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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의 방향 (2)

  • 작성일 2023-11-01
  • 조회수 872

안전의 방향 (2)


홍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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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에게 현실로부터 안전한 자리가 약속될 때, 문학은 스스로를 부인하는 방식으로 존재하게 된다. 문학에게 현실과 분리된 자리를 배당한다는 것은 비단 문학이 그리는 세계가 현실 세계의 재현일 뿐 실제 그것은 아님을 강조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문학이 재현하는 세계와 문학이 재현을 수행하는 세계가 분리되어 있는 것으로 가정될 수 있다고 여길 때, 그러한 단절 감각은 문학 속에서 일어나는 일과 문학이 문학으로서 쓰이고 읽히고 유통되는 제반 사정을 별개의 것으로 여길 수 있는 태도가 될 가능성을 가진다. 그 태도로부터 ‘문학’에 관한 이야기는 거듭 시작된다.

   예술로서 ‘작품’ 자체로 존재하는 문학에 관해 말할 때 문학은 사람‘의’ 창작물로서의 문학으로부터, 쓰고 편집하고 옮기고 읽고 교육하고 배우고 흡수하고 기억하는 사람들과 그들 사이의 관계성 속에서 만들어지는 문학에 대한 경험 및 관념 혹은 문학의 역사적 작동 방식으로부터 오롯이 분리된 자리에 있는 것으로 선언된다. 문학에 문학의 태생적 조건과 시간적 위치와 수행적 현실과는 무관한 자리를 쥐어 주는 그러한 언명은 다만 문학의 미적 가치를 알아보고 가꾸어 나가며 보존해 가야 한다는 소극적 의미의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무관’에 관한 감각은 모든 문학 텍스트의 조건과 위치와 역할들이 작동하는 문학이라는 이름의 장, 제도로서의 문학을 미적 산물로서의 문학과 분리시킴으로써 진정 문학적 가치를 음미하게 하는 ‘문학’을 상정하여 긍정한다. 한 텍스트의 ‘문학’적 면모를 말하는 일은 그것이 문학으로 유통되는 장의 생리에 대해 말하는 일과 반드시 유관할 필요는 없으며, 두 작업이 상호 호환된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문학’적 가치라는 것이 세계를 설명하는 유의미한 판단 기준이 된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으로서 ‘문학’의 위치를 긍정하게 한다.

   반면 두 작업이 때로 상충되는 감정과 판단에 도달한다면 그 괴리의 책임은 ‘문학’이 아닌 곳에 있으며, ‘그들’의 ‘몰이해’는 그러한 조건에서 이해할 만한 것이자 ‘문학’의 가치를 더 적극적으로 긍정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만일 ‘문학’과 문학 사이의 간극이 문제적으로 여겨지고 비판의 대상이 된다면, 문학은 때로 ‘문학’의 진정한 가치를 보지 못하도록 눈을 가리는 이데올로기적 현실, 정치, 목적, 의도, 혹은 편협으로 여겨질 수 있으며, 그렇게 바라보는 태도에 관해 문제점을 논의하려는 시도는 ‘문학’의 존재적 배경이나 도구적 조건에 관한 비본질적 논의로서 비판되고 배척될 수 있다.

   문학과 ‘문학’ 사이에 용인되는 간극은 나아가 문학인으로서 창작자의 태도나 언행을 비판하는 일이 ‘문학’인으로서 창작자의 위치나 창작 정신, 그의 ‘문학’을 의심하는 일이 될 필요는 없음을 의미하기도 하며, 문학에서 문학인이 행하는 일은 ‘문학’에서 ‘문학’인이 행하는 일과 반드시 유관하지 않을 수 있음을 보장할 수 있다. 그 사이의 유관성을 말하는 일은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그 ‘목적’의 순수하지 못함으로부터 ‘문학’인을, 그로써 ‘문학’을 안전하게 지키는 일은 현실의 재현이지만 현실 자체이지 않은 문학의 본질을 수호하는 일로서 중요하다.

   ‘문학’에 관한 이야기를 구성하는 위의 문장들 사이에는 구분된 문단들만큼의 거리와 그 거리를 없는 듯 겹치는 비약이 분명 있다. 문학이 현실과 관계 맺는 방식을 사유하는 일이 곧장 문학을 불가침한 성좌에 올려 두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문학의 자율성을 지지하는 일과 문학인의 권위와 권력을 무조건적으로 추앙하는 태도 사이에는 여러 입장과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장들의 비약은 경험적으로 마냥 비약이기만 하지 않다. 문학을 현실과 분리된 고유한 것으로 사유하고 그 자리를 안전하게 지키려는 마음은 각종 자본이 운용되는 방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제도로서의 문학으로부터 ‘문학’을 분리하여 ‘문학’의 권위를 수호하고, 그 권위 때문에 만들어지거나 강화되는 문학의 문제들을 ‘문학’의 이름으로 덮으며, 그렇게 ‘문학’이 하는 일을 ‘문학’이 스스로 모르는 체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문학을 굴려왔다. ‘문학’이 문학을 작동시키는 비약적 방식에 관한 경험은 2016년 가시화된바 오랜 시간 동안의 것이기도 했고, 2020년 재차 확인된 다층적 문제의 것이기도 하며, ‘문학’의 이름을 앞세워 그 모든 경험을 다시 압도하는 2023년 현장의 것이기도 하다. 그 경험의 굴렁쇠를 굴리는 동력은 ‘문학’은 현실과는 분리되는 고유한 영역으로 지켜져야 한다는 논리에서 가동된다. 문학으로부터 이미 항상 분리되어 있는 자리에서 ‘문학’은 안전의 공간으로 머물고, 그 안전성 속에서 비약은 오래 경험되는 중이다.

   비약은 논리적·언어적으로 문제적일 뿐 아니라 문학에 관한 논의의 작동 방식을 적시하기 어렵게 만든다는 점에서도, 아마도 그래서 더, 문제적이다. 문학과 현실의 관계에서 쪼개어진 문학과 문학 사이의 관계로, 문학과 문학인의 관계로, 문학인과 현실의 관계로 방향을 구성해 가는 비약의 논리-언어는, 문학을 그것의 제도적·역사적·수행적 성질로부터 무관한 무엇으로 상정하여 문학이 문학을 부인하게 만들 뿐 아니라, 문학이 그러한 부인의 방식으로 권위와 권력을 작동시킨다는 사실을 문학의 이름으로 부인함으로써 문학의 자기 부인을 긍정한다. 이 이중 부인의 메커니즘은 그러한 비약이 없는 듯 건너뛴 것들을 지적하고 논리-언어 자체를 무력화함으로써 쉬이 작동 중지시킬 수 있을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쉬이 중지를 선언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굴러가는 굴렁쇠를 함께 굴리고 있는 것만 같은 이중 구속의 자리를 실상 작동시키고 있기도 하다. 이중의 부인으로 이중으로 구속된 자리에서 문학 제도와 문학성에 관한 비판은 비판하는 동시에 비판의 대상이 되며, 비판하고자 하는 기존의 논법에 스스로 참여함으로써 비판의 방향을 때로 구부리기도 한다. 문학을 상대하는 일의 아포리아는 문학의 안전을 수호하고자 하는 자리 자체에 위치하며, 그 자리를 비판하는 것이 어쩌면 지금 여전히 계속되어야 할 비판의 용무인지도 모른다. 비판이 비판하고자 하는 것을 스스로 반복하고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을 아는 일, 그 앎이 비판을 무력하게 만들거나 부정하는 것이 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 비판은 외려 계속되어야 하고, 스스로로부터 끝내 안전하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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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과 같은 작용 또는 현상이 있다는 사실을 독자들이 인정했으면 한다. 여자 소설가가 쓴 소설의 주인공은 이따금 그 소설을 쓴 작가의 얼굴로 상상된다는 것.”(406)1) 박서련의 소설 「그 소설」에서 여성 소설가인 ‘나’는 과거 합평 시간에 제출했던 원고를 도용당해 고초를 겪는다. 소설에 대한 소유권을 공적으로 되찾기 위하여 그는 이미 문학상에서 가작을 한 원고로 공개된 해당 소설을 자신의 이름으로 앤솔로지에 싣는다. 도용 사실을 밝히고 ‘내 것’임을 보여 가는 일련의 과정에서 ‘나’는 “누구도 훔쳐갈 수 없는 내 얘기”(407)에 대해 생각하다, 십 년 전 경험한 임신 중지와 수술, 낙태죄 헌법 불합치 결정에 관하여 “일인칭 소유격의 내밀한 서사”(408)를 구성하여 소설로 쓴다. 그 소설의 제목은 ‘내 얘기’이다. 「그 소설」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은 “여자 소설가가 쓴 소설의 주인공은 이따금 그 소설을 쓴 작가의 얼굴로 상상된다는 것”이 소설 「내 얘기」를 둘러싸고 어떤 방식으로 확인되고 경험되는지, 그 가운데 ‘내 얘기의 발화자이자 「내 얘기」의 저자는 어떤 대응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게 되는지이다.

   김보경은 이 소설에서 여성 소설가의 ‘내 얘기’가 즉각적으로 소설가 자신의 이야기로 치환되어 버리는 광경을 중요하게 검토한다. 소설에서 ‘나’가 ‘독자’에게 직접 말을 걸며 하나의 사실로 인정하기를 바랐던 문장, “여자 소설가가 쓴 소설의 주인공은 이따금 그 소설을 쓴 작가의 얼굴로 상상된다.”를 직접 인용하면서, 김보경은 “여성 작가의 글에 대해서 유독 소설적 허구라는 안전장치는 쉽게 무력해진다.”는 점에 공감하고, 그것이 여성 작가들의 1인칭 글쓰기의 장이 적극 펼쳐지기 시작한 2010년대 후반부터 근 10년이 되어 가는 지금까지 사실상 변하지 않고 있는 현실이라고 지적한다. “이는 남성의 경험은 보편적인 것으로, 여성의 경험은 성별화된 사적 경험으로 여겨져 온 맥락이나 여성 작가의 여성성이 소비되어 온 맥락과 관련되어 있다.”2)라는 김보경의 진단은 역사 서술 속에서 여성의 언어와 경험만이 소거되어 온 역사와, 어떤 사실 관계에 관하여 여성의 증언과 진술들만이 부정되곤 하는 현실의 문제들과 연결되면서, 여성을 ‘실종’시키는 “성별화된” 읽기를 문제적으로 검토하게 한다. 그런 점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은 중요하게 읽힌다.


  사실 「내 얘기」에서 어디까지가 화자 자신의 이야기인지, 무엇이 ‘진실’인지 아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다. 이 소설은 차라리 그 진실을 추궁하는 구조를 가시화하며 ‘읽기’의 방식을 심문한다. 질문을 좀 더 정교하게 만들어 보자. 이 질문은 여성의 경험이 재현된 문학 작품에 대해 그 경험이 문학적 매개 없이 단순하게 반영되고 있다고 받아들이는 관습화된 독해를 겨냥한 것이기도 하다. 여성의 글쓰기는 경험에 대한 거리 두기를 통한 미학적 가공의 과정 없이 경험 그 자체가 날것으로 재현된다는 생각. 그런데 정말 그러한가.3)


   위의 문장들이 무게감 있게 읽히는 이유는 여성에게만 차별적으로 적용되는 읽기의 문법을 적확하게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비판이 문학과 현실의 관계를 사유하는 방식에 대하여 다층적인 물음들을 던지게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소설」의 ‘나’가 ‘나의’라는 소유격을 사용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고자 자신의 경험을 ‘핍진’하게 살려 ‘내 얘기’를 썼을 때, 그 소설은 ‘나’의 경험과 ‘나’의 의식과 ‘나’의 글쓰기 욕망이라는 현실을 ‘핍진’하게 반영한 것이다. “임신 공포증에 지배당하는 동안에는 오로지 그것에 대해서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도 낙태 소설을, 낙태 소설이나, 낙태 소설이라도 써버릴까 하는 충동이 시시때때로 들었”고 “「내 얘기」를 쓰기 위해”(406) 그 시절을 다시 불러낸 것처럼, 혹은 ‘내 소설’이 ‘내 것’이라는 ‘진실’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여자, 진실을 말하다”(399)라는 앤솔로지 기획에 참여한 것처럼, ‘나’에게 소설 쓰기는 언제나 ‘나’ 자신의 소유격을 확인하며 그것을 전면화하고, ‘의’라는 조사 양쪽에 쓰이는 두 단어 사이를 밀착시키는 행위로서 수행된다. 이때 ‘나’의 현실과 ‘나’의 문학은 ‘내 얘기’라는 소설의 제목처럼 서로 분리되지 않으며, 「내 얘기」는 “그렇다고 진짜 내 얘기는 아니”(398)지만 “절대로 흉내 낼 수 없는” “내 얼굴과 내 얘기”(407)이다.

   그 사실이 이 소설이 던지는 질문에 있어서는 아주 중요하다. 「내 얘기」를 읽고 “그거 혹시 내 얘기 아니니?”(412)라고 ‘언니’가 물어 올 때 이 소설이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말한 ‘나’의 작가노트 속 언어가 충족된다면, “언니 예전에 저한테 병원 가르쳐주셨던 거 기억해요?”(413)라고 ‘나’가 되묻고 ‘언니’가 말없이 전화를 끊을 때 「내 얘기」는 ‘언니’의 얘기가 아닌 ‘나’의 얘기, ‘나’의 작가로서의 소유권만이 아니라 경험의 소유권까지 확정된 얘기가 된다. 그런 조건에서 “어떤 새끼가 그랬어?”(413)라는 ‘엄마’의 다그침이나 “우리 얘기”(415)에서 “우리 아기”(416)로 이어지는 ‘그 새끼’의 질책이 「내 얘기」를 ‘나’의 ‘날것’의 얘기라고 단정해 버리는 방식은 부분적으로 사실의 측면을 갖게 된다. “엄마 그거 소설이야. 나 그런 적 없어.”(414)라는 자기 부정이 “아냐 엄마 내가 미안해. 놀라게 해서 미안해.”(414)라는 사과로 연결되는 이유나 “소설이잖아.”(415)라는 말이 “그래서 이제 와서 나보고 어쩌라고.”(416)로 이어지는 까닭은, 누군가는 놀랐을 것인 어떤 일이 실제로 ‘나’에게 있었다는 사실이 그 자체로 부인될 수는 없기 때문일 것이다. 「내 얘기」 속 경험은 ‘나’가 소유권을 가지고 있는 경험과 무관하지 않으며, ‘내 얘기’와 「내 얘기」가 온전히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이 이 소설을 둘러싸고 있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김보경의 글이 지적한 “「내 얘기」에서 어디까지가 화자 자신의 이야기인지, 무엇이 ‘진실’인지 아는 것”이 아닌 것과 더불어서, 그의 글이 비판적으로 읽어낸 “여성의 경험이 재현된 문학 작품에 대해 그 경험이 문학적 매개 없이 단순하게 반영되고 있다고 받아들이는 관습화된 독해”가 있음을 ‘인정’하거나 하지 않음의 문제 역시도 아닌 것이 아닐까. 「그 소설」의 ‘나’는 자신의 것은 계류유산 경험이고 「내 얘기」에서 그려낸 이야기는 낙태에 관한 것이라는 점을 들어 “그래서 「내 얘기」는 내 얘기가 아니”(418)라고 강조하여 말한다. 소설의 시작과 끝에서 그에게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소설이 소설이라는 것을 증명”(418)하는 일이지만, 그는 그 증명을 전화기 너머를 향해 하지는 않는다. 외려 ‘나’는 ‘나’의 일인칭으로 쓰이는 이 소설 「그 소설」을 통해 “여자 소설가가 쓴 소설의 주인공은 이따금 그 소설을 쓴 작가의 얼굴로 상상된다는 것”을 인정하자고 말을 거는 ‘독자’를 향해 그 ‘증명’을 하고자 한다. “이런 얘기까지 해야 하나 소설인데”(398)라는 생각으로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 이 소설의 발화, 그 복판에서 ‘나’에게 중요한 것은 소설이 허구로 읽히지 않는 현실만이 아니라, 때로는 소설이 ‘언니’의 얘기를 상상하여 그린 ‘허구’가 아니라 ‘나’의 얘기를 기술한 ‘내 얘기’로 여겨져야 하고, 때로는 ‘내 얼굴’로서 보이기를 원하며 쓴 소설이 ‘내 얼굴’이 아닌 것으로 부정되어야 하며, 그러한 현실을 그리는 ‘나’의 소설 쓰기가 사실은 이러한 ‘진실’을 내포하고 있음을 드러내면서 ‘내 얼굴’을 알아봐 주기를 요청하는 것이 되기도 하는 현실의 모순 자체이다.

   ‘독자’에게 중요하게 여겨져야 할 것은 그러므로 대체 왜 “소설이 소설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 이토록 치명적이어야만 하는지, 왜 ‘나’의 경험은 낙태가 아님을 ‘증명’하는 일이 수화기 너머의 이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로도 ‘나’에게 중요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는지, 그런 ‘나’의 위치를 읽을 때 “여성의 경험이 재현된 문학 작품”이 “거리 두기를 통한 미학적 가공의 과정 없이 경험 그 자체가 날것으로 재현된” 것으로 읽혀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을 확인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은 어째서인지, “소설적 허구라는 안전장치”가 여성에게 주어진다면 ‘내 얘기’와 「내 얘기」를 둘러싼 ‘나’의 위치는 읽기의 폭력으로부터 정말 ‘안전’할 수 있는지, 그때 ‘안전’은 어떤 종류의 안전인지, 그런 안전하고자 하는 마음에 관한 질문들인 것은 아닐까. 

   이를테면 그 질문들은 여성의 어떤 경험은 미학적인 재현을 경유한 것으로, 어떤 경험은 미학적 매개 없는 ‘날것’의 경험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사실, 그런 구분이 외려 어떤 여성의 경험 - 소설은 혹평을 받아야 할 것으로 어떤 여성의 경험 - 소설은 상을 받아야 할 것으로 판정하는 데에 활용되기도 한다는 사실과 관련되어 있다. ‘나’가 도용당했다 되찾은 소설은 가족 구성원에 의해 가해진 추행의 기억을 고백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여성의 이야기로, 그것을 쓴 ‘나’의 경험이든 그렇지 않든, 한 여성이 소유하는 경험을 발화하고 있다. 그 경험은 소설가로 활동해 온 ‘나’의 이름으로 앤솔로지에 실렸을 때 크게 주목받지 못하며, “한줌 될까 말까 한 독자들”에게는 “기획을 너무 의식해서 재미가 없어진 소설”(403)로 평가받는다. 그러한 평가에서 이 소설 속 경험은 경험이 아니라 기획되고 의식적으로 만들어진 ‘소설적 허구’로 여겨지고, ‘재미’의 대상으로 위치지어진다.

   「내 얘기」 역시 간접적으로 그렇다. 낙태죄 폐지에 대한 대체입법이 논의되는 시기에 발표되어 ‘반응’이 있을 법했던 이 소설은 “마침맞게 발표되었음에도 큰 반향은 없”어 ‘나’에게 실망감을 안겨 준다. ‘나’가 기대한 것은 「내 얘기」 속, 혹은 그것을 쓰는 자로서 ‘나’의 기억 속, 한 여성이 소유한 경험이 현실 세계의 여성이 소유하는 경험과 만나 소설과 현실이 밀착하게 되는 순간이지만, 소설은 현실의 현장으로부터 외떨어진 채 남겨져 있고, 그 거리가 하나의 사실로서 ‘나’에게 허탈함과 쓸쓸함을 준다. 소설에 대한 ‘반응 없음’은 소설이 현실이 아닌 ‘허구’의 자리에 머물러 있음을 방증하는 것처럼 그에게 여겨진다.

   “그랬던 「내 얘기」가” ‘나’에게 “일간지 문화부에서 주관하는 단편소설상을 안겨”(411) 준 것과, 도용당했던 그 소설로 ‘나’는 “합평 수업에서 호된 혹평을 듣”고 도용범은 “대학 문학상에서 가작”(403)을 수상했다는 사실들은 기묘한 이중의 시차時差/視差들을 드러낸다. 작가가 되고자 하는 여성 학생들이 수업에서 임신과 낙태에 관해 쓸 때 교수자의 위치에 있는 작가들은 그것을 “낙태 소설”(404)로 통칭하며 ‘실종’되어 마땅할 것으로 취급하고, 그러한 영향 관계 속에서 어떤 유형의 여성을 ‘화류계’로 부르며 소외시키는 작가 지망생들의 환경에서 어떤 여성의 경험은 현실과 밀착해 있다는 이유로 배제된다. “대단히 개성 있게”(404) 문학적 가공 과정을 거쳐 미적 성취를 이루어내지 않는다면 그러한 소설은 실제 자신의 경험이든 그렇지 않든 한낱 ‘날것’ 상태의 ‘경험’일 뿐이라 여겨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한 학생의 소설로 대학 문학상에 투고될 때, 익명의 심사를 거치는 것으로 가정될 수 있는 상의 선별 과정에서 같은 소설은 ‘날것’의 경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문학’으로, ‘문학적’ 시도를 하는 ‘소설’로서 읽히고 ‘수상작’이 된다. 이 익명의 선별에서 중요해지는 것은 특정 성별의 경험이 아니라 상의 취지를 통해 공표된 또 다른 정체성, 특정 연령대 혹은 특정 환경을 공유하는 사회적 신분의 경험이다. 이 상은 ‘작가’가 되지 않은 ‘미등단’ ‘대학생’을 대상으로 하므로 그 상의 차별성과 정체성을 전면화하기 위해 투고자들이 ‘대학생’이라는 위치에서 체감하는 현실을 ‘한낱’ 날것으로 여기지 않는 동시에, 그저 ‘기획’된 ‘허구’로도 치부하지 않을 수 있다. 투고작들에 담긴 경험은 대학의 합평 교실에서와 같이 ‘보편’으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이 상만이 포착할 수 있는 ‘특수’로 여겨지며, 이 읽기의 시차 속에서 중요한 것은 소설과 현실의 관계 자체가 아니라 밀착의 정도를 버려야 할 것으로, 혹은 인정하고 고평할 것으로 의미화하는 방식이다.

   「내 얘기」에 관하여 의미화의 문제는 보다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 소설」은 낙태죄 폐지 관련하여 실제 대한민국의 현실과 역사와 밀착하여 ‘나’의 서사를 만들고, 그 속에서 소설 「내 얘기」의 위치는 계속 변화한다. 「내 얘기」는 2019년 봄, 낙태죄 헌법 불합치 결정이 이루어진 봄에 경험한 내용을 바탕으로 그해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쓰이고, 2020년 1월 지면 발표가 결정된 후 출판사 사정으로 그해 여름에 발표된다. 대체입법 관련하여 계속해서 논의가 이루어지지만 구체적인 개정 법안이 마련되지 않던 2019년과 2020년의 상황에서 개정 법안 마련 기한인 2020년 12월 31일이 가까워져 오던 연말이 되었을 때 언론사들은 낙태죄 전면 폐지를 앞두고 남은 날짜를 거꾸로 세며 관련 내용을 보도했다. 그런 언론의 움직임 속에서 일간지 문화부에서 주관하는 단편소설상 후보 중 하나로 「내 얘기」가 지명되며 신문에 ‘나’의 이름과 소설의 제목, 후보 작가 인터뷰가 실리면서 계간지를 읽지 않지만 신문을 읽는 사람들에게서 축하 연락이 온 것이 그 연말이라면, 계간지를 읽지 않는 독자가 수상 작품집을 통해 「내 얘기」가 어떤 소설인지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은 2021년 1월, 낙태죄 폐지가 확정된 시점이다. 이때는 ‘나’가 수상 작품집의 작가 노트를 통해 “여성 소설가가 낙태법에 대해 말하는 게 이상해?”(414)라는 문장을 소설이 아닌 언어로 발화한 때이기도 하다.

   「내 얘기」의 시간을 기록하는 「그 소설」의 시간에서 중요한 것은 문학과 현실의 관계 자체이기보다는 그것이 시차에 따라 다르게 경험되는 방식이다. ‘나’가 「내 얘기」를 구상하게 된 순간을 경험하고 그것을 쓰고 수상 작가가 되어 이름을 알리면서 여러 인물들에게 질책의 전화를 받게 되기까지 한 해 반을 넘는 시간 속에서 ‘낙태’라는 것은 “그전에는 죄였던 것이 앞으로는 아니”(409)게 되고 잠정적으로 ‘헌법 불합치’ 상태였다가 확정적인 ‘폐지’ 단계로 이동하여 재의미화된다. 그러한 시간의 이행과 맞붙어 있는 상태에서 낙태와 낙태죄와 낙태죄 헌법 불합치와 낙태죄 폐지에 관한 소설 「내 얘기」는 마찬가지로 시차가 계속 생겨 가는 복판에 놓여 있다. 그 시차는 구체적으로 그려지지 않지만, 소설 발표 당시의 무반응에서 수상 후보와 수상작으로 위상이 달라져 가는 비약적 과정은 그 자체로 「내 얘기」가 놓이는 시간적·시선적 위치의 차이를 드러낸다. 수술을 받은 병원에서 “이런─곳에서 그런─뉴스를 확인하고 있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408)던 ‘나’와 “절대로 흉내 낼 수 없는” “내 얼굴과 내 얘기”(407)를 쓰려던 ‘나’는 “이것은 ‘내 얘기’이고, 내 소설이며, 내 이야기가 아니다,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라고 쓰는 ‘나’로 스스로에 대한 시차를 더불어 경험하고 있기도 하다. 그 가운데 ‘나’에게 거듭 중요해지는 것은 뉴스에서 보도되는 현실, 법이 폐지되는 현실, 그 현실과 가까운 자리에서 운영되는 문학상에서 주목하는 현실 등이 여성으로서 나의 현실과 여성으로서의 경험을 소설로 쓰는 나의 소설가로서의 현실과 밀착하여 함께 나아가는 경험이다. 그 경험은 ‘나’에게 “의미 있는 기록을 남길 수 있겠다는 확신”(408)과 새벽 세 시에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두서없이 소설 기획에 대해 이야기하는 열정을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차는 그렇게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경험되지는 않는다. “전과 달라졌지만 역시나······ 새로울 것 없는 세계”(409)에 대한 체감은 확신의 언어 이후에 회귀하듯 도착한다. ‘나’가 감당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시차는 “내가 받은 수술은 낙태 수술이 아니”(417)라는 “이런 얘기까지” 하게 만드는 시선, “소설이 소설이라는 것을 증명”(418)하지 않으면 “낙태충 살인자 년”(417)이 되고, “어떤 새끼가 그”(413)렇게 한 일에 대해 “이십사 시간 주 칠일 의식하며 고통 받”(418)아 온 사람이 되어버리는 현실이다. 「그 소설」은 “새로운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419)는 문장으로 맺어지면서 이 강력한 시차를, 돌고 돌아 제자리임을 확인하게 하는 시차를 생각하게 한다. 김보경의 글이 “이 소설은 차라리 그 진실을 추궁하는 구조를 가시화하며 ‘읽기’의 방식을 심문한다.”라고 지적한 것은, 제자리를 확인해야 하는 현실이 ‘내 얘기’에 가해지는 시선과 언어들이 드러내는 ‘읽기’의 편협에 원인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현실이란 다만 문학적 재현을 재현물로 대하거나 대하지 않는 문학적 읽기의 문제에, 문학과 현실의 관계를 파악하는 구도에서 현실의 위치에 머물지 않아야 하는 문제인 것이 아닐까. ‘실종’되어 온 여성의 ‘내 얘기’에 문학의 안전한 자리를 보장해 주는 일로 ‘새로운 일’은 일어날 수 있을까. 그 ‘안전’이 또 다른 제자리의 현실을 만드는 방법이 이미 되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계속)

1) 박서련, 「그 소설」, 『문학동네』 2021년 여름호, 398-419쪽. 소설에서 인용한 부분은 본문의 인용문 다음에 쪽수를 표기하기로 한다.
2) 김보경, 「실종」, 『문학과사회』 2021년 가을호, 21쪽.
3) 김보경, 「실종」, 『문학과사회』 2021년 가을호,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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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않(을)은 길을 향한 반유토피아적 노스탤지어 ― 전하영의 소설들 권영빈 온다 리쿠(恩田陸)의 소설 『잿빛극장』(김은하 역, 망고, 2022)은 1990년대 일본에서 실제로 있었던 동반 자살 사건에서 출발한다. 죽은 두 여성은 대학 시절 만난 친구 사이로 죽음에 이르기 전 함께 살았다는 사실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 이름도, 얼굴도 없이 단지 서로를 죽음의 의지처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특수한 관계성만 남긴 채 사라진 그들은 작가 자신이자 서술화자이기도 한 ‘나’의 마음에 왜인지 사무쳐 버린다. 그로부터 이십여 년 후, 두 여성의 이야기는 소설의 형식으로 소환되고 그들의 삶과 죽음에 존재감이 부여된다. 추리·미스터리 장르를 주축으로 하는 온다 리쿠의 소설은 한국에서도 이미 인기작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래서인지 그가 형상화하는 이 기묘하고 슬픈 ‘실화’는 독자로 하여금 이들 여성이 어떤 역사를 거쳐 동반 자살이라는 흔치 않은 비극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소상히 밝히는 데 주력할 것으로 기대하게 만든다. 그러나 소설은 죽음의 원인을 직접적으로 추적하는 대신 여성들의 삶과 죽음에 소설적 자리를 내주려는 분투 자체에 무게를 둔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주된 장치가 바로 ‘극장’이다. 『잿빛극장』은 작가가 죽은 두 여성의 이야기를 소설화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번민과, 완성된 텍스트를 토대로 이들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드는 과정을 다루는 시점을 교차해 보여준다. 그 사이사이 T와 M이라는, 익명의 두 당사자 여성 각자의 입장에서 그려지는 일상과 회고의 장면이 삽입된다. 극장이라는 장막은 사실로서의 죽음과 허구로서의 죽음 사이에서 빚어지는 재현 윤리를 과장되게 내세우거나 추상화하는 일을 경계하면서 여성들이 살았던 흔적을 희미하게나마 만들어낸다. 1990년대 사십대였던 여성들이 살아가며 겪었음 직한 가부장 이데올로기의 억압과 경력단절, 젠더화된 빈곤의 문제를 건드리면서도 그것을 죽음의 단적이고도 극적인 요인으로 지목하지 않으면서 다만 이들 여성의 시작과 끝을 지켜볼 수 있도록 하는 가변적인 무대를 만드는 것이다. 이름이나 얼굴이 아닌 이야기로 존재하게 된 두 여성은 작가와, 연극배우와, 가상의 당사자 캐릭터 주변을 선회하면서 눈치 채지 못하는 순간 잿빛의 세계로 다 같이 녹아든다. 어떤 사태가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 시작과 끝에 개입한 이야기 조각들을 수집하고 짜 맞추면서 결국에는 비가역적인 ‘한 시절’을 만들어내는 온다 리쿠 특유의 노스탤지어가 새삼 엿보이는 소설이다. 전하영의 소설을 말하려는 이 글이 그와는 세계관도, 세대도 다른 국외 작가의 소설을 거론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돌이킬 수 없는 ‘한때’를 향한 정동과 ‘극장’ 말이다. 시절에의 이끌림과 회한을 발판 삼아 작금의 사태를 해석하고 전망하려는 전하영의 소설은 노스탤지어의 분위기와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 관리자
  • 2024-05-01
소설의 원점, 혹은 클래식-퓨처리즘

소설의 원점, 혹은 클래식-퓨처리즘 박인성 시간의 순환과 소설의 원점 흔히 소설을 가리켜 시간의 예술이라고 부르던 시절이 있다. 물론 여전히 유효한 말이지만, 시간이란 결국 우리가 세상을 인지하고 이해하기 위하여 활용되었던 유용한 개념적 도구일 뿐이다. 따라서 시간을 다루는 방식의 다양성이 늘어나고 시간에 대한 인지적 표현 수단이 늘어나면 자연스럽게 소설이 시간의 예술이라는 표현은 보편적이거나 당연한 것이 아니게 된다. 소설의 언어적 형식은 주제를 이끌어 가는 캐릭터의 삶과 그 의미화를 매개로 시간을 다루는 구성적 논리일 뿐이다. 오늘날에는 양자역학과 다양한 과학적 가설들에 의해서 시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보편화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삶을 연대기적으로 엮어서 기승전결의 플롯 구조를 그리는 소설의 시간적 이해는 그 자체로 시간에 대한 세련된 접근은 아니다. 자연히 소설이라는 언어 형식이 시간에 대한 해석적 주도권을 잃어버린 시대에 다시금 소설이란 무엇이었는지를 묻게 된다. 근대문학으로서나 이후 오늘날의 다양한 소설 형식으로서나 저마다의 응답은 다양하게 도출되지만 자주 잊어버리게 되는 것은 원점에 대한 질문이다. “소설이라는 게 대체 뭐였더라?”라는 질문. 형식과 표현은 언제나 변화하지만 서술과 그에 따른 시간의 뒤섞임은 소설의 본질적인 원료다. 따라서 근대문학에서부터 기존의 시간에 대한 이해를 비틀어 보여주려는 수많은 형식적 실험과 새로운 시도에 존재해 왔지만, 결국 소설이란 세상에 대한 시간적 이해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며 ‘서사적 과거’(Episches Präteritum)1)라는 인지적 조작에 의해서 비로소 시작될 수 있는 삶과 세계에 대한 이해를 함축한다.2) 결국 소설은 ‘서술하는 시간’(narrating time)과 ‘서술되는 시간’(narrated time) 사이의 격차를 통해서 형성되는 상호주관성의 언어이며, 소설가와 독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경험적 맥락을 통해서 그 몸피를 부풀려 가는 해석의 공간이기도 하다. 시간의 공간화의 측면에서, 김연수는 언제나 소설의 언어적 형식이 가진 시간적 해석의 힘을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펼쳐 보인 작가다. 김연수가 지속적으로 소설이라는 언어 형식을 통해 시간을 다루어온 시도는 소설이 가진 이해의 힘을 비판적으로 해체함으로써 오히려 부정할 수 없게 재구성하는 시도에 가깝다. 마찬가지로 소설집 『이토록 평범한 미래』3)는 고전적인 시간의 상상력에 대한 김연수식 문학의 재구성을 집대성한 책이다. 이 소설집에서 다루어지는 시간에 대한 이해와 그 서술적 전략이 특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 소설의 시간성에 기반한 서술 전략이란 미래에 대한 선취를 포함하는 시간의 종이접기와 접붙임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종이접기와 접붙임의 결과물로 도출하고 싶었던 것은 전망-없음과 미래에 대한 비관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의도적인 평범성의 추구다. 소설집의 표제작인 「이토록 평범한 미래」가 보

  • 관리자
  • 2024-05-01
로망스 미학과 새로운 ‘합일’을 희구하는 낭만적 주체의 언어

로망스 미학과 새로운 ‘합일’을 희구하는 낭만적 주체의 언어 염선옥 첨단 테크놀로지의 물결이 세계를 장악하면서 시를 쓰는 철학적 기반에도 작지 않은 변화가 초래되었다. 가령 시 쓰기의 새로운 지표가 친환경적 태도로 기울어 가거나, 고독과 우울 같은 정서를 급격하게 동반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경향의 이면에는 서정적인 것이 낡은 것이라는 신념이 도사리고 있는데, 이는 시인들이 “‘서정적=감상적’이라는 오도된 등식과 연쇄적으로 마주”1)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삶의 모순을 표현하는 데 서정적 일치감보다는 대상과 내면 사이의 불일치를 선택하는 경향이 우세해진 것도 그 까닭의 한 측면을 이루고 있을 것이다. K-팝과 시가 화려한 리듬과 언어유희를 독자에게 전달한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지만, K-팝이 선풍적 인기를 구가하는 것에 반해 시는 일부 문학인들의 전유물로만 공유되고 있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K-팝이 K-문화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세계인들에게 통할 보편적 상상력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우리는 새로움이 주체의 상상력에서 연유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사유하는 것도 상상력”2)이라는 바슐라르의 표현처럼 K-팝은 이미지와 사유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음악이 덮고 있는 낭만성, 서정성이라는 은밀한 파동을 전달한다. 음악이 읊는 이미지는 사유로 이어지고 그것은 다시 ‘너’의 사유로 가닿는다. 이성의 시대를 맞이하면서“시를 쓸 수 없는 시대”, “시가 죽었다”라는 클리셰가 난무하는 가운데도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열정은 조금씩 패턴화되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 그런 와중에 문단 내로 불어오는 ‘서정’의 바람은 꽤 육중하고 소중하게 다가온다. 비역동적 세대의 내적 추락 2010년대 들어 청년층을 가리키는 신조어들이 국내외에서 쏟아져 나왔다. 국내에서는 3포 세대에 이어 N포 세대라는 신조어가 나왔고, 이웃 나라 일본에서는 사토리 세대, 중국에서는 탕핑(躺平, 당평, 눕자) 족이 출현했다. 2010년대 기준 청년실업 등 여러 사회 문제에 시달리는 20~30대 한국 젊은이들이 처한 암울한 현실을 일컫는 ‘N포 세대’는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의미를 염두에 둔 부정적 용어라고 볼 수 있고, 사토리 세대(とり世代)는 불교 용어로서 ‘깨달은 세대’, ‘득도한 세대’로 해석되어 물질적 욕망에서 벗어난 초월적 존재로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현대사회에서 희망을 포기한 젊은 세대를 일컫는다. 탕핑 족 역시 “평평하게 누워 있기”를 뜻하는 중국어로서 그 속내는 제아무리 일을 열심히 해도 대가가 없고 결국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 있는 게 현명하다는 뜻을 함축한다. 이는 존재의 고유한 운동성을 스스로 차단하는 세대를 통칭한다는 점에서 공통 함의를 띠고 있다. 한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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