”라는 단어가 통째로 실수로 삽입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The drove out to the desert, and when they parked and started walking, Yona told Luck that her work was now finished.”(p. 154)라는 문장도 그렇다. 이 문장의 첫 단어, “The”는 ‘They’의 오식이다. 결과적으로 이 문장에는 주어가 없어졌다.
편집이 이렇게 엉터리에 가깝다면 이 출판사를 과연 믿어도 되는 것일까. 글의 분량을 고려하여 편집에 관한 문제는 이 정도 선에서 넘어가기로 하자.


4) 방민호에 따르면 이 무이섬은 가상의 장소지만 베트남 남동부에 있는 무이네(Mũi Né, 㙁你)를 모델로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추리소설 형식과 자본주의 인류의 묵시록적 전망」, 「영화가 있는 문학의 오늘 43: 2022 여름호」, 2022, 225~251쪽에서 250쪽 참조.)
5) 편의상 본문에서 원작 「밤의 여행자들」을 인용할 때는 ‘쪽’을, 영역판 「The Disaster Tourist」를 인용할 때는 ‘p.’를 쓰기로 한다.


틀린 번역


다음은 ‘틀린 번역’의 유형이다. ‘틀린 번역’이라 함은 어휘, 문장, 비유 등의 수준에서 A를 B로 번역했다든가 하는 식으로 기초적인 것들을 엉뚱하게 잘못 번역한 사례들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안 좋은’ 번역이 아니라 아예 지시대상이 잘못되거나 의미가 바뀐, 말 그대로 ‘다른’ 번역이 아닌 ‘틀린’ 번역 말이다. 예를 들어, 번역가가 “수육”(23쪽)을 ‘poached meat’로 번역하지 않고 “boiled beef”(p. 14)로 번역한 것은 ‘안 좋은’ 번역과 ‘틀린’ 번역 사이의 중간쯤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한국적인 방식”(57쪽)으로 허기를 달래 주는 노점들’을 ‘허기를 달래 주는 한국적인 노점들’(“Korean-style street stalls”)(p. 47)로 번역한 것은 엄연히 ‘틀린’ 번역이다.
원문 17쪽의 “저만치서 후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요나에게 다가왔다.”라는 문장을 “A wide-eyed junior staff member had approached Yona from the hallway.”(p. 9)로 번역한 것 역시 그렇다. 원문의 후배는 “눈을 동그랗게” 뜬 상태의 후배지 ‘눈이 큰’ 후배(“wide-eyed junior staff member”)가 아닌데, 그렇게 번역되었고, 심지어 원문 그 어디에도 이 후배가 남성이라는 힌트는 없는데 번역가는 이 후배가 다시 등장할 때 “The man”(p. 9)이라고 지칭함으로써 그(녀)를 남자로 만들어버렸다. 나의 견해에 이러한 각색은 한국어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다. 한국어는 프랑스어나 독어처럼 언어 자체를 통해 성별을 식별할 수 있는 언어가 아니므로, 굳이 성별을 부여해야 한다는 강박증은 한국어의 세계에서는 금지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한국어의 특성을 존중하여 성별이 미지정된 경우에는 미지정으로 남기는 것이 옳았을 텐데, 번역가는 그러지 못했다.
원문 20쪽의 “요나는 쓰나미가 찾아온 그 봄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녔다. 그러나 추수의 순간이 되자, 김이 요나를 불러서 말했다.”라는 대목의 번역 역시 ‘틀린 번역’의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When she had visited the tsunami aftermath in Jinhae, sweat dripped down her neck the entire weekend. As soon as spring turned to summer, Kim called Yona into his office.”(p. 12)라고 번역되었는데, 여기에는 번역가의 지나친 자기해석이 들어가 있다.
‘열심히 일했다’라는 뜻의 비유적 표현인 “땀이 나도록 뛰어다녔다”를 번역가는 요나가 실제로 땀을 흘린 것으로 오해하고서, ‘땀이 목덜미에서 흘러내렸다’(“sweat dripped down her neck”)라고 번역했다. 이렇게 의미를 일차 변형한 후 이 변형된 설정에 나머지를 끼워 맞추기 위해서 “쓰나미가 찾아온 그 봄”을 ‘쓰나미 현장을 찾아 진해로 갔던 그 주말 내내’(“When she had visited the tsunami aftermath in Jinhae……the entire weekend”)로 이차 변형한 것이다. 사실 원작에는 요나가 금요일 오후에 진해로 내려갔다는 내용만 있을 뿐, 주말을 진해에서 보냈다는 내용은 없다. 요나가 주말을 진해에서 보냈다는 내용은 번역가의 상상력인 것이다.
요나가 ‘땀을 흘리면서 열심히 일했다’라는 의미가 전달되지 못했으니, 그 후에 이어지는 “그러나 추수의 순간이 되자, 김이 요나를 불러서 말했다.”(20쪽)도 제대로 번역될 수 없는 것이 당연지사다. 따라서 “추수의 순간이 되자”는 번역가의 마음대로 ‘여름이 되자마자’(“As soon as spring turned to summer,”)(p. 12)라고 번역되면서 삼차 변형이 일어났다.
이처럼 번역가가 원작에서 비유적으로 쓰인 표현을 리얼리즘의 표현으로 오해하고 번역한 사례들은 많다. 하나만 더 예를 들겠다.
상사인 김 팀장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한 요나가 고충처리반의 최를 만나서 사태를 고백하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상의하는 장면을 보자. 여기에서 최가 요나에게, “요나 씨, 진짜 막내동생 같아서 하는 말인데,”(23쪽)라고 말하는데, 이는 요나를 향한 최의 안타까움 내지 동정, 무엇보다도 친밀감의 표현이지 실제로 최에게 요나와 같은 친여동생이 있다는 뜻이 아니다. 그런데 번역가는 요나가 실존하는 최의 친여동생을 최에게 상기시키고 있다는 의미로 번역했다(“Yona, I’m telling you this because you remind me of my younger sister,”)(p. 15).
소설의 흐름을 크게 방해하지 않는 오역들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문제는 이러한 ‘틀린 번역’의 사례들이 번역가의 한국어 실력을 수준 미달로 의심케 할 정도로 빈번하게 노출된다는 데 있다.


의역과 직역의 ‘자리 바뀜’


실제로 이 번역가의 한국어 실력은 그리 뛰어나지 못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왜냐하면, 이 번역가가 한국어의 실제 쓰임새를 잘 모른다는 느낌을 주는 번역들이 여기저기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가령 한국어에서 특별한 의미 없이 습관적으로 쓰이는 ‘습관성’ 구어체 표현들은 굳이 번역하지 않거나 그냥 뉘앙스만 의역해야 하는데, 번역가는 그런 것들을 애써 살려 직역했다. 이러한 사례들을 유형화하자면 ‘의역과 직역의 자리 바뀜’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국어에는 흔히 ‘일단’이라는 단어처럼 분위기 전환을 위한 용도로 쓰인다든가, ‘괜히’라는 단어처럼 어떤 감정을 강조하기 위한 용도로 쓰이는 ‘의미 없는’ 낱말들이 있다. 이런 낱말들은 번역 문장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번역할 수 없다면 굳이 번역하지 않아도 되고, 낱말들을 생략하면서도 번역 문장에 이 낱말들이 주는 느낌 즉 뉘앙스를 담아내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The Disaster Tourist」의 번역가는 어떻게 처리했는가.
원문 35쪽의 “요나는 29인치 가방을 꺼내 그 안에 일단 여권과 카메라를 넣어 두었다.”라는 문장을 보자. 번역가는 이 문장에서 등장하는 “일단”을 “pre-emptively”(p. 26)로 번역했다. 이 “pre-emptively”는 ‘선제적으로’라는 뜻을 가진 단어로서 그 쓰임새가 원문의 “일단”과는 거리가 있으며, 일상 영어라고 할 수도 없다. 너무 사전적 번역이 아닌가 싶다.
원문 28쪽의 “요나는 괜히 남자의 전화번호를 다시 한 번 되묻고 전화를 끊었다.”라는 문장의 번역은 또 어떠한가. 여기에서 “괜히”란, ‘불필요하게’라는 뜻이 아니다. 독서의 흐름에서 그냥 스치듯이 지나가는, 요나의 무안함을 내비치는 용도일 뿐이다. 그런데 번역가는 “괜히”를 “unnecessarily”(p. 19)라고 직역했고, 이 “unnecessarily”로는 요나의 무안함이 전달되기는커녕 무례함이 전달된다.
이처럼 어떤 낱말들의 쓰임새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비롯되는 이상한 번역들은 계속된다.
“다들 바쁘지만 이럴 때일수록 여유가 필요한 법이지.”(20쪽)라는 김 팀장의 대사를 보자. 물론 “여유”를 구글 번역기에 돌려 보면 ‘relaxation’이라는 대응어가 나오지만, 한국어에서 통상 쓰이는 “여유”란 물리적 여유보다도 마음의 여유를 가리킨다. 그런데 번역가는 “Everyone’s busy, but that’s exactly why we need to relax for a few hours.”(p. 12)라고 하면서, “여유가 필요한 법”을 “we need to relax for a few hours”라고 번역했다. 그냥 “relax”라면 모를까, “a few hours”라는 사족은 어디에서 나온 아이디어일까. ‘we need to loosen up’ 정도로 번역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번역가가 “투박한 슬리퍼”(27쪽)를 “rough slippers”(p. 18)라고 번역한 것은 오역까지는 아니더라도 원어민다운 번역은 아니다. 원문에서 슬리퍼가 ‘투박하다’라고 한 것은 ‘못생겼다’라는 의미에 가깝지 ‘거칠다’라는 뜻이 아니므로, ‘ugly slippers’ 정도로 번역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거칠다’라는 수식어를 슬리퍼 앞에 붙이는 것이 한국어로 이상한 만큼, 영어로도 “rough slippers”라는 표현은 이상하다. 번역가의 영어 실력마저 의심케 하는 번역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내 시나리오 속의 연인은 시한부예요.”(184쪽)라는 작중인물 황준모의 대사를 살펴보겠다. 번역가는 이 대사를 “All the relationships in my are approaching their expiration dates.”(p. 151)라고 번역하면서 “시한부”의 사전적 의미, 즉 시간이 한정돼 있다는 의미를 그대로 가져왔다. 그러나 통상 한국어 쓰임새에서 ‘시한부다’라고 말할 때는,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말기 암 환자 등을 대상으로 한다.
이 대사가 등장하는 소설적 맥락도 사실은 그렇다. 황준모라는 인물은 시나리오 작가로, 바로 무이섬 음모의 시나리오를 쓰는 작가다. 길을 잃어버려 일행과 떨어지고 무이섬에 남게 된 요나는 금지된 구역에 있는 가짜 싱크홀 두 개의 존재를 알게 된다. 그것들은 어떤 미완성의 탑을 둘러싼 담 뒤에 가려져 있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미 공사가 끝난 이 싱크홀 두 개는 8월의 첫 번째 일요일 오전에 방금 발생한 듯한 천재지변으로 포장되어 세상에 드러나도록 예정되어 있었고, 이를 위해 섬 주민들 거의 전체가 시나리오 작가의 대본에 따라 움직이며 주어진 대사를 읊기로 계약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요나는 사기와 다름없는 이 음모를 세상에 제보하기는커녕, 앞으로 몰려들 관광객들을 위한 여행 프로그램을 미리 짜놓는 역할을 도맡는다.
문제는 이 대본에 강제로 가담되어 죽임을 당하게 될 자들도 있다는 것이었다. 우연히 대본을 읽고서 그녀의 연인인 원주민 청년 럭이 죽을 운명에 처했음을 알게 된 요나는 황준모에게 항의하고, 황준모는 그녀에게 “내 시나리오 속의 연인은 시한부예요.”라고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맥락을 감안해서 “In my , the best couples are all doomed to die.”라고 의역했어야 전달이 더 명쾌하지 않았을까.
통상 문학 번역이라고 하면 일반 번역보다 높은 수준의 언어능력이 요구되거니와, 그만큼 번역료가 인상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 어떤 종류의 번역보다도 난도의 의역과 적확한 직역을 하는 능력이 요구되는 작업 또한 문학 번역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 「The Disaster Tourist」의 번역가는 직역이 유지되어야 할 자리들에는 의역을, 반대로 의역이 적당한 자리들에는 직역을 실천하는 ‘어수선한’ 번역 전략을 마음껏 펼치면서 결과적으로 원작에 있는 그 어떤 부분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다.



3. 주체의 혼동, 일관성 결여, 이유 없는 추가 및 삭제


앞에서 본 것처럼 서펜츠 테일 출판사의 영역본에는 기본적인 문제들이 범람하고 있는데, 이번 장에서는 주체의 혼동, 일관성 결여, 그리고 ‘이유 없는 추가 및 삭제’로 유형화될 수 있는 몇 가지 사례들을 살펴보겠다. 이러한 문제들은 원작의 이해 여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비교적 큰 문제들이며 따라서 번역가의 책임을 무겁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주체의 혼동


먼저 주체의 혼동이다. 이는 「The Disaster Tourist」의 번역가가 너무 흔히 범하는 오역의 유형이라서 그 빈도를 놓고 말하자면 실수인지 고의인지 헷갈릴 정도다.
예컨대 29쪽에 보면, “요나는 지하철 노선도를 쳐다보았다. 곧 개통될 노선들이 점. 점. 점. 숨을 옥죄어 왔다.”라고 되어 있다. 이 문장은 피폐한 서울 직장인의 출퇴근 일상을 묘사한 것이다. 원문에서 숨이 막히고 있는 주체는 당연히 요나다. 지하철 노선들이 하나둘씩 늘어나는 모습을 보면서 요나가 압도당하는 스트레스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그런데 번역가는 도시를 의인화하여, 늘어나는 지하철 노선들을 감당하지 못해 도시가 숨이 막혀 가고 있다고 주체를 바꿔서 자유자재로 번역했다.6)
원문 31쪽의 “자신이 고갈되었다고 생각하면, 그때 사람들은 우회적인 방법으로 휴직계를 던졌고, 영영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라는 문장도 잘못 번역되었다. 원문에서는 사람들이 고갈될 때까지 버티다가 우회적인 방법으로 휴직계를 던지고 (회사를) 떠났다. 그런데 번역문에서는 ‘회사’라는 주체가 전면에 등장하면서, 회사가 사람들이 지칠 때를 노리고 있다가 사람들이 지치면 온갖 우회적인 방법으로 그들을 쫓아내는 것으로 변했다. 주체가 ‘사람들’에서 ‘회사’로 바뀌고, 의미도 덩달아 바뀌었다.7)
이렇게 번역가가 원작의 재료를 가져다가 재구성, 재배치하여 만들어내는 번역 행위는 피카소의 큐비즘 예술을 연상시킨다고나 할까. 사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피카소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이다. 미묘하게 다른 것들이 얼핏 보면 그럴싸하면서도, 알고 보면 원작과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
이러한 유형의 사례들은 번역본에 세기 힘들 정도로 많지만, 적어도 원작의 전반적인 짜임새에 별다른 지장을 주지 않는 번역이라면 그런대로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래의 사례처럼 때로는 번역문에서 원문의 주체가 혼동됨으로써 인물의 성격이 변질되고, 나아가서는 원작의 짜임새가 흐트러지는 결과가 초래되기도 한다.


6) “Yona looked at the subway map. Lines under construction suffocated the city with one new stop after another.”(p. 21)
7) “Only when someone was on the brink of exhaustion did the company start to throw days off at him or her in all sorts of circuitous ways.”(p. 23)



적어도 회사에서 잡고 싶은 사람이라면, 필요한 사람이라면, 사표를 던지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았다. 요나에게는 여러모로 확인이 필요했다. 이 정도에서 암묵적 합의가 된 거라고 요나는 생각했다.(32쪽)


If you were a necessary employee, someone Jungle wanted to hold on to, they didn’t just let you wallow dissatisfied until you resigned. Before granting her a break, Jungle needed to find out whether Yona really was considering leaving.(p. 23)


원문은 그동안 회사에서 “퇴물”(18쪽, 23쪽, 27쪽)로 버려지는 것을 두려워했던 요나가 자신은 아직도 회사에 필요한, 회사가 붙잡고 싶어 하는 인재라는 것을 회사로부터 확인받고 싶어 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당연히 확인이 필요한 쪽은 요나다. 회사가 갑이고, 요나가 을이다. 을이 갑에게 확인받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런데 번역본에서는 회사가 을이 되어 요나가 정말 떠날 것인지 말 것인지 요나에게 확인받고 싶어 한다고 번역되었다. 직장인으로서의 애환이 전달되기는커녕 직장인인 요나가 갑이 된 것이다.
이런 번역으로 영어권 독자는 과연, 이후 회사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자신의 욕망 때문에 ‘무이섬 음모’에 빠지게 되는 요나를 입체적 인물로 이해할 수 있을까?


일관성 결여


다음으로, 일관성 결여다. 이것은 사실 편집상의 오류로도 분류될 수 있는 유형이다. 번역을 할 때 원문에 똑같은 용어가 두 번 등장했다고 두 번 모두 똑같은 번역어를 고집할 필요는 없지만, 고유 명칭이라든가 단어의 철자법이라든가 하는 것들은 다르다. 이런 것들은 일관성을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다.
작은 예로서, 회사 정글에서 요나의 직급은 과장인데, 번역가는 “고 과장”(20쪽) 또는 “고 과장님”(25쪽)이라는 요나의 사내 타이틀을 “Manager Ko”(p. 12, p. 16)라고 번역했다가 26쪽의 “과장님”은 “Team leader”(p. 17)라고 번역했다. 하지만 요나의 직급이 변동된 적은 없으므로 이렇게 번역하는 것은 옳지 않다.
비슷한 문제가 ‘고객만족센터’라는 고유명사를 두고서도 발생한다. 분명 원문 27쪽과 32쪽에 등장하는 “고객만족센터”는 각각 p. 19와 p. 24에서 “customer service center”라고 번역되었는데, 뒤의 원문 193쪽의 “고객만족센터”는 p. 59에서 “customer satisfaction center”라고 번역된 것이다. 독자를 헷갈리게 만들기 십상이다.
그보다 심각한 문제는 다른 데 있는데, 이번에는 철자법의 비일관성 문제다. 160쪽의 “군데군데 심어진 선인장도 경고등처럼 멈춰 있었다.”라는 문장을 번역가는 p. 133에서 “Intermittent cacti marked the land like warning lights.”라고 번역했다. 주지하듯이 “cacti”는 영어로 선인장을 뜻하는 단어인 ‘cactus’의 복수형이다. 라틴어에 뿌리를 둔 단어이므로 ‘cacti’가 전통적으로 옳은 복수형이지만, 철자법의 현대화에 따라 ‘cactus’에 [e]s를 붙여서 ‘cactuses’를 복수형으로 사용해도 무방하다.
둘 중에 어느 복수형을 선택하든 상관없지만, 단일한 작품에서 ‘cactus’의 복수형을 ‘cacti’라고 쓰기로 번역가가 한번 결정했다면 그 철자법을 유지해야 맞는데, ‘cacti’라고 했다가 ‘cactuses’라고 하는 것은 반칙이다.
그런데 원문의 189쪽과 205쪽의 “빛의 각도에 따라 울룩불룩 솟아나는, 별들로 가득한 하늘을 향해, 천만 선인장이 다 발기하는 그 고요한 새벽이었다.”라는 문장에서 다시 “선인장”이라는 단어가 등장할 때, 번역가는 이를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In the quiet, early hours of morning, Luck and Yona gazed up at a sky full of stars shooting in all different directions, as endless desert cactuses stood sentry around them.”(p. 155, p. 166) 이번에는 “선인장”을 “cactuses”라고 번역한 것이다.


이유 없는 추가 및 삭제


앞에서 살핀 여러 오역 사례들 중에서도 상당수는 이미 번역가가 자기 상상력을 개입시켜 문장 등을 추가한, 이른바 ‘추가’의 유형을 포함하고 있었다.
모든 ‘추가’가 획일적으로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번역가의 판단에 따라 원문의 뜻이 불분명한 경우에는 번역문에 설명을 붙일 수도 있을 것이다.8) 그러나 「The Disaster Tourist」의 경우는 설명이 꼭 필요한 자리에만 ‘추가’가 들어간 것이 아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번역가의 사족이 자주 등장한다. 예를 들어서 원작은 출국을 앞둔 요나가 여행 가방을 봉해 놓고서도 다시 열었다 닫았다 해야만 했다고 하면서, 그 이유를 “더 집어넣을 것이 생기기도 했고, 빼서 당장 써야 할 것이 생기기도 했다.”(36쪽)라고 했다. 번역가는 여기에 “like her toothbrush”(p. 27)라고 말을 덧붙이는 식이다. 독자의 이해에 크게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며 없더라도 전혀 문제가 없는데 이렇게 번역하는 것은 원 창작자의 글을 존중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번역가의 ‘추가’식 변경들이 전혀 상식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을 때도 있다. 다음의 사례를 보자.


8) 예를 들자면, “뭐, 보험도 두둑하던데 이참에 집에 효도 한번 하는 것도 괜찮잖아요.”(42쪽)라는 대사의 번역이 그렇다. 이 대사의 주인공은 요나가 출장을 겸하여 나선 상품 여행의 일행 중 한 명인 대학생이다. 그가 일행의 인솔을 맡은 가이드에게 농담조로 하는 말인데, 여행 중 자신에게 부상이나 사망 사고가 생기면 가족에게 두둑한 보험금이 지급될 테니 그런 일이 생기더라도 괜찮겠다고 농담한 것이다. 사실 이 대사만 읽고서 그 의미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적어도 나는 그러했는데, 번역가도 그러했는지 번역본에서는 이 대사에 설명을 추가해서 독자가 잘 이해하도록 돕는다. p. 32 참조.



더 정확히 말하면 성추행당한 무리, 즉 퇴물이나 패배자, 떨거지들로 규정되고 싶지 않았다. 요나가 함께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사람들은 알겠다며 돌아갔다.(27쪽)


More specifically, she had no desire to join the group of victims, the has-beens and the losers, the dregs of the company. She thought again of what they had told her about the CCTV, that everyone already knew what had happened to her.(p. 19)


상사인 김 팀장한테서 성추행을 당한 요나에게 이 사실을 알게 된 다른 피해 직원들이 연대해 달라고 도움을 요청해 오자 요나가 거절하는 장면이다. “요나가 함께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사람들은 알겠다며 돌아갔다.”라는 원문의 마지막 문장은 요나의 확고한 거절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결정적인 문장이고 그들과 관련한 일련의 서사를 결론짓는 문장이다.
그러나 번역가는 이 문장을 삭제한다. 그리고 그 대신에 ‘요나는 그들이 CCTV를 언급하면서 진실을 알고 있다고 한 말을 다시 떠올렸다.’(“She thought……to her.”)라는 내용의 문장을 추가했다. 그런데 이것은 원문의 마지막 문장과는 상반되는 방향으로 독자의 기대를 데려가는, 맥락상 말이 안 되는 문장이다. 상식적으로 논리적으로 생각했을 때, 요나가 성추행당하는 모습이 CCTV에 찍혔다면 요나로서는 그들의 도움 요청을 거절하지 못할 이유가 더 많아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 황당한 ‘추가’들이 내가 앞으로 다룰 다른 유형의 사례들에도 포함되어 있으므로, 여기까지만 지적하고 ‘삭제’의 유형으로 넘어가겠다.
‘삭제’의 사례들을 두드러지는 건들을 중심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9)


삭제된 부분 원작 번역작10)
1 “감자의 싹을 도려내듯”, “살 속의 탄환을 빼내듯” 11쪽 p. 3
2 “파키스탄에서는 대홍수를 경험할 수 있었다.” 12쪽 p. 4
3 “단순히 습관 때문인지 몰라도, 많은 사람들은 생사의 기로에서 외투 보관소로 몰려들었고, 결국 그들 대부분은 압사했다.” 22쪽 p. 13
4 “요나가 함께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사람들은 알겠다며 돌아갔다.” 27쪽 p. 19
5 “자네가 상품의 존폐를 결정하는 거야.” 31쪽 p. 22
6 “그건 그저, 버릇이었다.” 34쪽 p. 25
7 “밤 비행기는 순항 중이었다.” 36쪽 p. 28
8 “바다 저 끝에서 무언가 검은 물체가 넘실대다 가라앉았다.” 166쪽 p. 138
9 “여자는 밤에 매니저의 방에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른 사람이 그 역할을 하고 있었다.” 190쪽 p. 156
10 “어느 순간 요나는 쫓는 자가 아니라 쫓기는 자가 되어 있었다. 모두가 요나를 보았다.” 198쪽 p. 163
11 “매니저가 발을 내딛는 곳마다, 걸음을 내리꽂는 곳마다 모세의 기적처럼 갈라지고 있었다.” 216쪽 p. 176



위의 표에서 1번, 6번, 7번은 아마도 영어권 창작 문법에 맞지 않는 불필요한 것들이어서 삭제되었다고 생각한다. 2번의 파키스탄은 원작에서 재난이 있었던 지명들이 나열되면서 그 하나로 등장하는 것인데, 번역문에서는 단순누락된 것으로 보인다. 8번, 9번, 10번은 번역가가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탓에 불필요하다고 여기고 삭제한 것으로 보인다. 3번의 경우는 삭제된 이유를 잘 모르겠지만, 소설의 흐름이나 의미에는 지장을 주지 않는 삭제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중요한데도 삭제가 된 경우다. 특히 4번과 5번이 그렇다. 4번은 앞에서 다루었으니 여기에서는 5번만 보면, 이것은 사표를 들고 온 요나에게 김 팀장이 퇴사를 만류하며 휴가를 줄 테니 소비자 입장으로 회사의 여행 상품 중 하나를 골라 출장 겸 여행을 다녀오라고 말하는 상황에서 등장하는 김의 대사다. 그는 상품의 존폐 결정권을 요나에게 위임한다는 뜻에서 이 출장을 “땡 보직”(31쪽, 32쪽)이라고 지칭한다.11) 김이 요나에게 제안하는 것이 그냥 휴가 겸 여행이 아닌, 이 “땡 보직”이라는 점은 중요하다. 요나가 김의 출장 제안을 받아들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요나가 원한 것은 단순 여행도 출장도 아니라, 바로 자신에게 권한을 안겨 줄 수 있는 이 보직에 있다.
김은 요나를 성추행한 요나의 상사다. 그런 맥락에서 김은 요나에게 이 땡 보직 제안을 한 것이고, 이에 대해 요나는 “김이 자신에게 한 못된 짓과 땡 보직 출장을 적당히 맞교환하는 셈”(32쪽)이라고, 속으로 정리한다. 말하자면 둘은 지금 일종의 협상을 벌이는 중인 것이다. 이 지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요나’라는 욕망의 인물을 이해할 수 없기에 소설도 이해할 수 없다. 5번의 문장은 전개상 없어서는 안 되는 대사였다.
“모세의 기적”(216쪽)이라는 표현이 들어간 11번의 문장이 삭제된 것 또한 아쉽게 처리된 부분이다. 그 이유는 「밤의 여행자들」은 상당히 기독교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인데, 이 부분은 이 글의 뒤에서 설명하고자 하므로 여기에서는 이 정도로만 지적하겠다.


9) 번역가가 의역처리 하느라 삭제한 유형의 삭제들은 표에 포함하지 않았다.
10) 번역되었더라면 그 번역이 발견되었을 영역판의 쪽수를 적은 것이다.
11) 번역문에서는 이 “땡 보직”도 “a no-strings-attached business trip”(p. 23) 또는 단어를 우회하는 방식(“Your time away might be a holiday, but it’s still part of your work duties.”)(p. 22)으로 의역되면서 “땡 보직”의 실제 의미와 어긋나게 오역되었다.



4. 작중 상황과 인물 성격의 변질, 역사 및 문화의 이해 부족, 영어 표현력의 결핍


이 장에서는 번역가가 원작의 의미를 여러 방식으로 왜곡하고 있는 사례들을 거론해 보고자 한다. 번역본은 작중 상황이나 인물의 성격을 변질시키는가 하면 원작에 관련된 역사·문화적 사실에 대한 이해 부족을 보여주고 있으며, 나아가 원작의 의미를 전달하는 데 필요한 영어 표현력의 결핍까지도 드러낸다. 이러한 문제들은 원활한 전달을 방해하는 수준을 넘어 원래의 의미를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오도하는 요소들이다.


작중 상황과 인물 성격의 변질


다소의 인내심을 가지고 이러한 문제들의 논의에 접근해 보고자 한다. 예를 들어서 작품 초반 김 팀장의 피해자들이 요나에게 연대를 요청하면서 “2년 전에도 이런 시도가 있었지만, 준비를 많이 하지 못한 채로 일을 벌여서 결국 피해자들만 깨졌습니다.”(24쪽)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다. 번역가는 이 문장을 “We tried to do it two years ago, but we weren’t prepared and lost the case.”(p. 16)라고 번역했다. 피해자들이 ‘깨졌다’라는 말을 “lost the case”로 번역한 것이다. 이렇게 번역하면 그 의미는 피해자들이 법정 소송에서 패배했다는 말이 되어버린다. 원래는 피해자들이 가해자를 상대로 벌일 수 있는 여러 가지 싸움을 함축하면서 거기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말인데 번역가는 법정 소송에서의 패배를 가리키는 뜻으로 한정하고 말았다.
반대로, 보다 제한적으로 번역했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해서 전달이 어려워진 사례도 있다. 예를 들어, 무이섬 음모 대본에 따르면 자신도 죽을 운명임을 알게 된 요나가 정글의 고객만족센터에 전화해서 퇴사 의사를 밝히지만, 그녀에게 돌아오는 대답은 “출장 중의 퇴사 규정은 본인 사망만 가능합니다.”(195쪽)이다. 이는 번역본에서 “According to the rules, it’s only possible for you to quit in the middle of a business trip if you die.”(p. 160)로 번역되었는데, 이렇게 번역하면 여기서 “quit”라는 단어는 회사를 그만둔다는 뜻인지 단순히 출장 여행을 중단한다는 뜻인지 불분명해진다. 더 구체적으로 번역했어야 한다.
원작의 뜻을 정반대로 이해해서 상황을 엉뚱하게 번역한 사례들도 많다. 예를 들어, 상품 여행에 함께 나선 요나 일행 중 대학생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대목이 있다. “사실 전 학자금 대출을 끌어다가 왔거든요. 상품이 보통 비싼 게 아니어서.”(42쪽) 그런데 번역가는 이를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Trips like this aren’t usually expensive, so I figured it wouldn’t be too hard on my finances.”(p. 32) 원래는 여행 요금이 보통 비싼 것이 아니어서 학자금까지 끌어다 써야 했다는 뜻인데, 번역본에 의하면 여행 요금이 대체로 비싸지 않기 때문에 그 대학생의 재정에 아무런 부담도 되지 않았다는 뜻이 되어버렸다.
상황을 왜곡한 예는 얼마든지 더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요나가 한 좌식 식당의 룸에서 김 팀장의 피해자들과 함께 이야기하다가 자리를 먼저 뜬 상황을 보자. 복도에 놓은 자신의 신발이 없어졌음을 깨달은 요나는 식당 주인과 함께 신발을 찾는다. 이때 “주인은 필요 이상으로 호들갑을 떨었고, 그 바람에 닫혔던 방문이 다시 열렸다.”(26쪽)라는 문장은 “The owner made more of a fuss than necessary looking for the missing sneakers and opened the door to the room full of Kim’s victims.”(p. 18)라고 번역된다. 원작에서 ‘방문이 다시 열렸다’라는 것은, 문밖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상황을 파악한 피해자들이 요나를 도와주려고 방문을 열었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번역에서는 주인이 요나의 신발을 찾고자 손님들의 방문을 열었다는 의미로 변했고, 요나의 신발이 ‘스니커즈’ 종류였다는 번역가의 상상력까지 추가되었다.
다음 사례는 요나의 출장 겸 상품 여행 일행 중 한 명이었던 교사에 관한 한 장면이다.


쿵쿵 뛰는 아이를 달래느라 녹초가 된 교사는 곯아떨어졌다. 잠시 후 리모콘을 찾다 지친 아이도 그 옆에서 곯아떨어졌다. 효과음인지 꿈인지 잠결에 몇 번 비명소리가 들렸지만, 문밖으로 나가 본 사람은 없었다.(66쪽)


Dog-tired from trying to calm her ever-moving child, the teacher slept like a rock. She let out a few loud shrieks in her sleep that may have been caused by nightmares or may have been the sounds of slumber. No one approached the house to see what caused the noises.(p. 56)


원문에서 교사는 깊은 잠에 빠져들면서 어떤 비명을 들었고, 꿈속의 소리인지 문밖에서 나는 소리인지는 불확실하나 소리를 들은 쪽은 분명 교사다. 그런데 번역가는 교사가 악몽 때문에 낸 소리인지 단순 잠꼬대인지는 불확실하나 교사가 잠결에 소리를 냈다고 오역했다.
다음의 번역 사례도 왜곡된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고객들은 통화 상대의 직급이 높을수록 관대해지는 경향이 있었고, 그래서 고객만족센터의 전화가 프로그래머들에게 넘어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15쪽)


Most of the time, customers were more forgiving of higher-ranking employees, which was why customer service passed calls up to programming coordinators.(p. 7)


원문에서 “관대”라는 말은 고객들이 상대의 직급이 높을수록 자세를 낮춘다는 의미로 쓰였다. 즉 상대의 직급이 높을수록 고객들이 을이 된다는 뜻인데, 번역가는 반대로 번역했다. 상대의 직급이 높을수록 고객들이 “forgiving” 즉 너그러워진다는 말이다. 고객들을 갑으로 만든 셈이다. “관대”라는 단어를 맥락에서 파악하지 않고 사전적 의미로만 생각한 결과로 보이는 이 오역은 한편 한국 사회의 문화적 관행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생겨났는지도 모르겠다.
오역으로 작중 상황뿐만 아니라 인물의 성격이 심하게 변질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서 성추행 문제에 봉착한 요나가 이를 둘러싼 싸움에 뛰어들기를 망설이는 대목을 보자.


한마디로 김을 고발하자는 거였는데, 모인 사람들이 죄다 추레해 보였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요나는 어쩌면 김의 성추행 대상과 관련된 루머가 그냥 헛소리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그들과 섞이기엔, 요나는 아직 멀쩡했다.(25쪽)


원작에 따르면 요나는 자신에게 도움을 청한 이 사람들이 “추레해” 보이는 “성추행당한 무리, 즉 퇴물이나 패배자, 떨거지들”(27쪽)로 여겨져 그들과 손을 잡고 싶지 않았다. 그들과 섞이기에는 자신은 아직 괜찮은 축이라는 자존심이 깃든 표현이고, 이는 악을 징치하는 일에 적극적이지 못한 요나의 성격의 일면을 드러낸다. 하지만 번역가는 이를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They were asking her to help prosecute Kim, but Yona wasn’t convinced by them. As she listened, Yona wondered if rumours about the targets of Kim’s sexual harassment really were just rumours.…… Compared to them, Yona had scarcely been touched.(p. 16)


요나가 이 피해자들의 주장에 설득되지 않아서 돕기를 망설이는 상태인 것으로 왜곡했다. 원작의 요나는 “어쩌면 김의 성추행 대상과 관련된 루머가 그냥 헛소리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라고 생각했지만, 번역작의 요나는 ‘루머는 정말로 그냥 루머인가 보다고 생각했다’(“Yona wondered……just rumours.”)라는 것이다. 작가의 의도를 정반대로 전달했다. 결과적으로 번역에서의 요나는 피해자들의 진의를 믿지 못해서 그들을 외면하는 인물이 되고 말았다.


역사 및 문화의 이해 부족


좋은 의미의 번역이란 또 그 텍스트를 끌어안고 있는 사회의 역사 및 문화를 잘 번역해야 할 것이다. 역사 및 문화의 번역이라면 흔히, 원래부터 해당 텍스트의 역사 및 문화에 대한 지식을 갖춘 사람이 번역해야 한다는 편견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충실한 번역가라면 자신이 번역하는 역사 및 문화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을지라도 조사를 통해서 그 부족함을 메울 수 있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The Disaster Tourist」의 번역가는 그러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먼저 역사적 사실의 번역에 관한 사례를 보자.


요나의 첫 여행지는 나가사키였는데, 그녀를 그곳으로 유인한 것은 가이드북의 한 문장이었다. “이 도시에는 원폭으로 불에 타거나 폭풍으로 목이 날아간 천사상이 여러 개 있다.” 가이드북에 나와 있는 것은 목 없는 천사상의 위치였지만, 요나가 정말 궁금했던 것은 날아간 목의 위치였다.(11쪽)


위 대목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The first place she’d ever travelled to was Nagasaki, her trip inspired by a single sentence in a guidebook: ‘The city is home to statues commemorating citizens who lost their lives in the atomic bomb explosion, as well as those who passed away in local storms.’ The guidebook mapped the location of the Nagasaki statues, but as she read, Yona had realised she didn’t care where the statues were. Instead, she’d begun to wonder what exactly went missing when a person lost his or her life, and if the lost life was ever found elsewhere.(p. 3)


이는 명백한 오역이다. 원작의 “원폭으로 불에 타거나 폭풍으로 목이 날아간 천사상”은 번역에서 ‘원폭 또는 폭풍으로 생명을 잃은 시민들을 기리는 동상’(“statues commemorating……local storms.”)이라는 의미로 변했다. “천사상”을 “the Nagasaki statues”라고 뭉뚱그려 번역한 것은 마치 맥아더 동상을 한국전쟁 동상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무엇보다 “목이 날아간 천사상”은 나가사키에서 원폭으로 목이 날아간 실제 천사의 상들을 가리킨 것인데, 번역에서는 이러한 중요한 디테일이 생략되고 말았다.
사실 특별한 역사적 조사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구글을 통한 간단한 검색만으로도 소설이 언급하는 천사상들의 사진들을 볼 수 있는데, 번역가가 그런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더군다나 번역에서는 ‘날아간 목의 위치를 궁금해 하는 요나’ 대신에 ‘사람이 죽었을 때 무엇을 잃는지 그 잃어버린 삶은 다른 데서 찾을 수 있는지 궁금해 하는’(“she’d begun……found elsewhere.”) 요나가 되어버렸다.
한편 「밤의 여행자들」에서 요청되는 문화 번역은 주로 사내문화와 관련 있다.
원작의 “회식”은 번역본에서 “a company dinner”(p. 12)로 번역되고 있는데, 이는 일종의 ‘콩글리시’ 같은 번역이다. 한자로 ‘회식’은 ‘모일 회(會)’ 자에 ‘밥 식(食)’ 자다. 직역하자면 ‘group dining’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회사에서 술과 함께하는 저녁 식사 자리를 뜻하는 것으로 통용된다. “company dinner”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corporate dinner’, ‘business dinner’, ‘staff dinner’ 등의 표현이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송년 파티”(22쪽)를 “New Year’s Eve party”(p. 13)라고 번역한 것은 한국적인 맥락을 왜곡한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New Year’s Eve party”라고 하면 정확히 12월 31일 밤에 모여서 신년이 시작되는 시각을 카운트다운 하면서 파티를 하는 것이지만, 한국에서는 그러한 식의 송년 파티를 거의 안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the end-of-the-year gathering” 또는 “the end-of-the-year dinner” 정도로 번역하는 것이 적당했을 것 같다.
이상의 예들이 크게 문제시되지 않을 수 있다면 다음 사례는 번역가가 의미를 충당하지 못하고 있는 비교적 중요한 사례다.


그러나 그날 오후에 진해 여행 상품 브로슈어가 옆 팀 동료의 이름을 달고 요나의 책상 위로 날아왔고, 요나는 머리로 열이 몰려 도저히 회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28쪽)


이 문장을 번역가는 다음과 같이 옮겼다.


But that afternoon, a brochure for the Jinhae trip landed on Yona’s desk. Its acknowledgements page bore the name of a co-worker from another team. Yona was filled with such feverish anger that she couldn’t sit inside the office any longer.(p. 20)


원문은 요나가 자신이 기획한 진해 상품을 다른 팀 동료에게 빼앗긴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상품 브로슈어에 요나의 이름이 찍혀 있어야 하지만 요나의 이름 대신 옆 팀 동료의 이름을 달고 나왔다. 그러나 번역가는 소설이 묘사하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듯하다. 번역가는 이 브로슈어의 “acknowledgements page”에 동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고 추가해서 번역했는데, “acknowledgements page”라는 것은 우리식으로 말하면 ‘감사의 말씀’난이다. 말하자면 기획자가 자신에게 도움을 준 이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는 난이지 자신의 이름을 올리는 난이 애초에 아니다. 따라서 위의 번역으로는 요나가 감사를 받지 못했다는 정도로만 전달될 뿐이지 팀 동료에게 성과를 빼앗겼다는 상황은 전달되지 않는다.
번역가가 한국의 회사들 내부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암투의 악습을 충분히 알지 못한 데서 온 오역의 사례로 보인다. 그렇지만 사내에서 요나가 성과를 빼앗긴 이 사건은 요나가 성공에 대한 한을 품고 무이섬 음모에 가담하게 되는 동기로 이해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따라서 이러한 오역은 상당히 중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영어 표현력의 결핍


번역본에서 어색한 영어 표현은 사실 너무 많이 등장한다. 최소한 중요한 장면들만이라도 섬세한 번역을 했다면 좋을 것이고, 대표적으로 로맨스 라인이 그런 특별한 주의가 요청되는 부분이었다. 뒤에서 더 논의하겠지만 「밤의 여행자들」에서 요나와 럭의 사랑은 작품의 전개나 주제, 메시지 등 여러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그러나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둘의 사랑이 충분하지 않게, 다소 갑작스럽게 진행된 느낌도 없지 않았고, 그렇다면 얼마 안 되는 분량에 사랑을 맺는 요나와 럭의 관계가 설득력을 얻도록 이를 아름답게 서술하는 능력이 더욱 중요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번역가의 실력으로는 둘의 사랑은 전혀 로맨틱하지 못하게, 심지어는 우스꽝스럽게 느껴지는 면도 있다.
예를 들자면 둘이 처음 만났다가 요나가 한국으로 돌아간다며 인사하는 장면에서 요나는 럭에게 2달러짜리 지폐를 준다. 2달러짜리 지폐는 생산이 중단된 지폐이니만큼 그 가치는 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럭’이라는 이름이 말해 주듯이 ‘행운’을 비는 마음에 있다. 요나는 2달러짜리 지폐를 꺼내 “럭, 이건 행운의 2달러래요. 갖고 있으면 행운이 온대요.”(78쪽)라고 말하면서 그에게 건넨다. 요나와 럭의 관계만이 소설에서 돈을 매개로 하지 않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유일한 관계로 전개될 것을 암시한다. 소설에 있는 모든 다른 관계나 계획이나 동기 등은 모두 돈으로 움직였으나 럭과의 관계만은 자본주의적 성격, 이해 타산적 성격을 벗어날 예정임을 2달러짜리 지폐가 상징한 것이다.
이때 원작에서는 럭의 반응을 “럭은 지폐를 보며 웃었다.”(78쪽)라고 묘사한다. 지폐를 보며 웃었다는 것은 돈이 생겨서 웃었다는 뜻이 아니다. 그 교환가치가 아니라 그것에 담긴 마음을 보면서 웃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번역가는 이 중요한 대목을 “Luck smiled when he saw the money.”(p. 66)라고 번역했다. 돈을 보자 웃었다는 뜻이다. 마치 돈을 좋아하는 무이섬의 많은 사람들 중 하나로 럭이 오해될 수도 있는 번역이다.
럭이 요나에게 사랑을 처음 고백하는 장면도 아름답다고 하기에는 어렵게 번역되었다. 둘이 해변가에서 같이 수영을 즐기다가 눈을 감고 있는 럭에게 요나가 “왜 눈을 감고 있죠?”(170쪽)라고 묻자 럭이 “눈을 뜨면, 당신이 너무 커다랗게 보일 것 같아서.”(170쪽)라고 대답하면서 고백이 이루어지는 장면이다.
번역가는 럭의 대사를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If I open them, I’m afraid you’ll look too big.”(p. 139) 내가 보기에는 전혀 로맨틱하지 못하다. “커다랗게” 보인다는 것을 영어로 직역하면 의미가 잘 전달되지 않는 것이다. 영어라는 언어에서는 그렇다. 번역문처럼 “I’m afraid you’ll look too big.”이라고 하면 육체적으로 커 보인다는 뜻으로 가장 먼저, 가장 직관적으로 전달된다. 꼭 “big”이 아니라 ‘large’ 등의 유의어를 써도 마찬가지다. 영어에서도 어떤 관념 등의 추상적인 대상을 놓고 ‘크다’라고 표현할 수는 있으나, 그 대상이 어떤 사물이나 인물이 되면 일반적으로 물리적 크기를 의미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예컨대 ‘big scholar’(큰 학자)와 같은 경우에는 ‘big’이란 표현이 가능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물리적 크기를 의미한다.
이러한 경우는 의역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I’m afraid you’ll look too big.” 대신에 ‘I’m afraid your presence will overwhelm me.’ 또는 ‘I’m afraid your presence will take me over.’라고 하든가 좀 더 의역해서 ‘I’m afraid your beauty will blind me.’ 등을 대안으로 제시해 볼 수 있겠다.
안타깝게도 럭이 요나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다른 장면 역시 미흡한 번역으로 낭만성이 삭감되고 있다. 189쪽과 205쪽에서 럭이 요나에게 사랑을 속삭이는 모습은 “럭이 속삭였다. 그리울 거라고.”라고 서술된다. 번역가는 이를 “he murmured that he’d miss her.”(p. 155, p. 166)라고 번역했는데, 틀린 번역은 아니지만 “murmured”는 낭만성과는 거리가 먼 단어다. ‘whispered’라고 번역하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5. 그래서 번역본은 어떻게 되었는가


「The Disaster Tourist」가 노정하고 있는 다양한 유형의 오역들은 서로 복합적으로 결합하면서 이른바 ‘총체적 난국’을 이루었다. 이 장에서는 그러한 종합적인 양상을 지닌 사례들을 살피고, 이 번역작을 총평하고자 한다.


“제발이래요.”
후배가 고객만족센터에서 넘어온 전화를 돌려주며 말했다. 전화기 속 남자는 “제발 어떻게 좀 안 될까요?”라는 말을 자주 했다. 제발 취소 좀 안 될까요, 하는 말이었다. 제발 좀 떠나 주시면 안 될까요, 라고 대꾸하고 싶었던 요나는 그다음 남자의 말을 듣고 대꾸할 말을 잃었다. 동행인으로 함께 신청한 사람이 죽었다는 거였다.(27~28쪽)


‘Please, just take it,’ Yona’s co-worker said, handing her the customer service call. The man on the phone kept asking, ‘Why can’t I?’ over and over again. Why can’t I cancel the trip? was what he meant. ‘Why can’t you hang up?’ Yona wanted to say in response. As she listened to the man speak, she forgot her prepared for dealing with customers. The person with whom this man was planning to travel had died.(p. 19)


문제가 많은 대목이다. 원문의 “제발이래요”라는 문장에서 ‘제발’이라며 호소하는 주체는 바로 요나와 통화하게 되는, 고객만족센터에 전화를 건 남자다. 그런데 번역에서는 그 주체가 어이없게도 고객만족센터에서 일하는 요나의 후배로 바뀌었다. 번역자는 “제발 어떻게 좀 안 될까요?”라며 약자의 자세로 애원하는 남자의 언어를 ‘왜 안 된다는 거죠?’(“Why can’t I?”)라고 귀찮게 ‘묻고 또 묻는’(“asking……over and over again”) 무례한 진상 고객으로 만들어버렸다.
“Why can’t you hang up?”12) 도 오역이다. 요나의 “제발 좀 떠나 주시면 안 될까요?”는 ‘제발 좀 (여행을) 떠나 주시면 안 될까요?’라는 뜻이다. 자신과 통화하고 있는 상대인 남자에게 ‘제발 좀 끊어 주시면 안 될까요?’라고 말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번역가는 아마도 ‘제발 좀 꺼져 주시면 안 될까요?’라는 뜻으로 원문을 오해한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번역이 나올 수가 없으니까 말이다.
다음 작중 상황의 번역 역시 오역투성이가 되는 바람에 의미가 이상해진 경우다.


12) 편집상의 문제도 발견되는데, 실제 발화된 대사가 아닌 요나 마음속의 대사인 이 “Why can’t you hang up?”은, 앞의 “Why can’t I cancel the trip?”이라는 요나가 상상한 남자의 대사와 마찬가지로 이탤릭체로 강조되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요즘 들어 요나는 출근할 때마다 민들레 홀씨처럼 우연히 회사 안으로 들어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분명히 내 자리인데 어쩌다 오늘 하루만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처럼 어색했다. 신입 사원들이 걸인처럼 여기저기 복도를 떠도는 걸 볼 때마다 불안했다. 요나가 그런 말을 했던 건 휴게실에서 친한 동료 몇몇이 불만을 늘어놓던 분위기에서였기 때문이다. 가볍게 토로하던 말들이 요나의 그 말에 이르자 갑자기 진지해졌다. 휴지통에 휴지를 버리듯 가볍게 말을 던지고 듣던 사람들이 요나에게 정색을 하고 물었다.
“뭐 불편한 일 있어? 그런 거 아니야?”
자기만 심각한 상황에 몰리는 듯해서, 요나는 급히 발을 뺐다.(16~17쪽)


Recently, whenever Yona went into work, she’d felt like a dandelion seed that had somehow drifted into a building. The chair she sat in each morning was definitely hers, but for some reason, sitting in it was awkward, like this was the first time she’d ever touched the piece of furniture. She grew uncomfortable whenever she saw the new hires in control of the place. When Yona voiced her discomfort to a few close co-workers in the bathroom, they said that her complaints were baseless. As soon as Yona opened her mouth, their casual conversation—light as the paper towels they were throwing into the bin—took on a heaviness, and Yona’s co-workers looked at her with very serious faces.
‘Is something going on?’ one friend asked.
Yona figured that she was making the situation worse by bringing it up, so she quickly washed her hands and tried to forget her unease.(p. 8)


다소 긴 인용문이지만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번역문의 첫 문장에서 “회사”가 “a building”으로 특징이 없게 번역된 것은 회사라는 배경이 강조되어야 하는 상황에서 그리 좋은 번역이라고 할 수는 없다. 두 번째 문장도 보면, “어쩌다 오늘 하루만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처럼”이란 표현이 ‘마치 이 가구를 난생처음 만져 본 것처럼’(“like this……piece of furniture.”)으로 바뀌었다. 세 번째 문장에서는 “걸인처럼 여기저기 복도를 떠도는” 신입 사원들의 모습이 회사를 휘젓고 다니는 통제자들의 모습(“new hires……the place”)으로 탈바꿈했다.
네 번째 문장에서는 요나가 친한 동료들과 잡담을 나눈 “휴게실”이 ‘화장실’로 바뀌었고, 다섯 번째 문장에서 번역가는 이 오역에 ‘충실’한 번역을 이어 나가듯, “휴지통에 휴지를 버리듯 가볍게 (던진) 말”이라는 비유적 표현을 ‘그들(요나의 동료들)이 (화장실에서) 사용하고 쓰레기통에 버린 화장지처럼 가벼운(“light as the paper towels they were throwing into the bin”) 말’로 번역했다. 작가가 의도치 않은 지저분한 상황을 연출한 것이다.
이 우스꽝스러운 연출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원문의 요나는 무슨 말을 꺼냈다가 자신이 한 말을 없던 말로 하려고 하면서 “발을 뺐”지만 번역문의 일곱 번째 문장을 보면 번역에서의 요나는 자신의 무안함을 감추려고 ‘발을 빼는’ 대신에 자신의 손을 닦으면서 이 화장실이라는 배경을 십분 활용한 것이다. 도대체 이 번역가는 어쩌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상의 나래를 펼쳤단 말인가.
본의는 아니었지만 이쯤 되니 내가 「The Disaster Tourist」의 번역가를 너무 비판했다는 생각도 든다. 만족스럽지 않지만, 이 번역가가 번역을 잘한 부분도 아예 없지는 않다. 주로 한국어의 언어유희와 관련해서 그렇다. “김좆광”(23쪽)을 “Jo-schlong”(p. 14)이라고 번역한 것, “‘자동문’ 자리에 ‘자동곰’을 써 붙인 버스”(40쪽)를 “Korean on buses……with misspellings such as ‘automatic rood’ instead of ‘automatic door’”(p. 30)로 번역한 것, 그리고 “폴과 파울의 철자가 같다는 생각이 들자 요나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103쪽)를 “Yona repeated the word ‘Paul’ in her head, until it started to sound like ‘foul’.”(p. 85)이라고 풀어서 번역한 것도 괜찮은 번역이었다고 판단한다. 원작 149쪽의 “오토바이 ‘경축’”을 p. 112에서처럼 ‘kyeongchuk’이라고 하지 않고 “‘celebration’ motorcycle”(p. 124)로 번역한 것은 아쉽지만, 앞에 언급한 몇 가지 언어유희는 번역가가 창의성을 적절히 발휘했다고 생각한다.



6. 번역되지 못한 「밤의 여행자들」의 의미 ― 알레고리의 패러디와 위험사회론


이 글의 서두에서 나는 ‘좋은’ 번역은 태생적으로 ‘재창작’일 수밖에 없다는 벤야민의 견해에 관해 언급했다. 그러나 그 번역이 마치 언어를 자동번역기에 돌려서 결과를 추출한 듯한 번역 행위에 따른 것이라면, 벤야민이 말한 ‘순수언어’는 과연 해방될 수 있을까?
벤야민이 말한 ‘재창작’이란 원작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나 구조를 심도 있게 이해하고 해석한 바탕 위에서나 가능한 것이 아닐까.


알레고리로서의 「밤의 여행자들」


나는 「밤의 여행자들」이 지닌 소설로서의 매력이 무엇보다도 이 작품이 일종의 알레고리적 해석을 요하는 작품이라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알레고리란 무엇인가? 그것은 “비유적으로 말하거나 혹은 다른 말로 말하는 것”13) 이다. 그렇다면 「밤의 여행자들」은 무엇을 비유적으로 말하고 있는가? 또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어떤 다른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가? 이 문제에 접근하려면 무엇보다도 이 작품의 주인공 이름이 ‘요나’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성경의 요나서는 니느웨로 가서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명을 부여받은 요나라는 선지자에 관한 이야기다. 히브리 사람인 요나는 자신의 민족을 괴롭혔던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를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을 못마땅해 하며 반항하는데, 심리학자 매슬로(Abraham H. Maslow)는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회피하고자 하는 이러한 요나의 심리를 가리켜 ‘요나 콤플렉스’라고 명명했다.14)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과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나는 정작 가야 할 니느웨와는 반대 방향으로 가다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큰 물고기의 뱃속에 갇히게 되고, 밤낮 사흘 동안 기도한 끝에 간신히 육지로 나와 어쩔 수 없이 니느웨로 향한다. 니느웨 성읍에 들어가서도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건성으로만 외칠 뿐이다. 하지만 뜻밖에도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의 몇 마디에 크게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게 되자, 요나는 끝까지 하나님께 불만을 품고 자신을 죽여 달라고도 말한다.
이처럼 요나 대 하나님, 요나 대 이방인으로 대치되는 구도 속의 요나의 모습은,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두 탕자와도 같다는 팀 켈러의 견해도 있다.15) 아버지를 버리고 떠났다가 돌아온 동생 탕자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자 형 탕자가 화를 내는 모습에서, 악독함을 회개한 이방인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자 화를 내는 요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요나서의 요나는 겉으로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고 수행하더라도 내적으로는 끝까지 ‘변하지 않는’ 요나다.
매슬로에 따르면 요나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 또는 과제를 이행하지 않으려는 심리적인 태도는 자아의 성장을 제한하는 기능을 한다는 점에서 성공으로 귀결될지도 모르는 기회를 눈앞에 두고서도 도망치는 상황을 초래한다.
이러한 것들을 염두에 두고 다시 읽어 보자면 「밤의 여행자들」의 요나는 전형적인 ‘요나 콤플렉스’ 인물이다. 성추행 피해자들끼리 연대하자는 정글 직원들의 요청을 거절하는가 하면, 사기극이나 다름없는 무이섬 음모에 적극적으로 가담한다. 희생자가 나올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계속 드는 상황에서도 요나는 사태를 방치할 뿐만 아니라 낯선 여자가 진실을 제보해 오자 들으려 하지도 않고 그녀를 돌려보낸다.
이와 같은 요나의 회피성향적 성격은 「밤의 여행자들」을 요나서의 맥락에서 해석하게 한다. 두 책은 모두 일종의 여행서사로서 주인공들은 모두 자신들이 사는 곳을 떠나 먼 곳으로 가 자신에게 부여된 과제를 이행해야 하지만, 이를 거부하고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길을 잃어버리거나 하는 등의 우여곡절 끝에 결국 자신에게 부여된 사명을 이행하게 된다. 이렇게 유사한 서사 구조는 ‘요나’라는 이름과 함께 「밤의 여행자들」이 알레고리임을 알려주는 중요한 지표다. 정확히는 요나서라는 알레고리의 패러디이면서 동시에 이 작품 자체도 알레고리다.
그렇다면, 요나서의 요나에게 어떤 사명이 있었듯이 「밤의 여행자들」의 고요나도 그러했으리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것은 ‘요나 콤플렉스’의 필수요소이기도 하다. 요나서의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을 구원할 의무가 있었듯이 고요나에게도 무이섬 사람들을 구원할 의무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고요나의 이 사명이 어떠한 양상을 띠고 어떠한 방식으로 이행되는지는 뒤에서 더 논의하기로 하되, 여기에서는 알레고리에 대하여 더 생각해 보기로 한다.
「밤의 여행자들」은 요나서를 알레고리적 패러디의 기본 토대로 활용하고 있으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물의 심판 노아의 방주”(32쪽), “모세의 기적”(216쪽) 등과 같은 언급이나 비유, 무이섬 음모가 하필 일요일로 D-데이가 정해진 점, 요나의 나이가 예수가 죽은 나이와 똑같은 서른셋이라는 점(104쪽) 등을 미루어볼 때 기독교적인 알레고리가 두드러진다. 그러나 작품의 모든 알레고리가 기독교적인 것은 아니며, 모든 기독교적인 알레고리가 요나서와 관련된 것도 아니다. 예컨대 요나의 회사 ‘정글’, 연인 ‘럭’, 무이섬을 지배하는 막강한 회사 ‘폴’, 대본 연기자들을 가리키는 은어인 ‘악어’, 음모 현장에 전시될 시체들을 가리키는 은어인 ‘마네킹’ 등도 일종의 알레고리 기법이지만 기독교와는 관련이 없다.
요나서가 「밤의 여행자들」의 기본 서사로 자리하고 있으나 이 둘은 서로 완벽한 평행선을 그리지는 않는다. 특히 말미가 그렇다. 니느웨는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고 멸망하지 않지만, 「밤의 여행자들」에서는 모종의 심판이 전면화되고 무이섬이 초토화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심판이 있고 없고는 극명한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요나서 외에도 「밤의 여행자들」이 알레고리적 패러디의 대상으로 빚지고 있는 기독교적 알레고리를 대표적으로 세 가지로 추려서 지적하고자 한다.
하나는 ‘소돔과 고모라’다. 창세기 19장에 기록된 이 이야기는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알레고리로서 소돔과 고모라라는 타락한 두 도시에 진노하신 하나님이 두 도시에 유황과 불을 내려 심판하신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이야기에서 롯과 그의 가족은 아브라함의 기도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소알 성읍으로 도망하면 목숨을 구제받을 수도 있었지만, 롯의 아내는 돌아보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으로 변한다.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 때처럼 다 멸망하고 오로지 소수만이 살아남는다.
「밤의 여행자들」의 끝부분에 쓰나미가 몰려와 무이섬 일대를 휩쓸어버리는 것은 일종의 심판이며 이러한 전개는 ‘소돔과 고모라’의 플롯에 크게 빚지고 있다.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암시는 일찍이 시작된다. 가령 리조트를 이탈한 요나가 여행 일행과 함께 방문했던 한 마을에 불청객으로 다시 갔다가 그 마을 사람들이 일행에게 보여줬던 모든 모습은 관광객들에게 동정표를 받기 위한 쇼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이때 충격을 받은 요나는 마을을 떠나면서 “돌아보는 순간, 소금 기둥이 될 것 같았다.”(97쪽)라고 묘사된다. 이 “소금 기둥”은 ‘소돔과 고모라’를 연상케 하는 하나의 기표다.
「밤의 여행자들」이 패러디하는 또 다른 대표적인 알레고리는 바벨탑이다. 소설에서 이 바벨탑에 해당하는 것은 폴이 공사하다가 미완성으로 남긴 그 탑이다.


13) “The word and concept of allegory in English is part of a chain of related terms and concepts, including parable, symbol, image, sign, emblem, figure, aphorism, metaphor, and translation. All name ways of saying one thing with another thing, or by means of another thing, in short, ways of speaking in figure.” (Miller, J. Hillis. The Two Allegories, Allegory, Myth, and Symbol. Edited by Morton W. Bloomfield, Harvard University Press, 1981, p. 356; quoted in Joanna Frueh. “Allegory, An-Other-World.” The Visionary Impulse: An American Tendency, Vol. 45, No. 4, 1981 (pp. 323-329), p. 323.)
14) Maslow, Abraham H. “Neurosis as a Failure of Personal Growth.” The Farther Reaches of Human Nature, Penguin Books, 1976. 이 장의 p. 34부터 p. 39의 “The Jonah Complex”라는 절이 ‘요나 콤플렉스’에 관한 내용이다.
‘요나’라는 주인공의 이름이 매슬로의 ‘요나 콤플렉스’와 연관 있다는 주장은 방민호의 글에서 먼저 지적된 바 있다. 방민호, 앞의 글, 239쪽 참조.
15) Keller, Timothy. The Prodigal Prophet: Jonah and the Mystery of God’s Mercy, Viking, 2018.



탑은 인체의 형상을 하고 있었는데, 그 내부로 나선형 계단이 있었고, 그것을 타고 올라가면 전망대가 나오는 구조였다. 그러나 목 윗부분은 아직 표정이 없었다. 처음에 이것은 예수상으로 만들어졌는데, 업체가 바뀌면서 성모마리아상으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 얼굴로 멈춰 있었다.(111쪽)


바벨탑은 죄악 혹은 타락에 관한 알레고리다. 그런데 무이섬의 탑이 처음에는 예수상으로 만들어졌다가 성모마리아상으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 얼굴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독교적 타락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고, 바벨탑처럼 끝내 완성되지 못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한편 탑은 미지의 존재가 의인화된 상태로 묘사되었는데, 의인화라는 것은 전형적인 알레고리적 기법이다. 탑을 공사하다 중단한 회사 ‘폴’도 사람의 이름이기에 그 이름에 의해 의인화되었는데, 이런 의인화 기법은 「밤의 여행자들」이 여러 알레고리를 복합적으로 패러디한 알레고리적 패러디임을 뚜렷하게 만드는 장치라 하겠다.16)
흥미로운 점은 이 탑 혹은 바벨탑 알레고리가 ‘소돔과 고모라’와도 결합한다는 것이다. 쓰나미가 닥치고 탑이 무너지는 순간, 탑 위쪽에 카메라를 들고 서 있던 사람이 추락하는데 이때 작가는 이 모습을 “두 동강 난 탑의 윗부분은 모래 틈으로 추락해 소금처럼 녹아버렸다.”(215쪽)라고 묘사한다. 탑을 소금 기둥으로 이미지화한 것이다.
「밤의 여행자들」에 등장하는 또 다른 패러디 대상은 예수의 ‘무화과나무 비유’로 널리 알려진 무화과나무와 관련한 이야기다. 「밤의 여행자들」에서 이 무화과나무는 교살자무화과나무로 종이 변형되어 나타나는데 이것은 요나와 럭이 사랑을 꽃피우는 장소 역할을 한다.
신약성서에서 ‘무화과나무 비유’는 여러 번 조금씩 다른 버전으로 등장하는데17) 중요한 것은 이들은 모두 성경 전반에 걸쳐 예언되는 최후의 심판에 관한 알레고리라는 사실이다. 그 핵심은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마태복음」 24:32~33)라는 말씀처럼, 자연현상을 보고 여름이 다가옴을 분별하듯 시대의 징조를 통해 최후의 심판과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했음을 분별하고 회개하라는 것이다.18)
「밤의 여행자들」의 심판의 계절도 여름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그리고 무이섬 음모가 예정된 8월의 첫 번째 일요일 아침, 교살자무화과나무는 심판의 도구가 된다.


16) 사실 영어로 ‘폴(Paul)’은 사도바울의 ‘폴’이기도 하지만 「밤의 여행자들」에 사용된 ‘폴’이란 이름에는 그런 거룩한 의미는 없다. 단순히 자본을 남성의 이름으로 의인화하고자 하면서 ‘파울(foul)’과의 언어유희 때문에 ‘폴’이라는 이름을 선택한 것으로 보이는데, ‘폴’이 ‘파울 클레(Paul Klee)’ 할 때의 ‘파울’로 발음되기도 한다는 점에 착안한 듯하다.
17) “무화과나무에서 배울 교훈” 계열에 속하는 「마태복음」 24:32~35, 「마가복음」 13:28~31, 「누가복음」 21:29~33이 있으며,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비유” 계열에 속하는 「누가복음」 13:3~9가 있다. 또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비유” 비유의 번외로 “저주받은 무화과나무”(「마가복음」 11:12~14) 비유도 있다.
18) 기독지혜사 편집부, 「톰슨 II 성경주석: 개역개정판」, 기독지혜사, 2008, 42쪽, 74쪽, 79쪽, 117쪽, 134쪽 등 참조.



쓰나미에 폴의 탑은 두 동강이 나고 말았는데, 부러진 단면에 하필 거대한 나무가 새 둥지처럼 박혀버렸다. 이 일대에 많은 교살자무화과나무였고 그 뿌리가 어디 하나 다친 구석도 없이 탑을 단단히 동여매는 바람에, 그것은 꽤 볼 만한 풍경이 되었다. 탑이 마치 나무의 새 숙주가 된 듯했다.(226~227쪽)


이렇게 ‘무화과나무 비유’도 요나서, 소돔과 고모라, 바벨탑 등과 합쳐지며 패러디되는바, 이는 「밤의 여행자들」이 요나서를 기본구조로 하면서도 이를 비틀어 놓은 일종의 알레고리적 패러디라는 사실을 확인해 준다. 그렇다면 좋은 번역가는 이 작품의 알레고리적 패러디 문법을 이해하고 그 문법에 따라 ‘재창작적으로’ 잘 번역할 수 있어야 했다. 과연 번역가는 그러한 방식으로 번역했는가?
무엇보다도 ‘요나’를 어떻게 번역했는지가 관건일 것이다. NIV를 비롯한 영어 성경의 모든 번역본에서는 ‘요나’를 전부 ‘Jonah’로 표기하고 있다. 그런데 「밤의 여행자들」의 번역본의 ‘요나’는 ‘Yona’로 번역되었다. ‘요나’라는 한글 이름의 발음을 살려서 번역한 것이다. 무난하지만 아주 좋은 번역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소설과 성경의 공통적인 ‘요나’라는 한글 철자 덕분에 소설의 요나는 성경적 요나로서의 정체성을 확실히 부여받을 수 있었던 것인데, 번역본의 ‘Yona’의 발음이 ‘Jonah’의 발음과 같다는 것만으로 독자가 ‘Yona’를 ‘Jonah’와 연결 짓기에는 연결고리가 약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번역가는 원작의 ‘요나’를 ‘Jonah’라고 번역했어야 했을까? 그렇게 했어도 문제는 있었을 것이다. 번역본의 ‘Jonah’를 독자는 발음상 ‘요나’가 아닌 ‘조나’로 생각했을 가능성 때문이다.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언어의 역사상 어느 시기에 ‘y’([ʝ] 또는 이응 소리)가 자음처럼 사용될 경우 ‘j’([ʤ] 또는 지읒 소리)가 이 자음으로서의 ‘y’를 대체하는 글자로서 대두되었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렇게 생겨난 ‘y’([ʝ] 또는 이응 소리)의 대체 글자로서의 ‘j’도 어느새 ‘j’([ʤ] 또는 지읒 소리)로 발음되기 시작한 것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히브리어 발음으로 ‘예수’는 우리말 ‘예수’에 가까운 ‘예슈아’(Yeshua)지만 그리스어로 번역되었을 때 ‘Yesous’(또는 ‘Iesous’)로 번역되었던 것이 점차 ‘Jesus’라는 철자로 바뀌었고, 훗날 영어의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글자 ‘J’는 원래의 [ʝ](이응 소리) 발음보다는 현대 영어식으로 [ʤ](지읒 소리)로 발음되기 시작하면서 영어로는 ‘지저스’라는 발음으로 굳히게 되었듯이 말이다. ‘Jesus’도 ‘지저스’라고 하는데 특별히 역사적으로 사연이 있는 단어가 아닌 이상 현대 영어에서는 ‘j’를 [ʝ](이응 소리)로 발음하지 않고 있으니, 하물며 한국 소설의 영역본에 등장하는 ‘Jonah’라면 당연히 ‘조나’라는 발음으로 이해되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것도 좋은 번역이라고 할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Yona’ 끝에 ‘h’ 무음 자를 붙여서 ‘Yonah’라고 표기했더라면 최적의 선택이 되었을 것 같다. 각종 자료에 따르면 영어 이름 ‘Jonah’는 히브리어 이름 ‘Yonah’의 음역이라고 한다.19) 따라서 ‘Yonah’라고 하는 것이 ‘Jonah’보다도 오히려 언어학적으로 더 오리지널 이름에 가깝고, 그뿐 아니라 ‘h’ 자가 붙은 ‘Yonah’가 그냥 ‘Yona’보다는 시각적으로 더 ‘Jonah’에 가깝다. 또한, 영어 소설에서는 ‘Y’ 자를 ‘요나’의 첫 자로 표기해야지만 그 발음을 ‘요나’로 이해시킬 수 있다는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으니 ‘Yonah’가 여러모로 좋은 선택이 되었을 것이다.20)
한편 작가가 의도한 기독교적이거나 미스터리하고 음습한 묵시록적 요소들을 번역가는 삭제하거나 왜곡했다는 점에서도 번역가는 이 소설의 알레고리적 패러디 문법을 이해했다고 보기 어렵다. 예를 들자면 앞의 표에 나온 8번, 9번, 10번, 11번, 그리고 앞에서 살핀 “쿵쿵 뛰는 아이를 달래느라 녹초가 된 교사는 곯아떨어졌다. 잠시 후 리모콘을 찾다 지친 아이도 그 옆에서 곯아떨어졌다. 효과음인지 꿈인지 잠결에 몇 번 비명소리가 들렸지만, 문밖으로 나가 본 사람은 없었다.”(66쪽)라는 대목 등이 그렇다.


19) “Meaning of YONAH.” Thenamesdictionary.
https://thenamesdictionary.com/name-meanings/10359/name-meaning-of-yonah, 20 Sept. 2022.
20) 참고로 히브리어로 ‘요나’는 ‘비둘기’라는 뜻을 지니는데, 비둘기는 ‘좋은 소식을 전하는 전달자(messenger)’를 상징한다고도 한다.


위험사회론의 맥락에서 본 「밤의 여행자들」


「밤의 여행자들」이 요나서, 소돔과 고모라 등의 알레고리적 패러디라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떠올릴 수 있다. 이 소설에서 사람들이 빠져 있는 죄악은 무엇이며, 그들에게 내려진 심판은 어디서부터 온 것인가? 그들을 구원해 줄 존재나 방법이 있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이 논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나는 「밤의 여행자들」의 서사가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 담론을 소개하고자 한다. 울리히 벡은 「위험사회」(1986)와 「성찰적 근대화」(1994)(공저)에서 인류가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스스로 위험에 처했다고 설파한다.21) 산업혁명을 통한 근대화 과정이 기술혁신과 물질적 성장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니까 역설적으로 인간의 삶을 위험에 빠뜨리게 되었고, 그 위험이 지구적으로 전개되고 그 빈도와 정도가 증대되면서 도래한 사회가 바로 위험사회라는 것이다. 벡에 따르면 이 위험사회를 넘어서려면 ‘성찰적 근대화’ 즉 성숙한 근대화 과정이 필요하다. 이는 지구화와 개인화라는 두 축으로 전개되는바 지구를 생태학적으로 구제하는 일에 동참한다는 의식이 개인에게 요구되는데, 이때 개인에게 필요한 것은 ‘세계시민’으로 거듭나기 위한 ‘각성’이다. 그리고 바로 이 ‘각성’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밤의 여행자들」의 줄거리가 된다.
실제로 「밤의 여행자들」은 많은 측면에서 벡의 이론에 기반한다. 추측이지만 윤고은은 작품 구상 단계부터 위험사회 담론을 구현하고자 의도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이는 경제적으로 발전할수록 위험이 증폭되는 시대에 위험은 오히려 “시장기회”22) 가 될 수 있음을 ‘예언’했던 벡의 말을 상기해 보면 눈치 챌 수 있다. ‘재난여행’이라는 소설적 발상이 이 예언에 정확히 부합하기 때문이다. 소설적 배경 또한 “재난의 빈도와 강도는 점점 또렷해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기술이 정교해지면서 방지 가능한 재난의 종류도 늘어났지만, 동시에 새로운 재난들도 계속 생겨나고 있었다.”(13쪽)라는 서술 등으로 위험사회의 개념을 포착하고 있다. 또한, 진해 쓰나미의 잔해인 한 어린이의 농구공이 일본 앞바다에서 발견되었다는 뉴스 등 작은 언급들은 지구적으로 연결된 재난의 ‘나비효과’를 연상시킨다.
성찰적 근대화 과정에서 수반되는 개인의 ‘지구 구제에 대한 참여의식’은 요나서식으로 말하자면 개인의 ‘사명’이다. 그러나 작중 초반의 요나는 재난을 겪은 타인의 아픔을 통해 돈을 벌려고 드는 여행사 기획자일 뿐, 공정여행 따위는 관심도 없다. 요나에게 재난이란 “신호등이 녹색에서 붉은색으로, 혹은 그 반대로”(13쪽) 바뀌는 것처럼, 일상이자 업무 대상에 불과하다. 성추행을 당하고서도 저항하기는커녕 손익을 따져 불의와 타협하고, 피해자들의 연대 도움 요청도 거절한다. 한마디로 각성되지 못한 병든 개인이다.
「밤의 여행자들」에 나타난 한국의 현대 사회는 경제적으로 급성장했지만, 그 부작용으로 기형적인 기업문화가 자리 잡아 정신적으로는 오히려 피폐해진 직장인들의 삶으로 대변된다. 부패한 현대 사회와 기업문화의 영향에 기인한 요나가 병든 개인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적어도 그녀가 ‘인공재난 프로젝트’라는 무이섬 음모에 가담하기 전까지 보인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모습들은 한국이라는 치열한 위험사회의 경쟁 속에서 살아가는 보통 사람의 표본인지도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밤의 여행자들」은 알레고리적 패러디 또는 알레고리 소설인 동시에 벡의 위험사회론으로도 읽힐 수 있는, 상당히 심층적인 의미의 소설이라는 점이다.
이제 다시 앞의 질문들로 돌아가 보자.
이 소설에서 요나서의 니느웨 사람들에 해당하는 인물들이 빠져 있는 죄악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무이섬 음모를 주도하는 회사 ‘폴’ 또는 ‘파울’로 상징되는 자본주의다. 정글에서든 무이섬에서든 사람의 생명조차도 수치화하고 보험금으로 환산하면 그만이라는 식의 경제적 사고법은 위험사회의 그것과 닮아 있다. 이는 타인을 희생시켜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려는 태도를 합리화하게 한다. 심판에 직면한 사회의 모습이다. 자본주의에 지배당하는 모든 자가 니느웨 사람들이고 이들 중 그 누구도, 서울의 김 팀장을 포함해서, 심판을 면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 소설에서 이 사람들에게 내려진 심판은 어디서부터 온 것인가? 내가 생각하기에는 바로 자본주의적 인간의 물질적 욕망과 메커니즘에 의해 파괴되어 가는 자연 자체다. 이 소설에서 쓰나미로 대변되는 자연의 심판은 폴이 관광사업적 이득을 취하고자 기획한 싱크홀이라는 인공재난 시나리오가 실현되기 직전에 시나리오보다 한 발짝 먼저 그곳에 당도한다. 소설 서막에 있었던 진해 쓰나미의 데자뷔 같기도 하지만,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라 심판의 성격이 강하다. 쓰나미는 음모의 가담자들을 전부 죽이고 그들의 시나리오를 좌절시킴으로써 인간의 꾀를 초월하는 자연의 힘을 보여준다. 이외에도 작품에 등장하는 맹그로브숲, 교살자무화과나무 등이 자연의 절대자적 신분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을 구원해 줄 존재나 방법이 있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무이섬에 들이닥친 천재지변의 대형 참사 속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럭의 도움으로 맹그로브숲으로 대피한 원주민들뿐이다. 원래 럭은 음모의 시나리오상 죽을 운명이었지만 요나의 제보로 원주민들을 미리 맹그로브숲으로 대피시켜 그들의 목숨을 구하고 그 자신도 목숨을 구한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 맹그로브숲이란 것은 실제로 지구 생태계 유지에 매우 중요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구원해 줄 존재나 방법이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세계시민 의식을 바탕으로 한 그들을 향한 요나의 사랑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럭과의 사랑을 통해 무이섬을 참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 요나가 럭을 살리려다 본의 아니게 그의 공동체까지 구하게 된 것이지만, 어찌 되었든 요나는 비로소 각성된 개인이 된 것이다. 사실 요나가 ‘폴’ 또는 ‘파울’ 같은 인물에서 각성된 인물로 변화하게 될 것은 소설 전반부에 암시되어 있었다. 요나가 자신의 과거 여권 사진들을 보면서 사진상 파울 클레를 닮았던 자신의 모습이 최근 사진들에는 달라져 있음을 보는 데서 그런 암시를 읽어낼 수 있다.


21) 이 문단에서 소개되는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와 「성찰적 근대화」의 내용은 두 저서에 관한 김정현의 서평, 「지구적 위험사회의 격동과 문명의 화산에서 살아가기: 울리히 벡, 「위험사회」(홍성태 옮김, 새물결, 1997), 앤소니 기든스, 울리히 벡, 스콧 래쉬, 「성찰적 근대화」(임현진, 정일준 옮김, 한울, 1998)」(「역사와 사회」 Vol. 23, 1999, 193~199쪽)를 참조했다.
22) “위험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위험 때문에 피해를 입은 사람과 그로부터 이윤을 얻은 사람들 간의 적대감이 발전한다......따라서 새로운 적대는 위험의 정의를 생산하는 사람과 그것을 소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형성된다.”(울리히 벡, 「위험사회―새로운 근대(성)을 향하여」, 홍성태 옮김, 새물결, 2006, 93쪽.)


요나는 오랜만에 여권을 꺼내 보았다. 서랍 속에는 지금 유효한 것부터 이미 유효기간이 만료된 것들까지 모두 네 개의 여권이 있었다. 첫 여권 속 요나의 사진은 파울 클레의 자화상처럼 귀가 없었다. 사진 규정은 점점 귀와 눈썹이 보이는 형태로 진화되었다. 글쎄, 진화인지 퇴화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좀 더 많은 부분을 드러내는 쪽으로 변하고 있었다.(34~35쪽)


확실히 럭을 만나 변화한 요나는 작중 초반의 요나와는 다른 요나다.
한편으로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기까지 한 요나의 희생은 단순한 세계시민 의식을 뛰어넘는 것이기도 하다. 선지자 또는 예수가 된 것이랄까. 따라서 요나의 원치 않는 죽음은 심판인 동시에 일종의 ‘순교’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번역가는 한국의 악독한 기업문화를 이해하지 못했는지 문화적 상황을 잘 전달하지도 못했고, 럭과의 로맨스 라인도 설득력 있게 전달하지 못했으며, 기독교적 메시지나 그 묵시록적 분위기를 살리는 번역도 하지 못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번역가는 「밤의 여행자들」을 성서 이야기들의 알레고리적 패러디로서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다.



7. 나가며 ― 세계 속의 한국 문학과 번역의 차원


「밤의 여행자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문제의식이 내장된 소설이다. 이 소설이 받은 대거상은 추리문학상이지만,23) 내가 볼 때 「밤의 여행자들」은 냉정하게 말해 추리문학도 스릴러도 아니다. 굳이 장르를 특정하자면 ‘묵시 문학’이라고 말하겠다. 기독교적인 묵시가 아니라 현대문명을 비판하는 ‘에코적인’ 묵시 말이다.
그리고 이 글에서 살펴보았듯이 그 방법은 바로 알레고리적 패러디 또는 알레고리다. 여러 가지 알레고리를 복합적으로 패러디하고 결과적으로 작품 자체도 알레고리가 된 것이다. 이 양식을 알레고리적 패러디라고 할 수 있겠다.
다만 어려운 주제를 알레고리적 패러디 또는 알레고리라는 어려운 문법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만큼, 독자 입장에서는 가독성이 다소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측면이 없지 않다. 더군다나 독자에 따라 기독교적 배경이 전혀 없거나 벡의 위험사회론을 모른다면 더더욱 힘들게 읽힐 수도 있다. 오늘날의 한국 독자는 리얼리즘의 독법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밤의 여행자들」은 국제무대에서는 한층 더 매력 있는 작품인지도 모르겠다.
문학 속의 한국은 사실 비교적 최근까지도 한국의 변화된 위상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것 같다. 적어도 국제적으로 주목받은 한국 문학 작품들은 대개 옛날의 한국, 가난한 한국, 피해자로서의 한국만 보여 왔다. 맨부커상을 탄 한강의 「채식주의자」의 한국만 해도 개를 잡아먹는 후진적 사회고, 한국어 소설은 아니지만 요즘 유행하는 한국계 미국인 작가 이민진의 「파친코」도 그렇다. 그에 비해 「밤의 여행자들」 속의 한국은 방민호가 지적하듯이 부유한 한국이고 무이섬 사람들의 숭배를 받으며 무이섬을 제3세계 국가로 소비하는, 유럽이나 미국과도 같은 존재다.24) 이렇게 ‘제국주의’로서의 한국, ‘가해자’로서의 한국을 본격적으로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새롭다고 할 수 있다.
여러모로 볼 때 「밤의 여행자들」은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러나 고도로 성장한 한국의 경제나 문화·문학의 수준과는 달리, 문학 작품 번역은 아직 충분한 수준에 올랐다고 볼 수 없다. 한국 문학 번역 작품들을 충분히 많이 검토해 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국제문학상을 받은 번역작의 수준이 내가 이 글에서 검토하고 밝힌 이 정도라는 사실은 한국 문학 번역에 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대거상 심사위원들이 생각했을 때 「밤의 여행자들」은 번역의 문제를 뛰어넘을 어떤 매력이 있었으리라. 그것은 아마도 이 작품이 가진 주제의 힘, 메시지의 힘에 있었으리라.
한국의 대중문화가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인정받는 시대에 들어섰으나 시각성이 강한 영화나 드라마와 달리 문학은 번역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한국 문학 번역이 한 단계 올라서려면 번역지원도 필요하고 좋은 번역가 발굴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한국 문학 번역에 진지한 관심을 가져 주는 것이다.
한강이 「채식주의자」로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했던 2016년은 한국 문단 역사상 거의 처음으로 ‘번역의 수준’이라는 것이 비평적인 화제로 떠올랐던 시기다. 그러나 이 문제는 곧 수면 아래로 잠복해 버렸다. 이제는 대형 작가의 국제 수상작 번역에 관한 일시적인 관심만 아니라 다양한 작품들의 번역에 관한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할 때다.
번역은 적어도 오늘의 한국 문학을 위해서는 결코 주변적 문제가 될 수 없다.


23) 엄밀히 말하자면 영어로는 “crime fiction(범죄문학)”에 주는 상이고, 윤고은이 수상한 것은 번역문학에 주는 인터내셔널 부문이다.
24) 방민호는 「밤의 여행자들」에 나타난 한국은 경제적으로 발전한 상태의 한국이고 나아가 제국주의적 성격을 띠는 한국이라는 점에서 작품이 유의미하다고 평가한다. 앞의 글, 235~237쪽 참조.














김엔야
작가소개 / 김엔야

한국문학번역원 번역아카데미 아틀리에 과정과 서울대 국문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문장웹진 2022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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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01
로망스 미학과 새로운 ‘합일’을 희구하는 낭만적 주체의 언어

로망스 미학과 새로운 ‘합일’을 희구하는 낭만적 주체의 언어 염선옥 첨단 테크놀로지의 물결이 세계를 장악하면서 시를 쓰는 철학적 기반에도 작지 않은 변화가 초래되었다. 가령 시 쓰기의 새로운 지표가 친환경적 태도로 기울어 가거나, 고독과 우울 같은 정서를 급격하게 동반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경향의 이면에는 서정적인 것이 낡은 것이라는 신념이 도사리고 있는데, 이는 시인들이 “‘서정적=감상적’이라는 오도된 등식과 연쇄적으로 마주”1)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삶의 모순을 표현하는 데 서정적 일치감보다는 대상과 내면 사이의 불일치를 선택하는 경향이 우세해진 것도 그 까닭의 한 측면을 이루고 있을 것이다. K-팝과 시가 화려한 리듬과 언어유희를 독자에게 전달한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지만, K-팝이 선풍적 인기를 구가하는 것에 반해 시는 일부 문학인들의 전유물로만 공유되고 있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K-팝이 K-문화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세계인들에게 통할 보편적 상상력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우리는 새로움이 주체의 상상력에서 연유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사유하는 것도 상상력”2)이라는 바슐라르의 표현처럼 K-팝은 이미지와 사유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음악이 덮고 있는 낭만성, 서정성이라는 은밀한 파동을 전달한다. 음악이 읊는 이미지는 사유로 이어지고 그것은 다시 ‘너’의 사유로 가닿는다. 이성의 시대를 맞이하면서“시를 쓸 수 없는 시대”, “시가 죽었다”라는 클리셰가 난무하는 가운데도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열정은 조금씩 패턴화되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 그런 와중에 문단 내로 불어오는 ‘서정’의 바람은 꽤 육중하고 소중하게 다가온다. 비역동적 세대의 내적 추락 2010년대 들어 청년층을 가리키는 신조어들이 국내외에서 쏟아져 나왔다. 국내에서는 3포 세대에 이어 N포 세대라는 신조어가 나왔고, 이웃 나라 일본에서는 사토리 세대, 중국에서는 탕핑(躺平, 당평, 눕자) 족이 출현했다. 2010년대 기준 청년실업 등 여러 사회 문제에 시달리는 20~30대 한국 젊은이들이 처한 암울한 현실을 일컫는 ‘N포 세대’는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의미를 염두에 둔 부정적 용어라고 볼 수 있고, 사토리 세대(とり世代)는 불교 용어로서 ‘깨달은 세대’, ‘득도한 세대’로 해석되어 물질적 욕망에서 벗어난 초월적 존재로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현대사회에서 희망을 포기한 젊은 세대를 일컫는다. 탕핑 족 역시 “평평하게 누워 있기”를 뜻하는 중국어로서 그 속내는 제아무리 일을 열심히 해도 대가가 없고 결국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 있는 게 현명하다는 뜻을 함축한다. 이는 존재의 고유한 운동성을 스스로 차단하는 세대를 통칭한다는 점에서 공통 함의를 띠고 있다.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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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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