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시 쓰고 자빠졌네

  • 작성일 2010-07-15
  • 조회수 1,725

 

시 쓰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누군가에게 자주 두들겨 맞았고, 누군가에게 가끔 린치를 가하던 시절이었다. 이웃 여고 문예부 아이들이 어쩐지 예쁠 거 같아서 문예부실을 전전했다. 그리고 백일장에 나가곤 했다. 물론 남달리 예쁜 아이는 없었지만, 어쨌든 17세 남녀가 교복을 입은 채로 노래방에서 듀스나 룰라, 혹은 투투의 노래를 함께 부르는 모습은 남달리 아름다웠다. 되도록 빨리 노래방으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사바사바, 시를 썼다. 빨리 써야 했다. 시는 최초의 노래였으므로. 엉덩이를 두드리듯, 천사를 찾아.
발라드를 부르며 감정 과잉에 빠지는 철수에게 영희는 이렇게 말한다. 시 쓰냐? 그때 우리는 원고지를 눕히던 누런 잔디에서, 어두운 노래방에서, 혹은 밀도가 높은 교실에서 어떤 감정 속에 놓여 있었을까. 난 누군지 또 여기는 어딘지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기에 우리는 분노에 가득 차 교복을 줄이고 담배를 숨기고 몰래 술을 마시기도 했다. 수채화 대신에 야간 자율 학습 감독을 주로 하던 미술 선생은 또 말했다. 또, 또 시 쓰냐? 시화전 제출 작품에서 피 흘리는 고등어를 그려 놓고 ?어느 고딩의 죽음?이라 제목을 붙이며 나는 전위를 담당한 듯 당당했다. 부끄러움이 없는 남자였다. 미술 선생에게 욕을 먹을 때에도, 맞을 때에도 나는 부끄러움을 몰랐다. 대한민국 학교 다 족구하라 그래.
 

시 쓰고 자빠졌다, 정말.
 
정말이란 말에 대해 오래 생각해 본다. 오래 생각하는 버릇은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최대한 짧고 단순하게 사고한 것으로 보이는 일들이 생각보다 빠르고 무식하게 벌어지고 있다. 정말? 시집을 묶어내던 중에 바위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 그 부엉이는 정말 새였을까. 도심에서 사람이 불에 타 죽었다. 그 망루는 정말 구름이었을까. 모두 정말이냐고 정색하며 물어 볼 만한 일들이었다. 분노가 치민다. 지금 나와 싸우자는 건가? 그런데 싸우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아니다. 싸움은 끝났다고, 이제 싸움이 아닌 경쟁의 시대라고 배웠다. 나는 그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잘 모르겠어서, 화가 났다. 사실 싸움보다 훨씬 경쟁이 무서웠다.
사건은 이미지가 되는 순간 거짓말이 된다. 이 모든 게 차라리 멋진 거짓말이었으면 좋겠지만, 이것은 너무나 끔찍한 거짓말. 난삽한 이미지. 이미지가 아닌 이미지. 그러므로 차라리 보이는 게 진실이라고 믿어 본다. 이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진실이 시의 배후가 되어 시에 맘껏 개입해도 나는 좋다. 시가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면 기꺼이 네가 그렇게 하라. 가져간 나의 반쪽! 때문인가. 이제 둘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리얼리스트 되자. 모던한 리얼리스트가 되자. 모더니스트가 되자. 리얼한 모더니스트가 되자. 장난하느냐고? 그렇다면, 불길한 장나니스트라고 해 두지 뭐.
 

꼴에 시랍시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나는 시가 좋다. 그리고 시가 밉다. 사랑하고 미워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처음 증상을 보일 때는 이렇게 데뷔를 하고 시를 쓰리라 짐작하지 못했다. 그리고 병세가 깊어지고 나서도 이렇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시집을 내리라 장담하지 못했다. 그동안 시는 재기 어린 애인이 깜짝 이벤트를 하듯 이런저런 선물을 해 줬다. 혹은 강퍅한 애인이 변덕을 부리듯 짜증을 부렸고, 밥상을 엎는 아버지처럼 광포하게 굴었다. 그러나 녀석은 애인이 아니고 시이기 때문에 나는 떠나지도, 보내지도 못한다. 사랑은 얄미운 나비, 사랑은 차가운 유혹. I`m so sorry but I love you 다 거짓말.
그러니까 내게 남은 일은 숱하게 자빠지는 일뿐이다. 그러니까 ‘소년 파르티잔 행동지침’은 넘어지고 고꾸라지며 다시 일어서는 것. 무릎이 까지고 그곳에 딱지가 얹히고 새살이 돋는 일이다. 그 와중에 많은 사람을 만났고 보았고 시로 썼다. 그것이 시인지 알 수는 없지만, 시가 대체 무엇인지 자체가 알기 어려운 문제라는 점에서 큰 위안을 얻는다. 시편에서 호명한 사람들의 생애에 대해, 늘 미안하다. 이토록 미안한 마음을 자랑하고 싶다. 꼴에 시라고 말이다.
 

자빠뜨리며 자빠지기.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아름다운지 분간할 방법을 몰랐다. 다만 무엇이 가장 나은지는 분명해 보였다. 지방보다는 서울이, 공부보다는 공무원이, 시보다는 시가 아닌 모든 것이 더 나았다. 체제 속에서 더 나았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조절할수록 남들보다 행여나 낫지 않기 위해서 마스크를 꾹 눌러 써야만 했다. 마스크의 눈 사이로 보이는 세상이 자꾸만 일그러진다. 일그러진 세상에서 못나고 잘난 사람들이 살과 마음을 부대끼며 살아가고 있다. 그들이 죽지 않도록 하고 싶다. 더없이 못난 자가 되어 불가능을 향해 슬랩스틱 코미디를 펼치며 정성스레 자빠질 것이다. 그것이 소년 파르티잔의 ‘진짜’ 행동지침.
자빠지기 위해서 노력했다. 턱없이 부족했다. 죽을 때까지 시에 대해 일하고 힘쓸 것이다. 더 아름다운 곡선으로 더 환상적인 자태로 자빠지기 위해 그들의 시를 읽었다. 죽을 때까지 읽을 것이다. 그들을 사랑했다. 영원히 사랑할 것이다. 나는 늘 한국어로 된 시가 가장 첨단이며, 전위이며, 미문이라고 믿고 있다. 그들의 유려한 자빠짐에 미칠 방법이 아직까지 내겐 없다. 그렇지만 이미 책은 나왔고, 나는 오늘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남자가 된다. 이리 와, 같이 침이나 뱉자. 팡팡 터져나갈, 우리의 말, 그리고 시…….   《문장웹진 8월호》

 

 

추천 콘텐츠

소년, 지구 종말의 날까지 분열하라

소년, 지구 종말의 날까지 분열하라 김지선 1 지구처럼 돌아가는 월세, 지구처럼 냄새나는 음식물 쓰레기, 지구처럼 막히는 싱크대, 곧 멸망할 작은 행성을 뒤로 하고 우주를 향해 눈꺼풀을 밟고 고래는 푸른 등을 돌린다 푸른등돌고래는 갈 곳 없는 포유류가 되어 강물에 몸을 담근다 위험한 가정에 등을 돌리지 못하는 고래 한 마리 브래지어에 너를 매단다 언젠가는 멸종하겠지만 고래는 그런 것이고 너는 흐를 것이다 ― 「고래를 잡는 아이를 위한 안내서」 중 세상은 결국 파국을 향해 간다. 당연하게 멸망은 예정되어 있고, 우리는 흐를 것이다. 정규와 비정규, 주류와 비주류, 일류와 삼류가 뚜렷하게 구분된 세상 속에서 혁명은 무력하고 광장은 추억이 되었다. 우리는 가면을 쓰고, 환상을 내면화하며 지겨운 시간을 견딘다. 종말을 향한 불안한 예감, 불길한 전조 속에서 우리에게 가능한 일이란 지루하게 화석화되고 무기력하게 시간을 죽이는 것뿐. 그밖에 선택이란 없어 보인다. 서효인 시의 화자들은 대부분 그렇게 무기력하다. 세계의 불합리와 부조리를 체득한 자의 무미건조한 발성이 시집을 가득 채운다. 찢기고 구워져 마요네즈에 찍힌 오징어처럼 아스팔트에 구워져 바퀴에 깔리는 환경미화원의 최후(「목격자」), 구운 토스트가 된 채 이틀간 방치된 할망구의 죽음(「냄새나는 사람」)을 읊조리는 목소리는 연민조차 거세되어 냉소를 자아낸다. 냉소란 본래 자조를 동반하기 마련이다. 시에서 삼류 인생들이 사물로 환치되는 것은 자본의 부조리한 체제가 뼛속까지 내면화된 수동성에 대한 적절한 은유다. 그렇지만 서효인 시를 읽는 즐거움은 이런 날카로운 비판적 사회학을 발견하는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의 어떤 시들은 의외의 전개로 상황을 밀고 나가는 미성숙한 도발을 그려낸다. 시를 읽어 가다 번쩍 눈이 뜨이는 순간은 바로 그런 똘끼를 발견하게 됐을 때다. 그것은 지루한 시간을 이탈시키는 경쾌한 해방감이며 카타르시스를 맛보게 한다. 서효인의 시가 전하는 즐거움은 시집의 정교한 배열을 주시할 때 더욱 강렬해진다. 시집은 , , , 의 4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에 따라 아이에서 성인으로 변화하는 시적 페르소나는 그의 시를 성장문학의 하나로 읽게 만든다. 상처의 시간을 딛고 견고해지며 어른으로 자라나는 통과의례는 성장문학이 거치는 당연한 수순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의 시선이 성장문학에 대한 여타의 방식을 뒤집는다는 것이다. 시에서 어설픈 미성숙의 시간이야말로 존재감이 최고조로 고양된 순간으로 격상된다. 2장의 시선을 확보한 뒤에 다시 읽는 1장의 반항적 소년기는 청년이 되어 버린 시적 자아가 취해야 할 행동 지침을 제시하지 않는가. 3장의 성인이 된 아이의 무기력을 거쳐, 4장 연작은 성인이 된 후에도 우리에게 남은 미성숙의 페르소나를 다시 한 번 이끌어낸다. 이런 서사적 배치는 강렬한 메시지를 내재하고 있는 건 아닐까? 혹 우리가 감지하는 것 이상으로 서효인의 시는 불온한 전복의 수사학으로 무장된 건 아닐까? 막연한 의혹을 해결하기 위해 그의 시에 천천히

  • wikisoft
  • 2010-07-30
일본 소설, 한국 시

일본 소설, 한국 시 한성례 한국에서 일본소설의 베스트셀러 현상 한류바람이 뜨겁게 일본 열도를 달구기 시작한 2000년 이후부터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해왔다.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인기가 많은 작가가 나올 정도로 한국은 일본소설 홍수 시대이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일본소설가들조차도 왜 일본소설이 한국에서 그렇게나 많이 팔리는지 몹시 궁금해 한다. 이에 대한 일본 신문의 인터뷰나 원고의뢰가 있을 적마다 나는 현재 한국에서의 한국시에 비유해서 설명을 한다. 이전에도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종종 많이 팔렸다. 70년대 중반에 첫 출간된 무라카미 류(村上龍)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해적판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출판금지서임에도 안 읽은 사람이 없을 만큼, 문학이나 예술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필독서이고 바이블이었다. 1999년 정식으로 저작권 계약을 맺어 커버에 비닐을 씌워 19세 미만 구독불가로서 출간된 후에도 쇄를 거듭하며 읽히는 소설이다. 또한 1989년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이 『상실의 시대』란 이름으로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소설은 당시 크게 각광을 받았고 지금도 계속해서 읽힌다. 당시 한국은 민주화 쟁취와 맞물려 자의식이 집단에서 개인으로 향하던 시기였다. 민주주의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태여서 사회,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못했고, 급변하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소외감, 고독, 상실감 등이 당시 한국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과 겹쳐지면서 이 소설에 크게 공감했다. 더욱이 하루키의 가독성 높은 문장은 금방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한편으로 문학의 구도자 같은 마루야마 겐지(丸山健二)의 소설도 여러 편 번역 소개되었는데, 이는 주로 문학 창작자들이 마니아였다. 하지만 일본소설의 인기는 단편적일 뿐 전반적인 경향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구소설이 중심을 이뤘다.그러던 것이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쓰지 히토나리, 히라노 게이치로, 요시다 슈이치 등 젊은 작가와 미야베 미유키, 스즈키 코지, 히가시노 게이고 등의 미스터리 소설과 나오키 상을 비롯한 여러 문학상 수상작이 2000년 이후에 대거 한국에 번역 소개되었고, 대형서점에는 코너가 별도로 마련될 만큼 일본소설은 인기를 끌고 있다. 왜 일본 소설을 좋아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일본소설은 재미있다. 독자를 의식하고 소설을 썼다는 게 금방 느껴진다. 말하자면 자신의 상품을 사줄 소비자의 위치에서 창작을 한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일본소설을 읽으면서 비현실적인 주인공을 통해 현실에서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자신의 일탈을 꿈꾸고, 대리만족을 느낀다. 일본소설의 주인공 젊은이들은 특별한 목표도 없고, 무기력하며 수동적이고, 나약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시대의 흐름과 기존 질서에 따르지도 않고, 세상을 약간은 냉소적이고 관조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 보편적인 부와 명예, 사회적인 안정 등과는 거리가 멀다. 이에 독특한 상상력과 가독성 높은 문장도 한 몫 한다. 최근 일본과 한국에서 밀리언셀러 판매 기록을 갱신하는 무

  • wikisoft
  • 2010-05-28
불타는 시편들

불타는 시편들 강경보 1 첫 시집을 묶기 전부터 내 머릿속을 꽉 채우던 생각들이 있었다. 그 중의 하나가 ‘하루 빨리 묶어서 버리자’는 것이었다. 그냥 불태워 버리면 될 것을 뭣하러 묶어서 버리느냐고 힐난하는 친구도 있었지만 그에 대한 대답은 대단히 궁하여서 ‘불 지르기보다 묶어서 버리는 것이 더 쉽다’며 웃곤 했던 기억이 난다. 아마도 길었던 습작기간 탓에 정말 불태웠던 많은 시들이 있었다. 젊었던 어느 날 동인 모임에 시무룩한 채로 나간 뒤(물론 빈손으로) ‘다 불태웠어’라고 했더니 또 반응이 두 가지였다. 그 아까운 것들을 보기 싫으면 나중에 찬찬히 들여다보면 되지 버릴 건 뭐냐는 반응과, 정말 불을 싸질렀는지 하는 것에 대한 궁금증과 함께 돌아온 힐난이었다. ‘뭔 불씩이나..... 그냥 쓰레기통에 쑤셔 넣으면 될 걸.....’. 그 두 가지 반응에 대하여 생각해 본적이 있다. 첫 번째 반응은 내가 실제로 불을 질렀는지 보다는 그 동안의 작품을 정말로 버렸는가에 대한 사실 확인과 그에 따른 아쉬움의 토로가 대부분이었다. 두 번째 반응은, 글쎄 뭐랄까 좀 미묘하다고 해야겠다. 두 가지 반응에서는 확실한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었다. 공통점은 당연히 그들 모두 시에 대한 갈급함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는 점이고, 차이점은 두 번째 반응을 보인 사람들 대다수가 평소 씨니컬한 성격이나 말투를 보여 오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 두 부류가 확연히 다른 삶을 살았을 거라는 오해는 하지 말자. 실제에 있어서는 천차만별의 직업을 갖고 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꼭 그만큼의 삶을 살며 고민하고 외로워하고 상처받거나 위로받기도 하였으니.말하자면, 불타버린 시편들은 시를 쓰는 누구에게든지 아픈 상처이거나 위로였다는 것이다. 시를 버릴 만큼의 좌절감이 없었다면 이미 오래전에 글쓰기는 끝났을 터이고, 불질러 버리든 쓰레기통에 쑤셔 넣든 이미 버려본 자들의 냉소는 짧지만 깊은 여운이 있어 위로를 주었을 것이다. 그래, 너도 그렇구나, 나도 그렇지. 잘 쓰지도 못하면서 생의 반절을 붙잡고 있자니 때론 남우세스럽다. 그래서 버리는 거다. 버리기는 하되 좀 잘 버리고 싶다. 이것이 내 첫 시집에 주는 변명 아닌 변명이다. 2 드라이아이스 같은 시를 쓰고 싶었다. ‘불타는 얼음’이라고 하면 어울릴지는 모르겠다. 사실 드라이아이스는 형체가 없다. 굳이 말하자면 빙글 말리며 허공으로 사라지는 하얀 연기가 그 형체의 본질이라고 해야 할까? 있으면서 없는 것이다. 없으면서 있는 말과 같은 존재다. 드라이아이스를 물속에 집어넣으면 나는 아주 즉각적으로 착각에 빠진다. 아, 말(言)이 불타는구나! 저 흐물흐물한 물뼉다귀를 끓이고 있구나! 그러나 아다시피 그것은 물이 끓는 것이 아니라 절멸을 꿈꾸는 드라이아이스의 맹렬한 산화이다. 허공으로의 사라짐. 그런데 거기서 나는 아름다움을 본 것이다. 그것도 아주 잠깐. 단 한 번의 사랑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따지고

  • wikisoft
  • 2010-05-27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