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담의 시작과 끝
- 작성일 2024-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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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괴담의 시작과 끝
현찬양
나는 중학교 졸업식에서 귀신을 본 적이 있다.
운동장에서 사백여 명에 달하는 아이들과 그 두 배쯤 되는 부모들이 조회를 하듯이 서서 식순을 진행하는 중이었다. 지루해서 우리 반 교실 창문을 보고 있었는데 뭔가 희끄무레한 것이 보였다. 처음엔 얼룩인 줄 알았는데 점차 뚜렷해지면서 교실 창문 너머로 얼굴 같은 것으로 변했다. 얼굴 모양의 흰 얼룩인지 흰 얼룩 모양의 얼굴인지 알 수 없었다.
우리 반 누가 아직 나오지 않았나, 싶었지만 얼굴이 너무 하얘서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눈은 움푹 들어가서 보이지 않고 얼굴의 윤곽은 뚜렷한데 몸이 잘 보이지는 않았다. 교복을 입은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키를 보면 우리 또래인가 싶기도 한데······. 그런데 내가 보고 있는 게 정말 맞아?
나는 옆에 애를 손으로 쿡 찔러서 “저거 보이냐?”라고 물었다. 아니라고 하면 약간 충격을 받을 것 같았다. 하지만 다행히 그 애 눈에도 그것이 보였다.
“으아 저게 뭐야.”
그 소리에 주변이 일순 소란해졌다. 학생들과 학부모 모두 그것을 보았다.
“뭐야, 저게.”
“누구 안 내려왔나 보네.”
같은 소리들로 시끄러워지자 단상 옆에 있던 담임선생님이 다가왔다. 대체 무슨 일이냐고. 아이들이 창문을 가리키자 담임은 우리 반 애들의 숫자를 세보고는 실장(우리 학교에선 반장을 그렇게 불렀다)더러 올라가 보라고 했다.
실장이 올라가서 귀신이 비치는 창문 너머에서 손을 엑스자로 그었다. 교실에는 아무도 없다는 뜻이었다. 실장은 다시 내려왔지만 여전히 귀신은 그곳에 있었다. 하얀 얼굴로 졸업하는 아이들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그제야 선생은 제법 당황했는지 실장에게 유리창을 닦아 보라고 했다.
“애들이 창문 너머로 분필 지우개를 터니까 그게 묻어서 그렇게 보이는 거야. 그러니까 창문을 닦으면 돼.”
그 말은 꽤 그럴싸하게 들렸다. 실장은 걸레를 가지고 가서 창문을 닦았다. 그래도 사람 얼굴은 사라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처음엔 술렁였지만 졸업식이 진행되자 점차 귀신에게서 눈길을 돌렸다. 햇빛이 반사된 것일 거라는 둥, 잘 닦이지 않는 얼룩일 거라는 둥, 하는 소리도 들렸다. 합리적인 듯 보이는 가설들이 몇 가지 나왔으나 식이 진행되고 있었으니 무엇도 검증할 수는 없었다.
선생님과 친한 몇몇 아이들이 “우리 교실에서 사람 자살한 적 있어요?” 하고 직설적으로 물어 보았지만 물론 선생님들은 대답하지 않았는데 아니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찡그린 얼굴로 자기들끼리 소곤거렸을 뿐이다.
학생회장이 연설하고 동창회장이 연설하고 교장 선생님, 교감 선생님, 학년 부장 선생님까지 한마디씩 하고 나자 몇 명이 표창장을 받았다. 꽃다발을 수여하면 사람들은 박수를 쳤다. 그러는 동안에도 귀신은 계속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생활한 교실에서 우리의 졸업식을 끝까지 보았다. 한 시간 넘도록 그는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졸업식은 무사히 끝났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다. 귀신이 나타났는데도 아무도 비명 지르지 않았고 약간 소란스러워졌을 뿐이다. 사진도 찍었고 헤어지는 친구들과 작별 인사도 했다. 여느 평범한 졸업식과 다르지 않았다. 말하자면 ‘아무 일도 없었다’.
그날의 기억이 무척 이상해서 몇 십 년이 지난 다음에도 동창들을 만나 ‘그날의 귀신’에 대해 물어 보면 다들 묘하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한다.
“아. 그러게.”
그걸로 끝이다. 더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아무 이야기할 거리가 없기 때문에.
심지어 기억하지 못하는 애들도 있다. 졸업식에 귀신이 나왔고 그것을 천 명 가까운 사람들이 보았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은 물론 기억도 하지 못하다니! 묘하게 평화로웠던 귀신 나오는 졸업식을 생각하면 여전히 이상한 기분이 든다. 뭔가 잘못되었는데 그것이 뭔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이것은 괴담이다. 괴담이란 기이하지만 시작도 끝도 없으며 순간 무서웠다가 금방 현실로 돌아올 수 있는 이야기다. 나는 공포스럽지 않은 그 괴담을 생각할 때마다 호러와 괴담이 다르다는 것을 실감한다.
『십이국기』 시리즈와 『귀담백경』 등 호러 소설로 유명한 작가 오노 후유미 역시 괴담과 호러를 구분해서 생각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괴담은 기분 나쁘고 정체가 분명치 않은 어떤 것’이다. ‘가슴이 울렁거리고 불편한 공포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단편적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아직 호러가 아니다. 호러가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가 더 필요하다.
나는 괴담을 기반으로 한 호러 소설인 『잠 못 드는 밤의 궁궐 기담』으로 데뷔했다. 그래서 무엇이 괴담이고 어디부터 호러가 되는가, 하는 것은 내게 꽤 오랫동안 큰 화두였다. 괴담만으로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그럼 무엇이 더 필요한가.
우선, 호러에는 귀신이 필요하다. 물론 호러의 세부 장르마다 약간 호칭은 다를 수도 있다. 그것은 악령일 수도 있고 좀비일 수도 있으며 외계에서 온 문어 괴물일 수도, 미친 과학자가 만들어낸 살아 있는 시체일 수도 있고 그저 나쁜 사람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귀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귀신에 의해 죽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괴이현상에 ‘진짜 피해자’가 나타나는 순간 이야기는 현실성을 입는다. 서사가 생기는 것이다.
이제 작가가 필요한 순간이다. 누구를 귀신으로 만들 것이며 누구를 죽이고 누구를 살릴 것인가. 조금 극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이것을 결정하면 호러 작가가 할 일의 절반 이상은 끝나는 셈이다. 이것이 바로 호러 플롯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무섭다는 것은 보편적인 감정처럼 보이지만 사실 무척 개인적이다. 어떤 사람은 개를 무서워하지만 누군가는 사랑한다. 어떤 사람은 고소공포를 가지고 있지만 누군가는 돈을 내고 번지점프를 한다. 그러나 공포는 또한 정치적이다. 무서운 일이 일어난 상황에서 누구를 ‘귀신’으로 지목하여 죽일 것인지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과거에는 망망대해에서 배가 태풍을 만나면 사람들은 임신한 여성을 가리키며 ‘저 여자가 악운을 몰고 왔다’고 말하며 빠뜨려 죽였다. 임신한 여성이 없을 때는 그냥 여자를 죽였고 여자조차 없으면 장애인을, 그리고 어린애들을 죽였다. 그들이 가장 약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약자에 불과했던 그들이 초인적인 힘을 입고 귀환한다면 사람들은 공포심을 느낄 것이다. 배에서 빠져 죽은 임산부가 도리어 뱃사람을 잡아 먹는 세이렌이 된다면, 손이 하나 없거나 발이 하나 없는, 더듬더듬 말하는 귀신들이 새벽에 찾아온다면 사람들은 틀림없이 무서워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공포심을 앞세워 귀환한 약자들을 ‘퇴치’할 수도 있다. 그렇게 쉽게 비겁해질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악령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 줄 수도 있다.
오컬트 영화로서 이례적으로 흥행한 <파묘>는 한국 사람 안에 내재되어 있지만 제대로 표출된 적이 없는 분노를 악령을 통해 명명한다. 그것은 군국주의의 망령이며 아직 처단된 적 없는 친일파에 대한 분노다.
식민지 당사자로서 우리는 아직도 일본에게 공식적으로 사과 받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한 이화림, 윤봉길, 김상덕, 고영근이라는 인물이 무덤에서 잊혀 가는 친일파를 파묘하여 저승으로 보내버린다. 이 영화의 서사는 공포를 기본으로 하여 해방감까지도 느끼게 하므로 호러 팬에 더하여 대중들에게도 사랑받을 수 있었다.
나는 “귀신보다 사람이 더 무섭다.”는 말을 싫어한다. 귀신에게 죽는 사람보다 사람에게 죽는 사람이 더 많은 것을 누가 모르겠는가. 하지만 “귀신보다 사람이 더 무섭다.”는 말은 호러의 쓰임에 대해 하나도 모르고 하는 소리다. 호러는 사람들이 모두 알지만 말하지 않는 사실에 대해 은유한다. 사람들 사이의 차별과 못난 부분과 사회의 어두운 면을 사정없이 끄집어내어 백일하에 두고는 정화시킨다.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이전과 달라지는 것이다.
내가 쓴 이야기 속 백희는 매일 밤 열리는 궁녀들의 괴담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높으신 분들이 볼 때는 쓸 데 없는 구설수나 만드는 모임이지만 오래 일하기 위해서 오히려 중요한 일입니다. 궁에 오래 있다 보면 아무리 의지가 강한 사람이라도 수이 웅덩이에 고인 물처럼 되기 때문에 그를 방지하는 것입니다.
고인 물이 썩는다는 말이 있듯이 변화 없는 생활을 지속하다 보면 권태와 무료라는 병에 걸리기 십상입니다. 그럴 때 가슴속에 깊이 묻어 두었던 이야기들을 꺼내 나누면 고인 물에 빗물이 흘러와 새 웅덩이가 되듯이 사람의 마음을 싱그럽게 만들어 주곤 합니다. 그것이 어떤 이야기이든 말입니다. 물론 이전에 들어 보지 못했던 기이한 이야기라면 더욱 좋겠지요. 이야기를 듣는 경험 하나만으로도 많은 것을 생각하고 되새기고 또한 상상하게 되어 조금은 삶이 견딜 만해집니다.
나는 호러가 우리 일상에 새 웅덩이를 만들어 준다고 생각한다. 호러란 그저 무섭고 기이한 상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악령의 이름을 불러 무찌르고 다시 평안을 찾는 과정에서 느끼는 카타르시스가 있다.
졸업식의 귀신에게 만약 이유가 있다면 그는 어떤 시작과 끝을 가지고 있을까. 그것은 한 시간 동안 졸업식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해갈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그날 이후로 졸업하지 못할 만한 이유를 가진 여러 학생들을 생각했다. 졸업식에 참가하는 것만으로도 해소될 수 있는 설움들은 어떤 것이 있을까. 만약 그 이유들이 내 마음에 뚜렷해진다면 그날의 괴담도 언젠가 호러가 되어 세상에 내보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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