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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익은 상처의 블록으로 지은, 낯선 레고의 집

  • 작성일 2005-07-19
  • 조회수 5,032

 

정여울(문학평론가)


1. 권여선: 2005년 판 김승옥의 「야행」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앞으로도 경험할 것 같지 않은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장인물의 몸짓과 표정과 대사 하나하나가 온전히 내 것인 양 느껴질 때가 있다. 열일곱 살, 김승옥의 「야행」(1969)을 처음 읽었을 때의 느낌도 그랬다. 게다가 남성작가가, 여성의 차마 드러낼 수 없는 욕망의 치부를 그토록 날선 촉각으로 그려낼 수 있다는 사실에 치를 떨었다. 합리적 이성과 사회적 터부의 울타리를 철저하게 걷어낸 자리에, 알몸의 거웃처럼 선명하게 고개를 드는 욕망의 투명한 낯빛을, 「야행」의 현주는 남김없이 폭로했다. 인간의 언어로 ‘대낮의 강간’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사건을 겪은 후, 현주는 생존의 몸부림으로 점철된 일상의 각질 깊숙이 숨겨져 있던 야생적 욕망을 발견한다. 「야행」 이후 30여 년이 지난 지금, 젊은 작가 권여선의 「위험한 산책」(《창작과 비평》, 2005년 여름호)은 그때와는 다른 질감과 다른 언어로 1969년 현주의 버림받은 욕망을 되새김질하는 듯하다.


「야행」의 현주와 「위험한 산책」의 ‘그녀’가 다른 점은 무엇일까. 첫째, 현주는 다짜고짜 그녀의 팔목을 그러쥐고 여관으로 직행하는 낯선 남자의 ‘살 내음’을 맡기 전까지는 자신의 욕망에 대해 무지했다. 그러나 「위험한 산책」의 그녀는 꿈이라는 무의식의 세계를 통해서이긴 하지만, 자신의 일상 곳곳에 아가미를 벌리고 있는 욕망의 틈새를 날카롭게 의식하고 있다. ‘그녀’의 꿈속의 남자는 “남편인지 그인지 아니면 다른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다만 그녀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만은 깊이 느낄 수 있”는 남자다. 꿈속에서 그녀는 “남자의 가슴이 닿은 그녀의 등과, 그 남자의 팔에 안긴 그녀의 허리가 뜨거웠다.”는 것조차 생생하게 감지하고 있다. 그녀는 내연의 남자와 모범적 남편으로는 충족시킬 수 없는 욕망의 그늘을 또렷이 의식하며 한밤중의 위험한 산책을 감행한다. 둘째, 1969년 「야행」의 현주는 자신의 은밀한 야행으로 인해 파생되는 불안과 공포마저 삭제해버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2005년 「위험한 산책」의 그녀는 꿈속 그 남자의 현신(現身)인 양, 근육질의 팔로 그녀의 등허리를 뜨겁게 감싸 안는 낯선 남자의 육체를 향해, “표정이, 일순 봄꽃처럼 화사하게 피어”난다. 소설 속 그녀의 심리적 행보를 더듬어볼 때, 그녀는 낯선 남자의 불길한 육체적 접촉에 언제든 달뜰 준비가 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야행」의 현주는 생존의 최전선에서 가난과 싸우느라 자신의 우울을 돌볼 여유가 없다. 감정을 표현하고 권태를 다독일 만한 어떤 일상적 무기도, 현주에게는 없다. 그러나 「위험한 산책」의 그녀는 현주처럼 가난하지도,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공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지도 않다. 이제 그녀는 현주처럼 직장 상사가 결혼한 여자에게 품는 불신의 늪에 빠지지 않기 위해 결혼 사실을 숨기지 않아도 된다. 그녀는 이름도 얼굴도 직업도 모르는, 내밀한 상상 속의 육체적 파트너에 대한 감정을 이렇게 요약한다. “내용은 사라졌으되 형식은 의연한 사랑”이라고. 1996년 장편 『푸르른 틈새』로 데뷔하고 2004년 소설집 『처녀치마』를 경유하여 최근 활발한 소설 창작의 행로를 보여주는 권여선. 그녀의 붓은 수정처럼 단단하되 물결처럼 유연하다. 그녀는 방울뱀처럼 치명적인 독을 품으면서도 화려한 무늬를 자아내는 문체를 구사한다. ‘오정희’적 문체와 ‘최윤’적 지성, 고집스런 감수성과 세련된 지성을 동시에 품은 그녀의 다음 소설이 기다려진다.



2. 손홍규: 이문구적 문체와 성석제적 입담 사이


손홍규 소설의 첫 번째 놀라움은 그의 젊음과 그의 언어 사이에 놓인 아득한 간극이다. 첫 작품집의 출간을 앞두고 있는 작가 손홍규. 갓 서른의 문턱에 선 젊은 작가에게 어떻게 이토록 난만한 언어의 춤사위가 가능한 것일까. 걸진 사투리의 응어리, 되알진 육두문자의 카니발, 감옥이나 주먹 세계에서나 가능한 치열한 은어와 비속어의 몸부림. 손홍규 소설에서는 이 모든 언어적 충동이 야생동물의 매서운 송곳니처럼 번득인다. 손홍규에게서는 십대에 이미 가장이 되어버린, 속 늙은 소년의 냄새가 난다. 조숙하다 못해 조로해버린 이 젊은 작가의 입담은 경이롭다. 그는 비애와 궁상으로 점철된 일상의 그늘을 응시한다. 그의 붓끝은 한 줌의 연민도 서리지 않은 채 가차 없이 대상을 해부한다. 그는 미디어의 카메라와 마이크가 닿지 않는 궁벽진 문명의 사각지대를 찾아 떠나는 21세기의 돈키호테다. 그러나 돈키호테와 달리 손홍규는 영웅의 판타지를 믿지 않는다. 동정 없는 세상을 향해 그 어떤 자비도 구걸하지 않는 주인공들. 그들은 스스로의 쓰라린 상처 주위를 남극의 빙산으로 봉인한다. 손홍규의 주인공들은 단단한 갑옷 같은 각질더미로 자신의 상처를 철저히 위장한다. 

   

손홍규의 「이무기 사냥꾼」(《문학동네》, 2005년 여름호)에서는 뉴 밀레니엄의 한국, 그 가장 밑바닥을 살아가는 인간들의 처절한 군상이 펼쳐진다. 이들의 절망적인 삶의 요철(凹凸)을 더듬어가는 작가의 언어는 거침없는 육체성으로 빛난다. 그에게서는 최근 신예작가에게서는 희귀한, 역사의식과 계급의식의 탄탄한 내공이 만져진다. 그렇다고 그가 ‘도식적인’ 리얼리즘의 세계에 가까운 것은 아니다. 그는 다만 궁핍과 사기행각과 근친상간으로 얼룩진 삶을, 학습이나 훈련을 거치기보다는 태생적인 것으로 느껴질 만큼 자연스럽게, 구성진 문체와 칼칼한 입담으로 풀어낸다. 평생 이무기를 사냥하여 식구들을 먹여 살린 아버지, 태어난 두메산골을 떠나 막노동과 사기행각으로 밥을 버는 용태, 그리고 용태를 수족처럼 따르는 이주 노동자 알리. 이들을 가로지르는 공통점은 ‘죽은 척하기의 달인’이라는 점이다.


오누이 사이에 살림을 차렸단 이유로 마을 사람들의 표적이 된 아버지. 그가 걸핏하면 자신에게 날아오는 집단적 린치와 황당한 누명을 견디는 유일한 방식. 그것은 아들까지도 깜빡 속아 넘어갈 만큼 완벽한 시체 연기였다. 캐나다 밀입국에 실패한 용태. 그는 죽는 시늉으로 보호소 사람들의 굶주린 배를 채워준 사내를 한국에서 다시 만난다. 그가 알리였다. 용태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사냥꾼 특유의 집요한 눈빛으로 알리를 추적한다. 그는 알리의 시체 연기가 지닌 높은 시장성을 눈치챈다. “알리가 못 받은 임금을 받으러 간 척 실랑이를 벌이다 상대방이 가볍게 밀치기만 하면 일은 끝난 셈이었다. 그는 알리의 동행 혹은 목격자를 위장해 알리의 시체를 처리하거나, 못 본 체하는 대가로 돈을 받아냈다.” 그러나 그들의 사기행각은 알리의 배신으로 허무하게 끝난다. 그는 청출어람의 시체 연기로 위기를 모면하지만, 그에게 남은 것은 이주 노동자 칼리와의 섹스에서 옮겨 받은 사면발이(가랑니)뿐이다. 손홍규 소설의 진정한 주인공은 밑바닥 인생의 라이프 스토리가 아니라 그들의 삶을 지탱하는 ‘언어적 분탕질’이다. 오랜만에 소설 언어의 맛깔스러움에 흥건히 젖기를 원하는 독자에겐 손홍규의 등장이 반갑다. 이문구적 문체의 아우라와 성석제적 입담의 능청을 고루 갖춘 이 젊은 작가의 첫 소설집이 기다려진다.



3. 정이현: ‘내추럴 본 쿨 걸’의 낙인을 넘어서기


여전히 자전적 글쓰기는 한국 문단에서 확고한 문학사적 위치를 점유하지 못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화하는 일에 대한 거부감은 작가와 비평가 모두에게서 발견된다. 작가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이야기를 쓴다는 것이 소재의 빈곤이나 상상력의 결핍으로 보일 수 있다는 불안이 작용할 것이다. 비평가의 입장에서는 자전적 글쓰기가 근대소설의 전형적 틀에 ‘미달’한다는 의식적 거부감이 앞설 수 있다. 어느 편에서든 ‘자서전⊂소설’이라는 명제보다는 ‘자전적 글쓰기≠소설(자전적 글쓰기는 소설의 울타리에 포함될 수 없다)’이라는 명제가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권지예의 자전소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문학동네》, 2004년 겨울호)는 자전적 글쓰기에 대한 우리 사회의 통념을 투명한 직설화법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소설가=화자’라는 도식으로 글쓰기를 재단하는 독자 일반의 관음증적 호기심만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있지만, 정작 작가 자신의 ‘고백의 욕망’은 문제 삼고 있지 않다. 자전적 글쓰기는 타인의 고해를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고픈 독자에 대한 수동적 응답에 그치지 않는다. 작가 역시 ‘고백의 수사학’ 자체를 능동적으로 열망하고 있음을 간과할 수는 없다. 자전소설은 터부시되지만 그만큼 매혹적이다. 자전소설은 한국소설의 창작 관행상 그 양적 축적이 미약하다.


그러나 여기, 자전소설을 통해 자신의 작품 세계를 한껏 비약시킨 젊은 작가가 있다. 정이현은 「삼풍백화점」(《문학동네》, 2005년 여름호)을 통해 스스로 ‘내추럴 본 쿨 걸’이라 명명했던 견고한 자의식을 넘어서고 있다. 대학 졸업 후 구직난을 겪던 중, 여전히 부모님의 용돈을 받으며 도서관을 오가던 시절 만났던 친구의 이야기. “그해 봄 내가 가졌던 그녀에 대하여, 아무도 몰랐다.” 이십대 중반의 정이현과 친구 R은 우연히 삼풍백화점에서 조우한다. 집에 있을 수도 없고 출근할 직장도 없었던 정이현에게 삼풍백화점 의류 판매원 R은 집 열쇠를 주며 말한다. “낮에 가 있을 데 없으면 우리 집 열쇠 줄까?” 놀란 정이현은 대답한다. “아냐, 괜찮아. 너도 없는 네 집에서 나 혼자 뭘 하니.” “그래도 받아, 혹시 또 모르잖아. 내가 자다가 심장마비로 죽으면 네가 이 열쇠로 따고 들어와서 나를 발견해줘.” “야, 끔찍하게 왜 그런 말을 해?” “그럼 목욕탕 바닥에 미끄러져 넘어져 있으면 구해줘, 알았지?” “알았어, 그래도 119 부르기 전에 먼저 옷은 입혀줄게.” “으하하, 꼭 그래줘야 해.” 혼자 힘겹게 살아가는 R의 여린 속삭임은 하나 같이 독자의 폐부를 아릿하게 긁는다. 자신은 절대로 오징어를 먹지 않는다는 R의 고백. “깊은 바다 속에 살던 오징어가 육지로 끌려나와, 몇 날 며칠 동안 땡볕 아래 바짝 말려진 걸로도 모자라, 뜨거운 불에 구워지는 건 너무 잔인하지 않니?”


그러나 소설 속 정이현이 R의 매장에서 일일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계산 실수를 한 사건 이후로 그들은 멀어진다. 한사코 정이현에게 백화점 유니폼 입히는 것을 반대했던 R. 친구의 실수를 자신이 온전히 감당하기 위해 어떤 굴욕도 감수하는 R. 사자 앞에서 새끼를 지키기 위해 제 몸을 던지는 연약한 초식동물 같은 R의 몸짓. 미안함과 서먹함을 견디지 못한 시간들을 뒤로 한 채 그녀들은 멀어진다. 이후 소설 속 정이현은 취직도 하고 연애도 한다. 1995년 6월 29일. 삼풍백화점이 붕괴된다. 붕괴 10분 전에 백화점을 나왔던 정이현은 살아남는다. 그녀는 무단결근을 한 채 붕괴 377시간 만에 열아홉 살 소녀가 발견될 때까지 텔레비전만 보고 있었다. 차마 사망자 명단을 볼 수 없었던 그녀는 서랍 속에 R의 열쇠를 간직한 채 10년을 보낸다. 정이현의 이번 소설을 통해 경쾌한 스타카토처럼 툭툭 끊어지던 그녀의 문체는 아름다운 여백을 간직하게 되었다. 휴지부는 있되 안타까운 여백이 존재하지 않았던 기존의 문체는 「삼풍백화점」을 통해 변신의 문턱에 다다른다. “고향이 꼭, 간절히 그리운 장소만은 아닐 것이다. 그곳을 떠난 뒤에야 나는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세상의 모든 슬픈 광경은 그저 ‘풍경’에 그친다는 듯, 작중인물과 독자 모두에게 공평하게 ‘쿨’했던 정이현. 그녀는 자신의 뼈저린 트라우마를 고백하면서 정이현적 쿨함의 경험적 기원을 누설한다. 기어이 속옷을 들춰내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는, 허벅지 깊숙이 숨은 짙푸른 멍처럼, 그녀의 소설에는 아릿한 머뭇거림이 생겼다. 2005년 여름, 정이현의 수줍은 비약을 통해 우리는 자전소설의 매혹과 가능성을 다시 한 번 발견한다.



4. 최인석: 우주가 끝나는 자리에서 삼키는 절규


일본 작가 나쓰메 소세키는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철 지난 농촌소설을 쓰는 한 작가(이케베 산잔)를 향해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작품으로서의 『흙』은 (……) 결코 재미있기 때문에 읽어보라고 권하기는 어렵다. (……) 나는 특히 환락을 동경하는 젊은 남자와 여자들이 읽기 곤란한 점을 참고서 이 『흙』이라는 작품을 한 번 읽어볼 용기를 고취할 것을 희망하는 바이다. 내 딸도 나이가 들어 음악회가 어떻다는 둥, 데이코쿠좌(일본 최초의 근대적 서양식 극장)가 어떻다는 둥 하면서 열을 내어 말할 때가 되면 나는 반드시 이 『흙』을 읽히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때 우리 집 아이는 반드시 싫다고 할 것이다. 이 작품보다 훨씬 흥미 있는 연애소설로 바꿔달라고 말할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나는 그때 우리 집 아이를 향해서 ‘재미있기 때문에 읽으라는 것이 아니다, 고통스럽기 때문에 읽으라는 것이다.’라고 말해줄 생각이다. (……)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편안하게 성장한 젊은 여자가 일으키는 보리심이나 종교적 감성은 모두 이러한 어두운 그림자의 깊은 곳에서 반사되어 오는 것이라고 나는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최인석의 「내 님의 당나귀」(《문학수첩》, 2005년 여름)는 우리를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의 나락으로 이끈다. 스토리를 요약하는 일 자체가 누추하게 느껴질 정도로, 「내 님의 당나귀」는 독자에게 어떤 정서적 여백도 허용하지 않는다. 이 소설을 보면서 나는 처음으로 내가 소설을 보는 동안 소설도 나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소름끼치게 깨달았다. 내가 소설을 보는 시선은 때로는 단순한 엔터테인먼트이며, 때로는 감동의 진원지다. 그러나 이 소설이 나를 보는 시선은 내가 깔고 앉아 있는 방석 하나만큼의 작은 공간마저 죄스럽게 만들었다. 첫 장을 넘기는 순간 「내 님의 당나귀」는 독자를 사방이 가로막힌, 창문조차 달려 있지 않은 캄캄한 암실로 몰아넣는다. 이 작품은 얼핏 최인석의 1996년 작 「숨은 길」을 떠올리게 했다. 80년대적 희망을 헛된 미망이라 단죄하고 후일담 소설을 팔아먹으며 살아가는, 성공한 386세대라 할 만한 한 여성작가를 강간하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우는 노동자의 이야기. 갓 스무 살이었던 내게 그 소설은 불에 달군 인두로 내 몸 어딘가에 화인(火印)을 새기는 듯 쓰라렸다.

그러나 「내 님의 당나귀」는 「숨은 길」을 뛰어넘는다. 「숨은 길」이 사회적 성공에 도취되어 노동운동의 기억을 종신보험처럼 뜯어먹고 사는 일부 386세대를 향한 불화살이었다면, 이 소설은 다음 끼니를 먹을 수 있고 오늘 밤 몸을 누일 방이 있고 내일 갈아입을 옷이 있는 모든 자들에게 내리꽂는 비수다. 「내 님의 당나귀」를 읽으며 나는 이 작품이 외눈 달린 괴물이 되어 내 뒤를 쫓는 환각을 보았다. 이 소설의 집요한 시선을 피해, 진정 ‘숨은 길’을 찾고 싶었다. 그리고 진심으로, 내가 소설 속 그 주인공만큼 불행하지 않다는 것에 안도했다. 이윽고 내 안도의 한숨이 부끄러워 불면의 밤을 보냈다. 이미 자기만의 튼실한 소설의 성채를 구축한 작가가 이런 소설을 썼다는 점 또한 놀라웠다. 그것은 자신의 작품세계 전체에 균열을 낼 수도 있는, 위험한 모험이었기 때문이다. 그 위험을 무릅쓴 ‘기성 작가’ 최인석의 ‘반시대적 젊음’이, 눈부시다. 고통은 야누스적 얼굴을 가졌다. 고통은 가장 쉽게 인간을 타락시키지만, 고통만큼 인간을 눈부시게 성장시키는 무기도 없다. 나쓰메 소세키가 환생하여 2005년 여름 당신들의 소설에서 『흙』에 비견할 만한 고통을 주는 작품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머뭇거림 없이 최인석의 「내 님의 당나귀」를 나쓰메 소세키에게 선물할 것 같다.



5. 김애란: 스카이 콩콩, 투게더 아이스크림, 한 지붕 세 가족


70년대에 태어나고 90년대에 대학생이었던, 현재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인 세대를 묶어줄 만한 이름이 있을까. 아니, 묶는다는 것이 가능하거나 필요한 일일까. 20대 초반에 IMF를 겪었으며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청년실업’이라는 단어를 귀가 아프게 들어야 했던, ‘백수’를 표현하는 온갖 창조적인 표현들을 발명해낸 이 세대. 오프라인의 경험을 온라인의 경험보다 굳이 우위에 두지 않는 이들의 정신세계를 ‘한 큐에’ 엮을 통쾌한 명명법은 없는 것일까. 나는 아직 이들을 ‘우리 세대’라 묶을 수 있는 어떤 경험적 증거도 찾지 못했다. 이 세대들에게서는 경험의 공통분모도 감수성의 교집합도 쉽게 발견할 수 없다. 가까스로 이들의 문화적 취향과 의식적 성향을 얼기설기 묶어낼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X세대나 N세대 같은 미디어의 언어로는 이들의 감각을 아우를 수 없다. 어쩌면 우리 세대의 가장 분명한 공통적 감수성은 그 어떤 집단과도 공통의 경험을 나눌 수 없다는 ‘단절감’이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의 눈뭉치들을 점점 거대한 눈사람으로 굴려 나가고 있을 즈음, 김애란의 소설을 만났다. 당혹스러웠다. ‘자그마치’ 1980년에 태어난 작가가, 나조차 잊어가고 있는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을, 나보다 훨씬 명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동년배들과도 나누기 어려웠던 간절한 세대적 교감을 나는 김애란의 소설들에서 발견했다. 김애란의 「스카이 콩콩」은 제목부터 어린 시절 기억의 한 귀퉁이를 날카롭게 베어냈다. 십자가의 형상을 코믹하게 패러디한 듯한 모양새. 가느다란 용수철만으로 아슬아슬하게 몸무게를 지탱할 뿐 아니라, 비행기를 타지 않고도 짜릿한 비상의 욕망을 충족시켜주었던, 추억의 놀이기구였다. 소설 속에는 스카이 콩콩뿐 아니라 온갖 추억의 미장센이 범람한다. 《과학동아》를 보며 설익은 상상력을 키우는 형의 모습, 드라마 〈한 지붕 세 가족〉의 순돌이 아빠를 연상시키는 전파상 주인 아버지, 전교생의 가슴을 달뜨게 했던 모형 비행기 시합, “굽이진 골목과 자글자글한 길들로 이루어진” 허름한 동네 어귀, 어릴 적 가장 고급스러운 간식에 속했던 투게더 아이스크림, 어둑신한 골목길을 장승처럼 지키던 낡은 가로등의 여린 불빛…….

그러나 이 모든 추억의 공통분모보다 경이로운 것은 그 자잘한 일상적 소품들에 얽힌 ‘우리들’의 정서를 오롯이 되살리는, 젊은 작가의 어여쁜 조숙함이다. 이 모든 소설적 미장센들을 아름다운 성장소설의 테마로 엮어내는, 경쾌한 소설 건축술 또한 놀랍다. 한 술 더 떠 그녀는 소설을 향한 독자의 심각한 눈초리를 한 칼에 무장해제시키는, 요절복통의 유머를 구사한다. 그러나 그 유머는 해맑은 폭소에 그치지 않는다. 김애란적 웃음의 끝자락에는 유머로 눙칠 수 없는 삶의 투명한 그늘이 서린다. 한국사회는 ‘나이의 중력’ 혹은 ‘나이의 문신’에 지나치게 민감하다. 우리는 젊은이에게서 섬뜩한 성숙함을 발견했을 때 그를 ‘오만한 인간’으로 바라볼 준비가 되어 있다. 노인에게서 때 아닌 싱그러움을 발견했을 때 그를 ‘철딱서니 없는 인간’으로 몰아세울 준비도 되어 있다. 그런데 이 작가, 김애란은 그녀를 바라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녀의 나이를 잊게 한다. ‘지나치게’ 조숙한 사람이 걸리기 쉬운 검푸른 우울에도 그녀는 감염되지 않았다. 그녀의 작품에는 건강한 비애와 수줍은 고통이 옹기종기 살고 있다. 그녀의 작품을 통해 나는 굳이 우리 세대에게 새로운 이름표를 달아주고픈 욕망이 헛된 것임을 깨닫는다. 태어난 곳만이 고향인가. 경험한 것만이 추억인가. 살아본 것만이 삶인가. 그렇지 않음을 온몸으로 증명하는 것이 문학 아닌가. 김애란은 ‘경험해보지 않은 추억’조차도 소설이라 불리는 아름다운 그릇에 담아낼 수 있는 작가다. 김현의 독자라면 누구나, 김현 선생의 저 추억 서린 통닭집, ‘반포치킨’에 가 보지 않고도 그 공간이 못내 눈물겹듯이.《문장 웹진/2005.8》


 

 

*나쓰메 소세키 지음, 황지헌 옮김, 『나츠메 소세키 문학예술론』, 소명출판, 2004, 334~33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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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30
시 쓰고 자빠졌네

시 쓰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누군가에게 자주 두들겨 맞았고, 누군가에게 가끔 린치를 가하던 시절이었다. 이웃 여고 문예부 아이들이 어쩐지 예쁠 거 같아서 문예부실을 전전했다. 그리고 백일장에 나가곤 했다. 물론 남달리 예쁜 아이는 없었지만, 어쨌든 17세 남녀가 교복을 입은 채로 노래방에서 듀스나 룰라, 혹은 투투의 노래를 함께 부르는 모습은 남달리 아름다웠다. 되도록 빨리 노래방으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사바사바, 시를 썼다. 빨리 써야 했다. 시는 최초의 노래였으므로. 엉덩이를 두드리듯, 천사를 찾아. 발라드를 부르며 감정 과잉에 빠지는 철수에게 영희는 이렇게 말한다. 시 쓰냐? 그때 우리는 원고지를 눕히던 누런 잔디에서, 어두운 노래방에서, 혹은 밀도가 높은 교실에서 어떤 감정 속에 놓여 있었을까. 난 누군지 또 여기는 어딘지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기에 우리는 분노에 가득 차 교복을 줄이고 담배를 숨기고 몰래 술을 마시기도 했다. 수채화 대신에 야간 자율 학습 감독을 주로 하던 미술 선생은 또 말했다. 또, 또 시 쓰냐? 시화전 제출 작품에서 피 흘리는 고등어를 그려 놓고 ?어느 고딩의 죽음?이라 제목을 붙이며 나는 전위를 담당한 듯 당당했다. 부끄러움이 없는 남자였다. 미술 선생에게 욕을 먹을 때에도, 맞을 때에도 나는 부끄러움을 몰랐다. 대한민국 학교 다 족구하라 그래. 시 쓰고 자빠졌다, 정말. 정말이란 말에 대해 오래 생각해 본다. 오래 생각하는 버릇은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최대한 짧고 단순하게 사고한 것으로 보이는 일들이 생각보다 빠르고 무식하게 벌어지고 있다. 정말? 시집을 묶어내던 중에 바위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 그 부엉이는 정말 새였을까. 도심에서 사람이 불에 타 죽었다. 그 망루는 정말 구름이었을까. 모두 정말이냐고 정색하며 물어 볼 만한 일들이었다. 분노가 치민다. 지금 나와 싸우자는 건가? 그런데 싸우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아니다. 싸움은 끝났다고, 이제 싸움이 아닌 경쟁의 시대라고 배웠다. 나는 그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잘 모르겠어서, 화가 났다. 사실 싸움보다 훨씬 경쟁이 무서웠다. 사건은 이미지가 되는 순간 거짓말이 된다. 이 모든 게 차라리 멋진 거짓말이었으면 좋겠지만, 이것은 너무나 끔찍한 거짓말. 난삽한 이미지. 이미지가 아닌 이미지. 그러므로 차라리 보이는 게 진실이라고 믿어 본다. 이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진실이 시의 배후가 되어 시에 맘껏 개입해도 나는 좋다. 시가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면 기꺼이 네가 그렇게 하라. 가져간 나의 반쪽! 때문인가. 이제 둘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리얼리스트 되자. 모던한 리얼리스트가 되자. 모더니스트가 되자. 리얼한 모더니스트가 되자. 장난하느냐고? 그렇다면, 불길한 장나니스트라고 해 두지 뭐. 꼴에 시랍시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나는 시가 좋다. 그리고 시가 밉다. 사랑하고 미워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처음 증상을 보일 때는 이렇게 데뷔를 하고 시를 쓰리라 짐작하지 못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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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15
일본 소설, 한국 시

일본 소설, 한국 시 한성례 한국에서 일본소설의 베스트셀러 현상 한류바람이 뜨겁게 일본 열도를 달구기 시작한 2000년 이후부터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해왔다.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인기가 많은 작가가 나올 정도로 한국은 일본소설 홍수 시대이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일본소설가들조차도 왜 일본소설이 한국에서 그렇게나 많이 팔리는지 몹시 궁금해 한다. 이에 대한 일본 신문의 인터뷰나 원고의뢰가 있을 적마다 나는 현재 한국에서의 한국시에 비유해서 설명을 한다. 이전에도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종종 많이 팔렸다. 70년대 중반에 첫 출간된 무라카미 류(村上龍)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해적판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출판금지서임에도 안 읽은 사람이 없을 만큼, 문학이나 예술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필독서이고 바이블이었다. 1999년 정식으로 저작권 계약을 맺어 커버에 비닐을 씌워 19세 미만 구독불가로서 출간된 후에도 쇄를 거듭하며 읽히는 소설이다. 또한 1989년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이 『상실의 시대』란 이름으로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소설은 당시 크게 각광을 받았고 지금도 계속해서 읽힌다. 당시 한국은 민주화 쟁취와 맞물려 자의식이 집단에서 개인으로 향하던 시기였다. 민주주의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태여서 사회,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못했고, 급변하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소외감, 고독, 상실감 등이 당시 한국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과 겹쳐지면서 이 소설에 크게 공감했다. 더욱이 하루키의 가독성 높은 문장은 금방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한편으로 문학의 구도자 같은 마루야마 겐지(丸山健二)의 소설도 여러 편 번역 소개되었는데, 이는 주로 문학 창작자들이 마니아였다. 하지만 일본소설의 인기는 단편적일 뿐 전반적인 경향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구소설이 중심을 이뤘다.그러던 것이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쓰지 히토나리, 히라노 게이치로, 요시다 슈이치 등 젊은 작가와 미야베 미유키, 스즈키 코지, 히가시노 게이고 등의 미스터리 소설과 나오키 상을 비롯한 여러 문학상 수상작이 2000년 이후에 대거 한국에 번역 소개되었고, 대형서점에는 코너가 별도로 마련될 만큼 일본소설은 인기를 끌고 있다. 왜 일본 소설을 좋아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일본소설은 재미있다. 독자를 의식하고 소설을 썼다는 게 금방 느껴진다. 말하자면 자신의 상품을 사줄 소비자의 위치에서 창작을 한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일본소설을 읽으면서 비현실적인 주인공을 통해 현실에서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자신의 일탈을 꿈꾸고, 대리만족을 느낀다. 일본소설의 주인공 젊은이들은 특별한 목표도 없고, 무기력하며 수동적이고, 나약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시대의 흐름과 기존 질서에 따르지도 않고, 세상을 약간은 냉소적이고 관조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 보편적인 부와 명예, 사회적인 안정 등과는 거리가 멀다. 이에 독특한 상상력과 가독성 높은 문장도 한 몫 한다. 최근 일본과 한국에서 밀리언셀러 판매 기록을 갱신하는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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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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