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기원이 우리의 전부를
- 작성일 2025-05-01
- 댓글수 0
[커버스토리 리와인드] 문장웹진 20주년을 맞아, 역대 편집위원들이 직접 고른 인상적인 문장웹진 작품들을 다시 꺼내 소개합니다. 당시의 문학적 의미와 오늘의 감상을 함께 나누며 문장웹진이 쌓아온 기록을 다시 읽고 새롭게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
우리의 기원이 우리의 전부를
― 조연호, 「저녁의 기원」, 《문장웹진》 2005년 08월호
신용목(시인, 前 문장웹진 편집위원)
1.
기원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이 도달할 수 없는 시작의 불가능한 기억으로 구성된 곳이라면 응당 과거의 한 지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을 가능하게 만드는 어떤 힘의 발원을 일컫는 것이라면, 기원이 꼭 과거로 달려가 맞이하는 마지막 도착점일 이유는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곳의 삶을 담보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지탱해 주는 것. 끝없이 현재를 보채는 것. 우리의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의 바깥을 어둠으로 채워 놓은 것. 달려가면 달려가는 만큼 따라오는 해와 달 같은 것. 말하자면 기원은 내 몸의 외피에 꼭 맞는 공기이거나 내 기억을 감싼 테두리, 낭떠러지 허공이거나 캄캄한 망각일지도 모르는, 그러나 그 경계의 여리고 연한 막으로 떨리며 우리를 있게 하는 것. 어쩌면 미래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모든 불안과 불편과 불쾌가 불시에 우리를 깨우며 우리에 대해 묻는 것.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달아나도 멀어질 수 없으므로. 아무리 발버둥 쳐도 놓여날 수 없으므로. 아무리 깊은 슬픔과 절망 뒤에 숨어도 뚜벅뚜벅 적막한 밤길을 걸어와 끝내 우리를 찾아내므로. 그러나 한 번도 우리의 시간이 아니었으므로. 우리는 영원히 기원으로부터 추방된 채 과거의 바깥이자 미래의 바깥에, 나를 존재하게 한 부모의 바깥에, 나를 키워 준 고향과 친구들과 학교의 바깥에 있다.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마침내 나는 나의 바깥에 있다는 감각. 떠돈다는 감각. 그것으로 우리의 현전을 지탱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는 진실에 속해 있지 않고 진리에 속해 있지 않으며 더더욱 사실과 제도와 규칙에 속해 있지 않다. 오히려 우리는 존재 자체로서 진실의 낙원으로부터 멀어지고 진리의 움직임으로부터 벗어나며 사실과 제도와 법률의 울타리 바깥에서 하루하루 말라 가는 굶주린 들짐승일지도 모른다. 머물지 못한다는 것. 나의 바깥에서 나를 찾아서 나의 주변을 서성이는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그 모든 것의 기원이자 그 모든 것으로서의 기원이 있다. 아무것도 없는, 아무것도 머물지 않는, 일어난 일이 일어나지 않은, 다시 시작하는 일이 결코 시작되지 않는, 아무도 자신이지 못하고 누구도 타자이지 못하며 사랑과 미움이 혼동되고 삶과 죽음이 엇갈리며 너와 내가 갈리지 않는, 가장 어둡고 깊고 위험하며 오로지 상실만이 무성한 곳. 상실로서만 확인되고 결정되며 상실을 통해서만 접근되는 곳. 우리를 영원히 상실한 자로 만드는 것. 우리를 매 순간 상실된 자로 만드는 것. 그래서 기원 앞에 설 때마다 우리는 상실의 증거가 될 수밖에 없다. 세계의 모든 질문을 안고 침몰한 곳에 기원이 있기 때문이다. 파문과 파도와 파장으로 기록되는 무늬. 무늬를 밀고 가는 저녁 공기와 그것을 완성하는 밤의 지문으로 가득한 곳. 그곳이 기원이기 때문이다.
2.
첫 시집 『죽음에 이르는 계절』(천년의시작, 2004)에서 자신의 어두운 밀실을 무덤 속에서 찾던 시인은 곧장 시간의 근원에 대해 묻기 시작한다. 죽음의 시간을 경유했던 시인은 이제 죽음조차도 어떤 기원의 이후로 돌리며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시간을 펼쳐놓는 것이다. 두 번째 시집의 표제작이자 연작의 하나인 「저녁의 기원」은, 그래서 시인의 궁극을 응결된 순간으로 바꿔 놓는 작품이라고 할 수도 있다.
옥상에서 바람을 만지던 시간, 모두 비슷한 맛의 눈물을 흘린 시간. 길고 맑은 살의 우산을 펴고 바람은 누나의 물 빠진 치마와 놀았다. 포플러가 그린 난곡의 악보 덕에 노래들은 하수처리장으로 떠가는 빨간 실지렁이들과 긴 여름을 함께 했다. 햇포도처럼 어젯밤이 무겁게 열리면 달은 자라던 것을 멈추고 다시 씨앗으로 돌아간다. 동생이 줄긋기 연습을 하던 시간, 팔뚝에 붉은 줄을 긋고 조용히 울던 시간. 내가 아는 모든 바람은 자기를 일으켜 세울 먼지 몇 줌을 쥐고 태어났었다. 난 단지 잡았던 끝을 어떻게 놓아야 할지 몰랐을 뿐이다.
―조연호, 「저녁의 기원」, 《문장웹진》 2005년 08월호, 전문.
잡히지 않는 바람을 만지며 비슷한 맛의 눈물을 공유한 세 남매가 등장하는 이 시는 유년의 ‘여름’에 대한 소묘로 시작된다. ‘옥상’, ‘길고 맑은 살의 우산을 편 바람’, ‘난곡의 악보를 그리는 포플러’ 등의 시어에 매달린 풍경은 ‘비슷한 맛의 눈물’, ‘누나의 물 빠진 치마’로 인해 즐겁고 유쾌하기보다는 ‘하수처리장으로 떠가는 빨간 실지렁이’처럼 쇠락하고 스산하고 음습한 분위기 속으로 우리를 몰고 간다. 쨍한 무료함과 이상한 무력감 속에 화자와 누나와 동생을 위치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팔뚝에 붉은 줄을 긋는 일’이자 ‘조용히 우는 일’이라고 쓴 ‘동생의 줄긋기 연습’은 마치 자발적 죽음을 연상하게 만들면서 더 비극적인 예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런 여름은 반복된다. 다시 말하지만 이 시는 어떤 ‘시간’에 대한 이야기이고 그 시간은 “햇포도처럼 어젯밤이 무겁게 열리면 달은 자라던 것을 멈추고 다시 씨앗으로 돌아”가는 시간이다. 어햇포도처럼 열린 어젯밤 때문에, 달은 자라지 못한다. 다시 씨앗으로 돌아가 어젯밤의 햇포도로 무겁게 자라는 일. 결국 이들의 놀이는 죽음을 연습하는 반복적 과정 혹은 죽음과 진배없는 시간을 살고 있는 어떤 기억의 원형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매일 돌아오는 ‘저녁’처럼 끝없이 반복되는 저 ‘시간’으로부터 벗어날 도리가 없어 보인다.
이들이 나눠 가진 ‘눈물’과 ‘울음’에는 소리가 없다. 절규가 없고 비명이 없다. 고요가 더 무섭고 깊다. 이미 절규가 지나간 다음이고 비명이 지나간 다음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아니 절규와 비명조차도 불가능한 어떤 상태라고 해야 할까. 이미 굳어 버린 시간의 결정성이 간직한 고요처럼. 그러나 이 시는 돌봄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비극적인 유희만을 보여 주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 대목에서 ‘먼지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바람’과 ‘끝을 잡고 있는 화자’는 그 모호함 때문에 편하게 읽히지 않는다. 어떤 모호함은 그 순간에 명멸하는 실재를 제대로 옮길 재능의 부족 때문이지만 대개의 모호함은 그 순간이 어긋난 이미지를 통해서만 말해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시어들이 잠시 묶어 놓은 이미지에 기댈 수밖에 없다.
‘먼지가 인다’는 말 못지않게 ‘먼지가 된다’는 말도 관용적이다. 다시 말해, 먼지는 바람을 일으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모든 것이 마지막으로 투사되는 사물이기도 하다. 그렇게 읽는다면 우리는 이미 그 마지막을 알고 있는 자가 역설적으로 자신의 시간을 살아 내는 과정에 대한 비의에 다가갈 수 있다. 더불어 모든 술어가 과거형이라는 점에서, 바람이 일으키는 먼지의 순간이 자신들이 공유한 운명이자 자신들의 기원이라는 것을, 현재의 화자는 알고 있을 것이라는 추정 또한 가능하다. 매일 찾아오는 회한과 슬픔과 쓸쓸함과 서글픔의 저녁을 가득 메운 바로 그 기원 말이다.
붉은 군조(群鳥)의 물가로 갔지만 비점(沸點)이 없는 바다였다. 자기 방이 있는 큰 집을 모래 위에 그려보고 아이들의 영혼은 그 집의 흉한 창이 파도에 지워지길 기다린다. 울지 마, 니들은 공평하게 이름을 나눠 가졌고 생일 달력 위엔 천박한 평등. 아이들은 자랐고 문간에 서서 사라진 사물들에게 냉정하게 하나씩 이름 붙였다.
같은 제목으로 쓰여져 『저녁의 기원』(램덤하우스, 2007)에 수록된 위 시에서도 아이들은 ‘사라진 사물들에게 하나씩 이름’을 붙이며 ‘공평’하게 자란다. 여기서 사라지는 것은 어쩌면 자라는 일과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그린 집의 흉한 창을 지워내는 일을 모래 위에서 반복하는 일은, 마치 붉게 날아오를 것 같지 끓지 않는 바다처럼 같은 시간 안에 갇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조연호에게 기원은 ‘사건의 자리’라기보다는 ‘마음의 자리’이며 더 가까이는 ‘감각의 자리’일 것이다. 있지만 있지 않으며 사라졌지만 사라지지 않은, 기어이 여기까지 긴 그림자를 뻗치고 있는 시간의 감각. 그 시간은 관계를 허용하지 않는 관계에 접근하는 유일한 통로로 열려 있을지 모른다. 그곳에는 진실도 없고 진리도 없으며 어떤 사실과 제도와 규칙도 없다. 다만 영원을 가진 순간과 순간을 가진 영원이 있을 뿐이다. 우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과거나 미래가 아니라 과거와 미래를 여는 감각이며, 그것이 언제나 현재에 앞서는 그리고 언제나 현재 앞에 주어진 기원이면서, 아주 지독하게 오래된 저녁 속으로 우리를 몰고 가는 상실 자체인 것이다.
3.
이제 우리가 이 시를 처음 읽었던 시기를 이야기할 차례이다. 시의 의미를 언어의 논리로 완성하는 유비적인 방법론으로부터 최대한 멀어진 자리에서, 시의 의미를 언어의 감각으로 드러내는 방식을 선택한 시인들이 이십여 년 전 대거 등장하였다. 여러 차별적인 호명과 무관하게 이들은 정련된 의미를 산출하는 일로부터 스스로를 차단하고 정련된 의미를 뒤흔드는 일에 자신의 역량을 외따로 집중하였다. 즉 사회와 시대의 의미 체계가 딛고 있는 상투성에 균열을 가함으로써 저 심층에 갇혀 있는 미지의 빛을 확인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는 현실을 직접적으로 겨냥하는 전통적 방법론의 시대적 한계를 체험하고 시의 부정성을 언어적 과정을 통해 구현하고자 한 사례였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그들은 사회의 모순과 대결하되 사회와 무관한 자리에서 싸우며, 새로운 세계를 염원하되 그것을 규정하지 않는 방식으로 바란다. 그 가운데 조연호가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의 시는 언어를 가장 순수한 차원으로 돌려놓음으로써 나타나는 효과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래서 그의 시에서 단어와 문장의 의미는 음운 형상 속에서 잠시 그 실마리를 드러내고는 이내 멀어진다. “하나의 영혼이 둘 이상의 신체로 덮여가는 날에/격이 낮은 언니의 밤에/접혀 있는 발이 아코디언처럼 소리를 펼치고 있는 건/밤이 인간의 청동빛 위를 걷고 있기 때문이다”(「아르카디아의 광견」, 『천문』)라는 표현에서 우리는 하나의 영혼을 나눠 쓰며 불우한 걸음을 운명처럼 지고 가는 공동체에 대해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의 표현대로 “우주가 음사된 우리들의 세계”(같은 시)는 사회적 질문과 정치적 효과를 벗어난 자리에서 다만, 언어의 기표와 기의의 틈을 최대한 벌려 거기 드나드는 순간적인 의미들로 하여금 낯선 세계의 예감을 실어 나르게 만든다.
다시 말해, 그의 시에서 언표화된 모든 것은 서로의 연관된 것을 연관되지 않은 것으로 돌려놓고 무관한 것을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돌려놓으며 이어질 것을 끊고 끓어질 것을 잇는다. 그로써 사물은 물론 사유와 감각까지 모두 자기의 위치를 고수한다. 세계는 좀처럼 주체의 권위에 포섭되지 않고 원근법의 시선으로 통일되지 않는데, 어쩌면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침범한 ‘천문’의 시간이자 자신을 물고 놓지 않는 특별한 ‘환상’이거나 ‘환각’ 쪽에 더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앞뒤가 없고 아래위가 없다. 오직 자신이 던져진 세계의 진상이 무엇인지 폭로하고 있는 듯한 병렬적 이미지의 불연속체는 그 자체로 현실의 폭력성에 의해 소외되고 배제되고 상처 입은 존재 자체인 셈이다. 오직 상처와 상실을 통해서만 작동하는 부재에 대한 감각. 오직 방기와 부패와 망각을 통해서만 일어서는 감각. 죽음에게 이름을 주는 감각. 시체를 깨우는 감각. 텅 빈 바람의 감각이자 놓쳐 버린 끝에 대한 감각. 그것을 통해서만 모습을 드러내는 저 ‘기원’은 어쩌면 가장 튼튼하게 현재의 우리를 포획하게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를 우리이게 하는지도 모른다. 많은 이들이 사회와 정치를 외부를 향한 태도에 찾고 있지만, 나는 자신을 향한 멈추지 않는 이 질문이 정치적 의지가 아니라고 말할 자신이 없다.
4.
최근에 와서 문학장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그지만 가끔 시를 통해 여전히 자신만의 세계를 우리에 전한다. 그때마다 나는 우리가 잃어버렸던, 그러나 우리를 에워싸고 놓지 않는 저 불가피한 세계를 또 한 겹 껴입곤 한다. 덕분에 봄에는 봄에 맞는 내가 살고 여름에는 여름에 적당한 내가 있다. 무엇보다도 겨울을 지날 수 있다.
추천 콘텐츠
[커버스토리 리와인드] 문장웹진 20주년을 맞아, 역대 편집위원들이 직접 고른 인상적인 문장웹진 작품들을 다시 꺼내 소개합니다. 당시의 문학적 의미와 오늘의 감상을 함께 나누며 문장웹진이 쌓아온 기록을 다시 읽고 새롭게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응원의 방식 -염승숙, 「지도에 없는」 (《문장웹진》2007년 4월호) 조경란(소설가, 前 문장웹진 편집위원) 좋은 소설에 대한 사적인 기준 단편소설 「지도에 없는」을 지금까지 세 번 읽었다. 처음엔 2007년 4월에 《문장웹진》에 수록되었을 때, 두 번째는 이듬해 염승숙이라는 젊은 작가의 첫 소설집 『채플린, 채플린』에서, 그리고 세 번째는 이 글을 쓰려고 준비하면서. 앞에 두 번을 읽었을 때는 나도 아직 중견작가라고는 불리지 않을 시기였고, ‘소설’에 대해서 지금보다는 잘 알지 못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 시절이 주변을 둘러볼 새 없이 바삐 뛰면서 소설을 쓰던 시기라면 지금은 느리게 걸으며 소설을 쓰는 시간보다 소설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고 표현하면 되려나. 어느 면으로 소설에 대한 나의 견해나 취향, 좋은 소설에 대한 기준이 약간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런 눈으로 「지도에 없는」을 세 번째로, 거의 처음 읽는 소설처럼 읽었다. 솔직히 말해서 어쩌면 나는 예전에는 이 단편을 나의 취향이 아니라고 쉽게 여겨 버렸을지 모른다. 이야기나 인물보다는 여러 가지 소설적 요소의 완결성과 미학적인 면에 더 집착하기도 했던 시기였으므로. 소설이 어떤 메스(mess), 즉 그것이 크기와 상관없이 ‘엉망인’ ‘헝클어진’ 상황에 인물이 놓이고 거기서 출발한다고는 여전히 여긴다. 그 메스가 작으면 작은 대로 조용히 파동하는 미니멀리즘 이야기에 가까우며 메스의 크기가 크면 큰 소동, 리얼리즘에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최근에 하게 되었다. 말했지만, 지금의 나는 작가로서 소설을 쓰는 시간보다는 소설이란 무엇일까? 소설이란 어때야 할까? 좋은 소설이란 무엇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몰두하면서 더 긴 시간을 보내는 편이라 떠오르는 대로 이런저런 단상을 메모해 두곤 한다. 그래서 소설에 대한 나의 이러한 생각이 맞는지 틀리는지 사실 알지 못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좋은 소설이 갖춰야 할 조건들은 요즘은 이렇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인물이 있어야 하며, 그 인물을 둘러싼 공간을 시각적으로 보일 만큼 세심하게 구축해야 하고, 인물이 맞닥뜨리게 된 ‘상황’을 작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내어 결말에 그 과정을 통해서 하고 싶었던 의미(meaning)가 작게라도 내포된 소설. 그리고 여기에 또 한 가지. 시대를 담고 있을 것. 그런 개인적 기준을 가진 상태에서 「지도에 없는」을 세 번째로 읽게 된 셈이다. 그래서 놀랐다고 할까, 그리하여 놀랐다고 할까. 당시 첫 책도 내지 않았던 젊은 작가 염승숙은 혹시 십팔 년 후에도,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는 이십 대 청년들의 삶이 미래에도 변하지
- 관리자
- 2025-07-01
[커버스토리 리와인드] 문장웹진 20주년을 맞아, 역대 편집위원들이 직접 고른 인상적인 문장웹진 작품들을 다시 꺼내 소개합니다. 당시의 문학적 의미와 오늘의 감상을 함께 나누며 문장웹진이 쌓아온 기록을 다시 읽고 새롭게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안 가느니만 못했던 여행’의 가치 - 한창훈, 「삼도노인회 제주여행기」(《문장웹진》2007년 5월호) 서경석(문학평론가, 前 문장웹진 편집위원) 2025년 3월에 2007년을 읽는다. 그 해 에 수록된 소설들. 작품을 마주하니 새삼스러웠다. 김재영, 명지현, 한창훈이 눈에 띈다. 김재영의 소설은 중년 남성의 퇴직 후 삶을 그린 이야기였다. 「달을 향하여」는 『폭식』의 작가가 달나라 땅도 팔고 사는 세태를 작품의 마무리로 삼았던 작품이다. 모든 것이 ‘쓸쓸하게’ 돈에 포섭되는 폭식의 세상을 그렸다고 생각했다. 이제 다시 읽으니 소설 속 주인공이 퇴직하고 갈 곳을 찾지 못해 회현동 골목길을 이리저리 살피며 걷는 모습이 더욱 눈에 들어온다.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며, 고향처럼 아늑하고 친밀한 장소가 주는 위로가 느껴진다. 어린 시절의 안식처에 대한 추억이 작품의 주된 정조를 이루어, 마치 새로운 작품을 읽는 듯하다. 명지현의 작품 「입안의 송곳」은 지금 다시 읽어도 ‘변함이 없다.’ 앓던 이‘는 누구에게나 있으며, 누구나 끊임없이 앓고 있고 세상 속 우리의 삶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편안하고 충만한 삶의 안식처가 어디 있겠는가. 삶의 근원적인 딜레마 속에서 마음의 고향을 찾아 헤매는 부조리한 몸짓만이 있을 뿐이다. 야생의 인간처럼 뭔가를 계속 씹으며 서먹한 힘으로 다가오는 세상에 저항할 따름이다. 한창훈의 소설 「삼도 노인회 제주 여행기」는 진정한 고향 이야기이다. 섬사람들의 이야기를 섬사람이 전하니 더욱 그러하다. 작가 한창훈은 거문도가 그의 고향이다. 어린 시절 그는 ‘세상은 몇 이랑의 밭과 그와 비슷한 수의 어선, 그리고 넓고 푸른 바다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일곱 살부터 낚시를 했으며, 외할머니에게 잠수를 배웠다고도 한다. 그는 먼 곳, 먼바다를 떠돌다 거문도로 돌아와 글을 쓰고 이웃들과 어울려 살아간다고 스스로 밝혔다. 그의 말처럼 그는 바다를 배경으로 한 변방의 삶을 주로 탐구한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그의 작품 세계의 중심에 놓여 있다. 이제 내용을 살펴 그 의미를 깊이 새겨 보자. 작품의 배경이 되는 삼도는 남쪽 바다의 한 섬이다. 젊은이들은 모두 도시로 떠나고, 오직 ‘늙은이들’만이 남아 섬을 지키고 있다. 지킨다기보다는 떠날 수 없어 살아가는 것이다. 이 노인들에게 섬은 삶의 터전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원초적인 삶의 뿌리이다. 벗어날 수도 없고, 설령 벗어난다 해도 그 몸에 새겨진 섬 생활의 그리움 때문에 곧 되돌아오고 마는 곳이다. ‘고단할지라도 섬을 버리고 자식들에게 가는 것은 멀쩡한 배에 구멍을
- 관리자
- 2025-06-01
플랫폼 시대의 문예창작(학) ㅇ 회차별 구성 -1차: 책장 업고 튀어 -2차: 연재 작가의 기쁨과 슬픔 -3차: 플랫폼 시대의 문예창작(학) ㅇ 회의명: 플랫폼 시대의 문예창작(학) ㅇ 일 시: 2024년 12월 7일(토) 17:30~19:30 ㅇ 장 소: 온라인 zoom ㅇ 참여자 -사회자: 김준현(소설가, 목포대학교 국어국문문예창작학부 교수) -참여자: 이지용(단국대학교 HUSS사업단 연구교수), 이명현(중앙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염승숙(소설가, 문학평론가), 이어진(동국대학교 WISE 캠퍼스 웹문예학과 객원교수, 웹소설 작가 레고 밟았어) 〈개회〉 김준현: 반갑습니다. 사회를 맡은 국립목포대학교 김준현입니다. 먼저 이번 좌담의 기획 의도를 다시 짚어 보는 것을 통해 시작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근래 국어국문학과, 문예창작학과는 제도적인 변화에 직면했다. 다양한 ‘콘텐츠’, ‘웹’, ‘크리에이티브’ 관련 전공들이 두 학과 제도를 대체하고 있다. 반대로 전통적인 ‘문학 산실’인 국어국문학과/문예창작학과는 점점 다른 교육 체계로 변화하고 있다. 바로 그러한 시대, 교육 현장에서 교강사와 학생들이 어떻게 이러한 체제 변화를 바라보고 있는지 살펴본다.” 기획 의도는 이러하고, 이러한 의도를 참가자 선생님들과 공유하며 먼저 자기소개를 하면서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일단 이 맥락에서 제 소개를 드리면, 올해 4월부터 국립목포대학으로 직장을 옮겼습니다. 제 전 직장은 서울사이버대학교 웹문예창작학과였고요. 이 기획 의도에서 언급하고 있는, 그야말로 학과의 이름에 ‘웹’이 들어가는 학과였습니다. 제가 올해 4월부터 일하게 된 국립목포대학교도 아마 국립대 최초로 문예창작에 웹소설, 웹문예교육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겠다고 하여 직장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저는 웹문예창작학과 학과장으로 3년 정도 있었고요. 국어국문문예창작학부이지만, 웹소설 특화를 표방한 학과에서 두 학기 정도 일한 셈입니다. 4년 정도를 소위 말해 ‘전통적인 문예 창작 교육’이 아닌 새로운 문예 창작 교육을 하고 있는 사람이고요. 웹소설 작가이기도 하고, 데뷔는 2012년에 장르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 좀비 아포칼립스 문학으로 데뷔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제가 사회를 맡게 됐고, 패널로 초대받게 된 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반갑다는 말씀드립니다. 제가 좀 부족하더라도 열심히 진행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 화면에 떠 있는 순서대로 자기소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선생님들마다 화면이 다를 텐데, 제 화면으로 보기에 제일 위에 떠 계신 분은 중앙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이명현 선생님이십니다. 이명현 선생님 자기소개를 한번 받아 보겠습니다. 이명현: 안녕하십니까. 저는 중앙대 국어국문학과에서 고전문학과 문화콘텐츠를 가르치고 있는 이명현입니다. 저는 중앙대 국어국문학과에서 2016년부터 근무했고, 국어국문학과에 재직하면서 고전문학
- 관리자
- 2025-03-01
저번까지 읽은 이후로 이어보시겠어요?
선택하신 댓글을 신고하시겠습니까?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