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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기원이 우리의 전부를

  • 작성일 2025-05-01
  • 조회수 269

   우리의 기원이 우리의 전부를

   ― 조연호, 「저녁의 기원」, 《문장웹진》 2005년 08월호


신용목

시인/전 문장웹진 편집위원


   1.


   기원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이 도달할 수 없는 시작의 불가능한 기억으로 구성된 곳이라면 응당 과거의 한 지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을 가능하게 만드는 어떤 힘의 발원을 일컫는 것이라면, 기원이 꼭 과거로 달려가 맞이하는 마지막 도착점일 이유는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곳의 삶을 담보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지탱해 주는 것. 끝없이 현재를 보채는 것. 우리의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의 바깥을 어둠으로 채워 놓은 것. 달려가면 달려가는 만큼 따라오는 해와 달 같은 것. 말하자면 기원은 내 몸의 외피에 꼭 맞는 공기이거나 내 기억을 감싼 테두리, 낭떠러지 허공이거나 캄캄한 망각일지도 모르는, 그러나 그 경계의 여리고 연한 막으로 떨리며 우리를 있게 하는 것. 어쩌면 미래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모든 불안과 불편과 불쾌가 불시에 우리를 깨우며 우리에 대해 묻는 것.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달아나도 멀어질 수 없으므로. 아무리 발버둥 쳐도 놓여날 수 없으므로. 아무리 깊은 슬픔과 절망 뒤에 숨어도 뚜벅뚜벅 적막한 밤길을 걸어와 끝내 우리를 찾아내므로. 그러나 한 번도 우리의 시간이 아니었으므로. 우리는 영원히 기원으로부터 추방된 채 과거의 바깥이자 미래의 바깥에, 나를 존재하게 한 부모의 바깥에, 나를 키워 준 고향과 친구들과 학교의 바깥에 있다.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마침내 나는 나의 바깥에 있다는 감각. 떠돈다는 감각. 그것으로 우리의 현전을 지탱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는 진실에 속해 있지 않고 진리에 속해 있지 않으며 더더욱 사실과 제도와 규칙에 속해 있지 않다. 오히려 우리는 존재 자체로서 진실의 낙원으로부터 멀어지고 진리의 움직임으로부터 벗어나며 사실과 제도와 법률의 울타리 바깥에서 하루하루 말라 가는 굶주린 들짐승일지도 모른다. 머물지 못한다는 것. 나의 바깥에서 나를 찾아서 나의 주변을 서성이는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그 모든 것의 기원이자 그 모든 것으로서의 기원이 있다. 아무것도 없는, 아무것도 머물지 않는, 일어난 일이 일어나지 않은, 다시 시작하는 일이 결코 시작되지 않는, 아무도 자신이지 못하고 누구도 타자이지 못하며 사랑과 미움이 혼동되고 삶과 죽음이 엇갈리며 너와 내가 갈리지 않는, 가장 어둡고 깊고 위험하며 오로지 상실만이 무성한 곳. 상실로서만 확인되고 결정되며 상실을 통해서만 접근되는 곳. 우리를 영원히 상실한 자로 만드는 것. 우리를 매 순간 상실된 자로 만드는 것. 그래서 기원 앞에 설 때마다 우리는 상실의 증거가 될 수밖에 없다. 세계의 모든 질문을 안고 침몰한 곳에 기원이 있기 때문이다. 파문과 파도와 파장으로 기록되는 무늬. 무늬를 밀고 가는 저녁 공기와 그것을 완성하는 밤의 지문으로 가득한 곳. 그곳이 기원이기 때문이다.

   


   2.


   첫 시집 『죽음에 이르는 계절』(천년의시작, 2004)에서 자신의 어두운 밀실을 무덤 속에서 찾던 시인은 곧장 시간의 근원에 대해 묻기 시작한다. 죽음의 시간을 경유했던 시인은 이제 죽음조차도 어떤 기원의 이후로 돌리며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시간을 펼쳐놓는 것이다. 두 번째 시집의 표제작이자 연작의 하나인 「저녁의 기원」은, 그래서 시인의 궁극을 응결된 순간으로 바꿔 놓는 작품이라고 할 수도 있다.   


   옥상에서 바람을 만지던 시간, 모두 비슷한 맛의 눈물을 흘린 시간. 길고 맑은 살의 우산을 펴고 바람은 누나의 물 빠진 치마와 놀았다. 포플러가 그린 난곡의 악보 덕에 노래들은 하수처리장으로 떠가는 빨간 실지렁이들과 긴 여름을 함께 했다. 햇포도처럼 어젯밤이 무겁게 열리면 달은 자라던 것을 멈추고 다시 씨앗으로 돌아간다. 동생이 줄긋기 연습을 하던 시간, 팔뚝에 붉은 줄을 긋고 조용히 울던 시간. 내가 아는 모든 바람은 자기를 일으켜 세울 먼지 몇 줌을 쥐고 태어났었다. 난 단지 잡았던 끝을 어떻게 놓아야 할지 몰랐을 뿐이다. 

―조연호, 「저녁의 기원」, 《문장웹진》 2005년 08월호, 전문.


   잡히지 않는 바람을 만지며 비슷한 맛의 눈물을 공유한 세 남매가 등장하는 이 시는 유년의 ‘여름’에 대한 소묘로 시작된다. ‘옥상’, ‘길고 맑은 살의 우산을 편 바람’, ‘난곡의 악보를 그리는 포플러’ 등의 시어에 매달린 풍경은 ‘비슷한 맛의 눈물’, ‘누나의 물 빠진 치마’로 인해 즐겁고 유쾌하기보다는 ‘하수처리장으로 떠가는 빨간 실지렁이’처럼 쇠락하고 스산하고 음습한 분위기 속으로 우리를 몰고 간다. 쨍한 무료함과 이상한 무력감 속에 화자와 누나와 동생을 위치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팔뚝에 붉은 줄을 긋는 일’이자 ‘조용히 우는 일’이라고 쓴 ‘동생의 줄긋기 연습’은 마치 자발적 죽음을 연상하게 만들면서 더 비극적인 예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런 여름은 반복된다. 다시 말하지만 이 시는 어떤 ‘시간’에 대한 이야기이고 그 시간은 “햇포도처럼 어젯밤이 무겁게 열리면 달은 자라던 것을 멈추고 다시 씨앗으로 돌아”가는 시간이다. 어햇포도처럼 열린 어젯밤 때문에, 달은 자라지 못한다. 다시 씨앗으로 돌아가 어젯밤의 햇포도로 무겁게 자라는 일. 결국 이들의 놀이는 죽음을 연습하는 반복적 과정 혹은 죽음과 진배없는 시간을 살고 있는 어떤 기억의 원형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매일 돌아오는 ‘저녁’처럼 끝없이 반복되는 저 ‘시간’으로부터 벗어날 도리가 없어 보인다. 

   이들이 나눠 가진 ‘눈물’과 ‘울음’에는 소리가 없다. 절규가 없고 비명이 없다. 고요가 더 무섭고 깊다. 이미 절규가 지나간 다음이고 비명이 지나간 다음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아니 절규와 비명조차도 불가능한 어떤 상태라고 해야 할까. 이미 굳어 버린 시간의 결정성이 간직한 고요처럼. 그러나 이 시는 돌봄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비극적인 유희만을 보여 주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 대목에서 ‘먼지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바람’과 ‘끝을 잡고 있는 화자’는 그 모호함 때문에 편하게 읽히지 않는다. 어떤 모호함은 그 순간에 명멸하는 실재를 제대로 옮길 재능의 부족 때문이지만 대개의 모호함은 그 순간이 어긋난 이미지를 통해서만 말해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시어들이 잠시 묶어 놓은 이미지에 기댈 수밖에 없다. 

   ‘먼지가 인다’는 말 못지않게 ‘먼지가 된다’는 말도 관용적이다. 다시 말해, 먼지는 바람을 일으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모든 것이 마지막으로 투사되는 사물이기도 하다. 그렇게 읽는다면 우리는 이미 그 마지막을 알고 있는 자가 역설적으로 자신의 시간을 살아 내는 과정에 대한 비의에 다가갈 수 있다. 더불어 모든 술어가 과거형이라는 점에서, 바람이 일으키는 먼지의 순간이 자신들이 공유한 운명이자 자신들의 기원이라는 것을, 현재의 화자는 알고 있을 것이라는 추정 또한 가능하다. 매일 찾아오는 회한과 슬픔과 쓸쓸함과 서글픔의 저녁을 가득 메운 바로 그 기원 말이다. 


   붉은 군조(群鳥)의 물가로 갔지만 비점(沸點)이 없는 바다였다. 자기 방이 있는 큰 집을 모래 위에 그려보고 아이들의 영혼은 그 집의 흉한 창이 파도에 지워지길 기다린다. 울지 마, 니들은 공평하게 이름을 나눠 가졌고 생일 달력 위엔 천박한 평등. 아이들은 자랐고 문간에 서서 사라진 사물들에게 냉정하게 하나씩 이름 붙였다.


   같은 제목으로 쓰여져 『저녁의 기원』(램덤하우스, 2007)에 수록된 위 시에서도 아이들은 ‘사라진 사물들에게 하나씩 이름’을 붙이며 ‘공평’하게 자란다. 여기서 사라지는 것은 어쩌면 자라는 일과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그린 집의 흉한 창을 지워내는 일을 모래 위에서 반복하는 일은, 마치 붉게 날아오를 것 같지 끓지 않는 바다처럼 같은 시간 안에 갇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조연호에게 기원은 ‘사건의 자리’라기보다는 ‘마음의 자리’이며 더 가까이는 ‘감각의 자리’일 것이다. 있지만 있지 않으며 사라졌지만 사라지지 않은, 기어이 여기까지 긴 그림자를 뻗치고 있는 시간의 감각. 그 시간은 관계를 허용하지 않는 관계에 접근하는 유일한 통로로 열려 있을지 모른다. 그곳에는 진실도 없고 진리도 없으며 어떤 사실과 제도와 규칙도 없다. 다만 영원을 가진 순간과 순간을 가진 영원이 있을 뿐이다. 우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과거나 미래가 아니라 과거와 미래를 여는 감각이며, 그것이 언제나 현재에 앞서는 그리고 언제나 현재 앞에 주어진 기원이면서, 아주 지독하게 오래된 저녁 속으로 우리를 몰고 가는 상실 자체인 것이다. 



   3. 


   이제 우리가 이 시를 처음 읽었던 시기를 이야기할 차례이다. 시의 의미를 언어의 논리로 완성하는 유비적인 방법론으로부터 최대한 멀어진 자리에서, 시의 의미를 언어의 감각으로 드러내는 방식을 선택한 시인들이 이십여 년 전 대거 등장하였다. 여러 차별적인 호명과 무관하게 이들은 정련된 의미를 산출하는 일로부터 스스로를 차단하고 정련된 의미를 뒤흔드는 일에 자신의 역량을 외따로 집중하였다. 즉 사회와 시대의 의미 체계가 딛고 있는 상투성에 균열을 가함으로써 저 심층에 갇혀 있는 미지의 빛을 확인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는 현실을 직접적으로 겨냥하는 전통적 방법론의 시대적 한계를 체험하고 시의 부정성을 언어적 과정을 통해 구현하고자 한 사례였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그들은 사회의 모순과 대결하되 사회와 무관한 자리에서 싸우며, 새로운 세계를 염원하되 그것을 규정하지 않는 방식으로 바란다. 그 가운데 조연호가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의 시는 언어를 가장 순수한 차원으로 돌려놓음으로써 나타나는 효과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래서 그의 시에서 단어와 문장의 의미는 음운 형상 속에서 잠시 그 실마리를 드러내고는 이내 멀어진다. “하나의 영혼이 둘 이상의 신체로 덮여가는 날에/격이 낮은 언니의 밤에/접혀 있는 발이 아코디언처럼 소리를 펼치고 있는 건/밤이 인간의 청동빛 위를 걷고 있기 때문이다”(「아르카디아의 광견」, 『천문』)라는 표현에서 우리는 하나의 영혼을 나눠 쓰며 불우한 걸음을 운명처럼 지고 가는 공동체에 대해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의 표현대로 “우주가 음사된 우리들의 세계”(같은 시)는 사회적 질문과 정치적 효과를 벗어난 자리에서 다만, 언어의 기표와 기의의 틈을 최대한 벌려 거기 드나드는 순간적인 의미들로 하여금 낯선 세계의 예감을 실어 나르게 만든다. 

   다시 말해, 그의 시에서 언표화된 모든 것은 서로의 연관된 것을 연관되지 않은 것으로 돌려놓고 무관한 것을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돌려놓으며 이어질 것을 끊고 끓어질 것을 잇는다. 그로써 사물은 물론 사유와 감각까지 모두 자기의 위치를 고수한다. 세계는 좀처럼 주체의 권위에 포섭되지 않고 원근법의 시선으로 통일되지 않는데, 어쩌면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침범한 ‘천문’의 시간이자 자신을 물고 놓지 않는 특별한 ‘환상’이거나 ‘환각’ 쪽에 더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앞뒤가 없고 아래위가 없다. 오직 자신이 던져진 세계의 진상이 무엇인지 폭로하고 있는 듯한 병렬적 이미지의 불연속체는 그 자체로 현실의 폭력성에 의해 소외되고 배제되고 상처 입은 존재 자체인 셈이다. 오직 상처와 상실을 통해서만 작동하는 부재에 대한 감각. 오직 방기와 부패와 망각을 통해서만 일어서는 감각. 죽음에게 이름을 주는 감각. 시체를 깨우는 감각. 텅 빈 바람의 감각이자 놓쳐 버린 끝에 대한 감각. 그것을 통해서만 모습을 드러내는 저 ‘기원’은 어쩌면 가장 튼튼하게 현재의 우리를 포획하게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를 우리이게 하는지도 모른다. 많은 이들이 사회와 정치를 외부를 향한 태도에 찾고 있지만, 나는 자신을 향한 멈추지 않는 이 질문이 정치적 의지가 아니라고 말할 자신이 없다. 



   4.


   최근에 와서 문학장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그지만 가끔 시를 통해 여전히 자신만의 세계를 우리에 전한다. 그때마다 나는 우리가 잃어버렸던, 그러나 우리를 에워싸고 놓지 않는 저 불가피한 세계를 또 한 겹 껴입곤 한다. 덕분에 봄에는 봄에 맞는 내가 살고 여름에는 여름에 적당한 내가 있다. 무엇보다도 겨울을 지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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