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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어도 괜찮아?

  • 작성일 2007-02-15
  • 조회수 4,002

 

[조경란이 만난 사람 5] 민병훈



울어도 괜찮아?




1. 벌이 날다


여배우 B의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 입구엔 환하게 불 켜진 가로등 하나가 서 있었다. 맞은편엔 횡단보도가 있고 그 횡단보도 바로 앞엔 수천 권의 책들을 소장해 놓은 걸로 유명한 북 카페가 하나 있었다. 정원이 있고 커피와 책과 나무가 있는 곳이라 언젠가 한번 저길 가봐야지, 지나칠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하곤 했었다. 지금은 그 북 카페가 아니라 B의 집으로 가야 하는 길인데, 나는 곧 횡단보도를 건너 그 카페로 들어갈 사람마냥 무턱대고 서 있다. 어디고 낯선 사람 없는 데가 없을 텐데. 너무 낯을 가리면 이럴 때 불편하다. 어쨌든 오늘은 B의 집에 초대를 받아온 거고 아직 B와 트고 지내는 사이가 된 건 아니니 가겠다는 약속은 지켜야 했다. 그 송년파티에 온갖 모르는 사람들이 온다고 해도 말이다. 빨간색 티코 한 대가 내 앞에서 골목 쪽으로 우회전을 시도한다. 내가 서 있는 가로등 주변이 주차장인 모양이다. 자동차에서 남자 두 명이 내리며 가로등 불빛을 우산처럼 받고 있는 나를 흘끗 돌아본다.

혹시 B의 집을 찾아요?

골목을 돌아 들어가던 남자 중 한 명이 거침없이 물었다. 집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덩달아 나도 네!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럼 이쪽으로 따라오세요. 여전히 새침한 얼굴로 나는 하, 벌써 아는 사람 하나 생겼네, 속으로 중얼거리곤 또각또각 골목으로 들어갔다. B는 커다란 흰색 건물 이층에 살았다. 계단을 올라가다가 빨간색 티코 주인과 수인사를 나눴다. 영화를 하는 민 뭐라는 사람이라고 했고 그 옆의 남자는 조감독이라고 했다. 이층에 올라가자 정말로 B를 빼놓고는, 텔레비전에서는 종종 보았으나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열댓 명의 사람들이 소파를 중심으로 둥글게 모여 앉아 있었다. 어휴, 뭐 선을 보러 나온 것도 아닌데 긴장이 돼서 자꾸만 어휴 어휴 그랬다. 저쪽에 내가 아는 희곡작가 O가 있는 것을 보고 안도할 때까지 말이다. 빨리 밥부터 먹자. 나는 접시를 들고 잽싸게 주방으로 갔다.

낯을 가리긴 해도 먼저 자리를 뜨는 편은 아니라 새벽이 되어도 나는 B의 집에 남아 여전히 맥주와 와인을 홀짝거리는 소수의 무리 속에 앉아 있었다. 일행들이 하나둘씩 가버리고 몇몇만 남게 되면 결국 누가 먼저 일어나자고 하지는 않을까, 누가 나보다 먼저 가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일종의 미미한 불안감이 형성되고 그 불안감이 서로를 더욱 결속시키기도 할 때가 있다. 그날도 그랬다. 서로 취기가 올라서 나는 두 무릎을 모으고 새색시처럼 별로 말도 없이 얌전히 앉아 있는 김기덕 감독에게 예전에 「악어」보고 좋아했는데 「파란 대문」은 그게 뭐냐, 정말 실망했다, 공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릴 늘어놓고 있고 O는 흔들흔들 춤을 추고 있을 때 공기를 바꾸듯 티코 주인이 벌떡 일어났다. 내일 시사회가 있어서요, 먼저 가보겠습니다. 티코 주인이 가버리자 한동안 모두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벌이 날다」 본 사람? 침묵을 깨고 누군가 물었다. 그러지 말고 우리 내일 민 감독 시사회 갑시다. 그 누군가가 제안했다. 그만 집에 가고 싶었다. 술김에 나도 고개를 끄덕끄덕하고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O에게 「벌이 날다」가 뭐예요? 소곤거리며 물었으나 그녀는 춤을 추느라 내 말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이튿날 오후, 아직 술이 덜 깬 얼굴로 우리는 우르르 정동극장으로 몰려갔다. 그게 벌써 지금으로부터 팔년 전, 1999년 12월의 일이다.

 



초등학교 교사 아노르는 나라 전체가 팔년 간 내전 중이어서 전기도 끊긴 지 오래고 물도 부족한 오지 마을에 살고 있다. 퇴근 후 그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신의 글을 쓰는 게 낙이다. 옆집에 살고 있는 동네 유지가 아노르의 집 담 쪽에 화장실을 만들어 틈만 나면 자신의 아내를 훔쳐보는 것도 모른 채 말이다. 어느 날 참다못한 아내가 말한다. “당신이 글 쓰는 데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우리가 얼마나 가난해졌는지 알기나 해요? 동네 사람 모두가 당신을 비웃는데 당신은 남자로서 자존심도 없어요? 우리가 조금만 부자고 힘이 있다면 옆집 남자가 바로 우리 코밑에 화장실을 만들어 우리 가족을 괴롭힐 생각은 꿈에도 못했을 거예요.” 아노르를 옆집 남자에게 가서 따지지만 무시만 당하곤 내쫓긴다. 동네 검사에게 가서 하소연해 보기도 하지만 옆집 유지에게 뇌물을 받은 검사는 듣는 척도 하지 않는다. 아노르는 책상 앞에서 한동안 골똘히 생각한다. 그리곤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서 검사의 옆집을 사서는 검사네 집 쪽으로 마을 공용화장실을 파내려가기 시작한다. 무모하다고 말리는 동네 사람들의 만류와 검사의 횡포에도 불구하고 아노르는 땅 파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그 구덩이 속에서,

뜻밖에 물이 스며 나오기 시작한다.

이백 년 동안 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던 그 척박한 땅에.


민병훈 감독은 영화 제목을 이렇게 붙인다.

「벌이 날다」.


‘먹을 것이 부족했던 그 마을엔 노인을 외딴 곳에 갖다버리는 풍습이 있었어요. 어떤 훌륭한 장군도 아버지를 갖다버려야 할 때가 왔어요. 장군은 아버지를 차마 버리지 못해서 상자를 만들어 그곳에 모셔뒀어요. 그러던 어느 날 장군의 부대가 사막에서 길을 잃고 헤매게 됐는데 그때 노인이 장군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른 아침 막사 밖에 꿀을 바른 찻잔을 내놓으면 벌들이 와서 그걸 먹고 목이 말라 더워지기 전에 물이 있는 곳을 찾아간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부대가 벌들을 따라가 물을 찾게 되었고 부대원들은 결국 무사할 수 있었다는 전설을요.’



2. 괜찮아, 울지 마


러시아 국립영화대학교 졸업 작품이었던 「벌이 날다」로 민병훈은 1998년과 1999년 사이에 이탈리아 토리노 국제영화제, 그리스 테살로니키 국제영화제, 네덜란드 로테르담 영화제 등 대여섯 군데 국제영화제에서 비평가상, 감독상을 수상하였다. 영화제에서 받은 상금으로 「벌이 날다」 영화를 찍었던 마을에 공동 목욕탕을 지어주고 초등학교 아이들에게는 축구공을 사주고, 그는 수년 만에 서울로 돌아온다. 그 해 부산영화제 심사위원장을 맡은 이란의 모흐센 마흐말바프는 그의 영화를 두고 ‘부산영화제에서 만난 최고의 작품이었다. 작은 이야기를 따뜻하게 그렸고 현학적이지 않으면서 인생의 의미를 담은 수작이다’라는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이러한 찬사와 국제영화제 수상과는 달리 민병훈 감독은 이 영화를 프린트해줄 후원인을 찾아 영화사 이곳저곳을 기웃거려야만 했고 결국은 사채를 얻어 프린트 작업을 해야 했다.

「벌이 날다」가 상영되고 있던 동숭동 극장에 어느 날 까만 양복을 차려입은 ‘어깨들’ 이십여 명이 한꺼번에 와 관람을 했다고 한다. 그 날을 회상하면서 민병훈은 이랬다. 식은땀이 쫙 나더라고. 한 열여덟 명은 자고 두 명은 그래도 끝까지 다 보더라. 두 명 중 한 명이었던 어깨들의 보스가 영화가 끝난 후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고생했다, 원금만 갚아라.

만약 그 무렵, 「벌이 날다」가 흥행에 성공하고(‘대박’이 나고) 그래서 다음 영화 같이 만들자 스폰서 해줄게, 하고 영화사들이 줄줄이 늘어섰다면 민병훈은 어떻게 되었을까. 남의 일이지만, 나는 가끔 그런 상상을 해보곤 했다. 그런 일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고 소수의 영화 관객들에게 민병훈은 ‘독립영화’, 혹은 ‘예술영화감독’으로 기억될 뿐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민병훈은 반포의, 내 옥탑방보다는 훨씬 넓고 크지만 내 방보다는 훨씬 더 오래되고 낡고 어두운 방에 틀어박힌 채 다음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O는 현재 국내 순수 창작물로는 최장기 기록을 세우게 될 작품을 새로 다듬기 시작했고 나는 나대로 한창 소설을 쓰고 있을 때였다. 그 무렵, 그러니까 막 2000년이 시작되던 해, 그리고 그 후 몇 년 우리가 가장 자주 만났던 것 같다. 어느 날은 O와 내가 둘이 만나 술을 마시다가 병훈이는 지금 뭐하고 있을까? 우리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O가 운을 떼면 어디 한번 가볼까요? 내가 거들어 불쑥 반포 집으로 들이닥치기도 했고 어느 날은 민병훈과 내가 둘이 카스를 마시다가 카스 좋아하는 우리 O 누나는 지금 뭐 하고 있을까? 그가 말하면 나오라고 전화 한번 해볼까? 라고 역시 내가 박자를 맞추는 식으로 주로 셋이 만났다. 그러다 민병훈이 취해 쿨쿨 잠들어버리면 O와 내가 ‘낄낄낄’ 거리며 그의 집을 나와 각자 택시를 잡아타며 또 만납시다! 헤어지곤 했다. 민병훈과 O, 민병훈과 나, 그리고 O와 나, 기분에 따라 이렇게 둘씩 만난 적도 여러 번 있었으나 한 사람이 없으면 그 한 사람이 들어서 좋지 않을 말들을 우리는 한 번도 한 적이 없으며 나는 그게 우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은 예전처럼 서로 자주 만나지는 않지만 어쩌다 간혹 만나게 되어도 있는 말 없는 말, 속에 든 말 안 든 말 곧이곧대로 다 해버리고는 또 상대방의 말도 그렇게 곧이곧대로 다 믿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 O가 많이 아프다.)


어느 날 민병훈이 물었다.

이 제목 어떠냐?

뭐?

「괜찮아, 울지 마」.

……무슨 얘긴데?

도시에서 도박에 빠져 있던 한 남자, 이름은 무하마드야.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놈이야. 그러다가 어느 날 빈털터리가 된 채 빚쟁이한테 쫓겨 고향으로 돌아가게 돼. 마을 사람들한텐 자신이 도시에서는 아주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라고 거짓말을 해.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고, 그렇게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는 거야. 무하마드한테 할아버지가 있는데……

             

그 할아버지는 마을사람들로부터 미친 사람이란 손가락질을 당하면서도 묵묵히 바위산에 올라 돌을 깬다. 날마다 산에 올라 돌을 깬다. 무하마드는 거짓말로 인한 두려움 때문에 할아버지를 따라 산에 오르게 된다. 아버지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와 ‘우공이산’을 떠올리게 하는 바위산에 얽힌 민화들.


그러니까 「벌이 날다」에서는 땅 아래로 파내려가는 이야기고 이번 영화는 산으로 올라가는 이야기네?

그 다음 영화는 아마 하늘과 신과 교감하는 이야기가 될 거야.


O를 통해서 민병훈이 영화를 찍기 위해 다시 우즈베키스탄으로 간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를 도와줄 친구 몇몇이 우즈베키스탄까지 따라가기로 했다. 나는 그를 만날 시간도, 영화 잘 만들고 와, 라는 인사를 전할 마음의 여유도 없이 잡다한 일들로 정신이 없을 때였다. 일 년쯤 시간이 더 흐른 것 같다. 그가 없어서 그런지 O와도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두 번째 영화, 「괜찮아, 울지 마」를 들고 민병훈 감독이 돌아왔다. 우리는 다시 만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영화를 만들 수만 있으면 행복하다, 라고 말했던 그는 그 후 오랫동안 침울해 보였다. O와 나는 아무리 술을 마셔도 더 이상 그의 집으로 쳐들어갈 용기를 내지 못했다. 우리는 그의 두 번째 영화를 기다려왔던 소수의 팬들처럼 「괜찮아, 울지 마」를 극장에서 볼 수가 없었다. 아무 곳에서도 그의 영화를 걸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이유는 너무나 분명했다. 관객이 없으니까.

어느 날, O와 나.

오랜만에 반포의 민병훈 집에 모여 있다. 두 사람을 위해서 민병훈은 비디오데크에 슬쩍 테이프를 밀어 넣곤 불을 껐다. 한글 자막도 없는 영화 속으로, O와 나는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괜찮아, 울지 마」는 그 해 2002년 체코 카를로비바리 국제영화제, 그리고 다시 그리스 테살로니키 국제영화제에서 예술 공헌상, 비평가상을 수상한다. 부산영화제에서도 호평을 받는다. 국제영화제에서의 그런 수상들은 ‘어려운 영화’, ‘낯선 영화’라는 꼬리표로 돌아와 그에게는 되레 도움이 되지 않았다. 「괜찮아, 울지 마」는 끝내 상영관을 잡을 수 없었다.



3. 포도나무를 베어라


목요일에 비가 왔다. 눈이 오는 게 나을 뻔했다. 제대로 오싹 추워 보지도 못했는데 겨울이 다 가고 있는 게 화가 난다. 나는 한 겨울에 태어났다. 겨울이 좋고 추운 겨울은 더 좋다. 이런 말을 하면 엄마는 막 화를 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정신 번쩍 날 만큼 추워 보지도 못하고 이대로 겨울이 다 지나가버리는 건 아닐까 노심초사하며 창밖을 내다보다가 아! 뭐야 비가 내리잖아, 짜증을 내는 데 눈물이 툭 떨어진다. 눈물이 한번 흐르기 시작하면 크게 울어주는 게 좋지만 막상 울고 싶어도 울 만한 장소가 없다. 집에는 귀신같은 엄마가 있고 밖에 나가면 사람들이 쳐다본다. 산책을 하며 울 수도 있지만 오늘은 비가 온다. 우산으로 얼굴을 가리며 울고 다니는 짓은 스무 살이 지난 이후로는 하지 않았다. 오늘 같은 날은 친구가 필요하다.


맥주한잔할까?

오랜만저녁때콜할께기다리셔


휴대전화가 아무리 발달이 되어도 통화를 하거나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을 때 상대방 얼굴이 보인다거나 하는 건 안 나왔으면 좋겠다. 우리는 메시지로 각각 한 문장씩 주고받았지만 민 감독은 내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 턱이 없었을 거였고 나 역시 그때까지만 해도 지금 민 감독이 광주에서 세 번째 영화 「포도나무를 베어라」 상영관을 잡기 위해, 시사회가 끝난 후 무작정 광주극장 극장장을 만나러가고 있는 답답하고 초조한 길이라는 걸 몰랐다. 그래서 몇 시간 후 내가 살고 있는 집 근처 스타벅스에서 우리가 만났을 땐 누가 보기에도 1)나: 한가한 시간을 틈타 친구를 만나러 나온, 생글생글 웃는 얼굴 2)민병훈: 새 영화 개봉을 앞둔, 의욕과 자신감에 가득 찬 얼굴로, 서로 반갑게 악수했다. 

B의 부친상 때 만나고 못 봤으니 횟수로는 벌써 삼 년만이다.

싱가포르 감독 에릭 쿠의 「내 곁에 있어 줘」를 보러 시네큐브에 갔다가 매표소 앞에 놓여 있던 영화잡지 《넥스트 플러스》에서 우연히 민병훈의 인터뷰 기사를 본 게 지난해 4월의 일이다. 사진 속의 그는 확신에 찬 모습이었으나 전보다 훨씬 야위어 보였다. 그때 인터뷰 기사 제목이 이랬다.

‘타협 없이 스크린 속을 날다’

타협 없이?

그래, 타협 없이.

불판에서 고기를 뒤집으며 그는 말했다.

예술영화가 흔히 갖는 오류가 뭐냐? 바로 매너리즘이지. 난 그걸 경계해. 그래서 타협 없이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이 「포도나무를 베어라」를 만들면서 대중과 예술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작업을 할 수도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어. 비록 1만 명을 목표로 하는 힘겨운 작업이지만 말이야. 하지만 대중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갖고 있고 10%든 3%든 아니 0.1%든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해.

소통은?

마음의 진정성만 있다면.

고기 다 타겠다.


민병훈을 만나면 어느 때의 그는 세상에서 둘도 없는 쿨 보이처럼 보이다가 어느 때의 그는 철학자, 어느 때의 그는 바람둥이, 술꾼, 어느 때는 신학자, 어느 때는 전문 사기꾼, 또 어느 때의 그는 히키코모리 혹은 모랄리스트처럼 보일 때가 있다. 목요일의 민병훈은 사 년 반 동안 혼자 준비하고 만든 「포도나무를 베어라」에서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순정하고 열렬한 ‘영화감독’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무슨 말 끝에 그가 어, 그동안 잘 있었냐? 라고 내 안부를 물어왔을 땐 우리가 만난 지 이미 두 시간쯤 지난 뒤였다. 그렇게 묻긴 해도 그 눈은 아까와 마찬가지, 나를 향해 있진 않았다.


「포도나무를 베어라」는 신부가 되려는 한 신학대학생이 사랑하는 여자와의 관계를 끊지 못하고 두려움에 닥쳤을 때 과연 스스로 극복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신부라. 나는 나와 같은 해에 태어난 민병훈 감독이 우리 세대들이 대학에 입학한 그 해에 신학대학에 지원해 떨어졌던 사실을 기억해낸다. 신부가 되고 싶었던 그. 그 후 군대를 다녀온 그는 러시아 국립영화대학으로 유학을 떠난다. 그의 영화에서 내가 본 ‘젊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처럼, 일찌감치 그는 독창적이고 철학적인 동구권 영화에 매료되어 있었던 것이다. ‘포도나무’가 뭘 상징하는 건데?

하나님, 즉 ‘신’, 이라는 대답을 들었을 때 ‘예술영화’, ‘독립영화’도 모자라서 이젠 ‘종교 영화’까지? 라고 나는 지레짐작, 염려했던 것 같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누구든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고 내가 그와 함께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요한복음 15장 5절). 그러나 「포도나무를 베어라」는 예술영화도 독립영화도 그리고 종교영화도 아니다. 민병훈 감독 말대로 소수의 대중을 위한, 그가 ‘주어진 예산을 가지고 한 씬 한 씬 정말 최선을 다해 촬영’한 사랑과 믿음에 관한 영화이다. 그러니 이 영화가 2007년 체코 카를로비바리 국제 영화제 경쟁부문 초청작으로 선정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도움이 안 되겠지.   

 



시사회장에서 민병훈 감독은 구석 자리에 홀로 앉아 자신의 영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미 한 삼백 번쯤 봤다는 그 영화를. 어렵게 개봉관과 날짜를 잡긴 했지만 관객이 없으면 이틀만에도 막을 내려버린다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던 그의 얼굴이 생각난다. 지금은 내가 이쪽, 먼 뒷자리에 앉아 있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볼 순 없지만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막막하다. 주인공인 신학생 수현이 수도원을 떠나 기차에 오른다. 기차 안에서 문득 시계를 들여다본다. 현장음이 사라진다. 수현은 다시 시계를 본다. 시간이 멈추고 과거가 멈추고 현재가 멈추고 미래가 멈춘다, 라고 나는 그 장면을 읽는다. 문득, 현장음이 다시 들리기 시작한다. 눈물인지 미소인지, 수현은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을 짓고 기차는 덜컥 움직인다. ……영화가 끝났다. 자막이 막 올라가기 시작하자마자 등을 떠밀듯 순식간에 불이 켜진다. 민병훈 감독은 꼼짝도 않고 앉아 있다.

성 프란시스코의 말처럼 손으로 일하는 사람은 노동자다. 손과 머리로 일하는 사람은 장인이다. 손, 머리, 그리고 가슴으로 일하는 사람은 예술가다. 민병훈, 너는 영화는 예술이라고 말했다. 너, 정말 예술가다, 라고 그에게 말해줘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참, 민병훈. 나 울고 싶을 땐, 그때 왜 내가 맥주 한 잔 사주고 너에게 뺏다시피 얻어온 「벌이 날다」 그 비디오 틀어놓고 몰래 운다. 나는 아무 데서나 우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지만 아름다운 영화를 보고서는 도무지 안 울 수가 없으니까. 벌을 따라, 나도 우물이 있는 곳을 향해 가고 싶은 사람이니까. 《문장 웹진/ 2007년 2월》  

     

    

                                                          


민병훈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러시아 국립영화대학에서 촬영을 전공한 뒤 단편 「한 사람」(1995), 「초상화」(1996) 연출, 1998년 잠쉐드 우스마노프와 공동 연출한 「벌이 날다」로 장편 데뷔했다. 이후 「벌이 날다」, 「괜찮아, 울지 마」에 이은 세 번째 장편 「포도나무를 베어라」로, 2004년 부산국제영화제 PPP 코닥상 수상. 2005년 영화진흥위원회 예술영화 제작지원작에 선정되었으며 2006년 부산국제영화제 공식 초청, 2007년 카를로비바리 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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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30
시 쓰고 자빠졌네

시 쓰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누군가에게 자주 두들겨 맞았고, 누군가에게 가끔 린치를 가하던 시절이었다. 이웃 여고 문예부 아이들이 어쩐지 예쁠 거 같아서 문예부실을 전전했다. 그리고 백일장에 나가곤 했다. 물론 남달리 예쁜 아이는 없었지만, 어쨌든 17세 남녀가 교복을 입은 채로 노래방에서 듀스나 룰라, 혹은 투투의 노래를 함께 부르는 모습은 남달리 아름다웠다. 되도록 빨리 노래방으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사바사바, 시를 썼다. 빨리 써야 했다. 시는 최초의 노래였으므로. 엉덩이를 두드리듯, 천사를 찾아. 발라드를 부르며 감정 과잉에 빠지는 철수에게 영희는 이렇게 말한다. 시 쓰냐? 그때 우리는 원고지를 눕히던 누런 잔디에서, 어두운 노래방에서, 혹은 밀도가 높은 교실에서 어떤 감정 속에 놓여 있었을까. 난 누군지 또 여기는 어딘지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기에 우리는 분노에 가득 차 교복을 줄이고 담배를 숨기고 몰래 술을 마시기도 했다. 수채화 대신에 야간 자율 학습 감독을 주로 하던 미술 선생은 또 말했다. 또, 또 시 쓰냐? 시화전 제출 작품에서 피 흘리는 고등어를 그려 놓고 ?어느 고딩의 죽음?이라 제목을 붙이며 나는 전위를 담당한 듯 당당했다. 부끄러움이 없는 남자였다. 미술 선생에게 욕을 먹을 때에도, 맞을 때에도 나는 부끄러움을 몰랐다. 대한민국 학교 다 족구하라 그래. 시 쓰고 자빠졌다, 정말. 정말이란 말에 대해 오래 생각해 본다. 오래 생각하는 버릇은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최대한 짧고 단순하게 사고한 것으로 보이는 일들이 생각보다 빠르고 무식하게 벌어지고 있다. 정말? 시집을 묶어내던 중에 바위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 그 부엉이는 정말 새였을까. 도심에서 사람이 불에 타 죽었다. 그 망루는 정말 구름이었을까. 모두 정말이냐고 정색하며 물어 볼 만한 일들이었다. 분노가 치민다. 지금 나와 싸우자는 건가? 그런데 싸우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아니다. 싸움은 끝났다고, 이제 싸움이 아닌 경쟁의 시대라고 배웠다. 나는 그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잘 모르겠어서, 화가 났다. 사실 싸움보다 훨씬 경쟁이 무서웠다. 사건은 이미지가 되는 순간 거짓말이 된다. 이 모든 게 차라리 멋진 거짓말이었으면 좋겠지만, 이것은 너무나 끔찍한 거짓말. 난삽한 이미지. 이미지가 아닌 이미지. 그러므로 차라리 보이는 게 진실이라고 믿어 본다. 이 지긋지긋하고 끔찍한 진실이 시의 배후가 되어 시에 맘껏 개입해도 나는 좋다. 시가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면 기꺼이 네가 그렇게 하라. 가져간 나의 반쪽! 때문인가. 이제 둘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리얼리스트 되자. 모던한 리얼리스트가 되자. 모더니스트가 되자. 리얼한 모더니스트가 되자. 장난하느냐고? 그렇다면, 불길한 장나니스트라고 해 두지 뭐. 꼴에 시랍시고 자빠졌네. 이런 말 자주 들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나는 시가 좋다. 그리고 시가 밉다. 사랑하고 미워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처음 증상을 보일 때는 이렇게 데뷔를 하고 시를 쓰리라 짐작하지 못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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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7-15
일본 소설, 한국 시

일본 소설, 한국 시 한성례 한국에서 일본소설의 베스트셀러 현상 한류바람이 뜨겁게 일본 열도를 달구기 시작한 2000년 이후부터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해왔다.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인기가 많은 작가가 나올 정도로 한국은 일본소설 홍수 시대이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일본소설가들조차도 왜 일본소설이 한국에서 그렇게나 많이 팔리는지 몹시 궁금해 한다. 이에 대한 일본 신문의 인터뷰나 원고의뢰가 있을 적마다 나는 현재 한국에서의 한국시에 비유해서 설명을 한다. 이전에도 한국에서 일본소설은 종종 많이 팔렸다. 70년대 중반에 첫 출간된 무라카미 류(村上龍)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해적판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출판금지서임에도 안 읽은 사람이 없을 만큼, 문학이나 예술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필독서이고 바이블이었다. 1999년 정식으로 저작권 계약을 맺어 커버에 비닐을 씌워 19세 미만 구독불가로서 출간된 후에도 쇄를 거듭하며 읽히는 소설이다. 또한 1989년 원제인 『노르웨이의 숲』이 『상실의 시대』란 이름으로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소설은 당시 크게 각광을 받았고 지금도 계속해서 읽힌다. 당시 한국은 민주화 쟁취와 맞물려 자의식이 집단에서 개인으로 향하던 시기였다. 민주주의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태여서 사회,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못했고, 급변하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소외감, 고독, 상실감 등이 당시 한국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과 겹쳐지면서 이 소설에 크게 공감했다. 더욱이 하루키의 가독성 높은 문장은 금방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한편으로 문학의 구도자 같은 마루야마 겐지(丸山健二)의 소설도 여러 편 번역 소개되었는데, 이는 주로 문학 창작자들이 마니아였다. 하지만 일본소설의 인기는 단편적일 뿐 전반적인 경향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구소설이 중심을 이뤘다.그러던 것이 에쿠니 가오리, 요시모토 바나나, 쓰지 히토나리, 히라노 게이치로, 요시다 슈이치 등 젊은 작가와 미야베 미유키, 스즈키 코지, 히가시노 게이고 등의 미스터리 소설과 나오키 상을 비롯한 여러 문학상 수상작이 2000년 이후에 대거 한국에 번역 소개되었고, 대형서점에는 코너가 별도로 마련될 만큼 일본소설은 인기를 끌고 있다. 왜 일본 소설을 좋아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일본소설은 재미있다. 독자를 의식하고 소설을 썼다는 게 금방 느껴진다. 말하자면 자신의 상품을 사줄 소비자의 위치에서 창작을 한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일본소설을 읽으면서 비현실적인 주인공을 통해 현실에서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자신의 일탈을 꿈꾸고, 대리만족을 느낀다. 일본소설의 주인공 젊은이들은 특별한 목표도 없고, 무기력하며 수동적이고, 나약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시대의 흐름과 기존 질서에 따르지도 않고, 세상을 약간은 냉소적이고 관조적인 눈으로 바라보면서, 보편적인 부와 명예, 사회적인 안정 등과는 거리가 멀다. 이에 독특한 상상력과 가독성 높은 문장도 한 몫 한다. 최근 일본과 한국에서 밀리언셀러 판매 기록을 갱신하는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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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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