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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형식(2)

  • 작성일 2023-05-04
  • 조회수 2,136

상실의 형식 (2)

김요섭


1


  '이쪽'과 '저쪽'은 유동적인 구분이다.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 따라, 그리고 먼저 지시하고 싶은 방향에 따라 이쪽과 저쪽의 위치는 언제든 달라지고, 또 서로 바뀔 수 있다. 그래서 이쪽과 저쪽의 나눔은 언제나 잠정적이자 사적인 기준일 수밖에 없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실제 일어난 현실의 상황과는 다르게. 한국전쟁이 끝나던 해에 태어난 나의 아버지는 사라진 친척들에 대해서 아주 드물게 이야기하셨다. 할아버지의 형제들, 증조할아버지의 가족들, 아버지가 고향의 먼 친척들과 만나서 나누던 이야기 속에 잠깐 언급되었지만 만난 적 없는 그들. 집안의 그 웃어른들을 만날 수 없을지라도, 그 자손인 먼 친척들이야 어디서 만난 적이 있어야 하는데 그들도 본 적이 없었다. 친척들과의 만남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이가 빠진 톱니처럼 그 관계들 사이에 비어 있는 틈들을 어릴 때부터 알게 모르게 조금씩 의식했던 것 같다. 그들은 대체 어디로 갔는지 하고 말이다. 아버지도 그들에 대해서는 어른들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만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 역시 그들을 만난 적이 없으니 말이다.

  사라진 친척들에 대한 아버지의 이야기는 아주 짧았다. 그 불쌍한 사람들, 그 불행한 땅에 대해서 그저 '이쪽'과 '저쪽' 모두가 그들을 괴롭혔고 그래서 사라진 이들보다 남은 이가 훨씬 적었다고. 그 사라진 이들의 이름이나 나이, 다른 사연에 대해서는 더 자세히 듣지 못했다. 하필 그들이 살았던 그 불행한 땅은 '이쪽'과 '저쪽'이 반복해서 점령했었다. 톱질할 때 날이 위로 아래로 계속 움직이는 것처럼, 전선이 올라갔다 내려가길 반복했다고 해서 생존자들이 '톱질전쟁'1)이라고 불렀던 그 전쟁의 톱날은 아버지의 고향을 파괴했다. '이쪽'에서 온 군인들이 '저쪽' 사람들이라며 죽이고, '저쪽'에서 온 군인들은 '이쪽' 사람들이라며 죽이는 폭력이 반복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저 이쪽도 저쪽도 아닌 계속 같은 자리에 있었을 뿐이었지만, 말이다. 전쟁의 톱날 아래 놓였던 이들은 이쪽과 저쪽 그 어느 편 모두에 연루되어 있었다. 그들의 가족과 가까운 이들, 그리고 그 자신은 혼란스러운 시대에 어떤 정치적 입장과도 연결될 수 있었고, 그래서 그들의 정치적 정체성은 이쪽과 저쪽 모두를 만족시킬 수도 또 적대할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이들은 두 권력 사이에서 살아남을 수도, 또 살해당할 수도 있었다. 이쪽을 만족시키는 행동은 저쪽의 공격을, 그리고 저쪽을 만족시키는 행동은 이쪽의 공격을 정당화하는 근거였다.2) 이쪽과 저쪽, 남과 북의 두 국가가 모두 자신들의 시각에서 그들의 이름을 불렀고 이제는 모두 잊어버렸다. 사라진 사람들은 그저 이쪽도 저쪽도 아니었던 이들, 그렇게 잊힌 이름들이자 내가 결코 만날 수 없는 이들이다.

  이쪽과 저쪽도 아닌 이들이 기억될 자리는 오랜 시간 이쪽에도 저쪽에도 없었다. 기억된다 해도 저쪽에 의해 살해당한 이쪽의 사람들과 이쪽에 의해 살해당한 저쪽의 사람들로 그 기억이 조각조각 나뉘어 있을 뿐이다. 사라진 그들의 이름을 한자리에 올릴 수 있는 자리는 오직 가족뿐이었다. 한국전쟁에 대한 기억은 오랜 시간 가족사 소설의 형태로 쓰여 왔다.3) 가족 관계는 이쪽과 저쪽이 만들고자 했던 사회의 바깥으로 밀려나 사라진 이들에 대한 기억을 전달하고 유지해 온 유일한 사회적 관계였으며, 그들을 이쪽도 저쪽도 아니면서 그 모두일 수 있는 사람으로 기억하는 유일한 자리이기도 했다. 전쟁 때 사라진 그 수많은 이들, 이쪽과 저쪽으로 찢어져 갈라진 이들의 이름이 하나로 모이는 기록 역시 가족의 역사인 족보뿐이었을 것이다.

1) 박찬승, 마을로 간 한국전쟁, 돌베개, 2010, 57쪽.
2) 양극적 대립 속에서 이쪽과 저쪽 모두를 오갈 수 있는 정체성을 향한 폭력의 경험은 냉전 아시아의 공통적인 체험이었다.
권헌익, 유강은 옮김, 학살, 그 이후, 아카이브, 2012, 46쪽.
3) 한국전쟁 기억의 재현에서 가족사 소설의 역사적 의미와 그것이 현재 한국 문학장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는 졸고 「제사의 행방」( 웹진 작가들』, 인천작가회의, 2023)에서 다루었다.

  가족은 이쪽과 저쪽이라는 구도에 완전히 포섭되지 않는다. 이는 냉전의 양극적 폭력과 가족이라는 제도 사이의 구조적 불일치에서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가족은 그 자체의 계보와 윤리 위에서 지속되었던 독자적인 사회적 관계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가족이 결코 국가와 같은 다른 사회 제도와 힘들로부터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지만, 나라가 사라진 뒤에도 그 관계망은 조금씩 모습을 달리하더라도 계속 반복되어 왔다. 한 나라의 역사보다 훨씬 긴 시간을 이어진 그 관계는 국가, 근대, 냉전과는 다른 문법으로 사라진 이들을 이야기하는 고유한 리듬을 만들어 왔다. 그 이야기의 질서는 세계에서 잊힌 자들을 기억할 수 있는 공간이자 동시에 그들의 삶을 옭아매는 굴레이기도 했다. 사라진 친척들과 톱질을 당한 그곳의 이야기를 전해 준 것은 가족이었지만, 그 상실이 남긴 상처 역시 가족의 기억을 통해 나의 대까지 전해졌다. 그렇다면 기억의 반복은 고통의 반복이기도 하다. 아니 반복이란 말은 적합하지 않다. 기억의 전달은 고정된 문자의 언어보다는 듣고 따라 부르며 이어지는 돌림노래처럼, 반복보다는 변주에 가깝다. 기억의 변주란 무엇이었는지, 신종원의 습지 장례법의 문장들을 짚으면서 설명해 보려고 한다.


2


“우리는 음향학적 기술로 다시 한 번 이와 같은 문헌학적 공백을 복원할 것입니다.”4)


  가족은 오랜 시간 고유한 자신의 법을 가져왔다. 가부장이 가문의 통치자로서 그 구성원의 생명을 빼앗을 권리를 가졌던 로마의 법률과 같은 극단적 사례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들 고유의 질서와 규칙이 가문에 속한 이들의 삶을 통제했다. 가문의 질서는 “먼지 같은 나라들은 모두 사라”(173)질 때까지 그 모습을 달리하면서도 세대를 거쳐서 이어 왔다. 신종원의 장편 습지 장례법』은 근래 한국 소설에서 보기 힘든 가문의 오래된 전통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습지 장례법'이라는 가상의 장례법은 오래전 그의 선조와 늪의 초자연적인 존재 사이에 맺은 계약, 대대손손 가문이 누릴 권세의 대가로 그 후손들은 죽은 뒤 늪지로 돌아와야 한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한 가문의 전통이다. 소설은 가문의 첫 가주와 그의 '187,731명의 자손'(200)들이 경험한 죽음 중에서 다섯 장면을 포착해서 보여준다. 고향의 전통에 환멸을 느끼고 떠난 '나'의 할아버지 부곡 아재, '신용길'부터 한반도를 넘어서 여러 역사의 장면과 마주해야 했던 가문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보도연맹학살과 같은 비참한 한국 현대사와 적백내전에 참여했던 조선인 여성혁명가, 조선을 무너뜨릴 뻔했던 17세기 경신대기근과 원제국 말기 제국에서 기이한 노사로부터 왕조를 살해할 비책을 배워 온 승려까지, 나라들이 사라진 뒤에도 이어지는 가문의 역사는 신종원의 독특한 문장의 리듬 위에서 연주된다.

  신종원의 소설은 현실과 환상, 신화와 역사, 유령과 같은 초자연적인 존재와 현대적 기술의 첨단을 달리는 사물들이 공존하며 서로 교차하는 음악적 공간이라는 이소의 말5)처럼 습지 장례법』 역시 할아버지에 대한 작가이자 화자 '신종원'의 기억과 가문의 역사와 신화적 세계가 그 고유한 음악적 리듬 위에서 펼쳐진다. 그렇지만 습지 장례법』을 현실과 환상이 중첩된 가상적 서사로 규정하는 것은 그리 잘 어울리지 않는 설명이다. '음향학적 기술로 문헌학적 공백을 복원'하겠다는 소설 속 한 대목처럼 현대를 살아가는 후손인 '나'가 확인할 수 없는 과거의 공백들을 가문의 역사 속에서 반복되는 '리듬'을 통해 재현하고 있다. 소설을 구성하는 환상성이나 재현되는 시대의 것일 수 없는 기술적·음향학적 언어들은 형태를 달리하더라도 반복되는 세계의 모습을 그려내는 음악적 리듬이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음악의 리듬을 통해 그가 읽어내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반복, 왕조의 흥망성쇠를 몇 번이나 지켜본 뒤에도 끝나지 않는 가문의 굴레라는 영원한 은율의 반복 말이다.

  작중 작가인 '나', '신종원'은 조부로부터 물려받은 가문의 땅으로 내려온다. 천 년 간 가문의 땅이었으며 그들의 비밀스러운 전통을 위해 최후에는 모든 가족이 돌아가야 할 장소였던 늪이 불타버렸기 때문이다. 가문의 마지막 가주인 '나'는 그곳의 전통을 지키고 있는 늪지기 노인의 연락을 받고 집성촌이었던 그곳으로 찾아온다. 집성촌이란 말이 무색하게 가문의 사람들은 고향을 떠나 흩어졌고, 가문의 고택도 비어 있다. 가문의 소유였던 늪도 람사르 협약에 따라 그 소유권이 국가로 이전되었다. 마지막 가주인 '나'는 늪을 제외하고 남은 가문의 땅을 물려받았을 뿐이다. 그러나 가문의 선조들로부터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의무는 그가 원치 않더라도 그를 향해 이어졌다.

4) 신종원, 습지 장례법』, 문학과지성사, 2022, 203쪽. 이 글에서 인용하는 신종원의 소설들은 다음과 같다. 「보이스 디펜더」(『전자 시대의 아리아』, 문학과지성사, 2021), 「고스트 프리퀀시」(『고스트 프리퀀시』, 자음과모음, 2021). 이후 인용 시 괄호 안에 제목과 쪽수만 표기한다. 5) 이소, 「전자 시대의 교향곡」, 전자 시대의 아리아』, 문학과지성사, 2021, 287쪽.


이 늙은이는 다른 건 잘 모릅니다. 도련님 말대로 늪은 이제 나라에서 관리하고 있지요. 하지만 아직 이 집안의 어르신들은 저 밑에 잠들어 계시지 않습니까. 늪이 이대로 죽은 것이라면, 도련님은 상주로서 마땅히 장례를 지내 주어야 합니다. 그건 공무원들이 할일이 아니고, 도련님이 해야 할 일이에요. 도련님이 할일을 하는 동안 늪지기는 늪지기가 할일을 하면 됩니다. 그것만이 늙은이가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36)


  늪지기는 마지막 가주인 그에게 늪의 장례를 치르는 상주의 의무가 있다고 말한다. 국가의 법에 의해 늪의 소유권을 잃었다고 해도 상관없다. 국가의 법과는 다른 시간의 주기로 이어지는 가문의 전통이 그에게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문의 전통을 이해하지 않으려는 그에게 늪지기는 고택에 하룻밤 머물면서 가문의 전통을 이해해 보라고 권한다. 할아버지가 남겨 둔 유산인 가문의 고택에서 그는 예상치 못한 과거의 기록과 마주하게 된다. 선조들의 기록을 보관해 둔 방에서 그는 조부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쓴 편지를 발견한다. 가문의 전통과 그 전통에 얽매여서 고향을 벗어나지 않으려는 가족들에 대한 분노와 혼란, 슬픔이 담긴 그 편지를 읽기 시작하면서 '나'는 잘 알지 못했던 그와 마주하게 된다. 전통을 끊어내고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던 그의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고향을 떠나 성공해 부곡 아재(부자 아저씨)라고 불렸지만 그 부를 위한 그의 행동이 “사람으로 땅을 지키는 인신 공양 풍습이 서울에서 새롭게 부활한”(41) 것이 아닌가 의심한다. 늪의 장례를 위해 찾아온 '나'의 여정은 오래전 세상을 떠났던, 그를 사랑했던 조부의 장례를 지내기 위해 가문의 역사가 보내오는 수많은 신호를 해석하는 음향학적 탐험의 과정으로 펼쳐진다.

  5부로 구성된 이 소설은 장례의 절차들로 나뉘어 있다. 임종을 맞는 순간부터 망자의 시신을 씻기는 '수시(收屍)', 시신을 모시는 '안치(安置)', 망자의 혼을 부르며 슬피 우는 '발상(發喪)', 그리고 망자를 위한 제사인 '삼우(三虞)'까지, 소설가는 늪의 장례 대신 그의 할아버지, 부곡 아재를 떠나보내는 과정을 거친다. 죽은 자를 장사지내는 일은 죽음이라는 영원한 상실을 인정하는 과정이지만 동시에 그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과정이기도 하다. 죽음을 맞은 이와 그 죽음을 애도하는 이 사이의 관계가 죽음의 과정을 통해 확인받기 때문이다. 제사와 같은 죽은 자를 추모하는 동아시아의 가족 의례가 기억의 공간으로 기능했는데 이 기억의 재현 공간을 경유함으로써 죽은 자들의 삶과 산자와의 관계는 새롭게 구성될 수 있었다. '제사문학'이라 명명되기도 했던 한국 현대문학의 한 전통은 이 의례가 펼쳐 놓는 기억의 공간을 통해 억눌리거나 잊힌 이들이 가졌던 이들의 기억과 이름을 새롭게 불러 왔다.6) 소설은 이미 오래전 떠나간 이를 위한 장례의 공간이 된다. 그리고 이제 문장이 시작되자 다시 장송곡이 울리고, 그의 죽음은 해석적 갱신의 과정에 들어서게 된다.


3


  사라진 자들에 대한 기억과 가족의 질서와 반복, 그 장면들의 뒤얽힘은 신종원의 소설을 구성하는 중요한 축이다. 역사, 가족, 자연과 인공의 사물들을 울리는 진동은 그의 소설에서 음악적 질서를 통해 표현되고 전달되며 해석된다. 해석, 그의 소설에서 음악은 현재에서 보이지 않는 과거와 미래를 이어 주는 연결망이자 동시에 그 모든 것의 기원이 되는 소리를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의 소설에서 울리는 소리의 연결망, 음악과 그 악보들은 방대한 세계로 뻗어 있다. 등단작 「전자 시대의 아리아」에서 일본제국의 오래된 건축물은 제국주의와 식민 지배가 남긴 폭력의 광기를 경고신호처럼 끝없이 반복하는 유령과도 같은 공간의 목소리가 울리고, 「멜로디 웹 텍스터」에서는 음악적 질서를 토대로 물질의 그물을 만들어내는 거미의 기교를 보여주며, 「보이스 디펜더」에서는 소리는 인간의 감각을 압도하는 악마적 질서와 그에 맞서는 인간이 대결하는 음향학적 격전장이기도 하다. 「아나톨리아의 눈」에서는 소리와 음악은 시대와 세계를 경유하는 장대한 여정이기도 하다. 신종원의 소설에서 음악이 이처럼 광대한 세계와 접속하고 또는 세계 그 자체일 수 있는 것은 그 소리가 근원적인 힘의 작용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소설 속 “인물과 사물 들은 홀린 듯 음악적 일의성(一意性)에 휩쓸”7)려 들어간다.

  음악은 영원한 소리의 형식이다. 이 영원한 소리는 신종원의 소설 속에서 두 가지 공포스러운 형상을 취한다. 하나는 모든 것을 가득 채운 소리, 악마 바알즈붐이 지배하는 끝없는 소음의 지배이고 다른 하나는 림보, 같은 음악이 영원히 반복되는 시간의 연옥이다. 「보이스 디펜더」에서 소음으로 세계를 가득 채우는 파리의 악마 바알즈붐은 탐욕스럽게 모든 소리와 음악의 코드를 집어삼킨다. 이 악마적 존재는 세계를 신호의 포화상태로 채워버리며 음악으로 가득 찬 음악 없는 세계를 만든다. 그곳에 한 사람의 목소리, 1인칭의 화법은 남아 있지 않다. 반면에 림보는 영원히 반복되는 한 사람의 목소리다. 이제 더는 이어 갈 수 없는 가문의 전통에 붙잡혀서 '나'를 늪으로 불러낸 늪지기, '이 사람이 살고 있는 시간대야말로 림보라고 부를 만'(19)하다. 가문의 노래는 한 사람에서 그다음 사람의 입으로 전해지며 불리지만, 같은 소리를 반복할 뿐이다. 이 림보는 영원한 굴레일 뿐이다. 그런데 이 두 소리의 공포는 기이하게도 서로 대립한다. 「보이스 디펜더」에서 반복되는 하나의 음악, 림보는 바알즈붐의 소음을 통한 군림에 맞서는 인간의 기술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6) 권헌익, 정소영 옮김, 『전쟁과 가족』, 창비, 2020, 220쪽. 한국전쟁과 제노사이드라는 냉전기 국가폭력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이러한 제사문학의 작동방식은 2020년대에는 가부장제 질서의 젠더 억압과 같은 구조적 폭력의 재생산 속에서 잊히거나 주변화된 이들과 새로운 관계성을 맺는 탐색의 서사로 재현되었다. 김요섭, 「제사의 행방」, 웹진 작가들』, 인천작가회의, 2023.
7) 이희우, 「신디사이저 은하계」, 『문학과사회-하이픈』 봄호, 문학과지성사, 2022, 126쪽.


  전자 음향 장비에 의해 되살아난 시시포스. 혹은 시시포스라는 이름의 사운드를 가동시켜라. 그는 피로를 좀처럼 모르고. 제 몫의 노임을 달라고 조르지 않을 테니. 220볼트의 전압이 흐르는 한, 하나의 지옥. 하나의 심연, 하나의 악몽에 맞서. 1인분의 목소리, 1인칭의 화법을 지켜줄 것이다. 인간이 멸망하더라도. 사운드는 남을 것이다. (「보이스 디펜더」, 232~233쪽)


  시시포스가 신들이 내린 벌 때문에 영원히 산 위로 바위를 올려야 하듯, 인간의 음향 장비는 세계를 가득 채운 소음을 덮기 위해 끝없이 사운드의 재생을 반복한다. 하지만 형벌을 견디어 내는 시시포스의 의지는 위대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그의 승리를 가져올 수 없었듯이 음향 장비의 저항은 세계를 가득 채운 소음들을 이겨낼 수 없다. 그렇다면 그의 음악은 두 개의 지옥, 림보와 악마의 소음이라는 신화적 이미지로 가득 찬 고통스러운 지옥의 이야기일까? 그렇지 않다. 그에게 소리란 언제나 해석될 수 있고, 해석을 기다리고 있는 통신의 신호들이기 때문이다.

  신종원의 소설 속에서 음악은 다른 이의 목소리, 알지 못하거나 인지하지 못했던 관계와 마주하게 하는 음향 신호다. 소리로 가득 찬 신종원 소설의 세계 속에서 음악은 서로에게 닿을 수 있는 매개이자,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해석되어야 할 신호다. 세계를 이루는 소리는 너무나 많이 중첩되어 소음이 되고 만다. 하나하나 나누어 본다면 그 소리는 각자의 질서를 가진 음악이겠지만, 세계는 하나의 질서나 관점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그 포화된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길을 잃을 수밖에 없다. 무엇 하나 구별할 수 없을 만큼 빽빽하게 가득한 세계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것은 다른 것들과 구별할 수 있는 고유의 패턴, 질서를 부여해야 한다. 그렇게 소리에 부여된 질서는 음악을 만든다. 이 과정을 다르게 이야기할 수 있다. 세계는 끝없이 발생하는 개체와 사건으로 가득하다. 우리는 세계를 채운 그 모든 존재를 이야기할 수 없다. 그 이야기는 서로 구별될 수 없는 소음일 뿐이다. 우리는 사건과 그 주체를 발견하기 위해, 하나의 형식을 부여한다. 신종원이 음악이라 불렀던 바로 그 형식, 즉 서사 말이다. 무한한 존재와 사건들 사이에 질서를 부여하는 서사가 성립된 뒤에야 우리는 한 사람의 삶과 마주할 수 있다.

  음악이 악기와 가사를 떠날 수 있듯이 서사도 이야기와 인물을 바꿔 가면서 그 형식 속에서 끝없이 반복될 수 있다. 가문의 전통과 역사 속에 갇힌 사람들의 이야기, 림보는 그 형식의 반복 과정이다. 그들이 경험한 삶은 반복되는 가문의 역사 속에서 그저 서로 다른 세대의 구성원들로 격하된다. 신종원의 소설은 삶을 구분할 수 없게 하는 공포들, 식별할 수 없는 혼란인 소음과 단일한 형식으로 모든 삶을 동질화하는 림보 사이에서 싸우고 있다. 그런데 이 싸움에서 가장 흥미로운 장면은 그가 세대를 넘어 이어지는 영원한 형식을 완전히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희우의 예리한 지적처럼 신종원의 소설에서 “하나의 음악적 질서를 부여하려는” 소설가의 의지는 “동시에 두드러지는 것은 자신이 만든 정교한 음악적 알레고리에서 벗어나려 하는 충동”8)과 교차한다. 세대와 시대, 세계를 서사의 질서를 통해 이어 놓으려는 연결의 의지와 그 이야기의 형식 안에 삶의 구체성을 가두지 않으려는 바람이 만나는 자리에 해석이 발생한다.

  『습지 장례법』은 망각과 싸우는 소설이다. 망각은 이중적이다. 모든 소리를 뭉치는 소음처럼 식별할 수 없는 시간이 망각을 가져오기도 하며, 모든 것이 반복되는 림보처럼 구별되지 않는 동질적 형식에 의해서도 이루어진다. 시간의 순서만 다를 뿐 반복되는 가문의 이야기 속에서 선조들과 구별되지 않던 할아버지의 삶을 구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또 다른 반복이다. 2부 수시를 구성하는 다섯 사람의 이야기, 가문의 역사를 이루지만 동시에 가문의 금기를 어기고 그 굴레를 벗어나고자 했던 이들이 병렬적으로 연결된다. 같은 듯 다른 이들의 이야기는 하나의 리듬이 반복되는 것만 같던 가문의 음악이 실은 계속되는 변주 과정을 거치며 연주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가문의 굴레와 싸운 할아버지의 삶은 그 장구한 세월을 가능하게 했던 또 다른 가문의 역사가 긍정한다. 림보 속에서 이 변주들을 발견하고 이 다른 음들로 연결된 악보를 그리는 이는 바로 신호의 해석자인 소설가다.

자료는 내가 찾아올 테니, 자네는 픽션으로 이들의 역상 이미지를 만드시오.
다시 질문 하나.
어떻게요?
에디슨이 말한다.
일어났던 일들을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하시오.
이어서,
자네의 목소리로 원본을 상쇄시켜 없애버리는 것이오. 할 수 있겠소?
고개를 끄덕이며 작업이 시작된다.
(「고스트 프리퀀시」, 126~127쪽)

  「고스트 프리퀀시」에서 '나'는 음향 장치라는 고정된 반복의 형식 속에 소리를 가두어버린 에디슨의 영혼과 만난다. 그는 모든 것이 반복되는 소리의 연옥(림보)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에게 또 다른 반복을 부탁한다. 픽션을 통해 소리의 역상 이미지를 만들어 달라고, 당신의 목소리로 원본의 소리를 상쇄하라고. 하나의 형식이 반복되는 가문의 림보를 끊는 소설가의 해석은 서사적 재현의 과정이다. 그는 천 년을 이어 온 가문의 역사가 반복해 온 기억의 형식을 재구성한다. 그의 서사적 재구성은 한 사람의 개별적 개인을 남기려는 것이 아니다. 그는 기억해야 할 이들과의 관계를 새롭게 만들어 나간다. 그의 재현은 오래된 기억이라는 고정된 형식을 벗어나 각자의 삶을 회복하려고 한다. 그래서 할아버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가문의 이야기를 다시 반복하는 이 소설가는 그 제의의 과정에서 불을 붙이고, 이 불길은 시간을 거슬러 가문의 굴레, 즉 늪을 불태운다. 그는 그렇게 할아버지를 떠나보내고, 또 받아들인다. 이야기를 끝내고 또다시 재생하는 그에게 할아버지가 보낸 신호(“괜찮다, 종원아. 다 괜찮다.” 267)가 도착한다. 그렇게 그들의 노래는 다시 이어지고 또 달라질 것이다.

8) 이희우, 위의 책, 126~1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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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계’를 말하기 전에 질문할 것들

‘생태계’를 말하기 전에 질문할 것들 김미정  스스로의 글을 언급하는 것이 면구스럽기는 하지만, 한 부지런한 지인으로부터 「시장에서 생태계로」(졸고, 《문장 웹진》, 2023년 4월호)에 대한 짧은 감상을 들었다. 지인의 감상의 요지는 그런 것이었다. “시장 모델을 생태계 모델로 대체해 생각해 보려는 아이디어는 이해되었다. 그런데 ‘(자본주의 시장) 바깥이 있다는 주장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 이 글이 시장 시스템의 공고함을 결정론적으로 다시 확인하는 것과는 어떻게 다른가. 한편, 현실의 다양한 문제 앞에서 ‘생태계’라는 말을 낭만적인 뉘앙스로부터 어떻게 구출할 수 있을까.”  쓰는 입장에서도 이해되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이번 2회 차 글에서 계획한 내용이 이 감상, 의견에 대한 느슨한 응답이 될 수도 있을 듯하여 잠시 언급해 둔다. 즉, 지인의 감상은 거칠지만 이렇게 바꿔도 취지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첫째, 왜 시장으로부터 출발하는가. 시장 모델과 문학(쓰기/읽기)은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것일까. 둘째, 이 글에서 말하려는 생태계란 무엇인가.  1. 왜 시장에서 출발하는가  2010년대 초 이래로 ‘지구의 멸망보다 자본주의의 멸망을 상상하기 어려워진 시대’(프레드릭 제임슨, 슬라보예 지젝)에 대한 체감을 반복적으로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 세기말의 이른바 세계화(globalization)의 연장선상의 일이며, 당시 외부소멸 테제들(세계화, 대항 세계화 측 모두)1)이 각기 다른 심정으로 예상했을 내용일 것이다. 저 인식은, 수용자와 창작자의 관계가 상품의 구매자와 판매자(소비자와 생산자) 등으로 치환되거나, 예술·문학장이 노동력 시장과 다를 바 없어졌다는 식의 상황만 지시하지 않는다. 우리 사고와 신체의 디테일을 위화감 없이 디자인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문제를 저 말로부터 환기해 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2)  물론 이것은 세기말 세기 초에 갑자기 문학·예술이 시장의 산물이 되었다거나, 근대 이래로 문학·예술이 자본주의를 모태로 출발했음을 간과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근대문학·예술이 자본주의 시장 내의 환금성을 지닌 상품의 일종이었다는 사실은, 2000년대 이래 한국 문학계의 ‘제도 연구’가 내내 골몰해 온 바였다. 오늘날 문학·예술이 근대 자본주의 조건과 불가분이었음은 2000년대 이래로 연구장을 넘어 일반 대중에게도 널리 체감되었다. 또한 이러한 문제의식을 통해, 이른바 작가론이나 작가연구야말로 지극히 근대적인 문학, 예술의 방법이라는 사실도 환기되었다. 작가론, 작가연구 속의 작품은 작가 개인의 삶과 사유와 감성체계로 통용된다. 그런데 일찍이 마르셀 뒤샹이나 앤디 워홀 같은 이들의 잘 알려진 퍼포먼스가 단적으로 보여주었듯, 작품의 성취에 개재된 작가(이름)의 신화는 시장의 브랜드네임과

  • 최고관리자
  • 2023-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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