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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逆)겨워’와 ‘역(力)겨워’의 거리

  • 작성일 2005-08-19
  • 조회수 2,874

 

심선옥(문학평론가)


1. 이별과 사랑의 시인, 소월

소월 김정식은 명실 공히 ‘사랑’의 시인이다. 그의 시가 지금까지 대중들에게 널리 읽히고 있는 가장 큰 이유도 ‘사랑’ 때문이다. 소월의 시는, 사랑에 빠져 있는 순간의 열정이나 황홀함보다, 사랑이 떠나려고 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또 이별한 뒤에도 사랑이 어떻게 지속되는지에 대해서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 준다. 실제로 한국의 근대 서정시들은 사랑의 얼굴을 정면에서 바라보는 것보다 사랑의 뒷모습, 사랑의 그림자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독특한 정서를 형성해 왔다. 최초의 자유시라고 일컬어지는 주요한의 「불놀이」(1919)를 비롯하여 소월의 「진달래꽃」(1922)과 「초혼」(1925), 한용운의 「님의 침묵」(1926) 등이 대표적이다.


이별을 체험하고 표현하는 방법은 시인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한 예로 한용운은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이부었습니다.”(「님의 침묵」)라고 하여 이별의 슬픔에 빠져 있는 현재의 부정적인 감정의 상태에서 벗어나 미래의 희망적인 세계로 빠르게 옮겨 가고자 한다. 이에 비해 소월의 시는, 이별을 돌이킬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고 깊은 슬픔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이별의 슬픔 속에서도 멈추지 않고 샘솟아나는 사랑의 언어를 길어 올린다. 이러한 소월의 시 세계는 애이불상(哀而不傷), 한(恨)이라는 민족 정서를 형상화한 것으로 평가받아 왔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감상주의(感傷主義), 체념(諦念)의 미학으로 비판받기도 하였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은 왜 일어난 것일까? 또 이별한 뒤에도 어떻게 사랑이 멈추지 않고 지속될 수 있는 것일까? 어쩌면 그것은 이별의 상황이나 이유와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질문은 매우 상식적이지만 시인의 감정 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된다. 지금부터 소월의 대표적인 작품 「진달래꽃」에서 그 해답을 찾아보고자 한다.


2. “나보기가 역겨워”의 문제성

「진달래꽃」은 1922년 7월 《개벽》에 처음 발표되었다. 당시 소월은 스무 살이었으며,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을 떠나 서울의 정동에 있는 배재고등보통학교 4학년에 편입해 다니고 있었다. 예전에 그가 다녔던 오산중학교가 1919년 3월, 만세운동을 주동했다는 이유로 일본 헌병들의 손에 불타 버리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학업을 중단한 뒤 소월은 3년간 고향집에서 실의의 나날을 보내다가 뒤늦게 상경하여 편입한 것이었다. 이때 소월은 이미 결혼하여 고향집에 아내와 두 딸, 구생(1919년생)과 구원(1920년생)을 두고 있었다. 또한 「진달래꽃」은 《개벽》에 발표될 때 제목과 함께 ‘민요시’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근대 자유시 양식이 확립되기 전인 1920년대 초까지, 시의 형식 명칭을 ‘소곡’ ‘단곡’ ‘산문시’ 등으로 규정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지만 ‘민요시’라는 명칭은 「진달래꽃」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그런 이유로, 이 시는 ‘민요시’라는 범주에서 지금까지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이 글에서는 「진달래꽃」의 주제인 ‘사랑’과 ‘이별’의 관점으로 되돌아가서 시를 다시 읽어 보고자 한다.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진달래꽃」 전문


먼저, 이 시가 구성하고 있는 시적 상황을 살펴보자. 한때 사랑했음에 분명한 두 사람이 이별을 앞두고 있다. 사랑을 버리고 떠나려는 주체는 시적 화자가 아니라, 시의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임’이다. 시적 화자도 눈앞에 닥친 이별이 거역할 수 없는 현실임을 순순히 인정한다(“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 그런데 ‘임’이 떠나려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시적 화자는 그 이유를 “나보기가 역겨워”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1연과 4연에 반복해서 나타나는 만큼, 시의 의미를 해석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하지만 ‘역겨워’라니? 이별의 슬픔과 고통도 순순히 받아들일 만큼 ‘나’는 간절히 임을 사랑하는데 그 임은 “나보기가 역겨워” 떠나려 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역겹다’는 말을 국립국어연구원에서 발행한 『표준국어대사전』(두산동아, 1999)에서 찾아보면 “역정(逆情)이 나거나 속에 거슬리게 싫다”라고 풀이되어 있다. 다시 ‘역정’을 찾아보면 “몹시 언짢거나 못마땅하여서 내는 성 = 역증(逆症)”으로 풀이되어 있다. 소월이 평안북도 태생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북한의 과학원 언어문학연구소 사전연구실에서 발행한 『조선말사전』(과학원출판사, 1960)에는 어떻게 풀이되어 있는지 찾아보았더니 ‘역겹다’는 “역정이 나게 겹다”로, ‘역정’은 “몹시 언짢거나 마땅찮게 여기어 내는 성”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그리고 ‘역겹다’의 용례로 「진달래꽃」의 첫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김이협이 편찬한 『평북방언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1)에는 따로 수록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뜻풀이에 따르면 “나보기가 역겨워/가실 때에는”이라는 구절은 ‘나를 보기가 몹시 언짢거나 못마땅하게 여겨져서, 그렇게 나를 보기가 싫어져서 헤어지려 한다’는 의미가 된다. 이것이 지금까지 이 구절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이었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요즘 독자들에게 ‘역겹다’는 말은 ‘비위가 상해서 구토가 날 것 같다’라는 좀 더 강한 의미로 사용된다. 그런 독자들에게 「진달래꽃」의 사랑과 이별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상상해 보라. 나를 보기가 토할 것처럼 싫어서 떠나는 사람의 발밑에 꽃을 뿌리고 또 죽어도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으니, 이건 마치 순종적인 여인상을 그린 고전 사극(史劇)에 등장할 법한 이야기거나 그도 아니면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종의 엽기 취향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3. ‘역(逆)겨워’로 읽기

그러면 소월이 「진달래꽃」을 발표했던 1920년대에는 “나보기가 역겨워” 이별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을까? 그가 배재고등보통학교를 다니던 시대에 근대식 학교 교육을 통해 신지식과 신문물을 접한 조선 청년들의 가장 큰 관심거리는 ‘사랑’이었다. 1920년대의 ‘사랑’은 오늘날의 ‘사랑’과는 그 무게와 의미가 달랐다. 배우자의 얼굴도 모르고 부모들의 결정에 의해 결혼이 이루어지던 시절에, 서로의 이상(理想)과 감정(感情)이 통하는 청춘 남녀 간의 자유로운 ‘사랑’이야말로 근대인임을 증명하는 중요한 표징(表徵)이 되었다. 당사자의 뜻에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중매결혼과 조혼제도를 거부하고, 결혼은 자유로운 ‘사랑’의 결과로서 성립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청년들 사이에 강하게 일어났다. 사회적으로도 근대 사상의 핵심인 ‘자유’와 ‘개성’을 실현하는 방법으로써 ‘자유연애’가 옹호되었다. 또한 ‘자유연애’는 아버지 세대가 주도하는 봉건적인 관습에 대한 반항이자 도전이기도 하였다. 비록 늦깎이 학생에다 기혼자였지만 소월도 이러한 시대적인 분위기에 초연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1926년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비관하여 현해탄에 몸을 던져 정사(情死)한 극작가 김우진과 가수 윤심덕의 ‘사랑’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거니와, 이와 비슷한 자유연애 사건들이 당시의 신문과 잡지에 자주 오르내렸다. 이런 사건들은, 미혼의 남녀가 집안의 반대로 맺어지지 못하는 것보다 주로 어린 나이에 결혼해서 고향에 부인을 둔 남자가 유학 중에 신여성이나 기생과 사랑에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 사정이 이러했기에, 찬란한 사랑의 기쁨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안타까움과 이별의 슬픔이 1920년대 문학과 예술의 주제가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낭만적인 연애시와 연애소설, 연애서간집이 청춘 남녀들의 가슴을 울리며 당대 최고의 베스트셀러 자리에 올랐다. 이 작품들에서 그려진 사랑은 한결같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기에 그 애절함이 더욱 강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의 감정은 더욱 낭만적인 빛깔로 채색되었다. 그리고 사랑의 대상과 감정이 낭만적일수록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비극성은 더욱 커졌다.

이렇듯 낭만적인 사랑의 분위기가 흘러넘치던 때, 사랑하는 사람이 “나보기가 역겨워” 떠나려 한다는 「진달래꽃」의 표현은 매우 파격적이 아닐 수 없다. 그런 표현이 가능한 상황을 굳이 유추해 보자면, 도시의 신문물을 접하고 신여성의 매력에 눈을 뜬 기혼 남자가 구시대적인 용모와 풍습에 젖어 있는 본부인을 떠나려 할 때를 가정해 볼 수 있겠다. 실제로 1921년 3월의 《개벽》에는 <최근의 우리 사회의 현상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비슷한 내용을 다룬 글이 실려 있었다.


재판소에서 사건접수 기록을 보면 이혼사건이 반수(半數)나 점하였으니 남녀의 교육이 균일치 못하고 조혼의 악습이 전래하여 오던 오늘날 조선 사회에는 피치 못할 일이올시다. 이혼의 이유는 허다불일(許多不一)할 터이나 대개는 기혼 배우(妻)가 자기의 이상(理想)하는 바에 정합(情合) 못되는 것, 기혼 배우가 신식적 취미에 부적합한 것, 내용의 여하보다도 용모, 외장(外裝)과 표정, 의행(儀行)이 신시대 여자와 같이 심정에 만족치 못한 것, 생활을 유지키 난(難)한 경우(하급계급 외에는 예외), 기혼 배우의 지식 부족, 연령의 차이 등이 가장 많은 제1의 원인이 될 것이고 제일 중요한 결혼에 관계되는 공동생계의 능력 부족, 가정살림에 태만, 무식, 남자 명령에 역행, 가족에 대한 불순(不順), 무덕(無德), 병질(病疾)은 제2의 원인이 될 줄로 생각합니다. 또 남자나 여자나 결혼의 요구조건이 제2의 내실적 조건보다도 제1의 외양적 조건이 될 줄로 생각합니다.


이 글은 당시에 이혼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오르게 된 현상을 개탄하면서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특히, 과거에 결혼을 유지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었던 경제적인 문제나 도덕적, 건강상의 문제는 부차적인 것이 되고 최근에는 배우자의 외형적인 조건, 부부간의 이상(理想) 차이가 이혼의 중요한 원인이 되고 있는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이 글의 내용 중에서 흥미를 끄는 것은 “용모, 외장(外裝)과 표정, 의행(儀行)이 신시대 여자와 같이 심정에 만족치 못한 것”이라는 대목이다. 그러면 「진달래꽃」에서 “나보기가 역겨워”라는 구절도 이런 현실을 염두에 두고 표현한 것이었을까. 일반적으로 ‘역정(逆情)이 나는 마음 상태’란 상대편의 외모나 성격, 행동거지에서 유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사실이 그러하다면 「진달래꽃」은 1920년대에 유행했던 낭만적인 사랑의 시가 아니라 당대의 사회 현상을 반영한 현실주의적인 작품으로 해석될 새로운 가능성을 갖게 된다.(오해를 막기 위해 덧붙이자면, 소월과 부인은 금슬이 매우 좋았다. 주변 어른들의 눈은 아랑곳하지 않고 사랑채에서 부인의 무릎을 베고 책 읽기를 즐겼으며, 그가 서울과 동경에 유학할 때는 부인이 힘들까 봐 친정에 가 있게 했다. 또 부인에게 술을 가르쳐 동네 주막에서 함께 술을 마신 뒤 어깨를 나란히 하여 귀가하는 일도 잦았다고 한다.)


4. ‘역(力)겨워’로 다시 읽기

그래도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가장 먼저 드는 의문은 소월의 시에서 ‘역겨워’와 같이 부정적인 느낌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단어가 「진달래꽃」 외에는 사용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소월의 시에 나타난 부정적인 어휘들을 살펴보면, “꺼림칙한 괴로운 몹쓸 꿈”(「서로 믿음」), “모질던 사람은 죽어서 지옥간다고”(「돈과 밥과 맘과 들」), “몹쓸음을 둔 사람 그 나의 사람”(「맘에 속의 사람」), “물 속에 몸을 던진 몹쓸 계집애”(「고락」) “얼마나 비꼬인 계집애든가”(「고락」) “내 맘에 미욱함이 불서럽다고”(「달밤」) 등이 최상급 수준이다. 이러한 경향은 당시에 발표된 다른 시인들의 시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상대편을 노골적으로 폄하하는 ‘역겨워’와 같은 단어는 사용된 예를 찾기 어렵다. 개성적인 시 세계를 창조한 시인일지라도 자신이 몸담고 있는 시대의 보편적인 정서와 언어 감각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진달래꽃」의 “나보기가 역겨워”라는 구절은 어딘가 돌출적이고 무리한 용례라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


‘역겨워’를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을까? ‘역겨워’는 한자어 ‘역’과 부사형 어미 ‘겨워’가 결합된 단어이다. 소월은 이런 형태의 한자 합성어를 즐겨 사용하였다. 예를 들어보면, “구만리 긴 하늘을 날아 건너 / 그대 잠든 품속에 안기렸더니, / 애스러라, 그리는 못한대서”(「구름」), “아아아 허수럽다 바로 사랑도 / 더욱여 허수럽다 살음은 말로”(「바닷가의 밤」), “험구진 산 막지면”(「야의 우적」) 등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여기서 ‘애스러라’는 ‘애(哀)+스러라’이며 ‘허수럽다’는 ‘허(虛)+수럽다’이고 ‘험구진’은 ‘험(險)+구진’으로 구성된 한자 합성어이다. 같은 방식으로 ‘역겨워’는 ‘역(逆)+겨워’로 해석되어 왔다.

그런데 ‘역겨워’가 ‘역(逆)겨워’ 뿐 아니라 ‘역(力)겨워’로도 해석될 수 있는 가능성을 파인 김동환의 시에서 발견하였다.


박 넝쿨 뻗은 담장 밑 낡은 우물가에

하얀 박꽃을 물 항아리에 띄워 연달아 이어 나르는

그 맵시 차마 한꺼번에 다 보기 역거워

오늘은 먼- 발치에서 나리꽃 같은 뒷맵시만 바라보고

내일날 시원한 눈시울을 여겨보려 합니다.

남겨두고 이튿날 기다려지는 이 안타까운 기쁨이여.

                         -김동환, 「내일날」(1940) 전문


백운청천 저 하늘에 하올 말씀 하도 많으이. 구름 따라 가버린 분이길래 구름 좇아 도로 오실 것이나 이 한밤을 혼자 보내기 역거워 이 심장 바람에 피우려는 뜻 그대 아실는가, 알아서 받아 주실는가.

                          -김동환, 「춘원초(春怨抄)」(1942) 부분


「내일날」은 낡은 우물가에서 물 길어 나르는 이의 맵시에 반해 버린 시적 화자의 안타까운 사랑의 마음을 낭만적인 어조로 노래한 시이며, 「춘원초」는 구름처럼 떠나 버린 임을 향해 애타는 그리움을 호소하고 있는 시이다. 두 시에는 “그 맵시 차마 한꺼번에 다 보기 역거워”와 “이 한밤을 혼자 보내기 역거워”라는 구절이 나온다. 여기서 “역거워”는 시의 문맥 상 ‘역(力)+거워’ 즉 ‘힘겨워’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하다.


현대의 한글 표기법을 기준으로 할 때 「진달래꽃」의 ‘역겨워’와 위의 시들에 사용된 ‘역거워’는 다른 단어이다. 그러나 조선 총독부의 ‘언문철자법’ 개정안(1930)과 조선어학회의 ‘한글맞춤법통일안’(1933)이 공표되기 전까지 우리말에는 공식적으로 통일된 표기법이 없었다. 그리고 문어(文語)와 구어(口語)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아서 발음이 나는 대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았고, 경성어(뒷날 표준어의 기준이 되는 서울말)와 서도어(평안도방언 중심의)가 표준어의 주도권을 다투며 혼용되고 있었다. 이러한 현실을 감안한다면, 비슷한 발음을 가진 ‘역겨워’와 ‘역거워’가 같은 의미의 단어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1920년대의 한글 표기 상황과 김동환의 시들을 근거로 할 때, 「진달래꽃」의 “나보기가 역겨워”를 ‘역(逆)겨워’ 즉 ‘나를 보기가 몹시 언짢거나 싫어져서’라는 기존의 의미가 아니라 ‘역(力)겨워’ 즉 ‘나보기가 힘겨워’로 해석하는 새로운 가설을 제기해 볼 수 있다. ‘역겨워’를 ‘힘겨워’로 뜻풀이하여 「진달래꽃」을 다시 읽어 보자. 그러면 시에서 구성하고 상황이 완전히 달라진다. 한때 사랑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 사랑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너무 힘겨워서 임이 나를 떠나려 한다. 나는 임의 마음을 알기에 떠나는 임을 붙잡지 못하고, 임이 더 힘겨워할까 봐 눈물도 흘리지 못하고 떠나는 임의 발밑에 애타는 사랑을 담아서 진달래꽃만 뿌린다. 이렇듯 ‘역겨워’를 ‘힘겨워’로 해석해 보면, 시의 간절한 느낌이 더욱 살아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역(逆)겨워’로 해석했을 때에는 임에 의해 일방적으로 사랑이 파기(破棄)되고 나는 버림받았지만, ‘역(力)겨워’로 해석했을 때에는 임과 나의 사이에 깊은 공감과 연민의 정이 흐른다. 이러한 공감과 연민이 있었기에, 소월의 시들이 이별의 슬픔 속에서도 멈추지 않고 샘솟아 나는 사랑의 언어를 길어 올릴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진달래꽃」의 의미가 ‘역(逆)겨워’와 ‘역(力)겨워’의 어느 쪽에 있는지 아직 확정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역(力)겨워’를 뒷받침할 수 있는 좀 더 많은 이론적? 실증적 근거들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다만 관습적으로 이해되어 온 이 구절을 시의 문맥에 충실하여 다시 읽어 봄으로써 「진달래꽃」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할 수 있으며, 그로 인해 새롭게 되살아나는 시의 생명력을 느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문장 웹진/200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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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15
일본 소설, 한국 시

일본 소설, 한국 시 한성례 한국에서 일본소설의 베스트셀러 현상 한류바람이 뜨겁게 일본 열도를 달구기 시작한 2000년 이후부터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해왔다.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인기가 많은 작가가 나올 정도로 한국은 일본소설 홍수 시대이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일본소설가들조차도 왜 일본소설이 한국에서 그렇게나 많이 팔리는지 몹시 궁금해 한다. 이에 대한 일본 신문의 인터뷰나 원고의뢰가 있을 적마다 나는 현재 한국에서의 한국시에 비유해서 설명을 한다. 이전에도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종종 많이 팔렸다. 70년대 중반에 첫 출간된 무라카미 류(村上龍)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해적판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출판금지서임에도 안 읽은 사람이 없을 만큼, 문학이나 예술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필독서이고 바이블이었다. 1999년 정식으로 저작권 계약을 맺어 커버에 비닐을 씌워 19세 미만 구독불가로서 출간된 후에도 쇄를 거듭하며 읽히는 소설이다. 또한 1989년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이 『상실의 시대』란 이름으로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소설은 당시 크게 각광을 받았고 지금도 계속해서 읽힌다. 당시 한국은 민주화 쟁취와 맞물려 자의식이 집단에서 개인으로 향하던 시기였다. 민주주의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태여서 사회,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못했고, 급변하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소외감, 고독, 상실감 등이 당시 한국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과 겹쳐지면서 이 소설에 크게 공감했다. 더욱이 하루키의 가독성 높은 문장은 금방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한편으로 문학의 구도자 같은 마루야마 겐지(丸山健二)의 소설도 여러 편 번역 소개되었는데, 이는 주로 문학 창작자들이 마니아였다. 하지만 일본소설의 인기는 단편적일 뿐 전반적인 경향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구소설이 중심을 이뤘다.그러던 것이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쓰지 히토나리, 히라노 게이치로, 요시다 슈이치 등 젊은 작가와 미야베 미유키, 스즈키 코지, 히가시노 게이고 등의 미스터리 소설과 나오키 상을 비롯한 여러 문학상 수상작이 2000년 이후에 대거 한국에 번역 소개되었고, 대형서점에는 코너가 별도로 마련될 만큼 일본소설은 인기를 끌고 있다. 왜 일본 소설을 좋아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일본소설은 재미있다. 독자를 의식하고 소설을 썼다는 게 금방 느껴진다. 말하자면 자신의 상품을 사줄 소비자의 위치에서 창작을 한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일본소설을 읽으면서 비현실적인 주인공을 통해 현실에서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자신의 일탈을 꿈꾸고, 대리만족을 느낀다. 일본소설의 주인공 젊은이들은 특별한 목표도 없고, 무기력하며 수동적이고, 나약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시대의 흐름과 기존 질서에 따르지도 않고, 세상을 약간은 냉소적이고 관조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 보편적인 부와 명예, 사회적인 안정 등과는 거리가 멀다. 이에 독특한 상상력과 가독성 높은 문장도 한 몫 한다. 최근 일본과 한국에서 밀리언셀러 판매 기록을 갱신하는 무

  • wikisoft
  • 2010-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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