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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의 힘

  • 작성일 2012-07-27
  • 조회수 8,811

 

[2012년 장르소설 특집]

 

 

우리 모두의 힘

 

듀나

 

 

 



 

1.

 

   서화영이 담임을 따라 교실 안으로 들어왔을 때, 지희를 포함한 2학년 D반 아이들은 모두 피부에 정전기가 스치고 지나가는 것과 같은 짜릿한 감각을 느꼈다.

 

   처음에 아이들은 자기네들이 새 전학생의 외모에 반응했다고 생각했다. 화영은 인상적인 외모의 아이였다. 예쁘다기보다는 잘생긴 편이었고, 날카롭게 날이 선 얼굴은 거의 인공적이었지만, 성형수술의 결과물보다는 모델의 개성을 강조한 조각품 같은 인상을 주었다. 키가 특별히 크지는 않았지만 깡마르고 긴 팔다리 때문에 후리후리해 보였다. 보고 신기해하거나 감탄할 수는 있지만 굳이 닮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 그런 외모였다.

 

   담임의 맥없는 소개가 끝나자, 화영은 지희 옆자리로 가 앉았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그 자리에는 박윤중이라는 남자애가 앉아 있었다. 그 아이는 사흘 동안 변종 폐렴을 앓다 죽었고, 그 뒤로 그 자리는 계속 비어 있었다. 전염병이 휩쓸고 간 뒤 학교에는 그와 같은 빈 자리가 일곱 개 생겼다. 매스컴에서는 조용했지만 유전자 해커의 짓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심지어 세금 뜯어먹는 빈민가의 노인들을 처리하기 위해 복지부에서 세균을 풀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화영은 그 자리에 그냥 앉아 있었다. 쉬는 시간이 되어도 화장실에 가지 않았고 주변 아이들과 안면을 틀 생각도 하지 않았다. 수업시간에는 프롬프트 안경의 스크립트를 낭송하듯 읽고 있는 교사들의 얼굴을 쳐다보며 가끔 책상의 터치스크린 위에 끄적거리는 것 이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과 눈이 마주치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까딱이는 게 전부였다. 그러는 동안 전학생들이 보통 거치는 통과의례는 얼렁뚱땅 건너뛰고 말았다.

 

   점심시간 때도 화영은 혼자였다. 지희는 멸균 뚜껑을 열고 식판 안의 음식을 꼼꼼하게 챙겨먹는 전학생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저 아이가 신경 쓰이는 거지? 전에 알고 지내던 아이였나? 그때 내가 저 아이에게 무언가 잘못했나? 아니면 그냥 얼굴이 내가 아는 연예인이랑 닮은 것뿐일까?

 

   갑자기 불이 나갔다. 반 지하 식당 안은 신경질적인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불은 다시 들어왔지만, 아이들은 이전의 소란스러움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 짧은 순간 동안 무언가가 식당 안의 공기를 바꾸어 놓았다. 세 명의 여자아이들이 일제히 화장실로 달려갔다. 다 먹은 식판을 들고 일어나던 남자아이 하나가 휘청거리더니 엉덩방아를 찧었다. 누군가는 훌쩍거리며 울기 시작했고, 누군가는 욕을 했다. 갑자기 쩍 하고 복도 쪽 나무 벽이 갈라지는 소리가 났고, 그와 함께 구석의 작은 창문에 거미줄 모양의 금이 갔다.

 

   수업시간이 끝나자, 지희는 같은 반 단짝 아이들 둘과 함께 수다를 떨면서, 물건을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화영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지희는 화영으로부터 20여 미터 간격을 유지하며 천천히 뒤를 따랐다.

 

   교문 앞에 하얀 소형차 하나가 화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운전석에 앉아 있는 사람은 화영과 그리 닮은 편이 아니었고 엄마치고는 젊어 보였다. 뒷좌석에는 초등학교 1, 2학년 정도로 보이는 작은 아이가 타고 있었는데, 그 거리에서는 여자아이인지 남자아이인지 알 수 없었다. 화영은 별다른 인사 없이 보조석 문을 열고 차에 들어갔고, 차는 가벼운 모터 소리와 함께 다가교 방향으로 떠났다.

 

   한참 자동차 꽁무니를 응시하고 있던 지희는 거치대에서 자전거를 풀었다. 차가운 빗방울이 목과 얼굴에 떨어졌다. 9월 말이었지만 온도는 벌써 10도 밑으로 떨어져 있었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여름이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지구온난화와 빙하기가 싸우고 있다고 했다. 오늘은 빙하기의 승리였다.

 

 

2.

 

   아이들은 화영이 있는 환경에 적응해 갔다. 그것은 화영이 온 뒤로 학교가 조금 달라졌다는 것을 모두가 눈치 챘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게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는 아무도 정확히 몰랐고, 아이들도 여기에 대해 깊이 이야기하는 걸 꺼렸다. 그들은 그냥 적응했다.

 

   도대체 무엇이 바뀐 걸까. 화영은 수많은 전학생 중 한 명일 뿐이었다. 공부를 꽤 잘하고 아이들 사이에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는. 말이 없고 사교성이 떨어지긴 해도 그것이 특별히 잘못된 건 아니었다. 전북교육청으로 전송되는 교실 동영상을 모두 챙겨 꼼꼼하게 검색해도 화영의 행동은 평범하게만 보였을 것이다. 화영은 그냥 공부하고 먹고 화장실에 가고 가끔 아이들이 말을 걸면 대답을 해주다가 시간이 되면 집에 갔다. 하교 시간이 되면 늘 하얀 차가 아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게 전부였다.

 

   변한 건 2학년 D반 아이들이었다.

 

   처음에 아이들은 그 변화가 화영에 대한 그들의 감정이라 여겼다. 그들 중 몇 명은 그 감정을 사랑이라 생각했다. 작은 선물들과 쪽지들이 화영의 책상 위에 배달되었고, 어설픈 농담과 다정한 말들이 주변을 맴돌다가 스러져 갔다. 다른 아이들에게 그 감정은 혼란이었다. 아이들은 왜 화영이 그렇게 신경이 쓰이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떤 아이들은 그 감정을 불쾌하다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그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늘 먹히는 ‘재수없다’라는 표현은 화영에게는 맞지 않았다. 아이들도 그건 알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아이들은 자신이 이전과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단지 그 방향은 제각각이었다. 어떤 아이들은 우울증을 앓았고, 어떤 아이들은 현기증과 이명에 시달렸다. 어떤 아이들은 운동에 몰두했고, 어떤 아이들은 학구파가 되었다. 창밖이나 복도에서 이상한 것을 보는 아이들이 늘어났고, 귀신 이야기가 유행했다.

 

   학교 안팎에서는 자잘한 사고들이 일어났다. 천둥번개와 함께 2학년 D반의 창문 하나가 깨졌다. 녹음된 내연기관 엔진 소음을 스피커로 틀면서 질주하던 모노 휠 족 한 명이 갑자기 운동장에 뛰어들어 담벼락을 박았고 그 사고로 세 명이 다쳤다. 정전이 잦아졌고, 수학 교사 한 명이 감전 사고를 당했다.

 

   이런 변화가 공식적이 된 것은 4차 정규 평가 시험이 있던 두 달 뒤의 일이었다. 2학년 D반의 성적이 예측 성적의 35퍼센트를 넘었던 것이다. 그리고 성적이 오른 건 모두 엉뚱한 학생들이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특별히 공부를 잘하지도 않고, 수업에 관심도 없었던 아이들. 오히려 우등생 두 명은 심각할 정도로 성적이 떨어져 있었다.

 

   교사들은 좋아하거나 신기해하는 대신 겁에 질렸다. 이런 상황의 답은 단 하나였다. 학급에 스피더가 도는 것이다. 그들은 당장 수상쩍은 아이들을 보건실로 불러 혈액검사를 했다. 양성반응을 보인 건 한 명뿐이었다. 나머지 아이들은 결백했다. 적어도 그래 보였다.

 

   그제야 교사들은 지난 두 달 동안 일어났던 일을 검토해 보았다. 그동안 아이들이 이상하게 행동하지 않았나? 사고가 수상할 정도로 잦지 않았나? 우리 역시 조금씩 이상하게 바뀌지 않았나? 언제부터 우리가 교장과 보건 선생이 불륜관계라는 걸 알고 있었지? 언제부터 내가 러시아어를 이렇게 많이 알았나? 어제 퇴근할 때 4층 교실 창문 밖에서 나를 노려보는 것 같던 긴 머리 여자 귀신은 설마 진짜였나?

 

   그러다 11월 셋째 주 월요일에 이반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이반을 발견한 사람은 지희였다. 어쩌다 보니 2학년 중 가장 먼저 학교에 도착한 지희는 자전거를 거치대에 고정하고 학교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던 중이었다. 거치대와 학교 건물을 잇는 콘크리트 길 중간에서 아이의 발이 무언가에 걸렸다. 발을 잡아당기자, 구두 버클에 걸린 누군가의 바지가 딸려 나왔고 그 바지는 축 늘어진 다리와 연결되어 있었다.

 

   지희는 비명을 질렀고, 학교는 즉시 그 소리에 반응했다. 경고 벨이 울렸고 숙직실의 교사들이 달려 나왔다. 머리 위에서는 탈칵탈칵 하는 소리가 났다. 지지대가 기역자로 꺾여 있는 카메라가 필사적으로 현장을 향해 목을 돌리려 하고 있었다.

 

   출동한 경찰은 동영상을 검사했지만 얻을 수 있는 건 없었다. 학교의 카메라 절반은 정전으로 꺼져 있었고 배터리로 움직이는 현장 주변의 카메라는 사망시간 추정 30분 전부터 갑자기 목이 꺾여 있었다. 이반이 학교에 들어가는 것이나 5층 옥상에서 떨어지는 것을 찍은 카메라는 한 대도 없었다.

 

   교사들은 겁에 질렸다. 이반이 죽었다는 것보다, 그 죽음이 전북교육청 빅브라더의 시야 밖에서 일어났다는 것이 더 무서웠다.

 

   경찰은 이반을 아는 아이들을 한 명씩 불러 이야기를 들었다. 대부분 쓸모없는 내용이었다. 경찰이 알고 싶어 하는 것들은 이미 교육청 컴퓨터가 자동 작성한 보고서에 다 나와 있었다.

 

   이반의 진짜 이름은 황영준이었다. 러시아계 혼혈이었고 미용사인 엄마와 함께 살고 있었다. 이반은 문제아였다. 학교에서 세 번의 큰 소동을 일으킨 뒤, 이반은 관심반에 들어갔고 행동조절 약물 치료를 받았다. 일주일에 한 번씩 아이는 보건실 카메라가 보는 앞에서 주사를 맞아야 했다. 그 뒤로 이반은 비교적 잠잠해졌지만, 그 세 번의 소동은 쉽게 잊히지 않았다.

 

   경찰은 그 세 번의 소동에 주목했고 관련된 아이들을 조사했다. 결과는 허탕이었다. 사망시각인 새벽 4시의 알리바이를 입증하는 건 힘든 일이었고, 무엇보다 이반이 자살했는지 살해당했는지 입증하는 것도 어려웠다. 자살은 이유가 없었고, 살해는 방법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희는 누가 범인인지, 어떻게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 알고 있었다. 왜 아무도 그걸 언급하지 않는지 그게 이상할 지경이었다. 2학년 D반에서 무슨 일이건 일어날 수 있다면, 이반을 그런 식의 죽음으로 몰고 간 건 2학년 D반 아이들 중 한 명일 수밖에 없었다. 이상한 논리지만 그게 사실이었다. 이반이 일으킨 세 번의 소동 중 두 개와 얽힌 사람이 단 한 명 있었다. 그 학생의 이름은 차연규였고, 2학년 D반이었고, 지희 뒷자리에 앉았다.

 

   지희는 쉬는 시간에 연규를 훔쳐보았다. 콩나물처럼 키가 크고 비쩍 마른 연규는 외톨이였다. 여덟 살에 당한 교통사고로 왼쪽 다리를 절어서 체육시간 면제였다. 아이는 이반과 같은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녔다. 지희는 연규가 그동안 이반에게 당한 모욕이나 고통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연규는 행동 제어 치료나 관심반 학습과 같은 건 충분한 처벌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지희는 평생을 따라다니며 자기를 괴롭힌 이웃집 아이에 대한 연규의 분노와 증오를 상상해 보았다, 만약 연규에게 이반을 처벌할 수 있는 능력이 갑자기 생겼다면? 그 힘의 우위가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면? 그 위치가 바뀌기 전에 당장이라도 이반을 옥상으로 끌고 올라가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으로 녀석의 목을 비틀고 죽어가는 소년의 눈을 바라보며…….

 

   지희는 작은 비명을 질렀다. 아이들은 무슨 일이냐는 듯 아이에게 시선을 돌렸지만, 국어가 들어오자 그 짧은 관심은 사라져버렸다.

 

   국어가 프롬프트 안경의 스크립트를 동기화하는 동안, 지희는 필사적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아까 경험한 것은 상상이 아니었다. 그건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다. 적어도 그것은 연규가 진실이라고 기억하는 것이었다. 지희는 잠시 연규의 머릿속에 들어갔다가 나왔던 것이다.

 

   나는 이제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

 

   지희에게 세상은 더 이상 이전까지 그 아이가 알고 있다고 믿었던 그 세상이 아니었다. 이제 지희는 주변 사람들이 느끼는 희미한 잡생각을 보고 듣고 냄새 맡을 수 있었다. 그 대부분은 안개처럼 하찮았고 무의미했지만, 그중 몇몇은 볼륨을 높인 라디오 음악처럼 선명했다. 그리고 국어의 목소리를 따라 흘러나오는 권태로움과 게으름, 미래에 대한 두서없는 공포를 덮는 것은 뒷좌석에 앉은 연규가 수업 내내 잘 익은 스테이크라도 되는 양 머릿속으로 씹어대는 살인의 기억이었다. 기억은 반복될수록 더 길어지고 잔인해졌다.

 

   지희는 관심을 화영에게로 돌렸다. 화영은 언제나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국어의 얼굴과 터치스크린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지희는 화영을 뚫어져라 노려봤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투명하지만 단단한 무언가가 화영의 정신을 둘러싸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이 무엇인지 지희는 곧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의지였다. 화영은 무심한 게 아니었다. 필사적으로 자신을 보호하며 무표정함을 위장하고 있었다. 학교에 있는 동안은 언제나.

 

   수업이 끝났다. 지희는 허겁지겁 물건들을 챙겨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영은 이미 복도로 나가 있었다. 복도에서 교문 앞까지는 겨우 200미터. 이미 그 하얀 차는 밖에서 화영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화영은 이제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150미터. 100미터. 그 애가 차에 오르기 전에 뭔가를 해야 해. 학교의 카메라나 마이크가 감지할 수 없는 무언가를.

 

   멈춰. 제발. 멈춰.

 

   지희는 외쳤다. 소리를 내지 않고 마음속으로.

 

   화영은 멈추어 섰다.

 

   나를 돌아봐. 제발.

 

   화영은 고개를 돌렸다.

 

 

 3.

 

   “화영이 친구니?”

 

   여자가 물었다.

 

   지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화영이 어머니시냐는 따위의 무의미한 질문은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가족 관계가 아니라는 건 마음을 읽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희 옆에는 너무 말라 철사 옷걸이처럼 보이는 소년이 앉아 있었다. 여자의 아들이었다. 끝에 콜라캔처럼 생긴 금속 원통이 붙은 투명한 산소마스크를 쓰고 있었고 바짝 깎은 머리 위로 듬성듬성 새 머리칼이 자라고 있었다. 지희가 차에 타자 소년은 호기심이 당긴 듯 잠시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차가 움직이자 멀미가 나는 듯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희는 차를 운전하는 여자와 조수석에 앉은 화영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라디오에서 랜덤으로 흘러나오는 뉴스를 건성으로 들었다. 바그다드 핵폭탄 희생자를 위한 위령제 소식, 은폐될 뻔했던 르완다 난민 학살사건, 벨기에 국왕 암살미수사건의 범인은 여전히 행방불명, 베이징에는 괴질이 돌았고, 우리나라에서는 대통령이 뇌물수수 혐의로 체포된 조카 때문에 사과 성명을 발표했고, 북한에서는 어제 있었던 평의회 선거 조작 의혹 때문에 시위대가 들고 일어났고…….

 

   지희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북한 이야기가 뉴스에 나오는 순간, 지금까지 흠 없는 완벽함을 과시하고 있던 화영의 방어막이 살짝 깨졌던 것이다. 넌 저기서 왔구나. 9년 전 폭탄이 터졌을 때, 넌 어디에 있었니.

 

   다가교를 건너 충경로를 따라 달리던 차는 전주대 근처의 오피스텔 건물 앞에서 멈추었다. 주차 장치에 올라간 차가 차고 안으로 들어가자, 네 사람은 2층으로 올라갔다. 아이는 곧장 창문 쪽에 붙은 침대 위로 달려가 눕더니 텔레비전을 켰다. 엄마는 침대 옆 협탁에서 약과 주사기를 꺼내 침대 위에 올려놓고는 안에서 접이식 문을 닫았다.

 

   “무슨 병이니?”

  

   지희가 물었다.

 

   “세틀러병. 지금은 많이 나았어.”

  

   “불치병이잖아. 네가 저 아이를 살리는 거니?”

 

   “정수는 정수 엄마가 살리지. 치유 능력이 있거든.”

 

   “그럼 너는?”

 

   “그냥 에너지만 대줄 뿐이야. 그게 내 능력이야.”

 

   “그게 전부야? 에너지를 대주는 것?”

 

   “응.”

 

   “연규가 이반을 죽일 때도 에너지만 대주었니?”

 

   “내가 어쩔 수 있는 건 아니야. 주고 싶은 사람들에게만 골라서 힘을 줄 수 있는 게 아니라고.”

 

   “그래도 사람이 죽었잖아. 연규는 앞으로 사람을 더 죽일지도 몰라. 재미가 붙었거든. 정말 그런다고 해도 누가 말리겠어.”

 

   “내가 떠나면 되지.”

 

   “그것으로 끝이야? 떠나는 것?”

 

   “그래. 그럼 그 애의 능력도 이전처럼 흐려져. 하지만 넌 정말 내가 떠나기를 바라니?”

 

   지희는 멈칫했다. 아이는 화영이 떠나기를 바라지 않았다. 막 생긴 능력을 다시 잃고 이전의 민지희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능력을 보존하고, 과시하고, 쓰고 싶었다. 그 능력을 통해 무언가가 되고 싶었다. 평범하고 평범한 민지희가 아닌 무언가가.

 

   “북한에서 왔니?”

 

   지희는 어색하게 말을 돌렸다.

 

   화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폭발을 봤니?”

 

   “응.”

 

   잠시 방어막이 열리고 화영의 기억이 흘러 들어왔다. 지희는 소름이 쫙 끼쳤다. 그것은 폭발을 보는 수준이 아니었다. 방사능 폭풍 안에서 온몸이 타들어가는 경험이었다. 1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이었지만, 지희는 숨이 막히고 온몸이 터져 나갈 것 같았다.

 

   “어떻게 살아남았어?”

 

   지희는 간신히 물었다.

 

   “어떤 간호사가 살려줬어. 치유능력이 있었거든. 민희, 그러니까 정수 엄마처럼. 그때부터 내 능력이 생긴 것 같아. 남에게 있는 능력에 힘을 대주는. 결국 그 간호사를 통해 나를 고친 셈이지. 지금은 괜찮아. 흉터 하나 없어. 어깨에 남았던 것도 정수 엄마가 고쳐 줬어.”

 

   “정수 엄마는 어떻게 만났는데?”

 

   “나를 몇 년째 찾고 있었거든. 정수 때문에.”

 

   “네가 그런 능력이 있다는 건 어떻게 알고?”

 

   “중국 국경을 넘을 때 어떤 목사 아저씨를 만났어. 방주 교회라고 알아?”

 

   “최명섭 목사에게 힘을 준 게 너였어?”

 

   “3년 동안. 그 아저씨는 치유자로서는 별 능력이 없었어. 대신 사람들을 잘 조종했어. 겉으로 보기엔 이거나 그거나 마찬가지였지만. 정수 엄마는 카이스트 교수였는데, 초심리학도 따로 연구했어. 정수가 아프기 시작한 뒤로는 더 집중적으로. 세틀러병은 현대의학으로는 고칠 수가 없었으니까. 그러다가 나를 알게 됐어. 그리고 하필이면 그때 목사 아저씨가 죽었거든. 심근경색으로. 내가 옆에 있었지만 별수 없었어. 말했잖아. 치유자로서는 별로였다고. 이제 정수도 많이 나았으니까 더 이상 같이 있을 필요도 없지. 정수 치료가 끝나고 남은 일을 마무리 지으면 해외로 갈 거야. 정수 엄마가 거기까지는 도와준다고 했어.”

 

   “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할 건데? 넌 어딜 가도 여기서처럼 일을 일으킬 거야. 다른 나라에도 나 같은 애들, 연규 같은 애들이 어디든지 있을 테니까. 힘을 억누르거나 제어하려고 시도는 안 해 봤니?”

 

   “왜 내가 안 했을 거라고 생각하니? 나라고 사기꾼 목사 공범자가 되고 싶어서 된 줄 아니? 난 사람 없는 곳으로 갈 거야. 아마존 밀림이나 툰드라 같은. 거기서 내 힘을 통제할 수 있을 때까지 나가지 않을 거야.”

 

   그건 거짓말이다, 지희는 생각했다. 방어막 때문에 정확한 생각을 읽을 수 없었지만, 지희는 화영의 선언이 거짓말이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화영 역시 연규나 지희만큼이나 자신의 힘을 사랑했다. 하지만 그 힘은 옆에 누군가가 있을 때나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사람 없는 곳에서 그런 힘을 관리하는 방법을 익히겠다고? 그건 허술하기 짝이 없는 거짓말이었다.

 

   “내가 도와줄게.”

 

   지희가 말했다.

 

   응?

 

   지희는 화영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희미하게나마 당황한 표정이 드러난 걸 보고 만족했다. 그녀는 소파에 앉아 있는 화영의 얼굴 위로 상체를 숙인 뒤, 또박또박 말했다.

 

   “네가 지금 무슨 꿍꿍이속인지 몰라도, 내가 도와주겠다니까.”

 

 

4.

 

   그 남자들이 경찰이 아니라는 건 마음을 읽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척 봐도 전주경찰청 사람들과 전혀 섞이지 않았고, 자기네들은 경찰 따위가 아니라는 티를 노골적으로 내고 있었다. 마음을 읽어 보니 그것은 의식적인 과시였다. 적어도 지금 학교 안으로 들어오는 남자들은 속전속결을 원했다. 구차하게 경찰인 척할 이유가 없었다.

 

   더 자세히 확인할 수도 있었지만, 지희는 조용히 안테나를 내렸다. 지희는 자신의 정체가 발각되길 바라지 않았다. 그들을 스캔하는 동안 최소한 한 명이 지희와 같은 능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 쪽도 지희의 감각을 느꼈는지, 반짝 하는 기분과 함께 감각신호가 끊겼다.

 

   올라간다.

 

   지희는 머릿속으로 속삭였다. 의미를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단어만 던졌다. 화영은 이런 식의 메시지 전달이 엿듣기 더 어렵다고 알려주었다.

 

   지희는 허겁지겁 자리에 앉았다. 남자 두 명이 담임과 함께 교실로 들어왔다. 그들 중 키가 작고 턱이 나온 남자가 교탁을 탁탁 두드리며 외쳤다. “서화영 학생?”

 

   어리둥절해진 아이들은 화영의 자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그들은 몇 초 전까지만 해도 당연히 화영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도 당연한 것이 지희는 지금까지 몇 초 간격으로, 자기 자리에 앉아 예습 중인 화영의 이미지를 아이들의 머릿속에 불어넣고 있었던 것이다. 전에 무의식적으로 서로의 마음을 도청해 시험 성적을 35퍼센트 올렸던 때처럼, 아이들은, 지희가 조작한 화영의 이미지를 집어 삼켰다.

 

   그리고 그 남자들은 그 이미지를 훔쳐 읽고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그들은 속은 걸 알아차렸지만, 당황하지 않았다. 대신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대고 서로와 연락을 취했다. 희미한 정보의 조각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어느 것도 온전하지 않았다. 도청을 걱정하는 건 지희뿐만이 아니었다.

 

   남자들은 교실을 떠났다. 담임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속으로 욕을 했다. 그러는 동안 자리를 뜬 것이 화영뿐만 아니라는 걸 눈치 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무언가 묵직한 것이 휙 미끄러졌다가 넘어지는 소리가 났다. 지희는 터치스크린에 시선을 박고 있었지만 2학년 A반 아이들의 눈을 통해 남자들 중 한 명이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넘어져 있는 꼴을 보았다. 신경질적인 웃음소리가 복도를 채웠다. 두 사람은 짜증을 냈고, 그 순간 정신이 흔들리며 여분의 정보가 흘러나왔다. 지희는 창문 너머에 세워진 두 대의 검은색 밴을 훔쳐보았다. 화영의 표적은 뒤의 것이었다.

 

   지희는 우쭐했다. 저 남자들은 6월부터 훈련을 해왔지만, 지희는 지난 나흘 동안 그들의 훈련 내용을 따라잡은 지 오래였다. 지희에게 그 나흘은 보통 나흘이 아니었다. 그동안 아이는 지금까지 9년 동안 화영을 거쳐간 수많은 감응자들이 자진 제공했던 직접 경험들을 흡수했다. 그중 가장 쓸모 있었던 것은 사기꾼 목사 최명섭의 것이었다. 화영을 거치면서 살짝 흐릿해지긴 했지만, 화영의 냉소적인 관점 때문에 오히려 당사자가 아는 것보다 더 선명해 보이는 부분도 있었다.

 

   다시 요란한 소리가 났다. 이번엔 저번처럼 은밀한 방해가 아니었다. 남자들 중 한 명이 2층 창문을 뚫고 운동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아까와는 달리 준비가 되어 있었는지, 남자는 어색하지만 안전한 자세로 착지했다. 몇몇 아이들이 영문도 모르는 채 박수를 쳤다. 밴에서 네 명의 남자들이 더 튀어나왔다. 그들은 손가락으로 옥상을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연규가 거기 있었다.

 

   지난 며칠 동안 지희와 화영은 연규를 끌어들이려고 노력해 왔다. 하지만 그들의 접근은 연규를 화나고 겁먹게 할 뿐이었다. 이반의 죽음 이후, 연규는 안전핀이 느슨해진 폭탄과 같았다. 조금만 더 건드렸다간 그들에게 무슨 짓을 저지를지도 몰랐다.

 

   차라리 그 불안한 상태를 이용하는 게 나았다.

 

   지희와 화영이 특별히 엄청난 계략을 짠 건 아니었다, 그냥 오늘 아침, 그 남자들이 온다고 알려주었을 뿐이다. 지희는 주말에 화영과 전주 시내를 싸돌아다니며 그들에 대해 알아냈다. 옛 성모병원 건물에 있는 비밀 아지트에서 5개월 동안 납세자들의 돈을 펑펑 써가며 훈련시킨 초능력자 부대. 그들이 왜 오는지, 누구를 노리고 오는지는 말해 주지 않았다. 지희가 연규에게 불어넣은 몇몇 이미지만으로 아이는 흥분했다.

 

   두 번째 남자도 창문을 뚫고 운동장으로 튕겨나갔다. 그는 동료만큼 운이 좋지 못했다. 제대로 일어나지 못하는 게 무릎을 심하게 다친 모양이었다. 엉금엉금 밴을 향해 기어가던 그는 갑자기 파이프가 울리는 듯한 이상한 소리를 내며 다시 고꾸라졌다. 이번에 그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연규가 그를 죽인 것이다.

 

   비명소리가 학급과 학급 사이를 물결처럼 통과했다. 그와 함께 학교 건물의 창문들이 깨지고 블라인드가 찢어지고 학교에 숨어 있던 귀신들이 튀어나왔다. 성적 때문에, 따돌림 때문에, 가족 문제 때문에 옥상에서 뛰어내리고 목을 매고 화학실습실의 독극물을 먹은 그 운 없는 아이들. 그들 중 몇 명은 오로지 학교 전설 속에서만 존재했을 뿐이었는데.

 

   5층에서 두 발의 총소리가 났다. 그에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학교는 저음의 요란한 고함을 질렀다. 건물 자체가 거대한 콘크리트 성대였다.

 

   책상 커버를 덮고 자리에서 일어난 지희는 이미 난장판이 된 복도를 가로질러 계단으로 내려갔다. 1층 현관에서는 화영이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들이 학교로 들어갈 때도 화영은 거기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지희가 만들어낸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그들은 눈앞에 있는 원본을 못 보고 지나쳤던 것이다.

 

   지희와 화영은 두 번째 밴으로 달려갔다. 옆문이 튕겨져 나가듯 열렸다. 남자 둘이 인형처럼 공허한 얼굴로 지희와 그들 사이의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순수한 염동력자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반드시 정신감응력자를 한 명 남겨 놓아야 한다는 걸 그들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하긴 그들에게 이것은 첫 번째 실전이었다. 경험 없는 이론이 대부분 그렇듯 그들의 작전은 구멍투성이였다.

 

   차 안에는 백설공주의 유리관처럼 생긴 상자가 고정되어 있었다. 안에는 화영을 닮았지만, 훨씬 작고 여려 보이는 소녀가 결박되어 있었다. 활짝 뜨여진 아이의 눈은 화영을 보자 기쁨과 흥분으로 반짝였다. 그 애는 화영의 동생이었다. 화영과 같이 폭발을 겪고 화영 옆에서 같은 능력을 개발했던. 5개월 전, 저 잘나 빠진 초능력 부대의 배터리로 이용하기 위해 정부에서는 그 아이를 납치했던 것이다. 화영은 3개월 동안 동생을 찾기 위해 정수 엄마와 함께 남한 땅을 떠돌았고, 동생의 위치를 확인하자, 지희의 학교에 들어왔다. 그들이 자기를 발견해 동생 있는 곳으로 데려가길 기다리며.

 

   화영이 상자 문을 열고 소녀를 꺼내는 동안, 지희의 명령을 받은 운전사는 밴의 시동을 걸었다. 차는 덜컹거리며 운동장을 빠져나왔다. 화영을 실으려 했던 첫 번째 밴은 여전히 운동장에 주차되어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까지 안심할 수는 없었다. 저쪽 운전사가 보고 있는 환영은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었다.

 

   “할렐루야!”

 

   지희가 외쳤다. 단 한 번도 기독교 신자인 적은 없었지만, 지금 지희가 사용하는 도구 대부분은 기독교 언어와 연결되어 있었다. 손잡이와 방아쇠 구실을 하는 찬송가 조각과 성서 인용구들이 지희의 뇌 이곳저곳에 박혀 있었다. 모두 고 최명섭 목사의 유산이었다.

 

   경고 신호가 들어왔다. 두 대의 경찰 모노 휠이 밴 양쪽에서 질주하고 있었다. 지희는 운전하지 않는 염동력자의 힘을 빌려 왼쪽 모노 휠의 자이로스코프를 끊어버렸고 오른쪽 경찰관이 들고 있는 스토퍼를 손에서 빼앗아 날려버렸다. 그래도 오른쪽 모노 휠은 계속 접근했고, 해결책은 역시 자이로스코프를 날리는 것이었다.

 

   다가교를 건널 무렵, 백미러에 첫 번째 밴이 들어왔다. 그들은 미사일형 스토퍼로 무장하고 있었다. 지희는 첫 번째 스토퍼를 튕겨냈지만, 점점 옆에 앉은 염동력자가 반항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밴에 있는 정신감응자가 끼어들고 있었다. 두 번째 스토퍼는 아슬아슬하게 차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지희는 화영과 함께 다짜고짜 뒷문을 열고 염동력자를 유리 상자에 태워 차 밖으로 던져버렸다. 첫 번째 밴은 방해물을 피해 커브를 틀었고 그와 동시에 발사된 세 번째 스토퍼는 옆을 지나가는 119번 노면 전차에 맞았다.

 

   중앙시장 옆을 지나칠 무렵, 지희는 운전사의 시각을 천천히 빼앗았다. 운전사는 안전장치를 당겼고 자동차는 인공지능의 도움으로 건물 옆에 정차했다. 운전사가 고함을 질러대며 날뛰는 동안, 화영과 화영의 동생은 차에서 뛰쳐나와 시장 안쪽으로 달려갔다. 맞은편에는 정수 엄마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희는 차 옆 벤치에 앉아, 행인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무시하며 마지막 힘을 모았다. 그 뒤 몇 분간은 환영의 잔치였다. 죽은 자들이 땅 속에서 기어 나왔고, 하늘에서는 비행접시와 익룡들이 날아다녔다. 버스만 한 크기의 핑크색 공룡이 대로를 점거하고 울부짖었고, 사방에서는 핏물 분수가 터져 나왔다.

 

   앞으로 한동안 이런 구경은 할 수 없겠지.

 

   지희는 생각했다.

 

 

5.

 

   “그년 때문에 몇 명이나 죽었는지 아니? 네 명이다. 그 목사, 혼혈아, 그 연규라는 녀석 그리고 우리 요원.”

 

   안경 쓴 남자가 호랑이처럼 으르렁거렸다. 안경의 프롬프트 라인이 꺼져 있는 것으로 보아 받아 적은 대사는 아닌 모양이었다.

 

   “너 때문에 병원에 실려 간 네 명은 어떻고. 모노 휠에서 튕겨나간 경찰관 한 명은 척추가 나갔어. 몇 년 전 같으면 반신불수로 평생을 보냈을 거다.”

 

   지희는 어깨를 으쓱했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제스처라는 건 알았지만 다른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묻겠다. 서화영은 지금 어디에 있지?”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그런 걸 그 애가 저에게 알려주었을 거라 생각하세요? 의심나면 부하분들 시켜서 저를 한번 읽어 보시면 어때요?”

 

   남자는 욕을 씹으면서 방을 나갔다. 방음 유리문 너머로 남자와 정신감응자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떠드는 게 보였다. 더 이상 그들의 마음을 읽을 수 없었지만 그 사람 역시 오래 전에 능력을 잃어버린 게 분명했다. 자매는 전주를 떠난 게 분명했다. 아니, 이미 이 나라를 떴는지도 모르지.

 

   남자는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아까와는 달리 조금 진정이 된 모양이었다. 그는 의자에 앉아 한동안 지희를 빤히 쳐다보다가 갑자기 물었다.

 

   “21세기에 핵폭탄이 몇 개 터졌는지 아니?"

 

   “다섯 개요."

 

   “맞아. 다섯 개다. 냉전시대 사람들은 소련과 미국의 핵전쟁 때문에 지구가 망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일은 안 일어났어. 핵폭탄은 냉전이 끝나고 나서야 터졌다. 왜? 이제 핵폭탄은 낙제한 대학원생도 멋대로 만들 수 있는 장난감이기 때문이야. 그것들이 이슬람 근본주의자들, 기독교 광신자들, 인종차별주의자들 기타 등등 미치광이들 손에 들어간 거다. 지금까지 핵폭탄을 터트린 자들 중 어딘가의 정부는 하나도 없었어. 아무리 정신 나간 정부도 그 정도로 정신이 나가지는 않는단 말이다.”

 

   “그럼 평양 핵폭탄은요? 그것도 정말 저번 정권과 아무런 관계가 없어요?”

 

   남자는 어이가 없다는 듯 신음소리를 냈다.

 

   “아마, 그 애는 널 잘 대해 줬겠지.”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너에게만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꼬셨을 거야. 하지만 네가 가지고 있는 건 대단한 능력이 아니야. 모든 사람이 그 정도 능력은 가지고 있어. 심지어 고양이나 개 같은 동물들에게도 그런 건 있어. 특별한 건 서화영 같은 아이들이고, 그 앤 널 이용한 거다. 요 며칠 사이에 죽어간 사람들과 너는 하나도 다른 게 없어. 아마 그 애들이 불쌍해 보였을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 아이들은 걸어 다니는 핵폭탄이나 다름없어. 우리가 연구하던 아이만 해도 지난 5개월 동안 힘이 25퍼센트가 자랐어. 얼마나 더 발전할지 아무도 몰라. 그런 아이들이 사회에 불만을 품은 불순분자 사이를 돌아다닌단 말이다. 당연히 국가기관이 나서서 막아야 해. 다시 한 번 묻겠다. 서화영은 어디 있지?”

 

   지희는 다시 어깨를 으쓱했다. 남자는 포기하고 다시 유리문을 열고 나갔다. 이번에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지희는 걱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지희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지희를 소년원이나 감옥에 넣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학교와 전주 시내에서 벌어진 일들은 더 이상 은폐할 수도 없었다. 전주 시민의 절반 이상이 지희의 마술쇼를 보았다. 게다가 정수 엄마는 아이가 낫는 즉시, 초능력자 부대에 대한 정보를 인터넷에 터트릴 예정이었다. 이제 사람들은 그들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아마 저 아저씨의 말이 맞을지도 몰라, 지희는 생각했다. 언젠가 저들 중 몇 명이 핵폭탄을 터트릴지도 모르지. 하지만 저들이 나선다고 과연 다가오는 종말을 막을 수 있을까. 오히려 앞당기고 말 것이다. 지희는 저들의 자신감과 희망이 유치해서 견딜 수 없었다.

 

   지희는 눈을 감았다. 이제 정신은 평온했고 깨끗했고 정상이었다. 더 이상 외부와 지희를 잇는 통로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로지 암흑과 희미한 소음만이 존재했다. 지희는 그 안에서 남은 힘을 최대한으로 짜내 임의의 한 점에 집중했다.

 

   뭔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창작 노트

 

   얼마 전 미쟝센 영화제에서 내가 좋아하는 배우 한예리의 특별전이 열렸다. 그때 내가 처음 보는 작품으로, 자신에게 초능력이 있다고 믿는 두 소녀의 이야기를 그린 이정행의 「물리수업」이라는 단편이 있었다. 영화를 보면서 난 결말에 대한 하나의 가설을 만들었는데, 그렇다고 영화가 정말 그런 식으로 끝날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지나치게 장르적이었으니까. 하지만 내 가설이 영화와 다르게 끝나면 나는 그 가설을 내 맘대로 이용할 기회를 얻는다. 공짜로 이야기가 하나 생기는 것이다. 그것이 꼭 새롭거나 신선할 필요는 없다. 그냥 편하게 자기 이야기를 펼칠 수 있을 정도만 되면 된다.

 

   이 이야기는 소위 ‘파일럿’이다. 앞으로 같은 설정을 이용한 단편이 최소한 세 편 이상 기다리고 있다. 아직 그 내용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계약상 늦어도 내년이 지나기 전에 이들을 묶어 책을 하나 내야 한다는 것은 안다. 이야기의 진정한 원동력은 창의력이 아니라 스트레스다. 살아남을 수 있도록 행운을 빌어 주시길.

 

 

   《문장웹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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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책쾌의 여정 우당탕탕 독립출판 북페어 기획자 도전기 임주아 뜻밖의 부재중 이름이 폰에 떠 있었다. 도서관에서 근무하는 S 팀장이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일로 만난 공무원이 퇴근 시간을 넘어 전화 문자 콤보로 연락했다는 건 모종의 긴급 상황 아닌가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딘가 다급해보이는 목소리였다. “헉 제가요?” 요지는 전주에서 처음 독립출판박람회를 여는데 내가 총괄 기획을 맡아줬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시기는 6~7월이라 했다. “오늘이 벌써 3월 7일인······” 기간도 기간이지만 독립출판 전문가도 아닌 내가 총대를 메는 게 맞는지 주제 파악에 나섰다. 그러자 팀장은 전주에서 책방을 운영하는 동료와 팀을 꾸리면 어떻겠냐며 인건비도 한번 생각해보라고 했다. 당황스러우면서도 눈에 광이 돌았다. 단기간에 아이디어를 짜고 사람 모으고 경주마처럼 내달리는 일은 내 주특기 아니던가. 그렇게 살아온 임시변통스러운 삶에 드디어 어떤 보상이 따르려나. 함께할 내 기쁜 동료는 누구인가. 기획자 동료 구하기 첫 타깃은 전주에서 10년 가까이 독립출판 전문책방을 운영중인 뚝심의 M이었다. 그의 책방 인스타그램 프로필에는 ‘기성으로 출간된 도서는 입고를 받지 않습니다’라는 문구가 단호하게 적혀 있다. 설사 혈육이 역사에 남을 명저를 썼다 하더라도 독립출판이 아니면 가차 없이 거절 메일을 전송하고야 말 꼿꼿함이었다. 그런 M의 책방에는 개인이 스스로 쓰고 만든 각양각색의 독립출판물이 대거 진열되어 있는데 그 큐레이션된 목록에는 웰메이드 작품인 ‘책방을 꾸리는 중입니다’라는 에세이도 있다. 화학공학과를 나온 공대생이 어쩌다 모교 대학로의 한 건물 지하에서 책방을 시작해 지금 모습에 이르게 됐다는 애환 서사가 담긴 책이다. 그는 그 책을 들고 전국을 쏘다니며 독자를 만났다. 주6일 책방 문을 여는 그가 문 닫는 날엔 어김없이 북페어 현장에 가 있었으니까. 캐리어를 끌고 고속버스를 타고 기꺼이 책 보부상으로 분해온 그는 힘들다 힘들다 해도 매년 매회 출전을 멈추지 않았다. 전주에서 오로지 독립출판만을 다루는 책방 주인은 M이 유일해서 대표성도 남다른 터다. 때문에 함께 하자는 내 제안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그의 눈높이도 짐작이 간다. 일찍이 S 팀장이 독립출판박람회 관련 자문을 구하고 싶다고 여러 번 M의 책방을 찾았으나 그는 ‘박람회’라는 명칭부터 맞지 않다고 생각해 소통에 소극적이었던 것이다. 특히 독립출판 행사는 스스로 책을 낸 제작자나 책방 운영자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해 열리는데 전주에선 도서‘관’ 주도로 만들어질 행사라 생각하니 최대한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럴수록 나는 M이 적극적으로 합류해 의견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잘되면 그가 책방 꾸리는 일에도 전환점이 올 거라

  • 관리자
  • 2024-05-01
도깨비 이야기

[에세이] 도깨비 이야기 한정현 최근 친구의 부탁으로 점집에 동행한 적이 있었다. 사실 무속에 대해선 알면 알수록 이건 민속 문화의 하나이지, 미래를 알려주는 예언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든다. 주변에서 무속 때문에 큰 피해를 본 경우도 있어서 나같은 경우는 사실 이제 거의 점괘를 안 믿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친구가 갓 신내림 받은 애동이라기에 나 또한 어디 구경이나 한 번 해보자 하는 생각에 따라가겠다고 했다. 문화로서의 무속은 여전히 관심거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옆에서 들어보니 그 영검하다던 무속인의 점사는 무척 일반적인 내용이었다. ‘어깨가 아프지 않느냐’ ‘밤에 늦게 자지 않느냐’ ‘두통이 가끔 오지 않느냐’ 오랜 시간 책상에 앉아 있는 친구의 직업상 대부분 추측 가능한 증상이었다. 게다가 친구는 불면증도 없고 두통도 없다는 거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순간 친구는 자신이 혹시 두통이 있는 걸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마치 도깨비에 홀린 것처럼 그 말에 순간 따라가고 있더란다. 하긴 나도 그 당사자가 되면 순간 나도 모르게 내가 그런 건 아닐까? 싶기도 할 것 같다. 말 그대로 이런 걸 보고 도깨비에 홀린다고 하나 보다. 다행히 친구는 도깨비에 홀려 도깨비가 되기 전에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이후 나는 왜인지 내내 도깨비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살면서 도깨비 만나기 사실 어렵지 않군, 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말이다. 사실 어릴 땐 도깨비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큰 산을 끼고 있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나고 자라다 보니 자연스레 온갖 민간 신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인 것 같다. 흔히 도깨비와 저승사자는 이길 수 없고 오로지 속일 수만 있다고들 한다. 그들이 그만큼 무서운 존재라는 것인데 특히 도깨비에 대해서는······. 얼마 전 영화 〈파묘〉에서도 나왔지만, 도깨비들은 주로 안 쓰는 물건에 혼이 깃들어 만들어지는 귀신이다. 이후엔 도깨비가 그 사물을 대신하여 그 자체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일반적인 혼령하고는 아주 다른 무시무시한 존재가 되어버린다고 한다. 한데 찾아보니 이 험상궂은 도깨비는 사실 일제강점기 이후 도입된 ‘일본식 도깨비’ 이야기가 일부 섞여 있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혹부리 영감이 그러한데, 우리가 알고 있는 혹부리 영감에서는 영감이 부러 도깨비를 속여 혹을 떼지만 이것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한다. 원래 한국 전래동화에서는 도깨비가 그리 나쁜 존재로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영감과 같이 어울려 놀던 도깨비들이 서로의 교감을 통해 친밀해진 후 먼저 나서서 영감의 혹을 떼준다는 이야기라고 한다. 생각해 보면 혼령이 물건에 깃들어 만들어진 것이 도깨비라고 한다면 무슨 혼령이냐에 따라 좋은 도깨비가 될 수도 있고 나쁜 도깨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이십 년 가까이 이고지고 다니

  • 관리자
  • 2024-05-01
어떤 기준

[에세이] 어떤 기준 전석순 “그래도 꽃은 잊지도 않고 제때제때 피네.” 예년보다 개화가 늦어지던 해였다. 어머니는 작년 봄 집 근처 공원에서 찍은 사진을 살펴보며 분명 이번 주쯤에는 피었어야 했다고 중얼거렸다. 이어서 괜히 달력을 들춰 보며 오늘 날짜를 확인했다. 사진 속 날짜와 일치했지만 어째선지 올해는 아직 봉오리조차 불거지지 않았다. 왠지 노크라도 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뭐 잊은 거 없냐고. 어디선가 계절을 알려주는 나무는 계절관측목이라고 부른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개나리, 진달래, 매화, 벚꽃 같은. 이 기준에 따르면 아직 봄이 오지 않은 셈이었다. 옆에서 발톱을 깎던 아버지는 아마 까먹은 거 같다고 말하며 히죽였다. 사람도 깜빡깜빡하는데 꽃이라고 다를 게 있겠냐면서. 심드렁하게 이어지는 목소리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슬쩍 흘겨봤다. 안 그래도 요새 외출하고 집에 들어올 때 수선 맡긴 바지를 찾아와야 한다거나 식초와 긴장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더러 잊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어머니는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닌 눈치였다. 몇 번쯤 길을 걷다가도 순간순간 또 뭔갈 잊고 지나쳐 버린 건 없는지 따져 보는 것 같았다. 한참 골몰하다가 겨우 친목회 회비 날짜를 기억해 낼 때도 있었다. 그때부터 사소한 거라도 핸드폰에 따로 메모를 해두고 수시로 빠뜨린 건 없는지 살펴봤다. 요가 교실 수업 신청 날짜나 관리비 납부 마감일과 함께 수리기사 방문 일정까지. 고개를 들다 어머니와 눈이 마주친 아버지는 돌아앉으며 우물댔다. “한 해쯤 그냥 지나가면 뭐 어때서.” 아버지의 생각과는 달리 뉴스에서는 연일 전국 봄꽃 개화 예상 일정을 내보내며 전문가까지 나와 늦어진 원인을 분석했다. 동네 사람들은 환경오염을 들먹이며 사나워진 날씨 탓에 종잡을 수 없는 계절 때문일 거라고 입을 모았다. 꽃도 계절을 헷갈리는 거라고. 개중에는 진짜 꽃이 피지도 않고 봄이 지나가는 게 아닐지 염려하는 이도 많았다. 어머니도 그중 하나였다. 나중에는 꽃을 향해 잊을 것 같으면 알람을 맞춰 두거나 메모하는 습관을 기르라고 조언해 줄 기세였다. 어머니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앞산을 내다보고 매일 지나다니던 화단과 공원을 천천히 돌아봤다. 더러 까치발까지 하고선 주변을 휘둘러보기도 했다. 혹시 진즉 만개한 꽃을 놓친 게 아닌가 싶은 듯했다. 처음에는 조금 서운한 기색이더니 나중에는 아예 울상이 되었다. 어느새 나도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꽃이 필 기미가 보이는지 기웃거렸다. 언뜻 봉오리라도 보이면 사진을 찍어 바로 보내드리려 했지만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바람까지 서늘하니 날짜와는 상관없이 정말 봄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이러다가 봄을 건너뛰고 곧바로 여름이 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즈음 제법 많은 양의 봄비가 내리더니 하루 사이에 기온이 크게 올랐다. 곧 지천으로 사방이 꽃이었다. 지난해 유난히 다닥다닥 모여 있

  • 관리자
  •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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