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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 「왕십리」를 다시 읽는다

  • 작성일 2006-02-22
  • 조회수 9,719

  

장철문

 

 

 


이태 전인가, 약속이 있어서 왕십리역에 간 적 있다. 상대가 조금 늦겠다고 해서 지하철역 근처를 무료하게 서성거렸다. 소월의 흉상을 발견한 것은 우연이었다. 그 뒤쪽에는 발표 당시의 옛투로 「왕십리」가 새겨진 시비가 서 있었다.

잘되었다 싶어 느긋한 마음으로 시를 읽는데, 처음 읽은 것도 아니련만, 새삼스레 충격으로 다가왔다. 배우는 사람으로서의 의무감이 전혀 없이, 무연하게 바라본 그 시는 가슴을 흥분으로 뛰게 했다. 아무리 반복해서 읽어도 질리지 않는 첫연의 리듬감, 그 유장한 리듬감은 시어를 해석하려는 충동을 번번히 밀어내곤 했다. 그리고 그 강력한 리듬 뒤에 가려진 모호한 의미와 극적 전환들은 적잖은 시간 시를 읽고 써온 나를 당혹케 했다.

연과 연 사이의 비약적인 거리는 자칫 발이 빠질지도 모르는 도랑을 건너뛰는 현기증마저 느끼게 했다. 그런데 그 두 둔덕 사이의 간극은 유연한 리듬에 의해 천연덕스럽게 이어졌다. 모호한 의미는 그대로 젖혀두고라도 그 리듬은 강력한 정서적 울림을 가지고 밀려왔다. 에밀 슈타이거가 “시인은  음악적인 것에 우선권을 주고 싶어하는 존재”라고 한 것을 나는 나중에야 읽었다. 그때 나는 소음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된 도시 한복판에서 비 올 바람을 흠뻑 머금은 벌판 바람에 휩싸인 느낌이었다. 그 바람의 실체는 ‘님의 부재’로 인한 비애에 불가항력적으로 노출된 화자의 정감 그것이었다.


비가 온다

오누나

오는비는

올지라도 한닷새 왓으면죠치.


여드래 스무날엔

온다고 하고

초하로 朔望이면 간다고햇지.

가도가도 往十里 비가오네.


웬걸, 저새야

울냐거든

往十里건너가서 울어나다고,

비마자 나른해서 벌새가 운다.


天安에삼거리 실버들도

촉촉히저젓서 느러젓다데.

비가와도 한닷새 왓스면죠치.

구름도 山마루에 걸녀서 운다.

1925년 시집 『진달래꽃』에 수록된 전문이다. 이 시는 1923년 『新天地』에 처음 발표되었다. 당시에는 제목 옆에 “(民謠詩)”라고 병기되어 있었으며, 3연 3행의 쉼표가 마침표로 되어 있었다.

그때 이후로 「왕십리」는 그 유려한 리듬으로 나를 자주 찾아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 시의 해석을 둘러싸고 소장학자들간에 한차례 논쟁이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정끝별 1998’ ‘김점용’에 그 과정이 소상히 밝혀져 있다. 人名에 관련한 書誌는 ‘참고자료’란에 밝힌다). 이 기회에 나는, 그때의 충격으로 내 나름대로 여러 차례 곱씹어보고 또 기왕의 연구와 논쟁들을 훑어본 기억을 살려 기존과 달리, 새롭게 읽어보려고 한다.


리듬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동안 첫 연의 기본형 ‘오다’의 반복에 의한 리듬에 대해서는 7?5조의 변격이라거나 3?4, 4?4와 같은 민요조 음수율과 더불어 여러 차례 언급되어왔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단 네 행으로 이루어진 한 연에서 무려 다섯 번이나 ‘오다’가 반복되면서도 말이 낭비되었다는 느낌이 전혀 없는 부드럽고 유장한 리듬이 해명될 수 있을까?

‘온다-오누나-오는-올지라도-왔으면’와 같이 변화무쌍한 어미활용을 통한 리듬의 변주는 정서의 미세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반복이 가져오는 정서의 지속성과 변화가 빚어내는 정서적 환기력. 그리고 그 반복과 변화는 서로 길항하면서 정서의 확장?심화로 귀결된다. 그 변화는 또한 연쇄적이다.

우선, 선행 논자들은 첫 행 “비가 온다”는 진술이 ‘비가 오고 있다’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진술한 것으로 보았다. 즉, 이전부터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화자가 그에 대하여 객관적으로 진술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꼭 그렇지는 않다. ‘外境’이 시인의 정서에 틈입해 들어옴으로써 정서적으로 유의미해지는 순간을 고려할 때, 이 진술은 ‘이전부터 비가 오고 있었다’거나, (잠시 그쳤던 비가) ‘이제 막 비가 오기 시작했다’는 두 가지 해석 모두 가능하게 한다. 다시 말해서, “비가 온다”는 진술은 현재형으로서 인지된 그 순간의 사실에 대해서만 지목하는 것이지 그 이전이나 이후를 확정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2행의 “오누나”와 연계해서 읽을 때, 화자가 이제 막 비가 오기 시작한 상황에 직면하여 그 인지적 사실을 잠재적 청자(또는 독자)에게 “비가 온다”고 발화한 것으로 읽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즉 “온다”는 평서문에 이은 감탄문 “오누나”는 새롭게 인지된 사건 또는 사실에 대하여 화자가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미 오고 있던 비라면 새삼스럽게 주관적 감탄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다. 또한 이는 ‘비’에 의해 화자의 정서가 고양되었으며, ‘비’와 자신의 감정을 정서적으로 동일시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음을 시사한다.

3행 “오는비는”은 다시 앞의 두 행을 문법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승계한다. 인지된 사건의 수용을 거쳐, 의식에서 기정 사실로 확정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심리적 인정과 더불어, 조사 ‘는’을 통하여 다음 행의 “올지라도”를 예비한다. 즉 양보절을 통한 ‘전환’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어서 “한닷새 왔으면죠치”라고 화자의 願望이 피력되기에 이른다. 리드미컬한 어미변화를 통하여 인지-수용-인정-전환-원망으로 의미 및 정서가 연쇄되는 것이다.

기존의 논의는 이 양보절을 역설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하나는 시적 정황이 장마철이라는 전제, 두 번째는 양보절이 역설을 선호한다는 전제. 그러나 앞의 전제는 2연을 읽는 가운데서 밝혀지겠지만, 근거가 희박하다. 역설의 가능성은 어떤가? 물론 양보절이 역설을 동반할 수 있기는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양보절의 ‘~ㄹ지라도’는 “앞절의 사실을 인정하면서 그에 구애받지 않는 사실을 이어 말할 때”(「표준국어대사전」) 쓰는 연결어미이다. 어떤 미래의 일에 대한 가정으로서 역설을 필요충분조건으로 하지는 않는다.

굳이 “오려거든” “오려면”과 같은 의미가 명확한 가정절을 택하지 않고, 양보절을 선택한 것은 그만큼 화자의 심리가 모순적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비’가 화자의 감정과 동일시된 객관적 상관물이라고 할 때, 그 감정을 원없이 풀어낼 수 있는 ‘한닷새’쯤 내렸으면 좋은 것이지만, 화자가 지금 ‘진퍼리(질다+벌+리. 지금의 행당동)’라는 왕십리의 부속지명(홍용오, 13면)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질척거리는 길을 걷고 있음을 감안한다면 동시에 그쳐야 좋은 것이다. 즉 ‘비’는 ‘님의 부재’에 대한 위무로 작용하기도 하면서 동시에 ‘님의 부재’ 그 자체에 대한 상징이기도 한 것이다. “한닷새 왓스면죠치”의 ‘한닷새’는 화자가 희망하는 시간으로서 더 내렸으면 좋겠다거나 덜 내렸으면 좋겠다는 어느 한쪽에 한정되지 않는 시간이다. 즉 어감상 리듬과도 상충하지 않으며, 심리적 적정성에도 부합하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의 ‘한닷새’인 것이다.


시적 정황은 장마철인가?


2연 1~3행은 리드미컬하게 대구를 이루는 두 개의 절을 안은 간접인용문이다. 안긴 문장과 안은 문장의 주어는 모두 생략되었다. 2연의 모호성은 1차적으로 여기에서 연원한다. “(누가) ‘(누가/무엇이) 여드레 스무날엔 온다’고 하고, ‘(누가/무엇이) 초하루 삭망이면 간다’고 했지”라고 화자는 진술했다. 여기서 안긴 두 절의 주어(또는 행위주체)는 안은 하나의 문장 안에서 대구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안은 문장과 안긴 문장의 주어는 동일하거나 동일하지 않거나 상관없다. 둘은 서로 구속적이지 않다.

첫 번째 가능성. (관습적으로 사람들, 즉 언중일반이) “(비가/님이) 여드레 스무날엔 온다”고 하고, “초하루 삭망이면 간다”고 했지, 라고 읽을 수 있다. 화자가 풍문을 인용한 것이다. 두 번째 해석의 가능성. (님은) “(님이) 여드레 스무날엔 온다”고 하고, “(님이) 초하루 삭망이면 간다”고 했지, 라고 읽을 수 있다. 화자의 독백이다.

기존의 논자들은 상당수 첫번째 가능성을 선택했다. 그런데 안긴 문장과 안은 문장의 각기 다른 주어가 동시에 생략되는 것은 부자연스럽거니와, 독자가 그 생략을 복원하기도 어렵다. 리듬을 고려한 부득이한 생략이라 하더라도 작위성의 혐의가 너무 짙다. 소월답지 않다. 또 하나. 이 가능성을 택한 논자들은 대부분 시적 정황을 장마철로 보았다. 그런데 “여드래 스무날”과 “초하로 삭망”이라는 날짜가 장마철임을 보증해주는가? 즉 오월 스무여드래로부터 유월 초하루까지이거나 그에 준한 기간인가? 꼭 그렇지는 않다. 각기 그 뒤에 붙는 조사 “엔”과 “이면”은 오히려 일회적이 아니라 반복적이라는 뉘앙스를 품고 있다(박건용, 169면). 주기적인 것으로 본다면, 일년 열두 달 어느 때든 상관없다.

두 번째 가능성은 화자가 ‘님’의 말을 인용한 독백이다. 청중을 상정한 연극의 독백과 마찬가지로, 청자(또는 독자)를 상정한 독백적 발화인 것이다. 이럴 때, 안긴 문장과 안은 문장의 주어가 중첩되면서 안긴 문장의 주어는 오히려 생략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어미 “~(했)지”에는 님과의 기약을 환기하면서 동시에 그 기약이 지켜지기를 염원하는 뜻이 담겨 있다. 거기에는 그 기약이 지켜지기 어렵거나, 또는 이미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비극적 인식이 내포되어 있다고 확장해서 읽어도 좋겠다.

그렇다면, “여드래 스무날”과 “초하로 삭망”은 어떻게 읽어야 할까? 첫 번째. 리듬을 고려한 ‘스무여드렛날’의 도치로, ‘초하루’의 반복으로 볼 수는 없을까? 이럴 때, 전자는 도치 이전에 ‘조작’에 해당하며 후자는 ‘초하루’와 ‘보름’을 의미하는 “朔望”에서 ‘望’의 의미가 탈각된다. 여기에 전자는 ‘오월 스무여드레’이며, 후자는 ‘유월 초하루’라고까지 의미를 확장해간 해석도 있다. 무리다. 그리고 여기에는 첫 연 첫 행부터 마지막 연 마지막 행까지 비가 계속해서 내리고 있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그러나 앞서 말한 바와 같이 1연 1행의 “비가 온다”를 통해 ‘비가 이전부터 내리고 있었다’고 확정할 근거는 없다. 또한 정끝별은 뒤에 올 3연을 읽으면서 ‘새가 운다’는 것은 비가 그쳤다는 것을 시사한다(정끝별 1998, 322면)고 자신과는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언급한 바 있는데, 비가 그쳤음을 시사해주는 시행은 그 외에도 더 있다. 4연의 ‘실버들이 촉촉이 젖어서 늘어졌다’거나 ‘구름이 산마루에 걸렸다’는 시각적 진술이 그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실버들’이 시각적으로 선명하게 다가오는 때는 봄비가 그쳤을 때이기 십상이다. 더욱이 지나가는 비이거나 이슬비가 아닌 다음에야 빗속에 고개를 들어 시야를 확보하기는 어렵다. 설사 우산을 받았다 하더라도 시야를 가로막는 빗줄기와 공기중에 미만한 수분 때문에 상황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뿐만 아니다. ‘산마루에 걸린 구름’에 한정하여 말한다면, 비가 내릴 때와 그쳤을 때의 일기는 다르다. 雨中에는 비구름이 하늘 전체를 뒤덮기 십상이어서 ‘산마루에 걸렸다’는 표현은 쓰기 어렵다. 늦은 봄비가 그쳤을 때라면 구름은 산마루에뿐 아니라 산허리에도 걸린다. 1~2연에는 비가 내리고 있으나, 3~4연에는 비가 그쳤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심지어,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봄비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두 번째. “여드래”는 上弦에, “스무날”은 下弦에 해당한다. 조금때다. ‘초하루’와 ‘보름’은 사리때다. 조금에는 비가 오기 십상이고, 사리때는 비가 그치기 십상이다. 이렇게 되면, 안긴 문장의 ‘온다’와 ‘간다’의 주체는 비이다. “조금 무렵에는 비가 ‘오는’ 동시에 고기잡이 떠났던 뱃사람들도 ‘돌아오고’” “사리 때에는 비도 ‘그칠’ 뿐 아니라 바다로 ‘떠나간다’는”(김점용, 201면) 점에서 그 주체를 ‘비’와 ‘사람’으로 중첩해서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왕십리’는 바닷가가 아닌 내륙이며, ‘마포’와 같이 소금배나 새우젓배가 수시로 드나들던 포구도 아니다. 소월의 고향이 바닷가를 끼고 있다는 것 역시 이 날짜들을 조수간만이나 뱃사람들의 생활과 연계시킬 근거로 삼기는 부족하다. 시의 공간적 배경은 어디까지나 ‘왕십리’다. 바닷가가 아니다.

나는 확정적이지는 않더라도, 제3의 해석 가능성을 생각한다. 전통사회가 자연의 순환성에 민감했으며, 달의 주기성에 입각한 ‘태음력’을 근간으로 하는 생활을 영위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현대인은 대개 주간 단위로 생활 주기를 갖는다. 자연현상에 밀착된 월 단위의 주기성을 더 세분하여 주 단위, 시간 단위, 분 단위, 초 단위까지 나아간 것이 현대인의 시간의식이다. 그러나 전통사회에서, 더욱이 민요의 주요 창작?전승과 향수층인 민초들의 삶에서 이러한 시간 단위는 무의미했다. 여기서 우리는 전통사회의 순환적 시간관과 월단위의 주기성을 갖는 생활방식을 고려할 수 있다. 굳이 바닷가의 조수간만과 관련된 ‘비’나 ‘어로행위’와 관련시키지 않더라도 어촌에서든 농촌에서든 도시에서든 월 단위로 주기성을 갖는 기약이 이루어질 수 있다. 구태여 주기성을 갖지 않더라도 먼곳의 왕래를 포함하여 여러 행위들이 달을 두고 일정한 날짜를 기약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다.

한편, 2연 4행 “가도가도 왕십리 비가오네”는 화자의 절망적 인식이 극에 달했으며, 슬픔과 비애의 정서가 한껏 고조된 것을 보여준다. 혹자는 이 구절이 비가 계속해서 내리고 있는 상황을 보여준다고 보는 듯하다. 그러나 “가도가도 비가오네”가 아니라 “가도가도 왕십리”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지속적으로 비가 오고 있는 상황에 대한 강조라기보다 화자가 왕십리라는 공간을 걷고 있는 행위와 그 심리적 상황에 대한 강조라는 것이다. ‘왕십리’라는 시적 시공간 전체가 화자의 정서를 표현하는 객관적 상관물이라고 할 때, ‘지금 비가 오고 있는 왕십리’ 즉 ‘가도 가도’ 제자리 걸음이나 다름없는 비극적 상황 그 자체를 화자는 걷고 있는 것이다.


“웬걸”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3연 첫행 “웬걸”은 다소 느닷없다. 2연, 더 긴밀하게는 “가도가도 왕십리 비가오네”의 고양된 정서와는 다른 “울냐거든/왕십리 건너가서 울어나다고”의 전환을 예고하는 것이다. “울냐거든”은 그 어미활용을 고려할 때 “웬걸”을 축으로 하는 전환 이전의 정서와 연계되며, “왕십리 건너가서 울어나다고”는 그 전환의 실현으로서 화자의 願望이 피력된 것이다. 즉 “울냐거든”에는 이미 울고 있는 새가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운다’는 것은 감정의 직접적 표출이다. 즉 앞 연 4행의 한껏 고조된 정서를 그대로 이어받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정서가 그대로 연장될 때 센티멘탈리즘에 떨어지게 된다. 여기서 공자가 『시경』을 두고 “樂而不淫, 哀而不傷” 운운한 ‘정서의 절제’나 T. S. 엘리엇이 “시는 정서의 표현이 아니라 정서로부터의 도피”라고 함으로써 객관화를 강조한 점을 상기해보는 것도 좋겠다. “건너가서 울어나다고”에는 지금 비극적 상황인식 속에 있는 화자의 곁에서 울지 말고 다른 곳에 가서 울어달라고 청원함으로써 비애의 감정과 거리를 두려는 의지가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더욱이 ‘건너’는 왕십리가 아닌 길을 따라가서 벌판이 끝나는 한강을 연상시키며, ‘울어다고’가 아닌 ‘울어나다고’라고 함으로써 차라리 울려거든 더 내려가 한강 이남을 향하여, 또는 한강 이남으로 건너가서 울어주는 것이 화자에게는 더 유의미하다는 함의를 내포하고 있다고 읽을 수도 있다.

뿐 아니다. 1연의 ‘님의 부재에 대한 슬픔’과 동일시된 ‘비’를 정서적으로 승계한 ‘벌새’의 ‘눈물’은 화자의 청원에 의하여 ‘부재의 님을 향한 願望’ 즉 기다림으로서의 ‘눈물’로 전환한다. ‘건너가서’는 벌판인 왕십리가 아닌, 길을 더 따라 내려간 ‘벌 건너’ 즉 한강을 연상시키며, ‘울어다고’가 아닌 ‘울어나다고’라고 함으로써 차라리 울려거든 한강 이남을 향하여 울어주는 것이 화자에게는 유의미하다는 뜻을 내비치고 있다. ‘벌새’라는 정서적 상관물을 통하여 ‘님이 부재한 현실 공간’로서의 ‘왕십리’가 ‘님을 지향한 정서적 공간’으로 변화하는 전환인 것이다. 마을[里]라는 ‘공간’으로서의 왕십리가 도정[往]이라는 ‘시공간’으로서의 왕십리로 전화하는.

“비마자 나른해서 벌새가 운다”. 산문적 진술에서라면 이는 3연의 맨 앞에 위치하는 것이 적당하다. 우선 “벌새가 운다”는 사실을 적시해놓고, 그 뒤에 “웬걸, 저새야” 하고 받아야 하는 것이다. 어미 ‘~고’를 종결어미 ‘~오’의 고어로 보는 데 이의가 없다면, “울어나다고,”의 쉼표는 마침표가 되어야 한다. 『신천리』 발표본에는 마침표였던 것이 『진달래꽃』에 와서 쉼표로 전환된 것을 상기해도 좋겠다. 마침표를 쉼표로 대체하고 도치시킨 것이다. 문장을 도치함으로써 얻는 효과는 “웬걸”의 전환을 극대화하는 데 있다. 소월의 다른 대표작들과도 통하는 전형적인 기?승?전?결 구조이다. 1연에서 자연현상으로서의 ‘비’와 화자의 감정을 동일시한 정황이 2연에 이르러 극대화된 데 대해, 극적 전환을 통하여 “왕십리 건너가서 울어나다고,”라고 효과적으로 정서적 전환에 이르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벌새가 운다”고 평서문 종결형으로 객관화함으로써 그 심리적 거리가 구체화되는 것 또한 도치의 효과이다.

덧붙여, 4행의 “벌새”의 의미에 대하여. 기존 논의는 ‘벌새’를 대부분 ‘꽃가루를 매개하는 작은 새’로서 특정한 새의 이름으로 보았다. 잘못이다. 1920~30년대 한국시를 대표하는 김소월?이상화?정지용?백석 등이 ‘벌’과 ‘들’을 혼용하고 있으며, ‘왕십리’가 ‘왕십리벌’ ‘진퍼리’ 등으로 호명됨으로써 그 지명에 ‘벌’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된다. ‘벌새’는 곧 ‘들새’이다. 오늘날 ‘벌판’과 ‘들판’이 약간의 뉘앙스 차이를 동반하고 혼용되고 있음을 상기해도 좋겠다. 더욱이 북한의 「조선말대사전』과 연변의 「조선말사전」은 ‘벌새’의 의미를 “벌에 사는 새”와 예의 ‘열대지방에 서식하는 새’의 두 어휘로 분명히 구분하여 풀이하였다. 북한과 연변에서는 아직도 이 말이 쓰이고 있는 것이다.


‘천안’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앞서 언급했듯이, 1~2연은 전체적으로 비가 오는 상황이며, 3~4연은 비가 그친 상황이다. 雨後의 실버들이 새삼스럽게 시각화하여 정서적 울림을 유발하는 계절은 봄이다. 봄비가 유독 오는 듯 마는 듯 그치고 내리기를 반복하는 것은 물론이다. 4연 3행이 “비가와도”라고 1연의 “오는비는/올지라도”를 축약하여 쓴 것을 고려해도 좋겠다. “오는비는”은 비가 오고 있는 것을 전제하지만, “비가와도”는 가정에 그친다. 그밖에 3~4연 어디에도 비가 ‘온다’는 진술이나 그를 뒷받침하는 단서는 없다. 1~2연과 대조적이다. ‘온다’는 오히려 의미가 전혀 다르면서 음성모음으로 대비를 이루는 ‘운다’로 대체되었다. 비는 그쳤다. 장마비를 맞고 들길을 걷는다고 생각해보라. 그것도 질척거리는 미나리꽝 옆 둔덕길을 상념에 젖어서 걷는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왕십리」와는 다른 리듬과 정서여야 할 것이다.

‘천안’과 ‘왕십리’가 삼남으로 통하는 대로로서 ‘만남과 이별의 공간’이라는 동일성을 갖는다는 점은 여러 논자들이 지적했다. 둘의 공간적 거리는 傳言을 나타내는 종결어미 ‘~데’가 이었다. 첨가를 나타내는 조사 ‘~도’ 역시 그와 무관하지 않다. 서정적 화자에게 공간적 차이성은 정서적 동일성에 의해 무화될 수 있는 것이다. 더욱이 화자의 ‘님’과 관련된 공간적 연속성이 ‘(서울)―왕십리―한강―천안―(삼남)’으로 연결된다면, 두 공간적 거리는 ‘이별’의 거리이면서 동시에 ‘만남’을 내포하고 있는 거리이다. ‘기다림’이란 결국 그 모순된 양가적 측면을 동시에 안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님’은 강 건너 남쪽으로 갔으며, 천안삼거리를 거쳐 돌아올 것이라는 상정은 가능하다. 그 님이 보부상이냐 중앙과 지방을 연결시키는 하급관료냐 아니면 다른 사유가 있느냐 하는 등 이별의 사유를 지목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야말로 ‘개인적 정황’이다. 독자는 ‘서정적 주체의 개인적 정황’을 묻지 않고도 그에 상응하는 자신의 체험이나 처지를 대입함으로써 정서적 공감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앞서 언급한 ‘실버들도’의 조사 ‘~도’에 대하여 좀더 생각해봐야겠다. 문맥을 고려할 때, 이는 별개의 두 장소를 연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버들’이 앞 연의 정서를 받고 있음을 시사한다. 나는 이것이 3연의 심리적 거리확보 의지 내지는 새에 대한 청원이 내포하는 ‘님과의 만남’을 향한 의지를 받은 것으로 읽는다. 비 온 뒤의 실버들은 다소 밝은 이미지를 가지며, ‘촉촉히 젖었다’는 것은 남녀의 관능적 결합을 환기하기도 한다(오하근, 54~58면; 정끝별 2001, 20면 참조). ‘(그친) 비-벌새-실버들’이라는 정서적 상관물은 그렇게 연쇄되어 있으며, ‘만남’을 향한 의지와 기대를 내포한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적인 정조는 한편으로 ‘님의 부재’의 현실을 곧바로 넘어서지는 못한다. 더욱이 3연의 청원과 4연 1~2행의 전언을 통한 간접인용은 그러한 희망이 현실적인 힘을 갖고 있지 못함을 의미한다. 오던 비는 그쳤으되 언제든 다시 올 수 있고, ‘님’이 온다는 기약은 있었으되 지켜진다는 보장이 없다. 내 마음을 의탁할 비라도 ‘한닷새’ 왔으면 좋겠다. 더욱이 이 비는 대지와 온갖 생물을 ‘촉촉히’ 적셔서 그 생장을 돕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장의 기운을 타고 님은 올 수 있고, 님이 온다면 화자 또한 촉촉히 젖을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러나 님은 오기는 올 것인가? ‘~올지라도’ ‘~와도’의 양보절은 “오려거든” “오려면”과 같은 가정절에 비하여 이러한 모순된 상황과 감정을 드러내기에 더 적절하다.

첫 연의 그것과 대를 이루는 마지막 연의 양보절이 앞의 것에 비하여 정서적으로 순화된 것은 물론이다. 한번 진술된 것이 감정의 고양과 전환을 거쳐 다시 진술될 때 정서적으로 객관화되기 마련이다. 1연과 달리 앞뒤의 시행으로부터 정서적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 데서도 그것은 분명하다. 별도 의미의 비연쇄적 정서를 가진 세 문장이 각각의 마침표를 가지고 분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정서의 순화’가 곧 ‘정서의 해소’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구름도 산마루에 걸녀서 운다”가 그것이다. 걷힐 듯 걷힐 듯 걷히지 않는 구름에 가서 화자의 마음도 걸린 것이다. 문학적 형상화가 정서의 순화에 이르는 길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해소에 이른 것은 아니다. 이미 부재한 님이고, 돌아올 기약이 분명치 않은 이상 그 비극적 정서가 다시 오르막길을 탈 가능성은 늘 잠복해 있는 것이다.《문장 웹진/2006. 3》



참고자료


국립국어원 편, 『표준국어대사전』, 국립국어원 홈페이지 인터넷판.

김용직, 「남도가락의 순수서정」, 『문학사상』 1974년 9월호.

김재홍, 『한국현대시인연구』, 일지사 1986.

김점용, 「김소월 시 「왕십리」의 의미구조」, 『한국시학연구』 11집, 한국시학회 2004.

박건용, 「김소월 시 「왕십리」의 분석-상호텍스트성 이론 적용의 한 시도」, 『한국학보』 제 27집, 2001.

사회과학원 언어학연구소 편, 『조선말대사전』, 사회과학출판사 1992; 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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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지구 종말의 날까지 분열하라

소년, 지구 종말의 날까지 분열하라 김지선 1 지구처럼 돌아가는 월세, 지구처럼 냄새나는 음식물 쓰레기, 지구처럼 막히는 싱크대, 곧 멸망할 작은 행성을 뒤로 하고 우주를 향해 눈꺼풀을 밟고 고래는 푸른 등을 돌린다 푸른등돌고래는 갈 곳 없는 포유류가 되어 강물에 몸을 담근다 위험한 가정에 등을 돌리지 못하는 고래 한 마리 브래지어에 너를 매단다 언젠가는 멸종하겠지만 고래는 그런 것이고 너는 흐를 것이다 ― 「고래를 잡는 아이를 위한 안내서」 중 세상은 결국 파국을 향해 간다. 당연하게 멸망은 예정되어 있고, 우리는 흐를 것이다. 정규와 비정규, 주류와 비주류, 일류와 삼류가 뚜렷하게 구분된 세상 속에서 혁명은 무력하고 광장은 추억이 되었다. 우리는 가면을 쓰고, 환상을 내면화하며 지겨운 시간을 견딘다. 종말을 향한 불안한 예감, 불길한 전조 속에서 우리에게 가능한 일이란 지루하게 화석화되고 무기력하게 시간을 죽이는 것뿐. 그밖에 선택이란 없어 보인다. 서효인 시의 화자들은 대부분 그렇게 무기력하다. 세계의 불합리와 부조리를 체득한 자의 무미건조한 발성이 시집을 가득 채운다. 찢기고 구워져 마요네즈에 찍힌 오징어처럼 아스팔트에 구워져 바퀴에 깔리는 환경미화원의 최후(「목격자」), 구운 토스트가 된 채 이틀간 방치된 할망구의 죽음(「냄새나는 사람」)을 읊조리는 목소리는 연민조차 거세되어 냉소를 자아낸다. 냉소란 본래 자조를 동반하기 마련이다. 시에서 삼류 인생들이 사물로 환치되는 것은 자본의 부조리한 체제가 뼛속까지 내면화된 수동성에 대한 적절한 은유다. 그렇지만 서효인 시를 읽는 즐거움은 이런 날카로운 비판적 사회학을 발견하는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의 어떤 시들은 의외의 전개로 상황을 밀고 나가는 미성숙한 도발을 그려낸다. 시를 읽어 가다 번쩍 눈이 뜨이는 순간은 바로 그런 똘끼를 발견하게 됐을 때다. 그것은 지루한 시간을 이탈시키는 경쾌한 해방감이며 카타르시스를 맛보게 한다. 서효인의 시가 전하는 즐거움은 시집의 정교한 배열을 주시할 때 더욱 강렬해진다. 시집은 , , , 의 4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에 따라 아이에서 성인으로 변화하는 시적 페르소나는 그의 시를 성장문학의 하나로 읽게 만든다. 상처의 시간을 딛고 견고해지며 어른으로 자라나는 통과의례는 성장문학이 거치는 당연한 수순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의 시선이 성장문학에 대한 여타의 방식을 뒤집는다는 것이다. 시에서 어설픈 미성숙의 시간이야말로 존재감이 최고조로 고양된 순간으로 격상된다. 2장의 시선을 확보한 뒤에 다시 읽는 1장의 반항적 소년기는 청년이 되어 버린 시적 자아가 취해야 할 행동 지침을 제시하지 않는가. 3장의 성인이 된 아이의 무기력을 거쳐, 4장 연작은 성인이 된 후에도 우리에게 남은 미성숙의 페르소나를 다시 한 번 이끌어낸다. 이런 서사적 배치는 강렬한 메시지를 내재하고 있는 건 아닐까? 혹 우리가 감지하는 것 이상으로 서효인의 시는 불온한 전복의 수사학으로 무장된 건 아닐까? 막연한 의혹을 해결하기 위해 그의 시에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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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30
시 쓰고 자빠졌네

시 쓰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누군가에게 자주 두들겨 맞았고, 누군가에게 가끔 린치를 가하던 시절이었다. 이웃 여고 문예부 아이들이 어쩐지 예쁠 거 같아서 문예부실을 전전했다. 그리고 백일장에 나가곤 했다. 물론 남달리 예쁜 아이는 없었지만, 어쨌든 17세 남녀가 교복을 입은 채로 노래방에서 듀스나 룰라, 혹은 투투의 노래를 함께 부르는 모습은 남달리 아름다웠다. 되도록 빨리 노래방으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사바사바, 시를 썼다. 빨리 써야 했다. 시는 최초의 노래였으므로. 엉덩이를 두드리듯, 천사를 찾아. 발라드를 부르며 감정 과잉에 빠지는 철수에게 영희는 이렇게 말한다. 시 쓰냐? 그때 우리는 원고지를 눕히던 누런 잔디에서, 어두운 노래방에서, 혹은 밀도가 높은 교실에서 어떤 감정 속에 놓여 있었을까. 난 누군지 또 여기는 어딘지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기에 우리는 분노에 가득 차 교복을 줄이고 담배를 숨기고 몰래 술을 마시기도 했다. 수채화 대신에 야간 자율 학습 감독을 주로 하던 미술 선생은 또 말했다. 또, 또 시 쓰냐? 시화전 제출 작품에서 피 흘리는 고등어를 그려 놓고 ?어느 고딩의 죽음?이라 제목을 붙이며 나는 전위를 담당한 듯 당당했다. 부끄러움이 없는 남자였다. 미술 선생에게 욕을 먹을 때에도, 맞을 때에도 나는 부끄러움을 몰랐다. 대한민국 학교 다 족구하라 그래. 시 쓰고 자빠졌다, 정말. 정말이란 말에 대해 오래 생각해 본다. 오래 생각하는 버릇은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최대한 짧고 단순하게 사고한 것으로 보이는 일들이 생각보다 빠르고 무식하게 벌어지고 있다. 정말? 시집을 묶어내던 중에 바위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 그 부엉이는 정말 새였을까. 도심에서 사람이 불에 타 죽었다. 그 망루는 정말 구름이었을까. 모두 정말이냐고 정색하며 물어 볼 만한 일들이었다. 분노가 치민다. 지금 나와 싸우자는 건가? 그런데 싸우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아니다. 싸움은 끝났다고, 이제 싸움이 아닌 경쟁의 시대라고 배웠다. 나는 그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잘 모르겠어서, 화가 났다. 사실 싸움보다 훨씬 경쟁이 무서웠다. 사건은 이미지가 되는 순간 거짓말이 된다. 이 모든 게 차라리 멋진 거짓말이었으면 좋겠지만, 이것은 너무나 끔찍한 거짓말. 난삽한 이미지. 이미지가 아닌 이미지. 그러므로 차라리 보이는 게 진실이라고 믿어 본다. 이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진실이 시의 배후가 되어 시에 맘껏 개입해도 나는 좋다. 시가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면 기꺼이 네가 그렇게 하라. 가져간 나의 반쪽! 때문인가. 이제 둘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리얼리스트 되자. 모던한 리얼리스트가 되자. 모더니스트가 되자. 리얼한 모더니스트가 되자. 장난하느냐고? 그렇다면, 불길한 장나니스트라고 해 두지 뭐. 꼴에 시랍시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나는 시가 좋다. 그리고 시가 밉다. 사랑하고 미워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처음 증상을 보일 때는 이렇게 데뷔를 하고 시를 쓰리라 짐작하지 못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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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15
일본 소설, 한국 시

일본 소설, 한국 시 한성례 한국에서 일본소설의 베스트셀러 현상 한류바람이 뜨겁게 일본 열도를 달구기 시작한 2000년 이후부터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해왔다.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인기가 많은 작가가 나올 정도로 한국은 일본소설 홍수 시대이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일본소설가들조차도 왜 일본소설이 한국에서 그렇게나 많이 팔리는지 몹시 궁금해 한다. 이에 대한 일본 신문의 인터뷰나 원고의뢰가 있을 적마다 나는 현재 한국에서의 한국시에 비유해서 설명을 한다. 이전에도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종종 많이 팔렸다. 70년대 중반에 첫 출간된 무라카미 류(村上龍)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해적판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출판금지서임에도 안 읽은 사람이 없을 만큼, 문학이나 예술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필독서이고 바이블이었다. 1999년 정식으로 저작권 계약을 맺어 커버에 비닐을 씌워 19세 미만 구독불가로서 출간된 후에도 쇄를 거듭하며 읽히는 소설이다. 또한 1989년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이 『상실의 시대』란 이름으로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소설은 당시 크게 각광을 받았고 지금도 계속해서 읽힌다. 당시 한국은 민주화 쟁취와 맞물려 자의식이 집단에서 개인으로 향하던 시기였다. 민주주의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태여서 사회,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못했고, 급변하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소외감, 고독, 상실감 등이 당시 한국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과 겹쳐지면서 이 소설에 크게 공감했다. 더욱이 하루키의 가독성 높은 문장은 금방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한편으로 문학의 구도자 같은 마루야마 겐지(丸山健二)의 소설도 여러 편 번역 소개되었는데, 이는 주로 문학 창작자들이 마니아였다. 하지만 일본소설의 인기는 단편적일 뿐 전반적인 경향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구소설이 중심을 이뤘다.그러던 것이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쓰지 히토나리, 히라노 게이치로, 요시다 슈이치 등 젊은 작가와 미야베 미유키, 스즈키 코지, 히가시노 게이고 등의 미스터리 소설과 나오키 상을 비롯한 여러 문학상 수상작이 2000년 이후에 대거 한국에 번역 소개되었고, 대형서점에는 코너가 별도로 마련될 만큼 일본소설은 인기를 끌고 있다. 왜 일본 소설을 좋아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일본소설은 재미있다. 독자를 의식하고 소설을 썼다는 게 금방 느껴진다. 말하자면 자신의 상품을 사줄 소비자의 위치에서 창작을 한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일본소설을 읽으면서 비현실적인 주인공을 통해 현실에서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자신의 일탈을 꿈꾸고, 대리만족을 느낀다. 일본소설의 주인공 젊은이들은 특별한 목표도 없고, 무기력하며 수동적이고, 나약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시대의 흐름과 기존 질서에 따르지도 않고, 세상을 약간은 냉소적이고 관조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 보편적인 부와 명예, 사회적인 안정 등과는 거리가 멀다. 이에 독특한 상상력과 가독성 높은 문장도 한 몫 한다. 최근 일본과 한국에서 밀리언셀러 판매 기록을 갱신하는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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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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