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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갑야화(玉匣夜話)」의 의도적 장치(裝置)

  • 작성일 2022-12-01
  • 조회수 1,427

[비평 / 2022년 문학비평활동지원사업 선정작]



「옥갑야화(玉匣夜話)」의 의도적 장치(裝置)



김치홍




1.서론
2.「옥갑야화」에 대한 의혹
3.의도적으로 설정된 장치의 양상(樣相)
1) 편목의 변경과 서두의 잘못된 두 전제
(ㄱ)「옥갑야화」로 명칭의 변경
(ㄴ)편목의 변경 사유
(ㄷ)설정된 배경로서의 지명 ‘옥갑’
(ㄹ)설정된 서두의 상황
2)작품 구조상의 의도적 장치
(ㄱ)「옥갑야화」의 이야기 구조
①익명화된 발화자
②독립된 7개의 일화와 그 서사적 구성
③액자형의 일화
④서사구조가 완벽한 ‘허생 이야기’
(ㄴ)의도적 장치로서의 이야기 구조
3) 「허생 후지」의 수정
(ㄱ)실체적 존재에서 은폐된 ‘윤영’
(ㄴ)변형된 허생의 신분
4) 허구화를 위한 의장(意匠)의 흔적들-소결
4.의도적 설정의 필요성
(1)문체반정과 『열하일기』
(2)보수적 세력의 반발
(3)동명이인(同名異人)에 대한 의혹의 해소
(4)허생 설화와의 관현성
5.『열하일기』에 수록 의도
1)사상적 기반의 조성
2)적극적 응답으로서의 「허생전」
6.결말





「옥갑야화(玉匣夜話)」의 의도적 장치(裝置)



김치홍




1.서론
1.1


「옥갑야화(玉匣夜話)」는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37~1805)의 연행일기인 『열하일기(熱河日記)』에 수록된 26편1) 의 글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이른바 「허생전」이라 지칭되는 허생의 이야기는 「옥갑야화」의 본문을 이루는 7편의 이야기 중에 한 편으로 말미(末尾)에 들어있다. 그런데도 「옥갑야화」보다는 「허생전」이라는 명칭이 일반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옥갑야화」에는 「허생전」이라는 명칭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옥갑야화」에 일곱 편의 이야기들이 별도의 제목이 없이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목도 없이 수록된 작품을 「허생전」이라고 칭하고 별도의 독립된 한 편의 소설로 인식하게 된 것은 여러 단계를 거쳐 이루어졌다. 우선 허생의 이야기만을 선택하여 독립된 글로 인식하고 「허생전」이라는 명칭을 부여한 것은 김노겸(金魯謙,1781~1853)에 의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성암집(性菴集)』에서 연암의 『열하일기』 중 「허생전」·「호질(虎叱)」 등은 희롱(戱弄)으로 지은 작품을 면치 못하였다2) 고 했는데, 이것이 「허생전」을 한 편의 작품으로 인식한 그 근원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1900년에 『연암집(燕巖集)』을 편찬한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 1850∼1927)이 『열하일기』의 「관내정사(關內程史)」에서 「호질(虎叱)」과 「옥갑야화」에서 허생의 이야기만을 골라 별도로 「호질」·「허생전」이라고 편집·인쇄한 것이 대중화의 계기가 되었는데 이를 근거로 간혹 최초의 명칭을 부여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3) 이렇게 본다면 「허생전」이라는 명칭을 부여하고 독립된 작품으로 인식한 것은 김노겸이고, 일반적으로 많이 알려지게 된 것은 창강이 『연암집』을 내면서 별편으로 편집하고 인쇄·배포한 것이 그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 이후 「허생전」을 ‘소설’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1907년 《대한자강회월보(大韓自强會月報)》에 제8호부터 10호까지 3회에 걸쳐 ‘소설’난에 「허생전」을 번역하여 ‘「소설―허생전」’을 게재한 것이 처음으로 보인다.4) 그 이후부터 「허생전」은 독립된 한편의 소설로 알려지기 시작했고, 그 이후 소설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으며,5) 드물게 「옥갑야화」는 「허생전」의 출전으로만 알려졌다.
일반적으로 「옥갑야화」는 서두의 서술로 옥갑이라는 곳에서 모든 비장들과 함께 밤늦도록 침상에 누워 주고받은 7편의 이야기를 묶은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이 7편의 이야기들은 대부분 단편적인 것으로 주로 역관들의 사행(使行)과 관련되어 있는데, 이런 역관의 사행과 전혀 관련이 없는 허생의 이야기도 6편의 일화와 함께 수록되어 있다. 연암의 사행과 관련이 없는 기록임에도 이 허생의 이야기가 일화 중에서 늘 주목의 대상이 되었고 오랜 동안 연암 문학의 중요한 일부분으로 연구되어 왔다.
그럼에도 새삼 『열하일기』의 한 편목에 불과하고 「허생전」의 출전으로만 알고 있는 「옥갑야화」 전체를 문제 삼는 이유는 대부분의 독자들이 이 작품을 연암의 열하 기행문의 일부로 읽고 있는 반면에 연구자들은 한 편의 소설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허생의 이야기야 누구나 소설로 볼 수 있겠지만 일반 독자들은 그 이야기를 수록한 「옥갑야화」 전체를 소설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다. 이와 같이 일반 독자와 연구자들 사이에 간극(間隙)이 생긴 까닭은 「옥갑야화」를 바라보는 선입견과 시선의 차이에서 빚어진 결과이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옥갑야화」가 열하의 여행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일화(逸話)들임에도 『열하일기』에 수록되어 있으니 의당 연경(燕京)이나 열하(熱河)의 여행 기록의 일부로 보게 된 것이다. 더구나 『열하일기』에 수록된 많은 글 중에서 일기체의 글을 제외한 상당수 별편(別編)의 글들은 견문록으로서 분야가 다양하여 「옥갑야화」 또한 이러한 글과 같은 부류로 보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이런 연유로 일반 독자들은 「옥갑야화」를 여행 중에 어느 특정 지역인 ‘옥갑’에서 있었던 사소한 이야기, 즉 여행담의 하나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반면에 연구자들은 이미 「옥갑야화」를 소설로 단정하여 다양한 관점에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6)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자들은 「옥갑야화」가 왜 소설인지, 그리고 소설을 통째로 『열하일기』에 수록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가 없었다. 연구자들은 「옥갑야화」가 연행 일기 중에 들어있는 「호질」처럼 여행일기 내용의 일부로 삽입된 것이 아니고, 한 편목 전체를 한 편의 소설로 채워 『열하일기』에 수록한 까닭을 해명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일반 독자와 연구자들 사이에서 「옥갑야화」를 바라보는 관점에 괴리현상이 생긴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열하일기』에 수록된 대부분의 글들처럼 「옥갑야화」도 연행(燕行) 중에 있었던 사실을 기록한 것 중에 하나라고 일반화 되어 있는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서, 「옥갑야화」가 당시의 연행을 기록한 것이 아닌 소설이라는 관점에서 논의를 시작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이 글은 왜 「옥갑야화」가 소설이며, 소설을 연행록에 수록한 이유는 무엇인지를 해명하려는데 주목하려고 한다. 이것을 해명하는 과정은 「옥갑야화」가 애초부터 기행록이 아닌 것을 마치 연행의 일부 기록인 것처럼 가장하여 연행록의 틀에 적합하도록 짜맞추어 첨부한 허구일 것이라는 의혹을 먼저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것에서 출발할 것이다. 그리고 이 의혹을 해명하는 것과 동시에 허구로 인식하도록 장치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이용했는지 이것을 광범위하면서도 세심하게 살펴보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더 나아가 「옥갑야화」에 대한 구조적인 문제와 함께 실질적으로 연행(燕行) 중에 고안(考案)하거나 집필된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왜 『열하일기』라고 하는 글의 한편으로 허생 이야기를 수록하게 되었는지, 더구나 연암은 「허생전」이라는 명칭도 쓰지 못하고 여러 일화 중에 하나로 첨부하였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지를 파악하고자 한다. 거기에는 아마도 많은 곡절(曲折)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옥갑야화」에 대하여 이와 같은 의혹을 제기하면서 연구를 시도하는 것은 연암이 의도적으로 「옥갑야화」를 『열하일기』에 ‘첨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게 하는 부분이 작품 내외에 상당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연암이 허생의 이야기를 수록하기 위하여 「옥갑야화」라는 편목을 의도적으로 설정하였을 것이라는 추측과, 설정을 구체화하기 위한 장치들이 존재하고 있는 것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열하일기』에 의도적으로 첨부한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는 단서들이 「옥갑야화」 자체의 내용이나 구성요소, 그리고 별도로 첨부한 기록인 「후지」 등에서 보이고 있다. 그뿐 아니라 당시 연암이 첨부할 수밖에 없었던 작품 외적 요인들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도 유추할 수 있다. 따라서 그 연장선의 끝에서 「옥갑야화」가 기행문이 아니고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열하일기』에 수록한 것은 작가의 어떤 의도가 개입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는 사실을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본격적인 「허생전」 연구가 아니라 「허생전」 연구를 위한 기초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기초 작업을 통해 「허생전」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를 좀더 심화확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굳이 폴 프라이(Paul Fry, 1944~ )가 “텍스트는 세계 속에 있는 하나의 대상으로서 사회적 힘들에 의해 생산되고 유지되고 폐지되고 파괴된다”7) 는 원론적이고 거창한 견해를 빌리지 않더라도, 역사가 문학이 배태된 배경이라는 것을 전제하면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대문학에서도 소설이 그 시대적 배경을 내포하고 있다면 이러한 원전(原典)의 배경에 대한 연구는 현대문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진행형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주목을 요하는 것은 『열하일기』의 경우, 원고의 개작이 자의와 타의에 의해 상당부분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아울러 이해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하게 되는 큰 이유가 된다. 원고가 탈고된 이후 장안의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독서계의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이 독서계의 확산은 필연적으로 필사본의 양산을 가져왔고, 필사본으로 전사(傳寫)되면서 변질되었을 것은 자명하다. 즉, 독서층의 확산(擴散)은 필사본 형태로 유통되었는데 필사과정에서 본래의 모습과 달리 윤색되었다. 이 윤색은 당시의 경직되고 폐쇄적인 사상과 문화적 풍토로 말미암은 전사자 자신에 의한 자기검열로 좋지 않은 쪽으로 변질이었고 훼손이었다.8) 그뿐 아니라 연암도 지속적으로 수정 보완했으며 그 후 후손들이 『연암집(燕巖集)』을 편찬하면서 부분적으로 손질을 가했다.9) 이러한 점을 감안한다면 원전의 당시 배경을 이해하기 위한 작업은 창작과정뿐 아니라 이본연구까지를 포함해 끊임없이 이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미 두루 아는 바이지만 허생의 이야기는 연암이 20세 때 봉원사(奉元寺)에서 윤영(尹映)이라는 노인으로부터 들었다는 구체적 사실에 근거를 둔 것이다. 그는 연경(燕京)으로 가기 훨씬 앞선 25여 년 전에 들은 이 이야기를 중국 여행 기록인 것처럼 「옥갑야화」라고 한 편목을 만들어 『열하일기』에 수록했다. 연암은 열하와 연경을 오가는 여행 중에 비장·역관들로부터 과거 역관들의 화식(貨殖)과 신의(信義)에 관련된 일화들을 들었을 것이며, 아마도 이것을 「옥갑야화」에 기록하면서 끝부분에 허생의 이야기인 「허생전」을 수록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허생의 이야기를 열하 여행기의 일부인 것처럼 보이도록 고안(考案)한 의장(意匠, device)에는 연암의 저의(底意)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이것은 연암의 창작 의도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만일 연암이 이러한 이유로 의도적인 장치를 고안하여 하나의 편목을 만들어 『열하일기』에 수록했다면 이것은 「옥갑야화」뿐이 아니라 「허생전」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단서들의 분석은 「허생전」을 한층 더 섬세하게 이해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이와 같은 「옥갑야화」의 성립과 관련된 여러 의문점들을 해명하는 것이 주된 관심사가 된다. 논의의 전개를 위해 편목의 명칭을 이본(異本)인 「진덕재야화(進德齋夜話)」에서 「옥갑야화」로 바꾼 이유는 무엇이고, 그리고 많은 독자들이 궁금해 하는 옥갑은 어디이며 역관들의 화식과 의리에 대한 이야기와 각각 쓴 후지(後識) 두 편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고 어떻게 변조되었는가 하는 문제와, 정조(正祖)의 문체반정과 보수 세력의 반발과 관련해서 어떻게 대처했는지 등 여러 사항들을 중점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작품에서 의도적인 장치 설정의 필요성을 감지하게 될 것이고 이로 인해 연암의 깊은 속내를 탐색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허생전」이 첨부되었을 것이라는 의혹에 대한 해명이 이루어질 것이다.


1) 박지원, 이가원 역, 『국역 열하일기』Ⅰ·Ⅱ(수정재판본, 민족문화추진회, 1976)를 근거로 했다. 『연암집』(11집~15집, 한국고전번역원,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2000, 한국고전종합DB.)에 수록된 『열하일기』에는 「양매시화(楊梅詩話)」가 빠져 25편이다. 이 『연암집』은 1932년 박영철(朴榮喆)이 자연경실본(自然經室本)을 대본으로 편집, 간행한 신활자본으로 별집 권11∼15에 『열하일기』 전편이 수록되어 있다.
2) 김노겸(金魯謙), 『성암집(性菴集)』권7, 囈述 條: 大抵燕巖所著 熱河日記最爲盛行 膾炙人口, 而其中許生傳 虎叱 象房記 人皆稱之, 未免弄作, 黃金帶記 出古北口記, 有作者家體格, 然, 以文恢諧, 少謹嚴之意. 故 世或以小品目之, 毁譽相半.”(박종채, 김윤조 역, 『역주 과정록(過程錄)』, 태학사, 1997, p.68. 각주160에서 재인용)
3) 김진균은 “박지원의 「옥갑야화」 소재 허생에 「허생전」이란 명칭을 부여한 사람은 창강 김택영이고, 그 명칭을 공식화한 해는 1900년이다.”라고 단정했다. 그의 연구에 의하면, 창강 김택영(金澤榮)이 1900년에『연암집(燕巖集)』(原集) 6권2책을 간행하였고, 1901년 『연암집 속집(燕巖集 續集)』3권1책을 간행하였는데, 권6 별집 『열하일기』에서 ‘호질’과 ‘허생고사(許生故事)’ 등을따로 뽑아 「호질」·「허생전」이라는 제명과 함께 수록하였다고 했다.(김진균, 〈허생 실재인물설의 전개와 허생전의 근대적 재인식〉, 《대동문화연구》제62집,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08, p.281 각주 30 참고)
4) 박지원 찬, 이종준(李鍾濬)·이만무(李晩茂) 역, 「소설―허생전」,《대한자강회월보》제8호(1907.2,) pp.69~70, 제9호(1907.3), pp.51~53, 제10호(1907.4), pp.56~58. 이 이후 동화생(東華生)의 「연암외집허생전(燕巖外集許生傳)을 독(讀)」(『반도시론(半島時論)』1권4호, 1917.7.10, pp.81~84.)등이 있다.(김진균, 앞의 글, pp.281~282 참조)
5) 이 ‘허생의 이야기’를 가장 먼저 소설로 인식하고 연구한 사람은 「조선소설사」를 쓴 김태준(金台俊)이다. 그는 《동아일보》에 「조선소설사」를 1930년10월 31일부터 1931년 2월 25일까지 속편을 포함하여 68회(사실은 64회분이 두 번이어서 총 69회)에 걸쳐 연재를 했는데, 이때 46회(1월 27일자) 「대문호 박지원과 그의 작품(3): 허생전」을 게재하면서 ‘허생전’이라는 명칭을 쓰고 소설이라고 했다.(이윤석, 〈김태준 『조선소설사』 검토〉, 《동방학지(東方學志)》제161집(2013년 3월), 연세대학교국학연구원, p.415.),
6) 김윤식은 〈연암문학의 문제점〉에서 연암소설을 언급하면서 「옥갑야화」를 전체의 맥락에서 한편의 소설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김윤식, 『한국문학사 논고』, 법문사, 1973, p.81.) 그 이후 이재선은 「옥갑야화」를 액자소설이라는 견해를 피력하였고(이재선, 『한국단편소설연구』, 일조각, 1982, p.111), 임형택도 전체를 한편의 액자소설로 보아야 한다고 했으며(임형택, 「실학파 문학과 한문단편」, 『한국문학사 시각』, 창작과비평, 1984, p.428.), 김영동은 작품 전체의 내용을 후지와 함께 실학과 관련해서 소설로 분석하였다.(김영동, 〈옥갑야화의 분석적 고찰〉, 《한국문학연구》11집, 동국대학교 한국문학연구소, 1988, pp.135~149.). 이외에도 서인석의 〈「옥갑야화」의 세계와 「허생전」〉(《운당 구인환선생 화갑기념논문집》, 한샘, 1989, p.739~758), 김종철의 〈「옥갑야화(玉匣夜話)」 이해의 시각〉(《선청어문》28권, 서울대학교 국어교육과, 2000, pp.135~156., 박일용의 〈「옥갑야화(玉匣夜話)」 ‘서두 이야기’의 서사 전략과 문제의식〉(《고전문학과 교육》17집, 한국고전문학교육학회, 2009, pp.328~329.), 이승은의 〈「옥갑야화」속 ‘허생 이야기’를 통해 본 조선 후기 야담과 소설의 관계〉(《동방한문학》제80집, 동방한문학회, 2019), 그리고 「옥갑야화」를 포괄적으로 연구한 것으로는 강명관의 『허생의 섬, 연암의 아나키즘』(휴마니스트, 2017) 등이 있다.
7) 폴 프라이, 정영목 역, 『문학이론(Theory of Literature)』, 문학동네, 2019, p.374.
8) 김혈조, 「역자 서문, 개정판을 펴내며」, 『열하일기』(개정신판)1, 돌베개, 2021, p.4.
이에 대한 논문으로는 김혈조의 〈열하일기를 통해 본 자기 검열〉(《한국한문학》제68집, 한국한문학회, 2017, pp.7~38.)이 있다.
9) 김명호, 「열하일기 이본의 특징과 개작양상」, 『열하일기 연구』(수정증보판), 돌베개, 2022, p.444. 김명호는 전사되는 과정에서 적잖은 개변이 이루어졌다고 하면서 그 결과 수많은 이본이 생겨나 국내외 현재까지 알려진 것이 50여종 달한다고 했다. 정재철도 박종채가 『열하일기』의 문체가 순정하지 못하다는 세간의 의혹을 불식시키려, 『열하일기』를 교정하면서 원문의 내용을 대폭으로 수정하였다고 했다.(〈박종채의 열하일기 교정과 편집〉, 《대동한문학》제59집, 대동한문학회, 2019, pp.43~45.)




1.2


연암이 연행을 하게 된 것은 그의 삼종형(三從兄)10) 인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 1725~1790)의 권유에 의한 것이었다. 박명원은 1780년(정조 4년) 청(淸)나라 황제인 고종(高宗, 건륭제(乾隆帝, 1711~1799, 재위 1735~1796)의 칠십 수(壽)를 축하하기 위해 파견된 진하(進賀) 겸 사은(謝恩) 사절단11) 의 정사(正使)였다. 그는 정사에게 주어지는 특권으로 개인수행원인 자제군관(子弟軍官) 자격으로 연암과 그의 서삼종제(庶三從弟)인 박래원(朴來源)에게 동행을 권유하여 사행(使行)에 동반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당시 삼사(三使)는 개인 수행요원으로 전·현직 무관인 군관(軍官)을 데리고 갈 수 있었는데, 간혹 군관으로 집안의 자제나 친인척을 데리고 가면서 자제군관이라고 하여 이들이 새로운 문물을 체험하게 하면서 한편으로는 말동무를 삼기도 했다. 따라서 연암과 박래원은 정사 박명원의 자제군관이었으나 공적인 의무가 없어 반당(伴當)으로 참여하여12) 연경(燕京)으로 가게 된 것이다. 그 때 연암은 44세로 비교적 많은 나이였다. 당시에 자제군관들은 당대 명문가의 자제들로 최고의 지성과 식견을 지녀서 필담으로 중국의 지식인들과 교류가 가능하여 체류하는 시간을 대부분 학자들과의 학문적인 교류, 견문 확대 및 민간정보 획득에 활용했으며, 여행 중 사행 곳곳에 대한 묘사와 다양한 체험의 표현으로 사신들이 기록하기 어려웠던 내용을 서술했다.13) 이들은 공식 신분이긴 했으나 대부분 직무에서 배제되어 비교적 활동이 자유로워 정해진 공로(貢路)에서 벗어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연암은 정사 일행과 떨어져 구요동으로 가서 관제묘(關帝廟)나 백탑(白塔), 광우사(廣祐寺) 등을 보고 신요동에서 합류하는 등 대열에서 이탈하기도 하여 의무려산(醫巫閭山), 각산(角山) 등을 유람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연암이 연경(燕京)에서 열하(熱河, 현재 지명은 승덕(承德))까지 가게 된 것은 그때 건륭제가 연경에 있지 않고 황제의 여름 별장인 열하의 피서산장(避暑山莊)에 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는 조선의 사절단(使節團)이 열하까지 가기로 되어 있었으나, 도중에 많이 지체되어 연경에 도착했을 때는 열하까지 갈 시간적 여유가 없어 가기를 포기하였다. 그래서 연경 도착 후 사흘을 더 머물러 있었는데 갑자기 열하로 오라는 황제의 명령으로 가게 되었다. 조선의 사절단이 사행(使行)으로서 열하까지 가서 황제를 알현하고 연경으로 되돌아 온 것은 연암이 함께 간 사절단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연암은 애초에 열하까지 가지 않고 연경에 머물러 구경을 더 할 생각이었으나, 정사 박명원이 “연경을 멀다않고 온 것은 널리 구경하고자 온 것인데 열하는 앞서 온 사람들이 보지 못한 곳일뿐더러 돌아간 뒤에 열하가 어떠냐고 묻는 이가 있다면 무어라 대답할 것인고? 그리고 연경은 사행을 다녀온 사람이 다 본 바이지만 열하의 여행길은 좀처럼 얻기 어려운 기회이니 꼭 가야만 할 것이 아닌가?”14) 하고 간곡하게 권유하여 열하까지 함께 가게 되었다. 연암의 일행이 열하의 태학에 머물렀던 기간은 8월 9일부터 14일까지 고작 엿새에 불과했다.
연암이 연경에 가기 전에, 전의감동(典醫監洞) 집에 혼자 기거하고 있을 무렵15) 어울렸던 벗들이 잇달아 연행(燕行)에 나서고 있었다. 연암과 각별했던 홍대용(洪大容)은 이미 1765년에 동지사의 일원으로 다녀왔고, 1776년에는 박명원이 동지사로 떠날 때 친우 나걸(羅杰)이 서장관으로 가게 되자 연암은 개성까지 전송했다.16) 1778년 3월에는 그와 아주 가까운 이덕무(李德懋)와 박제가(朴齊家)가 사은진주사의 일행으로 연경으로 함께 떠나는 것을 전송했었으며, 그해 7월에는 유득공(柳得恭)도 연경으로 떠났다. 그러나 1778년 연암은 홍국영(洪國榮)을 피해 가족들을 이끌고 황해도 금천 연암골로 들어가 2년 동안 은거하다시피 있다가, 홍국영이 실각한 뒤인 1780년 다시 서울로 왔으나 그때는 ‘훌륭한 벗들이 죽고 거의 남은 이가 없어서 울적하고’17) 의기소침해 있을 때였다. 이때 마침 박명원이 사절단의 정사로 가게 되자 연암에게 같이 갈 것을 종용했던 것이다. 물론 은거해 있던 기간에 연암은 독서와 사색을 통해 나름의 사상이 정립되었겠지만, 이미 연경을 다녀온 홍대용이나 박제가·이덕무 등을 통해 중국의 문물에 대해 통효(通曉)하고 있었던 그에게 중국의 여행은 자신의 사상에 대한 확신을 더해준 기회18) 라고 볼 수 있다.


10) 연암의 증조부는 형제가 일곱이었는데 증조부는 여섯째인 태길(泰吉)이었고, 종증조부인 맏이는 태두(泰斗)였다. 태두의 증손자가 박명원(朴明源)이었는데, 그는 영조(英祖)의 후궁인 영빈 이씨(暎嬪 李氏) 소생인 셋째딸 화평옹주(和平翁主,1727~1748)와 혼인하여 금성위(錦城尉)에 봉해졌으며, 영조의 깊은 사랑을 받았다. 연암과는 8촌이었으나 연암의 지극한 후원자였다.
11) 이에 대한 자세한 연구는 김동석의 『노이점의 수사록 연구』(보고사, 2016, pp.46~53.)가 있다.
12) 열하로 갈 때 수행단 인원을 축소하였는데 그 때 정사인 박명원(朴明源)은 비장을 주명신(周命新)만을 선택했으나, 부사 정원시(鄭元始)는 정창후(鄭昌後)와 이서구(李瑞龜), 서장관인 조정진(趙鼎鎭)은 조시학(趙時學)을 지명하여 4명이었다. 부사가 두 명을 지명하였던 것으로 보아 정사인 박명원이 한 명을 추천한 것은 연암을 비장 자격의 동행인으로 이미 결정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다만 정사 이하의 직함과 성명을 적어서 열하의 예부로 보내는 단자(單子)에서 연암을 뺀 것은 그가 비장의 명목으로 별상(別賞)을 받을까 보아 미리 피혐(避嫌)한 것이라고 했다.(박지원, 이가원 역, 「막북행정록」, 『국역 열하일기』Ⅰ(수정재판본), 민족문화추진회, 1976, p.310.) 이후 『열하일기』의 본문 인용은 이 책을 이용했으며, ‘『국역 열하일기』Ⅰ·Ⅱ’로 약칭했다). 이것으로 보아 연암은 공식적인 수행요원이었으나, “놀 양으로 가는 나와 같은 이는 반당(伴當)이라고 부른다”라고 자신을 반당이라고 지칭했던 것으로 보인다.(「피서록」, 『국역 열하일기』Ⅱ, p.161,)
13) 장안영, 〈18세기 지식인들의 눈에 비친 역관 통역의 문제점 고찰〉, 《어문논집》제62집, 중앙어문학회, 2015, pp.351~354.
14) 「막북행정록」, 『국역 열하일기』Ⅰ, p.310.
15) 연암은 1772~3년 무렵 가족을 장인의 고향인 경기도 성남 근방에 있는 석마(石馬)로 보내고 전의감동에 혼자 거처했다. 이때 홍대용·정철조·이서구·이덕무·박제가·유득공 등과 더불어 어울렸다.(박종채, 김윤조 역, 『역주 과정록(過程錄)』, 태학사, 1997, pp.43~47)
16) 「피서록」, 『국역 열하일기』Ⅱ, p.189.
17) 박종채, 앞의 책, p.64.
18) 김명호, 「연암의 현실인식과 전(傳)의 변모양상」, 임형택·최원식 편, 『전환기의 동아시아 문학』, 창작과비평사, 1985, p.69.




1.3


『열하일기』는 전체 여행 중에서 국내에서의 머물렀던 부분을 제외하고, 중국에서 머물렀던 기간만을 기록했다. 즉 전체여행 기간인 1780년 5월25일부터 10월 27일까지 약 5개월간의 여행 중에서, 『열하일기』는 6월 24일 압록강을 건너서부터 시작하여 목적지인 연경을 거쳐 열하로 갔다가 다시 연경으로 되돌아 온 8월 20일까지 58일간의 일기체의 글과 연경 도착 이후부터 9월17일 귀국하기 위해 출발할 때까지 연경에 머물렀던 별편(別編)의 기록으로 구성되어 있다.19) 중국에서 머물렀던 것만을 기록하여 제한적이긴 하지만 이 기간의 일정을 일기형식으로 자세하게 기록하면서 특정 지역이나 사건 등과 관련된 화제(話題)는 독립된 별편으로 따로 구성하였는데, 주로 가면서 본 것과 만나서 나눈 대화나 필담(筆談)을 기록한 견문 내용을 다루고 있다. 따라서 전체의 글을 두 유형으로 나누면, 일정을 기록한 일기형식의 글이 7편이고, 나머지 19편20) 은 별편으로 연암이 만난 지식인이나 관료와 나눈 필담을 기록한 것이거나 자신이 인식한 중국의 국내외 정세를 기록하거나 풍물을 소개한 글들이다. 당시에 독자가 많아 전사본(傳寫本)이 다양하게 존재했는데 모두 26권 10책으로 구성되었다. 『열하일기』는 연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쓰기 시작하여 4년 만에 탈고21) 하였으나 그 이후에도 퇴고를 거듭했다.
연암의 일행은 정사(正使) 박명원(朴明源)과 부사(副使) 정원시(鄭元始), 서장관 조정진(趙鼎鎭)을 비롯해서 역관 19명, 비장·하인 등 270명과 말 194필22) 이 1780년(정조4년) 5월25일23) 한양을 출발하였다. 21일 만인 6월 15일 의주에 도착하였으나 장마로 10여일을 머물다가 6월 24일에서야 겨우 압록강을 건넜다.24)『열하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압록강을 건넌 후 7월 9일까지 요동벌을 지나 십리하까지 15일간의 여정에서 책문(柵門) 안에서 벽돌을 사용한 것과 성제(城制)를 통해 그들의 이용후생적 건설을 목격하였다. 이것을 기록한 것이 「도강록(渡江錄)」이다. 7월10일 십리하를 출발하여 성경(盛京, 심양), 영안교, 요하를 거처 14일 소흑산에 도착할 때까지 5일간의 기록이 「성경잡지(盛京雜識)」이며, 15일 신광령을 출발하여 23일 산해관(山海關)에 도착할 때까지 9일간의 기록으로 거제(車制)와 교량(橋梁) 등에 대해 서술한 것이 「일신수필(馹汛水筆)」이고, 7월 24일 산해관을 출발하여 8월 1일 연경에 도착할 때까지와 도착한 후 8월 4일까지 구경한 11일간의 기록이 「관내정사(關內程史)」이다. 이 「관내정사」에는 7월 28일자 일기의 일부분으로 「호질(虎叱)」에 대한 기록이 있다. 새벽에 풍윤성(豊潤城)을 떠나 저녁에 옥전현(玉田縣)에 도착하였고, 저녁에 성중에 들어가서 소주(蘇州) 사람 심유붕(沈由朋)의 점포를 조용히 구경하다가 안쪽의 벽 위에 걸린 한 편에 기문(奇文)인 「호질」을 기록한 액자를 보고 주인의 양해를 얻어 베꼈다고 당일의 일기에 기록했다. 8월 1일 연경에 도착했으나 황제는 별궁인 열하의 피서산장(避暑山莊)에 가 있었다. 애당초보다 늦게 도착해 날짜가 촉박하여 열하까지 갈 수 없을 것이라 여겨 4일까지 연경의 숙소인 서관(西館)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던 중 4일 초저녁에 열하로 와서 예(禮)를 행하라는 황제의 명으로 8월 5일 연경을 출발하여 9일 열하에 도착하였다. 이때는 사절단을 줄여 정사·부사·서장관 외에 역관 3명과 비장 4명과 하인 등 74명과 말 55필만 갔다.25) 연경을 출발하여 열하에 도착하기까지 5일 간 여정의 기록이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이다. 열하의 태학에서 8월 9일부터 14일까지 6일 간 머무르며 중국의 문인·학자들과의 교류와 문물제도에 대한 것과 13일 황제의 만수절(萬壽節)을 기록한 것이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이고, 8월15일 열하를 출발하여 다시 연경으로 돌아온 20일까지의 기록이 「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이다. 『열하일기』에서 일기형식의 기록은 여기까지이다. 그리고 8월20일부터 9월17일 귀국하기 위해 출발할 때까지 연경에 머무르면서 문물과 제도를 구경하였는데 이것이 「황도기략(黃圖紀略)」으로 이것은 일기형식으로 기록하지 않았다.
연경으로 되돌아와서 머물러 있는 동안에도 황제가 열하에서 연경으로 떠났다는 연락을 받고 8월 29일 연경을 출발하여 밀운현(密雲縣)까지 마중을 나가서 9월 3일 황제를 맞아 다시 연경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9월 15일에 오문(午門) 앞에 나아가 황제가 하사한 상품을 받은 뒤에 여섯 통의 회답 자문(咨文)을 받았고, 16일에 예부에 나아가 하마연(下馬宴)을 행하였으며 숙소로 돌아와 또 상마례(上馬禮)을 행하고, 17일에 출발하여26)10월에 27일에 귀국하였다.27) 이 일기형식으로 기록한 7편의 글들과 연경의 풍물과 제도를 기록한 「황도기략」 등을 통해 열하까지 가는 여정과 연경에서의 전체 여행 일정 전모를 파악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열하일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전반부인 일정을 일기 형식으로 날짜별로 기록한 「도강록」부터 「환연도중록」까지 기록과, 일기 형식에서 벗어난 나머지 글들 즉 열하와 연경, 성경 등 여행지뿐만 아니라 연행 도중에 곳곳에서 수집한 각종 자료인 비문이나 서적류의 발췌와 단편적인 소감의 기록과 메모, 사적(史蹟)에 대한 견문 등과, 열하(熱河)나 연경(燕京)에서 그 지역 문인들을 비롯해서 명사들과 교유하며 필담했던 그곳 문물제도와 이용후생의 삶의 모습, 춘추의리론(春秋義理論)에 대한 비판, 주자학을 이용한 지식인의 회유정책과 몽고와 티베트에 대한 외교정책 등 연암이 현장에서 목격한 것을 세심하게 기록한 잡록이나 잡기(雜記), 야화(野話), 소초(小抄), 시화(詩話) 등 다양한 문장형식으로 사소한 것까지를 기록한 별편 19편을 합쳐 모두 26편으로 구성되어 있다.28) 이중에 6일간 열하의 태학에서 머물며 만난 지식인들의 출신과 이력, 성격 등 그들의 면면을 기록한 「경개록(傾蓋錄)」, 천하의 대세를 살핀 글로 청나라 학술과 사상의 동향뿐 아니라 지식인의 관리 통제라는 정치적 관점이 고려된 「심세편(審勢編)」, 연암이 만난 가장 거물급 인사인 70세의 전 대리시경(大理寺卿) 윤가전(尹嘉銓, 그는 다음 해에 문자옥(文字獄)으로 처형되었다.)과 청의 학자인 혹정(鵠汀) 왕민호(王民皥) 등과 음악에 대해 필담(筆談)을 기록한 「망양록(忘羊錄)」, 왕민호와 16시간 동안 필담으로 월세계, 자전(自轉), 역법, 천주 등 자연과학 분야의 문제를 비롯해서 종교·정치·역사·문화 등을 논한 「혹정필담(鵠汀筆談)」, 살아있는 부처로 통하는 티베트 승 반선(班禪, 판첸) 라마29)를 만난 기록인 「찰십륜포(札什倫布)30) 와 「반선시말(班禪始末)」, 열하에서 만난 지식인들과 더불어 나눈 라마교에 대한 필담을 기록한 「황교문답(黃敎問答)」, 피서산장에서 본 시(詩)와 그것을 평한 시화(詩話)의 기록과, 중국과 관련된 조선 시인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수록한 「피서록(避暑錄)」, 황제의 생일을 맞아 모여든 마술사들이 열하의 장터인 광피사표패루(光被四表牌樓) 밑에서 펼쳐놓은 20가지 마술을 보고 중국 마술에 대해 기록한 「환희기(幻戲記)」, 열하(熱河)로 가는 도중의 고북구(古北口)를 지나 피서 산장에 이르기까지를 쓴 기행록으로 연경에서 열하에 이르는 과정에서 있었던 기문(奇文)들을 모은 것과 만수절 행사를 기록하고 여기에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나,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 코끼리 이야기(「상기(象記)」) 등을 수록한 「산장잡기(山莊雜記)」, 연경에서 열하로 가는 도중의 고북구 밖의 이문(異聞)을 비롯하여 반양(盤羊)으로부터 천불사(千佛寺)에 이른 60종의 기이한 이야기를 모은 잡록인 「구외이문(口外異聞)」, 열하로 오라는 명령서와 열하의 피서산장에 있는 청(淸) 황제의 행재소에서 황제에게 올린 문서와 황제가 내린 칙교 등 보고들은 외교문서를 주로 기록한 「행재잡록(行在雜錄)」 등이 열하에서의 견문을 쓴 기록이다. 열하에서 연경으로 돌아오는 길에 옥갑에서 비장들과 밤새 나눈 이야기를 모은 기록으로 알려진 것이 「옥갑야화(玉匣夜話)」이고, 열하에서 연경으로 돌아와 그 곳의 명승지와 건물들에 대한 내력을 엮은 것으로, 구문(九門)을 비롯하여 화조포(花鳥舖)에 이르기까지 40종의 문관(門館)·전각(殿閣)·도지(島池)·점포(店舖)·기물(器物) 등을 기록한 「황도기략(黃圖紀略)」, 연경의 태학에서 공자 사당을 참배하고 연경의 유교 명승지를 둘러보고 유교나 유학에 대해 쓴 기록인 「알성퇴술(謁聖退述)」, 연경의 유리창(琉璃廠)의 양매죽사가에 있는 서점 육일재(六一齋)에서 8월 20일 중국문사인 황포(黃圃) 유세기(兪世琦)를 처음 만난 뒤 9월 17일 연경을 떠나기 전까지 일곱 차례나 만났는데 그때 유세기가 데리고 온 중국명사들과 문답한 필담의 일부를 정리한 「양매시화(楊梅詩話)」31) , 중국의 의학서적과 의술에 대한 기록인 「금료소초(金蓼小抄)」, 동란재에서 머물며 역사적으로 특이한 조선과 증국의 역사·문학·지리·음악 등에 대해 쓴 수필인 「동란섭필(銅蘭涉筆)」, 연경 안의 종교 유적지인 홍인사(弘仁寺)를 비롯한 이마두총(利瑪竇塚) 등 20여 곳을 둘러보고 쓴 도관(道觀), 사찰, 귀신, 묘지 등 유적(遺蹟)에 관한 기록인 「앙엽기(盎葉記)」 등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이 별편은 연경과 열하를 오가는 과정의 견문과 열하에서의 일을 기록한 것이 대부분이고 연경에서의 견문기록은 6편뿐이다. 따라서 열하 이외의 기록은 이 6편의 별편과 6월 24일 압록강을 건너 8월 9일 열하에 도착할 때까지 일기형식으로 기록한 5편, 열하에서 연경으로 되돌아간 것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환연도중록」과 이야기 모음집인 「옥갑야화」 등 모두 13편이다. 그리고 나머지가 열하에서 6일간을 일기형식으로 기록한 「태학유관록」과 별편 12편은 모두 열하에서의 기록이다. 『열하일기』라는 명칭은 이와 같이 열하에서의 각종 견문과 필담을 집중적으로 기록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열하일기』의 전체 26편의 편목을 장황하게 들춰낸 것은 일기 형식이 아닌 대부분의 별편 의 내용 중에는 특정 지역이나 날짜를 명시하고 있어 그 출처가 분명하다는 것과, 간혹 「금료소초」처럼 여정을 구체적으로 기록하지 않은 편목일지라도 글의 내용을 통해 출처를 뚜렷하게 밝히면서 여행 중에서 겪은 객관적 사실을 기록하여 어느 곳에서 쓴 것인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는 사실32) , 또한 이와 같은 편목에 대한 설명을 통해 별편이 『열하일기』에 수록한 것이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점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굳이 이것을 밝히는 것은 별편인 「옥갑야화」만 편목 자체의 내용 이외에는 나머지 정보를 도저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열하일기』에서 일기문으로 된 글들과 별편으로 된 글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관련되어 있어 상호 보완적이어서 일기문의 내용이 별편으로 구체화되거나, 별편의 자세한 일정을 일기문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러나 「옥갑야화」는 열하에서 연경으로 가는 일기문인 「환연도중록」에서도 전혀 언급한 바가 없다. 단지 별편으로 된 편목의 명칭에 구체적 지명이 있으나 그 지명을 전혀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일정이 불분명하고 익명화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여 장소나 날짜를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은 「옥갑야화」 한 편뿐이다.
글의 전개는 먼저 「옥갑야화」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고, 그 의혹을 근거로 「허생전」을 「옥갑야화」에 수록하기 위해 어떻게 의도적으로 장치를 했는지 다각도로 검토하고, 「허생전」을 수록하는데 그러한 의도적인 장치가 필요했던 까닭은 어디에 있었으며, 결과적으로 나타난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순차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9) 당시에 연암과 함께 연경으로 갔던 사람이 남긴 기록은 정사의 상방비장이었던 노이점(盧以漸, 1720∼1788)의 『수사록(隨槎錄)』과 주명신(周命新, 1729∼1798)의 『옥진재시고(玉振齋詩稿)』가 있다. 노이점은 연암이 기록하지 않은 한양에서 5월 25일에 출발하여 6월 24일 도강할 때까지와 9월 17일 연경을 출발하여 10월 27일 귀국할 때까지를 포함하여 전체 일정을 일기형식으로 기록하였다. 이 기록을 통해 『열하일기』에 생략된 구체적 여정을 알 수 있으며, 이와 함께 이국인과 수행원의 눈에 비친 연암을 제시하기도 하여 연행에 대한 풍부한 기록을 보여준다.(김동석, 〈노이점의 수사록에 대한 연구〉, 《한국한문학연구》27집, 한국한문학회, 2001, pp.260~261) 다만 그는 열하로 가는 일정을 포함에서 연경으로 올 때까지는 기록하지 못했다. 그는 나이가 많아 열하는 가지 않고 연경에 남아 있었고 대신 정사가 선택한 상방비장 주명신이 갔기 때문이다(당시 노이점은 61세, 주명신은 52세, 박지원은 44세였다.). 『옥진재시고』는 박지원과 노이점, 박명원 같은 사람들과 화운(和韻)한 시 뿐만 아니라 연경에 가면서 보았던 명승지, 자신이 느꼈던 감회 같은 것을 기록하고 있다.(김동석, 〈장서각 소장 『옥진재시고』 연구--1780년 주명신의 북경 기행시를 중심으로〉, 『장서각』32권, 한국학중앙연구원, 2014. pp.271~278). 한편 상방비장인 주명신은 명의(名醫)로 허준(許浚)의 제자였으며, 그는 『동의보감』을 참조하여 56세가 되던 정조 8년(1784년) 임상치료학의 명저인 『의문보감(醫門寶鑑)』 8권을 저술하였다.(유준상·김남일, 〈『의문보감(醫門寶鑑)』의 편찬과 주명신의 행적에 대한 연구〉, 《대한한의학원전(原典)학회지》제26권 2호(2013년 5월), 대한한의학원전학회, pp.64~65.) 신호열·김명호 공역, 『연암집』 제3권, 「공작관문고」, 「순찰사에게 올림(上巡使)」, 각주 6에 기록된 것이나 《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을 비롯한 많은 자료에서 저술연대를 1724년이라고 한 것은 잘못된 기록이다.
20) 일기형식으로 된 글이 아닌 편목의 숫자는 이가원(李家源)이 번역하고 편집한 『국역 열하일기』Ⅰ·Ⅱ를 근거로 한 것이다. 대체로 일기형식의 기록은 순서가 같으나, 나머지 부분은 이본에 따라 편목 수와 차례가 다르다.
21) 김하명, 「박지원 작품에 대하여」, 박지원, 홍기문 역, 『나는 껄껄선생이라오』, 보리, 2004, p.422.
김명호는 「도강록 서(序)」의 끝에 ‘숭정(崇禎) 156년 계묘(癸卯)에 열상외사(洌上外史) 제(題)’라고 한 것을 근거로 1783년에 탈고한 것으로 추정했다.(김명호, 『열하일기 연구』, 창작과비평, 1990, p.22.),
그러나 「피서록」의 오조(吳照, 1755~1811)에 관한 기록을 근거로 하면 1785년에도 「피서록」 원고를 작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피서록」, 『국역 열하일기』Ⅱ, p.226.)
22) 노이점, 김동석 역, 《열하일기와의 만남 그리고 엇갈림, 수사록》,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15, p.68.
23) 여기의 기록한 날짜는 음력이다. 참고로 양력으로 환산하면 1780년 6월 27일(화요일)로 약 한 달간의 날짜의 차이가 있다.
24) 노이점, 앞의 책, pp.67~71.
25) 「행재잡록」, 『국역 열하일기』Ⅱ, p.320.
26) ‘진하 겸 사은 정사(進賀兼謝恩正使) 박명원(朴明源)과 부사(副使) 정원시(鄭元始) 장계(狀啓)’, 『정조실록』10권, 정조 4년 9월 17일 임진(1780년). 이 장계에는 9월 17일에 연경에서 출발했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8월 1일 연경에 도착하여 열하로 가게 된 경위를 간략하게 기록하고 주로 열하에서 11일부터 14일까지 피서산장에서 황제를 만난 일을 비롯해서 열하에서의 있었던 일을 상세히 기록했다.
27) 노이점, 앞의 책, p.435.
28) 전체 편수와 체제, 편집 방식에 따라 이본간에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박종채가 1826년 판각하기 위해 최종 편집한 것은 문고(文稿) 16권, 『열하일기』가 24권, 『과농소초(課農小抄)』 15권으로 되어 있다.(박종채, 앞의 책, p.303.) 이 체제와 관련된 것은 김명호의 「열하일기 이본의 특징과 개작양상」( 『열하일기 연구』(수정증보판), 돌베개, 2022, pp.27~47)와 〈『열하일기』 이본(異本)의 재검토―초고본 계열 필사본을 중심으로〉(《동양학》제48집(2010년),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를 참고할 것.
29) 원문에서 한자 음차(音差)인 ‘반선액이덕니(班禪額爾德尼)’로 표기 된 것은 티베트어인 ‘판첸 라마’가 아니고 만주어인 ‘판천 어르더니’를 음차한 것이다. ‘반선액이덕니’의 의미는 ‘광명(光明)’, ‘신지(神智)’라고 했다.(「반선시말」, 『국역 열하일기』Ⅱ, p.89.) ‘판천’은 판첸으로 대학자를 의미하고 ‘어르더니’는 만주어로 ‘존귀한 사람’ 혹은 ‘진보(珍寶)’이란 뜻이다.
30) ‘찰십륜포(札什倫布)’는 티베트 말로 큰 덕이 있는 승려가 거처하는 집으로 건륭황제가 열하에 황금전각을 지어 활불인 반선이 거주하도록 한 수미복수지묘(須彌福壽之廟)를 지칭한 것이다.
31) 이가원의 『국역 열하일기』Ⅱ의 「양매시화」 항목에는 서문과 2개의 단락만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단국대 연민문고 소장 「양매시화」는 32장(張)의 필사본 1책으로, 서문과 32개 단락의 본문으로 구성되어 있다.(김명호, 〈『열하일기』 ‘보유(補遺)’의 탐색〉, 《동양학》제52집(2012년 8월),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p.3.). 김혈조 역본인 『열하일기』(돌베개, 2009년)에는 게재하지 않았다가 개정신판(2017년)을 간행하면서 「양매죽사가에서 쓴 시화(양매시화)」라고 번역하여 수록했는데, 「양매시화 서」에 이어 12쪽의 분량을 담았다. 이것은 단국대 연민문고 소장본을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리상호 번역본 『열하일기』(보리, 2004)에는 없다.
32) 사소한 것까지 기록하여 어디에서 기록했는지를 알 수 있는데 예를 들면, 「금료소초」 부록에는 열하에서 정리한 부분을 왕혹정에게 주었다고 기록했으나, 귀국하여 연암에서 쓴 서문에는 연경에서 구하려 했던 일부 자료를 구하지 못했음을 밝히고 있다. 이로 보아 연경에서 일을 보완하여 기록했음을 알 수 있다.(「금료소초」, 『국역 열하일기』Ⅱ, p.341.)




2.「옥갑야화」에 대한 의혹


「옥갑야화」는 서두에 “옥갑(玉匣)에 돌아와서 모든 비장들과 더불어 머리를 맞대고 밤들어 이야기를 시작하였다.(行還至玉匣。與諸裨連牀夜語)33) ”라고 하여 「옥갑야화」라는 명칭을 부여한 것으로 보인다. 이본(異本)으로 「진덕재야화(進德齋夜話)34) 가 있는데 이 글 서두에는 ‘여러 비장·역관과 진덕재에서 밤에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與諸裨譯夜話進德齋, 有言)’라고 기록하여 이 글의 명칭이 「진덕재야화」로 된 것이다. 그런데도 그동안 이 「옥갑야화」로만 부르게 된 이유는 「진덕재야화」가 필사본으로 전하는 반면에 「옥갑야화」는 활자본으로 출판되어 대중화되었기35) 때문이다. 이에 대한 것은 뒤에서 다시 언급하기로 한다.
「옥갑야화」가 일반인이나 연구자들에게 주목을 받았던 이유는 수록된 7편의 이야기 중에 허생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초기의 연구자들은 「옥갑야화」에서 허생의 이야기 부분만 떼어내어 ‘허생전’36) 이라고 명명하고 따로 분리하여 연구했다.37) 그 이유는 “「옥갑야화」의 이런저런 이야기에서 ‘허생의 일’이 가장 압권이어서 분리 독립을 하게 되었다”38) 고 한 임형택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워낙 뛰어난 작품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970년대 초반부터 「옥갑야화」 전체를 하나의 작품으로 보려는 경향이 나타나면서 그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 되었다.39) 이 중에 변곡점(變曲點)이 된 탁월한 연구는 7편의 일화를 독립된 내부 이야기로 보고 순환목적 유형의 액자소설로 주장한 이재선(李在銑)의 논문이다.40) 그러면서 그는 「허생전」을 「옥갑야화」 전체와 관련해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 근거를 액자식 구성으로 설명했다. 그는 「옥갑야화」가 일종의 일화와 같은 단순한 설화(說話)를 늘어놓음으로써 그 구성의 기조에 있어서만은 순환액자의 성격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41) 고 했다. 그러나 일부의 일화의 경우는 서사구조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첨언(添言) 정도의 것도 있어 7편이 모두 액자식 구성으로 보기 어려운 부분도 있으나 구성상 7편이 독립된 이야기이면서 일정한 주제를 형성하고 있으므로 액자소설로 인식하려고 하는 등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다.42) 한편 「옥갑야화」 전편을 분석한 강명관은 서두의 이야기를 화폐와 관련하여 설명하면서 ‘화폐로 인한 경제적 변화에 맞서 화폐에 선행하는 가치’43) 의 관점에서 허생의 이야기의 전제로 해명하고 있을 뿐 다른 각도에서 상호 관련하여 구체적인 설명을 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대표적인 연행록의 하나인 『열하일기』에 수록된 한 편목(編目)인 「옥갑야화」가 소설이라고 했을 때, 연암은 자신의 연행과 관련이 없는 한 편의 소설을 통째로 여행기에 수록한 이유는 무엇일까? 간혹 연행기록의 일부로 소설을 수록할 수는 있다. 예를 들면 『열하일기』에도 산해관에서 연경으로 가는 과정의 11일간을 기록한 「관내정사(關內程史)」에 8월 28일의 일을 기록하면서 「호질」을 삽입했다. 이것은 하루의 일정을 일기로 쓰면서 당일에 겪은 일 중에 하나로 수록한 것이다. 그것도 일기문의 기록에 사건의 자초지종만 기록하고 「호질」을 별편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일기체로 기록한 「관내정사」에 일기의 일부로 작품 전체를 수록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과 달리 한 별편으로 구성된 편목의 전체에 어떤 설명도 없이 연행과 관련이 없는 한 편의 소설로 채워 넣은 것은 「옥갑야화」 하나뿐이다. 따라서 의혹의 핵심은 소설을 『열하일기』에 끼워 넣은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것과, 삽입하기 위해 어떤 장치를 하였는가 하는 것이 된다.
연구자들이 『열하일기』에 수록한 편목인 「옥갑야화」 전체를 소설이라고 전제하고 다양하게 논의하면서도 정작 『열하일기』에 수록하게 된 것에 관련해서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있다. 막연히 『열하일기』에 수록된 한 편의 글인 「옥갑야화」가 소설이라고 단정하고 논의를 제기할 뿐이다. 연행록임에도 불구하고 『열하일기』에 「옥갑야화」라는 소설 한 편을 삽입한 까닭은 예사롭지 않은 일임에도 그에 대해 주목하거나 해명하려는 논의가 없었다. 그러나 기행문으로 위장된 「옥갑야화」를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고 하기에는 그 이면에 너무 많은 의혹이 담겨져 있다.
그런 의미에서 연암이 「옥갑야화」를 연행록인 『열하일기』에 수록한 의도를 살펴보고, 「허생전」만 따로 떼어 소설로 보지 않고 「옥갑야화」 전체를 소설로 보는 이유는 무엇인지도 세심하게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우선 글이 기행문이 아니고 소설인 이유를 밝혀내기 위해 작품을 분석하여 내적요소들을 두루 확인하고, 외적요인으로 연행록에 수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찾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 연암이 『열하일기』에 「옥갑야화」를 수록한 의도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를 제기한 출발점은 애초에 연암의 의도한 바가 「옥갑야화」가 아니라 「허생전」을 지으려고 했던 것에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진덕재야화」 후지인 「허생 후지Ⅱ」에 윤영과의 두 번째 만남에서 나눈 대화에 “‘자네, 일찍이 허생을 위해서 전(傳)을 쓰려더니 이젠 글이 벌써 이룩되었겠지’라고 하기에, 나는 아직 짓지 못했음을 사과했다”44) 라는 글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이로 미루어 보면 연암은 처음부터 허생의 이야기를 전(傳)으로 지으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그는 열하로 가기 전까지 무려 24년여의 세월이 지날 때까지 「허생전」을 짓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윤영이 언급한 ‘전(傳)’이라고 하는 형식은 일반적인 전기(傳記, biography)의 장르적 개념과 다르다. 대개 전기 혹은 전기문학은 실제로 살아 있던 인물의 일생이나 일생의 일부를 기록한 글로 특정한 인물의 남다른 경험이나 업적에 대하여 그가 겪은 실제 사실을 바탕으로 기록한 것을 지칭한다. 이것은 르네 웰렉(René Wellek, 1903~1995)이 ‘연대기적 재현으로 역사 편찬(historiography)의 일부45) 로 언급했던 것과 같은 의미이다. 그러나 윤영이나 연암이 인식한 ‘전’의 개념은 이와 다르다. 그가 인식한 전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의 「열전(列傳)」과 깊은 관련이 있다. 연암이 쓴 한문소설은 전의 형식을 가지고 있는데, ‘전’은 동양의 전기문학을 대표하는 전통적 양식이다. 이것은 수집된 자료를 바탕으로 실재했던 인물의 생애를 객관적으로 서술하면서 그 인물이 지닌 개성과 생애가 시사(示唆)하는 도덕적 교훈을 아울러 전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역사이자 동시에 문학이라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도덕적 평가를 곁들여 후세에 전하는데 목적이 있다. 이러한 전의 형식은 사마천에 의해 양식적 규범이 확립된 이후 한문학의 장구한 역사 속에서 고유의 형식과 지위와 전통을 수립한 것으로 되어 있다.46) 김명호는 사마천이 『사기』의 「열전」 첫 장인 「백이열전(伯夷列傳)」에서 역사적 인물들의 운명과 관련하여 천도(天道)가 시행되지 않는 현실에 비분(悲憤)하면서 뛰어난 자질로써 천하의 공명을 세웠으되 세상에서 경시되거나 잊혀진 이들의 행적을 후세에 널리 전하려고 했음을 지적했다. 그는 「열전」을 기록하는 의미를 이러한 탁월한 인물의 생애를 살펴봄으로써 그 시대의 진상(眞相)을 알 수 있고 또한 이들의 생애에 대한 포폄(褒貶)을 통해 난세의 올바른 처신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따라서 열전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사마천의 강렬한 비판의식과 함께 인간 중심의 역사관이다. 이것은 실제로 역사를 움직이는 것이 살아있는 현실의 인간이기 때문에 시대를 주도해 나간 이들의 삶을 탐구함으로써 그 시대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고 본 데서 열전의 체제가 착상된 것이다.47)
이러한 역사에 대한 인식은 기록을 통해서 사실을 전달하면서 그 시대의 진실을 밝히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래서 사마천은 인간의 삶이 어떤 시대적 환경에서 운명되어지는가를 주목하여 해당 사실들을 교묘히 편집·구성하고 거기에 간명한 논찬(論贊)을 덧붙임으로써 저자의 견해가 드러나도록 했다.48) 여기에 『사기』의 발분저서(發憤著書)를 바탕으로 한 문학을 현실과 분리할 수 없는 것으로 인식한 사마천은 문학이란 현실에서 못다 이룬 의지의 대상적(代償的) 표출이며, 시속(時俗)의 불의에 항거한 나머지 겪게 된 참담한 곤궁 속에서 창출된 위대한 문학49) 이라고 했다. 이와 같이 전의 장르적 개념은 일반적인 전기와 다르게 천도(天道)가 시행되지 않는 현실에 비분하면서 뛰어난 자질로써 천하의 공명을 세웠으되 세상에서 경시되거나 잊혀진 이들의 행적을 후세에 널리 전하여 포폄(褒貶)하고자 하는데 목적을 두었던 것이다.
이런 『사기』의 「열전」을 학습한 연암은 초기의 작품에서 전이라는 전통적인 양식을 통해 자신의 생활 주변에서 선택한 소재를 바탕으로 하여 소설을 지은 바 있다. 그가 목격자로서 사회현실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미하여 지향해야 할 인간 유형을 포착하여 전으로 쓴 것이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에 수록한 소설들이다. 여기에 수록한 몇 편의 소설들은 20세 전후부터 쓰기 시작한 것으로, 그는 이 소설들에서 인간의 삶에 대해 기술함으로써 그 시대의 진실을 드러내면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던 것이다. 그는 점차 자신의 사상을 구체화하면서 당시 사회의 제도나 윤리적인 관점에서의 비판을 전이라는 형식을 통해 제시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전의 문학적 특성을 인지하고 있으면서 소설을 창작했던 연암이 비슷한 시기에 접한 허생의 이야기를 전으로 쉽사리 완성하지 못했던 것은 그 나름의 창작의도를 구현해 낼 수 있는 여건이 충분히 조성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연암이 허생의 이야기를 듣고 전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윤영으로부터 들은 구체적 인물인 허생의 실체적 접근과 허구화의 방법, 허생을 통해 현실에서 불합리한 사회제도나 왜곡된 북벌정책 등 당면문제를 규명하기 위한 방식, 그리고 완성된 글을 세상에 펼쳐놓을 수 있는 방안으로서의 문학적 형식을 해결해야 했다. 그러나 「허생전」을 다 지었을 때는 정작 세상에 펼쳐놓을 수 있는 방법이 쉽지 않았음을 알았을 것이다. 이에 대한 방법을 모색하고 있던 차에 연행을 하게 된 것으로 보인이다. 연암이 언제 「허생전」을 완성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연행 이후에 전의 형식으로 어느 정도 완성한 것을 연행 중에 오가며 들은 다른 야화와 함께 한 편목으로 만들어 『열하일기』에 수록하려고 마음먹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진덕재야화」라고 편목을 제명으로 삼고 ‘허생전’이라는 명칭은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전의 형식은 그대로 둔 채 일화를 모아 묶은 ‘야화’ 속에 ‘허생전’을 숨겨 넣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추측을 근거로 한다면 「옥갑야화」는 「허생전」을 수록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적인 형식에 불과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50) 따라서 연암은 「허생전」을 완성하여 한 편의 글로 남기기 위해 「진덕재야화」라는 편명으로 껍데기를 씌워 『열하일기』에 수록했다가 후일에 이 편명으로 인해 일어날 논란의 소지(素地)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옥갑야화」로 편목의 명칭과 서두를 바꾸었던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이런 추정을 입증할 수 있는 몇 가지 의혹을 「옥갑야화」에서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열하일기』에서 일기 형식의 글은 말할 것도 없고, 편목들의 경우에도 여행 과정에서 있었던 사소한 것들까지 기록하여 대부분의 글은 연행(燕行)과 관련된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도록 하였다. 그 구체적인 증거로 『열하일기』의 다른 편목에서의 기록에는 편목과 관련된 인물이나 장소, 사건 혹은 심회 등 연행과정과 관련이 있는 사소한 것들을 비롯하여 심지어 가는 도중 연암 주변에 있었던 비장들과 역관들의 이름까지를 기록하여 상세하게 제시하고 있다. 이것이 연암의 글쓰기의 기본 태도이다. 그러나 「옥갑야화」는 이런 기본적인 글쓰기 태도에서 벗어나 있다. 우선 「옥갑야화」에는 앞에서도 잠시 언급한 바 있지만 일기 형식의 글뿐만 아니라, 열하나 연경에서의 별편의 기록에서도 이와 연관된 어떤 흔적도 전혀 찾아 볼 수 없고 어떤 단서도 발견할 수가 없다. 이야기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옥갑이라는 명칭 이외에는 어떤 단서도 기록하지 않았다. 배경으로 짐작되는 옥갑이라는 장소를 기록하고 있지만 그 곳 역시 전혀 알 수 없는 곳이고, 날짜도 유추할 수 있는 단서가 없으며, 대화의 상대자들은 익명화되어 있어 누구와 이야기 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이것은 「옥갑야화」가 연행록인 『열하일기』이라는 큰 틀에서 기록했던 일반적인 글의 성격과는 근본적으로 어긋난 것임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이와 같은 상태로 「옥갑야화」를 『열하일기』에 수록했다는 것은 연암의 일반적인 글쓰기 태도와도 다른 것이어서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열하일기』의 다른 편목에서 자세하게 기록했던 태도와는 정반대로 꼭 기록해야 할 부분까지 「옥갑야화」의 경우에는 전혀 기록하지 않았다. 더구나 전체에서 주된 부분을 형성하고 있는 허생의 이야기마저도 연행 중에 습득한 것이 아니라 연암이 오래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일화들은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가? 그리고 두 부류의 결합은 왜 필요했을까? 이런 데서 야기(惹起)되는 의혹의 근원은 「옥갑야화」의 이와 같은 기술 방식이나 내용 혹은 구성 방식이 『열하일기』에 수록된 다른 편목들과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는 것에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더욱 큰 의혹은 「옥갑야화」가 「진덕재야화」를 바꾼 편목의 명칭인데, 제목에서 제시한 지명을 바꿔도 내용이 그대로라면 기행(紀行)과는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더구나 한편의 글에서 무엇보다도 큰 구실을 하는 것이 제목인 것을 감안하면 이것은 간단히 지나칠 일은 아니다.
이러한 포괄적인 의혹을 중심으로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옥갑야화」는 허생의 이야기를 수록하기 위해 지은 것을 『열하일기』에 의도적으로 끼워 넣기 위해 설정한 허구적 장치일 것이라고 의심할 수 있다. 이 의심을 토대로 추론을 상세화한다면, 첫째, 앞에서 이미 설명했듯이 이야기의 시간적·공간적 배경이 되는 날짜와 지명(地名)의 불확정성을 들 수 있다. 진덕재를 옥갑으로 바꾼 것과 옥갑이 알 수 없는 곳이라는 것이 그 증거이다. 동일한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공간의 명칭을 바꾸었다는 것은 공간의 특정성을 상실한 것이다. 더구나 알 수 없는 장소로 바꾼 것은 기행문의 본래적 의미를 상실한 것이다. 따라서 편목의 명칭으로 제시한 배경은 허구적 장치일 가능성이 큰 것이다.
더구나 「옥갑야화」는 기행문에 수록된 한 편의 글임도 어느 곳에서 언제 썼는지를 전혀 알 수 없다. 이 글이 일기형식으로 쓴 글은 아닐지라도 일정을 추정할 수 있는 단서가 하나도 없다. 『열하일기』에 일정과 관계없이 기록된 별편은 모두 20편이 있으나, 이들은 열하와 연경에 머물면서 특정 사안에 대한 견문이나 그의 생각을 기록한 것으로 일정과 지명을 제시하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추정할 수 있는 인물이나 공간적 배경을 내용 속에 기록하여 어디에서 쓴 것인지를 알 수 있게 하였다. 동란재에 머무를 때 쓴 「동란섭필」, 황제의 행재소를 보고 쓴 「행재잡록〉 등은 「옥갑야화」처럼 머물렀던 곳을 제목으로 삼는 경우이나 내용으로 전모를 알 수 있다. 그리고 「망양록」이나 「환희기」도 편목의 명칭으로만 보아서는 어디에서 쓴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내용 중에 인명이나 장소를 제시하여 열하에서 쓴 것임을 알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간혹 일기 형식의 글에 ‘따로 「야출고북기」에 적은 것이 있다’51) , ‘따로 「만국진공기(萬國進貢記)」를 썼다’52) 와 같은 글을 남겨 기록의 배경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사행단이 이동하는 과정에서 장소나 날짜와 관련된 기록도 없고, 자체의 글에서도 공간적 배경을 유추할 수 있는 단서가 하나도 없는 것은 「옥갑야화」 한편 뿐이다. 옥갑이라고 했으나 옥갑은 『열하일기』 전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 지명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아마도 편목의 명칭을 「진덕재야화」에서 「옥갑야화」로 바꾼 시기가 일기문으로 된 부분이 다 완성되었던 때였기 때문에 고치거나 추가할 수 없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둘째는 「옥갑야화」의 내용 중에서 허생의 이야기를 제외한 나머지 6편의 글은 당시 여행했던 열하나 연경과 전혀 관련이 없는 과거에 있었던 역관들의 단편적인 일화이다. 간혹 연행(燕行)과 관련이 있는 일화이지만, 당시 연암의 연행과 관련이 없다. 대화의 내용은 당시의 연행과는 특별한 관련이 없는 한 세대 전의 이야기들로 주로 16세기 말부터 18세기 중엽까지의 역관들과 관련되어 있는 내용이라는 것과 발화자가 비장이라는 형식만 갖추었을 뿐이다. 첫 번째 일화는 ‘서른 해 전’에 일어난 것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연행 때인 1780년을 기준으로 본다면 1750년 무렵의 이야기이고, 두 번째 이야기의 대상인 역관 이추(李樞, 1675~1746)는 영조 때의 역관으로 18세기 중반의 인물이며, 세 번째 이야기는 홍순언(洪純彦, 1573~1598)의 이야기로 만력(萬曆) 연간(1573~1620)의 일이면서 임란 이전 일이니 16세기 후반이며, 네 번째 이야기는 역관이 아닌 중국의 강희(康熙, 1662~1722) 연간의 중국의 상인인 정세태(鄭世泰)의 이야기로 그가 죽은 후의 일이니 18세기 초중엽이다. 다섯 번째 이야기는 정축년(丁丑年)에 두 번의 국상(國喪) 53) 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당시를 기준으로 23년 전의 일이며, 여섯 번째 일화는 왜어 역관인 변승업(卞承業, 1623~1709)의 만년(晩年)의 일이므로 18세기 초의 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일화들이 당시의 연행과 관련이 없이 단순히 한참 전의 세대의 의리나 인심과 같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기행록이 아니라 야담(野談)의 수준이다.54) 혹 한 세대 전이라도 현재와 관련해서 연경의 변모된 모습을 비교한다든가 당시의 상황과 연관된 특이한 사건이나 인물이라면 혹 화제가 될 수 있다. 즉 전대의 일화라도 당시와 관련해서 그 일화를 말하게 된 동기가 분명하면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1화의 한 역관이나 홍순언의 일화는 연행 당시에서 보면 역관의 일화라는 점에서 화제가 될 수 있으며, 분명한 연대를 알 수 없고 단편적이지만 연경의 부자였던 정세태의 일화는 연경이라는 공간을 공유하고 있어 어느 정도 이야기 거리가 될 만하다.


33) 「옥갑야화」, 『국역 열하일기』Ⅱ, p.293.
34) 이가원의 연구에 의하면, 『열하일기』를 별본(別本)으로 한 것은 10여 종이 있는데, 그중에 8종의 필사본과 1종의 인쇄본, 1종의 영인본으로 그 중에서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4종의 필사본 중 3종이 「진덕재야화」로 되어 있다고 했다.(이가원, 『연암소설 연구』, 을유문화사, 1965, p.586.) 따라서 인쇄본이나 영인본이 8종 필사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한 것이라면, 8종 필사본 중 5종은 「옥갑야화」인 셈이다. 이 글에서 작품의 명칭의 사용은 따로 구분이 필요할 때 외에 일반적인 경우에는 「옥갑야화」로 통칭했다.
35) 『열하일기』는 26권 10책의 필사본으로 전해지다가 연암집이 간행되면서 「옥갑야화」도 함께 수록되어 간행했다. 1900년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이 『연암집(燕巖集)』을 전사자(全史字)와 1901년 간행한 『연암속집(燕巖續集)』권1·2(고활자본)로 간행하여 수록하였고, 1911년 최남선(崔南善)이 광문회(光文會)에서 A5판 286면의 활판본으로 『열하일기』를 간행하였다. 그 뒤 1916년에 중국 상해 남통(南通)에 있는 한묵림서국(翰墨林書局)에서 앞서 간행한 『연암집(燕巖集)』과 『연암집 속집(燕巖集續集)』을 합편(合編)하여 『중편연암집(重編燕巖集)』을 신활자(新活字)로 간행하였다. 그 후 1932년 박영철(朴榮喆)이 자연경실본(自然經室本)을 대본으로 편집, 간행한 신활자본 『연암집』 별집 권11∼15에도 『열하일기』 전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를 계기로 필사본으로만 전해오던 『열하일기』를 비롯한 연암의 저작을 활자로 간행해 보급함으로써, 대중들이 『열하일기』를 비롯한 연암 작품을 쉽게 접하게 되었고, 이런 출판은 뒤에 완전한 형태의 『연암집』이 간행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정재철, 〈김택영의 『연암집』 편찬과 그 의미〉, 《한국한문학연구》63권, 한국한문학회, 2016년 9월, p.135.) 이 과정에서 「옥갑야화」가 수록되어 일반인들에게 알려졌다. 한편 김문식에 의하면, 자연경실본(自然經室本)의 체제는 박종채가 작성한 『과정록』 추기(追記)에서 연암의 글이 ‘문고(文稿) 16권, 『열하일기』 24권, 「과농소초(課農小抄)」 15권 합하여 55권’이라고 한 것과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했다.(김문식, 〈단국대 소장 연민문고 필사본의 자료적 가치〉, 《동양학》제43집,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2008, p.166). 따라서 초고였던 「진덕재야화」보다는 퇴고한 「옥갑야화」를 선택해서 편집·인쇄했던 데 그 원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36) 연민(淵民) 이가원은 이에 대해 ‘허생전’이 아니라 ‘허생’이라고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이가원, 『연암소설 연구』, pp.594~595)
37) 「허생전」에 대한 연구가 시작된 것은 앞에서 지적한 대로 김태준(金台俊)이 《동아일보》에 ‘조선소설사’를 연재한 것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46회분(31년1월 27일자)에서 ‘대문호 박지원과 그의 작품(3): 허생전’이라고 하여 「허생전」을 소설의 관점에서 연구한 것이 처음이었고, 이것을 단행본인 『조선소설사』(청진서관(淸進書館), 1933년)에서 발행하면서 ‘제6편 근대소설 일반’에서 ‘제4장 대문호 박지원(연암)과 그의 작품’이라고 연암을 소개한 뒤에, ‘제3절 연암소설 제편’의 서두에 ‘1.허생전의 경개와 고평(考評)’이라고 썼다. 그리고 이어 ‘2.호질’과 ‘3.양반전’을 언급했다.(연재 당시에는 47회(1월 28일자) ‘대문호 박지원과 그의 작품(4): 호질, 민옹전, 양반전’을 함께 거론했다.) 연재되었던 그의 이 〈조선소설사〉는 한국소설사를 처음 쓴 것으로 이것을 보완하고 묶어 발간한 『조선소설사』는 후에 다시 더 보완하여 《증보 조선소설사》를 1939년에 학예사에서 발행했다.(이윤석, 〈김태준 『조선소설사』 검토〉, 앞의 책, pp.412∼416. 참조)
38) 임형택, 〈연암의 경제 사상과 이용후생론〉, 임형택·김명호 등 공저, 《연암 박지원 연구》,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14, p.53.
39) 김윤식은 〈연암문학의 문제점〉을 제기하여 「허생」을 독립된 작품으로 보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고 하면서, 「옥갑야화」를 전체의 맥락에서 이해한다고 주장했다.(김윤식, 《한국문학사 논고》, p.81.) 임형택은 “「허생전」을 분리할 것이 아니라 전체를 하나의 작품으로 보는 것이 좋으며 그렇게 보면 그것은 액자형 소설이 될 것”이라고 했다.(「실학파 문학과 한문단편」, 『한국문학사 시각』, p.428.) 그리고 이재선은 「옥갑야화」 전체를 액자소설로 된 한 편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했다.(이재선, 『한국단편소설연구』, p.111) 이외에 서인석의 〈「옥갑야화」의 세계와 「허생전」〉(『운당 구인환선생 화갑기념논문집』, 한샘, 1989, p.739~758), 김종철의 〈「옥갑야화(玉匣夜話)」 이해의 시각〉(《선청어문》28권, 서울대학교 국어교육과, 2000, pp.135~156.)등이 있다.
40) 이재선은 〈액자소설의 원질(原質)과 그 계승〉에서 ‘연암소설의 액자적 성격’을 다루면서 「옥갑야화」를 액자소설의 관점에서 분석했다.(이재선, 앞의 책, pp.109~114.)
41) 이재선, 앞의 책, p.114.
42) 김영동, 「옥갑야화」, 『증보 박지원 소설연구』, 태학사, 1993, pp.182~183., 박기석, 『연암소설의 심층적 이해』, 집문당, 2008, pp.302~303.
43) 강명관, 『허생의 섬, 연암의 아나키즘』, 휴마니스트, 2017, pp.35~106.
44) 「허생 후지Ⅱ」, 『국역 열하일기』Ⅱ, p.314.
45) 르네 웰렉·오스틴 워렌, 이경수 역, 『문학의 이론(Theory of Literature)』, 을유문화사, 1988, p.108.
46) 김명호, 「연암의 현실 인식과 전의 변모양상」, 앞의 책, p.56.
47) 김명호, 「연암문학과 사기」, 『이조 후기 한문학의 재조명』, 창작과비평사, 1983. p.37.
48) 김명호, 「연암문학과 사기」, 앞의 책, p.48.
49) 김명호, 「연암문학과 사기」, 앞의 책, p.39.
50) 박기석도 추론의 과정은 다르지만 “연암이 옥갑야화라는 편목을 설정하여 『열하일기』에 수록한 것은 「허생전」을 저술하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했다.(박기석, 『연암소설의 심층적 이해』, p.313.)
51) 〈막북행정록〉, 『국역 열하일기』Ⅰ, p.329.
52) 〈막북행정록〉, 『국역 열하일기』Ⅰ, p.333.
53) 1757년(정축년, 영조33년) 2월 15일에는 영조(英祖)의 왕후인 정성왕후(貞聖王后, 1693~1757) 서씨(徐氏)의 국상이 있었고, 3월 26일에는 숙종의 계비(繼妃)인 인원왕후(仁元王后, 1687~1757) 김씨(金氏)의 국상이 있었다(『영조실록』89권, 영조 33년(1757년) 2월 15일, 3월 26일). 이가원 번역의 『국역 열하일기』Ⅱ, p,297에 ‘1517년’은 1757년의 잘못임.
54) 이승은은 “실제로 「옥갑야화」의 각화는 연행 환경뿐만 아니라 주제나 형식의 측면에서도 일화 혹은야담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허생이 구연의 상황이나 발화의 방식, 그리고 이를 기록하는 형식과 주제로 미루어보아 본래 야담에 가까운 것이었음을 확인하였다.(이승은, 〈「옥갑야화」속 ‘허생 이야기’를 통해 본 조선 후기 야담과 소설의 관계〉, 《동방한문학》제80집, 동방한문학회, 2019, p.221, p.235.)



셋째, 『열하일기』에 「옥갑야화」를 의도적으로 수록했을 것이라는 의혹을 뒷받침해 주는 근거 중에 하나는 서두의 일화와 허생의 이야기의 내용과 구성의 차이다. 구성과 내용을 중심으로 「옥갑야화」의 전체 이야기를 크게 둘로 나누면 서두에서 비장들이 알고 있던 것을 언급한 역관들의 일화와 연암이 이야기 한 허생의 이야기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런데 「옥갑야화」의 내용과 형식이 서두의 일화들과 허생의 이야기가 판이하게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서두의 일화들의 내용은 연경 여행과 관련된 것과 역관의 일화가 주류를 이루나 허생의 이야기 부분은 이와는 전혀 다른 국내의 제반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서두 일화 부분의 구성 방식은 연암을 포함한 비장들이 방에 누워서 한 방담(放談)을 기록한 형식이다. 이 일화들은 대화형식이면서 개별적인 일화가 단편적인 독립된 형태로 단락을 구성하고 있어 근근이 유기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반면에 맨 마지막 7화인 허생의 이야기는 누워 방담을 한 것이라고 하기보다는 완벽한 전의 형식을 갖추고 있어 독립된 한편의 글로 이야기의 구성방식이 서두의 일화와는 전혀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앞의 비장들의 이야기들은 짧은 일화에 불과하지만 허생의 이야기는 전의 형식을 갖추고 있으면서 제법 분량이 많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보면 앞의 6편의 일화들은 도입부분이고 허생의 이야기 부분이 전체의 핵심이 되는 구조로 되어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리고 허생의 이야기와 달리 서두 일화들은 이야기의 구성이 전반적으로 조잡하고 거칠다. 물론 그 중에 홍순언(洪純彦)에 대한 일화는 매우 비교적 잘 구성되어 있으나, 이추(李樞)에 대한 일화는 다른 사람의 대화에 끼어드는 듯한 말로 단 한 문장이고, 네 번째 이야기인 정세태는 연경의 갑부였으며 역관이 아니었다. 그의 회계를 보던 사람이 정세태가 죽은 뒤 일패도지(一敗塗地)하자 정세태의 손자에게 은혜를 갚은 신의와 관련된 일화이다. 다섯 번째 이야기는 누가 어느 곳에서 겪은 일인지 불분명한 곳에서 화물 검사한 일화를 말하고 있다. 여섯 번째 이야기에서 변승업이 만년에 재산을 흩어버린 이야기를 하자 일곱 번째 이야기로 연암이 이 이야기를 이어받아 변승업이 부자가 된 사연을 말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옥갑야화」의 전체의 대화의 흐름이 중구난방(衆口難防)이어서 여섯 편의 이야기가 조잡하게 전개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중에 홍순언과 정세태의 일화는 이야기가 안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짤막한 이야기 한 토막에 불과하다. 서두의 일화들이 이와 같이 조잡하고 거칠게 된 것은 그들의 정제되지 않은 대화를 그대로 제시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연암이 손질한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의 대화였음을 표방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에 서두의 이야기의 구조가 허술한 것과 달리 허생의 이야기의 서사 구조는 치밀하게 잘 짜여진 소설적 구성형식을 가지고 있어 일화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전반부 일화의 주인공들은 일상적이고 삽화적(揷話的)인 인물임에 비하여 허생은 출중한 인물이어서 다른 일화의 인물과 큰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구성과 관련해서 보면, 「옥갑야화」의 전반부는 일화이지만, 허생의 이야기는 일화가 아니라 서사형식을 구비한 소설적 형태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이야기의 서술 방식이 근본적으로 다른 것을 의미하는데, 허생의 이야기는 인과관계에 의해 사건이 배열되어 있어 구성의 단계가 논리적으로 전개되어 창작에 가깝다면 나머지 이야기 부분은 대화를 직접 인용한 것에 불과하다. 이것은 허생의 이야기가 여행 중에 획득한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만들어진 이야기인 ‘전(傳)’을 일화와 함께 수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야담과 소설이라는 관점에서 허생의 이야기를 분석 정리한 이승은은 “실제로는 야담적인 존재성을 지니고 있었던 허생이 인물의 행적에 대한 포폄을 통해 가치를 전달하고자 했던 전이나, 주체와 세계의 대결을 그린 소설로 이해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55) 고 했는데 이 또한 구성상의 인물의 특성을 언급한 것이다.
이러한 구성의 차이에서 드러나는 것으로 치밀한 서사적 구성과 함께 주인공을 고려하면 허생의 이야기는 「옥갑야화」에 의도적으로 끼워 넣은 것이거나 허생의 이야기를 감추기 위해 일부러 서두에다가 일화를 배치한 것임을 확연하게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허생의 이야기 부분은 야화의 성격을 가지고 있지 않아 현장에서 밤에 나누었던 것이 아니라 후에 첨부된 것임을 구조상으로도 알 수 있다.
넷째는 서두의 1화~6화까지의 일화는 이야기를 펼쳐 놓게 된 계기 즉 모티브가 없다. 즉 옥갑에 돌아와서 무슨 일이 있어서 연암이 그들의 대화에 참여하게 되었는지 그 계기가 될 만한 이야기가 전제되어 있지 않다. 그분 아니라 모든 발화자들의 대화는 당시 연행과정에서의 어떤 동기가 있어 그것을 계기로 대화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아무 설명이 없이 그냥 누워 옛날이야기 하듯이 이야기를 시작했고 그것이 대화를 이어가는 방식으로 된 것이다. 그러면서 서두의 6편의 대화들은 줄거리가 이어지지 못한 채 분화된 한담으로 연이어져 있다.
그러나 허생의 이야기 부분은 6화에서 이어지면서 그 동기가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고, 변승업에서 허생으로 이어지는 대목이 아주 자연스럽게 펼쳐지고 있다. 실상은 5화와 6화의 연계가 서두의 다른 일화와 마찬가지로 맥락의 연계성이 전혀 없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주목할 것은 6화에서 이야기가 갑자기 변승업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연암이 치밀하게 「허생전」을 구성하기 위한 모티브를 마련한 구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처음부터 5화까지 일화의 공통점은 주로 화식을 일삼았던 중국어 역관과 관련이 있거나 중국과 관련된 사건을 기록한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6화에서 변승업에 대한 이야기로 바뀐 것이다. 이것은 전편(前篇)의 일화와 관련해서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그는 중국어 역관이 아니고 왜어 역관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전편에서 ‘돈 버는 일’과 관련된 일화를 제시하면서 역관으로 ‘돈 버는 일’로 성공한 변승업이 조선에서 손꼽히는 재산가라는 것을 명시하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제시한 것은 그의 재산 축적과정의 일부를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그의 축적과정에서 허생이 어떻게 기여했는지를 언급함으로써 허생의 이야기의 전모를 펼쳐놓을 수 있는 계기를 만든 것이다. 화제가 변승업의 축재에서 허생의 화식으로 이어지면서 허생의 이야기가 본격화 된 것이다. 따라서 6화에서 화제를 변승업으로 절묘하게 바꿈으로써 허생의 이야기는 군더더기 없이 매끄럽게 이어지는 논리적 단계를 수립한 것이다.
다섯째는 이야기의 분량과 관련된 것이다. 일곱 편 전체가 비슷한 분량의 이야기가 수록된 것이 아니다. 그 중에 네 편(1화, 3화, 4화, 6화)는 일화적 성격을 가지고 있으나 두 편(2화와 5화)은 대화에 끼어든 듯한 짤막한 첨언(添言)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이야기의 흐름은 서로 다른 분량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그 분량이라는 것이 모두 한 쪽을 넘나들어 여섯 편 모두라고 해봐야 5쪽 정도인데 비해 「허생전」 부분은 12쪽에 이른다.56) 이와 같이 전체적인 분량과 관련해서 보면 허생의 이야기 부분은 이야기 구조가 치밀하게 잘 짜여져 있으면서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데 여기에 「후지」와 「차수평어」가 전체적으로 허생의 이야기에 집중되어 있는 것은 핵심이 허생의 이야기이며 나머지는 구색을 맞추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섯째는 「후지」의 문제이다. 「진덕재야화」와 「옥갑야화」에는 각각의 「후지」가 있다. 이 「후지」는 모두 본문 중에서 허생의 이야기 부분을 보완해 주고 있다. 허생의 이야기의 출처와 허생의 출신 성분에 대한 것을 기술한 두 기록은 처음에 「후지」를 썼던 의도가 점진적으로 변화하여 모호하게 되는 것을 보이고 있다. 이야기의 유래를 기록한 「진덕재야화」 「후지」와 이것을 수정하여 허생의 출신 성분을 제시하여 전혀 다르게 기술한 「옥갑야화」의 「후지」는 더욱 설정이라는 의혹을 키우기에 충분하다.
이외에 내용과 관련해서는 서두의 도입 부분의 내용이 안고 있는 문제점, 내용상 이야기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화제의 연속성에 대한 문제,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편목의 제목이 「진덕재야화」에서 「옥갑야화」로 바꾼 것과 편목의 명칭을 바꾸면서 편목의 순서를 일정 순서에 맞게 재배치한 것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런 것들이 「옥갑야화」에서 조작을 위한 장치로 볼 수 있는 단서들이다.
이와 같이 열거한 부분들이 「옥갑야화」를 『열하일기』에 수록한 것에 대한 의혹의 핵심이다. 이러한 의혹이 내재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암은 「허생전」이 들어있는 「옥갑야화」를 연행의 기행문들과 함께 『열하일기』에 수록한 것이다. 이런 의혹을 근거로 전체 편목과 관련해서 「옥갑야화」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열하일기』의 내용들이나 서술방식과 어긋나는 점은 허생의 이야기를 수록하기 위해 작가의 어떤 의도가 개입된 것에서 발생한 것으로 추측된다. 즉 허생 이야기를 끼워 넣기 위해 「옥갑야화」를 지었고, 이 「옥갑야화」를 『열하일기』에 수록하기 위해 여행과 관련이 없는 것을 짜맞추어 여행 중에 있었던 이야기처럼 둔갑시켰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박기석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는 “이렇게 작품배경이 되는 시간과 장소, 그리고 환담에 참여한 인물을 『열하일기』의 다른 글에서와 달리 모호하게 설정한 것은, 이 작품이 「진덕재야화」와 「옥갑야화」라는 두 가지 제명으로 존재하는 문제와도 무관하지 않다. ‘진덕재’라는 실제의 장소를 제목으로 삼았다가 다시 옥갑이라는 모호한 장소를 제목으로 삼은 것은 이 작품이 어떤 구체적인 열하 여행 중에 함께 갔던 역관과 비장들과의 대화를 통해 얻은 이야기를 기반으로 하여 꾸민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고 하면서, “옥갑이라는 곳에서 비장과 역관들과의 환담은 실제 있었던 사건이라기보다 「허생전」이라는 작품을 『열하일기』에 자연스럽게 수록하기 위해 설정한 허구적 장치는 아닐까?”57) 라고 하여 편목의 변경을 근거로 조심스럽게 의문을 제시했다. 그러나 그는 의문을 제시하는 데서 그쳤을 뿐 더 이상 문제를 확대하거나 해명하지 않았다. 이제 그 의문의 실체들을 구체화하고 문제가 되는 허구적 장치를 찾아보려고 한다. 이 허구적 장치는 박기석이 의문을 제시한 편목의 변경뿐이 아니라 치밀하게 조작된 작품의 내적 구조와 후지를 비롯한 전체 구성형식에도 발견된다.
여기서 『열하일기』에 기왕에 쓴 글을 첨부한 것이 비단 이 「옥갑야화」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첨부된 여타의 글과 「옥갑야화」의 경우가 어떻게 다른 것인지를 좀더 해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 연암은 여행기간의 견문을 기록하여 소개할 목적으로 『열하일기』를 집필하면서 다양한 내용들을 소개했다. 특히 피서산장을 유람하면서 쓴 「피서록」 같은 경우는 중국인과 관련이 있는 조선 시인의 작품이나 조선과 관계된 중국 시인의 작품을 해설과 함께 수록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이덕무가 연경으로 갔을 때 반정균(潘廷均)을 만나 나눈 시화에 대한 이야기나, 그의 친구 나걸에 대한 사연과 시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첨부했다. 이뿐 아니라 연암은 29세 때인 1765년 가을에 유언호(兪彦鎬)와 신광온(申光蘊)과 함께 금강산을 유람하면서 지은 「총석정에서 해돋이를 보고 쓴 시(叢石亭觀日出詩)」를 『열하일기』의 「일신수필(馹汛隨筆)」에 수록하기도 하였고,58) 그런가 하면 친구인 석치(石痴) 정철조(鄭喆祚, 1730~1781)와 말(馬)에 대해 논의한 것을 「태학유관록」에 삽입하기도 하였다.59)「총석정에서 해돋이를 보고 쓴 시」는 연암이 소중하게 여겼던 시였기 때문이고, 정철조와 말에 대해 논의 한 것은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기 위해 정철조와 대담한 것을 다시 기록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글들은 편목의 일부로 첨부된 것으로 전체 글의 균형으로 보아 어긋남이 없는 것들이다. 편목의 명칭으로 보거나 내용상으로 보아 하등에 탈 잡을 것이 없도록 당시의 상황에 연계하여 자연스러운 대화 속에 첨부한 것으로 적절하게 보인다. 물론 이와 같이 첨부된 글들은 아마 약간의 메모나 자료를 근거로 후에 『열하일기』를 집필하면서 자세하게 보완하여 첨부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옥갑야화」는 성격이 다르다. 앞서 언급한 대로 지명이 불분명하고 글의 연속성이나 횡적인 연관성이 없으며 동기도 불투명하다. 이러한 「옥갑야화」에 허생의 이야기를 여행 중의 이야기인 것처럼 수록한 것은 의도적인 장치와 편집을 통해 교묘하게 첨부한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내용 중에 부분적으로 일부를 끼워 넣은 경우는 있어도 한 편목의 핵심이 되는 부분을 통째로 끼워 넣은 경우는 없다. 따라서 이것은 연행과 관련이 없는 이야기인 허생의 이야기를 끼워 넣기 위해 구색을 맞추려고 부수적으로 나머지 일화들을 오래 전 연행과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채워 넣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서두의 일화들과 허생의 이야기의 서술상의 차이가 생긴 것이다.
이와 같은 의혹을 고려하면, 이 부분에 대한 궁극적인 해명은 연암이 허생의 이야기를 왜 『열하일기』에 첨부했을까 하는 데에 이르게 된다. 연암은 왜 독립된 한 편의 글로 「허생전」을 발표하지 않고, 연행의 일정과 관련이 없으면서, 사행(使行) 과정에 특별히 주목할 만한 내용이 아닌 역관들의 일화들과 함께 「옥갑야화」라는 항목을 만들어 『열하일기』에 끼워 넣었을까? 이것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누차 언급한 바대로 6편의 이야기 서술구조와 이야기 전개방식이 「허생전」과 나머지의 이야기가 다르게 전개되고 있으면서도 주제적인 측면에서 유기적 관련성을 갖고 있다는 점과, 후지가 모두 허생의 이야기에 집중된 점을 고려하여 「허생전」을 왜 「옥갑야화」에 수록했는가 하는 것에 주목하면서 그 의도성을 입증하려는 것이다. 특히 앞의 6편의 일화와 「허생전」과의 유기적 관련성을 총체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연암이 「허생전」을 「옥갑야화」라는 이야기 형식의 일화를 빌어 형상화하여 『열하일기』에 수록한 궁극적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해명은 「허생전」의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러한 의혹을 제기하는 데 있어서 간과(看過)할 수 없는 중요한 논리적 근거의 대전제는 연암의 글쓰기의 기본적인 태도이다. 그가 글을 쓰는 데 있어서 중요하게 여긴 것은 진실성에 대한 것이었다. 글의 소재가 되는 사상(事象)을 진실하게 드러내는 데는 정확하고 사실적으로 표현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던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의 「자서(自序)」에서,


55) 이승은, 앞의 글, p.235.
56) 『국역 열하일기』Ⅱ에 수록한 「옥갑야화」(pp.293~310)를 근거로 했다. 참고로 김혈조 역 『열하일기』(개정신판 3권, 돌베개, 2017)는 처음부터 6화까지가 7쪽이고 허생 이야기 부분이 14쪽이다.
57) 박기석, 『연암소설의 심층적 이해』, pp.309~310.
58) 『국역 열하일기』Ⅰ, pp.211~217., 박종채, 앞의 책, p.32. 『연암집』4권 「영대정잡영(映帶亭雜咏)」에 수록되어 있다.
59)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국역 열하일기』Ⅰ, p.384.



“글이란 뜻을 그려내는 데 그칠 따름이다. 글제를 앞에 놓고 붓을 쥐고서 갑자기 옛말을 생각하거나, 억지로 경서(經書)의 뜻을 찾아내어 일부러 근엄한 척하고 글자마다 정중하게 하는 사람은, 비유하자면 화공(畫工)을 불러서 초상을 그리게 할 적에 용모를 가다듬고 그 앞에 나서는 것과 같다. 시선을 움직이지 않고 옷은 주름살 하나 없이 펴서 평상시의 태도를 잃어버린다면, 아무리 훌륭한 화공이라도 그 참모습을 그려내기 어려울 것이다. 글을 짓는 사람도 어찌 이와 다를 것이 있겠는가. 말이란 거창할 필요가 없으며, 도(道)는 털끝만한 차이로도 나뉘는 법이니, 글로써 도를 표현할 수 있다면 부서진 기와나 벽돌인들 어찌 버리겠는가. 그러므로 도올(檮杌)은 사악한 짐승이지만 초(楚) 나라의 국사(國史)는 그 이름을 취하였고, 몽둥이로 사람을 때려죽이고 몰래 매장하는 것은 극악한 도적이지만 사마천(司馬遷)과 반고(班固)는 이에 대한 기록을 남겼으니, 글을 짓는 사람은 오직 그 참을 그릴 따름이다.”60)


60) 박지원, 신호열·김명호 공역, 「자서(自序)」, 「공작관문고(孔雀館文稿)」, 『연암집』제3권. 한국고전번역원, 2004, 한국고전종합DB. 이후의 『연암집』 인용은 이 자료를 이용했다.



라고 한 것에서 그의 의도를 분명히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가 ‘글을 짓는 사람은 오직 그 참을 그릴 따름이다(爲文者惟其眞而已矣)’이라고 반복 부연해서 강조했듯이 글이란 자신이 느낀 바를 있는 그대로 진실하게 표현하여 참된 의미를 드러내는 데 있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글을 옳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부서진 기와나 벽돌 뿐 아니라 사악한 도올까지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맹자(孟子)가 “진(晉) 나라의 『승(乘)』과 초(楚) 나라의 『도올』과 노(魯) 나라의 『춘추(春秋)』가 똑같은 것이다.”(『맹자(孟子)』 「이루(離婁)」 하편)라고 한 것과 같은 말이다. 글을 쓸 때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호불호, 선악, 참됨과 거짓됨을 가리지 않고 대상에 대해 가감이 없이 적확(的確)하고 분명히 기록함으로써 참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함을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경지(京之)에게 보내는 세 번째 편지」에서도 보인다.


“저 허공 속에 날고 울고 하는 것이 얼마나 생기가 발랄합니까. 그런데 싱겁게도 새 ‘조(鳥)’라는 한 글자로 뭉뚱그려 표현한다면 채색도 묻혀 버리고 모양과 소리도 빠뜨려 버리는 것이니, 모임에 나가는 시골 늙은이의 지팡이 끝에 새겨진 것과 무엇이 다를 게 있겠습니까.”61)


61) 「경지에게 답함」(3), 「척독(尺牘)」, 「영대정잉묵(映帶亭賸墨)」, 『연암집』제5권.



이러한 그의 지적은 글로 표현하는 것이 개념으로 집약된 요체만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이나 태도 외에 감각적인 음성이나 모양까지도 진실하게 표현해야 함을 주장한 것이다. 구체적인 사실이 제거되고 개념만 전달한다면 늙은이가 지팡이로 끄적거려 겨우 의미만 전달하는 것에 불과함을 지적한 것이다. 사실적인 묘사에 대한 지적이지만 어떤 대상이건 사물이나 풍경, 현상, 현실, 인물 등 구체적으로 형상화 하여 정서적 동질감을 느끼도록 해야 함을 설명한 것이다. 이러한 것은 “마을의 어린애에게 천자문을 가르쳐 주다가, 읽기를 싫어해서는 안 된다고 나무랐더니, 그 애가 하는 말이, ‘하늘을 보니 푸르고 푸른데 하늘 ‘천(天)’이란 글자는 왜 푸르지 않습니까? 이 때문에 싫어하는 겁니다.’하였소. 이 아이의 총명이 창힐(蒼頡)로 하여금 기가 죽게 하는 것이 아니겠소.”62) 라고 한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사실성이 결여되고 개념만 남은 것에 대한 비판이었다. 연암은 글쓴이의 곡진한 음성이 들리는 듯하고, 개별적인 속성이 드러나면서 정서가 잘 표현되어 작가의 심경이 잘 표현된 글이어야 진실된 문장이라고 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적인 글쓰기를 강조한 것은 개념만을 강조한 도문일치론자들에 대한 반발이라고 하기보다는 사마천의 『사기』의 「열전」을 읽으면서 글을 지을 때는 사회적 상황이나 개인들의 삶을 진실되게 반영하여야 하는 것을 터득한 것에서 기인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이러한 학습효과로 그의 글쓰기의 태도는 현실문제에 목도하였을 때 폭넓고 심도있게 나타나게 되었고, 이것은 초기의 「방경각외전」에 그대로 반영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연암이 『열하일기』를 집필할 때뿐만이 아니라 평소에 글을 쓰면서 일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김명호는 『열하일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문예적 특징으로 극히 정밀한 세부묘사를 통해 대상의 본질을 구체적이고 객관적으로 드러내려는 경향이 있다63) 고 했다. 연암은 글 쓰는 사람의 책무 중에 하나가 정확한 정보이고 정보가 정확성을 잃으면 신뢰가 깨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연암은 「옥갑야화」를 기록하여 『열하일기』에 수록하면서 자신의 글쓰기의 기본 태도와 허생의 이야기 사이, 즉 사실과 허구라는 두 관점에서 미묘한 갈등과 겪으면서 또 한편으로는 외적 요인인 독자들의 비판을 감내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봉착해 있었다. 「옥갑야화」는 이러한 상황에서 미묘한 줄타기를 감행한 결과인 것이다.
특히 유득공이 쓴 『열하일기』의 서문64) 에서 마지막에 언급한 부분은 유득공의 견해이지만 의미하는 바가 자못 크다. 그는 연암의 『열하일기』가 외전이라고 하면서 『춘추(春秋)』가 변한 것이 외전(外傳)인데 대부분의 외전은 일반적으로 시대의 변화에 따라 참과 거짓이 섞여 있으나 연암의 『열하일기』는 그렇지 않고 진실성이 담겨져 있다고 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나는 이에서 비로소 장주(莊周)의 외전에는 참됨도 있고 거짓됨도 있는 반면, 연암씨의 외전에는 참됨은 있으나 거짓됨이 없음을 알았노라. 그리하여 이에는 실로 우언(寓言)을 겸해서 이치를 논함에 돌아가게 되었으니, 이는 마치 패자(覇者)에 비한다면, 진 문공(晉文公)은 허황하고 제 환공(齊桓公)은 올바르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하물며 그 이치를 논함에 있어서도, 어찌 황홀히 헛된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에 그쳤을 뿐이겠는가. 그리고 풍속이나 관습이 치란(治亂)에 관계 되고, 성곽(城郭)이나 건물, 경목(耕牧)이나 도야(陶冶)의 일체 이용(利用)·후생(厚生)의 방법이 모두 그 가운데 들어 있어야만, 비로소 글을 써서 교훈을 남기려는 원리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리라.”65) 라고 했는데, 이 말은 연암의 외전 즉 『열하일기』에는 참됨이 있지만 거짓이 없다는 것과 진리가 흘러서 된 우언을 겸해서 이치를 논한 것임을 밝힌 것이다. 이러한 진술이 유득공 개인의 견해이기도 하겠지만 연암의 『열하일기』의 서문으로 쓴 것이라면 터무니없는 주관적인 주장이기보다는 이 작품을 대하는 보편적 견해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이에 대해 김혈조도 비록 이 서문이 연암의 글은 아니지만 『열하일기』 전체 내용을 잘 파악하고 쓴 서문이라고 하면서 번역집에 수록하는 이유를 밝혔다.66)
앞에서 제기한 여러 의혹과 연암의 글쓰기의 태도를 토대로 작품에서 의혹이 될 수 있는 부분들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여 「옥갑야화」는 연암이 허생의 이야기를 수록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설정한 의장(意匠)으로서의 허구적 장치라는 가설을 입증해 보도록 하겠다.


62) 「창애(蒼厓)에게 답함」(3), 「척독(尺牘)」, 「영대정잉묵(映帶亭賸墨)」, 『연암집』제5권.
63) 김명호, 『열하일기 연구』, p.224.
64) 이 서문은 박영철본 『연암집』에는 없고 연암산방본(燕巖山房本)에만 있는데, 김혈조에 의하면 최근 발견된 유득공의 「영재서종(泠齋書種)」에 이 글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글의 필자는 유득공으로 보아야 할 것이라고 했다.(김혈조, 『열하일기』(개정신판1권, 돌베개, 2017, p.26.) 그리고 유득공 연보에도 『열하일기』가 탈고한 뒤에 「열하일기서」를 쓴 것으로 되어 있다.(김영진, 〈유득공의 생애와 교유, 연보〉, 《대동한문학》(제27집), 대동한문학회, 2007, p.22.). 그러나 연암의 「수산해도가(搜山海圖歌)」가 유득공(柳得恭)의 『영재집(泠齋集)』(권1)에 유득공의 작으로 잘못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서문 또한 문헌고증이 좀더 필요하다고 본다.(「수산해도가」, 『연암집』제4권, 각주 1 참고.) 다만 누구의 글이든 “연암씨의 외전에는 참됨은 있으나 거짓됨이 없음을 알았노라.”하는 진술은 『열하일기』에 대한 소견을 피력한 것임에 틀림없다.
65) 「열하일기 서」, 『국역 열하일기』Ⅰ, p.13.
66) 김혈조, 『열하일기』(개정신판)1권, p.26. 각주 1.



* 이 글은 2022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비평활동지원을 받아 집필하였습니다.















김치홍
작가소개 / 김치홍

약력
서울 출생.
명지대학교 대학원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명지대학교, 사회교육대학원, 명지전문대, 관동대, 성결대 강사 역임.
한국국어교육학회 이사,
한국문인협회회원


주요논저
『김동인평론접집 편저』, 삼영사, 1987
〈한국근대역사소설의 사적 연구〉, 한국학술정보, 2006
〈한국서사문학산고〉, 한국학술정보, 2008
등 논문 40여편


《문장웹진 2022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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