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작가, 금기에 도전하다

  • 작성일 2006-07-27
  • 조회수 2,722

 

작가, 금기에 도전하다

-남정현의 「분지」



양진오




반공주의의 형성과 확대재생산. 이는 해방 이후 한국인의 삶을 규율하는 문화적 조건이었다. 그런데 이는 한국인의 삶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 한국 현대문학의 장을 규율하는 문화적 조건이기도 했다. 식민 통치, 미군 주둔, 분단체제 형성, 한국전쟁 발발, 권위주의적 독재 등 한국 사회의 퇴행적 사건과 역사에서 기원한 반공주의. 이 괴물 같은 반공주의에서 자유로운 한국인은 단 한명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반공주의는 한국인의 삶을 규율해 왔으며, 현재도 그렇다.

그렇지만 이렇게 얘기할 때, 한국 현대문학을 반공주의에 완벽하게 규율된 문학으로 폄하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한국 현대문학은 확대재생산되는 반공주의에도 불구하고 그 압력에 포획되지 않는 주목할 만한 긍정적 성취를 남겨온 문학인 까닭이다. 반공주의는 해방 이후 문인들에게 금기와 허용의 검열 논리와 처벌의 공포를 때로는 은연중에, 때로는 노골적으로 안겨주었지만 모든 문인들이 그 논리에 투항한 건 아니었다는 말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작가가 있다. 바로 남정현이다. 독자들은 남정현을 「분지」 필화 사건의 주인공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남정현을 이렇게 기억하는 건 작가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남정현은 미국 비판을 용공으로 간주하는 60년대의 폭력적 반공주의에 주눅들지 않고 한국과 미국의 신식민지적 예속관계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작가적 모범을 보여주었다. 어떤 모범인가? 당대의 금기를 발견하고 그와의 싸움을 수행하는 작가적 모범, 문학텍스트를 당대 현장으로 귀환시키며 진리를 발견하고자 하는 작가적 모범을 남정현은 우리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남정현의 작가적 모범은 혹독한 상처를 지불해야 하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북괴를 이롭게 한 작가’, ‘계급의식을 고취한 작가’라는 해괴한 판정을 받은 남정현. 그는 어느새 친북 작가의 전형처럼 회자되었으니, 반공주의가 국시인 한국 사회에서 그의 처지는 고단할 수밖에 없었다.

정확히 말해 「분지」는 1965년 《현대문학》3월호에 발표된다. 그런데 이 작품이 1965년 5월 8일 북한 기관지에 수록된 게 계기가 되어 중앙정보부에서 남정현을 수사하게 된다. 1965년 7월 9일의 일이다. 그 후 7월 14일 서울지방검찰청으로 이 사건이 송치되었는데, 같은 달 23일 구속적부심 심사 끝에 남정현은 석방된다. 그러나 이 석방이 필화 사건의 끝이 아니었다. 이 사건을 맡은 김태현 검사는 1년을 미결로 두다가 1966년 7월 23일 서울 형사지방법원에 남정현을 불구속 기소하기에 이른다. 검찰은 반공법 제4조 제1항, 즉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 또는 국외의 공산계열의 활동을 찬양 고무 또는 동조하거나 기타의 방법으로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하는 행위를 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 및 자격정지에 처한다’는 조항에 근거해 남정현에게 7년을 구형한다. 그렇지만 남정현이 구형받은 대로 7년을 옥살이한 건 아니다. 1967년 서울고등법원에서 선고유예 판결을 받게 된 까닭이다.

그렇지만 이 선고유예가 검찰의 유죄 결정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담당 박두환 판사는 “이 작품을 읽은 독자들 중 많은 사람들에게 반미적 반정부적 감동을 일으키게 하고 심지어 계급의식을 고취할 요소가 다분하다”는 이유를 들어 유죄 판결을 내린 까닭이다. 사법부는 남정현을 반공주의의 구속에서 구원하지 않았다. 사법부마저 남정현을 용공을 사주하는 불온한 작가로 판정하고 만다. 친미 반공주의 금기를 정확하게 조준한 남정현의 「분지」. 그러나 작가에게 돌아온 건 영광이 아니라 상처였다. 당연히 남정현의 창작 의지는 한풀 꺾일 수밖에 없었다. 몸이나 마음이나 두루 쇠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남정현은 역시 남정현이었다. 이 사건 이후 연이어 발표한 「허허선생」시리즈가 남정현의 재기를 증명하고 있으니, 남정현 특유의 풍자와 비판적 상상력은 소멸된 게 아니었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분지」는 친미 반공주의로 요약되는 대한민국의 국가 정체성을 강렬하게 비판하는 문제적 성격을 중층적으로 구현하고 있다. 이런 까닭에 「분지」는 그 문제적 성격을 주목하며 다시 읽어야 할 텍스트로 독자들에게 여전히 다가오고 있다. 그런데 이 문제적 성격은 단지 「분지」만이 아니라 등단작인 「경고구역」에서부터 표출된 성격이며 「분지」는 이 문제적 성격이 누적된 텍스트라고 해야 한다. 이에 「분지」와 반공주의와의 긴장은 예고된 긴장이며 이 예고된 긴장은 필화 사건으로 표출돼버린 거라고 말할 수 있다. 남정현은 전후 한국을 관리?지배하는 미국의 패권주의와 그에 협력하는 반공주의의 허위를 지속적으로 폭로?비판한 작가 그리고 60년대 한국인들의 평균적인 의식을 훌쩍 뛰어넘는 자리에서 자기 문학을 열어간 전위적 작가였다. 그의 전위성이 텍스트 내부에서 들끓다가 바깥으로 폭발한 사건. 이게 바로 「분지」 필화 사건인 것이다.

남정현 소설의 특성을 간단히 살펴보는 게 좋겠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남정현 소설은 과장과 풍자, 유머, 그로테스크가 뒤섞인 극단적으로 전도된 세계를 창조한다. 현실과 픽션의 관계를 “현실에 참패한 픽션, 픽션을 제압한 현실”(「부주전상서」, 『남정현문학전집』, 국학자료원, 2002, 311면)로 파악하는 남정현은 현실을 “카오스의 세계”로 이해한다. “허구가 현실이 되고 현실이 허구가 되어버린” 카오스의 현실! 남정현은 이 카오스의 현실이 초래된 이유를 외세 개입으로 판단한다. 그렇기에 남정현은 이 카오스의 현실을 다시 제압하기 위해 과장, 풍자, 유머, 그로테스크로 구성된 픽션으로 당대의 금기에 시비를 걸고 있다.

사실 전후 한국사회의 작가로서 미국을 비판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미국은 전후 한국 국민들에게 혈맹으로 이해된 신성국가였던 까닭이다. 이 단적인 예가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한국 방문 시에 나타난 한국인들의 열광적 반응이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에 대한 이 열광적인 반응은 동원되고 조작된 게 아니었다. 당시 서울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가도에서 골목에서 집에서 아이젠하워를 환영했으니 서울 시민들에게 미국은 그들을 가난에서 구원해 줄 아버지 국가였다. 이런 정황에서 남정현은 일본에 이어 또 다른 외세로 등장한 미국의 정체를 강렬하게 폭로?비판하는 「분지」를 발표했는데, 이에 그의 전위적 시선은 주목받을 수밖에 없었다.

남정현의 전위적 시선은 「분지」 이전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너는 뭐냐」가 하나의 증거일 수 있다. 「너는 뭐냐」는 1961년 3월 《자유문학》에 발표된 작품으로, 남정현은 이 작품으로 그 해 10월 《사상계》에서 주최하는 동인문학상을 받는다. 그런데 이 작품의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 미국적 현대성을 조롱하고 비판하는 「너는 뭐냐」의 불온성이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예사롭지 않게 만들고 있다. 이 작품에는 미국적 현대성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속물 한국인인 신옥이 등장한다.


그러더니 아내는

“미국 좀 보세요, 미국!”

하고, 느닷없이 미국을 내세우는 것이었다. 미국이야말로 현대의 그 무서운 생리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견본이란 투의 말이다.

“뭐, 미국?”

“그래요, 미국이 뭐, 공연히 잘 살게 되었는 줄 아세요? 아, 미국이 공연히 남의 나라들을 지배할 수 있게 되었는 줄 아시느냐 이 말이에요. 그게 다 현대의 질서에 가장 잘 순응한 대가라는 사실을 아셔야 해요. 자기 이익을 위해선 무슨 짓을 해도 좋다는 그런 비정한 현대의 질서 말예요. 그런데도 당신처럼 맨날 그저 무엇이 안됐느니, 불쌍하다느니 하는 따위의 그 실용성도 없는 전근대적인 잡념에 사로잡혀 있는 한, 우리나라는 생전가야 그저 억울하게 남의 예속권에서 남의 나라 시장 노릇밖에 못 한단 말예요. 아시겠죠. 네?”(「너는 뭐냐」: 181)


“현대라는 한자 두 자에다 전생애를 걸다시피 하고 생활신조를 오로지 현대라는 두 자에다만 국한시키고 있는 아내 신옥”은 현대를 “네가 살자면 내가 죽고 내가 살자면 네가 죽어야 하는 그렇게 조직적으로 짜여서 빈틈없이 진행”되는 경쟁 논리의 사회로 설명한다. 그리고 이러한 비정한 현대질서를 주도하는 나라가 미국이며 미국의 타 국가 지배는 문제될 게 없다고 역설한다. 또한 신옥에 따르면 비정한 현대질서를 따르지 않는 자들은 도태되어도 무방하며 그런 점에서 남편 관수도 도태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이런 점에서 신옥은 마치 냉전질서와 경쟁적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미국적 현대성을 표상하는 알레고리적 인물로 보인다.

미국을 말 그대로 ‘아름다운 나라’로 숭앙하는 신옥은 주변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요강에 자주 배설하는데, 신옥은 이를 미국식 위생학을 실천하는 현대적 행위로 강변한다. 관수는 이런 아내에게 더 이상 실내에서 배설하지 말기를 당부하지만 그런 당부를 신옥은 차갑게 거절한다. 자신의 배설행위가 미국적 현대성에 부합하는 행위라고 말하는 신옥. 그녀는 미국이라면 덮어놓고 추종하는 자기분열적인 한국인의 희화화된 표출로 보인다.

미국적 현대성을 맹신하는 신옥 앞에서 관수는 주눅들어 있다. 신옥은 남편 관수를 미국적 현대성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경멸하는데, 이러한 경멸을 관수는 감수한다. 그런데 「너는 뭐냐」의 결론은 미국적 현대성이 주도하는 카오스의 현실을 뒤집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관수는 더 이상 신옥이 주는 경멸을 감수하는 게 아니다. 환상이 개입된 「너는 뭐냐」의 결론은 군중들의 “사자후의 함성”과 야유와 분노로 들끓는다. “민중을 압박하고 학대하던 일체의 건물과 일체의 제복들이 민중들의 그 피를 토하는 함성과 주먹, 방망이에 의해서 산산이 부서져 버리는 순간” 즉 급격한 반전의 순간이 「너는 뭐냐」의 결론을 차지한다. 이 소설의 결말에서 신옥은 현대성을 강변하며 자기모순을 합리화하는 기만적인 여성이 아니라 군중들을 두려워하는 한낱 “시시한 여인”으로 추락하고 있다. 신옥이 대변하던 미국적 현대성은 이 소설의 결말에서 그 절대적 지위를 급격하게 잃고 풍자와 야유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이렇게 남정현은 전후 한국사회의 친미주의적 행태들에 대해 통렬하게 야유하고 풍자의 비수를 날린다. 미국을 혈맹국가로 인식하는 60년대 독자들에게 남정현은 불편한 작가일 수 있지만 그 불편함에서 다른 작품들과 구분되는 문학적 수확이 잉태된 것이다.

그리고 그 결정적인 수확이 「분지」이다. 「분지」는 놀랍게도 악의 축이라는 수사학에 기대어 전세계적으로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하는 오늘날 미국의 행보를 다시 한번 연상시킨다. 이 소설의 서술자인 홍만수는 미국의 시각으로 보자면 확실히 제거해야 할 테러리스트이다. 미군 스피드 상사의 부인인 비취 여사를 겁탈했다는 혐의를 받는 까닭이다. 그러면 테러리스트로 규정된 홍만수의 처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분지」의 서술자 홍만수는 홍길동의 10대 손과 단군의 후손을 자처하는 인물로 미 펜타곤 당국에 의해 제거되어야 할 테러리스트로 몰린 채 향미산에 갇혀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대목은 홍만수가 홍길동의 10대 손이자 단군의 후손으로 설정된다는 점이다. 한국인들에게 홍길동은 의적의 전형, 단군은 민족의 기원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렇기에 홍길동의 10대 손과 단군의 후손을 자처하는 홍만수 역시 의적의 후예이며 동시에 민족의 후예라는 자격을 자연스럽게 획득하고 있다.

작가가 왜 이러한 설정을 하게 된 걸까? 이유는 명백하다. 홍만수를 미국에 저항하는 의인이자 동시에 미국의 억압을 받는 민족의 표상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작가는 홍만수를 홍길동의 10대 손이자 단군의 후손으로 설정하고 있다. 문제는 의인이자 민족의 표상인 서술자 홍만수가 이제 곧 처형될 수난자로 설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해방 직후 미군에 의해 겁탈당한 어머니나 스피드 상사에게 성적 학대를 당한 누이 분이 모두 민족수난을 극적으로 표현하지만 특히 서술자 홍만수가 마주한 절체절명의 위기는 「분지」 자체를 민족 수난의 메타포로 읽히게 한다.

여기서 논평적 서술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홍만수의 발언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만수에게 스피드 상사의 부인을 겁탈했다는 혐의를 두고 있는 미 펜타곤 당국은 “도대체 그 이름부터 사람 이름 같지 않은 홍만수란 자가 저지른 그 치욕적인 사건은 분명히 미국을 위시한 자유민 전체의 평화와 안전에 대한 범죄적인 중대한 도전행위로 보고” “신이 잘못 점지하여 이 세상에 흘린 오물”인 홍만수를 제거할 계획을 발표한다. 이에 홍만수는 향미산에서 미국의 폭격을 받기 전에 어머니에게 편지를 작성한다. 「부주전상서」도 그렇지만 「분지」가 편지 형식을 차용하고 있다는 점을 다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편지 형식으로 서술된 「분지」는 작가의 정치적 관념을 대변하는 서술자의 목소리를 텍스트의 여러 대목에 기입하고 있다. 아래와 같이 말이다.

 

어떻게 반공과 친미만을 열심히 부르짖다 보면 쉽사리 애국자며 위정자가 될 수 있는 것 같은 세상이란 것도 알고요. 오로지 정치자금을 제공한 몇몇 분들의 이익과 번영만을 위해서 입법이며 행정이 민첩하게 움직이는 것 같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379)


이 견딜 수 없이 썩어빠진 국회여, 나 같은 것을 다 빽으로 알고 붙잡고 늘어지려는 주변의 이 허기진 눈깔들을 보아라. 호소와 원망과 저주의 불길로 활활 타는 저 환장한 눈깔들을 보아라…(중략)…진정으로 한민족을 살리기 위해서 원조를 해줄 놈들은 끽소리 없이 원조를 해주고 그렇지 않은 놈들은 당장 지옥에다 대가리를 처박으라고 전세계를 향하여 피를 토하며 고꾸라질 용의는 없는가.(390)


곧 제거될 운명에 놓인 홍만수. 그렇지만 그는 주눅들어 있지 않다. 그는 격정적으로 당대 위정자들을 비판한다. 정치 팸플릿에 수록되어도 무방할 격정적인 발언을 홍만수는 쏟아놓는다. 반공과 친미를 애국으로 강변하는 위정자들, 주체성이 완전히 결여된 위정자들을 향하여 홍만수는 격정적으로 일갈하고 있다. 정치논평에 가까운 이 발언은 당연히 「분지」와 친미 반공주의와의 긴장을 유발한다. 이러한 긴장은 60년대 한국문학에서, 아니 한국현대문학 전체를 통틀어 그 유례를 볼 수 없는 사건이며 충격이며 파격이었다. 한국현대문학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정치적 상상력을 구현한 소설이 「분지」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이런 반박이 충분히 가능하다. 남정현은 과장된 포즈를 취한 작가이며 절제가 결여된 요설 과잉의 작가라고 말이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근본주의자적인 면모를 보인다고 말이다. 독자에 따라서는 그렇게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걸 알아야 한다. 미국 주도의 세계화와 자가당착적인 테러와의 전쟁이 광범위하게 수행되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분지」가 이야기해준 미국과 한국과의 그 불건강한 관계의 의미를 다시 숙고해야 한다는 걸 말이다. 그 메시지를 숙고하며 여전히 우리들을 규율하는 친미 반공주의의 금기와 이에 협력하는 우리 내부의 노예근성과 마주해야 한다는 걸 말이다. 그래야 한다. 60년대라는 시간 범주를 뛰어넘어 당대적 현재성을 구현하며 독자들에게 다가오는 「분지」. 「분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불편하게 하며 화들짝 놀라게 만든다. 《문장 웹진/ 2006년 8월》



추천 콘텐츠

소년, 지구 종말의 날까지 분열하라

소년, 지구 종말의 날까지 분열하라 김지선 1 지구처럼 돌아가는 월세, 지구처럼 냄새나는 음식물 쓰레기, 지구처럼 막히는 싱크대, 곧 멸망할 작은 행성을 뒤로 하고 우주를 향해 눈꺼풀을 밟고 고래는 푸른 등을 돌린다 푸른등돌고래는 갈 곳 없는 포유류가 되어 강물에 몸을 담근다 위험한 가정에 등을 돌리지 못하는 고래 한 마리 브래지어에 너를 매단다 언젠가는 멸종하겠지만 고래는 그런 것이고 너는 흐를 것이다 ― 「고래를 잡는 아이를 위한 안내서」 중 세상은 결국 파국을 향해 간다. 당연하게 멸망은 예정되어 있고, 우리는 흐를 것이다. 정규와 비정규, 주류와 비주류, 일류와 삼류가 뚜렷하게 구분된 세상 속에서 혁명은 무력하고 광장은 추억이 되었다. 우리는 가면을 쓰고, 환상을 내면화하며 지겨운 시간을 견딘다. 종말을 향한 불안한 예감, 불길한 전조 속에서 우리에게 가능한 일이란 지루하게 화석화되고 무기력하게 시간을 죽이는 것뿐. 그밖에 선택이란 없어 보인다. 서효인 시의 화자들은 대부분 그렇게 무기력하다. 세계의 불합리와 부조리를 체득한 자의 무미건조한 발성이 시집을 가득 채운다. 찢기고 구워져 마요네즈에 찍힌 오징어처럼 아스팔트에 구워져 바퀴에 깔리는 환경미화원의 최후(「목격자」), 구운 토스트가 된 채 이틀간 방치된 할망구의 죽음(「냄새나는 사람」)을 읊조리는 목소리는 연민조차 거세되어 냉소를 자아낸다. 냉소란 본래 자조를 동반하기 마련이다. 시에서 삼류 인생들이 사물로 환치되는 것은 자본의 부조리한 체제가 뼛속까지 내면화된 수동성에 대한 적절한 은유다. 그렇지만 서효인 시를 읽는 즐거움은 이런 날카로운 비판적 사회학을 발견하는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의 어떤 시들은 의외의 전개로 상황을 밀고 나가는 미성숙한 도발을 그려낸다. 시를 읽어 가다 번쩍 눈이 뜨이는 순간은 바로 그런 똘끼를 발견하게 됐을 때다. 그것은 지루한 시간을 이탈시키는 경쾌한 해방감이며 카타르시스를 맛보게 한다. 서효인의 시가 전하는 즐거움은 시집의 정교한 배열을 주시할 때 더욱 강렬해진다. 시집은 , , , 의 4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에 따라 아이에서 성인으로 변화하는 시적 페르소나는 그의 시를 성장문학의 하나로 읽게 만든다. 상처의 시간을 딛고 견고해지며 어른으로 자라나는 통과의례는 성장문학이 거치는 당연한 수순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의 시선이 성장문학에 대한 여타의 방식을 뒤집는다는 것이다. 시에서 어설픈 미성숙의 시간이야말로 존재감이 최고조로 고양된 순간으로 격상된다. 2장의 시선을 확보한 뒤에 다시 읽는 1장의 반항적 소년기는 청년이 되어 버린 시적 자아가 취해야 할 행동 지침을 제시하지 않는가. 3장의 성인이 된 아이의 무기력을 거쳐, 4장 연작은 성인이 된 후에도 우리에게 남은 미성숙의 페르소나를 다시 한 번 이끌어낸다. 이런 서사적 배치는 강렬한 메시지를 내재하고 있는 건 아닐까? 혹 우리가 감지하는 것 이상으로 서효인의 시는 불온한 전복의 수사학으로 무장된 건 아닐까? 막연한 의혹을 해결하기 위해 그의 시에 천천히

  • wikisoft
  • 2010-07-30
시 쓰고 자빠졌네

시 쓰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누군가에게 자주 두들겨 맞았고, 누군가에게 가끔 린치를 가하던 시절이었다. 이웃 여고 문예부 아이들이 어쩐지 예쁠 거 같아서 문예부실을 전전했다. 그리고 백일장에 나가곤 했다. 물론 남달리 예쁜 아이는 없었지만, 어쨌든 17세 남녀가 교복을 입은 채로 노래방에서 듀스나 룰라, 혹은 투투의 노래를 함께 부르는 모습은 남달리 아름다웠다. 되도록 빨리 노래방으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사바사바, 시를 썼다. 빨리 써야 했다. 시는 최초의 노래였으므로. 엉덩이를 두드리듯, 천사를 찾아. 발라드를 부르며 감정 과잉에 빠지는 철수에게 영희는 이렇게 말한다. 시 쓰냐? 그때 우리는 원고지를 눕히던 누런 잔디에서, 어두운 노래방에서, 혹은 밀도가 높은 교실에서 어떤 감정 속에 놓여 있었을까. 난 누군지 또 여기는 어딘지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기에 우리는 분노에 가득 차 교복을 줄이고 담배를 숨기고 몰래 술을 마시기도 했다. 수채화 대신에 야간 자율 학습 감독을 주로 하던 미술 선생은 또 말했다. 또, 또 시 쓰냐? 시화전 제출 작품에서 피 흘리는 고등어를 그려 놓고 ?어느 고딩의 죽음?이라 제목을 붙이며 나는 전위를 담당한 듯 당당했다. 부끄러움이 없는 남자였다. 미술 선생에게 욕을 먹을 때에도, 맞을 때에도 나는 부끄러움을 몰랐다. 대한민국 학교 다 족구하라 그래. 시 쓰고 자빠졌다, 정말. 정말이란 말에 대해 오래 생각해 본다. 오래 생각하는 버릇은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최대한 짧고 단순하게 사고한 것으로 보이는 일들이 생각보다 빠르고 무식하게 벌어지고 있다. 정말? 시집을 묶어내던 중에 바위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 그 부엉이는 정말 새였을까. 도심에서 사람이 불에 타 죽었다. 그 망루는 정말 구름이었을까. 모두 정말이냐고 정색하며 물어 볼 만한 일들이었다. 분노가 치민다. 지금 나와 싸우자는 건가? 그런데 싸우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아니다. 싸움은 끝났다고, 이제 싸움이 아닌 경쟁의 시대라고 배웠다. 나는 그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잘 모르겠어서, 화가 났다. 사실 싸움보다 훨씬 경쟁이 무서웠다. 사건은 이미지가 되는 순간 거짓말이 된다. 이 모든 게 차라리 멋진 거짓말이었으면 좋겠지만, 이것은 너무나 끔찍한 거짓말. 난삽한 이미지. 이미지가 아닌 이미지. 그러므로 차라리 보이는 게 진실이라고 믿어 본다. 이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진실이 시의 배후가 되어 시에 맘껏 개입해도 나는 좋다. 시가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면 기꺼이 네가 그렇게 하라. 가져간 나의 반쪽! 때문인가. 이제 둘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리얼리스트 되자. 모던한 리얼리스트가 되자. 모더니스트가 되자. 리얼한 모더니스트가 되자. 장난하느냐고? 그렇다면, 불길한 장나니스트라고 해 두지 뭐. 꼴에 시랍시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나는 시가 좋다. 그리고 시가 밉다. 사랑하고 미워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처음 증상을 보일 때는 이렇게 데뷔를 하고 시를 쓰리라 짐작하지 못했

  • wikisoft
  • 2010-07-15
일본 소설, 한국 시

일본 소설, 한국 시 한성례 한국에서 일본소설의 베스트셀러 현상 한류바람이 뜨겁게 일본 열도를 달구기 시작한 2000년 이후부터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해왔다.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인기가 많은 작가가 나올 정도로 한국은 일본소설 홍수 시대이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일본소설가들조차도 왜 일본소설이 한국에서 그렇게나 많이 팔리는지 몹시 궁금해 한다. 이에 대한 일본 신문의 인터뷰나 원고의뢰가 있을 적마다 나는 현재 한국에서의 한국시에 비유해서 설명을 한다. 이전에도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종종 많이 팔렸다. 70년대 중반에 첫 출간된 무라카미 류(村上龍)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해적판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출판금지서임에도 안 읽은 사람이 없을 만큼, 문학이나 예술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필독서이고 바이블이었다. 1999년 정식으로 저작권 계약을 맺어 커버에 비닐을 씌워 19세 미만 구독불가로서 출간된 후에도 쇄를 거듭하며 읽히는 소설이다. 또한 1989년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이 『상실의 시대』란 이름으로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소설은 당시 크게 각광을 받았고 지금도 계속해서 읽힌다. 당시 한국은 민주화 쟁취와 맞물려 자의식이 집단에서 개인으로 향하던 시기였다. 민주주의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태여서 사회,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못했고, 급변하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소외감, 고독, 상실감 등이 당시 한국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과 겹쳐지면서 이 소설에 크게 공감했다. 더욱이 하루키의 가독성 높은 문장은 금방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한편으로 문학의 구도자 같은 마루야마 겐지(丸山健二)의 소설도 여러 편 번역 소개되었는데, 이는 주로 문학 창작자들이 마니아였다. 하지만 일본소설의 인기는 단편적일 뿐 전반적인 경향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구소설이 중심을 이뤘다.그러던 것이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쓰지 히토나리, 히라노 게이치로, 요시다 슈이치 등 젊은 작가와 미야베 미유키, 스즈키 코지, 히가시노 게이고 등의 미스터리 소설과 나오키 상을 비롯한 여러 문학상 수상작이 2000년 이후에 대거 한국에 번역 소개되었고, 대형서점에는 코너가 별도로 마련될 만큼 일본소설은 인기를 끌고 있다. 왜 일본 소설을 좋아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일본소설은 재미있다. 독자를 의식하고 소설을 썼다는 게 금방 느껴진다. 말하자면 자신의 상품을 사줄 소비자의 위치에서 창작을 한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일본소설을 읽으면서 비현실적인 주인공을 통해 현실에서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자신의 일탈을 꿈꾸고, 대리만족을 느낀다. 일본소설의 주인공 젊은이들은 특별한 목표도 없고, 무기력하며 수동적이고, 나약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시대의 흐름과 기존 질서에 따르지도 않고, 세상을 약간은 냉소적이고 관조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 보편적인 부와 명예, 사회적인 안정 등과는 거리가 멀다. 이에 독특한 상상력과 가독성 높은 문장도 한 몫 한다. 최근 일본과 한국에서 밀리언셀러 판매 기록을 갱신하는 무

  • wikisoft
  • 2010-05-28

댓글 남기기

로그인후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 주세요!

댓글남기기 작성 가이드

  •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 비방 등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와 관련 없거나 부적절한 홍보 내용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 기타 운영 정책에 어긋나는 내용이 포함될 경우, 사전 고지 없이 노출 제한될 수 있습니다.
0 / 1500

댓글0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