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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 여유의 회복을 위해

  • 작성일 2005-06-13
  • 조회수 3,029



박수연(문학평론가)


한 계절의 시를 평하는 자리는 꽤나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무수히 많은 작품량이 일차적 이유이기는 하지만, 작품들의 갈래도 그렇다. 시들은 좀처럼 동일한 지평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시가 개성적 서정장르인 이상 각각의 작품이 특이성을 실현하는 것은 속성상 필연적이라고 해도, 최근 한국 시단의 모습은 개별자들의 무한한 각축장인 듯 보인다. 그것을 나는 어느 자리에선가 시의 바로크라고 불러본 적이 있다. 그 규정은 고무되어야 할 측면에서는 시적 자기 영역의 성실한 개성 탐구를 의미하지만, 그 반대 측면에서는, 바로크의 장인들이 절대왕정에 주박되어 있었듯이 자본에 휩쓸린 문화적 자기 부정을 의미한다는 말이었다. 전자의 측면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다채로운 해석적 글을 통해 애정을 표한 바 있다.


최근의 시비평은 주로 섬세한 시 언어의 결을 따라가면서 의미(도달할 수 없는 기의의 세계)를 해석하고 그로써 비평에 구두점을 찍었다. 이 구두점은 비평의 미학적 기준에 대한 확실한 자기 표현은 아니었을까? 글이 종결되는 순간 미끄러지던 기표들은 의미 해석을 가능케 하는 하나의 고정점을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해석 자체가 이미 일정한 주관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보면, 최근의 시비평이 비판과 평가를 결여한 해석에 머무르고 있다는 비판은 한편으로는 옳고 한편으로는 그르다. 시의 지속적 갱신에 기여할 수 있는 비평적 질문의 필요성을 제기한다는 점에서 그 비판은 충분히 납득되는 바가 있지만, 해석 자체로서 시의 의미론을 입증할 수 있다고 보는 관점에서 보면 그 비판은 그다지 정곡을 겨냥한 것이 못 된다. 왜냐하면 해석에 이미 평가가 포함된 것이겠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의 비평이 한 측면의 관점만을 대변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특징이 되었다면, 그렇다면 문제삼아야할 것은 오히려 근대적 개인 신화의 현재적 실현은 아닐까? 말하자면 여전히 주체라는 문제 설정이 결여되거나 과도한 형태로 문학 영역에 제기되고 있는 형국인 것이다.

시에 대한 시대의 규정성이란 바로 이것의 객관적 요인을 뜻하는 것이겠다. 근대적 개인주의 신화의 한 면이 서정시의 개성으로 실현될 때, 이 개성이란 곧 시적 주체의 발언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 발언의 방향과 수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을 하나로 모으는 일이 난맥상에 있다고 해도 불가능한 것은 아닌데, 먼저 이야기해보고 싶은 것은 여성 시인들의 작품이다. 《황해문화》 2005년 봄호는 여성 시인들의 시만 수록하고 있다. 편집자의 의도가 반영된 결과가 아닐 수 없는데, 시인들은 김혜순, 허수경, 이경림, 이수명, 김선우, 이기성 등이다. 이쯤 되면, 다양하면서도 활달한 언어로 한국 시단의 여러 갈래에 피를 돌게 하고 살을 입힌 시인들이 모여 있다는 평가가 나올 만도 하다. 다양한 언어라고 했듯이, 실로 이들의 시를 여성 시인들의 시라는 말로 묶기에는 작품들의 진폭에 큰 낙차가 있다. 가령,


나는 언덕을 쓰다듬는다

나는 언덕의 젖꼭지를 문다

나는 하늘과 땅 사이 희멀건하게

벗겨진 언덕의 엉덩이를 가려보려고

손수건을 펴고 앉는다


  …중략…


  나는 저녁 산책을 마치고 사지가 잘린 언덕을

  불쌍한 가슴처럼 두 팔에 싸안고 집으로 돌아온다

                                      ―김혜순, 「산책」 부분


에서처럼 대지모신의 상처를 보듬는 시가 있고,


휴게소 녹슨 탁자 위를 기어가던 까만 자벌레

둥글고 광막한 지평선 두리번거리다 허공을 기어오르기 시작한다.


상행과 하행의 고속도로는 마주보며 질주하고

한낮 주유소의 사내는 검은 기름 탱크를 깔고 앉아 졸고 있는데

뱉어낸 가느다란 실을 입에 꼭 물고 매달린 자벌레.


백미러에 쨍쨍하게 반사되는 빛, 한 겹씩 동그랗게 몸을 말아

안간힘으로 기어오르는 눈먼 자벌레의 이글거리는 표정으로 목이 쉰

사내는 다시 트럭에 오른다. 닳아버린 타이어에 찌그러진 그림자가 깔려 있다.


검은 고속도로가 다시 끈적하게 펴지고

폐타이어 가득 실린 트럭이 허공에 매달려 있다.


슬픔을 모르는 흰 손이 천천히 허공을 흔들고 있다.

                                     ―이기성, 「슬픔」 전문


처럼, 현실의 검은 삶을 막막한 이미지로 빚어내는 시도 있다. 서정시가 시인의 내면을 드러내는 언어라면, 김혜순과 이기성 사이에는 넘지 못할 어떤 선이 있다. 그것은 외적 대상에 대한 묘사의 태도에서 나타나는데, 김혜순이 안타깝게 대상을 품에 안는다면 이기성은 냉정하게 그것을 관찰한다. 여기에 물론 좋고 나쁨이 있을 수는 없다. 이것은 대상과의 거리를 표시할 뿐이다. 그래서 김혜순이 대상과의 일체감을 표현함으로써 여성성 자체의 힘과 아픔을 노래한다면, 이기성은 결코 일체화될 수 없을 듯한 대상을 통해서 세계의 슬픔을 노래한다. 세계에 대한 이 차이 나는 대응의 표현에 있어서 김혜순이 ‘꼼지락거리고, 물고, 만지고, 입술을 대고’ 등의 용언을 사용한다면, 이기성은 ‘두리번거리고, 안간힘을 쓰고, 찌그러지고, 끈적한’ 등의 용언을 사용한다. 김혜순이 재생의 국면에 주목한다면, 이기성은 불모의 순간에 집중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그러므로 여성의 언어라는 말로 포괄될 수 없는 굴곡을 갖는 언어들이다. 이것은 차라리 여성의 언어를 넘는 언어이다.


허수경은 그 사이에서 여성의 대지모신적 넉넉함을 노래하지만(「고요하게 손을 뻗다」), 그것을 부유하는 실재의 애매모호한 대상으로 표현함으로써 도달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낸다. 「동그라미」의 “달팽이”는 그 안타까움을 실체화하고 있는 징후적 대상에 해당할 것이다. “누군가 달팽이에게 말을 좀 걸어 주오/빗장을 걸 듯 말을 걸어/달팽이를 어느 어수선한 집 안으로 들여보내 주오”(「동그라미」)라는 진술은 그 도달할 수 없는 세계를 향한 애절한 호소이다. 이에 대비해서 이수명의 시를 볼 수 있다. 이른바 기표의 미끄러짐이라는 명제가 적절하게 표현되고 있는 그의 일련의 시들에 비해 「검은 불 붉은 불」과 「그를 매달았다」는 그 언어 놀이의 강도가 훨씬 덜하지만, 여전히 의미의 확정성에 대한 저항의 시편들이라는 인상이 크게 다가오는 작품들이다. “불의 어깨 위로 불이 내려앉는다. 검은 불 위로 붉은 불이 붉은 불 위로 검은 불이 내려앉는다. 검은 불이 붉은 말을 하고 붉은 불이 검은 말을 한다. 엉겨붙는 이 들쭉날쭉한 말들을 닫을 수가 없다. 말에는 문이 없다.”(「검은 불 붉은 불」)와 같은 진술은 그것을 직접 표현한 경우이다. ‘말들을 닫을 수 없을 때’ 시의 언어들은 끝없이 의미의 기원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데, 이 또한 대상의 참된 세계에 대한 호소라고 할 수 있다. 대상 세계에 도달하려 하되 도달하지 못하는 운명이 곧 허수경의 언어들이 전달하고 있는 운명이다. 허수경이 그것을 격정적 언어로 만들어낸다면 이수명은 그것을 이지적 언어로 만들어낸다. 이 둘 사이에도 대상에 대한 태도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경림과 김선우는 어떨까? 이경림에게는 우선 비애가 있다. 이 비애는 하나의 대상과 그것을 둘러싼 존재들의 무정함으로부터 비롯되는데, 「외등」이 그 관계의 비정성을 묘사한다면 「검은 문」은 그 비정성의 본질을 묘사한다. “검은 선팅된 저 자동문 안/언듯 보이는 것//회색의 계단……회색 벽……회색 바닥……회색 천장……/천장에 붙은 형광빛 해……/……닫힌 엘리베이터”(「검은 문」)와 같은 언어는, 안이한 선택이기는 하지만 세계의 비애를 충분히 전달한다. 여기에는 어찌할 바 모르는 주체의 안간힘 같은 것이 있다. “도대체 어떤 무지막지한 힘이”(「바람이 하도 모질게 부니」) 세계를 움직이는지 알지 못할 때 그 안간힘이 나온다는 것은 시인이 세상을 그렇게 살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무지막지한 힘 앞에서 속절없이 쓰러져가는 존재들에 비하면 이런 태도야말로 소중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는 비애의 냉정함을 뛰어넘는 능력이 있다.


김선우에게는 비애를 넘어서 긍정으로 향하는 생명의 커다란 힘을 발견할 줄 아는 시선이 있다. 「어떤 출산」은 죽음마저도 삶의 따뜻함으로 감싸서 피를 돌게 한다. 죽음이 삶을 덮을 때 무정함이 나온다면 그 반대의 경우에 사랑이 세계를 덮는 것인데, 후자에는 개별의 삶이 그것 자체로 충만한 경지가 있다. 이것이야말로 김선우 특유의 사랑법이다. 이 사랑은 주체와 타자의 경계를 없애는 사랑이며, 그 무경계로서 세상을 꽃피우는 행위이다. “그대가 피어 그대 몸속으로/꽃벌 한 마리 날아든 것인데/왜 내가 이다지도 아득한지/왜 내 몸이 이리도 뜨거운지//그대가 꽃피는 것이/처음부터 내 일이었다는 듯이.”(「내 몸 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라고 말할 때 그 무경계의 확산과 깊이가 주어지는 것이다.


이 여섯 명의 여성 시인들이 냉정과 열정의 언어들로 대상을 관찰하거나 대상의 불가능성을 이야기할 때, 혹은 대상과 주체의 경계 지우기를 노래할 때 시들은 그 관계의 궁극에까지 나아가지는 않는다. 관계의 궁극이란 사건들의 출발점에 해당하는 것인데, 관찰은 그 출발점을 아예 바라보지 않는 태도이고, 불가능성이란 어떤 좌절에 해당하며, 경계 지우기란 주체의 소멸과도 통하는 것이다. 이것이 근대적 인식론의 폐해에 대한 심미적 비판일 수는 있지만, 서정시의 개인 주체적 성격에 호응하는 것인지는 더 따져볼 문제임에 틀림없다. 시에서 주체는 과연 지워질 수 있는 것인가?


류외향의 시는 그 문제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변을 제출한다. 「바다조곡」(《실천문학》 2005, 봄)이란 시다. 바다와의 점층적인 합일을 거쳐 드디어 바다를 넘어서는 주체의 행위가 있고, 그 결과 이루어지는 우주의 신생이 있다. 여기에서는 결코 지워질 수 없는 주체의 능력에 주목해야 하는데, 그것이란 각 연의 첫째 행들인 “내가 바다에 이르렀을 때” “내가 바다에 한 발을 내밀었을 때” “내가 바다에 다른 한 발을 내밀었을 때” “내가 바다에 가슴을 내밀었을 때” “내가 바다에 입술을 내밀었을 때” “내가 바다에 들어 우주의 반대편으로 떨어질 때”로부터 비롯되는 우주의 탄생을 가져오는 힘이다. 주체가 존재한다면, 이렇게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다. 그렇지만 그것을 근대적 주체중심주의로 읽어서는 곤란하다. 류외향이 말하는 것은, 나로부터 시작된 세계의 움직임이 드디어 나를 떠나서 그대에게로 들어가는 일의 시작이다. 여기에는 탈주체중심주의와 주체중심주의의 상관이 있다. 주체에 대한 이런 인식은 최근의, 특히 무의식에 의탁한 시적 진술들에 비교해서 볼 때 독특한 성과가 아닐 수 없다.

한국 여성시인들의 시는 언제부터인지 무의식의 언어에 깊게 집중하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무의식에 의탁한다는 것은 그것대로 생애의 또다른 국면을 펼쳐 보인다는 점에서 배척될 수 없는 일임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그것을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상태에 오면, 주체의 망각과 개성의 소멸을 불러오지 말란 법도 없다. 현재 한국의 여성시가 넘어서야 할 분수령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되는 때에, 류외향의 시는 그에 대한 분명한 응답이다.


여성 시인들이 삶과 죽음과 재생을 냉정과 열정으로 보여주는 틈에, 선배 시인들에게 삶은 무엇이었을까? 두 경향이 대략 손에 잡힌다. 《문학동네》2005년 봄호에 발표된 황동규, 조정권의 시와 《시작》 2005년 봄호의 최하림과 신대철의 시다. 두 개의 대비되는 세계 인식을 위해 두 작품을 인용해보겠다.


여기저기 볏짚단들이 가을을

가을을 들어 세우고 있는 들녘에서

까마귀들이 날고 경운기가

털털털 나락가마를 싣고 간다

우리는 고개를 수그리고 따라간다

만 가지 감회 서린 어스름이 시시각각

색조를 달리하면서 우리 뒤를 따르고

시간도 시간들도 따라간다

빈 들이 시간들을 끌어당긴다

…중략…

수확이 많고 적고를 불문하고 지금은

그러할 때이다 한해 농사가 끝나고

남은 날들도 거의 가고 있으므로

저렇게 새날들이 서둘러 오고 있으므로

             ―최하림, 「저녁 종소리」 부분


소멸해가는 존재들의 숙명에는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그럴 때 “새날들이 서둘러 오”는 세계가 존재할 수 있다. 삶의 재생 국면이 다름아닌 순리의 법칙임이 조용히 기록되는 이 시는 같은 지면에 수록된 신대철의 시와도 상통한다. “생의 감각을 넘어서면 바람도 제자리로 돌아가는가, 고독도 죽음도 제자리로, 우주 어디로?”(「흰새」)라고 말하는 신대철의 생사 감각은 최하림의 그것과 거의 동일한 세계에서 형성된 것이다. 두 편의 시에서 삶의 비장함이 도드라지는 것은 죽음마저도 긍정하는 그 깊은 의미의 언어들이 독자들에게 울려 퍼지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문학동네》2005년 봄호에 실린 황동규와 조정권의 시에는 일상적인 긍정의 세계관이 작용한다. 여기에는 비장미 대신 경쾌함이 있다. 황동규의 오랜 시작법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조정권에게도 그것은 세계를 보는 새로운 프리즘으로 확실하게 자리를 잡은 듯하다. 그런데 이 둘의 경쾌함은 사실은 다분히 시적 진술의 방식에서 기인한다. “눈썹 바로 앞에서 나무하나가 몸을 홱 뒤틀어/간신히 충돌을 피해준다./전신 한차례 출렁! 잠시 나를 잊었다./그만 발길 되돌려?/이런, 백자 유약같은 외길인데!/그대로 걷는다. 허방들이 촉각에서 해방된다. 촉각들이 놓여난다./안개 속이 훤하다.”(「안개 속에서」)와 같은 진술은 생의 심각함을 묘한 경쾌함으로 바꾸어 놓는다. 이 유머는 “어제는 잎 다 떨구고 있는 저녁비/혼자 가게 했다./거적때기 밑에 꺼져 있는 햇빛./거 누구요,/거 뉘시요……/땅거미가 먼저 나와 있다.”(「이 마음의 걸(乞)」)라고 말하는 의뭉스러움과 통한다. 이것은 어떤 여유에서 비롯될 것이다. 이 여유가 시의 행 사이에 여백을 만들어낸다.


젊은 시인들에게서는 이런 여유를 찾아보기 힘들다. 그것의 성공과 실패를 따져볼 수는 없지만, 시의 언어에 깊이를 부여해주는 한 방법으로 이 여유를 생각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비장함도 마찬가지인데, 젊은 시에 그게 점점 사라지는 듯하기 때문이다. 이 사라짐의 근원적인 원인으로 시적 주체의 상실이라는 측면을 지적하는 것은 그리 잘못된 일은 아닌 듯하다.《문장 웹진/2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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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30
시 쓰고 자빠졌네

시 쓰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누군가에게 자주 두들겨 맞았고, 누군가에게 가끔 린치를 가하던 시절이었다. 이웃 여고 문예부 아이들이 어쩐지 예쁠 거 같아서 문예부실을 전전했다. 그리고 백일장에 나가곤 했다. 물론 남달리 예쁜 아이는 없었지만, 어쨌든 17세 남녀가 교복을 입은 채로 노래방에서 듀스나 룰라, 혹은 투투의 노래를 함께 부르는 모습은 남달리 아름다웠다. 되도록 빨리 노래방으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사바사바, 시를 썼다. 빨리 써야 했다. 시는 최초의 노래였으므로. 엉덩이를 두드리듯, 천사를 찾아. 발라드를 부르며 감정 과잉에 빠지는 철수에게 영희는 이렇게 말한다. 시 쓰냐? 그때 우리는 원고지를 눕히던 누런 잔디에서, 어두운 노래방에서, 혹은 밀도가 높은 교실에서 어떤 감정 속에 놓여 있었을까. 난 누군지 또 여기는 어딘지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기에 우리는 분노에 가득 차 교복을 줄이고 담배를 숨기고 몰래 술을 마시기도 했다. 수채화 대신에 야간 자율 학습 감독을 주로 하던 미술 선생은 또 말했다. 또, 또 시 쓰냐? 시화전 제출 작품에서 피 흘리는 고등어를 그려 놓고 ?어느 고딩의 죽음?이라 제목을 붙이며 나는 전위를 담당한 듯 당당했다. 부끄러움이 없는 남자였다. 미술 선생에게 욕을 먹을 때에도, 맞을 때에도 나는 부끄러움을 몰랐다. 대한민국 학교 다 족구하라 그래. 시 쓰고 자빠졌다, 정말. 정말이란 말에 대해 오래 생각해 본다. 오래 생각하는 버릇은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최대한 짧고 단순하게 사고한 것으로 보이는 일들이 생각보다 빠르고 무식하게 벌어지고 있다. 정말? 시집을 묶어내던 중에 바위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 그 부엉이는 정말 새였을까. 도심에서 사람이 불에 타 죽었다. 그 망루는 정말 구름이었을까. 모두 정말이냐고 정색하며 물어 볼 만한 일들이었다. 분노가 치민다. 지금 나와 싸우자는 건가? 그런데 싸우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아니다. 싸움은 끝났다고, 이제 싸움이 아닌 경쟁의 시대라고 배웠다. 나는 그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잘 모르겠어서, 화가 났다. 사실 싸움보다 훨씬 경쟁이 무서웠다. 사건은 이미지가 되는 순간 거짓말이 된다. 이 모든 게 차라리 멋진 거짓말이었으면 좋겠지만, 이것은 너무나 끔찍한 거짓말. 난삽한 이미지. 이미지가 아닌 이미지. 그러므로 차라리 보이는 게 진실이라고 믿어 본다. 이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진실이 시의 배후가 되어 시에 맘껏 개입해도 나는 좋다. 시가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면 기꺼이 네가 그렇게 하라. 가져간 나의 반쪽! 때문인가. 이제 둘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리얼리스트 되자. 모던한 리얼리스트가 되자. 모더니스트가 되자. 리얼한 모더니스트가 되자. 장난하느냐고? 그렇다면, 불길한 장나니스트라고 해 두지 뭐. 꼴에 시랍시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나는 시가 좋다. 그리고 시가 밉다. 사랑하고 미워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처음 증상을 보일 때는 이렇게 데뷔를 하고 시를 쓰리라 짐작하지 못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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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15
일본 소설, 한국 시

일본 소설, 한국 시 한성례 한국에서 일본소설의 베스트셀러 현상 한류바람이 뜨겁게 일본 열도를 달구기 시작한 2000년 이후부터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해왔다.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인기가 많은 작가가 나올 정도로 한국은 일본소설 홍수 시대이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일본소설가들조차도 왜 일본소설이 한국에서 그렇게나 많이 팔리는지 몹시 궁금해 한다. 이에 대한 일본 신문의 인터뷰나 원고의뢰가 있을 적마다 나는 현재 한국에서의 한국시에 비유해서 설명을 한다. 이전에도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종종 많이 팔렸다. 70년대 중반에 첫 출간된 무라카미 류(村上龍)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해적판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출판금지서임에도 안 읽은 사람이 없을 만큼, 문학이나 예술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필독서이고 바이블이었다. 1999년 정식으로 저작권 계약을 맺어 커버에 비닐을 씌워 19세 미만 구독불가로서 출간된 후에도 쇄를 거듭하며 읽히는 소설이다. 또한 1989년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이 『상실의 시대』란 이름으로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소설은 당시 크게 각광을 받았고 지금도 계속해서 읽힌다. 당시 한국은 민주화 쟁취와 맞물려 자의식이 집단에서 개인으로 향하던 시기였다. 민주주의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태여서 사회,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못했고, 급변하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소외감, 고독, 상실감 등이 당시 한국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과 겹쳐지면서 이 소설에 크게 공감했다. 더욱이 하루키의 가독성 높은 문장은 금방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한편으로 문학의 구도자 같은 마루야마 겐지(丸山健二)의 소설도 여러 편 번역 소개되었는데, 이는 주로 문학 창작자들이 마니아였다. 하지만 일본소설의 인기는 단편적일 뿐 전반적인 경향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구소설이 중심을 이뤘다.그러던 것이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쓰지 히토나리, 히라노 게이치로, 요시다 슈이치 등 젊은 작가와 미야베 미유키, 스즈키 코지, 히가시노 게이고 등의 미스터리 소설과 나오키 상을 비롯한 여러 문학상 수상작이 2000년 이후에 대거 한국에 번역 소개되었고, 대형서점에는 코너가 별도로 마련될 만큼 일본소설은 인기를 끌고 있다. 왜 일본 소설을 좋아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일본소설은 재미있다. 독자를 의식하고 소설을 썼다는 게 금방 느껴진다. 말하자면 자신의 상품을 사줄 소비자의 위치에서 창작을 한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일본소설을 읽으면서 비현실적인 주인공을 통해 현실에서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자신의 일탈을 꿈꾸고, 대리만족을 느낀다. 일본소설의 주인공 젊은이들은 특별한 목표도 없고, 무기력하며 수동적이고, 나약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시대의 흐름과 기존 질서에 따르지도 않고, 세상을 약간은 냉소적이고 관조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 보편적인 부와 명예, 사회적인 안정 등과는 거리가 멀다. 이에 독특한 상상력과 가독성 높은 문장도 한 몫 한다. 최근 일본과 한국에서 밀리언셀러 판매 기록을 갱신하는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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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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